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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24일 08시 47분 등록

두 시인이 길에서 역사를 노래하다

 

소가 뒷걸음 치다 쥐 잡았고, 고구마 캐려다 무녕왕릉 캤다는 느낌이 이런 걸까. 고운기의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이하 고운기의 삼국유사)’는 이렇게 뜬금없이 다가와 한달음에 읽히고 말았다. 삼국사기는 김부식, 삼국유사는 일연. 한 줄이라 말하기도 민망한 15()가 삼국유사에 관해 내가 아는 것의 전부였다. 학창시절에도 암기과목은 싫어했고 그 중에서도 국사는 최악이었다. 영혼 없이 외워야 할 개별 암기거리에서 스토리를 상상해 내기는 어려운 일이었는데 그 어려운 일을 13세기의 시인 일연과 21세기의 시인 고운기가 해냈다.

 

근거 중심, 논리적 사유를 높이 평가하는 시대 속에서 신화와 상상력, 시적 표현 등은 그 발을 디딜 곳이 없다. 그 와중에 古記에 의하면(=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또는 삼국사기에서는(=믿을만한 소식통에 따르면)’ 등의 애매한 인용과 함께 시공간의 삼천포를 커플로 빠져버리는 고운기와 일연의 삼국유사. 그들의 삼천포 스텝은 현장을 답사하며 쓰여진 길 위의 글이기에 더욱 더 생생한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어 나타난다. 사진작가 양진의 가세로 역사의 흥망성쇠를 한 자리에서 무심히 바라봤을 자연공간의 사진이 실려 현장감이 더욱 넘친다. 삼국유사를 읽는 길 위에 역사를 노래하는 두 시인이 함께 한다.

 

이 책의 저자는 고운기이지만 저자연구는 고운기, 일연, 양진 등 3인을 아우르는 것이 좋겠다. 일연과 양진은 2주차에 소개하기로 한다

 

고운기 일연의 피리소리에 샛길로 빠진 시인이여

 

부용산 오리길에 그늘이 지네.

사람은 가도 노래가 있어

좀체 사라지지 않는 땅의 역사를 그대 아는가

벌교천 따라 오르는 밀물이 담아온

좀체 사라지지 않는 바다의 역사를 그대 믿는가

(고운기, ‘다시 벌교에 와서)

 

고운기는 1961년 전남 벌교에서 태어났다. 현대사의 비극을 품고 있는 벌교는 <태백산맥>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작가 조정래는 태백산맥이 다루고 있는 시대는 민족사의 매몰시대’, ‘현대사의 실종시대라고 말한다. 작가 조정래는 벌교에서 실종된 현대사를 복원했고 시인 고운기는 매몰될 뻔 했던 민족사를 발굴해낸다. 역사의 흥망성쇠, 되풀이 되는 역사처럼 들어오고 물러나는 벌교 갯벌의 밀물을 바라보며 그는 시인으로서의 소명과 역사란 무엇인가를 생각했을 것이다.

 

고운기는 7형제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자식 욕심이 컸던 탓이었다. 장사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값어치 있는 일이라 생각한 그의 아버지에게 문학을 하겠다는 막내아들은 마뜩찮아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시조창(時調唱 : 시조에다 곡을 붙여 부르는 노래)으로는 거의 전문가적인 수준이었고 막내 아들은 아버지의 이런 예술적 재능을 물려받은 셈이었다. 그리하여 막내아들이 장사와는 딴판의 길을 걷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가 그것을 굳이 말리지 않은 것은 재능의 상당부분이 당신에게서 나왔음을 인정한 까닭이었을 것이다.

 

장사가 아닌 문학을 꿈꿨던 소년은 한양대 국문학과에 진학, 학부 4학년이 되는 1983 23세 때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이 당선되어 등단한다. 그와 함께 등단했던 이들은 기형도를 비롯, 안도현, 정일근, 이승하 등으로 등단 이후 시()에 전력투구를 한 반면, 그는 동료 시인들과는 달리 샛길에서 들리는 일연의 피리소리를 듣고 만다. 그는 고전시가 중에서도 향가를 전공하였다. 향가는 삼국유사에 14, 균여전에 11, 화랑세기에 1수만 남아 있기에 향가를 연구하기 위해 삼국유사를 펼쳐봐야 했음은 피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았을 것이다. 향가는 이렇게 그를 삼국유사로 더 나아가 일연에게 이끌었고, 시인이 되고자 했던 그는 일연이 부는 피리에 이끌려 그만 그 옛날 저잣거리에서 떠들썩하게 들리던 설화의 세계로 소환되고 만다.  

 

그렇게 1994 34세가 되던 해, 그는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일연의 세계인식과 시문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1996 36세에 명지대학교에 임용이 된다. 사실 그의 인생 목표는 좀 안정되게 살아보는 것이었으며 애초에 대학원 공부를 시작할 때 그저 대학에 자리 잡아 그걸로 생계는 유지하면서 하고 싶은 연구도 하고 시도 쓰는 삶을 생각했었다 한다. 그러다 뜻밖의 일로 학교를 관두게 되어 마음의 상처가 컸고 그 일이 계기가 되어 1999 39세에 일본행을 결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자신은 40세를 앞두고 둘째 아이는 막 100일이 지난 시점에서 세 식구를 떼어내고 유학을 결정하기엔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이 가볍지 않았을 것이다. 이 시기에 비장하게 곱씹었던 글이 바로 머리말에도 인용된 손문의 글이다. 비장한 각오로 일본 게이오 대학 문학부에서 방문연구원으로서 3년 간 유학을 한 후 2002 42세에 귀국하여 펴낸 책이 바로 우리가 알아야 할 삼국유사이다. 그에게 마음의 상처를 준 뜻밖의 일덕에 오늘날의 독자는 그의 정성스러운 삼국유사 해설서를 이렇게 접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러한 인연은 그 누구가의 뜻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하겠다.

 

머리말

 

한수진과 고서연, 희은에게

부인과 자녀들인갑다. 100일 된 둘째를 포함한 세 식구와 떨어져 일본에서 보낸 3. 3년을 보내고 돌아와 이 책을 썼다고 하니 가족들에 대한 마음이 남달랐을 것이다. 조셉 캠벨은 부인에게, 유발 노아 하라리는 첫 책은 아버지에게 두 번째 책은 스승에게 바쳤지. 책을 바친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벌써 이십 년 가까이 나는 <삼국유사>를 맴돌았다. 이는 분명코 13세기 무렵 이 땅에 살았던 혁명가가 내게 던져 준 화두였다.

2002년 현재 42세였으니 20년 가까이라 함은 22세 때부터 삼국유사를 붙잡으셨던 모양.

 

내게도 닥쳤던 안위와 감고의 세월을 곱씹는 동안 세상 보는 눈이 조금 열렸고, 그 때문에 내 혁명가의 화두 또한 보이기 시작했기에 그렇다. 혁명가는, 그 스스로 안위와 감고의 거친 세월 속에서, 도리어 피와 살이 되는 어떤 기제를 찾아 뒷사람에게 남겨 주었던 것 같다. 나는 그 틀에 기대어 삼국유사 읽기의 한 방법을 여기 내놓은 것이데, 다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이 땅의 사람들에게 조심스레 묻는다.

 

3 이는 문자 생활의 변화에서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한문이 우리 나라에 들어온 이래 고려의 지식인에 이르러서야 한문이라는(중국어가 아니다) 표기 수단은 자유자재로 구사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문자에 대한 자신감, 이는 저술을 감발(感發)시키는 촉진제. 첫 번째 저술은 역사서로 정해졌다.

큰 아이의 첫 책은 아로의 이야기. 글을 깨치고 처음 쓰는 것이 자신에 대한 이야기이듯 고려인도 그러했던 것. 나 역시 첫 책은 나에 대한 이야기였고, 변경연도 지원 시 개인사를 내게끔 하고 있다. 저술을 감발시키는 촉진제는 문자 외에 또 뭐가 있을까?

 

3 새로운 나라가 들어선 다음, 그 앞 시대를 정리한다는 생각은 이미 중국에서 보편화되어 있었다.

 

4 도대체 우리는 누구이고 어디서 왔단 말인가.

도대체 나는 누구이고 어디서 왔단 말인가. 그리고 덧붙여 어디로 갈 것인가. 과거와 역사를 돌이켜보는 것은 미래를 내다보기 위함이다. 고갱의 작품,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가 생각난다. 화가는 화두를 제목에 실어 작품을 완성했다.

 

4 당대의 관념이 완전히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세계관의 변화는 곧 역사관의 변화를 가져온다.

하늘이 무너지면 무너진 자리에서는 무엇이 솟을까. 기존의 관념이 무너질 때 그 터에서 무엇을 다시 재건할 것인가. 종족의 마지막을 바라보는 트루가니니 개인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5 1206년에 태어나 13세기를 온전히 살다간 일연은 바람처럼 휘몰아치는 시대의 변화를 겪었던 사람이다. / 특히 신라 말부터 유입된 선종은 사고의 혁신을 불교 안에서 먼저 이루어 사회로 퍼져나가게 했다.

고운기는 우리 나라의 역사에 있어서 13세기와 20세기(전반부)를 가장 어려운 시대로 보고 있다.

고갱의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역시 그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건강악화, 빈곤, 딸의 죽음, 자살시도 등)에 그려진 것이다. 힘든 시기에는 나에게 왜 이런 일이?’라는 의문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과거를 돌이켜보게 되는 것일까.

 

5 <삼국유사>는 이 시기에 우리 역사를 주체적으로 바라보고자 했던 지식인들의 일련의 작업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8 조선 후기에 실학자인 한치윤은 <삼국유사>의 이야기를 심히 괴탄하여 믿지 못할 바라 하였고, 그 이후 그나마 인용하거나 거론하는 일은 거의 없어지고 말았다.

논리 따지는 사람들의 오류. 근거야 있어야 믿어지는 류와 느닷없이믿어지는 류는 성경에서도 언급된다(‘느닷없이라는 말에는 측정할 수 없는 맥락과 셀 수 없는 변수와 보이지 않는 우주의 기운이 있다. 직관과 통찰은 측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역사가 만들어지는 거겠지. 독서는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하는 것임을 최근 들어 더 깨닫게 된다.

 

8 일본군 장수 한 사람이 퇴각하면서 수많은 종류의 책을 가지고 갔는데, 거기 이 두 책이 포함되어 있었다. 앞서 말한 정덕본 중의 하나인 이 두 책은 떨어져 나간 부분이 많이 불충분한 <삼국유사>였다.

할 말 많아지려고 한다. 임진왜란 때의 원수가 큰 일을 한 셈이 되었다. 퇴각하면서 책은 왜 갖고 갔는지, 독서가였는지 탐욕가였는지 알 길 없으나 결과적으로는 대리보관을 해준 셈. 고운기의 설명에 의하면, 이 때 가지고 온 책은 전국시대가 끝나고 에도시대가 열릴 때 빛을 발하게 되었다고 한다. 일본열도에도 평화가 찾아와 사무라이들도 칼을 놓고 펜을 들 때였는데 마침 임진왜란(1592-1598) 문화선진국조선에서 싹쓸이해 온 책 중 대부분이 도쿠가와에게 바쳐졌다고.

 

성리학에 가려 조선의 학자들에게 황탄(荒誕: 근거가 없고 황당함)하다고 평가절하되던 삼국유사가 일본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고 하니 이건 마치 우리가 삼국유사를 서동의 금처럼 대한 것은 아닐까. 금이라는 가치를 발견하는 선화공주의 눈이 없었다는 것이 아쉽다. 1904년 을사보호조약을 한 해 앞둔 시점에서 도쿄제국대학이 <삼국유사>를 출판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도 크지만 소름도 끼친다. 조선인의 정서와 심성을 이 책에서 찾아냈고 이를 식민지 경영에 활용했다고 하니 인도인들이 모르는 인도의 과거 문명을 발견, 발굴했던 영국 제국주의자들의 날카로운 시선이 여기에서도 느껴지지 않는가. 삼국유사는 1927년 일본 유학 중이던 최남선에 의해 귀환될 수 있었다.

 

고운기의 말로 마무리.

“1512년 경주부윤 이계복이 이 책을 인쇄하지 않았다면, 임진왜란이 터지지 않았다면, 도쿠가와가 사랑하지 않았다면, 최남선이 일본 유학에 나서지 않았다면 이 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엄청난 우연과 필연이 겹쳐 <삼국유사>가 우리에게 돌아왔어요. ‘한국인은 누구인가물을 때 유일하게 내밀 수 있는 이 책이 말입니다.” – 고운기, 조선일보 인터뷰, 2009 12 12

 

10 <삼국유사> 1290년경 일연에 의해 쓰여졌고, 곧이어 그의 제자들에 의해 출판된 것으로 보인다. 저자인 일연이 이 책에 들인 애정은 특별한 것이어서, 그의 생애와 저술 의도를 이해하는 것이 <삼국유사> 본체를 이해하는 데 요긴하다.

윌 듀란트의 철학 이야기 역시 철학자의 생애와 함께 그들의 철학을 다룬다. 삼국유사 역시 일연의 생애와 저술의도 그리고 당시 고려의 시대적 상황 등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그간 책을 읽으며 저자에 대해서는 딱히 생각을 안했는데 변경연 과정을 통해 저자연구를 하게 되며 그 상관관계를 깨치게 된 점은 좋았다. 내가 저자연구를 흥미 있게 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10 사실 그것들은 앞으로 획기적인 발굴이나 자료의 출현 없이는 학문적으로 어떻게 더 나갈 수 없는 난처(難處)들이다. 그러나 최종적인 책임은 어디까지나 나에게 있다. 그런 사실을 명백히 해 두고, <삼국유사>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자.

학문적으로 나아갈 수 없는 난처(難處)를 모처(某處)로 나아가게 할 수 있는 최종적인 책임은 독자인 나에게도 있다. 그 사실과 함께 삼국유사 여행을 떠나자. 따지는 잣대를 들이대지 말고 마음으로 여행하자는 뜻이다.

 

기이(紀異)

 

12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면서도 문제가 되지 않기 위해서 사실의 기록만이 아닌 상징이 자리잡는다.

나치독일 하 작가들도 그러했다. 문득 북한의 현대 작가들은 어떻게 작품을 쓸 지 궁금해졌다. 추후 몇 겹의 상징으로 만들어진 북한의 문학작품들이 뒤늦게 그 가치를 발할 것이라 생각된다. 그 때는 아마 북한문학의 독법 또는 해독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할 것이다.

 

14 상징으로 그리는 역사를 옳게 읽자면 독자는 상상력을 써야 한다.

웃자고 한 이야기에 죽자고 덤벼드냐는 말이 있다. 상징으로 그리는 역사에 들이대야 하는 것은 잣대가 아니라 상상력이다. 조셉 캠벨의 신화 덕분에 그나마 나도 상상력과 함께 하는 독법에 대한 감을 잡을 수 있었다.

 

16 곰과 호랑이는 받아서 그것을 먹고 21일을 꺼렸다.

어제 작은 애가 계란을 부화시키겠다고 난리도 아니었다. 어느 기간 품어야 하냐고 하니 남편이 21일이라고 답한다. 삼칠일, 21. 조상들이 21(삼칠일)을 이야기 한 것은 자연현상에서 3 7을 추출해낸 것인가? 아니면 끼워 맞춘 것인가? 어쨌든 신기했다. 탄생과 변신의 21일이라. 나도 무언가 의식을 만들 때 100일은 너무 기니 21일로 해야겠다.

 

18 곰은 여자가 되는 데 목적이 있지 않았다. 세상에!! 곰인지 알았더니 알고 보니 여우였다!

 

20 그런데 일연은 기자가 다스린 조선이 어떻게 되었는지 자세히 밝히지 않거니와, 아예 기자조선이라는 존재를 무시하고 있다. 단군조선 이후 곧바로 위만조선으로 넘어가 버린다. 여기에 <삼국유사> 첫 부분을 제대로 읽는 중요한 사실이 숨어 있다.

 

21 대개 책의 처음을 시작할 때 거기에 책 전체의 집필 의도를 함축할 어떤 상징적인 것을 내세우고 싶어한다.

나의 책은 어떤 집필 의도를 가질 것이고 집필 의도를 함축할 상징으로는 어떤 것이 좋을까.

 

21 그러므로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 아니다.

곰이 사실은 여우였음과 마찬가지의 충격. 그러게 이미 사람 사는 세상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했으니 단군의 자손이라 하기엔 무리가 있네(더러는 단군의 자손도 있었겠으나). 단군의 자손도 아니고 곰도 그저 곰 부족이었을 뿐.

 

21 건국이냐 창세냐 구분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네 관념의 소산이고, 그것은 특히 서양식 사고방식 아래서 그렇다.

                                            

23 일연은 그 바이러스의 정체를 발견했다. 중국의 제도와 문물이 좋다고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국이 그들의 필요에 따라 만들고 쓴 것이다. 이를 그대로 들여와 내용만 우리 것으로 채웠을 때, 내용은 형식에 가려 실상을 보여주지 못했다. 세련된 장식으로 우리 역사를 볼품 있게 세워놓았지만 그로 인해 본질을 놓친 것, 부작용이란 다름 아닌 우리의 실종이었다.

유발 하라리는 미래에는 우리의 마음이 통제될 것을 시사한다. 다가오는 인공지능 기반의 시대, 우리는 어떤 지능을 장착해야 할까. 종족의 말살보다 무서운 것이 언어말살, 문화말살이다. 세뇌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대사회는 세뇌사회라고 한다. 지배세력의 통제가 용이하게 우리의 뇌가 씻겨져서는 안될 것이다. 박근혜 정부도 역사왜곡을 시도했다. 신채호는 뤼순감옥에서조차 조선역사에 대해 썼다. 이러한 시도와 노력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가. 정신을 부여잡고 우리의 실종을 막아야 한다. ‘정신나가면안된다. 영혼이 털려서도 안된다. 제대로 역사를 바라봐야 하는 이유이다.

 

24 무신 정권의 성립, 몽고와의 전쟁/ 거기에 희미하게나마 민족의 주체성 같은 것이 자리한다.

 

25 송나라가 망하고 오랑캐족에 의해 원나라가 섰다. /  무인 정권이 내세웠던 새로운 질서라는 대의명분에 상당한 힘이 실렸다. / 당대의 문장가인 이규보가 <동명왕편>이라는 장편 서사시를 쓴 것은 결코 우연의 소산이 아니다. / 기실 민족의 발견이었다. 또 다른 문장가 이승휴는 시로 쓰는 이 나라의 역사 <제왕운기>에서 단군 신화부터 시작하였다. 이승휴는 일연과 동시대 사람일 뿐만 아니라, 함께 시를 지으며 즐긴 가까운 벗이기도 했다. 그런 이들이 줄을 잇는 13세기였다. 이 같은 분위기가 일연으로 하여금 우리 역사의 더 먼 곳에 관심을 갖게 했고, 거기서 단군이 발견되었음은 당연하다.

 

36 이런 여러 나라들이 어떻게 이합집산하여 세 개의 나라 곧 삼국시대로 접어드는가? 일연은 거기까지 넉넉히 마음을 썼고, 그것을 남방계와 북방계의 두 흐름으로 정리한다.

 

43 <삼국사기>가 금기시하는 것들이 이미 무너졌을 때, 그 존재를 회복한 것은 단군만이 아니다. 이렇듯 주몽에게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금기시 하는 것, 반대로 신격화 하는 것이 무너졌을 때 그 무너진 자리를 통해 다시 얻을 수 있는 것과 채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시대의 변화 속에서 유도되는 개인사의 변화에서 그것은 무엇일까? 생각거리!

 

43 이런 난생 신화의 핵심은 결국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이리라.

난생처음난생과는 다른 것이긴 한데, 한자가 되었건 (), 한글이 되었건(나오다, ) 어쨌든 껍질을 깨고 나온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기자. 부활도 그래서 계란이 상징인 듯.

 

49 비류와 온조가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렀다. 지금의 서울이다. /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 미추홀은 지금의 인천이다. 한편 동생인 온조는 하남의 위례성을 도읍으로 삼았다. 열 명의 신하가 보필을 하게 되어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하였다.

어머? 위례성이 지금 위례 신도시의 그 위례인가? 검색 시작. 백제의 한성시대는 493(73%)이고 웅진시대는 고작 63(9%)인데 보통 백제라 하면 웅진시대만 생각하게 된 까닭은? 아무래도 유물의 비중이 차이 나는 까닭? 1997년 풍납토성 일대 아파트 개발현장에서 백제시대 유물들이 많이 드러났다고 하나 건설업자들과 발굴업자들 간의 갈등(이렇게 가치가 첨예하게 대립할 수 있나)으로 아직도 백제의 유물들은 그 존재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모양. 백제의 한성시대가 땅 속에 묻혀 있다.

 

49 돌아오는 백성들이 매우 기뻐했다 하여, 나라 이름을 고쳐 백제(百濟)라 했다.

, 십제에서 백제가 이렇게 되는구나.

 

49 그런데 마지막에 일연은 <삼국사기>의 기록을 다시 수정하고 있다. 백제는 조상이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를 성씨로 삼았다고 했다. <삼국사기>에서는 부루라 한 부분이다. 일연의 끈질긴 고집을 읽을 만하다.

 

52 일연이 백제를 북방계에 속한 쪽으로 기술한 것도 그 같은 힘의 흐름을 따랐기 때문이다. 백제의 지배층이 우세한 세력을 형성한 끝에 새로운 땅의 주인이 되는 일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다음에 설명하겠거니와,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계는 그 선조들의 경험을 그대로 살려 다시 새로운 땅의 주인이 되었다. 나는 그것이 고구려에서 시작한 북방계 이동의 끝으로 보인다.

 

59 마을 사람들이 표주박을 박()이라고 한 데 따라, 성을 박이라 하였다.

 

62 아버지인 황제가 솔개의 발에다 편지를 묶어 부치면서, “솔개를 따라가 멈추는 곳에 집을 지어라라고 하였다. 스파이 파리가 따로 없네.

 

66 김부식과는 달리 선도 성모’ – ‘혁거세’ – ‘알영부인으로 이어지는 고리를 인정한다는 뜻이리라.

 

66 오줌을 눈 것이었다. 두 사람은 부부가 되고 딸 여덟 명을 낳았는데, 그들은 전국 팔도에 흩어져 무당이 되었다. / 무조신화

아니, 다른 나라도 이렇게 오줌 이야기 있나? 우리 나라에 유난히 많은 까닭이 뭐야? 이걸 뭐 거름이니 생태니 그렇게 해석해야 해? 좀 유난하네.

 

68 무당의 탄생 내력을 담은 이야기는 고대 국가의 건국 신화와 사촌간처럼 가깝다. 그것은 고대로 올라갈수록 왕권과 신권이 분리되지 않았던 데에서 연유한다. 삼국의 건국 신화 가운데 신라 쪽이 유독 무조 신화나, 민간 전승의 신모 신화에 가까운 것은 왕실의 성격이 곧 거기에 기반을 두었다는 강한 증거다. 그렇구나. 고등학교 때 엄마가 무당인 친구가 있었는데 친구들이 수근댔었다. 세월이 무상하다. 그 옛날에 제정일치 시대의 지위를 생각하면.

 

78 달리 생각하면 이만큼 인간 냄새가 나는 이야기도 없다. 하늘과 땅이 부리는 조화로 자신의 신성성을 포장하는 시대를 지나, 이제 인간 대 인간의 투쟁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 목적을 달성하려는 매우 정치적인 모습이 나온다. 신화가 설화로 돌아서는 지점이다. 훈훈한 이사금

 

89 우리의 영웅 김일 선수는 몹쓸 병마저 얻어 만년을 쓸쓸히 지내고 있지만, 링에서 김일 선수를 괴롭히던 안토니오 이노키 선수는 일본 프로레슬링계의 대부가 되어 그 인기를 느긋하게 끌어 나가고 있다.

나도 지금의 안정적인 상태를 느긋하게 끌어나가고 싶다. 더 많이 성취하고 더 많이 벌고 더 확장하고 그럴 생각 없다. 지금이 한가위이고 말년이 이 정도만 되어도 더할 나위 없겠다.

 

90 연구자들은 이것을 야마일국의 증거로 보고, 이 나라가 나중 나라시대를 여는 야마토 정부의 전신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91 야마일국을 중국 상고음으로 읽으면 야마잇국야마를 잇는 나라라는 뜻이며, 야마는 미오야마국이라는 것이다. / 즐거운 상상력에 민족적 쇼비니즘이 끼여들면 곤란하다.

 

92 그러나 한반도에서 건너왔다는 대목에 이르면 김일 선수 박치기를 보듯이 흥분하고, 흥분하다 보면 사실과 상상을 혼동하며, 나아가 그렇게 흥분하는 심리란 열등감의 역설적 표현에 지나지 않아 보여 뒷맛이 개운치 않다. 살아 있는 역사란 그런 의미가 아닐 것이다.

사실과 상상을 혼동하지 않기 위해서는 명상을 하라는 유발 하라리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92 역사는 그런 쇼나 각본으로 비유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아득한 옛 역사를 말하면서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너무 긴장한다면 결론이 엉뚱한 곳으로 흐르기 쉽다. 프로레슬링을 진짜 격투기라고 생각한 우리에게 잃어버린 것은 재미요 남는 것은 공허감이지 않았던가? 역사 또한 그래서는 안된다. 역사 또한 그래서는 안되고 개인사도 그래서는 안될 것이다.

 

96 승려 생활을 구름이나 강물처럼 머물러 살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 운수행각이라고 한다. 일연 또한 거기서 예외일 수 없었고, 그래서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살았지만, 13세기의 혼란스런 고려 사회가 그 삶을 더욱 모질게 했다.

운수행각. 붓놀림의 자유로움과 바람처럼 길 위를 쓸듯이 걷는 발걸음이 오버랩된다. 나의 상징도 이렇게 될 수 있을까. 가벼운 깃털로서의 붓과 발걸음. 펜촉의 끝에 달린 것도 깃털이다. 아이디어 씨앗.

 

96 자기가 머문 지역에 전해오는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빠뜨리지 않고 모았다는 점이다. 자신이 승려라 해서 불교적인 데에만 머물지 않았다. 이미 앞선 단군 신화의 경우와, 앞으로 소개할 많은 이야기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의 관심은 광범하게 퍼져 있다. 오늘날의 민속학자가 따로 없다.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 또한 그의 이 같은 관심과 실천 속에 모아진 것으로 본다. 그런 이야기일수록 일연의 붓끝은 힘을 얻는다. 일연이 영일에서 가까운 오어사라는 자그마한 절에 찾아든 것은 그의 나이 환갑을 바라보던 때였다 앞서 3년간 그는 강화도로 옮긴 왕궁 가까운 곳에서 왕을 모시고 있었다. 그 곳에서의 생활은 분주했다. 그러기에 낙향은 본연의 승려 생활로 돌아가려는 마음 때문이었다. 오어사는 지금 가 보아도 한가롭기 그지없는 산골 마을에 있다. 영일을 거쳐 들어가는 이 마을에서 그는 꿈처럼 전해오는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삼국유사> 속에 소중히 건사되었다. 인류학자 / 스토리 채집/ 스토리 사냥꾼/ , 마음이 바쁘다.

 

101 다만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가 이제 한반도에서 본격적인 역사시대로 들어가기 바로 직전에 위치하고 있는 설화라는 점, 게다가 훨씬 자연스럽게 의인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면 다르다. 정령의 의인화야말로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를 아름답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다.

 

102 작명 내력/ 눈여겨보면 알겠지만, 이는 일연 자신이 직접 답사한 곳의 이야기를 적을 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종결법이다.

 

103 이론을 떠나 감각적으로도 도저히 한 집안 식구라고 납득하기 어렵다고 한다. / 뿌리 없는 말

그러게, 나도 우랄 알타이어 어쩌고 할 때 도저히 이해가 안갔다. 이론을 떠나 감각적으로라는 말이 딱이네. 다만 몽골어와는 비슷하더라.

 

106 고대 사회에 이룩된 일본의 문물 대부분이 백제를 통해서 들어와 만들어진 것들이지만, 사회의 밑바닥을 흐르는 교류는 역시 좀더 가까운 경상도 쪽 곧 신라와 더 빈번했으리라 보인다.

 

107 실제 일본열도에 단일 국가로서 고대 왕조가 성립된 때를 대개 4세기 이후로 보고 있다.

 

107 신라를 괴롭혔던 왜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일 가능성이 있다. 어떤 왜는 친교를 하고, 어떤 왜는 침공을 했다.

복수로서의 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었네, ‘일본은 백제가 망한 이후의 국호라는 것도.

 

108 201년부터 섭정을 하였던 신공왕후의 선조라고 하였다. 301년부터 왕위에 올랐던 인덕왕이 백제계의 본격적인 출발이라 보고 있는데, 천일창과 신공왕후의 연결에서 우리는 신라계가 일본열도에서 먼저 힘을 가졌음을 본다.

 

108 그러나 이야기 속에 숨은 자그만 힌트를 허용한다면 일찍이 삼국시대 초반, 신라와 왜가 그만큼 가까웠음을 말해주는 증거들이 이쪽저쪽에 그렇게 널려 있는 것이다.

 

111 좀체 흥분하지 않는 일연의 붓끝이 여기서 가늘게 떨리고 있음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

붓끝의 미세함까지 감지할 정도로 저자는 삼국유사를 읽을 때 흠뻑 빠지다 못해 일연으로 빙의되는 듯한 체험을 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이다. 저자가 읽은 삼국유사는 13세기 오어사에 앉아 붓을 든 일연의 공간으로 소환시키는 향불과 같은 존재인 거 같다. 나도 책을 읽을 때 향불을 대하듯 읽어야겠다. 그 책을 쓴 작가의 시공간으로 소환되는 독자.

 

112 군사들은 동정심이 생겨 모두 화살촉을 뽑아내고 쏘았다 한다. 이 대목도 <삼국사기>에는 없다.

, 너무 아름답다. 그런데 성춘향이 곤장을 맞을 때 월매가 곤장 치는 사람에게 엽전을 찔러주어 그 사람이 때리는 시늉만 한 것처럼 화살촉을 뽑아내라고 누가 기지를 발휘하며 뇌물을 준 건 아닐까? 이런 생각하는 내가 각박한 것이려나, 아름다운 이야기는 그냥 아름다운 이야기로 남겨두자(하지만뇌물 준 이가 있었을 거 같아).

 

113 부인이 이를 듣고 말을 달려 율포에 이르러 보니, 남편은 이미 배에 올라타 있었다. 부인이 부르는 소리 간절하건만, 제상은 다만 손을 흔들 뿐 머물지 않았다.

둘이 사이가 좋았나 보다. 말을 달려 해변으로 갔을 장면은 영화의 한 장면같다.

 

116 한반도의 가장 가까운 신라가 그들과 적대 관계로 정착되는 상징적인 사건, 나는 그것을 박제상의 죽음으로 본다. / 장사사 / 벌지지  


120 승려의 신분을 벗어난 파격적인 내용으로 삼국시대 그 밑바닥의 정서를 전해 준 점 / 무릇 큰 강은 어느 지류도 마다 않고 받아들여 함께 흐르고, 그러기에 거꾸로 생각하면 큰 강이 된 것과 다르지 않게, 사람도 큰 사람이 있는 법이고, 큰사람이 이룬 일에 대대로 많은 이들이 도움을 받는다.

밑바닥의 정서를 전한다에서 아이디어를 얻을랑 말랑 한다. 위대한 사람, 유명한 사람에 대해 사람들은 읽고자 한다. 그런데 평범한 사람, 밑바닥의 정서를 전달받고자 할 때엔 또 다른 매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가령 개천에서 용이 난 경우, 평범한 사람이 위대한 사람이 된 경위. 그런데 이런 거 말고 밑바닥의 정서 자체가 의미와 재미와 가치가 있는 이야기꺼리가 되려면 어찌해야 할까?

 

121 한편 견훤의 탄생 설화는, 가까운 일본의 백제 영향권 아래의 지역에서 유포된 설화와 매우 비슷한 점을 보여, 설화를 통한 이동 경로를 추정하는 데도 흥미로운 자료가 된다.

말은 발이 없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

 

131 탑정동 일대/ 두두리들/ 두두리는 귀신이라는 뜻이고, 귀더리란 귀다리 곧 귀교인 듯 하다. 귀신들이 노는 들, 그리고 그들이 세운 다리가 있는 곳으로 정리된다. / 그것이 정말 귀교의 유허라면, 700년 전 일연은 실제 서 있는 다리를 보았을 법하다.

 

134 몸으로 못하면 혼으로라도 말이다.

머리가 안되면 몸으로, 몸으로 안되면 혼으로. 이가 아니면 잇몸보다 더 한 경지를 알았다.

 

137 그러나 전체 이야기의 구조는 이처럼 꼭 같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들은 서로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일까? 같다면 어느 쪽에서 어느 쪽으로 흘러간 것일까? 시기로만 놓고 본다면 미와야마가 훨씬 앞서 있다. 그러나 <고사기>의 성격이 전반적으로 설화라는 것, 이 책이 편찬되던 7세기의 영향을 받아 고쳐져 있다는 것 등으로 인해, 실제 이야기의 시대와 바로 연결시키지 못한다.

 

137 고대 백제계 이주민/ 도래인들에 의하여 유적으로서의 설화

 

139 自利만 행하고 利他의 공이 없으면, 지금에는 높은 이름을 떨치지 못할 것이요, 나중에는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 것이오.

自利만 행하는 것도 아니고, 나를 희생하며 100% 利他를 행하고 싶지도 않고, 그저 자리와 이타를 함께 하고자 할 따름.

 

144 이는 신라가 불교에 대해 자신감을 갖게 된 최초의 사건이라 할 수 있다. / 불교가 먼 나라에서 전래된 이방종교가 아니라, 이미 전세에 인연을 마련한 우리 종교라고 생각한 신라인들의 본지수적, 불국토 사상은 바로 토착 신앙을 저버리지 않는 밑바탕이었다.

 

149 여러 무리들과 화목하며 예의와 의리를 펼치는 모습이 일반 사람들과는 달랐다. / 힌트는 어디선가 주어져 있는 법이다. 그것을 찾고 못 찾고는 지혜의 눈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에 달렸다. / 타고난 바 영성이 특이한 사람이다.

149 그 같은 모범을 보인 국선이 있었다는 것은 곧 그 제도의 성패를 좌우할 뿐 아니라, 신라로서는 하나의 행운이었다. 제도나 시스템은 그걸 잘 구현하는 사람이 있을 때 빛을 발한다.

 

150 비록 수용이 늦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철저히 자기화 되어 정착되었으므로, 생경한 외래 사조에 휘둘리지 않았다. 속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휘둘리지 않을 자기화.

 

152 원광은 본디 귀족 출신이므로 유학에도 소양이 깊은 사람이었다. / 승려의 입장으로 실생활에 필요한 인륜 법칙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자체가 본디 불교적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것을 부자연스럽게 생각하지 않은 것이 신라 불교다. 원광 이후 신라 불교를 일으킨 삼총사라면 역시 자장, 원효, 의상이다. / 153 신라의 고승 세 사람이 모두 국가의 중대사에 참여하고 있다. 신라인의 사상적 무장은 이들을 통해 이루어지고, 그것은 곧 국력의 신장으로 이어졌다.

 

159 김유신의 동생이요 김춘추의 부인이 문희다.

김일, 히미코, 문희까지 삼천포로 어지간히 빠지시는데 그럼에도 재미있고 귀여운 생각마저 든다.

 

169 김유신은 가야 출신이다. 가야가 구형왕을 마지막으로 신라에 복속된 것은 법흥왕 19(532)의 일이다. 김유신이 태어나기 60여 년 전, 유신의 증조부 구해는 수로왕의 후손이었는데, 가야가 신라에 병합되자 가족들을 데리고 경주로 와서 살았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국민에다 이민 4세의 신분적 제약은 좀체 치워지지 않았던 것 같다.

문무왕은 김유신의 조카이고, 그래서 문무왕이 후에 끊어진 수로왕의 제사를 일으키게 되는구나.

 

169 일제시대 때 최재서가 그린 김유신의 모습이란 바로 망국민의 콤플렉스를 안고 살아가는 번민에 찬 지식인이다. 그것은 곧 최재서 자신의 의식이 투영된 분신이었다.

자꾸 지난 주에 사피엔스 통해서 알게 된 트루가니니 생각난다. 망국민이 뭐냐, 종족이 사라졌는데. 가족 없는 고아가 아닌 종족 잃은 최후의 일인의 심정이 어땠을 지 상상이 안간다.

 

170 왕이 될 만한 이로 춘추 밖에 없었고, 문희와의 결혼이 이뤄졌을 때라야만 신라와 가야는 진정한 한 나라가 된다는 생각이 그 밑에 깔려 있었다. 그것이 최재서가 말하는 민족의 결혼이었다. / 172 사실 진골은 편협한 신라 왕실이 한층 더 개방적으로 나가는 데 크게 공헌한 제도이기도 하다.

 

178 신라의 삼국 통일을 말할 때면 언제나 태종 무열왕 김춘추와 태대각간 김유신을 들지만, 실질적인 통일의 주역은 문무왕 법민이라 해야 옳을지 모른다. 백제가 멸망한 663년이 문무왕 3년이요,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이 문무왕 8년이다.

 

179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여 벌인 통일 전쟁이 한민족의 영토를 축소한 결과만 초래했다고 비판받지만, 기록을 자세히 살피자면 당나라에 전부 뺏기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없지 않다. 한반도 땅 전체를 집어삼키자는 것이 당나라의 속셈이었기 때문이다. 문무왕 법민은, 좀더 적극적으로 평가한다면, 그런 당나라와 맞서 최대한의 땅을 지켜 낸 사람이다.

181 그를 필두로 밀교 승려 12명을 동원하여 문두루의 비법을 썼다.

문두루는 산스크리트어로 mundra. 명랑은 나름 유학파. 그나저나 이 비법이 진짜 효험이 있는겐가? 12명도 의미 있는 숫자라 그런가. 열두제자, 십이지신. 수학과 신학, 철학의 관계. 숫자에 담긴 의미.

 

181 문제의 책임은 결코 신라에 있지 않음을 완곡하나마 강하게 말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전문이 실린 이 답신을 읽다 보면 문무왕의 당당한 면이 잘 드러난다.

 

186 실제 신라 천 년의 역사에서 두 왕대가 그 전성기를 구가한 것으로 보아 틀림없을 때, 이름은 이름 값을 하고 있다. 아들 신문왕은 왕위에 오르자 부왕을 위해 동해 가에 감은사를 짓는다. / 금당 아래의 동쪽에 구멍을 낸 감은사. 용더러 다니라는 통로를 만들어 준 것이라니, 나는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참으로 즐겁고 소중한 느낌이 가득해진다. 부자간의 짝짜꿍이 잘 맞아도 이렇게 잘 맞을 수 없다.

견훤 3대를 생각하면 문무왕, 신문왕 부자의 이야기는 너무 아름답다. 축생도에 떨어지더라도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겠다는 문무왕(“나는 세상의 영화를 싫어한 지 오래 되었소. 만약 악한 업보 때문에 짐승으로 태어나더라도 짐이 평소에 가진 생각과 맞는다오.”à 어찌 이런 대사를 할 수 있는지!!)과 용이 된 아버지가 돌아다닐 수 있도록 구멍 하나를 뚫은 아들이라니. 건축공간에 이런 부자 간의 정과 사랑이 스며든 곳이 다른 나라에도 있는가? 눈물나게 아름답다. 가봐야겠다.

 

189 상징의 핵심은 고장난명이었다고 해야 할까? /  당대의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그런 믿음 위에서 마음을 하나로 하여 살아가는 일 자체가 중요할 뿐이다. 그것이야말로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배인지 모른다.

 

191 “旱雨雨晴 風定波平(한우우청 풍정파평)”/ 이 문제를 푸는 학생들이 문장 구조가 아니라 거기 담긴 만파식적의 상징성을 잘 이해해 주면 더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旱雨雨晴 風定波平 號萬波息笛 稱爲國寶?(한우우청 풍정파평 호만파식적 칭위국보)”

가뭄에는 비가 오며, 장마 지면 날이 개며, 바람이 멎고 물결이 가라앉는다. 이 피리를 만파식적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194 이 이야기는 본디 백률사의 대비상이 영험 있음을 말하자는 데서 나왔다. 효소왕 때까지 국선 제도가 살아 있었음을 알게도 되거니와, 국선이 적군의 포로가 되자 대비상의 도움으로 피리가 날아가 구해왔다는 데서, 어느 결에 만파식적과 불교가 습합되었음을 알게 된다.

 

194 만만파파식적/ 벼슬이 높아져 더 이상 오를 데가 없으면 한 글자씩 덧붙이는 신라의 관습이 있었다. 이 언어 습관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명백보다는 명명백백. 중국어도 그러한데.

 

201 어쨌건 죽현릉의 주인공이 바로 미추왕임이 드러났다. 그런데 김유신의 혼령은 왜 미추왕릉을 찾아가고 있을까? / 202 석씨인 유례왕 때 이서국의 침입을 혼령의 힘으로 막았다는 이야기는, 미추왕에 대한 미화로도 해석된다. 죽은 김씨가 살아 있는 박씨보다 낫다는 이야기인 셈이다.

203 ‘호국이라는 한마디로 세 곳의 신 미추왕 김유신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203 취선사도 실은 오래 전 김유신을 위해 지은 절이었으나, 이 기록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그동안 제사마저 끊기도 버려져 있었다는 말 아닌가? / 더욱이 혜공왕으로 김춘추 직계 후손의 왕위 계승은 종지부를 찍는다.

 

205 화랑세기/ 신라 통일 후의 화랑들이 걸어갔던 비참한 말로/ 세간을 떠나 승려가 되는 경우는 차라리 점쟎은 은거이기에 무상한 세상의 인정을 훌훌 털어 버릴 수 있었거니와, 한편에서는 그들이 지닌 재주를 파는 광대에 버금갈 예인이나, 급기야 귀족 부인들의 노리개감으로 전락한 남창이 되었다는 데에서, 우리들의 눈은 실상 당혹을 넘어 경악에 어지럽다. 그것이 정말일까 너무나 어이없기에, 이는 분명코 위서며, 이 책의 출처인 일본 쪽의 어딘가에서 신라 화랑을 욕보이려고 조작한 것이라 주장하게도 된다. / 신라 통일의 8할은 화랑이 차지해 마땅하다. 그런 그들이 예인이며 남창이라니? 신라 통일 후 화랑이 그러했다니! 슬프다. 몰랐었다

 

210 득오가 지은 향가 <모죽지랑가>의 배경 설화로도 유명한 이야기다. / 화랑 출신들의 쓸쓸한 노년이 숨어 있다. / 212 득오의 <모죽지랑가>는 인생의 무상함을 그리고 있다. 그것은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인 동시에 삼국 통일 후 당해야 했던 화랑 출신들의 비극을 떠올리게 한다.

 

216 흠돌과 흠운이 인척 관계였다면, 그들은 한 쪽의 반역 사건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살아 남은, 통일된 신라의 첫 외척 세력으로 성장했다고 보인다. 살 놈은 살기 마련이구나.

 

219 태자로 책봉된 아들까지 둔 왕비를 내보낼 때의 이유란 반역 사건에의 연루 외에 무엇이 더 있을까 해서다. 다음 해 태자의 죽음도 여기서 멀지 않은 까닭이었을 터다. / 신문왕으로부터 시작하여 성덕왕과 경덕왕에 이르는 3대의 출궁 사건은 진골 세력들 사이에 벌어진 끊임없는 권력 투쟁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 진골은 양과 질에서 많은 발전을 한다. / 문무왕이 죽는 순간부터 노골화된 이 권력 투쟁은 반역과 반역의 악순환이었다. / 몸집만 비대해진 신라의 허둥대는 모습이다. / 신문왕 즉위년에서 시작해 혜공왕 폐위에 이르는 동안 그치지 않은 반역의 칼날, 그것은 김춘추 직계 후손의 쓸쓸한 종막을 불러 왔다.

 

221 신문왕으로부터 시작된 진골 귀족들의 권력 투쟁이 곧 왕비의 간택과 폐위에 긴밀히 연결되는 점을 감안한다면,

 

226 자연이 준 최고의 선물이 꽃이라면 인간이 만든 최고의 선물은 노래이다.

나는 노래에 특별히 재능도 관심도 없지만, 생각해보면 시라든가 노래라든가 무형에서 창조되어 감각적 즐거움을 준다는 점에서 정말 대단한 것 같다.

 

228 아름다운 이의 자태는 언제나 눈 도둑들에게 노출되어 있어서, 훔쳐가도 잃은 줄 모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왜 밥도둑이 연상되며 간장게장이 먹고 싶은겐지. 사람의 연상작용이란.

 

229 <구지가>로부터 <해가>까지 사이에는 이미 700여 년의 세월이 가로놓여 있다. 그렇듯 긴 세월을 두고도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하게 불리는 노래가 전승되었다는 것이다.

 

229 민요가 노동 현장에서 불렸을 때 노래의 제의적 성격이 감소되는 대신 기능적 성격은 충분히 살아 있게 된다. <해가>는 신가에서 민요로 넘어오는 중간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234 실명한 딸을 위해 향가를 지어 간곡히 기도하는 희명, 자기 손바닥을 뚫어 새끼줄에 꿰고는 필사적으로 염불하는 욱면이 그 시대 사람인가하면, 땅 속에서 사방불을 캐내고, 황룡사에 종을 만들어 건 이가 경덕왕이다. 그런 사람들이 살았던 시대가 존재했구나.

 

235 경덕왕 때 두 사람의 뛰어난 향가 시인이 존재했었다는 점이다. 두 사람은 물론 충담사와 월명사다. / 그런데 그들이 같은 시대를 산 사람이었고, 경덕왕과는 향가를 지어 바친 일에서 또한 같은 인연을 맺고 있다. 시를 지어 바친다라...시를 듣는 왕도 멋지다.

 

237 딸을 바꾸어 아들이 되게 해주시오

실제로 동의보감에는 전녀위남(轉女爲男) 처방이 있다. 경주에 그래서 아들 낳는 한약 처방하는 한의사들이 많았던겐가.

 

238 저는 다만 국선의 무리에 속해 있던 사람이라, 향가만 할 뿐 산스크리트말로 하는 염불은 잘 모릅니다. / 240 화랑이 향가를 지어 부르는 주 작가층이었다는 사실과, 승려가 된 다음 굳이 인도식 염불을 외우지 않고도 승려 생활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241 제망매가/ 일견 평범해 보이는 표현의 내면에 속 깊은 울림이 있다.

일견 평범 내면 울림

일견 화려 내면 공허

 

242 이 대목에서 일연은 향가가 종종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켰다는 기록을 일부러 적어 넣고 있다.

 

243 누가 거리에 나가 좋은 스님 한 분을 모셔올 수 있겠느냐? / 앵통을 진 채 남쪽에서 왔다.

옛날에는 거리에 스님들이 배회했던 모양. 얼마 전 만났던 어떤 분은 어릴 때 스님이 동생의 이름을 듣더니 이름이 좋지 않다고 했는데 그 이야기를 굳이 엄마한테 하지 않았었다고 한다. 후에 동생이 죽게 되었을 때 그 때 스님이 한 말씀이 생각나면서 엄마한테 동생 이름 바꾸자고 할 것을 하며 후회했다고 한다. 1950-60년 대 이야기 같은데 한국도 그 때만 해도 거리에 그런 스님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예전에는 더 했겠지.

 

246 그렇다면 짐을 위해 백성을 편안히 잘 다스리는 노래를 지어 주실 수 있는가?/ 충담사를 만나 <안민가>를 청해 들은 것이 죽기 불과 세 달 전이다.

저런 노래를 만들어 달라고 청한 것도 아름답고 지어준 사람도 멋있고. 안민가라는 제목 좋다.

 

253 왕은 진실로 잘 되고 못 되는 변화를 잘 알았으므로 <신공사뇌가>를 지었다. / 혼란이 겹치는 시대에 그 때가 점점 다가온다는 사실도 알았을 것이다.

 

261 독서삼품과/ 경전을 읽고 공부해 그 성취도에 따라 상중하의 3급으로 나누어 관직에 임명하는 이 제도는, 나중 고려시대에 와서 본격적으로 시행한 과거제의 출발이나 다름없다.

 

268 왕으로서 큰 정치를 하라는 뜻에서 <대도곡>, 여러 사람들에게 의견을 물어 보며 정치를 하라는 뜻에서 <문군곡>이리라. 왕은 기뻐하고 칭찬했다고 한다. 아마도 옛 친구들의 우정 어린 충언에 잠시나마 시름과 외로움을 덜었던 것일까?

화랑 출신의 경문왕이 옛 친구들이 지어준 향가를 듣는 장면이라.

 

280 거기에 음악과 무용까지 등장하니, 사실 이런 구조는 오늘날에도 굿에서 하는 차례와 매우 닮았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처용의 정체와 함께 이 이야기를 무속적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284 일연의 기술 의도/ 당시의 사회상/ 일연은 역사적 사실로서 광란스런 왕들의 혈전을 쓰는 것보다, 민간에 전해지는 이야기 한 토막으로 더 실감나게 당시 모습을 전해 준다. 그것이 <삼국유사>. 길바닥을 다녔을 스님, 밑바닥에 흐르는 정서를 전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86 기미(機微)를 보아 사리(事理)를 판단하는 법이다. 시절은 바뀌었어도 사람이 세상에 사는 한 언제든 잘 되고 잘못되는 징조가 따라다니기 마련이다. 거기서 기미를 읽어내라는 간절한 충정으로 보인다

나는 시에는 별 감흥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변경연 과정을 통해 시가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이 사는 세상의 기미는 커다란 사건사고에서 캐치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한 컷, 그러니까 단면에서 접할 수 있는 것이다. 고운기는 흐름이 소설이라면 일상의 단면은 시라고 했다. 그 시로흐름의 전후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유발 하라리는 여러분이 이 글을 읽는 동안 미 국방부는나노기술 연구소와 뇌 연구소에 수백만 달러씩을 송금하고 있다고 했다. 커다란 변화와 혁명은 이렇게 일상 속에서 조용히 이뤄지고 있다. 그 조용함 속에서 미세한 기미를 읽고 파악하여 사리를 판단하자. 기미를 읽자 = 시를 읽자.

 

287 골품제의 동맥경화 현상/ 신라는 탄력성을 잃고 둔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새로운 피가 수혈되지도 못했다. 내 인생에도 동맥경화의 조짐이 보이는지.

 

288 다라니/ 왕거인이 아니면 누가 이런 문장을 지었겠느냐?

왕거인은 억울하긴 하겠다만 한 편으로는 익명이어도 그 정체가 드러나고 마는 글솜씨는 부럽다.

 

289 사필귀정이요 새옹지마라 하나, 누구에게나 반드시 이르는 결과는 아니요, 다만 그 말대로 이뤄진 경험을 해본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쪽이다.

인생을 어느 정도 살아보면 이런 말이 나오는 거 같다. 인생은 불공평하고 권선징악은 동화책 속에서나 존재하지. 가난한 자라고 선한 자는 아니고 선행을 베푼다고 하여 그 대상으로부터 좋은소리를 듣는 것은 아님은 경험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알면서도 그냥 그렇게 사는 것일 뿐. 사필귀정, 새옹지마라는 말대로 이뤄진 경험을 해본 사람은 행복한 쪽이라는 말에서 고개가 끄덕거려지면서 마음은 싸해진다.

 

294 끝없이 이어지는 비극의 낱낱을 쓰기에 지쳤을 즈음에, 그 자신에게나 읽는 이에게나 한 가닥 희망 곧 새 나라 탄생의 빛을 실어 주려는 일연의 붓끝이 보이는 듯하다.

 

301 태자는 크게 울며 왕에게 사직하고, 개골산으로 들어가 삼베옷을 입고 풀을 뜯어먹으며 생애를 마쳤다. 막내아들은 머리를 깎고 화엄종에 귀의해 승려가 되었는데, 법명은 범공이었다.

 

302 태자의 이 간절한 한마디, ‘천 년 사직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실리에만 매달리지 못하는 어떤 다른 논리 아닌 논리가 있음을 어렴풋이 느낀다. 물론 그런 느낌일 뿐이다.

 

303 조선조에 들어 김부식은 사대주의에서도 민족적 주체성에서도 모두 공격을 받았다.

 

304 그런 면에서 일연은 오히려 올바른 김부식 팬이었다. 좋은 부분을 인용하면 그만이라는 태도가 엿보이고, 좋지 않은 부분을 놓고 비판한다거나 굳이 자기 관점에서 해석하지도 않았다.

나의 독법도 이러함. 한 저자의 시선으로 쓰여진 책 중에서 내가 취할 부분만 취하면 그만, 좋지 않은 부분은 그냥 냅두면 된다.

 

304 여러 백성들이 중의 옷을 입고 숨자/ 일연이 살았던 고려 말/ 능수좌, 나선사/ 온갖 승려들이 승직을 사려 비단과 보물을 짊어지고 고관들을 찾아다니는 것이었다.

 

307 사실 고구려의 전성기만큼이나 우리 역사가 중국에 떳떳한 적이 드물었으며, 일본의 초기 왕실이 백제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서 성립되었다는 사실을 상정했을 때 그 아쉬움은 커진다.

 

309 부여를 여주라고도 부른다는 일연의 기록은 매우 값진 것이다. 일연 자신이 직접 자복사라는 절에 가보았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거기서 본 글을 바탕으로 지명의 유래를 확실히 고증해놓고 있는 이런 대목이 <삼국유사>가 지닌 매력 가운데 하나다. 발로 고증

 

309 무녕왕릉 때문에 온통 백제 역사를 다시 찾은 듯 들떠 있던 때였는데도 말이다.

아 그래서 고구마 줄기 잡다가 무녕왕릉 캤다는 이야기가 예서 나온겐가?

 

311 그들의 천부적인 이동솜씨를 발휘해, 어느덧 배를 만들어 남쪽으로 일본열도를 발견해 내고 있는 것이다 한강 유역을 고집하지 않을 바에야 일본에 이르기까지 가까운 곳으로 도읍을 옮기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것이 웅진으로 다시 부여로 도읍을 옮기는 속내로 보인다. 그러므로 웅진, 부여 천도 뒤의 백제 역사는, 특히 그것이 왕실과 관련된 것일수록, 늘 일본과의 교섭 관계 속에서 보아야 한다.

 

315 그들은 먹고살기 좋은 곳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했던 당대의 생활인일 뿐이었다.

 

320 그러니까 일본에서 청동거울이 나온 지 거의 60여 년 만에 사마라는 이름의 주인공을 알게 되었고, 그로서 계체왕이 무녕왕과 형제간임을 밝히는 증거가 되었던 것이다.

 

321 우리들의 마음에는 놀라움과 착잡함이 겹친다. 그토록 가까웠나, 그런데 그토록 남이 되어 있나?

 

324 여기서 왕실의 근친으로 한정해 두면 이런 섭섭함과 곤란함을 면할 수 있다. / 200명도 채 안 되는 집권층이라면, 탁월한 문화를 지닌 소수가 가서 단번에 주도권을 잡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소수가 바로 백제계였다.

 

325 백제가 망할 무렵, 일본의 구원군은 적시에 도착하지 않았고, 그렇게 늦장 부리다가 싸우려는 시늉만 하고 돌아가고 말았다. / 종주국 백제의 멸망 후 7, 국호의 변경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백제에 대한 일본 왕실의 독립 선언으로 보인다.

 

326 흔적 지우기로 친다면야 이보다 더 한 일도 있었고, 지워질 것도 아닌 바에 저들이 줄기차게 되풀이하는 비슷한 일을 우리가 어떻게 해석하는가가 더 중요하다. 나는 그것을 일본의 자기정체성에 대한 부정이라기보다 독립의 비원으로 본다. / 수도를 교토로 옮기면서 헤이안 시대를 열었던 환무왕도 백제계였다고 한다. 200여 년 뒤, 지금은 일본의 중심인 관동 지방으로 처음 진출하여, 첫 막부 카마쿠라를 만들고 쇼군이 된 이도 백제계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을 이제 모두 일본인이라고 말하지 백제인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327 맹랑하기 그지없는 자가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 누구도 될 수 없다고 포기할 때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로 난국을 돌파하는 꾀는 맹랑한 자에게서 나온다. 그런 맹랑한 사람을 우대하는 사회가 발전한다.

 

327 서동이 쓴 방법은 노래를 통한 여론의 조성이었다. 노래에는 그 같은 힘이 있다. 민요에서는 그것을 참요 곧 예언의 노래 일종으로 보는데, 매스컴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 시절에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은, 사실이 어떤가와는 상관없이, 일의 흐름을 바꿔 놓기 십상이었다.

 

330 노래대로 이루어지는 기묘한 체험에 흠칫했다.

 

331 그 내용이 어떤 목적한 상황을 이미 이룬 것처럼 상정하고 있다는 데에서 참요 또는 예언요라고 한다.

참요! 마음에 든다. 미래의 기억을 말한다. 이미 목적한 상황을 이미 이룬 것처럼 나도 나의 참요를 하나 지어봐야겠다. 어찌 보면 옛날 사람들이 예언, 예시, 예지 능력이 뛰어났던 거 같다.

 

332 후천적인 교육의 중요성은 여기서 발휘된다. 공주는 가치를 발견하는 눈을 키워주었다. 그런 면에서 두 사람의 결합은 완전한 어떤 것을 지향하고 있다.

 

334 ‘지금도 남아 있다는 마지막 구절을 보건대, 일연은 이 절에 몸소 가 보았던지, 아니면 적어도 그 때까지 절이 남아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337 재미있는 이야기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나 전파되기 마련이고, 자생적으로 생겨난 이야기가 서로 비슷한 경우마저 있기도 하다.

 

338 <기이> 편의 기술을 일관되게 한 조에 한 왕대의 특징적인 사건 하나씩을 뽑아 그것으로 그 시대의 성격을 보여 준 일연은, 백제 말기 무왕의 40여 년에 걸친 파란만장한 생애를 설화로 남아 있는 이 이야기가 대변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그것의 사실 여부를 떠나서 말이다. 실제 무왕은, 설화 속에서는 장인인 진평왕과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르며 백제를 지켜 낸 왕이다. 신라의 삼국 통일이 의자왕대로 늦추어진 것도 무왕의 강고한 힘 때문이었을 것이다.

 

342 남녀간에 대소변을 보고자 하면 땅이 저절로 열렸다가, 보고 나면 문득 도로 합쳐지며

좀 유난하다니까. 대소변 이야기.

 

342 예전 사람들은 이런 물건 때문에 서로 해치고, 옥에 갇혀 무수한 고뇌를 받았다 하는데, 지금은 기왓장이나 돌과 같아서 아무도 지키려 하지 않는다.

 

343 그가 빨리 오기를 바라는 신앙

어디든 메시야를 원하고 그의 강림을 바라지만 메시야는 파랑새이고 구원은 우리가 해야 한다.

 

347 실상 견훤은 백제 땅에서 나온 마지막 왕이다. 신라가 경순왕을 끝으로 왕의 역사를 마감했다고는 하나, 그의 외손자들이 고려조의 왕위에 올랐고, 경주 출신의 지식인들이 상당수 고려 왕실의 요직을 차지했던 것과 비교한다. 아직도 그렇지 뭐

 

351 아들이 아버지에게 끝없이 반항하다 방한 견훤 집안 3대다. 식민지 치하,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다른 이념과 생활 방식을 가지고 살다 망해 버리는 집안을 그린 염상섭의 소설 <삼대>는 이미 천여 년 전을 무대로 삼아도 통할 이야기다. 문무왕-신문왕 2대와 비교된다.

 

353 그러나 오랜 싸움은 민심을 얻는 자가 이기는 법이다. 견훤은 제 힘만 믿고 오만스럽기 짝이 없어, 갈수록 민심을 잃는 편이었고, 왕건은 그렇게 떨어진 민심을 주워담아 자기편으로 만드는 데 능했다. 아마도 그 결정적인 사건은 견훤의 경애왕 살해일 것이다.

 

354 싸움터의 칼바람이 스산하게 묻어 있는, 그러면서 기 싸움에서 지지 않으려는 붓 놀림은, 그대로 칼 없이 겨루는 한 판이다.

 

355 초겨울에는 도두 색상이 성산 싸움에서 손이 묶였고, 이 달에는 좌장군 김락이 미리사 앞에서 해골을 햇볕에 쬐었소. 죽이고 얻은 것이 많으며, 쫓아가 사로잡은 것도 적지 않음을 보아, 강약이 이와 같으니 우리의 승패도 알 수 있을 것이오. 내가 바라는 것은 평양의 누각에 활을 걸고, 패강의 물을 말에게 먹이는 것이오. / 문인 최승우 vs 격문의 대가 최치원

내용은 오만하고 싸가지 없을지언정 글에서 느껴지는 기운과 힘과 표현이 대단하다. 해골을 햇볕에 쬐었대. 강약이 이와 같대. 평양의 누각에 활을 걸고 패강의 물을 말에게 먹이는 게 바람이라니. 진짜 할 말이 없다. 이거 원문 좀 봐야겠다.

 

357 무엇보다 의리에 맞게 살아가고 있는 자신에게 신라 왕이 지지해준 것처럼, 명분은 이미 결정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당대의 문장가들이 동원된 편지 싸움인만큼, 중국의 고사들을 적절히 인용하면서 자기를 합리화하는 글 솜씨는 찬란하다. 어디 이만한 편지 싸움이 또 있을까 싶다.

삼국유사 여기까지 읽은 것 중 최고의 페이지였다. 편지싸움, 감동받았다. 견훤의 편지가 비록 싸가지가 없긴 하지만 완전 살 떨린다. 나는 최치원보다 최승우 글이 더 좋네. 내가 중국어에 매력을 느꼈던 것은 장쩌민이 신년인사를 하는데 시로 표현하길래 무슨 정치가가 저렇게 문학적인가 싶었던 것이 계기였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에게서도 그러한 감동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물론 표현보다는 진정성이 우선인 까닭.

 

359 견훤은 금산사 불당에 위리안치 되었고, 금강은 죽임을 당했으며, 신검이 왕위에 올랐다.

위리안치가 뭔가 해서 찾아봤다. 탱자나무가 그렇게 가시가 촘촘하게 많은 지 몰랐네. 달아나지 못하게 집 둘레에 탱자나무를 빼곡하게 심는 거다.  

 

361 이 와중에도 살길을 찾는 이는 용케도 그 길을 간다. / 그러니 내 어찌 글을 올려 우리 왕을위안하고, 아울러 왕공에게도 은근한 정을 보내, 뒷날의 행복을 도모하지 않겠소?/ 명분과 실리가 맞아 떨어지는 지점이다.

 

365 임나일본부설을 증명하자는 의도에서 왜곡된 듯한 인상을 주는 것뿐이다. 도대체 400년 가까이 존속된 나라의 역사치고는 철저히 외면되어 있다.

 

365 그러나 가야를 그냥 건너뛸 수 없는 이유가 일연에게는 있었을 것이다. 허황옥이라는, 불교의 발상지 인도로부터 멀리 시집 온 여자, 이 땅에 불국토의 신성함이 서려 있다고 믿는 일연으로서 이 여자의 일거수일투족은 소홀히 대하지 못한다. 그런 그에게 찾아든 좋은 자료가 바로 가락국기.

 

369 일연이 수고한 김에 조금 더 넉넉히 마음을 써서, 간략이 줄이지 말고 모두 실어주었다면 좋았을 것을, 마지막에는 그런 생각까지 든다.

 

374 훌륭한 이가 덤불을 헤치고 스스로 오시니 내게 큰 행운이오.

 

378 바람과 파도 속에서, 또 때로 찬란한 태양과 밤하늘에 빛나는 별의 인도를 받으며 건너는 고해가 있다. 그 길을 지켜주는 석탑. / 절을 고해에 떠가는 배로 비유한다면 탑은 여기 왕후가 싣고 왔다는 그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378 그런데 이 탑의 생김새와 자질이 특이하다.

탑의 생김새와 자질에서 다른 나라에서 온 탑이려니 짐작한다. 사람의 생김새와 자질도 마찬가지.

 

384 그런데 <삼국사기>에서의 가야 누락은 엉뚱한 문제를 일으켰다. 이른바 일본의 사학자들이 제기하는 임나일본부설이다. 이 시기에 가야 지방에는 왜의 식민지가 서 있었으며, 그 식민지의 이름이 임나일본부라는 것이다. 지난 20세기 전반부 40여 년동안 한반도를 식민지 경영한 일본은 이 학설로 그들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384 제 땅에 아직 제대로 된 나라도 갖추지 못하던 때에 무슨 식민지 경영이란 말인가? 사료가 부족한 쪽만 억울할 일이다. 거기서 우리는 김부식이 원망스러운 것이고, 일연에게 감사하는 것이다. (1주 읽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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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4 10:43:43 *.35.38.89

섬세하고 독특한 저자연구.. 부럽고 놀랍습니다. 아 나는 정말 저자연구는 취향이 아는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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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4 12:33:02 *.18.218.234

정학씨는 '내가 저자라면' 갑이쟎아요 ㅋ 난 그게 힘들더만.  

저자연구는 재미있어요. 이번엔 외국저자가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지 ㅋ 영어로 볼라믄 눈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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