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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24일 11시 23분 등록

11기 연구원 장성한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고운기 지음 / 양진 사진

현암사

 

 

1. 저자에 대하여

 

고운기

 

대한민국의 시인이자 국문학자이다. 전라남도 보성군 출생이며,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해 등단하였다. 연세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석·박사 과정을 졸업하고, 일본 게이오 대학 문학부 방문 연구원(1999~2002 8),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2004), 일본 메이지대학교 문학부 객원교수(2007 4~20083)를 거쳐 2015년 현재 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 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 저서 리스트

 

시집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청하, 1987)

《섬강 그늘》(고려원, 1995)

《나는 이 거리의 문법을 모른다》(창비, 2001)

《자전거 타고 노래 부르기》(랜덤하우스, 2008)

《구름의 이동속도》(문예중앙, 2012)

 

교양서

《일연과 삼국유사의 시대》(월인, 2001)

《일연을 묻는다》(미래인, 2006)

《길 위의 삼국유사》(현암사, 2006)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현암사, 2005)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산하, 2006 초판, 2011 개정판) ― 윤동주 평전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스토리텔링 삼국유사 1) (현암사, 2009) ISBN 978-89-323-1536-2

삼국유사의 발굴, 대중화 등의 과정에 관한 책이다.《삼국유사 길 위에서 만나다》(현암사, 2011)

《듕귁과 오뤤지》(현암사, 2013)

《삼국 유사 글쓰기 감각》(현암사, 2015)

 

 

2.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들어가며

 

P3. 한번도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세계 속에 들어가 보지 않았다는 데 있으며, 그것은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제도적, 구조적인 결함에 원인이 있다는 데서 문제는 심각하다. 내 어린시절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흘렀건만, 이즈음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보니 극복 시간이 나보다 더 오래 걸리는 이가 많았다.

한국사가 대입시험 필수과목으로 재선정 된지가 얼마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학생들에게 역사교육을 해야 하는 것은 이 사회의 의무아닐까

 

P4. 세계관의 변화는 곧 역사관의 변화를 가져온다. 모든 것을 중국 중심으로 해석했던 [삼국사기]의 역사 기술은 이쯤 와서 힘을 잃게 된다.

[삼국유사] 탄생의 배경은 아무래도 이 두 가지 당대의 세계사적 사건으로 잡아야 할 것 같다.

 

P5. [삼국유사]는 이 시기에 우리 역사를 주체적으로 바라보고자 했던 지식인들의 일련의 작업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가장 염두에 두었던 책을 들자면 [삼국사기]를 젖혀 놓기 힘들다. 그가 [삼국사기]를 의식하고 있음은 특히 <기이>편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삼국의 고대사를 보여 주는 데에 [삼국사기]가 지닌 강점과 맹점을 누구보다 일연 자신이 깊이 간파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그칠 수 없는 것이 13세기 지식인으로서 일연의 입장이었다.

 

이 땅의 첫 나라

 

뿌리를 찾았던 첫 세대의 상징

 

P11. 단군 신화를 실었다는 것 그 하나로 일연의 [삼국유사]는 특별한 대우를 받아 왔다. 애써 이시기를 눈감아버린 [삼국사기]의 태도와 견주어 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나는 [삼국유사]의 다른 곳이 아닌 그 책의 첫머리에 단군 신화를 실었다는 점으로 더욱 호들갑을 떨고 싶다.

단군 신화를 첫 머리에 실었다는 것 하나만으로 호들갑 떨만한 일 아닌가.

 

P12. 예나 이제나 작은 나라는 거기에 그다지 자유가 없다. 늘 큰 나라가 만든 규범을 좇아가야 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일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면서도 문제가 되지 않기 위해서 사실의 기록만이 아닌 상징이 자리잡는다.

사실을 그대로 써서 저촉되는 것을 상징으로 포장해 놓으면 규범이 만든 규제의 그물망을 벗어난다.

 

세 부분으로 된 고조선

 

P17. 어쨌든 우리네 민간 신앙에서 3 7이라는 숫자는 매우 중요한 데서 자주 쓰이고, 꺼린다는 것은 민간 신앙적 의식에서 특별히 조심한다는 의미로 풀이될 수 있다. 환웅이 먹는 것, 생활하는 것 등에서 어떤 의식을 정해 놓고 그것의 준수를 요구했는데, 곰은 묵묵히 이행한 데 반해 호랑이는 그렇지 못했다.

 

P19. 사실 건국 연대보다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했다는 점이 더욱 중요하다. 이 땅에 세워진 첫 나라의 이름이요, 이후 우리 역사에서 이 만큼 자주 국호로 애용된 이름이 없다. 단군조선(일연은 고조선이라 썼지만), 위만조선 그리고 이씨조선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까지, 이렇듯 다양하므로 조선의 앞이나 뒤에 관형어를 붙여야 구분이 가능하다.

근데 왜 조선이라고 했을까? 너무 궁금하다. 고운 아침의 나라?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 아니다

 

P21. 우리는 먼저 단군 신화의 성격을 명백히 할 필요가 있다. 곧 신화 중에서도 단군 신화는 창세 신화인가 아니면 건국 신화인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단군 신화는 건국 신화다.

 

P21. 처음 환웅이 신단수에 내려왔을 때 그 곳에는 이미 사람 사는 세상이 존재하고 있었다. 다만 그들을 묶어 나라를 이룩하고 다스리는 제도가 없었을 뿐이다. 비록 그가 첫 왕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에게서 단군이 나오고, 단군은 곧 나라를 만들어 왕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 아니다. 더러 단군의 자손도 있겠지만, 그 때 이미 한반도에 살고 있다가 단군을 왕으로 모신, 이러저러한 사람들의 자손이다.

사실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부분인데, 엄밀히 따지면 단군의 자손은 아니네

 

조선은 어디로 갔을까

 

P22. 고려 왕조에 들어 이전 시대를 정리하는 처음 역사서는 [삼국사기]가 차지했다. 12세기 중반의 일이다. 사실 [삼국사기]는 한반도에 살았던 지식인층이 중국으로부터 문자와 그와 관련된 여러 문화를 전수 받은 다음, 이제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했음을 보여 주는 책이다.

 

P23. 일연은 그 바이러스의 정체를 발견했다. 중국의 제도와 문물이 좋다고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국이 그들의 필요에 따라 만들고 쓴 것이다. 이를 그대로 들여와 내용만 우리 것으로 채웠을 때, 내용은 형식에 가려 실상을 보여 주지 못했다. 세련된 장식으로 우리 역사를 볼품 있게 세어 놓았지만 그로 인해 본질을 놓친 것, 부작용이란 다름 아닌 우리의 실종이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물론 사대적인 면이 상당히 크긴 하나, 이렇게 정리를 했다는 자체는 인정하고 싶다.

 

13세기의 시대적 분위기

위만조선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P29. 약간의 추측이 가능하다면 일연은, 같은 민족이라는 전제 아래, 위만조선을 단군조선의 후계로 여겼으리라 생각한다. 중국에서 직접 책봉한 기자를 애써 간단히 처리해 버리고, 위만조선을 그 다음 조에 이어 놓은 일연의 생각은 여기서 조금씩 드러난다.

 

고조선과 위만조선을 함께 읽어야 할 이유

 

P34. 사실 [삼국유사]에서 단군 신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지만, 실은 일연이 단군 한 사람에 그치지 않고, 조선이라는 나라의 처음과 끝을 설명하고자 한 데 더 힘을 기울였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기에 중국 쪽 역사서에서 조선에 관한 기사를 모두 찾아보고, 그것을 일연 나름대로 정리해 크게 두 개의 제목을 써서 정리한 것인데, 일관성과 근거가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성공적이다. 오늘날 우리가 고조선조와 위만조선조를 나란히 두고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구려와 북방계

 

한반도의 전국시대와 삼국의 정립

 

P36. 고조선과 위만조선을 최초의 국가로 인정한 일연으로서는 한반도가 다시 삼국으로 정립되기까지 있었던 여러 작은 나라들을 소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것이 나는 무척 흥미롭게 보인다. 나는 역사학자도 아니고, 이 말을 어떤 역사의 흐름으로 공식화해 달라는 생각도 없다. [삼국유사]를 보면서 고조선과 위만조선 그리고 이 두 나라와 삼국의 정립 사이에 있는 작은 나라들의 기멸, 그것을 문득 떠오른 생각대로 한반도판 전국시대라고 이름 붙였을 따름이다.

 

북방계의 시작, 부여

 

P43. 일연의 [삼국유사]에 와서 주몽은 [삼국사기]에서보다 더 확실히 하늘님의 아들이라는 지위를 획득했다. [삼국사기]가 금기시하는 것들이 이미 무너졌을 때, 그 존재를 회복한 것은 단군만이 아니다. 이렇듯 주몽에게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동명성왕의 위대한 탄생

 

P44. 주몽의 이 같은 고난과 극복은 소설의 이론에서 말하는 영웅의 일생에 부합한다. 영웅은 특이한 재주를 지니고 태어난다. 그러나 성장 과정에서 주변으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아 고난을 겪는다. 영웅은 그가 타고난 능력으로 이 같은 고난을 극복하고 이상을 실현해 낸다.

 

북방계의 다른 흐름, 백제의 성립

 

P52. 백제가 북방계의 흐름을 타고 건국되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나라의 구성원이 전부 북방계였다고 보는 것은 무리다. 어떤 형태로든 거기에 원주민이 있었고, 여러 역사서에 그 이름이 나타나듯이, 그들의 나라 곧 변한 등은 사실 원주민들이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다만 이 시기에 부족간의 이동은 끊이지 않았고, 좀더 우세한 세력과 기술을 가진 쪽으로 힘의 균형이 움직였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일연이 백제를 북방계에 속한 쪽으로 기술한 것도 그 같은 힘의 흐름을 따랐기 때문이다.

 

신라와 남방계

 

남방 문화 속의 신라

 

P56.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은 곧 오리지널의 출발을 의미할 것이다. 이제 남쪽에도 하늘에서 내려온 이들이 있음을 말하는 일연의 의도란 곧 북쪽과 계통을 달리하는 오리지널이 있음을 강조하자는 데 있지 않을까?

 

혁거세의 탄생과 신라 건국

혁거세 탄생, 또 하나의 이야기

선도산 신모에서 나타나는 신라 왕실의 성격

 

P68. 삼국의 건국 신화 가운데 신라 쪽이 유독 무조 신화나, 민간 전승의 신모 신화에 가까운 것은 왕실의 성격이 곧 거기에 기반을 두었다는 강한 증거다. 물론 고구려나 백제의 초기 왕실 또한 제정일치적인 성격을 지녔을 것이다. 그러나 신라의 그것에 비하면 약하다.

 

탈해왕을 둘러싼 갈등

 

시골 출신의 벼락 출세

치아 많은 이가 된 왕 자리

탈해의 등장

탈해왕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

탈해왕의 고민

 

P87. 일연은 석탈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경위를 성과 이름으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다. 먼저 성에 대해서는 석 곧 옛날 이 곳이 내 집이라 하여 남의 집을 제것으로 만들었기에 성을 석씨로 하였다고 말한다. 성과 이름에 대한 또 다른 견해로는 작 곧 까치가 울어 궤짝을 열었으므로 조자를 떼어내고 성을 석씨로 하고, 궤짝을 해 곧 열어 알을 탈 곧 꺼내어 태어났으므로 이름을 탈해라 하였다고 말한다.

 

연오랑 세오녀, 첫 설화의 주인공

 

일본의 여자 프로레슬러 히미코

 

P89. 우리의 영웅 김일 선수는 몹씁 병마저 얻어 만년을 쓸쓸히 지내고 있지만, 링에서 김일 선수를 괴롭히던 안토니오 이노키 선수는 일본 프로레슬링계의 대부가 되어 그 인기를 느긋하게 끌어 나가고 있다.

애국심은 알겠지만, 불필요한 내용 아닌가 생각한다.

 

고대 일본의 여왕 히미코

히미코와 같은 시대의 연오랑 세오녀

해와 달을 섬긴 사람들의 이야기

 

P98. 일관이 이르기를 일월지정이라 했다. ‘을 편의상 정령이라 번역했는데, 이 의미에 주목해 보자. 해와 달은 빛이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쓸모 없듯 해와 달이 빛을 잃으면 쓸모 없는 물건이 된다. 그러나 빛이 있다고 다 보는가? ‘눈 뜬 소경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본다는 것은 그 정령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신라 사람들이 잃어버린 것은 해와 달이 아니라 해와 달을 해와 달로 볼 수 있는 그 정령이었다.

 

아름다운 설화 속의 정령

 

신라는 왜 일본과 앙숙일까

 

일본어와 비슷하게 들리는 한국어

일본에 간 신라 왕자 천일창

박제상 사건으로 터진 감정의 폭발

 

P110. 실성왕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일연의 기술에서 그것은 더 명료해진다. 참는 데도 한도가 있는, 그래서 쌓이고 쌓인 감정의 폭발이라고나 할까, 좀체 흥분하지 않는 일연의 붓끝이 여기서 가늘게 떨리고 있음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스타일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데, 저자가 개인의 생각을 강조하는 것이 불가피한 일이지만 너무 감정에 치우치는 것은 아닌지

 

박제상, 그 빛나는 충혼의 인물

일본에 대한 적개심

 

P118. 신라 왕실 내부의 갈등이 아닌 왜의 비인도적인 처사 쪽에 더 치중한 일연의 기술에서 우리는 어떤 해석을 내릴 수 있을까? 고구려 사람들은 화살촉을 뽑아 내고 쏘는 시늉만 한 데 비해, 발바닥 거죽을 벗기고 갈대 위를 걷게 하는 왜왕의 고문은 처참하기만 하다. 이렇듯 처참한 장면을 집어넣는 일연의 의도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여기서 일연이 [삼국유사]를 쓴 시점을 떠올리게 된다. 바로 몽고와 고려 연합군이 일본 정벌을 나섰던 때와 시기를 같이 하고 있다.

 

P119. 전쟁은 적개심을 필요로 한다.

고려는 개국이래 오랫동안 일본과 그다지 교류를 하지 않았는데, 뜻밖에 전쟁을 벌여야 하는 이 황당한 교류로 인해 새삼 그들의 존재가 무엇인지 떠올리게 하였고, 먼 옛날 신라와의 관계 속에서 그들이 저지른 일을 생각하면서, 임박한 전쟁에서 반드시 쳐부숴야 할 구원의 대상으로 그려야 하지 않았을까? 박제상의 이야기는 거기 적절한 감이었을 것이다.

 

밤에 찾아오는 손님

 

야래자 설화의 전통

복사꽃처럼 어여쁜 여자

사람을 돕는 귀신

 

P133. 그런데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달아나는 길달을 비형이 죽였다는 마지막 대목에서 우리는 또다시 귀신 세계를 보는 당시 사람들의 태도를 알 수 있다. 귀신은 사람을 돕는 존재이면서, 그것을 어겼을 경우 엄정한 벌을 받는다는데까지 나가 있는 것이다.

 

P134. 진지왕이라는, 현실에서는 실패한 왕을 다른 역할로 복권시켜주고 있는 느낌이 든다. 불명예스럽게 왕의 자리에서 쫓겨난 진지왕을 데려다 그 혼의 힘으로 특이한 아들을 낳게 하고, 이렇게 해서 그가 세상에 사는 동안 못다 이룬 일을 보상하게 했던 것일까? 몸으로 못하면 혼으로라도 말이다.

 

아무에게나 오지 않는 밤손님

 

P137. 스에는 스에키라는 도자기를 생산하는 곳의 지명이고, 이 도자기의 생산자들은 고대 백제계 이주민들로 밝혀졌다. 따라서 이 사람들에 의해 한반도로부터 전해진 설화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견훤 탄생담 같은 야래자 설화가 견훤 이전에도 한반도에 퍼져 있었고, 그 증거는 앞서 도화녀의 이야기에서 나타나거니와, 그 같은 이야기의 틀은 도래인들에 의해 일본에까지 전파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스에키 도자기! 정말 오랜만에 듣는다. 왠지 반갑다.

 

신라가 통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

 

P140.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은 옛 유대 성인의 입을 통해 나왔지만,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그것은 진리다. 최소한 한반도에서 신라는 그 말씀이 진리임을 입증한 나라였다.

 

불교에 대한 거부감을 이겨 내고

 

P142. 노인이 편지를 들고 나와 바쳤다고 해서 서출지라고 부르는 연못은 지금도 경주 남산 밑 피리촌에 있다. 사실 이 이야기는 무척 괴이하다. 표면적으로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승려와 궁주를 처단한 슬기로운 왕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넓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내전의 분수승으로 대표되는 불교에 대한 고위 관료들의 적대감이 표현되었다는 점이다. 편지를 바친 노인의 존재가 전통적인 세력을 대표한다고 보면 더욱 그렇다.

 

P144. 아육왕은 아쇼카왕을 말한다. 석가모니가 열반한 다음 인도에 최고의 불교 국가를 세운 왕이다. 그런 그가 이루지 못한 일을 신라 사람들이 단번에 마치고 황룡사에 모셨다. 이는 신라가 불교에 대해 자신감을 갖게 된 최초의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토착 신앙, 불교 그리고 화랑

 

P149. 미시를 분명히 불교적 존재로서 미륵으로 보려는 뜻일 것이다. 그런 한편, “지금 나라 사람들이 신선을 미륵선화라고 부른다는 말도 함께 붙여 놓아, 도교적 민간 신앙의 흔적을 지우지 않았다.

미시는 복합적인 성격을 지닌 존재다. 그만큼 신라의 화랑이, 더 나아가 신라의 불교 수용 후의 역사가 복합적임을 말해 준다.

 

신라의 호국 불교적 성격

 

P150. 그래서 세속오계를 주노라. 첫째, 임금을 섬기되 충성으로 할 것이요, 둘째, 부모를 섬기되 효성스럽게 할 것이요, 셋째, 친구와 사귀되 믿음으로 할 것이요, 넷째, 싸움에 나가서는 물러서는 일이 없을 것이요, 다섯째, 산 것을 죽이되 가려 해야 할 것이다. 자네들은 이를 행하고 소홀히 하지 말라.”

 

외교가 중요하다는 사실

 

문희, 그 아름다운 여자의 이름

 

추억의 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

통일의 운명을 타고난 사나이

꿈을 사서 얻은 행운

민족의 결혼

진골의 탄생

화려한 무대 뒤의 여인

 

P175. 태종무열왕 2년 왕은 3월에 세자 법민을 태자에 책봉하고, 9월에는 자신의 셋째 딸 지소부인을 김유신에게 시집보낸다. 유신의 나이 이 때 60세였다. 매제에 이어 공들인 조카가 태자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자신은 왕과 처남 매제간이 아니라 장인 사위간이 되었다.

 

P177. 김유신이 동생 문희를 불태워 죽이겠다고 벌인 해프닝을, 일연은 선덕왕 때의 일로 들었다 하고, 최재서는 진평왕 때라고 고쳐 놓았다. 문희의 뱃속에 법민을 품고 있을 때 이 일이 벌어지고 곧 결혼했다면 최재서의 정정이 옳다. 그러나 후처로 들어앉아 상당한 시간이 흐른 다음, 이제 웬만큼 힘을 얻은 유신이 끝내 처량한 동생의 처지를 참지 못하겠다고 나선 일이라면, 일연의 기록이 맞다. 상당한 시간이란 10년 남짓한 세월이다.

 

만파식적 만만파파식적

 

문무왕 법민

 

P179.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여 벌인 통일 전쟁이 한민족의 영토를 축소한 결과만 초래했다고 비판받지만, 기록을 자세히 살피자면 당나라에 전부 뺏기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없지 않다. 한반도 땅 전체를 집어삼키자는 것이 당나라의 속셈이었기 때문이다. 문무왕 법민은, 좀더 적극적으로 평가한다면, 그런 당나라와 맞서 최대한의 땅을 지켜 낸 사람이다.

 

사천왕사로 지켜 낸 땅

 

P183. 그를 인도해 새 절을 살펴보게 했다. 사자는 문 앞에 서서,

이것은 사천왕사가 아니오

라고 하더니, 덕요산의 절을 바라보면서 끝내 들어가지 않았다. 신라 사람들이 황금 1,000냥을 주자, 사자가 돌아가서 이렇게 아뢰었다.

신라에서 천왕사가를 창건하고, 새 절에서 황제의 장수를 빌고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뇌물주고 받는 거는 여전하구만. 이건 앞으로도 변하지 않겠구만

 

죽어서는 나라를 지키는 용으로

 

P183. 다시 말하거니와 왕위에 있었던 20년 동안 문무왕은 당나라와의 투쟁을 계속한다. 당나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을 꾀어 신라를 괴롭히게 하고, 문무왕은 그것을 역으로 이용하여 당나라 군사를 쳐부순다. 당나라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의 반란군을 제압한다는 명분으로 싸움을 일으키되, 실제로 주적은 당나라 군사로 삼았던 것이다. 문무왕의 이런 행적은 크게 평가받아 마땅하다고 여겨진다.

 

P185. 살아서는 사천왕사를 지어 나라를 지킨 문무왕은 죽어서는 용으로 태어나 그 일을 계속하겠다고 한다. 용으로 태어나는 것은 축생도 곧 지옥이나 다를 바 없는 곳에 떨어지는 일이다. 지의 법사가 이를 걱정해서 한마디 거들지만, 왕의 신념은 비록 축생도에 떨어진들 변함 없어 보인다.

 

더할 수 없는 선물, 만파식적

 

P187. 그러나 일연은 다르다. 절이며 피리며,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믿을 수 없는 일들을 그는 떳떳이 쓰고 있다. 일연도 정말로 믿지 못할 구석이 없기야 했겠는가? 다만 그는 이 모든 일들을, 요즈음 말로 하면, 상징으로 받아들였을 터다.

단지 역사서와 신화/설화는 구별하는 것이 낫지 않나 생각한다.

 

P189. 상징의 핵심은 고장난명이었다고 해야 할까? 천하를 상서롭게 다스리고 화평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누구나 같다. 그런 소망의 결정이 피리로 상징되어 나오는 것이다. 문무왕은 바다를 지키는 용이, 김유신은 하늘을 지키는 별이 되어, 신라와 거기 사는 백성을 영원토록 평안히 해준다는 믿음 또한 거기 가세한다.

그것이 믿을 수 없는 괴이한 일인들 어떠랴. 당대의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그런 믿음 위에서 마음을 하나로 하여 살아가는 일 자체가 중요할 뿐이다. 그것이야말로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배인지 모른다.

 

만파식적은 어디로 갔을까?

 

권력의 끝

 

토사구팽 그 비정한 원칙

김씨 성을 가진 첫 왕

김유신과 미추왕

효소왕대의 죽지랑

 

P204. 김유신가의 몰락은 100여 년의 시차를 두고 서서히 진행되지만 토사구팽의 비정함은 여기저기서 목격된다. 전쟁이 끝나 시대가 안정되자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히 다른 데로 흘러갔다. 그 가운데 가장 걸리는 존재가 전쟁 영웅들이었다. 그들은 전쟁 때에 절대적이면서 평화가 돌아오면 껄끄럽기만 하다. 토사구팽의 칼은 바로 그들을 겨누고 있었다.

김유신 또한 전쟁 영웅이다. 다만 그의 집안이 100년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왕실과 맺은 사돈 관계 덕분이었다. 그렇지 못한 대부분의 영웅들에게 갈 길은 정해져 있었다.

 

P205. 화랑은 바로 전쟁 영웅 그들이다. 앞서 살펴본 대로 신라 통일의 8은 화랑이 차지해 마땅하다. 그런 그들이 예인이며 남창이라니?

믿지 못할 일이지만 통일 이후 화랑 출신들이 걸어갔던 쇠락의 길을 하나하나 찾아보면 한편 수긍이 가기도 한다. 화랑 가운데 우두머리는 실권을 잃은 종이 호랑이로, 무리들은 주인을 잃은 처량한 신세로 이리저리 내쳐졌다. 철저한 토사구팽이다.

 

P211. 신라 계급제 사회가 고착되어 병통을 보이는 후기에 이르면 급기야 육두품들의 반발로 나라가 바뀌게도 되지만, 효소왕 때라면 아직 제도와 기장이 튼튼한 전성기였다. 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을 설명하자니 이면을 더듬게 된다. 그것은 바로 화랑 출신들의 토사구팽이다. 신라 통일을 완성한 문무왕과 그의 아들 신문왕을 지나 효소왕에 이르면 이는 더욱 노골적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그런 사회적 분위기의 한 단면을 죽지랑의 이 사건으로 읽게 되는 것이다.

 

수로부인, 미시족의 원조

 

왕비를 둘 두었던 왕

3대에 걸친 출궁 사건

 

P219. 신라의 진골은 대체로 진흥왕부터 시작된다고도 하지만, 역시 본격적인 출발은 김춘추가 태종 무열왕에 오르면서부터다. 삼국 통일의 전쟁을 치르는 동안 진골은 양과 질에서 많은 발전을 한다. 전쟁을 수행하다 보면 거기 공로자가 나오게 마련이고, 승리한 다음에 전리품을 놓고 다툼을 벌이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나마 태종과 문무왕대에는 강력한 왕의 힘으로 무마되었다. 그러나 문무왕이 죽는 순간부터 노골화된 이 권력 투쟁은 반역과 반역의 악순환이었다. 그것은 왕실과 가까운 최고 권력층에서 터졌다. 신문왕이 즉위하여 아직 부왕의 장례도 치르지 못했는데 반역 사건이 일어났다. 그 주모자는 다름 아닌 바로 왕의 장인이지 않았던가?

인간사는 변하지가 않는구나 어떻게든 한 자리 하려고 하는 모습. 이 번 정부도 정권교체에 공을 새운 사람들이 한 자리 차지하겠다고 하는 모습 제발 안 보여 줬음 좋겠다.

 

왕의 이혼 위자료는 얼마?

꽃과 여인 그리고 사랑의 노래

 

P226. 자연이 준 최고의 선물이 꽃이라면 인간이 만든 최고의 선물은 노래이다. 손에 잡은 암소도 놓고 그렇게 정중히 꽃을 바치는 노인의 태도야말로 헌신하는 자의 상징이다. 꽃을 탐내는 여자의 마음도 아름답지만, 모름지기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려 바꾸는 사랑이라면 최고의 가치를 지니지 않겠는가?

 

함께 부르는 노래의 힘

 

P228. 나무 아름다운 여자와 살아도 억울하다. 아름다운 이의 자태는 언제나 눈 도둑들에게 노출되어 있어서, 훔쳐가도 잃은 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감춰 놓고 있겠는가? 춤쳐간들 닳지 않는 것이라면 적선하는 마음으로 살아야지.

 

P229. 노인은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면서 노래하라 하였다. 실제적으로 노래는 여러 사람의 행동을 일사분란하게 통일시키는 데도 필요했을 것이다. 다시 다음 시대, 본격적으로 인간의 삶이 노동을 통한 생산물로 유지하는 시대에 노래는 민요가 되었고, 민요가 노동 현장에서 불렸을 때 노래의 제의적 성격이 감소되는 대신 기능적 성격은 충분히 살아 있게 된다. [해가]는 신가에서 민요로 넘어오는 중간 과정을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다.

 

동해 바다 그리고 국도 7호선

 

첫 성전환증 환자

 

일연이 그리는 경덕왕의 존재

아들을 바랐던 왕

 

P237. 표훈이 하늘님과 만나는 곳이 토함산이었다. 그는 하늘님과 직접 대화를 나눌 만한 세상의 단 한 사람이었기에 경덕왕은 무리한 부탁을 하고 있다. 비록 나라가 위태로워진다. 한들 아들을 얻겠다는 경덕왕의 비원은 차라리 비극에 가깝다. 더욱이 표훈으로서는 억울하게도 하늘님에게 중대한 경고와 처벌까지 받으면서 말이다.

 

재앙을 극복하는 길

죽은 누이를 위해 부르는 노래

 

P241. 월명사 <제망매가>를 빼놓을 수 없다.

생사의 갈림길

여기 있으니 두려웁고

나는 갑니다말도

못하고서 갔는가

어느 이른 가을 바람 끝에

여기 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은 모르겠네

, 미타찰 세상에 만날 나는

도 닦아 기다리리

언어영역 문제로 풀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작가의 숨은 의미. 한 가지란 한 부모 등등 문제가 떠오르는 구만

 

P242. 다만 삶의 고통은 죽음이라는 운명적 환경이 만들어 준 것, 도 닦는 사람이라고 거기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 한 잎에도 속절없는 인간의 생애를 비유한 솜씨가 비상하기만 하다. 바람은 다름 아닌 이른 바람이다. 아마도 이 대목이 시의 핵심이리라. 태어나는 데는 순서가 있어 형 아우가 정해지지만, 죽는 데는 순서가 없는 것이고, 언젠가는 누구나 죽음을 맞이한다 한들, 이다지 이르게 찾아온 죽음이 비록 생사를 넘어서려는 구도자에게라 할지라도 심금을 울릴 일 아니겠는가.

 

최후의 시도

 

P246. 충담사를 만나 [안민가]를 청해 들은 것이 죽기 불과 세 달 전이다. 노래는 다음과 같다.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다사로운 어머니

백성은 어린 아이라고

하실진대, 백성이 다사로움을 알도다

구물구물 살아가는 물생

이들을 먹이고 다스리라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리

하실진대, 이 나라 보전될 것을 알도다

, 임금갑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한다면

나라는 태평하리니

안민가도 문제로 풀었던 기억^^

 

여자 같은 남자

 

P250. 일연은 이를 해석하여, ‘여자 아일 것이 남자가 되었으므로그렇게 되었다 했으나,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건대 이는 성전환증을 가진 사람의 증세다.

너무 확대해석 한 거 아냐? 너무 자기식대로 해석하는데?

 

P250. 혜공왕은 성전환증 환자였을 것이다.

확신까지?

 

P251. 정황상 김양상과 김경신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왕을 지키기 위해 일어섰는가, 이 기회에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일어섰는가? 바로 다음 왕에 김양상이 들어서고, 이어 김경신이 왕위에 오르는 것으로 보아, 후자의 가능성도 충분하다.

 

왕이 되는 자

 

야심가의 등장

 

P253. 앞서 만파식적을 소개하면서, 그 소식이 마지막으로 보인다는 곳이 여기다. 다만 아버지 효양 대각간이 아들 원성왕에게 만파식적을 건네준 시점이 즉위 이전인지 이후인지 불분명하다. 그것이 언제이건 일찍부터 아버지는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꿈을 꾸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혼란이 겹치는 시대에 그 때가 점점 다가온다는 사실도 알았을 것이다. 아들은 총명했다.

그러나 가벼이 움직일 수 없다. 성공하면 충신이요 실패하면 역적인 것이 쿠데타다. 그런데 마침 같은 집안의 김양상이 상대등이 되었다. 경신은 그를 부추겨 내세웠을 것이다. 그러니까 양상은 얼굴 마담역할이었을 뿐이다. 쿠데타는 성공했고, 경신은 양상이 선덕왕으로 즉위한 다음 이벌찬 곧 각간으로 승진하면서 상대등이 된다.

 

왕이 되느냐 죽느냐

꼼꼼하면서도 과감했던 왕

 

P258. 삼국 통일 후에는 신라에도 도교를 전하고자 노력한 흔적을 여기저기서 보게 되는데, “당나라 사신이 <도덕경> 등을 보내와 왕이 예를 갖추어 받아 들였다경덕왕과 충담사 그리고 표훈대덕조 모두의 기록은 그 한 예에 불과하다. 사신으로 오고 가는 국가의 공식적인 교류에서 도교가 전면에 등장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P261. 그러나 실제 이 독서삼품과는 그다지 널리 활용되지 못하였다. 역시 기득권 층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기울어 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기란 차라리 새로운 나라를 열기보다 더 힘든 일이다. 우리는 그 같은 예를 고려조에 와서 공민왕, 조선조에 와서 영 정조 같은 이에게서 다시 확인한다. 신라의 원성왕은 그들과 비슷한 처지의 왕이었다.

독서삼품과! 역사문제에서 봤던. 너무나 반갑다.

 

왕이 되는 자의 금도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P267. 경문왕은 겉으로 보기와 다르게 결코 순탄치 않은 왕 노릇을 했는지 모른다. 그 자신 아무리 덕을 갖추었다 한들, 이미 시대가 급격한 소용돌이 속에 빠졌는데, 늘 행운만 따르기를 바랄 수는 없었다. 대단한 능력을 타고나서 어떤 고난이라도 헤쳐갈 사람이라도 시대의 운이 뒷받쳐 주지 않으면 대체적으로 결과는 비극을 향해 간다. 그래서 운명적으로 소용돌이의 중심에 던져진 사람은 그 세계관이 비극적이다. 경문왕이야말로 그런 비극적 세계관의 주인공이다.

뱀을 이불 삼아 자야했던 사람, 시중드는 내시들뿐만 아니라 부인 조차 모르게 감추어야 했던 긴 귀를 가진 사람 그것은 곧 자신의 고민을 오직 스스로 혼자 지고 가야하는 고독한 이의 슬픈 초상이다.

 

나라가 망하는 징조

 

달도 차면 기운다

 

P270. 무릇 세 치 혀를 함부로 놀려 죽음을 스스로 불러들인 이가 여기 무당 하나뿐일까? 딴에는 정직하고자 애쓴 보람 없이 비명횡사하고 말았지만, 어련히 그렇게 진행될 일에 토를 단 것도 부질없어 보인다. 무엇이 올바른지 판단하지 못하는 자에게 옳은 충고란 쇠귀에 경 읽기도 아니다.

 

P271. 나라가 망한다는 사실보다 실로 더 억울한 일은 따로 있다. 백성이야 어차피 어떤 나라가 서도 백성, 제 정권 지키자고 혈안이 된 자들에게 당하는 백성의 희생을 우리는 진정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이른 눈으로 상징한 것

 

P272. 그러나 일연은 사건의 기록보다는 이른 눈이라는 이상 징후를 통해 한 사회의 종언을 증언하고 있다.

시절은 봄이 오고 여름이 왔으되, 어지러운 세상은 뜻밖에 펄펄 휘날리는 눈 속에 잠겨간다.

 

권력다툼 속에 인재는 죽고

 

P275. 한편 왕의 입장에서는, 이제 효용 가치를 넘어 또 다른 위협세력으로 떠오른 장보고를 다른 신하들이 견제해 주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배반과 배반, 속임과 속임이 난무하는 어지러운 말년이다.

 

P276. 염장은 한 때 장보고와 같은 편으로 신무왕의 반란을 도운 사람이다. 그런 그가 장보고를 죽이는 일에 앞장선다. 거기에 입신양명을 꿈꾸는 자의 야심 밖에는 아무런 목적도 보이지 않는다.

 

빛나는 조연, 처용

 

P281. 처용은 정말로 용의 자식인가? 문면의 기록을 그대로 믿을 수 없어 갖가지 해석이 나왔는데, 앞서 말한 무속적인 것 외에도 지방 호족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지방 호족의 자식을 서울에 볼모로 잡아두는 기인 제도가 신라에 있었거니와, 왕이 울산에 간 것이 모종의 정치적 사건 때문이라면, 일이 해결되고 난 다음 자식을 데리고 가는 것은 전형적인 기인 제도의 볼모다. 한편 아라비아 상인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P284. 신라 헌강왕대는 사치가 극성했지만 바야흐로 기울어 가는 시기였다. 그 같은 사회는 필연코 성적으로도 문란하기 마련, 엄연한 유부녀가 외간남자와 정을 통하는 이 장면에서 당시의 사회상을 읽을 수 있다.

 

나라가 망하는 징조

 

P286. 나라가 망하는 징조를 무슨 신나는 일이라고 장황히 적었을 리는 없다. 그러나 기미를 보아 사리를 판단하는 법이다. 시절은 바뀌었어도 사람이 세상에 사는 한 언제든 잘 되고 잘못되는 징조가 따라다니기 마련이다. 거기서 기미를 읽어내라는 간절한 충정으로 보인다.

 

지는 해 뜨는 해

 

마지막 희생자

 

P287. 다시 말하지만 한 나라의 운명이 그렇게 되었다는 것뿐이지, 불난 집에 부채질하자는 것도 아니고, 일연이 신라의 멸망 과정을 그려나가는 <기이>편의 후반부를 신나게 읽을 일 하나 없다. 오히려 일연의 붓끝은 담담하면서도 상징적이다. 그가 누구보다 신라를 아끼는 사람이었음을 모르지 않기에 하는 말이다.

 

P287. 신라의 멸망 원인 가운데 무엇이 선두에 설까? 나는 무엇보다 골품제의 동맥경화 현상을 내세우고 싶다. 중앙과 지방의 중요한 관직을 성골과 진골들로만 채우는데, 그들이 나라 일을 맡아 해낼 능력도 의지도 부족해졌을 때, 신라는 탄력성을 잃고 둔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새로운 피가 수혈되지도 못했다. 원성왕의 독서삼품과가 실패로 돌아간 데서 우리는 그 같은 현상을 목격한 바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망조는 너무나 똑같다.

 

준비되는 새 나라

김부대왕이라는 칭호

 

P297. 사실 김부대왕조의 이 첫 부분에서부터, 구원병을 보내고 조문을 하고, 주인공은 왕건으로 바뀌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두 번째 대목을 왕건의 경주 방문으로 설정한 데서 더 분명해진다. 견훤의 무자비한 침공과 대조되는 상황을 극명하게 부각시키는 것이다.

 

비운의 왕자

 

P302. 경순왕이 항복할 때 향기롭게 장식된 마차가 30여 리에 길을 가득 메우고, 태조는 바깥까지 나가 맞이하여 동쪽 한 구역의 궁을 내려 주었으며, 큰딸 낙랑공주를 아내로 삼게 했다는 대목에 이르면, 두 아들의 출가는 한층 측은해 보이기까지 한다. 아버지인 경순왕은 새 나라 고려의 부마가 되어 40여 년을 더 살다가 죽었는데 말이다.

인물됨이 원래 좋은 것인지, 아니면 역사는 승자의 것이기에 포장했는지

 

천 년 사직은 막을 내리고

 

P304. 그러나 신라 왕조를 마감하는 김부식의 사론은 그가 감당하고자 했던 시대적 사명과 자신의 논리가 잘 들어가 있는 문장이다. 그에게는 그만의 고민이 있었다. 대체적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관점에서 내리는 평가란 또 하나의 주관적 주장이 될 뿐이다.

 

백제와 일본, 그 근친의 거리

 

아쉬운 백제의 역사

백제 고도의 대표는 부여가 아니다

따뜻했을 것 같은 백제의 풍속

곤지왕자로부터 시작하는 백제와 일본의 왕계

 

P318. 히미코가 신라나 가야계일 가능성이 큰 데 비해, 응신왕은 백제계일 것으로 보고 있다. 그것은 백제의 근초고왕이 응신왕에게 보냈다는 저 유명한 칠지도의 명문이나, 인덕왕의 무덤에서 발견된 청동거울 등으로 확인된다. 무엇보다 왕인이 일본 왕실의 스승으로 가서 하는 행동은 단순한 글방 선생 정도가 아니다. 최소한 이 때부터 백제가 멸망하기까지 두 나라는 외교 관계 이상의 무엇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P320. 수수께끼는 1971년에 와서야 풀렸다. 사마는 무녕왕의 이름이었다. 공주에게 발굴된 무녕왕릉에서 이 이름을 적은 묘지석이 나왔다. 그러니까 일본에서 청동거울이 나온 지 거의 60여 년 만에 사마라는 이름의 주인공을 알게 되었고, 그로서 계체왕이 무녕와과 형제간임을 밝히는 증거가 되었던 것이다. 무녕왕이 즉위한 것은 501, 2년 뒤에 아직 중앙 정부의 왕으로 오르지 않고 지방의 왕으로 있는 아우가 오래 살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아 보낸 청동거울이었다. 무녕왕이 이토록 아우를 배려한 데는 까닭이 있었다. 무녕왕 자신이 일본의 왕실에서 아우와 함께 살다가, 아버지인 동성왕의 뒤를 이르려 고국으로 돌아왔었다. 아버지를 여의고 멀리 떨어져 고절한 세월을 보내야 할 형제였기에 우의는 두텁기만 했다.

 

백제가 어떻게 일본 왕실을 지배할 수 있었을까

 

P323. 그러나 이는 다시 말하거니와 왕실과 호족에 한정한다. 그로 인해 다수의 인구가 백제인으로 채워졌다 한들 그것으로 한일동족을 말하자면 고구려와 신라 출신이 섭섭하고, 이미 선주민과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 온 세력이 상당했을 것으로 보이는 마련해선, 어느 한 민족만으로 특정하여 결국 그들의 출신지와 동족이 되게 했다는 설명도 곤란하지 않을까?

 

일본의 독립 선언

 

P325. 일본의 왕실이 보다 튼튼한 체계를 갖춘 것은 역시 나라시대였다. 한반도로부터 많은 문화를 받아들이고 드디어 자신들의 특성을 드러내는 시대, 이 때를 아스카 문화라 한다. 이 시기가 앞서 말한 백제계 왕들의 재위 연간이다.

왕실로만 놓고 본다면 일본은 분명히 백제의 식민지였다.

식민지라 함은 경제적 착취가 기본인데, 식민지로 보는 것은 너무 확대해석한거 아닌가?

 

서동은 정말 선화공주를 꾀었을까

 

맹랑한 눈에 맹랑한 자가 보인다

 

P328. 일연이 백제의 이야기 몇 편을 인색하게 배정하면서 하필 서동을 택하고 그가 곧 무왕이 되었다고 말하는, 이야기 속의 서동보다 더 맹랑한 행동 앞에서 망연자실한다. 도대체 역사적 사실과 하나도 맞지 않는 이야기를 짐짓 진지하게 마치 진짜처럼 올려 놓은 그의 의도를 알아 맞추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기야 엉뚱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진짜처럼 둘러댄 게 어디 이 하나 뿐인가? 정말이지 서동만큼 맹랑한 사람은 일연 당신이다. 그러기에 그 눈으로 서동 같은 인물이 보였을 것이다.

 

한 편의 완벽한 드라마

서동과 무왕 그 아슬아슬한 연결

 

P335. 다른 한편, ‘무왕조의 앞뒤 부분은 사실이고, 그 가운데 곧 선화공주와의 사건은 이런 비슷한 유형의 이야기가 들러붙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런 가능성을 <바리데기 설화>와 견주어 가며 설명해 본다.

먼저, 선화공주가 공주의 신분으로 쫓겨난다는 점에서 <바리데기 설화>의 바리공주와 비슷하다. 설화 속에서, 아들을 바란 왕은 줄줄이 여섯 명의 딸을 낳고, 다시 일곱 번째 딸이 태어나자 내다 버리라고 한다. 그래서 바리공주다. 선화공주도 셋째 딸이다. 그가 선화공주라는 이름을 얻고 아버지가 진평왕으로 설정된 것은, 실제 진평왕에게 딸만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미륵보살 쟁탈전 속의 선화공주

 

P342. 신라는 아직 유학승 하나 중국에 가지 못하고 있을 때, 백제는 벌써 많은 승려가 유학을 다녀오고 불상을 들여와, 거기에 자기들의 이름을 넌지시 하나 더 얹어 놓고 있다. 저 유명한 미륵반가사유상이 그 뒤를 잇고, 절정에 와서 미륵사의 창건이 따른다. 불교의 백제화는 신라인의 자기화에 못지 않다.

 

P343. 대체적으로 미륵불은 여성의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미륵이 본디 남자였지만 이렇게 바뀌는 것은, 미륵불이 자비와 영원불멸의 생산을 의미하는 여성적인 성격을 가진 데다 남성인 석가불에 대응하려는 사람들의 의지가 개입되었기 때문이다. 미륵은 자비의 부처다.

 

견훤, 비운의 영웅

 

백제 땅에서 나온 마지막 왕

3대에 걸친 물고 물리는 불화

 

P350. 설화 속에서 커다란 지렁이란 곧 여자가 남몰래 정을 통한 사내일 터인데, 서동의 경우처럼 용이 아닌 것으로 보면 그만한 지체는 아니지만 뭔가 남달랐을 사내의 영상이 떠오른다. 곧 농사꾼으로 출발하여 한 지역의 장군까지 올라 선 아자개의 총각 시절 모습이다.

사실 지렁이의 아들이라는 것도 승자인 고려입장에서 쓴 것 아닐까?

 

호랑이가 키운 아이

 

P353. 그러나 오랜 싸움은 민심을 얻는 자가 이기는 법이다. 견훤은 제 힘만 믿고 오만스럽기 짝이 없어, 갈수록 민심을 잃는 편이었고, 왕건은 그렇게 떨어진 민심을 주워담아 자기편으로 만드는 데 능했다. 아마도 그 결정적인 사건은 견훤의 경애왕 살해일 것이다.

 

편지로 싸운 한 판

가엾은 완산 아이

라이벌에게 의지한 마지막 생애

 

P361. 술을 빚어 마시다가 감시하던 군사 30명을 취하게 만들고는 도망을 쳤다. 그리고 오랫동안 적이었던 왕건에게 더러운 목숨을 부지하러 갔다. 왕건은 그가 지닌 성품대로 부하들을 보내 맞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자식에게 당한 배신의 쓰라린 상처를 안고 온 이 노장이 도착하자, 자기보다 10년 위라고 해서 그를 높여 상보라고 했다. 상보는 경순왕에게도 주었던 직함이다.

 

신비의 왕조, 가야

 

인멸된 가야사

 

P365. 그러나 가야를 그냥 건너 뛸 수 없는 이유가 일연에게는 있었을 것이다. 허황옥이라는, 불교의 발상지 인도로부터 멀리 시집은 여자, 이 땅에 불국토의 신성함이 서려 있다고 믿는 일연으로서 이 여자의 일거수일투족은 소홀히 대하지 못한다. 그런 그에게 찾아든 좋은 자료가 바로 가락국기.

 

P369. 먼 세월이 흐른 다음, 그런데도 가야의 사적을 적겠다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 지금 우리로서는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원 기록자는 스스로도 감격스러운 듯 이렇게 말한다.

 

P371. 하늘로부터 내려온 여섯 개의 알, 이야기의 골자는 신라의 박혁거세나 김알지의 탄생을 알리는 대목과 매우 닮은, 남방계 그대로다. 다만 여기에 이색적인 것 한 가지가 노래다.

이 노래를 오늘날 우리는 <구지가>라 부른다. 이는 제정일치시대의 신을 맞이하는 의례에서 사용된 무가일 것이 분명하지만, 흙을 파면서 발을 구르며 불렀다는 기록에서 민요 가운데 노동요가 될 수도 있다.

 

왕의 밀월 여행은 4일간?

바사석탑으로 풀어 보는 왕후의 정체

 

P379. 여기 나온 <본기>가락국기를 말한다. 그런데 1970년대부터 가락국 허 황후의 비밀을 캐러 나선 호사가들이 있었다. 그들이 주목한 두 가지는, 석탑의 자질을 분석하는 것과 왕후사의 불당 정면에 그려진 물고기 두 마리 그림의 근원을 캐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이 두가지가 남방계 특히 인도로부터 유래하는 돌이요 그림임을 증명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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