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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의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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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31일 10시 46분 등록
I. 저자에 대하여

1.일연
1214년(고종 1) 해양(海陽: 지금의 전라남도 광주)에 있던 무량사(無量寺)에서 학문을 익혔고, 1219년 설악산 진전사(陳田寺)로 출가하여 대웅(大雄)의 제자가 되어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 여러 곳의 선문(禪門)을 방문하면서 수행하였다. 이 때 구산문 사선(九山門四選)의 으뜸이 되었다.

1227년(고종 14) 승과의 선불장(選佛場)에 응시하여 장원에 급제하였다. 그 뒤 비슬산(琵瑟山)의 보당암(寶幢庵)에서 수년 동안 참선에 몰두하였고, 1236년 10월 몽고가 침입하자, 문수의 계시로 보당암의 북쪽 무주암으로 거처를 옮겨 깨달음을 얻었다. 이 해에 삼중대사(三重大師)의 승계(僧階)를 받았고, 1246년 선사(禪師)의 법계(法界)를 받았다.

1249년 남해의 정림사(定林寺)에 머물면서 남해의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 작업에 약 3년 동안 참여하였다. 1256년 윤산(輪山)의 길상암(吉祥庵)에 머물면서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 2권을 지었고, 1259년 대선사(大禪師)의 승계를 제수 받았다.

1261년(원종 2) 원종의 부름을 받고 강화도의 선월사(禪月寺)에 머물면서 설법하고 지눌(知訥)의 법을 계승하였다. 1264년 경상북도 영일군운제산(雲梯山)에 있던 오어사(吾魚寺)로 옮겨갔으며, 비슬산 인홍사(仁弘寺)의 주지가 되어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1268년에는 조정에서 베푼 대장낙성회향법회(大藏落成廻向法會)를 주관하였다.

1274년 그가 인홍사를 중수하자 원종은 ‘인흥(仁興)’으로 이름을 고치고 제액(題額)을 써서 하사하였으며, 비슬산 동쪽 기슭의 용천사(湧泉寺)를 중창하고 불일사(佛日寺)로 고친 뒤, 「불일결사문(佛日結社文)」을 썼다.

1277년(충렬왕 3)부터 1281년까지 청도 운문사(雲門寺)에서 살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켰다. 이 때 『삼국유사』를 집필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1281년 경주에 행차한 충렬왕에게로 가서, 불교계의 타락상과 몽고의 병화로 불타 버린 황룡사의 모습을 목격하였다.

1282년 충렬왕에게 선(禪)을 설하고 개경의 광명사(廣明寺)에 머물렀다. 다음 해, 국존(國尊)으로 책봉되어 원경충조(圓經冲照)라는 호를 받았으며, 왕의 거처인 대내(大內)에서 문무백관을 거느린 왕의 구의례(摳衣禮:옷의 뒷자락을 걷어 올리고 절하는 예)를 받았다.

그 뒤, 어머니의 봉양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1284년에 타계하자, 조정에서는 경상도 군위 화산(華山)의 인각사(麟角寺)를 수리하고 토지 100여 경(頃)을 주어 주재하게 하였다. 인각사에서는 당시의 선문을 전체적으로 망라하는 구산문도회(九山門都會)를 두 번 개최하였다.

1289년 손으로 금강인(金剛印)을 맺고 입적하였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혼구(混丘)와 죽허(竹虛)가 있다. 저서로는 『화록(話錄)』 2권, 『게송잡저(偈頌雜著)』 3권, 『중편조동오위』 2권, 『조파도(祖派圖)』 2권, 『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 3권, 『제승법수(諸乘法數)』 7권, 『조정사원(祖庭事苑)』 30권, 『선문염송사원(禪門拈頌事苑)』 30권, 『삼국유사』 5권 등이 있다.

2.사진작가 양진
양진은 1966년 대전에처 태어났다. 연세대 금속공학과 졸업하고 고운기씨와 함께 ‘삼국유사’ 등의 사진 작업을 했다. 사람과 자연을 테마로 한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로 활동 중이다. 

책을 읽는 동안 그의 다음 사진이 궁금했다. 어디선가 본듯하고 이런말하기 그렇지만 나의 사진찍는 스타일과 비슷한 느낌의 사진들. 그의 사진은 정말 따뜻한 감성을 품고 있는 듯 했다. 나도 카메라하나 매고 식구들과 훌쩍 떠나고 싶게 만들었다. 그의 사진을 더 찾아봐야겠다.


II. 마음을 무찔러 오는 글귀

P.119
문무왕이 '나라를 지키는 큰 용이 되겠다'고 한 데서도 적을 따지자면 일본만이 아니었고, 아들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지은 절 감은사에 대해서 일연은,
  • 왜적뿐만이 아니라 '백성을 보살핀다'라는 부분에 촛점을 맞춘듯 하다. 리더가 해야 할일에 대해 이야기 하는거 같다. 리더는 군림해야 하는게 아니라, 함께 살 일을 고민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주는 일이어야 한다. 다른 힘을 빌어서라도 막고 싶었던, 보살피고 싶었던 이야기가 마음에 닿는다. 

P.121
견훤의 탄생 설화는, 가까운 일본의 백제 영향권 아래의 지역에서 유포된 설화와 매우 비슷한 점을 보여, 설화를 통한 이동 경로를 추정하는 데도 흥미로운 자료가 된다.

P.125
봄꽃이라면 뭐든 아름답다 하나 복사꽃을 따를 만할까? 희다면 희고 붉다면 붉은 꽃,
  • 아름다운 표현이다. 친구 진필의 시가 생각난다. '복사꽃보다 빨간 사랑이 ...'라고 했던 그 시구절.

P.134~135
"그러면 네가 긴 실을 바늘에 꿰어, 그의 옷에다 꽂아 두어라."
딸이 그 말대로 했다.
다음 날 북쪽 담장 아래에서 그 실을 찾았다. 바늘은 커다란 지렁이의 허리에 꽂혀 있었다. 뒤에 임신을 하고 사내 아이를 낳았는데, 나이 열다섯 살에 스스로 견훤이라 불렀다.
  • 지렁이의 아들 이었군. P 121과 연결해서 볼 것

P.134
대체적으로 사람들의 소박한 소망에 초점을 맞추면, 설화가 지닌 내적 의미를 알게 된다. 세상에서 무서운 것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어떤 조화다. 조화를 부리는 것은 귀신이다. 그러므로 귀신을 마음대로 부릴 수만 있다면 공포는 사라진다. 어쩌면 귀신의 세계를 한 손에 움켜쥐고 있는 듯한 이 이야기가 역설적으로 귀신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는 듯하다.
  • 두려움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 부터 시작한다. 영화 미스트가 참으로 어이없는 영화였음에도 공포스럽게 다가온건 '도대체 저것이 무엇이냐?'라는데서 출발했다.

P.135
무왕의 어머니는 과부였는데, 서울의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다가 그 못의 용과 정을 통해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커다란 지렁이와 연못의 용은 어떤 유사성이 있다. 이 의미를 밝히는 일 또한 뒤로 미뤄두자.
그런데 밤에 찾아오는 손님으로서 기이한 남자, 그와의 통교(通交) 그리고 사내아이를 낳는다는 큰 줄거리는 닮아 있다. 전형적인 야래자 설화인 것이다.

P.137
밤에 찾아오는 손님은 보통 손님이 아니다. 아무에게나 찾아오지도 않는다. 그것은 적어도 왕의 권위를 가지고 더 크게는 신탁의 임무를 띠고 나타나, 구물구물 살아가는 이 땅의 중생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간다.

P.140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 는 말씀은 옛 유대 성인의 입을 통해 나왔지만,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그것은 진리다. 최소한 한반도에서 신라는 그 말씀이 진리임을 입증한 나라였다.

P.144
신라 불교의 힘은 무엇보다 먼저 있었던 토착 신앙을 버리지 않고 포용해 간 데서 더욱 커진다. 불교가 먼 나라에서 전래된 이방종교가 아니라, 이미 전세에 인연을 마련한 우리 종교라고 생각한 신라인들의 본지수적. 불국토 사상은 바로 토착 신앙을 저버리지 않는 밑바탕이었다.

P.149
힌트는 어디선가 주어져 있는 법이다. 그것을 찾고 못 찾고는 지혜의 눈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에 달렸다. 어떤 점에서 진지왕은 영민한 사람이다. 

P.150
비록 수용이 늦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절저히 자기화 되어 정착되었으므로, 생경한 외래 사조에 휘둘리지 않았다.

P.152
승려의 입장으로 실생활에 필요한 인륜 법칙을 만들어 낸다는 것 자체가 본디 불교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것을 부자연스럽게 생각하지 않은 것이 신라 불교다.

P.159
흔히 그 때를 떠올리는 사람드의 말처럼.
  • 좋은 표현이다.

P.160
영화배우 문희가 김유신의 동생이요. 김춘추의 부인인 문희와 자꾸만 오버랩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 처음에는 몰랐는데 뒷부분을 읽다보니 안타까운 마음이 닿아서 일꺼란 생각이 들었다.

P. 160
역사는 충신들이 만들어 낸 역사인지 모른다.

P.166
오줌을 누는 꿈 이야기가 왜 좋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이야기는 사실 여기에만 실린 독점물이 아니다. 『고려사』의 첫 부분, 왕건 집안의 내력을 소개하는 대목에 뜻밖에도 이와 똑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 오줌싸는 꿈은 좋은 꿈이군.

P.169
김유신은 가야 출신이다.(중략)
유신에게는 치명적인 콤플렉스였다.
일제시대 때 최재서가 그린 김유신의 모습이란 바로 망국민의 콤플렉스를 안고 살아가는 번민에 찬 지식인이다. 그것은 곧 최재서 자신의 의식이 투영된 분신이었다.

P.173
사실 김유신의 나라에 대한 충성은 누구에게도 견줄바 아니다. 힘으로 안되면 지략으로, 지략으로 모자라면 신술을 써서라도 주어진 일을 해내고야 마는 그였다.
  • 그만큼 절실했고 지키고 싶은 것과 하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P.175
흥무대왕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기까지 했겠으나, 살아서 영화도 그에 못지 않았다.
  • 시호가 내려진것이지 실제 왕은 아니었구나.

P.176
문희는 오라비의 어떤 계획에 따라 춘추와 맺어진 사이가 아닐까? 어쩌면 법민을 낳고 정식 결혼을 하기까지는 많은 시차가 있지 않을까?
  • 김유신의 의도는 있었을지 모르나 남녀가 사랑하는 것은 당사자들의 몫이 아닐까.

P.178
신라의 삼국 통일을 말할 땜녀 언제나 태종 무열와 김춘추와 태자각간 김유신을 들지만, 실질적인 통일의 주역은 문무와 법민이라 해야 옳을지 모른다. 백제가 멸망한 663년 이 문무왕 3년이요, 고구려가 명망한 668년의 문무왕 8년이다.
물론 통일의 위한 모든 기반을 김춘추와 김유신이 마련했으므로, 문무왕은 다만 그것을 이어 마무리한 정도로 볼 수 있지만 말이다.

P.189
상징의 핵심은 고장난명 이었다고 해야 할까? 천하를 상서롭게 다스리고 화평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누구나 같다. 그런 소망의 결정이 피리로 상징되어 나오는 것이다. 문무왕은 바다를 지키는 용이, 김유신은 하늘을 지키는 별이 되어, 신라와 거기 사는 백성을 영원토록 평안히 해준다는 믿음 또한 거기 가세한다.
그것이 믿을 수 없는 괴이한 일인들 어떠랴. 당대의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그런 믿음 위에서 마음을 하나로 하여 살아가는 일 자체가 중요할 뿐이다. 그것이야말로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배’인지 모른다.

P.196
사마천의 사기에 ‘교토사주구팽’ 곧 토끼를 잡고 나면 사냥개를 요리해 먹는 다는 말에서 유래한 권력의 비정한 뒤통수 치기를 나타내는 이 말은 이미 비유도 아니다. 권력을 잡은 자의 마무리 과정에서 밀려날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은 모두 이 한마디에 쓸쓸한 제 인생을 깊은 한숨과 함께 무상한 세월로 돌려보냈다. 

P.210
화랑 출신들의 쓸쓸한 노년이 숨어 있다.
  • 정말 몰랐던 사실이 이런것이었구나. 토사구팽

P.270
무엇이 올바른지 판단하지 못하는 자에게 옳은 충고란 쇠귀에 경 읽기도 아니다.
  •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을 변화시키기는 정말 어렵다. 그리고 스스로를 의심해 봐야 한다. 

P.279
염장은 한때 장보고와 같은 편으로 신무왕의 반란을 도운 사람이다. 그런 그가 장보고를 죽이는 일에 앞장선다. 거기에 입신양명을 꿈꾸는 자의 야심밖에는 아무런 목적도 보이지 않는다.
  • 그래봤자. 허망한 것을. 야심으로 죽인것일까? 시기심으로 죽인것일까? 진짜가 궁금하다.


P.284
(처용가의 부분에서)여기서 우리는 일연의 기술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신라 헌강왕대는 사치가 극성했지만 바야흐로 기울어 가는 시기였다. 그 같은 사회는 필연코 성적으로 문란하기 마련, 엄연한 유부녀가 외간 남자와 정을 통하는 이 장면에서 당시의 사회상을 읽을 수 있다.
  • 그러한 상징성이 있는거구나.

P.287(+)
신라의 멸망 원인 가운데 무엇이 선두에 설까? 나는 무엇보다 '골품제의 동맥경화 현상'을 내세우고 싶다. 중앙과 지방의 중요한 관직을 성골과 진골들로만 채우는데, 그들이 나라 일을 맡아해낼 능력도 의지도 부족해졌을 때, 신라는 탄력성을 잃고 둔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새로운 피가 수혈되지도 못했다.

P.288(++)
그러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아쉬워한들 무엇하랴.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무엇보다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고 적재적소에 등용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있는 인재마저 죽이는 상황이 반복 될 때, 거기서 우리는 한 나라의 멸망을 명확하게 예언할 수 있을 뿐이다.

P.302
백성의 입장에서야 누구의 백성이 된들 무슨 상관이랴? 더욱이 넘쳐나는 새로운 힘으로 나라를 잘 이끌어 백성의 삶이 더욱 윤택해질 교체라면, 어느 개인의 사유물처럼 정권을 휘둘러 무고한 희생만 초래하는 것에 비길 수 없다.

P.309(+)
우리네 수학여행이 늘 그렇듯이, 대충대충 견문과 불편한 잠자리가 원래의 목적을 대신하는 것이어서...
  • 그래 진짜 그랬다. 그래도 그때의 어두웠던 고등학교 수학여행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서 내겐 경주가 특별한 도시가 되었다.

P.325(+)
한반도로 부터 많은 문화를 받아들이고 드디어 자신들의 특성을 드러내는 시대, 아스카 문화라 한다. 이 시기가 앞서 말한 백제계 황들의 재위 연간이다.

P.330
영웅은 자기가 타고난 비범한 재주로 고난을 극복해 낸다. 서동은 이웃 나라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이려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것으로 그 첫발을 내딛고 있다. 첫발치고는 통도 크다.

P.338
실제 무왕은, 설화 속에서는 장인인 진평왕과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르며 백제를 지켜 낸 왕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이 의자왕대로 늦추어진 것도 무왕의 강고한 힘 때문이었을 것이다. 
  • 허허실실과 외유내강을 보여주는 인물이 무왕이었던거 같다

P.344
승려 혜현은 백제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애써 마음과 뜻을 다해 『묘법연화경』을 외는 일을 하고 기도하여 복을 청하니, 신령스런 감응이 매우 많았다. 겸하여 삼론을 부지런히 닦아 신통력을 갖추기도 했다.
  • 도술이라는 것과 신통력이라는 것이 같은 뜻을 알고 있었는데 왠지 묘한 차이가 있는 거 같다....

P.350
설화속에서 커다른 지렁이란 곧 여자가 남몰래 정을 통한 사내일 터인데, 서동의 경우처럼 용이 아닌 것으로 보면 그만한 지체는 아니지만 뭔가 남달랐을 사내의 영상이 떠오른다.

P.353(++)
오랜 싸움은 민심을 얻는 자가 이기는 법이다. 견훤은 제 힘만 믿고 오만스럽기 짝이 없어, 갈수록 민심을 잃는 편이었고, 왕건은 그렇게 떨어진 민심을 주워담아 자기 편으로 만드는데 능했다. 아마도 그 결정적인 사건은 견휜의 경애왕 살해일 것이다.
  • 장기간의 싸움의 기술이란 이런것이다. 오래가는 놈이 결국 이기는...

P.358
민심의 향배가 그들의 운명을 가르지 않았던가?
  • 싸움에서 이긴다는 것은 민심을 얻는 것

P.361 (++)
더구나 내가 듣기로 고려의 왕공은 어질고 검소해서 민심을 얻었다고 하니

P.369
가야는 고대 한반도의 남부를 설명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다.

P.384(++)
일연은 고대 삼국의 역사를 불교적 관점에서 바로보고 있다. 불교를 받아들여 어떻게 발전해 나갔는지가 나라의 흥망성쇠와 곧바로 연결된다는 생각이도,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비록 뒤늦게 불교를 받아들였으면서도 그 문화를 화려하게 꽃피운 신라가 역사의 주인공이 될 충분한 자격을 갖춘 나라라고 보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불교의 전래 경위만이 아니라 일연이 가진 역사의식의 일단을 읽게 된다.
  • 불교로 백성을 위로하고, 그 힘으로 다시 일어서고 싶었던 일연스님의 마음

P.396
종교를 처음 전할 때 의술이 따라다닌 것은 동서 고금을 두고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P.435(++)
싸움이나 싸움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천지가 평화로워지는 꿈, 그것은 일연이 구층탑을 보며 꾼 것이다.
  • 384페이지와 연결

P.440
문수보살을 흔히 출가의 보살이라고 한다.(중략)
누구든 수행의 첫 길은 문수보살로부터 시작한다.
또는 문수보살을 비유해서 세상의 어린 아이에게 부모가 있는 것처럼 문수는 불도를 닦아나가는데 부모라고도 했다. 부모는 자식이 홀로 설 수 있도록 돕는 자다. 문수도 성불의 그 같은 절대적 조력자라는 뜻이다. 나아가 문수 신앙은 대체롤 이런 문수 보살의 성격에서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P.444(+)
대체로 성인을 만나는 장면은 이렇게 전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인이 성인인 줄 알고 만난다면 오죽 좋으련만, 우리는 본질을 두고도 늘 외곽만 맴돌며, 손에 잡은 진리를 진리인 줄 모르고 버리는 경우또한 허다하다. 나는 그것을 '우연히 스치는 듯한 만남'이라고 말한다.
  • 지나고 나서야 안다.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던 것을. 사랑도 미움도 모두다...

P.458
분황사는 작은 절이 아니다. 신라의 일곱 군데 성지 가운데 하나로 당당히 자리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원효가 그 생애를 마감한 절로, 그리고 아들 설총이 아버지의 유골을 빻아 소상을 만들고 걸어 둔 절로, 일연은 여러 군데서 이 절을 소개하고 있다.

P.527
산사의 새벽과 새벽과 함께 오는 개명의 순간을 만끽한 바있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그 풍경속에서 나는 원광과 보양과 학일과 일연으로 이어지는 이 절을 세우고 지킨 이들의 숨소리를 드렀다.
  • 왜 글이 평화로워 보일까. 새벽이라는 느낌때문인걸까

P.530
일연은 원효의 생애를 한 마디로 요약했다. 무엇에도 얽매지 않는 사람이라고
  •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사람 나도 한때는 그렇게 살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살수 없다.

P.533(++)
현실주의자란 현실에 매달린다는 말이 아니다. 범박하게 풀어보자면, 현실의 첨예한 문제를 피해가지 않고, 사람의 생에에서 부딪칠 수밖에 없는 문제를 블교의 틀 속에서 이해하고 실천한다는 뜻이다.
  • 현실의 문제를 풀어가려하는 사람-> 현실주의자

P.533
원효와 의상이 중국을 가다 경험했다는 저 유명한 '해골바가지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나오지 않는다.
  • 그렇구나.

P.570
김수남의 「변하지 않는 것은 보석이 된다」
  • 제목도 아름다운 책. 나중에 꼭 읽어보자

P.580
인간의 강인한 의지와 용기도 엄청난 자연의 힘 앞에 맥없이 스러진다. 그러나 그것을 마다 않았던 순례자들을, 일연은 아름답고도 슬프게 추도하는 것이다.

P.637
산신각이라 이름 붙인 건물에서는, 흰 수렴을 길게 늘어뜨린 할아버지가 호랑이 한 마리를 데리고 당딩히 서 있거나 앉아 있는 모습의 그림을 보게 된다.(중략)
산에 절을 두니 그 산을 지키는 신령을 모신다. 그런 까닭으로 절과 호랑이는 한 살림을 하고 있는 모양이 되었다.

P.640
봄바람과 함께 사랑도 오는 것일까?
  • 그럴 수도...

P.658
마애불은 바위에 새긴 불상을 말한다. 바위에 그림을 그리듯이 선으로 불상을 새긴 것은 초기 또는 초보적인 형태고, 약간 도드라지게 파내서 입체감을 살린 것은 좀더 세련된 형태다.

P.704
일연이 삼국유사에 신라 향가 14수를 실어놓은 것에 대해 우리는 더할 나위 없는 고마움을 표해야 한다. 우리 고대 가요 중에 그 정형성을 최초로 획득했으며 지극히 높은 정신 세계를 구축한 이 시가 장르에 대해 비록 편린으로나마 구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오직 삼국유사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니 향가 하나에 머물지 않고 10세기 이전의 시가에 대해서 그렇다. 책 한 권에 실린 단 14수가 천 년의 시가사를 떠받치고 있는 셈이다. 

P.728(++)
우리는 일연을 그 생애의 화려한 경력 때문에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를 존경해 마지않는 것은 무신 정권기와 몽고전란기를 헤쳐가면서 그가 보여 준 삶의 궤적 때문이다. 비록 작은 나라로 힘없는 자의 설움을 당하면서도 그는 민족의 자존심을 염두에 두었던 사람이다. 그것을 그는 불교적 인식 세계에서 불국토사상으로 이었으며, 만년에 군위의 인각사에 거처하면서 정리한 「삼국유사」에 여실히 표현해 놓았다.
  • 백성들을 위로하고 스스로 다시 살아나길 스님을 바라셨을 것이다. 그리고 그 핵심사상은 불교였을 터이고. 비전과 미션의 관계가 명확해 진다.

P.729
평소 꿈꾸어 오던 일 이라는 구절이 의미심장하다. 비록 선종사의 중요한 일면을 차지한다고 한들 자신의 산문과 상관없는 책을 편찬하고자 꿈꾼 그의 뜻은 무엇일까?
  • 윗 부분과 연결


P.742
칠백쪽을 넘나드는 책의 맨 끄트머리에 있는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이 책에 깊이 감명받은 사람이거나, 나를 개인적으로 아는 누군가일 게다. 그도저도 아니면 책 뒤의 ISBN 코드까지 읽어야 직성이 풀리는 흔치 않은 성격의 소유자일 것이고, 어쨌거나 그 간의 내력을 조금 풀어놔야겠다.
  • 이제는 그래야 직성이 풀리는 것 같다. 

P.743
그렇게 3~4년을 쏘다니다가 나는 결혼을 했고, 카메라를 잠시 손에서 놓았다.
그로부터 몇 년 지나, 나는 「삼국유사」 사진 찍기를 다시 시작했다.가족들에게는 미않나 일이지만, 마음이 동하면 그 날로 길을 떠나 혼자 참 많이 다녔다. 다시 읽는 「삼국유사」에서 찾아낸 소중한 한가지, '사랑'을 담아내고 싶었다.
  • 나도 카메라를 꺼내들고 떠나고 싶어진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지 않을 것이다. 내 사랑하는 가족들과 같이 가야지. 그리고 글을 쓰고 사진을 찍어야지.

P.743 
황룡사 터를 배경으로 하얀 별빛과 노란 가로등 불빛에 처연히 빛나던 분황사 당간지주에 서린 원효의 고독한 사랑, 점점이 내리는 눈을 맞으며 서 있는 부석사 석등에 묻어 있는, 온갖 번뇌에도 흔들림없이 제자리를 지켜 내는 의상의 순결한 사랑, 몸통만 남은 깨진 불상을 위해 촛불을 밝히는 촌노의 손끝에 실린 욱면의 순박한 사랑, 낭산 너머로 지는 해를 아쉬워하며 먼발치에서 까치발로 서성대는 익모초에 담긴 지귀의 짝사랑
  • 사진에 정감이 묻어나는건 그 사람의 마음이 묻어난다는걸 이해합니다

P,743~744
이런 저런 사랑을 찾아 다니다 며칠 만에 집에 돌아오면 초롱초롱한 아이들과 아내는 내가 사진에 담으려고 했던 그 어떤 사랑보다도 더 큰 사랑으로 나를 반겨주었다. 내가 찍어온 평범한 사진에도 무한대의 감동을 보이며 힘을 실어주는 것도 아내와 딸의 몫이었다.
  •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그이전에 보이는 것과 다르리로다' 사진가의 사랑이 느껴진다.


III. 내가 저자라면

1. 목차에 대하여
1)아쉬운 점

2. 보완이 필요한 점
1)아쉬웠던 부분
  • 본래의 삼국유사를 보여주고 해설해 주는 책도 나왔으면 좋겠다.
2)이해가 안된 부분

3. 이 책의 장점
  • 사진 한컷 한컷이 정말 정성을 들인 사진같다. 사진으로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는 느낌이다. 
4 내가 저자라면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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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7 12:11:58 *.18.218.234

역시 이번 단상도 좋네요.  근데 친구 중에 시인이 있어요??

양진씨 사진 보면서 저도 쏭스 생각했어요. 평소 칼럼 쓸 때도 사진이나 음악이랑 같이 올리시쟎아요.

사진이 실린 글을 쓰시면 따듯함이 묻어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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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9 00:19:09 *.226.22.184

시를 쓰지 않는 시인이 있어요. 술만 마시는데 연락을 하지 않죠.

사진때문에 이 책이 참 마음에 들어요.

감히 제가 찍은 사진과 비슷하다고 말하고 싶네요.


사진에 정감이 많이 묻어나서...

아래사진은 2004년에 찍은 경주의 어느곳에서 ...


130920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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