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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31일 11시 58분 등록

11기 연구원 장성한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고운기 지음 / 양진 사진

현암사

 

 

1. 저자에 대하여

 

일연스님 관련

 

옥녀봉 자락에 자리 잡은 인각사는 신라 선덕여왕 11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신중동국여지승람 27권의 흥현 조에는 인각사지 유래를 이렇게 적고 있다. ‘인각사는 화산에 있으며 동구에 바위벼랑이 우뚝한데 속전에 옛날 기린이 이 벼랑에 뿔을 걸었으므로 그렇게 이름 했다 전한다.’ 이 절 인각사는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저술하고 입적하기 전까지 5년 동안 머물렀던 절이다.

 

일연은 행정구역상 경북 경산시 압량면 옥곡동에서 1206(희종 2)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언필이었고 어머니는 이씨였다. 아버지가 특별한 벼슬을 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훗날 일연이 국사에 오른 뒤 아버지 김언필이 벼슬을 추증 받았고, 어머니 이씨가 낙랑군부인으로 봉해지는데 이는 일연의 집안이 이 지역의 향리층에 속했던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 김언필이 일찍 세상을 떠났고, 일연은 홀어머니 이씨에 의해 길러졌으니 어린 시절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연이 태어나기 전 낙랑군부인 이씨는 어느 날 이상한 꿈을 꾸었다. 태양이 부인의 방에 들어와 그의 몸을 비추었다. 이러기를 사흘 밤, 이씨는 임신하게 되었고, 한여름 6월에 일연이 태어났다. 광명의 상징인 태양에 인연해서 세상에 나왔다는 뜻으로 일연의 처음 이름은 견명이었고 자는 희연이었다. 일연은 뒤에 받은 법명이다.

 

일연은 아홉 살 되던 해 부모의 슬하를 떠나서 속세를 등지고 출가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의표가 단정했으며 엄정한 데가 있고 말이 없었던 일연이 처음 찾아간 절이 해양 무량사였다. 지금의 전남 광주에 해당하는 해양 무량사는 통일신라 말 선종을 도입한 도의선사가 가지산에서 보림사를 창건하고 교리를 설파하면서 시작된 구산선문의 하나로, 우리나라 선종의 뿌리를 이루는 가지산문의 말사로 추정되고 있을 뿐, 정확한 위치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일연은 무량사에서 열심히 공부했다.

 

일연이 정식 승려로 입문한 것은 14세 되던 해 강원도 설악산 진전사에서였다. 대웅 스님을 은사로 정식으로 승려가 된 일연은 이때부터 여러 산사를 순계하며 수도에 힘썼다. 일연이 가는 곳마다 그의 깊은 선리와 높은 법당이 널리 알려졌다. 고종 6년 나이 22세에 선불장에 나아가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상상과에 급제한 일연은 고향에서 가까운 포산(비슬산) 보당암으로 옮겨 수도에 전념했다. 고종 23년 가을 몽고병이 두 번째로 남침하여 전 국토가 또 다시 그들의 말발굽 아래 유린되었고, 그때 일연은 참선 수행하다가 홀연히 깨달음을 얻었다.

 

일연은 사람들에게 오늘에야 삼계가 허깨비나 꿈같음을 알았고, 대지가 털끝만큼의 거리낌도 없음을 보았다고 말했다. 일연은 조정으로부터 삼중대사라는 승계를 받았고, 고종 3년에 선사가 되었으며, 36년에 그때의 실력자 최우의 처남 정안의 요청에 따라 남해 정림사로 자리를 옮겼다. 그때 남해분사도감에서 대장경 간행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되며, 길상암에서 중편조종도위 2권을 간행하였다. 고종 46년에 대선사가 되었고, 임금의 부름을 받아 강화도 선월사에 머물면서 목우화상 지눌의 법을 계승하였다.

 

이후 오어사와 인흥사를 거쳐 임금의 명으로 운문사에 머무르면서 선풍을 크게 일으켰으며, 이때부터 삼국유사를 집필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나이 73세 인흥사에서 역대연표를 간행하였고, 79세에 인각사에서 두 번에 걸쳐 구산문도회를 개최하였다. 84세 되던 해 78일 새벽에 제자들을 모은 후 내가 오늘 갈 것이다라고 말한 후 입적했으며, 그 해 10월에 인각사 동쪽 언덕에 탑이 세워졌고, 6년 후 비를 세웠고 시호는 보각, 탑호는 정조라 내렸다.

 

일연이 생존했던 고려 사회는 최씨 집정기에서 대몽항쟁기를 거쳐 몽고지배 초기로서, 국내외적으로 다사다난했던 시기로 온 국민과 함께 고통을 겪을 수 밖에 없던 시련기였으며, 일연이 삼국유사를 써서 펴냈던 때는 그의 나이가 여든 살이나 되었다. 그 일연을 우리는 그 당시 고구려 불교의 최고 높은 스님으로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나이 들어서 온 정신을 다 기울여 쓴 책 삼국유사(원래는 다섯 권에 책 셋으로 묶여 있었다)의 저자로 기억하고 있다.

 

한편 삼국유사는 일연 개인이 편찬한 역사책이기 때문에 체제와 양식이 자유롭다고 평가받아 왔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일연이 혼자서 집필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삼국사기가 김부식 혼자만의 작품이 아닌 것처럼 삼국유사 역시 그의 제자들과 더불어 자료수집, 필사, 판각 등을 함께 한 공동작업의 결과였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일연은 그가 삼국유사를 지은 사람이라고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

 

삼국유사의 정덕원 마지막 권의 첫머리에 대선사 일연이라는 이름이 발견됨으로써 일연과 삼국유사의 관계를 알았고, 그것마저도 그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존경의 마음으로 그의 이름을 적었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기록된 바에 의하면 일연 스님이 지은 책이 백여 권이 넘는다고 하나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것은 거의 없다. 오늘날 한편에서는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를 사대주의 역사관에 입각하여 편의대로 사료를 없애 버렸다는 평가를 내리고, 삼국유사는 황당무계하고 믿을 수 없는 일들을 기록하여 사료로서 가치가 없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1세기 반의 시간차를 두고 태어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아니었다면 우리들은 우리나라의 고대사회에서 삼국시대까지의 역사와 문화뿐만 아니라 그 시대 민중들의 삶 속으로 자유스럽게 시간 여행을 떠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가능성을 열어 둔 그 자체만으로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우리 민족의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평가되는데 손색이 없을 것이다. 또한 일연 스님은 1980년부터 일기 시작한 우리 것 바로 알기의 일환으로 펼쳐지고 있는 우리 산하와 우리 문화 답사여행의 원조로서 길이 기억될 것이다.

 

- <월간 사람과 산> 2014 4월호 中

 

2.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불교로 보는 역사

 

<흥법> 편의 성격

이 땅에 처음 온 승려 순도

 

P389. 나중 고구려가 도교를 받아들이는 것도 같은 입장에서 설명할 수 있다. 불교를 받아들였는데 도교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 없고, 그것이 고구려 사회의 다양성을 형성하는 쪽으로 발전해 나갔을망정, 멸망의 빌미가 되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비록 일연은 불교적 입장에서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도교랑 불교랑 굉장히 비슷한 면이 많은 거 같은데물론 나야 학문적 깊이가 있는 것이 아니기에 하지만 도덕경을 봤을 때는 정말 비슷한 면이 많은 것 같다. 나 역시 멸망의 빌미가 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

 

백제에 이른 마라난타

상상력, 사실 이상의 사실

 

P394. 순례자의 길은 외교 사절의 화려한 행차가 아니다. 무기를 쥔 군대의 살벌한 행진도 아니며, 이익에 혈안된 장사꾼들의 잰걸음도 아니다. 어떤 깨달음의 숭고한 사명이 조용히 깃든, 세계와 인간이 하나되어 마침내 그 비밀에 눈뜨고야 말 두근거리는 첫 발자국이다.

 

큰 나무의 인고

완고한 신라 사회 속에 뿌린 불교의 씨

 

P399. 봄빛이 아직 두루 돌지 못했을 때 매화는 핀다. 이런 자연의 섭리는 곧 인간 세계의 그것으로 원용되고 있다. 눈 덮인 땅에 봄빛은 돌지 않았지만, 매화꽃과 같은 존재로 모례는 등장한다. 신불이 생명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스런 상황에서 꿋꿋한 믿음을 지킨 그녀다. 이는 고구려나 백제에서 볼 수 없는 신라 불교의 독특한 면이면서, 완고한 신라 사회에 뿌린 불교의 첫 씨앗이었다.

 

순교의 흰 꽃 이차돈

 

법흥왕 이전에 불교는 없었는가

이차돈에 대한 일연의 관심

순교자의 마음

아도의 본마음을 이룬 성자

 

P409. 아도의 본 마음을 이룬 성자, 바로 이차돈이 아도의 순교를 이었다고 본 일념의 혜안에 일연은 손들어 준 것이다. 이는 앞서 잠깐 언급했었다. 신라 불교가 뿌리내리는 데에 치른 값진 희생의 전통, 그것은 곧 아도와 이차돈의 순교다.

 

그 후, 백제와 고구려의 불교

 

P414. 고구려의 후반기에 도교가 번성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적는 일연의 태도는 현저히 불교와 상대적으로 비교하는 입장이다. 나라가 망한 이유가 불교를 멀리하고 도교를 가까이 한 것 때문이라는 결론에서 그 의도는 명백해진다. 물론 그것은 일연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P415. <연개소문의 탄생설화>

짐이 천하의 임금이 되어 몸소 작은 나라를 치러 왔다가 봉변을 당하니,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되겠구나.”

그 때 우상 양명이 아뢰었다.

신이 죽어 고구려의 대신이 되어 반드시 나라를 멸망시키고 제왕의 원수를 갚겠나이다.”

양명이 죽은 다음 고구려에서 태어났다.

이런 내용은 역시 승자들의 역사이기에 이렇게 쓰여진 거겠지? 신라 혹은 고려의 입장에서 쓴 것이기에 뒷맛이 씁쓸하다. 시대적인 배경 역시 이런 내용이 등장한 이유가 된 것 같다.

 

신라의 중심 세계의 중심, 황룡사

 

황룡사의 돌무더기

황룡사는 어떤 절이었는가

 

P421. 왜 그랬을까? 절의 구조라든가, 전체적인 규모라든가, 오늘날 황룡사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 터에 우리가 궁금해 하는 부분이 이것인데, 좀더 자세한 소개가 없는 점 무엇보다 일말의 아쉬움으로 남는다.

 

인도의 아육왕도 이루지 못했던 일

 

P424. 인도의 아육왕도 이루지 못했던 일, 그것은 힘만으로 공덕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태자의 말에 함축된 의미에다, 오직 인연 있는 땅에서만 가능하다면 신라는 바로 그런 인연을 갖춘 곳이라는 자부심이 은근히 배어 있다.

 

정말 아육왕이 보낸 것일까

 

P428. 다소 설명이 장황해졌다. 결론은 아쇼카왕이 보냈다는 불상은, 이 같은 불교의 역사로 볼 때 믿기 어렵다는 말이 된다. 아직 불상이 나오자면 500여 년을 더 기다려야 하는 시점이다.

 

P429. 중국에도 아육왕의 불상을 바다에서 건져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라면 바로 굽타 왕조다. 이 왕조 동안에 인도에서는 배에다 불상을 실어 바닥을 띄워 보내는 행사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불교가 이 땅에 자리잡는 정당성과 당위성을 이런 전설로 기록하려 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불교가 창시된 나라에서 불상이 전달된 것은 필연적으로 이 종교를 우리의 주체사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논리를 성립하기 위해 만든 이야기가 아닐까?

 

황룡사 구층탑의 경우

 

P434. 어쨌거나 신라를 가운데 두고, 중국과 인도의 불교 문화 그리고 가까이는 백제로부터 들어온 기술까지 모두 한 자리에 모인 곳이 황룡사다.

 

그 안타까운 최후

 

문수 신앙의 근거지, 오대산

 

일연과 오대산 그리고 문수보살

중국의 오대산과 한국의 오대산

눈물의 태자

 

P450. 보천이 흘린 눈물은 서러움의 눈물이 아니리라. 도의 경지에 맛을 본 이가 세속으로 돌아가기 싫어했을 뿐이니, 신하들을 따라 왕궁으로 가야 하는 효명이 못내 아쉬운 발길을 돌렸을 것이다.

그러나 효명은 왕이 되어서도 이 곳을 잊지 못한 듯 몸소 와서 절과 불상을 짓고, 공양할 쌀이며 기름 등을 보내기를 잊지 않았다.

 

학의 깃털이 가르쳐 준 것

 

P453. 우리 나라에는 대표적인 적멸보궁이 다섯 군데 있다. 모두 자장이 당에서 가져온 진신사리를 모신 곳인데 그 가운데 하나가 오대산 중대에 있고, 또 하나는 태백 정암사에 있다. 정암사도 자장이 세운 것으로 전해온다.

 

P454. 이것은 하나의 인연이다. 도를 이루려고 해도 이루려는 자의 의지만으로 되지 않음을 우리는 이런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도를 이루려는 일만이 아니다. 무릇 의지만으로 하는 사람의 일이란 얼마나 고달픈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 그렇게 되는 것에 몸과 마음을 맡기는 것, 인연은 그렇게 오는 게 아닐까?

 

작은 절들에 서린 삶의 애환

 

금대암에서 보낸 하룻밤

의지할 데 없는 이들에게 주는 위로와 안식

중생사에 얽힌 이야기

고려까지 이어지는 중생사의 이야기

 

P466. 시주나 걷자고 나온 이야기는 결코 아닐 것이다. 자신들이 믿지 않는 어떤 절대자에 대한 꾸밈없는 흠모는 이런 기적을 낳게 한다. 일연은, 이 시대의 사람들이 이 같은 세계 속에서 살았음을, 우리에게 조용히 전해 주고 있을 뿐이다.

 

일연의 생애와 그 반영으로서 [삼국유사]

 

P470. 더욱이 거기에서 자신은 죽더라도 새끼들은 지키겠다는 어미 꿩의 애타는 모습이 충원공의 마음을 흔들었다. 더 이상 공격을 하지 않는 매의 모습이 더욱 감동적으로 겹쳐졌을 것이다.

나는 이 대목이 모두 놀라웠다. 한낱 짐승으로도 자비를 아는 짐승이며, 욕심을 내자면 한없을 인간으로도 깨우침의 무릎을 꿇을 줄 아는 사람이 어우러진 장면 장면들이다.

한낱 동물들도 자신의 새끼를 지키기 위한 모습을 보고 공격을 멈추고, 사냥을 멈추는데 요즈음 뉴스를 통해 접하는 인간 이하의 부모들을 봤을 때 비통함 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P471. 그 두려운 눈빛을 보고도 총을 쏜 자들은 인간이 아니다. 짐승도 아니다. 정작 누가 총을 쏘았는지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했지만, 양쪽 모두 열렬히 신을 섬긴다는 사람들이 도대체 그 신은 무엇을 가르치길래 그토록 매몰찬 짓들을 하는 것인지, 나는 그것을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흰 달이 비추는 산

 

P473. 간밤 계를 더럽혔으리라 생각하고 비웃어 주려 부득의 처소를 찾아온 박박은 막상 도착해 부득을 보자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다. ‘나는 마음 속에 가린 것이 있어서성인을 만나고도 알아보지 못했다고 시인한다. 변통 없는 원리원칙은 득도의 순간을 막고 말았던 것이다. 부득의 도움으로 남은 목욕물에 몸을 담근 박박도 함께 금빛 보살이 된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라는 사람

저물 무렵에 나타난 아리따운 여인

 

P478. 부득은 놀라며 말했다. “이 곳은 여자가 와서 더럽힐 곳은 아니오. 그러나 중생을 따르는 것도 보살행의 하나이지요. 하물며 깊은 산골에 날마저 저물었으니 어떻게 소홀히 대하리요.” 부득과 박박이 갈라지는 극명한 지점이다. 박박은 하나만 생각했다면 부득은 최소한 둘 이상을 생각한 것이다. 수행자의 초심을 흔들지 않으려는 박박의 태도도 뜻이 있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상황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부득의 태도는 차원이 달라 보인다. 박박의 교조적 외통수와 부득의 현실적 융통성이라고나 할까?

 

밤부터 아침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P480. 그런데 왜 여자의 모습인가는, 일연이 결론 부분에서 여자는 부녀자의 몸으로 나타난 섭화자라 할 만하다. [화엄경]에서 마야부인 선지식이 열한 군데에 살면서 부처를 낳아 해탈문을 환상했다는 것과 같다. 이 이야기에서 여자가 아이를 낳은 숨은 뜻이 여기에 있다고 말한 데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서양의 신화에서도 그렇고 동양, 특히 한국의 신화, 설화에서도 그렇고 아녀자의 모습으로 신들이 나타나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으리라. 생명을 낳는다는 생물학적 특성이 성인을 낳는다거나 혹은 그들의 각성 및 성장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어머니이기 때문이 아닐까?

 

발톱 하나 칠하지 못한 만큼의 차이

시로 완성되는 [삼국유사]

 

P484. 달달박박을 두고 쓴 시다. 여자를 암자에 들여놓지 않겠다는 것은 일편 계를 지키는 출가자의 바른 행동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속에는 이기적인 심성이 도사리고 있다. 이기심은 독선만 키울 뿐이요 자비심이란 찾을 수 없게 한다. ‘남쪽 암자로 가라든지, ‘푸른 이끼 밟은 발이라고 낭자를 몰아친 것이 그 증표다. 계율이 인간보다 앞서는, 그래서 매정하게 보이기만 하는 도의 낮은 차원을 일연은 이렇게 표현했다.

 

낙산사의 힘

 

담으로 쌓아서라도 지켜야 할 곳

 

P488. ‘담을 쌓다라고 말하면 흔히 좋지 않은 뜻으로 쓰인다. 뭔가 외부세계와 단절된 고립의 의미를 넘어, 제 주장에만 골똘한 고집쟁이를 연상시키는 말이다. 그러나 절 주변에 쌓은 담은 고집쟁이의 그것이 아니다. 속된 것으로부터 지키는 어떤 성스러움의 의지라 할 수 있다.

 

진신의 친견담과 조신

의상과 원효의 거리

 

P496. 의상이 치밀하고 정성스럽게 진신을 만나는 과정은 하나의 전범을 보여 주지만, 세상에 사는 보통 사람으로서 우리는 그 같은 경지에 오르기도 어렵고, 그럴 계기도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도의 경지는 참으로 높은 데에만 있지 않고, 우리들의 일상 곳곳에 숨어들어 있음 또한 사실이다. 거기서 우연히 스치는 수많은 만남이야 말로 우리들이 흔히 경험하는 바이다. 다만 끝내 그 정체를 모르고 지나쳐 버리는 경우와 어느 순간 깨닫는 경우로 갈라질 뿐.

 

어머니, 그 먼 나라를 아십니까

수고로운 인생, 일순간의 꿈

 

운문사 이야기

 

<의해> 편에 들인 공력

원광부터 시작한 까닭

원광과 신

 

P521. 좀더 확대해석해 본다면 이 이야기는 신라의 불교 신앙이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민간 신앙과 어떻게 결합하는가를 잘 보여 주고 있다할 것이다.

중요한 점은 여기에 있다. [수어전]은 본디 그런 책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일연의 입장에서 이를 만약 불순하다고 여겼다면 싣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일연은 원광의 전기 속에, 그것도 가장 공을 들였다는 <의해>편의 첫 글에 당당히 넣고 있다. 물론 일연으로서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원광이기에 어떤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막 나가는 비구 같은 이와 달리 원광은 중국에까지 유학하고 수행에 높은 경지를 이룬 사람이다. 그런 그가 생경한 외국 이론으로 무장하여 어려운 말로 떠들지 않고 이 땅의 토착 신앙과 만나고 있다. 일연은 그런 원광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세속오계와 운문사

 

P522. 두 사람이 다른 것이라면 얼마든지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나 산 것을 죽이되 가려 해야 한다는 말만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고 솔직히 묻자, 원광은 이렇게 대답했다.

육재일과 봄과 여름에 죽이지 않는 것, 이는 때를 가림이다. 기르는 동물 곧 말, , , 개를 죽이지 않는 것과, 자잘한 동물 곧 한 번 저미지도 못할 것을 죽이지 않는 것, 이는 대상을 가림이다. 이 또한 오직 필요한 만큼만 하고, 너무 많이 죽이지 말아야 하리니, 이것이 세속에서 좋은 계이다.”

 

운문사, 그 아름다운 이름

 

원효, 해동 불교의 자랑

 

무엇에도 얽매지 않는 사람, 원효

 

P531. 나는 원효를 현실주의 신앙의 구현자로 설정한다. 현실주의란 현실에 매달린다는 말이 아니다. 범박하게 풀어보자면, 현실의 첨예한 문제를 피해가지 않고, 사람의 생애에서 부딪칠 수밖에 없는 문제를 불교의 틀 속에서 이해하고 실천한다는 뜻이다.

 

일연이 가장 잘 알았던 사람

 

P537. 원효 아닌 원효는 무애의 원효였다. 무애의 원효가 지향하는 바는 관념이나 치장으로서의 불교가 아닌 현실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불교였다. 배우들이 노는 도구란 일반 민중들에게 익숙하고 재미있는 것이었으니, 거기에 빌려 어려운 불교의 교리를 쉽게 풀고, 누구나 가까이 하는 불교를 만들었다.

원효에 대해서는 해골바가지 이야기 밖에 없는데, 삼국유사를 통해 굉장히 매력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며, 더 알고 싶다.

 

바보 같은 원효

문 닫힌 분화사에서 추억하는 원효

 

P548. 거추장스런 교의의 탈을 벗어 버리고, 하늘을 괼 아들을 얻으려 세속의 인연도 마다 않은 원효의 큰 뜻을 생각하는데, 아들 설총마저 아비 따라가 버린 분황사는 문만 굳게 닫았을 뿐 이젠 아무도 없다.

 

의상, 화엄의 마루

 

해골바가지도 무섭지 않은 사람

 

P551. “지난밤 잘 때는 토굴이라도 편안하더니, 오늘은 잠들 자리를 제대로 잡았어도 귀신들 사는 집에 걸려든 것 같았네. , 마음에서 일어나 여러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토굴이나 무덤이나 매한가지. 또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모든 법이 오직 앎이니, 마음의 밖에 법이 없는 걸 어찌 따로 구하리요. 나는 당나라에 들어가지 않겠네.”

이런 작은 경험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이 참으로 대단!! 나도 더 일상을 사랑하고 더 집중해야겠다는 각오를 한다.

 

의상이 중국에 간 해에 걸린 수수께끼

의상도 이미 의상이었다

의상이 화엄을 전하다

종남산과 태백산이 똑 같은 봄

 

P565. 그렇다면 왜 법사일까? 원효가 현실주의라면 의상은 교조주의다.

 

P568. 국난을 구하고, 부석사 같은 큰절을 지으며 화엄종을 전한 의상의 활동은 실로 눈부시다. 불도를 닦기로 맹서한 이후 그는 단 한번의 실수도 없이 원칙대로 정진한 사람으로 보인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부처의 화신이라고 했다. 일연이 의상을 법사라고 부른 까닭도 이에 있을 것이다.

 

순례자를 위해 부르는 노래

 

인도에 대한 상념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을까

 

P574. 해동의 작은 나라 신라에서 출발한 순례자들이 아리나발마처럼 처음에는 중국까지만 가려다가 인도까지 가게 된 것인지, 아니면 애당초 인도 여행을 목적으로 출발한 것인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모두 한 번 가서 돌아오지 못했음은 분명하다. 아니 돌아오지 못해도 좋다는 각오가 서 있었을 것이다.

 

인도로 간 여러 스님들

순례자를 위해 부르는 노래

 

P580. 인간의 강인한 의지와 용기도 엄청난 자연의 힘 앞에 맥없이 스러진다. 그러나 그것을 마다하지 않았던 순례자들을, 일연은 아름답고도 슬프게 추도하는 것이다.

 

★ 스승에서 제자로 이어지는 어떤 것

 

삼대에 걸쳐 이어지는 계보

두 가지로 실린 진표의 전기

일연이 지닌 점찰 신앙에 대한 애착

두 번째 전기에서 구체화되는 미륵보살

뼈를 묻은 자리에 솟아난 소나무

 

P596. 무릇 미륵 신앙이란 민중들의 삶에 더욱 밀착되는 법이다. 그들의 어려운 삶 속에 동참하는 데서 이 신앙의 진수가 드러난다.

 

심지가 스승을 잇다

 

P601. 샘은 없었다. 아니 본디 있기는 있었다고 했다. 절에서 만난 스님 한 분은, 수도가 들어오자 샘은 빨래터로 전락했고, 얼마 안 있어서 그나마 절 안팎에 콘트리트 포장을 하면서 묻어 버렸다고, 아무렇지 않은 듯 설명한다.

너무 아쉽다. 만약 역사를 소중히 하고 역사를 알았다면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유명한 관광지나 역사적인 장소에 모텔이 들어서고 맛집이 들어서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밀교의 한 자락

 

어떤 사람이 승려가 되었는가

신라의 밀교 승려

 

P605. 어쨌건 밀교는 현교 곧 일반적인 불교의 세계를 거쳐 최후에 이르는 세계라고 그들은 말한다.

 

첫 밀교 승려 밀본

혜통과 용의 질긴 싸움

명랑의 신인종

 

P620. 앞서 진표나 심지 같은 점찰승들을 주의 깊게 살펴본 것과 함께, 일연이 관심을 가진 불교 사상이 매우 넓다고 하겠는데, 이것은 조선조에 들어와 뜻밖의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나 한다. 노골적으로 불교를 배척하고 나선 조선조의 정치 이념에 따라 한국의 불교사는 잠시 주춤한다. 그런데 이 때 집중적으로 탄압을 받은 쪽이 밀교나 점찰법회 같은 것이다. 이른바 사람들을 미혹시킨다는 부정적인 측면만 강조되었던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불교적 정신이 바탕 된 사회

 

P621. 한마디로 말한다면 <감통>편의 이야기들은 신라 사회가 불교를 받아들인 다음 민간 대중들에게까지 얼마나 체화되었는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P623. 크건 작건 실천의 문제다. 이론으로서 받아들인 철학을 넘어 생활 속에서 움직이는 실천 원리로 불교가 신라 사회에 자리잡혔음을, 우리는 이 같은 짤막한 삽화에서 읽을 수 있다.

실천이 중요하지요!

 

욱면이 염불해서 서방정토로 가다

광덕과 엄장

 

P632. 그렇다면 광덕과 엄장의 성불은 한결같이 여자의 도움을 받은 셈이다. 앞서 소개한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에서처럼 위 예의 여자도 관음보살의 현신이다.

 

P633. 그러나 역시 이 조에서 매력적인 인물은 엄장이다. 그가 우리와 닮아 있기 때문일까, 실수와 무지투성이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다. 그러나 어느 순간, 또는 어느 조력자를 만나 무지와 실수로 가득한 삶을 한 번 돌이킬 기회를 갖는 것, 그것 또한 우리의 모습이다.

 

선율이 살아 돌아오다

 

P636. 절의 재산을 몰래 훔친 여자의 부모, 저승의 일을 알지 못하는 그들은 곧 욕심 가득한 우리 모두를 상징한다. 선율의 환생은 그런 그들에 대한 경계이지만, 사실 살아 돌아와 저승의 일을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욕심이 화를 부르는 줄 알면서도 능청스럽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보통이다.

 

호랑이 처녀와의 사랑

 

절과 호랑이

호랑이 처녀와의 사랑

이어지는 신도징의 이야기

호랑이는 호랑이 굴로

 

무엇이 진정한 믿음인가

 

다시, 우연히 스치는 듯한 만남

 

P653~6. 효소왕은 그에게 공양을 베푸는 것도 자비심을 과시할 기회라 여겨, 한 자리 마련해 주

었다. 자리가 파할 무렵, 왕은 내심 거만하게 다짐해 두었다. 짐짓 놀리는 목소리였다고, 일연은

적고 있다.

어디 가서 임금이 손수 베푼 음식을 먹었다 하지 말게.”

그러자 이 초라한 스님에게서 나온 놀라운 한마디.

임금께서도 진신석가께 공양하였다고 말씀하지 마소서.”

스님은 그 말을 남기고 공중으로 솟아 남쪽으로 가 버렸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놀란 왕은 시종을 시켜 찾게 했는데, 남산 삼성곡의 대적천원에 이르러 바위에 숨어 버렸으니, 그 자리에 남긴 스님의 지팡이와 바리때가 증거물이었다. 이 바위가 바로 비파암이다.

비로소 진신석가가 몸소 찾아온 줄을 안 왕은 비파암 아래에다 석가사를 짓고, 자취를 감춘 곳에 불무사를 지어, 지팡이와 바리때를 나눠 간직했다.

나는 앞서 이런 비슷한 이야기의 모티브를 우연히 스치는 듯한 성인 만남이라 하고, 낙산사 진신을 만나러 가던 원효를 그 예로 들었다. 여기서 효소왕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다.

정작 큰 스승들은 무엇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는 법이 드물다. 진리는 단수한 법이기에 그런 것일까, 유독 진신과의 만남을 중요시 여기는 불교에서 그 만남은 곧 진리의 깨달음을 다르게 표현한 말이겠는데, 단순하기만 한 진리를 전하는 진신은 이렇듯 슬며시 다가온다. 진신인지 알고 모르고는 찾는 이의 책임인 것이다. 기독교의 <성서>에서 예수님은 그것을 도적같이 찾아온다고 말한다.

 

P656. 그렇다면 누가 그 성인을 만나는가? 의상 스님과 같이 치밀하고 정성스런 사람이 만날 것이며 효소왕처럼 겉만 번지르르한 사람은 결코 만나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다니는 큰길가에서 외치듯이 기도하는 무리들을 보고 예수님은 말한다. “하늘나라에 이르거든 하느님은 저들을 결코 모른다 할 것이다.” 그리고 첨언하지 않았는가, 골방에 숨어 자신의 죄를 참회하며 눈물 흘리는 자에게 하느님은 다가올 것이라고.

 

바위 속으로 숨은 뜻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세상

 

P660. 옛날 계빈에 큰스님이 한 분 있었다. 아란야법을 하며 일왕사에 이르렀다.

절에서는 큰 법회가 열리고 있었다. 문지기가 그의 옷차림이 초췌한 것을 보고, 문을 닫으며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이처럼 여러 차례 초라한 옷차림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자 다른 방법을 썼다. 좋은 옷을 빌려 입고 온 것이다. 문지기가 보더니 막지 않고 들여보냈다.

자리를 차지한 다음, 여러 가지 좋은 음식이 나오면 먼저 옷에게 주었다. 여러 사람이 물었다.

어째 그러시오?”

내가 여러 차례 왔으나 그 때마다 들어오지 못했소. 이제 옷 때문에 이 자리를 차지했으니, 여러 가지 음식이 나오면 그것을 옷에게 주어야 마땅하지요.”

 

경흥이 우연히 성인을 만나다

저무는 사회 속의 고민

 

P667. 경흥이 비록 국사라는 높은 위치에 있어서, 말을 타고 다닌들 그다지 흠이 될 일은 아니겠으나, 그 본연의 신분이 승려이므로 스스로 경계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다른 관료들처럼 위엄하게 행차하는 풍경은 도저히 덕이 되지 못할 일이요, 그것 하나로 끝나지 않고 무릇 그의 몸짓 하나하나가 그런 데 바탕을 두고 있다면, 진정한 구도자의 길과 사표가 되는 데서 멀어지는 것이리라.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숨어 사는 이의 멋

 

숨어 사는 것의 뜻

 

P672. 불교가 아직 사회의 전면에 있었을 때, 승려들의 역할 또한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쪽이었다. 그러므로 승려라면 누구나 피세은거하지 않느냐는 생각은 불교의 역할이 변한 오늘날의 관념이다.

 

혜현이 고요함을 구하다

 

P674. 헛된 명성을 만들어서라도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자 하는 것이 세상 인심이다. 혜현은 그가 이룬 높은 경지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는데도, 도리어 거기서 달아나 홀로 지냈으니, 정반대의 경우라고나 할까?

 

낭지와 포산의 두 성인

양손 스트레이트에 나가떨어진 연회

 

P686. 숨되 숨는 것이 아니요. 드러나되 드러난 것이 아니라는 불교의 변증법적 피은의 논리란 이런 것이 아닌가 한다.

 

불교가 보는 효도

 

효심의 결정편

 

P690. 그의 어머니에 대한 일연의 향념은 신앙 그 자체다.

나 역시도 어머니는 나에게 신앙이다. 내 몸에 어머니를 위한 노래가 있는 것과 같구나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

 

P691. “어머니가 예전에는 거친 밥을 먹으면서도 마음이 누그럽고 편했는데, 이즈음은 향기 나는 좋은 밥인데도 턱 걸리며, 찌르는 듯 마음이 편안하지 않으니 어쩐 일이냐?’고 물었지요. 여자가 사실대로 말하자, 어머니는 통곡하고 여자도 탄식할 밖에요. 다만 배불리 모시겠다는 생각만 했을 뿐, 편하게 못해 드린 것이었습니다.”

지은의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의 말이다. 어머니는 비록 배불리 먹었다고는 하나 왠지 마음이 편하지 않았던 것이다. 전하는 사람도 지은이 어머니를 편하게 모시지 못한 결과를 탓하고 있다.

부모가 이렇다. 자식의 마음을 듣지도, 보지도 않고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냥 느끼는 것이다. 위대한 어머니!

 

P692. 이런 관점에서라면 손순 또한 지나쳤다. 이미 다 산 목숨, 이제 굶어 죽은들 여한 없을 할머니는 차라리 손자의 창창한 앞날을 위해 희생할 마음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손순에게는 어머니인 할머니의 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이 오히려 불효가 아닐까?

 

두 세상을 산 사람

진정 스님, 일연의 초상화

 

P701. 진정은 조심스럽게 제 속에 있는 말을 꺼냈다. “효도가 끝나고 나면, 꼭 의상법사에게 들어가 머리를 깎고 도를 배우려 합니다.” 효도가 끝난다 함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이라는 뜻일 게다.

 

부처님의 법을 만나기는 어렵고 인생은 짧은데, 효도를 마친 다음이라니? 그건 너무 늦다. 내가 죽기 전에 도를 깨우쳤다는 소식을 듣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머뭇거리지 말고 빨리 가거라.”

어머님은 많이 늙으셔서 오직 제가 옆에서 지켜야 합니다. 이 일을 놓고 출가라니요, 어찌 차마 그러겠어요?”

아니다. 나를 위한다고 출가를 못하다니. 그건 나를 지옥 구덩이에 빠뜨리는 일이야. 비록 살아서 삼뢰칠정으로 나를 모신들 어찌 효도라 하겠느냐? 나는 남의 집 문 앞에서 옷과 밥을 빌어도 천수를 누릴 수 있다. 정말 내게 효도를 하려거든 그런 말은 하지 말아라.”

진정은 침통한 생각으로 머리를 떨구고 있었다. 어머니는 벌떡 일어나더니, 쌀독을 뒤집어 쌀 일곱 되를 털어 내, 그 자리에서 밥을 짓고는 말했다.

네가 밥 지어 먹으면서 가느라 늦어질까 오히려 두렵다. 내 보는 눈앞에서 그 중에 하나를 먹고, 나머지 여섯 개를 싸서 서둘러 가거라.”

진정은 눈물을 삼키고 사양하며 말했다.

어머니를 버리고 출가하는 것도 사람의 자식으로 차마 어려운데, 하물며 몇 일 먹을 식량마저 탈탈 털어 가다니요? 하늘이며 땅이 저를 뭐라 하겠습니까?”

세 번을 거듭 사양했으나 어머니는 세 번 모두 권했다. 진정은 그 뜻을 거듭 어기지 못해 길을 나서, 쉬지 않고 3일 만에 태백산에 이르렀다. 의상 문하에 들어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어 제자가 되었다. 이름은 진정이라 하였다.

어머니께서는 말하셨지, 너가 하고 싶은 것을 해라. 걱정하지 마라. 너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라. 어머니가 생각난다.

 

향가, 가장 고귀한 것의 정화

 

향가에 대한 일반적인 논의 하나

어떻게 무엇을 노래하였는가

향가 최고의 작품, 충담사의 <찬기파랑가>

 

P712. 부드러움과 강인함의 조화, 이것은 곧 신라 사회를 이룩한 미의 근본이다. 저 불국사 석굴암의 부처님의 남자로 보기에는 부드럽고 여자로 보기에는 위의가 넘친다는 평처럼, 이 나라를 일으키고 지킨 조상들은 두 가지를 조화시켜 깊은 미의식을 창조해 냈다.

 

노동요의 원조, <공덕가>

 

P714. 노동요는 일할 때 부르는 민요다. 힘든 일을 하다 지치고 괴로울 때 부르는 노래는 위안을 준다. 더욱이 함께 힘을 모아 부르다보면 박자에 맞추어 행동이 통일되니 힘이 덜 든다. 양지 스님은 그 같은 노래의 효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P714. 온 백성들이 힘을 모아 벌이는 사업은 곧 즐거운 잔치로 변한다. 거기에 양지는 당대 불교가 추구한 이념을 자연스레 녹아들게 하였다. 서방정토를 간절히 바라는 이생의 사람들에게 훌륭한 공덕을 쌓아 나가라는 메시지를 담은 것이다.

 

호쾌한 기상이 서린 노래, 융천사의 <혜성가>

충성심과 이기주의의 사이, 신충의 <원가>

 

P719. 드디어 효성왕이 그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약속과는 달리 신충과의 약속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왕을 따랐던 여러 신하들의 논공행상이 끝났건만 신충에게는 끝내 무소식이었던 것이다. 신충은 상심한 마음에 노래를 지어, 옛날 왕과 함께 지냈던 그 정원의 잣나무에 걸었다. 그 노래가 바로 <원가>이며

 

P720. 가을 서리에도 변하지 않는 잣나무 같을 줄로만 알았던 왕과의 약속은 부질없는 것이 되고, 연못에 비추는 달빛도 흘러 자취 없어질 허망함이다. 이런 뜻이 담긴 노래 <원가>를 불렀더니, 생생하던 나뭇잎이 갑자기 말라 떨어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 소식은 곧바로 왕에게 전해졌고, 왕은 곧 자신의 무심함을 반성하며 신충을 불러 들였다. 충성심과 이기심은 종이 한 장 차이다.

 

깨달음의 더할 데 없는 경지, 영재의 <우적가>

 

일여느 혼미 속의 출구

 

괴승 시비

 

P723. 이제는 진정된 감이 있지만 한때 일연에 대한 평가는 너무 과장되거나 왜곡된 부분이 적지 않았다. 과장되기로는 그가 민족의 명운을 개척이라도 한 사람처럼 떠받들린 부분인데, 가뜩이나 존경할 만한 인물도 적은 판에 그것은 차라리 위로 삼아 해보는 일이라 해도, 뒤틀린 생각을 가지고 까닭 없이 폄하하는 일은 못마땅하기 그지 없다.

 

P725. 그러나 순수 불교의 자리에서 약간 벗어난 듯한 일연의 태도에서 우리는 괴승의 요소보다는 시대가 요구하는 어떤 점에 적극적으로 대처한 선각자적 태도를 발견한다. 전쟁과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백성의 삶은 도탄에 빠졌고, 민족에 대한 각성이라는 더욱 큰 문제가 그들 앞에 닥쳤다. 한 시대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일연은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문제와 여러 부면에서 부딪혔던 것이다.

 

일연의 생애

 

P726. 일연은 처음 이름이 견명이었고 불교의 이름을 회연이라 지어 밝음과 어둠을 대조시켰다. 옛 사람들이 이름 다음에 자를 지을 때 흔히 하는 방법이다. 그러다가 만년에는 이 둘 곧 밝음과 어둠을 하나로 보겠다는 뜻에서 새로운 이름에 일자를 넣었다. 밝음이 어둠이요 어둠이 곧 밝음이며, 어둠과 밝음은 종국에 둘이 아닌 하나라는 불교의 깊은 진리가, 일연의 개명 과정에는 숨어 있다.

 

본질 앞에서 수정해야 할 방편

 

P733. 이른바 지천명의 나이에 선승의 눈에 비친 시대상은 한마디로 파탄과 혼란 그 자체였다. 앞에서 요약한 13세기의 시대 상황을 다시 떠올리건대, 나라의 체모는 흐트러지고 백성의 안위는 백척간두에 서 있거니와, 그것은 한두 가지 문제점을 개선하는 것으로 해결될 성질의 일이 아니었다. 모든 기존의 질서는 타의에 의해서든 자의에 의해서든 무너져 버린 다음이었다. 새롬게 서야할 질서, 그것을 일연은 불교 안에서부터 보았던 것은 아닐까? 선종의 형성과정에서 산문을 따지는 일은 중요했고, 일정한 규칙이 형성된 다음 그것은 관성적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혁신적 과업이 눈앞에 보이는 현실에서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에 불과할 뿐 본질은 아니다. 본질은 문제, 그 앞에서 일연은 기존의 방편을 부수고 있었다.

 

표면적 전범과 이면적 전범

 

P734. 고려 무인 정권은 최소한 그 같은 시대의 흐름을 감지했다고 보인다. 특히 최씨 무인 정권이 보여 준 일련의 정치적 행로는, 비록 무리수가 따랐다고는 하나, 민족의 주체성을 잘 이용하여 정권을 유지하는 데까지 나갔던 것이다. 물론 민족이라는 개념이 언제 확고히 섰던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섰다면 이미 고대 국가의 형성 시기부터라고 말할 수 있는 반면, 근대적 개념의 민족의식은 상당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민족의 개념은, 고대 국가의 초보적 형태를 벗어난 다음부터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근대적 개념의 민족이 성립하기 이전까지, 곧 중세의 단계를 말해야 옳을 듯하다. 그러기에 나는 13세기를 중세의 시작이라고 본다.

 

P738. 일연의 서문은 중국의 역사에서 일어난 여러 괴이한 사건들을 장황하게 열거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중국에서 처음 나라가 설 때부터 한나라를 일으킨 유방에게까지 신이한 일로 점철된 건국의 역사를 낱낱이 대는 것은 우리도 이면의 전범을 하나쯤 마련하겠다는 일연의 논리적 전거 대기다. 그러기에 결론적으로, “우리 나라 삼국의 시조가 신이한 데서 출발했음은 무엇이 괴이한 일이랴고 반문한다. 자존의 극치다.

 

혼미 속에서 찾는 출구

 

P741. 월명사는 국가의 변괴를 물리칠 연승으로 부름을 받을 만큼 도와 덕이 높은 승려였는데, 범어는 모르고 다만 향가를 지을 뿐이라고 당당히 밝힌다. 승려가 범어로 주문을 외우지 못함을 전혀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있다. 이 말을 듣고 경덕왕도 흔쾌히 받아들였으니, 두 사람이 취하는 이런 태도의 근저에는 신라 불교가 가진 자존심이 있다. 그 자존심은 재래 신앙에서 불교 신앙을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데서 나온 것이다.

 

P741. 13세기 혼미한 사회를 살다 간 일연은 종교과 문학 등 다양한 방면에서 새로운 출구를 찾으려 한 혁신적 승려였다. 그가 <삼국유사>에서 원효를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기술하고 있음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그 자신이 원효 스타일의 원융적이면서도 혁신적인 삶을 살아가기를 바랐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시대가 필요로 하는 삶의 모습으로 보였을 터다.

 

P741. 가치 있는 것과 나아갈 향방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알고 실천한 일연의 생애가 막을 내리고, 이어 조선의 건국이 다가오지만, 그것은 견고한 중국 중심 보수주의로의 회귀였다. 결과론적이지만 조선 사회의 그런 성격이 결코 긍정적인 쪽으로 손을 들기 어렵게 한다.

 

 

3. 내가 저자라면

 

목차/구성에 대하여

 

구성면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편찬하며 구성하였기에 특별히 언급할 요소가 없다.

 

목차의 제목

 

목차의 제목이 개인적으로 상당히 아쉽다. 폭넓은 독자들을 위해 더 친근하고 알기 쉬운 용어로 풀어 썼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원본의 제목과 큰 차이가 있어 오히려 원본의 제목을 그대로 사용했으면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더불어 내용에 대한 부분을 그대로 반영하지 못한 것 같아 더욱 아쉬움이 남는다.

 

이 책의 장점

 

단연 깊이다. 다양한 역사자료를 인용했으며, 특히 삼국사기와의 주제별 비교를 통해 마치 삼국사기도 함께 보고 있는 듯한 생각을 들게 한다. 더불어 고은기 선생의 강한 신념이 독자에게 확실히 전달된다. 민족정신, 주체의식, 자존감 등 삼국유사의 풀이와 더불어 눈여겨 볼 만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중간중간 추가적인 추가자료 및 풀이 또한 삼국유사 이해를 돕는다. 왕의 계보나 용어의 유례를 삽입함으로써 흥미와 정보, 2마리 토끼를 잡는데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사진이다. 삼국유사라는 역사서의 특성상 크게 지루할 만한 부분은 없지만, 책의 구성면에 있어서 글만 있다면 읽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방대한 양의 사진을 배치함으로써 지루함을 이겨낼 수 있었고, 마치 기행 혹은 답사서를 읽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보완점 / 저자의 눈으로

 

단연 깊이다. 이 책의 장점이면서 단점이다. 방대한 자료의 분석과 삼국사기와의 비교는 삼국유사만의 장점과 흥미로움을 빛나게 해 주는 요소다. 하지만 집중력을 떨어뜨린다. 여기에도 있으면서 저기에도 있지만, 이것은 곧 여기에도 없고 저기에도 없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통일성과 집중의 지속성이 실종되면서 삼국유사 특유의 설화적 재미와 신화적 장치가 반감되었다.

 

더불어 한 장의 시작에 저자 자신의 이야기를 삽입하거나, 관련된 경험을 배치하였다. 이것 역시 집중을 저해하는 요소이다. 히미코 관련해 레슬링을 언급한 것, 일본 지인과의 일화 등 뭔가 톱니가 삐걱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불교신자가 아닌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전문영역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이나 해설이 없다. 마치 독자가 다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쓰여진 내용이 많기에 삼국유사가 뭘까? 우리의 재미난 역사가 뭘까? 하며 접근한 독자에게는 다소 어려울 수 있다.

 

오히려 삼국유사의 설화 및 일화를 전반부에, 해설을 후반부에 분리배치를 하면 더욱더 집중도를 높일 수 있었지 않았을 까 생각한다.

 

예를 들어, 삼국유사 5권의 내용 해설 저자의 눈 용어해설 이런 식으로 명확하게 나눈다면 재미와 정보, 우리 역사에 대한 흥미까지 덤으로 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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