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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3일 06시 56분 등록

저자 연구

카를 구스타프 융(Carl Custav Jung: 1875.07.26~ 1961.06.06)

(Part 1에 이어서...) 

융의 이론은 비과학적이라고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책을 읽을수록 이해가 되었다.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융과는 매우 달랐다. 특히 신화와 종교는 물론이고 영지주의, 연금술, 만다라, 도교, 주역UFO에 대해 연구한 글은 워낙 모호하고 불투명해서 갖가지 해석과 오해를 불러냈다. 프로이트의 이론에 비하자면 융의 이론은 뚜렷한 체계나 개념을 잡기가 힘들다고 평가된다. 정신의학자 앤터니 스토는 프로이트에 비해 “융이 이처럼 도외시된 것은 그가 자신의 사상을 쉬운 용어로 잘 표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1944년에 융은 사고로 다리가 부러지고, 심근경색으로 병원 신세를 졌다. 그 와중에 그는 임사체험을 경험했으며,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차라리 이 상태로 세상을 하직했으면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황홀감을 느꼈다. 1947년에는 두 번째 심근경색으로 병원 신세를 졌지만, 건강을 회복한 다음부터는 다시 활발한 연구에 돌입했다. 1948년에는 취리히에 C. G. 융 연구소가 설립되었다. 욜란데 야코비(1890-1973)와 마리 루이제 폰 프란츠(1915-1990) 등은 융의 제자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말년의 저서 중에서는 기독교에 대한 분석으로 큰 논란을 일으킨 [아이온](1951) [욥에게 보내는 답](1952), UFO 현상을 집단무의식의 발현으로 해석한 [현대의 신화](1958), 융 사상의 입문서로 유명한 [인간과 상징](1961) 등이 유명하다. 82세 때인 1957년부터는 5년간 집필 및 구술을 통해 자서전을 만들었다.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다.” 이 유명한 말로 시작되는 자서전은 융의 생애와 이력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신비 체험에 대한 증언을 담았고, 그의 사후인 1961년에야 간행되었다.

1955년에 취리히에서는 80세 생일을 맞이한 융을 위해 대대적인 축하 행사가 펼쳐졌다. 하지만 그 해 말에는 반세기 넘게 해로한 부인 엠마가 사망하면서, 융도 급속히 노쇠의 기미를 보였다. 1961 6 6일 저녁, 칼 구스타프 융은 퀴스나흐트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부르든 부르지 않든, 신은 존재할 것이다.” 융의 묘비에 적힌 문구는 언젠가 그가 인터뷰에서 한 말을 상기시킨다. 신을 믿느냐는 질문을 받자, 융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그분을 믿는 게 아니라, 그분을 압니다.

 

 

마음을 무찌르는 글귀

내 안의 여인 아니마

신화와 환상

315 나는 아무런 선입견 없이 환자들이 스스로 이야기하기를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나의 의도는 우연에 맡겨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환자들이 자발적으로 꿈과 환상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나는 단지 질문만을 던졌다. 그것과 관련하여 당신에게 무슨 생각이 떠오릅니까?” “당신은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다고 여깁니까?” “그것은 어디서부터 온 것입니까?” “당신은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등의 질문이었다.

간혹 답이 안 보이는 것 같은 상황에서 우연 또는 운에 맡겨보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나의 의도는 될 대로 되라는 체념 내지 포기인데그러다 뜻 밖에도 잘 되는 경우도 종종 있긴 하다. 나의 의식보다 우연이 더 힘이 셌던 건가?

 

316 꿈은 우리의 출발점이 되어야 할 사실이다.

 

316 그 무렵 나는 이상하게도 명료한 정신상태 속에서 내가 걸어온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았다. 나는 생각했다. ‘너는 이제 신화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가졌다. 그리고 무의식으로 들어갈 수 있는 모든 문을 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때 내 안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있었다. 무엇 때문에 모든 문을 열려고 하는가?” 그러나 갑자기 내가 무엇을 이뤄왔는지 의문이 생겼다.

지난 주에 앞부분을 읽을 때만해도 우려했던 것보다 쉽고 재미있다고 생각하며 내친 김에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도 읽어볼까, 했었다. 그런데 동기들의 북리뷰를 읽다보니 이런 내용이 있었나? 왜 나는 처음 보는 것 같지하는 부분이 꽤 있었다. 너무 띄엄띄엄 읽었나 보다. 이번주는 읽으면서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돼서 자꾸 되돌아가서 읽어야 했는데, 내가 정말 제대로 이해하면서 읽고 있는지 확신이 안 들고 있다.

 

318 그 즈음 끔찍한 환상이 되풀이해서 나타났다. 뭔가 죽은 것이 있는데 그것이 아직도 살아 있다고 느껴지는 그런 환상이었다. 예를 들면 시체를 화장하기 위해 화덕에 넣었는데 그것이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식이었다. 이와 같은 환상이 최고조에 달하자 한 꿈속에서도 나타났다

나도 가끔 비슷한 꿈을 꾸거나 현실에서도 문득 그런 걱정이 드는 때가 있는데특히 죽은 줄 알고 장례를 치르던 치르던 사람이 관 속에서 일어났다거나 하는 뉴스를 본 후에 그런 걱정이 들더라. 너무 1차원적인가?

 

320 그러나 그러한 회고는 효과가 없었고, 나는 나의 무지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토록 아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나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내버려둬보자.” 그리하여 나 자신을 의식적으로 무의식의 충동에 맡겨버렸다.

나와 융에게도 공통점이 있었다. 그런데 그 후의 액션은 많이 다르다.

 

320 나는 속으로 말했다. “아하, 여기에 삶이 있구나! 그 작은 아이는 여전히 여기에 있고, 내게 결여되어 있는 창조적인 삶을 누리고 있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거기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현재 성인이 된 남자와 열한 살 소년을 서로 이어준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내가 그 시절과 다시 이어지기 위해서는 그곳으로 돌아가 아이의 놀이를 하면서 아이의 삶을 한번 더 살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 순간이 내 운명의 전환점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마침내 그 놀이를 해보기로 결심했다. 아이의 놀이를 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정말 아무것도 없을 때 크나큰 체념과 굴욕감의 고통이 따랐다.

건장한 융이 아이의 놀이를 하는 모습을 그려보니 재미있다. 어른이 되어서도 아이의 장난감을 좋아하고 아이의 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설마 이런 이유로 그런건가?

 

322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너는 종교의식을 치르듯이 작은 마을을 세워 완성해가고 있다!”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내 신화에 이르는 길을 가고 있는 중이라는 확신은 느끼고 있었다. ~

이런 종류의 일은 내 인생에서 늘 되풀이되었다. 내 후반기 인생에서 장애에 부딪힐 때마다 나는 언제나 그림을 그리거나 돌을 다루었다. 그런 일은 늘 그 다음에 이어지는 생각과 일을 위한 통과의례였다.

 

324 8 1일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이제 나의 과제는 분명해졌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나자신의 체험이 집단의 체험과 어느 정도까지 연관이 있는지 이해하기 위해 힘써야만 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먼저 나 자신을 성찰해야 했다 그 시작은 집짓기 놀이에서 생겨난 환상들을 그려내는 일이었다. 이제 이 작업이 우선시되었다.

끝없는 환상의 흐름이 펼쳐졌다. 나는 방향감각을 잃지 않고 길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나는 낯선 세계 속에 속수무책으로 서 있었다. 모든 것이 내게는 어렵고 이해하기 불가능한 듯이 보였다. 나는 줄곧 팽팽한 긴장 속에 살았다. 마치 거대한 돌이 내게로 굴러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자주 받았다. 뇌우(雷雨)가 연이어 일어났다. 내가 그것을 견뎌낸 것은 맹목적인 힘을 지닌 하나의 문제 덕분이었다. 다른 것들은 그 뇌우에 부서지고 말았다. 니체와 횔덜린(Holderlin)과 그외 많은 것이 부서졌다. 그러나 내 안에 마력과 같은 힘이 있어, 내가 환상에서 겪은 것의 의미를 찾지 않으면 안 되도록 처음부터 나를 붙들어주었다. 내가 노도와 같은 무의식의 엄습을 견뎌냈을 때, 보다 높은 어떤 의지에 순종하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고, 그러한 느낌은 나의 과제를 수행하는데 나침반 역할을 해주었다.

 

327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움직이는 환상을 붙잡기 위해서는, 이를테면 나 자신을 그 속으로 빠져들어가게 해야만 했다. 거기에 대해 나는 저항감을 느꼈을 뿐 아니라 무척 불안하기도 했다. 자기 제어력을 잃어버리고 무의식의 제물이 되지 않을까 두려웠다. 나는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신과의사로서 너무나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이미지들을 내 것으로 삼으려는 시도를 감행해야만 했다. 만약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그 이미지들이 나를 자기들 것으로 삼았을 위험성이 있었다.

내가 이러한 시도를 하게 된 한 가지 중요한 동기는 내가 감히 스스로 행할 수 없는 것을 나의 환자에게 기대할 수는 없다는 확신이었다. ~

내가 나 개인뿐 아니라 나의 환자를 위해서 이러한 모험을 자청해서 한다는 생각은 나로 하여금 위험한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게 했다.

안과 의사는 절대 라식수술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피부과 의사는 자식들에게 피부과 약을 먹이지 않는다는 말도 있다. 의사들뿐이랴. 자기 가족이 절대 먹지 않을 음식을 만들어서 팔고, 자신은 절대 입지 않을 옷을 만들고

마케터로 일하면서 회사를 선택할 때의 기준이나 고민도 그랬다. 내가 실제로 사용하고 싶은 서비스나 제품을 만드는 곳. 남들에게 구매를 권하면서 부끄럽지 않을 곳이어야 했다.

 

필레몬과의 대화

340 내 안에서 생겨난 한 여인이 나의 생각에 간섭한다는 것은 무척 흥미로운 일이었다. 십중팔구 그것은 원시적인 의미의 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 혼이 왜 아니마라고 불리게 되었는지 자문해 보았다. 왜 사람들은 그것을 여성적인 것으로 상상하는가? 나중에 나는 내 안에 있는 여성상이 남성 무의식 속에 있는 전형적인, 또는 원형적인 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를 아니마(Anima)’라고 불렀다.

드디어 나왔다. 아니마.

 

341 매일 저녁 나는 글쓰는 일에 매달렸다. 내가 아니마에게 편지를 쓰지 않으면 그녀는 나의 환상을 파악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의 성실한 글쓰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미 적어놓은 것은 아니마가 왜곡할 수 없을 것이고, 그걸 가지고 책략을 쓰지도 못할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보면, 우리가 어떤 것을 이야기하려고 마음만 먹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적어놓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나는 편지를 쓰면서 될 수 있는 한 정직하려고 노력했다. 옛 그리스 격언을 따른 것이었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버려라. 그러면 받으리라.”

아니마나 아니무스와는 상관이 없지만 나도 마음 먹은 것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적어 놓으려고 노력한다. 연초의 1년 계획이든 오늘의 할 일 리스트든, 일단 적어야 우선 순위가 정리가 되고 실제로 하게 된다. 리스트를 적은 뒤에 실제로 한 일을 하나씩 지우는 재미도 좋다. 이번주에 오프 모임이라 할 일이 많다. 내일 집에 돌아가면 주간 투 두(To-Do) 리스트 작성부터 해야겠다.

 

342 아니마의 말은 대개 유혹하는 힘과 깊이를 알 수 없는 교활함을 지니고 있다.

 

죽은 자를 향한 일곱 가지 설법

346 니체는 내면의 사상세계 외에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실의 발판을 잃어버렸다. 사실 그가 자신의 내면세계를 소유했다기보다 오히려 내면세계가 그를 소유한 셈이었다. 그는 뿌리가 뽑혀 땅 위를 떠돌아다녔다. 그리하여 그는 과장하는 습성이 생기고 비현실성에 빠졌다.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그렇지 않아도 날아갈까 걱정이다. 떠돌다 날아가지 않도록 붙잡아줘야겠다.

 

347 그러므로 나의 가족과 직업은 다행스럽게도 늘 현실감을 잃지 않게 했으며, 내가 정상인으로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증해주었다.

설마 그런 이유로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나아서 가족을 만든 것은 아니겠지.

 

353 나는 심사숙고한 끝에 학문적 출세의 길을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무의식과의 실험이 끝나기까지는 내가 공중 앞에 나설 수 없기 때문이었다. 뭔가 엄청난 것이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내가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믿기로 했다. 그것이 내 인생을 충만히 채울 것을 알고 있었고, 그 목표를 위해 나는 어떤 위험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내가 대학 교수가 되든 안 되든 그것이 무슨 문제란 말인가? 교수직을 버린다는 것은 물론 괴로운 일이었다. 숙명에 대해 분노하는 마음까지 있었다. 나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일반적인 것들에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점을 여러 면에서 후회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감정은 지나가는 것이었고, 실은 하찮은 것이었다. 이에 반해 다른 것이 중요한 법이다. 우리가 내적 인격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말하는지 주의를 기울인다면 마음의 고통은 사라진다. 이런 일은 내가 학문적 출세를 포기했을 때뿐 아니라 다른 경우에도 늘 겪어왔다.

요즘의 나에게 꼭 필요한 말이다. 나의 내적 인격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하라고 말하는지 잘 듣자. 나의 마음의 고통도 사라지길

 

354 말해봤자 오해를 사기 십상일 것이었다. 나는 외부 세계와 내면의 이미지세계 간의 차이를 아주 예리하게 느꼈다. 당시에는 그 두 세계 사이의 상호작용을 지금 내가 이해하듯 인식할 수 없었다. 나는 단지 의 화해할 수 없는 모순을 보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내가 심적 체험의 내용이 진실이며 그것은 나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집단적 체험으로서도 진실이라는 사실을 남에게 제시해줄 수만 있다면, 바깥세계와 다른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길을 찾게 되리라는 것을 나는 처음부터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이 일이야말로 가장 철저한 노력을 요할 것이었다.

 

연금술을 발견하다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

373 연금술에 대한 나의 작업에서 나는 괴테와의 내적인 관계를 보게 된다. 괴테의 비밀은 그가 수세기 동안 지속된 원형적 변환과정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파우스트>를 자신의 주요과업이라 불렀으며, 그의 생애는 이 드라마의 틀 안에서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그의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이 생동하는 실체로서 초개인적인 과정이며 원형세계의 위대한 꿈이라는 것을 인상깊게 지각하게 된다.

나 자신도 그와 같은 꿈에 사로잡혀 있었고 열한 살 때부터 착수해온 주요과업이 있었다. 나의 생애는 하나의 과제, 하나의 목표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그것으로 통합되어 있었다. , 인격의 비밀을 밝히고자 하는 과제요 목표였다. 모든 것은 이러한 중심점에서 설명되며 나의 모든 연구는 바로 이 주제와 연관된다.

 

성배전설과 동물 상징

387 맹목적인 수용은 결코 해답을 주지 못한다. 기껏해야 답보 상태로 있게 할 뿐이며, 그로 인해 다음 세대가 심각한 부담을 안게 된다.

 

398 오늘날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일찍이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이토록 성공을 거둔 것이 무척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나에게 늘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내가 말해야만 했던 것이 말해졌다는 사실이다. 나는 가능한 것이면 무엇이든 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물론 더 많이 더 훌륭하게 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 능력의 범위를 벗어나는 일이다.

앞의 말해야만 했던 것말해졌다은 서로 다른 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나도 그렇게 말하는 날이 오길 바란다. 어떤 분야에서든지

일찍이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이토록 성공을 거둔 것이 무척 놀라운 일입니다.”

 

, 내 가슴에 두 영혼이 살고 있다

죽은 자들과 소통하는 곳

404 처음부터 탑은 나에게 성숙의 장소였다. , 그 안에서 내가 현재의 나, 과거의 나, 미래의 나로 다시 존재할 수 있는 자궁, 모성적 이미지의 장소였다. 탑은 내가 돌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것은 미리 예감했던 것의 실현, 즉 개성화의 표현으로 여겨졌다. 청동보다도 오래갈 기억의 징표였다. 그것은 나의 존재에 대한 긍정처럼 느껴져 나에게 유익한 영향을 끼쳤다. 건축작업을 하는 동안에는 단편적으로 그때그때 구체적으로 필요한 것들만 좇아서 일을 했다. 그래서 내적인 연관성을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말하자면 일종의 꿈속에서 탑을 지은 셈이었다. 나중에야 비로소 나는 그것들이 결과적으로 의미있는 형태, 즉 정신적 전체성의 상징을 이루게 된 것을 알았다. 마치 오래전에 뿌린 씨가 싹이 트는 것처럼 그 일이 전개되었다.

 

405 나는 전기를 쓰지 않고 벽난로와 화덕에 손수 불을 지핀다. 저녁에는 옛날 등잔에 불을 붙인다. 수도도 없어 나는 펌프로 직접 물을 긷는다. 장작을 패고 음식을 요리한다. 이런 단순한 일은 사람을 단순하게 만든다. 그런데 단순해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머리가 복잡할 때 뜨개질이나 인형 눈 붙이기 등 단순 노동을 하는 것과 비슷한 건가? 나에게는 힘들어서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 외에 다른 생각이 들지 않는 오래 달리기가 나를 가장 단순하게 만드는 일인 것 같다.

 

411 나는 짜증을 내면서 생각했다. ‘이럴 수가! 이게 꿈이라 여겼는데 이제 보니 실제구나!’ 이런 느낌으로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문과 덧창을 열었다. 그러나 모든 게 그전과 똑같았다. 죽음처럼 고요한 달밤이었다. 그러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단순히 도깨비 장난이야!’

꿈속의 꿈?? 나도 가끔 꾸는 경우가 있다. 이럴 경우에 나는 거의, 깨고 싶어도 못 깨는 가위에 눌린다.

 

412 그날 밤, 모든 것이 그와 같이 정말 현실이거나 적어도 그런 것처럼 보였다. 그리하여 나는 두 개의 현실을 거의 구분할 수 없었다. 그 꿈도 나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시골 청년들이 음악소리를 내며 길게 늘어서서 행진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들은 호기심으로 탑을 구경하려고 온 것 같았다.

 

카르마

418 나의 그릇된 결론은 내가 젊은 날에 제삼자로부터 얻어들은 한 새로운 소문에서 비롯되었다. , 나의 조부 융이 괴테의 사생아였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짜증스러운 소문이 <파우스트>에 대한 나의 유별난 반응을 뒷받침해주고 설명하는 것같이 여겨질 정도였으니, 그만큼 그것이 나에게 먹혀든 셈이었다. 나는 환생을 믿지는 않았지만 인도 사람들이 카르마라고 부르는 개념은 본능적으로 신뢰하게 되었다.

그 무렵 나는 무의식의 존재에 관해서 아무런 자각도 없었으므로 나의 그러한 반응을 심리학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었다. 또한 나는 미래가 장기적인 전망으로 미리 무의식적으로 준비되며, 그리하여 투시력을 가진 사람은 훨씬 이전부터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아맞힌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지금도 일반인들은 그 사실을 잘 모르고 있지만 말이다.

 

421 옛 것이 한번 파괴되면 그것은 대부분 아예 없어지고 만다. 그리고 파괴적인 전진은 결코 그칠 줄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이러한 관계성의 상실이며 근원과의 단절로서 문화 속의 짜증과 성급함을 야기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발전의 역사가 아직 전체적으로 완성되지 않은 현재에 사는 대신 미래에 살며, 황금시대가 오리라는 터무니없는 약속에 의지한다. 사람들은 점점 깊어지는 결핍감과 불만, 초조감에 사로잡힌 채, 새로운 것을 향해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돌진하고 있다.

사람들은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미래의 약속에 의지하여 살고 있으며, 현재의 빛 속에서 살지 않고 미래의 어둠 속에서 살고 있다. 사람들은 그 어둠속에서 적절한 때에 해가 솟아오르기를 기대하고 있다.

반대로 과거의 특정 시대를 황금시대라 부르며 그리워하거나 좋았던 것만을 기억하며 과거 속에서 사는 사람들도 있다. 둘다 현재에 발을 딛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경계해야 한다.

 

421 사람들은 모든 좋은 것이 나쁜 것들의 대가로 얻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보다 큰 자유에 대한 희망은 국가에 대한 예속의 증대로 사그라들고 만다. 가장 눈부신 과학의 발견이 우리에게 끔찍한 재앙을 가져온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들이 찾던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면 못할수록 우리도 그만큼 더욱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온 힘을 다하여 개인의 근원과의 단절이 심화되도록 부추긴다. 그러면 각 개인은 집단의 한부분으로 단지 중력의 혼(니체가 말한 집단정신)’을 따라가게 된다.

융이 살던 20세기 초.중반에도 과학의 발견이 가져온 끔찍한 재앙에 대한 성찰이 있었구나. 하긴 그 때 핵폭탄이 터지고 각종 전쟁무기가 눈부시게 발전했으니 끔찍해할만도 하다. 현재는, 그리고 앞으로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겠지.

 

422 앞을 향한 개혁, 즉 새로운 방법 또는 묘안을 통한 개혁은 지금 당장은 확실하겠지만 길게 볼 때는 의심스러우며 어떤 경우에도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것들은 전체적으로 인간의 즐거움, 만족 도는 행복을 증가시키지 못한다. 그것들은 대부분 실재의 허울좋은 사탕발림에 불과하다. 예를 들면 시간을 단축하는 조치들은 아주 불쾌한 방식으로 속도만 빠르게 하여 이전보다 더 시간이 부족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래서 옛스승들은 항상 이렇게 말하곤 했다. “모든 성급함은 마귀에서 나온다.”

20세기 유럽 vs 21세기 한국. 말해 뭐하랴.

 

423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이 너무 뚜렷하면 우리는 오늘의 시간에 제약을 받아 우리 조상들의 혼이 오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하는지, 다시 말해 무의식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감지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 조상의 세계가 우리의 삶에 근원적인 즐거움으로 참여하고 있는지, 아니면 우리의 삶을 뒤집어 놓고 잇는지, 혐오감으로 외면하고 있는지를 알 수 없는 어둠속에 남게 된다. 우리의 내적인 평안과 만족은, 개체를 통하여 인격화된 역사적 가족이 우리 현재의 덧없는 상황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따라 거의 대부분 좌우된다.

 

여행

북아프리카, 순진한 인류의 청소년기로!

431 우리가 사하라로 들어갈수록 나는 시간이 점점 느려지는 느낌을 받았고, 심지어 시간이 거꾸로 가도록 위협당하고 있는 듯했다. 열기가 진동하며 점점 높아지는 바람에 나는 그만 몽롱한 상태로 빠져들었다. 우리가 오아시스 초입의 야자나무와 집에 이르자 모든 것이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보였다.

사막의 매력인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사막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사막에 가면 잠깐 사이에도 나는 누구, 여긴 어디? 메롱~’ 상태에 빠지게 된다.

 

438 많은 부분에서 합리적인 특성을 가진 유럽인에게 인간적인 것은 무척 낯설다. 유럽인은 합리적인 특성을 꽤 자랑하고 있지만, 그것이 생의 열정을 희생하고 얻은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원시적 인격 부분이 국부적인 지하존재로 떨어지는 운명을 맞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합리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이 상대적이라는 말인가? 아무리 융이라도 동의할 수 없다. 아니, 번역이 좀 이상한 건가?

 

푸에블로 인디언, 자기 자리에 있는 사람들

441 비평의 사단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려면 대상의 외부에 관점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 이 관점은 특히 그 성격상 어떤 다른 학문분야보다도 훨씬 주관적인 경향을 가진 심리학적 사랑들에 아주 유용하다. 예컨대 우리나라를 밖에서 볼 기회를 한 번도 갖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나라의 특성을 인식할 수 있겠는가?

 

443 옥비에 비아노가 말했다. “백인들이 얼마나 사납게 생겼는지요. 그들의 입술은 얇고, 코는 날카롭고, 얼굴은 주름졌고, 눈은 완고한 눈초리를 하고 있소. 그들은 항상 뭔가를 찾고 있소. 무엇을 찾는 거지요? 또한 백인들은 항상 뭔가를 원하며 언제나 불안하고 차분하지 못하오. 우리는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오. 우리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소. 우리는 그들이 넋이 나간 사람들이라고 확신하오.”

나는 그에게 왜 백인이 모두 넋이 나간 사람들이냐고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그들은 머리로 생각한 것을 말하오.”

나는 놀라서 물었다.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당신은 어디서 생각하오?”

우리는 여기서 생각하오.” 그는 자신의 심장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450 나는 우리의 대화가 이제 이 종족의 비밀의식에까지 근접한 무척 까다로운 영역에 이르렀음을 느꼈다. 그가 말했다. “우리는 세계의 지붕 위에 사는 민족으로 아버지 태양의 아들들이오. 그리고 우리의 신앙으로 날마다 우리 아버지가 하늘을 운행하도록 도와주고 있소. 우리는 이것을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전세계를 위해서 하는 것이오.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더 이상 활용하지 않으면 그때는 10년 안에 태양이 뜨지 않게 될 것이오. 그러면 항상 밤이 되고 말 것이오.”

그 순간 나는 인디언 남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의젓한 자기확신감과 위엄이 어디서 나오는지 뚜렷이 알게 되었다. 그는 태양의 아들로 그의 생명은 우주론적으로 깊은 의미가 있다. 그는 모든 생명의 아버지요 보존자인 태양이 날마다 떠오르고 지도록 돕고 있다. 우리가 이것을 우리 자신의 삶의 근거, 즉 우리의 이성이 짜내는 인생의 의미와 비교한다면, 우리의 것이 얼마나 빈약한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순전히 질투심으로 인디언의 순진함을 슬쩍 비웃고 우리가 그들보다 영리하다고 여기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빈약하며 쇠락한 가운데 있는지 보지 않으려고 한다. 지식은 우리를 성숙하게 해주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이전에 살던 신화적인 세계에서 더욱 멀리 떨어지게 한다.

 

451 ‘모든 생명은 산에서 온다는 것은 그에게는 그대로 직접 다가오는 확신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는 자신이 넓은 세계의 지붕 위에서 신과 가장 가까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신성한 귀를 지니고 있으며 그의 제의적 행위는 가장 빨리 저 먼 태양에 닿는다. 산의 신성, 야훼의 시나이산 계시, 엥가딘산에서 받은 니체의 영감 들은 모두 같은 맥락인 셈이다.

 

케냐와 우간다, 아프리카의 고독을 겪다

455 이 광경을 보고 나는 마법에 걸린 듯했다. 그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모습이었으나 동시에 강렬한 기시감(旣視感)’을 주었다. , 내가 마치 이런 순간을 이미 한번 경험했고, 시간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으나 그 세계를 언제나 알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내가 어린시절의 시골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었으며, 오천 년 전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는 저 검은 남자를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도 어릴 때 그것이 뭔지도 모를 때부터 기시감을 느꼈었다. 오히려 요즘에는 별로 못 느끼는 것 같다. 감이 떨어졌나?

그런데 요즘 심리학자들은 기시감을 뇌의 착각이라고 한다. 융의 해석이 더 맘에 든다.

 

458 “그럼 내가 당신에게 충고를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선생도 아시다시피 이곳은 인간의 나라가 아니고 신의 나라입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아무 걱정 말고 마음을 편안히 가지십시오.” 그러고는 인사도 없이 일어나더니 이쪽으로 몰려오는 흑인들의 무리 속으로 사라졌다.

걱정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어서 그렇게 말한게 아닐까?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진다면, 걱정이 없겠네가 떠오른다.

 

472 “예전에 라이본들은 꿈을 감득(感得)하고 그 꿈으로 전쟁이 일어날지, 질병이 생길지, 비가 올지, 사람들이 어디로 가축떼를 몰고 가야 할지 알아맞혔소.” 그와 같이 그의 할아버지도 꿈을 꾸었다. 그러나 백인들이 아프리카로 온 후로는 아무도 꿈을 감득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더 이상 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제는 영국인들이 그것들을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476 대체로 그 사람들은 창조주가 모든 것을 선하고 아름답게 만들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창조주는 선과 악 그 너머에 있다. 그는 음주리(엘곤족 언어로 아름답다는 뜻)’하고, 그가 만든 모든 것도 음주리하다.

그런데 당신들의 가축을 잡아죽이는 그 나쁜 짐승은?” 하고 내가 묻자 그들이 대답했다. “사자는 선하고 아름답소.” “당신들의 끔찍한 질병은?” 하고 붇자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은 햇볕을 쬐고 누워 있소. 그건 아름다운 일이오.” 나는 이러한 낙관주의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내가 곧 알게 되었듯이, 저녁 6시 무렵이 되자 이런 철학이 갑자기 중지되었다. 일몰 후부터는 다른 세계, 즉 어둠의 세계, 아이크의 세계가 지배한다. 그것은 악이요 위험이며 불안을 일으키는 것이다. 낙관적인 철학은 중지되고, 유령에 대한 공포의 철학과 재앙을 막으려는 마술적 풍습의 철학이 시작된다. 그러다가 일출과 함께 아무런 내적 모순 없이 낙관주의가 다시 돌아온다.

 

477 그래도 가장 의미있는 것은 적도의 어둠속에서 돌발적으로 첫 햇살이 섬광처럼 분출하는 순간이다. 그 생명력 넘치는 빛 속에서 밤은 사라지고 만다.

이 평원에서 맞이하는 일출은 날마다 나를 새롭게 압도하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477 처음에는 밝음과 어둠이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다가 모든 것이 빛속에서 선명하게 드러나고, 그 빛은 계곡 건너편에 고원 가장자리가 솟아 있었다. 처음에는 밝음과 어둠이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다가 모든 것이 빛속에서 선명하게 드러나고, 그 빛은 계곡 구석구석을 온통 환하게 밝혔다. 지평선은 저 너머에서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떠오르는 빛이 차츰, 이를테면 몸 속으로 파고들어 몸 자체가 안에서부터인 듯 밝아지며 결국은 채색유리처럼 투명하게 빛났다. 모든 것은 번쩍이는 수정이 되었다. 방울새가 지평선을 맴돌며 지저귀었다. 그 순간 나는 어느 안에 들어와 있는 듯이 여겨졌다. 그것은 하루 중에서 가장 거룩한 시간이었다. 나는 이 장엄한 광경을 식을 줄 모르는 감격으로, 아니 더 낫게 표현한다면 무궁한 황홀감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478 원숭이들도 나처럼 일출을 경외하는 듯이 보였다. 그것들을 보자 이집트 아부 심벨 사원에서 경배의 몸짓을 해보이던 비비원숭이들이 생각났다. “옛날부터 우리는 세계를 구원하는 위대한 신을 숭배해왔습니다. 그가 거대한 어둠으로부터 환한 하늘빛으로 떠오를 적에 말입니다.”

좋은 건 동물들도 아는구나. 나는 일몰을 더 좋아하지만, 일출에는 일몰과는 또다른 신비함이 있기는 하다. 빛이 어둠을 몰아내는 걸 볼 수 있기 때문이겠지.

 

479 사실은 자연의 밤보다는 그와는 전혀 다른 어둠이 그 땅을 짓누르고 있다. 그것은 헤아릴 수 없는 수백만 년 동안 언제나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했던 정신적인 원초적 밤이다. 빛에 대한 동경은 의식(意識)에의 동경인 셈이다.

 

인도, 이방의 문화에서 유럽의 뿌리로!

492 탑은 바닥에서 꼭대기까지 아주 음란한 조각들로 덮여 있었다. 우리는 이 주목할 만한 사실에 관해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이것을 정신적인 정화의 수단이라고 설명했다. 나는 그 기묘한 광경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경탄하고 있는 한 무리의 시골 청년들을 가리키면서 이의를 제기했다. 이 젊은 사람들은 아마도 정신적 정화를 체험하는 중이 아니라 성적인 환상이 그들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그 학자가 대꾸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카르마를 먼저 갚지 않고 어떻게 스스로를 정화할 수 있겠습니까? 저 덧붙여진 음란한 형상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다르마(Dharma:부처의 가르침, 계율)를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거기 있는 것입니다.

황당해 하는 융의 표정이 떠올라 재미있다.

 

495 그리스도 역시 부처와 마찬가지로 자기의 구현자다. 하지만 전혀 다른 끗에서 그러하다. 둘 다 세상을 극복한 자들이다. 부처는 이를 테면 이성적 통찰로써, 그리스도는 숙명적인 희생으로써 그 일을 이루었다. 기독교에서는 더 많이 고통을 겪는 데 주안점을 두고, 불교에서는 더 많이 깨닫고 행하는 방향으로 나간다.

 

502 “아닙니다. 부처가 아닙니다. 부처는 니르바나(열반)에 있으므로 그에게 기도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꽃의 아름다움처럼 인생도 그렇게 지나가버리고 말도다. (인도말로는 deva라고 하는데, ‘수호천사라고 할 수 있음)이시여, 나와 함께 이 제물의 은덕을 누리소서.” 젊은이들이 그렇게 노래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인도적이라 아니 할 수 없었다.

 

라벤나와 로마, 보이는 환상과 보이지 않는 실재

507 남자의 아니마는 현저히 역사적인 성격을 띤다. 아니마는 무의식의 인격화로 역사와 선사(先史)에 깊이 물들어 있다. 아니마는 과거의 것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남성이 그의 선사에 관해 알아야할 것들을 남성 속에서 대신 보충해주고 있다. 남성 속에 아직도 살아 있는, 이미 있었던 모든 삶이 아니마다. 아니마와의 관계에서 나는 늘 나 자신이 원래 어떤 역사도 가지고 있지 않은 야만인처럼 여겨진다. 마치 이전도 이후도 없이 그야말로 무에서 생겨난 자같이 생각된다.

 

509 라벤나 침례당에서의 체험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후로 나는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처럼,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의 육안이 틀림없이 보았을 침례다의 진짜 벽면은 본래대로 있는 세례반(洗禮盤)과 똑같이 실재로 여겨지는 환상으로 뒤덮여 그 모양이 바뀌고 말았다. 그 순간에 어느 것이 과연 실재였을까?

신기하다. 융 혼자였다면 그냥 환상이라고 할 수도 있었을텐데, 같이 경험한 사람이 있다니집단 환상이라고 해야 하나? 정말 서프라이즈에 나올 일이다.

 

510 예를 들어 파리나 런던에 가듯이 로마를 여행하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늘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 도시나 저 도시나 기호에 맞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가는 데마다 그 곳을 지배했던 정신에 의해 마음 깊은 곳에서 충격을 받을 때, 그리고 거기 있는 성벽 잔해와 둥근 기둥 하나가 내 눈에 이제 막 새롭게 인식될 때 문제는 달라지는 법이다. 이미 폼페이에서 예기치 못한 사물들이 인식되었고 내 능력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물음이 제기되었다.

1949년 이미 고령에 이르러 내가 그동안 미뤄두었던 일(로마여행)을 뒤늦게 해보려고 했으나, 차표를 사자마자 나는 기절해 버렸다. 그후로 로마여행 계획은 단호히 접어두고 말았다.

로마를 파리나 런던에 가듯 간 사람 여기 있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구나.

 

환상들

생의 한계점에 이르러

516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겠다. 나에게 남아 있는 그것이 바로 (Ich: ‘자아라는 용어로도 쓰임)’라고 말이다. ‘는 이를 테면 남아 있는 그것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는 나의 역사로 이루어졌으며, 그것이 참으로 나라는 절실한 느낌을 지니고 있었다. ‘(자아)는 성취된 것과 지금까지 있었던 것의 그와 같은 묶음이다.’ 이런 체험은 나에게 극도의 결핍감을 안겨주면서도 동시에 커다란 만족을 주었다. 내가 요구하거나 원하는 것은 더 이상 없었다.

 

518 그 의사가 심연에서 형상으로 떠올라 나에게 이르러 내 앞에 서자 우리 사이에 소리없는 생각의 전달이 이루어졌다. 그 의사는 이를 테면 지구를 대표해 나에게 어떤 통지를 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그 내용은 내가 지구를 떠나려고 하는 데 대해 항의가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나는 지구를 떠나서는 안 되고 돌아와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 통지를 받는 순간, 나의 환상을 끝나고 말았다.

 

융합의 신비

523 환상을 보는 동안 느끼게 되는 아름다움과 감동의 강도는 사람들이 결코 표현해낼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일찍이 겪은 일들 중에서 가장 엄청난 경험이었다.

그러고 나서 찾아오는 낮의 대비! 나는 낮에는 괴로웠고 신경이 완전히 지쳐 있었다. 온갖 것이 나를 부아나게 했다. 모든 것이 지나치게 물질적이고 너무나 난폭하며 말할 수 없이 답답하고, 공간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제약되어 있으며, 확인할 수 없는 목적에 매여 인위적으로 좁아져 있었다. 그런데도 그것들은 진실인 것처럼 믿게 하는 최면력 같은 어떤 힘을 지니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것들의 무가치성을 분명히 인식했는데도 말이다. 사실 나는 그때부터 이 세계에 대한 믿음이 회복되기는 했지만, ‘인생이란 그것을 위해 이미 마련된 삼차원의 세계체제 안에서 전개되는 존재의 한 단면일 뿐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 일반인과의 평범한 교류는 매우 어려웠을거라 예상된다. 평범한 사람들과의 대화가 얼마나 지루하고 재미없었을까. 반대로 평범한 사람들은 융이 그가 치료하는 환자와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527 그런데 나는 병을 통하여 또 다른 것을 얻었다. 그것은 존재에 대한 긍정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하는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이었다. 주관적인 반론 없이 말이다. 현존재의 조건을 내가 보는 그대로, 내가 이해하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후의 삶에 관하여

꿈과 예감

534 이러한 일들의 확실성에 대해 반대의견을 말하는 온갖 이성적인 고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 가지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인생이 현존을 넘어서 무한정한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은 훨씬 더 이성적으로 잘 살며 더욱 편안해질 것이다. 사람은 수백 년을, 상상할 수 없는 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런데 왜 이와 같이 헛되이 분주하기만 한가?

아주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영생을 믿는 기독교의 세계관과 다를 바가 없다.

 

539 이런 체험들을 하면 우리는 무의식의 가능성과 능력에 대해 일종의 존경심을 갖게 된다. 다만 우리는 비평적인 태도를 견재해야 하며, 그러한 전달(무의식이 전해주는 내용들)’이 언제나 주관적인 의미도 함께 지니고 잇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실제와 부합되는 수도 잇고 아닐 수도 있다. 아무튼 나는 무위식의 암시를 기초로 얻을 수 있었던 견해가 나에게 빛을 밝혀주고 예감의 영역을 내다보는 눈을 열어주는 것을 경험했다. 몰론 나는 거기에 관해 계시록을 쓰지는 않겠지만, 나로 하여금 관심을 갖게 하고 문제를 제기하도록 하는 하나의 신화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신화는 과학의 맨 처음 형태다. 내가 사후의 일들에 관해 말할 때 나는 내적 감동으로 말하는 것이며, 거기에 관한 꿈과 신화를 이야기하지 않고는 더 이상 진전할 수 없을 것이다.

 

541 이를테면 회피할 수 없는 질문자가 그에게 다가오고 그는 이에 답해야 한다. 그가 죽음에 관한 신화를 가져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성은 그가 들어갈 어두운 구덩이 외에는 아무것도 그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 신화는 그의 눈앞에 다른 이미지를 가져다줄 수 있다. 그것은 유익을 주며 정신을 풍성하게 하는 사후세계 삶의 이미지들이다. 그가 이 이미지들을 믿거나 약간만 신뢰하더라도 그것들을 믿지 않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옳을 수도 잇고 그를 수도 있다. 어쨌든 부인하는 자는 ()’를 향해 가는 반면에, 원형의 도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발자국을 따라간다. 두 사람 다 불확실성 속에 있다. 그런데 전자는 자신의 본능을 거스르고 있고, 후자는 본능을 따르고 있다. 이것은 현저한 차이이며 후자에게 이로운 점이 있음을 의미한다.

 

신화,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

546 기독교의 가르침은 우리가 내세에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듯 바라보게 된다고 가정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죽은 자가 우리보다 훨씬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죽은 자의 혼령들도 그들이 죽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알고 있던 것만 알고그 외에는 모르는 것 같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람들의 앎에 참여하기 위해 인생 속으로 밀고 들어오려고 애쓴다.

나는 그들이 바로 우리 뒤에 서서 우리가 어떤 회답을 자신들에게 주는지, 어떤 회답 숙명을 향해 주는지 듣고자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자주 받는다. 내가 보기에는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 있는 자들, 다시 말해 그들 위에 살아남아서 계속 변화하는 세계 속에 존재하는 사람들로부터 자신들의 물음에 대한 회답을 얻는 것이 아닌가 싶다. 죽은 자들은 전지(全知)하나 모든 지식을 임의로 활용할 수 없고 단지 육체에 갇힌 살아 있는 사람들의 혼으로 흘러들어가는 일만 가능하다는 듯이 우리에게 묻고 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사람의 혼은 적어도 한 가지 면에서는 죽은 자에 비해 유리하다. , 명쾌하고 결정적인 인식에 이를 수 있는 능력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생각과 느낌, 그리고 체험을 늘상 하면서 86세까지 장수했다는 게 신기하다. 나라면 삶이 피폐해져서 저리 오래 살지 못했을 것 같다.

 

547 사후에 의식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인류의 의식과 같은 방향으로 계속 나아갈 것으로 여겨진다. 그 의식은 높은 수준이긴 하지만 그때그때 한계가 변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이 죽음의 순간에 자기 자신의 가능성에 미치지 못한 채 남아 있을 분만 아니라, 특히 생존시에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하여 그들이 생전에 습득하지 못한 의식성 부분을 죽음에서 얻으려고 요구하게 된다.

 

551 신화는 피할 수도 없는, 의식적 인식과 무의식 사이의 중간단계다. 무의식이 의식보다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은 기정 사실이지만, 그것은 특별한 종류의 앎으로 영원 속의 앎, 대개 지금 여기와 관계가 없고 우리의 지적 언어도 고려하지 않는 앎이다. 오직 우리가 무의식으로 하여금 스스로 확충하여 진술할 수 잇는 기회를 줄 때에만, 앞에서 수를 예로 들어 제시했듯이 그것이 우리 이해의 범위 안에 들어오게 되고 새로운 측면이 우리에게 지각된다. 이러한 과정은 성공적인 꿈분석이 이루어질 적마다 확실한 방법으로 항상 반복된다. 그러므로 꿈의 진술과 관련하여 교조적인 선입견을 갖지 않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해서의 획일화가 눈에 띄는 즉시 우리는 그 해석이 교조적이며 따라서 비생산적임을 알게 된다.

 

552 한번은 밤중에 눈을 뜨고 누운 채로 전날 무덤에 묻힌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그의 죽음이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문득 그가 방 안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가 내 침상 옆에 서서 내게 자기와 함께 가달라고 부탁하는 듯했다. 어떤 모습을 보았다는 느낌은 없고 내적인 시각영상이었으므로 나는 스스로 그것을 환상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그것이 환상이라고 증명할 수 있는지 나 자신에게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때 나는 생각했다. ‘증거가 있든 없든 상관없다! 그를 환상이라고 여기는 대신 똑 같은 자격을 가진 현상적 존재로 받아들이고, 시험삼아 최소한 실재라고 시인해보자.’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그는 문 쪽으로 가서 내게 따라오라는 눈짓을 보냈다. 이를테면 자기와 동행하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물론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번 따져보아야만 했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나의 한상 속에서 그를 따라갔다.

그는 나를 집 밖으로 데리고 나가더니 정원과 길거리를 지나 마침내 그의 집으로 갔다. (시제로 그의 집은 내 집에서 수백 미터 떨어져 있었다). 내가 집 안으로 들어가자 그는 나를 자신의 서재로 안내했다. 그는 발판에 올라서서 붉은 표지로 제본된 다섯 권의 책 중 두번째를 가리켰다. 그것은 서가 꼭대기에서 두 번째 칸에 놓여 있었다.

그때 환상이 끝났다.

 

555 죽음은 역시 무섭도록 가혹하다. 여기에 사람들이 속아서는 안 된다. 물리적인 사건으로뿐 아니라 정신적인 사건으로서 더욱 그러하다. 한 인간을 빼앗기고, 냉혹한 죽음의 정적만 남는다. 더 이상 어떤 관계성도 맺을 희망이 없다. 모든 다리는 파괴되었다. 사람들이 오래 살아주었으면 하고 바라던 인간은 삶의 한가운데서 저승으로 끌려가고, 쓸모없는 인간은 늙도록 살아남는다. 이것이 숨길 수 없는 잔인한 현실이다. 죽음의 야만성과 전횡성은 사람들을 비통하게 만들어 사람들은 자비로운 하느님도 없고 정의나 선도 없다고 단정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죽음은 하나의 즐거운 사건으로 여겨진다. 영원의 관점에서 죽음은 일종의 결혼이며 융합의 비의다. 영혼은 이를 테면 자신에게 결여된 반쪽을 도달하여 통합을 이루게 된다. 그리스 관들에는 그 희열이 무희들로써 묘사되었고, 에트루리아 무덤에는 향연으로 표현되어 있다.

대부분의 내세를 믿는 종교에서 죽음에 대해 이런 관점을 갖고, 그런 식으로 여기는 것 같다.

 

단일성과 무한성

560 세계의 본질과 관련하여 보편적인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확실하고, 마찬가지로 천문학자들도 지금까지 이 문제에 관해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서양인으로서는 정적이기만 한 세계의 무의미성을 견디지 못한다. 그들은 세계의 의미를 전제해야 한다. 동양인은 이런 전제를 필요로 하지 않고 자신의 그 전제를 구현한다. 서양인이 세계의 의미를 완성하고자 하는 반면, 동양인은 인간 속에서 의미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며 자신으로부터 세계나 존재를 벗어버린다. 이것이 바로 부처다.

 

570 그런데 그때 나는 요기(Yogi: 요가수행자) 한 사람이 제단 앞 바닥에 연꽃자세(가부좌를 가리킴)로 나를 향해 앉아 깊은 명상에 잠겨 있는 것을 보았다. 좀 더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그가 내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정말 놀랐을 것 같다. 아니 이 정도는 이제 아무것도 아닌가?

 

571 그 두 꿈의 뚜렷한 경향은 자아의식과 무의식의 관계를 완전히 뒤바꾸고 무의식을 경험적 인간의 생산자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도치는 다른 쪽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의 무의식적 존재가 참다운 것이며 우리의 의식세계는 일종의 환각이거나 일정한 목적을 위해 세워진 하나의 가상적 현실임을 가리키고 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그 속에 있는 동안만 현실로 여겨지는 꿈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분명히 동양의 세계관과 무척 닮은 점이 많은데, 특히 마야(Maja: 오직 정신만이 영원하고 물질세계는 환영이며 착각이라고 하는 힌두교의 오래된 신앙)를 믿는 점에서 그러하다.

 

572 인류에게 결정적인 물음은 당신이 무한한 것에 관련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의 시금석이다. 무한한 것이 본질적이라는 사실을 내가 알 때에야 비로소 나는 결정적인 의미가 없는 하찮은 일에 관심을 쏟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것을 모를 때는 개인적인 소유로 생각하고 잇는 이런저런 지위들 때문에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인정받기를 고집할 것이다. 아마도 나의재능이나 나의미모 대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인간이 그릇된 소유를 고집할수록 그리고 본질적인 것을 덜 느끼게 될수록 그의 삶은 더욱더 만족스럽지 못하게 된다. 그는 한정된 견해를 가지고 있으므로 제약을 받는 듯이 느낀다. 그리고 이것은 질투와 시기를 낳는다. 우리가 이생에서 무한한 것에 이미 접속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느낄 때 우리의 욕구와 자세가 달라진다. 결국 인간이 가치있는 것은 오직 본질적인 것 때문에 그러하다. 우리가 그것을 갖지 않는다면 인생은 헛된 것이다. 또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무한한 것이 그 관계 속에 나타나느냐 그렇지 않으냐가 결정적인 것이다.

 

574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한, 인간실존의 유일한 의미는 존재 그 자체의 어둠속에 빛을 밝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무의식이 우리에게 작용하듯 우리 의식의 증가가 무희식에 작용한다는 사실까지도 추정해볼 수 있다.

인간실존에 대해 회의가 들 때가 있다. 점점 그 빈도가 커지고 있었는데, 융의 이 말을 잘 기억하고 성찰해야겠다.

 

만년의 사상

대극의 통합을 위하여

579 빛에는 창조주의 다른 측면인 그림자가 따른다. 이러한 전개는 20세기에 와서 절정에 이르렀다. 지금 기독교 세계는 실제로 악의 원리와 대립하고 있다. 다시 말해 공공연한 부정부패, 폭정, 허위 날조, 예속 및 양심 억압과 대립하고 있다.

 

579 아무튼 우리는 하나의 새로운 방향 설정, 즉 일종의 메타노이아(헬라어로 회개라는 말로 번역되나 여기서는 방향전환을 뜻함)를 필요로 한다. 우리가 악과 접하게 되면 거기에 빠져들 긴박한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악에 더 이상 빠져들어서는안 되며 선에도 빠져들면 안 된다. 이른바 사람들이 빠져버린 선은 도덕적인 성질을 잃게 된다. 그 자체가 나빠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에 빠져버렸으므로 그것이 나쁜 결과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중독 대상이 알코올이든 아편이든 또는 이상주의든 그 어떤 형태의 중독이든 똑같이 모두 악에서 나온다. 우리는 선악의 대극에 더 이상 이끌려서는 안 된다.

 

581 하지만 윤리적 결단이 요구한다면, 버릇없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도덕적인 선이라고 알려진 것을 경우에 따라 피하고 악하다고 인정되는 것을 행할 수 있는 자유를 가져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선악의 대극에 빠져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일방성에 대하여 우리는 도덕적 형태를 갖춘 인도철학의 네티 네티(neti-neti: ‘아니다 아니다라는 뜻으로 부정의 부정, 즉 부정을 통한 긍정을 시사하는 말이다. 우파니샤드철학 이래 절대네티 네티에 의해서만 인식된다고 한다)’의 모본을 가지고 있다. 이로써 윤리규범은 경우에 따라 불가피하게 지양(止揚)되고, 윤리적 결단은 개인의 판단에 맡겨진다. 이런 생각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심리학 이전 시대에도 이미 의무의 충돌이라는 말로 늘 제기되었던 내용이다.

 

582 그러므로 오늘날 제기된 악의 문제에 대해 해답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우선 철저한 자기 인식, 즉 자신의 전체성에 대한 최선의 인식을 필요로 한다. 그는 자신이 얼마만큼 선을 행할 수 있으며 어떤 파렴치한 행위를 할 가능성이 있는지 냉철하게 알고 있어야 하며, 전자를 사실로 여기거나 후자를 착각이라고 여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두 가지 다 가능성으로서는 진실이다. 사람이 원래 그래야 하듯이, 자기기만과 자기착각에 빠지지 않고 살고자 한다면 전자나 후자를 완전히 모면할 수는 없다. ~

이러한 자기인식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그러한 바탕에서 우리가 본능과 마주치게 되는 기층 또는 인간존재의 핵에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본능은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동적 요인으로, 우리 의식의 윤리적 결단이 궁극적으로는 거기에 좌우된다.

 

583 타고난 순진성으로 어느 정치가가 선언하기를, 자기는 악의 상상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고 했다. 정말 참다운 진실은 우리가 악의 상상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악의 상상이 우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591 우리는 미지의 것, 생소한 것이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음을 안다. 꿈이나 어떤 착상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지 저절로 생겨난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듯이 말이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밀려오는 것들을 사람들은 마나, 데몬, 신 또는 무의식으로부터 나오는 작용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594 인간은 성찰하는 정신 덕분에 동물의 세계에서 빠져나오게 되며, 그는 인간 본성이 특히 의식의 발달을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그의 정신을 통하여 증명한다. 의식의 발달을 통하여 그는 자연을 소유하고 그 안에서 세계의 현존을 인식하며 이를 테면 창조주를 입증한다. 이로써 세계는 현상이 된다. 의식적인 성찰 없이는 그렇게 될 수 없다.

 

595 나는 인간의 의미와 신화에 관한 이와 같은 생각으로 모든 것을 다 말했다고 착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사람 모습의 아쿠아리우스 (물병자리) 시대를 앞두고 현재 물고기시대 말기에 언급될 수 있고 아마도 언급되어야만 하는 것을 내가 말했다고 확신한다. 물병자리는 두 개의 대립적인 물고기(일종의 대극융합) 뒤를 따르면서 자기를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여유 만만하게 그 항아리물을 남쪽 물고기 입에 부어넣는다. 물고기는 아들, 즉 아직 무의식적인 것을 나타내고 있다.

물병을 든 사람이 등장해서 물병자리를 사람의 시대라고 하는 건가? 시대 구분은 어떤 기준으로하는건지. 처음 듣는 개념이라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좀 더 찾아봐야겠다.

 

597 어떤 학문도 신화를 대체하지 못하고 어떤 학문으로도 신화를 만들어낼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아니라 신화가 인간 안에 있는 신적인 삶을 계시해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것을 고안해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일종의 신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산의 말씀이 우리에게 오는 것이며, 우리는 그것이 신과 다른 것인지,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 것인지 구별할 수 잇는 방편을 가지고 있지 않다. 말씀은 우리에게 자연발생적으로 다가와서, 우리를 강요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내용이 모두 인간적이며 인식할 수 잇는 것들이다.

그것은 우리의 자유의지와는 상관이 없다. 우리는 영감을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착상이 우리가 궁리해낸 결과가 아니라 그런 생각이 어떤 식으로든지 다른 곳에서우리에게로 스며들어왔다는 것을 안다. 하물며 선인식(先認識)에 속하는 꿈을 우리가 다루면서 어떻게 꿈을 자신의 이성의 작용으로 돌릴 수 있겠는가. 그런 경우에 사람들은 꽤 오랫동안 그 꿈이 일종의 예지 혹은 원견(遠見: 멀리까지 내다본다는 의미)을 의미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그 말씀은 우리에게 닥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견디느라 고생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심각한 불확실성에 내맡겨져 있기 때문이다.

 

원형, 그 역동적인 에너지

600 남들과 뒤섞이지 않도록 개인을 보호하는 데는 지키고자 하거나 지켜야 하는 비밀을 소유하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다. ~

그럴 듯한 비밀의 필요성은 원시단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공동의 비밀은 결속을 위한 시멘트 역할을 해준다. 사회적인 단계에서 비밀은 개별 인격들의 결속 부족을 효과적으로 보상하는 데 의미가 있다.

맞다. 친구와 정말 친해지려면 비밀을 공유하거나 함께 욕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조금 확대하면 집단, 즉 비밀을 공유하는 공동의 결속이 되겠지.

 

602 그럼에도 충분한 이유로 자극을 받아 더 넓은 곳을 향해 자기 자신의 발로 걸어가겠다고 마음먹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에게 제공된 온갖 껍데기, 형식, 울타리, 생활방식, 분위기에서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홀로 걸어갈 것이며 동반자는 자기 자신밖에 없다. 그 자신이 여러 가지 의견과 경향으로 반드시 같은 방향으로 나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자신의 다양성을 공동행동으로 통합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그가 외부적으로는 중간단계의 사회체제로 보호받고 잇다 하더라도, 그것으로는 아직 내적 다양성에 대해 자신을 보호할 수는 없다. 내적 다양성은 그를 자기 자신과 불화하게 하고 외부세계와의 동일성에서 옆길로 빠지게 만든다.

 

617 세계상이란 레비 브륄이 적절하게 명명한 대로 집단표상인 것이다. 확실히 자아와 그의 의지가 큰 역할을 한다. 하지만 자아가 하고자 하는 것은 대개 자기도 모르는 방식으로, 원형적 과정의 자율성과 누미노제에 의해 몹시 방해를 받게 된다. 원형적 과정을 실제적으로 고려하면 종교의 본질을 찾아낼 수 잇다. 종교가 심리학적인 관찰방식을 감당하는 한에서 말이다.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

619 여기서 문제는 가장 큰 것과 가장 작은 것, 가장 먼 것과 가장 가까운 것, 가장 높은 것과 가장 깊은 것인데, 하나는 다른 하나 없이는 결코 언급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언어도 이 모순을 감당할 수 없다.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지 그 전체를 표현할 수 잇는 말은 없다. 부분적인 측면에서 말하는 것은 항상 너무 과하거나 너무 부족하다. 왜냐하면 오직 전체만이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620 사랑은 그의 빛이며 그의 어둠이며 그 끝을 예측할 수 없다. 그가 천사의 혀로 말할지라도또는 과학적인 정밀성으로 세포의 생명을 가장 깊은 바탕까지 주의깊게 관찰한다고 하더라도, “사랑은 결코 그치지 않는다”. 그는 사랑에다 온갖 이름을 마음대로 갖다붙일 수 있겠지만 그는 단지 끝없는 자기기만에 빠질 뿐이다. 그가 한줌의 지혜라도 가지고 있다면 그는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며 미지(未知)를 미지라고, 즉 신의 이름으로 명명할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열등함, 불완전성, 그리고 의존성을 시인하는 것이며 동시에 진실과 오류 사이에서 선택의 지유를 증언하는 것이다.

결국은 기독교적 결론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회고

비밀로 가득 찬 세계

623 어떤 사람이 강에서 한 번 모자로 물을 가득 퍼냈다고 하자.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는 그 강물이 아니다. 나는 강에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도 강에 있지만 그들은 대개 스스로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벚나무 줄기가 자라도록 돌봐야 할 사람이 나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는 거기 서서 자연이 해낼 수 있는 것을 보고 경탄할 뿐이다.

나 자신과 삶에 대해서 조금 더 알게 됐다고 뭔가 대단한 것이나 깨달은 양 우쭐댔었는데, 반성한다. 나는 모자 정도도 안 될텐데

이 말 역시 앞으로도 오랫동안 기억해야겠다.

 

623 어느 랍비에 관한 오래된 훌륭한 이야기가 있다. 그의 제자가 와서 이렇게 물었다. “옛날에는 하느님을 대면하여 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왜 그렇지 못합니까?” 랍비가 대답했다. “오늘날에는 그럴 정도로 허리를 깊이 굽힐 줄 아는 사람이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강물을 길으려면 허리를 얼마만큼은 굽혀야 하는 법이다.

 

624 다른 대부분의 사람과 나의 차이점은, 내게는 칸막이벽들이 투명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고유한 특성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 벽들이 너무 두꺼워서 그 뒤를 보지 못하므로 거기에는 전혀 아무것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느 정도 그 배후의 과정을 인지하는 편이어서 내적 확신을 가지고 있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면 또한 아무런 확신도 갖지 못하며, 아무런 결론도 끌어낼 수 없거나 자신의 결론을 믿을 수도 없다. 나로 하여금 삶의 흐름을 인지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아마도 무의식 그 자체일 것이다. 어쩌면 어릴 적 꿈들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들은 내 삶의 방향을 처음부터 결정해버렸다.

 

624 고독이란 주변에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을 전할 수 없거나 자기는 가치 있다고 여기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황당무계한 것으로 간주될 때 생기는 법이다. 나의 고독은 어릴 적 꿈의 체험과 함께 시작되었고, 내가 무의식에 대한 연구를 할 시기에 최고조에 달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알게 되면 그는 고독해진다. 하지만 고독은 반드시 공동체에 대립하는 것만은 아니다. 고독한 사람보다 공동체에 대해 더 호감을 느끼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모든 개체가 자신의 개성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과 동일시되지 않는 곳에서만 만개하게 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융은 얼마나 고독했을까? 너무 뛰어난 것도 개인에게는 불운일 수도 있겠다. 그냥 평범한 게 복 받은 걸지도

 

625 사람은 자신이 어떤 면에서는 비밀로 가득 찬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감지해야 한다. 그리고 그 세계 안에서는 마음 속으로 예상되는 일뿐만 아니라 그 외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경험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예기치 못한 일들과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일들이 바로 이 세계에 속하는 것들이다. 오직 그럴 때에만 삶은 온전해지는 것이다. 나에게 세계는 처음부터 무한히 크고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627 아마도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사람들을 다른 사람보다도 더 많이 필요로 하고 동시에 훨씬 덜 필요로 한다고 말이다. 다이모니온이 작용하고 있는 곳에서는 사람들이 항상 너무 가깝고 너무 멀다. 다이모니온이 잠잠해진 곳에서만 사람들과 중간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명석한데 나만이 흐리멍덩하구나

628 나는 내 인생이 그렇게 지나간 것에 만족한다. 내 인생은 풍성했으며 내게 많은 것을 가져다 주었다. 어떻게 내가 그토록 만은 것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그동안 일어난 것들은 그야말로 기대 밖의 일들이었다. 나 자신이 달라졌더라면 많은 일이 다르게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되어야 하는 대로 그렇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생긴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629 많은 일이 의도한 대로 이루어졌으나 항상 나에게 이로운 것만을 가져다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일이 저절로 숙명적으로 전개되었다. 나는 내 고집으로 말미암아 일어났던 어리석은 많은 일을 후회한다. 하지만 내가 그런 어리석음을 갖지 않았다면 나의 목표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실망하면서도 실망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에 대해 실망하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실망했다. 나는 인간에게서 경이로운 것들을 경험했고 스스로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해냈다. 그러나 나는 최종적인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인생이라는 현상과 인간이라는 현상은 너무도 큰 것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나는 그만큼 더 나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인식하지 못하게 되며 알지 못하게 된다.

 

629 나는 단지 내가 태어나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어디에 실려다니는 것과도 같았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의 토대 위에 존재하고 있다. 온갖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실존의 견고함과 내 존재양식의 연속성을 느끼고 있다.

 

630 노자가 모든 사람이 명석한데 나만이 흐리멍덩하구나라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내가 이 늙은 나이에 느끼는 바다. 노자는 빼어난 통찰을 지닌 사람의 모범이다. 그는 가치와 무가치를 보았고 경험했으며 인생의 마지막에 자신의 고유한 존재로, 인식할 수 없는 영원한 의미로 돌아가기를 바랐던 사람이다. 인생을 충분히 보아온 노인의 원형은 언제까지나 진실이다. 지능의 어떤 단계에서도 이 유형이 등장하며, 그것이 늙은 농부든 노자와 같은 위대한 현인이든 동일한 유형이다.

융은 나이가 들수록 동양적인 사고를 갖게 되는 것 같다. 앞부분에도 많은 경험에서 도교적 사고가 느껴졌는데, 결국 노자의 얘기가 나오고 있다.

 

편집자의 말: A. 야페

633 나에 관한 책은 항상 일종의 숙명적인 사건이었다. 거기에는 무언가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나 자신으로 하여금 미리 어떻게 쓰도록 한다든지 미리 계획을 세우도록 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이 자서전도 지금 벌써 처음 내가 생각햇던 것과는 다른 길로 접어들고 있다. 어린시절의 기억을 기록한다는 것은 하나의 필수적인 일이 되고 말았다. 이 일을 하루라도 중단하면 그와 동시에 불쾌한 신체적 증상이 따라온다. 그러나 내가 그 작업을 하면 금방 그 증상은 사라지고 머리가 아주 맑아진다.

 

636 항상 그랬듯이 내 인생에서 모든 외적인 것은 우연한 것이고, 오직 내적인 것만이 실체성이 있으며 결정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 숙명적이네. 그 결과 외적인 사건에 대한 기억들은 모두 희미해졌네. 아마도 외적인경험들은 한 번도 실재가 된 적이 없거나, 아니면 단지 나의 내적 발달단계와 일치할 때만 실재가 되었을 것일세. 내 존재의 이러한 외적인발현들 중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이 나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았네. 그것은 내가 모든 정력을 기울여 그러한 일들에 참여했기 때문인 듯이 여겨지기도 하네.

 

637 이 편지에는 융의 태도의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이미 그 일을 착수하기로 결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편지는 거절로 끝나고 있다! 이러한 긍정과 부정 사이의 갈등은 그가 죽는 날까지 결코 수그러든 적이 없었다. 항상 회의의 찌꺼기가 남아있었고, 미래의 독자들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 있었다.

 

640 나는 나의 모든 생각이 태양 주위의 행성들처럼 신을 중심으로 돌면서 불가항력적으로 태양과도 같은 신에게로 끌려가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만일 내가 이러한 힘에 저항한다면 그것은 아주 심각한 죄라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내가 저자라면

l  보완이 필요한

성장기에는 가족과의 관계나 함께 했던 경험, 영향 등이 비교적 많은 부분에서 보인다. 그런데 가장 큰 영향을 끼쳤고 현실에 발을 딛게 한 부인과 자식 등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이 없다. 가족에 대해서 좀 더 언급했더라면 그가 정신적 성장과 깨우침,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의 갈등 등에 대해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것 같다.

 

l  책의 장점

융이라는 이름 자체가 이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그 밖에 뭐가 더 필요할까.

정신분석학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융이 아니라 내가 이런 글을 썼더라면 어떤 출판기획자가 거들떠나 봤을까. 그만큼 꿈이나 환상은 누가 말하냐에 따라 말이 될 수도 안 될 수도 있는 컨텐츠인 것 같다. 

누가 작가인지가 왜 중요한지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책이 아닐까 한다. 


l  내가 저자라면

보완이 필요한 점에서도 언급했듯이 내가 작가라면 결혼후에 만든 가족, 즉 아내와 아이들의 꿈이나 그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글을 썼을 것 같다. 특히 귀신을 느낀 큰 딸과의 대화 또는 그녀의 정신에 대한 분석에서 재미있는 부분이 나왔을 것 같은데... 가족에 대한 보호 차원이 아니라면 가족 부분을 넣는다면, 정신분석학자로서 환상과 꿈에서 살았던 융뿐이 아니라  땅에 발을 대고 있는 남편이자 아버지로서의 융의 인간적인 모습이 드러났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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