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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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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2일 11시 52분 등록

『난중일기』

이순신 지음, 김지윤 편역, 돌베개사

 

26주차 (9/25~10/1)

티올(윤정욱)

 

1. 작가 분석

 

가.   이순신의 생애 :

 

이순신의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아버지는 이정(李貞)이며, 어머니는 초계 변씨(草溪卞氏)로 변수림(卞守琳)의 딸이다. 서울 건천동(乾川洞: 지금의 중구 인현동 부근)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가문은 4대 때에 조선 왕조로 넘어오면서 두각을 나타낸다. 5대조인 이변(李邊)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와 홍문관 대제학을 지냈고, 증조부 이거()는 병조참의에 이르렀다.

 

그는 위로 희신(羲臣)·요신(堯臣)의 두 형과 아우 우신(禹臣)이 있어 모두 4형제였다. 형제들의 이름은 돌림자인 신()자 위에 삼황오제(三皇五帝) 중에서 복희씨(伏羲氏)·요()·순()·우()임금을 시대순으로 따서 붙인 것이다. 그는 사대부가의 전통인 충효와 문학에 있어서 뛰어났을 뿐 아니라 시재(詩才)에도 특출하였으며 정의감과 용감성을 겸비하였으면서도 인자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그의 인자한 성품은 홀로 계신 노모를 극진히 받들 수 있었고, 어버이를 일찍 여읜 조카들을 친아들같이 사랑할 수 있었다. 그의 시골 본가는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면 백암리이나 어린 시절의 대부분은 생가인 서울 건천동에서 자란 듯하다. 같은 마을에 살았던 유성룡(柳成龍)은 『징비록(懲毖錄)』에서 이순신이 어린 시절부터 큰 인물로 성장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었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순신은 어린 시절 얼굴 모양이 뛰어나고 기풍이 있었으며 남에게 구속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라치면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고 그것을 가지고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하였으며,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하여 어른들도 그를 꺼려 감히 그의 문앞을 지나려 하지 않았다. 또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급제하여 발신(發身)하려 하였다. 또 자라면서 말타고 활쏘기를 좋아하였으며 더욱이 글씨를 잘 썼다.

 

28세 되던 해에 비로소 무인 선발시험의 일종인 훈련원별과에 응시하였으나 불운하게도 시험장에서 달리던 말이 거꾸러지는 바람에 말에서 떨어져서 왼발을 다치고 실격하였다. 그 뒤에도 계속 무예를 닦아 4년 뒤인 1576(선조 9) 식년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처음 관직에 나갔다. 그러나 무관으로 발을 들여놓은 그의 진로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중략)

 

그는 곧 왜침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좌수영(左水營: 여수)을 근거지로 삼아 전선(戰船)을 제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등 일본의 침략에 대처하였고, 나아가서 군량의 확보를 위하여 해도(海島)에 둔전(屯田)을 설치할 것을 조정에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듬해인 1592 4 13일 일본의 침입으로 임진왜란이 발발되었는데 일본의 대군이 침입해 왔다는 급보가 전라좌수영에 전달된 것은 이틀 뒤였다.

 

(중략)

 

5 29일 그는 거북선을 앞세우고 23척의 전선으로 여수항을 출항하였다. 노량(露梁) 앞바다에 이르러 전선 3척을 인솔하고 있던 원균이 그의 전함에 올라와 적정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조선수군은 곧 일본수군이 정박중인 사천으로 달려갔다. 이때 왜군은 대부분 상륙하여 있었고 해변에는 왜선 12척이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다. 그는 공격이 용이하지 않자 그들을 바다로 유인하여 섬멸할 계획을 세웠으며, 그 작전계획은 적중하여 왜선 12척을 파괴하고 많은 왜군을 섬멸하였다. 이 싸움에서 군관(軍官) 나대용(羅大用) 등이 부상하였고, 그도 적의 조총탄에 맞아 왼쪽어깨가 뚫리는 부상을 입었다. 이 싸움에서 최초로 출동한 거북선의 위력은 확고한 인정을 받았다. 6 2일 왜선이 당포(唐浦)에 정박중이라는 보고를 받은 그는 곧 그곳으로 달려갔다.

 

당포 선창에는 일본수군장 가메이(龜井玆矩)와 구루시마(來島通元)가 인솔하는 대선 9, 중·소선 12척이 정박하고 있었으며, 일본수군들은 성 안팎에서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다 조선수군을 보고 발포하였으나 거북선을 앞세운 조선수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대패하고 왜장 구루시마가 전사하였다. 당포해전 다음날 그의 함대는 가박지(假泊地)인 창신도(昌信島)를 떠났다. 다음날 당포 앞바다에서 왜선이 거제로 향하였다는 정보를 받고 즉시 전함대에 거제출격을 명하고 발선(發船)하려는 때에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전선 25척을 이끌고 이곳에 오자 그는 매우 반갑게 맞았다.

 

5일 아침 전선 51척과 중·소선 수십척의 연합함대는 일제히 거제로 향하였다. 이때 피난민으로부터 거제로 도피하였던 왜선단이 다시 당항포로 도주하였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그와 이억기와의 연합함대는 바로 길을 바꾸어 당항포로 향하였다. 당항포 내만(內灣)에는 왜의 대선 9, 중선 4, 소선 13척이 정박 중이었다. 조선수군의 내습을 발견한 일본수군은 먼저 공격을 가해 왔다. 아군의 전선들은 적선을 포위하고 먼저 거북선을 돌입시켜 맹공을 가하였다. 이 싸움에서 왜군은 대패하였고 왜선은 모두 소실되었다.

 

(중략)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내원(來援)하자, 죽도(竹島)로 진을 옮기고, 이어 장문포(長門浦)에서 왜군을 격파, 적군의 후방을 교란하여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왜군의 전진을 막아 이들의 작전에 큰 차질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 뒤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회담이 진행되면서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그는 후일에 대비하여 군사훈련, 군비확충, 피난민 생업의 보장, 산업장려 등에 힘썼다.

 

1597년 명·일 사이의 강화회담이 결렬되자, 본국으로 건너갔던 왜군이 다시 침입하여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그러자 그는 적을 격멸할 기회가 다시 왔음을 기뻐하고 싸움에 만전을 기하였다. 그러나 그는 원균의 모함과 왜군의 모략으로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고니시(小西行長)의 부하이며 이중간첩인 요시라(要時羅)라는 자가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에게 가토(加藤淸正)가 어느날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수군을 시켜 이를 사로잡을 것을 은밀히 알려오자, 조정에서는 통제사 이순신에게 이를 실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이것이 적의 흉계인 줄 알면서도 부득이 출동하였으나, 가토는 이미 수일 전에 서생포(西生浦)에 들어온 뒤였다. 이때 마침 조정에서도 영의정 유성룡을 몰아내려는 자들이 있었다. 그는 유성룡이 전라좌수사로 추천한 사람이라 이를 구실로 먼저 그가 모함당하게 되었다. , 그 중에서도 경상우수사 원균 같은 이는 한층 더 노골적인 불만을 가졌던 터라 이순신을 모함하는 소를 올리게 되었다. 상소를 받은 선조는 돌아가는 실정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여 원균의 상소만을 믿고 크게 노하여 이순신이 명령을 어기고 출전을 지연하였다는 죄를 들어 그에게 벌을 주고 원균으로 하여금 그 직을 대신하게 하였다.

 

그러나 유성룡은 끝까지 “통제사의 적임자는 이순신밖에 없으며, 만일 한산도를 잃는 날이면 호남지방 또한 지킬 수 없습니다” 하고 간청하였지만 정세판단에 어두운 선조가 그것을 받아들일 리 없었기에, 이순신을 잡아들이라는 명령만을 내렸다. 이때 그는 전선을 거느리고 가덕도 앞바다에 있었는데, 이러한 소식을 듣고 바로 본영인 한산도로 돌아와 진중을 정리하고 원균에게 직위를 인계하였다. 당시 한산도에는 밖에 있는 군량미를 제외하고도 9,914석의 군량이 있었으며, 화약은 4,000, 총통은 각 선척에 적재한 것을 제외하고도 300자루나 되었다.

 

이때, 영남지방을 순시하던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은 그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왜군이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수군인데, 이순신을 바꾸고 원균을 보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는 치계(馳啓)를 올렸지만 허사였다. 그가 서울로 압송되자, 지나는 곳곳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백성들이 모여들어 통곡을 하며 “사또는 우리를 두고 어디로 가십니까. 이제 우리는 모두 죽었습니다” 하였다.

 

서울로 압송된 그는 이미 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였지만, 그러한 공로도 아랑곳없이 1차 신문(訊問) 때 한 달여 동안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남을 끌어들이거나 헐뜯는 말은 한마디도 없이 자초지종을 낱낱이 고하였다. 1차 신문으로 몸이 쇠약해지자 이순신은 우의정 정탁(鄭琢)의 적극적인 변호로 인해 추가적인 신문을 받지 않게 되었으며, 도원수 권율(權慄)의 막하(幕下)로 들어가 두번째 백의종군을 하게 되었다.

 

남해안으로 향하던 그는 중도에서 어머니의 부고를 받고 “세상천지에서 나 같은 일을 겪는 수도 있을까. 일찍이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한탄하면서 잠시 들러 성복(成服)을 마친 다음 슬픔을 이기고 다시 남쪽으로 향하였다. 그 해 7월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적의 유인전술에 빠져 거제 칠천량(漆川梁)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함으로써 그가 힘써 길러온 무적함대는 그 형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한산도의 군비는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초계(草溪)에서 이 소식을 들은 그는 “우리가 믿은 것은 오직 수군인데 그같이 되었으니 다시 희망을 걸 수 없게 되었구나” 하며 통곡하였다. 원균의 패보가 조정에 이르자 조야(朝野)가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고, 왕은 비국대신(備局大臣)들을 불러 의논하였으나 당황하여 바로 대답도 못하였다. 오직 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만이 그를 다시 통제사로 기용할 것을 주장하였을 뿐이었다. 이리하여 조정을 기만하고 임금을 무시한 죄, 적을 토벌하지 않고 나라를 저버린 죄, 다른 사람의 공을 빼앗고 모함한 죄, 방자하여 꺼려함이 없는 죄 등의 많은 죄명을 뒤집어씌워 죽이려고까지 하였던 그를 다시 통제사로 기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선조도 변명할 말이 궁하였던지 교서(敎書)에서 “지난번에 경의 관직을 빼앗고 죄를 주게 한 것은 또한 사람이 하는 일이라 잘 모르는 데서 나온 것이오, 그래서 오늘날 패전의 욕을 보게 된 것이니 그 무엇을 말할 수 있겠소” 하며 얼버무렸다. 통제사에 재임용된 그는 남해 등지를 두루 살폈으나 남은 군사 120인에 병선 12척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조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전에서 적을 맞아 싸울 것을 결심하였다.

 

명량해전(鳴梁海戰)에 앞서 장병에게 필승의 신념을 일깨운 다음 8 15 13(일설에 12)의 전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하여 31척을 부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 싸움은 재차 통제사로 부임한 뒤의 최초의 대첩이며 수군을 재기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싸움이었다.

 

명량대첩으로 제해권을 다시 찾은 그는 보화도(寶花島: 목포의 高下島)를 본거로 삼았다가, 다음해 2월에 고금도(古今島)로 영()을 옮긴 다음, 군사를 옮겨 진()을 설치하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널리 둔전을 경작시키고 어염(魚鹽)도 판매하였다. 이로 인하여 장병들이 다시 모여들고 난민(難民)들도 줄을 이어 돌아와서 수만 가를 이루게 되었으며, 군진(軍鎭)의 위용도 예전 한산도시절에 비하여 10배를 능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단시일에 제해권을 회복하고 수군을 재기시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의 개인적 능력에 의한 것이었다.

 

1598 11 19일 그는 노량에서 퇴각하기 위하여 집결한 500척의 적선을 발견하고 싸움을 기피하려는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陳璘)을 설득하여 공격에 나섰다. 그는 함대를 이끌고 물러가는 적선을 향하여 맹공을 가하였고, 이것을 감당할 수 없었던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와 선척을 잃었다. 그러나 선두(船頭)에 나서서 적군을 지휘하던 그는 애통하게도 적의 유탄에 맞았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삼가라” 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운명을 지켜보던 아들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그대로 통곡하려 하였으나, 이문욱(李文彧)이 곁에서 곡을 그치게 하고 옷으로 시신을 가려 보이지 않게 한 다음, 북을 치며 앞으로 나아가 싸울 것을 재촉하였다. 군사들은 통제사가 죽은 사실을 미처 모른 채 기운을 내어 분전하여 물러나는 왜군을 대파하였으며, 모두들 “죽은 순신이 산 왜군을 물리쳤다”며 외쳤다. 부음(訃音)이 전파되자 모든 백성들이 애통해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순신 [李舜臣]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상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42496&cid=46622&categoryId=46622)

 

 

나.   난중일기에 대해

 

난중일기는 충무공 이순신이 1592 1 1일부터 1598 11 17일까지 쓴 일기다. 원래는 쓰인 연도에 따라 각 책의 표지가 다르게 달렸으나, 1795년 정조의 명으로 <이충무공전서>가 간행될 때, 이순신의 일기에 <난중일기>라는이름이 붙여졌다.

 

이순신은 거의 매일 일기를 썼다고 한다. 바다에 나가 왜적과 전투를 치른 날도, 왜적이 쏜 총탄을 맞아 부상을 당한 날도, 감옥에서 풀려 나온 날도, 아들의 부음을 들은 날도 일기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다.   이순신이 왜 일기를 썼을까?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 역자는 이렇게 말한다.

“ ‘전쟁이라는 너무도 비일상적인 상황을 체험하면서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의지가 이순신을 일기 쓰기로 이끌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전쟁이라는 일상도 잦아지면 일상이 된다. 일상이 되면 늘 하던 대로 습관적으로 대하기 쉽다. 다른 모든 일은 몰라도 전쟁에 대한 준비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일상에 매몰되지 않고 매일 있었던 일을 점검하면서 스스로를 담금질 하는 과정이 필요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순신 장군에게는 매일 저녁 혼자인 시간에 일기를 쓰면서 그 날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전쟁을 준비하고 전략을 구상하는 시간으로 삼았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순신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일기 쓰기를 멈추지 않았던 이유가 아닐까?

 

 

라.   엄격한 모습의 이순신 (전장에서 장수로서의 엄격한 모습)

 

(26) 전쟁 대비에 여러 가지로 결함이 많아 군관과 담당 아전에게 벌을 주었다. 첨사를 잡아들이고 교수는 내보냈다.

 

 

마.   자애로운 동료로서의 이순신

 

 

II. 가슴을 치고 들어오는 문구들

 

<책 머리에>

 

(6) 이순신은 수십 번의 해전에서 승리만을 거두며 왜적을 물리치고 조선을 지킨 위대한 업적을 이룬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순신이 반드시 성웅으로만 미화될 것은 아니다. 『난중일기』에 보이는 것은 인간 이순신의 모습이다.

 

(24) 아산으로 문안 갔던 나장이 들어와,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행이다.

 

(26) 1592 2 25일 흐림

전쟁 대비에 여러 가지로 결함이 많아 군관과 담당 아전에게 벌을 주었다. 첨사를 잡아들이고 교수는 내보냈다.

 

è 임진왜란이 시작 된 것은 임진년(1592) 4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가토 기요마사를 보내 부산을 침공하면서부터였다. 전쟁이 실제로 발발하기 전부터 전쟁 대비에 한창이었다는 충무공의 대비 정신이 놀랍다. 물론 1591년부터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것인가를 두고 조정 대신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였다고는 하나 실질적인 대비에는 미흡했었다.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된 충무공만은 제외였다. 여러 군영을 꼼꼼하게 살피며 전쟁 준비에 최선을 다한다. 충무공의 가장 큰 장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사소한 것부터 하나씩 미리 챙기는 준비 정신이 아닐까 한다. 그의 이러한 준비 정신에 대해 역자 역시 이렇게 말한바 있다.

 

“(28) 이순신의 승리는 철저한 대비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592 2월에는 몸소 관할 지역을 순회하면서 무기와 전선에 이상이 없는지 점검하였고, 1593년부터 정유재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명나라와 일본이 강화 협상을 벌이며 실제 전투가 뜸하던 시기에도 이순신은 무기와 전선을 새로 만들며 다시 있을지 모를 전쟁을 대비했다

 

(33) 1596 7 2일 맑음

새로 지은 정자에 올라 편을 나누어 활쏘기를 했는데, 경상도 순찰사 편이 162획이나 졌다. 하루 종일 퍽 기분이 좋았다.

 

è 다소 의역이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들지만 어쨌거나 난중일기라는 것이 단순한 병영생활기록부가 아닌 이순신의 개인적인 감상들도 상당수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마저 든다. 만약 난중일기라는 것이 단순한 병영 활동에 사실적 기록이나 전쟁을 준비하는 장수로서 사실적인 내용에 대한 기록에만 그쳤다면 어쩌면 그것의 가치는 반감되었을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일기는 그 날 충무공이 직접 썼다고 한다. 그것은 그 날 자신의 감상이 최대한 그대로 반영되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가 실록에 남아 있는 기록만으로써 충무공을 이해해야 한다면 우리는 그를 평면적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의 감상이 잘 드러나 있는 난중일기라는 사료를 통해 우리는 충무공을 더욱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난중일기의 가장 큰 의의다.

 

(37) 1594 2 16일 맑음

암행어사 유몽인의 보고서 초안을 보니 임실 현감 이몽상과 무장 현감 이충길, 그리고 영암 군수 김성헌 및 낙안 군수 신호를 파면하라 청하고, 순천 부사는 탐관오리 중 첫째라고 거론하였다. (중략) 임금님의 귀를 속이는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구나. 나랏일이 이러하니 왜적이 평정될 리 만무하다.

 

è 아마도 충무공은 난중일기(당시에는 임진일기 등)를 쓰면서 주변에 자신의 감성이나 소회를 담은 가감 없이 써 내려갔다.

 

(41) 1594 2 13일 맑고 따뜻함

곧바로 나대용을 수사 원균에게 보내 작은 이득을 보고 공격한다면 큰 이익을 이루지 못할 것이니 일단 머물고 있다가 기회를 타서 무찔러 전멸시키자는 말을 전하게 하였다.

 

è 원균(1540~1597)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 때 경상우도 수사, 충청도 병사,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냈으며 이순신과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순신이 적의 공격에 대비하고 철저한 준비 끝에 적을 공격하여 연전 연승을 거둔다면 원균은 일단 돌격 앞으로를 외쳤다. 이순신 장군에 비해 한양과 가까이 있었던 원균은 조정에 이순신이 앞으로 나아가기를 저어한다고 거짓 보고를 자주 올렸고, 이순신이 백의종군을 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둘의 사이가 좋을 리 만무했다.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을 하던 1597년 칠천량 전투에서 원균을 앞 세운 조선 수군은 왜군에게 대패를 하였고, 원균 자신도 그 전투에서 전사하고 만다.

 

(42) 1594 9 3일 비가 옴

새벽에 임금님께서 비밀리에 내리신 분부가 도착했다. 수군과 육군 장수들이 팔짱을 끼고 서로 쳐다보기만 할 뿐, 한 가지 계획이라도 세워서 나아가 적을 토벌하지 않는다는 말씀이셨다. 3년 동안 바다 위에 있으며 이런 일이 있을 리 만무하다. 여러 장수와 죽음을 각오하고 복수하자는 뜻을 맹세하고서 하루 또 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다만 왜적이 험한 곳에 소굴을 지어 그 땅을 차지하고 있는 까닭에 가벼이 진군할 수 없을 따름이다. 더욱이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하지 않았던가!

 

è 전장의 실체를 경험해보지도 않은 조정 대신들의 탁상공론이 전장의 영웅 충무공의 어깨를 무겁게 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그 해 5월 옥포 해전이 있고, 1594 3월 제2차 당항포 해전이 있기까지 이순신 장군은 열 차례의 대 규모 전투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었다. 오히려 왜군의 수장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수군과는 해상에서 싸우지 말라고 까지 하기도 하였다. 이미 국내에 상륙했던 왜군들은 보급로가 끊겼고, 이 때문에 낙안, 진지 등 왜관을 설치하고 읍성을 쌓아 주둔하며 장기전을 도모하는 등 그들의 전략을 대대적으로 수정하는데 조선 수군의 공로가 매우 컸다. 두려워하는 마음이 큰 선조의 눈을 가리고 있는 대신들은 거짓 보고를 통해 충무공의 공을 깎아 내리기 바빴다. 이를 바라보는 충무공의 안타까운 마음과 한탄이 난중일기 곳곳에 드러난다. 이런 억울한 상황 속에서는 그는 지피지기면 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 정신으로 전쟁에 대비하고 또 대비한다. 진정한 민족의 성웅이다.

 

(42) 1594 9 3일 비가 옴

나랏일이 앞으로 넘어지고 뒤로 자빠지듯 곤경에 처해 있는데, 나라 안에는 구제할 방법이 없을 듯 싶었다. 어쩌면 좋단 말인가. 어쩌면 좋단 말인가.

 

è 이순신은 한산도에 있을 때 작전을 세우는 집이라는 뜻을 지닌 운주당(運籌堂)을 짓고 밤낮으로 머물면서 여러 장수와 군사적인 일을 의논했다고 한다. 그게 두 번이나 쓰면서 토하듯 뱉어내는 한숨이 가슴 아프게 들린다.

 

(43) 1594 7 12일 맑음

공무를 보고 나서 활을 쏘았다. 영의정 류성룡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순변사에게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이는 필시 영의정을 시샘하는 자들이 말을 지어내 해코지하는 것일 게다.

 

(44) 1595 9 17일 맑음

식사를 마치고 서울에 편지를 써서 보냈다. 김희번이 조정에 올릴 보고서를 가지고 출발하였다. 영의정(류성룡)에게 유자 서른 개를 보냈다.

 

è 영의정(류성룡)을 생각하는 충무공의 마음이 각별하다. 아마도 둘에게는 오래 전부터 서로를 의지하게 하는 계기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충무공은 사람에 대한 호불호가 분명하다. 일기라고는 하지만 사람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것에 거침이 없다. 그런 그가 류성룡을 대하는 마음에는 편애(偏愛)’로 느껴질 만큼 각별하다. 전장에 있는 장수는 외롭다. 그러나 그것은 류성룡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자신들의 안위만을 걱정하는 조정 대신들 사이에서 영의정은 바다 위에 떠있는 섬처럼 외로웠을지도 모른다. 류성룡에게 보냈다는 유자 서른 개. 이 글이 자꾸만 되 읽힌다. 아마 류성룡의 가족까지도 생각해서였는지 모른다. 문득 유자를 보내는 충무공의 마음은 어떠했을지 생각해 본다. 그 유자를 받은 류성룡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머나 먼 전장에서 자신을 생각하며 유자를 보낸 그 마음이 아려 유자를 차마 먹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막 가을로 넘어서는 9월 중순, 제주에서 밖에 나지 않는 유자를 서울로 보내는 충무공의 마음이 아리다.

 

(53) “역자의 말

5 7일 지금의 경상남도 거제시 옥포동 앞바다인 옥포에서 왜적과 첫 전투를 치러 적선 26척을 물리쳤다. [옥포해전]

 

(55) 1592 5 29 (“역자의 말”)

왜적이 벌써 사천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5 29일 사천 앞바다로 출격하였다. 이 날 거북선이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되어 돌격전을 펼쳤고, 모두의 선전 끝에 왜적의 배 13척을 침몰시켰다. [사천해전]

 

è 사천해전은 거북선이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되었던 전투라고 한다.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깊다. 임진왜란이 그 해 4월에 발발한 것을 감안해 볼 때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을 미리 기획하고 준비했던 것이다. 그가 어떻게 이 모든 것들을 미리 준비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60) 1593 2 22

얼마 후 진도의 큰 전함이 적에게 포위되어 구출할 수 없을 듯 했는데, 우후가 곧바로 들어가 구해 냈다. 경상 좌위장과 우부장은 보고도 못 본 체하며 끝끝내 배를 돌려 도와주지 않았으니 그들의 형편없음은 말할 거리도 못 된다. 원통하고 분하다. 오늘의 분함을 어떻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다 경상 수사(원균)가 이렇게 만든 것이다.

 

è 생사를 함께하는 전장에서도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무리들이 있다. 그들에게 충무공은 형편없으며, 말할 거리도 되지 않는다며 아주 직설적으로 비난하고 있다. 그리고 그 비난의 화살은 경상 수사 원균을 향하고 있다.

 

(63) 1594 3 4일 맑음

새벽 두 시쯤 출발했다. 진해 앞바다에 이르러 왜적의 배 여섯 척을 추격해 사로잡아 불태웠다. 저도에서도 왜선 두 척에 불을 놓았다.

 

è 저도(楮島)라는 지명이 반갑다. 이 곳은 지금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에 속한 섬으로, 지금도 저도라는 이름이 남아있다. 이 곳에는 바다를 가운데 두고 육지와 육지를 연결하는 다리가 있는데 저도연륙교라고 한다. 매주 주말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 명소로서 예전에는 서울의 남산 타워와 마찬가지로 많은 연인들이 이 곳으로 와서 다리 구조물 곳곳에 서로의 이름을 새긴 열쇠고리를 채우며 사랑이 영원하길 빌곤 했다. 지금은 이전의 열쇠들을 모두 철거하고 열쇠를 따로 채워둘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서 사진을 촬영할 수 있는 곳으로 두기도 했다. 이 곳은 바다를 인접한 주변 풍경이 아름다워 바다를 바라보면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찻집이 유명하다. 또한 주변을 산책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볼 수 있는데, 여름이면 수상 레져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도 곧잘 볼 수 있다.

 

(71) “역자의 말

전쟁이 길어지면서 일본군 가운데 일부는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또는 상관의 혹독한 매질을 견디다 못해 조선 진영으로 와서 항복을 하였다. 조선이 항복한 왜인들을 후하게 대접한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항복한 왜인들은 모여 있으면 음모를 꾸밀지 모른다는 이유로 조선 땅 여러 곳에 나누어 두었으며,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자나 검술에 능숙한 자는 조선군에 편입시켜 그 기술을 전수하게 하였다. 1594년 가을 무렵부터 항복한 왜인들의 상당수는 이순신이 다스리던 한산도로 보내져 노 젓는 선원이 되었고 왜적을 물리치는 데도 얼마 간 도움이 되었다.

 

(77) 1597 9 15일 맑음

장군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였다.

 

병법에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했고, ‘한 사람이 길목을 잘 맡으면 천 명도 충분히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이 지금 내가 하려는 말이다. 너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즉각 군율에 따라 한 치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

 

è 사즉필생 생즉필사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이 한 마디로 우리 모두의 마음을사로 잡은 명량해전의 전야다. 내일이면 큰 전투가 있다. 그 전투를 앞두고 장군들에게 이 말을 하며 충무공은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그리고 그들을 물리고 저녁에 다시 홀로 일기를 쓰면서 그는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새삼 외로웠을 것 같기도 하다. 외로움과 불안함, 걱정 이 모든 감정들을 그는 의연히 맞이했을 것이고 다음 날 있을 대규모의 전투에 아무렇지 않은 듯 임했을 것이다.

 

(77~81) 1597 9 16일 맑음

아침 일찍 정찰병이 와서 셀 수 없는 왜선이 ~ 당사도로 건너가 배를 대고 밤을 보냈다.

오늘 일은 참으로 하늘이 주신 큰 행운이다.

 

è 명량해전 당일의 전투 모습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82) 1598 9 21일 맑음

왜적이 타고 왔던 배와 이러저러한 물건들을 빼앗아 와서 진 도독에게 바쳤다.

 

è 명나라 수군 장수 진린 (1543~1607) 1598 7월에 500여 척의 배를 이끌고 조선을 도우러 왔다. 진린과 이순신의 사이가 처음부터 좋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순신은 실질적으로 명나라 수군의 힘을 빌리면서도 공을 세웠을 때는 이를 진린에게 돌리는 방식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계속해서 구축할 수 있었고, 명나라 군사를 활용하여 왜군을 물리치는데 큰 역할을 했다.

 

(87) 1592 3 20일 빗발이 거셈

순천은 수색 업무를 기한 안에 마치지 못했기 때문에 업무를 대신하고 있는 장수와 담당 아전, 도훈도 등을 추궁했다. (중략) 반나절 동안 내나로도와 외나로도, 대평두도와 소평두도를 수색하고 같은 날 포구로 돌아왔다고 하니 일을 이다지도 거짓으로 꾸밀 수 있단 말인가.

 

è 충무공은 하급 군인의 보고서도 허투루 보지 않았다. 장수는 지시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 실무를 이해하고 있어야 병사들을 지휘하고 통솔할 수 있다.

 

(88) 1595 2 1일 맑지만 바람이 붊

아침에 대청으로 나가 보성 군수를 기한을 넘긴 죄로 처벌하였다.

도망쳤던 왜인 두 명을 처형하였다.

 

(89) 1595 4 29일 새벽 2시쯤 비가 내리기 시작해 아침 6시경 갬

해남 현감이 공사 간의 예를 행한 뒤, 두 번이나 기한 안에 오지 않은 하동 현감에게 곤장을 아흔 대 쳤다. 해남 현감에게도 곤장을 열 대 때렸다. 미조항 첨사는 그간의 사정을 아뢰었다.

조방장 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눴다.

노윤발이 미역을 아흔아홉 동 따왔다.

 

è 전시(戰時)에 장수가 위임 받는 권한은 막강하다. 전시에는 후방에서의 지역 현감의 역할이 아주 중요했다. 병사들을 모아 전쟁터로 보내야 했고 식량은 물론 각종 군수품에 대한 지원도 필요했다. 그러나 당시에 일부 지역 현감들은 병사들과 물자를 보내라는 요구에도 차일피일 기일을 미루며 늦게 대응하기 일쑤였다. 충무공은 이에 지역현감이라 할지라도 곤장을 때리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공사 간의 예를 행한 뒤 곤장을 쳤다는 부분은 새롭게 다가온다. 그리고 노윤발이라는 사람이 충무공에게 미역을 아흔아홉 동을 따와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라는 숫자는 장수를 상징한다. 아흔아흡 동의 미역을 바쳤다는 것은 오늘 내일의 생사를 예측 하기 힘든 전장에서 충무공이 무탈하게 장수 하시어 종래에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를 바라는 충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한다.

 

(89) 1595 5 15일 궂은비가 그치지 않아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음

광양 사람 김두검이 복병으로 있을 당시 순천 부사와 광양 현감에게서 이중으로 삵을 받아 그 벌로 수군에 나왔으면서도 칼을 차지 않고 활도 메지 않은 채 무척이나 거만을 떨기에 곤장 일흔 대를 쳤다.

 

è 아마 김두검이라는 사람은 조정 대신 가운데 소위 빽(?)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한다. 이런 사람도 예외 없이 거드름을 피우면 곤장을 맞는다. 그래야 전장이 돌아간다. 다른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지 않는다.

 

(89) 1595 6 16일 맑음

순천 7호선의 장수 장일이 군량을 훔치다가 잡혀 왔으므로 처벌하였다.

 

è 모든 군상의 모습들이 보이는 곳 바로 전장이다. 실제로 조선 수군들은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먹을 음식과 마실 물이 제대로 배급되지 않아 충무공이 그들의 모습이 보기 매우 안쓰러운 지경이었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98) 1593 5 30

기효근은 배에 어린 여자를 태워 놓고 남들이 알까 두려워하니 우습다. 나라가 위급한 일을 당한 때에 어여쁜 여자를 데리고 다닐 정도이니 그 심사가 형편없고도 형편없다. 그런데 기효근의 대장인 수사 원균 또한 똑 같은 짓을 하니 어쩌겠는가.

 

è 기효근을 향한 충무공의 불만은 기효근의 대장 격인 수사 원균에게 까지 향해 있다. 난중일기는 이처럼 충무공의 감정들과 당시의 인물들에 대한 분노의 감정들까지 가감 없이 기록되어 있다. 성웅으로서의 장군 이순신이 아닌 인간 이순신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이순신의 모습을 더욱 입체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100) 1595 1 21일 종일 가랑비 내림

장흥 부사가 와서 그 편에 들으니 순변사 이일의 일 처리가 너무도 형편없다.

 

è 역자의 말에 따르면 이일은 백전노장으로 한 때 이순신의 상관이기도 했는데, 함경북도 지역을 함께 수비했을 당시 여진족의 기습에 조선군이 패배를 당한 적이 있었다. 당시 이일은 패전의 책임을 부하인 이순신에게 떠넘기려 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이순신은 첫 번째 백의종군을 하게 되고, 두 사람의 사이는 다소 껄끄러웠던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103) 1597 9 2일 맑음

배설이 달아났다.

 

(106) “역자의 말

전쟁의 와중에 제 한 목숨 보전하려고 자기가 맡은 고을과 백성들을 버리고 달아난 지방 수령은상당히 많았다. 남언상은 이순신 앞에 나타난 며칠 뒤 의금부로 압송되었는데, 이 때 남언상과 같은 죄목으로 잡혀 온 수령만 30여명에 달했다. 언제나 사()보다는 공()이 우선이고, 자신의 목숨보다는 나라를 지키는 일이 먼저였던 이순신에게는 남언상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107) 1597 9 8일 맑음

장수들을 불러 계책을 의논했다.

전라 우수사 김억추는 일개 만호 자리에나 겨우 적합할 뿐 변방을 지키는 장수가 될 만한 인물이 아니다. 그런데 좌의정 김응남이 친분이 두텁다는 이유로 반대를 무릅쓰고 임명해 보냈으니 조정에 재대로 된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다만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다.

 

è 당시 조정에도 이른바 낙하산 인사가 많았던 듯하다. 지금도 40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힘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힘을 통해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을 자기 주변에 앉히고 그들에게 권력을 주려 하는 것은 당장 그 자신의 권력을 오랫동안 가지고 싶어하는 속내와 다름 아니다. 이 날의 일기는 충무공의 개인적인 감정와 분노 그리고 장수로서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부심, 때를 만나지 못해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치지 못하는 한이 날 것 그대로 담겨 있다. 난중일기 가운데서도 몇 안 되는 강한 불만의 표시이다.

 

(112) 1593 5 14일 맑음

원균이 남을 헐뜯고 함부로 행동하는 것은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다.

 

(114) 1594 1 19일 흐리다 오후 늦게 날이 갰지만 바람이 세게 불어 저물녁에 더욱 사나워짐

소비포 권관에게서 들으니 영남에 속한 여러 배의 활 쏘는 군사와 노 젓는 선원들이 다 굶어 죽을 지경이라고 한다. 마음이 아파 차마 듣고 있기 어려웠다.

 

è 충무공은 군율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엄격했지만 이처럼 병사들이 극도로 어려운 환경에서 전쟁에 임하는 것을 마치 자신의 일처럼 가슴 아파했다.

 

(114) 같은 날

수사 원균과 공연수, 그리고 이극함은 눈길을 주었던 여자들과 전부 사통하였다고 한다.

 

è 깜짝 놀랄만한 내용이다. 확실히 난중일기가 처음 쓰여진 목적이 조정 대신이나 왕에게 보고하기 위함은 아니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116) 1595 6 9일 맑음

조형도가 수군은 군사 한 사람에게 매일 식량 다섯 홉과 물 일곱 홉을 준다고 임금님께 거짓으로 고했다고 한다. 인간사 놀랍고 어처구니없기도 하지, 하늘과 땅 사이에 어찌 이처럼 남을 속이는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è너무 많다. 나라 안에 도둑놈들이 너무 많다아마도 충무공은 내심 이렇게 한탄했을지도 모른다.

 

(122) “역자의 말

1593년부터 그 이듬해까지 이순신 진영에는 돌림병이 크게 번졌다. 4개월 동안 진영 안에서 돌림병으로 사망한 사람이 무려 1800여명에 이르렀다. 군사든 백성이든 먹을 것이 부족해 굶주린 상태였기 때문에 돌림병에 감염되면 태반이 목숨을 잃었다.

 

(125) 1593 7 9일 맑음

오늘 밤 바다 위로 뜬 달이 청명하다. 티끌 한 점 일지 않고 바닷물과 하늘빛이 한 가지 색인데, 시원한 바람도 언뜻 불었다. 뱃전에 홀로 앉아 있으니 백 가지 근심이 마음을 두들겼다.

 

è 고독한 그의 모습이 눈 앞에 선한 듯 하다.

 

(126) 1597 1013일 맑음

해남 향리 송언봉과 신용 등이 왜적 사이로 들어가 왜놈들을 끌고 와서 그 지방 양반들을 많이 죽였다고 이야기하였다.

 

è 역자에 따르면 당시 왜적이 일으킨 난리를 틈타 약탈을 자행하거나 반란을 일으킨 조선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고 한다. 홍산 역적 이몽학이 그 대표적인 예다.

 

(129) “역자의 말

이순신은 부하들은 물론 주변의 백성에 대해서도 늘 마음을 썼다. 전쟁으로 인해 갖은 고생을 겪고 있는 백성들을 위해 이 일기에서처럼 부역을 줄여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전리품으로 얻은 쌀과 옷감을 피란민에게 나눠 주기도 하고, 갈 곳 없는 백성들을 거두어 수영에 속한 둔전에서 농사를 짓게 해 먹고 살 방편을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

 

è 이 글을 보다 문득 작금의 나라 경제를 돌아보게 된다. 선 성장 후 분배, 선 분배 후 성장. 경제사를 가르는 큰 이론적 바탕을 이 두 가지로 나눠도 무리가 없지 않을까. 신 자유주의를 기치로 우리는 마치 갈증에 허덕이는 사람처럼 성장을 추구해 왔다. 그 과정에 파생되는 부작용들은 알면서도 모른 체 했다. 열심히 일하고 또 일하면 볕이 들 날이 올 거라 믿었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빈부의 격차는 점점 심해지고, 더욱 문제는 너도 나도 빈자에서 벗어나 부자가 되려고만 하지, 왜 우리가 이런 짓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한치의 의심도 하지 않는다. 당연하게 받아 들인다. 마치 정글에서 하이에나 무리와 사자 무리들에게 쫓겨 나무를 오르는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다. 나무는 한정 되어 있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다. 나무를 오르지도 못한 사람은 하이에나에게 물려 죽고, 나무를 올랐어도 높이 오르지 못한 사람들은 사자에게 물려 죽는다. 그러다 보니 나보다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을 밑으로 끌어내리고 내가 조금이라도 더 높은 곳에 올라가야 산다는 생각이 팽배하다. 반달곰에게 쫓겨 달리던 두 사람이 각자 옆에 사람 보다가 빨리 달리기만 하면 산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하이에나와 사자와 반달곰은 정글에서 살아야 하고, 사람은 마을에서 살아야 한다. 우리가 왜 아등바등 나무에 매달려 떨어질까 안절 부절해야 하는 것일까. 누가 우리는 원래 태어나면서부터 나무에 매달려 태어나는 거라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세뇌시켜 온 것일까. 허리가 두터워야 한다. 적당히 잘 먹고 잘 사는 중산층이 많아야 구성원 전체가 건강해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순신 장군의 행동은 옳다고 생각한다. 당장의 눈 앞의 이익을 위해 백성을 짜내는 것은 나라의 근본을 헤치는 일이다.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조정 대신이라고 앉아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136) 1592 2 20일 맑음

아침에 여러 방비에 필요한 물건들과 전선을 점검했는데, 모두 새로 만든 것들이었다. 무기도 다 그럭저럭 갖추어져 있었다.

느즈막이 출발해 영주에 도착하니 좌우의 산에 핀 꽃과 교외의 향기로운 풀들이 마치 그림 같았다. 옛날에 있었다던 영주도 그 경치가 이러했을까.

 

è 꽃을 바라보며 느끼는 감상들을 풀어내는 충무공의 필치와 감각이 새삼 놀랍다.

 

(139) 1596 5 5일 맑음

밤늦도록 군사들을 뛰놀게 한 것은 내가 즐겁고자 한 것이 아니라, 다만 오랫동안 애쓰고 있는 군사들의 노고를 풀어 주려는 생각에서 그리 한 것이다.

 

(141) 1596 7 13일 맑음

저녁에 항복해 온 왜인들이 광대놀이를 벌였다. 장수가 된 사람으로서 가만히 앉아 보고 있을 일은 아니었지만, 귀순한 왜인들이 간절히 마당놀이를 하고 싶다 하기에 금하지 않았다.

 

(142) 1593513일 맑음

날이 저물어 배로 내려왔는데, 바다 달빛이 배를 가득 채웠다. 온갖 근심이 가슴을 두드려 홀로 안장 뒤척대다 닭이 울고서야 잠깐 잠이 들었다.

 

(143) 15945 9일 비가 오고 또 옴

하루 종일 텅 빈 정자에 홀로 안자 있노라니 수백 가지 생각이 마음을 뒤흔든다. 괴롭고도 심란한 이 마음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흐리멍덩하여 취한 듯 꿈꾸는 듯 바보 같기도 하고 정신 나간 사람 같기도 했다.

 

è 충무공의 고뇌에 찬 모습이 눈 앞에 선하다.

 

(148) 15941014일 맑음

새벽에 꿈을 꾸었다. 왜적들이 항복을 빌며 구멍이 여섯 개인 총통 다섯 자루와 환도를 바쳐 왔다. 왜적의 말을 전해 준 자는 김서신이라 했다. 왜놈들은 무기를 전부 바치고 투항하였다.

 

è 무언가를 강렬하게 바라면 항상 그것에 몰입해서 지내다 보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현상이 있다. 바로 그것과 관련한 꿈을 꾼다는 것이다. 난중일기 곳곳에서는 전쟁 중에 이순신 장군의 꿈에 관한 내용이 많다. 전쟁 중에서도 전쟁을 하는 꿈을 꾸는 것이다. 그가 얼마나 몰입해 있는지, 그로 인한 스트레스는 얼마나 심했을지 짐작조차 어렵다.

 

(149) 1596710일 맑음

새벽에 꿈을 꾸었는데, 어떤 사람은 멀리 화살을 쏘고, 또 어떤 사람은 다 해진 삿갓을 발로 차고 있었다. 나 스스로 미루어 생각해 보니 화살이 멀찍이 나간 것은 왜적들이 멀리 달아날 조짐이었다. 또 망가진 삿갓을 발로 찬 것은 머리에 쓰는 삿갓이 발길질을 당한 것이라, 삿갓을 쓰는 자란 곧 왜적의 두목이니 왜적들을 모두 무찌를 징조였다.

 

è 이순신 장군도 우리처럼 꿈을 꿨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또 신기하기도 하다. 그리고 그 꿈을 꾸고 나서 해석을 좋게 하려고 애쓰는 그의 모습에서 그러한 해석을 통해서라도 심리적 안정을 찾고 위로를 받고 싶어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성군 이순신도 이러한 꿈에서 조차 위로와 안정을 절실히 찾으려고 했던 인간이었다는 사실에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163) 1593612일 비 오다 개다 함

아침에 흰 머리카락을 여남은 올 뽑았다. 머리 세는 것이 꺼려져서가 아니라, 다만 위로 늙으신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에 그리하였다. 하루 종일 혼자 앉아 있었다.

 

è 충무공의 나라에 충성하는 마음과 부모를 생각하는 효심은 하나인 듯 하다.

 

(165) 1595612일 가랑비가 내리고 바람이 붊

새벽에 아들 울이가 들어와 어머니 병환에 조금 차도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도 아흔의 연세에 이렇게 위중한 병을 얻으셨다니 염려가 되고 눈물이 난다.

 

(166) 1594112일 맑음

아침을 먹은 뒤 어머니께 하직 인사를 드렸다. 어머니께서는 잘 가라고 하시며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 내야 한다고 두 번 세 번 당부하실 뿐, 이별의 슬픔 때문에 한숨지으시는 모습은 조금도 없으셨다.

 

è 충무공의 어머니를 보며 죽음을 앞 둔 아들 앞에서 누구보다 의연했던 안중근의 어머니가 떠올랐다. 가슴을 쥐어짜도 그 보다 아프지 않을 고통을 자식들을 위해 의연하게 감내하는 세상 모든 어머니들은 위대하다.

 

(168) 1594830일 맑고 바람 없음

수사 원균의 일은 너무도 해괴하다. 내가 머뭇머뭇하면서 전진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니 천 년을 두고 탄식할 일이다.

 

(177) 159710 14일 맑음

하늘은 어찌 이토록 어질지 못 하신가.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무슨 이치가 이리도 어그러졌느냐. 하늘은 어둡고 땅은 컴컴하니 한낮의 해도 빛을 잃었구나. 슬프다! 우리 막내,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이야.

 

è 아들 면이가 아산에서 왜적들과 싸우다가 목숨을 잃었다. 그의 슬픔과 비통함이 터지듯이 새어 나온다.

 

(179) 15971019일 맑음

저물녁에 코피를 한 되 남짓 쏟았다. 밤에 앉아서 면이 생각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 마음 어떻게 말로 표현할까. 이번 세상에선 영혼이 되었으니 결국 제 불효가 이리 막심한 줄도 모를테지. 슬픔에 울부짖는 꺾이고 찢어진 심정 어찌 억누를 수 있으리오.

 

(184) 159742일 종일 비가 내림

저녁에 성 안으로 들어가 영의정 류성룡과 밤새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닭이 울고 나서야 자리를 끝냈다.

 

(189) 1597416일 궂은비가 내림

어머니 영구를 실어 본가로 돌아왔다. 고향 마을을 바라보니 눈물이 나고 가슴이 찢어진다. 이 심정을 어찌 말로 다하랴. 집에 이르러 빈소를 차리는데, 빗줄기가 거세졌다. 남쪽으로 갈 일도 다급하니 부르짖고 통곡하며 어서 죽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è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채 삼년 상을 마치지도 못했는데, 충무공은 다시 남쪽으로 가야 한다. 부모를 여읜 애통함과 슬픔을 추스를 새도 없이 이 조선이라는 나라는 전장의 소용돌이로 그를 다시 밀어 넣어야만 한다. 그러한 상황에 대해 충무공을 애 끓는 심정으로 어서 죽기만을 기다릴 뿐이라는 말로 대신한다. 사흘이 지난 419, 그는 어머니의 영전에 곡을 하고 길을 나선다. 역자의 말에 따르면 매일 일기 쓰는 것을 거를지 않았던 충무공도 어머니를 여읜 슬픔을 글로 적기는 힘들었다고 한다. 당시의 일기는 모두 나중에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194) 1593530일 종일 비가 내리다 오후 네 시쯤 잠깐 갰지만 다시 비가 옴

수사 원균이 송 경략이 보낸 불화살을 혼자 쓰려고 술수를 부려, 병사가 불화살을 나누어 보내라는 공문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원균은 도무지 공문을 따르려 하지 않을뿐더러 이치에 닿지 않는 말만 늘어놓으니 가소롭다. 명나라 조정에서 천자를 모시는 신하가 보내준 화공 무기인 불화살 1530개를 나누지 않고 오로지 혼자서만 쓰려고 하다니, 그 간계는 입에 올릴 가치도 없다.

 

(196) 159758일 맑음

자신(원균)이 데려온 서리를 곡식 사 오라는 명목으로 육지에 보내 놓고 서리의 처와 사통하려 했는데, 서리 처가 악을 쓰며 따르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와 고함을 지른 일도 있다고 했다.

 

è 원균이라는 사람의 끝을 알 수 있다. 문득 정사에는 이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지 궁금해졌다.

 

(196) 같은 날

원균이 온갖 술수로 나를 모함하는 것, 이 또한 내 운명이다. 서울로 끝도 없이 짐을 실어 보내고 구실을 만들어 나를 헐뜯기가 날로 심해진다. 좋은 세상 만나지 못한 이 신세를 나 혼자서 한으로 여길 뿐이다.

 

è 원균의 사람됨에 대한 분노와 근거 없는 그의 모함에 대해 억울한 마음이 드러나 있다. 원균은 서울로 끝도 없이 짐(뇌물)을 실어 보내지만, 정작 그는 그러한 여유도 그러한 마음도 없다. 다만 때를 만나지 못한 자신의 신세만 한탄하는 충무공의 마음이 서글프다. 민족의 영우에게도 이러한 감정이 있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199) 15978 3일 맑음

이른 아침 선전관 양호가 임금님의 교우서를 가지고 왔다. 바로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하라는 명이셨다. 교유서에 절한 다음 조심스레 서장을 받아 들고 임금님의 명을 잘 전해 받았다는 편지를 써서 봉하였다.

 

è 두 번째 백의종군을 갔던 충무공의 화려한 복귀다.

 

(200) 159786일 맑음

아침밥을 먹고 길을 나서 옥과 경계에 다다르자 순천과 낙안의 피란민들이 도로에 한 가득 쓰러져 있었다. 남녀가 서로 부축하며 가는데 마음이 아파 그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들을 울부짖으며 이렇게 말했다.

사또께서 다시 오셨으니 저희들은 살 길을 얻었습니다

 

(205) 15981117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자 왜적들은 해안에 배를 대고 뭍으로 올라가 도망쳐 버렸다 한다. 포획한 왜적의 배와 군량은 명나라 군사들에게 빼앗겨 빈손으로 왔다고 보고했다.

 

è 이 일기는 이순신 장군이 남긴 마지막 일기라고 한다.

 

 

III. 내가 저자라면

 

1) 목차에 대하여 (독자의 눈으로) : 목차의 좋은 점, 아쉬운 점, 잘못된 점을 분석

 

가.   주제별로 이야기를 묶은 이유는?

 

머리말에서도 역자는 난중일기를 엮으며 시대적 흐름에 따르지 않고 주제별로 묶었다고 미리 밝힌바 있다. 난중일기를 완역해서 내놓은 책들이 많이 있었기에, 주제별로 본문을 따로 가려 뽑아 좀 더 읽기 편한 난중일기를 기획했음을 알겠다. 다만 본문을 읽으면서 흐름에 따라 전개되지 않고 과거와 현재를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집중하기 어려운 점도 있었지만 의미 있는 새로운 시도라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전체의 난중일기를 이해하는데 핵심이 되는 것들만 남겨두고 나머지 것들에 대해서는 덜어내는 작업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2) 보완이 필요한 점 (독자의 눈으로) :

 

가.   너무 많은 직책 이름 (책에 쉽게 몰입하기 어려움)

ó 반대로 생각해 보면 조선 시대 많은 관직에 대해 이해 할 수 있음

 

(예시)

‘- 지사(知事) : 조선 시대 의금부, 중추부, 성균관 등에 두었던 정2품 관직을 가리킨다

‘- 순변사(巡邊使) : 조선 시대 변경 지역의 군사 업무 등을 순찰하기 위해 임금의 명을 받고 파견되던 특사이다. 당시 전라도 순변사는 이일, 경상도 순변사는 이빈이었다.

‘- 도훈도(都訓導) : 조선 시대 각 군영에 소속된 하급 군인 중 우두머리 군사를 가리키는 말로 보인다.

 

거의 모든 생소한 직책에 대해 상세하게 어떠한 일을 하는지에 대해 주석을 달아 놓은 역자의 정성에 새삼 감사한다. 아마 역자의 이러한 수고 덕분에 난중일기를 좀 더 편하고 쉽게 읽을 수 있었음을 고백한다.

 

나.   날짜 순으로 기록되지 않은 점 :

 

앞서 아쉬운 점으로 밝혔지만 더 많은 장점을 위한 의도적인 배려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십 보 전진을 위한 이보 후퇴랄까.

 

 

3) 이 책의 장점 (독자의 눈으로) : 이 부분이 이래서 좋았다, 이런 점이 이 책의 미덕이다 등등

 

가.   옛 지명 그대로 사용 (ex : ‘소비포경남 고성군 하일면의 옛 지명 등)

 

부유창, 서생포, 다대포, 삼가현 등 많은 지명이나 장소들이 현재의 우리에게는 매우 낯선 것들이 대부분이다. 옛 지명이나 장소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되 그 지명 또는 장소의 현재 위치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설명을 붙임으로써 좀 더 생동감을 느낄 수 있었다.

 

나.   많은 등장인물들에 대한 약식 소개

 

난중일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비중을 막론하고 이들에 대한 생애와 업적을 간략히 소개 한 역자의 수고에 감사한다.

 

다.   매 단락 마지막에는 역자의 보충 설명

 

난중일기의 단락과 단락 사이에 한 번씩 쉬어가면서 역자의 보충 설명을 통해 난중일기가 더욱 풍성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45) 류성룡 (1542~1607) : 1593년부터 6년간 나라가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영의정을 맡아 조선 조정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류성룡과 이순신은 어린 시절을 서울의 건천동에서 보냈다. 이 때부터 이들은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지냈던 듯하며, 이후 정치적으로도 운명을 같이하는 사이가 되었다. 1591, 평소 이순신의 자질을 눈 여겨 보았던 류성룡이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로 추천하였고, 이 두 사람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국난을 함께 헤쳐 나갔다.

 

 

4) 내가 저자라면 이렇게 (저자의 눈으로) : 내가 저자라면 이 책에서 아쉬웠던 점을 이렇게 해결하겠다.

 

가.   임진왜란의 배경 (일본 도미토리 막부의 천하 통일 이후)

 

1)     막부 지배권력 강화를 위해

2)     지방 영주세력를 임진왜란에 동원함으로써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동시에 일본 내 자신들의 지배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3)     공공의 적 만들기 (갓 통일을 이룩한 나를 일치 단결시키는 법? 전쟁!)

 

Ex) 영화 그랜드부다페스트를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부유한 미망인 D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나자 이전까지는 그녀와 연락 조차 없었던 그녀의 많은 유족들이 그녀의 유산을 탐내며 장례식에 대거 참여 한다. 미망인 D를 살뜰히 챙겼던 주인공은 그녀로부터 고가의 미술품을 유산으로 받게 되는데, 그 때부터 주인공은 유족들에게 공공의 적이 되고 만다.

 

나.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는데 어려움

 

다.   분노하는 이순신 따로 소개

 

라.   원균의 최후는? (좀 더 상세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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