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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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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5월 10일 22시 20분 등록
강의 (신영복 지음, 돌베개, 2004)

1. 서론

내가 본격적으로 동양고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무래도 감옥에 들어간 이후입니다. 감옥에서는, 특히 독방에 앉아서는 모든 문제를 근본적인 지점에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감옥의 독방이 그런 공간입니다. 우선 나 자신을 돌이켜보게 됩니다.
분단과 군사 독재에 저항하면서 열정을 쏟았던 학생운동의 연장선상에서 감옥에 들어가게 되고, 그것도 무기징역이라는 긴 세월을 앞에 놓고 앉아서 나 자신의 정신적 영역을 간추려보는 지점에 동양고전이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말하자면 나의 사고와 정서를 지배하고 있는 식민지 의식을 반성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고전 독법 역시 과거의 재조명이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당대 사회의 당면 과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고전 독법의 전 과정에 관철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고전 강독에서는 과거를 재조명하고 그것을 통하여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는 것을 기본 관점으로 삼고자 합니다. 그래서 예시한 문안도 그런 문제의식에 따라 선정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성의 고양을 궁극적 가치로 상정하고 있는 것, 그리고 인성이란 개별 인간의 내부에 쌓아가는 어떤 배타적인 가치가 아니라 개인이 맺고 있는 관계망의 의미라는 것이 동양사상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성이란 개념은 어떤 개체나 존재의 속성으로 환원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여러 개인이 더불어 만들어내는 장(場)의 개념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성을 고양시킨다는 것은 먼저 ‘기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자기(自己)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닌 것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자기를 키우는 순서입니다.

동양사상은 가치를 인간의 외부에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종교적이고, 개인의 내부에 두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개인주의적이 아닙니다. 동양학의 인간주의는 바로 이러한 점에서 인간을 배타적 존재로 상정하거나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 두는 인본주의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의 하나이며 그 자체가 어떤 질서와 장의 일부분이면서 동시에 전체입니다. 그리고 인성의 고양을 궁극적 가치로 인식하는 경우에도 인간을 관계론의 맥락에서 파악함으로써 개인주의의 좁은 틀을 벗어나고 있습니다.

과학과 종교를 두 개의 축으로 하는 서양 문명뿐만 아니라 모든 사상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모순 구조를 내장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상은 대립, 모순, 긴장, 갈등 과정에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양적 구성 원리에서는 그러한 모순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화와 균형에 대단히 높은 가치를 부여합니다. 중용(中庸)이 그것입니다. 대립과 모순이 존재한다는 것과, 그것의 조화와 균형을 중시한다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모순 대립의 두 측면이 적대적이지 않다는 것 또한 대단히 중요한 차이입니다.

새로운 문명사적 담론은 근대사회의 기본적인 구성 원리를 뛰어넘는 지점에서 모색되어야 마땅한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지양(Aufheben)을 통하여 21세기의 새로운 구성 원리를 모색하고 있다는 중국 모델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조화와 지양에 의하여 과연 새로운 문명이 모색될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과연 근대성을 뛰어넘는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구성 원리인가에 대하여 논의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통일 과정에 대해서도 심도 있는 논의가 있어야 합니다.

고전을 재조명하는 작업은 어쩌면 오늘날처럼 속도가 요구되는 환경에서 너무나 한가롭고 우원(迂遠)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가 쌓아가고 있는 모순과 위기 구조는 근본 담론이 더욱 절실하게 요구되는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금언이 있습니다. 길을 잘못 든 사람이 걸음을 재촉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2. 오래된 시(詩)와 언(言)..시경(詩經) 서경(書經) 초사(楚辭)

시경은 동양고전의 입문입니다. 시경 독법은 우리들의 문화적 감성에 대하여 비판적 시각을 기르는 일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접근되기보다는 정서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함은 물론입니다. 그런 점에서 아픔과 기쁨이 절절히 배어 있는 시경의 세계는 매우 중요합니다.

원래 시경에 실려 있는 시들은 가시(歌詩)였다고 합니다. 악가(樂歌)지요. 시(辭)+노래(調)+춤(容)이었다고 전합니다. 노래와 춤이 어우러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정의(情意)가 언(言)이 되고 언(言)이 부족하여 가(歌)가 되고 가(歌)가 부족하여 무(舞)가 더해진다고 했습니다. 간절한 마음을 표현하기에는 말로도 부족하고 노래로도 부족해서 춤까지 더해 그 깊은 정한의 일단이나마 표현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악곡(樂曲)은 없어지고 가사(歌詞)만 남은 것입니다.

공자는 시경의 시를 한마디로 평하여 ‘사무사(思無邪)’라 하였습니다. ‘사무사’는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특함이 없다는 뜻은 물론 거짓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시인의 생각에 거짓이 없는 것으로 읽기도 하고 시를 읽는 독자의 생각에 거짓이 없어진다는 뜻으로도 읽습니다. 우리가 거짓 없는 마음을 만나기 위해서 시를 읽는다는 것이지요.

사실과 전설 가운데에서 어느 것이 더 진실한가를 우리는 물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사실보다 전설 쪽이 더 진실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문학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의 내면을 파고 들어갈 수 있는 어떤 혼(魂)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시경의 시가 바로 이러한 진실을 창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이란 결국 진실을 구성하는 조각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의 조합에 의하여 비로소 진실이 창조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문학의 세계이고 시의 세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문화적 환경은 우리 자신의 삶과 정서를 분절시켜놓고 있습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상품미학, 가상 세계, 교환가치 등 현대 사회가 우리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한마디로 허위의식입니다. 이러한 허위의식에 매몰되어 있는 한 우리의 정서와 의식은 정직한 삶으로부터 유리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소외되고 분열된 우리들의 정서를 직시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유력한 관점이 바로 시적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시적 관점은 왜곡된 삶의 실상을 드러내고 우리의 인식 지평을 넓히는 데 있어서도 매우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이 변화할 때 사회가 변화한다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미래가 어디서부터 다가온다고 생각합니까?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식민지 의식의 전형입니다. 권력이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입니다.

낭만주의는 물론 시대와 나라에 따라서 매우 넓은 스펙트럼으로 나타납니다. 문학이나 미학(美學)에서부터 사회체제에 대한 비판적 세계관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한 영역을 포괄하고 있음이 사실입니다. 낭만주의가 대체로 부정적 의미로 인식되는 것은 인간의 정신을 구속하는 억압에 대한 원천적 저항과 비판 의식을 내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대응방식의 개인주의적 성격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에 대한 소아병적 인식의 협소함 때문에, 그리고 도피 또는 복고적이라는 실천의 허약함 때문에 그것의 긍정적 의미가 크게 훼손되어왔기 때문입니다.

3. 주역의 관계론..주역(周易)

주역은 대단히 방대하고 난해합니다. 주역에 담겨있는 판단형식 또는 사고의 기본 틀을 중심으로 읽기로 하겠습니다. 판단형식 또는 사고의 기본 틀이란 쉽게 이야기한다면 물을 긷는 그릇입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바다로부터 물을 긷는 것입니다. 자연과 사회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나름의 인식 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역에 담겨있는 사상이란 말하자면 손때 묻은 오래된 그릇입니다. 수천 년 수만 년에 걸친 경험의 누적이 만들어낸 틀입니다. 그 반복적 경험의 누적에서 이끌어낸 법칙성 같은 것입니다. 물 긷는 그릇에 비유할 수 있지만 또 안경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물과 현상을 그러한 틀을 통해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주역은 오랜 경험의 축적을 바탕으로 구성된 지혜이고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진리를 기초로 미래를 판단하는 준거입니다. 그런 점에서 주역은 귀납지(歸納知)이면서 동시에 연역지(演繹知)입니다. 주역이 점치는 책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경험의 누적으로부터 법칙을 이끌어내고 이 법칙으로써 다시 사안을 판단하는 판단 형식입니다. 그리고 이 판단 형식이 관계론적이라는 것에 주목하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역을 64개의 대성괘를 중심으로 읽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하려는 판단 형식이 바로 이 대성괘에 가장 잘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각 대성괘에는 그 괘의 성격을 나타내는 이름이 있고 괘 전체의 의미를 나타내는 괘사가 달려 있으며 괘를 구성하는 여섯 개의 효와 그 효를 설명하는 효사가 달려있습니다. 이 대성괘를 주역의 기본 범주로 이해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대성괘를 주역의 기본적 범주로 이해하는 경우 우리는 칸트나 헤겔 또는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규정하고 있는 범주들과는 그 수에 있어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한 범주를 갖게 되는 셈입니다. 더구나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판단형식의 단순함에 비하면 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선망이 되고 있는 선두(先頭)는 물론 스타의 자리입니다. 최고의 자리이지요. 그 자리는 모든 영광이 머리 위에 쏟아질 것같이 생각되지만 사실은 매우 힘든 자리입니다. 반대로 맨 꼴찌는 마음 편한 자리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아마 가장 철학적인 자리인지도 모릅니다. 기를 쓰고 달려가야 할 곳이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곳이 비록 편안하고 한적한 달관(達觀)의 공간이긴 하지만 그곳은 무엇을 도모하거나 실천하기에는 너무나 후미진 공간이라고 생각됩니다. 더불어 관계 맺기가 어려운 매우 적막한 처소(處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튼 주역에서는 중간을 매우 좋은 자리로 규정합니다. 그리고 가장 힘 있는 자리로 칩니다.

주역이 복서(卜筮)라고 하더라도 단순한 미신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점이라고 하는 것 역시 그 본질에 있어서는 어떤 현상과 상황을 우리들의 일상적 관점과는 다른 논리로 재해석하고 조명하는 인식 체계입니다. 그것 역시 사물과 변화에 대한 판단 형식의 일종이며 그런 점에서 기본적으로 철학적 구조를 띠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상이란 어느 천재의 창작인 경우는 없습니다. 어느 천재 사상가가 집대성하는 경우는 있을지 모르지만 사상이란 장구한 역사적 과정의 산물입니다. 주역은 글자 그대로 주(周)나라 역사 경험의 총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나라 역시 그 이전의 여러 문화 사상의 총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패로 끝나는 미완성과 실패가 없는 완성 중에서 어느 것이 더 보편적 상황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실패가 있는 미완성은 반성이며, 새로운 출발이며, 가능성이며,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완성이 보편적 상황이라면 완성이나 달성이란 개념은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완성이나 목표가 관념적인 것이라면 남는 것은 결국 과정이며 과정의 연속일 뿐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날 만연한 ‘속도’의 개념을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속도와 효율성, 이것은 자연의 원리가 아닙니다. 한마디로 자본의 논리일 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도로의 속성을 반성하고 ‘길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이란 기본적으로 우리가 조직한 ‘관계망’에 지나지 않습니다. 선택된 여러 부분이 자기를 중심으로 하여 조직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과학 이론도 다르지 않습니다. 객관세계의 극히 일부분을 선별적으로 추출하여 구성한 세계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삶은 천지인을 망라한다고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중심의 주관적 공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매트릭스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것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주역의 범주는 왜소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절제와 겸손이란 바로 이러한 제한성으로부터 도출되는 당연한 결론이라고 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사정을 배려하는 겸손함 그것이 바로 관계론의 최고 형태라는 것이지요.


4. 논어, 인간 관계론의 보고..논어(論語)

고전과 역사의 독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제(時制)라는 사실입니다. 공자의 사상이 서주(西周)시대 지배 계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오늘의 시점에서 규정하여 비민주적인 것으로 폄하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과거의 담론을 현대의 가치 인식으로 재단하는 것만큼 폭력적인 것도 없지요. 우리의 고전 독법은 그 시제를 혼동하지 않음으로써 인(人)에 대한 담론이든 민(民)에 대한 담론이든 그것을 보편적 개념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그러한 관점이 고전의 담론을 오늘의 현장으로 생환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문성은 바로 효율성 논리이며 경쟁 논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효율과 경쟁을 강조하는 자본가는 전문성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전문화를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성공한 자본가들이 공통적인 특징이라는 것이지요. 자본가는 어느 한 분야에 스스로 옥죄이기를 철저하게 거부해왔던 것이지요. 전문화는 있었지만 그것은 언제나 아래층에서 하는 일이었습니다. 귀족은 전문가가 아니었습니다. 육예(六藝)를 두루 익혀야 하는 것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귀족들은 시도 읊고 말도 타고 활도 쏘고 창칼도 다루었습니다. 문사철(文史哲) 시서화(詩書畵)를 두루 익혀야 했습니다. 오늘날 요구되고 있는 전문성은 오로지 노동생산성과 관련된 자본의 논리입니다. 결코 인간적 논리가 못 되는 것이지요.

사회의 본질에 대하여 수많은 논의가 있었습니다만 나는 사회의 본질은 부끄러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부끄러움은 인간관계의 지속성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일회적인 인간관계에서는 그 다음을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사회란 지속적인 인간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사회성 자체가 붕괴된 상태라고 해야 하는 것이지요.

개인의 능력은 그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에 있으며 이 인간관계는 신뢰에 의하여 지탱되는 것이지요. 신(信)은 그 글자의 구성에서 보듯이 ‘인(人)+언(言)’의 회의(會意)로서 그 말을 신뢰함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함부로 말하지 않는 까닭은 그것을 지키지 못할까 두려워서라고 합니다. 신(信)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약속이라고 풀이되고 있지만 언(言)은 원래 신(神)에게 고하는 자기 맹세이므로 신(信)이란 곧 신(神)에 대한 맹세로 보기도 합니다. 사람들 간의 믿음이라는 뜻은 후에 파생되었다고 보지요. 그만큼 신(信)의 의미는 엄격한 것이지요.

크게 생각하면 공부란 것이 바로 관계성에 대한 자각과 성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은 것은 큰 것이 단지 작게 나타난 것일 뿐임을 깨닫는 것이 학(學)이고 배움이고 교육이지요. 우리는 그 작은 것의 시공적 관계성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지요. 빙산의 몸체를 깨달아야 하고 그 이전과 그 이후의 전 과정 속에 그것을 놓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온고(溫故)와 지신(知新)을 아울러야 하는 것이지요.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탓하는 것이 이를테면 존재론적 사고라고 한다면, 관계론적 사고는 내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어느 경우든 지(知)보다는 우(愚)를 어려운 덕목으로 치고 있습니다. 이 경우의 우는 그 속에 대지(大知)를 품고 있는 우입니다. 다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어리석은 척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知)와 우(愚)에 대하여 보다 열린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방금 우가 그냥 우가 아니라 대지를 품고 있는 우라고 했습니다만, 사실 진정한 지란 무지(無知)를 깨달았을 때 진정한 지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자기의 지가 어느 수준에 있는 것인가를 아는 지(知)가 참된 지라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야말로 지의 최고 형태라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경우에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명석합니다. 이 말에 대하여 아마 선뜻 납득하기가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타자의 시각이 정곡을 찌르는 법입니다. 모든 타인은 그러한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집단적 타자인 대중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대중은 현명하다고 하는 것이지요. 대중은 결코 속일 수 없습니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겸허해야 되는 이유입니다.


5. 맹자의 의(義)..맹자(孟子)

오늘날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많은 숙어들의 출전이 바로 이 맹자입니다. 연목구어(緣木求魚), 오십보소백보(五十步笑百步), 농단(聾斷), 호연지기(浩然之氣), 인자무적(仁者無敵), 항산항심(恒産恒心) 등 이루 다 예거하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맹자는 공자 사후 100년경에 활동한 사상가로서 맹자 당시에는 유가의 사회적 지위가 크게 쇠미하여 오히려 묵자(墨子)와 양자(楊子)사상이 크게 위세를 떨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맹자는 당시 세상에 크게 떨치고 있던 다른 사상과의 논쟁을 통하여 자신의 사상을 전개해 나갑니다. 따라서 맹자에는 농가(農家), 병가(兵家), 종횡가(縱橫家) 등 당시의 다른 많은 사상이 소개되고, 또 비판되고 있기 때문에 제자백가의 사상을 가장 폭넓게 접할 수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임금을 바꿀 수 있다는 맹자의 논리는 이를테면 민(民)에 의한 혁명의 논리입니다. 맹자의 민본사상의 핵심입니다. 임금과 사직을 두는 목적이 백성들의 평안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임금을 몰아내고 현인을 새 임금으로 세울 수 있음은 물론이고 사직단도 헐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지요. 사직단은, 비유한다면 로마교황청입니다. 그로부터 임금의 권력이 나오는, 당시 최고의 종교적 권위입니다. 그러한 권위와 성역마저도 가차 없이 헐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 맹자의 민본 사상입니다.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은 사회 원리인 예(禮)가 (그것이 봉건적 사회원리이든, 고대 노예제 사회의 원리이든) 인간 본성에 순응하는 천리(天理)라는 것을 밝히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관적 윤리인 인(仁)보다는 객관적 구조를 갖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객관적 구조가 기존의 제도와 체제에 대한 비판을 봉쇄하는 보다 효과적인 이론으로 기능하는 것이지요.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의 확충이 곧 본성의 사회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자의 사회화가 곧 맹자‘라는 논리가 확인되는 셈입니다.

일상생활의 크고 작은 실패에 직면하여 그 실패의 원인을 내부에서 찾는가 아니면 외부에서 찾는가의 차이는 대단히 큽니다. 이것은 모든 운동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가 아니면 내부에서 찾는가 하는 세계관의 차이로 나타납니다. 세계는 끊임없는 운동의 실체이며, 그 운동의 원인이 내부에 있다는 것은 세계에 대한 철학적 인식 문제입니다. 반대로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 것은 결국 초월적 존재를 필요로 합니다. 마찬가지 논리로 초월적 존재를 만든 어떤 존재를 또다시 외부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지요.

가장 핵심적인 것은 ‘본다’는 사실입니다. 본다는 것은 ‘만난다’는 것입니다. 보고(見), 만나고(友), 서로 안다(知)는 것입니다. 즉 ‘관계’를 의미합니다. 오늘날의 우리 사회는 만남이 없는 사회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주변에서 ‘차마 있을 수 없는 일’이 버젓이 자행되는 이유가 바로 이 ‘만남의 부재(不在)’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얼굴 없는 생산과 얼굴 없는 소비로 이루어진 구조입니다. 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남처럼 한 점에서, 그것도 순간에 끝나는 만남이지요. 엄격히 말해서 만남이 아니지요. 관계가 없는 것이지요. 관계가 없기 때문에 서로를 배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2차대전 이후 전쟁이 더욱 잔혹해진 까닭이 바로 보지 않은 상태에서 대량 살상이 가능한 첨단 무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나는 우리 사회의 가장 절망적인 것이 바로 인간관계의 황폐화라고 생각합니다. 사회라는 것은 그 뼈대가 인간관계입니다. 그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가 바로 사회의 본질이지요. 지속성이 있어야 만남이 있고, 만남이 일회적이지 않고 지속적일 때 부끄러움(恥)이라는 문화가 정착되는 것입니다. 지속적 관계가 전제될 때 비로소 서로 양보하게 되고 스스로 삼가게 되는 것이지요. 지속적인 인간관계가 없는 상태에서는 어떠한 사회적 가치도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맹모보다는 한석봉(韓石峰)의 어머니가 더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자식을 지도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맹모처럼 공부하기에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자신이 몸소 모범을 보여줌으로써 자식이 그것을 본받게 했던 것이지요. 어머니는 떡을 썰고 석봉은 글씨를 쓰지요. 물론 이 게임은 공정한 게임은 아닙니다. 그렇긴 하지만 석봉의 어머님은 매우 훌륭한 교육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부모가 직접 자신의 일면을 자식에게 보여주는 것은 그 교육적 효과는 차치하고라도 참된 스승의 모습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6. 노자의 도와 자연..노자(老子)

중국 사상은 지배 담론인 유가 사상과 비판 담론인 노장(老壯) 사상이 두 개의 축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사회든 지배 담론과 비판 담론이 일정한 길항(拮抗)구도를 가지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동양 사상의 정체성은 논어(論語)보다는 오히려 노자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노자 사상의 핵심은 나아가는 것(進)이 아니라 되돌아가는 것(歸)입니다.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노자가 가리키는 근본은 자연(自然)입니다. 노자의 자연은 천지인(天地人)의 근원적 질서를 의미하는 가장 큰 범주의 개념입니다.

노자의 제1장은 무(無)와 유(有)가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고 있다는 관계론(關係論)의 선언입니다. 무와 유는 그것에 접근하는 접근로에 따라서 구분될 수 있는 개념상의 차이일 뿐입니다. 따라서 노자의 무(無)는 ‘제로’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인식을 초월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무입니다. 우리의 인식에 있어서 무라는 것이지요. 도는 천지 만물의 생성과 변화 그 자체를 의미하며 그런 의미에서 근원적 법칙성입니다. 인간의 인식이 그것을 담아낼 수 없지요. 도리어 인간의 인식이 그것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노자의 철학적 체계입니다.

노자 제2장은 인식론이며 실천론입니다. 그 인식에 있어서 분별지(分別智)를 반성하고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아마 선악의 구분처럼 천박한 인식은 없다고 합니다. OX식의 이분법적 사고도 저급한 것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기존의 저급한 인식을 반성하자는 것이지요. 유무(有無), 난이(難易), 고저(高低), 장단(長短)은 비교할 것이 아니지요. 스스로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굳이 비교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지요. 더구나 윤리적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지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미의식마저도 기존의 인위적 틀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이지요. 말없이 실천하고, 자랑하지 말고, 개입하지 말고, 유유하고 자연스럽게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노자 실천론의 요지입니다.

유가에서는 제3장을 들어 노자 사상은 우민사상(愚民思想)이며 도피사상(逃避思想)이라고 비판합니다. 무지(無知), 무욕(無欲) 그리고 무위(無爲)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먼저 전체의 의미를 읽고 전체적 연관 속에서 부분을 읽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자구와 부분을 도려내어 확대하는 것은 처음부터 부정적인 결론을 이끌어내려는 것이지요. 미운 사람을 험담하는 경우에 그렇게 하지요. 부분의 집합이 전체가 아니기 때문에 부분의 확대는 전체의 본질을 그르치기 쉽습니다. 무위는 무행(無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무위는 그 자체가 목적이나 가치가 아니라 방법론입니다. 실천의 방식입니다. 그것이 목표로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난세의 극복’(無不治)입니다. 혼란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노자의 물은 민초들의 정치학이면서 동시에 우리 사회의 실천적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변혁 역량은 대단히 취약합니다. 절대적인 역량에 있어서 취약하고 더구나 부문별로 또는 정파 단위로 분산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처럼 분산된 부문별 역량들의 결합 수준 또한 대단히 저급하기 때문입니다. 연대야말로 당면의 실천적 과제인 것이지요. 그리고 진정한 연대란 다름 아닌 노자의 ‘물’입니다. 하방연대(下方連帶)입니다. 낮은 곳으로 지향하는 연대입니다. 하방연대에는 보다 진보적인 역량이 덜 진보적인 역량과 연대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덜 진보적인 역량은 더 내놓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수레를 타고, 그릇을 이용하고, 방에서 생활하지만 그것은 수레나 그릇이나 방의 있음(有)에만 눈을 앗기어 막상 그 있음의 배후(無)를 간과하고 있는 것이지요. 숨어있는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지요. 즉 유(有)의 배후로서의 무(無)를 드러내는 것이 노자의 철학이고 이 장의 의미입니다. 나는 이 장이 한 개의 상품의 있음(有) 즉 그 효용에 주목하기보다는 그것을 만들어내는 노동을 생각하는 화두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기쁨이 누군가의 아픔의 대가라면 그 기쁨만을 취할 수 있는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는 것이지요. 자본주의적 가치란 소유와 소비라는 유(有)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유(有)의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고 어떻게 유지되는가, 이 유의 세계가 어떠한 것을 축적하고 어떠한 것을 파괴하고 있는가를 주목하는 실천적 관점이 바로 노자의 현대적 독법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노자 사상을 몇 마디 말로 정리하기는 어렵습니다만 그것의 핵심은 동(動)보다는 정(靜)을, 만(滿)보다는 허(虛)를, 교(巧)보다는 졸(拙)을, 웅(雄)보다는 자(雌)를, 그리고 진(進)보다는 귀(歸)를 더 높은 가치로 보는 데 있습니다. 노자 사상은 마치 수학에서 ‘0’의 발견이 갖는 의미와 공헌을 중국 사상에 기여했다고 평가합니다. 노자 사상은 상당 부분이 법가 사상으로 계승되기도 합니다. 노자의 철학은 귀본(歸本)의 철학입니다. 본(本)은 도(道)이며 자연입니다. 그런 점에서 노자의 철학을 유가 사상에 대한 비판 담론으로 규정하는 것은 노자를 왜소하게 읽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자 철학이야말로 동양 사상의 정수를 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7. 장자의 소요..장자(莊子)

장자 사상이 가장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이 제1편 소요유(逍遙遊)입니다. ‘소요유’는 글자 그대로 아무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거닌다는 뜻입니다. 소요(逍遙)는 보행(步行)과는 달리 목적지가 없습니다. 소요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하릴없이 거니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소요는 보행보다는 오히려 무도(舞蹈)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춤이란 어디에 도달하기 위한 동작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동작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장자의 소요유는 ‘궁극적인 자유’, 또는 ‘자유의 절대적 경지’를 보여주기 위한 개념입니다. 인간의 삶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어떠한 가치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소요유의 의미이고 나아가 장자 사상의 핵심입니다.

장자는 그 전편에 흐르는 유유자적하고 광활한 관점을 높이 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이론과 사상뿐만 아니라 모든 현실적 존재도 그것은 드높은 차원에서 조감되어야 할 대상입니다. 조감자 자신을 포함하여 세상의 모든 존재는 우물 속의 개구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부분이고 찰나라는 것을 드러내는 근본주의적 관점이 장자 사상의 본령입니다. 여기에 비하면 논어와 맹자의 세계는 지극히 상식적인 세계입니다. 이 상식의 세계란 본질에 있어서 기존의 논리를 승인하는 구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그것은 답습의 논리이며, 기득권의 논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장자는 이 상식적 세계와 세속적 가치를 일갈(一喝)하고 일소(一笑)하고 초월하고 있습니다. 장자의 이러한 초월적 시각은 대단히 귀중한 것입니다.

장자는 제자백가들과 치열한 논쟁을 통하여 자신의 사상을 전개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 논리가 상대의 허점을 예리하게 찔러 사람들이 그와의 논쟁을 기피할 정도였다고 하였습니다. 유유자적한 장자 사상으로서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킬러의 이미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주로 ‘공자의 무리’ 즉 유가(儒家)와 묵가(墨家)를 비판하는 내용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문장이 교묘하고 세상과 인정을 추찰(推察)함이 뛰어나 당시의 석학들도 그 예봉을 꺾지 못했다고 전할 만큼 그의 수사학과 논리는 뛰어난 것이었습니다.

장자는 수많은 이야기를 어떠한 형식에도 구애받음이 없이 그야말로 거리낌 없이 풀어내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자유로운 서술 형식과 전개 방식입니다. 이러한 형식은 장자 사상과 가장 잘 조화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소요와 자유와 자연을 본령으로 하는 장자의 사상을 담을 수 있는 가장 적합한 형식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장자는 대단히 높은 문학적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상대적인 행복은 본성의 자유로운 발휘로써 얻을 수 있지만 절대적인 행복은 사물의 본질을 통찰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절대적 행복과 절대적 자유는 사물의 필연성을 이해하여 그 영향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장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물의 필연성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즉 도(道)의 깨달음이 아니라 그것과의 합일(合一)입니다. 도의 이치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도와 합일하여 소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지요. 정서적 공감이 없다면 그것은 아직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 상태입니다. 사실은 머리보다는 가슴이 먼저 알고 있습니다.

장자의 체계에 있어서 기계가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것은, 기계는 그 속성인 기사(機事)와 기심(機心)으로 인하여 인간을 소외시키기 때문입니다. 기계의 발명과 산업화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발생되는 노동 문제, 노동자 문제, 노동 계급 문제 등은 장자가 경험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나아가 공황이나 실업 문제에 대해서도 경험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장자는 매우 중요한 문제를 미리 꿰뚫어보고 있습니다. 기계로 말미암아 인간이 비인간화된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일과 놀이와 학습이 통일된 형태가 가장 바람직한 것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기계는 바로 이 통일성을 깨트리는 것이지요. 노동은 그 자체가 삶입니다. 노동이 삶 그 자체, 삶의 실현임에도 불구하고 기계로 말미암아 노동이 다른 목적의 수단으로 전락되는 것이지요. 노동을 그 본연의 지위로부터 끌어내리는 일을 기계가 하지요.

부국강병이라는 전국시대의 패권 논리가 장자에게 있어서 어떤 것이었던가를 우리는 상상해야 합니다. 도(道)란 무엇인가, 패권이 인간이 지향해야 할 궁극적 가치인가를 장자는 반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자의 이러한 근본주의적 비판 정신이 바로 우리의 현실에 요구된다는 것이지요. 빈 배의 예는 너무 비현실적입니까? 자기를 비운다는 표현을 자주 접하기도 하지만 빈 배라 하더라도 내가 타고 있으면 빈 배가 될 수 없지 않는가 하고 생각하지요? 바로 이 점과 관련하여 장자의 ‘나비 꿈’은 매우 함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8. 묵자의 겸애와 반전 평화..묵자(墨子)

사상은 개인에 앞서서 반드시 ‘사상적 과제’가 먼저 존재합니다. ‘누구의’ 사상이기에 앞서 반드시 ‘무엇’에 관한 사상이게 마련입니다. 사상이란 일정한 사회적 조건에서 생성되는 것이지만 그 사회적 조건이 변화하면 사상도 사상사(思想史)의 장(場)으로 물러납니다. 따라서 학파간의 차이는 그 시대의 과제를 인식하는 관점의 차이에 불과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각 학파 간의 차별화가 진행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각 학파 간의 침투가 진행되는 것이 사상사의 일반적 발전 과정입니다. 여러 시내가 몸을 섞어 강이 되듯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상호 침투합니다.

제자백가 중에서 공자 다음으로 그 인간적 면모가 뚜렷하게 부각되고 있는 사람이 아마 묵자(墨子, BC.479~381)일 것입니다. 묵자는 다른 학파의 사람들과는 분명하게 구별되는 매우 강한 인상을 남기고 있는 사람입니다. 기층 민중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며 검소한 삶을 영위하고 신명을 다하여 실천궁행하는 모습이 묵가의 이미지입니다. 공자와 묵자는 다같이 춘추전국시대의 사회적 상황을 ‘사회적 위기’로 파악했습니다. 무도(無道)하고, 불인(不仁)하고, 불의(不義)한, 이기적이고 파멸적인 시대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현실 인식에 근거하여 묵자는 겸애(兼愛)라는 보편적 박애주의와 교리(交利)라는 상생(相生)이론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론을 지침으로 하여 연대(連帶)라는 실천적 방식을 통하여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당면의 실천적 과제로서 반전 평화의 기치를 내걸고 헌신적으로 방어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묵자는 그의 사상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그것의 실천에 있어서도 매우 훌륭한 모범을 보입니다. 실천 방법이 언제나 집단적이고 조직적이며 철저한 규율로써 일사분란하게 진행되었다는 점을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묵자는 천하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결국 어떠한 사태로 전락하는지를 매우 설득력 있게 전개합니다. 강자는 약자를 억누르고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능멸하고, 귀한 사람은 천한 사람에게 오만하며 간사한 자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며, 천하의 화와 찬탈과 원한이 생겨나는 근본적인 원인을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사랑의 문제라면 지극히 개인적이고 심정적인 차원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묵자는 이 문제를 제도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습니다. 천하의 이익을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모든 사람들이 서로 이롭게 되도록 법을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 그렇습니다.

전국시대는 이름 그대로 하루도 전쟁이 그치지 않는 시대였습니다. 묵자는 전쟁의 모든 희생을 최종적으로 짊어질 수밖에 없는 기층 민중의 대변자답게 전쟁에 대해서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그것을 정면에서 반대합니다. 전쟁은 수천수만의 사람을 살인하는 행위이며, 수많은 사람의 생업을 빼앗고, 불행의 구렁으로 떨어트리는 최대의 죄악입니다. 단 한 줌의 이로움도 없는 것이 전쟁입니다. 따라서 비공(非功), 즉 침략 전쟁을 반대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사상이지요. 그런 점에서 반전 평화론이야말로 전국시대 최고의 사상이며 최상의 윤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라도 물드는 것이다.” 이것이 아마 묵자가 가장 절실하게 고민했던 문제였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인간의 행동은 욕구로부터 나오며 욕구는 후천적으로 물들여지는 것(所染)이라고 주장합니다. 백지와 같은 마음이 ‘마땅하게 물들여져야’(染當) 도리에 맞는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도 물든다는 것은 곧 묵자의 사회 문화론이 됩니다. 물건을 많이 소비하는 것이 고귀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전쟁으로 많은 사람을 죽이는 것을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나라가 그렇게 물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경우든 사람들의 소용(所用)은 기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현재의 생산 규모를 유지하려고 하는 정도라면 차라리 큰 문제는 아니지요. 새로운 상품이나 새로운 소재, 새로운 기술, 새로운 문화가 끊임없이 등장합니다. 부단히 그 규모를 확대해가지 않을 수 없는 구조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소용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최대한의 이윤을 얻기 위한 자본 운동의 일환일 뿐입니다. 묵자의 절용이 과연 문화를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자본주의 문화 그 자체가 과연 인간적인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한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먹고사는 구조를 어떻게 짜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하는 것이지요. 기업의 논리, 경쟁의 논리, 효율성의 논리에 의해서 생산 규모와 소비 수준이 설정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9. 순자, 유가와 법가 사이..순자(荀子)

일반적으로 유학(儒學)은 객관파(客觀派)와 주관파(主觀派)로 나누어집니다. 사회질서와 제도를 강조하는 순자 계통이 객관파로 분류되고, 반대로 개인의 행위를 천리(天理)에 합치시키고자 하는, 다시 말하자면 도덕적 측면을 강조하는 맹자 계통이 주관파로 분류됩니다. 이러한 차이는 후에 기학파(氣學派)와 이학파(理學派)로 나누어지기도 합니다. 순자는 예(禮)에 의한 통치를 주장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덕(德)에 의한 통치를 주장하는 주관파와 분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순자의 예는 법의 의미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순자를 법가(法家)의 시조로 보는 견해가 여기서 나오는 것이지요. 법가 이론을 집대성한 한비자와 진시황을 도와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의 재상 이사(李斯)가 순자 문하에서 수학한 제자들이지요.

순자는 인간의 능동적 참여를 천명합니다. 천(天)이 해결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순자의 천론은 당시 생산력의 발전, 천문학의 발달과 무관하지 않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개인의 사상이란 크게 보아 사회적 성과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지요. 순자의 ‘능참’(能參)은 ‘실천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고 이를 제어하여 활용할 것을 강조합니다. ‘자연은 만물을 만들었지만 다스리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순자의 인본주의적 관점입니다. 하늘만을 하늘같이 바라보거나 하늘을 칭송하는 숙명론을 벗어던지고 스스로 운명의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순자가 비록 하늘을 물리적 천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결코 하늘을 단순화하거나 그 존재를 격하시키고 있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하늘의 신비스러운 작용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아는 것은 다만 이루어져 눈에 보이는 것에 불과하며 그 보이지 않는 무궁한 세계는 알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하는 일 즉 천공(天功)은 알 길이 없는 것이며, 성인은 하늘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범부(凡夫)들이나 하늘을 알려고 무리하게 지혜를 짜낸다는 것이지요. 순자에게 있어서 하늘을 안다(知天)는 것은 하늘의 무한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남겨두는 것’은 천의 법칙을 모두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이상의 것을 구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기(知己)와 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면이 순자를 그 이단적 내용에도 불구하고 역시 유가로 분류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순자의 성악설과 함께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주제가 있습니다. 맹자의 성선설이든 순자의 성악설이든 우리는 본성론 자체를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선악 판단을 한다는 것 자체가 올바른 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회로 자연을 재단하는, 이른바 꼬리가 개를 흔드는 격이기 때문입니다. 맹자의 성선설이 천성과 천리를 뒷받침하기 위한 개념인 것과 마찬가지로, 순자의 성악설은 그의 사회론을 전개하기 위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성이란 과연 있는 것인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선악 판단 이전의 것입니다.

순자의 이론 체계는 교육이라는 후천적 훈련과 예(禮)라는 사회적 제도에 의하여 악한 성(性)을 교정함으로써 사회의 혼란을 방지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순자는 모든 사람은 인의(仁義)와 법도(法度)를 알 수 있는 지(知)의 바탕을 갖추고 있으며 또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선단(善端)을 갖추고 있다는 맹자의 주장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순자의 성악설은 인간에 대한 불신이나 절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순자는 모든 가치 있는 문화적 소산은 인간 노력의 결정이라고 주장하는 인문 철학자임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순자의 악론편(樂論篇)을 음악론으로만 읽는다면 순자의 음악에 대한 견해는 매우 편협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음악은 사람을 다스리는 데 탁월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하는 내용이 그렇습니다. 이것은 음악을 다른 것의 수단으로 삼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음악론이 아니라 예론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순자가 음악을 주목하는 것은 그것이 즐겁고 감동적이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 착안하여 즐겁고 감동적인 예(禮), 나아가서 즐겁고 감동적인 법(法)을 전망하는 것이지요. 즐거움이 지나쳐서 그 도를 이탈하고 혼란하게 되는 것은 물론 경계해야 마땅하지만, 예는 근본에 있어서 즐거운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참으로 이례적인 것입니다. 순자의 예는 그처럼 유연한 것입니다.

순자의 예론에서 예는 기르는 것(養)이라고 했습니다. 순자의 예가 곧 법이 되는 것임은 이미 이야기했지요. 따라서 순자는 법이란 무엇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기르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회의 잠재력을 길러내는 것이며, ‘법’이란 글자 그대로 물(水)이 잘 흘러가도록(去) 해야 한다는 거서이지요. 순자가 악론을 전개한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순자는 법과 제도적 통제가 가져올 폐단을 경계했던 것이지요. 나아가 사회의 질서가 타율적이고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공감과 동의에 근거해야 한다는 점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지요. 순자를 계승한 법가의 이론이 바로 이 점을 간과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법가가 단명할 수밖에 없는 이유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10. 법가와 천하 통일..한비자(韓非子)

법가(法家)는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사상입니다. 법가는 부국강병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실현하고 최후의 6국을 통일했습니다. 다른 학파, 다른 사상에 비하여 그 사상의 현실 적합성이 실천적으로 검증된 학파인 셈이지요. 한비자는 법가 사상을 집대성한 책입니다. 법가는 시대의 변화를 인정하고 새로운 대응 방식을 모색해갑니다. 법가의 사관을 미래사관(未來史觀) 또는 변화사관(變化史觀)이라 하는 이유입니다. 이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앙집권적 체제를 가장 성공적으로 수립하고 단기간에 부국강병을 이끌어낸 나라가 바로 진(秦)나라 였습니다. 그것을 추진한 사람은 재상인 상앙(商鞅)이었습니다. 당시 변방의 작은 약소국이었지만 상앙에 의하여 변법과 개혁이 성공합니다. 상앙은 먼저 성문법을 제정하고 문서로 관청에 보관하여 백성들에게 공포해야 한다는 소위 법의 공개성을 주장했습니다. 당시의 법치란 무엇보다 권력의 자의성(恣意性)을 제한하고 성문법에 근거하여 통치하는 것이었습니다. 법제를 행함에 있어서 사사로움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법의 공개성이야말로 법가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상앙은 핵심적인 것을 놓치지 않은 뛰어난 정치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법가의 법치 원칙은 누구를 위한 법치인가 하는 점에서 오늘날의 민주 법제와 구별되는 것은 물론입니다. 법가의 법은 군주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의미가 핵심입니다. 바로 이 점이 법가 비판의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역시 군주는 아니더라도 지배 계급이 법을 독점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해야 합니다. 입법과 사법을 동시에 장악하고, 금(金)과 권(權)을 동시에 장악하고 있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지요. 대부는 예로 다스리고 서민은 형으로 다스린다는 과거의 관행이 지금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범죄와 불법 행위라는 두 개의 범죄관이 있습니다. 절도, 강도 등은 범죄 행위로 규정되고, 선거사범 경제사범 조세사범 등 상류층의 범죄는 불법 행위로 규정됩니다. 전혀 다른 두 개의 범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법가는 법 지상주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법이 지상이 되기 위해서는 공개성, 공정성, 개혁성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이 세 가지 내용은 법가 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서로 통일되어 있는 하나의 체계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복고적 사관이 아닌 변화사관에 입각하여 낡은 틀을 허물고 새로운 잠재력을 조직해내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의 내용이 동시에 추진되어야 하는 것이었으며 그만큼 단호한 권력이 요구되는 것이었습니다. 전국시대는 이러한 변화가 현실적으로 가능한 환경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환경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지식인을 요구하게 됩니다. 소위 법술지사(法術之士)에 대한 요구가 나타나게 되는 배경입니다. 법가의 ‘법’(法)은 오늘의 법학(法學)과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통치론, 지도자론, 조직론 등 오늘날 정치학 분야까지도 포괄하고 있는 훨씬 광범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비자에는 법가 사상에 관한 내용뿐만 아니라 세사(世事)와 인정(人情)을 꿰뚫는 많은 일화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사상가를 이해함에 있어서 그의 인간적 면모에 주목한다는 것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갖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인간을 알지 못하면 그 사상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과 사상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지요. 사상과 시대, 사상과 사회가 분리될 수 없는 것도 같습니다. 그것의 분리가 바로 관념화의 과정이고 물신화의 과정입니다. 더구나 법가 이론은 한비자의 인간적 면모를 심하게 왜곡합니다. 巧詐不如拙誠.. 나는 한비자의 이 한 구절만으로도 매우 정직하고 우직한 사람이라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 문장은 뛰어났지만 말은 더듬었다는 기록도 그것을 뒷받침해줍니다. 問田篇.. 그림이든 노래든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결정적인 것은 인간의 진실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혼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비자의 이러한 인간적 면모가 적어도 내게는 법가를 새롭게 이해하는 데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법가 사상에서 적극적 의미로 읽어야 하는 것은 개혁성과 법치주의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상에 비하여 분명한 차별성을 갖는 법가의 특징입니다. 법가의 개혁성은 구사회의 종법 구조가 이완되고 보수적 저항성이 약화됨으로써 형성된 새로운 공간을 충분히 향유하였습니다. 이 새로운 공간은 일차적으로 과거의 관념적 제약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습니다. 법가의 개혁성은 이 과거의 구조가 해체되고 새로운 구조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구성되는 개념입니다. 법치주의는 이러한 개혁성을 뒷받침하는 제도적 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서 대단한 발전입니다. 군주의 자의적 폭력에 대한 제도적 규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은 사회의 예측 가능성이기도 합니다.

11. 강의를 마치며..불교(佛敎) 신유학(新儒學) 대학(大學) 중용(中庸) 양명학(陽明學)

불교 철학의 관계론을 가장 잘 나타내는 상징적 이미지는 인드라의 그물입니다. 제석천(帝釋天)의 그물망(Indra's Net)에 있는 구슬의 이야기입니다. 제석천의 궁전에 걸려 있는 그물에는 그물코마다 한 개의 보석이 있습니다. 그 보석에는 다른 그물코에 붙어 있는 모든 보석이 비치고 있습니다. 모든 보석이 비치고 있는 이들 모든 영상에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신의 영상도 담겨 있습니다. 그것이 또다시 다른 보석에 비치고, 당연히 그 속에는 자신의 모습도 비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계의 참된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세계의 구조를 변화의 과정으로 보는 것입니다. 연기(緣起)란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송대 신유학과 관련된 논의 중 꼭 짚고 넘어가야 할 하나는 유학의 철학화가 이루어졌다는 평가입니다. 그러나 철학 즉 philosophy는 어디까지나 서양의 문화 전통에서 비롯된 특수한 문화 아이템에 지나지 않는다는 반론이 있습니다. 서양 철학은 현실과 이상, 현상과 본질 등을 구분 짓는 이분법적 구조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학적 구조라는 것이지요. 존재론적 구조이면서 동시에 신학적 구조라는 또 하나의 특수한 사유 형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 철학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철학을 인류의 보편적 문화 형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오리엔탈리즘이 됩니다. 그것을 문화 상대주의적 입장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 반론의 요지입니다. 철학은 서유럽 중심의 특수한 지적 활동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대학 독법에 있어서는 송대 신유학이 어떠한 학문적 동기를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회적 관심이 매우 촌스러워진 현재의 상황, 개인의 감성을 가장 상위에 두는 문화, 단편적인 이미지에 의하여 그 전체가 채색되고 부분을 확대하는 춘화적(春畵的) 발상이 지배하는 오늘의 사회와 문화를 생각하면 주자의 시대가 당면했던 사회적 과제를 짐작할 수 있을 듯합니다. 개인적 수양에 아무리 정진한다 하더라도, 한 장의 조간신문에서 속상하지 않을 수 없고, 한나절의 외출에서마저 속상하지 않을 수 없는 사회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라면 우리는 생각을 고쳐가져야 합니다. 개인의 수양이 국(國)과 천하(天下)와 무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중용은 당시의 사회적 과제를 완벽하게 반영하고 있는 텍스트입니다. 당시를 풍미하던 해체주의적 문화와 무정부적 상황을 개변하려는 건축적 의지로 일관된 사회학적 동기이며 사명감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자가 중용을 통하여 제기하려고 하는 가장 절실한 주제는 바로 도(道)의 큰 근원이란 하늘에서 명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으로서는 그것을 따르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인간적 도리의 구체적 덕목은 예악형정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사회적 가치라는 것이지요. 주자의 정신세계는 철저하리만큼 사회적 동기가 중심이 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명나라 중기에 신유학에 대한 비판 이론으로 양명학(陽明學)이 소위 심학(心學)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양명학의 대두는 지식인 사회에 상당한 반향과 새로운 지적 전환의 가능성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그러나 비판 이론으로서의 심학은 신유학과 같은 강도와 파장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심론(心論)에서 긍정적으로 읽어야 할 부분은 바로 ‘주체적 실천의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인식이 실천의 결과물이라면, 그리고 그 실천이 개인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목적의식적 행위라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신유학에 대한 심학의 문제 제기는 매우 정당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고전 독법은 관계론의 관점에서 고전의 의미를 재조명하는 담론이었습니다. 이러한 담론을 통하여 우리가 발견한 가장 중요한 것은 동양적 삶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가치는 ‘인성의 고양’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인성의 내용이 바로 인간관계이며 인성을 고양한다는 것은 인간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성은 이웃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며 그 시대의 아픔을 주입함으로써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좋은 사람은 좋은 사회, 좋은 역사와 함께 만들어지는 것임을 간과하지 않는 것이지요. 인성의 고양은 그런 뜻에서 ‘바다로 가는 여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바다로 가는 겸손한 여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상의 최고 형태는 감성의 형태로 ‘가슴’에 갈무리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감성은 외계와의 관계에 있어서 일차적이고 즉각적인 대응이며 그런 점에서 사고(思考) 이전의 가장 정직한 느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성적 대응은 사명감이나 정의감 같은 이성적 대응과는 달리,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마음의 움직임입니다. 이러한 정서와 감성을 기르는 것은 인성(人性)을 고양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면서 최후의 방법입니다. 사상의 장(場)을 문사철의 장으로부터 시서화의 장으로 옮겨와야 한다는 주장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시서화의 정신은 무엇보다 상상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상상력은 작은 것을 작은 것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작은 것은 큰 것이 단지 작게 나타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상상력입니다. 하나의 사물이 맺고 있는 거대한 관계망을 깨닫게 하는 것이 상상력이며 그것이 바로 시서화의 정신입니다. 시서화로 대표되는 예술적 정서는 우리의 경직된 사고의 틀을 열어주고, 우리가 갇혀 있는 우물을 깨닫게 합니다.


***


깊은 분지를 만나면 그 큰 공간을 차곡차곡 남김없이 채운 다음 뒷물을 기다려 비로소 나아간다는 물처럼..이 책을 읽고자 했는데 많은 아쉬움을 남기면서 정리합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의식의 변혁 없이 자본주의 체제의 변혁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투쟁은 사상 투쟁에서 시작한다고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깨달음(覺)의 의미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깨달음의 의미를 지극히 명상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은 고전 읽기의 시작이며 그 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소름이 다섯 번쯤 끼쳤는데 그 중 하나가 이 글이었다. 늘 고민해 왔던 ‘깨달음’에 대해서 그것이 ‘지극히 명상적인 것’이며 ‘이데올로기’라고 규정하는 대목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그리고 비주류라 분류될 수 있는 묵자, 순자, 한비자를 읽어내는 따뜻한 시선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또한 우물에 갇혀 보지 못했던, 어쩌면 숨겨져 있던, 아주 많은 것들을 꺼내어 보여주는 친절한 날카로움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살고 있는 광명에는 성공회대에서 운영하는 평생학습관이 있다. 작년 언젠가 그곳에서 신영복 선생의 강연이 있었는데 그냥 지나쳤었다. 참으로 ‘딱한 일’이었음을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더불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이토록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안다’는 것은 알아야 하는 것, 알 수 있는 것만 알면 되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있었던 것, 알아서는 안 되는 것까지 알아야 한다는 것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내게 이런 깨달음을 선물한 분께 감사한 마음을 가졌음은 물론이다.

나는 장자를 좋아한다.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라는 번역서를 통해서 만난 이후로 장자는 오랫동안 한 줄기 바람으로 내 곁에 함께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장자를 만나는 시간을 기다리며 책을 읽으니 더 감칠 맛이 나기도 했다. 여전히 알쏭달쏭한 ‘나비의 꿈’이 나오기에 눈을 크게 뜨고 읽으면서 또 하나의 알쏭달송함인 ‘연기(緣起)’를 떠올렸을 때 이 둘이 같다고 하는 대목에서는 한동안 멍하기도 했다. 그래서 눈을 더 크게 뜨고 읽고 또 읽었지만 이번에도 여전히 뿌옇다. 이 연기(煙氣)는 언제쯤 걷힐지...

이 책에 소개된 장자의 몇 줄기 바람을 옮기며 마무리하겠다. 참으로 새삼스럽다.

수레바퀴를 깎을 때 많이 깎으면 헐거워서 튼튼하지 못하고 덜 깎으면 빡빡하여 들어가지 않습니다. 더도 덜도 아닌 정확한 깎음은 손짐작으로 터득하고 마음으로 느낄 뿐 입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중간에 정확한 치수가 있기는 있을 것입니다만, 신이 제 자식에게 그것을 말로 깨우쳐줄 수가 없고 제 자식 역시 신으로부터 그것을 전수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일흔 살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손수 수레를 깎고 있습니다. 옛사람도 그와 마찬가지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전하지 못하고(글로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하께서 읽고 계시는 것은 옛사람들의 찌꺼기일 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배로 강을 건널 때 빈 배가 떠내려와서 자기 배에 부딪치면 비록 성급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화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배에 사람이 타고 있었다면 비키라고 소리친다. 한 번 소리쳐 듣지 못하면 두 번 소리치고 두 번 소리쳐서 듣지 못하면 세 번 소리친다. 세 번째는 욕설이 나오게 마련이다. 아까는 화내지 않고 지금은 화내는 까닭은 아까는 빈 배였고 지금은 사람이 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모두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간다면 누가 그를 해칠 수 있겠는가?

남해 임금은 숙, 북해 임금은 홀, 중앙의 임금은 혼돈이었다.
숙과 홀이 자주 혼돈의 땅에서 만났는데 혼돈은 그들을 잘 대접했다.
숙과 홀은 혼돈의 은덕을 갚을 방도를 의논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일곱 개의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 쉬는데, 오직 혼돈에게만 구멍이 없으니, 시험 삼아 구멍을 뚫어줍시다.”
날마다 구멍 한 개씩 뚫어주었는데 칠 일 만에 혼돈은 죽어버렸다.

전(筌)은 물고기를 잡는 통발인데,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은 잊어버리게 마련이고,
제(蹄)는 토끼를 잡는 올무인데, 토끼를 잡고 나면 그것을 잊어버리고 만다.
말은 뜻을 전하는 것인데, 뜻을 얻으면 말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나도 이렇듯 그 말을 잊어버리는 사람을 만나 그와 더불어 이야기하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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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곤
2005.05.17 23:13:08 *.51.82.119
잘 보았습니다.
꼭 한번 읽어봐야 겠군요.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
사실 고전은 껌처럼 자주 씹어 주어야 되는데
아직은 엄두가 안나는군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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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영
2005.05.20 10:42:06 *.39.220.121
껌처럼 자주 씹어 줘야 한다는 말..
참 재밌는 표현이네요..^^
글..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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