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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5월 25일 16시 49분 등록
금빛 기쁨의 기억 (한국인의 미의식..강영희 지음, 일빛, 2004)

강영희(姜英熙)..
문화평론가.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동양사학과와 국문학과 대학원, 동국대 영화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저서에는 문화평론집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와 인터뷰집 [우리는 자유로에서 다시 만났다]가 있다. 연극평론에서 시작해서 문화평론으로 영역을 넓혔고,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인터뷰에도 팔을 걷고 나섰다.

문화평론가로서 세상의 모든 잡사에 대한 잡문을 써온 그녀는, 이 책을 쓰면서 세상의 모든 잡학을 용감하게 돌파하여 그것들을 꿰뚫는 깨달음을 얻겠노라는 야무진 꿈을 꾸게 되었다. 꿈의 주제는 물론 문화이며 인문이며 창조이며 성찰이다. 한국인의 미의식을 다룬 이 책은 그 첫걸음인 셈이다.

<지은이의 글>

‘아침에 도를 깨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공자님은 도를 깨친 즉시 죽어도 좋다고 하지 않고, 아침부터 저녁까지라는 하루만큼의 여유를 두었을까. 공자님표(made by 孔子) 진리를 스스로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이 필요했을까. 아니면 쓰라린 날들을 거쳐 손에 넣은 도를 스스로 누리는 즐거움의 시간이 필요했을까. 본래 공자님이 철두철미한 현세주의자였고 보면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생각했음이 분명할 터인즉, 그가 마침내 진리를 ‘존재의 형식’으로 완결 짓기 위해 성찰 또는 취향을 필요로 했으리라고 상상하는 것도 지나친 일은 아닐 것이다.

매년 전율하며 느끼는 것이지만 어김없이 다시 봄은 찾아왔다. 이 책이, 계절의 순환과 함께 성스러운 박동을 전해오는 자연의 질서처럼 인간 사회의 선(善)순환을 발동시키는 작은 화두가 되기를 바란다. 이제는 참으로 지나간 기억상실의 세월을 마감하고, 다가오는 명철(明哲)의 날들을 맞이해야 할 때다. 이 책은 바로 그런 날들을 준비하기 위해 쓰여 졌다. 나는 이 책을 읽을 분들에게,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금빛 기쁨의 기억들을 다시 지펴내며 함께 깨어있자고 말하고 싶다. 그같은 깨어있음이 또 하나의 고통이 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감내하지 않고 도달할 수 있는 깨달음이란 것이 과연 있기나 하단 말인가.

1부 기억상실과 어제의 한국인

1. 백남준과 서울의 기억

새천년의 새아침 세계문화 유행통신의 발상지인 뉴욕에서, 최첨단 영상예술인 레이저 아트를 선보인 백남준. 새로운 예술작품을 창조하는 데서 한 걸음 나아가, 새로운 예술양식 자체를 창조한 예술가. 세계인 백남준이 전통적인 인간의 감정과 소양을 지닌 순한국인으로 남아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은 기억이다. 세계인 백남준의 예술이 한국인의 토속적인 자기를 주장하는 내용을 담아낼 수 있는 것은, 그가 전통을 기억의 형태로 몸 속 가득히 저장한 채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전통이란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쓸 수 있는 ‘기억 속의 심상’이다. 세계인이자 ‘지구촌 민주주의 건달’인 그가, 동시에 거뜬히 순한국인이자 전통적 인간일 수 있는 까닭이 여기 있다. 세계인 백남준에게 한국인 백남준이 죽어버린 과거가 아니라 살아 있는 현재가 될 수 있는 비결은 그의 몸속에 자리 잡은 기억이다.

2. 기차가 있는 풍경

토속적인 자기의 뿌리인 기억의 상실은 정체성의 상실로 이어질 것이다. 이같은 일이 지난 세기의 한국인에게 정말로 발생했다. 갑자기 들이닥쳐 굴욕적인 관계를 강요한 제국의 군함이 던진 근대화라는 과제가 그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서구화에 일본화를 겹쳐놓은 것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문명, 개화, 과학, 합리, 이성과 동일시되기도 했는데, 주목해야 할 것은 이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주체적으로 변용시키는데 필요한 성찰의 여백은 실종된 반면 이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데 급급한 조급함만이 넘쳐났다는 것이다. 근대문학사의 첫 페이지를 열어젖힌 기념비적 작품인 소설 「무정」의 주제도 이같은 조급함과 무관하지 않다. 「무정」에서 이같은 조급함을 인상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기차가 있는 풍경’이다.

2부 야나기 무네요시의 한국 예술론

1. 미적인 위계질서 또는 오리엔탈리즘

한국인의 미의식에 대해 말하는 이 책에서,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다. 그는 기억상실에 빠진 지난 세기의 한국인들에게, 당신들에게는 미의식(美意識)대신 무의식(無意識)이 훨씬 잘 어울린다고 말한 사람이다. 한국인은 자신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아니고, 일본인에 의해서만 제기되며 이해되며 정의되며 기능하는 존재라는 것. 한국 예술은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존재이기 때문에 일본인이라는 타인에 의해서만 존재의 장(場)으로 초대된다는 것. 일본인은 행위자이고 한국 예술은 반응자라는 것. 이같은 오리엔탈리즘적 담론이 한국 예술에 대한 야나기의 주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본질이라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것은 제국의 일본인이 식민지 조선인의 사정을 알아보고 보호해준다는, 저 흉악한 제국주의의 논리와 다를 바 없다.

2. 일본 국학과 야나기의 미의식

일본의 국학은 ‘좋건 나쁘건 태어나면서부터 지니고 있는 그대로의 마음’으로 이해되는 마고코로(眞心)를 최고의 덕목으로 내세우면서 이것을 ‘지나치게 영악한 마음’으로 이해되는 카라고코로(漢意)와 대비시킨다. 동북아시아 질서에 동참하는 ‘세계인’이기를 거부하고 ‘일본인’이기만을 고집한 결과, 카라고코로(漢意)와 대립하는 마고코로(眞心)를 내세운 일본의 국학. 이들이 카라고코로를 추종한다고 여겨지는 조선을 비롯한 이웃 나라의 문화를 마음으로부터 경멸하면서 그들의 모든 것을 오로지 자민족 중심주의에 따라 재단하거나 폄하한 것은 필연적이다. 국학적 세계관에 사로잡힌 일본인이 조선을 비롯한 이웃 나라의 문화를 존중하는 예외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거기서 ‘일본적인 것’을 발견했을 경우에 한정된다. 야나기가 바로 그런 경우다.

3. 선의 미와 야나기의 환상

사대와 사대주의는 구별되어야 한다. 특히 동북아시아 국제질서의 일환이었던 조선의 사대란 적극적인 세계화 정책의 일환이었을 따름이지(자주성이나 주체성과 대립하는) 소극적인 사대주의적 근성과는 무관한 것이다. 동북아시아 세계질서의 구성원이었던 조선이 대표격인 중국을 향해 사대의 예를 갖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니까 사대는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을 일본의 떳떳한 자주의식과 대비되는 조선의 비굴한 사대주의로 손가락질한 것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이같은 손가락질의 끄트머리에는 동북아시아 세계질서에서의 세계화에 성공하지 못한 채 오랑캐로 불리며 소외되었던 아웃사이더 일본의 뒤틀린 자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물론 동북아의 세계질서 자체도 조선시대라는 특정 시기에 국한된 것이었다. 따라서 이같은 사대의 질서를 사대주의로 바꿔치기 하여 한국사의 전 시기에 걸친 민족성 따위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분명 역사왜곡이자 식민사관이다.

4. 일본의 기교와 한국의 격

비어 있는 형태에서 충실한 정기가 배어나오는 것. 육체의 기교를 멀리하고 정신의 격을 가까이하는 것. 이같은 한국의 미를 직접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었고 다만 일본인의 미의식을 통해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밖에 없었던 야나기는, 그것을 완전하지 못하고 갖추어지지 못한 비어 있는 형태로서 받아들였다. 사물은 상(象)과 형(形)이 하나로 결합하여 이루어지는 것인데, 양자는 서로 반비례 관계가 있어 하나가 평균 이상으로 빼어나면 다른 하나는 평균 이하에서 어릿거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한국의 미를 형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본인의 미의식을 통해 바라본 야나기는 거기에 불가사의한 신비(神秘)의 분위기를 덧씌워 부정형, 불균제, 불균등 같은 것으로 정리해낼 수밖에 없었다.

5. 근대적 자의식과 한국 예술의 민예성

야나기가 한국 예술에서 민예성을 발견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일본인의 눈으로 한국 예술을, 형식의 기교로 정신의 격을 바라봄으로써 생겨난 발견이자 창작이다. 난쟁이의 잣대로 거인의 키를 잰 것이라고 할까. 그러니까 원경(遠景)에서는 아(雅)하되 근경(近景)에서는 졸(拙)한 한국 예술을 일본인의 근경의 시선으로만 본 까닭에 오직 근경의 졸함만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이로부터 발견된 것이 바로 무기교, 무작위, 무의식의 민예성이다.

6. 자연과 작위를 통합시킨 일본의 세(勢)

세(勢)라는 것은 도학을 부정하고 인욕을 긍정하는 일본적 사고의 산물이다. 야나기는 일본적 자연을 토대로 삼은 위에, 근대적 작위를 동시대의 세로 쌓아올렸다. 이처럼 불변의 토대와 가변의 세를 하나로 통합한 일본인 특유의 사고는 언제나 정서적인 경애(敬愛)와 이성적인 폄하(貶下)가 동시에 존재했다. 식민지 조선에 대한 제국 일본의 근대적인 우월감을 배경으로 해서 조선 예술을 ‘잡기적인 민예’로 깎아내린 폄하의 태도는 물론이요, 조선 예술을 일본 국학의 타고난 자연스러움을 실현한 ‘예술적인 명물’로 높여 올린 경애의 태도 모두 조선의 참얼굴과는 무관하다. 이제는 열등감과 우월감으로 착잡하게 덧칠된 지난 세기의 서글픈 자화상으로부터 벗어날 때가 되었다.

3부 한국인의 미의식

아름다움의 취향을 달리 말하면 미의식이 된다. 아름다움이란 창조에서 비롯되는 것이요, 창조란 성찰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성찰이란 백인백색의 취향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다움의 취향이 성찰의 강을 거슬러 창조의 피안으로 올라간다는 것. 이것은 취향이 단지 미(美)와 관련된 것만이 아님을 말해준다. 성찰의 강에서 피어나는 안개에는 미뿐 아니라 진과 선도 한데 섞여 있다. 진선미의 합일을 지향하는 한국의 가치관념이 바로 ‘멋’이다. 멋은 미의식일 뿐 아니라 정신미(情神美)를 지향하는 생활의 이념이기도 하다. 따라서 한국인의 미의식의 비밀을 푸는 일은 한국인의 가치관의 핵심을 탐구하는 일이 된다.

1. 음양오행과 상(象)의 미의식

예로부터 한국인은 형(形)과 상(象)이 하나로 어우러져 사물을 이룬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생겨나는 것이 사물의 형상이다. 한국인에게 있어 음양오행사상을 관통하는 상이란 언제든지 곁에 놓아두고 사용해온 일상의 척도였다. ‘눈에 보이는’ 형 너머에 존재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이 때문에 흔히 멋이라고 불리는 한국인의 미의식은 형태미를 넘어서는 정신미의 성격을 지닌다.

2. 아졸미(雅拙美)또는 고졸미(古拙美)

일그러진 달항아리와 휘어진 대들보. 물론 달항아리와 대들보가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니다. 사실인즉슨 일그러지지 않은 달항아리와 휘어지지 않은 대들보가 더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한국인들은 달항아리가 일그러졌다고 해서 깨뜨려버리거나, 대들보감이 구부러졌다고 해서 고쳐서 쓰거나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들은 살짝 일그러진 달항아리나 그럴싸하게 휘어진 대들보, 입술이 약간 휘어져 삐뚜름 능청거리는 사발이 오히려 멋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만약 상이 만족스럽다면 설령 형이 약간 허물어지더라도 너그럽게 눈감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을 뿐 아니라, 때로는 형이 약간 허물어졌을 때 도리어 상이 만족스러울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바로 이것이 고졸(古拙)이나 아졸(雅拙), 무관심성이나 비균제성의 본질이다.

3. 발효맛과 생기의 미감

상(象)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살아 있는 유기체가 발산하는 생기(生氣)의 느낌이다. 유기체의 생기야말로 육체라는 형 너머에서 정신이라는 상을 느끼게 하는 근원이다. 흥미로운 것은 발효음식은 살아 있는 유기체들의 덩어리로 이루어진 것이며, 발효맛은 잘 삭힌, 시원하고 칼칼한, 생기 있는 맛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상의 미의식과 통한다. 발효음식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음식문화는 발효맛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맛을 낳았고, 이것은 어느 순간 물질에너지에서 ‘얼에너지’로 승화됨으로써, 잘 삭힌, 시원하고 칼칼한, 생기의 미감을 탄생시켰다.

4. 상극적인 것을 상생적인 것으로

발효(醱酵)의 원리란 자연의 이치에 따른 상극의 과정인 부패를 인간의 지혜에 따른 상생의 과정인 발효로 변용시키는 것이다. 비보(裨補)라는 말은 도와서 보충한다는 뜻이다. 한국의 산야 가운데 어디가 빈 듯 허전하거나 사기 어린 듯 썰렁하거나 험악한 듯 편치 않은 곳에는 예외 없이 소박하고 친근한 모양새의 장승과 솟대와 바위와 돌맹이, 단정하고 가지런하게 조성된 나무와 숲, 옹색한 자리에 의연히 버티고 선 탑과 절 등의 비보물이 오똑하니 자리 잡고 있는데, 이같은 개입에 의해 상극적인 것을 상생적인 것으로 변용시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5. 해학과 신명

발효와 비보의 원리를 통해 생겨난 미적 범주가 바로 해학과 신명이다. 이는 무엇보다 인물의 형상과 관련된 미적 범주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통해 한국인의 자화상과 만날 수 있다.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 한과 울음이지만 한국인 자화상의 울음이란 웃음으로 승화되어 가는 전단계이며, 한이란 신명으로 승화되어 가는 과정에 불과하다. 따라서 미처 승화되기 전의 한(恨)이 한국적인 정서를 대변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며, 그보다는 충분히 승화되고 난 후의 해학 또는 신명이 한국적인 정서를 대변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6. 고지도와 명당론

한국인의 공간 의식을 한눈에 실감하게 하는 아름다운 고지도는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오늘날의 지도와는 달리, 땅의 모습을 기록하는 실용적인 기호의 성격과 함께 땅의 형상을 묘사하는 예술적인 도상의 성격을 아울러 지녔기 때문이다. 땅을 살아있는 유기체로 보는 생각을 체계화시킨 것이 풍수사상이다. 결국 풍수사상이란 한국인의 의식 뒤편에서 후광처럼 빛을 발함으로써, 의식의 수면 위를 떠다니는 공간 심상들로 하여금 실용적인 기호의 성격을 넘어 예술적인 도상의 성격을 아울러 지니도록 만드는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7. 백의와 색동

미의식을 상징하는 핵심적인 요소의 하나가 바로 색(色)이다. 색이란 보편 너머의 특수가 자신의 ‘저다움’을 드러내는 눈빛과도 같은 것이다. 색상의 문제뿐 아니라 색배열 또는 색구성의 문제 역시 색 취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다. 한국인은 흰옷을 즐겨 입었으며 흰색을 좋아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경우의 흰색은 색이 없는 무색이 아니라 자연 바탕의 바탕색인 소색(素色)이다. 주변의 다른 색들을 지우고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주변의 색들을 생생하게 살려내고 풍성하게 싸안는 것이다. 오방색(五方色)이란 무엇인가. 색 가운데 순수한 우리말로 된 명칭은 하양, 까망, 빨강, 노랑, 파랑의 다섯 가지뿐인데, 이것이 바로 오방색이라는 것이다. 오방색 또는 오정색은 수많은 간색(間色) 또는 잡색(雜色)을 파생시킴으로써 세상의 모든 색을 포함한다.

4부 취향과 성찰 그리고 내일의 한국인

1. 이데올로기에서 취향으로

성찰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근대 한국인에 대한 반성이 시작되는 지점은 근대 한국인을 탄생시킨 근대성 자체에 대한 성찰이다. 물론 근대성에 대한 논의는 오랜 세월 계속되어 왔지만 만족할 만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것은 무엇보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사용된 근대성이라는 개념이, 명(名)은 합리적이지만 실(實)은 서구성으로 명실상부하지 못했던 데 원인이 있다. 합리성을 방패삼아 서구성을 밀어붙인 것이랄까. ‘나를 살리면서 남을 참고한’ 대신 ‘나를 죽이면서 남을 흉내내는’ 데 몰두했으니 결과가 신통할 리 없다. ‘나를 죽이면서 남을 흉내내는’ 사람이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2. 상생 지향과 탈속의 아름다움

한국인의 미의식을 취향적인 사고에 따른 성찰의 시선으로 바라볼 경우,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상생적인 조화로움에 따른 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현실적인 질서인 상극 너머에 존재하는 이상적인 질서인 상생을 추구하는 것이랄까. 천지인의 일부인 인간은 인간적인 질서에 지나친 관심을 기울이는 속기에서 벗어나 탈속의 별유천지 비인간(別有天地 非人間)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생 지향이 만들어낸 탈속의 경지는 참으로 아름답다. 거기에는 순수하게 증류된 아름다움, 한치의 가감도 허용되지 않는 정밀한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3. 정태적이고 자폐적인 유토피아

쓸쓸함과 즐거움이 함께 한다는 것. 이것은 자신들의 몫인 인간의 문화를 천지인 전체의 상생적인 조화를 이룩하기 위한 비보물로 간주한 한국인이, 어느 순간 거기서 한 걸음을 더 나아가 인간적인 자의식 자체를 놓쳐버렸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이에 따라 저만치 탈속의 풍류를 지향한 현세의 실존에는 어딘가 허무의 느낌이 덧붙기도 했으며, 동시에 어딘가 별유천지 비인간의 느낌이 묻어나기도 했다.

4. 허무주의와 샤머니즘의 극복

한국인이 인간의 질서인 상극보다는 자연의 질서인 상생을 추구한 나머지, 정신적인 내용을 착안하는 데는 탁월한 반면 육체적인 형식을 완성하는 데는 허술한 측면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육체적인 형식으로 도야되지 않은 정신적인 내용이 허랑한 ‘멋’으로 공중분해되는 경향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에서 흥으로, 울음에서 웃음으로 승화되는 과정은 전자를 지워버리고 후자로 날아오르는 초월(超越)의 몸짓이 아니라 전자를 등에 지고 후자를 향해 기어가는 포월(匍越)의 몸짓이 되어야 한다. 상극의 과정을 과거의 삶의 흔적으로만 남겨두는 정태적인 상생이 아니라 그것을 현재의 삶의 에너지로 확보하는 역동적인 상생 쪽으로 우리의 취향을 자꾸만 밀어내는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5. 역동적이고 개방적인 유토피아

한국적인 상생의 질서 위에 20세기적인 상극의 질서를 겹쳐놓는 발상의 전환. 지난 세기 후반의 한국인은 이같은 발상의 전환을 거대한 실험의 형태로 실천에 옮겼다.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걸쳐 민주화운동의 현장에서 전개된 민족예술운동이 그것이다. 부조화에서 조화로, 다시 부조화로 꿈틀거리며 전진하는 그것은 변혁의 전망으로 가득찬 살아 있는 움직임이었다. 정태적이고 자폐적인 유토피아에서 역동적이고 개방적인 유토피아를 향해 한발을 내딛는 것이었다고 할까.

6. 김정희와 연경의 기억

김정희가 살았던 시대는 17세기말에서 18세기말에 걸친 이른바 진경시대(眞景時代)의 직후다. 스물네 살 김정희에게 있어 청나라의 연경으로 대표되는 우물 밖 세상은 평생에 걸쳐 자신의 사상과 예술의 수준을 돌아보게 하는 국제적인 척도로 남아 있었다. 국제적인 안목과 감각을 유지하는 것은 토속적인 안목과 감각을 유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며, 얼핏 모순처럼 보이는 양자는 창조의 주체 속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추사는 ‘토속적인 자기’를 지키는 것과 ‘남의 유행’을 따라가는 것을 창조적으로 회통시켰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는 세계인인 동시에 한국인이었다.

<회통적인 사고>

한국인과 세계인 사이에서, 법고(法古)와 창신(創新) 사이에서 회통적인 사고를 모색하는 사람들만이, 창조라는 새 역사의 문을 열어젖힐 수 있다. 유월의 햇살 아래 붉은 악마로 서 있었던 우리 모두가 눈부시게 깨달았듯이, 한국인이기를 원한다면 동시에 세계인이기를 꿈꾸어야 하며 세계인을 꿈꾼다면 결코 한국인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

‘그리하여 나는, 피카소에 경탄하고 렘브란트의 자화상 앞에서 영혼을 무장해제 당하는, 21세기의 세계인에 걸맞은 잡종(雜種)적 취향 속에서도 나의 취향을 키운 것은 팔 할이 서울 북촌의 기와집 풍경이었노라고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렇게 잡종적 미의식의 안 쪽에서 도저한 근성으로 숨쉬는 순종(純種)적 미의식의 존재를 깨달은 것은, 나의 미의식의 본거지인 북촌 골목길에서가 아니라 잡종적 미의식의 메카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그 안쪽에서 그들의 순종적 미의식이 날카롭게 살아숨쉬는 루브르 박물관에서였다는 것이다. 전세계 문화유산을 긁어모아 ‘프랑스 취향’의 인류성(人類性)으로 재편집한 제국주의의 보물창고가 바로 루브르 박물관 아닌가. 이렇게 해서 순종적 미의식과 잡종적 미의식은 물밑에서 서로 뜨겁게 손잡고 있는 것이다.’

같은 걸 봐도 이렇게 다르구나..싶었다. 새털같이 많은 작품 중에 털끝하나만큼도 못 보고 온 것만 아쉬웠던 루브르.. 기본적인 미의식 자체의 부재에서 온 당연한 결과였겠지만 내가 기억하는 루브르는 그랬다. 그 큰 박물관 덩어리를 가진 프랑스가 엄청 부러웠을 뿐이었다. 그래서.. 빈약한 나, 구체적이지 못한 나를 또 만나고야 말았다. 의기소침해진 나를 배려해서였을까. 이런 얘길 들려준다.

‘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한국인의 미의식. 상의 기미를 잡아내는 것이 도통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지는 오늘의 한국인에게 이것은 버거울 뿐 아니라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처럼 황당한 것으로 들릴 수도 있다.’

딱 들켰다. 어쩜.. 그리고 고맙게도 친절한 안내를 덧붙여준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시도를 해보는 것은 어떨까.
박수근의 작품이든, 한반도의 어느 녘에서 마주치는 화강암 마애불이나 여타의 화강암 조각이든, 아니면 일상에서 만나는 문화유산이든 간에 그것을 조용히 바라보되, 그로부터 적어도 몇 걸음이나 몇 마장 떨어진 자리에서, 육체의 눈을 가늘게 뜬 대신 영혼의 눈을 크게 뜨고, 근경(近景)의 미학이 아닌 원경(遠景)의 미학으로 바라보라. 만약 그것이 코앞에서 조목조목 뜯어보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거칠기보다 부드럽고, 졸(拙)하기보다 아(雅)하며, 어눌하기보다 격조있게 보인다면, 그때 비로소 당신은 상의 아름다움에 주목하는 한국인의 미의식에 눈뜨기 시작한 것이다.’

눈을 뜨고 있어도 보질 못하니 답답하겠지만.. 그래서 이렇게 친절을 베풀었겠지만.. 이번엔 글을 읽기도 힘들다는 걸 깨달았을 뿐. 이 일을 미안해서 어쩌나.. 싶을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는 도중에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울퉁불퉁한 퍼즐 조각 몇 개를 맞출 수 있었다. 딱 꼬집어 분류하기 뭐한 ‘미학’이라는 학문처럼 퍼즐의 그림을 표현하긴 뭐하지만 아무튼 그랬다. 초록이 ‘지쳐서’ 단풍이 들었다고나할까. 빨갛고, 노랗게..

한국인이니 세계인이니 하는 구분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는 저자의 말에 동의한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따로 또 같이’라는. ‘회통’이라는 말이 무슨 얘긴지 잘 모르겠는 나 나름의 정리는 그거였다. 답이 하나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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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24 성공하는 기업들의 8가지 습관 - 짐 콜린스(完) 신재동 2005.05.25 2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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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22 [8] 소유의 종말 홍승완 2005.05.26 2425
4821 소유의 종말(제러미 리프킨)-完 [3] 오병곤 2005.05.26 2875
4820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 [3] 문요한 2005.05.27 10679
4819 소유의 종말 -제러미 리프킨(完) 손수일 2005.05.27 2412
4818 나. 구본형의 변화 이야기 - 完 [2] 오병곤 2005.06.01 3048
4817 블루오션 전략 - (完) 신재동 2005.06.02 2620
4816 [드러커 100년의 철학] 5/2~6/2 [1] 이선이 2005.06.02 2631
4815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 -구본형(完) 손수일 2005.06.03 2810
4814 [9] 블루오션 전략 홍승완 2005.06.03 2648
4813 도서정리10-소유의 종말 박노진 2005.06.04 2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