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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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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6월 9일 05시 32분 등록
완당평전 1 (일세를 풍미하는 완당바람..유홍준 지음, 학고재, 2002)

<서장> 저 높고 아득한 산

추사 사후 150년 간 그의 전기가 나오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모든 전공자들이 자신이 몸담고 있는 학문과 예술의 어느 한 측면에서만 추사를 논해왔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이 점은 우리의 학문, 특히 인문학의 큰 병통이었다. 연구자들이 뭐라고 말하든 추사 자신은 문사철과 시서화를 분리시키지 않은 총체적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삶과 학문과 예술에 충실했을 뿐이다. 따라서 추사에 대한 이해와 연구는 그를 어느 각도에서 조명하든 그의 인간상 전체에 대한 탐구에서 나오지 않으면 그 실상은 규명되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말해서 한 예술가가 자신의 예술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남다른 고뇌와 수련과 시행착오를 겪게 마련이고 초년, 중년, 노년의 경향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예술가의 인생 역정을 배제하고 그의 예술을 논하다 보면 상투적인 ‘천재성의 발로’라는 말밖에 남는 것이 없다. 그것은 결코 한 예술가를 올바로 평가하고 기리는 길이 될 수 없다. 특히 추사처럼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예술가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제1장 출생과 가문 (1~24세 ; 1786~1809년)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1786년(정조 10) 6월 3일, 충청도 예산(禮山) 용궁리(龍宮里), 오늘날 추사고택이라고 부르는 경주 김씨 월성위(月城尉) 집안의 향저(鄕邸)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고, 아버지는 훗날 판서를 지낸 김노경(金魯敬;1766~1837), 어머니는 김제군수를 지낸 유준주(兪駿柱;1746~1793)의 딸인 기계 유씨(杞溪兪氏;1766~1801)이다.
자는 원춘(元春), 처음엔 호를 추사라 하였으나 이후 완당(阮堂), 승설도인(勝雪道人), 노과(老果), 병거사(病居士), 노완(老阮) 등 100여 개의 호를 그때그때 바꿔 썼다.

추사고택과 고조부, 증조부, 추사의 묘소를 보면 사실 한 예술가를 기리는 답사처로 이렇게 잘 보존된 예는 아주 드문 일이다. 그것은 추사 사후의 복이라 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추사의 후손은 얼마 안 가 대가 끊기고 말았다. 때문에 추사고택에 보존되어 있던 얼마 안 되는 유품들마저 후손들 사이에서 분규가 일어나자 1971년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에서는 일괄유물을 보물 제547호로 지정하고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 보관케 하여 간신히 추사의 유품이 일부 보존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유물을 정확하게 보존하는 것은 그 후손이 아니라 박물관, 미술관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된다.

제2장 영광의 북경 60일 (24~25세 ; 1809~1810년)

왕조가 바뀌고 사회가 바뀌면 그 새로운 상황에 걸맞은 이념과 사유방식이 등장한다. 그런데 조선사회는 국초부터 주도적 이데올로기로 삼아온 성리학이 근 300년간 기조를 이루는 바람에 매너리즘에 빠져 이미 공리공론(空理空論)으로 겉돌고 있었다.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곧 조선 후기에 나타난 이른바 실학사상이었다. 조선 후기의 실학은 경세치용(經世致用), 이용후생(利用厚生), 실사구시(實事求是)로 요약되는, 대단히 실질적이고 현실 중심적인 사상으로, 그것은 중국과는 관계없이 자생적으로 일어난 학문의 신동향이었다. 박제가는 이런 사상적 경향을 스스로 ‘북학(北學)’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런 사상적 기류는 청나라에서도 똑같이 일어나 고증학이라는 이름으로 상당히 체계화되어 있었으며 이것을 국제적인 교류 속에서 토착화시키며 완성한 분이 바로 추사 김정희였다.

북학파의 조선 문인들이 연경(지금의 북경)학계와 교류하면서 그곳의 학풍을 받아들이게 된 데에는 정조대왕의 후견과 후원이 매우 컸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규장각을 세워 학술자료를 모으게 하고 그 자료를 수집, 조사하는 검서(檢書)자리에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서상수 등 비록 서출이지만 능력 있는 북학파 학자들을 채용한 것부터가 말할 수 없이 큰 학예 진흥정책이었다. 청나라 학문과 예술의 신경향은 조선사회에 충격을 주어 일변케 하는 기류를 형성하였고, 그 선봉에서 누구보다 적극 받아들인 이가 박제가였으며, 바로 추사의 스승이었다.

한동안 우리 사회에도 미국 갔다온 지식인이 말끝마다 “미국은 그렇지 않다”며 남을 면박주며 잘난 체하곤 했는데 그런 오만과 편견과 치기가 추사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본인은 알고 했든 모르고 했든 추사는 그런 식으로 남에게 상처를 많이 주었고 간혹 그것이 심하여 미움도 받았다. 그러나 추사로서는 그럴 만도 하였다. 지금 여기 모여 있는 사람들이 누구던가. 중국에서도 최고가는 인사들이니 당시로서는 세계의 정상급 학예인들과 어울리고 있는 것 아닌가. 나이 25세의 젊음에는 그런 오만은 비록 권장될 수는 없다 해도 용서될 수는 있는 일이 아닐까.

제3장 학예의 연찬 (25~34세 ; 1810~1819년)

귀국 후 추사는 열정적으로 학예의 연찬에 들어갔다. 연경학계와 계속 교류를 했으며, 엄청난 양의 책과 탁본과 서화가 연경에서 추사에게 들어왔고, 추사는 이곳 자료와 선물을 보냈다. 추사는 학문과 예술 모두에서 자기화, 토착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고증학의 정신과 방법을 한편으로는 자기 몸으로 익히고 한편으로는 자기 현실에 적용시켜 그렇게 이룩한 성과를 연경학회로 전했다. 이런 식으로 추사는 국내 학계는 물론이고 국제사회에도 기여했으며 수많은 학예인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이리하여 조선 지식인 사회 한쪽에서는 고증학과 금석학에 기반을 둔 신선한 학풍과 예술사조가 생겨났다. 이렇게 일어난 완당바람은 날로 그 세를 더하여 가히 일세를 풍미하게 된다.

완당의 학문세계는 자신이 쓴 글의 제목인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로 요약된다. 실사구시란 구호는 청나라 고증학을 연 고염무가 주창한 표어로, “사실에 의거하여 사물의 진리를 찾는다”는 뜻이다. 완당은 바로 이 명제를 학문의 가장 중요한 도리로 삼았다. 완당이 이 글을 쓴 것은 1816년, 31세 때이다.

한 사람의 사람됨은 그의 벗을 보고도 알 수 있다는 옛말이 아니더라도, 한 사람의 삶을 복원하는 데서 교우관계는 그의 인생관은 물론 그의 정서, 나아가서는 학문과 예술에 대한 성향까지 엿보게 한다. 완당 역시 그가 교류한 인사들을 보면 세상사에 대한 그의 폭넓은 관심, 단호하면서도 결단성 있는 행동, 잔정이 많은 섬세한 성격까지 두루 살필 수 있다. 그가 청나라 연경의 학예인들과 교류한 것은 예외로 치더라도 최소한 세 부류로 나누어볼 수 있으니 하나는 정통 사대부 문인들이고, 둘째는 완당 일파라 불러도 좋을 학예의 문인(門人) 제자들이며, 셋째는 스님들이다.

완당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신분에 대하여 매우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가 중시하는 것은 신분이 아니라 인간의 능력과 노력이었다. 그리고 인재가 되지 못하는 이유를 세 가지 꼽고 있는데 첫째는 주석(注釋)이나 외우는 폐쇄적인 교육방식, 둘째는 과거시험이라는 입시교육, 셋째는 견문의 부족이라며, 진정한 인재는 자유스런 상상력과 풍부한 감성으로 자기의 개성을 갖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제4장 출세와 가화(家禍) (34~50세 ; 1819~1835년)

완당은 부친이 유배된 슬픔과 아픔 속에서도 끊임없이 연경학계와 교류하였다. 완당의 제자였던 역관들은 완당이 연경의 학예인들에게 선물로 보내는 서신, 책, 탁본, 종이, 인삼을 전해주고 돌아올 때는 그들이 완당에게 보내는 서신, 책, 서화, 붓, 먹 등의 선물을 가져다주었다. 그렇게 오가는 문물 교류가 해마다 두어 차례는 반드시 있었다.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양이었고, 미처 그 내용을 따라잡지 못하는 수준 높은 논의가 이루어졌다.

다산과 부친의 서거가 완당에게 준 정신적 충격과 의미는 적지 않았다. 일찍이 위당 정인보는 완당의 학문세계가 “가정(家庭)과 사우(師友)들로부터 힘입어 나온 것”임을 잊지 말라고 하였는데, 가정의 부친, 사우인 다산이 세상을 떠난 것은 이제 앞 시대의 어른, 선생을 모두 잃었다는 뜻이었다. 이제 완당은 나이 52세로 스스로를 노완(老阮)이라고 자호할 만큼 늙은이가 되었다. 완당은 가정이나 사회에서나, 예술과 학문 어느 분야에서나 노숙한 경지를 보여주어야 하는 사회의 어른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제5장 완당바람 (50~55세 ; 1835~1840년)

완당은 나이 50에 이미 학문과 예술 모두에서 당대의 대가 위치에 올라 있었다. 그것은 국내뿐만 아니라 청나라에서도 크게 이름을 떨치는 빛나는 학예의 성취였다. 그의 예술론은 학술과 마찬가지로 청나라 예원(藝苑)에서 일어나는 신사조를 받아들여 국제적 지평에서 새로운 글씨와 그림 세계를 지향하고 있었다.

진정한 변화는 어떻게 이룰 수 있다는 것인가. 그것은 분방한 개성을 제어할 수 있는 장치로서 고전의 힘에 의지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청나라 사람들은 입고출신(入古出新)이라고 했다. 즉 옛것을 본받으면서 새것을 창출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고증학의 기본정신이라 할 만한 것이다. 조선의 연암 박지원이 주창한 법고창신(法古創新)도 같은 맥락이었다.

완당은 등석여의 작품도 열심히 본받았다. 그러나 맹목적으로 따른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예술로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는가를 고민하며 재창출했다. 이것은 사대주의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오히려 국제적 시각의 확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수 있다. 사실 정보력은 그 자체가 힘이다. 완당의 정보력은 자신이 알고 있는 어느 한 채널을 통해 얻은 편협하고 일방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완당이 그런 정통한 정보력으로 청나라 학예계를 파악하고 그들과 동시대적 지평에서 자신의 학문과 예술을 펴나갔다는 것은 바람직한 국제성, 세계성의 확보였다.

완당이 그들을 열심히 좇아 모방하면서 그 현대적 흐름에 동참하는 한편,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과 성과를 동시에 이루어냈다는 점에서 그의 위대성이 있는 것이다. 모방은 그 자체로는 흉이지만 창조의 기본이기도 하다. 모방이 있은 다음에야 그 극복이 있는 것이다. 완당은 이렇게 청나라 대가들의 작품을 본뜨며 자신의 예술세계를 구축해갔다. 더욱이 그는 맹목적인 모방이 아니라 고전의 습득을 통해 자신을 발견해가고 있었다. 고증학의 모토대로 입고출신하기 위해 옛 비문 글씨를 연구하며 거기에서 새로운 서체를 모색하고 있었다.

완당을 굳이 화가로 본다면 그것은 난초그림에 한해서는 맞다고 할 수 있다. 그럴 정도로 완당은 난초그림에는 깊은 정성과 자부심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완당은 산수화에 대해서는 그런 적이 없지만 난초그림에 대해서는 당당한 화론을 제시하면서 끊임없는 장인적 연찬과 수련까지 요구했다. 완당은 항시 난초그림은 그림의 영역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면 무엇이란 말인가? 완당은 단호히 말한다. 그것은 글씨의 영역이라고.

제6장 제주도 유배시절(상) (55~59세 ; 1840~1844년)

임금이 완당에게 내린 벌은 정확하게 말해서 “대정현에 위리안치하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위리안치란 유배 중에서도 가장 가혹한 형벌이었다. 조선시대 행형제도에서 유형(流刑)이라는 형벌은 죄인을 먼 곳에 유배시켜 격리 수용하는 제도인데, 죄질과 죄인의 신분, 유배 장소에 따라 이름도 형식도 다양하다. 그 중 위리안치는 유배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울타리를 두르고 그 안에 가두는 중형이다. 대개는 당쟁으로 인한 정치범들이 이 형을 받았다.

귀양살이에서 정신적으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외로움이라면 육체적으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음식과 질병이었다. 완당이 제주 유배시절 음식을 어떻게 조달했는가는 아내에게 보낸 한글 편지에 생생히 전한다. 귀양지에 앉아서 장을 보내라, 민어를 말려 보내라 하는 것이 요즘 정서로는 민망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 양반들의 삶의 기준에서는 그럴 수 있었던 것이 그때와 지금, 양반과 평민의 차이이다. 완당의 편지와 음식, 옷 등 물품들은 주로 완당 집안의 하인들이 맡아 부리나케 오가며 전달하였다.

아픔과 외로움 그리고 작은 즐거움의 귀양살이 나날 속에서 완당은 참으로 열심히 책을 읽고 글씨를 쓰며 학예에 열중하였다. 조선시대 행형제도에서 유배형이 갖는 미덕은 결과적으로 학자들이 책을 읽을 수 있고 자신의 예술에 전념할 수 있는 ‘강제적인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다산 정약용의 학문은 18년의 유배생활이 낳은 결과였고 원교 이광사의 글씨도 22년 유배의 산물이었듯이, 완당은 제주도 유배생활 9년간 끊임없이 책을 구해 읽으며 고전을 연구하고 새로운 학계의 동향을 살피면서 점점 더 학문의 세계를 심화시켜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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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당평전 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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