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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6월 18일 00시 46분 등록
강영희 지음/일빛


Ⅰ. 인용


1부 기억상실과 어제의 한국인

<백남준과 서울의 기억>

요컨대 예술은 아이덴티티를 구하는 방법의 하나이며, 그것이 예술의 큰 기능입니다. 남의 유행에 동의하는 것과 아이덴티티는 상반된 개념이지요. 예술은 결국 모순입니다. (김홍희, 「백남준 vs 김홍희」, 『백남준과 그의 예술』

반드시 백남준이거나 윤이상, 이응노여야 할 이유도 없다. 겸재나 박수근이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장사꾼이면 어떻고, 평범한 시민이면 어떤가. 중요한 것은 당신의 삶이 창조적이기를 원하는가에 달려 있다.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이 순간 세계인과 한국인의 제로섬 게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제는 새로운 개안(開眼)이 필요하다. 한국인과 세계인, 토속성과 세계성이 창조의 마음을 징검다리 삼아 경계를 허물고 손잡는다면, 그것들은 서로 다른 둘이고 모순이되 상생적인 둘이며 창조적인 모순이 될 것이다.

세계인 백남준에게 한국인 백남준이 죽어버린 과거가 아니라 살아 있는 현재가 될 수 있는 비결은 그의 몸 속에 자리잡은 기억이다. 러셀은 『철학의 문제들』에서 현재가 감각을 통해 인식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과거는 오직 기억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고 말했다. 기억의 형태로 몸 속에 저장된 전통이야말로 백남준이 지난날의 수많은 다른 백남준들로부터 물려받아 자신의 작품 구석구석에 숨겨놓은 토속적인 자기의 원천이다.

전통이란 ‘기억 속의 심상’이 지금 이 순간에 새롭게 창조된 것이다. 그리하여 문화의 저력이란 문화 속에 덧쌓인 ‘기억 속의 심상’의 두께이며, ‘기억 속의 심상’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취향이야말로 미의식의 본질이다. 따라서 살아있는 전통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취향을 즐겁게 뛰놀도록 하는 ‘기억 속의 심상’이 ‘생의 지주’와도 같이 우리 안에 늘어서 있어야 한다. 취향의 뜨락인 ‘기억 속의 심상’의 상실이야말로 전통의 단절에서 창조의 불능으로 이어지는 마음의 감옥이다.


<기차가 있는 풍경>

백남준이 전통적인 인간의 감정과 소양을 지닌 순한국인으로 남아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은 기억이다. 기억은 시간을 거슬러 뛰어넘는다. 기억은 시간의 질서에 거역함으로써 세월의 무상함을 넘어서는 인간적인 정체성의 토대를 형성한다. 그런데 만일 백남준에게서 순한국인 백남준의 기억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토속적인 자기의 뿌리인 기억의 상실은 정체성의 상실로 이어질 것이다. 이 같은 일이 지난 세기의 한국인에게 정말로 발생했다.

근대 한국인의 불행의 근원은 여기에 있다. 시간의 흐름보다 앞서고자 하는 조급함의 열기에 휩싸인 나머지 가끔씩 시간의 흐름에서 뒤돌아 설 때만 확보되는 기억 속의 심상을 상실한 근대 한국인은, 마침내 인간적인 정체성의 토대가 흔들리는 비극에 직면했다. 이것이 바로 근대 한국인의 기억상실이다.

근대 한국인이 집단적인 기억상실에 빠진 징후는 그들이 오랜 세월 손때 묻히고 눈도장 찍어온 낯익은 취향과 결별한 데서 찾아진다. 취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오늘의 나를 구성하는 찰나(刹那)인 동시에, 어제의 나에 대한 기억이 깃들이는 영겁(永劫)이다. 따라서 기억상실에 빠진 자들의 취향이란 영혼이 빠져나간 육체와도 같이 무의미하고 심지어는 추하기까지 하다.

취향이란 무엇보다 타인과 자신을 구별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구체적인 계기이기 때문이다.

취향이란 ‘기억 속의 심상’이라는 영혼이 깃드는 육체와 같은 것이며 영혼과 육체는 하나로 통합되어 인간적인 정체성의 토대를 이룩한다. 그렇다면 낯익은 취향을 청산하고 기억상실에 빠진 지난 세기 한국인의 내면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것이었다. ‘기억 속의 심상’을 거느린 낯익은 취향을 회복하는 일이 오늘의 과제로 새롭게 떠오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2부 야나기 무네요시의 한국 예술론

한국인은 한국인의 미의식에 따라 자신의 예술을 바라보아야 하며, 그것은 일본인의 미의식과는 다른 것이다. 따라서 한국 예술을 소중하게 여긴 일본인의 사랑에 감격하여 그를 사랑하고 존경한 나머지, 그의 ‘사랑’ 뒤에 숨은 ‘진실’도 알아보지 않은 채 그의 한국 예술론을 고스란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한국인의 태도는 달라져야 한다.


<미적인 위계질서 또는 오리엔탈리즘>

한국인은 자신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아니고, 일본인에 의해서만 제기되며 이해되며 정의되며 기능하는 존재라는 것. 한국 예술은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존재이기 때문에 일본인이라는 타인에 의해서만 존재의 장(場)으로 초대된다는 것. 일본인은 행위자이고 한국 예술은 반응자라는 것. 이 같은 오리엔탈리즘적 담론이 한국 예술에 대한 야나기의 주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본질이라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흔히 ‘무의식의 미’ ‘무작위의 미’ ‘무기교의 미’로 표현되는 야나기의 한국 예술론의 핵심은 일본인의 미의식을 한국인의 미의식에 덮어 씌우면서 그것을 미의식에 미달하는 무의식으로 격하시킨 것이다(이 같은 격하의 이면에는, 이것을 최고의 미로 격상시킴으로써 왜곡의 면죄부를 스스로 발행하는 교묘한 심리적 메커니즘이 장착되어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이것을 창작(創作)이라는 단어를 빌어 표현했다는 것이다.

한국 예술은 일본인의 미의식에 의해서만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 한국 예술에는 자율적인 가치의 척도가 주어지지 않으며, 타율적인 척도로나마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일본인과 한국인에게 차별적으로 적용된 미의식의 위계질서의 본질이다. 따라서 이 같은 주장의 언저리에서 한국 예술에 대한 따뜻한 눈길 너머에 존재하는 일본적 오리엔탈리즘의 차가운 시선과 마주치는 것은 필연적이다.


<일본 국학과 야나기의 미의식>

한국의 미를 비애의 미로 규정한 야나기의 주장은 한국사를 사대주의에 따른 비애의 연속으로 본 식민사관의 산물로 비판받았다. 그러나 그가 한국 예술에서 발견한 비애의 미가 일본 국학의 정서적 핵심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이를 비판하는 주장은 제기된 적이 없다. 야나기는 이것을 쓸쓸한 정감이나 남모르는 정의 세계, 인정이나 마음의 하소연 등으로 표현했는데, 이렇게 해서 그는 모노노아와레 라는 일본인 특유의 정서와 거기서 우러나는 정서적 아우라를 식민지라는 특수한 상황에 처한 한국 예술에 덮어씌웠다.

일본 문화 특유의 미적 범주인 시부사의 기원이 한국문화라고 주장하는 근거 중 하나는, 일본인 자신이 인정하듯이 시부사의 본질에 좀 더 가까운 예술적 성과가 일본문화 아닌 한국문화에서 발견되다는 사실로부터 찾을 수 있다. 여기서 다시 한 걸음을 나간다면, 한국 예술에서 시부사를 창작(創作)하고자 한 일본인의 소망과는 달리, 일본의 시부사가 지닌 ‘함축적인 차분함의 느낌’과 조선도자기의 소색(素色) 또는 비색(秘色)의 차분함 속에 담긴 ‘풍요로운 단색조의, 생기 넘치는 깊은 맛’ 사이에는 일본인 야나기의 애절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코 뛰어 넘을 수 없는 낭떠러지가 가로놓여 있다. 일본문화 특유의 미적 범주인 시부사를 염두에 둔 채 한국 예술의 미를 설명하고자 한 야나기의 글이 끝내 뛰어 넘을 수 없는 불가해한 신비주의에 빠져들고 만 것도 이 때문이다.


<선의 미와 야나기의 환상>

여기서 새삼스러운 사실 한 가지가 확인된다. 야나기가 예술의 ‘저 호소하는 듯한 선’에서 읽어 낸 말할 수 없는 정과 쓸쓸함의 아름다움과 동경하는 마음의 눈물이 바로 모노노아와레라고 불리는 일본 국학의 정서적 핵심이라는 것이다. 야나기가 말하는 한국 예술의 ‘선의 아름다움’이란 일본인 야나기의 미의식에 의해 새롭게 창작된 것이며, 그것의 배후에는 일본인의 미의식을 한국 예술에 덮어씌우는 일본식 오리엔탈리즘이 자리잡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취향 또는 미의식은 결코 제멋대로의 것이 아니라 고유의 풍토와 역사 속에서 형성된 인문적 지혜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한옥의 지붕곡선이 현수곡선으로 만들어진 것은 장마철의 집중호우를 특징으로 하는 한국의 풍토에서 빗물을 빨리 배수시키기 위한 과학적인 노력의 산물이다.

사대와 사대주의는 구별되어야 한다. 특히 동북아시아 국제질서의 일환이었던 조선의 사대란 적극적인 세계화 정책의 일환이었을 따름이지(자주성이나 주체성과 대립하는) 소극적인 사대주의적 근성과는 무관한 것이다.


<일본의 기교(奇巧)와 한국의 격(格)>

한국인의 미의식 속에서는 야나기의 말마따나 일본적인 기교에 해당하는 ‘꼼꼼한’ 무엇을 발견할 수 없으며, 그보다 훨씬 스케일이 큰 ‘분방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흔히 격(格)이라고 불리는 이것은, 빈틈없이 맞추어야 하는 눈앞의 실선 같은 것이 아니라 느슨하게 의식되는 머리 속의 점선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일본의 기교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범’인 반면, 한국의 격은 ‘때에 따라 넘나드는 틀거리’라고나 할까. 달리 말하면 한국의 격은 ‘격식에 맞으면서도 격식을 뛰어넘을 때’를 어림하기 위한 가상의 척도 같은 것이다.

멋은 격식에 맞으면서도 격식을 뛰어넘을 때, 바꿔 말하면 격이 맞는 변격(變格), 변격이면서 격에 제대로 맞을 때 거기서 멋을 느낀다는 말이다. (조지훈, 「멋의 연구」

상(象)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한국의 미를 형(形)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본인의 미의식을 통해 바라본 야나기는 거기에 불가사의한 신비(神秘)의 분위기를 덧씌워 부정형, 불균제, 불균등 같은 것으로 정리해 낼 수밖에 없었다.


<근대적 자의식과 한국 예술의 민예성>

야나기가 한국 예술에서 민예성을 발견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일본인의 눈으로 한국 예술을, 형식의 기교로 정신의 격을 바라봄으로써 생겨난 발견이자 창작이다. 난쟁이의 잣대로 거인의 키를 잰 것이라고나 할까. 그것은 한국 예술의 상(象)의 미의식을 일본인의 형(形)의 미의식으로 바라봄으로써 생겨난 발견이다. 본래 상과 형은 한데 어우러져 사물의 형상을 이루되, 근본적으로 양자는 서로 반비례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원경(遠景)에서는 아(雅)하되 근경(近景)에서는 졸(拙)한 한국 예술을 근경의 시선으로만 본 까닭에 오직 근경의 졸함만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이로부터 발견된 것이 바로 무기교, 무작위, 무의식의 민예성이다. 그렇지만 원경을 아름다움을 외면할 수는 없었을 터.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토록 아름다운 불가사의(不可思議)로서 그것을 설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자연과 작위를 통합시킨 일본의 세(勢)>

우리는 그이 글 속에 들어있는 경애의 태도에 귀를 기울일 뿐 아니라 폄하의 태도에도 눈길을 주어야 한다. 식민지 조선에 대한 제국 일본의 근대적인 우월감을 배경으로 해서 조선 예술을 ‘잡기적인 민예’로 깎아 내린 폄하의 태도는 물론이요, 조선 예술을 일본 국학의 타고난 자연스러움을 실현한 ‘예술적인 명물’로 높여 올린 경애의 태도 모두 조선 예술의 참얼굴과는 무관하다. 도대체 남이 억지로 들이댄 잘못된 근거에 따라 나를 터무니없이 깎아 내릴 까닭도 없으며 반대로 터무니없이 높여 올릴 까닭도 없다. 이제는 열등감과 우월감으로 착잡하게 덧칠된 지난 세기의 서글픈 자화상으로부터 벗어날 때가 되었다.


제3부 한국인의 미의식

흥미로운 사실은 한국어에서 아름다움의 고어인 ‘아름다옴’의 본뜻이 사호(私好) 즉 ‘제 마음에 어울린다’는 뜻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취향이 아닌가. 한국인은 예로부터 아름다움의 뿌리가 취향에 있음을 강하게 의식해 온 것이다.

저다움의 취향이 성찰의 강을 거슬러 창조의 피안으로 올라간다는 것. 이것은 취향이 단지 미(美)와 관련된 것만이 아님을 말해준다. 성찰의 강에서 피어나는 안개에는 미뿐 아니라 진과 선도 한데 섞여 있다. 그리하여 고유의 풍토와 역사 속에서 형성된 삶의 지혜를 대표하는 미의식은 진선미를 아우르는 인문적인 가치를 대표한다. 진선미를 아우르는 인문적인 가치를 ‘멋’이라는 이름의 미의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한국문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진선미의 합일을 지향하는 한국의 가치관념이 바로 ‘멋’이다. 멋은 미의식일 뿐 아니라 정신미(精神美)를 지향하는 생활의 이념이기도 하다. 따라서 한국인의 미의식의 비밀을 푸는 일은 한국인의 가치관의 핵심을 탐구하는 일이 된다.


<음양오행과 상(象)의 미의식>

한국인의 미의식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상(象)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형(形)과 대립되는 개념이다. 예로부터 한국인은 형과 상이 하나로 어우러져 사물을 이룬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생겨나는 것이 사물의 형상이다. 하지만 사람의 눈에 익숙한 것은 어디까지나 형인 까닭에 무형의 상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불가능한 것만은 아닌 것이, 상이란 형의 기본을 이루는 것일 뿐 아니라 형을 통해 자취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졸미(雅拙美) 또는 고졸미(古拙美)

비로소 우리는 일그러진 달항아리와 휘어진 대들보를 통해, ‘형의 어눌함’의 후광에 해당하는 ‘상의 세련됨’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달리 말하면 ‘상의 세련됨’을 머금은 ‘형의 어눌함’이 되는데, 바로 이것이 한국문화를 마음으로 겪은 이들이 한결같이 이야기하는 고졸이나 아졸, 무관심이나 비균제성의 본질이다. ‘그 만듦새는 극히 소박하여 전체적으로의 조화와 균제의 미를 찾았을지언정, 부분 부분 뜯어보면 차라리 거칠다 할만큼 잔손질이 가지 않은 것이 한층 우리의 주의를 끈다(김용준).’ 그러나 볼수록 여운이 남는 아름다움이 있어서, 초라한 육신에 깃들인 품격있는 정신이 느껴지는 것.


<발효맛과 생기의 마감>

상(象)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살아 있는 유기체가 발산하는 생기(生氣)의 느낌이다. 유기체의 생기야말로 육체라는 형 너머에서 정신이라는 상을 느끼게 하는 근원이다. 한 점의 도자기나 한 구의 조각에서 살아 있는 유기체를 연상시키는 생기의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까닭은, 그것의 배후에 상의 미의식이 살아 숨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다시금 마음의 눈을 크게 뜬 상태에서 원경의 미학으로 그것을 바라보라. 거기서 문득 유정한 생명의 에너지가 느껴진다면, 그때 당신은 상의 아름다움에 주목하는 한국인의 미의식에 한 걸음 다가선 것이다.

한국인이 이처럼 살아 있는 유기체가 발산하는 생기의 느낌을 생활 속에서 물질적으로 확인하고 또다시 확인해 온 감가적인 근원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국의 맛을 대표하는 발효 맛이다. 본래 음식과 결부되어 있던 물질에너지인 맛은, 어느 순간 그로부터 떨어져나가 정신에너지로 승화됨으로써 미감 또는 미의식을 파생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은 ‘맛’이라는 단어에서 미감을 의미하는 ‘멋’이라는 단어가 파생된 사실을 통해서도 짐작된다.


<상극적인 것을 상생적인 것으로>

한국인의 미의식이 상(象)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고 했을 때, 한국인은 이를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기울여 왔을까. 이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인에게 상의 아름다움이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한마디로 음양과 오행의 상생적인 조화다.

상극 역시 만물의 생성변화에 필요악인 까닭에 상생적인 조화를 추구한다고 해서 상극 관계를 애당초 부정하고 회피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상극관계를 부정하지 않은 채로 상생적인 조화를 추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상극관계를 고스란히 껴안은 채 그것을 가능한 한 상생관계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문화 속에서 이 같은 변화를 이룩한 원리는 무엇일까. 발효의 원리와 비보의 원리가 그것이다.


<해학과 신명>

한국인의 자화상을 묘사하는 자리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은 한과 울음이다. 하지만 한국인의 자화상에서는 울음만이 아니라 웃음도 묻어난다. 결국 한국인 자화상의 울음이란 웃음으로 승화되어가는 전 단계이며, 한이란 신명으로 승화되어가는 과정에 불과하다.

이것은 김치가 익어 시원하고 칼칼한 발효 맛을 내기 전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숙성의 과정을 거치는 것에 비유된다. 맛이 들고 난 후의 곰삭아 익은 맛을 김치 맛이라고 하지, 맛이 들기 전의 설익은 맛을 김치 맛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미처 승화되기 전의 한(恨)이 한국적인 정서를 대변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며, 그보다는 충분히 승화되고 난 후의 해학 또는 신명이 한국적인 정서를 대변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고지도와 명당론>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시간적 파악이 역사라면, 그 공간적 인식이 지리와 지도이다. (한영우, 『우리 옛 지도와 그 아름다움』

사람은 위치와 장소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사람은 시간에 대한 사유보다 공간에 대한 사유를 더 절실해한다. (양보경, 「한국의 옛 지도」

하지만 공간의식과 공간취향이 인간의 정체성과 직결되는 미의식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는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조차 없다. 흔히들 말하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 역시 그런 것이거니와, 무엇보다 공간 의식이란 인간의 정체성을 속절없이 떠도는 천상의 것으로부터 든든하게 뿌리내린 지상의 것으로 잡아 내리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땅을 ‘살아있는’ 유기체로 보는 생각을 체계화시킨 것이 풍수사상이다.

이처럼 한국인의 공간 취향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명당이란 본래부터 그곳에 존재한 자연적인 풍경 위에 상(象)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미의식에 따라 생겨난 인문적인 풍경을 겹쳐놓은 것이다.


<백의와 색동>

한국인이 좋아하는 색은 무엇보다 ‘밝고 맑은’ 색, 즉 명도(明度)와 채도(彩度)가 아울러 높은 색이다. 물론 명도와 채도의 높고 낮음은 상대적인 개념이므로, 이것은 예컨대 중국인이나 일본인이 좋아하는 색을 염두에 둔 것이다. 명도와 채도가 아울러 높은 ‘시원하고 칼칼한’ 색. 자연 염색된 조각보에서 볼 수 있는 투명한 담채(淡彩)와도 같은 색. 그것은 단청이나 민화, 자수 같은 데서 볼 수 있는 불투명한 진채(眞彩)의 경우에도 중국의 색인 당채에 비해 한결 ‘밝고 맑은’ 느낌을 선사하는 색이다. 한국인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노랑 저고리에 빨간 치마’라는 이미지가 이것을 상징적으로 대표한다.

한국인의 색 취향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인의 색채적 심상의 바탕색에 해당하는 소색의 아름다움에 눈을 떠야 한다. 다양한 질감을 지닌, 생기 넘치는 소색의 아름다움. 은은하고 투명하면서도 깊은 맛을 지닌, 미묘한 뉘앙스의 매력. 천연 그대로의 색을 간직한, 격 있고 깊이 있는 아름다움. 이것은 태토(胎土)의 종류에 따라 눈빛 같은 설백이나 한지의 색, 모시나 삼베, 옥양목이나 광목 같은 옷감의 색을 통틀어 가리키는 것으로,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복합적인 뉘앙스을 지닌 것이다.

오방색(五方色)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색을 청(靑), 적(赤), 황(黃), 백(白), 흑(黑)의 다섯 계열로 구분하는 색 체계를 가리킨다. 오방색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사실은 우리 민족이 누려온 수많은 색 가운데 순수한 우리 말로 된 명칭은 하양, 까망, 빨강, 노랑, 파랑의 다섯 가지뿐인데, 이것이 바로 오방색이라는 것이다. 한국인에게 있어 오방색이란 관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색에 관한 현실 자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한국이 도시들에 깃들어 삶을 꾸려가는 한국인은 어떤 존재들인가. 적어도 오늘에 대해 묻는다면, 대답은 비관적이다. 개성적인 컬러가 존재하지 않음은 물론이요 형광색을 비롯한 끔찍한 색들이 난데없이 얼굴을 내미는 부조화의 난장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고유색의 부재란 한국 도시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문화 전반의 문제인데, 이 같은 문제의 배경에는 색 취향을 비롯하여 취향 전반을 잃어버린 한국인의 기억상실이 자리잡고 있다.


4부 취향과 성찰 그리고 내일의 한국인

미는 무엇보다 취향이다. 사람마다 개성이 다른 것처럼, 사람마다 미에 대한취향도 다르다. 그리하여 개성 있는 미의 취향을 자유롭게 꽃피우는 백화제방의 아름다움이야말로 미의 절정이다. 수많은 풀꽃과 나무가 어우러진 자연이 격조높은 아름다움을 지닌 것은, 그것이 빛깔과 향기를 달리하는 수많은 생명체들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개성 있는 취향은 정신의 여백에서 자라난다. 동양화의 여백이란 하릴없이 비어있는 공간이 아니라 부분을 비워내어 전체를 넘치게 하는 역동적인 기운생동의 근원이다. 정신의 여백을 간직한 사람만이 시시때때로 튀어오르는 정신의 자투리들로 아름다운 성찰의 조각이불을 꾸며낼 수 있다.

취향은 고유의 풍토와 역사 속에서 형성되는 인문적인 지혜의 산물이다. 취향은 인간이 공간과 시간 속에서 이룩한 인문적인 가치의 토대이다. 따라서 그것은 ‘제멋대로의 것’이 되기보다는 ‘자기를 돌아보는 것’이 될 가능성이 많다. 출발점에서는 ‘제멋대로의 것’으로 작용하던 취향도 반환점을 돌고나서부터는 시나므로 ‘자기를 돌아보는 것’으로 작용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바로 취향이 지닌 성찰의 가능성이다.


<상생 지향과 탈속의 아름다움>

한국인의 미의식을 취향적인 사고에 따른 성찰의 시선으로 바라볼 경우,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상생적인 조화로움에 따른 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현실적인 질서인 상극 너머에 존재하는 이상적인 질서인 상생을 추구하는 것이랄까. 인간적인 질서인 상극 역시 자연적인 질서, 우주적인 질서인 상생의 품 안을 벗어나지 않도록 했으며, 그 결과 신명이나 해학처럼 상극을 변용시키는 문화적인 실천이 한국문화의 특징으로 자리잡았다.

그리하여 나는, 피카소에 경탄하고 렘브란트의 자화상 앞에서 영혼을 무장해제 당하는, 이십일 세기의 세계인에 걸맞은 잡종(雜種)적 취향 속에서도 나의 취향을 키운 것은 팔 할이 서울 북촌의 기와집 풍경이었노라고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렇게 잡종적 미의식의 안 쪽에서 도저한 근성으로 숨쉬는 순종(純種)적 미의식의 존재를 깨달은 것은, 나의 미의식의 본거지인 북촌 뒷골목에서가 아니라 잡종적 미의식의 메카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그 안쪽에서 그들의 순종적인 미의식이 날카롭게 살아숨쉬는 루브르 박물관에서였다는 것이다. 전세계 문화유산을 긁어모아 ‘프랑스 취향’의 인류성(人類性)으로 재편집한 제국주의의 보물창고가 바로 루브르 박물관 아닌가. 이렇게 해서 순종적 미의식과 잡종적 미의식은 물밑에서 서로 뜨겁게 손잡고 있는 것이다.


<허무주의와 샤머니즘의 극복>

따라서 우리는 상생 속의 상극, 정지태 속의 가동성, 매끈함 속의 거칠음, 신명 속의 한을 단단한 핵심으로 보전하는 과제를 잠시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한에서 흥으로, 울음에서 웃음으로 승화되는 과정은 전자를 지워버리고 후자로 날아오르는 초월(超越)의 몸짓이 아니라 전자를 등에 지고 후자를 향해 기어가는 포월(匍越)의 몸짓이 되어야 한다. 상극의 과정을 과거의 삶의 흔적으로만 남겨두는 정태적인 상생이 아니라 그것을 현재의 삶의 에너지로 확보하는 역동적인 상생 쪽으로 우리의 취향을 자꾸만 밀어내는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려야 한다.


<역동적이고 개방적인 유토피아>

기쁨, 산다는 것의 기쁨. 육체의 기쁨.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찬란한 것. 살이 있는 유기체가 발산하는 생기의 느낌. 이것이 바로 상극적인 부조화를 상생적인 조화로 승화시킴으로써 얻어지는 한국적인 감성의 본질이다.


<김정희와 연경의 기억>

법고창신. 옛것(古)을 따름으로써 새것(新)을 창조하는 것. 이것은 ‘기억 속의 심상’을 ‘오늘의 심상’으로 탈바꿈시켜내는 것이다. 마치 삼국시대의 반가사유상이 장욱진의 「진진묘」로, 폰트로모의 「방문」이 빌 비올라의 「만남」으로 다시 태어난 것처럼 말이다.
골동이 되어버린 옛 것에 새것의 아우라를 뒤집어씌우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지금 이 순간’의 주체가 체험하는 당대성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의 주체로 하여금 당대성을 체험하게 하는 지렛대는 무엇일까. 추사가 ‘연경의 기억’을 통해 획득한 국제적 감각이 그것인데, 그것은 우물 안 개구리와도 같은 토속적인 감각 또는 조선성을 넘어선 곳에 존재하는 세계성이다.

회통적인 사고. 한국인과 세계인 사이에서, 법고와 창신 사이에서 호통적인 사고를 모색한 사람들만이, 창조라는 새 역사의 문을 열어젖힐 수 있다. 유월의 햇살 아래 붉은 악마로 서 있었던 우리 모두가 눈부시게 깨달았듯이, 한국인이기를 원한다면 동시에 세계인이기를 꿈꾸어야 하며 세계인을 꿈꾼다면 결코 한국인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순일(純一)함이란 불모의 것이요 난장(亂場)만이 다산의 터전이라는 것. 전통의 고유색과 현대의 난장은 불이(不二)의 묘경(妙境)으로 회통되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정태적이고 자폐적인 ‘그들만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퇴행적인 저다움을 딛고서 도달해야 할 진정한 저다움인 동시에, 조선식의 순종적 예술실천을 추사식의 잡종적 예술실천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진정한 견인차인 것이다.


Ⅱ. 감상

좋은 책을 읽었다. 저자의 깊은 성찰과 많은 책 읽기, 연구, 노력 등이 엿보이는 역작이다.

저자는 시종일관 본질을 파악한 사람의 목소리와 언어를 진실되게 구사하고 있다. 아래 인용한 부분에서 엿보이는 것처럼 ‘참되다’ ‘착하다’ ‘아름답다’의 진선미 세 가지 가치를 대립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합일하여 아우르는 것으로 한국인의 미의식을 설명하는 통찰은 내게 있어 꽤 인상적이다.

“진선미를 아우르는 인문적인 가치를 ‘멋’이라는 이름의 미의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한국문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진선미의 합일을 지향하는 한국의 가치관념이 바로 ‘멋’이다. 멋은 미의식일 뿐 아니라 정신미(精神美)를 지향하는 생활의 이념이기도 하다. 따라서 한국인의 미의식의 비밀을 푸는 일은 한국인의 가치관의 핵심을 탐구하는 일이 된다.”(p.130-131)

이 책을 통해 이제 우리의 문화나 미의식에 관해 어느 정도 얘기를 할 수 있겠다 싶은 자신감을 얻은 것도 하나의 소득이다. 저자가 기억과 시간을 통해, 일본인의 한국예술론에 대한 비판을 통해, 다양한 분야에 걸쳐서 다양한 한국문화를 통해 조목조목 한국인의 미의식을 짚으며 그에 따른 성찰과 주장을 일관되게 표현하는 그 만만찮은 노고와 성실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마음이다.


Ⅲ. 저자의 입장에서

아쉽게 여겨지는 점이 있다면 ‘4부 취향과 성찰 그리고 내일의 한국인’ 부분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이렇게 잡종적 미의식의 안 쪽에서 도저한 근성으로 숨쉬는 순종(純種)적 미의식의 존재를 깨달은 것은, 나의 미의식의 본거지인 북촌 뒷골목에서가 아니라 잡종적 미의식의 메카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그 안쪽에서 그들의 순종적인 미의식이 날카롭게 살아 숨쉬는 루브르 박물관에서였다는 것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는 바, 어떤 생각과 경로로, 혹은 사색을 통해서 그러한 결론을 깨닫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미진하다. 이 점이 못내 궁금하다. 이 부분은 다른 저서 혹은 다른 기회를 통해서 한번 더 설명되었으면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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