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오병곤
  • 조회 수 3265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05년 6월 19일 09시 00분 등록
"한국인의 미의식에 대한 잘 삭힌, 시원하고 칼칼한, 생기 있는 보고서"

강영희 지음 | 일빛


1. 책이 내게로 왔다.(감상)

한마디로 올해 만난 최고의 책이다. 마치 발효된 음식과 같이 잘 삭혀서 시원하고 칼칼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미가 있고 값진 깨달음을 명징하게 전해준다. 이 책을 통해서 나의 정신세계를 통제해 온 지긋지긋한 식민사관과 오리엔탈리즘, 야나기 무네요시의 망령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 동안 나는 한국인의 한을 엔카식의 감상주의로 덧칠하고 백의민족에게서 고단하고 서글픈 역사를 떠올렸다. 한국 문화의 졸(拙)한 미를 소니의 전자제품 같은 정교함으로 재단하려고 했다. 우리 정체성에 대해 '필름이 끊어진' 상태처럼 기억상실증에 시달렸다. 사대(事大)를 줏대가 없는 민족으로, 풍수사상을 미신을 좇는 무지몽매한 민족으로 대입시켰다. 아, 얼마나 졸렬하고 어리석었는가? 이 모든 왜곡의 역사는 한국미, 한국에 대한 취향이 없이 이데올로기에 의해 사로잡혀 있었음을 고백하게 한다.

취향은 무엇인가? 취향이란 무엇보다 타인과 자신을 구별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구체적인 계기이다. “따라서 그것은 ‘제멋대로의 것’이 되기보다는 ‘자기를 돌아보는 것’이 될 가능성이 많다. 출발점에서는 ‘제멋대로의 것’으로 작용하던 취향도 반환점을 돌고나서부터는 시나브로 ‘자기를 돌아보는 것’으로 작용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바로 취향이 지닌 성찰의 가능성이다.” (P232) 그렇다. 우리는 우리만의 고유의 취향을 알 수 있었던 성찰의 시간이 부족했다. 근대 100년은 ‘잊고 싶었던’ 기억 상실의 역사였다. 제국 열강의 침략과 일본 식민지 시대, 분단과 동족간의 전쟁, 독재의 시대를 살아 온 험난의 역사는 그야말로 살기 위해, 사라지지 않기 위한 몸부림의 역사였다.

그렇다면 이제는 다시 쿨한 시선으로 한국의 정체성, 본령을 바라보아야 할 때다. 상실된 기억 속의 심상을 온전히 복기하여 금빛 기쁨의 기억을 지펴내야 한다. 가장 경계하고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이분법적인 사고이다. 한국인에게 한이란 신명으로 승화되어 가는 과정에 불과한 것처럼 상극과 상생, 형(形)과 상(象), 고통과 깨달음, 아(雅)와 졸(拙), 울음과 웃음을 통일체로, 회통의 관계로 보아야 한다. “한에서 흥으로, 울음에서 웃음으로 승화되는 과정은 전자를 지워버리고 후자로 날아오르는 초월(超越)의 몸짓이 아니라 전자를 등에 지고 후자를 향해 기어가는 포월(匍越)의 몸짓이 되어야 한다.” (P261)

특히 전 세계를 대상으로 비즈니스와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 글로벌 시대에서 한국인의 정체성은 세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무조건 ‘우리 것이 세계적인 것이여’ 라는 쇼비니즘적인 국수주의는 온당치 못할 뿐더러 미아의 신세가 되기 십상이다. 우리 속에 있는 기억 속의 심상을 제대로 알고 그 두께를 넓혀가야 하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세계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점에서 저자의 결론적인 메시지는 의미심장하다. “한국인이기를 원한다면 동시에 세계인이기를 꿈꾸어야 하며 세계인을 꿈꾼다면 결코 한국인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P279)

이 책은 소중한 깨달음을 주는 것 외에도 또 다른 묘미를 제공한다. 책 곳곳에 배열된 그림과 문화재 등의 사진이 더해져 책의 맛이 깊다. 맛을 멋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저자의 어린 시절의 모습을 공개하는 희생정신(?)도 발휘한다. 어쩜 이다지도 편집을 잘한단 말인가?
국문학과 출신답게 어휘, 단어 사용의 깊이도 상당하다. ‘곰삭음’, ‘에둘러서’ 등의 표현과 책 구석구석 인용된 문장은 완벽할 정도로 시의적절하다.

문화유산 감상법을 배운 점에 대해서도 저자에게 감사하는 바이다. 어렸을 적 박물관에서 문화재를 본 경험을 떠올리면 그냥 밋밋한 느낌이 든다. 단지 고구려의 역동적인 벽화가 인상적이었다. 문화재를 감상하는 법, 미의식에 대한 교육을 받은 기억이 없기 때문이리라.

“박수근의 작품이든, 한반도의 어느 녘에서 마주치는 화강암 마애불이나 여타의 화강암 조각이든, 아니면 일상에서 만나는 문화유산이든 간에 그것을 조용히 바라보되, 그로부터 적어도 몇 걸음이나 몇 마장 떨어진 자리에서, 육체의 눈을 가늘게 뜬 대신 영혼의 눈을 크게 뜨고, 근경(近景)의 미학이 아닌 원경(遠景)의 미학으로 바라보라. 만약 그것이 코앞에서 조목조목 뜯어보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거칠기보다 부드럽고, 졸(拙)하기보다 아(雅)하며, 어눌하기보다 격조있게 보인다면, 그때 비로소 당신은 상의 아름다움에 주목하는 한국인의 미의식에 눈뜨기 시작한 것이다.” (P142)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말하자면 이 책에는 앞으로 관심을 갖고 싶은 사람과 책이 가득하다. 백남준, 윤이상, 이응노, 박수근, 정선, 김정희, 장욱진, 김기창, 오윤 같은 인물에 마음이 이끌렸고 그 지긋지긋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읽고 싶어졌다. 조지훈 '멋의 연구'도 꼭 보고 싶은 책이다.

오랜만에 인문학적 감수성에 푹 빠져든 일주일이었다. 그리고 내 자신이 사랑스러웠다.




2. 역지사지(易之思之)-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무엇보다 한국인의 미의식에 대한 저자의 치열한 땅굴파기의 결과이다. 책 뒷부분에 있는 방대한 양의 참고도서가 이를 웅변해준다. 또한 저자의 발로 뛴 모습이 선명하게 다가올 정도로 답사의 흔적도 역력하다.

강영미 평론가의 미의식도 상당한 것 같다. 저자의 취향에 퍽 매료되었다. 특히 박수근 화가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 책을 읽은 큰 소득 중의 하나이다. 평소 미술에 대해서는 그리기는 물론이고 감상에 대해서도 젬병일 뿐만 아니라 나의 관심분야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해 온 평소의 소신(?)이 무너졌다.

책에 관해 몇 가지 말하자면, 먼저 책 제목에 대한 얘기를 해야겠다. ‘금빛 기쁨의 기억’ 이라는 제목이 가슴에 잘 다가오지 않는다. 책 서문을 보면 아마도 저자의 어린 시절 ‘기억의 심상’인 서린동에서의 기억이 조선(朝鮮)에 대한 기억과 하나임을 깨닫는 순간의 기쁨을 묘사한 것으로 짐작된다. 저자가 이 책에서 기억은 인간을 자신의 일방적인 흐름 속에 가두어놓는 시간의 질서에 거역함으로써, 세월의 무상함을 넘어서는 인간적인 정체성의 토대가 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 점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럼에도 ‘금빛’에 대한 심상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저자 고유의 기억과 조선의 기억을 아우르는 멋진 제목이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부제 ‘한국인의 미의식’과 잘 회통이 되지 않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단어장을 하나 만들었다. 워낙 감각적인, 매혹적인 단어가 많은지라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책을 읽으면서 나를 사로잡은 단어를 동그라미 치고 책을 타이핑할 때 같이 단어를 저장했다. 감상문을 쓰거나 칼럼을 쓸 때 단어장을 한번 음미하고 써보면 글에 새콤한 맛이 더하지는 것 같아 즐겁다.

평소에 본인이 쓴 글을 그대로 직접 인용하는 방법도 좋을 듯 싶다. 책의 몇 군데는 저자가 이 책을 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용도로 미리 써둔 듯한 내용의 글로 짐작되는 대목이 엿보인다. 역시 평소에 잘 정리해야 한다.

칼럼 주제라던가 아니면 책 중간의 소제목에 관련된 사진과 이미지를 평소에 모아두는 것도 퍽 도움이 되고 재미있는 일인 듯하다. 이처럼 훌륭한 내용의 글과 그림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어지간한 재미와 이력이 없다면 불가능하다고 생각된다.

끝으로 다시 한번 몽매한 나를 찬연한 미의식의 세계로 인도하고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한 오해의 편견을 벗겨준 저자께 깊이 감사 드린다.



3. 책에서 끌어다 쓰기(인용)


<1부 기억상실과 어제의 한국인>

[백남준과 서울의 기억]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따금 밖으로 향해 있는 안테나를 내리고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올 필요가 있다. 그것은 겸재의 진경산수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또 다른 교훈이기도 하다. - 유홍준 '화인열전1' (P17)

아주 자연스럽게 고유의 전통과 사대주의가 병존합니다. 그런 마당에 사대와 자주라는 대립을 생각하는 것은 의미가 없죠. 그러니까 사대주의의 문제를, 우리가 소국(小國)이 되어 사대했으니 분하고 슬프다는 식으로 한국사에 너무 집착해서 보면 그 전무가 보이지 않을 우려가 있습니다. - 이용희 '한국민족주의' (P18)

요컨대 예술은 아이덴티티를 구하는 방법의 하나이며, 그것이 예술의 큰 기능입니다. 남의 유행에 동의하는 것과 아이덴티티는 상반된 개념이지요. 예술은 결국 모순입니다. - 김홍의 '백남준과 그의 예술' (P20)

어쩌면 우리는 세계성의 부재를 토속성의 과장으로 얼버무리는 이상한 논리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P23)

만유는 무에서 나온 것이 아니지만, 그렇게 해서 나온 사물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이라는 면에서 무에서 나온 것이다. - 박수근의 '대화'그림을 보고(마애불과 쇠라의 그림을 동시에 연상시킴) (P24)

세계인이냐 한국인이냐가 아니라 세계인인 동시에 한국인이어야 한다.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둘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문제다. 양자택일(兩者擇一)의 문제가 아니라 회통(會通)이다. (P25)

세계인 백남준의 예술이 한국인의 토속적인 자기를 주장하는 내용을 담아낼 수 있는 것은, 그가 전통을 기억의 형태로 몸 속 가득히 저장한 채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전통이란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쓸 수 있는 '기억 속의 심상'이다. 세계인이자 '지구촌 민주주의 건달'인 그가, 동시에 거뜬히 순한국인이자 전통적 인간일 수 있는 까닭이 여기 있다. (P27)

러셀은 '철학의 문제들'에서 현재가 감각을 통해 인식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과거는 오직 기억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고 말했다. (P28)

인간의 삶을 관통하는 모든 비극은 인간이 시간의 일방적인 흐름 속에 갇힌 존재이기 때문에 생겨난다. 시간의 엔트로피 법칙 또는 불가역성은 덧없음이라는 인생의 쓰디쓴 진리를 탄생시킨 우주의 원죄다. 이 같은 시간의 불가역성에 항거하는 것이 바로 기억이다. 기억은 시간을 거슬러 뛰어넘는다. 기억의 다른 이름이 추억인 까닭도 이 때문이다. 기억은 인간을 자신의 일방적인 흐름 속에 가두어놓는 시간의 질서에 거역함으로써, 세월의 무상함을 넘어서는 인간적인 정체성의 토대가 된다. (P28)

문화의 저력이란 문화 속에 덧쌓인 '기억 속의 심상'의 두께이며, '기억 속의 심상'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취향이야말로 미의식의 본질이다. (P32)


[기차가 있는 풍경]

지난 세기의 한국인에게 근대화가 의미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서구화에 일본화를 겹쳐 놓은 것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문명, 개화, 과학, 합리, 이상과 동일시되기도 했는데, 주목해야 할 것은 이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주체적으로 변용시키는 데 필요한 성찰의 여백은 실종된 반면 이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데 급급한 조급함만이 넘쳐났다는 것이다. (P38)

역사의 시간과 숨가쁜 경쟁을 해야 한다는 조급함, 여기서 역사의 시간이란 서구에 의해 주도된 근대적인 시간을 의미하며, 조급함이란 서구적 근대에 대한 콤플렉스를 말한다. 이 같은 조급함은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의 참극을 낳은 혁명의 열기고 이어졌고, 일본에서는 일본인과 중국인 수백 수천 만을 남태평양과 중국 대륙에 묻는가 하면 스스로를 세계 최초의 원폭 희생국으로 몰아간 제국주의적 팽창의 광기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P42)

따라서 기차가 있는 풍경 속 근대 한국인의 내면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것은 조급함이다. (P47)

시간의 흐름보다 앞서고자 하는 조급함의 열기에 휩싸인 나머지 가끔씩 시간의 흐름에서 뒤돌아볼 때만 확보되는 기억 속의 심상을 상실한 근대 한국인은, 마침내 인간적인 정체성의 토대가 흔들리는 비극에 직면했다. 이것이 바로 근대 한국인의 기억상실이다. (P47)

기억의 상실이란 만취하여 '필름이 끊어진' 상태와도 흡사하다. '필름이 끊어진' 사람들이 그렇듯이 기억상실에 빠진 사람들은 성찰을 토대로 한 자기 통제력이 현저하게 낮아진다. 이것이 바로 한국병이라고 불리는 사회심리적인 병폐의 원인이다. (P48)

취향이란 무엇보다 타인과 자신을 구별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구체적인 계기이기 때문이다. (P49)



<2부 야나기 무네요시의 한국 예술론>

[미적인 위계질서 또는 오리엔탈리즘]

에드워드 사이드는 하위사회와 그 예술에 대한 사랑을 내세워 그들의 미와 상상력을 교묘하게 착취하고 마침내 그들의 영혼을 자기소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이 같은 근대 속의 야만을 동양주의 또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라고 불렀다. (P60)

일본인을 이해하기 위한 시도로서는 먼저, "각자 알맞은 위치는 갖는다(take one's proper station)"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가에 관한 일본인의 견해가 어떠한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일본인은 국내 문제를 위계질서의 견지에서 바라보아 왔지만, 국제관계 역시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아 왔다. - 루스 베네딕트 '국화와 칼' (P66)


[일본 국학과 야나기의 미의식]

야나기가 한국 예술을 '사랑'한 것은 거기서 중국적인 작위를 따르는 도학(道學)의 삶 대신 일본적인 자연스러움을 따르는 인욕(人慾)의 삶을 중시하는 국학의 이상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그는 조선의 도자기를 인정과 마음의 하소연을 간직한 '정의 기물'인 동시에 '무작위의 미'와 '무기교의 미'의 표본이라고 말했다. (P78)

주목해야 할 것은 이같은 인욕(人慾)의 삶에는 반드시 쓸쓸함의 정감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엔카의 애상이나 벚꽃의 허무로 대표되는 일본적 감상주의의 본질이다. (P82)

국학적인 자연주의에 토대를 둔 일본인의 미의식을 한국 예술에 덮어 씌운 '무작위의 미'나 '비애의 미'와 한국 예술의 아름다움은 아무 관련이 없으며, 만약 관련이 있다면 도리어 일본인의 미의식이 한국 예술의 아름다움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형성된 것이다. 그렇다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로, 그들의 것은 그들에게로 되돌려줘야 한다. (P90-91)


[선의 미와 야나기의 환상]

한국 예술의 선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며, 자유곡선이 아니라 자연곡선이라는 것이다. (P94)

물매를 직선으로 하지 않고 곡선으로 하는 이유는 빗물을 빨리 배수하기 위한 이유이다. 직선으로 거리가 짧아서 더 빨리 배수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사이클론 곡선으로 만들었을 때 가속도가 붙어서 더 빨리 배수된다는 것이다. - 김왕직 '한국건축용어' (P97-98)

그들의 미의식은 주제가 정지태에 있지 않고 힘찬 운동 계열에 있다는 것. 자웅이 합체 되고 음양이 하나 되어, 마치 태초에 내딛는 첫발자국과도 같이 고도로 응축된 힘을 발산하고 있다는 것. 이 같은 미의식의 특성은 비단 사신도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한옥의 지붕곡선이나 의복의 선, 도자기의 선에서도 마찬가지로 발견된다. 그것들은 근엄하게 팔장을 낀 듯한 정지태에서 벗어나, 살아 숨쉬며 꿈틀거리며 심지어는 슬쩍 말까지 걸어오는 듯한 움직임의 기미를 드러낸다. (P100)

물론 '조선 역사의 운명은 슬픈 것이었다'는 명제가 야나기의 발명품은 아니다. 그는 조선사의 본질을 지정학적 숙명에 따른 사대주의로 규정한 일본 관학자들의 발명품인 식민사관의 뒤통수에 일본인 특유의 정서인 모노노아와레의 꼬리표를 달아놓았을 따름이다. (P101)

'작은 것을 보살피고 큰 것을 섬기는' 자소사대(字小事大)의 준말인 사대는, 동북아 세계질서의 중심인 중국과 중국의 문화적 선진성을 인정한 주변 국가들 사이에서 형성된 자율적 질서의 매커니즘이었다. (P103)


[일본의 기교(技巧)와 한국의 격(格)]

흔히 격(格)이라고 불리는 이것은, 빈틈없이 맞추어야 하는 눈앞의 실선 같은 것이 아니라 느슨하게 의식되는 머리 속의 점선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일본의 기교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범'인 반면, 한국의 격은 '때에 따라 넘나드는 틀거리'라고나 할까. 달리 말하면 한국의 격은 '격식에 맞으면서도 격식을 뛰어넘을 때'를 어림하기 위한 가상의 척도 같은 것이다. (P106-107)

멋은 격식에 맞으면서도 격식을 뛰어넘을 때, 바꿔 말하면 격이 맞는 변격(變格), 변격이면서 격에 제대로 맞을 때 거기서 멋을 느낀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초격미(超格美)라고 부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는 변격이합격(變格而合格)'이요 '격에 들어가서 다시 격에서 나오는 격'이라 할 수 있다. - 조지훈 '멋의 연구' (P107)

수식(瘦式) 득격(得格) : 식(式)을 최소화해야 격(格)을 최대화할 수 있다.
부작기격(不作奇格) 염화취실(염華就實) : 화(華, 형식)를 거두어야만 실(實, 내용)로 나아갈 수 있다. - 추사 김정희 (P108)

일본의 격이란 위계질서의 표현인 격식(格式)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첫째 '때에 따라 넘나드는 틀거리'인 한국의 격과는 달리 '넘나듦이 가능하지 않은 세부항목'을 말한다. (P110)

사물은 상(象)과 형(形)이 하나로 결합하여 이루어지는 것인데, 양자는 서로 반비례 관계에 있어 하나가 평균 이상으로 빼어나면 다른 하나는 평균 이하에서 어릿거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P111)

또 우리 목조 건축이 한 조형 미술로서 건축물 전체를 미적 대상으로 삼는 데 반해서 일본의 목조 건축은 건축 전체의 조형미는 거의 잃어 버리고 단지 건축을 구성하는 부분적인 요소에만 치밀하고 복잡한 장식적 의장을 부가하여 건축을 부분적인 공예품의 집합체로 타락시키고 말았다. - 김정기 '한국의 건축과 미의식' (P111)

따라서 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한국의 미를 형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본인의 미의식을 통해 바라본 야나기는 거기에 불가사의한 신비(神秘)의 분위기를 덧씌워 부정형, 불균제, 뷸균등 같은 것으로 정리해낼 수 밖에 없었다. (P111)


[근대적 자의식과 한국 예술의 민예성]

그러므로 이것을 형상(形象)의 대립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형(形)과 기(氣)는 언제나 그 세력이 병행하는 것이 아니고 서로 소장(消長)하면서 외면을 형성한다는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 한동석 '우주변화의 원리' (P118)

그러니까 원경(遠景)에서는 아(雅)하되 근경(近景)에서는 졸(拙)한 한국 예술을 일본인의 근경의 시선으로만 본 까닭에 오직 근경의 졸함만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P118-119)



<3부 한국인의 미의식>

아름다움의 취향을 달리 말하면 미의식이 된다. 물론 서구인의 미의식을 통해서도 석굴암 불상의 아름다움과 만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이 될 수 밖에 없다. 아름다움이란 창조에서 비롯되는 것이요, 창조란 성찰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성찰이란 백인백색의 취향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P128)

흥미로운 사실은 한국어에서 아름다움의 고어인 아 ㄹ.ㅁ다옴'의 본듯이 사호(社好) 즉 '제 마음에 어울린다'는 뜻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취향이 아닌가? 한국인은 예로부터 아름다움의 뿌리가 취향에 있음을 강하게 의식해온 것이다. (P130)


[음양오행과 상(象)의 미의식]

한국인의 미의식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상(象)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형(形)과 대립하는 개념이다. 예로부터 한국인은 형과 상이 하나로 어우러져 사물을 이룬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생겨나는 것이 사물의 형상이다. 하지만 사람의 눈에 익숙한 것은 어디까지나 형인 까닭에 무형의 상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불가능한 것만은 아닌 것이, 상이란 형의 기본을 이루는 것일 뿐 아니라 형을 통해 자취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P132)

음양오행사상은 크게 형이상의 측면과 형이하의 측면으로 나누어진다. 형이상의 측면이란 도가와 유가의 철학으로 전개된 우주의 생성론이며, 형이하의 측면이란 음양가(陰陽家)에 의해 발전된 만물의 변화론이다. (P134)

‘눈에 보이는’ 형 너머에 존재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이 때문에 흔히 멋이라고 불리는 한국인의 미의식은 형태미를 넘어서는 정신미의 성격을 지닌다. (P139)

원경의 미학과 근경의 미학의 차이는 이처럼 마애불을 닮은 박수근의 그림을 통해 쉽사리 짐작된다. 가까이서는 할아버지와 손자의 모습이 만져지고, 멀리서는 할아버지와 손자의 마음이 만져진다. (P141)

박수근의 작품이든, 한반도의 어느 녘에서 마주치는 화강암 마애불이나 여타의 화강암 조각이든, 아니면 일상에서 만나는 문화유산이든 간에 그것을 조용히 바라보되, 그로부터 적어도 몇 걸음이나 몇 마장 떨어진 자리에서, 육체의 눈을 가늘게 뜬 대신 영혼의 눈을 크게 뜨고, 근경(近景)의 미학이 아닌 원경(遠景)의 미학으로 바라보라. 만약 그것이 코앞에서 조목조목 뜯어보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거칠기보다 부드럽고, 졸(拙)하기보다 아(雅)하며, 어눌하기보다 격조있게 보인다면, 그때 비로소 당신은 상의 아름다움에 주목하는 한국인의 미의식에 눈뜨기 시작한 것이다. (P142)


[아졸미(雅拙美) 또는 고졸미(古拙美)]

‘뜯어 보믄 잘 못 생겨서 잘 생긴 것도 있으라우’ 라는 도공의 말이 여기에 들어맞는다. ‘잘 못 생긴 것’은 형(形)이요 ‘잘 생긴 것’은 상(象)이다. (P145)

다시 한번 주목해야 할 것은 평균치를 넘어서는 우아함을 갖춘 상은 어느 정도 형의 졸함을 수반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진기의 셔터를 누를 때 하나의 장면에 대해 정확하게 초점이 맞는 거리는 하나 뿐인 까닭에 원경에 초점을 맞출 경우 근경의 초점이 흐려지는 사실에도 비유된다. 이것은 도인의 격조를 지닌 선비의 글씨가 어린아이 같은 치졸한 맛을 풍기는 이치와도 같다. 상의 아름다움은 형의 어눌함을 수반하며, 높은 경지의 그것은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는 경향이 있다. 이 같은 성격을 지닌 형상을 가리켜 아졸(雅拙)하거나 고졸(古拙)하다고 하는데, 한국문화는 이렇게 상의 세련함과 형의 어눌함이 아졸함이나 고졸함의 형상으로 넘쳐난다. (P146)


[발효맛과 생기의 미감]

멋이란 말의 어원이 맛에 있다는 것은 이미 통설이 되어 있다…. 멋이란 말은 애초에는 맛이란 말뜻을 좀 다른 어감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발음적인 왜형(歪形)으로 시작되었던 것이 차츰 특이한 관념형태로 바뀌어 원의(原義)와는 별반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P156)

흥미로운 것은 발효음식은 살아 있는 유기체들의 덩어리로 이루어진 것이며, 발효맛은 잘 삭힌, 시원하고 칼칼한, 생기 있는 맛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살아 있는 유기체가 발산하는 생기의 느낌을 추구하는, 상의 미의식과 통한다. (P157)

한국음식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밑반찬의 다양함은 김치나 젓갈, 장아찌 같은 발효음식에서 비롯된다. 예로부터 가난한 이들의 밥상은 ‘밥 한 사발에 간장 한 종지’로 묘사되었고, 요즘에도 반찬이 없을 때는 밥을 고추장에 비벼 먹거나 풋고추를 고추장에 찍어먹는 경우가 있다. (P160)


[상극적인 것을 상생적인 것으로]

그렇다면 상극관계를 부정하지 않은 채로 상생적인 조화를 추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상극관계를 고스란히 껴안은 채 그것을 가능한 한 상생관계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P165)

넓은 의미의 부패란, 미생물의 증식으로 식품성분이 분해되어 유해한 물질이 만들어짐으로써, 가식성(可食性)을 잃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와는 반대로 동일한 미생물의 작용이라 할지라도 사람에게 유익한 생산물로 변화한 현상을 발효(醱酵, fermentation)라 한다. – 윤숙자, ‘한국의 저장 발효음식’ (P166)

발효를 ‘썩지 않으며, 처음 그대로 유지되지도 않은 은근한 곰삭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까닭이 이것이다. 그러니까 발효의 원리란 자연의 이치에 따른 상극의 과정인 부패를 인간의 지혜에 따른 상생의 과정인 발효로 변용시키는 것이다. (P167)

비보란 말은 도와서 보충한다는 뜻인데 흔히 풍수지리에서 국면을 이루기 위한, 그 중에서도 이른바 명당의 조건을 갖추기 위하여 마을 형태에서 부족한 점을 인공적으로 만들어 보충한다는 것이다. 비보의 방법은 조림(造林), 조산(造山), 장승, 골맥이 등이 있는데…. – 김덕현, ‘유교적 촌락경관의 이해’ (P169)

그렇다면 완전한 아름다움을 지닌 완전한 땅이란 ‘자연적인 것’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손길을 거친 ‘인문적인 것’으로서 존재한다고 볼 수도 있다. 여기서 사람의 손길이란 비보(裨補)요, 완전한 아름다움이란 상(象)의 아름다움이다. (P171)


[해학과 신명]

멋은 형상이나 가락이나 마음에 있어서 한 움직임에서 다음 움직임에로 이어 가고 넘어 가는 과정에 나타난다. 가동적인 정지태(靜止態), 멈추려는 움직임이 연속되는 가동적인 경향상태가 멋의 형태미의 본질이다. – 조지훈, ‘멋의 연구’ (P175)

다시 말하면 우리의 예술은 왜 선의 예술이냐 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바로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의 예술은 흐름과 율동, 곧 멋을 특색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동적인 미는 그 수법으로서 색을 요구하지 않고 선을 요구하게 된다. – 조지훈, ‘멋의 연구’ (P177)

한국인 자화상의 울음이란 웃음으로 승화되어 가는 전 단계이며, 한이란 신명으로 승화되어 가는 과정에 불과하다. 이것은 김치가 익어 시원하고 칼칼한 발효맛을 내기 전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숙성의 과정을 거치는 것에 비유된다. 맛이 들고 난 후의 곰삭아 익은 맛을 김치라고 하지, 맛이 들기 전의 설익은 맛을 김치맛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P178)

한국적 한이라는 말이 성립될 수 있다고 할 때, 이는 한민족에게만 한이 있다거나, 한민족의 한이 유달리 넓고. 깊고. 짙다거나, 그러한 이유에서가 아니고, 그것을 초극해가는 삶의 양식 자체가 다른 민족의 그것과 다르다는 이유에서일 것이다…. 한국 사람은 자기 몫의 한을 ‘삭이면서’ 살아왔던 것이다. 적어도 한을 ‘삭이면서’ 살아가는 것을 윤리적 덕목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한국인은 한을 삭이면서 인간으로 성숙해가고, 그 한을 즐기면서 멋을 구사하였던 것이다. – 천이두 ‘한의 구조 연구’ (P179)

한에 대해 잘못된 담론이 형성된 이유
첫째 한을 삭일 여유가 없었던 까닭에 해학과 신명으로 승화시키지 못한 채 한의 늪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던 일제 강점기의 척박한 현실을 염두에 두어야 하며, 둘째 일본적인 정서인 모노노아와레와 신파의 퇴행적 영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P180)


[고지도와 명당론]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시간적 파악이 역사라면, 그 공간적 인식이 지리와 지도이다. –한영우, ‘우리 옛 지도와 그 아름다움’ (P185)

여기서 우리는 지난 세기의 한국인이 서구적 근대를 향한 ‘시간과의 경쟁’에 빠져든 결과 공간 의식과 공간 취향을 상실해 버린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주위의 공간을 오로지 서구적 근대의 잣대인 돈 가치, 효율성, 편리성에 의해서만 판단한 나머지 개인이 사는 집이나 집단이 사는 도시에 대해서도 오로지 평수나 땅값 같은 돈 가치만을 따지는 데 익숙해졌으며, 그 결과 자신의 공간취향이 발붙일 자리를 상실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공간 의식과 공간 취향이 인간의 정체성과 직결되는 미의식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는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조차 없다. 흔히들 말하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 역시 그런 것이거니와, 무엇보다 공간 의식이란 인간의 정체성을 속절없이 떠도는 천상의 것으로부터 든든하게 뿌리내린 지상의 것으로 잡아내리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P186)

땅을 인간적 의미를 주어, 이용과 소유의 대상이 아닌 더불어 살아가야 할 삶터로 환원시키는 것이 풍수사상이다. – 최창조, ‘한국 풍수사상의 이해를 위하여’ (P193)

우리들에게 공간이란 시간과 함께 객관적 대상일 수밖에 없지만, 경관이란 공간이 주체인 우리의 의식 속으로 들어와 재구성된 주관적 공간이라 볼 수 있다. – 김덕현, ‘유교적 촌락경관의 이해’ (P196)


[백의와 색동]

한국인이 좋아하는 색은 무엇보다 ‘밝고 맑은’ 색. 즉 명도(明度)와 채도(彩度)가 아울러 높은 색이다. (P201)

한국적인 이미지의 색이란 하나 하나의 색깔에 한국적인 의미가 부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몇 가지의 색깔이 지각공간에 어떻게 구성되느냐의 정도, 이른바 상대적 가치에 의해서 형성된다. 색동은 색동저고리와 같이 몇 가지의 색깔이 구성될 때에만 한국적 이미지를 환기시킨다. – 국립현대미술관, ‘한국전통표준색명 및 색상’ (P202)

이상을 통해 우리는 한국인의 색 취향을 결정한 색배열 또는 색구성의 원리를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첫째 흰색을 여백으로 남겨둔 수묵채색화 같은 구성이며, 둘째 하양, 까망에 빨강, 노랑, 파랑이 한데 어우러진 오방색의 구성이다. (P205)

한국인은 흰옷을 즐겨 입었으며 흰색을 좋아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경우의 흰색은 색이 없는 무색이 아니라 자연의 바탕색인 소색이라는 것이다. 소색이란 무엇인가. 바탕 소자(素)에 색 색자(色), 옥양목이나 비단, 광목의 색처럼 재질에 따라 다양한 뉘앙스의 색감을 드러내는 자연의 바탕색이다. (P206)

소색은 광선을 반사하여 번쩍거리는 백색이 아니고, 빛을 흡수하는 은은한 빛깔이다. 소색의 백색은 화학약품으로 처리되어 표백된 순백색이 아니라, 옅은 색상을 띤 백색이다. (P207)

여백은 문자 그대로 비어있는 상태가 아니라 무엇인가 존재하고 있지만 우리의 눈에 쉽사리 확인되지 않는 그 어떤 심오한 상태인 것이다. – 박용숙, ‘한국미술의 해학정신’ (P210)

아무런 색도 지니지 않은 흰색 취향과 관련된 부정적인 자화상. 쓸쓸하고 조심성 많은 소멸 지향의 자의식. 제국주의자의 동정에 기대야만 간신히 지탱할 수 있는, 불완전하기 이를 데 없는 식민지인의 정체성. 이상은 조선인 스스로는 아무런 창조적 에너지도 소유하지 못하며, 오직 일본인의 은총에 의지해야만 ‘기적과도 같은’ 창조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고 말한 일본인 야나기의 한국 예술론의 본질이다. (P219)

이데올로기란 본질적으로 사물을 다면적이 아니라 일면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고, 이 같은 일면성은 한 측면에서의 설득력을 발휘하는 대신 다른 측면들에서의 터무니없음을 피하기 어렵다. (P219)

시간의 화살 위에 올라탄 인간이 잡담 제하고 일직선 저편의 목표에 몰두한 채 앞만 보고 질주한다면, 공간의 치마폭에 싸인 인간은 반성적인 성찰의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걸어간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시간 좌표에 지나치게 강박된 반면, 공간 좌표에는 무감각해졌다. 자신에 대한 반성과 아울러 타인에 대한 배려가 결여되었음을 떠들썩하게 고백하는 무질서한 대형 간판들의 난립이 이 같은 현실을 웅변한다. (P224)



<4부 취향과 성찰 그리고 내일의 한국인>

[이데올로기에서 취향으로]

미는 무엇보다 취향이다. 사람마다 개성이 다른 것처럼, 사람마다 미에 대한 취향도 다르다. (P231)

취향은 고유의 풍토와 역사 속에서 형성되는 인문적인 지혜의 산물이다. 취향은 인간이 공간과 시간 속에서 이룩한 인문적인 가치의 토대이다. 따라서 그것은 ‘제멋대로의 것’이 되기보다는 ‘자기를 돌아보는 것’이 될 가능성이 많다. 출발점에서는 ‘제멋대로의 것’으로 작용하던 취향도 반환점을 돌고나서부터는 시나브로 ‘자기를 돌아보는 것’으로 작용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바로 취향이 지닌 성찰의 가능성이다. (P232)

여기서 나는 ‘사물을 의식함으로써 그 사물을 의식하는 자신을 의식하고 반성(retrospection)할 수 있으며, 그 결과 우리가 우리의 정신 내용들과 직접적으로 대면하게 된다’는 인식론의 주제를 떠올린다. 이것이 이른바 자의식(self-consciousness)의 내용을 구성한다는 것이다(버트란드 러셀, ‘철학의 문제들’). 따라서 한국인이 된장찌개를 좋아하고 색동옷을 즐겨 입으며 상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식의 취향에 대한 담론들은, 사실상 된장찌개나 색동옷, 상의 아름다움 자체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이끌리는 한국인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P232-233)

앞뒤가 따로 없는 ‘뫼비우스의 띠’나 안팎이 따로 없는 ‘클라인 씨의 병’에 비유될 수 있는 한 차원 높은 사고를 모색해야 한다. 나는 이 같은 사고를 취향적 사고라고 부를 것을 새롭게 제안한다. (P234)

한마디로 말해서 한복바지는 뫼비우스 고리로 된 입체적인 것이고, 양복바지는 자연고리로 된 평면적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인체는 근육과 뼈대로 된 입체이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우리의 몸에 적합한가는 알고도 남음이 있다. 한복바지는 우리의 인체(입체)에다 옷을 그대로 맞추어 놓은 것이라면, 양복바지는 2차원의 평면에다 3차원의 인체를 넣는 무리를 저지르고 있다. – 김상일, ‘대(對)’ (P235)

합리성을 서구성과 동일시하게 된 출발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합리성에 대한 잘못된 접근이다. 합리성이라는 개념을 과학과 수학을 매개로 한 형식합리에 한정하고, 전통과 역사 위에 쌓아 올린 실질합리를 원천적으로 배제했기 때문이다. (P236)


[상생지향과 탈속의 아름다움]

상생의 자연 질서 앞에서 상극의 인간 질서를 해소시켜 버린 정태적인 무의식이 아니라, 상극의 인간 질서를 온몸으로 껴안으며 그것을 상생의 자연 질서로 승화시키고자 애쓴 역동적인 자의식. 이 같은 역동성이 즐거움이나 해학적이 생기로 표출된 것이다. (P245)

그리하여 양자를 하나로 아우른 것이 바로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으뜸 가는 방책으로 삼되 자신은 한사코 물외한인(物外閑人)의 자리에 머무르고자 하는 조선 선비의 취향이다. (P248)

그때까지 나는 그곳의(프랑스) 자연과 거리라는 원관념은 빼놓은 채 이것과 그림 사이를 다리놓은 ‘예술가의 상상력’을 신기루인 양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런데 어는 순간 마음의 눈을 떠보니, 그들이 탁월한 예술가인 까닭은 그곳의 낯익음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돌아보게 만든 데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곳의 대중들이 자신들의 삶을 새롭게 응시할 수 있게 만든 그림들을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P252)


[허무주의와 샤머니즘의 극복]

이 상상성, 구상성이 진실미를 못 얻을 때 일종의 허랑한 ‘멋’이란 것만이 나게 되고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술적 승화를 못 얻을 때 한편으로는 ‘군짓’이 잘 나오고 한편으론 ‘거들먹 거들먹’하는 부화성(浮華性)이 나오게 된다. – 고유섭, ‘조선 미술문화의 몇낱 성격’ (P261)

따라서 우리는 상생 속의 상극, 정지태 속의 가동성, 매끈함 속의 거칠음, 신명 속의 한을 단단한 핵심으로 보전하는 과제를 잠시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한에서 흥으로, 울음에서 웃음으로 승화되는 과정은 전자를 지워버리고 후자로 날아오르는 초월(超越)의 몸짓이 아니라 전자를 등에 지고 후자를 향해 기어가는 포월(匍越)의 몸짓이 되어야 한다.(김진석, ‘초월에서 포월로’) 상극의 과정을 과거의 삶의 흔적으로만 남겨두는 정태적인 상생이 아니라 그것을 현재의 삶의 에너지로 확보하는 역동적인 상생 쪽으로 우리의 취향을 자꾸만 밀어내는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P261)

문화란 창조적인 것이며, 그 같은 창조의 빛은 세계성이라는 ‘큰 나’ 안에서 토속성이라는 ‘작은 나’들이 부싯돌과도 같이 부딪힐 때, 그 부딪힘의 섬광 속에서 피어난다. (P262)


[김정희와 연경의 기억]

법고창신. 옛것(古)을 따름으로써 새것(新)을 창조하는 것. 이것은 ‘기억 속의 심상’을 ‘오늘의 심상’으로 탈바꿈시켜내는 것이다… 골동이 되어버린 옛것에 새것의 아우라를 뒤집어씌우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지금 이 순간’의 주체가 체험하는 당대성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가’의 주체로 하여금 당대성을 체험하게 하는 지렛대는 무엇일까. 추사가 ‘연경의 기억’을 통해 획득한 국제적 감각이 그것인데, 그것은 우물 안 개구리와도 같은 토속적인 감각 또는 조선성을 넘어선 곳에 존재하는 세계성이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의 우리는 몬드리안의 작품을 통해 만나는 국제적인 감각을 획득하고 나서야 비로소 천연염색 조각보의 토속적인 아름다움에 새롭게 눈뜰 수 있으며, 현대 회화의 개성적인 예술혼을 접하고 나서야 비로소 조희룡 매화도의 진한 매혹과 김수철 화훼도의 간결한 세련에 새삼스럽게 빠져들 수 있다. (P277)

한국인이니 세계인이니 하는 구분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들은 자신을 한국인인 동시에 세계인으로 여겼으며, 이 같은 회통적인 사고야말로 그들로 하여금 창조의 주체로 우뚝 서게 한 원동력이었다고.
한국인이기를 원한다면 동시에 세계인이기를 꿈꾸어야 하며 세계인을 꿈꾼다면 결코 한국인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P279)
IP *.51.71.189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