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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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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6월 12일 13시 53분 등록
오리엔탈리즘 (에드워드 사이드 지음, 박홍규 옮김, 교보문고, 1991)

Edward W. Said.. 1935년 영국이 위임통치하고 있던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나치독일의 박해를 피해 1948년 이집트로 이주하였고 그는 카이로에 있는 빅토리아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 후 1950년대 말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 대학과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하버드에서 학위를 받았다.

그는 현재 컬럼비아 대학의 영문학 · 비교문학 담당 교수이자 하버드 대학의 비교문학 객원교수로도 일하고 있으며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문학평론가 중 한 사람으로 활동하고 있다. 1976년에는『시작 : 의도와 방법』으로 리오넬 틀리링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오리엔탈리즘』『지식인의 표상』『문화와 제국주의』등이 있고, 자서전인『Out of Place』를 펴냈다.

“이 책의 대부분은 1975년에서 1976년까지, 캘리포니아 주 스탠포드 대학의 행동과학 고등연구소 특별연구원으로 있었던 동안에 썼다”
Orientalism(New York: Patheon Book , 1978)

<서설>

동양이란 사실상 유럽인의 머리 속에서 조작된 것이었고, 옛날부터 로맨스나 이국적인 존재, 무엇엔가 사로잡힌 기억과 풍경, 진지한 체험담 등의 무대가 되어왔다. 오리엔탈리즘이란 오리엔트 곧 동양에 관계하는 방식으로서, 서양인의 경험 속에 동양이 차지하는 특별한 지위에 근거하는 것이다. 동양은 유럽에 단지 인접되어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유럽의 식민지 중에서도 가장 광대하고 풍요하며 오래된 식민지였던 토지이고, 유럽의 문명과 언어의 연원이었으며, 유럽문화의 호적수였고 또 유럽인의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반복되어 나타난 타인의 이미지이기도 했다. 나아가 동양은 유럽(곧 서양)이 스스로를 동양과 대조가 되는 이미지, 관념, 성격, 경험을 갖는 것으로 정의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19세기 초엽부터 제2차대전까지는 영국과 프랑스가 동양과 오리엔탈리즘을 지배했다. 제2차대전 이후에는 미국이 동양을 지배하게 되었고, 과거의 프랑스 및 영국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동양에 대하여 접근하고 있다. 이러한 근접관계의 역학은 모두 서양(영국, 프랑스, 미국)의 동양에 대한 우월을 시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그 생산력은 거대한 것이었으며 이러한 근접관계의 내부로부터 내가 오리엔탈리스트라고 부르는 방대한 분량의 텍스트가 출현했다.

오리엔탈리즘은 허위와 신화로 이루어진 것에 불과하고 만일 그 진실이 밝혀진다면 허위와 신화는 일거에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나 자신은, 오리엔탈리즘이 갖는 독특한 가치는 동양에 관하여 진실을 말하는 언설의 측면보다도 동양을 지배하는 유럽적-대서양적인 권력의 표지라는 측면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오리엔탈리즘에 관한 언설을 긴밀하게 엮어 놓은 힘 그리고 강력한 사회 경제 정치적인 여러 제도와 그것과의 지극히 밀접한 연결, 나아가 그 엄청난 지속력을 가볍게 취급하지 말고 그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더욱 중요한 일은 오늘날 오리엔탈리즘에 대체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연구에서, 어떻게 하면 타인을 억압하고 조작하는 것이 아닌 자유로운 입장에 서서 상이한 문화나 상이한 민족을 연구할 수 있겠는가를 묻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것을 위해서는 지식과 권력이라고 하는 복잡한 문제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나의 희망은, 문화적 지배의 가공할 만한 구조를 분명히 밝히고 나아가 특히 식민지를 경험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 구조를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게 적용하는 것의 위험성과 유혹에 관하여 분명히 인식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 1부 > 오리엔탈리즘의 범위

제1장 동양인에 대한 인식

오리엔탈리즘은 유럽 곧 서양이 지구 위의 지극히 광대한 부분을 문자 그대로 지배하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한 일정한 인식에 의해 강화되었고, 동시에 그 인식을 강화하도록 작용했다. 제도의 면에서도, 내용의 면에서도 급속하게 전진한 시대는 유럽의 엄청난 팽창의 시대와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1815년부터 1914년까지 유럽의 직접지배 하에 놓인 식민지 영토는 지구면적의 거의 35%에서 85%까지 확대되었다. 모든 대륙이 영향을 받았으나, 특히 그 영향이 현저했던 곳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2대제국으로서 한편으로는 동맹국으로서 동반자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적대적인 경쟁 상대이기도 했다. 지중해동안으로부터 동양의 여러 지역에서 양제국의 식민지영토 및 세력범위는 서로 인접하고 가끔 중복되며 자주 충돌하기도 했다. 곧 그 나라를 포기하든가, 독점하든가 또는 분할하는 것인데 실제로 그들은 나누어 먹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나눈 것은 토지나 이윤 또는 지배만이 아니었다. 오리엔탈리즘이라고 이름 지은 일종의 지적 권력도 나누었다. 그것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유효성이 증명되는 하나의 가치체계였다.

한 시대의 작가들도 동양을 경험하고 동양에 관하여 말하는 경우 어떤 억압이나 강제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오리엔탈리즘이란 결국 현실에 관한 정치적 비전이며, 친구들(유럽, 서양, ‘우리’)과 이방인(동양, 동방, ‘그들’) 사이의 차이를 확장하는 구조를 갖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전은 이분법에 의해 두 가지 세계를 창조하고 그것에 봉사하는 것이었다. 만일 어떤 정도라도 교류의 자유라고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일방적으로 장악한 것은 언제나 서양인 측이었다. 그것은 서양인의 문화가 더욱 강력했기 때문이고 그 때문에 아시아의 위대한 신비를 간파하고, 그것과 격투하고, 형상과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리엔탈리즘의 현실이란 반인간적인 것임과 동시에 지속적인 것이라는 점을 나는 말하고 싶다. 오리엔탈리즘의 범위는, 그 여러 제도 및 광범한 영향력과 마찬가지로 오늘에까지 존속되고 있다.

제2장 상상의 지리와 그 표상 : 동양의 동양화

하나의 학문분야로서 오리엔탈리즘이 갖는 역사적 발전의 법칙은 선택성의 증대가 아니라 영역의 확대라고 하는 점에 있다.

외래물의 길들임이라고 하는 것 그 자체는 특별히 문제로 삼거나 비난해야 할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문화 사이에서 일어나고, 모든 인간 사이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동양에 관하여 생각하고 동양을 체험한 서양의 유럽인 가운데서 오리엔탈리스트를 능가할 정도로 이러한 정신작용을 담당해온 사람들이 없다고 하는 사실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결과로서 한정된 수의 어휘와 이미지가 강요되었다는 점이다.

허구라고 하는 것에도 그 나름의 논리가 있고, 그 나름으로 성장과 쇠퇴의 변증법이 있다. 중세에는 마호메트라고 하는 인격 위에 실로 다양한 속성이 산더미처럼 누적되었다. 마호메트는 잘못된 계시를 전파하는 자로 인정되었으므로, 호색, 방탕, 남색, 기타 있을 수 있는 모든 비도덕적인 행위를 한 몸에 체현한 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동양은 소위 대표자와 표상을 획득했다. 이와 같은 상당히 자기도취적인 서양의 동양관은, 그 원천이야말로 시간과 함께 변하는 적이 있어도 그 성격에서는 결코 변화하는 적이 없었다.

모든 문화란 살아 있는 현실 위에 교정을 가하고, 그것을 자유롭게 유동하는 대상으로부터 일정한 지식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변환이 생기는 것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다룬 적이 없는 미지의 물체로부터 공격을 받았을 때 인간의 정신이 그것에 저항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문화는 언제나 상이한 문화에 대하여 완전한 변형을 강요하며 그것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서가 아니라, 받아들이는 측에서 보아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는 모습으로 전환시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서양인의 경우, 동양적 사물은 언제나 서양의 어떤 측면과 ‘비슷한’ 것이었다.

우리들은 동양을 묘사하는 경우에 사용되는 언어와 동양 그 자체의 사이에서는 대응관계를 탐구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그 언어가 부정확하기 때문이 아니라 정확하게 하려고 노력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제3장 사업 (project)

나폴레옹의 오리엔탈리즘이 낳은 번역자들의 대부분은, 1796년 6월 이래 ‘동양어공립학교’ 초대의, 그리고 유일한 아라비아어 교사인 실베스트르 드 사시의 제자가 되었다. 그 뒤 유럽의 중요한 오리엔탈리스트는 거의 모두 사시의 제자였고, 유럽에서는 그들이 이 분야를 지배했다. 그들의 다수는 이집트에서 나폴레옹을 도왔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으로 이용되었다. 이집트는 더 이상 신비의 나라도 아니고, 또 선구적인 여행가나 학자 또는 정복자의 위업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알려진 동양의 일부분도 아니며, 프랑스 학문의 일부가 되었다.

나폴레옹의 <이집트지>는 일종의 보편적인 기획이 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말하고, 관찰하고, 연구한 것 일체가 기록되어야 했으며, 실제로 그것들은 <이집트지>라고 하는 일국이 타국을 대규모로 착취하고자 하는 기도 속에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1809년부터 1828년에 걸쳐 모두 23권이라고 하는 방대한 규모로 출판되었다.

어떤 지역을 현재의 야만상태 속에서 구출하고, 그것에 과거의 고전적인 위대함을 회복시키는 것.
근대 서양의 방식을 통하여 동양을 가르친다는 것.
동양을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과정에서 얻은 빛나는 지식에 근거하여 사업을 확대하기 위하여 군사력을 종속적인 위치에 두거나 그 행사를 자제한다는 것.
동양의 정식화, 곧 기억 속의 위치나 제국적 전략의 중요성, 유럽의 부속물로서 그 ‘필연적 역할’을 충분히 고려하여 그것을 위하여 필요한 형태, 아이덴티티, 정의를 동양에 부여하는 것.
식민지적 소유의 기간에 수집된 지식에 대하여 ‘근대적 학문에 공헌’이라는 명목으로 위신을 부여하는 것.
현지인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 텍스트를 변명하는 경우에만 그들을 상담의 상대로 대우하는 것.
자신이 동양의 역사, 시간, 지리를 거의 마음먹은 대로 지배하는 유럽인 이라고 느끼는 것.
새로운 전문영역의 설정.
새로운 학문분야의 확립.
시야에 있는 모두를 분할, 배치, 도식화, 도표화, 색인화, 기록하는 것.
관찰 가능한 모든 세부로부터 하나의 일반론을 만들어내고, 모든 일반론으로부터 동양적인 성질, 기질, 심성, 습관 또는 유형에 관한 불변의 법칙을 만들어내는 것.
살아있는 현실을 텍스트의 소재로 전환시키는 것.
동양에는 우리들의 힘에 저항하는 것이 없으리라는 것을 주된 이유로 하여 현실을 점유한다(고 생각하)는 것.
이러한 것이야말로 오리엔탈리즘이 투사(projection)된 여러 모습이며, 그것들은 <이집트지> 그 자체, 나폴레옹이 서양적인 지식과 권력을 사용하여 이집트를 철두철미한 오리엔탈리즘으로 포섭함으로써, 처음으로 그 성립이 가능하게 되고 또 내용이 강화되었다. 그리하여 <이집트지>는 고유한 일관성과 아이덴티티 그리고 의미를 갖춘 역사로서 이집트사 또는 동양사를 그 자리에서 밀어내었다.

옛날부터 몇 번이나 실패를 거듭하고 막대한 비용이 소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운하는 참으로 시도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음모에 능한 이집트인이나 배신을 잘하는 중국인, 반나의 인도인이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이룩할 수 없었던 동양 총체의 개혁사업을 실행에 옮기게 되는 유일한 프로젝트였다. 수에즈운하의 구상에는, 오리엔탈리즘적인 사고와 노력의 논리적인 귀결이 나타난다. 애매함은 소실되고, 대신 온실에서 기른 실체가 대체되었다. 동양이라는 말은 근대 유럽이 최근에 와서 만들어낸 것을 뜻하는 학술용어가 되었다.

제4장 위기

오리엔탈리즘은 매우 많은 것을 이룩했다. 서양에서 가르치는 언어의 수는 증대되었고, 더욱 많은 사본이 편집되었으며, 번역되고, 주석되었으며, 순수한 흥미를 지닌 유럽인 연구자를 제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리엔탈리즘은 언제나 특수한 인간적인 세부로부터 출발하여, 일반적인 초인간적인 것으로 상승했다. 나아가 18세기 이후의 존재형태에서 오리엔탈리즘은 자기를 결코 수정할 수가 없었다.

18세기의 70-80년대 이후 적어도 1세기 반 동안, 프랑스와 영국은 학문분야로서 오리엔탈리즘에 군림하여왔다. 오리엔탈리스트는 그 누구도 거의 예외 없이 먼저 문헌학자로서 출발했으며, 두 가지 특징을 발전시켜 왔다. ⑴ 유럽에 대한 동양의 언어학적인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새로운 과학적 자의식을 형성하는 것, ⑵ 동양은 언제나 동일하며, 불변이고, 획일적이며, 근본적으로 특수한 객체라고 하는 견해에 결코 변경을 가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그 주제를 구분하고, 다시 그것을 구분하고, 재구분하고자 하는 경향을 나타내는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의 한계란 다른 문화, 민족, 지리적 구분 속의 인간존재를 무시하고, 그 정수를 뽑아버리고, 박탈하는 결과로서 생기는 한계이다. 오리엔탈리즘이 대상을 서술하고 텍스트화함에서 이룬 성공이 너무나도 강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에 동양의 문화, 정치, 사회의 모든 역사적인 단계는 서양에 대한 단순한 응답에 불과했다고 인정되었다. 나아가 텍스트로부터 예견될 수 없었던 일이 생겨나면, 외부로부터의 선동이나 동양의 잘못된 우둔함의 결과라고 간주하였다. 그런 것이 증가되는 가운데, 급속히 위험한 균열이 동양과 서양을 분리시켰다.

< 2부 > 오리엔탈리즘의 구성과 재구성

제1장 재설정된 경계선, 재정의된 문제, 세속화된 종교

나폴레옹의 원정(1798-1801)을 소위 근대 오리엔탈리즘에 가능성을 부여한 최초의 경험이라고 인정한다면, 오리엔탈리즘의 선구적인 영웅들-이슬람연구의 사시, 르낭, 레인-은 이 분야의 건설자이고, 전통의 창시자이며, 오리엔탈리스트의 형제관계의 시조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이 오리엔탈리즘을 개척한 것은 주목할 만한 위업이었다. 이것에 의해 과학적인 전문용어의 사용이 가능하게 되었다. 애매함은 사라지고, 동양을 조명하기 위한 특별한 형식이 확립되었다. 오리엔탈리스트라고 하는 인물상이 동양을 대표하는 중심적 권위로서 확립되었고, 오리엔탈리즘의 밀도가 높은, 일관된 내용을 갖는 저작이 정통성을 획득했다.

제1차대전말까지 유럽은 지상의 85%를 식민지로 차지했다. 근대 오리엔탈리즘이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단면이었다고 단언하여도 크게 논쟁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것만을 지적하는 것은 불충분하다. 그것은 분석적이고 역사적으로 검증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지적 및 이론적인 특징을 갖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오리엔탈리즘을 인간과 영토의 체계적인 축적으로 숙명적으로 향하게 한 것이다. 사멸하여 상실된 동양의 언어를 재구성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사멸되어 무시된 동양을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재구성하는 경우의 정확함, 과학, 나아가 상상력이라고 하는 것까지가 그 뒤에 동양의 대지에서 군대, 행정부, 관료조직이 행하는 경로를 준비할 수 있는 것을 뜻한다.

제2장 실베스트르 드 사시와 에르네스트 르낭 : 합리주의적 인류학과 문헌학의 실험실

사시의 이름이 근대 오리엔탈리즘의 초창기와 결부되어 있는 것은, 그가 단순히 (1822년에 창설된)아시아협회의 초대회장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일에 의해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하는 직업의 면전에 완전히 체계화된 텍스트의 총체, 교육의 실천, 하나의 학문적 전통이라고 하는 것이 제시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동양에 관한 학술과 공공정책이 중요하게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또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사시가 자신을 수정주의적인 프로젝트의 출발점에 선 인간이라는 것을 언제나 느꼈다는 것이다. 그는 자각적인 창시자였다.

사시의 노력의 초점은, 사화집, 명문집, 일람표, 일반원리의 개설에 집중되었다. 비교적 소수의, 효과적인 보기의 집합에 의해 동양이 학생들에게 전수되었다. 사시의 작업은 모두 본질적으로 편찬적인 성격의 것이다. 곧 격식을 차리는 교사의 작업이고 동시에 부지런한 개정자의 작업이었다. 그 결과로서 동양을 둘러싼 소재, 그것을 연구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 동양인조차 가진 적이 없었던 보기를 만들어 내었다.

사시가 창시한 프로세스가 언제까지나 계속되어간 것은, 문헌학으로 인하여 체계적이고 제도적인 힘이 발달되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르낭의 공적이었다. 오리엔탈리즘의 제2세대 출신인 르낭은 동양을 더욱더 근대적인 비교연구와 결부시켰는데, 문헌학이야말로 가장 빛나는 분야의 하나였다. 사시와 르낭의 다른 점은 창시자와 계승자의 차이이다. 르낭의 작업은 오리엔탈리즘의 공적인 언설을 확고히 하고 그 통찰력을 체계화하여, 그 지적 및 세속적인 여러 제도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새로이 탄생된 특권적인 과학의 암호화된 언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을 익힌 르낭은, 문헌학에 ‘관하여’ 말하는 것보다도 도리어 ‘문헌학적으로 말하는’ 자였다고 성격지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과학이 언어 그 자체에 관하여 무엇을 말할 때에도 (암호를 사용하기 때문에)직접적인 솔직한 방식으로는 결코 해석할 수 없는 것이었다.

과학자란 ‘건설하는’ 사람이고, 건설이란 행위 그 자체가 반항적 현상에 대한 제국적 권력의 상징임과 동시에, 지배적인 문화의 힘을 확인하고, 그것을 ‘자연화’시키는 것이다. 실제로 르낭의 문헌학적 실험실은 유럽민족중심주의의 실천의 장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하여 르낭이 살아있는 유기체라고 부르는 유럽의 문화도 사실은 실습실 속에서 문헌학자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다.

제3장 동양체류와 동양에 관한 학문 : 어휘서술과 상상력이 필요로 하는 것

르낭과 사시의 책을 읽으면, 문화의 개괄적인 파악이 과학적 진술이라고 하는 갑옷으로 몸을 단단히 싸고 외국문화를 교정하는 연구의 분위기를 갖추기 시작하는 모습을 손쉽게 볼 수 있다. 아카데믹한 전문분야의 초기단계와 같이 근대 오리엔탈리즘도 스스로가 정의한 주제를 엄청난 힘으로 잡아 쥐고서, 그것이 유지할 수 있는 힘을 통하여 거의 모든 것을 행하였다. 그리하여 인식방법을 규정하는 어휘가 발달하고, 그 양식과 기능이 동양을 비교연구의 틀 속에 위치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비교연구는 서술적인 경우가 드물고 거의 언제나 평가적이고 해설적이라고 해도 좋다.

유럽인으로서 동양에 살고 있다는 것은, 그 주위의 환경으로부터 초연하게 된, 주위와는 동등하지 않은 하나의 의식으로서 그곳에 있다고 하는 의미를 ‘언제나’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의해야 하는 것은, 이 의식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 의식이 현실에는 유럽을 떠나지 않은 그대로, 지극히 구체적인 경험을 추구하여 동양을 여행하고자 할 때에도 왜 그들은 서양에 있고자 하는가라는 이유가 문제된다.

동양은 용감한 여행가나 거주자들의 개인적인, 종종은 왜곡된 증언이었으나, 이제는 그것이 학문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의 협력에 의해 얻어진 비개성적인 정의로 전환하게 된다. 동양은 개개인의 조사체험의 연쇄였으나, 이제는 벽이 없는 일종의 상상의 박물관으로 변모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거대한 넓이와 다양성을 갖춘 동양의 문화로부터 수집되어온 있을 수 있는 모든 것이 무조건 ‘동양적인’ 것이 된다. 19세기 중엽까지 동양은, 디즈레일리가 말한 바와 같이, 평생을 바쳐야하는 사업이 되었다. 곧 동양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개조하고 소생시킬 수 있는 사업이 되었다.

제4장 순례자의 순례, 영국인과 프랑스인

동양을 여행하고 동양에 거주하는 유럽인은 모두 동양의 불온한 영향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자 했다.
순례자는 누구나 사물을 자기류로 바라본다. 그러나 순례행이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어떤 형상과 형식을 취하며, 어떤 진실을 분명히 할 수 있는가에 관해서는 한계가 존재한다. 동양순례는 모두 성서에 기록된 여러 지방을 통과하는 것이다. 아니 통과하여야 했다. 그러한 순례행의 대부분이 유태-기독교적, 그리스-로마적 현실의 어떤 부분을 체험하고자 하는 시도이고, 또는 그러한 현실을 동양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하는 기도였다.

19세기에 동양이란 개개의 여행가에게는 어떤 것으로 보였을까? 영국은 나폴레옹을 타파하고 프랑스를 축출했다. 영국인에게 동양이란 현실적으로 영국의 영토였던 인도를 가리켰다. 따라서 근동을 통과한다는 것은 중요한 식민지인 인도에 이르는 길을 통과하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상상력을 발동시킬 수 있는 여지는 이미 제약을 받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프랑스인 순례자는 동양에서 심각한 상실감을 맛보아야 했다. 이들은 과학적인 현실보다도 매력적인 현실을 탐구했다.

지식과 생활의 모든 영역을 복구하고, 재구성하며, 구출하고자 하는 19세기적 시도의 과정에서, 오리엔탈리즘은 매우 큰 역할을 수행했다. 동양은 하나의 장소라는 것으로부터 현실의 학술적 지배의 영역, 잠재적인 제국지배의 영역으로 변화했다. 초기 오리엔탈리스트들의 역할은 자신들의 작업과 동양의 쌍방에 대하여 ‘무대장치’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 뒤의 오리엔탈리스트들은 학술적인 사람이든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든 간에 이 무대를 분명히 지켰다. 나아가 그 뒤에 와서는 무대가 경영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그 일을 위하여 개인보다도 제도를 설정하고 정부를 개입시키는 쪽이 훨씬 낫다고 하는 사실이 분명하게 되었다. 20세기는 이 유산을 받은 상속인이 되었다.

< 3부 > 오늘의 오리엔탈리즘

제1장 잠재적인 오리엔탈리즘과 명백한 오리엔탈리즘

오리엔탈리즘이란, 동양에 대하여 표면상 적합하다는 여러 가지의 요청, 관점, 이데올로기적인 편견에 의해 지배되는 것으로서 규칙화된(동양화된) 작품, 비전, 연구의 양식이라고 볼 수 있다. 동양은 어떤 독특한 방법에 의해 가르쳐지고, 연구되고, 관리되고, 판단되는 것이다. 따라서 오리엔탈리즘 속에 나타나는 동양은 서양의 학문, 서양인의 의식, 나아가 근대에 와서 서양의 제국지배영역 속에 동양을 집어넣는 일련의 총체적인 힘의 조합에 의해 틀이 잡힌 표상의 체계이다.

19세기의 모든 유럽인은 그가 동양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것에 관하여 필연적으로 인종차별주의자이고, 제국주의자이며, 거의 전면적으로 자민족중심주의자였다고 해도 무방하다.

오리엔탈리즘이란 동양이 서양보다도 약했기 때문에 동양 위를 억누른,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교의이고, 그것은 동양이 갖는 이질성을 그 약함에 관련시켜 무시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동양 그 자체에는 오리엔탈리즘에 대응하는 분야가 존재하지 않으나, 서양에는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하는 ‘분야’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동양과 서양 사이의 상대적인 힘의 관계를 시사하고 있다. 동양은 서양을 위하여 존재했다. 적어도 그 수를 셀 수 없는 오리엔탈리스트들에게는 그렇게 생각되었다.

제2장 양식, 전문지식, 비전 : 오리엔탈리즘의 세속성

“인종이론은 증대되어 가는 민족주의와 확대되어 가는 제국주의의 자극을 받아 또 불완전하고 소화불량 상태인 과학의 도움을 받은 덕분에 거의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이 되었다.”
19세기 말엽의 문화에서 인종이론, 인류발생의 기원과 분류에 관한 여러 관념, 현대의 퇴폐, 문명의 진보, 백색인종의 숙명, 식민지의 필요성, 이러한 것들은 모두 과학과 정치 및 문화의 기묘한 합성 속에 나타난 요소이고, 그곳에는 유럽과 유럽인종을 비유럽인종에 대한 지배자의 지위에 항상 올리고자 하는 조류가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차 있었다.

동양인에게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불가능한가라고 하는 발언까지도 생물학적인 ‘진리’에 의해 지지받게 되었다. 이 진리는 사물의 근저에까지 이르렀고, 모든 사물은 그 진리로 인하여 자신의 기원과 그 유형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되었다. 그것은 인간 사이에 참된 경계선을 긋는 것이고, 인종이나 민족, 문명 등의 개념은 그 경계선에 따라 구축되었다.

양 대전사이의 시기에는, 동양과 서양의 관계가 광범하게 되었음과 동시에 불온한 양상을 나타내었다. 동양이 정치적인 독립을 요구하는 징후는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이제 동양은 서양일반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서양의 정신과 지식 및 절대권에 대해서도 도전하는 듯이 생각되었다. 동양은 스스로 근대성의 위기에 반응했다. 그곳에는 직접점령과 위임통치령의 문제가 있고, 동양에서 유럽의 경쟁문제가 있었다. 현지인 엘리트나 현지의 민중운동, 현지의 자치와 독립의 요구에 어떻게 대응하여야 하는가라는 문제도 있었고, 동양과 서양 사이의 문명적 접촉이라는 문제도 있었다. 이러한 문제는 동양에 관한 서양의 지식의 재고를 요청했다.

제3장 현대 영국-프랑스의 오리엔탈리즘, 그 극성기

오리엔탈리즘과 같이 비교적 고립되고 특수화된 전통의 경우, 각각의 학자에는, 국가적인 이데올로기까지는 말할 수 없어도, 국가적 전통에 대한, 부분적으로 의식적이고 부분적으로 무의식적인 자각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특히 오리엔탈리즘에 현저히 나타나는 것이고, 그 이유의 일부는 유럽의 여러 나라가 동양 여러 나라의 문제에 정치적으로 직접 관여했다는 점에 돌아간다.

문제의 핵심은 어떤 사물의 참된 표상이라고 하는 것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또는 그것이 표상‘이기 때문에’ 표상하는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나 문화, 제도, 정치적 환경에 분명히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점이다. 만일 후자가 옳다고 한다면, 우리들은 표상을 단순히 내재적인 공통의 주제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공통의 역사, 전통, 언설의 세계에 의해서도 규정된, 어떤 공통의 활동영역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영역은 어떤 한 사람의 학자의 힘으로 창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각 학자가 수용하고, 그 뒤에 그곳에 자신의 장소를 발견하여 그 내부에서 각 연구자가 각각에 공헌하는 것이다.

제1차대전의 종결로부터 1960년대 초엽까지, 유럽의 오리엔탈리즘에서 생각하는 한 본질적으로 보편적인 권위를 확보했다. 그들의 뒤에 나타난 새로운 현실은 넓게 말하면 앵글로색슨적인 것이고, 좁게 말하면 미국류의 사회과학적인 것이었다. 이 새로운 환경 속에서 낡은 오리엔탈리즘은 갈기갈기 찢어졌다.

제4장 최근의 전개

제2차대전 이후 특히 아랍-이스라엘 분쟁 이래, 아랍 무슬림은 미국 대중문화의 문제꺼리가 되었고, 학계나 정계, 재계에도 아랍이 심각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것은 국제적인 힘의 배치의 커다란 전환을 상징한다. 세계정책의 중심무대를 차지하는 것은 더 이상 프랑스와 영국이 아니라, 미국의 절대적인 권력이 그것을 대신하여 등장했다. 광대한 이해관계의 망이 구식민지 전역을 미국과 연결시켰고, 동시에 오리엔탈리즘과 같은, 과거의 문헌학적인, 그리고 유럽에 기초를 둔 모든 학문분야도 세분화된 여러 전문분야의 급증에 의해 분단(나아가 결합을 유지하면서)되어 있다.

현대 미국의 근동연구에 문학이 결여되고, 문헌학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낮다고 하는 것은 오리엔탈리즘에서 새로운 편향을 나타내는 것이다.
미국은 사실상 20세기에 와서 처음으로 세계제국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나, 미국이 동양연구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은 유럽제국주의의 열강을 뒤따르기 위해서였고, 유럽에서 발전되어온 전통적인 오리엔탈리즘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에 영국과 프랑스는 그 탁월성과 재력에 의해 동양의 지적인 지평선을 지배했다. 그러나 지금 그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미국이다. 그 결과 시스템 속을 빠져나갈 수 있는 소수의 가능성 있는 학생은, 더욱 고도의 연구를 계속하기 위하여 미국에 가도록 장려된다. 나아가 장학금이나 실무와 연구 상의 후원시스템에 의해 미국은 실질적으로 사태를 한 손에 장악하는 지휘자의 위치에 놓여 있다. 그 자금원이 현실적으로는 미국에 없어도 미국의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미국에는 아랍과 이슬람적인 동양을 연구하기 위한 기관이 수없이 존재하나, 동양측에서는 그 지역에 대하여 최대의 경제적 및 정치적 영향력을 갖는 미국을 연구하는 기관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면 우리들은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나아가 더욱 충격적인 것은, 동양에는 동양연구를 위한 조직이 극히 조심성 있는 것조차 거의 없다는 점이다.

동과 서의 구별이 아니더라도, 남과 북,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제국주의와 반제국주의, 백인과 유색인종과 같은 구별을 다루지 않을 수 없다. 도리어 거꾸로 현대의 오리엔탈리즘은, 그 점을 모르는 체 하고자 하는 지적인 불성실에 관하여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 결과는 차별을 강화시켜서 그것을 사악하고 영구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나는 오리엔탈리즘의 결함이 지적인 것임과 동시에 인간적인 것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오리엔탈리즘은 자신과는 이질적인 것으로 보이는 지구 위의 한 지역에 대하여 확고한 적대자의 입장을 취해야 했기 때문에, 인간경험과 일체화할 수 없고, 인간경험을 인간경험으로 볼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들이 20세기에 와서 이 지구상의 수많은 사람들의 정치적 및 역사적인 자각을 올바르게 살릴 수 있다면, 우리들은 오리엔탈리즘 세계의 거대한 헤게모니에 대해서도 또 그것이 대표하는 모든 사물에 대해서도 이제 하나의 도전을 할 수 있다.

***

긴 시간에 걸친 폭넓은 각도의 예리한 시선을 보았다. 책의 두께만큼이나 묵직한 뭔가를 던져주는 이 책에 대해서 뭘 어떻게 정리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이 책을 펼치면서 만나게 되는 50page가 넘는 <서설>만으로도, 아니 그보다 훨씬 더 길게 마지막을 장식하는 역자인 박홍규의 <옮기면서>만으로도, 눈이 번쩍 뜨임을 경험할 수 있다. 지식이란 무엇인가? 더불어 지식인이란 누구인가? 라는 아주 오래된 질문을 떠올리게 했다. 역자는 말한다. “이 책은 양심적인 제3세계의 한 지식인이 자신의 조국에 대한 서양의 편견, 서양의 학문이 가진 모든 편견에 대한 치열한 해부이다.”라고. 그저 그 ‘치열’함이 부러울 뿐이다.

사이드가 해부한 편견은 ‘새삼스럽지 않은’ 부분이기에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위대함’이다. 우리가 배우는 ‘세계사’라는 것이 서유럽의 역사이고, 거기서 건너간 미국의 역사인 현실에서, ‘세계’라는 자체에 대한 물음조차 생략된 우리가 외치는 ‘세계화’란 과연 무엇인지 뒤돌아보게 한다. 아니, 어쩌면 우리의 머리 속에 존재하는 세계인 미국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원래의 모양을 본 적이 없어서 기억하지 못하는 머리로는 지금의 모양이 틀린 것 말고는 알 길이 없지 않은가 말이다.

하나도 새로울 것 없는 이 책은, 그래서 특별하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인이면서 미국시민인 사이드가 썼다는 자서전이 읽고 싶어졌다. 다음은 「에드워드 사이드 자서전」의 리뷰 (김중혁) 중에서 일부이다.

“그의 이름 역시 무척 상징적이다. 영국(에드워드)과 팔레스타인(사이드)을 한 몸에 지니게 된 그의 삶은 이름만큼이나 혼란스러웠다. 중동지역에서 성장한 사이드는 미국에 사는 이른바 ‘소외된 팔레스타인인’으로 이스라엘의 탄생, 팔레스타인의 소멸, PLO의 출범, 레바논 내전, 1990년 중동평화협상 과정을 직접 두 눈으로 목격했다. 아버지가 미국에 귀화한 신분이었기 때문에 그의 국적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미국이 됐고 모국어 역시 영어와 아랍어 두 가지였다. 그는 어린 시절의 혼란을 이렇게 설명한다.

내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은, 우리가 순전한 아랍인이거나, 순전한 유럽인 또는 미국인이거나, 순전한 정통 기독교도거나, 순전한 이슬람교도거나, 순전한 이집트인이거나 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절망적인 소망을 품었던 일이다. “넌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이냐?” “하지만 사이드는 아랍 이름인데?” “미국인이라고?” “이름은 미국식이 아니지만 미국인이고, 미국에는 가본 적도 없다고?” “너는 미국인처럼 보이지 않아!” “결국 너는 아랍인이야. 하지만 어떤 아랍인이지? 기독교도라고?”(19쪽)

제3차 중동전쟁에서 아랍 진영은 참패했다. 이스라엘의 점령 지역이 확장됐고 수많은 ‘팔’인은 난민이 됐다. 사이드가 가장 분노한 것은 이스라엘의 발언권이 우세해지고 팔레스타인의 힘이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는 국제 정치 시스템이었다. 사이드는 그때부터 팔레스타인의 대변인 역할을 자처하고 나섰다. 팔레스타인의 실상이 미국 언론을 거쳐 조작되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모두 테러리스트’란 지독한 편견이 만들어졌다고 사이드는 역설한다. 그의 명저 「오리엔탈리즘」이 바로 그런 내용을 담지 않았던가. 사이드의 자서전을 읽다보면 한 가지 새로운 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팔레스타인을 친밀하게 느낄 수 있는 최초의 책이라는 것이다 … ”

끝으로, <옮기면서>에서 역자는 아주 무서운 얘기를 우습게 들려준다. 한국의 교수들이 원서주의에 젖어있다고 하는 얘기를 읽으며 나는 웃었고, 웃을 수밖에 없어서 슬펐다.
“한국의 대가들은 자기만이 읽는 원서를 (소위 대가일수록 남에게 빌려주지도 않는다) 혼자 읽다가 (읽었다고 한다) 죽는다. 그리고 그 제자는 다시 그 책을 사기 위해 돈을 짜내어야 하고, 그것을 읽기 위하여 수년간 외국어 공부를 하며, 그러다가 죽는다. 그 결과 한국에는 두세 명의 원서주의 대가는 나오는지 모르지만, 외국어를 잘 모르는 수십만 명의 대학생들이 쉽고 빨리 읽을 수 있는 번역서를 책임 있게 내는 중•소가는 없다. 논문에 원서가 인용되는 경우 그것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구별할 사람도 없다. 모두 모르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책임 있는’ 번역가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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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형
2005.06.13 10:55:47 *.229.146.78
700 페이지에 달하는 위압적이고 쉽지 않은 책을 가장 먼저 읽고 정리했군요. 기분이 좋지요 ? 살면서 좋은 책 읽고 혼자 비식비식 웃는 재미만한 것도 드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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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영
2005.06.13 13:56:23 *.236.222.122
선생님 덕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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