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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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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6월 17일 20시 43분 등록
생각의 지도 (리처드 니스벳 지음, 최인철 옮김, 김영사, 2004)

Richard E. Nisbett.. 예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를 역임했고 2004년 현재 미시간대학교 심리학과의 시어도어 M 뉴컴 석좌 교수로 재직 중이다. 미국의 양대 심리학회인 미국심리학협회와 미국심리학회의 학술상을 수상했다. 2002년 사회심리학자로는 최초로 미국 과학원 회원으로 선출됐다. 저서로 「Human Inference: Strategies and Shortcomings of Social Judgement」, 「Rules for Reasoning」, 「Culture of Honor: The Psychology of violence in the South」 등이 있다.

최인철.. 서울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시간대학교에서 리처드 니스벳과 공동 연구를 수행했다. 니스벳 교수의 지도 아래 사회심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미국 일리노이대학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 2000년 서울대 심리학과에 부임, 2004년 현재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3년 한국심리학회 소장학자상을 수상했다.

< 서론 >

수년 전에 나는 중국 출신의 한 대학원생과 함께 사회심리학적 주제와 인간의 사고 방식에 관하여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연구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학생은 “교수님, 교수님과 저의 차이점이라면, 저는 세상을 원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교수님은 세상을 직선으로 생각하신다는 점입니다”라고 내게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당혹스러워한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의 생각을 계속해서 말했다.

“중국 사람들은 사물은 변화하며 언젠가는 다시 원점으로 회귀한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아주 많은 사건들에 동시에 주의를 기울이고 사물들 간의 관계성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중국 사람들은 전체를 고려하지 않고 부분만을 떼어내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 서양 사람들은 훨씬 더 단순하고 기계적인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큰 그림보다는 부분적인 사물 그 자체, 혹은 사람 자체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물의 행위를 지배하는 규칙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심리학자인 나에게 인간의 사고가 문화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주장들은 그 시사하는 면에서 가히 혁명적이었다.

동양과 서양 사이의 매우 상이한 사고 체계가 과거 수천 년 동안 계속되어왔고 지금도 그 차이가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이 책에서는 역사적, 철학적 증거들과 함께 민속지학, 조사 연구, 실험실 연구들과 같은 현대 사회과학의 연구 결과들을 총 동원하였다.

이 책에서 ‘동양’이라 함은 ‘동아시아’, 즉 중국과 중국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문화, 대표적으로 한국과 일본을 주로 칭한다. 또한 ‘서양인’은 주로 ‘유럽 문화권’의 사람들을 칭하고, ‘유럽계 미국인’은 미국 내에서 동양계가 아닌 모든 인종, 즉 백인, 흑인, 라틴아메리카계를 포함한다.

1. 동양의 도와 서양의 삼단논법
고대 그리스와 중국의 철학, 과학, 그리고 사회 구조

오늘날 지구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 약 10억 정도가 고대 그리스의 지적 전통을 물려받은 사람들이라면, 그보다 훨씬 많은 20억 정도는 고대 중국의 지적 전통을 물려받았다. 그런데, 지금부터 2,500년 전의 고대 그리스와 중국은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과 사회 구조 면에서 매우 달랐을 뿐만 아니라, 철학과 문명에 있어서도 서로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그런 차이들이 현대를 살고 있는 동양과 서양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큰 차이를 가져왔다는 점이다.

그리스가 이룩한 가장 위대한 과학적 발견은 ‘자연계’라는 개념 자체의 발견이다. 그리스인들은 자연계를 인간과 인간의 문화를 제외한, 우주의 나머지 부분으로 규정하였다. 이 정의는 너무나 당연해 보이지만, 놀랍게도 자연계와 인간계를 이렇듯 뚜렷하게 구분한 것은 오직 그리스 문호뿐이었다. 이러한 구분은 그리스 논쟁의 전통에서 기인한 듯하다. 즉, 논쟁을 통해 남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에 대해 자신이 남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현실에 대한 주관적인 해석에 있어서 내가 상대보다 더 정확하다는 신념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설득이 가능하다.

실제로 객관성은 주관성에서 비롯된다. 사람들마다 세상을 보는 시각이 제각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면, 세상은 그러한 각각의 인식들과는 무관한 객관적인 실체라는 판단에 이르게 된다. 그리스인들의 이러한 깨달음은 아마도 그리스가 무역의 중심국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자유 무역을 통해 세상에 대한 인식이 매우 다른 사람들을 정기적으로 만났으니 말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중국은 일찍부터 통일된 문화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인들이 그들과 전적으로 다른 철학적 종교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상대적으로 드문 일이었다.

그리스인들이 ‘자연계’의 개념을 발견하면서 과학이라는 것이 생겨났다. 중국인들이 과학을 일찍 발전시키지 못한 것은, 호기심의 부족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이유는 ‘인간계와는 독립적인 실체로서의 자연계’라는 개념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우주를 서로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장(場)으로 보았기 때문에, 인과 관계를 설명할 때에도 장 전체의 복잡성에 주목했다. 그들은 어떤 일이든지 수많은 힘들이 상호 작용하는 장 안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였다.

2. 동양의 더불어 사는 삶, 서양의 홀로 사는 삶
현대 동양인과 서양인의 자기 개념

1930년대 미국의 초등학교 교과서에는 「딕과 제인」이라는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딕이 뛰는 것을 보아라. 딕이 노는 것을 보아라. 딕이 뛰면서 노는 것을 보아라.’
한 독립된 개체로서의 개인의 행위를 묘사하고 있는 이 문장들은 서양의 개인주의적인 관점을 잘 드러내고 있다. 반면에 똑같이 한 남자아이의 행동을 묘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초등학교 교과서는 사뭇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형이 어린 동생을 돌보고 있구나. 형은 어린 동생을 사랑해. 그리고 동생도 형을 사랑한단다.”
이 문장들은 독립된 개인의 개별 행위가 아닌 개인과 주변 인물 간의 관계를 부각시키고 있다. 어린이들이 처음 접하는 교과서에 이미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동양 문화가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정도에 따라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에 대한 관점도 달라진다. 서양에서는 아이들에게 의사소통을 가르칠 때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대화에 임해야 하며, 대화 과정에서 오해가 발생하면 그것은 말하는 사람의 잘못이라고 강조한다. 이와는 매우 대조적으로, 동양에서는 아이들에게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말할 것을 강조한다.

논쟁의 전통이 없다는 사실은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한국 사회에서 북한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하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며, 그 전의 정부는 사람들이 북한에 대하여 말하는 것조차 금지시켰다. 이는 서양인인 나의 관점에서는 무척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왜냐하면 한국은 지난 40여 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지만, 북한은 전적으로 실패한 체재를 고수해온 나라이기 때문이다. 서양인의 관점에서는 북한의 실상을 공개하는 것이 오히려 자국민을 보호하는 더 효과적인 방법이었을 것이다.

논쟁의 전통은 법률 분야나 과학에서의 수사학(rhetoric)양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대개의 과학 논문은 연구 아이디어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 관련 이론 기술, 구체적인 가설 기술, 연구 방법 및 그 정당성 기술, 연구 결과 제시, 연구 결과가 가설을 지지하는 주장 전개, 다른 대안 주장들에 대한 반박, 기본 이론에 대한 재언급, 보다 큰 영역으로의 확장 가능성 언급으로 구성되어 있다. 미국인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이와 같은 논리적 구조를 학습하기 때문에 대학원생 정도가 되면 이 구조를 거의 제2의 천성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3. 전체를 보는 동양과 부분을 보는 서양
세상을 지각하는 방법의 차이

보다 상호의존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는가, 아니면 보다 독립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는가 하는 사회적 존재 방식이 세상을 ‘보는’ 방법을 결정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오늘을 살고 있는 동양인들은 개인의 힘보다는 외부의 힘을 중시하는 집합주의적이고 상호의존적인 사회에 살기 때문에 ‘외부 환경’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반면에 서양인들은 개인주의적이고 독립적인 사회에서 살기 때문에 보다 분석적인 눈으로 세상을 보고 환경보다는 ‘사물’ 자체에 많은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현대의 동양인들은 고대의 동양인들처럼 세상을 종합적으로 이해한다. 그들은 전체 맥락에 많은 주의를 기울이고 사건들 사이의 관계성을 파악하는 데 익숙하며, 세상이 복잡하고 매우 가변적인 곳이라 믿는다. 또한 세상의 구성 요소들은 서로 얽혀 있고, 세상사는 양극단 사이에서 순환을 반복하는 형태로 진행되며 그러한 사건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의 협동과 조정이 꼭 필요하다고 믿는다.

이와는 반대로, 현대의 서양인들은 고대의 그리스인들처럼 세상을 보다 분석적이고 원자론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 사물을 주변 환경과 떨어진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변화가 일어난다면 한 방향으로 일정하게 진행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개인이 그러한 일들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

4. 동양의 상황론과 서양의 본성론
동양과 서양의 인식론적 사고

‘세상은 복잡한 곳’이라는 동양인들의 생각이 어쩌면 진실에 더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서양인들은 지나치게 단순한 모델을 가지고 세상을 파악하는 약점이 있지만, 반면에 동양인들은 수없이 많은 인과적 요인들 모두에 주의를 기울이다 보니 예외적인 사건이 발생해도 그리 놀라워하지 않는 문제점이 있다. 서양인들의 단순한 세계관은 적어도 과학의 영역에서는 매우 유용한 시각이다. 왜냐하면 단순한 모델은 검증이 쉽고, 따라서 개선의 가능성이 그만큼 커지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중국의 물리학 이론들과는 달리 검증이 가능한 단순한 형태였기 때문에 이후의 검증 과정을 통하여 올바른 물리학 원리들이 확립되는 토대가 되었다.

반면 중국인들은 ‘거리가 멀리 떨어진 곳으로도 힘이 전달될 수 있다’라는 원리를 서양인보다 먼저 이해해놓고도 그것을 증명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것을 증명한 이들은 처음에는 그것을 믿지 않았던 서양인이었다. 서양인들은 ‘서로 인접해 있는 물체들 사이에서만 마치 당구공들처럼 접촉에 의해 힘이 전달될 수 있다’라는 단순한 모델을 검증하는 과정에서 떨어진 물체 사이에서 작용하는 힘의 원리를 알아냈던 것이다. 서양인들이 ‘과학에서 거둔 성공’과 ‘인과적 설명에서 범하는 오류’는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그 뿌리란 다름 아닌 ‘개인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 모델을 만드는 자유’, 그리고 ‘그 모델을 이용하여 결과로부터 원인을 추구하는 자유’이다.

5. 동사를 통해 세상을 보는 동양과 명사를 통해 세상을 보는 서양
동양의 관계와 서양의 규칙

동양의 언어는 ‘맥락’에 주로 의존한다. 동양어의 단어는 대개 다중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문맥에 따라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 그러나 영어의 단어는 그 의미가 매우 제한적이며, 게다가 영어 사용자들은 단어를 사용할 때 가능하면 맥락의 도움 없이 이해될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서양의 언어는 맥락보다는 대상’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영어는 ‘주어’에 매우 집착한다. 그러나 동양의 언어는 ‘주제’ 중심적이다. 동양의 언어 습관에서 문장의 첫 부분에는 대화의 초점이 되는 주제가 나온다.

서양에서 행위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다. 그러나 동양인에게 행위란 다른 사람과의 교감을 통해 발생하는 것이거나 주어진 상황에 자기가 적응한 결과이다. 이러한 차이가 언어에서도 잘 드러난다. 가령, 일본어나 중국어, 한국어에서는 ‘나(I)'를 표현하는 말이 주어진 상황에 따라 다르다. 동양 언어에서 구체적인 맥락과 인간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나‘를 표현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행동의 원인에 대한 관점의 차이 또한 문법에서 잘 나타난다. 서양의 언어는 행위자 중심적이다.

6. 논리를 중시하는 서양과 경험을 중시하는 동양
서양의 논리와 동양의 중용

서양 사고의 기본 원리 중 하나인 ‘동일률’은 상황이 변해도 달라지지 않는 일관성을 강조한다. 즉, A는 맥락에 관계없이 A인 것이다. 또한 비모순율은 한 명제와 그 명제의 부정이 동시에 참일 수 없음을 강조한다. 즉, A이면서 동시에 A가 아닌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동양의 ‘종합론 원리’는 맥락이 달라지면 어떤 사물이 전혀 다른 것이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으며, ‘변화의 원리’는 삶이란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끊임없는 변화 과정이며 따라서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는 것일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들에게 개념이란 단지 사물의 반영에 불과하기 때문에, 반대인 것처럼 보이는 두 개념을 동시에 참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동양인들은 타협에 의한 해결책과 종합적인 주장을 선호하며 서로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개의 모순된 주장을 자연스럽게 모두 수용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또한 스스로의 선택을 정당화해야 할 때에는, 명백한 원리에 의존하기보다는 절충점 혹은 중도적 입장을 추구한다. 비모순의 원리에 충실한 미국인에게서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현상이다. 그러나 비모순에 대한 혐오에 가까운 미국인들의 반응은 때로 불필요하게 극단적인 판단을 내리게 만든다. 이러한 경향성은 동서양 철학자 모두가 염려하는 서양의 극단적인 논리주의의 병폐라고 할 수 있다.

7. 동양과 서양의 사고방식의 차이, 그 기원은?
경제구조와 사회적 행위

동양과 서양의 사고방식이 왜 이렇게도 다른지 궁금해서 한 중국 철학자에게 그 이유를 물어본 적이 있다. 그 철학자는 농담조로 “그야 서양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있었고 동양에는 공자가 있었기 때문 아니겠소?”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철학자의 지적대로 공자와 아리스토텔레스는 동양과 서양의 지적, 사회적, 정치적 영역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그들을 동서양 사고방식 차이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볼 수는 없다. 오히려 그 두 사람을 동서양 사고방식의 산물로 보는 것이 옳다. 만일 두 사람의 사상 안에 각각 동양과 서양의 사고가 반영되어 있지 않았다면, 그들의 사상이 그들이 속한 사회에 그렇게 큰 영향을 미쳤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두 문화의 사고방식의 기원은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설명될 수 있다. 즉, 두 사회의 생태 환경이 경제적인 차이를 가져왔고, 이 경제적인 차이는 다시 사회 구조의 차이를 초래했다. 그리고 사회 구조적인 차이는 각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사회적 규범과 육아 방식을 만들어냈고, 이는 환경의 어떤 부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를 결정했다. 그리고 서로 다른 주의 방식은 우주의 본질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민족 형이상학)를 낳고, 이는 다시 지각과 사고 과정(인식론)의 차이를 가져왔던 것이다.

8. 동양과 서양, 누가 옳은가?
실생활에 주는 교훈

우리가 수행한 거의 모든 연구에서 동양인과 서양인은 사고방식의 차이를 보였고 그 정도 또한 매우 큰 편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질적으로 아주 다른 방식의 행동 양상을 보였다. 예를 들어, 미국인들은 배경 속에서 일어난 변화를 발견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동양인들은 배경 속에 사물에서 일어난 변화를 잘 발견하지 못했다. 미국인들은 행동을 제약하는 상황의 힘을 잘 인식하지 못했지만, 한국인들은 이를 매우 잘 인식했다.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규칙’에 의거하여 범주화했지만,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유사성을 근거로 사물들을 짝지었다. 서로 상반되는 주장이 동시에 제시되었을 때 미국인들은 상대적으로 어느 한쪽 주장으로 극화되었지만, 중국인들은 두 주장을 모두 수용하는 타협을 선택했다.

사회의 인종적 다양성은 여러 가지 이유로 옹호되고 있다. 그중 하나가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이 공존함으로써 교육적 환경과 업무 환경이 더 풍성해진다는 것이다. 우리의 연구는, 상이한 사고방식을 가진 문화권의 사람들이 함께 일하면 어떤 문제든지 쉽게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동양인과 서양인의 사고방식과 기술이 매우 다르기 때문에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문제든지 같은 문화권 사람들끼리만 모여서 해결하기보다는 서로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 함께 해결할 때 문제 해결이 훨씬 쉬울 것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에필로그 - 동양과 서양의 사고방식, 충돌할 것인가, 통일될 것인가?

만일 사회 구조, 가치, 신념이 하나로 수렴된다면 사고방식의 차이도 줄어들 것이다. 실제로 사회적 경험이 바뀌면 아주 단기간이라도 사람들의 사고와 지각의 방법이 바뀔 수 있다는 연구 결과들이 있다. 이 책에서 소개한 많은 연구에는 동양인과 미국인 외에 동양계 미국인이 참여했다. 동양계 미국인은 사회적 경험 면에서 동양인들과는 상당히 다를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사고방식과 지각 방식이 서양인의 그것과 유사할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한데, 이 역시 연구 결과를 통해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많은 경우에 동양계 미국인의 사고방식은 동양인과 미국인의 사고방식의 중간쯤에 해당했으며, 어떤 경우에는 미국의 사고 유형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유사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이중문화적(bicultural)이다. 우리 안에는 다른 사람들과 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려는 상호의존적인 특징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독립적인 존재로 살아가려는 독립성이 혼재한다. 따라서 이 중 어떤 특성이 더 강하게 부각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문화적 특징을 보일 수 있다.

나는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서로의 문화를 수용하여 중간쯤에서 수렴될 것이라는 견해가 ‘문화 차의 미래’에 대한 가장 타당한 견해라고 믿는다. 동양과 서양은 서로의 장점을 수용하여 두 문화의 특성이 함께 공존하는 문화 형태를 만들어나갈 것이다. 마치 요리의 재료들이 각각의 속성은 그대로 지니면서도 서로 어우러져 하나의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내듯이, 두 문화는 새로운 통합을 맞이할 것이다. 그 통합이 두 문화의 가장 좋은 특성들만을 모아놓은 걸작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


흥미롭다. 주제는.
하지만 결론을 포함해서 몽땅 ‘미국스러운’ 책이다.
나는 이런 류의 이분법적인 내용은 별로 재미없다. 너무 단순하고 유치하다.
게다가 누가 옳은가? 라니!

문화는 요리가 아니다. 먹고 배설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란 얘기다.

“만일 사회 구조, 가치, 신념이 하나로 수렴된다면 사고방식의 차이도 줄어들 것이다.”
그 차이를 줄여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왜 줄여야 하는가?

“실제로 사회적 경험이 바뀌면 아주 단기간이라도 사람들의 사고와 지각의 방법이 바뀔 수 있다는 연구 결과들이 있다.”
갈수록 태산이다. 이런 연구 결과의 근거는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서로의 문화를 수용하여 중간쯤에서 수렴될 것이라는 견해가 ‘문화 차의 미래’에 대한 가장 타당한 견해라고 믿는다.”
무슨 근거로 이런 황당한 얘길 늘어놓는가?

<에필로그>를 읽으며 흥분하고 있는 나를 만났다.
역자 후기는 읽다 말고 덮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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