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신재동
  • 조회 수 2329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05년 6월 21일 12시 07분 등록
◎ 인용

1부 기억상실과 어제의 한국인

1. 백남준과 서울의 기억

그렇다면 백남준은 어떤가. 새천년의 새아침 세계문화 유행통신의 발상지인 뉴욕에서, 최첨단 영사예술인 레이저 아트를 선보인 백남준. 새로운 예술작품을 창조하는 데서 한 걸음 나아가, 새로운 예술양식 자체를 창조한 예술가. 사실인즉슨 그에게는 한국인이라는 수식어보다 세계인이라는 수식어가 훨씬 잘 어울리지 않는가. 그에게 있어 한국인 백남준이란 죽어버린 과거이며, 세계인 백남준이야말로 살아있는 현재이자 미래가 아니겠는가. 도대체 '지구촌 민주주의 건달'이라는 별명이 썩 잘 어울리는 인터내셔널 아티스트 백남준에게 '한국이 낳은'이라든가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우리도 백남준과 같은 세계인이기를 원한다면, 한국인에 대한 미련 따위는 포기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p. 19)

창조의 빛이란 세계인 윤이상과 한국인 윤이상이, 세계인 이응노와 한국인 이응노가 부싯돌의 스프카와도 같이 절묘하게 부딪쳐서 피워올리는 한 줄기 서광이다. 마애불과 쇠라의 그림을 동시에 연상시키는 박수근의 그림도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은 아닐까. 이것들은 세계인에 대한 한국인의 승리도 아니고 한국인에 대한 세계인의 승리도 아니며, 그같은 제로섬 게임을 벗어나 양자를 회통시킨 결과 도달한 창조의 열매다. 세계인이냐 한국인이냐가 아니라 세계인인 동시에 한국인이어야 한다.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둘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문제다. 양자택일(兩者澤一)이 아니라 회통(會通)이다.
(p. 24,25)

인간의 삶을 관통하는 모든 비극은 인간이 시간의 일방적인 흐름 속에 갇힌 존재이기 때문에 생겨난다. 시간의 엔트로피 벅칙 또는 불가역성은 덧없음이라는 인생의 쓰디쓴 진리를 탄생시킨 우주의 원죄다. 이같은 시간의 불가역성에 항거하는 것이 바로 기억이다. 기억은 시간을 거슬러 뛰어넘는다. 기억의 다른 이름이 추억인 까닭도 이 때문이다. 기억은 인간을 자신의 일방적인 흐름 속에 가두어놓는 시간의 질서에 거역함으로써, 세월의 무상함을 넘어서는 인간적인 정체성의 토대가 된다.
(p. 28)


2. 기차가 있는 풍경

백남준이 전통적인 인간의 감정과 소양을 지닌 순한국인으로 남아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은 기억이다. 기억은 시간을 거슬러 뛰어넘는다. 기억은 시간의 질서에 거역함으로써 세월의 무상함을 넘어서는 인간적인 정체성의 토대를 형성한다. 그런데 만일 백남준에게서 순한국인 백남준의 기억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토속적인 자기의 뿌리인 기억의 상실은 정체성의 상실로 이어질 것이다. 이같은 일이 지난 세기의 한국인에게 정말로 발생했다.
(p. 38)

근대 또는 문명을 하루빨리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주먹을 불끈 쥐고 서둘러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 재촉이라도 하듯이 칙칙폭폭 연기를 내뿜으며 달리는 기차가 상징하는 것은 이것이다. 지난 세기의 한국인은 이같은 풍경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변화시키는 일에 맹목적으로 매달렸다. 모범답안을 암기하듯이, 하루빨리 서둘러 서구의 문예사조를 받아들였고, 하루빨리 서둘러 서구의 생활양식을 받아들였고, 하루빨리 서둘러 서구의 가치관을 받아들였다. 대신 같은 분량만큼의 전통적인 그것을 버려야 했는데, 이것 역시 하루빨리 서둘러서 그렇게 했다.
(p. 41)

존재의 속도를 앞지르는 기차의 속도에 따라 생겨난 조급함의 열기는 시간을 거스르는 기억의 되새김질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근대 한국인의 불행의 근원은 여기에 있다. 시간의 흐름보다 앞서고자 하는 조급함의 열기에 휩사인 나머지 가끔씩 시간의 흐름에서 뒤돌아설 때만 확보되는 기억 속의 심상을 상실한 근대 한국인은, 마침내 인간적인 정체성의 토대가 흔들리는 비극에 직면했다. 이것이 바로 근대 한국인의 기억상실이다.
(p. 47)


2부 야나기 무네요시의 한국 예술론

그렇다면 한국인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한국 예술을 사랑하고 이해한다고 말한 야나기의 눈으로 자신의 예술을 바라본 한국인들은 일본인의 눈으로 한국 예술을 바라본 셈이다. 남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게 됨으로써 고유의 시선을 잃어버린 것이랄까.
(p. 47)

☞ 잠깐 ☜

한국예술에 대한 문제는 그렇다치고 자신의 모습을 남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보여진다. 즉 남들이 규정해준 것을 그대로 자신의 모습으로 인지하고 지내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보여지는데 그것은 나만의 주관적인 경험일까? 기우일까?



1. 미적인 위계질서 또는 오리엔탈리즘

타고난 자연스러움을 따르는 인간의 정이 이처럼 비애의 감정으로 귀결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중국적 작위 대신 일본적 자연을 내세운 국학의 자연주의가 자연의 배후에 존재하는 초인격인 신(神)을 창조한 사실과 관련이 있다. 타고난 자연스러움에 따르는 일본적인 삶이란 결국 신이 마련한 길(神道)에 순종함으로써 신의 은총을 구하는 삶인 것이다.
(p. 85)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신의 세계에 우연히 발을 들여놓는 인간의 이야기다. 그곳의 음식에 허락없이 손을 대었다가 돼지로 변하는 치히로의 부모는 '저마다의 알맞은 위치'를 지키지 않고 상급의 위계질서에 천방지축 끼여드는 불순종(不順從)으로 인하여 벌을 받으며, 그곳의 위계질서를 지혜롭게 살펴서 적절한 일을 맡는 데 성공한 치히로는 '저마다의 알맞은 위치'를 지키는 순종(順從)으로 인하여 은총을 받는다.
(p. 85)


3부 한국인의 미의식

진선미의 합일을 지향하는 한국의 가치관념이 바로 '멋'이다. 멋은 미의식일 뿐 아니라 정신미(정신미)를 지향하는 생활의 이념이기도 하다. 따라서 한국인의 미의식의 비밀을 푸는 일은 한국인의 가치관의 핵심을 탐구하는 일이 된다.
(p. 131)

3. 발효맛과 생기의 미감

한국인이 이처럼 살아 있는 유기체가 발산하는 생기의 느낌을 생활 속에서 물질적으로 확인학 다시 확인하고 또다시 확인해온 감각적인 근원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국의 맛을 대표하는 발효맛이다. 본래 음식과 결부되어 있던 물질에너지인 맛은, 어느 순간 그로부터 떨어져나가 정신 에너지로 승화됨으로써 미감 또는 미의식을 파생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p. 155,156)

이제 다시 발효맛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흥미로운 것은 발효음식은 살아 있는 유기체들의 덩어리로 이루어진 것이며, 발효맛은 잘 삭힌, 시원하고 칼칼한, 생기 있는 맛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살아 있는 유기체가 발산하는 생기의 느낌을 추구하는 상의 미의식과 통한다.
(p. 157)


4. 상극적인 것을 상생적인 것으로

발효의 원리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그것이 부패와 관련된 미생물의 활동을 억누르고 발효와 관련된 효모균의 활동을 북돋운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소금을 첨가하여 음식물을 부패시키는 균들을 죽이고 소금에 견디는 유익한 균들만 활동하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발효 원리의 핵심은 부패균을 죽이는 상극적인 방식이 아니라 발효균을 살리는 상생적인 방식을 취한다는 것이다.
(p. 167)


6. 고지도와 명당론

여기서 우리는 지난 세기의 한국인이 서구적 근대를 향한 '시간과의 경쟁'에 빠져든 결과 공간 의식과 공간 취향을 상실해 버린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주위의 공간을 오로지 서구적 근대의 잣대인 돈 가치, 효율성, 편리성에 의해서만 판단한 나머지 개인이 사는 집이나 집단이 사는 도시에 대해서도 오로지 평수나 땅값 같은 돈 가치만을 따지는 데 익숙해졌으며, 그 결과 자신의 공간취향이 발붙일 자리를 상실히 버린 것이다.
(p. 186)


7. 백의와 색동

이데올로기란 본질적으로 사물을 다면적이 아니라 일면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고, 이같은 일면성은 한 측면에서의 설득력을 발휘하는 대신 다른 측면들에서의 터무니없음을 피하기 어렵다.
(p. 219)

해결책은 분명해졌다. 이데올로기적 표상인 백의민족의 강박적인 이미지를 머리 속에서 거둬내야 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우리는 색동옷과 녹의홍상, 노랑저고리에 분홍치마, 오방색의 화려한 배합인 단청, 자주색의 삼회장 저고리, 색동보다도 고풍스럽고 몬드리안보다도 모던한 조각보의 색 꾸러미처럼, 아득한 기억의 지평선 너머로 밀어냈던 색채적 심상을 기억 속에서 되살릴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마음 속에 해묵은 얼룩처럼 새겨진 백의민족의 환영, 그 흰옷의 그림자를 상대로 한 힘겨루기에서 손을 놓아서는 안 된다.
(p. 222)

하지만 이들 도시의 색은 하루 아침에 갑자기 칠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서서히 물들어온 것이다. 이들의 색은 거기서 살아온 사람들의 마음에 오랜 세월 거듭해서 쌓아 올려진 색에 대한 취향이 투영된 것이다. 마음의 색이 풍경의 색과 하나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기억 속의 심상이 현실의 풍경과 오버랩되는 일상을 꾸리는 사람들. 그들은 과연 미의식의 행복한 주인공들이다.
(p. 225)


4부 취향과 성찰 그리고 내일의 한국인

1. 이데올로기에서 취향으로

이데올로기란 본질적으로 사물을 단면적으로 바로보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적어도 미의 문제에 관한 한, 이데올로기적인 표상보다는 취향적인 심상이 사물의 본질에 입체적으로 다가서는 쿨한 프리즘이다.
(p. 231)


6. 김정희와 연경의 기억

그러고 보면 과거와 현재, 옛것과 새것이 우리네 삶의 현장 곳곳에서 기묘한 모습으로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눈에 띈다. 몇백 년 전의 순간에 정지해버린 듯한 남대문과 이십 일 세기를 향해 날렵한 촉수를 뻗친 듯한 고층건물이 나란히 서 있는 사잇길을 이리저리 다니는 것이 우리들의 삶 아닌가. 따라서 우리는 이같은 공존을 혹은 옛것 쪽으로 되돌리거나 혹은 새것 쪽으로 밀어붙이기보다는, 그것들을 하나로 버무려 내는 모순적인 공존을 통해 창조의 길로 나아가는 유연하고도 열린 사고를 가져야 할 것이다. 새것의 프리즘을 통과하여 '지금 이 순간'에 살아 남은 옛것의 존재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p. 278)




◎ 소감

자신의 모습을 자신의 눈으로 온전하게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다시 한번 깨닫게 한다.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모른 채로 '힘 있는 자'가 정의해 준 모습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지 모르게 불편한 것이고 결국은 부작용이 생기기 마련이다. 뭔지 모르게 각박한 삶. 저자의 말처럼 그것은 토속적인 자기의 뿌리인 기억의 상실이 정체성의 상실로 이어졌기에 생겨난 불편함은 아닐런지....

책을 읽고 나니 '고향'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고향.
아버지의 고향은 강원도 철원이다. 어릴 때 나는 그곳에 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아버지께서는 당연히 좋아하셨다. 경관이 그리 좋은 곳도 아니고, 시골 사람들의 넉넉한 인심도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 곳이지만, 그래도 아버지께서는 좋아하셨다. 어린 시절 자신께서 자랐던 곳이기에 그곳은 편안한 안식처일 것이라 짐작된다. 어머니의 품과도 같은....

가끔 정처없이 거리를 떠돌 때가 있다. 서울 시내에서 발길 닿는 곳을 여러 군데 돌아 다녀 봤지만, 특별히 정감이 가는 곳은 솔직히 없다. 어디를 가나 뭔지 모르게 느껴지던 불편함. 그곳이 나의 안식처가 아니었기 때문인가보다. 그러고 보니 나에게는 고향이 없다. 어느 때 찾아가도 편안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안식처. 내게는 그런 곳이 없다.

저자는 시종일관 '한국의 미'라는 것을 주체적인 관점에서 들여다 보고 그에 대해 설파한다. 아쉽게도 '한국의 미'에 대해 문외한에 가까운 나로서는 많은 부분에서 뜬구름 잡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동안 '우리 것'에 대해 거의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고, 그에 대한 필요성도 거의 느끼지 못했었기에 일어나는 당연한 현상일 것이다. 그나마 앞으로는 동양화 한편이나, 서예 작품을 바라볼 때 이전과는 달리 조금이나마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것도 수확이라면 수확일 것이다.




◎ 내가 저자라면

자신의 모습을 자신의 눈으로 들여다 보기. 비단 '한국인의 미의식'을 제대로 들여다 보기 위한 것뿐 아니라 우리 개개인 모두에게 그것은 중요한 화두이다.
얼마 전 인터넷 상에 잠깐 돌던 글 하나를 소개한다.

시간이 오래걸리는 것들..................


미워하는 사람이 좋아지는 데 걸리는 시간.
사랑하는 연인이 타고 오는 전철.
엘리베이터 문 닫히기를 기다리는 3초.
주문한 음식 기다리는 시간.
백수로 있을 때 아무리 자고 또 자도 가지 않는 시간.
군생활.
군에 간 남자친구를 기다리는 하루하루.
용서하는 시간.


그리고
나 자신을 아는 데 걸리는 시간.


나 하나를 온전하게 파악하는 일도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보다. 하물며 나를 포함하고 있는 사회 구성원들의 공통점을 파악해야할 때 그 어려움은 능히 짐작이 간다. 나 자신에 국한하건, 아니면 나와 함께 사는 사람들을 모두 대상으로 하건 간에 자신이 처한 모습을 들여다보고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은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하는 작업이다. 그렇기에 자신을 아는 데에 그렇게도 시간이 걸리는 것이 아닐까.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바라보고 있지 못하면서 그에 대한 필요성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글 하나가 왠지 절실하게 느껴진다.
(왠지 억지로 적는 느낌이 들어 이만 마쳐야겠다)
IP *.111.251.128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