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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13일 11시 06분 등록

열하일기

박지원 씀 / 리상호 옮김 / 보리

 

 

I. 저자에 대하여 / 박지원

 

박지원.JPG

 

출생 : 1737년 음력 2 5일 조선 한성 반송방 야동

사망 : 1805년 음력 10 20일 조선 한성

사인 : 병사

국적 : 조선

별칭 : 자는 중미 또는 미중, 호는 연암, 연상, 열상외사, 시호는 문도공

학력  : 한학 수학

직업 : 실학자, 외교관, 사상가, 소설가, 문인

종교 : 유교(성리학)

배우자 : 전주 이씨

자녀 : 장남 박종의, 박종채, 박종간

부모 : 박사유 / 함평 이씨

친척 : 형 박희원, 조부 박필균, 손자 박규수, 박주수, 외조부 이창원, 장인 이보천, 처삼촌 이양천, 삼종형 박명원, 족질 박종경, 족손 수빈 박씨

 

박지원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당시 허위의식에 빠진 세태를 비판하였다. 그는 또한 당시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배우고 실천하려고 하였던 북학의 선두 주자였다.

 

어린 시절

 

박지원은 1737(영조 13) 한양 서부(西部) 반송방(盤松坊 : 야동(冶洞))에서 지돈녕부사를 지낸 노론중진 박필균(朴弼均)의 손자이며, 열상외사(洌上外史) 박사유(朴師愈)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머니는 함평이씨(咸平李氏)로 이창원(李昌遠)의 딸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16세에 조부가 사망했다.

성장하면서 신체가 건강하고 매우 영민하여 옛사람의 선침(扇枕)과 온피(溫被) 같은 일을 흉내내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의 가문은 서인노론의 명문가문이었으나 아버지 박사유는 관직에 오르지 못했고, 포의(布衣)로 지냈기 때문에 할아버지 박필균에게서 양육되었다. 할아버지 박필균은 정2품에 이르렀지만 당색에는 관심이 없어서 적을 만들지 않았다.

1752(영조 28) 16세에 처사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결혼했다. 장인에게는 ≪맹자≫를, 처삼촌 이양천(李亮天)에게는 ≪사기(史記)≫를 배워 본격적인 학문을 시작했다. 처남인 이재성(李在誠)과는 평생의 문우(文友) 관계를 이어갔다.

 

수학 시절

 

장인인 이보천에게서 《맹자》를 중심으로 학문에 정진하였으며, 이보천의 아우 이양천(李亮天)에게서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 史記》를 비롯하여 주로 역사서적을 교육받고, 글과 문장 쓰는 법을 터득하고 많은 논설을 습작하였다. 수년간 이보천과 이양천의 학업에서 문장에 대한 이치를 터득하였다. 처남 이재성(李在誠)은 평생의 친구로 지냈고 동시에 그의 학문에 충실한 조언자가 되어주기도 했다.

22세 때부터 원각사 근처에 살 때 박제가·이서구·서상수·유득공 등과 이웃하여 깊은 교우를 맺었다. 홍대용과도 사귀면서 지구의 자전설을 비롯한 서양의 신학문을 배웠으며30세때 북학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방법을 토론하였다. 1760년 할아버지가 죽자 생활은 더욱 곤궁하였다. 그뒤 집안의 염원에 따라 29세 때 과거에 응시했지만 낙방한다. 과거에서 낙방한 이후 오직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학문 연구와 정치 활동

 

정치 활동과 낙향

 

박지원은 청년 시절에 세상의 염량세태에 실망하여 불면증우울증으로 고생했으며 이러한 성장 배경을 바탕으로 진실한 인간형에 대해 모색한 전() 아홉 편을 지어 ≪방경각외전(璚閣外傳)≫이란 이름으로 편찬했다.

1768 백탑(白塔) 근처로 이사를 하게 되어 박제가(朴齊家), 이서구(李書九), 서상수(徐常修), 유득공(柳得恭), 유금(柳琴) 등과 이웃하면서 그들과 교류하였고, 이후 그들과도 깊은 학문적 교유를 가졌다. 후일 박제가, 유득공 등은 그의 문인이 되었다. 또한 홍대용(洪大容), 이덕무(李德懋), 정철조(鄭喆祚) 등과도 만나 이용후생(利用厚生)에 대하여 자주 토론하였으며, 이무렵 유득공, 이덕무 등과 서부지방을 여행하기도 했다.

1776 정조 즉위 직후 정조의 측그느 근신인 홍국영(洪國榮)이 세도를 잡으면서 같은 노론이지만 벽파(僻派)를 공격하면서 벽파에 속했던 그의 생활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1777(정조 1) 권신(權臣) 홍국영에게 벽파(辟派)로 몰려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이듬해 황해도 김천(金川) 연암협(燕巖峽)으로 은거하였다. 연암이란 호는 이 골짝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때 그는 개성유수로 부임한 교우 유언호에게서 생활하는데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의 아호가 연암으로 불린 것도 이에 연유한다. 박지원은 이곳에 생활하는 동안 직접 농사를 지어 생활하였으며, 농사와 목축에 대한 장려책을 정리하게 되었다.

 

청나라 방문과 열하일기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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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0(정조 4) 44세 때 처남 이재성의 집에 머물고 있다가 삼종형 진하사 박명원(朴明源)을 따라 북경을 갔다. 1780 6 25일 출발하여 압록강을 거쳐 베이징, 열하를 여행하고 4개월간 돌아본 후 그해 10월 27 귀국하였다. 이때 건륭제가 열하에서 피서를 즐기고 있었기 때문에, 박지원은 일행과 함께 청나라 황제여름 별궁이 있는 열하(熱河)까지 갔다. 이 과정에서 중국의 발달된 사회를 보고 실학에 뜻을 두게 된다. 그의 대표작 《열하일기》는 이때의 견문을 기록한 것[5]으로 이용후생에 관한 그의 구체적 견해가 담겨 있다. 《열하일기》는 당시 보수파에게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정치·경제·병사·천문·지리·문학 등 각 방면에 걸쳐 청나라의 신문물을 서술하여 실학 사상을 소개하였다. 그의 실학 사상은 ‘이용후생’을 한 다음에 정덕(正德)을 할 수 있다는 방법으로서, 도학의 입장과는 정반대로 근본(도덕)보다 말단(실용)을 앞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의 견문을 정리하여 쓴 책이 《열하일기》이며, 베이징, 열하, 만주 등에서 그가 본 풍경과 현지 주민의 생활, 그가 평소에 생각하던 이용후생에 대한 생각이 구체적으로 표현하였다. 이 저술로 인하여 그의 문명이 일시에 드날리기도 하였으나, 어떠한 형식이나 격식에 얽매이지 않았다 하여 이상한 글을 쓴다는 이유로 문단의 호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북학파 활동

 

그는 노론임에도 열하베이징을 여행하고 돌아온 후 청나라와 서구의 문물을 적극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서구의 문물과 청나라의 기술 중 성곽 축조, 제련 기술 등을 적극 받아들여야 된다고 주장하였고, 상행위를 천시할 것이 아니라 상행위와 무역을 적극 장려하고 무역항을 개설해야 한다는 것과 화폐를 이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수많은 동지들을 규합하고 문하생을 길러내 노론당 내에서도 북학파라는 학파/정파를 형성하였다.

그는 문하생에도 양반, 중인, 서자를 차별하지 않고 학문을 배우려는 자를 모두 받아들였다. 그는 서얼을 차별하는 것은 잘못이며 능력과 실력에 따른 균등한 인재 등용을 주장하였다. 서얼 차별에 대해 그는 '서자를 금고하는 것은 왕조를 세운 초기에 어떤 좀스런 신하가 기회를 타서 앙갚음한데 지나지 않는다.'며 서얼을 차별할 이유가 없다고 부르짖었다.

 

생애 후반

 

관직 활동

 

1786 50세 때 음보로 처음 출사하여 조정 시무책을 건의하였다. 그해 왕의 특명으로 선공감 감역(監役)에 제수되고, 1789 사복시 주부主簿), 1790 금부도사, 제릉(齊陵令), 1791(정조 15) 성부 판관을 거쳤다. 이후 안의(安義) 현감 · 면천(沔川) 군수(1797)를 거쳐 양양(襄陽) 부사(1800) 등 지방 수령으로서 자신의 이용후생론을 실험하고 그 경험을 지식으로 구체화하였다. 《열하일기》에서는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여 조선의 낙후된 현실을 개혁하고 풍요하게 하기 위한 이용후생론을 제시하며, 조선 사회의 편견과 타성의 폐단을 예리하게 분석하여 그 개선책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배청의식 속에서 수용되기는 어려웠다. 그의 안의현감 시절은 열하 여행의 경험에서 본 것으로 실험적 작업을 시도하였으며, 면천군수 시절에는《과농소초 課農小抄》·《한민명전의 限民名田議》·《안설 按說 등을 저술하였다.

정조 15 12월 안의현감에 임명되어 다음 해부터 임지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정조 임금이 문체를 타락시킨 장본인으로 ≪열하일기≫를 지목하고는 남공철을 통해 순정한 글을 지어 바치라 명령했으나 직접 응하지는 않았다. 정조 21(1797) 61세에 면천군수로 임명되었다.

 

은퇴와 죽음

 

당시 홍대용·박제가(朴齊家) 등과 함께 청나라의 문물을 적극 배우고 신기술을 유치해야 하며 장사는 천한 것이 아니라는 이른바 북학파의 영수가 되어 이용후생의 실학을 강조하였으며, 특히 자유기발한 문체를 구사하여 여러 편의 한문소설(漢文小說)을 발표하였다. 그는 작품에서 아무 실속 없이 양반이라는 자존심에 사로잡혀 허세부리는 자들을 조롱하고, 힘써 일하지 않는 게으른 풍조가 양반, 중인, 평민에게까지 확산되는 것을 지적했다. 또한 당시의 양반계층 타락상을 고발하고 근대사회를 예견하는 새로운 인간상을 자신의 작품에 실음으로서 논란거리가 되고 많은 파문과 영향을 끼쳤다.

1798 왕명을 받아 농서(農書) 2권을 찬진(撰進)하였다. 과농소초》라는 농업 연구책을 지어 에게 바쳤으며, 1800 양양부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해 정조가 죽자 노론벽파가 집권했음에도 1801 치사(致仕)하고 물러났다.

순조 5(1805) 10 20일 서울 가회방(嘉會坊)의 재동(齋洞) 자택에서 깨끗하게 목욕시켜 달라는 유언만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선영이 있는 장단(長湍)의 대세현(大世峴)에 장사 지냈다.

 

사후 영향

 

그의 묘는 경기도 장단군 송서면(松西面) 대세현(大世峴)에 있다. 그의 제자 중 한사람인 박제가는 윤가기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고, 순조 즉위 후 노론벽파가 집권하면서 노론 북학파 사상 역시 이단시되어 정계에 발탁되지 못하거나 오히려 추방당했다. 후일 우의정을 지냈던 그의 손자 박규수는 그의 실학 사상을 계수하여 개화 사상을 열어준 인물로 비중이 크다. 그가 가지는 생각들이 당대의 사고와 많은 차이를 내포하고 있어 그의 문집은 그의 생전에 간행되지 못하였고, 사후에도 간행되지 못했다. 그의 손자 박규수(朴珪壽)고종 우의정에 올랐지만 그 할아버지의 문집을 간행하지 못했다.

그의 문집 《연암집(燕巖集)》은 1900에 비로소 초록 형태로 처음 서울에서 공간될 만큼 간행이 늦었다. 1910에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고, 문도의 시호를 받았다. 1900 김만식(金晩植) 23인에 의하여 경성부에서 처음 그의 문집을 초록한 형태로 간행되었고, 1910 조선이 멸망한 뒤에 비로소 그의 저서와 학문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사상과 신념

 

양반 특권에 대한 비판

 

박지원은 소설 양반전을 써서 양반의 특권과 횡포를 신랄히 풍자했다. 그에 의하면 양반은 아무런 일을 하지 않고 무위도식해도 꺼리낄 것이 없으며 죄를 묻지 않는 이상한 존재라는 것이다.

'하늘이 백성을 낳았는데 그 백성이 넷이다. 그 중 으뜸은 사()로다. 양반이라고도 일컬으며 이익이 이보다 큰 것이 없다. 밭을 갈지 않고 장사를 하지 않으며, 글과 역사를 조금만 공부하면 크게는 문과에 합격하고 적어도 진사가 된다. 문과의 홍패는 두 자에 지나지 않지만 온갖 물건을 얻을 수 있으니 돈자루라고도 할 수 있다. 진사는 40세에 첫 벼슬을 해도 큰 고을의 남항(南行, 음직, 음서 제도와 같은 말로. 학식과 덕행이 특출하여 추천되었거나, 가문 덕에 하는 벼슬 수령으로 가서 잘만 풀리면 귀가 양산 그늘에 휘어지고, 배는 종놈의 대답 소리에 저절로 불러지고, 방에는 노리개로 기생을 두고, 뜰에는 명학을 기른다.며 양반의 무위도식을 조롱했다.

또한 시골의 선비, 혹은 낙향해서 생활하는 선비들에게도 풍자를 가하였다. '궁한 선비가 시골에 살더라도 꺼리낄 것이 없다. 이웃 소를 함부로 가져다가 먼저 밭을 갈고 마을 사람들을 함부로 불러다가 김을 매도 누가 감히 거역하겠는가? 네 코에 재를 붓고, 뜨거운 물을 붓고, 함부로 상투를 꺼들고, 수염을 뽑아도 감히 거역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정쟁에서 초연하거나 불의를 보고 낙향한 것처럼 행세하던 선비들 역시 낙향한 시골에서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면서 고결함을 가장한 위선을 질타하였다.

 

평가

 

홍대용·박제가(朴劑家)와 함께 북학파(北學派)의 영수로 청나라 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10편의 한문소설을 써 독특한 해학(諧謔)으로 고루한 양반, 무능한 위정자를 풍자하는 등 독창적인 사실적 문체를 구사하여 문체 혁신의 표본이 되었다.

 

문학 세계

 

박지원의 문학 정신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옛것을 본받되 변화를 알고 새롭게 지어내라”는 의미다. 그는 문학의 참된 정신은 변화의 정신을 바탕으로 창조적인 글을 쓰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비슷하게 되려는 것은 참이 아니며, ‘닮았다’고 하는 말 속엔 이미 가짜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연암은 억지로 점잖은 척 고상한 글을 써서는 안 되며 오직 진실한 마음으로 대상을 참되게 그려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그는 틀에 박힌 표현이나 관습적인 문체를 거부하고 그만의 독특한 글투를 지향했다. 이러한 그의 글쓰기에 대해 세상 사람들은 ‘연암체’라고 불렀다. 나아가 옛날 저곳이 아닌 지금 여기를 이야기하고자 했다. 중국이 아닌 조선을, 과거가 아닌 현재를 이야기할 때 진정한 문학 정신을 구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를 일러 ‘조선풍(朝鮮風)’이라고 하는데 ‘조선의 노래’란 뜻이다.

그는 자신의 실학 사상을 소설을 통해 생생하게 제시하고 있다. 자신이 양반의 가문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 양반들이 실속 없이 허울 좋은 이름만 내세우는 것을 미워한 나머지 10편의 한문 소설을 지어 독특한 해학으로써 이들을 풍자하였다. 양반전〉은 조선 왕조 봉건사회의 와해와 그 속에서 군림하는 사() 계급의 올바른 개념을 정립하고 있으며, 허생전〉은 북벌론의 허위의식을 배격하면서 당시 사회의 문제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또한 〈광문자전(廣文者傳),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등은 양반 계층과 도학자의 도덕적 위선을 신랄하게 풍자하여 사회 개혁 의식을 제시하고 있다.

자유로운 성정(性情)을 표현하기 위해 신문체를 수립함으로써 이덕무, 박제가 등의 한학신파의 4가를 낳게 했으며 문학을 통해 양반계급의 해체를 통찰하고 이를 비판, 새로운 현실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의 문학은 공리공론을 배격하고 사실주의 문학을 수립했다. 청나라 문학인들과 사귀며 정치·음악·천문·경의(經義) 등에도 관심을 갖고 연경에 갔다온 기행을 쓴 《열하일기》의 대문장 26권을 이루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허생전(許生傳)>, <양반전(兩班傳)>, <호질(虎叱)>, <민옹전(閔翁傳)>, <광문자전(廣文者傳)>, <마장전>, <우상전(虞裳傳)>,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 <김신선전(金神仙傳)>, <열녀함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 등의 단편소설을 창작하였는데, 비록 그 표기가 한문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리얼리즘 소설의 빛나는 걸작들이다.

그는 <양반전>을 통해 몰락해 가는 조선 사회를 풍자했으며, <호질>에서 유학자의 전형적인 위선을, <민옹전>에서 몰락해가는 무인들의 울분을 반영하여 당시 사회의 이면사(裏面史)가 되어준다. <허생전>에서는 전시대의 허균이 쓴 《홍길동전》과 함께 현실과 유토피아 세계를 교착시키며 날카로운 사회비판의 작가정신을 보여주었다. 그의 소설은 근대적 비판의식의 소산으로, 여러 가지 인간 유형을 통해 리얼리즘의 전통을 이룩하였고, 독특한 풍자와 해학으로써 양반계급의 무능과 위선을 고발하는 등 사실적 문체를 구사하여 문체 혁신의 표본이 되었다.

 

인물평

 

박지원의 외모에 대해서는 그의 아들인 박종채가 《과정록(過庭錄)》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보면, 큰 키에 살이 쪄서 몸집이 매우 컸으며 얼굴은 긴 편이었고, 안색이 몹시 붉었으며 광대뼈가 툭 불거져 나오고 눈에는 쌍꺼풀이 있었다고 한다. 이 기록은 현재 남아있는 박지원의 초상화와도 거의 일치한다. 또한 박지원은 목소리가 몹시 커서 그냥 말을 해도 담장 바깥의 한참 떨어진 곳까지 들릴 정도였다고 한다. 원래 박지원 자신의 중년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가 한 점 있었지만 연암은 그 초상화가 본래 자신의 모습의 7할도 못 미친다며 없애버리게 했고, 다시 그리자는 아들의 간청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박지원은 다른 사람과 쉽게 타협을 할 줄 몰랐던 성격이었다. 김기순은 박지원에 대해 "연암은 순수한 양기를 타고 나서 반 푼의 음기도 섞여있지 않으니, 지나치게 고상해서 매양 부드럽게 억누르는 공력이 모자라고, 지나치게 강해서 항상 원만한 면이 부족했다"고 평가하고 있으며, 박지원 자신도 "일생 동안 이런 저런 험한 꼴 다 겪은 것은 모두 내 성격 탓이다", "이는 내 타고난 기질의 병이라서 바로잡으려고 한 지 오래되었지만 끝내 고치지 못했다."라고 인정하고 있기까지 하다. 실제로 박지원은 음서로 관직에 진출해 안의현감이나 면천군수 등의 관직을 지내긴 했지만, 끝내 조정의 요직에는 오르지 못했다.

 

주요 저서와 관련서

 

《열하일기》(1780-1793) : 호질, 허생전 수록 리상호 역, 열하일기. 보리.

 김혈조 역, 열하일기. 돌베개

고미숙, 길진숙, 김풍기 역,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연암선생 서간첩》(1796-1797) 박희병 역, 고추장 작은 단지를 보내니. 돌베게.

《과농소초》(課農小抄, 1799) 최홍규 역, 국역 과농소초.

《과정록》(過庭錄, 1826) : 차남 박종채가 쓴 박지원 평전 김윤조 역주, 역주 과정록. 태학사.

 박희병 역, 나의 아버지 박지원. 돌베게. 1826/1998 ISBN 89-71-99107-0

《연암집》(1900년 초간) : 양반전 수록 신호열/김명호 역, 연암집. 돌베게

 홍기문 역, 나는 껄껄 선생이라오. 보리. /1900/2004 ISBN 89-84-28190-5 : 발췌역

《한민명전의(限民名田義)

주요 문학작품

 《마장전(駔傳)

 《민옹전(閔翁傳)

 《양반전(兩班傳)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허생전(許生傳)

 《호질(虎叱)

 《우상전(虞裳傳)

 《광문자전(廣文者傳)

 《열녀함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

 《김신선전(金神仙傳)

 

 

II.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 열하일기

 

압록강을 건너서

 

P21 후삼경자 우리 나라 성상 4

(청나라 건륭 45, 정조 4, 1780)

 

<당서>를 보면, “고려의 마자수는 그 근원이 말갈의 백산에서 출발했으니 물빛이 오리 대가리빛처럼 푸르다 하여, ‘압록강이라고 한다”. 했다. 이른바 백산은 장백산을 가리킨 것으로 <산해경>에는 불함산이라 쓰여 있고, 우리 나라에서는 백두산이라 한다.

 

P25 동으로 멀리 바라보니 의주 철산의 여러 봉우리들이 모두 아득한구름 속에 묻혔다. 술 한 잔을 가득 부어 먼저 첫째 기둥에 뿌려 이몸이 무사히 강을 건널 것을 빌고, 또 한 잔을 가득 부어 둘째 기둥에 뿌려 창대와 장복을 위하여 빌었다. 술병을 흔들어 보니 아직도 몇 잔이 남았기에 창대를 시켜 술 한 잔을 따라 내가 탄 말을 위하여 땅에 뿌렸다.

 

P28 사람마다 본적, 성명, 거주, 연령, 수염과 흉터의 유무, 키의 장단을 기록하고 말은 털빛까지 등록한다. 깃대를 세 개 세워 문턱을 삼고 거기서 금수품을 뒤지는데, 금수품인즉 중요한 것으로는 황금, 진주, 인삼, 수달 가죽, 포에 들지 않은 남은 들이요, 소소한 것으로는 예전 명목과 새 명목을 합하여 무려 수십 종으로 번쇄하기 짝이 없었다.

 

P29 금수품이 첫 번째 세운 깃대에서 발각될 때에는 곤장으로 치고 물건은 몰수하는 법이요, 두 번째 깃대에서 발각되면 귀양을 보내는 법이요, 세 번째 깃대에서 발각된 범인은 목을 베어 효수하나니 법들인즉 매우 엄하다. 그러나 이번 사행에 가져가는 원포는 그 절반도 못 되고 대부분이 공포라, 불법적인 남은들이야 여기서 이렇고 저렇고 한댔자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P37 각 방에서 무슨 호령이 내리면 만만한 것이 군뢰다.

 

P37 하늘을 활짝 개 뭇 별들은 총총 나지막하게 드리워 손을 내밀면 금방이라도 만져질 것만 같았다.

 

P49 책 밖에서 책 안을 바라다보니 여염집들이 다들 높직하고 대개는 오량집들이다. 이엉으로 집을 이었으나 용마루가 높이 솟고 문호들이 번듯하며 거리는 곧고 판판하여 양측은 먹줄을 친 듯하다.

담장은 모두 벽돌로 쌓았고 거리에는 사람 타는 수레, 짐 실은 수레가 왔다 갔다 한다. 벌여 둔 기명들은 모두 그림 놓은 꽃사기들로서 일반 풍물이 하나도 시골티가 없어 보인다.

전일 내 친구 홍덕보에게 중국 문물의 규모와 수법들을 들은 적도 있었지마는 오늘로 보아 책문은 중국의 맨 동쪽 끝 벽지인데도 오히려 이만하거든, 앞으로 구경할 것을 생각하니 문득 기가 꺾여 그만 여기서 발길을 돌리고 싶은 생각이 치밀면서 전신에 불을 끼얹은 것같이 후끈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크게 반성을 하면서 혼잣말로, ‘이것은 질투심이구나.’했다. 내 본성이 담박하여 일찍이 부럽다든가 질투나 시기가 없었는데, 한 번 국경을 넘어 타국의 경내에 발을 들여놓았을 뿐, 아직 그 만분의 일도 못 본 내가 벌써 이런 그릇된 생각을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아직 본 것이 적은 탓일 것이다. 이른바 시방 세계를 둘러본다는 석가여래의 밝은 눈으로 본다면 세계는 모두 평등이라고 한다.

 

P51 냇가에서 말다툼질하는 싸움 소리가 들렸다. 무어라고 지껄이는지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쫓아가서 본즉 득룡이가 방금 청인들과 예단이 적으니 많으니 힐난이다. 예단을 보낼 때는 반드시 전례에 따라 주는 법인데, 봉성의 간악한 청인들은 언제나 품목과 수량을 더 청한다. 이것을 잘 처리하고 못하는 책임은 전부가 상판사 마두에게 달려 있다. 그이가 중국말이 능숙하지 못하여 싸움을 해 가면서라도 사리를 따지지 못하고 달라는 대로 주고 보면 올해 잘못 준 것이 내년에는 전례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싸움을 해 가면서라도 이것을 바로잡아야 한다. 사신들은 언제나 이런 사리를 모르고 책에 들기가 바빠서 무턱대고 일 맡은 역관에게 재촉을 하고 역관은 마두를 재촉하게 되어 이 폐단인즉 실로 오래 묵은 폐단이 되었다.

 

P57 이용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후생이 될 것이요, 후생이 있은 후에야 그 질서를 바로잡을 것이다. 물건을 이롭게 쓸 줄 모르고 그 생활을 넉넉하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물건을 이롭게 쓸 줄 몰라 생활 자료가 근본 부족하면서 억지로 잘 살겠다고만 한다면 어떻게 그 도덕과 질서를 바로잡을 것인가?

 

P71 우리 나라의 기와 이는 법은 이와는 아주 다르다. 지붕에서 진흙을 잔뜩 올리고 보니 위가 무겁고, 바람벽은 벽돌로 쌓아 회로 때우지 않고 보니 네 기둥은 의지할 데가 없어 아래가 허하며, 기왓장이 너무 크고 보니 지붕의 비스듬한 각도에 맞지 않아 절로 빈틈이 많이 생겨 부득불 진흙으로 메우게 되며, 진흙이 마르면 기와 밑창은 절로 들떠 비늘처럼 이어 댄 데가 벗어지면서 틈이 생겨 바람이 스며들고 비가 새고 새가 뚫고 쥐가 구멍을 내고 뱀이 붙고 고양이가 뒤집는등 온갖 폐단이 생긴다.

그렇고 보니 무릇 집을 짓는데는 벽돌을 쓰는 것이 얼마나 득이 되는지 모른다. 비단 담벽을 쌓는 데 쓸 뿐만 아니라 방 안이나 방 밖이나 벽돌을 깔지 않는 데가 없다. 넓은 마당을 통으로 벽돌을 깔아 ()’ 자로 또렷또렷한 금이 바둑판같이 보이고 집채는 담벽에 부축되어, 위는 가볍고 아래는 든든하며 기둥은 담벽 속에 박혀 비 바람을 겪지 않으니, 이로써 화재 염려가 없고 도적이 뚫을 걱정이 없고 더구나 새, , , 고양이의 피해가 없을 것이다. 한번 복판문을 닫으면 온 집은 절로 성새같이 되어 집안에 든 물건은 궤짝 속에 넣은 것이나 다름없이 된다. 이로써 보면 집을 짓는다고 많은 흙과 나무와 쇠붙이와 토역이 소용없고 벽돌을 한바탕 구워 내는 때는 벌써 집은 다 된 폭이나 다름없다.

 

P74 성의 주위는 3리에 불과한데 벽돌로 수십 겹 쌓아 제도는 웅장하고도 사치스럽고 네모반듯하여 흡사 말을 놓아 둔 것만 같다. 아직도 절반쯤 쌓아 올렸은즉 그 높이는 비록 알 수 없을지라도 성문 위에 누각을 세우는 데는 구름다리를 놓고 공가(기중기 같은 도구)를 달아 역사는 비록 방대해 보여도 기계가 편리하여 벽돌을 운반하고 흙을 실어 나르는 것도 모두 기계로 움직인다. 더러는 위에서 끌어올리고. 더러는 저절로 밀려가기도 하는 것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되어, 어느 것이나 모두 힘은 절반 들고 보람은 곱절이나 나는 기술이요 방법이다. 앞길이 바빠 자세히 볼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또 온종일 틈을 내어 익히 들여다 본다 하더라도 짧은 시간으로는 이것들을 도저히 배워 낼 수 없으니 실로 애달픈 일이다.

 

P110 옛날부터 영웅은 잘 울고 미인은 눈물이 많다지마는 불과 두어 줄기 소리 없이 눈물이 옷깃을 적실 뿐이오. 아직까지 그 울음소리가 쇠나 돌에서 짜 나온 듯하고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찰 만한 소리를 들어 보지 못했거든! 사람들은 다만 안다는 것을 칠정 가운데 ‘슬픈 감정’ 만이 울음을 자아내는 줄만 알았지, 칠정이 모두 울음을 자아내는 줄은 모르고 있다네. 까지껏 골이 나면 울 수 있고, 까지껏 즐거우면 울 수 있고, 까지껏 골이 나면 울 수 있고, 까지껏 즐거우면 울 수 있고, 까지껏 사랑하면 울 수 있고, 까지껏 미우면 울 수 있고, 까지껏 하고 싶으면 울 수 있으니, 맺힌 감정을 한번 활짝 후는 데는 소리쳐 우는 것처럼 더 빠른 방법이 없네.

 

P111 ‘정’인즉 응당 즐겁고 웃을 일인데 도리어 분하고 서러운 생각에 벅차서 울부짖네. 혹은 인생은 잘나나 못나나 죽기는 일반이요, 커서는 더구나 백 가지 근심 걱정이 성화를 받을 터이니 갓난 아이는 세상에 태어난 것을 후회하여 먼저 울어서 제 조문을 제가 하는 것이라고 하네. 이것은 갓난애의 본정과는 당토 않은 소리지. 아이가 어미 태 속에 자리 잡고 있을 때 어둡고 갑갑하고 졸립고 비좁다가 하루아침에 어미 뱃속을 벗어나자 팔을 펴고 다리를 뻗고 정신이 툭 트이게 될 터이니 어찌 한번 있는 ‘정’그대로 참된 소리를 쳐 보지 않겠나? 그러매 갓난애의 울음소리에는 거짓차림이 없다는 것을 마땅히 본받아야 할 것이네.

 

성경의 이모저모

 

P182

한번 제생이 되고 보면 어디 일류 선비로 쳐주는가요? 하니, 이생이 대답했다.

“그렇답니다. 제생도 명목이 많지요. 늠생, 감생, 공생으로 있다가 생원으로 올라붙게 됩니다. 한번 생원이 되면 온 일가 친척들은 빛이 나지마는 이웃 사방은 못살게 되는 판입니다. 관청을 끼고는 고장과 이웃을 억누르는 버릇이 생원들의 단벌 재주지요. 소위 선비붙이도 역시 세 층거리가 있어, 상등은 벼슬에 나가 녹봉을 받고, 중등은 글방에 나가 생도들을 끌어 모으고, 최하는 남의 눈치나 훑어보아 가면서 누구한테나 대고 손을 벌려 꾸어라, 빌려라 하는 작자들입니다.

아무런 생업이 없이 눈치꾸러기 비럭질꾼이 되어 분주히 거리바닥을 나돌면서 더운날, 추운날 없이 사람만 만나면 숙덕숙덕 궁상을 떠는 정상이야말로 한창 시절에는 큰소리를 탕탕 치던 이들이 오늘은 누구나 실증내는 지천꾸러기가 되고 말았지요. 속담에 남의 돈 천 냥이 제 돈 한 푼만 못하다고 우리네 장사치들은 이런 딱하고 아쉬운 사정은 없답니다.

 

P196 나는 흔히 길가 점방 문 위에 써 붙여 놓은 ‘기상새설’이라고 쓴 넉 자 간판들을 보고 내 속짐작으로 장사치들이 응당 지킬 본분을 자랑 삼아, 마음이 맑고 깨끗하기는 서릿발이나 다름없고 눈보다도 더 희다는 뜻으로 저런 간판을 걸었나 보다 생각했고,

이윽고 종이 앞에 나앉아 왼쪽으로부터 시작하여 ‘설’자부터 한 자 먼저 써 놓고 보니 미상불 미원장의 글씨에는 미치지 못하손 치더라도 동 태사의 글씨보다야 어데고 못할 바 없었다. 구경꾼들은 덮쳐 모여들어 글시가 잘 쓰였다고 야단들이다. 이어서 다음 글자인 ‘새’ 자를 쓰니 더러는 역시 좋다고들 떠들었지마는 유독 전당포 주인은 ‘눈 설’자 쓸 때 소리치던 폭보다는 기색이 아주 확 달라졌다. 나는 속으로, ‘새 자는 흔히 쓰이는 글자가 아니라 손에 익지를 못했고 보니 글자 웃동갱이는 획이 너무 빽빽하고 아랫동갱이 패자는 너무 길어져서 그래서 못마땅해하는가?’ 했고, 마침 붓끝에 묻었던 먹이 ‘새’자 왼편 점 옆에 잘못 떨어져 조금씩 번져서 얼룩이 지고 보니 이 작자들이 이것으로 탈을 삼나 보다고만 생각했다. 잇달아 ‘상기’ 두 자를 단숨에 쓰고는 붓을 놓고 오른편으로부터 차례로 붙여 읽으니, 큰 글자로 ‘기상새설’ 넉 자가 뚜렷했다. 전당포 주인은 고개를 쩔쩔 흔들면서, ‘당토 않은데!’했다. 나는 불쾌하여, ‘또들 봅세!’ 인사를 하고는 일어서 나오면서 속으로 괘씸해서, ‘하기야 소읍 장사치들이 어데라고 심양 사람들을 따를라고! 벽 창호 촌뜨기 놈들이 주제에 글씨 잘 쓰고 못 쓰는 것을 알아볼 것이 무어람!’ 하고 혼자 투덜댔다.

 

P212 나는 이내 ‘기상새설’ 넉자를 써 내놓았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어리둥절하여 얼굴이 마주들 쳐다보는 폼이 어제 전당포에서 보던 기색들이나 다름없이 괴이쩍었다. 나는 속으로 ‘이것 참 괴상 한 일이구나.’ 하고는 다우쳐 물었다.

“글 뜻이 맞들 않소?” 하니, 그렇다고 하면서 곽생이,

“우리 점방들은 단벌로 부인네들 머리꽂이만 사고 팔고 할 뿐이지 가루 점방은 아닙니다.”한다.

그제야 비로소 내가 잘못 안 것을 깨닫고는 어제 일이 장히 부끄러웠다. 그러나 나는 선뜻 말머리를 돌려, “다 안다우! 한번 그저 써 봤다우.” 하고는, 전일에 요양성 안에서 본 ‘계명부가’라고 금자백이로 쓴 간판이 선뜻 생각에 떠오르자 이 글귀가 아마 이런 등속 점방에는 아주 제격일 것이라 하고는 이내 ‘부가당’ 석자를 썼다. 여러 사람들은 “악!” 소리를 치면서 좋다고들 야단이다. 곽생이, “이 상호는 무슨 뜻입니까?” 하고 묻기에, 나는, “당신네 점방에서는 부인네 머리 꾸미개를 사고 팔다 보니 <시경>에 나오는 ‘부계육가’란 글귀를 따온 말이지요.”하니, 곽생이 인사를 늘어놓는다. “우리 점방의 영광이야말로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지 알 길이 없소이다.” 나는 내일 북진묘를 구경할 예정도 있어 일찍 일어나 숙소로 돌아와 이런 이야기를 해주니 엉뚱한 글제를 쓰던 대목에 와서는 배를 쥐고 안 웃는 사람이 없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는 어데서나 점방머리에서 ‘기상새설’이란 글씨만 볼 때는 틀림없는 가루집으로 알게 되었다. 마음이 깨끗하다느니 하는 새김질은 동에 닿지도 않은 수작이요. 가루는 부드럽기가 서리와 다툴만하고 희기는 눈보다 더 낫다고 자랑하는 뜻임을 알았다.

 

일신수필

 

P228 내가 본 장관을 말하리라. 깨진 기와 조각이 장관이요, 냄새나는 똥거름이 장관이더라. ? 깨진 기와 조각은 천하가 버리는 물건이다. 그러나 동리 집을 둘러싼 담장 어깨노리 위로는 깨진 기왓장을 두장씩 마주 붙여 놓아 물결 무늬를 놓기도하고 네 쪽이 안으로 합하면 동그라미 무늬가 되고 네 쪽을 바깥으로 등을 대어 모아 붙이면 옛날 엽전의 구멍 모양을 이룬다. 기와 조각들은 서로 맞물려 알쏭달쏭 뚫린 구멍들이 안팍으로 마주 비치면서 별별 무늬가 다 놓이고 보니, 한번 깨진 기와 쪽을 내버리지 않아 천하의 문채는 벌써 여기 다 있지 않은가? 동리 집들의 문전 뜰에는 형세가 닿잖고 보니 벽돌은 깔 수 없고 오색 빛깔의 유리 기와 쪽과 냇가에서 동글고 반들반들한 조약돌을 주워다가 얼기설기 서로 맞추어 꽃 무늬, 나무 무늬, 새 무늬, 짐승무늬를 놓아 가면서 깔아 놓아 비가 와도 땅이 질 걱정이 없이 만든다. 한번 자갈과 조약돌을 내버리지 않으니 천하의 명화는 다 여기 있지 않은가.

똥 오줌이란 세상에서도 가장 더러운 물건이다. 그러나 이것이 거름으로 쓰일 때는 금싸락같이도 아끼게 된다. 길에는 버린 재가 없고 말똥을 줍는 자는 오쟁이를 둘러메고 말꼬리를 따라다니고 있다. 이렇게 모은 똥을 거름간에다 쌓아 두는데 혹은 네모반듯하게, 혹은 팔모가 나게, 혹은 육모가 나게, 혹은 누각 모양으로 만들고 보니 한번 쌓아 올린 똥거름의 맵시를 보아 천하의 문물 제도는 벌써 여기 버젓이 서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러매 나는 힘차게 말할 수 있다. 기와 조각, 조약돌이 장관이라고, 똥거름이 틀림없이 장관이라고, 하필 성곽과 연목과 궁실과 누각과 점포와 사찰과 목축과 광말한 벌판, 자욱한 수림의 꼼속 같은 풍광만을 장관이라고 부를 것인가?

 

P240 수레를 만들 때 무엇보다 먼저 생각할 것은 궤도를 똑같이 해야 된다는 것, 소위 ‘동궤’라는 것이다. 그러면 동궤란 무엇일까? 즉 두 바퀴 사이의 굴대 길이를 말하는 것이다. 어떤 수레고 두 바퀴 사이의 척수가 규격에 어긋나지를 않고 보면 수없는 수레들이 자국은 한 자국이 되는 법이니, 이것이 소위 동궤라는 것이다. 이번에 천리 연도를 지나면서 하루에도 수없는 수레들을 보았지마는 앞수레와 뒤수레는 같은 바퀴 자국을 거듭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약속도 없이 꼭 같아지는 경우를 ‘일철’이라고 하고, 뒤에 선 사람이 앞에 선 사람이 가는 대로 따를 때는 ‘전철’이라고 한다. 성문 같은데 바퀴 자국이 난 곳은 아주 ‘ 모양으로 홈통처럼 되었다. 이것이 소위 성문의 ‘궤’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 조선에는 아직도 수레란 것이 없지만, 있다는 것도 바퀴가 똑바르지 못하고 바퀴 자국은 궤도에 들지를 못하니 수레가 아주 없는 셈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흔히 말하기를, 우리 조선은 산협 지대라 수레를 쓰기에는 적당하지 못하다고들 한다. 이런 당토 않은 소리가 어데 있을 것인가? 나라에서 수레를 이용하지 않고 보니 길을 닦지 않고 있는 것이요, 수레만 쓰게 된다면 길은 절로 닦일 것이 아닌가? 거리가 비좁고 산마루들이 험준하다는 것은 아무 쓸데 없는 걱정이다.

중국이 재물은 풍성풍성하되 한쪽에 물려 있지를 않고 쉴새없이 흘러 퍼지고 장사를 통해서 이곳저곳 옮겨지는 것은 모두 수레를 이용하는 탓이다.

 

P245 맷돌은 큰 아륜 두 짝을 포개고 가운데는 쇠 굴대를 박아 방 복판에 두고 기계를 설치하여 이를 돌리고 있었다. 이륜이란 것 은 자명종 속에 이빨이 돋은 바퀴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방안 네 구석에는 역시 두 층으로 맷돌짝을 두고 맷돌짝 가장자리로 역시 이빨을 내어 큰 바퀴 이빨과 서로 맞물리도록 했다. 큰 바퀴가 한번 돈즉 여덟 짝 맷돌이 한목으로 돌아 삽시간에 밀가루는 눈처럼 쏟아져 쌓인다. 그 이치는 시계도는 이치와 비슷하다. 길에 오면서 본 민가에서 다들 맷돌 한 틀에 당나귀 한 마리가 붙었고 곡식을 찧는 데는 흔히들 연자방아를 노새로 끌어 절구방아 대신으로 삼았다.

체로 가루를 치는 법식을 보자. 밀폐한 방 안에 바퀴 셋이 달린 흔드는 수레를 두었는데, 앞바퀴가 두 개고 뒷바퀴는 한 개다. 수레 위에는 기둥 넷을 세우고 큰 체를 두 층으로 위태위태하게 올려 놓았는데, 가루 두어 섬은 넣을 만했다. 위층 체에서 친 가루는 그 밑에 비워 둔 아래층 체가 받아 다시 더 가는 가루를 뽑게 된다. 체를 흔드는 수레 바로 앞에는 나무 막대기를 하나 걸치고, 막대기의 한 쪽 머리는 수레에 물리고 한쪽 머리는 방 바깥을 뚫고 나오도록 하고, 거기는 기둥을 한 개 세워 벽을 뚫고 나온 나무 끝을 기둥에다 이었다. 기둥 밑바닥에는 땅을 움푹하게 파고 큰 널판으로 기둥뿌리를 받쳤다.

 널판 한복판 밑바닥에는 고임대를 가로 놓아 널이 들뜨도록 하여 흡사 디딤 풀무처럼 되엇다. 사람이 널판 위에 걸 앉아서 조금씩 발을 놀리면 널판의 양머리는 번갈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바람에 널판 위에 박은 기둥은 절로 끄덕끄덕 흔들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와 함께 기둥머리에 물린 가름대는 절로 힘차게 밀치고 나가면서 방 안의 수레가 한 번은 앞으로 한번은 뒤로 왔다 갔다 하게 된다. 방안 네 벽에는 열 층이나 시렁을 매고 그 위에는 그릇들을 쭉 얹어 두어 날리는 가루를 받는다. 밖에 앉아 널판을 밟고 있는 자는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찾아온 손들과 이야기를 주고 받기에도 아무런 구애가 없었다. 다만 등 뒤에서 왈가닥절거덕 요란한 소리들이 나는데, 누가 조작해 내는 소리인지 알 까닭이 없었으니, 그도 그럴 것이 발은 알 듯 모를 듯 놀리고 그 보람은 엄청나게 크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부녀들이 몇 말도 못 되는 가루를 한번 치자면 머리와 눈썹은 하루아침에 새하얗게 세고 손목은 저리고 물러 녹을 지경이고 보니 같은 일인데도 힘들고 편하고, 덕되고 손보는 정도를 한번 이것과 비교해 봄이 어떨까?

 

P246 고치실을 뽑는 소차는 더구나 그 방법이 묘하여 꼭 본받을 만하였다. 큰 아륜이 붙은 것은 맷돌 도는 법과 같고 소차의 양머리에는 역시 아륜으로 맞물리게 되어 쉴새없이 절로 돌게 되었다. 소차란 결국 몇 아름이나 되는 커다란 얼레를 두고 말하는 것으로, 고치는 몇십 보 밖에서 삶고 그 중간에는 몇십 층으로 시렁을 매어 시렁들은 차차 높아졌다가 차차 낮아졌는데, 시렁마다 바늘귀 같은 구멍이 뚫린 철편을 세웠고, 실은 그 구멍으로 새어들어 틀이 돌면 바퀴가 따라 돌고 바퀴가 돌면 얼레도 따라 돌아 바퀴 이빨들은 서로 맞물고,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고 슬금슬금 뽑아 내어 고치실은 흔들리고 부딪침이 없이 제 신대로 풀리도록 밀쳐 두었으므로, 곱거나 거거친 것 희뜩뻐뜩 섞여 나오지를 않는다. 고치실이 가마에서 나와 얼레에까지 감기는 동안에는 여러 개의 쇠구멍을 빠져나오게 괴고 보니, 이 동안에 실에 붙었던 잡티는 죄다 떨어지고 얼레에 미처 감기기 전에 실은 벌써 제풀에 바래고 맑은 광택이 번드레하게 나게 되어 다시 잿물에 이기지 않고도 바로 비단을 짤 수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 고치실 뽑는 법이란 기껏 안다는 것이 손으로 건져 뽑는 법뿐이요, 소차는 쓸 줄 모른다. 실을 뽑으면서 서툴게 고치에 손을 대는 것이 벌써 고치가 타고난 성질을 다치는 노릇이다. 손으로 실을 뽑을 때는 바르기도 하고 느리기도 하여 솜씨가 고르지 못하고 가다가는 대중없이 흔들고 다치고 보면 성난 실과 놀란 고치는 뛰어오르기도 하고 쌍가닥으로도 뽑혀 나와 얼기설기 헝클어져 끝을 찾을 수도 없이 덩이로 굳어지면서 광택조차 잃어버리게 된다. 티가 박히고 멍울이 지고,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는 실을 애써 바로 잡기 위하여는 입과 손바닥만 죽을 고생을 한다. 이러고 보니 소차의 보람과 쓸모에 비해 보아 그 민첩하고 둔한 품이 어떻다고 할까. 다시 나는 고치가 여름을 지나도 벌레가 나지 않는 용수를 물었다. 그 방법인즉 고치를 약간 볶으면 나비가 나오지를 않고, 더운 구들에 달게 말리면 벌레도 안먹고 나비도 나오지를 않아 겨울철까지도 실을 뽑을 수가 있다고 한다.

 

P313 바다 위에 뾰족하게 하늘을 찌르고 선 봉우리는 창려현 문필봉이다.

한참 동안이나 구경을 하다가 성에서 내려오자니 아무도 감히 먼저 내려오는 자가 없었다. 벽돌로 쌓은 층층대를 까마득하게 올라왔다가 내려 굽어보니 사지가 떨릴 지경이다. 하인들이 부축해 안으려해도 몸이 돌릴 자리가 없고 보니 형편은 딱하게 되었다 내가 서쪽 층층대로 내려와 평지에서 쳐다보니 대 위에 선 사람들은 벌벌 떨면서 어쩔 줄 모르고들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올라갈 때는 한 층대 한 층대 붙들고 올라가다 보니 위태한 줄을 몰랐다가 도로 내려오려고 보니 한번 눈을 들자 뜻도 못한 자리에 서게 되어 금방 눈이 핑 돌았다.

탈은 눈에서 생겼으니 벼슬하는 자들도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바로 떠받들려 올라갈 때는 한 층대 반 층대가 남보다 뒤떨어질까 하여 더러는 동배를 떠밀고 앞을 다투다가도 급기야 몸이 높은 자리에 처하고 보면 겁이 나고 외롭고 위태로워 나아갈 곳은 한 자죽도 없고 물러설 자리는 천길 낭떠러지가 있을 뿐으로 어데를 더위잡았자 도움될 가망도 없고 보니 내려오려 해도 제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다. 천고를 두고 통하는 이치렸다.

 

관내에서 본 이야기

 

P374 범이 노루, 사슴을 잡아먹을 때 너희놈들이 범을 밉다, 곱다 끽소리 없다가도 범이 한번 마소를 잡아먹을 때는 너희놈들이 범을 원수로만 여기니, 이것은 노루, 사슴이 사람에게 덕 되는 데가 없고 마소는 너희들이 부려 덕을 본다고 해서 그런 것이겠지. 그렇지마는 너희놈들은 마소 대접을 어떻게 하느냐? 태워 주고 부리던 고생도, 심부름하고 주인을 따르던 정성도 알아줄 까닭 없이 날마다 푸줏간이 비좁도록 몰아넣어 뿔다귀 한 개, 갈기 한 오리도 남기지 않을 뿐더러 이것도 부족하여 내 양식인 노루, 사슴에까지 손을 뻗쳐 우리들이 산에서는 배를 못 불리고 들에서는 끼니까지 건너게 만들어 놓았으니, 이쯤 되고 보면 어디 하늘더러 이 사정을 한번 처리해 달라고 해 보자. 네놈들을 우리가 잡아먹어야 할 것이냐, 그만둘어야 할 것이냐.

무릇 제 것 아닌 물건을 가져가는 놈을 불러서 ‘도적놈’이라 하고, 남의 생명을 빼앗고 물건을 해치는 놈을 가져다가 ‘화적놈’이라고 하느니라.

 네놈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분주하게 팔뚝을 뽐내고 눈을 부릅뜨고 잡아채고 훔치고 하건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심한 놈은 돈을 형님이라고까지 하고 장수가 되기 위해서는 제 계집조차 죽이는 놈이 있는 데야 삼강오륜을 더 이야기할 나위가 어데 있겠느냐. 어디 그뿐인가. 메뚜기에게서 밥을 가로채고, 누에에게서 옷을 빼앗고, 벌 떼를 쫓고는 꿀을 도적질하고, 더 악착한 놈은 개미 새끼로 젓을 담아 제 할애비 제사를 지내는 놈까지 있으니, 잔인하고도 악착한 버릇이 네놈들을 덮을 놈이 또 어데 있단 말인가.

 

P376 범의 집안에서는 홍수나 가물을 모르고 보니 하늘을 원망할 리 없고 덕이고 원수고 다 잊어버리는지라 세상에 미운 것이 없고, 하늘의 마련대로 따라 살다나니 무당이나 의원의 농간에 넘어갈 턱이 없고, 타고난 성품에 따라 저 생긴대로 살다나니 더러운 세상살이 잇속에 병들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범의 영특하고 갸륵하다는 내력이란 말이다.

한 가지 얼룩을 보아 열 가지 문채를 세상에 자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치의 병장기를 손에 대지 않고도 다만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만 가지고서 위풍을 천하에 뽐내고 범의 형상을 그린 제기들로써 효성을 세상에 널리 퍼뜨려 가르친다. 하루에도 한 끼는 까마귀, 솔개미, 개미 떼가 대궁을 갈라 먹으니 우리들의 어진 행실이야 이루 다 칠 수 없을 것이고, 애매하게 남에게 먹힌 사람을 잡아먹지 않고, 병자나 폐인을 잡아먹지 않고 상주를 잡아먹지 않으니 의로운 행실까지도 이루 다 들 수 있겠느냐?

 정 모질구나, 네놈들이 잡아먹는 버릇이야말로, 덫과 함정이 부족하다 하여 새 그물, 노루 그물, 후리 그물, 반두 그물, 자 그물들을 만들었으니 대관절 맨 처음에 그물을 뜨기 시작한 놈이 화근을 세상에 퍼뜨린 놈일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뾰족 창, 접적 창, 긴 창, 삼지창, 도끼, 환도, 비수, 쇠꼬치가 있지 않나, 또 한 방만 터트리면 소리는 산악을 무너뜨리고 불길을 번쩍번쩍 토하면서 벼락보다도 더 무서운 대항구까지 있다. 이것도 제 신대로 포악을 부리기에는 부족하다고 하여 이번에는 부드러운 털로 아교풀로 붙여 길이는 한 치도 못 되게 대추씨처럼 뾰족하게 만들어 먹물에 덤벅 찍어서는 이것으로 가로 찌르고 모로 찌르면 굽은 놈은 갈구리창 같고, 날이 선 놈은 칼 같고, 뾰족한 놈은 검 같고, 갈라진 놈은 가장귀창 같고, 곧은 놈은 화살 같고, 둥그레한 놈은 활같이 생겨 이놈의 병기들이 한번 움직이는 곳에서 뭇 귀신들이 밤 울음을 울게 되는 판이다. 참혹하게 서로들 잡아먹는 데야 누가 너희놈들보다 더 심할 것이냐?

 

P401 성인은 일찍이 그 제자들이 나라를 다스리는 방안을 물을 때 대답하면서 말로는 그럴듯하게 벌여 놓았지마는 몸소 실천을 못했다. 그러나 후세에 소위 하늘의 뜻을 받아 위에 올라서게 된 임금이란 학문으로 보아서는 반드시 성인보다 낫다고 할 수 없더라도 하루아침에 능히 들고 나서 제 손으로 실천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필 중국 사람들만 이럴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랑캐의 임금으로서 중국을 정복한 자도 모두 다 이 법도를 계승하고 있다.

의식이 족한 뒤라야 예절을 알게 되는 법이라, 후세에 있어서 그 나라를 부강코저 하는 자가 때로는 각박하다, 덕이 적다는 비평이야 들을 값에 그렇다고 그들의 이룩이 자기 한 몸의 이익만 돌보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위태롭고 미약할 때의 마음 쓰는 법이나 일의 공사를 분명히 따져 말한다면 유정유일 정신을 그들에게 함부로 말할 것은 못 된다. 그러나 그 공덕과 이용에서 볼 때는 비록 그 방법이 오랑캐로부터 나왔다고 하더라도 여러 가지 장점들을 모아서 유정유일로서 표본을 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북방 여행기

 

P428 나는 말 위에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인간으로서 가장 괴로운 노릇은 이별처럼 괴로운 노릇이 없을 터이요, 이별 중에서도 괴로운 이별은 생이별처럼 괴로운 이별이 없구나. 그 까짓 죽고 사는 이별쯤이야 괴롭다 말할 거리가 못 될 것이다. 천고로 내려오면서 어진 아버지, 효성 있는 자식, 믿음직한 남편, 알뜰한 지어미, 의로운 임금, 충성된 신하, 피로 맺은 동지, 마음으로 사귄 친구들이 운명을 하는 자리에서 마지막 유언을 주고받을 때나 또 옛날 임금들이 임종할 때 탁자에 기대어 자기가 믿던 신하에게 국사를 부탁하는 자리에서는 누구 없이 손을 붙잡고 눈물을 뿌리면서 있는 정곡을 다하여 애끊는 당부를 하는 법이다.

이것은 세상의 어느 부자, 어느 부부, 어느 군신, 어느 붕우 사이에서라도 언제나 있을 수 있는 일이요, 또 세상에 어질고 효성 있고 알뜰하고 믿음성 있고 의롭고 충성되고 피로 맺고 마음으로 사귀는 사이들에서는 누구 없이 우러나오는 심정들이다. 이런 일이 이미 사람마다 함 직한 일이요, 또 사람마다 우러날 수 있는 심정이라면 이런 일은 세상에 순순한 이치로 될 것이다. 이처럼 누구나 할 수 있는 순순한 이치를 실천만 하고 보면 소위 ‘3년을 고치지 않는다.(적어도 3년 동안은 죽은 아버지가 지켜 오던 법도를 고치지 않아야만 효자라 할 수 있다라는 <논어>의 한 구절.) 고 쳐줄 것이니, 여기서 무덤에 들어가 죽은 자로서야 땅속에서 다시 또 무슨 할 말이 있을 것인가.

그러나 살아남은 자의 괴로움이란 부모를 따라 죽으려고 한 효자도 있고, 아들이 죽어서 눈이 멀게 된 아비도 있고, 아내가 죽어 너무도 어이가 없어 물동이를 치고 노래를 부른 남편도 있고, 임금의 원수를 갚으려고 숯을 먹고 벙어리가 된 충신도 있고, 남편의 시체를 찾으려다가 성이 무너져 치여 죽은 아내도 있었으니 이런 사람들은 다들 죽은 사람들을 위하여 제 몸을 희생하였을 뿐 이미 죽은 자로서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으니 이러고 보면 죽고 사는 이별 마당에서 죽은자는 아무런 괴로움이 없었다고 할 것이다.

 

 

III. 내가 저자라면

 

박지원 선생은 타고난 묘사력 덕분에 실제로 그 사물을 본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지만 글로만 읽던 그 기행문 내용들을 글과 사진을 확인 한다면 느낌이 어떡해 달라졌을까?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이 어색할 만큼 열하일기는 마치 사진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들게 한다. 연암 박지원 선생의 정밀한 집필 능력을 이 시대와 만났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지금 시대에 맞게 열하일기를 쓴다면 사진을 첨부하여 독자의 이해를 쉽도록 도움을 됐을 지는 모르나 묘사력이 떨어 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중 하 끝나지 않는 여행기를 계속 보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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