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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13일 11시 29분 등록

열하일기, 박지원 씀, 리상호 옮김. 보리출판사

 

1.   저자에 대하여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한 나이 29살까지 연암은 어찌 살았나?

 

1737년에 반남 박씨 박사유와 함평 이씨 사이 2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휘는 지원, 자는 중미, 호는 연암이었다. 조부 박필균은 노론을 지지했던 선비로 사간원정언, 경기관찰사, 예조참판, 공조참판 등을 지내고 지돈녕부사에까지 이르렀다. 조부의 신중한 처신과 청렴한 생활은 연암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16세 때 관례를 올리고 유안재 이보천의 딸과 혼인했다. 장인 유안재에게 맹자를 배우고 처숙인 홍문관 교리 이양천에게 문장 짓는 법을 배웠다. 18세에 우울증으로 고생했다. 사람들을 청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고 읽으며 우울증을 고쳐보고자 했다. 거지 광문의 이야기로 광문자전을 썼다. 19세 때 연암의 학문을 지도했던 영목당 이양천이 40세로 별세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제영목당이공문을 지었다. 20세 때 김이소, 황승원, 홍문영, 이희천, 한문홍 들과 북한산 봉원사 등을 찾아 다니며 공부했다. 봉원사에서 윤영을 만나 허생의 이야기를 들었다. 23세 때 어머니 함평 이씨가 59세로 돌아갔고, 그 해 큰 딸이 태어났다. 29세때 금강산을 유람하고 총석정 해돋이등을 썼다. 이 글은 열하일기에도 되풀이 수록했다.

 

삼십대, 벼슬길을 단념, 실학 선비들과 어울리다.

 

30살에 장남 종의가 태어났다. 홍대용이 중국 문인들과 나눈 필담을 정리해 건정동회우록을 냈다. 박지원이 거기 서문을 썼다. 홍대용과 중국 사람들의 우정을 예찬하고 청을 무조건 배격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글이었다. 31세때 아버지 박사유가 돌아가셨다. 부친상을 당하고 장지 문제로 녹천 이유집안과 시비가 벌어졌다. 이 일로 상대방의 편을 들어 상소를 올렸던 이상지가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난 것을 보고 이때부터 연암도 스스로 벼슬길을 단념하였다. 삼청동에 있는 무신 이장오의 별장에 세를 얻어 살기 시작했다. 32세때 백탑 근처로 이사해 이덕무, 이서구, 서상수, 유금, 유득공 들과 가까이 지냈다. 34세 때 감시의 양장에서 모두 일등으로 뽑혔다. 입궐하여 영조에게 극찬을 받았다. 많은 이들이 박지원을 급제시켜 공을 세우려 했으나 회시에 응하지 않거나, 응시한다 하더라도 시권을 제출하지 않거나, 제출하더라도 노송과 괴석을 그린 그림을 제출하여 벼슬에 뜻이 없음을 밝혔다. 벗들과 북한산의 대은암에 놀러가 시와 문장을 주고받은 것을 기록한 의인과소인배를 썼다. 35세때 큰 누님 박씨가 43세로 돌아가셨다. 누님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백자증정부인박씨묘지명을 썼다. 이덕문, 백동수 들과 송도, 평양을 거쳐 천마산, 묘향산, 속리산, 가야산, 단양 등 명승지를 두루 유람했고, 황해도 금천 연암골을 보고는 몹시 좋아했다. 36세때 식솔들을 처가로 보내고 서울 전의감동에 혼자 살기 시작하였다. 가까이 지내던 홍대용, 정철조, 이서구,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 여러 벗들과 더욱 친하게 사귀었다. 이서구가 하야방우기를 쓰자 사흘째 끼니를 거르고를 써서 자신의 생활을 그려 보였다. 37세에 유득공, 이덕무와 서도를 유람했다. 허생의 이야기를 해 주었던 윤영을 또 만났다. 38세에 송나라 이당의 그림 장하강사가 우리 나라에 들어온 내력을 기록한 제이당화를 썼다.

 

마흔줄, 황해도 연암골 은둔 선비, 삼종형을 따라 북경을 여행, 열하일기 쓰다.  

 

41세에 장인 이보천이 64세로 돌아가셨다. 장인을 추모하는 글을 썼다. 42세 때 사은진주사 일원으로 북경으로 떠나는 이덕무와 박제가를 전송했다. 이 해에 가난한 집안 살림을 도맡아 했던 형수 이씨가 55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홍국영의 견제를 피해 연암골로 은둔하였다. 초가삼간을 장만하고 손수 뽕나무를 심었다. 형수의 유해를 연암으로 옮겼다. 유언호의 도움으로 개성 금학동에 있는 양호맹의 별장에 머물면서 이행작, 이현겸, 양상회, 한석호 등을 가르쳤다. 다시 연암골로 돌아왔다. 개성에서 만난 유생들이 따라와서 그에게 글을 배었다. 43세 때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이 규장각 검서로 발탁되었다. 홍대용에게 편지를 써 연암골 생활을 전하며 세 사람의 기용을 축하했다. 1780 44세 때 홍국영이 실각하자 서울로 돌아와 처남 이재성의 집에 머물렀다. 삼종형인 금성도위 박명원을 따라 북경으로 갔다. 5월에 떠나 6월에 압록강을 건넜고, 8월에 북경에 들어갔다가 열하에 들러 다시 북경으로 돌아와 10월에 귀국하였다. 돌아오자마자 열하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둘째 아들 종채가 태어났다. 45세때 박제가가 쓴 <북학의> 서문을 썼다.  47세때 벗이었던 담헌 홍대용이 53세로 죽자 손수 염을 하고 나의 벗 홍대용을 써 슬퍼했다.  

 

오십대, 벼슬길에 오르다.

 

50 7(1786)에 유언호가 천거하여 선공감역에 임명되었다. 다음 해에 부인 전주 이씨가 51세로 죽었다. 박지원은 그 후 죽 혼자 지냈다. 큰 형 화원도 그해 58세로 죽었다. 연암골에 있는 형수의 무덤에 합장했다. 형을 보내고 쓴 시를 보고 이덕무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부인이 죽은 지 1년 만에 맏며느리 덕수 이씨가 죽었다. 끼니를 끓여 줄 사람이 없어 주위에서 다시 처를 얻으라고 했으나 듣지 않았다. 종제 박수원이 선산부사로 나가있는 동안 계산동 집을 빌렸다. 53세때 평시서주부로 승진했다. 54때 제릉령에 임명되자 한가로운 곳에서 마음대로 독서하고 저술할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했다. 사복시주부, 사헌부감찰로 임명받았으나 사퇴하고 연암골에 하루 이틀 머물 수 있는 제릉령에 머물렀다. 55세 때 한성부판관에 임명되었다. 겨울에는 안의현감으로 부임해 60세까지 안의현감으로 일했다. 흉년이 들자 자기 녹봉으로 구휼하고, 아전들이 포탈한 곡식을 원래대로 채웠다. 5년동안 둑 공사 부역으로 힘든 일이 없게 했다. 임기를 마친 후 서울로 돌아왔다. 57세에 열하일기로 잘못된 문체를 퍼뜨린 잘못을 속죄하라는 정조의 하교를 받았다.

 

육십대, 관직 은퇴후 서울로 돌아와 쉬다.

 

61 7월에 면천군수에 임명되자 임금을 알현하게 되었다. 문체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나누었다. 연암이 일하던 면천군에 천주교가 성행했으나 천주교도들을 크게 벌하지 않고 기회를 주어 방면했다. 63세 봄에 흉년이 들자 안의에서 했던 것처럼 봉록을 덜아 백성을 구휼했다. 농서 <과농소초>를 썼다. ‘부자들의 토지를 나누어 주라가 부록으로 붙어 있는데 중국에 갔을 때 본 것들과 우리 나라에 시행할 수 있는 것들을 묶어 14책으로 내었다. 정조가 이 책을 보고 농서대전을 박지원에게 편찬케 해야겠다는 말을 하였다. 64 1800년에 정조가 승하하고, 8월에 박지원은 양양부사로 승진했다. 65세에 양양부사를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왔다. 69 1805 10 20일 가회방 재동 집의 사랑에서 죽었다. 홍대용이 그랬던 것처럼 반함하지 말고 다만 깨끗이 씻어 달라고만 유언을 남겼다. 

 

*자료출처 : 열하일기. 보리출판사       

 

저자에 대한 개인적 평가

 

나의 저자조사의 빈천함은 28권째에 이르러서도 나아질 기미가 없네. 마감일 새벽에야 헐레벌떡 책의 왼날개나 뒤쪽 저자 약력을 베껴적는 형편이다. 궁금한 것을 못 찾아보고 지나간다. 2주간 같은 저자의 책을 연달아 읽으니 좋다. 기억과 궁금증이 살아있는 동안 연작물을 읽는 때가 또 있었던가? 이번에는 궁금증을 제 손과 발로로 해소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열하일기를 읽으면서 박지원의 글이 장난기 있고, 어수룩해보이지만 눈이 매섭고, 뜻이 원융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은 저자다. 몇 가지를 메모한다.

 

첫째, 정민교수님의 책 중에 연암과 관련된 것은 무엇일까?

다산을 연구하기 전에 연암에 홀릭한 10년이 있었댔다. 정민교수님의 연암 사랑은 연암의 어떤 면을 비추고 있을까? 정민교수님의 책을 두 권 읽었다. 한시미학산책은 레이스 기간에, 다산선생지식경영법은 지난 주에. 거기에 인용된 연암의 사례는 갑자기 눈 떠서 집 가는 길 잊어먹었거든 다시 눈을 감으라는 거하고 성 쌓는데 벽돌이 나으니 돌이 나으니 논쟁이었다. 직접 만나러 갔을 때 정민선생님은 질문을 제기하고 저만치 빠져버리고 딴 소리를 해 대는 연암과 무릎 아래 앉혀놓고 시시콜콜히 잔소리를 해 매만지는 다산은 가르치는 스타일이 다르다 했었다.

 

둘째, 그가 유쾌상쾌호쾌하면서도 대안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는 이유가 있을까?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와 본 대로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려면 이해득실에서 자유로운 게 필요하다. 연혁을 읽어보니 36살에 식솔들을(처와 11) 처가로 보내고 자기는 혼자 서울서 방을 얻어 살다가 천지를 주유하다 연암골로 들어갔다. 친구가 보낸 편지에 사흘간 끼니를 굶었다는 답장을 보낸 건 매우 생활이 곤궁했다는 거다. 작가여서 식구들을 건사하는 책임보다 글 쓰는 걸 우선했던 걸까? 그건 좀 책임감이 없어 보이기도 한데. 과거에 합격할 실력을 갖추었음에도 답안지를 엉뚱하게 낸다든가 2차 시험을 결시한다든가 하는 건 과거를 통해 가는 길에 대한 미련이 전혀 없다는 의미였다. 마음만 먹으면 벼슬을 할 수 있는 집안, 실력인데도 선택해서 재야에 남은 이는 그것을 얻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이들과는 다를 거다. 가난하고 지위가 없으나 당당하고 어딘가 무서운 데가 있다. 게다가 웃긴 캐릭터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가 매우 자기 감정에 진실한 사람인 것 같다.    

 

셋째, 연암은 소설을 자기 생각의 표현 수단으로 삼았다. 이유가 있을까? 그리고 과연 효과적인 수단이었을까?

상권에는 범의 꾸중을 받는 북곽선생이 나오고, 하권에 허생전이 있었다. 대략 읽어보니 이건 양반사회를 비판조롱하고, 새로운 이상세계를 꿈꾸는 이야기다. 언뜻 보기에 소설이고, 지어낸 이야기라고 하면 누가 뭐랄 게 없는 것 같다. 연암은 설명하는 방식보다는 미리 보여주는 방식이 더 어울리는 것도 같다.

 

넷째, 이덕무, 유득공, 홍대용, 박제가, 연암 박지원이 모두 교류가 있었다. 정조, 영조 1800년대 근간이다. 역사책에서 실학파의 중요인물명으로 거론되던 굵은 이름들이다. 중국에 사신으로 가는데 배웅을 나갔다든가, 편지를 주고 받았다든가 이야기가 있으니, 어떻게 이런 중요 인물들이 모두 모이게 되었을까? 이 곳은 지금은 어디일까? 지금은 누구일까? 어떤 시각을 가지고 움직이는 사람들일까? 우리 나라에 대한 시각과 함께 세계전체에 대한 시각을 함께 가진 이들일 것 같은데.     

 

연암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야기를 조금 적어둔다. 열하일기를 읽기 전에 읽은 책 <다산선생지식경영법>을 이 책을 읽으며 써먹었다. 배운 걸 적용하는 즐거움이 찰지다. 그걸 읽고 열하일기를 읽으니 좋은 점. 우선연구원 읽기 방식에 대한 궁시렁이 현저히 줄었다. 초서를 하면서 읽어라, 정해진 일과대로 정해진 분량을 읽어라, 질서-질문을 휘리릭 메모해두어라, 고전을 읽어라, 돌아가는 미련퉁이의 방식처럼 보이는 이게 스테디 & 슬로우 황소걸음이 히말라야를 넘는 지름길, 당구경첩법이다. 네 문장의 뿌리를 든든히 하는 기초작업이지 다산 선생의 친절한 잔소리가 쟁쟁 울려왔다. 남과 북이 합심해서 만든 겨레고전선집을 읽는 게 자랑스러웠다. 이중에서 실천이 안되는 건 매일 정해진 분량을 정해진 시간에 읽는 거다. 이번주도 막판 초치기 벼락치기 했고, 마감시간 못지키고 근무시간을 헐어서 쳤다. 또 하나는 자구에 얽매이고, 인상에 희번득이며 맑은 샘물이 나올 때까지 삶에 적용해 생각해보지 못하고 흙탕물만 끼적거리고 만다. 연암의 책을 읽으며 얻는 것은 다산의 책을 읽으며 얻는 이런 명시적, 구체적 노하우들이 아니라 근본적인 질문이리라 기대한다. 나는 수업시간에 선생님들이 했던 농담만 새겨들었던 학생이라 그가 치고 빠질 때 엉뚱한 것에만 집착할까 살짝 경계한다. 그가 나에게 제기해 들이미는 시퍼렇지만 웃긴 포장지에 쌓인 근본적인 질문을 설레며 기다린다.       

 

 

 

2.   내가 저자라면

 

1)   목차와 뼈대

 

열하일기는 1780년 박지원 44세 때 삼종형인 금성도위 박명원을 따라 북경으로 갔던 여행기다. 5월에 떠나 6월에 압록강을 건넜고, 8월에 북경에 들어갔다가 열하에 들러 다시 북경으로 돌아와 10월에 귀국하였다. 황제의 생일축하 사절단으로 갔는데 황제가 여름별장으로 나가있어서 북경에서 열하까지 가야했다. 거기까지 갔던 길을 소상히 그렸다. 돌아오자마자 열하일기를 쓰기 시작해서 4년 동안 썼다. 북경에서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의 여행기는 중복되므로 생략하였다. 각 시기마다 제목을 붙였고, 3권으로 구성된 각 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책에 수록된 지도를 참조한다. 

 

상권 : 압록강을 건너서 북경 찍고, 열하까지 가는 동안의 기록.

     [도강록, 성경잡지, 일신수필, 관내정사, 막북행정론(북방여행기)]

중권 : 열하에 머무는 동안과 다시 북경으로 돌아오는 과정의 기록

      [태학유관록, 환연도중록]

하권 : 여행여정보다 쪽글들을 모아놓은 글들

       [피서록, 옥갑야화-허생전, 황도기략, 공자묘 참배]

 

매일 일기를 위주로 써나가다가 단독 꼭지글로 독립해서 쓴 것은 그것을 밝혀놓았다. 이런 식이다.

 

144 나는 한군데 골동품을 사고 파는 가게에 들렀다. 상점 이름은 예속재라고 하는데 수재 댓 명이같이 경영을 한다고 한다. 다들 한 번 오기로 약속하였는데 이 집에 와서 주고받은 이야기는 속재필담에 싣기로 한다.

 

열하일기2.jpg  

 

2)   장점과 보완점

 

묘사가 매우 뛰어나다. 사진기가 없었던 시절에 매의 눈보다 더 매서운 작가의 눈이 순간을 사진찍듯이 남겨놓았다. 또한 눙치고 해학적인 태도가 있어서 쉽고 즐겁게, 만져지듯, 보여지듯 읽힌다.

 

로드무비 같은 일종의 성장여행기다. 오감과 육감이 활발히 열려 깨어 있다. 길 위에 있는 박지원의 살아있는 레이다에 들어오는 모든 것에 대해 상세히 느끼고 반응하고 있다. 다른 여행기들을 읽었을 때처럼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진다.   

 

번역이 쉽고 아름답다. 아름다운 우리 말로 되어 있다. 근데 낯설어서 뜻을 모르겠는 단어들과 종종 맞부닥쳤다. 북한에서는 통용되는데 남한에서는 두루 쓰이지 않는 말이어서인지, 내 어휘가 부족해서인지. 둘 다겠지.

 

뒷 쪽 부록에 있는 박지원 생애와 여행일정 소개가 도움되었다. 그런데 작품과 생애에 대한 해석은 도움이 덜 되었다. 참고할 만하지 않았다. 중립적인 것을 다루어주었으면 좋겠다. 이건 북한의 학자들이 나름 정치색을 가지고 재해석했기 때문인데 그 해석이 편파적이었다. 보리출판사의 출간의도는 조선민주주의인문공화국 문예출판사의 <조선고전문학선집>을 가능한 한 원문 그대로 낸다는 것이었는데 이것에 대해 남한의 학자들은 어떻게 보는 지 그런 다른 시각의 글을 덧붙여 두었으면 좋았겠다.     

 

 

 

3)   감동적인 장절

 

 

1)     웃음나는 장면이 여럿 있었다. 나는 큭큭큭 웃어댔다. 두꺼운 책에, 고전이라는 정체성에 만나보기 전에 완전 쫄았었다. , 고전이 이렇게 웃길 줄은 몰랐다. 작가 박지원의 연보를 읽다가 18세에 우울증이 발병해서 즐거운 얘기를 읽고서 치유에 도움받았다는 걸 보았다. 16세에 혼인한 가장이 18세에 걸린 우울증을 웃음치료법을 써서 완치했구나, 그래서 웃음의 힘을 알고 있겠구나 생각했다. 그의 글 속에는 천연스레 웃기는 장면이 많았다. 그건 솔직하고 능청스런 해학이었다. 이걸 또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이 안난다. 이런 고전을 더 읽어보고 싶어진다. 판소리?

 

 

75 어느 점방 앞을 지나려니 금글자로 한 면에 자를 쓴 패쪽을 걸어 놓았는데 그 옆에는 다만 군기는 잡지 않는다고 쓰여 있었다. 이곳은 전당포다.

아하하하하 끝내준다. 책상다리 말고는 다 먹는다와 비슷.

 

77 정진사는 말 등 위에 꼬부리고 앉아 방금도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가 꾸벅꾸벅 존 지는 이미 오래였다. 나는 부채로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면서 큰 소리로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듣지 않고 졸다니

하고 나무라니, 정진사는 웃으면서

죄다 들었지요. 아무래도 벽돌은 돌만 못하고, 돌은 잠만 못하군요.”

아하하하하

 

82 여럿은 나를 투전 솜씨가 서툴다 하여 판에서 따돌려 내고 가만히 앉았다가 술만 얻어먹으라고 한다. 속담에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라는 격으로 속으로는 슬며시 좀 꼴렸으나 하는 수 없었다. 앉아서 누가 따는지 구경이나 하다가 술잔은 내가 먼저 들 것이니 해롭지 않은 일이다.

재미있다.

 

82 벽틈으로 가끔 아낙네 말소리가 새어 들리는데 갸날프고 아양스럽고 꾀꼬리 같은 목청에, 나는 물을 나위도 없이 필시는 절대가인이리라 생각하고 짐짓 담뱃물을 붙이러 가는 척하고 부엌에 들어갔다일부러 재를 오래 뒤적거리면서 옆눈으로 흘깃흘깃 그 여자를 보니 머리에는 빈자리 없이 꽃을 꽂았고, 금비녀, 옥귀걸이에 연지까지 엷게 발랐다. 몸에는 검정빛 긴 옷을 걸쳤는데 은단추를 죽 꿰었고, 발에는 화조봉접을 수놓은 신을 신었다. 대체로 만족은 전족을 하지 않고 궁혜를 신지 않는다.

아하하 솔직하다. 일부러 부엌에 나갔대

 

89 나는 와락 놀음판에 뛰어들어 연거푸 다섯 판을 이겨 돈 백여 닢을 따서 술을 사 먹으니 아까 분풀이가 제법 되었다.

연암이 좋아질라 한다.

 

138 웬 노인이 수화자 홑적삼을 입고 대머리에 땋은 머리를 늘인 채 나를 보고는 넌지시 읍을 하면서 수고들 한다고 인사를 하기에 나도 마주 읍을 했다. 늙은이는 내가 신은 진신을 한참 들여다보고는 어떻게 만들었는지 자세히 보고 싶어하는 기색이 있기에 나는 앉은자리에서 선뜻 한 짝을 벗어 보였다.

재미있다.

 

142 마음 놓고 구경하셔도 좋습니다. 설사 누구를 만나더라도 쫒겨날 뿐이겠습죠.

아하하

 

147 달빛이 유달리 밝기에 변계함과 같이 가상루에나 가 보려고 하여 변군이 수역에게 여부를 의논차로 갔더니, 수역은 펄펄 뛰면서 성경은 황성이나 다름없는 곳인데 밤출입이란 당찮은 말씀이라고 하는 바람에 변군은 아주 풀이 탁 죽어 버렸다. 수역은 실상 간밤 일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수역이 이것을 안다면 나도 마저 못 가게 될 것이라 일부러 이를 기이고 나는 혼자 슬며시 숙소를 빠져나오면서 장복에게

혹시나 누가 나를 찾거든 뒷간에 갔다고 대답을 해라

하고 당부를 해 두었다.

박지원은 이런 사람. 좀 재미있다. 전날 저녁에 저녁 먹고 나서 달밤에 가상루에 이르러 여러 사람여러 함께 예속재에 와서 날이 밝도록 놀았거든. 이 양반은.

 

298 이가가 말하는 소위 천기누설이란 말에는 정말 더럽고 아니꼬웠다.

ㅋㅋㅋ 솔직하다.

 

366 나는 정군에게 중간에서부터 시작해서 베끼도록 당부하고 나는 대가리부터 벼껴 나갔다. 심유봉이 선생은 그것을 베껴 무엇 하십니까?” 하기에

고국으로 돌아가면 국내 사람들에게 한 번씩 읽혀 그들로 하여금 배를 틀어쥐고 넘어지도록 웃게 하되, 먹던 밥티가 벌 날 듯 튀고 갓끈이 썩은 새끼처럼 끊어지게 될 것이오.”

하고는 숙소로 돌아와서 등불을 켜고 훑어본즉 정진사가 베낀 몫은 오자 막서가 허다하고 글귀는 문리가 통하지 않는데가 많았으므로 내 뜻을 약간 붙여 한 편의 글이 되었다.

유머러스한 사람. 밥티가 벌 날 듯 튀고 갓끈이 썩는 새끼처럼 끊어지게 되다니.

 

범의 꾸중

368 범이 첫번째 사람을 잡아먹으면 죽은 사람의 혼은 굴각이라는 창귀가 되어 범의 겨드랑 밑에 붙어서 범을 끌어다가 남의 집 부엌으로 들어가 범이 그 집 솥전을 핥으면 그 집 주인은 그만 배가 고파지면서 그 아내에게 밥을 시키게 된다고 한다. 범이 두 번째 사람을 잡아먹으면 죽은 사람의 혼은 이올이란 창귀가 되어 범의 광대뼈 위에 붙어서 높은 데 올라가 망을 보다가 덫이나 함정이 있을 때는 앞질러 가서 덫틀을 풀어 놓아 버린다고 한다. 범이 세번째 사람을 잡아먹으면 죽은 사람의 혼은 육혼이란 창귀가 되어 범의 턱에 붙어 있다가 제가 아는 친구들의 이름을 죄다 주워섬겨 바친다고 한다.

 

인제는 해가 저물었는데 어데 가서 끼니를 치를꼬?”

굴각이 있다가

저는 벌써 저녁 끼니를 점찍어 두었습니다. 뿔난 놈도 아니요, 깃 달린 놈도 아니요, 대가리는 새까만 놈으로 눈 가운데 걸어간 발자국으로 보아서는 조작조작 걸음이 엉성하고 꼬리는 뒤통수에 올려 붙어 항문도 못 가리는 놈입니다.”

하고 이올이는 있다가

동문께에도 먹을 차반이 있는데 이름은 의원이라고 하며 입으로는 가지각색 풀을 뜯어먹어서 살에는 향내가 풍긴답니다. 서문께에도 먹을 차반이 있는데 이름을 무당이라고 합니다. 온갖 잡귀신에게 아양을 떨기 때문에 매일같이 목욕재계를 한답니다.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고기 차반이나 골라 잡수시지요.”

 

369 이번에는 육혼이 있다가 말하였다.

여기야말로 맛좋은 고기가 숲속에 있습니다. 간은 어질고, 열은 의롭고, 충성을 안고, 결백을 품고, 풍류를 머리에 이고, 예절을 행하고, 입으로는 온갖 글을 다 외우고 세상에는 모르는 이치가 없다고 하여 이름인즉 덕이 대단한 선비라고 한답니다. 등판은 두드러지고 몸집은 뚱뚱하여 별의별 맛을 다 갖추고 있소이다.”

이 부분은 아이들이 읽은 그림책으로 읽고 보면 정말 즐겁겠다. 입말로.

 

370 “음양이란 건 원래가 한 가지 기운에서 나오는 것인데 둘로 쪼개 놓았다니 그놈의 고기가 벌써 잡되구나. 오행이란 건 원래 제자리를 잡고 있어 서로 낳고 말고가 없을 터인데 요즘에들 공연히 어미니 새끼를 만들어 놓고, 짜다니 시다니 갈라 놓았다니 이러고야 그 맛이 성할 수 없으렸다. 육기란 것은 원래 절로 돌아가는 것이지 일부러 당기고 말고할 까닭이 있어야지. 요즘에 와서 함부로들. 이런 데 손을 대느니 돕느니 떠들어 제 생광을 쓰려고 드니 이런 놈의 고기를 먹다나면 질기고 여물어서 삭여 낼 서 같잖구나.”

말이 참 기막히다.

 

371 그 고을 동쪽 마을에는 일찍이 혼자된 인물로 잘난 과부가 살았는데 동리자라 했다. 동리자가 수절을 잘 한다지마는 아들 오형제가 모두 각성바지였다.

 

374 네 놈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분주하게 팔뚝을 뽐내고 눈을 부릅뜨고 잡아채고 훔치고 하건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심한 놈은 돈을 형님이라고까지 하고 장수가 되기 위해서는 제 계집조차 죽이는 놈이 있는 데야 삼강오륜을 더 이야기할 나위가 어데 있겠느냐. 어디 그뿐인가. 메뚜기에게서 밥을 가로채고, 누에에게서 옷을 빼앗고 벌 떼를 쫒고는 꿀을 도적질하고, 더 악착한 놈은 개미 새끼로 젓을 담아 제 할애비 제사를 지내는 놈까지 있으니 잔인하고도 악착한 버릇이 네놈들을 덮을 놈이 또 어데 있단 말인가….또 이것을 선악을 두고 따져 본다면 드러내놓고 벌과 개미집을 털어 가는 놈이 천하게 큰 도적놈이 아니고 무엇일까 보냐, 제 마음대로 메뚜기와 누에의 밑천을 훜쳐가는 놈의 의리로 보아 대적이 아니고 무엇일까 보냐.

그러네. 인정, 근데 재미있다. ㅋㅋㅋ

 

384 숙소로 돌아오니 대문 밖에는 장사꾼들이 빽빽이 몰려 있었다. 말이야, 노새야, , 서화, 골동 등을 가지고 온 자도 있었고, 역시 곰 놀리는 자와 그 밖에도 구경거리로 뱀 놀리는 놈, 범 놀리는 놈까지 왔다가 다 파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구경 못한 것이 애석했다.

앵무새를 파는 자가 있었으나 날이 이미 저물어 털빛을 자세히 볼 수 없기에 뒤미처 등불을 찾는 판인데 가 버리고 말아서 더구나 서운했다.

재밌다. 이이의 태도가. 

 

393 정사가 구경꺼리가 있다고 바삐 오라고 불렀다. 부사와 함께 일어나노라니 등 뒤에서 무엇이 땅에 부딪히는 소리가 나기에 돌아다보니 부방 비장 이서구가 넘어져 쳐다보고 웃는다. 배 위에 깐 널이 얼음 못지 않게 미끄러워 발을 붙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부사도 방금 조심조심 부축을 받고 돌아다보고는 조심하라고 말하다 말고 미끈덕하고 양쪽을 붙잡은 채 넘어졌다.

나이든 아저씨들이 장난기가 있네. 귀엽다.

 

394 한족 문으로 나서니 정사와 서장관이 뱃장 널판을 붙잡고 배 밑창을 들여다 보고 있다. 여기는 부엌인데 늙은 여자 둘이 흰 수건을 머리에 쓰고 방금 숙주나물, , 미나리 등속을 새로 냉수에 씻고 있었다. 나이 열여섯쯤 되어 보이는 한 처녀가 섰는데 예쁘기 짝이 없었다. 사람을 보고도 수줍어하는 기가 없이 얌전스레 서서 하던 일을 천연스레 그대로 하고 있었다.

안개 같은 망사 속으로 새하얀 팔뚝이 연뿌리처럼 포동포동해 보였다. 아마도 진씨네 여종으로서 아침밥을 차리는 모양이다.

여기 훔쳐보는 장면이 제법 있다.

 

459 나는 길가의 돌에 두고 맹세해서 만약에 내가 사는 연암 산중으로 돌아가는 날은 꼭 천 일하고도 하루 동안 잠을 자서 희이 선생보다도 하루 더 자면서 천둥같이 코를 골아 영웅의 젓가락을 떨어뜨리도록 하리라고 생각했다.

북경에서 열하로 가는 강행군 속에서 나흘간 잠을 못잤을 때 하는 말. 으하하하하

 

 

2)     묘사가 뛰어나다. 사진기로 찍은 것보다 이 사람이 글로 쓴 게 더 상세하다. 오감이 열려 있다. 그냥 온 몸과 마음을 활짝 열어놓고 그 순간을 찍어듯 경험하고 있듯 하다. 이런 장면이 매우 많았다. 사실주의 작가라 하더니 그 말이 맞다 싶으다.

 

 

54 사신이 이 앞까지 이르자 마두는 하인들에게 소리쳐 가마를 멈추라고 한다. 가마꾼들은 빨리 걸어오던 바람에 제자리에 멈추지 못하고 가마를 부리려는 듯이 주춤주춤하다가 지나쳐 선다. 부사와 서장관이 탄 가마들도 앞 가마꾼의 시늉을 내는 것 같아서 보기에 우스웠다.

눈이 세심하기도 하여라.

 

60 저녁녘이 되면서 날씨가 몹시 더워나기에 빨리 숙소로 돌아와 북창을 훨씬 젖히고 옷을 벗고 누웠다. 뒤뜰은 편편하게 넓은데 파 심은 이랑, 마늘 심은 둔덕들이 다들 곧고 반듯하며 오이, 호박 넝쿨을 올리는 시렁들이 정갈하여 들에 그늘이 자욱하게 덮였다. 울타리 가에는 희고 붉은 촉규화와 옥잠꽃이 한창이고 처마 밖으로 석류나무 두어 분과 수구화 한 분과 가을 해당화 두 분이 놓여 있다. 주인 마누라는 손에 대광주리를 들고 꽃을 따 모아 저녁 화장을 할 모양이다. 창대가 어디서 술 한 병과 볶은 닭알 한 접시를 들고 와서 내게 권하면서

어데를 가셨습니까? 소인은 속이 타서 꼭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하면서 짐짓 응석을 부려 내게 정성을 보이려고 하는 꼴이 한편으로는 밉살스럽고 한편으론 우습다. 허나 술은 내가 즐기는 바요, 닭알까지 가져왔으니 눈을 감을 수 밖에

카메라가 없어도 된다. 장면이 그려진다. 나중에 눙치는 통에 그 매서움이 둥그래진다.

 

83 주렴 속에서 한 처녀가 나오는데 나이는 스무 살쯤 되어 보이고 머리는 가운데를 갈라 틀어놀린 것으로 보아 처녀임을 알겠다. 얼굴은 역시 우악스럽고도 사납게 생겼으나 몸집은 뚱뚱하고 살결은 희다. 그는 쇠주전자를 들고 초록빛 자배기를 기울여 수수밥 한 보시기를 수북하게 담고 물 한 사발을 따라서는 서쪽 바람벽 아래에 있는 의자에 걸터앉아 젓가락으로 끌어먹으면서 두어 자 길이나 되는 잎이 달린 파를 들고 밥과 번갈아 된장에 찍어 먹었다. 목에는 닭알만이나 한 혹이 붙어 있고 밥을 먹고 차를 들이키는 것이 조금도 수줍은 빛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해마다 조선 사람들을 겪고 보니 모두가 심상스럽고 친숙해진 탓이다.

부엌에서 한 처자가 밥먹는 장면 묘사. 밥먹는 모양이 다르다. 중국은 입식이다. 저 닭알만한 혹이 뭘까?

 

132 몽고 사람들은 대개 코가 크고 눈은 깊숙하고 거세고 사납게 생겨 사람 같아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의복이나 쓰개는 남루하고 얼굴은 먼지와 때를 뒤집어썼지마는 그래도 버선은 벗지 않았다. 우리 하인들이 맨발로 걷는 것이 이상하게 보이는 모양이다.

생김새 묘사가 사진보다 정교하다.

 

231 북진묘는 의무려산 앞에 있으니 묘의 배후를 둘러싼 천봉만학은 병풍을 둘러친 것만 같았다. 앞으로는 요동벌을 안았고 오른편으로는 바다를 둘러 끼고 있어 광녕성을 그 무릎 아래 놓고 쓰다듬으면서 있는 격이다. 눈 아래 질펀하게 들어선 집집마다 뿜어 올리는 연기는 파랗게 허공에서 감돌고 멀리 보이는 층층탑 한 쌍은 허옇게 번쩍이고 있었다.

사진보다 선명하다. 만져질 듯 보인다.

 

259 국화차 한 잔에 만두 두 개를 사 먹다가 우연히 역관 조명회를 만나 어떤 술집에 찾아들었다. 마침 그 술집에는 방금 소주를 밭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술집으로 가려고 한즉, 점원이 골이 나서 머리로 조 역관의 앙가슴을 떠받으면서 어데로 움직이지도 못하도록 한다. 조군은 할 수 없이 웃으면서 도로 들어와 앉았다. 돼지고기볶음 한 쟁반, 계란볶음 한 쟁반과 술 두 병을 사서 배불리 먹고 떠났다.

통역하는 사람저런 걸 상세히 기록해놓았다. 심지어 술은 두 병. 신기하다. 저 세부묘사가 

 

308 머리에는 모두 초립을 썼는데 좌우, 칠보, 시괘 등 재주넘는 법이 눈발이 휘날고 나비가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338 , , , 변 제군과 더불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야기들을 하고 가던 차에 갑자기 난데없는 냉수 한 종지가 손등에 덜컥 떨어져 몸이 으쓱했으나 사방을 돌아다보아도 물을 뿌리는 사람은 없었다. 또다시 주먹만 한 물덩이가 창대가 쓴 벙거지 가장자리에 탕하고 떨어졌다. 노참봉의 갓에도 이같이 떨어지기에 고개를 쳐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바로 해 옆에 검정 바둑돌만한 구름장이 나타나고 맷돌 가는 소리같이 우루루 하는 소리가 은은히 들리더니 삽시간에 사방 벌판 끝으로부터 여기저기 작은 구름장이 까마귀 대가리처럼 내밀었다. 구름 빛깔은 독기가 서린 듯 하고 해 곁에 뵈던 구름장은 벌써 해 바퀴를 반 나마 덮더니 한 줄기 흰 불빛이 버드나무 속으로 번뜩 하고 지나가면서 해는 구름 속에 숨고, 구름 속에서 번갈아 나는 소리는 바둑판을 밀치는 듯, 비단필을 찢는 듯, 버들 숲은 침침해지고 잎새마다 번갯불이 번득였다.

일행은 일제히 채찍질을 다그쳐 말을 모는데 등 뒤에서는 천 대만대의 수레가 앞을 다투어 몰려오는 듯, 산은 미쳐나고 들은 뒤엎어져 성난 나무, 취한 수풀하인들은 손발 어지럽게 놀려 비옷을 바쁘게 끄집어 내려고 했으나 전대에 꼭 감겨 빠져 나오지 않고 비 귀신, 바람 귀신, 우레 귀신, 번개 귀신은 가로 세로 달리고 뛰어 지척을 분별할 수 없었다. 말은 다리를 벌벌 떨고 사람들은 기겁을 하여 할 수 없이 말머리들을 모아 빙 둘러들 섰다. 하인들은 모두 대가리를 말갈기 밑에 틀어박고 있는데 번갯불 속으로 보이는 노군은 소름이 돋아 발발 떨면서 기가 눌려 웅크러져 두 눈을 꽉 감고 방금 숨이 넘어가는 사람만 같아 보였다. 이윽고 비바람이 좀 자자 얼굴들을 서로 마주 쳐다보니 제 얼굴빛 가진 사람이 없었다. 

 

362 말꾼이 문 밖으로 나가자 점방 주인은 분이 아직 가라앉지 못해서 비를 맞으면서 뒤를 쫒아 따라나갔다. 말꾼은 돌아서서 욕질을 하면서 가슴팍을 한주먹 내지르니 점방 주인을 흙탕에 가로 나가 넘어진다. 마부가 또다시 한족 다리로 그의 가슴을 질끈 눌러 밟고는 달아나 버린다. 점방 주인은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죽은 사람처럼 누웠다가 한참만에야 일어나 절뚝절뚝 절면서 온 몸뚱이에 싯누렇게 흙칠을 해 가지고 성이 나서 부르터 가지고는 점방 안으로 들어왔다. 눈을 부릅뜨고 나를 노려보면서 입 밖으로 말은 없어도 형세가 장히 좋지 못했다. 나는 짐짓 눈을 아래로 떠 보면서 한결 점잔을 배고 틀을 차려 범접을 못하도록 한 후 이윽고야 화색을 지으면서 점방 주인에게

못된 놈이 무례하고 당돌하게 덤벼서 안됐소. 마음에 끼울 것 없소했더니 점방 주인은 그제야 얼굴빛을 돌리고 웃음을 띠면서

부끄러운 일입니다. 나으리께서도 마음을 놓으시우.” 한다.

싸움 구경하는 이의 조마조마한 마음이 잘 느껴진다.

 

 

3)     일기이므로 날씨, 그 날 움직인 곳, 숙소가 밝혀져 있다. 그 기록이 한 문단은 된다. 매우 상세하다. 필경 기억력이 매우 뛰어나거나 메모를 꼼꼼히 해 두었으리라. 이 여행은 떠나서 돌아올 때까지 5개월 남짓 걸렸다. 그걸 4년에 걸쳐 여행기를 썼다. 이 상세한 메모를 어찌 했을까 상상해본다. 날마다 저녁에 촛불 아래서 먹을 갈아 붓으로 나중에 여행기를 상세하게 적을 수 있을 정도의 정리를 해 두었으리라. 그러니까 여행 반, 글쓰는 시간 반, 주여야서쯤 되는 여행이었으리라. 근데 장거리 놀음판을 구경하고, 술을 사 먹고, 문장을 가면서 참으로 자세히도 보았다. 날마다의 상세한 일정을 볼 때마다 감탄했다.

 

 

131 7 10일 병술일, 비가 내리다가 곧 개었다. 십리하에서 일찌감치 떠나 판교보까지 5, 장성점 5, 사하보 10, 포교와자 5, 전장포 5, 화소교 3, 백탑보 7, 도합 40리를 와서 백탑보에서 점심을 치르고 또다시 백탑보로부터 일소대까지 5, 홍화포 5, 혼하 1, 배로 혼하를 건너 심양에 들기까지 9, 도합 20리로서 이날 모두 합해 60리를 와서 심양에서 묵었다. 이날은 몹시 더웠다.

 

 

4)     신문물에 대해 어느 것 하나 놓치질 않는다. 그걸 우리나라에 가지고 들어와서 살아가는 일에 쓰임이 되고자 고심하는 걸 볼 수 있다.

 

 

57 주위에 차려 놓은 범절을 보면 어느 한 구석이라도 빈틈이 없이 모두가 방정하고 물건 한 개라도 허투루 굴려 놓은 것이 없었다. 비록 소 외양간, 돼지우리까지라도 되는 대로가 아니라 일정한 법식이 있으며 심지어 거름더미 똥구뎅이까지도 그림같이 정갈했다. 옳다. 이렇게 한 후에야 이용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요, 이용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후생이 될 것이요. 후생이 있은 후에야 그 질서를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물건을 이롭게 쓸 줄 모르고 그 생활을 넉넉하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물건을 이롭게 쓸 줄 몰라 생활 자료가 근본 부족하면서 억지로 잘 살겠다고만 한다면 어떻게 그 도덕과 질서를 바로잡을 것인가?

문화충격을 받는 와중에도 이용후생을 생각하고 있다!

 

68 그렇고 보니 무릇 집을 짓는 데는 벽돌을 쓰는 것이 얼마나 득이 되는 지 모른다. 비단 담벽을 쌓는 데 쓸 뿐만 아니라 방 안이나 방 밖이나 벽돌을 깔지 않은 데가 없다.

신문물!

 

87 가마는 길기만 하고 높지는 않으므로 불꽃이 타오르들 못하고, 불꽃이 타오를 수 없고 보니 불기운이 없고, 불기운이 없고 보니 반드시 소나무 장작을 때 불길을 세게 해야만 되고, 소나무 장작을 때 불길을 세게 하고 보니 불길이 고르지 못하고, 불길이 고르지 못하고 보니 불에 가까운 기왓장은 깨지고, 불에서 먼 놈은 잘 구워지지 않을 염려가 크다. 사기나 옹기나 할 것 없이 무릇 옹기점의 가마란 죄다 이런 따위다.

중국 가마를 보고 우리나라 가마를 반성하고 있다.

 

102 캉이 방보다 못하다는 것은 옳네. 다만 구들 놓는 법만 본떠서 이것을 방에다 적용하고 장판을 깐들 누가 말릴 것인가? 대체 우리나라 구들 놓는 법에 여섯 가지 탈이 있는데 아무도 말하는 사람이 없네. 내가 이야기해줄 터이니 자네는 떠들지 말고 잠자코 듣게나.

흙을 이겨서 쌓아 구들 골을 내고 돌을 걸쳐 얹어 온돌을 만드니 돌이란 크고 작고 두텁고 엷어서 본디가 고르지 못한 것이라 반드시 조약돌을 겹쳐 네 모서리를 괴어 놀지 않도록 하고 보니 돌은 달고 흙은 말라 언제나 짜그라져 퉁겨나니 이것이 첫째 탈이요, 구들장 거죽이 움푹움푹 들어간 데를 흙으로 두텁게 매우고 새벽질을 판판하게 고르고 보니 불을 때도 골구루 덥지 못한 것이 둘째 탈이요, 고래가 높고도 넓어 불길이 미처 닿질 않으니 이것이 셋째 탈이요, 바람벽이 엷고도 넓어 불길이 미처 닿질 않으니 이것이 셋째 탈이요, 바람벽이 엷고도 성글어 언제나 틈서리로 바람이 새들면 불길은 거꾸로 새 나오고 연기는 방안에 꽉 차서 욕을 보니 불길은 멀리 넘나들지를 못하고 나무 위에서 맴돌이를 하고 보니 이것이 다섯째 탈이요, 구들을 말리는 데는 아무래도 나무 백단은 들 것이요, 열흘 안에는 거접하기 어려울 것이니 이것이 여섯째 탈이거든. 자 어떤가? 자네와 함께 별돌 수십장을 깔았고, 웃고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벌써 온돌 몇 칸을 놓고 그 위에 누운 셈이로구만.

 

228 나는 원래 삼류인사다. 내가 본 장관을 말하리라. 깨진 기와 조각이 장관이요, 냄새나는 똥거름이 장관이더라. ?

 

229 냇가에서 동글고 반들반들한 조약돌을 주워다가 얼기설기 서로 마추어 꽃 무늬, 나무 무늬, 새 무늬, 짐승 무늬를 놓아 가면서 깔아놓아 비가 와도 땅이 질 걱정이 없이 만든다. 한 번 자갈과 조약돌을 내버리지 않으니 천하의 명화는 다 여기 있지 않은가? 똥오줌이란 세상에서도 가장 더러운 물건이다. 그러나 이것이 거름으로 쓰일 때는 금싸락같이도 아끼게 된다. 길에는 버린 재가 없고 말뚱을 줍는 자는 오쟁이를 둘러메고 말꼬리를 따라다니고 있다.

거름으로 쓰이는 것이 핵심. 제 자리에 있음

 

227 오랑캐로 부르는 오늘의 청조는 무어이든지 중국의 이익이 될 만하고 그것으로써 오래 누릴 수 잇는 일인 줄 알기만 할 때는 억지로 빼앗아 와서라도 이를 지켜냈고, 만약 본래부터 있던 좋은 제도가 백성에게 이롭고 국가에 유용할 때는 비록 그 법이 오랑캐로부터 나왔다손 치더라도 주저없이 그것을 그대로 이용하고 있다. 더구나 삼대 이래 현명한 제왕들의 법도와 역대 국가들이 가졌던 고유한 원칙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고운기 삼국유사에서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 오랑캐라 했던 민족의 중국 지배는 한족 중심의 역사관에서 벗어나는 패러다임 전환을 가져왔다고.

 

228 지금 사람들이 참으로 오랑캐를 배척하려거든 중국의 발달된 법제를 알뜰하게 배울 것이요, 자기 나라의 무딘 습속을 바꿔 밭 갈고 누에 치고 질그릇 굽고 쇠 녹이는 야장이 일을 비롯하여 공업을 고루 보급하고 장사의 혜택을 넓게 하는데 이르기까지 모두가 배우지 않을 것이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열 가지를 배울 때에 이녁은 백 가지를 배워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나라 백성들에게 이익을 주어야만 할 것이다.

 

 

5)     여행 떠나고 싶도록 선동당할 때 좋았다. 책 뒤의 연보를 읽어보니 박지원은 여행을 많이 했다. 29세 때 금강산을 유람하고 총석정 해돋이등을 썼고, 35세 때는 이덕무, 백동수 들과 송도, 평양을 거쳐 천마산, 묘향산, 속리산, 가야산, 단양 등 명승지를 두루 유람했다.  황해도 금천 연암골을 보고는 몹시 좋아했고 한다. 형수를 장사지낸 연암골은 그가 두루 다니다 마음에 쏙 든 장소였나 보다.  44세에는 북경에서 열하를 여행했다. 그가 오십 줄 넘어 아내가 죽은 후 홀아비 관리로 근무했던 안의, 양양, 면천군은 어디일까? 서울이 아니니 타지였을 거다. 그는 여행하는 셈 치며 살지 않았을까? 여행을 좋아하는 이들이 쓴 여행으로 펄펄 살아나는 듯한 글을 읽으면 나 같은 후천적떠남또는이륙결핍증 방안퉁수도 어딜 쏘다니고 싶어진다. 하다못해 이마트 가서 필리핀 원산 파인애플 통조림 하나라도 사들고 들어오고 싶어진다. 그런 느낌 대 환영이다. 

 

 

105 형님은 심양이 어떻더냐?” 하고 물으셨다. 나는 본 것이 들었던 것보다 훨씬 낫더라고 공손히 대답하면서 무진 아름다움을 자랑했다.

백문이불여일견, 백문이불여일행 (7 9일 임오날 일기 중)

 

109 말을 멈추고 사방을 휘둘러보다가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이마에 대고 말했다.

한바탕 울만한 자리로구나.”

정 진사가

천지간에 이런 넓은 시야가 펼쳐지는데 별안간 새삼스레 울 생각을 하다니요?”

110 사람들은 다만 안다는 것이 칠정 가운데 슬픈 감정만이 울음을 자아내는 줄만 알았지. 칠정이 모두 울음을 자아내는 줄을 모르고 있따네. 까지껏 기쁘면 울 수 있고, 까지껏 골이 나면 울 수 있고, 까지껏 즐거우면 울 수 있고, 까지껏 사랑하면 울 수 있고, 까지껏 미우면 울 수 있고, 까지껏 하고 싶으면 울 수 있으니 맺힌 감정을 한 번 활짝 푸는 데는 소리쳐 우는 것처럼 더 빠른 방법이 없다네.

울음이란 천지간에 있어서 뇌성에 비할 수도 있는 것일세. 북받쳐 나오는 감정은 언제나 이치에 맞아 발작하는 것이니 웃음만 하더라도 그러한 감정의 발로라네. 사람들의 보통 감정은 이러한 지극한 감정을 겪어 보지 못하고 보니 공연히 까다롭게 칠정으로 나누어 슬픈 감정에다가 울음을 짜맞추어 둔 것이네. 이러므로 사람이 죽어 초상이 나면 즉시 억지로라도 아이고하고 부르짓는 것이지. 

요동벌을 보면서 나누는 대화다. 나도 한바탕 울만한 자리로구나감탄이 절로 나오는 저런 장면에 서고 싶다.

 

49 전일 내 친구 홍덕보에게 중국문물의 규모와 수법들을 들은 적도 있었지마는 오늘로 보아 책문은 중국의 맨 동쪽 끝 벽지인데도 오히려 이만하거든, 앞으로 구경할 것을 생각하니 문득 기가 꺾여 그만 여기서 발길을 돌리고 싶은 생각이 치밀면서 전신에 불을 끼얹은 것 같이 후끈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크게 반성을 하면서 혼잣말로 이것은 질투심이구나했다. 내 본성이 담박하여 일찍이 부럽다든가 질투가 시기가 없었는데, 한 번 국경을 넘어 타국의 경내에 발을 들여놓았을 뿐 아직 그 만분의 일도 못 본 내가 벌써 이런 그릇된 생각을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는 아직 본 것이 적은 탓일 것이다. 이른바 시방 세계를 둘러본다는 석가여래의 밝은 눈으로 본다면 세계는 모두 평등이라고 한다.

출발 후 두려워하고 있다. 자신의 좁은 세계가 깨어질 것이므로. 아 나도 두려워해도 되는구나. 이런 경험 하고 싶다. 떠나고 싶어지네.

 

 

6)     출판사의 머리말. 북한의 학자와 출판업 동종업 종사자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통일을 준비하는 마음이 느껴져 뭉클했다. 남한과 북한은 어떤 식의 미래를 그리게 될까 생각해보게 된다. 박지원이 중국을 여행하고 열하일기를 쓰던 때는 남한과 북한의 구분이 없던 때였다. 중국과의 관계에서 우리나라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뭣도 모르지만 이 감동에 묻어 가며 2초간 생각해본다.

 

4 예로부터 우리 겨레가 즐겨온 노래와 시, 일기, 문집 들은 지난 삶의 알맹이들이 잘 갈무리된 보물단지입니다. 그 동안 남과 북 양쪽에서 고전 문학을 되살리려고 줄곧 애써 왔으나, 이제껏 북녘 성과들은 남녘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웠습니다.

북녘에서는 오랠 전부터 우리 고전에 깊은 관심과 사랑을 보여왔고 연구와 출판도 활발히 해오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조선고전문학선집>은 북녘이 이루어놓은 학문 연구와 출판의 큰 성과입니다. <조선고전문학선집>은 가요, 가사, 한시, 패설, 소설, 기행문, 민간극, 개인 문집 들을 100권으로 묶어내어 고전을 연구하는 사람들과 일반 대중 모두 보게 한, 뜻 깊은 책들입니다. 한문으로 된 원문을 현대문으로 옮기거나 옛 글을 오늘의 것으로 바꾼 성과도 놀랍고 작품을 고른 눈도 참 좋습니다.

 

5 이 선집이 겨레가 하나되는 밑거름이 되고, 우리 후손들이 민족 문화유산의 알맹이인 고전 문학이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을 제대로 맛보고 이어받는 징검다리가 되기 바랍니다. 아울러 남과 북의 학자들이 자유롭게 오고 가면서 남북 학문 공동체가 이루어지는 날이 하루라도 앞당겨지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빌려, 어려운 처지에서도 이 선집을 펴내 왔고 지금도 그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북녘의 학자와 출판 관계자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 뭉클해. 눈물나. 이 시리즈를 기획한 이들에게 이런 뜻이 있었구나.

 

 

7)     열하여행이 우연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부분. 여행은 달리기와 함께 삶에 대한 은유인 듯 하다.   

 

 

426 “대가리는 떨어진 대가리다

사연을 물을 수도 없고 이자들의 노는 거조가 흉패스럽기 짝이 없었다. 사정인즉, 황제는 매일같이 조선 사신이 올 것을 기다리다가 급기야 사신이 왔다는 보고를 받기는 했으나, 예부가 조선 사신이 황제의 행재소까지 가야 할 지 여부를 물어 아뢰지 않고 다만 표자만 올리고 말아 그 직책을 다하지 못한 죄책으로써 모두 녹봉을 감소시켰다. 상서 이하 북경 예부 관리들은 겁이 나서 어쩔 줄 모르고는 대뜸 한다는 짓이 사신 일행을 독촉하여 따르는 권솔을 간단히 추려서 열하로 빨리 가도록 성화를 대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뜻 밖의 변수가 생긴다. 그래서 인생이 다른 길로 흐른다. 물길이 구불구불 흘러갔다고는 하지만 물은 장애물 앞에서 흐름을 멈추지 않는다. 터닝포인트를 만드는 법을 물에서 배워라, 웅덩이를 채우면서 흘러가고 자기를 막는 장애물과 싸우지 말라 하셨지. 삶의 원칙을 지키면서 가라고도 하셨다. 삶의 원칙 이런 부분이 내게는 이순신장군의 활열순을 내 생활에서 매일 쏘는 거라고 생각한다. 11월 오프수업을 마친 후 며칠, 그리고 인사를 다녀온 후 며칠 나는 탈진상태였다. 뜻밖의 변수를 만났기 때문이다. 내가 연구원에 오게 했던 <천일간의 자기사랑>은 선배님들의 피드백을 받으면서 젖히고, <마흔살 여자의 발로 책읽기>가 그나마 출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부모님은 문제제기를 강하게 하신다. 변수가 생겨서 삶이 재미있어진다기 보담 변수가 생기는게 인생이겠지. 일단 책읽기에 대한 책을 먼저 쓰자. 그건 문헌연구다. 그리고 나의 신화에 대한 책도 버리지 않겠다. 이걸 사부님이 권하신 이유가 있으리라. 지금 출발하자. 중간에 멈추지 않고 계속 걷는다면, 물방울이 바위를 뚫듯이 정진한다면 3년이고 5년이고 10년이고 후에는 열매가 맺어지겠지. 눈 오는 날 달마대사에게 찾아온 이가 혜가라했던가? ‘네 마음을 내 놓아보거라. 그럼 내가 편안하게 해 줄께법륜스님은 그 제자가 스승에게 다시 찾아와 찾아보니 없습니다.’라고 대답한 잠시후 1시간인지, 1년인지, 10년인지, 평생인지 알 수 없다 하셨지. 신화에 대한 것은 이런 종류의 참구꺼리, 일종의 방향을 제시하는 화두다. 그리고 <천일간의 자기사랑>은 출간을 목표로 하지 말고 3년 전에 맘 먹은 대로 결혼식 전에 초고를 쓰자. 그걸 내가 혼수로 드리겠다 했으니까 드리면 되는 거지. 그건 사적인 게 맞다. 나를 위한 것이지. 선배님들이 여러 질문을 던져주셨다. (책에서는 컨셉이 가장 중요하다. 책의 씨앗이다. 천일 간 한 것 중에서 니가 가장 재미있고 잘 할 수 있는게 게 뭐냐? 그 책을 안 읽은 이들, 아무런 배경지식이 없는 이들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망라주의는 안된다. 각론으로 가자) 금방 답하거나 적용할 수 있는게 아니라 나의 연구가 필요하다. 부모님의 건강 염려 덕분에 진짜로 풀코스 마라톤 완주메달과 금연 예물이 가능해지리라. 건강검진서를 바탕으로 한 건강상담 역시도. 맘 먹은 것을 가능케 하는 동력이 되리라.        

 

426 나를 보고는 기어코 같이 동행을 해야 한다고 하지마는, 첫째로 먼 길에 와서 안장을 푼 지도 얼마 안되고 보니 피로가 회복되지 못했고, 둘째로 만약에 열하에서 곧장 조선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이 있다면 북경 유람은 적실코 낭패를 볼 터이다. 황제는 전에 비하면 해마다 더 조선 사신을 아껴 생각하여 매양 상례를 벗어나게 빨리 돌아가도록 특별한 은혜를 베풀고 본즉 곧장 돌려보낼 염려가 십중팔구다. 정사가 나를 보고

너의 이번 참 연경 만 리 걸음은 유람 때문이 아닌가? 열하는 전에 왔던 사람들이 아직 누구도 구경을 못한 곳으로 만약에 고국으로 돌아가 누구나 열하를 물을 때는 무어라고 대답할 것인가? 황성은 많은 사람들이 본 데지마는 이번 걸음으로 말한다면 다시 없는 좋은 기회로구나, 꼭 가야한다.”

하며 권했다. 필경 나는 가기로 작정하였다.

정사로부터 시작하여 죽 직위와 성명을 기록한 명단을 만들어 예부로 먼저 보내는 한편 역마편으로 황제에게도 아뢰었다. 나의 성명은 명단에 넣지 않았으니 혹시 황제로부터 별다른 상급이나 있을까 하여 이를 피한 까닭이다.

이윽고 사람과 말들을 점검하니 사람들은 모두 발들이 부르트고 말들도 모두 다리들을 절어 정말 대어 낼 가망이 없어 보였다. 일행에게 마두들은 죄다 뽑아 치우고 다만 견마잡이 한 명씩만 데리고 가게 되어 나 역시 부득이 장복이는 떨어뜨려 두고 창대만 같이 가기로 했다.  

어떤 이유로 그 사신일행으로 갔던 이들보다 박지원은 많은 걸 남겼다. 열하일기 3.

 

64 깊이 간직한 것은 빈 것 같이 보인다.

깊은 강물은 조용히 흐른다는 것과 비슷한 말인듯

 

104 꼴이 괴이쩍어 까닭을 물었더니 빈손으로 물에 들어가면 몸이 가벼워 혹시 물에 떠내려가기가 쉬우므로 일부러 무거운 것으로 잔뜩 어깨를 눌러 놓아야 된다고 한다.

짐의 효용이네 

 

 

 

 

 3.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첨부합니다.    열하일기 - 인용문[1].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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