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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13일 11시 54분 등록
 

열하일기 (상)

박지원지음/ 리상호 번역/보리출판사


저자에 대해서


박지원-조선후기 비판적 신지식인, 북학의 선구자

박지원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당시 허위의식에 빠진 세태를 비판하였다. 그는 또한 당시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배우고 실천하려고 하였던 북학의 선두 주자였다.

 박지원의 청장년 시절은 그리 유쾌한 시간만은 아니었다. 서울 반송방 야동(지금의 중구 순화동과 의주로 2가 일대)에서 태어나 삼청동 백련봉 아래 이장오라는 인물의 별장에서 세들어 살았고 얼마 뒤에는 백탑 인근으로 이사하였다가 다시 백탑 서쪽 전의감동으로 옮기며 생활해야만 하였다. 그가 20~30대에 [양반전]이나 [예덕선생전]과 같은 세태를 비판하는 작품을 집필하게 된 것도 이런 생활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당시 탑골을 무대로 활동하던 이서구나 이덕무, 유득공 등을 만나 교류한 것이 기쁨이라고 할 수는 있겠다.

대대로 서울에서 살던 명문가의 후예로 태어난 박지원이었지만, 그 당대에는 별로 여유로운 삶은 아니었던 듯하다. 한때 생원진사시에서 장원을 하며 촉망받던 재원이었던 박지원은 끝내 과거를 포기하고 1771년(영조 47) 황해도 금천의 골짜기인 연암골을 찾고는 그로부터 몇 년 뒤에 가족들과 함께 이곳에 정착하였다. 박지원의 호는 여기서 유래하였다. 이같은 박지원의 청장년 시절의 삶은 선조들의 청렴한 삶과 유람을 즐기는 그의 생활관에서 연유한 것이지만, 그밖에도 당시 실력자 홍국영과의 불화도 한 몫을 하였다.

박지원이 연암골에 정착하기 직전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유언호는 “자네는 어쩌자고 홍국영의 비위를 거슬렸나. 자네에게 심히 독을 품고 있으니 무슨 화가 미칠지 모르겠네. 그 자가 자네를 해치려 틈을 엿본지 오래지만 자네가 조정의 벼슬아치가 아니라고 늦추어 온 것 뿐이라네. 이제 복수의 대상이 다 제거되었으니 다음 차례는 자네일 걸세. 자네 이야기만 나오면 그 눈초리가 심히 험악해지니 필시 화를 면하기는 어려울 걸세. 이 일을 어쩌면 좋겠나? 될 수 있는 한 빨리 서울을 떠나게나”(이종묵, [조선의 문화공간]에서 재인용)라고 권하였다는 것이다. 유언호 이외에도 정조의 역작인 [무예도보통지] 편찬 실무를 주관하였던 친구 백동수도 이처럼 권하였다. 사실 당시까지도 이렇다할 정치적 활동이 없었던 박지원이었기에 홍국영과 직접적인 마찰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정조 즉위 초 홍국영을 중심으로 정조의 적대세력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1776년(정조 즉위년) 11월 기장현에 유배된 심종질인 박종악의 활동을 통해서 유추해 볼 수 있겠다. 이때 박종악이 유배된 것은 정조와 홍국영에 의해 1차 제거 대상이었던 홍인한․정후겸과 밀착되었다는 이유였다. 이를 통해서 유추해본다면 박지원 가문이 이들과 밀착된 것이 아마도 홍국영과의 관계를 껄끄럽게 했던 요인이 아닐까 한다.


‘북벌’에서 ‘북학’으로, 열하일기의 집필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두 차례를 경험한 조선에서는 북벌론이 팽배하였다. 후금, 후일의 청나라 황제에게 조선을 대표하던 국왕 인조의 굴욕적인 항복은 조선의 사림들에게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항복 후 형식적으로는 사대 외교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군비를 증감함과 동시에 이른바 ‘소중화’론을 내세우며 문화적 우월성을 강조하면서 청에 대한 북벌을 준비하였다. 북벌은 한동안 조선의 정치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18세기 중반을 넘기면서 서서히 북벌의 이념은 점차 퇴색해가고 그 자리에 북학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는 당장이라도 멸망할 것 같은 청나라가 멸망은커녕 오히려 중국의 주인으로 굳건하게 자리잡은 뒤 정치적 안정뿐 아니라 문화적 발전을 이룩해가는 상황과도 관련되었다. 이제 청나라는 정벌해야 할 대상에서 배움의 대상으로 변화한 것이었다.

같은 해 6월 압록강을 건넌 뒤 북경을 거쳐 열하, 그리고 다시 북경을 거쳐 10월말 서울로 돌아오기까지 약 5개월여의 기간 동안 박지원은 신세계를 경험하게 되었다. 열하는 건륭황제가 별궁을 건설하면서 북경에 버금가는 청나라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박지원은 사행 기간 동안 청국의 학자를 비롯해 몽골과 티베트 사람까지 접하면서 그들의 학문과 문화를 접하며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돌아와서 몇 년의 작업 끝에 그동안 오랑캐로만 치부하였던 청나라의 경제적, 문화적 발전상을 소개하며 북학론을 개진한 역작 [열하일기]를 발표하였다. [열하일기]는 내용에서뿐 아니라 그 문체에서도 당시로써는 파격적이면서 직접적이고, 해학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체반정의 대상이 되다

<열하일기>를 발표하면서 주가를 올리던 박지원은 이어 친구인 유언호의 추천으로 선공감 감역에 제수되면서 벼슬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평시서 주부와 사복시 주부, 의금부 도사, 사헌부 감찰, 한성부 판관 등을 거쳐 1791년(정조 15) 경상도 안의현감에 제수되었다. 안의현감에 재직하던 1792년 뜻밖의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다름 아닌 규장각 직각 남공철의 서신이었다. 이때 남공철이 편지를 보낸 것은 국왕 정조의 명에 따른 것으로,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문체가 바르지 못하니 이를 반성하라는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는 중앙의 조정에서 국왕 정조에 의해 문체반정(文體反正)이 추진되던 시기였다. 문체반정이란 당대 과거시험지를 비롯해 지식인들의 일부 저술에 보이는 문체가 잘못되었다고 하여 그 문체를 단속해 기강을 바로잡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바로 문체반정의 주 표적이 되었다. 이와 관련해서 후일 김택영(1850∼1927)이 찬술한 [박연암선생전]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실려 있다.


<열하일기>가 발표되자 이를 얻어 본 국왕 정조는 1792년(정조 16) 남공철을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근래 신기한 것만을 따르는 문체의 주범은 박지원의 [열하일기]라고 하면서 남공철로 하여금 편지를 보내도록 해서, 속히 문체의 잘못을 인정하고 순정하게 수정한다면 관직 제수도 마다하지 않겠으나 그렇지 않으면 중죄로 다스릴 것이라고 전하도록 한 것이었다. 남공철의 편지를 받은 박지원은 자신의 문체가 잘못되었다는 속죄의 편지를 보냈으며, 이를 받아 본 정조는 그의 문재(文才)를 칭찬하며 더 이상은 문제 삼지 않겠다고 하였다.


현장에서 실현된 북학 정신

  한때 정조의 문체반정 대상이기도 하였던 박지원은 그가 평소 저술에서 강조하였던 북학의 정신을 직접 현장에서 구현하는데 주력하였다. 안의현감으로 재직하던 당시 고을 내 노인들을 초청해 잔치를 베풀어 효의식을 고양시키고, 옥사를 관대하게 처리하였으며, 백성들의 구휼에도 주력하였다. 그는 뿐만 아니라 각종의 수차나 베틀, 물레방아 등을 제작하여 사용하게 하였고, 하풍죽로당이나 연상각, 공작관 등의 중국식 건물을 지었다. 중국 사행길에서 보고 들었으며, 자신이 [열하일기]에 기록한 중국의 실용적인 문명을 실천하는 과정이었다.

  1796년 안의현감에서 물러나 군직(軍職)을 받고 상경한 박지원은 이후 계산동(오늘날의 종로구 계동 일대)에서 생활하던 중 역시 벽돌로 총계서숙을 지었다. 그리고 다시 제용감 주부와 의금부 도사, 의령 령 등을 거쳐 1797년 면천군수에 제수되었다. 면천군수에 재직하던 1799년에는 농서를 구하는 교지에 응하여 농서인 [과농소초]를 지어 올렸다. [과농소초]는 그가 금천의 연암골에서 생활하던 당시 경험에 바탕한 농서로써, 여기에 그가 후일에 찬술한 [한민명전의]를 첨부하여 올린 농서였다. [과농소초]에서 박지원은 중국 농법의 도입 및 재래 농사 기술의 개량을 주장하였을 뿐 아니라, 첨부한 [한민명전의]에서는 토지 소유를 제한하는 한전론(限田論)을 제안해, 심각한 토지 소유의 불균형을 해소하려고 하였다. 박지원은 결국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당시 허위의식에 빠진 세태를 비판하면서, 당시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배우고 실천하려고 하였던 북학의 선두 주자였다고 하겠다.

마지막으로 박지원이 후배 박제가의 [북학의]에 대해서 지은 서문을 인용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여기서 그는 당시 조선 내 지식인들의 허위의식을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우리를 저들과 비교해 본다면 진실로 한 치의 나은 점도 없다. 그럼에도 단지 머리를 깎지 않고 상투를 튼 것만 가지고 스스로 천하에 제일이라고 하면서 ‘지금의 중국은 옛날의 중국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 산천은 비린내 노린내 천지라 나무라고, 그 인민은 개나 양이라고 욕을 하고, 그 언어는 오랑캐 말이라고 모함하면서, 중국 고유의 훌륭한 법과 아름다운 제도마저 배척해 버리고 만다. 그렇다면 장차 어디에서 본받아 행하겠는가. …(중략)…남들은 물론 믿지를 않을 것이고 믿지 못하면 당연히 우리에게 화를 낼 것이다. 화를 내는 성품은 편벽된 기운을 타고난 데서 말미암은 것이요, 그 말을 믿지 못하는 원인은 중국의 산천을 비린내 노린내 난다고 나무란 데 있다.”(박지원, [연암집] ‘북학의서’에서)

작성(이근호 / 국민대 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  -네이버 캐스트에서 발췌-


열하일기가 씌진 계기

홍대용 등으로부터 시작된 북학 논의는 박지원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작품이 [열하일기]였다. 여러 가지 이유로 금천의 연암골에서 은둔 생활을 하던 박지원은1780년(정조 4) 서울로 돌아왔다. 직접적인 계기는 아마도 그 동안 불화를 겪었던 홍국영의 정치적인 몰락이 아닐까 한다.

서울로 돌아와 생활하던 중 박지원은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였다. 같은 해 5월 삼종형 박명원이 고희를 맞은 청나라 건륭황제의 탄신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되는 진하 겸 사은사의 정사로 사행길에 올랐다. 이때 박지원은 박명원의 권유를 받고는 그의 개인 수행원 자격으로 사행길에 동행하였다.


***연암박지원은 우렁찬 목소리를 가진 훤칠한 미남으로 술을 아무리 마셔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고 논쟁이 붙으면 사흘 밤낮을 쉬지 않는 등 카리스마가 가득한 인물이었다.

연암은 스스로를 ‘조선의 삼류선비’라 칭했다. “술 권하는 과거(科擧)의 나라, 이 조선에서 태어난 나는 열일고여덟부터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렸다. … 서른넷에 과거를 포기하는 대신, 술과 벗, 글쓰기와 제자들을 얻었다. 내 병든 삶을 치유해준 소중한 만남들이다.”


내 가슴을 무찔러 드는 문장들


**** “너희들이 술을 몇 잔씩이나 먹느냐?”

하고 물으니 이자들은 술은 입에 대지도 못한다고 했다. 나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에기! 쫄보 녀석들, 술을 못 먹다니.”

하고는 한편으로 생각하니 이것도 먼길을 떠나는데 미상불 위로가 될 것같아 시름없이 술 한 잔을 들었다.(25P)

☆☆☆연암은 거대한 몸집에 매의 눈초리를 가진 사람이다. 그는 수십 보 떨어진 담장 밖에까지 들릴 정도로 크고 우렁찬 목소리를 가졌다고 한다. 말술을 마시고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으며 일단 논쟁이 붙으면 사흘밤낮을 쉬지 않았다는 다혈질의 기질의 사람이었다. 박지원의 초상화를 보면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박지원의 초상화는 손자인 박주수가 그렸다.


***‘자내 도를 아는가?“

하니 홍군은 얼떨떨하여

“그 무슨 말씀인지요?”

하기에 나는 말했다.

“도를 안다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세. 도는 저 강시울에 있느니.”

“세상 인심(人心)은 갈수록 간드러지고 도심(道心)은 갈수록 메말라든다고 햇네. 서양 사람들은 기하학에서 한 획의 선을 변증할 때도 선이라고만 해서는 그 정미한 점을 표현할  엇다하여 빛이 있고 없는 짬으로 표현하였고 불교에서 말하는 ‘붙지도 떨어지지도 않으므로 그 짬에 잘 처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짬’으로써 이는 도를 아는 자라야 할 수 있는 노릇이니 이런 사람은 정나라 자산같은 이를 들 수 있을 것이네.”(31P)


***높은 둔덕 위에 혼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니 산수가 맑고 무연히 열린 벌판에 하늘가를 맞물고 늘어서 수림 틈 사이로 은은히 마을들이 보인다. 개소리, 닭소리가 금세라도 들려오는 것만 같고 당은 갈아제침 직하게 기름졌다. (35P)


***봉황산을 바라다보니 순 돌을 땅속에서부터 뽑아내어 일으켜 세운 것처럼 우뚝 솟았다. 그 모양이 손가락을 세운 것 같기도 하고, 반즘 핀 부용꽃 봉오리 같기도 하고, 여름 하늘 흰구름을 뽑아내고 깎아내고 도끼로 쪼개 좋은 것 같기도 하여 이루 형용해 말할 수 없었다. 다만 흠절이 있다면 맑고 기름진 맛이 없을 뿐이다. (44P)

☆☆☆박지원의 묘사력은 뛰어나다. 그 표현의 현대의 글과도 뒤처지 않을 만큼 감각적이다.

***한강 상류에서 배를 타고 두만강 어귀로 내려 서쪽으로 바라보면 한양의 삼각산 봉우리들이 하늘에 닿을 듯 푸르게 솟은 위에 영롱한 이내와 맑은 아지랑이가 자욱이 서리면서도 어데고 상긋거리고 한들거리는 듯한 풍치는 삼각산이 아니고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또 나는 일찍이 남한산성 남문에 올라가 북으로 한양을 바라볼 때에 물에 비친 꽃그림자 같기도 하고, 거울에 비친 달그림자 같기도 하여 더러는 이것을 공중에 뜬 밝은기운 이라고도 한다. (45P)


***이엉으로 집을 이었으나 용마루가 높이 솟고 문호들이 번듯하며 거리는 곧고 판판하여 양측은 먹줄을 친 듯하다. 담장은 모두 벽돌로 쌓았고 거리에는 사람 타는 수레, 짐 실은 수레가 왔다갓다 한다. 벌여 둔 기명들은 모두 그림 놓은 꽃사기들로서 일반 풍물이 아닌 하나도 시골티가 없어 보인다.(49P)


***나는 여기서 크게 반성을 하면서 혼잣말로 ‘이것은 질투심이구나’했다. 내 본성이 담박하여 일찍이 부럽다든가 질투나 시기가 없었는데 한 번 국경을 넘어 타국의 경내에 발을 들여놓았을 뿐, 아직 그 만분의 일도 못 본 내가 벌써 이런 그릇된 생각을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아직 본 것이 적은 탓일 것이다. 소위 시방 세계를 둘러본다는 석가여래의 밝은 눈으로 본다면 세계는 무비 평등이라고 한다. 만사가 평등이면 질투도 없을 것이 아닌가? (50P)


***봉황성을 한 30리 못 와서 옷이 모두 축축하게 젖고  길 걷는 사람들의 수염에는 벼 잎에 달린 이슬인 양 구슬을 꿰어 놓은 듯이 방울이 맺혔다. 서쪽 하늘가에서 무거운 안개가 뚫리면서 새파란 조각 하늘에 영롱한 빛을 드러내는 것이 흡사 작은 유리쪽을 붙인 창구멍처럼 터졌다. 이윽고 안개 기운은 맑은 구름으로 변하여 장엄한 광경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동쪽으로 머리를 돌리니 벌써 붉은 햇발은 서 발 나마 솟았다. (61~62P)


***높이 간직한 것은 빈 것 같아 보인다. (64P)

***옆 눈으로 홀깃홀깃 그 여자를 보니 머리에는 빈자리 없이 꽃을 꽂았고, 옥귀걸이에 연지까지 엷게 발랐다. 몸에는 검정빛 긴 옷을 걸쳣는데 은단추를 죽 꿰었고 발에는 화초봉접을 수놓은 신을 신었다. 대체로 만족여자는 전족을 하지 않고 궁혜를 신지 않는다. (83P)


***마당은 넓이가 수백간이나 되고 장마에 아주 진탕이 되엇다. 본시는 아무런 소용도 없어보이는 강가에 매끈매끈한 조약돌로서 바둑돌만큼씩 한 노란 새알빛 자갈을 생김새와 빛깔이 같은 놈을 골라 모아 문 앞에다가 봉황 무늬를 놓아 깔아서 비가 와도 질벅거리지 않게 하였다. 폐물의 이용이 얼마나 알뜰한가를 이로써 알 수 있었다. (83P)

☆☆☆벌써 이 시대에 폐물의 이용을 보았으니 보는 눈이 날카롭고 시대를 앞서간다.


**** 오늘 이곳 가마를 보면 벽돌로 쌓고 석회로 봉하여 애초부터 구워 굳히는 비용이 먹히지 않고 마음대로 크고 높게 만들 수 있어 모양은 종을 엎어 놓은 것 같다. R고대기는 우묵하여 물을 몇 섬씩이고 찰 수 있도록 하고, 옆에는 연기 뽑는 구멍 네댓 개를 뚫어 불이 잘 타오르도록 했고 벽돌은 그 속에 두는데 서로 엇괴어서 불곬을 낸다. 대체 용한 것은 쌓는 격식이다. 당장에 내 손으로도 아주 쉽사리 함 직하되 입으로 형용해 내기는 실로 어렵다.

벽돌은 반듯하게 놓는 것이 아니라 죄다 모로 세워 방고래처럼 여남은 줄로 하고 그 위에 다시 엇비슴하게 벌려 올려 차례차례로 시렁처럼 쌓아 가마 꼭대기까지 닿도록 걸쳐 쌓아 올린다. 구멍들은 고라니 눈처럼 절로 숭숭 뚫려 불기운이 치오르도록 서로 엉켜 목구멍같이 화염을 빨아당기게 되었다. 수없는 불목이 번갈아 빨아들이니 불기운은 늘 세차서 수수깽이, 기장대라도 고루 구워지고 고루 익어 뒤틀리고 터질 염려가 별로 없다. (88P)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여니 장맛비는 활짝 걷고 맑은 바람이 이따금 불어드는데 날씨가 이렇게 청명하니 한낮은 무던히 더울 것 같다. 석류꽃은 떨어져 땅에 질펀히 깔린 채 붉은 흙탕이 되었다. 수구꽃은 이슬에 젖고 옥잠화는 눈 속에서 뽑은 듯하다.(90P)

****점방주인은 안방 ‘캉’의 구들 곬을 열고 자루가 긴 가래로 재를 쳤다. 나는 이 틈에 ‘캉’의 제도를 대강 봤다.

구들 곬 높이는 간신히 손을 펴서 들이고 낼만하고 고임돌은 서로 엇먹여 불목이 되어 있었다. 불길이 불목을 만나면 반드시 빨아 당기듯이 넘게 되고 불꽃은 재까지 휘몰아 여러 불목으로 가뜩 미어지게 퍼져들면서 번갈아 연방 삼켜 갈아들이고 보니 불길은 거슬러 나올 짬도 없이 굴뚝목에까지 닿게 된다. 굴뚝목에는 길 나마 되는 도랑이 하나 있으니 우리나라 말로 하면 개자리다. 재는 언제나 불길에 몰려나와 개자리에 떨어지고 개자리가 메이면 3년에 한 번은 굴뚝목의 한쪽을 헐고 재를 쳐 낸다.(100P)


***이내 일어나 앉아 이를 깍깍 물고 관자놀이를 툭툭 두드려 정신을 가다듬으니 머리가 건듯해지면서 한편으로는 서글프레하고 한편으로는 개운했다. 한참은 정신이 떨떨하여 다시 잠을 잘 수가 없어 이리 뒹굴 저리 뒹굴 이것저것 생각다 보니 날이 밝는 줄을 몰랐다. (106P)


**** “한 바탕 울 만한 자리로구나!”

     정진사가

‘천지간에 이런 넓은 시야가 펼쳐지는데 별안간 새삼스레 울 생각을 하다니요?“

하기에 나는 말했다.

“참 그렇겠네. 그러나 아니거든! 옛날부터 영웅은 잘 울고 밍니은 눈물이 많다지마는 불과 두어 줄기 소리 없는 눈물이 옷깃을 적실 뿐이요. 아직까지 그 울음소리가 쇠나 돌에서 찌나온 듯하고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찰 만한 소리를 들어 보지 못했거든! 사람들은 다만 안다는 것이 칠정(七情) 가운데 슬픈 감정만이 울음을 자아내는 줄만 알앗지. 칠정이 모두 울음을 자아내는 줄은 모르고 있다네. 까지껏 기쁘면 울 수 있고, 까지껏 골이 나면 울 수 있고, 까지껏 즐거우면 울 수 있고, 까지껏 사랑하면 울 수 있고, 까지껏 미우면 울 수 있고, 까지껏 하고 싶으면 울 수 있으니, 맺힌 감정을 한 번 활짝 푸는데는 소리쳐 우는 것처럼 더 빠른 방법이 없네.(110P)

☆☆☆칠정이 전부 울음을 자아낼 수 있구나!


****울음이란 천지간에 있어서 뇌성에 비할 수도 있는 것일세. 복받쳐 나오는 감정은 언제나 이치에 맞아 발작하는 것이나 웃음만 하더라도 그러한 감정의 발로라네. 사람들의 보통 감정은 이러한 지극한 감정을 겪어 보지 못하고 보니 공연히 까다롭게 칠정으로 나누어 ‘슬픈 감정’에다가 울음을 짝맞추어 둔 것이네. 이러므로 사람이 죽어 초상이 나면 즉시 억지로라도 ‘아이고’하고 부르짖는 것이지.

정말로 칠정에 느낀바, 지극한 감정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는 참소리는 천지 사이에 참고 눌리고 쌓이고 맺혀서 간대로 풀려 발로가 안 되네.(110P)


***"새긴 글자로 대중할 것은 못 됩니다. 이것은 다 근년에 금릉, 하남 등지에서 새로 부어 만든 물건들로 꽃무늬나 글자 새긴 품은 옛본을 떳으나 모양이 벌써 질박한 데가 없고 빛깔이 또 순정하지 못합니다. 만약에 이것을 참말 진품 고동기 틈에 끼워 두고 본다면 진짜와 가짜를 선 자리에서 알아 낼 것입니다. (161P)

☆☆☆그때에도 가짜 골동품이 판을 쳤던 모양이다. 이시대나 그 시대나 다를 바가 없다.

***진짜 옛 그릇은 퉁의 살이 두텁고 질박해 보일 뿐만 아니라 제 몸에서 나는 빛깔이 밝고도 윤기가 나지요. 수은빛도 그릇 전체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한쪽만, 때로는 귀나 또는 다리에만 나기도 하고 혹시는 차차 번져 나가는 수도 있습니다. 푸른빛 주사 얼룩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짙기도 하고 약간 엷기도 하고 정하기도 하고 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탁하다 해서 더럽지 않고 더덕더덕 덮쳐 덥수룩하지요. 정해도 마르지 않아 윤기가 흐르는 품이 축축하게 젖은 것만 같아 보입니다. 때로는 주사 점이 파뜩파뜩 찍혀 속으로 파고 들어갔으나 이것은 고동빛을 제일로 채준답니다. (162P)


***꼭두새벽에 일어났다. 세수하고 머리 빗는 것이 왜 이토록 싫증이 나는지! 지새는 새벽 하늘에는 총총한 별들이 마주 눈을 깜박일 대 마을 닭들은 번갈아 홰를 쳤다. 몇 리를 못 가서 안개는 자욱이 넓은 들을 먹어들어 수은 바다처럼 되었다. (194P)


***돌이켜 동편 하늘을 바라다볼 때 불빛 구름은 뭉게뭉게 펴지면서 수레바퀴 같은 붉은 해가 수수밭 속으로부터 반은 솟고 반은 잠겼다가 슬금슬금 둥그렇게 돋아 올라 온 요동벌을 덮는다. 지평선 위로는 가는 말과 오는 수레, 말없는 나무와 움직이지도 않는 집들이 깃털처럼 늘어선 채 햇빛 속에 휘덮여 있었다. (195P)


일신수필

***시방 여기까지 몰아쳐 쓰다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구나! 먹 한 점 큭 찍는 ‘동안’은 눈 한 번 깜빡, 숨 한 번 쉬는 동안이요, 뒤미처 ‘작은 옛날’. ‘작은 오늘’이 되어 버리고 마니 ‘큰 오늘;과 ’큰 옛날‘은 역시 큰 눈 한번 깜빡,  ’큰 숨 한 번 쉬는 ‘동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보잘것 없는 ’동안‘에 이름을 대고 공로를 세우겟다고 날뛰는 것이야말로 그 아니 서글픈 일이랴. (222P)

**나는 원래 삼류 인사다. 내가 본 장관을 말하리라. 깨진 기와 조각이 장관이요, 냄새나는 똥거름이 장관이더라. 왜? 깨진 기와 조각은 천하가 버리는 물건이다. 그러나 동리 집을 둘러싼 담장 어깨노리 위로는 깨진 기왓장을 두 장씩 마주 붙여 놓아 물결 무늬가 되고 네 족을 밖으로 등을 대어 모아 붙이면 동그라미 무늬가 되고 네 쪽을 밖으로 등을 대어 모아 붙이면 엣날 엽전의 구멍 모양을 이룬다.

똥오줌이란 세상에서도 가장 더러운 물건이다. 그러나 이것이 거름으로 쓰일 때는 금싸라기 같이도 아끼게 된다. 길에는 버린 재가 없고 말똥을ㄹ 줍는 자는 오쟁이를 둘러메고 말꼬리를 따라다니고 있다. 이렇게 모은 똥은 거름간에다 쌓아두는데 혹은 네모 반듯하게 혹은 팔모가 나게 혹은 육모가 나게, 혹은 누각모양으로 만들고 보니 한 번 쌓아올린 똥거름의 맵시를 보아 천하의 문물제도는 벌써 여기 버젓이 서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나는 힘차게 말할 수 있다. 기와 조각, 조약돌이 장관이라고 똥거름이 틀림없는 장관이라고 하필 성곽과 연못과 궁실과 누각과 점포와 사찰과 목축과 광막한 벌판, 자욱한 수림의 꿈속 같은 풍광만을 장관이라고 부를 것인가?(228~229P)


***우리 조선은 산협지대라 수레를 쓰기에는 적당하지 못하다고들 한다. 이런 당치 않은 소리가 어데 있을 것인가? 나라에서 수레를 이용하지 않고 보니 길을 닦지 않고 있는 것이요 수레만 쓰게 된다면 길은 절로 닦을 것이 아닌가(240P)


****중국이 재물은 풍성풍성하되 한쪽에 몰려 있지를 않고 쉴새없이 흘러 퍼지고 장사를 통하여 이곳저곳 옮겨지는 것은 모두 수레를 이용하는 것이다. (241P)


***넓이가 수천리나 되는 나라에서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이토록 한 것은 대체 무엇이겠는가? 한 마디로 말하면 극내에 수레가 다니지 못하는 까닭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수레는 왜 못다니는가? 모두가 선비와 벼슬아치의 죄다. 이 양반들은 평생에 읽는다는 글이 <주례.란 성인의 저술로서 툭하면 거인이니 윤인이니 여인이니 주인이니 하지마는 입으로만 외울 뿐이요 정말 수레를 만드는 법을 어떠하다든가 수레를 부리는 기술은 어떠하다든하 하는 e[는 연구가 엇으니 이야말로 건성으로 읽은 풍월뿐이요 학문이요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242~243P)


저자

**그들이 위하는 재물귀신이란 관운장의 상을 탁자 위에 모시고 향불을 피우고는 아침저녁이 멀다시피 절을 하는 품이 이녁 집 가묘(家廟)보다는 더했다. 이런 것으로 미루어 볼때에 한 번 산해관 안으로 발길을 들여놓으면 대체 어떠리라는 것쯤은 미리 짐작할 수 있었다. (252P)


***아침노을은 늠실늠실 나무숲을 횝사 뭉개면서 수없는 봉우리로 뭉게뭉게 vdjdhf라 용이 둥지를 틀고 봉이 춤을 추는 듯 천리벌판을 뒤덮는다. (258P)


*** “예쁜 기생도 많은가?”

“가만있자 자랑을 어떻게 할까? 양귀비 같은 놈이 없는가, 서시같은 놈이 없는가? 유색이라고 부르는 기생은 곷을 부끄러워하고 달이 얼굴을 못들 만큼 자색이 곱고 춘운이라는 기생은 가는 구름을 멈추고 남의 창자를 녹일 만큼 소리를 잘한답니다.” (269ㅖ)

***해는 원래 임금의 상이라고 한다. 요임금을 해에 비겨 찬양하기를 “멀리 바라다보면 구름이요, 가강 나아가 보면 해로다 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해가 채 돋기도 전에는 반드시 하고 많은 구름이 해의 변두리로 모여들어 마치 해돋이 앞장을 서는 것 같기도 하고 마치 해돋이 뒤를 따라서는 것 같기도 하고 마치 수만의 수레와 말을 탄 군사가 옹위를 해 모시는 듯 오색깃발이 휘날리고 용틀임 뱀굽이를 쳐 한바탕 뒤흔든 뒤에야 비로소 장관이라 말할 ㅅ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구름이 너무 많이끼면 도리어 캄캄하도록 해를 가려 아무 것도 볼 수가 없게 된다. (287ㅖ)


***큰 물고기 제멋대로 용마인 양 내달릴 제

붉고 푸른 날개미를 제 신대로 폈으려니

천지 배판 혼돈할 적 누가 있어 보았기에

미친 듯이 큰소리쳐 등불을 발히려나.

창날 같은 헤성 꼬리 불살을 드리운 듯

우뚝 선 나무 위에 올빼미 울음 고약코나.

어느 덧 물 바닥엔 작은 멍을 돋아났네.

용님 발톱 조심하소. 건드리면 터진다오.


빛 멍울은 점점 커져 가도 끝도 뻗쳐

물결 위에 금티 은티 꿩 가슴팍 무늬인 듯

어둠 속에 하늘 땅은 붉은 줄로 금을 그어

아래 위 두 층대로 뚜렷하게 갈라졌네.

천 오리 만 오리 산 듯 깨운 색실 가음

금단 수단 오색 비단 물감들이 가마인 듯

산호가지 꺽어 내어 숯불 장만 누가 했나.

부상의 뽕나무를 하늘하늘 태우는 듯.


염제는 불 불기에 주둥이가 쑥 나왔고

축융은 부채질에 오른팔이 녹아낫다.

새우 수염 기다라니 맨 먼저 탈 것이요,

조개 껍질 더 굳어져 절로 익을 참이렷다.

구름이란 구름장은 동쪽으로 몰려들어

저마끔 상서인양 뽐내 보기 한창이다.

자신전 조회마당 미처 차비 못됐으니

금관조복 늘인 휘장 그대로 걸렸을 걸.


그래도 새벽달은 태백성과 마주 서서

내가 밝나 네가 밝나 손꼽장난 한창이다.

붉은 기운 잦아들고 오색빛깔 서리더니

멀리 솟은 파도머리 맨 먼저 툭 터졋네.

바다 위에 갖은 괴물 다 어데로 사라지고

해님 타신 수래 모는 희화 님만 남았구나.

6만 4천여 년 나마 한결같이 둥근 얼굴

오늘 아침 망령 나서 네모로 변할랴고.


만길 물깊은 바다뉘 감히 길러 내랴.

하늘 닿은 바다이매 금방도 올라갈 듯

등림에 을 드니 빨간 여름 한 알 인듯

해 아드님 찬 쭝방울 반만 솟다 말았는가.

과보는 헐떡이며 뒤를 따라 좋아오고

육룡은 신이 나서 앞장서서 그덕대네.

하늘 끝은 암담하여 얼굴을 찡그리며

제 힘껏 용을 써서 바퀴 끌어 어기여차.


아직도 덜 둥글고 동이처럼 길쭉 하이

물을 빠져 나오는데 출렁 소리 들리는 듯

사방을 돌아보아 어제 보던 그대로다.

어느 누가 두 손으로 번쩍 끌어올렸을까.(291P)



***창대는 참외 한 개를 공애하고는 수없이 절을 하더니 금방 소상 앞에서 참외는 제가 먹어 버린다. 아무래도 모를 일이다. 기도를 올리는 작자는 대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아먈로 바치는 것은 적고 바라는 것은 사치하다고 볼 수 밖에 없구나.

대문 안 차면담에 그린 청자 그림을 볼 만했다. 감로사에 있는 오도자의 그림을 본뜬 듯한데 일찍이 소동파가 칭찬한 바 “위엄은 이발에 나타나고 반가움은 꼬리에 나타난다.”란 말이 더할 나위 없는 형용이라 할 수 있겠다. (302~303P)


***장대견문기

만리장성을 보지 않고는 중국이 얼마나 큰 줄 모를 것이요, 산해관을 보지 않고는 중국의 제도를 모를 것이요, 산해관 밖의 장대를 보지 않고는 장수의 위엄이 얼마나 장한지를 모를 것이다. (312P)


***몽염은 장성을 샇아서 오랑캐를 막고자 했는데, 진나라를 망친 오랑캐는 필경 집안에서 기르게 되었고 서중산도 이 관나을 지어 오랑캐를 막고저 했더니  오삼계가 관문을 열어 적군을 맞아들이기에 여가가 없었다. 천하가 무사태평한 이대야말로 공연히 장사치 길손 나부랭이나 붙들고 이러쿵저러쿵 힐난을 한 대서야 난들 이 관에 대하여 무어라 말해서 좋을 지 모르겟구나. (316P)


관내에서 본 이야기

***우리나라에서 습자 하는 사람들이 옛람들의 필적을 직접 보지 못하고 평생에 대한다는 것이 다만 금석문뿐이다. 금석문이란 옛사람 글시의 전형만 상상될 뿐이요 그 붓과 먹 사이에 여린 한없이 미묘한 감정의 표현은 벌써 선천에 속한 만큼 글씨의 체나 세는 비슷하게 본뜰 수 있으나 힘차고 세찬 글씨의 뼈다귀에 스며들어 있는 글씨의 감정은 도무지 찾을 수 없어 먹이 짙은 데는 먹돼지처럼 되고 여윈데는 마른 등넝쿨같이 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것은 다름 아니라 돌의 새김질이나 쇠에 새긴 획에 습성이 젖어 버린 까닭이다. (322P)

***종이와 붓이 중국과는 사뭇 다르다. 엣날부터 조선의 백추지와 낭미필을 중국에서는 외국 물건으로 별나다고 하여 쳐주는 것이지, 실상은 이름뿐이요, 그 성능은 서화에 그리 맞지 못하다. 종이란 먹칩을 잘 받고 필태를 잘 먹어들이는 것을 쳐주는 것이지 하필여물고 질겨 찌어지지 않는다고 쳐줄 것은 못된다. 서위의 말에 따르면 조선종이는 그림에 적당하지 못하고 다만 약간 두터운 놈은 조금 낫다고 했다. 다듬질을 않은 즉 종이털이 꺼칠해 글쓰기가 어렵고, 다듬질을 한 종이는 지면이 너무 굳고 미끄러워 붓이 잘 머물지 않고 굳어서 먹이 받지 않는다. 이러고 보니 정이는 중국 것만 못하다.(322P)


***붓이란 조절해 놀리기에 부드럽고 손 놀리는 데 따라 힘이 서로 맞아 나가야만 좋다고 할 수 있다. 굳고 닥딱하고 끝이 뾰족한 것은 쳐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서 좋은 붓은 반드시 호주치라 하여 전부 양털을 스고 다른 잡털을 섞지 않는다. 양털은 다른 털에 비하여 가장 보드랍다. 보드랍기 때문에 가장 잘 닳지 않고 종이에 대면  먹이 제 마음대로 놀아 흡사 효자자식이 부모의 듯을 지레 알아차리고 반드는 것처럼 된다. (323P)

☆☆☆박지원은 종이와 붓과 벼루에 대해 우리 것만 최고라는 생각을 버리게 된다.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바깥으로 나가보지 못한 선비들이나 양반들은 우리 것이 최고라고 하지만 박지원은 그렇지 않음을 조목조목 따지고 있다. 그래서 여행이 필요한 것이다.


***구름 빛깔은 독기가 서린 듯하고 해 곁에 뵈던 구름장은 벌서 해바퀴를 반나마 덮더니 한 줄기 휜 불빛이 버드나무 속으로 번뜩하고 지나가면서 해는 구름 속에 숨고 구름 속에서 번갈아 나는 소리는 바둑판을 밀치는 듯 비단필을 찌는 듯 버들 숲은 침침해지고 잎새마다 번갯불이 번득였다. (338P)


****배를 탄 사람들은 돌아다보면서 좋아라고.

“산수가 그림 같구먼!”

하기에 나는

‘자네들이 산수도 모르고 그림도 모르는 말일세. 산수가 그림에서 나왔겠는가, 그림이 산수에서 나왔겠는가?“

했다. 이러므로 무엇이든지 비슷하다. 같다, 유사하다, 근사하다, 닮았다고 말하는 것은 다들 무엇으로써 무엇을 비유해서 같다는 말이다. 그러나 무엇과 비슷한 것으로서 무엇을 비슷하다고 비겨서 말하는 것은 어데까지라도 그것과 비슷해 보일 뿐이지 아주 같은 것은 아니다. (345P)


*** “이제묘에서 점심참을 먹는 것이 전레인데 이곳에서는 으레 고비 나물을 차랍니다. 어떤 철이라도 주방에서 우리나라에서 마른 고비를 가지고 와서 고비국을 끓여 일해에게 차려 내놓은 것이 한 가지 준레로 되어 있습지요.

십수 년 전에 건량청에서 잊어버리고 고비를 가져오지 않았다가 여기와서 고비 음식을 차려내지 못하여 건량관은 서장관에게 곤장을 얻어맞고 냇가에 나가서 백이, 수제, 백이, 숙제 네가 나와 무삼 원수냐. 하며 통곡했답니다. 소인의 생각에는 고비는 고기반찬만 못할 것 같고 백이 숙제도 고비를 먹다가 죽었다니 고비는 정말 사람 잡는 독물인 것 같습니다.“ (348P0


***꼭두새벽에 길을 떠나니 길에서 상여 수레를 만낫다. 관 위에는 흰 장닭 한 마리를 놓아 두었다. 닭은 홰를 치면서 울었다. 길에서 연거푸 상여를 만났는데 모두 닭을 올려 놓았다. 이것은 닭이 혼백을 인도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351P)


***세월은 아물아물 화살같이 빠르고

강물은 동으로 흘러 다함이 없네.

명리를 다투는 초로 같은 인생아,

백년 세월에 몇 명 살아남았던가?


어부와 초부 사이 주고 받는 이야기

봄바람 가을 달 밑 시비가 없고

제 잔 부어 제 마시고 제 노래 제 읊으니

잘한다 못한다가 소용이 없네 (354~355P0


***네가 세상 이치를 펴 늘어놓을 때는 걸핏하면 하늘을 둘러메고 나서지마는 참말 하늘이 마련한 대로 본다면 범이나 사람이나 마찬가지 물건이어든 천지만물이 살아나가는 어진 도리에서 본다면 범이나 메뚜기나 누에나 벌이나 개미나 다 사람과 함께 같이 살기 마련이지. 서로 등지고 지낼 터수가 아니렸다. 또 이것을 선악을 두고 따져 본다면 드러내놓고 벌과 개미집을 털어가는 놈이 천하에 큰 도적놈이 아니고 무엇일까 보냐. 제 마음대로 메뚜기와 누에의 밑천을 훔쳐가는 놈이 의리로 보아 대적이 아니고 무엇일까 보냐. (375P)


***천하에 뜻있는 인사로야 어찌 하루라도 중국을 잊어버릴 수 있을 것인가. 오늘 청나라 세상이 된지 겨우 4대에 불과하지마는 문화와 무력을 오래 부지해왔고 백년동안을 태평세월로 국내, 국외가 잠잠하니 이런 세월은 한나라, 당나라 시절에도 없었다. 이런 이룩은 범연한 일이 아니라 오늘의 천자도 역시 하늘이 마련한 우두머리로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이런 ‘하늘의 미련’을 두고 설마 하늘이 그러랴 하고는 성인에게 물어본 적도 있엇다. 이럴 적에 성인은 분명히 하늘의 뜻을 받아서 말하기를

“하늘은 말이 없이 행동과 사실로 보여준다.”

고 했다. (378P)


7월 29일 을사일 개었다.

***산 위에는 안녹산의 사당이 있고, 성 안에는 돌로 건축한 패루 세 개가 있는데 패루 한 군데는 금자로 대사성이라 섰고 아래 층에는 국자 좨주의 3대 고증을 쭉 늘려 써놓았다.(383P)


***** 양귀비의 사당이 잇어 산보우리 위에 있는 안녹산의 사당과 함게 서로 마주 보게 되었으니 세상에 돈 가지 s놈들이 무슨 할 짓이 없어 이따위 음탕한 사당을 세워 두고 명복을 비는 것인지. <시경>에도 ‘복을 빌어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이 잇지마는 이야말로 헛돈이 아니고 무엇이랴. 혹자는 말하기를 성인도 정, 위의 음탕한 시를 버리지 않고 이로서 훈계하는 거울을 삼았다는 말로도 변명한다.

계주의 금병산 석벽에는 양웅이 반교운을 찔러 죽이는 장면을 새겨 놓았다고 한다. (386p)


***돌아서서 향림사에 들르니 불전의 편액에는 향림암이라 써 붙엿고 전각 위에는 금자로 향림법계라고 써 붙였으니 강희 황제의 글씨라고 한다.

순치 황제의 누이되는 이가 일찍이 혼자되어 여승노릇을 하고 이 암자에 거처하다가 나이 아흔이 넘어서 죽었다고 한다. 절에 있는 중들은 모두가 여승들뿐이다.(386P)


***순치 초년에 조선 사신이 드는 집을 처음으로 옥하의 서쪽언덕에 두어 이름을 옥하관이라 햇다가 아라사 사람들에게 내 주었다. 아라사는 소위 코보들로서 아주 거세어 청인들도 잘 제어를 못햇다. 그 뒤 사고나은 건어호동에 있는 도통 만비으 집에 회동관을 두게 되었는데 만비가 잡혀 죽을 때에 그 집안 사람들이 많이 자살을 해서 집이 음산햇다고 한다. 더러 우리나라 별사가 동지사와 행기가 마주칠 적에는 갈라서 서관에 들게 된다. (397P)


***옛날 진나라 황제는 육국의 본을 떠서 아방궁 전전을 크게 지엇으니 본을 떳다는 말은 화공이 모방을 해서 그려서 떴단 말이다. 육국의 정객들이 그 임금들에게 돌아다니면서 유세를 할 때는 응당 걸 주 두 임금에 대하여 많은 욕설을 해껬지마는 소위 걸, 주가 옥으로 궁전을 지엇다는 경궁, 요대는 장화대나 황금대의 시늉에 불과할 것이요, 장화대와 황금대는 겨우 아방궁의 윤곽에 불과할 것이다. (399~400P)


북방 여행기

***8월 5일 신해일로부터 8월 9일 을묘일까지 5일동안 황성에서 열하까지.


머리말

열하는 황제의 행재소이다. 옹정 시절에는 이곳에 승덕주를 두었고 지금의 건륭은 주를 부로 승격하였으니 황성의 동북쪽 422리 되는 곳이요, 장성으로부터 2백여 리 떨어진 곳이다.

지금은 청나라가 통일을 한 후 처음으로 ‘열하’라고 이름을 붙이고 만리장성 박에서는 요해지가 되었다. 강희 황제 시대로부터는 언제나 여름철이 되면 황제는 이곳에 두류하여 피서지로 삼았다.

거처하는 궁전은 그리 화려하지를 낳고 이름도 피서산장이라고 하여 황제는 이곳에서 독서로 소일을 삼고 산수를 홍취로 여겨 세상 밖에서 한탄 평민의 생활에 취미를 두는 듯햇지마는 그 실상인즉 험악한 지세를 이용하여 몽고의 산멱을 틀어주기ㅗ 국경 밖으로 깊숙하게 자리를 잡아 피서에 이름을 붙이고는 숫제 처자 자신이 오랑캐들을 방비하고 있는 셈이다.


이번에 우리 사절은 창졸간에 천자의 부름을 받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닷새동안에 열하까지 대었으니 가만히 노정을 꼽아보면 아무래도 4백리가 아닌 것만 같앗다. 열하까지 와서야 산동도사 학성과 더불어 노정의 멀고 가까운 이야기를 하게 되엇다.

학성이도 열하가 처음 길인데 그의 말대로 하면 열하에서 황경은 실상 7백여리라고 한다. 강희 황제때부터 해마다 이곳으로 피서를 하고보니 왕족과 부마와 조정대신들이 닷새만에 한 번식은 조회를 드리는데 도중의 길은 급한 여울과 강물이며 험한 영과 고개가 많아 다들 이런 멀고 험난한 걸음을 싫어하고 보니 건룡 때 와서는 각 참 이수를 깎아 4백리로 만들었는데 실상은 7백리라고 한다.


이번 같은 걸음은 우리 사람들로서는 처음 당한 노릇으로 더구나 밤을 낮 삼아 달려 꿈속에 장님걸음이나 다름없이 오고 보니 역함이나 이정표 같은 것도 일행의 아래위 할 것 없이 알 바 없었다.(419~421P)


8월 5일 산해일 날이 맑고 더웠다

*** ‘세상일이란 만일을 모르거든 만약에 열하로 오라는 명령이 잇다면 그럴 날짜가 없는데 어찌할 것인가? 설사 열하 걸음이 없다손 치더라도 만수절에는 꼭 황성까지 대어가야 할 터인데 만약에 심양이나 요동 등지에서 또 물에 막힌다면 이야말로 속담에 새벽길을 걸어도 대문까지 못 간다는 격이 되겠는데.’ (423P)

 

***사정인즉 황제는 매일같이 조선 사신들이 올 것을 기다리다가 급기야 사신이 왔다는 보고를 받기는 했으나, 예부가 조선사신이 황제의 행재소까지 가야할지 여부를 무어 아뢰지 않고 다만 표자만 올리고 말아 그 직책을 다하지 못한 지책으로써 모두 녹봉을 감소시켯다. (426P)

****나는 말 위에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인간으로서 가장 괴롱누 노릇은 이별처럼 괴로운 노릇이 없을 터이요, 이별 중에서도 괴로운 이별은 생이별처럼 괴로운 이별은 없구나. 그까짓 죽고사는 이별쁨이야 괴롭다 말할 거리가 못 될 것이다, 천고로 내려오면서 어진 아버지 효성있는 자식, 믿음직한 남편, 알뜰한 지어미, 의로운 임금, 총성된 신하, 피로 맺은 동지, 망므올 사귄 찬그들이 운명을 하는 자리에서 마지막 유언을 주고받을 때나 또 엣날 임금들이 임종할 때 탁자에 기대어 자기가 믿던 신하에게 국사를 부탁하는 자리에서는 누구없이 손을 붙잡고 눈물을 뿌리면서 있는 정곡을 다하여 애끊는 당부를 하는 법이다. (428~429P)


***세상사람들은 죽고 사는 것을 누구나 한 번 당하고 말 일로 보고  있다. 죽고 사는 일이 이같이 당연한 이치일진대 여기서 한 사람은 삵 한 사람은 죽는 이별로서는 못내 괴롭다고 말할 거리가 못될 것이다.

세상에 무엇이 괴롭다, 무엇이 괴롭다 해도 한 사람은 가고 한 사람은 남는 옛이별보다 더한 괴로움이 도 어디 있을 것인가. 그러니 이별의 괴로움에는 ‘곳’과 ’대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대체 어떤 곳이 이별하는 괴로움을 자아낼 만한 곳일까? 집오 아니요 정자도 아니요,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니다. 그러나 물이란 풍정은 적실히 이별의 괴로움을 자아냄 직한 곳이 될 것이다. (430P)

***이별 ‘곳’으로 치는 물이란 대체 어떤 물을 두고 말하는 것인가? 커서 강과 바다요, 작아서 도량과 개굴창만이 물이 아니다. 크건 작건 간에 되돌아갈 길이 없어 흘러가는 모든 것이야말로 물일 것이다. 그러니 옛날로부터 이별하는 괴로움을 그려 낼 적에 흔히들 물이 배경으로 나오는 것이다. 세상에는 이릉과 소무만이 다정다한 한 사람이 아니언마는 그네들의 글에 나오는 애끊는 이별들은 유달리 물을 이별 ‘곳’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니 그네들의 이별이 가장 이끊는 이별로 보엿던 것이다.

물? 물의 정취를 나는 알고 잇다. 옅도 않고 깊도 않고 잔잔도 않고 급하지도 않은 물결이 바윗돌을 얼싸안은 채 흐느껴 우는 것이 물이었다. 바람도 없고 비도 없고 그늘도 안 들고 볕도 안 나는 음산한 날 눈에 보이는 경물들이란 한 번은 무너지고 말 강 위에 놓인 다리, 필경은 죽고 말라 버릴 강둑에 선 나무, 앉고 서고 뒹굴 수 있는 강가의 모래사장, 솟았다 잠겼다 숨바꼭질하는 강 복판의 물새들1 이런 경물 속에 선 사람인즉 셋도 아니요 넷도 아닌 단 두 사람이 소리도 없고 말도 없이 마주 설 때야말로 세상에 이런 괴로운 자리가 또 있을 것인가. (431P)


**이별도  없었는데 이별의 진곡을 안 사람은 시남료 한 사람을 볼 수 있다.


그대를 보내는 이 강둑에서 돌아설 제

그리운 그대 모습 이로부터 멀어지네.


이야말로 천고에 다시없을 남의 창자를 끊는 소리다. 무슨 까닭일까? 이는 다름 아니라 물에 다다라 이별을 하게 된 까닭이니 말하자면 이별하는 ‘곳’이 그럴듯 했던 까닭이다.


***유우석(당나라 시대의 저명한 문인)은 상수에서 유종원과 이별한 후 5년 만에 다시 옛길을 따라 계령을 나서서 다시 옛날에 이별하던 그곳에 다다라 시 한 편을 지어 유종원을 조상하였다.


 옛 보던 그 숲보고 내가 탄 말 울음 울제

그대가 탔던 그 배 산 굽이로 사라지네.(432P)


한 많은 귀양살이손이라 하자. 무엇 때문에 이토록 괴로웠던가?

이것은 오로지 물의 정취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워낙 지역이 좁고 보니 그토록 괴로울 만한 먼 길 생이별을 모르고 있지마는 유독 물길로 중국을 갈 때가 생이별의 괴로운 정리를 가장 쉽게 알 만한 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32P)


***우리나라 대악부에도 배따라기 곡이 잇다. 방언으로 배가 더나간다는 말인데 그 곡조가 창자를 에으듯이 구슬프다.


닻 감아라 배 떠나간다.

이때 가면 언제 오나.

만경창파(萬頃蒼波)에 가는 듯 돌아오소사.


이 노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눈물나는 이별곡조다. (433P)


***슬프다. 벌레같은 이 몸이건만 백년이 지난 이날에 와서도 한 번 그 당시 일을 돌이켜 생각할 적엔 호남이 서늘하고 뼈가 녹는 듯 쓰라리거든. 하물며 당시에 잇어서 이국에 붙들려 와 있는 r 임과 또 다시 작별까지 하는 그 자리일까 보냐.

당시의 정경으로 보아 떠나고 처지는 신하들이 서로 박별을 할 때면 멀리 바라보아 요덩벌은 망망하여 끝이 없고 심양의 짙은 숲은 까마득한데 가는 사람은 콩알처럼 아물아물 해보이고 걷는 말은 겨자씨만큼 작아져 갈 때 안력(眼力)은  다할 대로 다하고 땅 끝과 물시울이 하늘을 맞닿을 뿐 흔적조차 없어지면 해는 저물어 여관으로 돌아와 누울 때 이같은 이별에야 하필 물역만이 이별 ‘곳’이로 될 법은 없을 것이다. 정자도 좋고 집도 좋고 산도 좋고 들도 좋다.

또 하필 흐느겨 우는 물결 소리와 음산한 날씨만이 그들의 괴로운 정곡을 자아낼 것이랴. 또 하필 무너지려는 다리와 말라 죽으려는 나무만이 그들의 이별 ‘곳’이 될 것이랴. 비록 단청한 집이나 화려한 봄날도 모두가 그들에게는 이별한 ‘곳’이 될 것이요 통곡할 ‘때’가 될 것이다. 이런 ‘때’야말로 비록 돌로 깎은 사람이라도 한 번 돌아다 볼 것이요 무쇠 창자라도 녹아내릴 것이니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로서는 상하 없이 통분을 참을 수 없었던 ‘때’였다.  (435P)


****오던 도중에 멜대를 꿴 누런 수십 개를 메고 오던 자들이 있었는데 궤짝들은 더러는 좁기도 하고 넓기도 하고 더러는 길기도 하고 높기도 한데 모두 옥기명들을 넣은 것으로 회자(回子)나라에서 황제에게 조공하는 진상품들이라고 한다. 북경 거리에서 삯짐군을 내어 운반을 해 가는데 회회교 나라 사람 네댓 사람이 영솔해 가지고 간다. 그 중에 차린 품으로 보아 높은 사람 같아 보이는 자가 회자나라의 태자라고 한다. 얼굴 생김새가 우락부락하고 흉하게 생겼다. (438P)


***벽돌 반석을 깐 대청에는 큼직하고 멀쑥하게 차린 탁자 위에 반듯반듯하게 자리를 잡아 흰 유리 접시에는 불수감 세 개를 담아 놓아 맑은 향내가 코를 찔렷다. 교의들은 모두 무늬있는 나무들로 여남은 개나 놓였고 서쪽 바람벽 아래는 등자리를 펴고 꽃무늬 놓은 탄자와 보료와 요를 갈았고 구들간 위에는 시벌건 탄자를 길이나 넒이가 구들간에 꼭 맞도록 깔았고 침대 위에는 푹신푹신한 털탄자를 깔았는데 오색으로 쌍륭 무늬를 놓아 짰다. (446P)


8월7일 계축일. 아침 나절에 비가 뿌리다가 곧 멎었다.

****사방을 돌아보아도 벼루 물을 찾을 길이 없기에 성 안에서 술을 사 먹을 적에 술을 몇 잔 더 사서 새벽 술참 삼아 안장 옆구리에 달아 둔 술병을 한 목따라 부어 별빛 아래서 먹을 갈고는 찬 이슬 짬에 앉아 붓을 들어 먹을 덤뻑 찍었다. 봄도, 여름도, 겨울도 아닌 이 철, 아침도 점심도 저녁도 아닌 이때, 태백성 정기가 바로 맞아떨어지는 게절, 관 마을 첫닭이 홰를 치려는 이 무렵, 어재서 이 자리가 우연한 자리일가 보냐. (451P)

****또 다시 한 잿마루턱에 오르니 지새는 달은 이미 기울고 물소리는 어덴지 가까이 들리는데 흐트러진 산봉우리들은 수심을 자아내는 듯, 언덕진 곳을 닥칠 때는 범이나 나오지 않을까, 한 모롱이 돌때마다 머리카락 끝이 선득선득하엿다. 이 대목은 따로 밤중에 고북구를 빠져서 야출고북구기편에 쓰기로 한다. (산장잡기)(451P)


****오늘 밤에 이 물을 건넌다는 것은 정말 아슬아슬한 노릇이다. 그러나 나는 말을 믿고 말인즉 제 발굽을 믿고 발굽인 즉 땅바닥을 믿어 벌서 견마잡이를 세우지 dskg는 덕이 이만큼이나 되는 셈이다.

수역이 주 주부에게

“옛말에 위태로운  짓을 비겨 말할 적에는 장님이 눈먼 말을 타고 밤중에 물을 들어서낟고 햇지! 이야말로 바로 오늘 밤 우리들을 두고 한 말일세.”

하기에 나는 말햇다.

“이것도 위태롭기는 위태로운 일이지마는 정말 위태한 것을 알아 맞히지는 못했는걸!”

두 사람이 있다가 한목으로 묻는다.

“어재서 그렇단 말인가?”

“장님을 보는 사람은 결국 눈이 성한 사람일 것이네. 장님의 위함은 눈이 성한 사람이 보다니 위험으로 생각되는 것이지. 장님보지를 못하는데 위험인 줄 알 재주가 없을 것 아닌가. 장님이야 보지를 못하는데 위험이고 뭐고 있을 것이 무엇이람.”

서로들 한 참 웃었다. 이 대목은 따로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에 씌기로 한다. 9산장 잡기에 있다.)(455P)


8월8일 갑인일,  개었다

***여기까지 어는 데는 밤낮없이 나흘 동안 눈 한번 못 붙이고 하인들은 걸을 때나 머물를 때나 모두 선 채로 잠을 잣다. 나 역시 졸음을 견디다 못해서 눈꺼풀은 구름 드리우듯 무겁고 하품은 조수 밀듯 와서ㅓ 대로는 눈을 뻔히 뜨고 보는데도 꿈결 같기만 하고 때로는 놀라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가 저절로 안장에 올라앉기도 때로는 눈에 보인ㄴ 것들이 다 허느적 하느적 아물아물거리고 몸이 자릿자릿하게 좋기도 하고 때로는 눈이 게슴츠레해서 보이는 덧 만듯하여 아기자기한 미묘한 경지 속에 들게 되어 언제고 소위 취중의 세상, 꿈속의 산천만 같았다. (458P0

***가을 매미 소리가 길게 흐늘어지게 들릴 때 공중에는 허깨비가 펼펄 날고 정신이 멍청하기는 선가(仙家)가 묵상할 적 같고 소스라쳐 깰 적에는 참선하는 사람이 견성을 하듯 팔일난이 삽시간에 지나가ㅗ 사백사병이 씻은 듯이 나은 듯하다는 것이 바로 이럴 때를 두고 말함인 듯하다. (458P)


****차지도 않고 덮지도 않은 구들 위에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은 베개를 베고 두텁지도 않고 얕지도 않은 이불에 깊지도 않고 얕지도 않은 술 몇 잔에 취한 채 장주도 아니요 나비도 아닌 몽롱한 꿈을 꾸는 심경이다.(459P)

***나는 길가에 돌을 두고 맹세해서 만약에 내가 사는 연암 산중으로 돌아가는 날은 곡 천일하고도 하루 동안 잠을 자서 희이 선생(송나라 초기 진박이란 은사가 한 번 잠을 자면 천 날식 잣다는 고사를 말한다)보다도 하루 더 자면서 천둥같이 코를 골아 영웅의 젓가락을 떨어뜨리도록 하리라고 생각했다. 만약에 그렇지 못할 때에는 맹세대로 ‘나는 돌이다’하면서 한 번 꾸벅하고 깨다나니, 이것도 역시 꿈이었다. (459P)


8월9일 을묘일. 개엇다. 사시쯤 열하에 도착하여 태학에 들어 묵엇다.

***산골짝 속으로 들어서면서 벌써 열하에 닿았다. 궁구러들은 웅장화려하고 길 양쪽으로 점포들은 10리에 뻗쳤는데 장성 밖에서는 첫 손 꼽는 대처다. 서쪽으로 봉추산 봉우리가 방아고처럼 우둑 섯는데 높이가 백여길이나 되어 하늘을 기대고 곧추 솟아 석양 햇발이 가로 비겨 금색이 찬란했다. 이 산을 강희황제는 ‘경추산’이라고 고쳐 불럿다고 한다. (464P)


***부근 지역에는 서른여섯 경치가 있다. 열하는 엣날 한나라 적 요양, 백단, 활염현들의 지역이다. 한나라 경제가 이광에게 명령하기를 ‘군사를 거느리고 백단으로 가서 주둔하라“한 데가 바로 여기요, 거란의 아보기가 페허가 된 활염성을 다시 쌓은 뒤에는 세상에서 대흥주라고 했고, ”명나라의 상우춘이 원나라의 야속을 추격하여 전녕에서 이기고 대흥주까지 밀고 나갔다“는 곳이 바로ㅗ 여기다. (46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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