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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18일 21시 21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연암 박지원은 1737년 서울 안국방에서 태어났다. 연암의 아버지는 박사유이며 어머니는 함평이씨로 이창원의 딸이다. 연암의 조부는 지돈녕부사란 고관 벼슬을 지낸 박필균이었다. 연암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어 어려서는 학문을 적극적으로 권장받지 못하였다. 16세가 되던 해 전주 이씨와 결혼한 후 장인에게 맹자를, 처삼촌 이양천에게 사기를 배워 그제서야 본격적인 학문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 때부터 연암은 3년 간 학업에 매진하여 젊은 나이에도 많은 집필을 하였다.

 

그가 태어난 조선의 18세기는 영정조 시대로 말기적 증세를 보이는 봉건 사회로, 탐관오리의 횡포와 농민의 봉기가 끊이지 않던 시기였다. 조선 중기 이후 더욱 까다로워진 신분 제도에 의해 문벌, 적서차별 등 구분할 수 있는 모든 분류군에서 차별이 심화되었다. 그리고 중국은 선교사들을 통해 서구의 과학문물이 전파되어 신세계의 편린을 보여주고 있었다. 연암은 청년 시절 조선 사회의 모순을 절감하여 불면증과 우울증이 시달렸다고 전한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연암은 20세 경 진실한 인간형에 대해 모색한 <방경각외전>을 집필하였다.

 

연암은 22세부터 원각사 근처에서 살며 박제가, 이서구, 유득공 등과 이웃하며 깊은 교우를 맺었다. 29세에 집안의 염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고 이후 오직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30세가 되던 해에 홍대용과 사귀면서 서양의 과학을 배울 수 있었고 북학과 이용후생에 대한 토론을 즐겨 하였다. 이러한 바탕에서 나온 그의 글은 양반 세도가들과 권력 계급을 비판하는 색채를 뛰었고 얼마 못가서 이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연암은 세도가들의 박해를 피하여 황해도 금천 연암에 피신하였는데 그의 호는 이 곳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러던 1780년 여름, 연암은 영조 임금의 셋째 사위이자 자기의 팔촌형인 박명원을 따라 당시 청국의 황제인 건륭의 70세 탄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떠나는 사절단에 동행하게 되었다. 이 때 건륭제가 열하에서 피서를 즐기고 있었기 때문에, 박지원은 일행과 함께 청나라 황제의 여름 별궁이 있는 열하까지 갔다. 연암은 만 리에 가까운 거리를 4개월 동안 여행하며 열하일기 26권을 저술하였다. 열하일기는 기행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기행문체만을 빌려온 총체적 사상서이다. 이 때의 여행을 통해 연암은 중국의 발달된 사회상을 직접 눈으로 체험하게 되었고 실학에 절실한 뜻을 두게 되었다. 주목할 점 중 하나는 박지원의 객관적인 과학 인식론으로, 그는 열하일기에서 서양 과학을 거론하며 유교 세계관의 음양오행설을 반박하는 급진적 견해를 과감히 수용하고 있다. 연암은 우국애민에 입각하여 이용후생을 구체적으로 주장하였고 노론의 한 분파인 북학파를 세워 영수가 되었다. 연암은 어릴 적 친구인 홍대용, 박제가 등과 함께 청나라의 우수한 점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상공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중상주의를 피력하였다.

 

연암은 50세 되던 해에 처음으로 선공감역이라는 말단 관직에 취임하였다. 그 후 64세에 양양부사로 부임하였다가 1년만에 사임하고 69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연암의 저작은 그가 살아있을 때부터 당식 통치 계급의 탄압 아래 발간되지 못하였고 죽은 후에도 금서가 되었다. 그의 손자 박규수가 우의정이라는 최고급 관직에 있었음에도 자기 조부의 문집을 감히 발간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에 대한 연구는 1910년 조선이 멸망한 뒤에 비로소 제대로 연구되기 시작하였다.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열하일기 중

 

 

22 외곬으로 유교를 숭상하여 예악과 문물이 중국을 본받아 예로부터 '작은 중국'이란 이름까지 듣고 있습니다. 나라를 이룩한 범절이나 식자들의 몸가짐으로 보아 옛날의 조송과 다를 바 없을 것이오.

è 그것을 자랑스러워한다는 것이 신기하지만, 따지고보면 오늘날 우리의 중국은 미국이 아닐까? 미국말, 즉 영어를 잘하는 것이 지식인의 표상이며 미국물을 먹은 자들이 상위 계급을 이루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24 우리나라의 벼슬하는 양반들이란 타고난 천품이 교를 부려 중국 사람들을 볼 때는 그가 만족이고 한족이고 간에 언제나 멸시하는 버릇과 마음을 주지 않는 것이 아주 습성으로 굳어져 그가 어떤 청인인지 또 관직이 무엇인지도 알아줄 리 없이 따뜻하게 맞아 줄 턱이 없을 터이요, 비록 마주 대면을 시키더라도 사람 대접을 않을 터이니, 나로서는 실로 딱한 사정이었다.

 

30 좋은 이 밤 밝은 달 아래, 같이 놀 님이 이토록 없다니. 이럴 녘에 어쩌면 우리 권솔들만 저렇게들 쿨쿨 잘꼬. 도독부 장군님도 잠들었구나, 에라! 나도 방으로 들어가 숫제 베개를 베고 나뒹굴어질거나.

è 요즘 너무 할 일이 많아서 이런 운치가 공감이 안간다.

 

36 우리 나라가 비록 바다 한 구석에 붙어 있지마는 네 가지를 자랑할 만합니다. 유교를 숭상하는 것이 첫째요, 홍수가 없는 것이 둘째요, 고기와 소금을 딴 나라에서 가져오지 않는 것이 셋째요, 여자가 개가를 않는 것이 넷째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è 오늘날에는 어느 하나도 맞지 않는다.

è 코어밸류에 해당하는 자랑거리란 없을까? 유교를 코어밸류라고 할 수 있나? 아닐 것이다.

 

40 오랑캐 여자들과 분간 없이 섞이기가 부끄럽다 하여 그럴 것입니다.

è 전족의 악습이 여성들에 의해 없어지지 않는 이유

è 그렇다면 전족은 어떻게 없어지게 되었을까?

 

46 붉은 꽃이 떨어지면 누런 꽃이 핀다.는 동요로서 붋은 꽃은 청인들의 붉은 모자를 두고 말하는 것이요, 누런 꽃은 몽고나 서번 사람들이 모두 누런 옷과 누런 모자를 쓰는 것을 가리킴이다. 또 다른 동요에는 원래는 고물인데 누가 주인이 될꼬? 했다.

è 아무것도 모를 아이들을 통해 시대를 반영한 의미심장한 뜻의 동요가 불리게 되는 사회역학은 어떻게 하여 생성되는가? 서동요처럼 일부러 지어서 불리게 하는 것인가? 그건 아닐 것 같은데. 오늘날에는 어떠한가?

 

48 만약 달 속에 또 한 세계가 있어 달로부터 땅덩이를 바라보는 자가 있다면 역시 우리처럼 난간에 기대고 서서 땅빛이 달에 가득 찼다고 '땅놀이'를 할 터이겠지!

53 내가 술을 한꺼번에 따라 단숨에 들이마셔 버리니 여럿이들은 서로 저마끔 얼굴을 쳐다보면서 깜짝들 놀랐다. 아마도 내가 술을 본때있게 마시는 것을 보고 놀랍게 여기는 모양이다.

è 우리 나라의 술문화, 중국의 과장이 섞인 문화권에서도 술을 말술로 마시는 것이 통상적인 일은 아닐진대 왜 유독 우리나라만 이토록 호방하게 말술을 마시게 되었을까?

 

60 여기서 만약에 간교한 상인들이 법을 어겨 가면서 몰래 매매를 하다가 혹시 청국 정부에 들키는 날은 무슨 사단이 일어날 것도 염려되는 데다가 황제가 이미 황금으로써 지붕 도금을 한 이상 우리 나라에다가 금광 발굴을 하러 안 달려들 것이라고 누가 장담을 할 것이랴.

 

63 이렇게 마음에도 없는 아첨은 세상에도 못볼 풍조로서 예로부터 세상 인심이 얼룰덜룩하고 좋고 나쁜 것은 모두가 우두머리에 달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è 아첨을 수용하는 우두머리가 있으면 세상에는 아첨만이 넘쳐나게 된다.

 

69 수역이 조금만 달라고 하여 잔에 남은 몇 방울을 얻어서는 돌려 가면서 맛을 보고 입에 침이 없이 칭찬을 하고 대궐에서 빚은 일품 술이라고 하면서 조금 있다가 일행들은 서로 쳐다보면서 꽤 취한다고 말했다.

밤이 되어 기공을 찾아가 한 잔을 내놓은 즉 기공은 배를 쥐고 웃으면서 이것은 술이 아니요, 여지즙이라고 했다.

 

73 참 용한 이야기요. 땅이 둥글다는 이야기는 서양 사람들이 처음 말했지마는 땅덩이가 돈다는 말은 하지 않았는데 선생의 이 학설은 이녁이 터득한 학설인가요, 그렇잖으면 어느 선생에게 계승한 학설인지요?

è 지구의 자전에 대한 생각은 홍대용의 독자적인 것이었을까? 지동설에서 낮과 밤이 바뀌려면 지구는 당연히 자전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은데.

 

73 사람의 일도 모르는 터에 하늘 일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è 바로 이런 체념주의가 겸손으로 추앙받았기 때문에 동양은 과학의 발전이 뒤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며 신을 증명하기 위해 과학을 연구했던 서양과 다른 점이다.

è 버트런드 러셀이 동양의 신비주의 때문에 과학이 발전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 신비주의가 "신비한 것은 알 수 없다"는 체념주의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맞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이어서) 저는 본디 수학에 어두운 터입니다. 비록 칠원옹의 깊은 생각으로도 아득한 우주에 관한 지식은 덮어 두고 해설을 안 했지요. 이것은 내가 터득한 지식이 아니라 귀동냥이랍니다. 홍대용이란 친구가 있는데 호는 담헌입니다. 학문을 좋아하되 사람이 꼼꼼하지 않아 일찍이 나와 함께 달구경을 하면서 장난삼아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대체로 황당하여 종잡기 어려우니 성인의 지혜로도 해득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è 학문을 좋아하되 꼼꼼하지 않으면 그저 취미로 학문을 하는 것일 뿐, 학자라고 부를 수 없다.

è "별이 얼마나 멀고 가까운지 알아서 무엇하겠는가? 그저 적당히 멀면 되는 것이다." 라는 취미로서의 학문, 낭만으로서의 학문적 담론은 아무 필요가 없다.

 

78 모르기는 하지마는 불과 몇 해 안 가서 베갯 머리에서 조그마한 담뱃대 통을 말구유로 삼아 말을 먹이게 될 것이네.

è 우생학에 관하여. 의도적으로 종자를 개량하면 불과 몇 세대 안에 엄청난 발전을 보일 수 있으나 우리나라에는 이런 방식으로 목축하지 않았다.

 

84 우리 나라 벼슬하는 양반들은 일반 허드렛일은 알려고도 않으려는 버릇들이 있어 옛날 어디서든 여럿이들 모인 자리에서 누가 콩을 말에게 좀 더 주라는 말을 한마디 했다가 사람이 좀스럽다고 그만 벼슬자리가 막힌 일까지 있었다.

è 이렇게 실용적인 노력을 폄하하는 문화에서 백성을 위한다는 철학은 글자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닌가? 근본에서 이탈된 이기적인 학문이었을 뿐이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비열하지 않은가?

 

85 한 나라의 큰 정책으로는 고려하지 않고 이것을 수치로 여기고 하인들의 손에만 맡겨 두고 있으니, 비록 직책은 감목이라고 하지마는 사람은 벼슬에 있는 사람으로서 목마의 지식이라고는 꼬물도 없다. 이것은 능력이 없다기보다도 배우기를 사리기 때문이니, 이런 것을 들어 관원들이 목마에 무식하다고 하는 것이다.

 

87 귀국 황제는 중국과 대등한 천자가 아닙니까?

만국이 한 천자를 받들고 천지가 모두 대청이요, 해와 달이 다 건류인가 보외다.

그러면 관영, 상평이라는 연호는 어데서 난 연호입니까?

무슨 말씀인지요?

제가 바다를 표류하던 귀국의 배에서 보았는데 '관영통보'돈을 잔뜩 실었습니다.

그것은 일본 사람들이 참칭하는 연호요, 우리 나라 연호가 아닙니다.

è 여기에서 박지원은 상대방이 조선에 황제가 없는 줄도 모르고 왜와도 헷갈려 하는 것을 보고 그를 무식하다고 폄하하고 있는데, 사실 이는 매우 부끄러운 이야기다. 왜도 주체성을 가지고 황제를 칭하는 마당에 사대하여 황제가 없음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나라가 아닌가?

 

92 달 아래 이별을 하고 보니 다른 날 만리 밖에 계신 선생이; 그리울 적은 저 달을 보고 선생을 대하듯 하리다. 보아하니 선생은 술도 잘 자시고 또 놀기도 좋아하시는 터인데 부디 몸보심을 하소.

 

102 그가 갑자기 난간 아래를 굽어보고 기침을 탁 하자 입에서 술이 폭포같이 쏟아졌다. 문 안쪽을 향하여 돌아다보면서,

"량아!(신선하다)"

è 황제의 조카, 예쁜 첩을 셋 데리고 있는 남자. 그리고 술을 진탕 마시는 남자. 부럽지 않다.

 

109 대체 무슨 덕으로 해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로구나. 너무나 높으면 무너지는 것은 세상 이치일 것이다. 백성들이 난리를 못 본 지도 너무 오래되었으니 한목으로 흙담 무너지듯 할 일도 못내 걱정스러운 일이로구나.

è 태평한 날이 오래되면 백성들은 난리를 원하게 된다는 혜안인가?

 

115 성인은 주고받는 데 삼가기를 정당한 이유가 없이는 팃검불 하나도 남을 주지 않으며 정당한 이유가 없이는 팃검불 하나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지 않는다고 하였다. 대체 팃검불이란 물건은 세상에도 가장 작고, 가장 가벼운 물건으로서 만 가지 물건 속에서도 손으로 꼽을 것이 못 되거늘 어째서 팃검불 하나를 가지고 주고받고 하는데 무슨 이치를 따지겠는가? 이같이 성인의 심각한 발언이 있었으니 영기에는 너무 심한 결벽성이 큰 의리에 구애된다는 감이 없지않지마는 나는 오늘 오미자 한 알을 증험 삼아 성인의 팃검불 하나에 대한 이론이 과연 심한 말이 아님을 알겠다.

 

119 ! 세도란 이토록 믿을 수 없는 것이나 세력이 있는 곳에 우르르 덤벼들었다가는 눈 한 번 굴리는 동안에 때는 가고 일은 식어 어디고 등 닿을 곳이 없을 때는 진흙으로 만든 소가 바닷물에 들어가 풀어지듯, 얼음 산이 볕을 본 듯 녹아 버리고 마니 이 어찌 서글픈 일이 아닐까보냐.

 

123 대체 학문이란 것은 신중히 생각하고 사물을 밝게 분별하고 자세히 묻고 넓게 안다는 것이다. 덕성만을 가지고 함부로 추어올릴 수 없기 때문에 다시 '묻고' '배움'과 연결시킨 것이다. 우 임금 같은 이가 '착한 말을 하는 자에게는 절을 하고 촌음을 아꼈던 것'과 안자의 '허물을 반복하지 않으며 노여움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지 않는 행위' 쯤으로는 아직도 그 심성이 완전하다고 평할 수 없을 터인 바, 이는 그들이 학문하는 극치에서 볼 때 아직도 객기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객기를 없애는 데는 반드시 자기를 이기고 옳은 심성에 돌아와야 할 것이다. 자기란 개개인의 사욕이다. 마음을 바로잡는 데 있어서 만약 조그마한 사욕이라도 비치게 될 때는 성인으로서는 이것을 도적이나 원수를 대한 것처럼 아주 뽑아 없애고야 만다.

 

132 밤에는 관에 머문 여러 역관들이 다들 내 방에 모여들어 간략하게 술자릴 벌였는데 나는 ss여 중에 온통 입맛을 잃었다. 여러 사람들이 내 자리 옆에 봉해 싸 둔 보따리 속에 무엇이나 들었나 하고 흘겨들 보기에 나는 곧 창대를 시켜 보따리를 풀어 샅샅이 뒤져보게 했으나, 다른 물건은 아무것도 없고 다만 가지고 갔던 붓과 벼루뿐이고, 부품해 보이는 것은 죄다 필담했던 초기와 유람 일기였다.

è 이 일기가 가장 값진 것이었다.

 

140 기풍액은 만주 사람이다. 자는 여천이요, 현직은 귀주 안찰사요, 나이는 서른일곱이요, 근본은 우리 나라 사람이다. 중국에 들어간 지 4대째 나는데 본국에서 자기 선조의 근본은 모른다. 다만 그의 본성이 황씨라고 하며 키는 8척이요, 헤멀쑥한 풍채에다가 위의를 잘 꾸몄다. 박학인 데다가 글을 잘 짓고 우스래를 잘 하며 불교를 배척하기는 아주 준엄하여 주장하는 이론이 꽤 정당하였다. 그러나 위인이 교티가 있어 눈 아래 사람이 없어 보였다.

è 사람 묘사.

è 오늘 날로 치자면 재미교포 3세쯤으로, 그곳에서 나고 자라 미국인인 경우.

è 오늘 날의 상황으로 봐서, 한국 외교관의 미국 여행기라고 치환하여 보면, 이 책이 그 당시 얼마나 흥미로웠을지 예상이 된다.

 

142 조음은 좀 별난 사람입니다. 금년이 회갑인데도 뜻을 얻지 못하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시와 그림으로 생명을 삼고 산수로 벗을 삼아 닥치는 대로 순을 먹고 취할 대로 취해서는 노래를 부르고 욕설을 퍼붓는답니다.

è 도대체 뜻을 얻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철이 들면 뜻을 얻는 것인가? 철이란 또 무엇인가? 자기 앞가림만 할 수 있다면 어찌 살든 그것은 개인의 자유다.

 

150 황교는 서장 지방에서 성행하는 불교의 종파로서 라마교의 별칭이다.

 

152 왜 그런고 하니 돈과 곡식은 나라의 허실에 관계된 일이요, 군대는 나라의 강약에 관계된 일이요, 산천과 지세는 관문과 요새에 관계되므로 이를 문답하는 것은 좋지 못한 것이다.

è 가장 중요한 정보로, 반드시 문답해서 알아내야 하는 바이다.

 

161 가치 천하에 다시없는 좋은 나라이외다. 이단의 폐해란 성인들도 이미 걱정한 바로서 심지어 사람을 서로 잡아먹는다는 말까지 있어 이것을 듣는 자는 설마 그럴 리가 있을까 했으나 지금도 깊은 산중에서는 왕왕 사람 잡아먹는 도사가 있어 어린애를 기르는 데 순 양기덩이 사내아이가 더욱 좋다고 해서 이를 쪄서 먹는답니다.

è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와 도교를 배척하는 자세. 논리도 없이 악의적 태도로 일관하는 등, 감정적 배타주의를 자랑인 양 드러내고 있다.

è 오늘 날, 유교와 불교, 도교 중 그나마 명맥은 잇는 것은 불교이며 유교와 도교는 사실상 죽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책으로 남아있기만 하다. 라틴어처럼. 이들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불교는 기복의 대상으로서 빌만한 우상이 있었기 때문인가?

 

164 흡사 물에 빠진 놈처럼 놀고 고서를 파먹고 사는 책벌레를 길러 이번엔 여우나 쥐 같은 소인배로 만드는 즉 고증학 따위로써 방어선을 치고, 남보다 뛰어난 총준들을 넉눌러 아주 바보로 만드는 동시에 훈고학으로써 자갈로 물립니다. 때로는 용기를 돋우어 싸우다가도 형세가 불리하게 되면 무릎을 꿇고 항복을 하는 것이 요즘 세상의 선비입니다. 오늘의 유학자들이야말로 참말 무섭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è 내가 할만한 비판

 

174 또 언젠가 활불은 황제와 함께 차를 마시고 있다가 갑자기 남쪽을 향하여 찻물을 뿌렸다고 합니다. … 때는 바로 한낮이나 되었는지라 하늘은 맑게 개어 구름 한 점 없었는데 갑자기 맹렬한 소낙비가 동북쪽에서 몰아들어 삽시간에 불을 껐다고 합니다. 차를 뿌려 비를 보낸 시각이 꼭 불났을 시각과 맞아 떨어졌답니다.

è 이런 허풍. 종교라면 지금의 사람들도 믿겠지.

 

178 그런데 이것도 교라고 부르고, 저것도 교라고 불러 이단과 서로 섞이기를 부끄럽게 생각한다면 교라는 글자를 아주 없애야 할 지경이외다. 지금에 와서 '우리 도'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 저들 이단들도 장차 '우리 도'라고 부를 터인즉 이러다가는 점점 짓이 나서 정말 '우리 도'까지 까뭉개 버릴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183 고금 천하에 환생이란 법이 없는 바도 아니요, 다른 사람에게 태어나는 수도 역시 없지 않으며 화식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과 장생불로하는 사람 역시 없는 것이 아닙니다. 또 덮어놓고 이런 이치가 없다는 것도 일종 편견이요, 또 이런 이치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편견일 것입니다. 이러한 이치가 때로는 있을 수도 있는 것이므로 이같이 '혹시 있을 수 있는 일'로써 함부로 만 가지 이치에다가 맞추려 하거나 천하의 이목을 돌리려는 것은 더욱 말할 수 없는 편견입니다.

è 그래서 어쩌라고?

è 어물쩍 아는 체 하는 것이 더 나쁘다.

 

185 옛날의 초인이나 선인들의 도이며 자아와 공리를 초월하는 학문입니다. <장자>에 나오는 자휴가 말한, '정신을 한번 통일하면 백성들은 재난이 없고 농사는 풍년이 든다.'는 말과 요 임금이 고산, 분수를 가 보고는 정신없이 천하를 잊어버렸다는 것이 곧 이 도 같은 것입니다.

è 이해가 안되네. 굳이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데. 후에 지칠 때 위로가 될 수 있으려나?

 

191 형장께서 만일 재물이 많았다면 나는 반드시 좋은 단골 손으로 정했을 것이오.

그것은 또 무슨 말이요?

말 빚을 잘 갚고 보니 말이외다.

 

206 다섯 교왕이 조공 바치는 사신들은 서령과 조황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므로 중국도 일찍부터 그들을 접대하는 데 드는 많은 비용을 괴롭게 여겼다 그러나 실상은 융숭한 예우로써 그들을 짐짓 어리석게 만들고 널리 왕호를 봉하여 남모르게 그들의 세력을 분할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각기 조공을 바치도록 하였으니 서번 사람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214 옛날의 제왕들은 상대되는 그로부터 먼저 배운 것이 있은 뒤에야 그를 신하로 삼았으므로 더욱 갸륵하다고 쳐주었고, 천자의 몸으로서 성명 없는 평민을 친구로 사귀되 그것이 자기의 위신에 손상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더욱 크게 되었으나, 뒷날 세상에는 이런 법이 없어졌다.

 

223 라마 중의 말을 받아서 몽고 왕에게 전하니 몽고 왕은 군기대신에게 전하고 군기대신이 오림포에게 전하고 오림포는 우리 역관에게 전하니 대체 오중 통역이다. 상판사 조달동이 일어나 팔뚝을 뽐내고는 말했다.

"천하에 흉물스러운 것 같으니! 옳은 죽음을 할 턱이 없을 것이다."

 

232 오늘의 청나라는 명나라의 묵은 신하들을 어루만져 천하를 통일하고는 여러 대를 내려오면서 우리 나라에 좋은 대우를 해 왔다. 해마다 선물을 바치는 범절에 있어서 금이 우리 나라 토산이 아니라고 하여 이를 그만두게 했고, 타는 말이 작고 약하고 보니 이를 면제했고, , , 종이, 자리 같은 폐백도 해마다 그 수량을 삭감하였으며, 몇 해 이래로는 대체로 칙사를 내보낼 만한 일도 반드시 적당히 처리하여 칙사를 마중하고 보내는 폐단을 없애도록 하였다.

è 반어법이거나, 비판이 목적인 글의 도입부를 부드럽게 하기 위한 글?

 

234 요즘같이 온 세상이 평화로운 시절에 와서 역시 슬금슬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많이들 친절을 보이고 있다. 두텁게 대우하는 것은 은혜를 팔고저 함이요, 인정으로 얽어매는 것은 우리 나라의 군비를 방심케 하자는 것이다. 다른 날에 자기의 본 고장으로 돌아와 국경을 눌러 타고 앉아 옛날의 임금과 신하 사이의 예절로 따져서 흉녀이 들 때는 구제를 청하고 전쟁이 날 때는 원조를 바란다면 오늘의 대수롭잖은 종이와 자리 따위 선물을 면제해 주는 것이 다른 날 막대한 희생과 진주 보옥을 청하는 미끼가 되지 않으리라고 누가 보증할 것인가? 그러므로 걱정거리가 됐으면 됐지, 영광이 될 것은 없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244 비록 외국 사신이 제 스스로 사례를 하여 전주해 주기를 요청하더라도 마땅히 번거롭고 시끄러운 폐단이라고 물리치는 것이 당연한 일일 터인데 이와는 반대로 오히려 사례분 제출하는 시간이 늦어 전주하지 못할까 겁을 내고, 심지어는 사신에게 물어보지도 않고는 가만히 문구를 고쳐 체면을 돌보지 않고 다만 한때 황제를 기쁘게 할 자료만 필요로 하여 스스로 위를 속이는 죄를 범하고 외국의 멸시를 달게 취하고 있다. 예부가 이와 같을진대 다른 여러 부도 알 만한 일이다. 그리고 또 사신은 며칠이 못 되어 응당 돌아가야 될 처지라 자문도 절로 받아서 갈 만한 터인데 먼저 서둘러서 발송을 하여 마치 공로를 세우기에 눈이 어두운 거리의 소인들처럼 행세를 한다. 대국의 처사가 어찌 그리 천박스러울까? 이러고야 천하에 모범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249 지체와 문벌이 높다는 것은 본래 우리 나라 풍속에서도 더러운 습관이니, 식자로서는 자기 나라 안에 있을 때라도 양반이란 말을 입 밖에 내기도 부끄러워 하는 터에 더구나 변방의 토성쯤 가지고 중국의 묵은 겨레를 업수이 여길 것인가? 이것이 첫째 망령이다.

 

250 중국 사람들에게는 세 가지 어려운 일이 있다. 한번 거인이 되고 보면 역사와 경서 전부를 사건에 따라서 척척 변증을 하고 제자백가와 구류의 시말을 대체로 상고하여 물으면 소리가 마주 울리듯 대답해야 하나니, 이렇게 못하면 선비라고 쳐주지 않는다. 이것이 첫째 어려운 일이다. 너그럽고 점잖고 예절에 밝고 의젓하게 생겨 교만하거나 틀을 차리지 않고 허심하게 사물을 대하여 대국의 체면을 잃지 않아야 되난, 이것이 둘재 어려운 일이다. 크고 작고 먹고 가깝고 간에 벅ㅂ을 두려워하지 않음이 없고, 법을 두려워하므로 관직을 조심하고 관직을 조심하기 때문에 질서는 한결같아서 사, , , 상으로 분업을 똑똑히 하여 제마끔 제 앞을 닦아야 하나니, 이것이 셋째 어려운 일이다.

 

253 ! 청나라 황실이 어찌 참말로 주자의 학문을 이해하여 그 정통을 얻었겠는가? 대체 황제는 천하에 높은 지위를 가지고 겉으로 공중 좋앟나느 듯하되, 그 뜻은 중국의 대세를 살펴서 미리 세상 사람의 입에 자갈 물려 아무도 감히 자기를 오랑캐라고 부르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일 것이다. 무엇으로 그런 줄 알겠는가? …… 이같이 걸핏하면 주자를 내세우는 것은 다름이 아니다. 천하의 악자와 양반들의 머리 꼭대기를 눌러 타고는 그 산멱을 틀어쥐고 등을 어루만지도 보니 천하의 학자나 양반들은 이 어수룩한 협박에 굴복하여 저절로 구구하게도 번잡한 형식적 학문에 빠져 있으면서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è 학문이 고착하는 것은 학문적 콤플렉스 때문?

 

256 소위 호걸들은 비록 성은 낼 망정 감히 말은 못 하게 되고 아첨쟁이들은 시대를 따르는 것으로써 자기 몸의 이익으로 삼았으니, 한편으로는 슬그머니 중국땅의 선비들을 약하게 만들고 한편으로는 드러내놓고 문교라는 찬양을 받게 되었다. 옛날 진나라처럼 선비를 파묻어 죽이지는 않으면서도 그들을 도서 교정하는 사업에 썩어나게 하고 진나라처럼 책을 불사르지는 않았지만 그들을 취진국에서 갈가리 찢어 버렸다.

 

267 태곳적 당우 시대에 백성들의 풍속이 너그러운 적에는 그들의 귀에 즐거운 음악이 소, 호 같은 곡조였으니 이로써 그들은 무엇을 배척하는 가를 알 수 있는 일이요, 주나라 폭군이었던 유왕, 여왕의 시대에는 백성들의 풍속이 음탕하여 그들이 즐거워한느 음악은 상, 복의 악곡이었으니 이로써도 그들이 무엇을 배척하는가를 알 만한 일입니다. 요즘 세상 잡극에서도 '서상기'를 놀 때는 하품을 하고 졸다가도 '모란정'을 놀면 정신이 번쩍 나서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이런 것이 시정의 하찮은 일이라 하더라도 백성들의 풍속이 시대를 따라 변화고 있다는 증거가 충분히 될 것입니다.

 

269 "소리가 난다는 것은 다 칠정을 거쳐 나는 것입니다. 또 변궁, 변상, 변각, 변치, 변우 소리가 있습니다. ''은 소리에 따라 어울려 사람의 마음에 느끼는바, 바르고 삐뚠 데 따라서 ''이 움직이고 ''이 따라 맞고 ''가 따라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나는 물었다.

"오음에는 선과 악이 있을까요?"

곡정이 무슨 말슴이냐고 되물었다. 나는,

"궁음같이 넓고 크고 깊고도 우람찬 소리는 선이요, 상음같이 급하고 빠른 소리든지, 치음같이 빠른 소리는 선하지 못하다는 말씀이외다."

하니, 곡정이 대답하였다.

"아니외다. 오음은 다 바른 소리입니다. 소위 넓고 크고 깊고 우람차고 높고 빠르고 급하다는 것은 다만 여러 가지 소리의 본질을 형용한 데 불과한 것이요, 그 작용인 즉 바르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279 무릇 소리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거쳐서 난다 하였으니, 대체 몸이 극히 귀하고 오랜 수를 누리는 사람은 목소리가 큰 종소리 같고, 내뽑는 힘이 웅장하고 화창하여 때로는 육률의 기보음인 황종률에 맞을 수 있습니다.

è 전제는 훌륭한데 결론이 이상하다.

 

285 옛날은 관리릉 임명하는 데 각자가 가진 재주를 바꾸지 않았으며 겸직으 삼가고 예절을 맡은 고나리와 음악을 맡은 관리가 구별되어 각각 한 가지 직분에 정신을 모아 이로써 평생을 두고 익히는 것입니다. 이래서 비단 그 관직에 종신토록 있을 뿐만 아니라 세습도 좋은바, 더구나 역사 편찬을 맡은 태사나 음악 맡은 고나리가 그리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è 응당 그랬어야 하며, 각각의 가치를 인정해 주었어야 하는데 조선은 그러하지 않고 사대부가 예술을 독식하며 교양 정도로만 취급했기 때문에 예술이 크는데 한계가 있었다.

 

294 , 한 이래로 비록 큰 난리가 자주 일어났으나 환난은 나라 안에서 있었기 때문에 악공이고 악기고 옮겨 가지 않았고 제도는 그대로 남았으며, 나라를 차지한 자도 창과 칼을 버리고 먼저 악기를 찾았습니다. 그러므로 음악을 맡은 관원들은 세대와 더불어 같이 일어나고 난리가 끝나면 다투어 가면서 악기를 안고 관직에 나와서 아들과 손자에게까지 세업을 전하여 마음 내키는대로 타고 불며 보고 듣는 것을 배우게 했습니다.

è 음악을 세업을 시키려는 경향은 서양에도 있지만, 알다시피 거의 실패한다.

 

302 뒷날 세상에 와서 이런 가사 짓는 벼슬아치들이란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선발하여 모두가 둘러맞추기를 잘하고 거짓말, 아첨쟁이들이고 보즉 벌서 찬양받을 자의 덕행이 사실에 맞지 않는 데서 소리가 구부러질 것입니다.

 

312 성인이 지은 책들은 옛날 성인의 도를 계승하고 후진을 개척해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공자가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와 시를 정리하고 예를 바로잡을 때에 하필 음악에 대해서만은 어째서 아무것도 저술한 것이 없을까요?"

곡정은 아무 말 없이 한참 있다가 말했다.

"이런 저술이 있을 턱이 없습니다. 공자가 시를 정리하고 예를 바로 잡았다는 그것이 곧 악학입니다. 원래 음악의 본질은 시에 속한 것이요, 음악의 이용은 예에 속한 것입니다. 언어로 사람을 가르칠 때는 세상 물정이 너무 노골화하고, 문자로써 사람을 가르칠 때는 오묘한 이치를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음악이란 것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이 빠르되 가쁘지 않으며, 나타나되 불거지지 않으며, 깊숙하되 충충하지 않으며, 온순하되 강직할 수 있으며, 꼿꼿하되 구부릴 수 있으며, 낮았다 높았다 감격스럽고 흐느끼고 간곡하여 이것이 사람에게 영향을 줄 때는 소름이 끼치도록 두렵기도 하고 벌벌 떨리도록 놀랍기도 하고 갑작스레 없어졌다가 슬그머니 생각나게도 됩니다."

è 음악에 대해 저술할 수 없다고 본 것인가? 그럴 듯 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314 그러므로 성인은 특히 저술하지도 않은 책과 말하지 않은 뜻에 유의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도록 하여 지혜가 좋은 자는 덕을 알게 되고 지혜가 나쁜 자는 음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성인이 과거의 학문을 계승하고 장래의 후진들을 개발하는 의취일 것입니다. 이래서 저는 <악경>이란 당초부터 없었다는 것을 주장하는 바입니다.

 

325 나는 말하였다.

"한나라 공덕에 대한 선생의 말씀은 좀 과한 것 같습니다. 한 고조는 처음에 백성들을 구제하겠다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진 시황이 아방궁 짓는 것을 보고는 술이 취한 김에 한바탕 소리를 치고 뜻을 낸 데 불과하였으니, 이 같은 망나니들 중에서도 흉물스러운 자를 어떻게 주나라의 거룩한 이룩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335-336 곡정이,

"선생은 옳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뒷날 세상에서 말할 때는 대체로 어긋난 일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 당시를 헤아려 볼 때는 매우 의미심장한 생각이 있었던 것입니다."

 

341 당시의 외번들은 중국의 정통 임금의 가짜, 진짜를 분간 못하고 때로는 중국을 친선하는 극진한 정곡으로써든가 더러는 자기 나라의 국경을 방위하기 위해서든가 혹은 큰 나라와 결탁하여 군중을 눌러 복종시키기 위하여 외번으로 자처하고 그 연호를 받드는 것도 괴이할 게 없는 일입니다마는, 다만 뒷날 세상에 역사를 쓰는 자로서 본다면 진짜, 가짜가 비교되고 득실이 드러날 것입니다. 중국땅으로부터 문헌들이 해마다 압록강을 건너가 일반 교화는 기자의 가르침을 따르고 학문은 주자를 표준으로 삼아 예의지국으로 알려져 있는 터에 천년을 두고 지켜 온 춘추대의는 식자들의 책임을 무겁게 하고 있을 것입니다.

è 현재와 다를 바가 없다. 미국과 중국 등과 잘 조율하고자 노력한다. 그렇다고 사대의 굴욕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실질적 이득을 위하는 것일 뿐?

 

348 박지원의 사상과 견해가 곡정의 입을 통하여 대부분 발표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물론 곡정이란 인물도 당시 이족의 지배 하에 정치적으로 불우한 급진적 인텔리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따라서 그의 언론은 평범한 유학자의 고루한 언론과는 구별되고 있다. 그러나 그와 토론한 담초를 한 편의 속기록처럼 그대로 발표한 것은 아니다. 박지원은 이 담초를 자료로 삼아 완전히 편술을 마치기까지는 거의 8,9년의 시간을 요하였다.

 

351-352

"공자는 기하학에 정통하시다지요?"

"무엇을 보고 아십니까?"

"머릿방에 있는 기 안찰사가 굉장하게 말합니다. 고려 박 공자(우리 나라를 부를 때는 고려라고 불러 흡사 우리 나라 사람이 중국을 말할 때 ''이니 ''이니 하는 것과 같다. 여러 사람들이 나를 부를 적에 더러는 공자라고도 했다.)는 기하에 정통해서 달 속에는 또 세계가 있어 꼭 이 땅과 비슷하다느니, 땅은 허공에 있어서 꼭 한 개 작은 별이라느니, 땅덩이도 빛이 있어서 달 속에 두루 비친다느니 하셨다구요, 이것은 모두가 이상한 이론으로서 가위 하늘과 땅을 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정직하게 말하자면 아직도 '기하'라고는 기 자도 한 번 본 적이 없습니다. 전날 밤에 우연히 기공과 함께 앞채에 나가서 달 구경을 하는 중 후련히 이상한 흥을 견디지 못하여 허튼소리를 지껄인 데 불과하지요. 말하자면 한때 장난말인 것입니다. 더구나 이런 억설은 기하학으로 알아낸 바가 아닙니다."

"너무 겸손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땅빛 이야기를 한번 들읍시다. 땅덩이가 빛이 있다는 것이 모르기는 하지만 햇빛을 받아서 내는 빛인지요, 그러찮으면 제 몸에서 빛을 내는 것인지요?"

"꿈속에 부적 그림을 본 듯이 시방은 벌써 다 잊어버렸습니다."

"저도 평생에 혼자 생각하는 것이 있는데 역시 사람을 대해서는 감히 입을 열지 못합니다. 온 나라 사람들이 깜짝 놀라고 괴상스러이 생각할까 봐 겁이 나서 그렇습니다. 이 때문에 뱃속에 적이 덩이로 맺혀서 여름철과 겨울철이 제일 괴롭습니다. 바로 말하자면 선생도 이런 병이나 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아주 이 시각에 툭 털어 말씀을 해 버려서 몇 해만에 약을 안 쓰고도 얻는 효험을 이참에 한번 보시면 어떠시겠소?"

곡정은 손을 흔들고 웃으면서,

"아니외다, 아니외다."

하기에, 나는,

"손님이 먼저 나서지 않는 것이 예법인갑소이다."

했다.

è 너무 슬프다.

 

359 제가 비록 추상적으로 이런 명제를 설정했지마는, 저같이 큰 물체는 태양에 비길 수도 있는 터에 어찌 달세계라고 하여 기운이 모여 꿈틀거리는 생물로 화하는 것이 없으리라고 하겠습니까? 오늘 우리나 세람이란 불에 들어간즉 타고, 물에 들어간즉 빠지지마는 역시 아직 불을 떠나거나 물을 떠나본 적이 없습니다. 만약에 다른 세계에서 이것을 본다면 물속에서 산다거나 불속에서 산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 여러 가지 벌레로 물속에 산다는 것이 유독 어족뿐만 아닙니다. 물론 물고기나 조개 등속이 주장은 되겠지마는 깃과 털이 난 족속도 때로는 물에 곁붙어 살고 있습니다. 또 물고기 족속을 육지에 놓아 두면 죽는다고는 하지마는 역시 때로는 깊숙하게 진흙탕 속에서 놀기도 합니다. 이것은 물고기 족속도 역시 흙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르기는 해도 이 세상의 천하민국 밖에도 몇 개의 세계가 기필고 더 있진 않을까요?

 

362 서양 사람들은 다만 땅이 둥글다고만 했고 지주가 돈다는 것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땅덩이가 둥굴 수 있음을 알았으나 둥근 물건은 반드시 돈다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è 코페르니쿠스 (1473-1543), 박지원(1737-1805)

거의 300년의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자동적으로 자전설을 내포한다.

 

369 <시경>에는 일렀으되, '하늘이 창생을 내니, 사물이 있은즉 법칙이 있다.' 했는데, 불교에서는 모든 형체를 환상으로 여겼은즉 이는 창생이 있고도 사물도 없단 말입니다.

è 둘 다 관점에 따라서는 옳다.

 

370 서양 학문이 어떻게 불교를 비방할 수 있겠소? 불교 이론이란 모두가 고상하고 오묘합니다. 다만 허다한 비유 이야기가 너무 허탄하고 이렇다 할 귀결이 없으믕로 그들이 소위 도를 깨달았다는 것도 결국 '허망하다'는 것입니다.

 

376 옛날부터 신하 된 자가 누구나 자기 임금의 학문을 위하여 애쓰지 않은 자가 없었지마는 천년을 두고 적적하다가 간신히 이종 한 사람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학문이란 나라의 흥망과 승패에는 아무런 이익이 없는 학문으로, 구산 문하에서는 수제자 노릇을 할는지 모르겠지마는 그 학문에 있어서는 눈으로는 일자무식들인 석세룡이나 막길렬을 따르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일을 '보리 떠내려가는 줄 모르고 글만 읽듯이 할 것'은 못된다고 생각합니다.

 

387 곡정은 말하였다.

"선생의 청탁을 가리지 않는 넓은 도량에 감격할 뿐입니다. 대체로 세상일이란 무엇이나 정도로 하지 않아서는 못 쓰는 법이요, '한 자를 구부려서 열 자를 바르게 잡는 법'도 옳지 못할 줄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처치한다면 모두 다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공자의 문하에서는 삼척동자라도 오패를 부끄럽게 여겼으니, 이렇게만 이론을 세운다면 다시 다른 일이 생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한창려가 말한 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대접하고 쓰지 못할 이론은 불살라 버린다.'면 도리어 세상은 태평해질 것이요, 동중서가 말한 대로 '그 의리를 바로잡고 잇속을 도모하지 않으면' 도리어 세상에는 응당 좀도둑까지도 없어질 것입니다.

 

389 유학이 나라를 파괴한다는 말이 어째서 유학의 죄겠습니까? 못된 선비들이 유학의 명분을 그저 도적질만 한 까닭이지요. 그래서 세상을 어지럽게 한 것은 유학의 찌꺽지일 것입니다. 만약에 참말로 유학을 사용했다면 소위 세상에 밭이란 밭은 모두 정전법을 실시할 수 있을 것이요, 천하의 제후들은 모두 다섯 등급으로 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390 곡정은 말했다.

"선생은 진정으로 내가 대담하게도 유학을 배척하는 줄만 인정하십니까? 옛말부터 말이란 것은 반드시 마음에 있어서 한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요, 실천을 하는 자도 반드시 말이 먼저 있으란 법도 없습니다. 일부 세계는 허위니까요. 선생의 말씀은 단벌 방문만 믿고 신선 되겠다고 날뛰는 친구들의 말솜씨와 같습니다."

"신선 됐다고 날뛰는 자들의 단벌 말솜씨란 무엇인지요?"

"'문성장군이 말의 간을 먹고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 글에 대한 리상호의 역주

이상은 세상에서 역사를 평할 때에 흔히 유교 본위인 경술로써 말하지마는 시대의 흐름과 함께 정치, 도덕 개념이 달라지게 되기 때문에 임금과 신하의 관계도 옆에서 보는 것보다 자신이 당해 보면 다르다는 것과 유교 경술을 고정적으로 고집하다가는 시대에 뒤떨어져 실패를 보게 된다는 이론으로, 다시 말하면 맹목적 복고주의는 실패의 근본임을 강조한 것이다.

 

398 나는 곡정과 함께 닷새를 같이 있었는데,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는 한숨을 자주 내쉬었다. 그 소리는 "위히." 하여 옛날부터 말하는 '위연 탄식'이란 것이 이것이다. 나는 물었다.

"선생은 평소에 어째서 한숨을 자주 내쉽니까?"

"이것은 저의 속 결리는 병인데 '후우'하고 기운을 내뽑는 버릿으 끝내 한숨으로 ㅇ굳어졌습니다. 평생을 두고 글을 읽어도 세상에 뜻대로 안 되는 것이 열에 여덟, 아홉이니 어찌 속병이 생기들 않겠습니까?"

"글을 읽으실 때마다 세 번씩 한숨을 지으신다면 선생의 한숨은 가의가 문제에게 올린 상소 속의 여섯 번 한숨보다 많을 것 같소."

곡적은 웃으면서,

"세상일이란 매양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너느냐 못 건너느냐 하는 싸움이라고 할 수 있지요. 제가 <논어>를 읽다가도 '공자가 강물에 이르러 말하기를 내가 물을 못 건너는 것은 하늘의 마련이다.'란 구절에 이르러 미상불 세 번 탄식하였고, '항우가 오강을 못 건넜다.'는 구절에 와서는 미상불 세 번 탄식했고, '종유수가 강물을 건너라고 세 번 외쳤다.'는 구절을 대하고 미상불 세 번 탄식을 하였으니, 이만해도 아홉 번 탄식한 것으로 벌써 가 태부의 여섯 번 탄식보다 많은갑소이다."

è 이 글에서도 놀랍게도 제1의 인격과 제2의 인격이 나타나고 있다. 선배들 피드백에서 제2의 인격의 성격은 여러가지로 정의될 수 있음을 지적받았다. 박지원과 곡정의 관계는 L K의 관계처럼 이데아의 관계는 아니며 니체와 짜라투스투라의 관계와 비슷할 것이다. , 자신을 대신하는 화자 역할을 하는 것인데, 1의 인격이 실체를 의미한다면 제2의 인격이 자신에게 더욱 맞는 본질을 의미하는 것은 동일하다.

è 루비콘 강을 건너는 일화들의 모음. 세상일을 강 건너는 일로 형상화한 탁월함. 이를 50 50의 확률론으로 해석하는 것이 합당한 일일까? 3% 의 합병증이 있는 치료에서 나에게 걸리고 걸리지 않고의 5:5를 거론하는 것은 옳은가?

 

405 세상일이란 거꾸로 되는 일이 많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410 옳습니다. 어질고도 사람을 죽일 수 있고, 예절을 지키면서도 무력을 쓸 수 있고, 지혜가 있으면서도 물을 줄 알고, 용맹이 있으면서도 머리를 숙일 줄 알고, 신의가 있으면서도 변화를 할 줄 아는 것을 가리켜 굳세고 참을성 있는 인물이라고 합니다. 성정이 이렇지 않고는 역시 반란을 일으키거나 반란을 바로잡을 수 없습니다.

대체로 나라를 창건하는 자는 갖은 풍상을 겪지 않으면 하늘을 맑게 하고 땅을 평정할 수 없습니다. 천지가 바뀔 때는 바람과 서리와 우레와 우박이 없이는 해를 이루지 못합니다. 시월 어간은 곧 천지 자연이 한번 뒤집히는 시절로서 어찌 한번 무서운 변화가 없겠습니까?

주공이 선대의 아름다운 미덕을 기술하여 치켜세우기만 하는 한 편의 기념시 같은 글을 잘 지었으니 ,영롱한 중추 달빛을 같이 구경하지만 뉘라서 간밤에 내리던 비를 알 것입니까? 뒷날 세상에서 참말로 태왕이 천하를 얻는 데 무심했다고 인정한다면 '점검이 취해 누워 자면서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이 어찌 백정이 칼을 갈면서 염불을 외는 것이나 다를 것이며, '침대 곁에 다른 사람의 콧소리를 용납할 수 없다.'란 말을 보면 어찌 '군막 속에서 술만 억병으로 취하고' 있었겠습니까?"

 

416 우리 선비들이 말하는 바 '천명'이란 것은 '운수' 두 글자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여기서 운수란 것은 역시 성공과 실패의 결과만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평소에 늘 한느 말로, '하늘이 임금의 지위를 주고 인심은 자연히 돌아온다.'는 말은 이야말로 엉터리 수작에 불과합니다.'

역리로 손에 넣은 후 순리로 지키는 자치고 천명이 알뜰하게 돌보아 주지 않은 때가 있었으며 '후직의 농사짓는 법으로 사람들이 지극한 도움을 받는 바에야' 어느 귀신이고 제향을 받아주지 않을 자가 있겠습니까? 제 몸만 편하고 보면 한나라 백성들은 왕망의 공덕을 날마다 찬송한 것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나라 귀신이 진나라가 올린 향이라고 토한다.'는 말은 못 들었습니다.

 

435 나는 말하였다.

"천하의 걱정거리를 먼저 걱정해야만 하는 천자의 지위야말로 참말 괴로운 자리일 것입니다. 한 고조가 호나관의 다리를 베고 집 첝아을 쳐다보고 누웠을 때야 팔 년 동안 얻은 것이 무엇이라 생각했겠습니까? 서리가 내리고 물이 말라드는 늘그막에 돌이켜 지난날을 회상한다면 이가 시릴 만큼 서글펐겠지요. 이때쯤은 응당 세상일이란 아무런 맛도 없었을 것입니다."

형산이 있다가,

"재상도 역시 그렇습니다. 술과 계집과 재물에 지쳐날 때 젊어서 과거 보던 시절을 회상해 본다면 이야말로 과연 어떤 심사라 할 수 있을까요?"

하니, 곡정은,

"영감임은 경치 좋은 물가에 밭뙈기나 장만하고 저술이나 하시면 그만이겠지요."

하니, 형산은 허허 웃으면서,

"목전에 급급하게 서두는 것은 모두가 늘그막 준비입니다. 누에가 늙으면 절로 고치를 짓는 것이지, 사람들에게 비단옷을 입히고자 목적한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나는 말했다.

"곡정 선생은 아직도 과거를 단념 않고 계십니까?"

"벌써 단념했습니다. 선생은 어떠십니까?"

"마찬가지입니다."

"흰머리로 과거를 본다는 것은 선비의 수치니까요."

è 과거란 현대의 수능보다 100배는 더 큰 욕망이었던 것 같다.

 

441 (곡정) 말하자면 굉장한 박식으로 이야기를 많이 떠벌리는 축이었으나 벼슬도 못한 채 궁한 처지에서 앞날도 멀지 않으니 참말 서글퍼 보였다.

 

447 때마침 초생달이 산마루턱에 걸려 넘어가려고 하는데 그 빛이 사늘하기는 숫돌에 갓 갈아 낸 칼날처럼도 벼려졌다. 이윽고 달이 재너머로 차츰 기울어 가자 아직도 뾰죽한 두 끝은 남아 있어 빛깔은 갑자기 불빛처럼 붉게 변하면서 두 개 횃불이 산 너머서 솟은 듯만 하였다.

è 대기에 의한 색의 변화

è 왜 그러한지는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452 이토록 위험하다 보니 물소리도 미처 듣지 못하는 것이다. 다들 말하기를 요동벌은 넓고 펀펀하기 때문에 물소리가 요란하게 나지 않는다고 하지마는 이는 물소리 속을 모르는 말이다. 요동땅 강물들이 물소리를 안 내는 것이 아니라 밤에 건너지 않았던 까닭이다. 낮에는 눈으로 물을 볼 수 있으므로 눈은 외곬으로 위험한 데에만 쏠려 무시무시하여 눈 가진 것을 걱정이라도 할 판인데 귀에야 무엇이고 들릴 까닭이 있을 것인가? 오늘 나는 밤중에 물을 건너는지라 눈으로는 위험을 볼 수 없은즉 위험은 외곬으로 듣는 데만 쏠려 귀는 언제나 무서워 부들부들 떨면서 걱정을 놓을 수 없었다.

è 옛날 수능 지문이다.

 

457 이것은 잠시 동안에 하고 마는 놀음인데도, 기율이 이 같이도 엄격하다. 만약에 이런 법으로 군대가 전쟁터로 나간다면 세상에 누가 감히 다칠 것인가? 그러나 천하의 태평은 도덕에 있는 것이요, 규율에만 있는 것이 아닐진대 더구나 이 따위 잡극의 규율이 천하의 태평에 무슨 도움이 될 것이랴?

è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471 몸뚱이는 솟 같고 꼬리는 나귀 꼬리에다 약대 무릎, 범 발통에 털은 짧은 잿빛이요, 어질어 보이는 모습에 소리는 처량하고 귀는 구름장같이 드리웠고, 눈은 초생달 같고, 두 어금니는 크기가 두 아름은 되고 길이는 발 나마 되겠으며, 코는 어금니보다 길어 구부리고 펴는 것이 자벌레 같고, 꼬부리기는 굼벵이 같고, 코끝은 누에 꽁무니 같은데 물건을 끼우는 것이 족집게 같아서 두루루 말아 입에 집어넣는다.

è 코끼리 묘사. 누에 꽁무니 같다는 표현이 압권이다.

 

474 그러나 나는 말하리라. 긴 어금니를 주고서 코를 힘입이라 함은 차라리 어금니를 없애고 코를 짧게 함만 같지 못할 것이다.

è 진화는 반드시 합리적인 방향으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다.

 

484 우리 일행의 역졸이 눈을 부릅뜨고 자세히 보다가는 슬그머니 골이 나서 얼굴빛을 변해 가지고 주머니를 털어 돈을 내어 소리를 쳐서 요술쟁이를 불러 가지고는 돈을 먼저 주고 다시 한 번 자세히 보자고 청했다. 요술쟁이는 두덜거리면서 내가 너를 바보라고 안 할 터에 네가 나를 못 믿거든 네 멋대로 나를 묶어 보라고 하였다. 역졸은 기운을 내어 본디 노끈을 던져 버리고 제가 가진 채찍을 끌러 침으로 축여 눅진눅진하도록 해 가지고는 이내 요술쟁이를 붙들어 등에다 기둥을 지우고 뒷손을 젖혀서 묶었다. 처음에 비하여 훨씬 되게 묶으니 요술쟁이는 "아야!"소리를 외치며 뼛속까지 아파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역졸은 허허 웃고 구경꾼들도 더 많아졌다. 벗는 것도 못 본 동안에 요술쟁이는 벌써 기둥에서 떨어져 나왔다. 손을 묶은 데는 종시 풀리지 않았다. 이렇게 신통한 놀음을 세 번씩이나 보였다. 알 수 없는 일이다.

 

495 인간 세상이 꿈결 같은 것은 본디 이같이 거울 속과도 같아서 차고 더운 변천이 이토록 달랐다. 일체 세간의 가지가지 사물이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엔 시들고 어제 부자가 오늘은 가난하고 갑자기 젊었다가 갑자기 늙는 것이 꿈속의 꿈 이야기로서, 바야흐로 죽으면서 살고 있다가도 없는 것이니, 누가 참이고 누가 거짓일 것인가? 세상에 착한 마음을 가진 착한 형제자매들에게 이르노니 허깨비 같은 세상에 꿈 같은 몸둥이와 거품 같은 황금과 번개 같은 재물로 큰 인연을 맺어서 천지 기수에 따라 잠시 이 세상에 머무를 뿐이거든 원컨대 이 거울을 본으로 삼아 덥다고 나가지 말고 차다고 물러서지 말아 있는 돈을 회사하여 이 가난을 구제할지라.

 

497 이로써 말해 본다면 눈이란 이같이도 밝은 것을 자랑할 거리가 못 됩니다. 오늘 요술을 구경하는 데도 요술쟁이가 눈속임질을 해서 속은 것이 아니라 실상은 보는 자가 제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열하일기 하

 

30 (허난설헌에 대하여) 대체로 규중에 들어앉아 있는 여인이 글을 짓는다는 것은 본래 아름다운 일이라고 할 수 없는 터이지만, 외국의 한낱 여자로서 꽃다운 이름이 중국에 퍼졌다는 것은 영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 부인들은 아직 이름이나 자가 본국에서도 드러내지 못한 터에 '난설'이라는 별호도 오히려 과하다고 할 수 있는데, 더구나 그 이름이 '경번'으로 알려져서 두고두고 책에 실려 씻어 내기 어렵다면 재주와 생각 있는 규중 여자들로서는 한 본보기로 삼아 조심해야만 될 일이 아닐까?

è 뭐래.

è 남자로 치환하여 읽으면 연암이 얼마나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36-37

안개 속에 핀 꽃인 양 곱기도 하여라.

귀신할미 상판인 양 못나기도 하여라.

 

38 조한이 지은 시 한 수를 들어 봅시다.

 

30년 이래로

육도를 배워

꽃다운 이내 이름

무장으로 빛났네.

 

난리가 벌어질 젠

철갑을 떨쳐 입고

아무리 가난해도

보검을 팔잖았네.

 

내 팔뚝 늙었어도

시위를 당길 터요.

이내 눈 어둡잖아

진터쯤은 살핀다오.

 

간밤에 가을 바람

뜰 앞에 일다나니

옛날 입던 수갑옷을

대하기도 부끄럽네.

 

이 시를 읽을 때는 그가 '안장 위에 버티고 앉아서 이리저리 둘러보는 용기'를 생각케 합니다.

 

리상호 : 춘추 때 조나라 장수 염파를 늙었다고 등용하지 않으니, 그는 말에 올라 자기는 늙었어도 전장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고사.

 

45 책을 들자 눈물은

천년 역사 적시고

è 단 두 줄로 이해가 된다.

 

48 뽀얀 먼지 실버들

꿈속만 같네(중국 반씨)

 

먼지는 뽀얗게

꿈속만 같네(홍대용)

 

라고 했는데 우리 나라에서 중국의 명사들을 사모하는 것이 이렇습니다.

è 장영주의 바이올린 콘체르토를 들으면서. 동양인이 서양의 바이올린을 켜는 것이나, 중국의 시를 흠모하는 것이나 그게 그거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다.

 

57 바윗돌에 비낀 담쟁이

마주 어울려 푸르네.

 

63 슬프다 을지문덕

서럽구나 그의 죽음

나라는 망했건만

후정화야 했을랴고.

 

73 천순 7년 봄에 관청에서는 이런 풍문을 듣고 이자가 본디 보고 다니는 신중이 있어 그 신중을 붙들어 신문을 하였다. 그 신중이 이자의 음경이 놀랍게 크다고 하였다. 여자 의원인 반덕을 시켜 만져 보도록 하고, 영순군 이부와 하성위 정현조가 돌림으로 검열해 보고는 다들 혀를 빼물면서 굉장하더라고 했다.

당시 중국에서도 역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오군 양순길의 <봉헌별기>에 성화 경자년에 서울 살던 과부 이야기가 나온다. 그 과부는 길쌈도 잘하고 곱고 젊은 데다가 신발은 네 치를 넘지 않았다. 부자 양반들 집에서는 서로 끌어당겨 수놓는 법을 가르쳤는데, 남자를 보면 당장에 수줍은 태를 짓고 피했다. 밤에는 수 가르치는 자를 따라가서 자는데, 언제나 자는 방에는 문을 채워 두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몸조심하는 것을 더욱 믿게 되었다.

태학에 다니는 어떤 자가 그를 연모하여 자기 마누라를 거짓으로 누이라 속이고 그 과부를 자기 집까지 청했다. 밤들어 그는 자기 마누라에게 눈짓을 하여 가만히 문을 열고 뒷간에 가는 척하게 하고는 갑자기 과부 방에 뛰어들어 촛불을 껐다. 과부가 고함을 치자 그는 목을 틀어쥐고 억지로 달려든즉 남자였다. 즉시로 잡아 묶어서 관청으로 보내서 국문을 했더니 이자의 성은 상가요, 이름은 충이요, 나이는 스물네 살로서 어릴 적부터 발을 조였다 한다. 법 맡은 관원이 이 사건을 아뢰니, 헌종 황제는 이를 요망스럽다 하여 극형에 처하였다.

è 과부는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으며, 그 과부를 범하려고 하였던 태학 다니던 자가 벌을 받아야 했던 것 아닌가?

 

84 세상에 전하는 이야기로는, 간이가 왕감주를 찾아보았을 때에, 공문서가 산처럼 쌓였고 관리 수십 명이 번갈아 문건을 아뢰고 있었다고 한다. 감주는 책상에 기대어 결재하는데 물이 흐르듯 거침없어, 열러 아전의 붓대들이 한목으로 움직여 삽시간에 해치우더란다.


또다시 십여 명 젊은이들이 저마끔 더러는 시, 더러는 줄글, 더러는 소품 등 숙제를 가져다 바치니 감주가 붉은 먹을 갈아 비점을 쳐가면서 열람하는데, 손에 든 붓을 놓을 사이가 없더라고 했다. 간이는 어이가 없이 놀라서 시중꾼에게,

"선생님은 언제나 저러고 지내시는지요?"

하고 물었더니, 시중꾼이,

"오늘은 마침 한가한 틈이신가 보외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시를 만 수나 지었고 저서가 천 권은 됩니다."

했다. 간이는 말문이 막히고 풀이 죽어 소매 속에서 글 한편을 끄집어 내어 가르침을 청했더니, 감주가 말하기를,

"글짓기에 뜻을 두는 자로서 독서를 많이 못하고 견문이 넓지 못하니, 돌아가서 창려의 글 속에 '획린해' 한 편을 오백 번만 읽으면 작문의 첩경을 마땅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오."

하여, 간이는 몹시 부끄러워 감주를 만났던 일을 굳이 감추었다고 한다. 간이가 글을 징르 때는 일부러 뒤틀린 버릇으로 괴상한 글을 짓기 좋아하면서 이를 이우린에게 배웠다고 하였다. 우린은 원래 감주가 가장 그의 재주를 두려워했으므로 이렇게 말함으로써 감주를 한번 눌러 주려는 것이었다.

è 간이의 뒤틀린 심경. 반성을 많이 하게 된다. 긍정적 경험으로 치환시킬 줄 알아야 대인배일 것이다.

 

94-95

낮잠을 자면서

 

낮잠을 자다나니

찌는 듯 덥구나.

만사에 게을러져

손 닿기도 싫어라.

 

읽던 책 채 못 덮어

먼지만 케케 앉고

벼루에 남은 먹은

파리 배만 불리네.

 

옹솔길 지나치는

나그네 묻는 말에

묵밭 매던 내 마누라

짜증만 내누나.

 

별안간 솟아오른

맑은 달빛을

해님이 돋은 줄만

잘못 알았지.

è 남자는 책 읽고, 여자는 묵밭 매고짜증이 날 만도 하지.

 

107 남주는 나이 서른에 죽었는데, 장사를 치르면서 관을 들다가 너무도 가벼워서 집안 사람들이 관 뚜껑을 열어 보았더니 빈 관이었다고 한다. 관 속에는 글이 쓰여 있었다.

 

바다에는 배 간 자리

찾을 길 없고

산에서는 학 난 자취

볼 수 없어라.

 

107 한유의 시에 '나무와 돌은 요괴스러운 변이 잘 생긴다'는 말이 나온다.

 

114 우리 사람들이 처음으로 중국 어린아이가 개천을 사이에 두고 그 어머니에게, '물이 깊어 건널 수 없어요. '물이 깊어 건널 수 없어요.'라고 외치는 것을 볼 때 깜짝 놀라면서 중국에서는 다섯 살 난 아이라도 입만 벌리면 시를 짓는다고 하였다. 이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말이 이렇다. 무슨 뜻이 있어서 글을 지은 것이 아니다.

è 글자가 곧 말이 된다.

 

123 남수가 나에게 준 전별시를 실었다.

 

머리가 세었다고

걱정 말지라.

천지는 길고 길어

다함이 없네.

 

넓디넓은 요동벌

필마로 드니

채찍을 한 번 치자

바람은 만리.

 

125 십년을 연암 두메

살던 그 님이

먼 길 떠날 차비

분주하고야

 

반생을 책더미 속

묻혔던 그 몸

오늘은 천자 있는

그곳에 가네

 

126

그 옛날은 공명의 뜻

없잖았건만

사슴 뫼돌 짝을 삼아

숨어 살았네

 

그래도 두 눈은

구경에 그려

늘그막 헝큰 생각

잊어 볼거나

 

127

넓은 뜻 가진 그 님

몸 둘 곳 없어

하늘 밑 동쪽 구석

살게 되었네

 

멀거나 가깝거나

차별이 없고

문밖을 나서잖아도

뜻은 만리 밖

 

136 글자를 배운 것이

평생 후회로구나.

명리를 줄 터이니

한가한 몸 못 바꿀까.

è L의 생각

 

142 새벽 절 종 다 쳤건만

갈가마귀 날지 않고

빈 행랑채 적막한데

오동꽃만 지누나.

 

154 건륭 무진년에 장하에서 고기잡이를 할 때 물속에서 자맥질하던 자의 허리가 동강나서 떠올랐다. 황제는 수만 명 병졸을 풀어서 강 옆을 파고 물을 딴 데로 돌린 뒤에 강바닥을 들여다보니, 수없는 병장기가 널려 있고 그 아래는 무덤이 있어 드디어 관을 파내니, 금은으로 찬란히 치장한 속에 황제의 면류관과 복색을 갖추었으니 곧 조조의 시체였다.

황제는 친히 관우묘에 나와서 소열의 소상 앞에 그 시체를 꿇어앉히고 목을 베었다. 이 일은 천고에 내려오던 귀신과 사람들의 분노를 시원하게 씻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일흔두 개의 무덤을 만들었다는 전설의 의혹을 통쾌하게 부수게 되었다.

è 직접 봄으로써 의혹을 불식시킴

è 그러나 강바닥에 있던 시체는 썩지 않았겠는가? 이 글도 허구일 수 있다. 허구를 깨부수는 허구?? 희한한 구도다.

 

166 장성 밖에 있는 백운탑 돌함 속에는 요나라 시대에 죽은 중의 시체가 있는데, 몸뚱이가 지금도 썩지 않고 부드러운 윤기가 돌면서 따뜻하나 눈은 감고 숨은 끊어졌다고 한다.

 

173 역졸들이나 말꾼들이 배웠다는 중국말이란 모두가 발음이 뒤틀린, 가짜 중국말이다. 이자들은 저희가 하는 말이 저들 자신도 무슨 말인지 모르면서 말하고 있다.

가장 더러운 냄새를 '고려취'라고 하는데 조선 사람들은 목욕을 잘 하지 않아 발 냄새가 흉하다는 것이요, 물건을 잃어버렸을 때는 '동이'라고 말하는바, 이는 '동이'가 훔쳤다는 의미다.

;'자 발음은 '', ''자 발음은 '' ''음의 반절인 바, 우리 사람들은 이런 줄 잘 모르고는 냄새가 좋지 못할 때는 '고려취'라 하고 다른 사람이 물건을 훔쳤다고 의심할 때는 '아무개는 동이'라고 해, 마침내 훔친다는 말이 되어 버렸다.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187 이러므로 뛰어난 명의는 병을 고치는 데 병이 들어 눕기 전에 고치는 것이요, 병이 다 든 후에 고치지는 않는 것이다. 병이 다 든 후에 고친다는 것은 병을 치료하는 법에서는 아주 하책일 것이다. 그나마 다시 아무것도 모르는 땡땡이 의원에게 병을 내맡긴다면 어찌 병이 나을 것인가? 심한 자로서 이익을 탐내는 자는 본디 병 없는 사람을 상대로 하여 공로를 세우고, 처음으로 의원에 종사하는 자는 심지어 사람을 희생해 가면서 의원 공부를 한다. <주역>에서 말한, '병은 약을 먹이지 않고 절로 낫게 한다.'는 말과 <논어> '남방 사람들은 간특하여 돈 벌기에만 몰두한다.'는 말은 그들을 두고 한 말인 것 같다.

 

192 선의란 좋은 옷입니다. 천조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다들 상상품 좋ㅇ느 옷 한 벌씩은 가지고 있어 무늬로 귀천을 표시합니다. 그러나 심의란 것은 귀천이나 남녀의 구별이 없고 길흉의 구별도 없이 꼭 같은 복장입니다. 이를 대포로써 만드는 것을 그 검소함을 표시하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좋은 옷감이 아니겠습니까?

 

201 나에게 묻기를

"만주 말을 아느냐, 몽고 말을 아느냐?"

하기에, 나는 농조로 대답하여,

"양반이 어떻게 만주 말이고, 몽고 말을 알 것인가?"

하고는 즉시 글로 써서 회회국 내력을 물었더니 한 사람은 머리를 흔들면서 다른 편을 쳐다보는 것이, 아주 글은 까막인 모양 같고, 한 사람은 흔연히 붓을 매만지며 한참 생각하더니 겨우 몇 자를 쓰는데 젖 먹던 힘을 다 들여 쓰는 것 같아 보였다.

è , 박지원도 중국어를 다 안다기 보다는 글자를 알기 때문에 곡정과도 글로써 대화한 듯하다.

 

207 옛날 양대년이란 사람이 젊어서 주한, 주앙 두 사람과 함께 한림원에 있었는데 이 두 사람은 이미 머리가 허옇게 세었다. 매사를 논의할 때마다 양대년은 그들을 모욕하여,

"두 영감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할 때에, 주한은 매우 불쾌하여

"그대는 늙은이를 그리 깔보지 마소. 필경은 이 백발을 꼭 그대에게 꼭 선사할 것이네!"

하였다. 주앙이가 있다가,

"백발을 남겨서 그를 주지 마오. 다른 사람이 또 그를 깔보는 것을 못하도록 해야지요."

하였다. 후일 양대년은 과연 나이 쉰 살도 못 살았다.

è 백발이 될 때까지 못살도록 저주함.

 

è 이 부분은 글들이 지나치게 짧아서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를 찾을 수 없었다.

 

224 청나라 때 왕월의 과거 시험 종이가 바람에 날려 우리 나라에 떨어졌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 종이를 사신 편에 부쳐 돌려보냈는데, 황제께 아뢰었더니 중국은 이 일을 기록하면서 '유구'라고 잘못 기록했다.

è 이게 말이 되니?

 

237 동악묘에 한 5리 못미처 황량대라는 곳이 있는데 이는 글자가 잘못된 것이다. <장안객화>에 당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면서 일찍이 군사를 이곳에 주둔하고 거짓 창고를 설치하여 상대방을 속였으므로, 세상에서는 이 땅을 '거짓말 양식'이란 의미의 '황량대'라 했다 하니, 이 말이 그럿듯하다.

 

240 내가 일찍히 풍윤현을 지날 때 현의 동북쪽에는 진왕산이 있는데 다만 가시덤불이 떨기로 자라고 있을 뿐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당 태종이 진왕으로 있을 때 이 산에 올라 가시나무를 보고 말하기를,

"이 가시나무는 우리 동리 훈장이 나에게 글 구절 떼는 것을 가르칠 때 쓰던 회초리다."

하고는 말에서 내려 절을 하였는데 그때 가시나무들은 모두 머리를 드리우고 엎드리듯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시방도 그 시늉을 내는 듯하다.

è 진짜? 당태종을 왜 동리 훈장이 가르치며 과연 회초리를 썼을까?

 

247 30년 전에 한 역관이 빈손으로 연경에 와서 장차 돌아갈 무렵에 그 단골 주인을 보고는 엉엉 울었다고 한다. 주인이 괴이쩍어서 까닭을 물었더니, 그는,

"압록강을 건너올 적에 몰래 남의 은을 맡아 가지고 오다가 발각되어 제가 가졌던 포와 함께 관청에 몰수당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빈손으로 돌아가려닌 살 길이 없어 돌아가지 못하겠습니다."

하면서 칼을 뽑아 자살하려고 드니, 주인은 놀라서 재빨리 끌어안고 가진 칼을 빼앗고는 물었다.

"몲수당한 은은 얼마나 되는가?"

"삼천 냥이올시다."

주인은 위로하면서,

"대장부가 몸이 없어지는 것이 걱정이지, 돈 없는 것이야 걱정할 게 있나. 지금 죽고 돌아가지 않는다면 처자들을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그대에게 돈 만 냥을 꿔 줄 터이니 5년 동안 식리를 하면 다시 만 냥은 더 얻을 것이네. 그때 가서 본전만 갚으소."

하였다. 역관은 돈 만 냥을 얻어 물화를 크게 무역해 가지고 돌아왔다. 당시에는 아무도 이 사정을 아는 자가 없어서 누구나 그의 재주가 신통하다고 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는 5년 만에 드디어 큰 부자가 되어 즉시로 사역원에 등록된 관적을 삭제하고 다시는 북경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 후 여러 해가 지나 한번은 가만히 북격 가능 친구에게, "연경 가서 만약에 아무 주인을 만나 안부를 묻거든 반드시 우리 집이 역병에 몰사당했다고 말하게나."하고 부탁하니, 그 친구는 이야기가 너무도 허황하므로 주저하였던바, 그 역관은 만약 그렇게만 하고 돌아오면 꼭 돈 백 냥을 주리라고 약속하였다.

그 친구는 연경에 가서 과연 그 주인을 만났는데, 그 주인은 역관의 안부를 물었다. 그는 부탁받은 그대로 자세히 말을 전했더니 그 주인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대성통곡을 하는데 눈물이 비 오듯 하면서,

"하느님 맙시사. 어찌자고 그런 착한 사람 집에 그 같은 참혹한 재앙을 내렸을꼬!"

하고는 드디어 돈 백 냥을 내어 주며 부탁하기를,

"그는 처자까지 다 죽었으니 제사 지내 줄 사람도 없을 터라. 그대가 고국에 돌아가거든 나를 위하여 50냥으로는 제물을 장만하여 제사를 지내 주고 50냥으로는 추후로 그의 명복을 비는 재를 올려 주소!"

하고 부탁하였다. 그 친구는 정신없이 놀랐으나 이미 거짓말을 해놓았으므로 할 수 없이 돈 백 냥을 받아 가지고 돌아와 그 역관의 집을 찾아갔더니, 벌써 참말로 역병에 걸려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몽땅 몰사를 하고 말았다. 그 친구는 크게 놀란 데다가 또 겁이 더럭 나서 그 돈 백 냥으로 주인 몫으로 재를 올리고는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 주인을 다시 볼 것인가.' 하면서 죽는 날까지 다시는 연경 걸음을 하지 않으리라 각오하였다.

è 이 이야기, 정말 반전인데?

è 보은하는 이야기인 줄 알았더니, 은혜를 모르는 자를 하늘이 처단한 이야기구나.

 

249 당성군 홍순언의 이야기

è 여인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녀가 보은한 이야기. 감동적이다.

è 취할 여자에서 인간 여자로 변신. 어찌하여? 위협을 가하던 자가 은혜를 주는 자가 되었다.

 

256 자네들이 모르는 말일세. 대체로 남에게 아쉬운 사정을 말하는 자는 언제나 제 의사를 떠벌려 먼저 신의를 자랑하면서도 어디고 그의 얼굴빛은 비굴하고 이야기는 중언부언하는 법이네. 그러나 아까 그 손님은 비록 옷과 신발이 허술하기는 하나 말은 간결하고 눈초리에 뱃심이 나타나고 얼굴에 수줍은 빛이 없으니 이런 이는 재물이 없어도 자족하는 사람일 것이네. 그가 시험해 본다는 일이 필시 작은 일이 아닐 터이니, 나 역시 그 손을 한번 시험해 보겠네. 안 주면 몰라도 돈 만 냥을 이미 줄 바에야 이름은 알아서 무엇 할 것인가?

è 이 일은 망한 경우, 실패의 원형이 되었을 것이다.

 

260 허생은 이러고야 은 10만냥을 변씨에게 내어 주면서,

"내가 한때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여 글공부를 끝내지 못하고 당신에게 돈 만 냥을 꾸게 되어 미안하오."

하였다. 변씨는 깜짝 놀라 일어서서 절을 하고는 사양하면서 십분의 일만 이자로 받겠다고 하니 허생은 크게 화를 내며,

"임자는 어째서 나를 장사치로 보는가!"

하고는 옷을 뿌리치고 가 버렷다.

è 가난하게 살던 선비들이 "나도 마음만 먹으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위로를 받기 위해 허생전을 쓴 것 같다.

 

267 내가 세 가지 계책을 말하였으되 너는 한 가지도 들을 수 없다고 하면서 그러고도 네 입을 조정의 신임받는 신하라고 하니, 대체 신임     받는 신하 꼴이 이렇단 말인가! 이 죽일 놈 같으니!

è 계책이 신통치 않다. 혹은 많이 급진적이다.

è 열을 내고 있다. 남자들의 허세와 존심의 세계. 열린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277 백탑사의 부도와 정각들의 황금 호로병 꼭대기는 때로 나무숲 위로 솟아 있고 수풀 저편 멀리 보이는 하늘빛은 푸른데, 맑은 아지랑이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푸근스럽게 만들어 마치 늦은 봄 날씨만 같았다.

 

284 사람에 비한다면 요순도 역시 보통 사람과 같지마는 만약에 좌우에서 원, 개 같은 어진 신하가 보필하지 않고 구차하게 망나니, 나무꾼 따위로 직위를 채울 뿐이라면 아무리 요순과 같은 성인이 있어서 일월성신과 별별 갖은 무늬로 수놓은 복장을 입고 영롱한 광채를 휘날리며 눈동자가 둘씩 있는 눈을 끔벅거린다 하더라도 저 혼자 오뚝 서서 어떻게 그 위대한 정치를 하겠습니까?

리상호 : 전설에 순 임금의 눈동자가 둘이라 한다.

è 눈 동자에 큰 점이 있었던 모양이다.

 

297 태자를 미리 봉하지 않는 법은 대대로 내려오는 청조의 법이다. 황자들로 하여금 저마끔 효도하고 우애하고 공손하고 검소함에 힘쓰도록 할 것인바, 이래서 천명을 기다릴 분이요, 형제간에 시기와 참소와 악심을 끊게 되는 것이다. 이 법이야말로 만대를 통하여 오래 두고 쓸 아름다운 법도이다. 명나라 간신 왕석작이 태자 세울 것을 청원하여 어진 태자를 세우지 않고 천계를 세웡 필경 천하를 망쳤다. 네가 왕석작을 본받을 것인가?

è 무한경쟁을 통해 적자생존시킴

 

306 저들로서는 근본 되는 학문의 이치를 찾아 냈다고 자칭하고 있으나, 뜻이 너무 고원하고 이론이 교묘한 데로 쏠려 도리어 하늘을 빙자하여 사람을 속이는 죄를 범하여 제 자신이 절로 의리를 배반하고 윤상을 해치는 구렁으로 빠지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다.

 

308 무릇 그림을 그리는 자가 거죽만 그리고 속을 그릴 수 없음은 자연의 세이다.

è 그려도 되는데.

 

대체 물건이란 불거지고 우묵하고, 크고 작고, 멀고 가까운 ''가 있다. 그림에 능한 자는 붓대를 대강 몇 차례 놀려 산에는 주름이 없기도 하고, 물에는 파도가 없기도 하고, 나무에는 가지가 없기도 하니, 이것이 소위 '뜻을 그린다'는 법이다.

 

317 석숭의 그 많은 재물도 생겨난 데가 있을 것임에도 아주 타고난 재물인 듯이 '이놈이 내 재물을 탐내는가?'하고 욕질을 하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소리인가?

è 원래 동산은 돌고 도는 것. 내 명의로 되어있다면 그 순간에는 정당한 내 것.

 

334 극락 세계 - 몇 길 되는 폭포는 흰 눈을 뒤번지는 듯 거품이 일어 사람으로 하여금 혹하도록 한다. 얼음을 새겼느니 물이 떨어지느니 하는 말은 다 헛소리요, 대체 유리를 녹여 만든 것이다.

 

è 이 사이 부분 그냥 기행글이 대부분임.

 

352 청나라의 학사에 대한 견해 - 박지원은 "그러나"를 정말 많이 쓴다.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헷갈린다. A 그러나 B 그러나 C.

 

358 내가 나이 열여덟 살 때 처음으로 창려와 동파의 '석고가'를 읽고 그 글을 기이하게 여긴 적이 있었고, 석고에 새긴s 글 전문을 얻어 볼 수 없음을 한탄했다. 오늘 내 손으로 석고를 어루만지면서 입으로 반적의 음훈비를 읽고 보니, 외국 사람으로서 어찌 행운이 아닐까 보냐.

è 내가 프랑스 미테랑 도서관을 보았을 때의 느낌일 것 같다.

 

363 만약에 나라를 얻은 임금이 충분한 자신을 가지고 천자의 지위를 얻었다면 이것을 하늘의 명령으로 볼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힘으로 얻었다고 볼 것인가? 하늘이 이미 천자의 지위를 명령하였고 자신의 힘을 들이지 않았다면 역시 자신에게 천하의 책임을 맡게 한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천하로써 자신의 이해에 이용하라는 것일까? 하늘이 이미 자신으로써 천하에 이익을 주고저 할진대 천하에 이익을 주는 방법은 역시 어떤 원칙이 있을 것이니, 그것은 자신이 하늘의 명령을 받아서 도탄 속에 든 만백성을 구해 낼 따름이다.

è 매우 의미심장한 분석이다. 천자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해야 하는가? 아니면 이 세상은 하늘이 천자에게 준 선물인가?(그냥 막 해도 되는). L은 전자를 거부하고 후자의 입장을 취하고 싶어한다.

 

369 비록 낙제한 과목이라도 꼬누는 법이 친절하여 작자로 하여금 똑똑히 낙제한 이유를 알도록 하였다. 정성스럽고 간절한 태도는 선생과 제자 사이에서 일깨우고 가르치는 태도 그대로이다. 큰 나라 시험장 제도가 엄격한 점과 고시하는 법이 자세하고도 주의 깊은 점은 과거 보는 자로서 넉넉히 유감이 없도록 해 놓았다.

 

378 슬프다! 충신과 의사란 나라가 망해 엎어진다 해서 조금이라도 그 간결한 충군 애국심을 늦추지 않고 본즉 진실로 천하 국가를 위하는 근본은 오로지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마음을 바로잡는 데 있는 것이다.

 

390 이같이 큰 절간에 단지 한 명의 늙은 중이 두서너 명의 젊은 중을 데리고 있을 따름이다. 행랑채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장인바치들이 거주하면서 물건을 만든다고 뒤법석이다. 서화의 장축들과 표구 장식들을 모두 이곳에서 하고 있었다. 동북쪽 모퉁이 높은 다락 안에는 13층 금탑을 세워 두었는데 조각과 그림이 훌륭하기는 귀신 솜씨로 된 것만 같았다.

 

403 사첩산이 원나라 지원 26 4월에 연경에 이르러 사 태후의 빈소와 영국공이 있는 곳을 찾아 절을 하면서 통곡하였다. 원나라 사람들이 그를 민충사에 보내 두었더니 벽 사이에 섰는 조아비를 보고 울면서, '여자라도 본받을 만하다.'하고, 이어 먹지 않고 굶어 죽었다."

 

413 그대! 그 강물 건너지 맙시사고

그토록 애태워 당부를 했건만

그대! 필경은 그 강물에 사라졌구나.

è 남자는 강을 건너고 여자는 말린다.

è 앞서 나온 "남자가 뜻을 이룬다 = 강을 건넌다"와 매치시켜 생각해보자. 남자가 강을 건너면 여자가 울고 남자가 강을 건너지 못하면 남자가 운다.

 

423 원시비서란 책에,

"고려의 학문은 기자로부터 시작되었고, 일본의 학문은 서복으로부터 시작되고, 안남의 학문은 한나라가 군현 제도를 세우고 자사를 두어 중국의 문화를 편 데서 시작하였는데, 뒷날 오대 말기에 절도사 오창문의 시기에 와서야 성황을 이루었다. 중국으로부터의 문화가 외지로 퍼져 나간 지 수천년 사이에 그들의 학문이란 모두 외국 티를 면치 못하여 어디고 군색하고 고루하여 성인의 교리를 계승하기에 부족하다. 그 이유는 대체로 그 소리와 발음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 학문의 현묘한 이치는 붓끝이나 혀끝으로는 전할 수 없으므로 서로 맞지를 않는 것이다.

 

430 우리 나라 기물들 중에는 일본 것을 본뜬 것이 많이 있으니 쥘부채도 고려는 일본에서 배웠고 중국은 고려에서 배워 갔는지? 중국에서 큰 부채를 '고려 부채'라 하여 만든 솜씨가 몹시 투박하고 조선 종이에다가 기름을 올리고 가는 서화를 그린 것을 매우 귀중하게들 여긴다고 한다.

 

444 오직 이같이 국가를 창건하는 시기에 있어서 우리 편에 항거하여 선봉으로 오는 자는 응당 용서 없이 무찔러 죽임이 당연했지마는 칼날과 창끝을 무서워하지 않고 충성을 다하여 싸우는 태도는 적군이라도 가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450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이야기는 역시 다 각각 다르니 용 새끼의 이름과 성질을 무엇으로 알 것인가? 옛날 이야기의 억측들이란 다 이와 같다.

 

465 우리 나라에서는 허투루 계피로서 좀 두터운 놈을 육계로 쓰고 있으니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나는 일찍이 이 이야기를 의원들이나 약국에 두루 말해 준 적이 있었다. 우연히 통주 어느 약포에서 육계를 찾아 보았더니 주먹만 한 놈을 내보이면서 값은 은 50냥이라고 하였다. 범생이란 사람이 나를 따라오면서 가만히 내게,

"이것도 진품이 아닙니다. 중국에서도 진품이 없어진 지가 벌써 20년이 되었습니다."

하였다.

 

479 왕원미의 '완위여펀'에는 여자로서 군관이 된 자를 실었다. 군사마 공씨 같은 이는 공고침의 어머니요, 정렬장군 왕씨는 왕흠의 딸이다. 당나라 행영절도 허숙기의 부하 왕씨, 당씨, 후씨는 모두 그 행영의 과의교위 출신 장교들이다. 진나라 여자 백경아가 거란의 회화장군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데 당 태종이 신라의 선덕여왕을 광록대부로 초증하고, 또 진덕여왕을 주국으로 삼아 낙랑군왕으로 봉하였으며 또 왕이 죽자 고종은 개부의동삼사를 추증하였던 것들을 알지 못하였다.

 

488 고기 가시가 목에 걸렸을 때는 개의 침을 먹고, 곡식 가시랭이가 목에 걸렸을 때는 거위의 침을 넘기면 즉시 낫는다.

è 이런 미신적인 의학이 왜 옳다고 생각하였는가? 현대 사회에도 이런 미신이 존재할까?

 

497 난산을 치료하는 방법으로는 행인 한 알을 껍데기를 벗기고 '' 자와 '' 자를 써서 꿀을 묻혀 양쪽에 갈라 붙이고 볶은 꿀로 환을 만들어 맹물탕이나 혹은 술을 마셔 넘긴다.

 

 

 

 

 

 

 

 

 

 

 

 

 

 

 

 

 

 

 

 

 

 

3. 내가 저자라면

 

 

 

 

2012년을 살면서 연암 박지원을 읽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그의 열하일기는 태풍 전의 고요 같다. 천자가 있는 나라로 여행을 간 (상대적으로) 유유자적한 양반의 이야기. 그가 죽은 후, 우리는 이용후생을 충분히 실현하지 못하였고 서양 문물과의 우리의 것 간의 현격한 강세 차이를 경험해야 했다. 한국의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근대사로 올수록 점점 더 힘들어진다. 나라를 잃었으며 타국에 의해 겨우 주권을 회복하였다. 이미 예견되어 있던 역사라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단 한번도 사대를 벗어난 적이 없었던 우리가 아니던가? 게다가 우리가 사대하였던 중국마저도 서양의 과학 문명 앞에서는 종이 호랑이처럼 무너졌다. 어째서 이러한 차이가 나타났는가? 서양인들이 특별히 더 똑똑했던 것도 아니요, 그들이 동양의 지식인들보다 더욱 열심히 공부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 어느 시점부터 동양 문명을 추월하기 시작하였다. 그 기원이 그리스 시대부터인지 아니면 코페르니쿠스때부터인지? 우리는 그 이유를 알아야만 미래를 과거로 회귀시키지 않을 수 있다.

 

박지원이 그토록 자랑스럽게 주장하였던 지구 자전설(서양은 땅이 둥글다고만 했지 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은 코페르니쿠스가 300년 전인 15세기에 주장할 때 이미 내포될 수 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박지원은 조선의 18세기에 가장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지식인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열하일기를 읽으면서 박지원이 보여주는 사고 체계에서 엄밀성이 떨어지는 것을 확인할 때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다. 이는 박지원의 문제가 아니다. 박지원에게 학문을 가르쳤던 선대까지 이런 엄밀한 과학주의적 사고를 가르칠 수 있는 바탕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어느 정도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실용적 학문을 천대하고 이를 다루는 일은 사대부의 것이라 여기지 않고 오로지 하인에게 맡기었다고 했다. 동양인들은 유교를 치국의 근본으로 삼으면서 이미 주어진 것을 어떻게 분배할까에 대해서만 논의하였을 뿐(물론 이마저도 잘 지켜지지 않았다) 더욱 잘살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유교는 오히려 계급을 공고히 하는 도구였다. 지식인들이 학문에 매진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입신양명을 위한 것으로, 이는 곧 계급을 유지하거나 더욱 상승시키기 위한 노력에 불과하였다. 이 소모적 노력이 다른 분야의 학문의 탄생을 배격하였고 학문 사이에도 계급을 만들었다(상공업이나 목축을 학문으로 부르지도 않았을 테지만).

 

과학적 사고력은 왜 계발되지 않았는가? 결과론적 해석일지는 모르겠으나, 어쩌면 무생물이 가득한 와중에도 물가에서 생명체가 태어난 것처럼 그리스 아테네는 과학적 사고력이 탄생할 수 있는 천혜의 환경이었는지도 모르겠다사기열전은 땅따먹기의 지략서라 부를만한데, 지나치게 넓은 땅과 이를 나눠먹기 위한 각축전 덕에 그리스의 아테네와 같은 실험적 도시 국가가 형성되지 못하였다사마천의 사기에서는 목숨임 오고가는 와중에 지략가들의 말빨과 허세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들의 말은 검증하고 사유할 시간 없이 바로 바로 적용되어야 했다. 이들은 치밀하고 천재적인 논리를 가지고 있지만 이 자체가 사물에 대한 유물론적 사유라고 보기는 힘들며 국가간의 싸움은 실시간이므로 이 와중에 새로운 무기를 실용주의에 입각해 개발하는 것은 템포의 실패이다. 전쟁전략과 치국, 그리고 "왜 살아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관한 사상은 발달하였으나 과학이 발전할 바탕은 이루지 못하였다. 더군다나 학자들이 추앙하는 이들 지략가들과 사상과들은 거의 소피스트에 가깝다. 이들의 사유에는 엄격함이 없다. 말로써 이기고 멋지면서 제자들이 많이 생기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이제 세계 10위권을 넘나드는 강소국이 되었다. 싸이가 빌보드 차트에 오르고 삼성의 스마트폰이 세계를 장악하였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박지원의 조선과 다른 나라가 되었는가? 나는 열하일기를 읽으면서 미국 생각을 참 많이 하였다. 아는 교수님의 칼럼을 읽은 적이 있다. 현대 한국사회에도 엄연히 신분은 존재하며 더욱 세분화되어 가고 있다. 지금의 계급은 돈과 학벌로 정의되는데 서울대, 연고대를 나오고 2대 이상 서울권 소재 대학을 나올 때 5두품 이런 식이다. 성골은 한국에서 학벌을 획득하지 않는다. 이들은 모두 미국에 나가 있다. 한국에서 서울대 연고대를 거론하는 세계는 이미 소외된 자들의 리그라는 것이다. 우리는 글로벌라이제션이라는 명목으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친다지만, 18세기에 문벌가 박지원이 청나라 말을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이미 성골 계급은 영어권에서 학위를 마쳤으며 이미 국적도 한국이 아닌 경우가 많다. 우리는 국가 관계에서 미국에 의존하고 있으며 현재 한국에는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 한 때 서양문물의 강펀치에 나가떨어지면서 중화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고 문화대혁명을 해야 했던 중국도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이 와중에 박지원이 사대를 불가피한 것으로 간주한 대목에서 역사적 수치심을 느낄 자격이 있는가? 우리의 21세기는 18세기와 무엇이 달라졌는가?

 

그래도 박지원의 글을 읽으면서 당시의 우리들 중 마냥 한심한 지식인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에 위안을 얻었다. 급진적으로 옳은 자들은 늘 외롭다. 심지어 박지원도 그러했다. 그러나 자기를 드러내보이고 산화시키지 않는다면 결코 세상은 변화하지 않는다. 1910년에 박지원을 연구해서 무엇하겠는가? 깨인 자들은 행동해야 한다. 박지원조차 보지 못했던 것이 있듯이, 오늘날의 우리도 눈뜨고도 당하고 있는 것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늘 생각하자. 깨어있기 위해 노력하자. 우리는 과거를 통해 배우고 미래를 예견하며 우리 시대의 몫을 제대로 살아주어야 한다. 어떻게? 멋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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