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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19일 11시 41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한 나이 29살까지 연암은 어찌 살았나?

 

1737년에 반남 박씨 박사유와 함평 이씨 사이 2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휘는 지원, 자는 중미, 호는 연암이었다. 조부 박필균은 노론을 지지했던 선비로 사간원정언, 경기관찰사, 예조참판, 공조참판 등을 지내고 지돈녕부사에까지 이르렀다. 조부의 신중한 처신과 청렴한 생활은 연암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16세 때 관례를 올리고 유안재 이보천의 딸과 혼인했다. 장인 유안재에게 맹자를 배우고 처숙인 홍문관 교리 이양천에게 문장 짓는 법을 배웠다. 18세에 우울증으로 고생했다. 사람들을 청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고 읽으며 우울증을 고쳐보고자 했다. 거지 광문의 이야기로 광문자전을 썼다. 19세 때 연암의 학문을 지도했던 영목당 이양천이 40세로 별세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제영목당이공문을 지었다. 20세 때 김이소, 황승원, 홍문영, 이희천, 한문홍 들과 북한산 봉원사 등을 찾아 다니며 공부했다. 봉원사에서 윤영을 만나 허생의 이야기를 들었다. 23세 때 어머니 함평 이씨가 59세로 돌아갔고, 그 해 큰 딸이 태어났다. 29세때 금강산을 유람하고 총석정 해돋이등을 썼다. 이 글은 열하일기에도 되풀이 수록했다.

 

삼십대, 벼슬길을 단념, 실학 선비들과 어울리다.

 

30살에 장남 종의가 태어났다. 홍대용이 중국 문인들과 나눈 필담을 정리해 건정동회우록을 냈다. 박지원이 거기 서문을 썼다. 홍대용과 중국 사람들의 우정을 예찬하고 청을 무조건 배격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글이었다. 31세때 아버지 박사유가 돌아가셨다. 부친상을 당하고 장지 문제로 녹천 이유집안과 시비가 벌어졌다. 이 일로 상대방의 편을 들어 상소를 올렸던 이상지가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난 것을 보고 이때부터 연암도 스스로 벼슬길을 단념하였다. 삼청동에 있는 무신 이장오의 별장에 세를 얻어 살기 시작했다. 32세때 백탑 근처로 이사해 이덕무, 이서구, 서상수, 유금, 유득공 들과 가까이 지냈다. 34세 때 감시의 양장에서 모두 일등으로 뽑혔다. 입궐하여 영조에게 극찬을 받았다. 많은 이들이 박지원을 급제시켜 공을 세우려 했으나 회시에 응하지 않거나, 응시한다 하더라도 시권을 제출하지 않거나, 제출하더라도 노송과 괴석을 그린 그림을 제출하여 벼슬에 뜻이 없음을 밝혔다. 벗들과 북한산의 대은암에 놀러가 시와 문장을 주고받은 것을 기록한 의인과소인배를 썼다. 35세때 큰 누님 박씨가 43세로 돌아가셨다. 누님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백자증정부인박씨묘지명을 썼다. 이덕문, 백동수 들과 송도, 평양을 거쳐 천마산, 묘향산, 속리산, 가야산, 단양 등 명승지를 두루 유람했고, 황해도 금천 연암골을 보고는 몹시 좋아했다. 36세때 식솔들을 처가로 보내고 서울 전의감동에 혼자 살기 시작하였다. 가까이 지내던 홍대용, 정철조, 이서구,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 여러 벗들과 더욱 친하게 사귀었다. 이서구가 하야방우기를 쓰자 사흘째 끼니를 거르고를 써서 자신의 생활을 그려 보였다. 37세에 유득공, 이덕무와 서도를 유람했다. 허생의 이야기를 해 주었던 윤영을 또 만났다. 38세에 송나라 이당의 그림 장하강사가 우리 나라에 들어온 내력을 기록한 제이당화를 썼다.

 

마흔줄, 황해도 연암골 은둔 선비, 삼종형을 따라 북경을 여행, 열하일기 쓰다.  

 

41세에 장인 이보천이 64세로 돌아가셨다. 장인을 추모하는 글을 썼다. 42세 때 사은진주사 일원으로 북경으로 떠나는 이덕무와 박제가를 전송했다. 이 해에 가난한 집안 살림을 도맡아 했던 형수 이씨가 55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홍국영의 견제를 피해 연암골로 은둔하였다. 초가삼간을 장만하고 손수 뽕나무를 심었다. 형수의 유해를 연암으로 옮겼다. 유언호의 도움으로 개성 금학동에 있는 양호맹의 별장에 머물면서 이행작, 이현겸, 양상회, 한석호 등을 가르쳤다. 다시 연암골로 돌아왔다. 개성에서 만난 유생들이 따라와서 그에게 글을 배었다. 43세 때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이 규장각 검서로 발탁되었다. 홍대용에게 편지를 써 연암골 생활을 전하며 세 사람의 기용을 축하했다. 1780 44세 때 홍국영이 실각하자 서울로 돌아와 처남 이재성의 집에 머물렀다. 삼종형인 금성도위 박명원을 따라 북경으로 갔다. 5월에 떠나 6월에 압록강을 건넜고, 8월에 북경에 들어갔다가 열하에 들러 다시 북경으로 돌아와 10월에 귀국하였다. 돌아오자마자 열하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둘째 아들 종채가 태어났다. 45세때 박제가가 쓴 <북학의> 서문을 썼다.  47세때 벗이었던 담헌 홍대용이 53세로 죽자 손수 염을 하고 나의 벗 홍대용을 써 슬퍼했다.  

 

오십대, 벼슬길에 오르다.

 

50 7(1786)에 유언호가 천거하여 선공감역에 임명되었다. 다음 해에 부인 전주 이씨가 51세로 죽었다. 박지원은 그 후 죽 혼자 지냈다. 큰 형 화원도 그해 58세로 죽었다. 연암골에 있는 형수의 무덤에 합장했다. 형을 보내고 쓴 시를 보고 이덕무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부인이 죽은 지 1년 만에 맏며느리 덕수 이씨가 죽었다. 끼니를 끓여 줄 사람이 없어 주위에서 다시 처를 얻으라고 했으나 듣지 않았다. 종제 박수원이 선산부사로 나가있는 동안 계산동 집을 빌렸다. 53세때 평시서주부로 승진했다. 54때 제릉령에 임명되자 한가로운 곳에서 마음대로 독서하고 저술할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했다. 사복시주부, 사헌부감찰로 임명받았으나 사퇴하고 연암골에 하루 이틀 머물 수 있는 제릉령에 머물렀다. 55세 때 한성부판관에 임명되었다. 겨울에는 안의현감으로 부임해 60세까지 안의현감으로 일했다. 흉년이 들자 자기 녹봉으로 구휼하고, 아전들이 포탈한 곡식을 원래대로 채웠다. 5년동안 둑 공사 부역으로 힘든 일이 없게 했다. 임기를 마친 후 서울로 돌아왔다. 57세에 열하일기로 잘못된 문체를 퍼뜨린 잘못을 속죄하라는 정조의 하교를 받았다.

 

육십대, 관직 은퇴후 서울로 돌아와 쉬다.

 

61 7월에 면천군수에 임명되자 임금을 알현하게 되었다. 문체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나누었다. 연암이 일하던 면천군에 천주교가 성행했으나 천주교도들을 크게 벌하지 않고 기회를 주어 방면했다. 63세 봄에 흉년이 들자 안의에서 했던 것처럼 봉록을 덜아 백성을 구휼했다. 농서 <과농소초>를 썼다. ‘부자들의 토지를 나누어 주라가 부록으로 붙어 있는데 중국에 갔을 때 본 것들과 우리 나라에 시행할 수 있는 것들을 묶어 14책으로 내었다. 정조가 이 책을 보고 농서대전을 박지원에게 편찬케 해야겠다는 말을 하였다. 64 1800년에 정조가 승하하고, 8월에 박지원은 양양부사로 승진했다. 65세에 양양부사를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왔다. 69 1805 10 20일 가회방 재동 집의 사랑에서 죽었다. 홍대용이 그랬던 것처럼 반함하지 말고 다만 깨끗이 씻어 달라고만 유언을 남겼다.       

 

저자에 대한 개인적 평가

 

나의 저자조사의 빈천함은 28권째에 이르러서도 나아질 기미가 없네. 마감일 새벽에야 헐레벌떡 책의 왼날개나 뒤쪽 저자 약력을 베껴적는 형편이다. 궁금한 것을 못 찾아보고 지나간다. 2주간 같은 저자의 책을 연달아 읽으니 좋다. 기억과 궁금증이 살아있는 동안 연작물을 읽는 때가 또 있었던가? 이번에는 궁금증을 제 손과 발로로 해소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열하일기를 읽으면서 박지원의 글이 장난기 있고, 어수룩해보이지만 눈이 매섭고, 뜻이 원융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은 저자다. 몇 가지를 메모한다.

 

첫째, 정민교수님의 책 중에 연암과 관련된 것은 무엇일까?

다산을 연구하기 전에 연암에 홀릭한 10년이 있었댔다. 정민교수님의 연암 사랑은 연암의 어떤 면을 비추고 있을까? 정민교수님의 책을 두 권 읽었다. 한시미학산책은 레이스 기간에, 다산선생지식경영법은 지난 주에. 거기에 인용된 연암의 사례는 갑자기 눈 떠서 집 가는 길 잊어먹었거든 다시 눈을 감으라는 거하고 성 쌓는데 벽돌이 나으니 돌이 나으니 논쟁이었다. 직접 만나러 갔을 때 정민선생님은 질문을 제기하고 저만치 빠져버리고 딴 소리를 해 대는 연암과 무릎 아래 앉혀놓고 시시콜콜히 잔소리를 해 매만지는 다산은 가르치는 스타일이 다르다 했었다.

 

둘째, 그가 유쾌상쾌호쾌하면서도 대안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는 이유가 있을까?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와 본 대로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려면 이해득실에서 자유로운 게 필요하다. 연혁을 읽어보니 36살에 식솔들을(처와 11) 처가로 보내고 자기는 혼자 서울서 방을 얻어 살다가 천지를 주유하다 연암골로 들어갔다. 친구가 보낸 편지에 사흘간 끼니를 굶었다는 답장을 보낸 건 매우 생활이 곤궁했다는 거다. 작가여서 식구들을 건사하는 책임보다 글 쓰는 걸 우선했던 걸까? 그건 좀 책임감이 없어 보이기도 한데. 과거에 합격할 실력을 갖추었음에도 답안지를 엉뚱하게 낸다든가 2차 시험을 결시한다든가 하는 건 과거를 통해 가는 길에 대한 미련이 전혀 없다는 의미였다. 마음만 먹으면 벼슬을 할 수 있는 집안, 실력인데도 선택해서 재야에 남은 이는 그것을 얻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이들과는 다를 거다. 가난하고 지위가 없으나 당당하고 어딘가 무서운 데가 있다. 게다가 웃긴 캐릭터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가 매우 자기 감정에 진실한 사람인 것 같다.    

 

셋째, 연암은 소설을 자기 생각의 표현 수단으로 삼았다. 이유가 있을까? 그리고 과연 효과적인 수단이었을까?

상권에는 범의 꾸중을 받는 북곽선생이 나오고, 하권에 허생전이 있었다. 대략 읽어보니 이건 양반사회를 비판조롱하고, 새로운 이상세계를 꿈꾸는 이야기다. 언뜻 보기에 소설이고, 지어낸 이야기라고 하면 누가 뭐랄 게 없는 것 같다. 연암은 설명하는 방식보다는 미리 보여주는 방식이 더 어울리는 것도 같다.

 

넷째, 이덕무, 유득공, 홍대용, 박제가, 연암 박지원이 모두 교류가 있었다. 정조, 영조 1800년대 근간이다. 역사책에서 실학파의 중요인물명으로 거론되던 굵은 이름들이다. 중국에 사신으로 가는데 배웅을 나갔다든가, 편지를 주고 받았다든가 이야기가 있으니, 어떻게 이런 중요 인물들이 모두 모이게 되었을까? 이 곳은 지금은 어디일까? 지금은 누구일까? 어떤 시각을 가지고 움직이는 사람들일까? 우리 나라에 대한 시각과 함께 세계전체에 대한 시각을 함께 가진 이들일 것 같은데.     

 

연암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야기를 조금 적어둔다. 열하일기를 읽기 전에 읽은 책 <다산선생지식경영법>을 이 책을 읽으며 써먹었다. 배운 걸 적용하는 즐거움이 찰지다. 그걸 읽고 열하일기를 읽으니 좋은 점. 우선연구원 읽기 방식에 대한 궁시렁이 현저히 줄었다. 초서를 하면서 읽어라, 정해진 일과대로 정해진 분량을 읽어라, 질서-질문을 휘리릭 메모해두어라, 고전을 읽어라, 돌아가는 미련퉁이의 방식처럼 보이는 이게 스테디 & 슬로우 황소걸음이 히말라야를 넘는 지름길, 당구경첩법이다. 네 문장의 뿌리를 든든히 하는 기초작업이지 다산 선생의 친절한 잔소리가 쟁쟁 울려왔다. 남과 북이 합심해서 만든 겨레고전선집을 읽는 게 자랑스러웠다. 이중에서 실천이 안되는 건 매일 정해진 분량을 정해진 시간에 읽는 거다. 이번주도 막판 초치기 벼락치기 했고, 마감시간 못지키고 근무시간을 헐어서 쳤다. 또 하나는 자구에 얽매이고, 인상에 희번득이며 맑은 샘물이 나올 때까지 삶에 적용해 생각해보지 못하고 흙탕물만 끼적거리고 만다. 연암의 책을 읽으며 얻는 것은 다산의 책을 읽으며 얻는 이런 명시적, 구체적 노하우들이 아니라 근본적인 질문이리라 기대한다. 나는 수업시간에 선생님들이 했던 농담만 새겨들었던 학생이라 그가 치고 빠질 때 엉뚱한 것에만 집착할까 살짝 경계한다. 그가 나에게 제기해 들이미는 시퍼렇지만 웃긴 포장지에 쌓인 근본적인 질문을 설레며 기다린다.      

 

2.   내가 저자라면

 

1)   목차와 뼈대

 

열하일기는 1780년 박지원 44세 때 삼종형인 금성도위 박명원을 따라 북경으로 갔던 여행기다5월에 떠나 6월에 압록강을 건넜고, 8월에 북경에 들어갔다가 열하에 들러 다시 북경으로 돌아와 10월에 귀국하였다. 황제의 생일축하 사절단으로 갔는데 황제가 여름별장으로 나가있어서 북경에서 열하까지 가야했다. 거기까지 갔던 길을 소상히 그렸다. 돌아오자마자 열하일기를 쓰기 시작해서 4년 동안 썼다. 북경에서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의 여행기는 중복되므로 생략하였다. 각 시기마다 제목을 붙였고, 3권으로 구성된 각 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책에 수록된 지도를 참조한다. 

 

상권 : 압록강을 건너서 북경 찍고, 열하까지 가는 동안의 기록.

     [도강록, 성경잡지, 일신수필, 관내정사, 막북행정론(북방여행기)]

중권 : 열하에 머무는 동안과 다시 북경으로 돌아오는 과정의 기록 외 쪽글

      [태학유관록, 환연도중록]

하권 : 여행여정보다 쪽글들을 모아놓은 글들

       [피서록, 옥갑야화-허생전, 황도기략, 공자묘 참배]

 

매일 일기를 위주로 써나가다가 단독 꼭지글로 독립해서 쓴 것은 그것을 밝혀놓았다. 이런 식이다.

 

144 나는 한군데 골동품을 사고 파는 가게에 들렀다. 상점 이름은 예속재라고 하는데 수재 댓 명이같이 경영을 한다고 한다. 다들 한 번 오기로 약속하였는데 이 집에 와서 주고받은 이야기는 속재필담에 싣기로 한다.

 

2)   장점과 보완점

 

묘사가 매우 뛰어나다. 사진기가 없었던 시절에 매의 눈보다 더 매서운 작가의 눈이 순간을 사진찍듯이 남겨놓았다. 또한 눙치고 해학적인 태도가 있어서 쉽고 즐겁게, 만져지듯, 보여지듯 읽힌다.

 

로드무비 같은 일종의 성장여행기다. 오감과 육감이 활발히 열려 깨어 있다. 길 위에 있는 박지원의 살아있는 레이다에 들어오는 모든 것에 대해 상세히 느끼고 반응하고 있다. 다른 여행기들을 읽었을 때처럼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진다.   

 

번역이 쉽고 아름답다. 아름다운 우리 말로 되어 있다. 근데 낯설어서 뜻을 모르겠는 단어들과 종종 맞부닥쳤다. 북한에서는 통용되는데 남한에서는 두루 쓰이지 않는 말이어서인지, 내 어휘가 부족해서인지. 둘 다겠지.

 

뒷 쪽 부록에 있는 박지원 생애와 여행일정 소개가 도움되었다. 그런데 작품과 생애에 대한 해석은 도움이 덜 되었다. 참고할 만하지 않았다. 중립적인 것을 다루어주었으면 좋겠다. 이건 북한의 학자들이 나름 정치색을 가지고 재해석했기 때문인데 그 해석이 편파적이었다. 보리출판사의 출간의도는 조선민주주의인문공화국 문예출판사의 <조선고전문학선집>을 가능한 한 원문 그대로 낸다는 것이었는데 이것에 대해 남한의 학자들은 어떻게 보는 지 그런 다른 시각의 글을 덧붙여 두었으면 좋았겠다.     

  

3)   감동적인 장절

 

3.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열하일기 ()

 

태학관에 머물면서

 

29 오른편 행랑채로 들어가 보니 역관 세 사람과 비장 네 사람이 한 구들간에 같이 자고 있었다. 고개를 마주 대고 다리들을 포갠 채 아랫도리도 가리지 않고는 코들을 드르렁드르렁 골고 잤다. 한쪽에서는 병 모가지에서 물 따르는 소리가 나는가 하면, 한쪽에서는 잘 들지 않는 톱으로 나무 켜는 소리가 나기도 하고, 더러는 사람을 나무라는 듯 혀 차는 소리를 내는가 하면 한쪽에서는 두덜두덜 누구를 원망하는 소리도 들렸다. 이역만리 길에 고생을 함께 하고 숙식을 같이 하여 정은 응당 골육간이나 다름없어서 생사라도 같이 할 터인데 한 자리에 누워서도 저만끔 딴 꿈을 꾸면서 속 배짱들은 초나라, 월나라 사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잠꼬대 장면 묘사

 

33 덕보는 웃으면서 말하는 것이 무엇을 씹은 것이 목구멍 속에 끼여 있듯이 발음이 분명하고 똑똑하지를 못했다.

 

34 갑자기 사람 물리치는 쉬이소리가 나면서 물을 끼얹듯이 잠잠해지면서 모두들 황자가 온다고 수군거렸다. 말을 탄 사람 하나가 대궐로 들어가는데 따르는 사람들은 모두 말에서 내려 걸어서 따랐다. 여섯째 황자 영용이라고 한다 얼굴빛은 희나 빡빡 얽은 곰보다. 콧대는 납작하고 광대뼈가 튀어나와 넓적하고 눈알 흰자위가 크고 눈에 삼시울이 끼고 어깨가 큼직하고 가슴이 떡 벌어져 몸집은 튼튼하게 생겼으나 아무 데도 귀한 티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글을 잘 짓고 그림도 잘 그려 지금 사고전서 총재관으로 인망이 높다고 한다. 내가 얼마 전 강녀묘에 들렀을 때에 벽에 치장해 둔 셋째 황자와 다섯째 황자의 시폭을 보았다. 다섯째 황자의 별호는 등금거사인데 시는 쌀쌀하고, 글씨도 메말라 재주는 있어 보였지마는 황실 자손으로서 부귀스러운 기상이란 찾아볼 수 없었다.

등금거사는 호부시랑 김간의 조카인데 김간은 김상면의 종손이다. 김상명의 할아버지 되는 사람은 본디 의주 사람으로 중국에 들어와 예부상서 벼슬까지 지낸 웅종 때 인물이다. 김간의 누이가 귀비가 되어 건륭의 총애를 받았다. 황제는 귀비의 소생인 다섯째 아들에게 늘 마음을 두다가 그가 연전에 일찍 죽어 시방은 영용이 단벌 귀여움을 받고 있다고 하는 바, 작년에는 서장까지 가서 반선을 맞아 왔다고 한다. 죽은 사람의 시를 보면 쌀쌀한 맛뿐이고, 산 사람의 외양을 보면 귀티조차 없으니 황제님 집안일도 어찌된 셈인지 모를 일이구나.

ㅋㅋㅋ 솔직하다. 속시원하다. 연암은 황제한테도 기가 안죽고 자기 할 말을 다 하네

 

37 중국에서도 이 풍습이 역시 고질이 되다시피 하여 납폐를 하고도 성례를 않았거나, 성례를 하고도 합궁이 없은 채 잘못 불행이 있을 때는 평생 수절을 하지요. 이것은 또 약과랍니다. 서로 친숙한 집안끼리는 뱃속에 든 아이를 서로 약혼시키기도 하고, 머리에 쇠똥도 안 벗고 이도 갈기 전에 부모들끼리 말이 있다가 한번 사내 편에 불행이 있을 때는 색시는 독약을 마신다, 목을 맨다 하여 순장을 청하니 이런 괴변이 있겠소

젊잖은 사람들은 멀쩡한 처녀가 한번도 보지 못한 남의 집 총각의 시체를 따라 바람이 났다고 흉을 보기도 하고, ‘절개 지키는 화냥질이라고도 합니다. 국법으로도 엄하게 금하여 부모의 죄로 습속까지 되고 말았으니, 이런 일은 동남 지방이 더 심하답니다. 그러니까 식자의 집안에서는 여자가 성년이 된 뒤에야 비로소 통혼을 하게 되었지마는 이것도 후세에 와서야 시작된 일이랍니다.

답답하구나. 머리쇠똥? ?

 

41 곡정은 다시 말을 이었다.

여기 또 담배로 말하자면 만력(1573~1619) 말년에 절강 지방에 두루 유행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이 막히도록 취해 넘어지도록 만드는, 천하에도 몹쓸 풀이라 할 수 있을 것이오. 입에 맞거나 배를 불릴 음식이 아닌데도 금싸락 같은 곡식과 맞잡아 일들 옥토에서 재배하여 부녀자와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고기보다 더 좋아하고 밥보다도 더 즐겨 쇠붙이와 불로써 입에 처물리는 버릇이 생겼으니, 이것도 역시 세상 운수라고 해야 할 지, 변괴라고 이보다 더 클 수 있나요? 선생께서도 이것을 즐기시는지요?”

 

43 이 풀이 본디 일본서 난 것이 아니라 원래는 서양서 온 것으로 아미리샤왕이 온갖 풀을 맛보다가 이 풀을 얻어 백성들 입 안에 나는 창을 고쳤답니다. 사람의 비장은 오행으로 치면 토에 속하여 허하고 냉하고 습하여 벌레가 생길 수 있는데, 입에까지 벌레가 번지면 당장에 죽게 됩니다. 그래서 말하자면 불로써 벌레를 잡는 것으로 대체 불이란 나무를 이기고 흙을 이롭게 하는 이치에 근거하여 토질과 습기를 없애게 되고 앉은자리에서 신효를 보게 되기 때문에 이것을 영초라고도 합니다.

아하하하하, 흡연자의 구라가 수준급. 정말 이렇게 믿었을까? 담배에 대한 그림책이 있다면 이런 걸 넣어도 좋겠다. 아이들이 믿을라.

 

50 길에서 웬 새파랗게 젊은 중이 덜썩 높은 말을 타고 검정 공단으로 만든 모난 관을 쓰고 몸에는 공단도포를 입었는데 얼굴도 잘났을 뿐만 아니라 차림도 깨끗하였다. 그런데 괴상스럽게도 그 중은 의기양양, 기가 나서 가는 도중에 웬 큼직한 노새를 탄 사람과 만나 각각 말 잔등 위에 앉은 채 흔연히 손을 잡고 인사를 하더니 갑자기 내색이 달라졌다. 그러더니 둘이 서로 큰 소리를 주고받고 하다가는 필경 말 위에서 손찌검을 시작해 서로 두 눈을 부라리고 한 손으로는 멱살을 잡고 한 손으로는 머리를 쥐어질렀다. 노새를 탄 자가 몸을 한 옆으로 비키다가는 모자가 떨어져 목에 걸렸다. 노새를 탄 자도 역시 허우대가 큼직하고 건장하게 생겼으나 머리가 희끗희끗한 것이 젊은 중에게는 좀 부대끼는 편이다. 둘이 마주 안고 겨루다가는 안장에서 한목 내려와 처음은 노새 탄 자가 중을 걸타고 앉다가 이윽고 중이 자반 뒤집어 노새 탄 자를 되걸타고 저마끔 멱살들을 틀어쥔 채 주먹질은 못하면서 마주 얼굴에 대고 침만 서로 뱉고 있었다. 주인 없는 노새와 말은 말뚝처럼 마주 보고 서서 움쩍도 않은 채 두 사람은 길을 가로막고 누워 겨루고 있는데 굴러선 구경꾼도 없고 말리는 사람도 없이 한편은 치켜 바라보고 한편은 굽어 노려보면서 서로 헐떡헐떡 씨근씨근할 따름이었다.

싸움 묘사 훌륭

 

 52 나는 소리를 쳐 데울 것 업이 그대로 가져오라고 했다. 심부름꾼은 빙그레 웃으면서 술을 따라 가지고 와서 먼저 작은 잔 두 개를 탁자 위에 늘어놓기에 나는 담뱃대로 휙 쓸어 잔을 넘어뜨려 치우고 큰 보시기를 한 개 가져오라고 소리를 쳤다. 내가 술을 한꺼번에 따라 단숨에 들이마셔 버리니 여럿이들은 서로 저마끔 얼굴을 쳐다보면서 깜짝들 놀랐다. 아마도 내가 술을 본때 있게 마시는 것을 보고 놀랍게 여기는 모양이다. 대체로 중국 사람들이 술 먹는 법이란 얌전하디 얌전하여 아무리 한여름철이라도 으레 데워 먹는다. 비록 소주라도 으레 데워서 잔은 은행 깍지만큼씩 한 것으로 이빨에 걸고 쪽쪽 빨다가는 그나마 잔에 남겨 탁자 위에 놓았다가 , 참 이 맛이군하니 좀처럼 취해 거꾸러지는 일이 없다. 되사람들도 술 먹는 조격은 역시 비슷하고 보니 속담에 대포 떼기란 눈 닦고 볼 수 없었다.

으하하하하

 

56 참말 당시의 소의였던 언니며 누이들에게 오늘의 이 장관을 보였던들 그들은 영락없이 자리에 드러누워 울며불며 이런 궁실을 지어달라고 졸랐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 있어서 황제는 비록 해주고 싶었을 것이나 그의 고문격인 안창, 무양 같은 무리는 다들 도학 선비들로서 경서나 인용하면서 그것을 만류했을 것이니 황제의 역량으로써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설혹 이를 했다고 치더라도 모르기는 하려니와 맹견의 붓대로는 이를 묘사하여 무어라고 떠벌렸겠는가?

으하하하하

 

63 사신은 비록 두 말 않고 활불을 보러 가기는 했지만 속으로는 불평이 없들 않았고 역관들은 그저 무슨 사단이나 생기지 않을까 하여 엄벙뗑 어물쩍 하는 것이 일쑤요, 하인들은 마음속으로는 벌써 서장중의 목을베고 뱃속으로는 황제를 비방하여 소위 천하의 주인으로서 한 가지 거조라도 신중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속으로 투덜댔다.

숙소로 돌아오니 중국 양반들은 모두들 내가 반선을 만나 본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부러워하면서 입에 침이 없어 그의 도술이 신통한 것을 치켜세웠다. 이렇게 마음에도 없는 아첨은 세상에도 못볼 풍조로서 예로부터 세상 인심이 얼룩덜룩하고 좋고 나쁜 것은 모두가 우두머리에 달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학지정의 처소에서 술을 한 잔 했다. 이 날밤에 달빛이 찢어지게 밝았다. (이야기는 황교문답에 싣기로 한다.)

하루 일을 가지고 일기, 황교문답, 찰십륜포, 반선시말을 썼다.

 

66 여럿이 곁눈질을 해보면서 말하기를 황제는 이제 여섯 살 난 황녀를 화신의 어린 아들과 약혼시켰다고 한다. 황제는 나이가 많아지면서 성미가 괄괄해져서 툭하면 좌우에 있는 자들이 매를 맞기 일수인데 황제가 그 황녀를 가장 귀여워하므로 더러 황제가 성을 몹시 낼 적에는 궁녀들이 흘제 어린 황녀를 안아다가 황제 앞에 두면 황제는 절로 성이 풀어져 버린다고 한다.

황제도 딸바보, 누구든 이런 대상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다행.

 

73 얼음 속에는 누에가 살고 불 속에는 쥐가 살고 물 속에는 고기가 살아 가지각색 생물들은 어디나 붙어 있는 곳이 저들로 보아서는 다 땅입니다. 만약에 달에도 세계가 있다면 오늘 이 밤에 두 명의 달세계 사람이 난간 머리에 마주 서서 달빛 아닌 땅빛이 차고 기우는 이야기를 아니 한다고 누가 알겠습니까?

(얼음 속에 산다는 누에는 중국 전설에 빙잠이라 하여, 이 누에실로 짠 비단은 불에도 안 탄다고 한다. 불 속에 산다는 쥐는 화서라는 <산해경> 나오는 동물)

바꿔보기, 빙잠과 화서가 재미있다. 방한복과 방열복 소재에 대한 상상이잖아.

 

북경에서 돌아오는 도중에 (환연도중록)

 

94 본편은 박지원이 열하에서 여정을 완료하고 다시 북경으로 돌아오던 중의 잡관과 소감을 역시 일기체로 서술한 것이다. 박지원이 중국 여행에서 자기 여정을 표시하는 일기체 서술은 본편에서 북경에 돌아오는 것으로 단락을 짓는다.

이 밖에 각 편들은 열하와 북경에 머물 때의 견문과 담화들을 별도로 정리하여 따로 제목을 정하고 논술하였다. 박지원은 자기의 방대한 저술을 협소한 기행체 서술에 제약받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이와 같은 편집 체계를 설정한 것 같다.

 

96 이렇게 출발을 독촉하는 것이 우리 측이 다시 문서를 못올리도록 헤살하는 수단이었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곧장 길을 떠나니 벌써 정오가 지났다. 뽕나무 아래 사흘 밤을 자도 오히려 잊을 수가 없다는데 나는 더구나 우리 선생님을 우러러 쳐다보면서 엿새 밤이나 묵었음에랴. 더구나 거처했던 집은 맑고 깨끗했고 보니 연연한 정을 절로 금치 못했다. 나는 일찍부터 과거를 단념하여 진사 한 자리도 얻지 못하고 보니 비록 태학에서 글 공부를 하고 싶었으나 할 수 없었다. 이번 참에 뜻밖에도 고국을 떠나 만리 변방에 와서 엿새 동안이라도 태학관에 묵은 것은 마련되었던 운수 같으니, 이것이 어찌 우연한 일일까?

공자 관련된 속소에 묵었던 것을 많이 감사하고 있구나.

 

103 검정 가죽으로 대가리를 덮어 씌워 눈을 못 보도록 가렸다. 이처럼 매나 독수리 같은 새는 눈을 가려 마음대로 무엇이나 못 보도록 하여 함부로 날아 다리를 상하게 한다든가 정력을 허비하지 않게 하고 눈 정기를 외곬으로 기르기 위함이다.

이걸 사람에게도 적용할 수 있을까?

 

111 중은 점점 기가 죽어들어 다시는 감히 입을 못 떼는데 춘택이는 되는대로 욕을 퍼붓고 세도를 기대로 더 즛이 나서 툭하면 황제를 팔고 보니 황제도 아마 이때쯤은 두 귀가 필시 간지러웠을 것이다. 춘택이가 말끝마다 황제를 쳐들어 세를 믿고 허풍을 치는 꼴이란 보는 사람의 허리를 끊도록 하였다. 저 무지막지한 중인즉 진정으로 겁이 나서 황제님 석 자가 천둥 소리나 귀신 소리 같이만 들리는 모양이다. 춘택은 벽돌장 한 장을 뽑아 가지고 치려고 하니 중 두 명은 한목으로 웃으면서 달아나 숨었다가 아가위 두 개를 가지고 나와서 웃으며 바치면서 첨심환을 청한다. 이자가 당초에 실랑이를 일으킨 것도 실상 청심환을 짜내려고 든 것이다.

깔깔깔.

 

118 전번에 갈 적에는 군기대신이 도중에서 맞아주고, 낭중은 물 건너는 것까지 돌보아 주었으며, 환관들은 우리가 길을 얼마나 왔는지 알아보기도 하고 제독과 통관들은 기세가 당당하여 강가에 다다르면 채찍을 번쩍 들어 지휘하는 품이 그야말로 산을 무너뜨리고 강을 메우는 형세였는데 이번 참 북경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근신의 호송도 볼 수 없고 황제로부터도 역시 한 마디 말이 없었다. 대체로 이것은 사신이 라마 부처를 보라는데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첫 참에 승낙을 않은후회를 하게 된 것이다. 기색들을 살펴본다면 갈 적, 올 적이 딴 판이다.

 

123 대체 학문이란 것은 신중히 생각하고 사물을 밝게 분별하고 자세히 묻고 넓게 안다는 것이다. 덕성만을 가지고 함부로 추어올릴 수 없기 때문에 다시 묻고’ ‘배움과 연결시킨 것이다. 우 임금 같은 이가 착한 말을 하는 자에게는 절을 하고 촌음을 아꼈던 것과 안자의 허물을 반복하지 않으며 노여움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지 않는 행위쯤으로는 아직도 그 심성이 완전하다고 평할 수 없을 터인바 이는 그들이 학문하는 극치에서 볼 때 아직도 객기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객기를 없애는 데는 반드시 자기를 이기고 옳은 심성에 돌아와야 할 것이다. 자기란 개개인의 사욕이다. 마음을 바로잡는 데 있어서 만약 조그마한 사욕이라도 비치게 될 때는 성인으로서는 이것을 도적이나 원수를 대한 것처럼 아주 뽑아 없애고야 만다. <서경>에는 말하기를 상나라를 반드시 이길 것이다했고 <주역>애는 고종은 귀방을 친 지 3년 만에 이겼다.’ 했고 이와 같이 3년에 걸쳐 전쟁을 하여 꼭 이기고야 만 것은 이를 이기지 않고는 나라가 나라답게 될 수 없었던 까닭이다. 자기를 이긴다는 것도 자기를 이긴 후에야 타고난 심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회복이란 말은 조금도 부족이 없다는 말로 일식이나 월식처럼 다시금 둥글게 회복되는 것이요, 또 잃어버린 물건을 찾음과 같이 한 푼중도 축이 안 난다는 말이다.

 이게 무슨 뜻일까? 학문이 거의 도 닦는 수준인듯 하다.

 

128 장복이 역시 다른 인사말이 없이 히죽히죽 웃음을 못 가누면서 상금이 몇 냥이냐고 묻는다. 창대는

상금이 천 냥인데 너하고 나눈댄다.”

했다. 장복이가 물었다.

너 황제를 봤니?”

보았지. 황제는 눈깔이 호랑이 같고 코는 화로 같고 옷을 벗고 벌거숭인 채 앉았더라.”

그래 뭐를 덮어 썼더냐?”

황금 투구를 쓰고 나를 불러 큼직한 잔에 술을 한 잔 부어주면서 네가 서방님을 잘 모시고 험로를 가리지 않고 왔으니 기특하다고 하더라.”

상사 도는 일품 각로로 부사 또는 병부상서가 되었다는 둥 창대의 말은 모두가 허튼 수작이다. 장복이는 언제나 잘 속아서 그럴 뿐만 아니라 조금 사리를 아는 다른 하인들까지도 믿지 않는 자가 없었다.

ㅎㅎㅎ

 

132 밤에는 관에 머문 여러 역관들이 다들 내 방에 모여들어 조촐하게 술자리를 벌였는데 나는 여행 중에 온통 입맛을 잃었다. 여러 사람들이 내 자리 옆에 봉해 싸둔 보따리 속에 무엇이나 들었나 하고 흘겨들 보기에 나는 곧 창대를 시켜 보따리를 풀어 샅샅이 뒤져 보게했으나, 다른 물건은 아무것도 없고 다만 가지고 갔던 붓과 벼루 뿐이고, 부품해 보이는 것은 죄다 필담했던 초기와 유람일기였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궁금증을 풀고는

아닌 게 아니라 갈 적에 아무런 행장이 없더니 돌아올 때 봇짐이 좀 크기에 이상타 했더니……’

했다. 장복이는 역시 서글프레해서는 창대를 보고는

특별 상금은 어디 있지?”

하며 몹시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공수래 공수거. 갔던 대로 돌아왔구나. 그 흔한 선물 하나 안 챙겨오고 다만 글 쓴 것만 보태었다.

 

경개록

 

137 옛날에도 오랜 벗도 마음이 맞지 않으면 낯설기만 하고, 우연히 마주한 이라도 마음이 통하면 오래 사귄 벗과 같다.’고 했다.

 

145 멀찌감치 훈장을 바라보니 섬돌에 나와 서서 오라고 손짓을 했다. 내가 섬돌 앞까지 나아가니 조공이 문 밖까지 나와 친히 맞으면서 손수 나를 부축하여 의자에 앉혔다.

장면 또렷, 반가움을 보여준다.

 

황교문답

 

153 저자에서 파는 벼루 한 개 값은 백 냥 값을 넘지 않는 것이 없다. . 천하가 소란한 때는 주옥 같은 보배가 뒹굴뒹굴 굴러도 거두어 들이지를 않지마는 나라 안이 잠잠한즉 땅에 묻힌 기와 쪽, 벽돌장 같은 것도 반드시 파내게 된다. 부귀한 자들은 취미로 구하여 보고, 빈천한 자들은 눈을 부릅뜨고 주워 모으며, 이에 취미를 가져 감상을 하는 자들은 어쩌다가 한번씩 문질러 매만지고 우둔한 자는 발이 부르트도록 쏘다녀, 필경은 밭 갈다가 얻은 것, 고기 잡다가 건져 낸 것, 송장 냄새가 나는 무덤 속에서 갓 파낸 것, 이것저것 할 것 없이 천하의 보물로 쳐주고 있다. 이러매 천하에 골동을 좋아하는 심정도 또 괴로운 심정이라 할 것이다.

 

155 활불은 어마어마해서 사람마다 볼 수가 없답니다. 더구나 신통한 법술을 가져 사람의 오장 속을 들여다본답니다. 보물 거울을 하나 걸어 두었는데 사람이 음탕한 생각을 먹으면 반드시 푸른빛으로 비치고 누구나 탐심이나 도적질할 마음을 먹으면 반드시 검정색으로 비치고, 누구나 위험하고 불측스러운 생각을 먹으면 반드시 흰빛으로 비치고, 다만 충효스러운 생각과 전심으로 부처를 공경하는 사람이 오면 붉은빛 아지랑이에 누런 빛깔을 띠고 상서로운 구름과 우담화가 거울 바닥에 감돌게 된답니다. 이 오색 거울이 무섭지요.

마음을 비추는 오색거울. 이건 염라대왕 앞에 있다는 그 명경과 비슷하구나. 재미밌네. à그림책

 

160 귀국의 불교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요?

나는 부디스트인데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 명쾌하게 대답을 못하네. 공부하자.

 

161 이단의 폐혜란 성인들도 이미 걱정한 바로서 심지어 사람을 서로 잡아먹는다는 말까지 있어 이것을 듣는 자는 설마 그럴 리가 있을가 했으나 지금도 깊은 산중에서는 왕왕 사람 잡아먹는 도사가 있어 어린애를 기르는데 순 양기덩이 사내아이가 더욱 좋다고 해서 이를 쪄서 먹는답니다. 심지어 밤에는 잃어버릴까 하여 궤짝 속에 숨겨 두기까지 한다는데, 이런 사건이 있은 지방의 관가에서는 이것을 적발하여 불들고자 도관을 덮쳐 허물고 불사르면 다시 이름을 중의 명목에 붙여 두고 있든가 몸을 절간에 숨기고 있답니다. 심지어 은밀한 뒷방 속에서 하는 술법이든지 더러운 병에 쓴다는 야릇한 처방들은 모두가 곯아 떨어진 도사들이 만든 것인데 사람들은 그들을 따라다니기를 좋아하고 또 몰래 이 술법을 배우고 있으니 참말 허탄하기 짝이 없습니다.

오해. 도교 도관이 마법사, 연금술사, 마녀와 비슷하게 취급되는 듯. 아이를 유괴해 찜쪄먹는다는 건 한센병 환자들, 또는 유태인에게도 덮어씌웠던 누명이지 않은가?

 

166 서로들 허허허 웃었다. 나도 역시 따라 웃었다. 그러나 심기가 끝내 유쾌하지 못하고, 오랑캐 딸에 가서 살고 싶다는 비유가 더욱이 나로서는 못마땅했다.

못마땅했다.는 말이 마음에 드네

 

181 우리네 집안에서 매우 총명스런 아이가 한 명 태어났다고 치고 이 아이가 네댓 살 날 때부터 터럭만치도 세상 일을 모르도록 하고는 매일같이 고명한 선생과 탁월한 선비들로 하여금 항시 곁에 붙어 있도록 하여 성현의 말씀으로 그의 심성을 교양하고, 또 커서는 먹고 입는데 걱정이 없고 금이나 옥이나 비단 같은, 사람이 하고 싶어하는 물건들을 보아도 마음에 두지 않도록 하여 귀신이나 다름없이 모셔 섬긴다면 그 다음부터는 외곬으로 도를 지향하게 될 것이니 이러고야 성현이 안될 수 없지요. 또 그를 어릴 적부터 늙은 중으로 하여금 기르게 하여 매일같이 설법을 하여 공덕을 알게 하고, 부처를 극진히 섬기도록 하여 어릴 때부터 어린이 되기까지 세상살이 잡념으로써 그의 마음을 쭈그러들도록 하지 않는다면 부처가 못 될 턱이 없을 것이오.

정말 그럴까? 울타리 안에서 보호된다고 부처가 될까? 달라이 라마가 키워진 방식과 비슷하다만

 

186 …점을 찍으면서 빙그레 웃고는

개똥이야. 이 양반이 하는 정사도 이 시처럼 모호할테지.”

했다. 나는

어떻게 그렇게 경솔한 말씀을?”

했더니, 여천이 즉시 개똥두 자를 찢어 입에 넣고 씹어 버리기에 나는 껄걸 웃으면서

나이 많은 어른을 함부로 조롱하더니만 이녁이 벌 턱으로 똥을 자시누만.”

했더니 여천도 역시 죽겠다고 웃었다. 조금 있다가 형산이 들어와 셋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하다가 형산이 곧 나가기에 둘이 남아 서로 쳐다보고 웃었다. 

ㅎㅎㅎ

 

195 연암은 이르노라. 세상에는 이러저러한 종족이 많다. 내가 열하에 이르러 이번 참에 모여든 번족들을 많이 보았다….

나도 보고 싶다.

 

197 이참에 내가 열하의 지세를 살펴보니 대체로 천하의 정수리 같아 보였다. 황제가 어정거리며 북쪽으로 이 지방까지 온 것은 다름이 아니다. 정수리 골통을 깔고 앉아 몽고의 산멱을 틀어잡을 따름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몽고는 벌써 매일같이 튀어나와 요동을 쥐고 흔들었을 것이다. 요동이 한 번 흔들리면 천하의 왼팔이 끊어지는 것이요, 천하의 왼팔이 끊어지면 하황은 천하의 오른팔로서 한쪽팔만 움직일 수 없을 터인즉 내가 본 바로는 서번 지방 여러 오랑캐들이 부스스 나오기 시자하여 섬서, 감숙 지방을 엿볼 것이다.

우리 나라는 다행히 한쪽 바다 구석에 붙어서 이런 판국과는 상관없다손 치더라도 나는 벌써 머리털이 센지라 앞날을 미처 보지 못할 것은 뻔한 일이지마는 30년을 못가서 세상 일을 걱정할 줄 아는 자가 있다면 응당 내가 오늘 한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할 것이다. 그러매 오량캐 여러 종족에 대한 소견을 이와 같이 아울러 기록한다.

아직 세계정세를 읽지 못할 때 연암은 예감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은 구한말 격변기를 겪었고, 어려움 속에서 식민지가 되었다. 지금의 세계정세는 어떤가?

 

반선시말

 

207 대법왕과 소법왕 둘이 있어 대법왕이 죽을 때는 소법왕에게 아무 데 아무네 집에 아이가 나서 이상한 향기가 날 때는 그것이 곧 나이니라.”고 유언을 한다고 한다. 이리하여 대법왕이 죽고 나면 아무 데서 태어날 거이라고 말한 아이가 태어나게 되고 잘 알아보아 살에서 과연 향내가 풍기면 즉시로 깃발이야 일산이야 옥가마, 금수레를 버젓하게 갖추어 가사 아이를 수건에 싸 맞아온다. 이것은 파사팔이 향기로운 수건에 감촉되어 난 때문이라고 한다. 이리하여 양육해서는 소법왕을 삼고 종전의 소법왕이 이번에는 대법왕이 된다고 한다.

달라이 라마 이야기에서 읽은 것 하고 비슷

 

215 반선은 과연 잘난 사람일까? 황금으로 지은 집은 오늘 황제로서도 거처할 수도 없는 터에 저 반선은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곳에 안연히 거처를 할까?

그러네. 황제가 준 황금집에 살면서 수행자가 과연 자기정체성을 지킬 수 있을까?

 

찰십륜포

 

220 왼쪽 옆에는 낮은 상이 두 개 있어 몽고 왕 두 명이 무릎을 가지런히 하고 앉았다. 얼굴은 모두 검붉은데 한 명은 코가 뽀죽하고 이마는 툭 불거지고 수염이 없었으며, 한 명은 얼굴이 깎은 듯 하고 올챙이 수염에 누런 옷을 입었다.

 

221 막 햇빛에 번쩍이는 금기와를 보고 전각 속에 들어서 보니 집 안은 침침하고 그가 입은 입성은 모두 금실로 짰으므로 살빛은 샛노랗게 되어 마치 황달병 들린 자만 같았다. 대체로 누런 금빛깔로 뚱뚱부어 터질 듯이 꿈틀꿈틀 군지럽게도 살은 많고 뼈는 적어서 맑고 영특한 데가 없고 보니, 비록 까많게 쳐다볼 만하고 앉은 덩어리가 방에 가득 찼으나 보기에 겁나 보이들 않고 멍청한 것이 물귀신 화상만 같아 보였다.

나쁜 인상. 나쁘다 말하지 않고 보여준다.  

 

행재잡록

 

246 청나라가 일어난지도 140여 년에 우리 나라 식자들은 중국을 오랑캐라고 하여 치욕으로 생각하고는 사절 내왕은 부지런히 하면서도 문서의 거래라든가 사정의 중요 여하를 일체 역관에 밀쳐 맡겨 두고 압록강을 건너 연경에 들기까지 거쳐 오는 2천 리 어간에 각 군, 각 읍의 지방장관과 관소를 맡은 장수들을 얼굴이나마 한 번 접견해 보기는커녕 그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통관은 공공연히 뇌물에 눈을 밝히고 본즉 우리 사신은 그들의 농간을 끽소리 없이 받을 뿐이오, 역관은 바쁘게 뜻을 받들기에 겨를이 없다. 언제나 무슨 큰 비밀이나 그 사이에 숨어 끼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 까닭이 이녁 편이 너무 망령되게 젠 척하는데 허물이 있다.

사신이 역간을 너무 의심하는 것은 정리가 아니요, 그렇다고 너무 지나치게 믿을 것도 안될 일이다. 만약 한번 걱정거리라도 생긴다면 삼사는 입 다물고 서로 멍멍히 보고 앉아서 역관의 입만 바라보고 있을 것인가? 사신된 자로서 반드시 한 번 연구할 문제다.

외교관이 외국어를 제대로 않고 통역자에게 의존하던 시절의 폐단이군. 그래서 행재잡록에 서로 보낸 공문을 다 기록해 둔 모양.

 

심세편

   

255 우리는 천하를 차지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명나라 황실을 위하여 큰 원수를 갚고 큰 치욕을 씻어준 것이다. 그렇지만 세상에 천자의 자리를 오래 비워 두라는 이치는 없을 터인즉 천하를 위하여 중국땅을 지키다가 만약에 중국땅에 주인이 생긴다면 역시 보따리를 싸 가지고 동쪽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조종의 묵은 제도를 바꿀 필요가 있다.

우스운 의리. 그럼 명나라는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온 지 140년이 되었는데 어떻하나? 이걸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도 적용할 수 있으려나? 제 나라의 실리, 기본 원칙을 가지고 외교를 해야 하지 않겠나?

 

255 천하의 우환은 언제나 북쪽 오랑캐에게 있으매 그들을 복종시키기까지는 강희 대부터 열하에다가 대궐을 짓고 몽고 군사들을 주둔시켰다. 이는 중국의 군사를 번거롭게 하지 않고 오랑캐로써 오랑캐를 막는 것이니, 군비는 들지 않고 국경 방어는 튼튼하여 지금 황제는 몸소 국경을 방비하고 있는 셈이다. 서번은 억세고 사나우나 황교를 몹시 두려워하고 본즉 황제는 그 풍속을 따라서 몸소 자신이 그 나라 중을 받들어 모시고 궁실을 장하게 꾸며 그들의 마음을 즐겁도록 하고 왕의 명목을 주어 조각조각 나누어 봉하여 그 세력을 꺾으니, 이것이 바로 청인들이 이웃 사방 나라를 제압하고 있는 수단이다. 

국경방비(열하여름별장)+민심수습(라마)

 

망양록

 

260 본편은 주로 박지원이 태학관에서 만난 중국 학자 곡정 왕만호와 형산 윤가전을 상대로 음악에 대해 토론한 것이 그 내용의 주요 부분이다.

 

266 악기는 말하자면 골짝과 같고, 소리는 말하자면 바람과 같을 터인데, 골짝을 고칠 수 없는 것으로?  친다면 바람 자체는 변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람에도 거센 바람, 잔잔한 바람, 회로리바람, 찬 바람의 구별이 있은즉 이로써 본다면 음률에서 예와 지금이 다른 점이 있다면 이는 악기가 고쳐진 것이 아니고 소리가 변한 것일까요

 

267 태곳적 당우 시절에 백성들의 풍속이 너그러울 적에는 그들의 귀에 즐거운 음악이 소, 호 같은 곡조였으니 이로써 그들은 무엇을 배척하는가를 알 수 있을 일이요. 주나라 폭군이었던 유왕, 여왕의 시대에는 백성들의 풍속이 음탕하여 그들이 즐거워하는 음악은 상, 복의 악곡이었으니 이로써도 그들이 무엇을 배척하는가를 알 만한 일입니다. 요즘 세상 잡극에서도 서상기를 놀 대는 하품을 하고 졸다가도 모란정을 놀면 정신이 번쩍 나서 기울이게 됩니다.

음악이 세상과 사람들의 마음을 반영한다는 말이로군. 위의 골짜기 비유가 더 좋다.  

 

278 우 임금은 소리를 내면 음률이 되었고, 몸을 움직이면 척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모범이 되었나 보군. 소리와 움직임이 모두 아름답고

 

279 기록에도 있되 무릇 소리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거쳐서 난다 하였으니 대체 몸이 극히 귀하고 오랜 수를 누리는 사람은 목소리가 큰 종소리 같고, 내뽑는 힘이 웅장하고 화창하여 때로는 육률의 기본음인 황종률에 맞을 수 있습니다.

그런가? 목소리로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을까?

 

290 북쪽에 무슨 변고가 생길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하였답니다. 이 음악이 되고 나서 드디어 정강의 화가 났으니 음악이란 것은 속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299 나는 물었다.

벌새와 새란 무슨 뜻일까요?”

여치와 쓰르라미는 보래 같은 벌레요, 꾀꼴새와 황조는 원래가 한 새인데 때에 따라 변화하여 우는 소리가 각각 다르다는 말씀이지요.”

시정이란 무슨 뜻인가요?”

저자에서는 화목을 볼 수 있고, 우물터에서는 질서를 볼 수 있습니다. 물건을 서로 교역하는 데 팔고 하는 두 편 뜻이 맞아떨어지는 것이 저자의 도덕이요, 뒤에 물을 길러 온 자가 먼저 온 자를 원망하지 않고 그릇을 벌여 놓아 차례를 기다리다가 제 뜻에 찰 대에 돌아가는 것이 우물터의 도덕입니다. 대체 역사의 본질은 정직하여야 하고, 시호란 것은 잘잘못을 들어 밝히는 것입니다. ‘

 

302 시 삼백편은 다 사람의 감정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305 무릇 글자가 생긴 지 오래된 공자가 역사를 정리하여 <춘추>를 지은 것은 이야말로 천지 시운의 한 개 커다란 변화인데, 공자도 부득이한 처사일 것입니다.

이런 책을 써낼 수 있다면 좋겠다. 있어야 할 책의 도구가 되는 것.

 

312 곡정은 아무 말없이 한참 있다가 말했다.

이런 저술이 있을 턱이 없습니다. 공자가 시를 정리하고 예를 바로잡았다는 그것이 곧 악학입니다. 원래 음악의 본질은 시에 속한 것이요, 음악의 이용은 예에 속한 것입니다. 언어로 사람을 가르칠 때는 세상 물건이 너무 노골화하고 문자로써 사람을 가르칠 때는 오묘한 이치를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음악이란 것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이 빠르되 가쁘지 않으며 나타나되 불거지지 않으며, 깊숙하되 충충하지 않으며, 온순하되 강직할 수 있으며, 꼿꼿하되 구부릴 수 있으며, 낮았다 높았다 감격스럽고 흐느끼고 간곡하여 이것이 사람에게 영향을 줄 때는 소름이 끼치도록 두렵기도 하고 벌벌 떨리도록 놀랍기도 하고 갑작스레 없어졌다가 슬그머니 생각나게도 됩니다.

이는 언어와 문자 밖에 따라 말하기 어려운 말고 글자 아닌 글자를 빌려서 높게는 하늘에 짝을 맞추고, 낮게는 땅에 짝을 맞추고, 쥐었다 폈다 하기는 귀신과 짝을 맞추며, 빙빙 돌기는 사시에 짝을 맞추어, 만물을  윤택케 함에 있어서 비와 이슬의 덕택을 빌리지 않고 사람을 일깨우는 데는 일월의 광명을 기다릴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사람을 깨우치는 데도 바람과 우레처럼 급격하지 않고 차츰 먹어들되 강물의 범람과는 달라서 쇠, , , , 바가지, , 가죽, 나무에서 나는 소리가 효제, 충신, 예의, 염치의 행실이 아니건만 입으로 불고 손가락으로 타고 어깨를 으쓱, 다리를 떨먹 하는 것도 모두 사단이 흐르는 듯 하고 칠정이 짜나는 듯 합니다. 이는 무엇이 시킨 것이겠습니까? 그러매 사람의 사지 맥체를 말없이 깨우쳐 준다는 것이 발로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태곳적 세상에서는 문헌들이 그리 많지 못하여 항간에서 부르는 노래들을 나라가 세운 학부로 끌어들여 글자를 맞추어 이를 악기에 맞추었으므로 옛날에는 대학에서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이 반드시 책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노래부르고 춤추는 것이 곧 학문하는 것이었습니다.

 

312 옛날의 노래는 후세의 독서나 다름없었습니다.

 

318 뒷날 시공부란 것은 불고 타고 노래 부르는 법을 없애고는 네모난 책만 마주 대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소리와 시가들로 갈라지고 본즉 주자가 <시경>을 주석하면서 정풍과 위풍 같은 시를 아주 음탕한 과목으로 돌려 버렸으니, 이는 시의 음탕한 뜻만 깨닫고 음탕한 소리는 깨닫지 못한 탓입니다.

 

329 해는 벌써 저녁 나절이 되어 가고 종일 마신 술은 각기 여남은 잔씩 되었다. 형산은 한낮부터 의자 위에서 잠이 깊이 들었고 곡정은 자주 칼을 뽑아 양고기를 베어 한 입씩 움쑥움쑥 먹으면서 또 자주 나에게 권했다. 나는 노린 냄새가 퍽도 못마땅하여 떡과 과일만 그저 집어먹었다.

중국 재야 학자 2명과 연암의 이야기 나누는 풍경이 상상된다. 저렇게 음악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일 수 있다니 품고 있는 교양과 평소의 공부가 놀랍다.

 

곡정필담

 

 

348 본편은 박지원이 열하에서 교유한 중국 학자들 중에도 대표적 인물로 들 수 있는 곡정 왕민호를 중심으로 윤가전, 학성 들을 상대하여 무려 16시간 동안 주고 받은 담화 내용이다. 본편에 토론된 담화의 내용은 물론 어느 한 개 특정한 문제를 설정했던 것이 아니요, 토론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순서나 계획 없이 화제는 절로 전개되어 과학, 종교, 역사, 정치 기타 다양한 문화 만담 등을 호상간 해박한 지식을 토대로 다방면에 걸쳐 논급하였다.

본편은 실로 박지원의 세계관과 사상을 연구하는데 중요하다. 역사의 의견으로는 본편이 결코 몇몇 인물의 담화를 초록한 속기록이 아니라는 점을 특히 강조하고 싶다. 박지원의 다른 저서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수법과 같이 여기서도 많은 경우에 있어 박지원의 사상과 견해가 곡정의 입을 통하여 대부분 발표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물론 곡정이란 인물도 당시 이족의 지배 하에 정치적으로 불우한 급진적 인텔리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따라서 그의 언론은 평범한 유학자의 고루한 언론과는 구별되고 있다. 그러나 그와 토론한 담초를 한 편의 속기록처럼 그대로 발표한 것은 아니다. 박지원은 이 담초를 자료로 삼아 완전히 편술을 마치기까지는 거의 8,9년의 시간을 요하였다특히 본편의 서두에 나오는 지동설, 지구 원형설, 지광설, 물질의 본체, 생물의 기원 및 진화에 관한 철학적, 과학적 견해는 연암이 지닌 진보적인 유물론적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어, 탁월한 연암 사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355 나는 말했다. ‘도리어 온 몸이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겠는데요.”

지정은 다시 땅빛 이야기를 청한다. 나는

제가 그러면 허튼 이야기 삼아 말씀 드릴테니, 선생도 허튼 소리 삼아 들어주시잖겠소?”

하니 곡정은 무방합니다.” 했다.

허튼 소리. 가볍다.  

     

362 아직 모난 별들을 본 적이 없은 즉, 지구가 둥글다는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비록 저는 서양 사람의 저서는 보지 못했으나, 일찍부터 지구가 둥글다고 말했습니다.

홍대용은 과학자, 연암은 홍대용 친구

 

362 저의 망령된 생각으로는 지구가 한 바퀴 돌면 하루가 되고 달이 지구를 한 바퀴 돌면 한 달이 되고, 해가 지구를 한 바퀴 돌면 일 년이 되고, 세성이 지구를 한 바퀴 돌면 1기가 되고 항성이 지구를 한 바퀴 돌면 1회가 됩니다.

 

380 대체로 한 시대의 임금된 자로서 아주 어둡고 용렬하여 큰 잘못을 저지른 자를 제외하고는 흔히 볼 수 있는 임금들도 당대의 이름난 학자보다 도리어 낫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당대의 이름난 학자들로 하여금 한번 자리를 바꾸어 준다면 도리어 그들만큼 해내지 못할 점이 있을 것입니다.

 

384 나는 말했다.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비해서 말하자면 바둑 두기와 같아서 임금은 바둑을 두는 당국자요, 신하는 옆에 앉은 구경꾼이니, 선생이 말씀하신, 옆에 있는 구경꾼이 바둑 두는 자보다수가 나은 것 같아 보인다는 말은 옳습니다. 바둑돌을 잡은 자가 잘 판단을 못할 때는 옆 사람의 훈수를 두지 않을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결코 그런 것이 아니외다. ‘말 위에서 천하를 얻으면언제나 열 손가락에 피가 난다고 자랑하는 것이 일쑤요. 대를 이어서 즉위한 임금이 갖은 호사와 계집질에 빠지는 것은 판에 박은 놀음입니다.이래서 천하에 무슨 일인고 모두가 황제의 집안일이 된 지는 이미 오래 되었는바, 이는 천고에 바꿀 수 없는 법칙같이 되었습니다.

 

388 대체 세상일이란, 비하자면 양쪽에서 줄다리기 하는 것이나 다름없어, 줄이 끊어지면 줄이 끊어진 자리로부터 짧은 쪽에 있는 자가 먼저 넘어지는 것은 두말 할 것 없습니다. 처음 두 편은 어금지금 하기 때문에 세상에 역리와 순리는 있고, 옳고 그른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나라를 차지함에 있어서 확실히 성공과 실패가 밝혀진 뒤에는 역리라든가 순리란 말도 도리어 등불 뒤에서 하는 귓속말로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긴 편이 논리를 만들어낸다고?

 

398 나는 곡정과 함께 닷새를 같이 있었는데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는 한숨을 자주 내쉬었다. 그 소리는 훠이 하여 옛날부터 말하는 위연탄식이란 것이 이것이다. 나는 물었다.

선생은 평소에 어째서 한숨을 자주 내쉽니까?”

이것은 저의 속 결리는 병인데 후우 하고 기운을 내뿜은 버릇이 끝내 한숨으로 굳어졌습니다. 평생을 두고 글을 읽어도 세상에 뜻대로 안되는 것이 열에 여덟, 아홉이니 어찌 속병이 생기들 않겠습니까?”

글을 읽으실 때마다 세 번씩 한 숨을 지으신다면 선생의 한숨은 가의가 문제에게 올린 상소 속의 여섯 번 한숨보다 많을 것 같소.”

둘 다 재야학자인데 연암은 이런 속병이 없다. 연암도 곡정도 천재 비슷무리한데 연암은 욕심이 별로 없고, 만사를 우습게, 가볍게 보는 것 같다.   

 

403  곡정이 얼른 말하였다.

청조가 나라를 얻을 때 공명정대함은 천지에 대하여도 유감이 없습니다. 대체 나라를 창건한 자가 정권을 잡을 대는 전조에 대하여 원수와 같이 대하지 않은 자가 없었으나, 나라를 세울 즈음에 큰 은혜를 베풀어 명나라의 원수를 갚아 준 일은 우리 청조밖에 없을 것입니다.

청 세조가 여덟 살 난 어린아이로 중국을 한 구역으로 통일하였다는 것은 세상이 생긴 이후로 한 번도 없었던 일입니다. 우리 세조 장 황제는 처음에는 천하는 차지할 마음이 없었고 다만 천하를 위하여 대의를 밝히고 명나라의 큰 원수를 갚고 천하 백성들을 유혈의 참화에서 구해내려 한 것인데, 하늘과 백성들의 마음이 한목으로 귀순하였던 것입니다.청조와 같이 공명정대하게 강상을 튼튼히 붙들어 잡는 일은 삼황 오제 이래로 아직 들어본 적이 없어야만 능히 그 나라를 오래 지닐 수 있습니다. “ 

 

405 나는 물었다.

물을 뿜어 올리면 산 위에까지 끌어올릴 수 있으나 이것이 어찌 물의 본성이겠습니까?”

96)맹자가 고자와 사람의 본성을 토론할 때 사람의 본성은 물을 막은 것과 같아서 동둑이 터지는데 따라 동쪽이나 서쪽으로 흐르듯이 가르치는 데 따라 선악이 갈라질 수 있다고 한 반면에 맹자는 물의 본성은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아서 본래 선한 것이라는 토론에서 나온 말.

사람의 본성이 본래 선할까?

 

418 내가 사람들은 흔히 말하기를 하늘은 거짓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하지마는 일이 되려는 집안에는 그렇지도 않아 후패가 얼음이 굳게 얻었다.’고 거짓말을 했건마는 하늘은 이 거짓말을 그대로 따라 주었고, 지성을 들여 기도를 하더라도 반드시 원대로 들어주는 것이 없건마는 망하려는 집안은 장세걸이 분향을 하면서 하늘에 빌던 그대로 영락없이 들어맞았습니다.

세상에도 가장 정확한 것이 제때에 우는 닭울음인데 맹상군은 범의 아가리에서 벗어나려고, 한 사람에게 입을 오므려 닭 울음을 울게 하자 닭이란 닭은 모조리 따라 울음을 울었습니다. 천하에  

어김없는 현상으로는 밀물 같은 것이 없겠건만, 송나라 왕조가 더는 견디지 못할 파이고 본즉 전당강의 조수가 사흘을 두고 들지 않았습니다.

흥하고 망하는 판에는 귀신의 조화 실적도 거짓과 진실이 번갈아 이용되며 성실과 휼계가 한목 쓰여 어떤 사람이 천하를 얻을 때에 하늘은 반드시 기꺼이 한 건 아니겠지마는 일부러 공교히 도와 주는 것 같고, 도 어떤 사람이 천하를 잃을 때는 꼭 하늘이 미워한 것은 아니겠지마는 잔인하고 지독하기가 무슨 흉악한 원수나 다름 없었던 것은 무슨 이유였을까요?”

나도 궁금하다. 동상이몽, 꿈보다 해몽 아니겠나?

 

426 제마끔 구구하게 얻은 지식이란 위로는 임금에게도 아뢰어 올릴 수 없고, 아래로는 자손들에게 전할 수도 없고 옆으로는 언뜻 친구들에게도 억지 변론을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학문인가? 이런 책을 써야 하나? 단지 제 답답한 속을 푸는 용도로.

 

435 형산은 허허 웃으면서

목전에 급급하게 서두는 것은 모두가 늘그막 준비입니다. 누에가 늙으면 절로 고치를 짓는 것이지, 사람들에게 비단옷 입히고자 목적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나는 말했다.

곡정 선생은 아직도 과거를 단념 않고 계십니까?”

벌써 단념했습니다. 선생은 어떠십니까?”

마찬가지입니다.”

흰머리로 과거를 본다는 것은 선비의 수치니까요.”

 

436 “강희 기묘년(1699) 과거에 백두 살 난 과거꾼이 있었습니다. 성은 황씨요 이름은 장인데 광주 불산 사는 생원이었소. 그는 금번 과거에 급제를 못할 때는 돌아오는 임오년 1702 과거에 올 것이요, 그 때 또 급제를 못하더라도 을유년 1705년 내 나이 백여덟살 될 때에는 꼭 급제를 할 터이니 많은 사업을 하여 국가에 봉사를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하기에 나 역시 웃음을 절로 참지 못하고 그 황장이란 이는 과연 을유 과거에 급제를 하였더가고 물었더니 두 사람은 고개를 흔들어 더욱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 곡정은

그가 급제를 못 할 때는 세상의 결함을 훌륭히 알 수 있을 것이지마는 만약 급제를 해 버렸다면 도리어 아무런 재미가 없을 일이지요.”

이것이 연암이 벼슬을 하지 않아서 얻는 이득이리라. 곡정의 입으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고 이 글 해제에서 말하고 있는 걸 참고한다면.

 

440 연암은 이르노라

나는 곡정과 가장 많이 이야기를 하였는바, 엿새 동안을 창을 대하여 밤을 밝혀 가면서 이야기를 하였으므로 아주 허리띠를 끌러 놓고 무탈하게 마주 대할 수가 있었다. 그는 본디 두르러진 선비요 걸출한 인물이라 그렇게도 이야기가 가로세로 엎치고 뒤치고 걷잡을 수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좋았겠다.

 

440 내가 서울을 떠나서 여드레 만에 황주까지 왔을 때 그대로 말 위에 앉아서 혼자 생각하기를 보디 학식이 없는 나로서 기회를 얻어 중국땅에 들어가 만약 중국의 고명한 선비를 만난다면 장차 무엇으로 질문을 들이대어 한 번 애를 먹여 볼까 하고는, 드디어 옛날 들은 지식 중에서 땅덩이가 도는 이야기라든가 달세계 이야기를 찾아 내어 매양 고삐를 잡고 안장 위에 앉은 채 졸면서도 무려 수십만 자의 말을 풀어서 가슴속에는 글자 없는 글씨로 쓰고, 허공에 소리없는 글을 읽어 하루에도 몇 권의 책이 되었다. 말은 비록 동에 닿지 않아도 이치는 역시 따라 붙을 만 하였지마는 말타기도 더 피로했고 붓과 벼루도 들 사이가 없었다. 용한 생각도 하룻밤이 지나면 스러져 죽고 말았지마는 이튿날 다시 하늘을 쳐다보고 그려 볼 때는 새로운 생각이 겹쳐 떠올랐다. 이야말로 참말로 좋은 길동무가 되고 위로할 거리가 되었다.

곡정의 한숨병과 뜻대로 안되는 가장의 술병의 사유가 비슷하리라. 누군가를 만나 이야기할 준비를 했구나. 

 

441 말하자면 굉장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많이 떠벌리는 축이었으나 벼슬도 못한 채 궁한 처지에서 앞날도 멀지 않으니 참말 서글퍼 보였다.

실컷 이야기 늘어놓고 이렇게 솔직히 말하다니 연암이 좀 괘씸하다.

 

산장잡기

 

447 우리 나라 인사들은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동안에도 좀처럼 국경을 한번 넘어보지 못했으나 근세의 선배로서 오직 김가재와 내 친구 홍담헌이 그래도 중국의 모퉁이를 밟아 보았다.

나도 못해봤다. ‘국경의 밤이런 말이 참으로 선동적이다. 이런 글로벌 시대에 마흔되도록 의무여행만 해보고, 제 울타리 밖으로 나가보질 못했으니. 연암의 비판에 나도 맞는다.

 

448 때로 바로 초생달이 비스듬이 관내를 비추면서 양쪽 절벽은 천야만야 깍아 섰는데 길을 그 복판으로 났다. 나는 어릴 적부터 간이 작고 겁이 많아 대로는 대낮에 빈 방에 들어가거나 밤중에 등불을 만나더라도 미상불 머리끝이 쭈뼛해지고 가슴이 두근거렸을 터인데, 금년은 내 나이 마흔넷이건만 무서움을 타기는 어릴 적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오늘 이 한밤중에 홀로 만리장성 밑에 우뚝 서고 보니 달은 지고 물을 울고 바람은 솨솨, 반딧불은 펄펄 날아서 보는 것마다 무엇이나 다 놀랍고 휘둥그레지고 이상야릇하였건만, 나는 갑자기 겁나는 마음이 없어지고 이상하게도 신이 날 대로 나서 팔공산의 풀잎 군사나 북평의 호석 까지도 나를 놀래지 못하니, 더욱이 내 자신 다행으로 여겼던 것이다.

유감이 있다면 붓은 가늘고 먹은 메말라 획은 서까래처럼 굵게 쓰지 못하고 또 장성의 옛일을 두고 시 한 수 못 지어 붙인 것이다.

고국으로 돌아가는 날 동리 사람들이 다투다시피 술병을 차고나와서 위로 인사를 하며 열하 행정을 물을 적에는 이 기록을 내보여서 머리를 마주 대고 읽으면서 책상을 서로 치고 좋다고 떠들어 보리라.

소심하고 겁많은 여자의 세계여행기김남희 씨 책을 그래서 읽었지.  

 

450 물은 두 산 틈에서 나와 바위와 마주쳐 판가리 싸움이 벌어지면 놀란 파도 성난 물결 우는 여울 흐느끼는 돌창이 굽이를 치고 뒤번지면서 울부짖는 듯 고래고래 소리를 치는 듯 만리장성을 부서뜨릴 기세로서, 만 대의 전차, 만 마리 군마, 만 틀 대포, 만 개의 쇠북쯤으로는 그 야단스러운 소리를 족히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

모래밭 위 큰 바윗돌은 우뚝이 떨어져 섰고, 강 둔덕에 버드나무 숲은 까마득하게도 어두컴컴하여 물귀신, 강도깨비가 저마끔 튀어나와 사람을 놀리는 듯, 교룡과 이시미가 양쪽에서 서로 붙들어 보겠다고 날뛰는 듯만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런 까닭도 아니다. 대체 물소리란 듣기에 달린 것이다. 연암 산골 내가 사는 집 문앞에는 큰 개울이 있어서 해마다 여름철이 되어 소낙비가 한번 지나가면 개울물은 갑자기 불어서 언제나 수레 소리, 말 달리는 소리, 대포 소리, 북소리를 듣게 되어 필경에는 아주 귀탈이 날 지경으로 귀에 젖어 버린다.

나는 언젠가 문을 닫고 누워 소리나는 종류에 따라 이를 사물에 비교해 들어 보았다. 깊숙한 소나무가 퉁소 소리를 내는 듯하니 이는 청아한 취미로 들은 탓이요, 산이 찢어지고 절벽이 무너지는 듯 한 것은 분노하는 소리로 들은 것이요, 뭇 개구리가 저마끔 우는 소리는 발칙스러운 것으로써 들은 것이요, 수없는 대가치가 서로 마주 어울려 내는 듯한 소리는 성난 소리로써 들은 것이요, 벼락 소리, 천둥 소리인 듯한 것은 공포심으로 들은 것이요, 찻물이 부글부글 끓는 듯한 소리는 취미로 들은 것이요, 거문고가 궁성, 우성에 맞게 나는 듯한 소리는 슬픔으로 들은 것이요. 종이 문창에 풍지 우는 듯한 소리는 의심스럽게 들은 탓이다. 무엇이나 올바르게 듣지 못하고 더구나 가슴속에 무슨 딴 생각을 먹고 있으면 그것이 귀에서 소리가 되는 것이다.

물소리를 가려듣고 표현한 것이 기막히다.

 

452 다들 말하기를 요동벌은 넓고 펀펀하기 때문에 물소리가 요란하게 나지 않는다고 하지마는 이는 물소리 속을 모르는 말이다. 요동땅 강물들이 물소리를 안 내는 것이 아니라 밤에 건너지 않은 까닭이다. 

 

452 나는 오늘에야 이치를 알았다. 마음의 눈을 감은 자는 육신의 귀와 눈이 탈이 될 턱이 없고 귀와 눈을 믿을수록 보고 듣는 힘이 밝아져서 더욱 병통이 되는 것이다. 오늘 내 마부가 발을 말발굽에 밟혀서 뒷수레에 실려 가고 보니, 나는 하는 수 없이 혼자 고삐를 늦추어 물에 들어갔다. 무릎을 구부려 발을 모으고 안장 위에 앉았다. 한 번만 까딱하면 강물 바닥인지라 물로 땅을 삼고, 물로 옷을 삼고, 물로 몸을 삼고, 물로 마음을 삼으니, 이때야 내 마음속에는 벌써 한 번 떨어질 것을 각오한 바라, 내 귓속에는 드디어 물소리가 없어지고 무릇 아홉 번이나 물을 건너는 데도 마치 의자 위에서 앉고 눕고 기동하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았다.

옛날 우임금이 강물을 건널 때 누런 용이 배를 등으로 떠밀어 위험한 고비를 당했으나 죽고 사는 판단은 이미 마음 속에 결정되었고 본즉 그의 앞에는 용이나 지렁이나 크고 작은 것을 비할 나위도 없었다.

소리와 빛깔은 외계로부터 듣고 보는데 따르는 것이라 이는 언제나 귀와 눈에 탈이 되어 이렇게도 사람으로 하여금 똑바로 보고 듣는 힘을잃도록 만든다. 더구나 사람이 한 세상 살아감에 그 험하고 위태함이야 강물보다 더한지라 보고 듣는 것이 즉시로 병이 될 것이 아닌가?

내가 사는 산중으로 돌아가 다시 앞 개울의 물소리를 들으면서 이를 가늠해 보니 영락없이 맞았다. 그리하여 나는 이로써 어떤 사람이나 자신이 처세술에 능란하여 총명한 체하는 자들에게 경계하는 바이다.

 

462 건륭 45년 경자년(1780) 황제의 나이가 7인데 남쪽 지방을 순시하고는 바로 북쪽 열하로 돌아왔다. 이해 가을 8 13일이 곧 황제의 천추절이다. 황제는 특별히 우리 나라 사신을 행재소로 불러와 대궐 뜰에서 축하를 하도록 하였다.

나는 사신을 따라 북으로 장성을 빠져 밤낮없이 달렸다. 길에서 보니, 사방에서 조공 드리러 가는 수레가 만 대는 됨 직했다. 또 사람이 지고 약대 등에 싣고 가마에 태우고는 풍우같이 몰아갔다. 들 것을 해 가지고 메고 가는 것은 물건들 중에서도 더욱 다치기 쉬운 물건들이라고 했다.

 

468 8 13일은 황제의 만수절이다. 이 날을 두고 전 3, 3일 한 목으로 연극판을 벌렸다.

연극을 보다니 독특

 

471 내가 북경서 코끼리 열여섯 마리를 보았는데 모두 쇠사슬로 발을 비끄러매어 이놈이 움직이는 꼴을 보지 못했다. 이번에는 코기리 두 마리를 열하 행궁 쪽에서 보았는바, 온 몸뚱이를 꿈틀거리며 움직여 가는 것이 풍우 같다고나 할까, 굉장히고 거추장스러웠다.

 

요술구경

 

요술구경의 각 대목의 묘사가 절묘하다. 특히 칼을 삼키는 것, 바늘 삼키는 것, 그리고 접시 돌리는 것

 

496 “아무리 잘하는 요술쟁이가 있더라도 장님에게는 눈속임질을 할 수 없을 것이니, 눈이란 과연 떳떳한 것이라고 할 수 있나요?”

조광련이 말했다. 나는 말했다.

우리나라 서화담 선생이란 분이 하루는 길에서 울고 있는 자를 만나 너 왜 울고 있니?’ 했더니 그가 대답하기를 제가 세 살에 장님이 되어 사십 년 동안 장님 노릇을 했습니다. 전일에는 걸음을 걸을 대는 발을 의지삼아 보고, 무엇을 잡을 때는 손을 의지삼아 보았고 음성을 듣고는 누구인지 분변을 하여 귀를 의지삼아 보았고 냄새를 맡아서 무슨 물건인지 알았은즉 코를 의지삼아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두 눈만 가졌지마는 나는 손과 발과 코와 귀가 모두 눈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하필 손, , , 귀뿐이겠습니까?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낮에는 피로한 것으로 보고 물건의 형상과 빛깔은 밤 들어 꿈으로 봅니다. 이래서도 아무런 장애가 없었고 일찍이 의심과 혼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길을 걸어오는 도중에 두 문이 별안간 밝아지고 동자막이 절로 열려 천지가 광대하고 산천이 헝클어지고 만물이 눈을 가로막고 별별 의심이 가슴에 복받쳐 손, , , 귀의 감각은 거꾸로 뒤틀려서 옛날의 정상스런 버릇을 잃어버리고 보니 우리 집이 어디인지 아득하게 잊어버려 저 혼자는 돌아갈 수가 없기 때문에 울고 있습니다.’ 하더랍니다. 화담 선생이 네가 너의 손, , , 뒤들에게 물으면 응당 잘 알 것이 아닌가?’ 했더니 내 눈이 이미 밝았고 보기 그것들에게 물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했습니다. 그러자 선생은 도로 네 눈을 감아라. 그러면 바로 네 집으로 갈 것이다.’ 했다고 합니다.

이로써 말해본다면 눈이란 이같이도 밝은 것을 자랑할 거리가 못됩니다. 오늘 요술을 구경하는 데도 요술쟁이가 눈속임질을 해서 속는 것이 아니라 실상은 보는 자가 제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

한시미학산책에 나온 원문이 이것이로구나. 이걸 정민선생님은 그렇게 해석을 한 거로구나.

 

500 “호광 같은 정승은 중용으로 요술을 삼고 오대 시대의 풍도는 명철한 것으로 요술을 삼았으니, 웃음 속에 칼을 품은 것은 오늘 본 입속으로 환도를 삼키는 것보다도 더 무섭지 않을까요?”

하고는 서로 한바탕 웃고 일어섰다.   

요술구경의 요지다. 한 마디로 웃음 속에 칼을 품었다.

 

 

열하일기 ()

 

피서록

 

23 “서까래를 새기고 기둥을 단청할 비용이 필요 없고, 숲과 물이 가진 자연 그대로의 담박한 정신을 즐길 수 있다. 고운 물새는 푸른 물결을 희롱하는데 사람을 피하지 아니하고, 사슴들은 석양빛을 띤 채 떼를 지어 출몰한다. 솔개는 날고 고기를 뛰되 제 천성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할 뿐 먼빛으로 자줏빛 아지랑이에 사인 아름다운 풍광을 절로 열어놓았으니 이것이 피서산장의 경치다.”

이는 강희 50(1711) 6월 하순에 쓴 것인데 강희는 늘그막에 대부분 열하에 있었던 것이다. 

강희는 청 몇 대 황제?

 

30 대체로 규중에 들어앉아 있는 여인이 글을 짓는다는 것은 본래 아름다운 일이라고 할 수 없는 터이지만, 외국의 한낱 여자로서 꽃다운 이름이 중국에 퍼졌다는 것은 영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 부인들은 아직 이름이나 자가 본국에서도 드러내지 못한 터에 '난설'이라는 별호도 오히려 과하다고 할 수 있는데, 더구나 그 이름이 '경번'으로 알려져서 두고두고 책에 실려 씻어 내기 어렵다면 재주와 생각 있는 규중 여자들로서는 한 본보기로 삼아 조심해야만 될 일이 아닐까?

우와, 웃기다. 연암도 그 시대 남자구나. 어허허허허.

 

36 숯불을 불다나니

붉은 입술 오물오물

장작을 때다나니

하얀 팔뚝 드러났네

 

자욱한 연기 속

멀리뵈는 그 얼굴

안개 속에 핀 꽃인 양

곱기도 하여라

 

하니 그의 마누라가 옆에 있다가 그 남편에게 하는 말이 당신은 어째서 나한테는 그런 시를 짓지 못하냐고 했답니다. 그러자 남편이 당신도 불을 때면 응당 본떠 지으리라 하여 그 마누라가 불 부는 시늉을 했더니 남편이 시를 지어

 

숯불을 불다나니

푸른 입술 우물우물

장작을 때다나니

검은 팔뚝 드러났네

 

자욱한 연기 속

멀리 뵈는 그 얼굴

귀신 할미 상판인 양

못나기도 하여라.

 

아 슬프다. 이 두 시가는 정녕 사랑은 집, 결혼, 생활 안에서 휘발되고, 내 집의 여편네를 아름답게 볼 수는 없는가? 남편에게 끝까지 고운 사람으로 남기 위해 발버둥을 쳐야 하나?    

 

58 유춘동

 

지는 꽃 손목 잡고

손님인 양 만류할새

비바람께 부탁하다가

핀잔만 맞았구나

 

골짝 꽃 꺾어다가

화병에 모셔두니

삼백예순 사시절이

언제나 봄이로세

꽃 꺾으러 가고 싶구나.   

 

70 강희 무오년(1678)에 강서성 여자 계문란은 오랑캐에게 붙들려 심양으로 팔려 가게 됐다. 가는 길에 진저점에 이르러 바람벽 위에 시를 지어 썼다.

 

가엾어라 옛 단장

어데로 가고

다 낡은 비단 치마

이 웬일인고

 

우리 부모 생사를

어디서 알랴

봄바람에 심양 길을

울며 가누나

 

밑에다가 또 이렇게 썼다. 저는 강서 우상경 수재의 처로서 남편은 잡혀 죽고 이제 왕장경에게 팔려 심양으로 가는 길입니다. 무오년 정월 21일 눈물을 뿌려 벽을 씻고 이 글을 쓰옵니다. 다만 바라옵건대 천하에 마음 있는 분은 이 글을 보시고 구원해 주소서. 저희 나이는 스물한 살이외다.

안타깝다.

 

72 강희 황제가 산장을 두고 지은 시는 전부 서른여섯 수인데 졸렬하여 볼 만한 것이 없었다. 대부분 억지 작품으로 평소의 뜻을 표시하였는바, 여러 신하들은 숱한 서적을 끌어 모아서 별별 주석을 다 붙였다.

연구원 과정을 마치며 이런 글을 쓰려는가?  그러니 출판사 관계자들에게 바로 까이기 보담 출간 경험이 있는 선배님들한테 이런저런 지적을 받은 것은 천만다행이다. 더 연단이 되어야 하리라. 지적한 것을 반영해서 나를 변화시키자.

 

90 적막한 산골 집엔

갓망건도 소용없네

늘그막에 하는 노릇

한가롭고야.

 

섬돌 위 양지 볕은

조용도 한데

하늘 밖에 뜬 구름은

산뜻도 하이

 

푸른 숲 찾아들어

꾀꼴새 울음 울 제

아롱다롱 고운 꽃

청춘을 보내누나

 

내 뜻이자 하늘 뜻

어김이 없으리라

타고난 모습대로

살고 크고 자랄거니

(연암의 친구 중흥의 시)

두시도 읽어보고 싶다. 호우시절 영화볼 때 만 읽었지.

 

 

하늘 밖 금서 땅은

산 지나 또 산일세

집터를 잡고 보니

한가롭기 그지없다.

 

외봉우리 솟은 바위

창공에 비껴 섰고

오솔길 그윽한 꽃

아롱다롱 점쳤구나

 

나는 새도 조심스레

비 맞은 채 지나가고

꿀벌만 너도나도

꽃향기로 배불리네

 

흥겨운 그날그날

지팡이로 짝을 삼아

보고 읊고, 읊고 보고

이 나그네 즐겁고야.

 

94 낮잠을 자면서

 

낮잠을 자다나니

찌는 듯 덥구나

만사에 게을러져

손 닿기도 싫어라.

 

읽던 책 채 못 덮어

먼지만 케케 앉고

벼루에 남은 먹은

파리 배만 불리네

 

나그네 묻는 말에 묵밭 매던 내 마누라

짜증만 내누나

 

별안간 솟아오른

맑은 달빛을

해님이 돋은 줄만

잘못 알았지

낮잠과 지루한 느낌이 섞여 있다.

 

100 일흔 개 솟은 샘은

돌 절구질 요란하고

두어 그루 고목 나무에

서리만 자욱하네

 

전조에 세운 누대

모래밭에 흔적인 양

이 해도 다 저물어

숲 그늘만 충충하이

 

지나는 나그네

마음 두고 보는 눈매

머리 센 늙은 기생

만나나 보는 듯 하네

 

오동꽃 떨어질 때

산 생강 다 늙는다.

왕랑의 늙은 얼굴

누가 알아볼거니

머리센 기생은 몇 살일까? 40? 50?

 

106 일찍이 신돈복이 나에게 해준 이야기 가운데, 중묘조 때 사람 남주 이야기가 있다. 남주는 열아홉살에 과거에 급제하여 문형의 천거에 들어 전적으로 벼슬을 마쳤는데 어릴때부터 이상한 행적이 많았다.  매일 아침이면 글방 선생에게 공부를 하러 간다고 가는데, 알아보면 가지 않을 때가 많아서 집안 사람들이 가만히 뒤를 밟아 본즉 도중에 곧장 솦속으로 들어갔다. 수림 속에서 공부하는 글방 집 한 채가 있고 집주인은 띠끌 세상과는 떨어서 말쑥하게 생긴 사람이었다. 남주가 들어가 절하고 종일 강의를 듣다가 해가 저물어서야 돌아오곤 했다.

하루는 그의 하인을 시켜 편지를 써주어 지리산 청학동으로 들여보냈다. 거기에는 화려하게 지은 단청집이 있고 사람 둘이 있는데 한 사람은 자줏빛 옷에 구름무늬 관을 썼고, 한 사람은 늙은 중으로 둘이 종일 바둑을 두고 있었다고 한다. 그 하인은 하루를 머물다가 다시 글을 받아 가지고 돌아왔다. 그 하인이 처음에 이 산에 들어올 때는 봄철이어서 산에는 풀과 나무가 한창 무성했는데 산을 나와 보니 들에서는 가을걷이를 하고 있었다. 이상스러워서 물었더니 9월 초순이라고 하였다. 

남주는 나이 서른에 죽었는데, 장사를 치르면서 관을 들다가 너무도 가벼워서 집안 사람들이 관 뚜껑을 열어 보았더니 빈 관이었다고 한다. 관 속에는 글이 쓰여 있었다.

 

바다에는 배 간 자리

찾을 길 없고

산에서는 학 난 자취

볼 수 없어라.

 

그 당시 마을 앞에서 밭을 갈고 있던 농부가 공중에서 풍악소리가 나는 것들 쳐다보았더니 남주가 말을 타고 흰 구름 속에 둥실 떠가더라고 했다.

이런 이야기가 나는 무척 재미지다. 어데 동굴로 휙 들어가버려도 좋겠지.  

 

115 이덕무가 청비록에 썼다.

조선사람으로서 중국땅을 두루 돌아다닌 사람으로는 익재 이제현 만한 이가 없을 것이다…..그가 돌아다닌 곳은 놀라워 조선 사람으로서는 따를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의 시는 참말 우리 나라 2천 년 이래의 대가로서 화려하고도 명랑하고 전아한 품이 우리 나라 시의 딱딱하고 꺽꺽한 폐습을 깨끗이 벗어났다….”

여러 군데를 여행한 호연지기가 글에 묻어나게 되나 보다.

 

117 배를 타고 아미산으로

 

비에 쫒긴 송아지는

돌아갈 길 바쁘고

물결에 밀린 갈매기떼

배 탄 손을 따르네

 

130 가랑비 내리는 봄 뒤원

 

무거운 이슬 방울

오동잎이 먼저 알고

가느단 뇌성이매

새마저 놀라잖네.

 

싹트는 새 풀잎은

깊숙한 꿈 속 같고

활짝 핀 꽃봉우리

말없이 멀뚱멀뚱

 

섬돌에 검정 개미

오르다 미끄러질 제

나뭇잎 안은 벌레

떨어질까 아슬아슬

 

물 위에 선 쌍무지개

저 멀리 보일 적

연기 속 새 한 마리

굼뜨게 날아드네

 

외로운 나그네는

시름없이 앉아서

그리운 님 생각에

깊이도 잠겼어라.

이 장면에 나온 시에 관련된 것, 한시미학산책에서 나왔던 보여주는 시? 당시? 송시?

 

134 그의 시는 화려한 맛이 있으면서도 아담하여 조선의 시인들이 가진 촌티와 깔깔한 때를 활짝 벗었다. ( : 이익재)

 

144 호수 밖에 뫼 있고

뫼 아래 밭이로다

비 올 때나 갤 때나

물빛도 고울시고

 

내 만약 이곳으로

살 집을 옮긴다면

서쪽 이랑 다 갈고선

배 잡아타고 놀걸

 

구외이문

 

149 중국 사람들은 조선 진주를 보물로 여겨 고려 구슬이라고 한다….나는 모를러라. 조선진주가 어디서 나는지, 또 누가 이것을 캐서 세상에 이렇게 내돌렸는지

진주 귀걸이, 목걸이 하나 갖고 싶다. 왜냐면 내가 좋아하는 정장들이 모두 회색, 파스텔톤의 옷이라 진주가 어울린다.

 

155 조조의 수장

건륭 무진년(1748) 장하에서 고기잡이를 할 때 물속에서 자맥질하던 자의 허리가 동강나서 떠올랐다. 황제는 수만 명 병졸을 풀어서 강 옆을 파고 물을 딴 데로 돌린 뒤에 강바닥을 들여다보니, 수없는 병장기가 널려 있고 그 아래는 무덤이 있어 드디어 관을 파내니, 금은으로 찬란히 치장한 속에 황제의 면류관과 복색을 갖추었으니 곧 조조의 시체였다.

황제는 친히 관우묘에 나와서 소열의 소상 앞에 그 시체를 꿇어앉히고 목을 베었다. 이 일은 천고에 내려오던 귀신과 사람들의 분노를 시원하게 씻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일흔두 개의 무덤을 만들었다는 전설의 의혹을 통쾌하게 부수게 되었다.

시체를 대상으로 벌을 준다. 원한을 푼다. 대단한 방식

 

166 장성 밖에 있는 백운탑 돌함 속에는 요나라 시대에 죽은 중의 시체가 있는데, 몸뚱이가 지금도 썩지 않고 부드러운 윤기가 돌면서 따뜻하나 눈은 감고 숨은 끊어졌다고 한다.

미라

 

173 가장 더러운 냄새를고려취라고 하는데 조선 사람들은 목욕을 자 하지 않아 발 냄새가 흉하다는 것이요, 물건을 잃어버렸을 때는동이라고 말하는바, 이는동이가 훔쳤다는 의미다. ‘자 발음은, ‘자 발음은음의 반절인바, 우리 사람들은 이런 줄 잘모르고는 냄새가 좋지 못할 때는고려취라 하고 다른 사람이 물건을 훔쳤다고 의심할 때는아무개는 동이라고 해, 마침내 훔친다는 말이 되어 버렸다.

애자라고 놀리는 것도 비슷

 

185 우리 나라 서적으로서 중국에 들어가 출판한 것이 매우 드무나 홀로 <동의보감>25권이 널리 유행하고 있다. 그 판본은 아주 정묘하였다. ..이 책은 선조 병신년(1596)에 시작하여 광해 2년 경술년(1610)에 완성되었는바

16년 걸렸다. 

 

187 이러므로 뛰어난 명의는 병을 고치는 데 병이 들어 눕기 전에 고치는 것이요, 병이 다 든 후에 고치지는 않는 것이다. 병이 다 든 후에 고친다는 것을 병을 치료하는 법에서는 아주 하책일 것이다. 그나마 다시 아무것도 모르는 땡땡이 의원에게 병을 내맡긴다면 어찌 병이 나을 것인가? 심한 자로서 이익을 탐내는 자는 본디 병없는 사람을 상대로 하여 공로를 세우고, 처음으로 의원에 종사하는 자는 심지어 사람을 희생해 가면서 의원 공부를 한다.

 

192 선의란 좋은 옷입니다. 천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다들 상상품 좋은 옷 한 벌씩은 가지고 있어 무늬로 귀천을 표시합니다. 그러나 심의란 것은 귀천이나 남녀의 구별이 없고 길흉의 구별도 없이 꼭 같은 복장입니다. 이를 대포로써 만드는 것은 그 검소함을 표시하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좋은 옷감이 아니겠습니까?

 

194 진시황은 자주 흉노를 정벌하다가 그의 몸은 썩은 고기가 되었고, 거란은 중원땅을 한번 유린하다가 몸은 소금에 절인 돼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201 회회국 사람 십여 명이 뒤를 따르는데 얼굴이 사납고 코가 크고 눈은 푸르고 머리와 소염이 억세게 났다. 그중 두 사람은 눈매가 맑고 고운데, 복색이 가장 화려했다.

 

207 사람이 젊을 적에는 전정이 멀고 보니 자기는 늙을 날이 없을 듯이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도 노인을 업신여기는 실수를 가끔 한다. 이런 경박한 악소년이나 건방진 자는 흔히 앞날의 복을 받지 못할 것이니 불가불 조심해야 할 일이다. 인조 때 찬성 민형남이 나이 일흔이 넘어 손수 과실 나무 접을 붙이니 같은 마을에 사는 여러 젊은 명관이 이를 웃으면서

공께서는 아직도 백 년 계획을 세우시나요?”

할 때에 민공은

바로 그대들을 위하여 선물로 남길 것이네.”

하였다. 그후 민공은 아흔 네 살이 되어 여러 명관들의 제삿날 과일을 손수 따서 제사에 부조했다고 한다.

 

옥갑야화

 

247 대장부가 몸이 없어지는 것이 걱정이지 돈 없는 것이야 걱정할 게 있나.

 

256 자네들이 모르는 말일세 대체로 남에게 아쉬운 사정을 말하는 자는 언제나 제 의사를 떠벌려 먼저 신의를 자랑하면서도 어디고 그의 얼굴빛은 비굴하고 이야기는 중언부언하는 법이네. 그러나 아까 그 손님은 비록 옷과 신발이 허술하기는 하나 말은 간결하고 눈초리에 뱃심이 나타나고 얼굴에 수줍은 빛이 없으니 이런 이는 재물이 없어도 자족하는 사람일 것이네. 그가 시험해 본다는 일이 필시 작은 일이 아닐 터이니, 나 역시 그 손을 한번 시험해 보겠네. 안 주면 몰라도 돈 만 냥을 이미 줄 바에야 이름은 알아서 무엇 할 것인가?

 

263 내 짐작으로 내 재주라면 능히 백만 냥은 벌 수 있다고 생각했지마는 운수야 하늘에 있는 것이라 내가 어찌 꼭 알 수야 있었겠소? 그러매 나를 부리는 자는 복이 잇는 자일 터라 반드시 부유한데 더욱 부유할 것도 역시 하늘 운수일 것이오. 이러고야 어찌 돈을 꾸어 주지 않겠소? 벌써 돈을 꾼 다음에는 돈 임자의 복을 빙자해 장사를 했으므로 손만 대면 성공하게 되었으니 만약에 내 자신의 돈으로 했다면 성공과 실패를 단정하지 못할 것이오.”

이건 무슨 말인가?

 

270 차수는 말한다.

이 이야기의 대력을 보면 당나라의 규염객전과 화식전의 작법을 사용하여 그중에는 중봉의 봉사와 반계수록 및 성호사설 들에서도 하지 못한 말들을 하였다. 이 문장은 솜씨가 분방하고 사상이 비분강개하여 조선에서 보기 드문 문장이라고 할 것이다.

(주석을 붙인 이는 박제가이다.)

 

황도기략

 

276 더러는 말하기를 이 집은 몰수한 집이라고 한다. 앞 담이 십여간인데 모란을 새긴 벽돌을 쌓아 알쑹달쑹 물린 무늬가  영롱했다.

 

283 태화전의 명나라 때 이름은 황극전이다. 삼첨 지붕에 아홉층대 뜰이요, 지붕은 누런 유리 기와를 이었다.

 

284 일찍이 들으며 우리 나라 소현세자가 구왕을 따라 이 전각에 유숙했다고 한다.

 

292 북쪽 담장에는 우물이 잇고 우물가에는 커다란 돌구유가 있었다.

(~293황제의 어용마구간 묘사 재미있다.)

 

296 세상에 머리 센 태자가 있을까?

 

308 무릇 그림을 그리는 자가 거죽만 그리고 속을 그릴 수 없음은 자연의 세이다. 대체 물건이란 불거지고 우묵하고 크고 작고, 멀고 가까운 세가 있다. 그림에 능한 자는 붓대를 대강 몇 차례 놀려 산에는 주름이 없기도 하고 물에는 파도가 없기도 하고, 나무에는 가지가 없기도 하니 이것이 소위 뜻을 그리는 법이다.

 

공자묘를 참배한 감상

 

352 이곳 서재와 학사들이 텅텅 비어 있다면 응당 먼지에 파묻히고 잡풀이 돋았을 터인데, 어디고 씻고 닦아 맑게 정돈하지 않은 데가 없어 탁자들은 가지런하고, 문과 창은 밝아 종이를 바른 지는 비록 오래되었으나 하나도 찢어지고 떨어진 데가 없다는 점이다. 이것이 비록 한 가지 일이지마는 중국 법도의 대체를 알 수 있는 일이다.

 

362 역사에서 흥하고 망하는 판에는 하늘의 뜻을 단연코 알 수 잇는 것이다. 그것들이 요망스러운 재앙과 경사스러운 상서로 나타날 때에는 이를 반드시 알뜰하게 좇기도 하고 힘써 붙들기도 하여 비록 어린아이와 부녀자라도 하늘의 뜻이 있다는 것을 뻔히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충신이고 의사들이란 공연히 한 손으로 하늘을 버티다시피하고 보니 이 어찌 억지 놀음이 아니며 또 어려운 일이 아닐까 보냐.

 

양엽기

동섭필란

425 고려 인삼을 찬미하는 글에, “세 가지에 다섯 잎, 양지 볕을 등지고 응달로 향한다. 그를 구하려면 자작나무 밑을 찾으라.”는 말이 있다. 또 중국의 문헌에는 많이들 이 글이 실리고 있다.

자작나무 잎은 오동나무 잎 같아서 매우 크고 그늘이 많이 지므로 인삼이 이런 응달에서 자란다고 했다. 자작나무는 우리 나라에서 책 판각에 쓰는 나무로서 우리 나라에는 매우 흔한 나무다.

 

481 “조선은 본디부터 예의를 숭상하여 머리털을 머리보다도 소중히 여기는데 이제 만일 억지로 사정없이 서두른다면 우리 군사가 돌아온 뒤에는 반드시 본래대로 되돌아설 것이다. 그럴 바에야 그 들의 풍속에 따라 예의로 구속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저들이 만일 우리 나라 풍속에 따른다면 말 타고 활쏘기가 편리할 터인 즉, 이는 우리의 이익이 아니다.”

하여 이를 중지하였다고 한다. 우리 편으로서 생각한다면 이런 다행이 없을 일이라 하지마는, 저들의 계책으로는 우리들이 문약한 습성을 그대로 두려는 것이었다.

 

금료소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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