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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26일 07시 10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신영복은 1941년 경상남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구사범을 졸업하고 경상북도에서 교사로 근무했는데, 일본인 교장의 조선 학생 차별에 항의하다가 파면됐다. 아버지께서 교사 한 명뿐인 간이학교의교장으로 의령에서 근무하실 때 신영복은 교장 사택에서 태어났다.

 

<광복>

다섯 살 때 광복이 되었다. 비가 엄청나게 온 그날, 동네 청년들은 어린 신영복을 집에서 조금 떨어진 교장 사택으로 데려가 그곳을 지키게 했다. 해방이 되자 일본인 교장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집 안은 책상 서랍도 다 열려 있는 등 급히 떠난 흔적이 역력했다.

 

<6.25>

그가 열 살 때 6.25가 터졌다. 어느 날 서북청년단원들은 좌익으로 몰린 청년들을 잡아 죽이고, 그들의 머리를 벤 뒤 철사로 귀를 꿰어 영남루 부근의 다리 양쪽으로 가로등마다 묶어놓았다. 신영복은 그 머리들을 유심히 보았는데 거기에 아는 얼굴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자 앞장서서 친일파 집을 때려부수었으나, 6.25이후 달아난 친일파가 미군을 앞세워 돌아오면서 사라졌던 청년의 머리를 찾은 것이다. 어린 신영복의 마음에도 그 청년의 심상은 자신과 연계성을 보이는 것으로 각인되었다.

 

<서울 상대 입학>

 

밀양군 교육감이 되신 아버지가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하면서 가세가 기울었고, 그는 자형이 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부산상고로 진학하게 되었다. 시인으로 5•16 군사반란 뒤 교원노조 운동으로 구속된 살뫼 김태홍 선생이 당시 국어 선생님이었는데, 그분의 권유로 한국은행 면접시험 대신 서울상대에 시험을 쳐 합격하였다.

 

<4.19>

대학에 들어간 지 꼭 1년 만에 4•19가 일어났다. 세상이 바뀐 것을 경험한다는 것은 큰 감동이었다. 4•19에서 5•16까지 비록 1년여의 짧은 기간 동안 느꼈던 희망이 그를 지탱시켜준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독일어 원어를 교재로 썼지만, <자본론> 강독이 정식 과목으로 개설되기도 했고, 학생들은공산당 선언같은 문건을 번역해서 세미나를 시작했다.

 

<5.19>

5•16이 일어난 3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후배들의 세미나 지도를 시작하는 등 학생운동에 몰두하게 된다. 그는 군사정권이 들어선 현실에서 장기적인 학생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서울 상대에 본격적인 독서 동아리를 만들게 된다. 마오쩌둥의모순론이나신민주주의론같은 논문도 번역해서 대학노트에 베껴 적어 돌려읽고, 고리키의 소설 <어머니>도 영문판을 구해 대학노트 4권에 깨알같이 번역해서 돌려읽곤 했는데, 나중에 통혁당 사건이 터지면서 모두 중앙정보부에 압수됐다.

 

<통혁당 사건>

대학원을 마치고 숙명여대에 강사로 나가던 시절, 아마 1965 2학기나 1966년 초에 <청맥>이라는 잡지의 예비 필자 모임인 새문화연구회 모임에 안병직 등 선배들을 따라나가게 되었는데, 여기서 서울대 사회학과 출신의 김질락을 만나게 되었다. <청맥>은 통혁당 핵심들이 당의 합법 기관지로 설정한 잡지인데, 반미적인 논설이 종종 실렸다.

 

김질락과 그의 후배 이진영 등은 신영복이 학생운동에 깊이 간여하고 있는 것을 알고 그를 유심히 관찰하면서 접근했고, 어느 날 김질락이 정색하고 혁명을 지지하느냐고 물어왔고, 신영복이 그렇다고 하자 그날부터 김질락, 이진영과는 따로 만나게 되었다. 이것이 나중에 통혁당 산하의 민족해방전선으로 발표된 모임이다. 통혁당 사건으로 김종태, 이문규, 김질락 등이 사형되었고 신영복은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20년의 수감 생활>

그는 20년 동안 수감 생활을 하였다. 이 시기 그 고뇌와 사색은 20년내내 이어져 완전히 '인간성이 개조'되는 내적 자기혁명을 이루어 낸다. 신영복은 교장의 아들로 성장하여 민중의 삶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남다른 애착은 없었다. 그런데 감옥에서는 밑바닥을 살아온 기층민중과 24시간을 맨살을 부대끼며 살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을 통해 자신이 지식청년으로서 가지고 있던 창백한 엘리트주의적 관념성과 '먹물성'을 통절히 비판하고 뼈아픈 반성을 하게 된다. 감옥에서의 삶은 서로가 알몸으로 부대끼며 가식없이 숨김없이 사는 탓에, 한방에서 오래 살다보니 서로의 과거와 생각을 공유하게 되고 자신의 삶과 완전히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번은 목수출신이 집을 그릴 때 지붕부터 그리지 않고 주춧돌부터 그리는 것을 보고 그는 큰 충격을 받는다. 책이나 이론으로 배운 세계가 현실과 완전히 다를 수 있다는 생각에 그간의 인식틀을 깨부순 것이다. 무엇보다 10여 년간 교도소에서 노동을 하면서 목공, 영선, 제화공, 재단사등으로 직접 노동자 생활을 온몸으로 고통을 느끼며 경험했다는 사실은 그 자신의 인간 개조론을 수긍하지 않을 수없게 한다.

 

특히, 감옥에서의 비전향 장기수들과의 만남은 이후 그의 사상과 인생관을 결정짓는 계기가 되었다. 막연하게 책에서나 보아온 분단과 전쟁의 피투성이 현대사의 이야기를 직접 이를 경험한 빨치산과 투사들을 통해 생생히 들으면서 살아있는 역사체험을 한다. 또한, 한학자 출신의 사상장기수로부터 동양고전과 철학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서구사상에 매몰된 현실에 대한 자각과 자존을 깨닫고 고전학습에 몰입한 나머지 이후 성공회대에서 동양철학도 강의할 수 있게 된다. 신영복은 현재 서예가로도 명성이 높다. 이도 감옥에서 여러 장기수 선생으로부터 지도받은 결과라 한다. 한문 서체로 익힌 필법은 한글에도 응용해 민중 정서에 맞게 민체, 연대체, 어깨동무체라는 글씨체를 창안해 독특한 경지를 보여주었다. 그래서 그는 감옥 20년의 삶이 완전히 인생을 바꾼 진정한'나의 대학시절'이었다고 고백했다.

 

<석방>

 

신영복은 1988년에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하였다. 현재는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하며신영복 함께 읽기라는 수업을 통해 학생들과 나눔과 소통을 하고 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강의

 

16 내가 본격적으로 동양고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무래도 감옥에 들어간 이후입니다. 감옥에서는, 특히 독방에 앉아서는 모든 문제를 근본적인 지점에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감옥의 독방이 그런 공간입니다. 우선 나 자신을 돌이켜보게 됩니다. 유년 시절에서부터 내가 자라면서 받은 교육을 되돌아보게 되고 우리 사회가 지향했던 가치에 대해서 반성하게 됩니다.

è 한 지식인이 20년간 감옥에서 사색하여 얻은 결과를 나는 책 한 권을 읽음으로서 얻을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고맙다고 하기엔 상황이 짓궂긴 하다.

 

16 사회의 상층부에 속하는 대학 사회와 대학 문화가 당연히 더 적극적이었고 그런 점에서 더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지요. 우리의 의식을 지배했던 것이 근대화와 서구문화였습니다.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만 우리 것에 대한 최소한의 자부심마저 허락하지 않는 불행한 문화였습니다.

 

17 요즈음 대학생이나 젊은 세대들은 근본적 성찰을 하는 일이 별로 없는 것같이 느껴집니다. 매우 감각적이고 단편적인 감정에 매몰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또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세례를 받고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그러한 반성 자체가 낡은 것으로 치부되기까지 하지요.

 

21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관점입니다. 고전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중요합니다.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고전 독법 역시 과거의 재조명이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당대 사회의 당면 과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고전 독법의 전 과정에 관철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2 이 시기는 흔히 축의 시대라고 하여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상의 백화제방 시대입니다. 처음으로 고대국가가 건설되는 시대였기 때문에 사회에 대한 최초의 그리고 최대한의 담론이 쏟아져 나왔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석가도 이 시대의 사상가임은 물론입니다. 한마디로 사회와 인간에 대한 근본 담론의 시대 그리고 거대 담론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è 거의 동일한 시대에 춘추전국시대와 그리스 시대가 있었다.

춘추전국시대 기원전 770-221

그리스 시대 기원전 1100-146

 

23 유럽 근대사의 구성 원리가 근본에 있어서 존재론임에 비하여 동양의 사회 구성 원리는 관계론이라는 것이 요지입니다. 존재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를 세계의 기본 단위로 인식하고 그 개별적 존재에 실체성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이든 집단이든 국가든 개별적 존재는 부단히 자기를 강화해가는 운동 원리를 갖습니다. 그것은 가지 증식을 운동원리로 하는 자본 운동의 표현입니다.

 

24 자연과의 조화와 공동체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라다크의 오래된 삶의 방식에서 바로 오염과 낭비가 없는 비산업주의적 사회 발전의 길을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26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 책방 도령의 읽는 소리를 들으니 그제야 미, 록지, 대자야로 바르고 끊어서 읽더라는 것이지요. 스스로 깨치는 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루 종일 걸려서 그제야 깨닫는 그런 비능률적인 방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과는 매우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여러분이 영어 공부 시작한 지가 최소한 10년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어 논문을 쓰거나 영시를 짓고 감상할 정도가 되기는 어렵지 않나요? 그러나 우리의 할아버지 세대는 4,5년이면 뛰어난 문장력과 시작 수준을 보여주고 있거든요. 과학적 방법이나 첩경에 연연하지 않고 그저 우직하게 암기하는 것이 오히려 가장 확실한 성과를 이루는 것이기도 하지요. 나는 여러분이 마음에 드는 고전 구문을 선택해서 암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è 통독법의 유효성

è 하지만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암기하는 것은 경계해야. 정약용이 비판한 만 번 읽는 선비

 

30 근대사는 서구 문명이 전 세계로 확장되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 한국, 일본 등 아시아 각국이 지난 몇 세기 이래 줄곧 서양 문화를 배우고 있습니다.

è 그러나 전복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질 않는다.

 

30 그러나 서양 문명은 이 두개의 축이 서로 모순되고 있다는 사실이 결정적 결함이라는 것입니다. 과학과 종교가 서로 모순된 구조라는 것이지요. 과학은 비종교적이며 종교 또한 비과학적이라는 사실입니다.

 

31 과학의 압도적 우위로 말미암아 진리와 선이라는 서양 문명의 기본 구조가 와해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의 경이적인 발전이 인간적 가치를 신장하기 위한 것이 아님은 물론이지요. 신무기나 신상품의 생산 기술이 과학 발전의 동기가 되고 있으며, 과학은 다시 자본 축적의 전략적 수단이 되어 사회 변화를 증폭하고 미래에 대한 압도적 규정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의 높은 범죄율, 생명 경시적 풍조는 종교의 역할이 무너진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과학이 자신의 대립면을 상실하고 무한 질주를 거듭하기 대문이라는 주장입니다.

è 범죄율이 과연 고대 시대에 비해 높아졌을까?

è 종교를 윤리의 이유로 삼았기 때문.

è 사고가 경직되어 있다.

 

32 서구 문명이 도덕적 근거를 비종교적인 인문주의에 두었더라면 그러한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반성이지요. 동양의 역사에는 과학과 종교의 모순이 없으며 동양 사회의 도덕적 구조는 기본적으로 인문주의적 가치가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è 모순이 없는 것이 아니라, 과학이 없었다.

 

34 동양의 사고는 현실주의적이라고 합니다. 현실주의적이라는 의미도 매우 다양합니다만 대체로 윌들의 삶이 여러 가지 제약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승인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 혼자 마음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고려해야 하고 나아가 자연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에게 모질게 해서는 안 되며, 과거를 돌이켜보고 미래를 내다보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일에 소용용이 없는 것이라면

 

여기서 우리는 서구인들의 동양에 대한 인식을 원천적으로 결정하고 있는 막스 베버에 대하여 언급해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막스 베버는 동양 사회의 정체가 바로 이 현실주의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39 만약 그릇이 그릇이기를 계속 고집한다면 즉 자기를 고집한다면 생성 체계는 무너지는 것입니다.

 

41 인성은 개인이 자기의 개체 속에 쌓아놓은 어떤 능력, 즉 배타적으로 자신을 높여 나가는 어떤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성이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논어] '덕불고 필유린'이란 글귀가 있습니다.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뜻입니다.

 

42 따라서 인성을 고양시킨다는 것은 먼저 '기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자기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닌 것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자기를 키우는 순서입니다.

è 듣고 보니 인성을 키우기 싫어졌다.

 

43 그러나 서양 문명뿐만 아니라 모든 사상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모순 구조를 내장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상은 대립, 모순, 긴장, 갈등 과정에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양적 구성 원리에서는 그러한 모순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화와 관흉에 대하여 대단히 높은 가치를 부여합니다. 중용이 그것입니다. … 그리고 모순 대립의 두 측면이 적대적이지 않다는 것 또한 대단히 중요한 차이입니다.

è 사상의 논리가 치열하지 않은 것은 아닌가? 너도 옳고 나도 옳다.

 

45 나는 21세기 담론은 그것이 진정한 새로운 담론이 되기 위해서는 근대사회의 기본적 구조를 새로운 구성 원리로 바꾸어내고자 하는 담론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문명사적 담론은 근대사회의 기본적인 구성 원리를 뛰어넘는 지점에서 모색되어야 마땅한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지양(Aufheben)을 통하여 21세기의 새로운 구성 원리를 모색하고 있다는 중국 모델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조화와 지양에 의하여 과연 새로운 문명이 모색될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과연 근대성을 뛰어넘는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구성 원리인가에 대하여 논의가 있어야 합니다.

è 중국의 사회주의가 고전적 가치를 표방하지는 않는데. 중국이 고전의 모태이므로 중국을 언급한 것인가, 아니면 자본주의로 점철된 세계 사회에서 거의 유일하고 거대하게 사회주의와 공존하고 있기 때문인가?

è 사회주의의 장점은 뭐지?

è 지양 : 1 . 더 높은 단계로 오르기 위하여 어떠한 것을 하지 아니함. ‘피함’, ‘하지 않음으로 순화.

2 . <철학> 변증법의 중요한 개념으로, 어떤 것을 그 자체로는 부정하면서 오히려 한층 더 높은 단계에서 이것을 긍정하는 일. 모순 대립 하는 것을 고차적으로 통일하여 해결하면서 현재의 상태보다 더욱 진보하는 것이다. ‘벗어남’, ‘삼감으로 순화. [비슷한 말] 양기5(揚棄).

 

46 고전을 재조명하는 작업은 어쩌면 오늘날처럼 속도가 요구되는 환경에서 너무나 한가롭고 우원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가 쌓아가고 있는 모순과 위기 구조는 근본 담론을 더욱 절실하게 요구하는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금언이 있습니다. 길을 잘못 든 사람이 걸음을 재촉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52 우리가 시경의 국풍 부분을 읽는 이유는 시의 정수는 이 사실성에 근거한 그것의 진정성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과 정서가 진정성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한 우리의 삶과 생각은 지극히 관념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53 여분

 

저 강둑길 따라 나뭇가지 꺾는다.

기다리는 임은 오시지 않고 그립기가 아침을 굶은 듯 간절하구나.

저 강둑길 따라 나뭇가지 꺾는다.

저기 기다리는 님 오시는구나. 나를 멀리하여 버리지 않으셨구나.

방어 꼬리 붉고 정치는 불타는 듯 가혹하다.

비록 불타는 듯 가혹하더라도 부모가 바로 가까이에 계시는구려.

 

해석 : 왕실이 불타는 듯 어지럽더라도 그러한 전쟁이나 정쟁에 일체 관여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지요. 관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부모가 가까이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è 이해할 수 없다. 어지러우면 바로 잡아야 할 것 아닌가?

 

56 시경은 중국 사상과 문화의 모태가 되고 있습니다. 시경은 제후국 간의 외교 언어로 소통되었으며 이를 통하여 공통 언어가 성립되고 나아가 중국의 문화적 통일성에 중요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문학의 길에 뜻을 두는 사람을 두고 그의 문학적 재능에 주목하는 것은 지엽적인 것에 갇히는 것입니다. 반짝 빛나게 될지는 모르지만 문학 본령에 들기가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 역사적 관점에 대한 투철한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 시대와 그 사회의 애호나이 자기의 정서 속에 깊숙이 침투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61 만리장성에 올랐을 대 이 시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책에도 이 시를 소개했습니다. 나는 관광지로 유명한 팔달령으로 가지 않고 찾는 사람도 별로 없는 사마대로 갔습니다. 팔달령은 관광 목적으로 개축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감회가 덜할 것 같았지요. 반면에 사마대는 마침 단 한 명의 관광객도 없는 쓸쓸하기 그지없는 전경이었습니다. 눈까지 내려 더욱 쓸쓸했습니다. 멀리 뻗어 있는 장성을 따라 시선을 던지며 그 엄청난 역사에 감탄하기도 하고 벽돌 한 장 한 장에 담겨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땀에 몸서리치기도 했습니다.

è 사마대에 가보고 싶다.

 

그러나 사실과 전설 가운데에서 어느 것이 더 진실한가를 우리는 물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사실보다 전설 쪽이 더 진실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문학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의 내면을 파고 들어갈 수 있는 어떤 혼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시경]의 시가 바로 이러한 진실을 창조항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이란 결국 진실을 구성하는 조각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의 조합에 의하여 비로소 진실이 창조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문학의 세계이고 시의 세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66 [시경]은 황하 유역의 북방 문학입니다.

 

67 천자의 언행을 기록하는 이러한 전통은 매우 오래된 것입니다. 그리고 동양 문화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사후의 지옥을 설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구속력이 강한 규제 장치가 되고 있습니다. "죽백에 드리우다"라는 말은 청사에 길이 남는다는 뜻입니다. 자손 대대로 그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는 것은 대단한 영예가 아닐 수 없습니다.

è ? 죽으면 그만 아닌가.

 

72 여기서 주공에 대하여 좀 더 소개하고 싶습니다. 주공은 공자가 며칠 간 꿈에 보지 못해서 아쉬워하던 바로 그사람이지요. 은나라를 멸망시킨 무왕의 동생이 바로 주공입니다. 이름이 희단이지요. 주공은 저우언라이와 함께 중국 최고의 정치가로 평가됩니다.

 

74 주공은 조선 시대의 세조와 같이 어린 조카를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고 자기가 군권을 장악할 수 있는 지위에 있었지만 끝까지 성왕을 도와 주나라의 기틀을 튼튼히 닦았습니다.

주공은 일반삼토, 일목삼착이라는 유명한 일화의 주인공입니다. 한 끼 밥 먹는 동안에도 세 번씩이나 먹던 밥을 뱉어내고 손님을 맞으러 달려 나가는가 하면, 한 번 머리 감는 사이에도 세 번씩이나 젖은 머릿단을 움켜쥐고 손님을 맞으러 달려 나갔다는 것이지요.

 

76 그리고 [무일]편은 생산하는 사람을 업신여기고 소비하는 사람을 우러러보는 우리들의 사고는 과연 어디서 연유하고 있는지, 그리고 한 개인의 정체성이 그 사람의 고뇌와 무관한 소비 행위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인지를 반성하는 관점에서 재조명되기를 바랍니다.

 

77 최근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약 3만 년 전 현생인류의 조상인 호모사피엔스(크로마뇽인)는 그 이전의 네안데르탈인에 비하여 노년층의 비율이 무려 다섯 배나 증가했음을 밝혀낸 것이지요. 노인 세대의 비율이 급증한 시기는 바로 폭발적인 인구 증가가 있었던 시기였으며 인류가 장신구를 사용하고 동굴벽화를 그리고 장례 행위를 시작한 때와 일치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나이 든 세대의 경험과 역할이 현생인류의 양적 팽창과 질적 발전을 가져온 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할머니 역할은 그 사회적 의미에 있어서 오늘날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지요.

 

78 굴원의 [이소] [초사]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힙니다. [이소]는 흔히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오디세이]에 비유되기도 하고 단테의 신곡에 비유되기도 하지만 전쟁 영웅을 기리는 서사시이거나 인간 이성의 구법 여행을 표현한 작품이 아닙니다. 실연한 여인의 장편 서사시입니다.

 

81-82

[어부]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갓의 먼지를 떤 다음 갓을 쓰는 법이며 몸을 씻는 사람은 옷의 먼지를 떤 다음 옷을 입는 법이라고 선언합니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

 

나는 굴원의 이 시를 '이상과 현실의 갈등'이라는 의미로 읽는 것이 ㅇ롷다고 생각합니다. 이상과 현실의 모순과 갈등은 어쩌면 인생의 영원한 주제인지도 모릅니다. 이 오래된 주제에 대한 굴원의 결론은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가장 정갈하게 간수해야 하는 갓끈을 씻고 반대로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 것입니다. 비타협적 엘리트주의와 현실 타협주의를 다같이 배제하고 있습니다. 이럿은 획일적 대용을 피하고 현실적 조건에 따라서 지혜롭게 대응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굳이 이야기한다면 대중노선을 지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감옥에서 만난 노선배들로부터 자주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이론은 좌경적으로 하고 실천은 우경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좌경적이라는 의미는 '신목자 필탄관 신욕자 필진의'처럼 비타협적인 원칙의 고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경적이라는 의미는 맑은 물에는 갓끈을 씻고 흐린 물에는 발을 씻는다는 현실주의와 대중노선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상과 현실의 갈등을 어떻게 조화시켜 나갈 것인 가 하는 오래된 과제를 마주하는 느낌입니다.

 

84 1972년 닉슨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마오쩌둥이 닉슨에게 건넨 선물이 놀랍게도 [초사]라는 사실입니다. 마오쩌둥은 [초사]를 손에서 한시도 놓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장정 때에도 손에소 [초사]를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직의 류사오치, 이론의 마오쩌둥"이라는 유행어가 있습니다만, 마오쩌둥 사상이 이러한 남방적 낭만주의가 갖는 자유로움과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남방과 낭만주의와 창조적 정신 영역이 서로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입니다. 현실에 매달리지 않고 현실의 건너편을 보는 거시적 시각과 대담함이 곧 낭만주의의 일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넓고 긴 안목이 비록 [초사]의 세계나 남방적 낭만주의와 무관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우리가 처하고 있는 공고한 체제적 억압과 이데올로기적 포섭 기제를 드러내야 하는 당면의 과제와 한번쯤 연결시켜보는 것도 매우 의미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è 비록 현재는 좌경적 이상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 것이 낭만주의

 

88 점치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약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스스로를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이러한 사람을 의지가 약한 사람이라고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스빈다. 그러나 '하면 된다'는 부류의 의기 방자한 사람에 비하면 훨씬 좋은 사람이지요. '나 자신을 아는 사람'은 못 되더라도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고 있는 겸손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요.

è 나는 의기 방자한 사람이다.

 

94 예를 들어 "사회는 개인의 집합이다" 또는 "인간은 이기적이다"와 같은 인식 틀을 봅시다. 이러한 사고는 매우 단순한 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을 분석함으로써 개인의 집합인 사회 전체를 분석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틀입니다. 사회가 개인의 집합이라고 하는 경우 인간이 집합 속에 있든 개인으로 있든 조금도 변함이 없는 것이지요. 인간이 이기적 존재라면 인간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시장 골목에 있건 가정에 있건 변함없이 이기적이어야 합니다. 존재론의 폭력적 단순성이라 할 만한 것이지요.

è 존재론은 필연적으로 단순한가?

 

95 사회나 인간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 틀을 잘 관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 경우든 우리의 인식 틀이 의외로 기계적이고 단선적인 논리 구조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대체로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 논리로 짜여져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100 개별적 존재에 대해서는 그것의 고유한 본질을 인정하지 않거나, 그러한 개별적 본질을 인정하는 경우에도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깁니다. 이는 동양적 전통에서 매우 자연스러운 생각입니다. 그 처지에 따라 생각도 달라지고 운명도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역지사지라는 금언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처지를 바꾸어서 생각하라는 말은 처지에 따라 그 생각도 달라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처지에 눈이 달린다"는 표현을 하지요. 사회과학에서는 이를 입장이라 합니다. 계급도 말하자면 처지입니다. 당파성과 계급적 이해관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109 태괘는 주역 64괘 중에서 가장 이상적인 괘라고 합니다. 하늘의 마음과 땅의 마음이 화합하여 서로 교통하는 괘입니다. 땅이 위에 있고 하늘이 아래에 있는 모양은 물론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자연의 형상과는 역전된 모양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이 태화의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하늘의 기운은 위로 향하고 땅의 기운은 아래로 향하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 만난다는 이치입니다. 서로 다가가는 마음입니다.

 

126 다음으로 주목해야 하는 것은 '꼬리를 적시고', '이로울 바가 없으며', 또 그렇기 때문에 '끝마치지 못한다'

는 일련의 사실입니다. 나는 이 사실이 너무나 당연한 서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실수와 실수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그러한 실수가 있기에 그 실수를 거울삼아 다시 시작하는 것이지요. 끝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세상에 무엇 하나 끝나는 것이라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람이든 강물이든 생명이든 밤낮이든 무엇 하나 끝나는 것이 있을 리 없습니다. 마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세상에 완성이란 것이 있을 리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64개의 괘 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이 미완성의 괘를 배치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128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날 만연한 '속도'의 개념을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늘날 만연한 '속도'의 개념을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속도와 효율성, 이것은 자연의 원리가 아닙니다. 한 마디로 자본의 논리일 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도로의 속성을 반성하고 '길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도로는 고속일수록 좋습니다. 오로지 목표에 도달하는 수단으로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 도로의 개념입니다. 짧을수록 좋고, 궁극적으로 제로(0)가 되면 자기 목적성에 최적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모순입니다. ''은 도로와 다릅니다. 길은 길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길은 코스모스를 만나는 곳이기도 하고 친구와 함께 나란히 걷는 동반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일터이기도 하고, 자기 발견의 계기이기도 하고, 자기를 남기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è 전혀 모순이 아닌데 어디서 모순이 있다는 것인가? 모순이 되기 위해서는 목적하는 바를 상정해두고 여기에 모순임을 증명해 보여야 하는데, 목적은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목적"에 도달하는 것이다. 목적에 더 빨리 도달하는 것이 목적에 모순되는가?

è 과정이 중요하다는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과정이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다고 하였지만 과정은 목적의 수단으로서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목적은 의미 그 자체이다. 목적과 목적 사이의 불필요한 시간을 최소화하는 것이 더욱 본질적 의미로 충만된 삶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è 고속도로를 내지 않고 새로운 단계로 도약할 수 있는가? 서울에서 부산을 오고 가는데 걸어서 10일이 걸리는 세계에 영원히 갇혀 사는 것이 과정의 의미라고 한다면 그렇게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울과 부산을 걸어서 오고 가는 길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다고 하여서 현재 우리의 삶이 조선 시대보다 더욱 의미가 결여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고속도로를 자동차로 오고가는 쾌감도 있으며, 심지어 서울과 부산으로 순간이동 할 수 있는 순간이동 캡슐을 체험할 시대가 온다고 한다면 이보다 더 멋진 체험이 어디 있겠는가?

 

131 [주역]에서는 위에서 본 것과 같은 철학적 구도 이외에 매우 현실적이고 윤리적인 사상이 일관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절제 사상입니다. 일례로 건위천괘의 상구 효사에 '항룡유회'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즉 하늘 끝까지 날아오른 용은 후회한다는 경계입니다. 초로 만들어진 날개를 달고 있는 이카루스가 너무 높이 날아오르자 태양열에서 녹아서 추락하는 것과 같습니다.

è 이카루스의 신화는 브레이크 없는 기술문명의 비판으로 잘 인용된다.

è 교훈은? 하늘 끝까지 오르지 말자. 기술이 초로 날개를 붙이는 수준밖에 안 된다면. 기술 수준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한계가 어디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나? 부딪혀 봐야 알 것 아닌가? 초로 붙였더니 녹았다. 그렇다면 다음 번엔 본드로 붙이고 그 다음 번에는 날개 형태도 바꿔보고 글라이드도 시험해 보고 동력 추진기도 달아봐야 하는 것이다.

è 갈매기의 꿈. 얼마나 감동적인 이야기인가? "갈매기는 정어리 찌꺼기를 얻어먹고 사는 주제에 대해 겸손하게 인식할 줄 알아야 해." 가 교훈이라면 이 소설이 감동이 있겠는가? 어디까지 높이 날 수 있는지 자기를 던져보는 "낭만주의"도 없이 어떻게 과정의 의미를 말하고 어떻게 삶의 의미를 말할 수 있나? ""??? 결국 체념하며 살다가 외부에서 주어지는 자극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 ""인가? 주어진 조건들을 시험도 해보지 않고 자연이 주어진 대로 되는대로 살아가는 것이 베버의 눈에는 "체념주의"로 보이는 것이 당연하지 않았을까? 베버가 과연 이 책을 읽고 ", 내 생각이 짧았구나. 과연 관계론이 더 중요하지."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체념주의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를 보여주는 책"이라고 평하지는 않을까?

 

132 [주역] 독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절제와 겸손이란 것이 곧 관계론의 대단히 높은 차원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 가지 사정을 배려하는 겸손함 그것이 바로 관계론의 최고 형태라는 것이지요.

è 겸손함의 사전적 의미는 아닌 것 같다.

è 인격이 수양되고 안목이 넓혀지면 겸손을 수행함에 있어서 여러 가지 사정도 고려하게 될 테지만 별개의 속성 같다.

 

141 그러나 우리가 이 지점에서 합의해야 하는 것은 고전과 역사의 독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제라는 사실입니다. 공자의 사상이 서주 시대 지배 계층의 이해 관계를 대변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오늘의 시점에서 규정하여 비민주적인 것으로 폄하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149 [주역] 지천태괘의 효사에서 '무왕불복'이란 구절을 읽었습니다. 지나간 것은 반드시 돌아온다는 뜻이었지요. 20세기를 보내면서 새로운 세기에 대한 숱한 소망과 전망이 제시되었지만 우리는 지금 20세기의 오만과 패권주의가 조금도 변함이 없는 참담한 현실을 목전에 보고 있습니다. 지금이 과연 21세기인가를 회의하고 있는 것이지요. 요컨대 과거란 지나간 것이 아닙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편의를 위한 관념적 재구성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è 매트 리들리. 이성적 낙관주의자.

è 빌 클린턴의 두 번째 대통령 취임식 기조 연설문 : "우리는 이제 더더욱 많은 국가가 독재주의보다 민주주의에 편입되어 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역사의 종말을 주장하는 수준은 아니더라도 더욱 인간적이고 정의로운 체제가 번지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è 2차 세계 대전 이후, 유태인 포로수용소 출신인 엘리 비젤의 <위험한 무관심>에 관한 연설이 있었고, 그 후 강대국들은 서방 세계의 무력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è 역사가 돌고 돈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거시 역사의 발전 가능성을 회의하는 "체념주의"의 근거로 쓰일 수 있겠다.

è 물론 역사는 돌고 돈다. 일부분에서. 그 원인은 무엇인가? 인간의 근본 속성이 "존재론적"으로 잘 변하지 않기 때문이며(가령 이기적이라거나 높은 자리를 원한다거나 자본 축적을 원한다거나), 국가간 패권주의를 견제할 적절한 도구가 "아직"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 일은 "아무도 모른다"가 더욱 정확한 답이라고 생각한다.

 

155 사카구치 안고의 [타락론]에 의하면 사회적 위기의 지표로 '집단적 타락 증후군'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집단적 타락증후군도 여러 가지 내용이 있습니다만, 우선 이 교통법규 위반 사례와 같이 모든 사람이 범죄자라는 사회적 분위기가 그 중의 하나입니다.

 

163 따라서 '군자화이부동'의 의미는 군자는 자기와 타자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타자를 지배하거나 자기와 동일한 것으로 흡수하려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반대로 '소인동이불화'의 의미는 소인은 타자를 용납하지 않으며 지배하고 흡수하여 동화한다는 의미로 읽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화의 논리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의 논리이면서 나아가 공존과 평화의 원리입니다. 그에 비하여 동의 논리는 지배, 흡수, 합병의 논리입니다. 동의 논리 아래에서는 단지 양적 발전만이 가능합니다. 질적 발전은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화의 논리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è 나는 소인

 

164 유럽 근대사 비판에 대하여

è 동양 고전의 중국과 한국의 관계는 그럼 뭐였다고 생각하나? 지배, 흡수, 합병, 심지어 "종교와 언어까지도 동일할 것"

 

172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정치란 신뢰이며 신뢰를 중심으로 한 역량의 결집이라는 사실입니다.

 

172 [논어]에서 인에 대한 공자의 답변은 여러 가지 입니다. 묻는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른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안연에게는 인이란 자기를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답변하였고 중궁에게는 자기가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라고 대답하는가 하면, 사마우에게는 인이란 말을 더듬는 것이라고 대답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인의 의미는 특정한 의미로 한정하기 어렵습니다.

è 나는 이미 서구적 문화에 길들여져서인지 definition을 명확하게 하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사람에 따라 달리 대답하는 것이 덕으로 이해되는 듯한데, 따지고 보면 그만큼 공자 자신도 인의 명확한 정의를 내리지 못했다는 뜻 아닌가? 이도 저도 아닌 의뭉스러운 것이 높은 학문이라는 듯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

 

179 인간의 사고가 두뇌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밝혀진 것은 적어도 일본의 경우 메이지 유신 이후라는 사실입니다. 그때까지는 사고가 가슴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았던 것이지요.

è 뇌손상을 입은 사람이 사고에 이상을 보이는 사례가 정말 단 한 건도 없었을까? 그렇다면 의심해 볼 수 있었을텐데사고하는 부위에 대한 믿음, 그리고 엄밀하게 생각해보지 않음. 그래서 메이지 유신이 될 때까지도 사고하는 장기가 어디인지도 알지 못하였다. 보고자하는 대로 보는 무서움.

 

182 [학이]편에 '학즉불고'란 구절이 바로 이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배우면 완고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지요. 학이 협소한 경험의 울타리를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학이란 하나의 사물이나 하나의 현상이 맺고 있는 관계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자기 경험에 갇혀서 그것이 맺고 있는 관계성을 읽지 못할 때 완고해지는 것입니다.

 

183 책상에서는 한 가지이지만 실제로 일해보면 열 가지도 넘는다.

"머리는 하나지만 손은 손가락이 열 개나 되잖아요."

내가 반론을 폈지요.

"머리는 하나지만 머리에는 머리카락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의 대답은 칼로 자르듯 명쾌했습니다.

"머리카락이요? 그건 아무 소용없어요. 모양이지요. 귀찮기만 하지요."

그렇습니다. 생각하면 머리카락이란 이런저런 모양을 내면서 결국 '자기'를 디자인하고 합리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187 세상 사람은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당신이 먼저 말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를 세상에 잘 맞추는 사람인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그야말로 어리석게도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하여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해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88 그러나 무욕과 무사에서 우리의 논의를 끝낸다면 그것은 너무나 상투적인 윤리학에 갇히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무욕과 무사를 설파하는 것보다 "모든 사람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공과를 불문하고 아무리 교묘한 방법으로 그것을 치장하더라도 결국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알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 핵심입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명석합니다. 이 말에 대하여 아마 선뜻 납득하기가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타자의 시각이 정곡을 찌르는 법입니다. … 그래서 대중은 현명하다고 하는 것이지요. 대중은 결코 속일 수 없습니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겸허해야 되는 이유입니다.

 

192 '마을의 모든 사람'에 대한 허망한 사랑을 가지고 있거나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증오에 대하여 알 만큼 알고 있기' 때문이라 믿습니다. 증오는 그것이 증오하는 경우든 증오를 받는 경우든 실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불행이 수반되게 마련이지만, 증오는 '있는 모순'을 유화하거나 은폐함이 없기 때문에 피차의 입장과 차이를 선명히 드러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증오의 안받침이 없는 사랑의 이야기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증오는 '사랑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193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어느 곳에나 다수로서의 민중은 존재하는 법이며 다수는 항상 선량하다는 사실입니다.

 

197 결국 많은 사람들이 그 배신의 경험 때문에 상품을 불신하고 나아가 증오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패션의 속도가 더욱 빨라집니다.

è 이렇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은데? 아무도 상품을 증오하지 않는다. 인터넷 쇼핑에서 쇼핑에 실패하는 경우는 있지만. 신영복의 책도 상품 아닌가? 패션의 속도가 빨라지는 것은 불신하는 자들이 재구매하는 것을 설명할 수 없다. 욕망이 끝이 없기 때문일 뿐. 조선 사회에서도 구매력과 정보력만 있었다면 유행은 얼마든지 가속되었을 것이다.

 

212 맹자가 양혜왕을 만나뵈었을 때 왕이 말했다. "선생께서 천리길을 멀다 않고 찾아주셨으니 장차 이 나라를 이롭게 할 방도를 가져오셨겠지요?"

맹자가 대답했다. "왕께서는 어찌 이()를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과 의가 있을 따름입니다."

 

물론 이 대목에서 맹자는 인과 의를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만 의에 무게를 두고 있는 사상가입니다. 인과 의의 차이가 곧 공자와 맹자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인이 개인적 관점에서 규정한 인간관계의 원리라면 의는 사회적 관계로서의 인간관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에 비하여 사회성이 많이 담긴 개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è 정말 그러하다.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는 좋은 게 좋은 것이지만, 사회로 확대되면 마냥 좋은 것이 좋은 것은 아니다.

 

227 이 장과 관련해서 여러분에게 논의의 과제로 남겨두고 싶은 한두 가지 대목이 있습니다. 우선 사단을 가지고 있는 것은 마치 사지가 있는 것과 같다는 대목입니다. 이것은 윤리적 차원의 선언이기는 하지만 "만민은 평등하다"는 주장과 통합니다. 매우 중요한 맹자 사상의 하나입니다. 어떤 점에서는 윤리적 차원의 성선설보다 더 중요한 맹자의 사회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è 모든 사람이 사지를 가지고 있으므로

 

233 그리고 삶의 자세와 관련해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체로 자기의 작은 실수도 그 원인을 바깥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바깥이란 남이기도 합니다.

 

237 소와 양

우리가 이 대목에서 이야기해야 하는 것은 동물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사회의 실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사회의 인간관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마디로 오늘날의 우리 사회는 만남이 없는 사회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주변에서 '차마 있을 수 없는 일'이 버젓이 자행되는 이유가 바로 이 '만남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만남이 없는 사회에 '불인인지심'이 있을 리 없는 것이지요.

 

241 지하철 이야기를 하나 더 하지요. 모스크바 지하철에서는 젊은이들이 노인을 깍듯이 예우합니다. 노인이 타면 얼른 일어나 자리로 안내하고, 노인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어쩌다 미처 노인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가는 그 자리에서 꾸중을 듣는다고 합니다. 의아해 하는 나에게 들려준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이 지하철은 저 노인들이 만들지 않았느냐!"는 것이었어요. 그것도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와서 한 젊은이한테 물어보았지요. 물론 잘 아는 젊은이였지요. 이 지하철을 만든 이가 바로 저 노인들인데 왜 자리를 양보하지 않느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그들의 답변 또한 의외로 간단한 것이었어요. "자기가 월급 받으려고 만들었지 우리를 위해서 만든 것은 아니잖아요." 참으로 충격적인 대답이었습니다. 도대체 이러한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요? 모스크바의 지하철이건 서울의 지하철이건 젊은이들이 만들지는 않았지요. 노인들이 만든 것이 사실입니다 .똑 같은 사실관계를 두고 모스크바의 젊은이와 서울의 젊은이가 판이한 대답을 하는 까닭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똑 같은 사실관계가 전혀 다른 의미로 읽히는 까닭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신도림역의 지하철 좌석 이야기는 동시대의 횡적인 인간 관계의 실상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반면에, 모스크바의 젊은이와는 판이한 우리나라 젊은이의 대답은 인간관계가 세대 간에 어떻게 단절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예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세대 간의 관계가 그만큼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는 종횡으로 단절되어 있습니다.

è 자본주의이기 때문인가? 그래서 사회주의 국가인 러시아는 노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나?

è 모스크바의 그 젊은이와 노인은 다시 만날 수 있는 사이일까?

è 사회주의 국가 러시아에서 유색인종 차별이 KKK단이라는 이름으로 과격하게 자행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나?

è 교육을 잘 받은 인간이라면 그러하지 않았겠지. 왜 인성교육이 부재하게 되었나? 긴 이야기다. 자녀의 인성에 별 관심을 보이는 부모가 없다.

 

249 사람도 모름지기 스스로를 모욕한 연후에 남이 자기를 모욕하는 법이며, 한 집안의 경우도 반드시 스스로를 파멸한 연후에 남들이 파멸시키는 법이며, 한 나라도 반드시 스스로를 짓밟은 연후에 다른 나라가 짓밟는 것이다.

 

263 도라고 부를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며,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 무는 천지의 시작을 일컫는 것이고, 유는 만물의 어미를 일컫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로서는 항상 그 신묘함을 보아야 하고, 유로서는 그 드러난 것을 보아야 한다. 이 둘은 하나에서 나왔으되 이름이 다르다. 다 같이 현이라고 부르니 현묘하고 현묘하여 모든 신묘함의 문이 된다.

 

핵심적인 개념은 무와 유입니다. 그리고 더욱더 중요한 것은 무와 유는 같은 것의 두 측면이라는 선언입니다. 1장의 핵심 개념은 무와 유이고 그것이 같은 것이라는 선언이지요.

 

264 노자 철학에 있어서 무는 '제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인식을 초월한다는 의미의 무입니다. 그런 점에서 무의 의미는 무명과 다르지 않습니다. 유명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름이 붙는다는 것은 인간의 인식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이지요. 식물의 경우도 잡초가 가장 자유로운 식물이라는 것이지요. 이름이 붙여진 경우는 인간의 지배 밑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그런 점에서 무와 무명은 같은 범주에 속합니다. 유와 유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명을 붙여서 읽거나 무명을 이름 붙이기 전으로 해석하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섣부른 절충도 피해야겠지만 지나치게 차이에 주목하는 것도 옳은 태도는 못 됩니다. 논의의 핵심을 놓치기 쉽기 때문이지요.

 

267 전체의 의미 맥락에 영향을 줄 정도가 아니라면 자구 해석에 있어서의 차이는 서로 용인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노자 사상은 그 함축적인 수사로 말미암아 얼마든지 다른 표현과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270 이처럼 노자의 도와 명은 서양의 사유와는 정반대의 지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유는 개념적 사유라는 것이 서양의 논리지요. 개념이 없으면 사유가 불가능한 것이지요. 이것을 노자류로 표현한다면 "도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며 이름 붙일 수 없는 이름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 이것이 서양의 사유입니다. 개념이 없으면 존재 자체가 없습니다. 칸트의 인식론에 의하면 모든 현상은 인식 주체인 인간의 선험적 인식 구조에 의하여 구성될 뿐이지요. 바로 이 점에 있어서 노자의 도와 명에 관한 제1장의 선언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하지만 노자의 경우 이것은 폭력적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언어는 존재가 거주할 진정한 집이 못 되는 것이지요.

è 하이데거의 주장은 인간이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존재 위에 덧입힌 이름이라는 개념이 사실은 역전된 것임을 폭로한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신선한 자각을 불러일으켰다.

è "개념에 대한 정의를 세우는 것"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정의하지 못해도 이름은 붙일 수 있다. 정의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276 성인은 무위의 방식으로 일하고 무언으로 가르쳐야 한다.

만물은 (스스로) 자라나는 법이며 간섭할 필요가 없다.

생육했더라도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되며

자기가 했더라도 뽐내지 않으며

공을 세웠더라도 그 공로를 차지하지 않아야 한다.

무릇 공로를 차지하지 않음으로 해서 그 공이 사라지지 않는다.

 

279 네팔에서 느낀 것입니다만 수입 전자 제품은 네팔 사람들로서는 감히 엄두를 낼 수 없는 고가인 반면에, 엄청난 수고가 담겨 있는 수공예품은 그 값이 거저나 다름 없었습니다. 볕바른 좌판에 놓여 있는 수공예품 앞에 앉아서 너무나 낮은 가격에 당사자가 아닌 내가 마음 아파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외환제도나 시장가격이란 고도의 수탈 메커니즘이 아닐 수 없습니다.

è 계획경제라고 뭐가 다를 줄 아는가? 포퓰리즘에 빠져 턱없이 낮은 가격으로 상정된 의료비는 과연 공리주의에 의한 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내가 드레싱 하고 받는 돈 1000원에 대해서도 좀 불쌍하게 생각해줘 봐라. 노동력을 헐값에 착취당하는 젊은 의사들에 대해서 인륜의 공분을 좀 느껴주면 안되나?

 

284 상선약수

노자가 물을 최고의 선과 같다고 하는 까닭은 크게 나누어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만물을 이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다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투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좀 설명이 필요합니다. 다투지 않는다는 것을 매우 소극적인 의미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다투어야 마땅한 일을 두고도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도피주의나 투항주의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다투지 않는다는 것은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다툰다는 것은 어쨌든 무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목표 설정에 무리가 있거나 아니면 그 경로의 선택이나 진행 방식에 무리가 있는 경우에 다투게 됩니다. … 다투지 않는다는 것은 작위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 처한다는 것이지요.

 

가장 낮은 물 = 바다

è 위로가 되는 구절이다.

 

294 노스님의 무소유는 사찰 종단의 거대한 소유 구조 위에서 가능한 것이지요. 그 자체가 역설입니다. 무소유가 가능한 것은 소유가 용이 되기 때문이지요. 노자의 역설입니다. 나는 무소유와 무의 가치를 예찬하기보다는 차라리 우리 사회가 숨기고 있는 보이지 않는 무, 숨겨진 억압 구조를 드러내는 관점에서 이 장을 읽어주기를 바랍니다.

 

294 "모든 살아 있는 생명들의 숨결을 위하여 한 줄기 바람이 되리라." 무와 유가 절묘하게 융화되고 있는 것이 바람이라고 생각하지요.

우리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우리들이 일하는 방식에 대한 반성의 의미로 이 장을 읽을 수 없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기 바랍니다.

 

298 다음으로는 자연에 관해서입니다. … 노자의 자연은 그러한 의미가 아닙니다. 굳이 영어로 표현하자만 'self-so' 정도가 가장 가까운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은 그 자체로서 완성된 것이며 다른 외부를 가지지 않은 존재입니다. 독립적 존재입니다. 그 이전도 그 이후도 상정할 수 없는 그야말로 항상적 존재입니다. 최후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최초의 존재입니다. 한마디로 최대한의 개념이며 가장 안정적인 질서가 바로 노자의 자연입니다.

è "잔디를 밟지 마시오."

드넓은 잔디밭을 만들어 놓고 사람들에게 잔디밭을 돌아가게 만든다. 어떤 생각이 드나? 잔디를 위한 잔디. 그렇다면 잔디는 필요가 없다. 필요로 가치를 따질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도대체 그 가치란 무엇을 근거로 가치임을 증명할 수 있는지 되물을 수 밖에.

è 'Self-so'에서 현재의 self는 자본주의가 몸으로 체화된 세상 그 자체인데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이미 상정해 둔 또 다른 self-so가 있다는 의미가 된다.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결국 이데아 또는 원형, 그리고 교조주의로서의 self-so가 존재한다는 의미가 된다. 현대의 사람들은 자본주의에 당연하게 soso 적응된 상태이며 21세기적 노자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 나의 말이 궤변이라고 주장하고 싶다면, self-so의 정의가 종적 유동성을 띄는지 아닌지 분명히 해야 할 것. Self란 도대체 어떤 self를 의미하나?

è 유전자 조작을 비판하려 한다면, 농사부터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땅을 있는 그대로 두지 않고 개간하여 가장 노자다운 "잡초"들을 뽑아서 죽이고 원하는 작물만을 골라서 키우기 때문이다.

 

310 근본적인 문제는 공동체 구성원 개개인의 '자유와 해방'에 있다는 것이 장자의 주장입니다. 이른바 장자의 자유주의 철학입니다. 개인을 지도, 감독, 보호하려는 일체의 행정적 또는 이념적 규제를 '인위적 재앙'으로 파악하였습니다.

 

313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예미도중'의 일화는 장자의 그러한 면모를 알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장자가 낚시를 하고 있을 때, 초의 위왕이 대부 두 사람을 보내어 재상을 삼으려는 뜻을 전했습니다. 장자는 낚싯대를 드리운 채 돌아보지도 않고 웃으며 사신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듣기로 초나라에는 신령스런 거북이 있는데 죽은 지 이미 3천년이나 되었다 합니다. 임금은 그것을 비단으로 싸고 상자에 넣어 묘당에 보관한다 합니다. 당신이 그 거북의 입장이라면, 죽어서 뼈만 남기어 존귀하게 되고 싶겠소, 아니면 살아서 진흙 속에 꼬리를 글고 다니고 싶겠소?" 하여 돌려보냈다는 일화입니다.

è 내 소설의 주제로 써야 하겠다.

è 장자의 생각이 나의 생각과 가장 일치하는 것 같다.

 

315 그러나 장자는 노자의 상대주의 철학 사상에 주목하고 이를 계승하고 있지만 이를 심화해가는 과정에서 노자로부터 결정적으로 멀어져 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주의적인 세계, '정신의 자유'로 옮겨갔다는 것이지요. 그것을 도피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떻든 노자의 관념화인 것만 것 분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è 개인주의가 왜 실천의 관념화인가? 개인주의는 두루뭉슬한 이기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건들지 마라."라는 것이 "너의 필요에도 응하지 않을 자유를 누리겠다."라는 뜻일까? 개인주의는 필연적으로 실천의 소멸, 즉 관념화로 이어지나? 그렇게 사유할 근거가 충분하다.

è 그러나 개인의 자유가 억압되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실천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316 그러나 우리는 바로 그 점에서 루쉰의 대가적 면모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첫째는 장자와 호루라기라는 극적 대비를 통하여 장자의 허구성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그 하나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장자의 무시비란 결국 통치자에게 유리한 논리임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호루라기는 권력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장자 사상이 권력에 봉사한다는 부정적 평가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그러게 원용되었을 뿐이며 [장자]는 권력 그 자체를 부정하는 근본주의적 사상으로 평가됩니다.

 

320 장자는 약소국의 가혹한 현실에서 자신의 사상을 키워낸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부자유와 억압의 극한 상황에서 그의 사상 세계를 구성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렇기에 그가 생각한 1차적 가치는 '생명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 없는 질서'보다는 '생명 있는 무질서'를 존중하는 것이지요.

è 입장에서 사상 난다.

 

328 도를 깨닫는 것은 이론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지요. 정서적 공감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지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완전한 이해가 못 된다고 해야 합니다. 정서적 공감이 없다면 그것은 아직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 상태입니다. 장자의 이리화정은 가슴으로 느끼는 단계를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330 동양의 가치는 인성의 고양

 

334-5 불치병자가 밤중에 아기를 낳고 급히 불을 들어 살펴보았다. 급히 서두른 까닭은 아기가 자기를 닮을 까봐 두려워서였다.

 

엄중한 자기 성찰과 냉철한 문명 비판의 메시지

 

345 화접몽 -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이것은 9만 리 장공을 날고 있는 붕새의 눈으로 보면 장주와 나비는 하나라는 것이지요. 장주와 나비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식하는 개별적 사물은 미미하기 짝이 없는 것이지요.

 

346 장주와 나비 사이에 무슨 구분이 있기는 있을 것이다. 이를 일컬어 물화라 한다.

 

모순과 통일을 운동의 형태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정태적 제물론이 아니라 동태적 제물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물, 즉 사물은 운동합니다. 정지도 운동의 한 형태입니다. 모든 사물은 변화 발전하는 동태적 형식으로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물은 원인이며 동시에 결과입니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인과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지요.

 

347 대폭발 이론을 전제하지 않더라도 나는 우리 자신을 포함한 이 우주의 모든 물은 별의 부스러기라는 것이 마음에 듭니다. 그 이름에서 매우 무한한 관계성을 느낍니다.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불이성의 세계입니다.

 

256 고기는 이를 테면 하나의 현상입니다. 반면에 그물은 모든 현상의 저변에 있는 구조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기가 하나의 사물이라면 그물은 세상의 모든 사물을 망라하고 있는 천망인 것이지요. 고기는 잊어버리든 잃어버리든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물입니다. 모든 사물과, 모든 사건과, 모든 사태가 그 위에서 생성 변화 발전하는 거대한 관계망을 잊지 않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지요.

 

364 나도 오랫동안 수형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런 정서를 조금은 알 수 있습니다만 묵적처럼 형벌을 받았다는 사실을 이름으로 삼아 공공연히 밝힌다는 것은 그 형벌이 부당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또 형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공언하는 것이지요.

 

369 공자와 묵자는 다 같이 춘추전국시대의 사회적 상황을 '사회적 위기'로 파악했습니다. 무도하고, 불인하고, 불의한, 이기적이고 파멸적인 시대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공자와 묵자는 현실 인식에 있어서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지만 문자는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세 가지의 고통을 받고 있는 바, 주린 자는 먹을 것이 없고, 추운 자는 입을 것이 없고, 일하는 자는 쉴 틈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현실 인식을 보더라도 묵자가 기층 민중의 고통에 주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76 성공회대 정보과학관 휴게실에 '겸치별란'이란 액자가 걸려 있습니다. 내가 쓴 글씨입니다. 겸애하면 평화롭고 차별하면 어지러워진다는 뜻이며 물론 묵자의 글에서 성구한 것ㅇ비니다. 묵자의 겸은 유가의 별에 대한 비판입니다. 이 별이야말로 공동체적 구조를 파괴하는 가장 근본적인 해악이라는 것이지요.

 

386 미리 아궁이를 고치고 굴뚝을 세워 화재를 예방한 사람의 공로는 알아주지 않고, 수염을 그을리고 옷섶을 태우면서 요란하게 불을 끈 사람은 그 공을 칭찬하는 것이 세상의 인심인 셈이지요.

 

392 묵자의 삼표는 첫째는 역사적 경험이며, 둘째는 현실성이며, 셋째는 민주성입니다.

 

394 우리가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묵자의 비명 사상입니다. 이 삼표론 역시 [비명]편에 있습니다. 비명일나 하늘이 정한 운명과 숙명을 부정한느 것입니다. 화복은 인간이 자초하는 것이며 결코 하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399 자기 생활이 아무리 마른 나무처럼 되어도 자기의 주장을 버리지 않으니 이는 정말 구세의 재사라 하겠다.

 

405 순자가 유가학파로부터 배척당한 가장 큰 이유는 아마 그의 천론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순자의 천은 물리적 천입니다. 순자의 하늘은 그냥 하늘일 뿐입니다. 인간 세상은 하늘과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유가의 정통적 천인 도덕천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지요. 순자는 종교적인 천, 인격적인 천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순자의 탁론입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유가의 정통에서 벗어난 것이지요. 정통 유가와 결정적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 바로 순자의 천론이고, 순자가 이단인 이유가 바로 천론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413 사람의 본성은 악한 것이다. 선이란 인위적인 것이다. 사람의 본성이란 태어나면서부터 이익을 추구하게 마련이다. 이러한 본성을 그대로 따르면 쟁라이 생기고 사양하는 마음은 사라진다. 사람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질투하고 증오하는 마음이 있다. 이러한 본성을 그대로 따르면 남을 해치게 되고 성실과 신의가 없어진다.

 

414 에드워드 윌슨 - 닭과 달걀.

è DNA, 이기적 유전자는 리처드 도킨스가 먼저인 줄 알았더니 아닌가보다.

 

422 군자는 널리 배우고 날마다 거듭 스스로를 반성하면 슬기는 밝아지고 행실은 허물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높은 산에 올라가지 않으면 하늘이 높은 줄 알지 못하고 깊은 골짜기에 가보지 않으면 땅이 두꺼운 줄 알지 못하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선비는 선왕의 가르침을 공부하지 않으면 학문의 위대함을 알 수 없는 것이다.

 

431 법가 - 다른 학파, 다른 사상에 비하여 현실 적합성이 실천적으로 검증된 학파인 셈이지요. 따라서 법가를 읽을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이러한 법가의 현실성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39 나는 법가의 법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공개 원칙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법치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막연한 생각을 분명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의 법치란 무엇보다 권력의 자의성을 제한하고 성문법에 근거하여 통치하는 것이었습니다.

 

444 법가 - 법 지상주의 사상. 공개성, 공정성 그리고 개혁성.

 

456 한 사람의 사상가를 이해함에 있어서 그의 인간적 면모에 주목한다는 것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갖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인간을 알지 못하면 그 사상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과 사상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지요.

 

464 권모술수의 대가인 한비자가 권모술수의 희생자가 되었던 이야기도 역설적이 아닐 수 없으며 ,특히 경쟁 상대를 제거 하기 위하여 동문수학의 우정을 미련 없이 던져버리는 이사의 비정함을 통하여 전국시대의 사람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됩니다.

 

471 특히 관계론이라는 주제에서 본다면 불교를 다루어야 마땅합니다. 불교 사상은 관계론의 보고라 할 수 있습니다. 연기론은 그 자체가 관계론입니다.

 

474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한 시간과 무변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는 드넓은 것이라는 진리를 깨닫는 그 순간,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저마다 찬란한 꽃이 됩니다. 아무리 보잘것없고 작은 미물이라도 찬란한 꽃으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온 천지가 찬란한 꽃으로 가득 찬 세계를 상상해봅시다. 한마디로 장엄한 세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읽어야 하는 [대방광불화엄경]의 의미가 이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478 이러한 해체론적 논의 구조와 비교해볼 때 불교 철학이야말로 존재론에 대한 가장 과격한 해체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82 그리고 송대 신유학과 관련된 논의 중에 우리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는 송대 신유학에 이르러 비로소 유학의 철학화가 이루어졌다는 평가입니다. 그러나 철학은 어디까지나 서양의 문화 전통에 비롯된 특수한 문화 아이템에 지나지 않는다는 반론이 있습니다.

 

488 격물치지 - 물과의 관계를 통하여 인식을 얻는다. 실천을 통하여 지에 이르게 된다. 물이란, 우리가 있다고 생각하든 없다고 생각하든 상관없이, 다시 말해서 우리의 주관적 의지와는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 인식과 깨달음이 외계의 객관적 사물과의 관계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주장은 매우 중요합니다. 돈오와 생각의 비약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지요. 선종 불교의 주관주의를 배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점이 주자가 주목한 [대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501 어쨌든 신유학은 13세기까지 중국이 경험하였던 정치 사회적 성취와 지적 유산이 학문적으로 재구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대단히 성공적인 역사 발전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서구 근대 사상에 의하여 치명적인 충격을 받을 때까지 중국 사상과 중국 사회 구조의 견고한 토대가 되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506 이러한 담론을 통하여 우리가 발견한 가장 중요한 것은 동양적 삶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가치는 '인성의 고양'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515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대답하기를, 나는 나무를 오래 살게 하고 열매가 많이 열게 할 능력이 없다. 나무의 천성을 다라서 그 본성이 잘 발휘되게 할 뿐이다. 무릇 나무의 본성이란 그 뿌리는 펴지기를 원하며, 평평하게 흙을 북돋아주기를 원하며, 원래의 흙을 원하며, 단단하게 다져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일단 그렇게 심고 난 후에는 움직이지도 말고 염려하지도 말 일이다. 가고 난 다음 다시 돌아보지 않아야 한다. 심기는 자식처럼 하고 두기는 버린 듯이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나무의 천성이 온전하게 되고 그 본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3. 내가 저자라면

 

 

 

 

 

 

20년의 밑바닥 사색의 결과에 대해 이토록 쉽게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미안한 일이다. 그러나 동일한 경험을 하지 않고서는 감정이 동하는 깨달음까지 동일하게 얻을 수 없다는 전제 하에, 과감한 비판을 해보려 한다. 따지고 보면 나는 신영복이 저서에서 말한 "오만방자한 사람"의 부류라 할 수 있다.

 

글은 "관계론의 화두"로 책의 서문을 열어 마지막까지 통일성 있게 이어간다. 책 하나를 관통하는 주제를 잘 잡고 있어 다양한 사상을 다루면서도 책의 뼈대가 흔들리지 않는다. 누가/언제/어디서/무엇을/어떻게/왜가 매우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렇다면 이제 사색의 깊이를 논할 차례이다.

 

==> "이게 다 자본주의 때문이다." 왠지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를 떠올리게 하는 문구?

 

어떤 평가에서 신영복은 사상의 '어른'일 뿐 래디컬리즘을 기대할 수는 없다고 하였는데, 나는 그가 동양 고전의 가치를 설파함에 있어서 그 누구보다 래디컬하다고 느꼈다. 서양에서 유래한 자본주의에 대한 그의 태도는 자본주의 = 패악이라는 단순성과 저돌성을 그 특유의 부드러운 문장으로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리하여 현대 사회는 각종 폐해가 점철되는 비관적인 사회이며 "이게 다 자본주의 때문이다."라고 주장하는 듯이 보인다. 특히 서구의 사상 체계가 오리엔탈리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상피적 지식만으로 부정적으로 판단하였다고 비판하면서 그들의 사상이 지극히 "폭력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는 "폭력적"이라는 말은 서양 사상사에 대해 수차례 언급하였다. 나는 동양인으로서 어느 정도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하였으나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었다. 나는 오히려 베버의 이론에 수긍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면서 신영복의 입장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

 

==> 결국 "소고기 사먹는 이야기"??

 

개그콘서트의 새로운 코너 중에 "어르신"이라는 코너가 있다. 가장 윗어른은 아랫 사람의 고민에 대한 대답으로 "무엇무엇을 하면 뭣하겠노. 그게 다 쓸데 없는 것이라. 뭣 하면 뭣 하겠지, 뭣 하면 뭣할 것이고... 그래서 결국 소고기 사먹겠제."로 끝나는 허황된 말을 한다. 저자가 서구와 동양의 사상 체계를 존재론과 관계론의 대치로 구분한 것은 압권이다. 그의 통찰력은 무릎을 치게 만든다. 그러나 관계론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과연 신영복의 주장처럼 (동양 고전의 가치에 기반한) 21세기에 전혀 새로운 담론의 사상이 등장할 수 있을 것인가? 물론 동양 고전은 핵심적인 참고서가 될 것이다. 그것은 서구 사상에 내재된 한계 때문이 아니다. 서구 사상의 발전으로 인해 네트워크 과학이 발전하였고, 또한 정보의 규모도 방대해졌다. 그 결과 동양 고전의 텍스트도 다시 한 번 주목 받을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된 것이다. 그것을 과연 과거에 서구 과학 문명이 동양을 침공한 것에 대한 역침공 수준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저 우연한 상동성이 가십처럼 거론되고 말 정도로 끝날 것인가? 개인적으로 좀 더 공부해 볼 필요성을 느낀다. 그러나 아직까지의 판단은 꽤 유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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