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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26일 08시 06분 등록

강의

-. 신영복 지음

-. 돌베개, 2004

 

 

저자에 대하여 - 신영복

 

 그는 1941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서울대 경제학과 및 동 대학원 경제학과를 졸업하였다. 숙명여대 경제학과 강사를 거쳐 육군사관학교 경제학과 교관으로 있던 중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게 된다. 복역한 지 20 20일 만인 1988 8 15일 특별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1989년부터 현재까지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로 재직중이다.

 

 이번 기회에 역사 속에서만 들었던 통일혁명단 사건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 사건에서 핵심은 북과의 관련 문제였다. 신영복은 통혁당에 대해서는 자신은 전혀 알지 못했고 중앙정보부에 가서야 들었다고 한다. 중앙정보부에서의 수사는 혹독했다. 이미 그들은 신영복이 전혀 모르는 것에 대해서도 다 알고 있었다. 현역 장교로 근무하고 있는 신영복이 북에 갔다 올 수 없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저들은 북에 갔다 온 날짜를 대라고 구타와 전기고문을 했다. 고문도 힘들었지만, 조사 자체가 고문이기도 했다. 청년기의 고민과 방황이 어린 수많은 만남과 토론, 그리고 서로 빌려주고 빌려 보았던 수많은 책들은 몇 십 장의 자술서와 몇 십 장의 조서와 몇 줄의 법률용어에 의해 온통 조직적인 관계로 규정됐다. 지난 수년간 자신이 행한 활동을 담은 것이건만 수사 기록은 외국어보다도 낯설었다. ‘이런 방식으로 한 사람의 복잡한 사상과 의식이 규정되고 단죄되는구나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감옥에서의 삶은 서로가 알몸으로 부대끼며 가식 없이 숨김없이 사는 탓에, 한방에서 오래 살다보니 서로의 과거와 생각을 공유하게 되고 자신의 삶과 완전히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한번은 목수출신이 집을 그릴 때 지붕부터 그리지 않고 주춧돌부터 그리는 것을 보고 그는 큰 충격을 받는다. 책이나 이론으로 배운 세계가 현실과 완전히 다를 수 있다는 생각에 그간의 인식틀을 깨부순 것이다. 무엇보다 10여년간 교도소에서 노동을 하면서 목공, 영선, 제화공, 재단사등으로 직접 노동자 생활을 온몸으로 고통을 느끼며 경험했다는 사실은 그 자신의 인간 개조론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특히, 감옥에서의 비전향 장기수들과의 만남은 이후 그의 사상과 인생관을 결정짓는 계기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막연하게 책에서나 보아온 분단과 전쟁의 피투성이 현대사의 이야기를 직접 이를 경험한 빨치산과 투사들을 통해 생생히 들음으로써 '피가 통하고 숨결이 이는 화석'처럼, 살아있는 역사체험을 한다. 또한, 한학자 출신의 사상장기수로부터 동양고전과 철학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서구사상에 매몰된 현실에 대한 자각과 자존을 깨닫고 고전학습에 몰입한 나머지 이후 성공회대에서 동양철학도 강의할 수 있게 된다. 신영복은 현재 서예가로도 명성이 높다. 이도 감옥에서 여러 장기수 선생으로부터 지도 받은 결과라 한다. 한문 서체로 익힌 필법은 한글에도 응용해 민중 정서에 맞게 민체, 연대체, 어깨동무체라는 글씨체를 창안해 독특한 경지를 보여주었다. 그래서 그는 감옥 20년의 삶이 완전히 인생을 바꾼 진정한'나의 대학시절'이었다고 고백했다.

 

 

■ 저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1988년)

엽서(1993년)

나무야 나무야 (1996년)

더불어 숲 1 (1998 6월)

더불어 숲 2 (1998 7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증보판 (1998 8월)

더불어숲-개정판 합본 (2003 4월)

신영복의 엽서 (2003 12월)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 (2004 12월)

처음처럼: 신영복 서화 에세이 (2007 1월)

청구회 추억: Memories of Chung-Gu Hoe (2008 7월)

For the First Time: 처음처럼(영문판) (2008 8)

신영복 (여럿이 함께 숲으로 가는 길) (2010 12)

 

 

■ 역서

외국무역과 국민경제(1966년)

사람아 아!사람아(1991년)

루쉰전(1992년)

중국역대시가선집(1994년)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1. 서론

 

20 국어사전 290쪽은 노촌 선생님께서 바늘을 숨겨놓는 책갈피이다. 바늘을 항상 노촌 선생님께서 바늘을 항상 노촌 선생님께 빌려 쓰면서도 무심하다가 언젠가 왜 하필 290쪽에다 숨겨두시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290'이 바로 '이구영'이라고 답변하셨다. 엄혹한 옥방에서 바늘 하나를 간수하시면서도 잃지 않으셨던 선생님의 여유이면서도 유연함이었다.

 

24 미래로 가는 길은 오히려 오래된 과거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자연과의 조화와 공동체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라다크의 오래된 삶의 방식에서 바로 오염과 낭비가 없는 비산업주의적 사회 발전의 길을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과거는 그것이 잘된 것이든 그렇지 못한 것이든 우리들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미래를 향해 우리와 함께 길을 가는 것이지요.

 

29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들은 관계가 있습니다. 관계없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차이보다는 관계에 주목하는 것이 바람직하지요. 수많은 관계 그리고 수많은 시공으로 열려 있는 관계가 바로 관계망입니다. 우리가 고전 강독의 화두로 걸어놓은 것입니다.

 

30 그러나 서양 문명은 이 두 개의 축이 서로 모순되고 있다는 사실이 결정적 결함이라는 것입니다. 과학과 종교가 서로 모순된 구조라는 것이지요. 과학은 비종교적이며 종교 또한 비과학적이라는 사실입니다.

 

34 다른 사람에게 모질게 해서는 안 되며, 과거를 돌이켜보고 미래를 내다보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일에 소용이 없는 것이라면 의미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현실주의란 한마디로 살아가는 일의 소박한 진실입니다.

 

36 살아간다는 것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며, 살아가는 일의 소박한 현실이 곧 소중한 가치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36 서양에서는 철학을 Philosophy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지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지에 대한 애입니다. 그에 비하여 동양의 도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길은 삶의 가운데에 있고 길은 여러 사람들이 밟아서 다져진 통로입니다 도자의 모양에서 알 수 있듯이 착과 수의 회의 문자입니다.

 

37 진리란 일상적 삶 속에 있는 것이 아니며 고독한 사색에 의해 터득되는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37 동양적 사고는 삶의 결과를 간추리고 정리한 경험과학적 체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동양 사상이 윤리적 수준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한다고 할 수 있지만 비종교적이며 과학과의 모순이 없습니다.

 

39 자연이란 공간과 시간의 통일, 유한과 무한의 통일체로서 최고, 최대의 개념을 구성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을 '생기의 장'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생성과 소멸이 통일이 되어 있는 질서입니다. 모든 것은 모든 것과 조화 통일되어 있으며, 모든 것은 생주이멸의 순환 과정 속에 놓여 있는 것이지요.

 

40 동양사사의 현실주의란 이러한 자연주의를 기본으로 하고 그 위에 인간과 인간관계를 두루 포괄하는 사회적 내용을 갖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41 <논어> '덕불고필유린'이란 글귀가 있습니다.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뜻입니다. 덕성이 곧 인성입니다. 인간이란 존재 자체를 인간관계라는 관계성의 실체로 보이는 것이지요. 인간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인간입니다. 이 사회성이 바로 인성의 중심 내용이 되는 것이지요.

 

41 인은 기본적으로 인 + 二人이인의 의미입니다. 즉 인간관계입니다. 인간을 인간, 즉 인과 인의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혹시 여러분 중에 간에다 초점을 두는 '사이존재'를 생각하는 사람이 없지 않으리라고 생각됩니다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존재에 중심을 두는 개념입니다. 동양적 구성 원리로서의 관계론에서는 '관계과 존재'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사이존재' '관계'는 본질적으로 다른것이지요.

 

42 따라서 인성을 고양시킨다는 것은 먼저 '기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자기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닌 것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자기를 키우는 순서입니다.

 

44 이러한 인간 중심주의, 좁은 의미의 인간주의가 갖는 독선과 좌절을 사전에 견제하고 사후에 지양하는 체계가 내부에 존재합니다. 그것이 유가의 대립면으로서의 도가 사상입니다.

 

44 노자는 자연을 최고의 자리에 두는 것이지요.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을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는 것이지요, 자연의 일부인 인간에 대하여 무위 무욕할 것을 가르치는 것은 당연합니다. 오만과 좌절을 겪을 수 밖에 없는 유가의 인본주의를 견제하고 그 좌절을 위로하는 종교적 역할을 도가가 맡고 있는 셈입니다.

 

47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금언이 있습니다. 길을 잘못 든 사람이 걸음을 재촉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2. 오래된 시와 언

 

53 <시경>독법은 우리들의 문화적 감성에 대하여 비판적 시각을 기르는 일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접근되기보다는 정서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야 함은 물론입니다.

 

55 정의가 언이 되고 언이 부족하여 가가 되고 가가 부족하여 무가 더해진다고 했습니다. 간절한 마음을 표현하기에는 말로도 부족하고 노래로도 부족해서 춤까지 더해 그 깊은 정한의 일단이나마 표현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악곡은 없어지고 가사만 남은 것입니다.

58 공자는 <시경>의 시를 한마디로 평하여 '사무샤'라 하였습니다. '사무사'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특함이 없다는 뜻은 물론 거짓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시인의 생각에 거짓이 없는 것으로 읽기도 하고 시를 읽는 독자의 생각에 거짓이 없어진다는 뜻으로도 읽습니다. 우리가 거짓 없는 마음을 만나기 위해서 시를 읽는다는 것이지요.

 

65 정호승의 시에 <종이학>이 있습니다. 비에 젖은 종이는 내려놓고 학만 날아간다는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유연하고 자유로운 사고를 길러야 하는 것이지요. 여러분도 아마 시간이 많이 들기 때문에 소설 읽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많은 글들을 읽고 나서 생각하면 핵심적인 요지는 시 한 편과 맞먹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시는 읽는 시간도 적게 들고 시집은 갑도 비싸지 않습니다. 시를 많이 읽기 바랍니다.

 

66 여러분이 잘 아는 미당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라는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시의 핵심은 바로 한 송이 국화가 피기 위하여 봄부터 소쩍새가 울고, 서리가 내리고, 천둥이 친다는 광활한 시공간적 연관성에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시상이 백낙천의 <국화>에 있지요. "간밤에 지붕에 무서리 내려 파초 잎새 꺽이고 연꽃은 시들어 기울었다. 오직 동쪽 울타리의 국화만이 추위에도 굴하지 않고 금빛 꽃술 환히 열고 해맑게 피어난다"는 내용입니다. <국화 옆에서>는 시상의 핵심을 여기서 취했다고 생각합니다.

 

70 군자는 무일에 처해야 한다. 먼저 노동의 어려움을 알고 그 다음에 편안함을 취해야 비로소 백성들이 무엇을 의지하여 살아가는가를 알게 된다.

 

77 여러분은 무엇이 변화할 때 사회가 변화한다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미래가 어디로부터 다가온다고 생각합니까?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식민지 의식의 전형입니다. 권력이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입니다.

 

82 나는 굴원의 이 시를 '이상과 현실의 갈등'이라는 의미로 읽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상과 현실의 모순과 갈등은 어쩌면 인생의 한 주제인지도 모릅니다. 이 오래된 주제에 대한 굴원의 결론은 창량의 물이 맑으면 가장 정갈하게 간수해야 하는 갓끈을 씻고 반대로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 것입니다. 비타협적 엘리트주의와 현실 타협주의를 다 같이 배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획일적 대응을 피하고 현실적 조건에 따라서 지혜롭게 대응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84 마오쩌둥 사상이 이러한 남방적 낭만주의가 갖는 자유로움과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남방과 낭만주의와 창조적 정신 영역이 서로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입니다. 현실에 매달리지 않고 현실의 건너편을 보는 거시적 시각과 대담함이 곧 낭만주의의 일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3. <주역>의 관계론

 

91 공자 이전 2500년은 점복의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자 이후의 시기는 <주역>의 텍스트에 대한 해석의 시대입니다. 경은 원본 텍스트이고, 전은 그것의 해설입니다.

101 여러분은 어떤 자리가 자기에게 어울리는 자리인지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궁금하지요? 이건 여담입니다만 나는 사람이란 모름지기 자기보다 조금 모자라는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01 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그 '자리'가 그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상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평소 '70%의 자리'를 강조합니다. 어떤 사람의 능력이 100이라면 70 정도의 능력을 요구하는 자리에 앉아야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30 정도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30정도의 여백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여백이야말로 창조적 공간이 되고 예술적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70 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 100의 능력을 요구받는 자리에 앉을 경우 그 부족한 30을 무엇으로 채우겠습니까? 자기 힘으로는 채울 수 없습니다. 거짓이나 위선으로 채우거나 아첨과 함량 미달의 불량품으로 채우게 되겠지요. 결국 자기도 파괴되고 그 자리도 파탄될 수밖에 없습니다.

 

103 나도 물론 중간을 매우 선호하는 편입니다만 그 선호하는 이유가 무난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내가 중간을 선호하는 이유는 앞과 뒤에 많은 사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가 가장 풍부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106 점이라고 하는 것 역시 그 본질에 있어서는 어떤 현상과 상황을 우리들의 일상적 관점과는 다른 논리로 재해석하고 조명하는 인식 체계입니다. 그것 역시 사물과 변화에 대한 판단 형식의 일종이며 그런 점에서 기본적으로 철학적 구조를 띠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07 <주역>은 변화에 관한 사상이고 변화에 대한 법칙적 인식이기 때문입니다.

  <주역>의 관계론적 철학 사상이 이러한 사회 역사적 지반 위에 형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무리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상이란 어느 천재의 창작인 경우는 없습니다. 어느 천재 사상가가 집대성하는 경우는 있을지 모르지만 사상이란 장구한 역사적 과정의 산물입니다.

 

107 <주역>은 글자 그대로 주나라 역사 경험의 총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나라 역시 그 이전의 여러 문화 사상의 총괄이라 할 수 잇습니다. <주역>과 주나라의 문화 사상은 이후 중국 문화화 동양적 사고의 기본 틀이 되고 있음이 사실입니다. 공자는 <주역>을 열심히 읽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위편삼절이라 하였습니다. 죽간을 엮은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많이 읽은 것으로 유명하지요.

 

112 멀리 있는 사람도 포용하고 맨발로 황하를 건너는 사람도 포용하고, 멀리하거나 버리지 않으며 붕당이 없으면 중도를 행함에 짝을 얻으리라.

 

119 나아가기보다는 물러나 강호에 묻히는 것이 난세를 살아온 사람들의 처세였습니다. 이러한 처세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습니다. 우직하게 직언하고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129 ''은 도로와 다릅니다. 길은 길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길은 코스모스를 만나는 곳이기도 하고 친구와 함께 나란히 걷는 동반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일터이기도 하고, 자기 발견의 계기이기도 하고, 자기를 남기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내가 붓글씨를 즐겨 쓰는 구절을 소개하지요.

  "목표의 올바름을 선이라 하고 목표에 이르는 과정의 올바름을 미라 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함께 올바른 때를 일컬어 진선진미라 합니다."

 

4. <논어>, 인간관계론의 보고

 

141 과거의 담론을 현대의 가치 의식으로 재단하는 것만큼 폭력적인 것도 없지요.

 

141 우리의 고전 독법은 그 시제를 혼동하지 않음으로써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그러한 관점이 고전의 담론을 오늘의 현장으로 생환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44 어쨌든 '학이시습지'의 습은 실천의 의미로 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시의 의미도 '때때로'가 아니라 여러 조건이 성숙한 '적절한 시기'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그 실천의 시점이 적절한 때임을 의미한다도 할 수 있습니다. 시는 often이 아니라 timely의 의미입니다.

 

150 옛것 속에는 새로운 것을 위한 가능성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변화를 가로막는 완고한 장애도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가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신의 방법으로서의 온은 생환과 척결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가이위사의' "스승이라 할 수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무난합니다. 스승이란 단지 정보만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지요. 더구나 과거지사를 전하는 것만으로 스승이 될 수는 없지요. 스승이란 비판적 창조자여야 하는 것이지요.

 

154 예와 형의 가장 큰 차이는 그것이 인간관계에 미치는 영향의 차이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형은 최소한의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에 비하여 예는 인간관계를 인간적으로 만듦으로써 사회적 질서를 세우려는 우회적 접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54 정치란 바로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형은 인간관계의 잠재적 가능성을 가두는 것이며 반대로 예는 인간관계를 열어놓음으로써 그것이 최대한으로 발휘될 수 있는 가능성을 키우는 구조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55 둘째로, 부끄러움에 관한 것입니다. 덕으로 이끌고 예로서 질서를 세우면 부끄러움도 알고 질서도 바로 서게 되지만, 정형으로 다스리면 형벌을 면하려고만 할 뿐이며 설사 법을 어기더라도 부끄러움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현실을 이야기화는 것 같습니다.

 

159 '아름다움'이란 우리말의 뜻은 '알 만하다'는 숙지성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모름다움'의 반대가 아름다움입니다. 오래되고, 잘 아는 것이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새로운 것, 잘 모르는 것이 아름다움이 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이 아니면 결코 아름답지 않은 것이 오늘의 미의식입니다.

 

163 '군자화이부동'의 의미는 군자는 자기와 타자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타자를 지배하거나 자기와 동일한 것으로 흡수하려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반대로 '소인동이불화'의 의미는 소인은 타자를 용납하지 않으며 지배하고 흡수하여 동화한다는 의미로 읽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화의 논리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용의 논리이면서 나아가 공존과 평화의 원리입니다. 그에 비하여 동의 논리는 지배, 흡수, 합병의 논리입니다. 동의 논리 아래에서는 단지 양적 발전만이 가능합니다. 질적 발전은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화의 논리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164 이러한 자본주의 논리가 바로 존재론의 논리이며 지배, 흡수, 합병이라는 동의 논리입니다. 종교와 언어까지도 동일할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 나라는 그러한 식민지 역사를 경험했지요. 그러므로 동의 논리를 극복하는 것은 곧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과 무관할 수 없는 것이지요.

 

167 '변화 그 자체'에 몰두하는 오늘의 상품미학에서 형식미는 더욱 덧없는 것이지요, 백범을 넘어서 그리고 루쉰을 넘어서서 이 '마음'의 문제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마음 좋다는 것은 마음이 착하다는 뜻입니다. 착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안다는 뜻입니다. 배려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168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게 마련이다." 이 구절은 사람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옛말에 쉰살까지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은 노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그때까지 그가 맺어온 인간관계가 안전망이 되어 그의 노후를 책임진다는 것이지요.

 

169 군자는 도를 추구할 따름이며 결코 식이나 빈을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청빈의 예찬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이야기이며 나아가 '사람과의 사업'에 대한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70 자공이 정치에 관하여 질문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정치란 경제, 군사, 그리고 백성들의 신뢰이다." 자공이 묻기를, "만약 이 세가지 중에서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하겠습니까? "군사를 버려라", "만약 (나머지)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버리지 않을 수 없다면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하겠습니까?" "경제를 버려라. 예부터 백성이 죽는 일을 겪지 않은 나라가 없었지만 백성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면 나라가 설 수 없는 것이다.

 

174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인간'입니다. 그러한 인간을 아는 것이 지라는 대단히 근본적 담론을 공자는 제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174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알려고 하는 그 사람이 나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그를 알기 위해서는 그가 나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자연의 대상물과는 달리 내가 바라보는 대상이 나를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서로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쌍방향으로 열려 있어야 합니다.

 

 180 독서는 독서 이후와 완벽하게 단절된 그저 독서일 뿐입니다. 실천과 유리된 관념의 소요(逍遙)일 뿐입니다. 책을 덮고 읽은 것을 다시 생각하고 정리해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책을 읽는 것이나 책을 덮고 생각하는 것은 같은 것을 반복하는 의미 이상일 수가 없었습니다.

 

182 이론과 실천의 통일입니다. 현실적 조건에 대한 고려가 있어야 함은 물론이며 동시에 특수한 경험에 매몰되지 않는 이론적 사고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182 학이란 하나의 사물이나 하나의 현상이 맺고 있는 관계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자기 경험에 갇혀서 그것이 맺고 있는 관계성을 읽지 못할 때 완고해지는 것입니다.

 크게 생각하면 공부란 것이 바로 관계성에 대한 자각과 성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87 세상 사람은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당신이 먼저 말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를 세상에 잘 맞추는 사람인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그야말로 어리석게도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하여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해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88 제갈공명의 명석한 판단은 무사(無私)에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천하를 도모하려는 사사로운 욕심이 없었음을 물론, '윗사람이 되려고 하는 욕심'마저도 없었지요. 이처럼 무사하기 때문에 공평할 수 있고 공평하기 때문에 이치가 밝아질(天理明)수 있는 법입니다.

 

189 나도 학생 때에는 교단 아래에서 선생님들의 강의를 들었지요, 그때 느낀 것입니다만 학생이란 위치 즉 교단 아래에 턱 괴고 앉아 있는 바로 그 자리는 선생의 일거수일투족이 너무나 잘 보이는 자리입니다. 강의 내용을 이해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강의 내용에 대한 선생 자신의 이해 정도가 너무나 훤하게 들여다보이는 자리입니다.

 

189 그러기에 집단적 타자인 대중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대중은 현명하다고 하는 것이지요. 대중은 결코 속일 수 없습니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겸허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192 '마을의 모든 사람'에 대한 허망한 사랑을 가지고 있거나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증오에 대하여 알 만큼 알고 있기' 때문이라 믿습니다. 증오는 그것이 증오하는 경우든 증오를 받는 경우든 실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불행이 수반되게 마련이지만, 증오는 '있는 모슨'을 유화하거나 은폐함이 없기 때문에 피차의 입장과 차이를 선명히 드러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증오의 안받침이 없는 사랑의 이야기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증오는 '사랑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198 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를 '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남'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짧은 만남 그리고 한 점에서의 만남입니다. 만남이라고 하기 어려운 만남입니다. 부딪침입니다.

 

199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200 지와 호를 지양한 곳에 낙이 있다고 생각하지요.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고전 강독의 관점에서 이를 규정한다면 "낙은 관계의 최고 형태"인 셈입니다. 그 낙의 경지에 이르러 비로소 어떤 터득이 가능한 것이지요.

 

201 지자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는 산을 좋아합니다. 지자는 동적이고 인자는 정적이다. 지자는 즐겁게 살고 인자는 오래 산다.

 

202 "하늘을 망라하는 그물은 성글기 그지 없지만 하나도 놓치는 법이 없다". 인자는 최대한의 관계성을 자각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3 흔히 <논어>가 갖는 최대의 매력은 그 속에 공장의 인간적 풍모가 풍부하게 담겨 있다는 점이라고 합니다.

 

207 먼 곳에서 벗이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 않으랴.

 

5. 맹자의 의

 

212 많은 연구자들이 일치된 견해는 공자의 인이 맹자에 의해서 의()의 개념으로 계승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중심 사상이 인에서 의로 이동했다는 것이지요. 인과 의의 차이에 대해서 물론 논의해야 하겠지만 한마디로 의는 인의 사회화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15 사실 <맹자>는 그의 주장과 같이 "문구의 생략과 중복이 절묘하고, 흐름이 경쾌하고 민첩하며, 비유가 풍부하고, ......어떠한 상대도 설복시킬 정도로 논리가 정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의문, 감탄, 부정구 등 문장의 형식도 다양하고 자유자재하여 한문의 문법과 예문의 교범이 되고 있는 것이 바로 <맹자>입니다.

 

219 현자는 여민동락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즐거움이란 여럿이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225 측은해 하는 마음은 인의 싹이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의의 싹이며, 사양하는 마음은 예의 싹이고, 시비를 가리는 마음은 지의 싹이다. 사람에게 이 네 가지 싹이 있음은 마치 사람에게 사지가 있는 것과 같다.

 

227 "만민은 평등하다"는 주장과 통합니다. 매우 중요한 맹자 사상의 하나입니다. 어떤 점에서는 윤리적 차원의 성선설보다 더 중요한 맹자의 사회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31 인이라는 것은 활 쏘는 것과 같다. 활을 쏠 때는 자세를 바르게 한 후에 쏘는 법이다. 화살이 과녁이 맞지 않으면 자기를 이긴 자를 원망할 것이 아니라 (과녁에 맞지 않은 까닭을)도리어 자기 자신에게 찾는다.

 

233 우리는 대체로 자기의 작은 실수도 그 원인을 바깥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바깥이란 남이기도 합니다. 내가 붓글씨를 쓰다가 전화벨 소리 때문에 글씨를 틀려버린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런 경우마저도 돌이켜보면 원인은 전화벨 소리가 아니라 자기 내부에 있었음을 깨닫게 되지요.

 

233 반구제기는 우리를, 나를, 내부를 먼저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운동의 원인은 내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개인이든 국가든, 자기반성이 자기 합리화나 자위보다는 차원이 높은 생명 운동이 되기 때문입니다.

 

237 소를 양으로 바꾼 까닭은 소는 보았고 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본다'는 사실입니다. 본다는 것은 '만난다'는 것입니다. 보고, 만나고, 서로 안다는 것입니다. '관계'를 의미합니다.

 

237 한마디로 오늘날의 우리 사회는 만남이 없는 사회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주변에서 '차마 있을 수 없는 일'이 버젓이 자행되는 이유가 바로 이 '만남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만남이 없는 사회에 '불인인지심'이 있을 리 없는 것이지요.

 

237 식품에 유해 색소를 넣을 수 있는 것은 생산자가 소비자를 만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식품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얼굴 없는 생산과 얼굴 없는 소비로 이루어진 구조입니다. 전에 이야기했듯이 당구공과 당구공이 만남처럼 한 점에서, 그것도 순간에 끝나는 만남이지요. 엄격히 말해서 만남이 아니지요. 관계가 없는 것이지요. 관계 없기 때문에 서로를 배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2차 대전 이후 전쟁이 더욱 잔혹해진 까닭이 바로 보지 않는 상태에서 대량 사살이 가능한 첨단 무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239 지하철은 평균 20분 정도 승차한다고 합니다. 승객들은 평균 열 정거장 이내에 서로 헤어지는 우연하고도 일시적인 군집일 뿐입니다. 나는 사회의 본질을 인간관계의 지속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맹자가 사단의 하나로 수오지심, 즉 치()를 들었습니다만 나는 이 부끄러움은 관계가 지속적일 때 형성될 수 없는 정서입니다.

 

240 자본주의 사회란 사회의 일반적 부문에 있어서의 인간관계가 일회적인 화폐 관계로 획일화되어 있는 사회입니다. 일회적 화폐 관계가 전면화되고 있는 인간관계는 사실상 인간관계가 황폐화된 상태이며, 인간관계가 소멸된 상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서로 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모든 사람이 타자화되어 있는 상태이며, '불인인지심'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구조이기 때문이지요.

 

245 '불영과불행'도 우리가 특히 명심해야 할 좌우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는 학과(學科)라고 할 때의 과입니다. 원래 의미는 '구덩이'입니다. 물이 흐르다 구덩이를 만나면 그 구덩이를 다 채운 다음에 앞으로 나아가는 법이지요. 건너뛰는 법이 없습니다. 건너 뛸 수도 없는 것이지요. 첩경에 연연하지 말고 우직하게 정도를 고집하라는 뜻입니다. 무슨 문제가 발생하고 나면 그제야 "기본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원칙에 충실하라"고 주문하기도 합니다. 그동안 건너뛰었다는 뜻이지요.

 

249 어린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로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량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리"라는 노래가 있다. 공자께서 이 노래를 들으시고 "자네들 저 노래를 들어보게. 물이 맑을 때는 갓끈을 씻지만 물이 흐리면 발을 씻게 되는 것이다. 물 스스로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라고 하셨다.

 

6. 노자의 도와 자연

 

254 노자가 가리키는 근본은 자연입니다. 노자의 귀()는 바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연이란 문명에 대한 야만의 개념이 아님은 물론이고 산천과 같은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노자의 자연은 천지인의 근원적 질서를 의미하는 가장 큰 범주의 개념입니다.

 

258 <논어>에서 공자의 인간적 면모를 볼 수 있는 것과 달리, <노자>에는 노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노자를 생환한다는 의미가 그 인간의 생환이 아님은 물론이지만 우리의 <노자> 독법이 그만큼 어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258 <노자> 81 5,200여 자에 이릅니다. 상편은 도로 시작하고, 하편은 덕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도덕경>이라 불리게 됩니다.

 

264 노자 철학에 있어서 무는 '제로'(0)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인식을 초월한다는 의미의 무입니다. 그런 점에서 무의 의미는 무명과 다르지 않습니다.

 

270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하지만 노자의 경우 이것은 폭력적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언어는 존재가 거주할 진정한 집이 못 되는 것이지요.

 

271 노자 철학을 물의 철학이라고 하는 까닭은 보이는 것 중에서 도에 가장 가까운 것이 물이기 때문에 물의 비유로써 도를 설명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271 결론적으로 무의 세계든 유의 세계든 그것은 같은 것이며, 현묘한 세계입니다. 유의 세계가 가시적이기 때문에 현묘하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무의 작용이며, 현상 형태이며, 그것의 통일체이기 때문에 현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아이는 단순할지 모르지만 그 어머니 때문에 복잡한 경우와 같은 것이지요.

 

273 <노자> 텍스트에서 대부분의 위() 인위, 작위의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인간의 개입이라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노자 사상의 기조는 대체로 유가에 대한 비판적 관점에 서 있습니다. 인의예지란 인위적인 것이며 그 인위적인 것이 세상을 어지럽힌다는 것이지요.

 

274 거시이란 글자는 여러분도 잘 알고 있듯이 ''()입니다. '()는 인() + () 입니다. 거짓의 근본적인 의미는 '인위'입니다. 인간의 개입입니다. 크게 보면 인간의 개입 그 자체가 거짓입니다. 자연을 속이는 것이지요. 개미라는 이름을 붙이고 곤충으로 분류하는 것이지요. 그 인식에 있어서 자연을 왜곡하여 거짓 인식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276 성인은 무위의 방식으로 일하고 무언으로 가르쳐야 한다.

    만물은 (스스로) 자라나는 법이며 간섭할 필요가 없다.

    생육했더라도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되며

    자기가 했더라도 뽐내지 않으며

    공을 세웠더라도 그 공로를 차지하지 않아야 한다.

    무릇 공로를 차지하지 않음으로 해서 그 공이 사라지지 않는다.

 

277 노자는 이 장에서, 먼저 잘못된 인식을 반성한 다음 올바른 방식으로 실천하기를 요구하는 것이지요. 말없이 실천하고 자랑하지 말고, 개입하지 말고, 유유하고 자연스럽게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노자 실천론의 요지입니다.

 

282 노자 정치학의 압권이 바로 '생선 굽는' 이야기입니다. "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작은 생선 굽듯이 해야 한다. 것이지요. 생선을 구울 때 생선이 익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집다가 부스러뜨리는 것이 우리들의 고질입니다. 생선의 비유는 일상생활의 비근한 예를 들어서 친근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284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이 경우 최고의 선은 현덕(玄德)이며 도입니다. 물은 물론 현덕이 아닐 뿐 아니라 도 그 자체도 아니지만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요.

 

285 물은 결코 다투는 법이 없습니다. 산이 가로막으면 멀리 돌아서 갑니다. 바위를 만나면 몸을 나누어 비켜갑니다. 곡류하기도 하고 할수(割水)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가파른 계곡을 만나 숨 가쁘게 달리기도 하고 아스라한 절벽을 만나면 용사처럼 뛰어내리기도 합니다. 깊은 분지를 만나면 그 콘 공간을 차곡차곡 남김없이 채운 다음 뒷물을 기다려 비로소 나아갑니다. 너른 평지를 만나면 거울 같은 수평을 이루어 유유히 하늘을 담고 구름을 보내기도 합니다.

 

285~286 물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 처한다는 것이지요. 이 경우 낮다는 것은 반드시 그 위치가 낮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비천한 곳, 소외된 곳, 억압받는 곳 등 여러 가지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물론 물은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나는 이 구절이 노자 정치학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속에서 대단히 풍부한 민초들의 정치학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89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이 '바다'입니다. 바다가 세상에서 가장 낮은 물입니다. 낮기 때문에 바다는 모든 물을 다 '받아들입니다.'그래서 그 이름이 '바다'입니다. 세상의 모든 물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지요. 큰 강이든 작은 실개천이든 가리지 않고 다 받아들임으로써 그 큼을 이룩하는 것이지요.

 

294 없는 듯이 있는 분의 이야기입니다. 노자의 무를 연상케 하는 품성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살아 있는 생명들의 숨결을 위하여 한 줄기 바람이 되리라." 무와 유가 절묘하게 융화되고 있는 것이 바람이라고 생각하지요.

 

298 미생물의 세계뿐만이 아닙니다. 생태계의 질서가 엄청난 규모로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파괴되고 있는 것이 바로 현대 사회입니다. 자연의 질서에 대한 거대한 간섭인 것이지요. 치산치수에서와 마찬가지로 백성들의 삶에 대해서도 개입하지 않는 것이 최고의 정치라는 것이지요.

 

301 '대변약눌' "최고의 웅변은 더듬는 듯하다"는 뜻입니다. 언은 항상 부족한 그릇입니다. 언어로는 그 뜻을 온전히 담아내기가 어렵습니다.

 

305 노자의 철학은 귀본(歸本)의 철학입니다. 본은 도이며 자연입니다. 그런 점에서 노자의 철학을 유가 사상에 대한 비판 담론으로 규정하는 것은 노자를 왜소하게 읽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자 철학이야말로 동양 사상의 정수를 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7. 장자의 소요

 

309 우물 안 개구리의 비유는 장자 사상을 가장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17 장자는 이 상식적 세계와 세속적 가치를 일갈하고 일소하고 초월하고 있습니다. 장자는 이러한 초월적 시각은 대단히 귀중한 것입니다.

 

318 장자의 세계에서 최고의 경지는 도를 터득하여 이를 실천하는 노자의 경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도와 일체가 되어 자유자재로 소요하는 경지를 의미합니다. 아무것에도 기대지 않고, 무엇에도 거리낌 없는 경지가 장자의 절대 자유의 경지라 할 수 있습니다.

 

325 '포정해우'의 이야기는 술()에 관한 것이 아니라 도에 관한 이야기임은 물론입니다. 장자 사상의 뛰어난 문학적 표현으로 평가됩니다. 자연의 이치를 이해하는 단계가 아니라 그것을 체득하고 있는 경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328 장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물의 필연성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즉 도의 깨달음이 아니라 그것과의 합일(合一)입니다. 이것이 바로 장자의 이리화정(以理化情)입니다. 도의 이치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도와 합일하여 소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도를 깨닫는 것은 이론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지요. 정서적 공감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지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완전한 이해가 못 된다고 해야 합니다. 정서적 공감이 없다면 그것은 아직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 상태입니다.

 

328 장자의 이리화정은 가슴으로 느끼는 단계를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머리보다는 가슴이 먼저 알고 있습니다. 교실과 책과 시험으로 채워진 학교 시절을 끝내고, 싱싱한 삶의 실체들과 부딪치며 살아가기 시작하면 이 말이 절실하게 가슴에 와 닿으리라고 생각합니다.

 

334 불치병자가 밤중에 아기를 낳고 급히 불을 들어 살펴보았다. 급히 서두른 까닭은 아기가 자기를 닮았을까 두려워서였다.

 

335 자기를 기준으로 남에게 잣대를 갖다 대는 한 자기반성은 불가능합니다. 한 사회, 한 시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회, 그 시대의 일그러진 모습을 정확히 직시하고 그것을 답습할까 봐 부단히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지요. 사회발전은 그러한 경로를 거치는 것이지요.

 

337 옛사람도 그와 마찬가지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전하지 못하고(글로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하께서 읽고 계시는 것은 옛사람들의 찌꺼기일 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338 세상에서 도를 얻기 위하여 책을 소중히 여기지만 책은 말에 불과하다. 말이 소중한 것은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며 뜻이 소중한 것은 가리키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은 그 뜻이 가리키는 바를 전할 수가 없다. 대체로 눈으로 알 수 있는 것은 형()과 색()이요 귀로 들어서 알 수 있는 것은 명()과 성()일 뿐이다.

 

342 장석이 집에 돌아와 잠을 자는데 그 큰 나무가 꿈에 나타나 말했다. "그대는 나를 어디에다 견주려는 것인가? 그대는 나를 좋은 제목에 견주려는 것인가? 아니면 돌배, , , 유자 등 과일나무에 견주려는 것인가? 과일나무는 과일이 열리면 따게 되고, 딸 적에는 욕을 당하게 된다. 큰 가지는 꺾이고 작은 가지는 찢어진다. 이들은 자기의 재능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는 것이지, 그래서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일찍 죽는 것이다. 스스로 화를 자초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세상 만물이 이와 같지 않은 것이 없다. 나는 쓸모 없기를 바란지가 오래다.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제야 뜻대로 되어 쓸모 없음이 나의 큰 쓸모가 된 것이다 .만약 내가 쓸모가 있었다면 어찌 이렇게 커질 수 있었겠는가? 그대와 나는 다 같이 하찮은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하여 서로를 하찮은 것이라 헐뜯을 수 있겠는가? 그대처럼 죽을 날이 멀지 않은 쓸모 없는 사람이 어찌 쓸모 없는 나무를 알 수가 있겠는가?

 

343 배로 강을 건널 때 빈 배가 떠내려와서 자기 배에 부딪치면 비록 성급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화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배에 사람이 타고 있었다면 비키라고 소리친다. 한 번 소리쳐 듣지 못하면 두 번 소리치고 두 번 소리쳐서 듣지 못하면 세 번 소리친다. 세 번째는 욕설이 나오게 마련이다. 아까는 화내지 않고 지금은 화내는 까닭은 아까는 빈 배였고 지금은 사람이 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모두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간다면 누가 그를 해칠 수 있겠는가?

 

346~347 모든 물, 즉 사물은 운동합니다. 정지도 운동의 한 형태입니다. 모든 사물은 변화 발전하는 동태적 형식으로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물은 원인이며 동시에 결과입니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인과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지요. 직접적 원인을 인()이라 하고 간접적 원인을 연()한다면, 즉 천인소연이라 한다면 모든 사물은 시간과 공간을 매개로 인연을 맺고 있는 것이지요. 불교의 연기설이 모든 존재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해체적 체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모든 존재를 꽃으로 보는 화엄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의 연기설에 있어서 인()과 과()는 불일불이의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가 아니면서도 둘이 아닌" 즉 서로 다르면서도 둘이 아니며 또 서로 다르면서도 하나인 관계에 있습니다. 이것이 장자의 재물과 물화의 관계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347 모든 존재는 인과 과의 관계 있으며 동시에 과와 인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은 배우는 제자의 입장에 있으면서도 또 가르치는 스승의 입장에 서 있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은 스승이면서 동시에 제자로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사물의 이이일(異而一)의 관계, "다르면서도 같은" 모순과 통일의 관계에 있는 것이지요. 상호 침투하는 것이지요. 장자의 '나비 꿈'은 바로 이러한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48 그런데 사실은 나는 말은 안 했지만 속으로 '별 부스러기 회' 보다는 "별똥회"가 낫다고 생각했지요. 아마 농촌 정서가 없는 젊은 사람들은 똥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가 보다고 생각했지요. 물론 '별 부스러기 회'의 정서도 이해는 가지요.

 

356 고기는 이를테면 하나의 현상입니다. 반면에 그물은 모든 현상의 저변에 있는 구조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기가 하나의 사물이라면 그물은 세상의 모든 사물을 망라하고 있는 천망인 것이지요. 고기는 잊어버리든 잃어버리든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물입니다. 모든 사물과, 모든 사건과, 모든 사태가 그 위에서 생성 변화 발전하는 거대한 관계망을 잊지 않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지요. 한 마리의 제비를 보고 천하의 봄을 깨달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관계망이지요. 중요한 것은 한 마리의 제비가 아니라 천하의 봄이지요. 남은 것은 경기의 승패가 아니라 동료들의 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는 것은 그물입니다. 그리고 그물에 관한 생각이 철학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8. 묵자의 겸애와 반전 평화

 

362 묵가는 유가와 함께 당시에는 현학이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비주류로 물러났습니다만 당시에는 가장 강력한 주류 학파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순자> 역시 유가라는 점에서 주류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한비자>는 법가 사상을 집대성한, 법가를 대표하는 사상입니다. 천하통일을 주도한 사상이란 점에서 법가를 비주류라고 하기에 다소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묵자>, <순자>, <한비자>가 중국 사상의 전체 흐름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비주류에 속한다고 해야 합니다.

 

366 맹자에 따른 "묵가는 보편적 사랑을 주장하여 정수리에서 무릎까지 다 닮아 없어진다 하더라도 천하를 이롭게 하는 일이라면 그것을 행동에 옮기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374 사회의 혼란은 모두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376 만약 천하로 하여금 서로 겸애하게 하여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한다면' 어찌 불효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천하가 서로 겸애하면 평화롭고 서로 증오하면 혼란해진다. 묵자께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 까닭이 이와 같다.

 

381 묵자에게 있어서 전쟁은 국가가 근본을 잃게 되는 것이며 백성들이 그 생업을 바꾸어야 하는 일입니다. 천하에 엄청난 해악을 끼치는 일입니다. 전쟁의 페단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임금이나 대신들이 그런 짓을 즐겨 행한다면 이것은 천하의 만백성을 해치고 죽이는 것을 즐겨 행한다면 이것은 천하의 만백성을 해치고 죽이는 것을 즐기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 묵자의 비공의 논리입니다.

 

282 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군자는 물을 거울로 삼지 않고 사람을 거울로 삼는다'고 했다. 물을 거울로 삼으면 얼굴을 볼 수 있을 뿐이지만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길흉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공격 전쟁이 이롭다고 하는 사람들은 어찌하여 지백과 부차의 일을 거울로 삼지 않는가?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전쟁이야말로 흉물임을 일찌감치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387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은 전쟁터에서 아들이 죽지 않고 돌아온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며, 돌아오는 아들을 맞으러 언덕에 서 있는 어머니의 상이야말로 그 어떠한 것보다도 전승의 의미를 절절하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했어요.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전쟁과 승리에 대한 나의 생각이 얼마나 천박한 것인가가 여지없이 드러난 것이지요.

 

388 묵자가 실이 물드는 것을 보고 탄식하여 말했다. 파란 물감에 물들이면 파랗게 되고 노란 물감에 물들이면 노랗게 된다. 넣은 물감이 변하면 그 색도 변한다. 다섯 가지 물감을 넣으면 다섯 가지 색깔이 된다. 그러므로 물드는 것은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단 실만 물드는 것이 아니라 나라도 물드는 것이다.

 

392 무엇을 삼표라고 하는가, (), (), ()이 그것이다. 어디에다 본을 할 것인가? 위로 옛 성왕의 일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 어디에다 원할 것인가? 아래로 백성들의 이목(현실)을 살펴야 한다. 어디에다 용할 것인가? 나라의 법과 행정이 시행되어 그것이 국가, 백성, 인민의 이익에 합치하는가를 검토하는 것이다. 이 세가지를 소위 판단의 세 가지 표준이라고 한다.

 

399 묵가는 중국 사상사에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최초의 좌파 조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국시대의 패권적 질서와 지배 계층의 사상에 대하여 강력한 비판 세력으로 기층 민중의 이상을 처음으로 제시하였습니다.

 

9. 순자, 유가와 법가 사이

 

405 순자가 유가학파로부터 배척당한 가장 큰 이유는 아마 그의 천론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순차의 천은 물리적 천입니다. 순자의 하늘은 그냥 하늘일 뿐입니다. 인간 세상은 하늘과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유가의 전통적 천인 도덕천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지요. 순자는 종교적인 천, 인격적인 천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408~409 하늘만을 하늘같이 바라보거나 하늘을 칭송하는 숙명론을 벗어던지고 스스로 운명의 창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운명이란 인간의 실천적 노력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순자의 사상 체계입니다.

 

411 주희의 성리학은 기본적으로 이학입니다. 주희는 사서의 주석도 이학의 입장에서 일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는 매우 복잡한 철학적 주제이지만 쉽게 이야기한다면 바로 천입니다. 말하자면 이는 천리입니다. 모든 사물에 반드시 내재되어 있으며, 세상을 관통하고 있는 최고의 원리이자 규범이 이()입니다.

 

414 맹자의 성선설이든 순자의 성악설이든 우리는 본성론 자체를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선악 판단을 한다는 것 자체가 올바른 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회로 자연을 재단하는, 이른바 꼬리가 개를 흔드는 격이기 때문입니다. 맹자의 성선설이 천성과 천리를 뒷받침하기 위한 개념인 것과 마찬가지로, 순자의 성악설은 그의 사회론을 전개하기 위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418 ()의 기원은 어디에 있는가? 사람은 나면서부터 욕망을 가지고 태어난다. 욕망이 충족되지 못하면 그것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욕망을 추구함에 있어서 일정한 제한이 없다면 다툼이 일어나게 된다. 다툼이 일어나면 사회는 혼란하게 되고 혼란하게 되면 사회가 막다른 상황에 처하게 된다. 옛 선왕이 이러한 혼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예의를 세워서 분별을 두었다. 사람의 욕구를 기르고 그 욕구를 충족시키되, 욕망이 반드시 물질적인 것에 한정되거나 물이 욕망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일이 없도록 함으로써 양자가 균형 있게 발전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예의 기원이다. 그러므로 예란 기르는 것이다.

 

421 예란 "사람의 욕구를 기르고 그 욕구를 충족시키되, 욕망이 반드시 물질적인 것에 한정되거나 물이 욕망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일이 없도록 함으로써 양자가 균형 있게 발전하도록 해야 한다"는 대목입니다.

 

422 나는 말한다. 학문이라 중지할 수 없는 것이다. 푸른색은 쪽에서 뽑은 것이지만 쪽보다 더 푸르고, 얼음은 물이 (얼어서) 된 것이지만 물보다 더 차다. 먹줄을 받아 곧은 나무도 그것을 구부려서 둥근 바퀴로 만들면 캠퍼스로 그린 듯 둥글다. 비록 땡볕에 말리더라도 다시 펴지지 않는 까닭은 단단히 구부려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무는 먹줄을 받으면 곧게 되고 쇠는 숫돌에 갈면 날카로워지는 것이다.

 

422 군자는 널리 배우고 날마다 거듭 스스로를 반성하면 슬기는 밝아지고 행실은 허물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높은 산에 올라가지 않으면 하늘이 높은 줄 알지 못하고 깊은 골짜기에 가보지 않으면 땅이 두꺼운 줄 알지 못하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선비는 선왕의 가르침을 공부하지 않으면 학문의 위대함을 알 수 없는 것이다.

 

422~423 <순자> (권학편)편의 첫 구절입니다. 유명한 '청출어람'의 출전이기도 하지요. 학습과 교화를 강조한 교육철학의 선언입니다. 곧은 나무를 휘어서 바퀴가 되게 하는 것을 유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교육입니다. 그리고 바퀴가 예전처럼 다시 펴지지 않는 것도 이 유의 효과입니다. 나무를 곧게 만드는 것도 교육이며 쇠를 날카롭게 벼리는 것도 교육의 역할입니다.

 

425 순자에게 중요한 것은 인도와 인심입니다. 천도와 천심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순자의 도는 천지의 도가 아니라 사람의 도일 뿐입니다. 순자의 이론에는 또한 신비주의적 요소가 없습니다. 그는 성인이라면 하늘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군자는 자기의 내부에 있는 것을 공경할 뿐이며, 하늘에 있는 것을 따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이 바로 순자의 이와 같은 인간주의와 인본주의라고 생각합니다.

 

426 순자가 음악을 주목하는 것은 그것이 즐겁고 감동적이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 착안하여 즐겁고 감동적인 예, 나아가서 즐겁고 감동적인 법을 전망하는 것이지요. 즐거움이 지나쳐서 그 도를 이탈하고 혼란하게 되는 것은 물론 경계해야 마땅하지만, 예는 근본에 있어서 즐거운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참으로 이례적인 것입니다. 순자의 예는 그처럼 유여한 것입니다.

 

426~427 순자는 예론에서 예는 기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순자의 예가 곧 법이 되는 것임은 이미 이야기했지요. 따라서 순자는 법이란 무엇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기르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회의 잠재력을 길러내는 것이며, ''()이란 글자 그대로 물()이 잘 흘러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428 난세의 징조는 그 옷이 화려하고, 그 모양이 여자 같고, 그 풍속이 음란하고, 그 뜻이 이익을 쫓고, 그 행실이 잡스러우며, 그 음악이 거칠다. 그 문장이 간사하고 화려하며, 양생에 절도가 없으며, 죽은 이를 보내는 것이 각박하고, 예의를 천하게 여기고, 용맹을 귀하게 여긴다. 가난하면 도둑질을 하고, 부자가 되면 남을 해친다. 그러나 태평시대는 이와 반대이다.

 

10. 법가와 천하 통일  

 

432~433 송나라 농부의 우화인 '수주대토'는 어제 일어났던 일이 오늘도 또 일어나리라고 기대하는 어리석음을 풍자하고 있습니다. 이 우화가 농부의 어리석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다른 제자백가를 풍자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변화하는 현실을 낡은 인식 틀로써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며, 대응 방식도 미래 지향적이지 못하고 과거 회귀적이라는 것이지요. 시대를 보는 눈이 없는 것이지요. 법가는 그런 점에서 다른 모든 학파와 구별되는 분명한 차별성을 갖는 학파라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세상이 변화하면 도를 행하는 방법도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법가의 현실 인식입니다.

 

433 법가의 가장 큰 특징은 이처럼 변화를 인정하고, 변화된 현실을 받아들이는 현실성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의 정치는 변화된 현실에서는 적합하지 않은 사상이라는 것이지요. 급변하는 현실 속에서 인의의 정치를 주장하는 것은 고삐 없이 사나운 말을 몰려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 법가의 인식입니다.

 

436 한비자(BC, 280~233)는 법가 사상을 집대성한 법가의 대표입니다.

 

438 법가 사상 형성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람을 먼저 제나라의 관중을 듭니다. 관중은 토지 제도를 개혁하고, 조세, 병역, 상업과 무역등에 있어서 대폭적인 개혁을 단행합니다. 법가의 개혁적 성격을 가장 앞서서 보여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39 진나라 상앙은 먼저 성문법을 제정하고 문서로 관청에 보관하여 백성들에게 공포해야 한다는 소위 법의 공개성을 주장했습니다.

 나는 법가의 법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공개 원칙이라고 생각합니다.

 

440 다음으로 상앙은 법에 대한 신뢰와 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신상필벌과 엄벌주의의 원칙을 고수했습니다.

 

441 항상 강한 나라도 없고 항상 약한 나라도 없다. 법을 받드는 것이 강하면 강한 나라가 되고, 법을 받드는 것이 약하면 약한 나라가 된다.

 

443 현재 우리 사회에는 범죄와 불법 행위라는 두 개의 범죄관이 있습니다. 절도, 강도 등은 범죄 행위로 규정되고, 선거사범, 경제사범, 조세사범등 상류층의 범죄는 불법행위로 규정됩니다. 전혀 다른 두 개의 범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소위 범죄와 불법 행위는 그것을 처리하는 방식이나 그것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각도 전혀 다릅니다. 범죄 행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매우 가혹한 것임에 반하여, 불법 행위에 대해서는 더없이 관대합니다.

 

443 법의 도리는 처음에는 고생스럽지만 나중에는 오래도록 이로우며, 인의 도리는 처음에는 잠깐 동안 즐겁지만 뒤에 가서는 곤궁해진다.

 

445 법가의 법()은 오늘의 법학과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통치론, 지도자론, 조직론 등 오늘날 정치학 분야까지도 포괄하고 있는 훨씬 광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법가는 새로운 정치 상황에 대한 새로운 대응 과정에서 형성된 학파였습니다.

 

447 한비자의 사상은 그것이 군주 철학이란 점에서 비판되기도 하지만, 한비자의 군주 철학은 분명한 논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권력이야말로 난세를 평정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논리입니다.

 

447~448 임금을 정점으로 하는 정치권력을 확고히 하지 않는 한 간특한 무리들을 내쫓을 수 없으며, 칼을 차고 다니며 법을 무시하는 법외자들을 제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혼란과 혼란으로 말미암은 인민의 고통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강력한 중앙을 확립하는 것임을 한비자는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452 탁이란 책입니다. 리포트를 작성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탁을 가지러 갑니다. 현실을 본뜬 탁을 가지러 도서관으로 가거나 인터넷을 뒤지는 것이지요. 현실을 보기보다는 그 현실을 본뜬 책을 더 신뢰하는 것이지요. 발을 현실이라고 한다면 여러분도 발로 신어보고 더 신뢰하는 것이지요. 발을 현실이라고 한다면 여러분도 발로 신어보고 신을 사는 사람이 못 되는 것이지요.

 

457 악양은 공로를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의심을 받고, 진서파는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신임을 받았다. 교묘한 속임수는 졸렬한 진실만 못한 법이다.

 

458 그림이든 노래든 글이든 실제로 그것은 어떠한 것이든 결정적인 것은 인간의 진실이 담겨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인간의 혼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비자의 이러한 인간적 면모가 적어도 내게는 법가를 새롭게 이해하는 데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460 모든 사상은 기본적으로 기존의 관념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개념적 인식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잊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461 우리가 법가 사상에서 적극적 의미로 읽어야 하는 것은 개혁성과 법치주의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상에 비하여 분명한 차별성을 갖는 법가의 특징입니다.

 

11. 강의를 마치며

 

472 불교 사상의 핵심은 연기론과 깨달음입니다.

 

478 어떠한 존재도 인연으로 생겨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존재도 공하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이지요. 연기는 결과이며 나무는 원인입니다. 연기가 인연으로 생겨난 과인 것과 마찬가지로 나무도 인연으로 생겨난 과입니다. 물과 햇볕과 흙의 상마에 의하여 생겨난 것입니다. 물과 햇볕과 흙이 사라지면 나무도 사라지는 것이지요. 인과 과는 하나가 아니면서 서로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서로 다르면서도 하나인 것입니다. 이것을 불이무이라 합니다.

 

482 그리스 철학 이후 중세의 스콜라 철학을 거쳐 근대 철학에 이르기까지 소위 서양 철학은 현실과 이상, 현상과 본질 등을 구분 짓는 이분법적 구조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학적 구조라는 것이지요. 존재론적 구조이면서 동시에 신학적 구조라는 또 하나의 특수한 사유 형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 철학이라는 것이지요.

 

491 <대학>은 평천하, 즉 세계 평화를 위한 방법론과 평화의 내용에 관한 담론이라는 것이지요. 평천하, 즉 평화로운 세계는 명덕과 친민과 지선이 실현되는 세상을 의미합니다.

 

495 정자가 말하기를 치우치지 않는 것을 중이라 하고, 바뀌지 않는 것을 용()이라 한다. 중은 천하의 바른 도요, 용은 천하의 정한 이치이다. 이 편은 바로 공문에서 전수한 삼법이니 자사는 그것이 오래되어 어긋나게 될까 봐 염려하였다.

 

502 "효친의 마음이 없다면 효도의 없다면 효도의 이()가 있을 수 없으며, 충성의 마음이 없다면 충성의 이가 있을 수 없다. 충효의 이가 있기 때문에 충성과 효심이 생긴다고 하는 주자의 입장과는 정반대입니다.

 

511 그림은 우선 '그림'이라는 의미에 충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림' '그리워함'입니다. 그리움이 있어야 그릴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린다는 것을 그림의 대상과 그리는 사람이 일체가 되는 행위입니다. 대단히 역동적인 관계성의 표현입니다. 나아가 그림은 우리 사회가 그리워하는 것, 우리 시대가 그리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나게 합니다. 이처럼 시와 문 그리고 서와 화라는 정서적 영역은 우리의 독법인 관계론을 확장하고 다시 그것을 인격화할 수 있는 소중한 영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513 산에는 새 한마리 날지 않고

    길에는 사람의 발길 끊어졌는데

    도롱이에 삿갓 쓴 늙은이

    홀로

    눈보라 치는 강에 낚시 드리웠다.

 

515 무릇 나무의 본성이란 그 뿌리는 퍼지기를 단단하게 다져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일단 그렇게 심고 난 후에는 움직이지도 말고 염려하지도 말 일이다. 일단 그렇게 심고 난 후에는 움직이지도 말고 염려하지도 말 일이다. 가고 난 다음 다시 돌아보지 않아야 한다. 심기는 자식처럼 하고 두기는 버린 듯이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나무의 천성이 온전하게 되고 그 본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515 다른 식목자는 그렇지 않다. 뿌리는 접히게 하고 흙은 바꾼다. 흙 돋우기도 지나치거나 모자라게 한다. 비록 이렇게는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사랑이 지나치고 그 근심이 너무 심하여, 아침에 와서 보고는 저녁에 와서 또 만지는가 하면 갔다가는 다시 돌아와서 살핀다. 심한 사람은 손톱으로 껍질을 찍어보고 살았는지 죽었는지 조사하는가 하면 뿌리를 흔들어보고 잘 다져졌는지 아닌지 알아본다. 이렇게 하는 사이에 나무는 차츰 본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비록 사랑해서 하는 일이지만 그것은 나무를 해치는 일이며, 비록 나무를 염려해서 하는 일이지만 그것은 나무를 원수로 대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뿐이다. 달리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저자라면

 

 신영복 교수의 이름은 회사에 근무하고 있을 때 우연히 듣게 되었다. 신제품 이름을 바꾸는데, 그가 쓴 작품 제목과 서체를 가져와 제품명을 만들었다. 바로 '처음처럼' 소주였다. 지금에야 비로서 그의 책을 만나게 되어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어렵게만 여겨졌던 고전을 어떤 방식으로 소화시키고, 현 시대의 문제점을 고전과 연결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는 지혜를 제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비지향적인 자본주의의 확장과 이기적 개인주의에 대한 우려를 동양 고전의 여러 가지 화두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이번 주 '강의'을 읽으면서 오랜만에 '강의' 요청이 들어왔다. 강의 주제는 '식품안전 위기관리 대응'이었다. 강의 내용을 준비하면서 이 책에서 얻는 소중한 깨달음, 몇 가지를 강의하면서 소개했다. 먼저 "모든 사람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내용이다. 불만 고객을 대응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 겸손, 겸허라는 내용을 설명하는데 효과적이었다. 또한 강의를 하고 있는 나의 모습이 자리에 앉아 있는 수강생들이 어떻게 생각하며 받아들이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으며, 강의 내용을 보다 충실하게 준비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고객이 불만을 가지게 되는 원인이 고객의 성향이나 취향 등 외부에 있지 않고 우리 내부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었다. 마지막으로 식품 안전사고가 발생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생산자가 소비자를 만나지 않기 때문에 단순히 생산에만 이익이만 몰두한 결과라고 말했다. 자신이 만든 제품을 가족이 먹는 거라 생각하고,  자신의 아이가 먹는다고 생각하면 식품 사고를 미연에 예방할 수 있을 거라고 설명했다.

 이번엔 이론적인 이야기보다는 실제 사례중심으로 강의를 진행했었는데, 수강생들의 호응이 좋았다. 실제 고객을 만나면서 경험했던 생생한 상황들을 보여주고, 그러면서 얻은 느낌들을 전해주었을 때 공감을 하는 눈빛이었다.

 

 이 책에서도 저자가 감옥에서 고전을 읽으면서 가졌던 생생한 체험이나 깨달음에 대한 내용이 깊게 와 닿았다.  그래서 내가 저자라면, 감옥에서 어떤 시기에 무슨 고전을 읽었는지 설명해주고 싶었다. 저자가 가장 힘든 순간에 읽어내려 갔던 고전의 문구들이 어떤 것이며, 어떤 힘을 주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아직 그의 저서인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저자가 느낀 고전의 풍부한 감동이 담겨져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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