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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11일 06시 46분 등록

관자

: 관중 지음, 김필수/고대혁/장승구/신창호 함께 옮김

: 소나무, 2006

 

 

 

A. 저자 소개 : 관중에 대하여

 

 

 1. 관중은 누구인가?

 

주나라가 쇠퇴해질 무렵, 여러 나라들이 패권을 다투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들을 한 묶음으로 묶어줄 지도자가 없던 시기이기도 했다.

마침 이러한 시기에 제환공이 등장하게 되었고 또한 제환공을 도와 패업을 이룩하게 했던 사람이 관중이다.

더구나 그 당시에는 패자(覇者)라는 개념이 없었고 맹주(盟主)라는 개념도 없었던 시절이다.

그러나 제환공의 등장으로 인해 제후(諸侯)들을 모아 그 회맹(會盟)하여 최초의 패자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제환공이 맹주가 되어서 패자가 되었다면 관중을 이를 보필하여 책사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던 것.

 

 

관중(管仲) 이오(夷吾)는 영수(潁水) 남쪽 사람이다.

그는 젊었을 때 항상 포숙아(鮑叔牙)와 사귀었는데, 포숙은 그의 현명함을 알아주었다.

관중은 곤궁하여 언제나 포숙을 속였지만, 포숙은 항상 그를 잘 대해 주었으며, 속인 일에 대해 따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난 뒤, 포숙은 제(齊)나라 공자(公子: 제후의 아들을 말함) 소백(小白)을 섬기고, 관중은 공자 규(糾)를 모셨다.

소백이 왕위에 올라 환공(桓公)이 되었고, 이에 맞서던 규는 싸움에서 져 죽었다.

관중은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으나 포숙은 환공에게 관중을 힘껏 추천하였다.

이렇게 하여 관중은 제나라의 정치를 맡게 되었다.

 

 

제나라의 환공은 관중을 등용하여 천하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환공이 제후들을 여러 차례 모아 천하를 바르게 이끈 것은 모두 관중의 정책에 따른 것이다.

그러던 관중도 관포지교(管鮑之交)의 고사성어의 유래를 빌어 살펴보면 어린 시절에는 꽤나 불운하게 지냈을 가능성이 크다.

 

 

관중이 말하길 " 내가 가난하게 살았을 때 포숙과 장사를 한 적이 있었다. 이익을 나눌 때마다 내가 더 많은 몫을 차지하곤 하였으나, 포숙은 나를 욕심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가난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한 번은 내가 포숙을 대신하여 어떤 일을 경영하다가 실패하여 그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지만, 포숙은 나를 어리석다고 하지 않았다. 운세에 따라 좋은 때와 나쁜 때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일찍이 세 번이나 벼슬길에 나갔다가 세 번 군주에게 내쫓겼지만, 포숙은 나를 모자란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내가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세 번 싸움에 나갔다가 세 번 모두 달아났지만, 포숙은 나를 겁쟁이라고 하지 않았다. 내가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공자 규가 왕의 자리를 놓고 벌인 싸움에서 졌을 때,[나와 함께 곁에서 규를 도왔던] 소홀(召忽 )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나 나는 붙잡혀 굴욕스런 몸이 되었다.

그러나 포숙은 나를 부끄러움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자그마한 일에는 부끄러워하지 않지만 천하에 이름을 날리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

 

만약 포숙아가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없었더라면 관중은 제환공을 도와 패업을 이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관중은 시대를 진취적으로 이끄는 눈을 가졌더라면 포숙아는 그것을 알아보는 재능이 있었던 것이다.

 

관중은 제나라의 재상이 되어 정치를 맡자, 보잘 것 없는 제나라가 바닷가에 있는 이점을 살려,

다른 나라와의 교역을 통해 재물을 쌓아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군대를 튼튼하게 만들었으며,

백성들과 더불어 좋고 나쁜 것을 나누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 창고의 물자가 풍부해야 예절을 알며, 먹고 있는 것이 풍족해야 명예와 치욕을 알게 된다.

임금이 법도를 실천하면 아버지, 어머니, 형, 동생, 아내, 자식이 굳게 뭉치고 나라를 다스리는

네 가지 강령, 즉 예의(禮)․정의(義)․깨끗함(廉)․부끄러움(恥)이 펼쳐지지 못하면 나라는 멸망한다.

수원(水源)에서 물이 흘러가듯이 명령을 내리면 그 명령은 민심에 순응하게 된다."

 

 

관중은 정치를 하면서 재앙이 될 수 있는 일도 복이 되게 하고, 실패할 일도 돌이켜서 성공으로 이끌었다.

그는 이해(利害)를 분명하게 따지고, 득실을 재는 데 신중히 하였다. 예를 들면, 제나라 환공은 부희 소희(少嬉)가 뱃놀이하는 중에 배를 흔들어 놀라게 한 죄를 물어 그녀를 모국인 남쪽 채(蔡)나라로 내쳤는데, 채나라에서 그녀를 다시 시집보내자 화가 나서

채나라를 친 일이 있었다. 그때 관중은 채나라와 거리상 가까운 초나라를 함께 쳐서, 주나라 왕실에 포모(包茅: 참억새로 만든 제사 용품으로 술을 거르는 데 씀)를 바치지 않은 것을 나무랐다. 또 환공이 북쪽의 산융(山戎)을 치려 하자, 관중은 이 기회에 연나라를 쳐서 [그들의 조상인] 소공(召公)의 어진 정치를 다시 실행하도록 했다. 또 가(柯)에서 제후들을 만나 맹세할 때, 환공이 노나라에서 빼앗은 땅을 돌려주기로 한 노나라 장수 조말(曹沫)과의 약속을 어기려고 하자, 관중은 이 약속을 지켜 신의를 세우도록 하였다. 이 일로 해서 제후들은 제나라로 귀의하게 되었다. 그래서 "주는 것이 곧 얻는 것임을 아는 것이 정치의 비책이다."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관중은 제나라의 국력 강화 계획을 추진했다. 그의 국력 강화 계획이란 한마디로 창고가 실해야 예절을 알고, 의식이 족해야 영욕을 안다.(倉實而知禮節, 衣食足而知榮辱)는 것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국가경제가 튼튼하고 국민경제가 부유해야 부강한 나라가 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관중은 황하(黃河) 하류에 자리 잡고 있는 제나라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소금 생산을 늘리고 매매되는 소금에 세금을 붙였다.

 

춘추시대의 내륙 국가들은 제나라의 소금을 수입하지 않을 도리가 없어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제나라는 이 돈으로 쌀을 사 쌀이 귀한 다른 나라에 판매하니 국부가 증대했다.

또한 관중은 강력한 군사력이 강국의 기본 요건이라고 생각해 오가병제(五家兵制)를 실시했는데 이는 일정 규모의 상비군을 둔 것이었다. 이와 별도로 한 가구에서 병사를 한명씩 차출해 조직한 3개 민병군을 두어 평시에는 농사를 짓고 전시에는 상비군의 지휘를 받아 전투에 임하게 했다. 이를 통해 평시에는 군사비를 줄이면서도 전쟁시에는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강군을 지닐 수 있었다.

 

관중은 이처럼 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으로 환공을 춘추시대 최초의 패자로 만들 수 있었다.

특기할 것은 관중이 다른 나라를 군사적으로 정복해 환공을 패자로 만든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외교적 방식으로 환공을 패자로 만들었는데 그 방법 중 하나가 회맹(會盟)이었다.

회맹이란 제 환공의 주재 아래 각국의 제후들이 한 자리에 모여 회의를 하는 것으로, 이는 곧 제 환공의 패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2. 관중의 논란점.

 

관중은 그 자신이 제환공을 도와 이룩한 위대한 패업(霸業)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모셨던 공자 규를 따라 죽지 않은 점과 관련해 후세에 두고두고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유가(儒家)의 경우는 이 문제를 놓고 집요하고도 끈질긴 논란이 전개했다. 이 문제는 크게 두 가지 시각으로 엇갈려 있다. 하나는 관중이 주군을 따라 죽지 않은 것은 어디까지나 대의(大義)를 살리기 위한 것으로 비난할 대상이 아니라는 시각이 그것이다. 일종의 대의론(大義論)에 입각해 관중의 행위를 적극 변호하는 입장이 그것이다.

 

 

 이에 반해 관중이 대의를 내세워 모시던 주군을 좇아 죽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의 변명에 불과한 것으로 관중의 행위는 결국 변절(變節)에 지나지 않는다는 시각이 있다. 관중의 행위를 일종의 변절론(變節論)으로 취급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입장이 상이할 수밖에 없을지는 모르나 관중은 난세로 접어드는 춘추시대 중기에 태어나 제환공을 도와 천하를 바로 잡은 인물이다. 그가 이룩한 이 같은 업적을 인정하지 않고 단순히 모시던 주군을 위해 죽지 않았다는 점만을 강조해 그의 행위를 변절로 모는 것은 소아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관중이 죽지 않고 살아서 제환공을 섬긴 데에는 제환공에게서 명군(明君)의 자질을 발견한 관중의 판단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보아야 한다. 동시에 관중 스스로 천하를 바로잡아 보겠다는 대지(大志)를 지닌 인물이었다는 점 또한 빼놓을 수 없다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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