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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16일 22시 32분 등록

장자

-. 오강남 풀이

-. 현암사, 1999

 

 

저자에 대하여 - 장자

 

 장자는 몽()지역의 사람인데, 이름은 주(). ()에서 태어나 맹자와 동시대에 노자를 계승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실재성은 의심스럽다. 그는 몽의 칠원의 관리였는데, 양혜왕(재위기간: B.C. 370~319)과 제선왕(재위기간: B.C. 319~301)과 동시대 사람이다. 전국시대 말기, 도가의 사상가들이 원본 <장자>를 편찬할 때, 이것을 장주(莊周)에게 가탁(假託)하여 『장자』라 명명한 듯하다. <장자>는 공자ㆍ맹자보다 노자와 함께 장자가 존중되기에 이르렀던 한대 초기에, 전국 말 이래의 도가의 논저(論著)를 부가하여 성립한 것으로서, 통일된 체계는 없지만 도가 사상의 역사적 전개를 볼 수 있다. 관영(官營)인 칠원(漆園)에서 일한 적도 있었으나, 그 이후는 평생 벼슬길에 들지 않았으며 10여 만 자에 이르는 저술을 완성하였다. ()나라의 위왕(威王)이 그를 재상으로 맞아들이려 하였으나 사양하였다. 여기서 사마천의 장자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살펴보자.

 

 그의 학문은 엿보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포괄적이었지만, 그 학문의 요체와 근본은 노자의 말에 귀착된다. 공자의 추종자들(유가)을 비판하고 노자의 학술을 밝혔다. 그는 글을 잘 짓고 문장을 잘 엮었고, 사실을 가리켜 실정을 유추해냄으로써 유가와 묵가를 공격했다. 그래서 비록 당시의 원숙한 학자들이라고 할지라도 그의 비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장자의 말은 광대하고 심원하지만 그는 스스로 자유 분망하게 말하는 것으로 만족하였기 때문에, 왕공 대인들은 그를 등용해서 쓸 수가 없었다.  

 

 장자는 노자(老子)와 마찬가지로 도()를 천지만물의 근본원리라고 본다. 도는 어떤 대상을 욕구하거나 사유하지 않으므로 무위(無爲)하다. 도는 스스로 자기존재를 성립시키며 절로 움직인다. 그러므로 자연(自然)하다. 도는 있지 않은 곳이 없다. 거미 ·가라지 ·기왓장 · ·오줌 속에도 있다. 이는 일종의 범신론(汎神論)이다. 도가 개별적 사물들에 전개된 것을 덕()이라고 한다. 도가 천지만물의 공통된 본성이라면 덕은 개별적인 사물들의 본성이다. 인간의 본성도 덕이다. 이러한 덕을 회복하려면 습성에 의하여 물들은 심성(心性)을 닦아야 한다. 이를 성수반덕(性脩反德)이라고 한다. 장자는 그 방법으로 심재(心齋)와 좌망(坐忘)을 들었다. 덕을 회복하게 되면 도와 간격 없이 만날 수 있다. 도와 일체가 되면 도의 관점에서 사물들을 볼 수 있다. 이를 이도관지(以道觀之)라고 한다. ()의 관점에서 사물들을 보면 자기는 귀하고 상대방은 천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도의 관점에서 사물들을 보면 만물을 평등하게 볼 수 있다.

 

 인간은 도와 하나가 됨으로써 자연에 따라 살아갈 수 있으며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이러한 자유는 천지만물과 자아 사이의 구별이 사라진 지인(至人)이라야 누릴 수 있다. 이 지인은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고 천지만물들과도 사이 좋게 살아갈 수 있다. 장자의 사상은 대부분 우언(寓言)으로 풀이되었으며, 그 근본은 노자(老子)의 무위사상(無爲思想)을 계승하는 것이지만, 현세와의 타협을 배제하는 점에서는 더욱 철저하여, 바로 그와 같은 면에서 장자의 분방한 세계가 펼쳐진다.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장자>를 읽기 전에

 

17 윤리와 실용을 강조하는 유교의 가르침을 양이라 한다면, 좀더 신비한 내면을 강조하는 도교의 가르침을 음이라 할 수 잇다. 이 둘은 서로 배척하는 관계가 아니라 완화하는 관계로 조화와 균형을 이상으로 삼는 동양인의 정신적 필요에 부응해 온 셈이다.

 

17 도가 사상의 근간은 노자와 장자의 사상이다. 그래서 후대에 와서 그것을 흔히 노장 사상이라고도 한다.

 

19 곽상은 장자』를 33편으로 하고 이를 내편 7, 외편 15, 잡편 11편으로 나누었다.

 

21 노자가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닙니다.”하는 엄숙한 선언으로 『도덕경』 첫머리를 시작한 데 반해, 장자는 북쪽 깊은 바다에 물고기 한 마리가 살았는데, 그 이름을 곤이라 하였습니다.” 하는 이야기로 운을 떼었다.

 

21 아무튼 노자가 자상하면서 근엄한 철인의 풍모를 지녔다면, 장자는 투철한 눈매로, 때로는 크게 껄걸 웃고, 가끔은 험구도 불사하는 재기발랄한 야인의 모습을 지녔다고 하겠다.

 

22 장자의 일차적 관심은 무엇보다 개인이 내적으로 성장하고 깨닫기 위해 힘쓸 것을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노자가 도가적 정치실현을 이상으로 삼았다면, 장자는 도가적 삶의 완성에 초점을 맞춘 셈이다.

 

22 장자는 도를 무궁한 생성 변화 그 자체로 파악하고, 근원으로 돌아가기보다는 그냥 그 변화에 모을 맡겨 함께 흐르거나 그대로 변하기를 더욱 강조하였다고 볼 수 있다. 『도덕경』은 주로 도의 하는 측면을 말하였는데, 장자』는 도의 하는 기능을 부각한다.

 

22 그러면 장자는 우리에게 기본적으로 무엇을 가르쳐 주려 하는가? 엄격히 말하면 가르쳐 주려는 것이 없다. 무엇을 가르쳐 주기보다는 우리가 떠받드는 상식적인 고정 관념, 이분법적 사고 방식, 거기에 기초를 둔 맹목적인 가치관, 윤리관, 종교관 등을 우리에게 스스로 깊이 살펴보게 해서 이런 것들의 내재적 모순과 불합리함을 발견해 없애도록 도와 줄 뿐이다.

 

23 모든 이분법적 사고 방식을 넘어선 상태, 야심과 욕망과 우월감 등 일체의 자의식을 극복한 상태, 이런 빈 마음의 상태에서 도와 하나가 되어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고, ‘신나는, 힘있는 삶,풍요한 삶, 활력이 넘치는 삶, 절대적인 자유의 삶으로 이끄는 장자의 초청을 발견한다.

 

25 절대 자유와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변화초월’, 이것이 『장자』 전체의 주제이며 가르침의 궁극 목표라 할 수 있다.

 

1편 자유롭게 노닐다

 

28 끝없이 멀기 때문에 푸르게 보이는 것은 아닙니까? 붕새가 높이 떠서 내려다보니까 이처럼 까마득하고 푸르게 보일 뿐입니다.

 

28 바람이 충분하지 못하면 큰 날개를 띄울 힘이 없습니다. 구만리 창공에 오른 붕새는 큰 바람을 타야 푸른 하늘 을 등에 지고 거침이 없이 남쪽으로 날아갑니다.

 

29 히브리 지혜서에 나오는 창조 설화를 보면, ‘신령한 바람이 혼돈 위에 안장서 마치 알을 품고 있는 새와 같이 만물에게 각각 생명의 기운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30 종교사에서 거의 모든 종교는 우주의 바람, 이 바람이 사람에게 작용해서, 그것이 사라을 신바람이 넘치는 사람, 생기에 찬 사람, 진정으로 살아 있는 자유인이 되게 한다는 기본 진리를 가르치고 잇다는 것도 확실한 사실이다.

 

30 “바람을 타라. 생기를 찾아라. 그리하여 활기찬 삶을 살아라.” 이것이 건조하고 무의미한 인간의 현존을 뛰어넘는 진정한 초월이라는 것이다.

 

31 “우리는 한껏 날아 보아야 겨우 느릅나무나 다목나무에 이를 뿐이고, 어떤 때는 거기에도 못 미쳐 땅에 내려앉고 마는데, 구만리를 날아 남쪽으로 간다니.”

 

31 조금 아는 것으로 많이 아는 것을 헤아릴 수 없고, 짧은 삶으로 긴 삶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32 눈이 어두운 우리에게는 하루하루 먹고살기도 바쁜 세상에 도대체 뭘 먹자고 저렇게 높이 날아다닐까? 정신 나간 짓이 아닌가? 하는 냉소의 대상일 뿐이다.

 

33 조나단은 보통 갈매기의 한계를 넘어서, 더 높이, 더 빨리 더 아름답게 나는 것, 궁극적으로 비상의 신비스러운 경지를 찾는 데 시간과 정력을 바친다. 드디어 그런 경지를 터득하고, 자기의

그런 체험을 다른 갈매기들과 나누려고 하지만, 다른 갈매기들은 이렇게 허황한 짓은 갈매기 사회의 안정과 평화를 파괴하는 못된 짓이라 하여 이 갈매기를 추방하고 만다. 매일매일 먹고살기도 바쁜데 그런 구름 잡는 소리같이 당치도 않는 소리를 해서 자신들을 현혹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33 노자도 도덕경에서, 세상에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다. “뛰어난 사람은 도를 들으면 힘써 행하려 하고, 어중간한 사람은 도를 들으면 이런가 저런가 망설이고, 못난 사람은 도를 들으면 몹시 비웃습니다. 웃음거리가 되지 않는 것은 도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34 지금의 부자유한 삶의 모습을 직시하고, 붕새처럼 이를 초월해서 살 수 있다는 것, 그렇게 될 때 우리의 삶이 참으로 신나는 삶이 된다는 것을 꿰뚫어 봐야 하겠다.

 

37 장자』는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문자적 진리를 안겨다 주려는 책이 아니라 상징들을 통해 우리 스스로 깨닫게하려는 것이다. 상징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처럼 그 자체를 넘어서는 어떤 것으로 우리의 시선을 돌리게 해준다. 손가락의 생물학적 성격이나 물리적 구조에만 관심을 쏟으면 달을 볼 수 없다.

 

37 상징을 문자로 읽으면 그 환기적 기능, 영어의 ‘evocative’ 기능이 완전히 죽어 버리고 싸늘하게 죽은 문자만 남는다. 바울의 말과 같이, “문자적인 것은 죽이는 것이고 은 살리는 것이다.

 

37 이렇게 상징을 넘어서 상징이 가리키는 바를 바라볼 때 우리는 변해서새로운 실재에 동참한다는 것이다.

 

37 붕새의 변화와 초월과 자유에서 우리가 가진 실존의 한계를 초극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고, 우리 스스로 변혁의 날개를 펴는 것이다.

 

39 이들은 이렇게 현실적이고 실감나는 일을 모르고 인간의 한계 밖을 넘보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므로 거들떠보지도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두 메추라기처럼 시야가 좁기 때문에 자기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찾지 못할 뿐 아니라, 그런 가능성을 말하는 사람들과 실현한 사람들을 비웃기까지 한다. “도대체 어디로 저렇게 날아간단 말인가하고.

 

40 이런 송영자의 경지도 아직 완전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스스로 칭찬이나 비난에 초연하지만, 아직도 칭찬과 비난을 칭찬과 비난으로 의식하고 칭찬받으려는 사람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분별의 마음이 있기 때문일까?

 

40 자유자재로 노닐다가 15일이면 돌아왔는데 그것은 15일마다 불어오는 새바람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또 이렇게 훨훨 떠다니기 위해서 어절 수 없이 바람이라는 외부 요인에 의지했다. 말하자면 열자는 아직 기대는 상태에 머문 것이다.

 

40 사람이 열자처럼 살기도 어렵지만 『장자』의 궁극적 이상은 우주의 원리에 따라 자연과 하나가 돼 무한한 경지에 노니는절대 자유의 단계이다. 아무것에도 기대지 않는완전한 자유를 만끽하고 구가하는 무애의 삶이다.

 

43 뱁새나 두더지 같은 동물이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에 만족하고 살아가듯, 자기도 그렇게 살겠다는 것이다.

 

43 알렉산더 대왕이 찾아와서 무슨 소원이든 말하라고 했을 때 지금 자기에게 비치는 햇빛을 가리지 말 것밖에는 달리 부탁할 것이 없다고 한 고대 그리스의 철인 디오게네스를 연상시키는 이야기이다.

 

43 알렉산더 대왕이 찾아와서 무슨 소원이든 말하라고 했을 때 지금 자기에게 비치는 햇빛을 가르지 말 것밖에는 달리 부탁할 것이 없다고 한 고대 그리스의 철인 디오게네스를 연상시키는 이야기이다.

 

48 완전한 무위의 상태에서 유유자적하게 살면서 세상을 이롭게 한다. 도덕경』의 말처럼 함이 없는 함을 실천한다.

 

50 결국 요 임금이 이런 경지에 이른 것은 이 신인들의 함이 없는 함때문이었던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통 사람들에게 쓸모 없는 사람들처럼 보이는 이 신인들이야말로 쓸모 없음의 더욱 큰 쓸모라는 진리를 실증해 준다.

 

2편 사물을 고르게 하다

 

55 세상에 버려야 할 것, 쓸데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런 비본질론적 견해를 다른 말로 해서 시각주의적 접근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시각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56 동네 안에 늙은 나무는 왜 서 있습니까? 사람들이 그늘을 찾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일도 하지만 또 쉬기도 합니다…. 현실적으로 살림도 하지만 상사의 세계도 갈구합니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이 해묵은 밤나무나 느티나무 가지의 그늘입니다.

 

56 늙은 나무가 찍히고 거기 깃들였던 혼은 산으로 도망갈 때, 마을에 남는 것은 주고받기와 시비와 깔고앉음과 깔리움밖에 있을 것이 없습니다.

 

57 매미나 새끼 비둘기, 메추라기처럼, 하늘 높이 날아가는 붕을 비웃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시야를 넓혀 큰 시계를 보고, 사물의 더 크고 참된 쓸모를 찾으라는 것이다.

 

60 제목을 어떻게 풀든 논의의 초점은 에 있다. ‘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로 한다는 것이다. 하나로 한다고 하여 각각 다른 사물을 일률적으로 획일화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 때의 하나는 다양함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조화와 일치를 의미한다.

 

60 동일한 것이 보기에 따라 크기도 하고, 동시에 작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비를 넘어서는 세계, 제일, 제동, 여일의 세계, 서양의 중세 사상가 쿠자누스가 말한 양극의 조화가 이루어진 세계, 대립을 초월한 세계에서 사물을 보는 것이다. 그 동안 우리 눈에 씌웠던 눈가리개를 벗긴 셈이다. 이럴 때 우리는 숙명으로 뒤집어쓰고 있던 제약의 굴레를 벗고, 붕새처럼 구만 리 창공을 날아가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61 여기 이 오상아장자』의 핵심 개념에 속한다. 내가 나를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려, 내가 진정한 내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는 어떤, ‘는 어떤 인지에 대해 글자의 어원을 다지는 등, 주석가들 사이에 설이 분분하지만, 쉽게 말하면, 우리의 비본래적인 자아, 작은 자아에서 풀려난 본래의 자아, 큰 자아가 된 것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63 옛 자아가 죽고 진정한 새 생명이 탄생하는 것이다. 옛 나를 장사 지내고 새로운 내가 무덤에서 나오는, 깊은 의미의 죽음과 부활이다. 불란서 철학자 데카르트가 라틴말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다지만, 여기서는 나는 잊었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내 일상의 이분법적 고정관념을 버릴 때 진정한 나, 온전하게 된 내가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이다.

64 이것이 바로 제물론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 곧 일체의 대립을 초월하여 하나가 되는 차원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직관을 얻는 것이다.

 

65 자기가 대답했습니다. “땅덩어리가 뿜어내는 숨결을 바람이라고 하지. 그것이 불지 않으면 별일 없이 고요하지만, 한번 불면 수많은 구멍에서 온갖 소리가 나지.

 

66 자기가 대답했습니다. ”온갖 것에 바람을 모두 다르게 불어넣으니 제 특유한 소리를 내는 것이지. 모두 제 소리를 내고 있다고 하지만, 과연 그 소리가 나게 하는 건 누구겠느냐?

 

66 1편의 바람이 우리가 타고 신바람 나게날아가게 하는 바람이라면, 여기 나오는 바람은 퉁소 속으로 통과하면서 소리를 내듯 속으로 불어 우리를 움직이는 내면적 바람인 셈이다.

 

67 이처럼 우주의 온갖 사물은 각각의 모양과 환경에 따라 서로 다른 소리를 낸다.

 

67 인간은 이 바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내보내느냐에 따라 나름대로 다양한 소리, 생각, 의견, 심리 작용, 감정, 정서 상태와 다양한 정도의 생동성과 생명력 등을 얻는다.

 

67 책을 덮고 앉아 있어도 여러 가지 소리가 귀에 윙윙 들려 오는 듯하다

 

67 하늘 소리는 그 자체로 독립된 소리가 아니라 인간과 대지가 이처럼 다양한 소리를 내도록 해 주는 바로 그것, 그 자체로는 들리지 않지만 모든 소리들이 근원이 되는 바로 그것. 바람 혹은 기 그 자체, 바람이나 기의 근본인 도와 도가 발휘하는 힘을 의미한다.

 

68 하늘의 소리란 모든 소리를 나게 하지만 그 자체로는 소리가 아닌 소리이다.

 

68 우리는 이런 사람의 소리와 땅의 다양한 소리를 들을 때 그 속에서 하늘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늘의 소리는 우리 몸의 귀로 들을 수 없다. 그것은 남곽자기처럼 바로 나를 잃어버린 상태에서 새롭게 열리는 영적인 귀로만 들을 수 있으므로, 하늘의 퉁소리를 들어 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이렇게 우리 자신을 잃어 보라고 권한는 것이 아닐까?

 

72 장자는 이런 일상적인 마음, 우리 속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스스로 주관한다고 착각하고 그 이상의 존재를 모르는 마음이 바로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고 보고, 이런 마음의 불완전하믕ㄹ 깨달아 이를 잃고 초극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75 마음도 다른 기관과 마찬가지로 덧없이 쇠망해 가는 여러 사물 중 하나일 뿐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러면 참주인은 과연 누구인가?

 

77 뒤집어 말하면 이런 분별심, 성심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시비를 따지는 일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런 정신적 병폐 때문에 나의 참주인’, 나의 참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뜻이다.

79 이 같은 일은 지금 우리 주위에서도 볼 수 있다. 모두 코끼리를 만지는 장님들처럼 자기가 만져 본 일방적이고 부분적인 단견을 내세워 서로 분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코끼리가 구렁이처럼 생겼나? 문제를 해결하려면 눈을 뜨고 코끼리를 전체적으로 보아야 한다. 눈을 떠야 구렁이 같은 면과 기둥 같은 면을 다 본다. 이를 일러 밝음을 얻음이라 한다.

 

83 아무튼 사물을 이렇게 통째로 보는 것이 하늘의 빛에 비추어 보는 것이고, ‘도의 지도리에서 보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바로 실재를 있는 그대로 그렇다 함이요,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밝음이다.

 

92 ‘하늘의 고름이란, 의인의 밭에도 악인의 밭에도 고르게 비를 내리는 하늘의 공정함이고, ‘두 길을 걸음이란 시비 등 이분의 세계에서 어느 한쪽에 기울지 않는 경지이다. 이런 것은 역시 사물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인정하는 인시의 문제라는 것이다.

 

97 성인은 가르지 않는다고 하고, 멈출 줄 안다고도 하였다. 멈출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이분을 넘어선 하나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고 가르쳤다.

 

102 털끝이 태산보다 클 수 있고, 태산이 털끝보다 작을 수 있다. 무한히 작은 도에서 본 털끝은 무한히 크고, 무한히 큰 도에서 본 태산은 무한히 작기 때문이다. 시간도 마찬가지. 도는 아무리 긴 시간보다도 더 길고 아무리 짧은 순간보다도 더 짧다.

 

102 사물을 양쪽 관점에서 동시에 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장자』 「천하」 편을 보면 혜자의 열 가지 역설 중에 셋째 것에 해당된다. 거기에 하늘도 땅과 같이 낮고, 산도 늪지와 같이 평평하다고 했다.

 

103 이렇게 사물을 볼 때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가 된다. 따라서 하늘과 땅이 나와 함게 살아가고, 모든 것이 나와 하나가 되었다는 말이 된다. 이것은 혜자의 열가지 역설 중의 마지막 것인데, 혜자는 만물을 두루 사랑하면 하늘과 땅이 나와 하나라고 했다.

 

104 이렇게 구분하고 따지고 변론하고 시비를 가리면서 부산하게 좇아다니지 말고”, ‘순수이성의 한계를 깨닫고 그것을 넘어서는 직관으로 있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긍정하라 타이른다.

 

107 『도덕경』 제1장 첫 줄에 도라고 말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라고 한 것이다. 절대적인 것은 말로 할 수 없는 것, 말이 없어져 버린 상태이다. 전통적인 용어를 쓰면 언어도단이요 언설을 떠난 상태인 것이다.

 

108 철학자 파스칼도 하느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야곱의 하느님이지 철학자와 학자들의 하느님이 아니라고 했다. 도는 마음에 간직하거나 체험으로 알아야지 사변이나 논의의 대상으로 삼아 따지면 영원히 절대타자일 수밖에 없다.

 

108 도를 말하려면 도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는 것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도에 대해서 뭔가 말할 수 있다고 하면, 그 자체가 도를 전혀 모른다는 증거이다. 이런 경우를 두고 『도덕경』은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합니다.”라고 했다.

 

108 ‘알지 못함을 알고 멈출 줄 아는 사람, ‘말로 하지 않는 변론도라고 할 수 없는 도를 아는 사람, 이런 사람이 은근한 빛을 감추고 있는 하늘의 보고이다.

 

109 성인은 일방적 방법에 의지하지 않고, (전체를 동시에 볼 수 있는) 하늘의 빛에 비추어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있는 그대로를 그렇다함이다하는 문장 뒤에 들어갈 것이 여기 잘못 들어왔다고 했다.

 

114 장자가 인간과 동물은 차별하지 않고 동물에게도 인간과 똑 같은 권리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이 집에서 살기를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꾸라지도 진흙 바닥을 좋아하는 것인데 그것에 대해 인간이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것이다.

 

122 소크라테스가 사약을 마시기 직전, “이제 떠날 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각자 자기의 길을 간다. 나는 죽음의 길, 너희들은 삶의 길. 어느 길이 더 좋은 것인가 신만이 알 것이라고 한 말을 연상시켜 주는 이야기이다.

 

125 여희나 프시케처럼 우리도 우리 속에 있는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발현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에 안주하지 말고, 어떤 시련이 있더라도 거기서 벗어나 새로운 로 탈바꿈을 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127 문제는 우리가 꿈을 꿀 때는 그것이 꿈인 줄 모른다는 사실이다. 꿈이 꿈인 줄 알려면 꿈에서 깨어나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범속한 인간들에게는 이런 큰 깨어남, 큰 깨달음, 큰 깨침이 없기 때문에 이 인생의 꿈속에서 그것이 꿈인 줄도 모르고 서로 아웅다옹하면서 산다는 것이다.

 

128 우리 범속한 인간들은 우리의 삶이 꿈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할 뿐 아니라, 이런 것을 꿈이라고 말하는 사람의 이야기도 괴상하게 여겨 일소에 부친다.

 

131 모든 의견은 결국 각자의 견지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이른바 보편타당한 객관적 기준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여러 번 지적한 대로 시각주의입장 없는 입장을 말한다.

 

134 어느 날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유유자적 재미있게 지내면서도 자신이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문득 깨어 보니 다시 장주가 되었다. 장주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장주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알 수가 없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 무슨 구별이 있기는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을 일러 사물의 변화라 한다.”

 

135 지금 그 꿈에서 깨어난 상태를 다시 꿈꾸는 것으로 이해했다는 것은 이른바 그 깸에서 다시 한 번 깨어났다는 뜻이다. 이렇게 깸에서 깨어나는 것이 큰 깨어남, 대각이라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장자는 대각한 사람이다.

 

135 장자가 보는 세계는 모든 사물이 이것과 저것으로 갈려 독립한 개물의 세계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앞에서도 여러 번 지적했다. 장자가 보는 세계는 모든 사물이 서로 얽히고 설킨 관계, 서로 어울려 잇는 관계, 꿈에서 보는 세계와 같이 서로가 서로가 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들어가기도 하고 서로에게서 나오기도 하는 꿈 같은 세계이다.

 

136 이런 세계는 만물이 상호 합일하고, 상호 침투하는 세계, 만물이 상호 연관하고 상호 의존하는 세계, 만물이 상호 변화하고 상호 연기, 상호 존재하는 세계를 말한 것이다.

 

136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실 종이는 종이 아닌 요소만으로 된 셈이다. 그러니까 종이는 종이다.”하는 대신에 종이는 구름이다”, “종이는 나무다”, “종이는 다이아몬드다”, “종이는 종이 아닌 것이다.”하는 편이 더 적절한 말이다. 종이와 구름 구름과 종이, 장자와 나비, 나비와 장자, 서로 넘나들어, 그야말로 자유자재이다. 이것이 이른바 물화이다.

 

137 사물을 깊이 통찰하는 사람이라면 이처럼 사물을 고정한 무엇으로 보지 않고 언제나 서로 어울려서 함께함을 볼 수 있다. 꿈은 우리에게 이런 세계가 있음을 어렴풋이나마 상징적으로 암시해 주는 매체 노릇을 해준 셈이다.

 

137 궁극적으로 이런 세계는 이 편 서두에서 말한 나를 잃어버린 상태에서 진정으로 채득할 수 있는 세계요,

 

139 이렇게 신나고, 활기차고, 풍성한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한마디로, 자연의 순리에 따라 거기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것이다. 지식욕, 자존심, 자기중심주의 같은 일체의 인위적, 외형적인 것을 넘어서서 자연의 운행과 그 리듬에 따라 우리의 행동을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할 때, 우리 속에 있는 생명력이 활성화하고 극대화해 모든 얽매임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삶, 이른바 기대지 않는 삶을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명을 북돋는 일’, ‘삶의 질을 높이는 일이라는 것이다.

 

3편 생명을 북돋는 데 중요한 일들

 

141 우리의 삶에는 끝이 있습니다.

    아는 것에는 끝이 없습니다.

    끝이 있는 것으로 끝이 없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위험할 뿐입니다.

    그런데도 계속 알려고만 한다면

    더더욱 위험할 뿐입니다.

 

142 독일작가 괴테가 쓴 파우스트』에 나오는 주인공 파우스트처럼 철학, 법학, 의학, 신학 등 인간이 알아야 할 모든 학문을 다 섭렵하고도 모자라 악마에게 자기 혼을 팔아서라도 우주의 신비를 알아보겠다는 끝없는 지식욕 같은 것은 위험하다는 것일까?

 

142 아무튼 순전히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일방적 지식 추구는 위험한 일이므로, 오직 중도를 기준으로 삼으면 몸도 보전하고 삶도 온전하게 되고, 모두 화목하게 지내게 되고, 천수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 네 가지가 곧 보신’, 전생’, ‘양친’, ‘진년이다.

 

142 노자도 마음은 비우고 배를 든든하게 하며, 뜻은 약하게 하고 뼈는 튼튼하게하고, “지식도 없애고 욕망도 없애고, ….. 함부로 하겠다는 짓도 못 하게하라고 했다. 소위 무지’, ‘무욕’, ‘무위를 가르치고, 이렇게 하면 세상에서 안 되는 것이 없으리라고 했다.

 

143 도와 하나가 되려면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편견이나 단견 같은 이분법적이고 일방적인 의식으로 얻은 지식을 하나하나 버려야 한다. 그런데도 오히려 이런 것을 더 얻지 못해 안달하며 쏘다니면 이야말로 위험한 일이 아니겠느냐는 뜻이다. 동서를 막론하고 궁극적으로는 이렇게 앎을 버림’, 혹은 배운 것을 버림에 이를 때, 비로소 하나의 세계를 체험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데, 여기서도 결국 지식이 아닌 직관으로 실재의 세계를 꿰뚫어 볼 수 있음을 말한 셈이다.

 

144 그렇다면 사회 정의를 위하여 싸우다가 감옥에 갇히는 일 같은 것은 좋지 않다는 뜻인가? 이런 질문에 장자는 잔잔히 미소를 지으며, “훌륭한 일일 수 있다. 정의를 위해 힘껏 싸워 보아라. 결국 싸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까지. 그러고 나서 스스로 더욱 근본적인 일이 있음을 발견하라고 타이르지 않을까? 장자에게서 더욱 근본적인 것은 착한 일을 한다, 나쁜 일을 피한다, 하는 등 의식적 가치 기준에 따라 움직이는 표피적 행동이 아니라 의연하고 묵직하게 중도를 따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장자가 이 편에서 강조한 양생의 요체인 셈이다.

 

145 희랍 사람들이 다이몬이라 하고, 로마 사람들이 지니우스라 한 것, 영어의 것트’, 우리말로 표현하면 좋은 뜻으로 육감혹은 뱃심을 따르라는 것쯤으로 볼 수 잇을 것이다.

 

145 몸의 등줄과 옷의 등심이 모두 중앙에 있듯이 우리의 행동이 이리저리 치우치지 않고 증정이나 중용을 지키라는 뜻으로 새길 수 있다.

 

145 우리의 잔꾀에서 나오는 고의나 계략 같은 것이 전혀 없이 자발적이고 자연적인 행동, 우리 깊은 속에서 솟아나는 어떤 활기나 기백에 따라 올바르게 나타나는 행동 같은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잇지 않을까? 한마디로,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자연의 순리를 따르고 거기에 몸을 맡기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50 정이 정력이라고 할 때처럼 성인의 활동력을 지탱해 주는 기본적인 요인이고, 기가 기운이나 원기라고 할 때처럼 사람을 건강하게 힘차게 살아가게 하는 힘이라 한다면, 신은 신난다고 할 때처럼 사람에게 활기와 흥을 돋워 주는 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50 옛날 선사들은 깨침에 이르는 단계를 두고, 산과 물을 보는 경우, 첫째,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고 하는 단계, 둘째,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라고 하는 단계, 셋째,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고 하는 단계를 말하였는데, 포정이 거친 삼 단계라는 것이 이와 비슷한 것일까?

 

151 이런 비보통적망아, 무아, 허심의 상태에서 만을 가지고 대할 때 소에 본래부터 있는 하늘이 낸 결’, ‘자연적인 결이 툭 트인 듯 훤히 보이고 그 결에 따라 칼을 자연스럽게 움직일 뿐, 결코 인대나 건이나 뼈 같은 것을 건드려 본 일이 없다는 것이다.

 

151 여기서 이라 한 것은 의 본래 뜻이다. ‘하늘의 이에 따라 움직인다는 뜻이다.

 

152 골프 선수 중에는 어느 경지에 이르렀을 때 구멍()이 물통만하게 보여 그 큰 구멍으로 공을 쳐 넣는 느낌이 든다고 한다. 운동 선수들은 이런 경지에 이른 것을 ‘zone’에 들어갔다고 말한다. 머피는 이런 것을 두고 인간에게 있는 초보통적 능력이라 한다.

 

153 권투챔피언 조한슨도 1959라이프 지와의 인터뷰에서 내 오른손에 이상한 일, 도저히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 생겼다. 내 손이 전혀 내 모의 일부 같지 앟은 기분이었다. 그것은 나도 모르게 튀어 나왔다. 저절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움직임이 빨라서 눈으로 볼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나도 모르게 오른손이 나가서 명중을 할 때 흐뭇한 감정이 내팔을 타고 내려가 전신으로 흘렀다고 했다.

 

153 자식이라도 열심히 가르쳐 어떻게 하든 사회에서 버젓이 성공하도록 뒷받침해 주는 것이 상식이다. 이런 상식을 뒤집고 오히려 백정이 임금에게 참되게 사는 방식을 가르쳐, 임금이 감탄했다.

 

153 그리스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유명한 소설 희랍인 조르바가 생각난다. 거기서도 소위 성공한 지성인 사업가로 등장하는 상전이 불학무식한 하인 조르바의 신나는 삶, 거침이 없는 삶에 감복하여 결국 춤추는 것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는 대목으로 끝이 난다. 인생의 참된 성공은 어떤 것일까? 전통적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는 대목이다.

 

156 어느 화가가 남녀의 사랑을 묘사하는 그림을 그릴 때, 두 남녀가 침실에 같이 있는 장면을 소상하게 그릴 수도 있고, 단순히 댓돌 위에 고무신 두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는 모양을 그릴 수도 있다. 전자를 서술적묘사라 한다면, 후자는 암시적’, ‘환기적기법이라 할 수 있다.

 

160 어쩌다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때를 만났기 때문이요, 어쩌다가 세상을 떠난 것도 순리이기 때문일세. 편안한 마음으로 때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리를 따른다면, 슬픔이니 기쁨이니 하는 것이 끼여들 틈이 없지. 옛날 사람들은 이를 일러 하늘님의 매닮에서 풀려나는 것이라 했네.”

 

164 이 편에서 주목할 것은 해우현해에서 보듯이 가 중요한 글자로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는 해체한다. 푼다. 벗어난다는 뜻이다.

165 이렇게 상식 세계를 벗어나 사물을 한 차원 높은 데서 전체적으로 보라고 강조한 점에서 제2제물론의 주제와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어느 의미에서 요즘 많이 논의하는 해체주의와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도 있다. 하이데거가 장자』를 좋아한 것도 이런 뜻에서 우연이 아닐지 모른다. 일체의 고정 관념이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라는 것…. 사실 누구인들 좋아하지 않으랴.

 

4편 사람 사는 세상

 

170 덕은 이름을 내려는 데서 녹아 없어지고, 못된 앎은 서로 겨룸에서 생긴다. 이름을 내려는 것은 서로 비걱거리는 것이고, 못된 암은 겨루기 위한 무기이다. 둘 다 흉한 무기라 완전한 삶을 위해서는 써서 안 될 것들이다.

 

174 바울도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나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남만을 생각하는 아가페 같은)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했다.

 

179 안회가 말했습니다. “부디 마음의 재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먼저 마음을 하나로 모으라.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라. 다음엔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로 들어라. 귀는 고작 소리를 들을 뿐이고, 마음은 고작 사물을 인식할 뿐이지만 기는 텅 비어서 무엇이든 받아들이려 기다린다. 도는 오로지 빈 곳에만 있는 것. 이렇게 비움이 곧 마음의 재니라.”

 

181 기는 텅 비어 모든 것을 수용하니 이렇게 텅 빈 기로 사물을 대하면 그 빈 곳에 도가 들어온다. 이렇게 도가 들어오도록 마음을 비우는 것. 이것이 마음을 굶기는 것, ‘심재라는 것이다.

 

183 “바로 그렇다. 내가 너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네가 위나라에 들어가 그 새장에서 노닐 때, 이름 같은 데 영향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받아 주거든 소리내고, 받아주지 않거든 잠잠하라.

 

185 이렇게 몸은 앉아 있으니 마음이 쏘다니는 상태를 좌치라고 하는데, 가만히 앉아 자기를 완전히 잊어버린다는 좌망과 맞서는 개념이다. 좌망이 마음의 구심 운동이라면 좌치는 마음의 원심 운동인 셈이다.

 

186 앎을 버림 곧 무지를 통해서만 참된 앎에 이른다는 것이다. 여기서 무지란 물론 이분 세계에서 우리가 얻은 상식적이고 일상적인 암을 비우는 것이고, 이렇게 비운 상태에 이르렀을 때 참된 앎이 생긴다는 이야기이다.

 

187 장자는 이 문제에 대해 마음을 굶겨’, 내면에서 솟는 초월적인 힘을 체험한 뒤에 삶의 현장으로 나가 사람들을 도우라고 한 것이다.

 

195 마음이 사물의 흐름을 타고 자유롭게 노닐도록 하십시오. 부득이한 일은 그대로 맡겨 두고, 중심을 기르는데 전념하십시오. 이것이 최고입니다. 무엇을 더 꾸며서 보고할 것 있겠습니까? 그저 그대로 명을 받드는 것뿐. 그러나 그것이 어려운 일입니다.”

 

196 안명론은 니체가 말한 운명을 살아함과 비슷하다고 할까. “바꿀 수 잇는 것에는 바꿀 능력을 주시고, 바꿀 수 없는 것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잇는 의연함을 주시고, 이 둘을 구별할 수 잇는 예지를 주시옵소서.” 라고 한 어느 성자의 기도가 생각난다.

 

200 물은 동그란 그릇에 들어가면 동그랗게 되고 길쭉한 그릇에 들어가면 길쭉해지고, 뜨거우면 김이 되어 날아가고, 차가워지면 얼음으로 굳고. 이렇게 어떤 환경,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물이 물임물됨을 잃는 일이 없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적응하는 것 그 자체가 물의 정체성이다.

 

201 바울도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을 구원코자 함이라고 했다.

 

204 호랑이 사육사는 시간을 맞춰먹이를 주고, 말을 사랑한 사람은 시간을 못 맞춰말을 때렸다. 모든 일에 적기가 있음 알고 잘 맞추라는 것이다. 영어로 타이밍, 희랍어로 카이로스, ‘때를 따름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208 마르틴 부버의 용어를 빌리자면, 사물을 나와 너로 보는 것도 시원치 않은데, 당신은 사물을 나와 그것;으로 보고 그것을 당신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만 본단 말인가 하는 식이다. 더구나 장석 자신의 판단 기준으로 본다면 장석이야말로 죽을 날이 가까워 오는 쓸모 없는 인간이 아닌가. 그러니 사물을 대할 때 함부로 쓸데 있다 없다를 속단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 준 것이다.

 

209 그 나무를 보고 왜 사당 나무가 되었느냐고 비난하거나 또 그것이 사당 나무라고 떠받드는 것은 사당 나무 본래의 의도와 상관없이 인간의 평가 기준으로만 따지는 빗나간 판단이라는 것이다.  사당 나무의 더욱 큰 쓸모란 무엇일까?

 

213 천박하게 이해한 실용주의나 실리주의의 기준에서 벗어난 것은 어느 의미에서 오히려 다행스럽게 여길 일이라는 것이다. 긴 안목으로 볼 때, 이런 일을 통해서 이제까지 몰랐던 자신을 발견하고, 진정한 자기실현을 이루어 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215 지리소는 육신이 이렇게 막돼먹어이른바 군대에 들어가 장군이나 국방장관 같은 것도 생각할 수 없고, 부역에 충실해서 건설부 장관이나 노동부 장관 같은 자리도 꿈꾸지 못한 채, 그저 처한 환경에서 성실하고 근면함으로 그렇게 활기차고 건실하게 산다.

 

216   세상 사람 모두 여유 있어 보이는데,

       나 홀로 빈털터리 같습니다.

      세상 사람 모두 총명한데 나 홀로 아리송하고,

      세상 사람 모두 똑똑한데 나 홀로 맹맹합니다.

      바다처럼 잠잠하고, 쉬지 않는 바람 같습니다.”

 

이렇게 덕이 곱추인 사람노자야말로 얼마나 자유스러운 사람이었던가!

 

218   그만두오, 그만두오.

      덕으로 남 대하는 일.

      위태롭다. 위태롭다.

      땅에 금을 긋고

      그 안에서  종종걸음.

 

219 모두 땅에 금을 긋고 그 안에서 종종걸음옥신각신하는 세상에서 어느 한편을 위해 쓸모 있으려애쓴다는 것은 그야말로 쓸데없고 위태로운 일이라는 것이다.

 

220 장자든 누구든 정신적인 영웅은 조셉 캠벨의 말처럼 일단 인습을 등진 사람이다. 그래서 인습대로 사는 사람에게 정신적 영웅은 어쩔 수 없이 바보처럼, 미친 사람처럼, 우스운 사람처럼 보이게 마련이다.

 

221 궁극적으로 지인의 경지에 이르기 이전의 모든 유용성은 진정한 유용성이 아니다. 따라서 진정으로 크게 유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진정으로 내면적 준비를 갖추는 것이 중요함을 말한 것이다. 세상에서 떠받드는 자질구레한 유용성이나 실용성에 정신을 팔지 말고 무엇보다도 먼저 마음을 굶기는심재를 실천하라는 것이다.

 

223 노자의 『도덕경』이 도를 어머니로 표현하는 등 여성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다는 뜻에서 현재 여성 운동가들의 성서가 될 수 있다고 한다면, 『장자』는 불구자가 도를 실현하고 덕을 발휘하는 데 아무 장애가 없다는 것을 그림처럼 생생하게 실증했다는 점에서 장애인들의 성서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5편 덕이 가득함의 표시

 

226 “다름의 입장에서 보면 간과 쓸 개도 초나라와 월나라처럼 멀지만, 같음의 입장에서 보면 만물이 모두 하나이다. 그런 사람은 귀나 눈이 옳다고 하는 것과 상관하지 않고, 덕에서 나오는 평화의 경지에서 마음을 노닐게 한다. 사물에서 하나 됨을 보고, 그 잃음을 보지 않는다. 그러니 발 하나 떨어져 나간 것쯤은 흙덩어리 하나 떨어져 나간 것에 지나지 않지.”

 

227 사람이 흐르는 물에 제 모습을 비춰 볼 수 없고, 고요한 물에서만 비춰 볼 수 잇다 고요함만이 고요함을 찾는 뭇 사람의 발길을 멈추게 할 수 있다.

 

229 남의 눈치나 칭찬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기 실현만을 위해’, 차분하고 조용히 정진했을 분인데도 사람이 모여드는 것은 이런 거울같이 맑은 마음에 자기들의 참모습을 비추어 보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229 자기를 따르는 신도의 머릿수나 지지하는 사람의 투표 수에 따라 일희일비하면서 오로지 자기나 자기 집단의 종교적, 정치적 세 확장에만 혈안이 된 요즘 세태와 얼마나 대조적인가?

 

232 어쩔 수 없음을 깨닫고, 편안하게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은 덕이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지.

 

233 내가 선생님을 19년 동안이나 따르며 배웠지만 선생님께서는 아직도 내가 외발임을 아신다고 내비치신 적이 없으시다네. 이제 자네와 나는 몸 안의 세계를 배우는 데 자네는 아직 모 밖의 것에만 눈을 돌리고 있으니 이것 역시 뭔가 잘못된 것 아닌가?”

234 신도가 자신도 남이 자신을 업신여기면 화가 나는 것을 보면 자신도 아직 라고 하는 의식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모양이라며 그럴 때마다 백혼무인 선생님에게 가서 그런 마음을 씻어 평정을 되찾고 자의식을 줄여 가고 있다는 것이다.

 

239 이렇게 율법주의의 껍데기에 갇히면 어느 누구도 설득할 수가 없다고 했다. ‘자기 스스로 의롭다는 의식에 도취해서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못한다.

 

240 왕필은 공자는 무()와 하나가 되었기에 그것이 가르침이 대상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아 어쩔 수 없이 유()만을 말했지만, 노자와 장자는 유의경지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들 스스로에게 모자라는 바를 계속 이야기 했기때문이라는 것이다.

 

244 한마디로 화이불창이다. 이것은 라는 자의식에서 완전히 풀려난 상태를 의미한다. 물 같은 상태라는 뜻이기도 하다. 둥근 그릇에 들어가면 둥글어지고 길쭉한 그릇에 들어가면 길쭉해지고, 추우면 얼고, 더우면 증발하고…… 이것은 완전히 빈 배가 된 상태 ,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가는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248 “그러면 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평평한 것은 물이 완전히 고요해진 상태입니다. 이것이 본보기가 될 수 있음은 안에 고요를 간직하고 밖으로는 출렁거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덕을 이룬 사람은 조화를 이룬 사람으로, 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에게서 떠나지 못합니다.”

 

249 캐나다 록키 산에 있는 루이스 호수가 제 아름다움을 선전하고 내세우지 않아도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오듯이

 

254 외모에 마음 쓸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외모 때문에 성형외과의 문전이 닳도록 드나들면서 마음을 쓰고, 신경을 써야 할 내면 세계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이니 어찌 된 일이냐느 것이다. 이처럼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으니 이것이야말로 정말 한심한 진짜 잊어버림이라는 이야기 이다.

255 성인은 자신을 하늘에 맡기고 살아가는 사람. 하늘이 알아서 먹여주고 길러 주는데, 일부러 설치면서 허우적거릴 일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예수는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했다.

 

257 “도가 얼굴 모양을 주고, 하늘이 형체를 주었으니,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으로 속상하는 일이 없는데 지금 자네는 자네의 신을 겉으로 드러내 놓고 정력을 쓸데없이 소모하면서, 나무에 기대어 신음하고, 책상에 기대어 졸고 있네.

 

258 ‘무정이란 감정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보통 감정을 넘어선 감정이란 뜻이다. 그야말로 정일랑 두지 말라. 미련일랑 두지 말 자.” 하듯이 애증과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활달하고 트인 마음, 빈 마음에서 작용하는 티 없는 감정의 흐름일 뿐이다.

 

259 어느 선사가 노래한 것처럼, 호수 위를 날아가는 기러기가 제 그림자를 호수 위에 드리우되 일부러 하지 않고, 호수도 기러기의 그림자를 비추되 일부러 하지 않는 것과 같다. 둘 다 무심히드리우고 무심히 비출 뿐이다.

 

6편 큰 스승

 

271 진인은 무엇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하는 대립, 상극, 이원론을 넘어서서 모든 것을 이것도 저것도하는 하나 됨의 경지, 막히고 걸리는 것 없는 통전적 경지에 이른 사람이다. 한마디로 유연하고 탄력성 있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275 인의가 필요 없는 세상, 그런 것을 잊어버리고 살 수 있는 세상이 바로 도가 편만한 세상, 물고기가 물에서 헤엄치듯 시원하게 사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276 대지는 나에게 몸을 주어 싣게 하고, 삶을 주어 힘쓰게 하고, 늙음을 주어 편안하게 하고, 죽음을 주어 쉬게 합니다. 그러므로 내 삶을 좋다고 여기면 내 죽음도 좋다고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277 도와 하나 되면 살아도 거기, 죽어도 거기. 밤중에 죽음이 찾아와 우리의 생명을 도둑질해 간다 해도 결국 숨을 데가 없으니 거기가 거기. 죽음이니 삶이니 하는 구분이 있을 수도 없고, 잃으니 찾느니 하는 대립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생각하게 하는 말이다. “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죽음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이 가능하게 된다.

 

279 궁극적으로는 이런 사람이 본받는 도,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도야 말로 가장 큰 스승이라는 것이다.

 

281 도는 체험의 영역이지 말의 대상일 수 없음을 말한다. ‘터득할것이지 떠들거시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왜 여기서 떠들고있는가? 여기서는 도는 이거시다.”하고 떠드는 것이 아니라, 도에 대해서는 떠들 수 없다고 떠들고 있을 뿐이다.

285 삶을 잊게 되자 그는 아침 햇살 같은 밝음을 얻었습니다. 그는 아침 햇살 같은 밝음을 얻자 그는 하나를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를 보게 되자 과거와 현재가 없어졌습니다. 과거와 현재가 없어지자 죽음도 없고 삶도 없는 경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289 모두 자의식으로 가득한 현재의 가 죽어 없어질 때 우주적 의식을 지닌 진정한 ’, ‘우주적 나가 새로 탄생한다는 죽음과 부활의 종교적 진리를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290 글을 읽되 거기에 매이지 말고 읽어라. 그것을 오래오래 구송하고, 맑은 눈으로 그 뜻을 잘 살핀 다음, 그 속에서 속삭이는 미세한 소리마저도 알아들을 수 있게 바로 깨닫고, 그 깨달은 바를 그대로 실천하고, 거기에서 나오는 즐거움과 감격을 노래하라.

 

293 각자의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사귀는 벗이 훌륭한 벗이요, 그 중에서도 필요할 때 도와 주는 벗이 참된 벗이어서 영어 속담에도 ‘A friend in need is a friend indeed.”는 말이 있는 모양이다.

 

293 여기 『장자』에서 말하는 참된 벗이란 선과 덕을 바탕으로 한 우정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맺는 벗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인생관이나 세계관의 차원에서 의기투합할 수 있는 벗, 한번 같이 웃기만 해도 속마음을 서로 이해할 수 있는 벗이 진정한 벗이라는 뜻이다. 참된 의미의 길벗이라야 참된 벗이라는 것이다.

 

295 무릇 우리가 삶을 얻은 것도 때를 만났기 때문이요, 우리가 삶을 잃는 것도 순리일세. 편안한 마음으로 때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리에 따르면 슬픔이니 기쁨이니 하는 것이 끼여들 틈이 없지. 이것이 옛날부터 말하는 매달림에서 풀려나는 것이라 하는 말 걸세. 그런데도 이렇게 스스로 놓여나지 못하는 것은 사물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지. 세상의 모든 사물은 하늘의 오램을 이기지 못하는 법. 내 어찌 이를 싫어하겠는가?”

296 인생을 살면 몇백 년을 살겠는가? 하늘에 비하면 우리의 삶은 찰나에 불과한 것을. 길게 살았다 짧게 살았다 따지는 것은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297대저 대지는 내게 몸을 주어 싣게 하고, 삶을 주어 힘쓰게 하고, 늙음을 주어 편안하게 하고, 죽음을 주어 쉬게 하자. 그러니 삶이 좋으면 죽음도 좋다고 여길 수밖에.

 

299 『장자』에서는 인간이 행한 행위에 따라 내세가 결정된다는 인과응보라든가 업보를 같은 사상이 없다. 모두 자연이 그 순리에 따라 적절한 길로 만물을 변화시킬 따름이라는 것이다.

 

300 우리가 주위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것에 안달하지 않으려면, 여기에 나오는 도나 조물자’, 혹은 조화자가 결국은 만사를 선한 길로 이끌 것이라는 신뢰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형이상학적 믿음이 있을 때 삶이 그만큼 듬직해지지 않을까?

 

305 물고기는 강과 호수에서 서로 잊고, 사람은 도에서 서로 잊는다.

305 ‘이상스러운 사람이란 보통 사람과 비교해서 이상할 뿐, 하늘과는 하등 다를 바가 없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하늘의 소인이 사람에게는 군자요, 사람의 군자가 하늘에는 소인이라한 것이다.”

 

305 세례 요한을 두고 예수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라고 한 말을 생각나게 한다.

 

309 “사물과 편안히 어울려 변화를 잊은 채 텅 빈 하늘로 들어간 사람이다. 그야말로 도가 큰 사람이다.

 

319 이른바 기대 중독에서 헤어나라 하는 식이다. 말하자면, 주어진 한계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극복하는 길을 채택한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여기서 말한 것은 앞에서도 여러 번 지적한 것처럼 운명론이 아니라 안명론이다.

 

7편 황제와 임금의 자격

 

322 참된 지도자는 그런 인위를 넘어서 실재를 있는 그대로 꿰뚫어 얻은 그 감화력으로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알듯 모를 듯 이끌어 가는, 노자식 무위의 정치, 가만 놓아둠의 정치, 무심의 정치를 실현하는 사람이다. “ 최소한으로 다스리는 것이 최선의 다스림이라는 원칙에서 궁극적으로 다스리지 않으면서 다스리는 사람이다.

 

325 『도덕경』에서도 참된 지도자는 백성의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삼는다고 했다.

 

35 결국 말만 소만혹은 이것만 저것만하는 만만주의의 세계가 아니라, ‘말도소도혹은 이것도저것도하는 도도주의의 세계, 비이분의 세계, 불이의 세계, 시비 초월의 세계, 2편에 말한 양행의 세계에 속한 사람임을 극적으로 표현한 말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두 쪽을 다 같이 볼 수 있는 사람, 사물을 있는 그대로, ‘여실하게 보는 사람, 이런 사람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제왕이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삶이라는 뜻이다.

 

327 지도자는 먼저 자신을 올바르게 하고 그 감화 아래서 모두가 저절로 되어 가도록 하고, 그렇게 잘 도어 가는 것만 확인하는 정도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도가에서 말하는 무위의 정치’, ‘놓아둠의 다스림이다.

 

327 새도 화살을 피하려 하늘 높이 날 줄 알고, 들쥐도 잡힐까봐 사당 밑에다 살자리를 마련하는데, 사람들도 도의다, 법령이다, 규정이다 하고 못살게 굴면 어디로 피하게 마련이니 제발 사람을 그런 식으로 다스릴 생각은 아예 말라는 것이다.

 

331 참된 지도자는 이슬처럼 공기처럼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백성들 뒤에서 그들의 필요에 따라 너무나 자연스럽게 순리대로 다스린다. 그래서 백성들이 그 이름을 들먹이지 않고’, 만사 이렇게 잘 되는 것이 마치 자기들 스스로 잘해서 그런 줄 알고 기뻐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341 이렇게 초능력 같은 것이 생기면, 그것을 구도의 길에서 이제 어디쯤 왔구나 하고 가르쳐 주는 일종의 이정표쯤으로 생각하고 거기에 한눈 팔지 말고 계속 정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342 아직 배움을 시작하지도 못했음을 스스로 깨달았다는 사실 자체가 배움이 지극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342 거기서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아내를 위해 밥을 짓고, 돼지를 사람처럼 대접하고, 좋고 싫은 일이 따로 없게 되었는데, 이것은 모두 열자가 이제 남녀를 구분하고, 인간과 동물을 차별하고, 좋아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을 가르는 일체의 이분법적 세계관을 초월했다는 뜻이다.

 

343흙덩이처럼 우뚝 선 모습이란 앞 5:23에서 말한 것 같이 일상적인 의식이나 분별심에서 벗어나 그야말로 무심, 무정,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345 ‘앎의 주인이 되지 말라. 잔꾀나 지모의 주인이 돼야 일이 된다고 생각하지 말라. 이런 부정적인 방법을 버리고 무궁한 도, 사물이 근본을 체득하고, 없음의 경지, 비움의 경지에서 자발적이고 자연적인 행동을 하라. 이것이 바로 마음을 거울처럼 한다는 뜻이라고 충고하고 있다.

 

345 거울은 앞에 나타나는 것을 그대로 비출 뿐, 밉다고 쫓아 보내고 예쁘다고 받아들이는 짓을 하지 않는다. 앞에 나타나 것이 슬프다고 함께 슬퍼하는 것도 아니고, 더러운 것을 비췄다고 제가 더러워지는 것도 아니고, 출렁거리는 것을 보여 준다고 같이 출렁이는 것도 아니다. 오직 잔잔히 떠오르는 대로 비추는 거울, 이것이 자유인의 고요하고 잔잔한 마음이라는 것이다.

 

348 이 미분화의 세계가 분화하여 된 것, ‘이발의 세계가 우리가 일상적 경험하는 현존 세계이다. 『도덕경』28장에서는 이를 두고 다듬지 않은 통나무를 쪼개면 그릇이 됩니다.

 

349 옛날의 는 진정한 로 다시 태어나는 변혁의 긴 여정을 완성하는 것이다.

 

부록 | 외편 · 잡편에서 중요한 구절들

 

356 『장자』를 읽되 이렇게 무군파에 속한 부분은 조심해서 다원주의 시대에 걸맞게 읽어야 하리라.

 

362 이제 이 개구리가 할 일은 정신을 가다듬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 우물 밖으로 일생 일대 신앙의 도약을 감행하는 것이다.

 

364 “원컨대 나랏일을 맡아 주시기 바랍니다.”

장자는 낚싯대를 쥔 채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습니다. “내가 듣자 하니 초나라에는 죽은 지 삼천 년이나 된 신령한 거북이가 있는데, 왕께서 그것을 비단으로 싸서 상자에 넣고 사당 위에 잘 모셔 두었다 하더군요. 이 거북이 죽어서 뼈를 남겨 귀히 여겨지기를 바랐을까요, 살아서 진흙에 꼬리를 끌고 다니고 싶었을까요?

 

367 정치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사에서도 상대는 별다른 생각이 없는데 쓸데없이 경쟁 대상으로 생각하고 그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이 자기를 해치거나 불리하게 하는 행동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369 물고기와 하나가 되면 물고기의 즐거움이 곧 나의 즐거움이 아닌가.

 

372 장자는 그것이 아니라 간디가 말한 일종의 진리파지를 체험했다고 할까, 진실의 깊은 면을 통찰할 때 죽음의 본질을 깨달아, 결국 울고불고하는 것을 그만 둘 수 있었다면서 혜자의 오해를 풀어 준다.

 

372 여기서도 죽음을 자연스런 변화의 일부로 본다. 죽음을 계절의 변화와 같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 오히려 죽음을 극복한다는 이야기이다. 순명이요, 안명이요, 아모르 파티이다.

 

374 남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본성 그대로 살고. 본성을 계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375 ‘의식이 온전하다는 것은 의식이 둘로 나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직 의식이 주와 객으로 완전히 나누지 않은 갓난 아기는 침대에서 떨어져도 웬만해서는 다치지 않는다. 술취한 사람이나 갓난 아기의 의식 상태는 주객 미분으로 온전한 것이고, ‘하늘로부터 얻은 온전함주객 초월로 운전한 것이다.

 

376 19편 『달생』(통달한 삶)이란 이처럼 주객으로 나뉜 일상적 의식이 외부적인 조건을 잊어버리고 궁극적으로 이런 이분법을 초극한 상태에 이르렀을 때 생기는 자연스럽고 부드럽고 힘있는 삶을 의미한다.

 

380 덕이 온전한 상태, 완전한 허심, 무심에서 생기는 내면의 힘이 겉으로 허세를 부리는 공격 자세를 압도한다는 얘기이다.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원리이다.

 

382 숲에 들어가 나무의 본래 성질을 살펴 모양이 더할 수 없이 좋은 것을 찾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거기서 완성된 거를 보게 된 후야 비로소 손을 대고, 그렇지 않으면 그만둡니다. 이렇게 되면 하늘과 하늘이 합하는 것입니다. 제가 만드는 것들이 귀신이 같다고 하는 것이 여기에서 비롯하는 것입니다.

 

382 이런 신기가 나오는 것은 일체의 외부적인 일을 잊어버리고 마음이 완전히 한 점에 집중한 상태에서 초의식적이고 자연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383 발을 잊는 것은 신발이 꼭 맞기 때문이고, 허리를 잊는 것은 허리띠가 꼭 맞기 때문이고, 마음이 시비를 잊는 것은 마음이 꼭 맞기 때문입니다.

 

383 남편과 부인도 일심동체가 되었으면, 서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며 살아간다는 뜻일까?

 

384 인간의 사랑이란 이렇게 본래 붙었다가 잘려 나간 다른 쪽에 대한 동경이라고 한다. 아무튼 떨어져 나간 제 짝을 찾아 찰칵하고 들어맞으면 천생연분이라 삐걱거리지 않는다는 것이고, 의식한다는 것은 삐걱거린다는 것인가? 물론 상대방을 잊을 정도로 서로 완전히 편하게 지내는 것과 등한히 여기거나 업신여기면서 잊어버리는 것은 비슷하면서도 크게 다를 것이다.

 

387 쓸모 있고 없고를 떠나 허심, 무심의 경지, 집착이 없이 자유로운 경지, 자유자재한 경지가 궁극의 자리라는 것이다.

 

391 아무튼 실컷 잘해 주고 욕먹는다는 말이 있다. 남에게 좋은 일을 해주면서 거들먹거리며 허세를 부리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남을 생각하는 마음, 겸허한 태도가 없으면 아무리 훌륭한 일을 해도 결국 모두 허사로 돌아간다. 훌륭하면서 그리고 훌륭한 행동을 하면서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이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요, 이렇게 훌륭할 때 어디 가서라도 환영받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392 화공은 두 다리를 뻗고 벌거벗은 상태였습니다. 원군이 말했습니다. “됐다. 이 사람이야말로 참된 화공이다.”

 

393 예술이란 물리적 사실보다 내면적 정신을 표현하는 것이며, 그림은 붓을 자연스럽고 순간적으로 움직여 그려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 이야기라고 했다. 참된 예술가는 내면적 자유를 구가하는 사람이기에 궁극적으로 인습이나 통상적 형식에 전혀 구애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395 집착을 버리는 일 중에서도 가장 절실한 것은 사람들이 나를 귀하게 여기거나 천하게 여기는 일 같은 네 마음을 쓰지 않는 것이다. 이를 요즘 말로 하면 남이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법구경』에는 육중한 바위가 바람에 움직이듯 않듯, 지혜로운 사람은 남의 칭찬이나 비난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395 장자는 아무데도 얽매이지 않는 허허로운 마음을 중요하게 본 데 반해, 공자는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충성심을 핵심적인 것으로 본 것이다.

 

400 도를 하나의 실체로 생각한 나머지 세계나 자연이나 인간과 떨어져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개별적인 무엇으로 보면 안된다는 말이다.

 

410 도움이 당장 필요한 사람에게는 내일이 있을 수 없다. 적기를 놓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중에 보자는 사람 무서울 것 없다고 했지만, 도와 달라고 할 때 나중에 보자는 사람, 정말 믿을 것 없다.

 

413 장자가 대답했습니다. “진나라 왕이 병이 나서 의원을 부르면, 종기를 따서 고름을 빼내 주는 의원에게는 수레 한 대를 주고, 치질을 핥아서 고쳐주는 의원에게는 수레 다섯 대를 준다는데, 치료할 곳이 더러우면 더러울수록 수레를 더 많이 준다고 하더군. 자네는 치질을 얼마나 고쳐 주었기에 그렇게 많은 수레를 얻었는가, 자네, 물러가게.

 

 

내가 저자라면

 

 <장자> 33편으로 이를 내편 7, 외편 15, 잡편 11편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중 내편 7편은 장자 자신의 저술로 여겨지고 있다. 외편과 잡편은 거의 모두 장자의 후학들이나 그 사상에 공명한 사람들에 의해 지어졌다고 한다. 장자는 어떤 때는 세상 사람들의 권위를 부여하는 성인의 말을 빌려서 이야기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재미있는 우화형식으로 이야기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대화상대방의 삶의 환경에 맞게 자연스럽게 이야기했다. .

 지난번 노자 <도덕경>을 통해서 접한 도가사상을 이번 <장자>을 읽으면서 좀더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어떤 때는 마치 노자의 <도덕경>을 읽고 있는 느낌이었다. 동시대의 사상가, 공자나 맹자, 순자 등은 세상을 올바르게 하고 바꾸려는 집권자나 위정자들의 마음가짐에 대해 이야기 했지만, <장자>에서는 인간의 마음을 중심으로 말하고 있었다. 또한 기존의 공자 사상을 부정하는 것 같아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초월하고 있다.

 

 <장자>에서 원문의 내용을 보면 처음에는 잘 이해되지 않지만, 두 번 세 번 다시 읽다 보면 내 마음으로 연결되고 나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풀이한 저자의 다양한 경험과 성경, 동서양의 고전들을 이야기하며 원문의 깊이를 더해주었다. 이렇게 이야기 속의 모든 단어들은 장자의 깊은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으며, 문체들은 일방적인 학설을 전달하는 지식인이 아니라, 상대방을 진심으로 고려한 대화의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임을 나타내고 있다.

 <장자>는 지금 쓰고 있는 나의 글에 큰 영향을 주었다. 나를 잊고 세상과 하나가 되는 비결을 말해주고 있으며, 세상은 결국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진리이다. 그러한 배경으로 나의 이야기를 풀어 나가고 있다. 설사 그것이 현실에서 일어나기 힘든 환타지의 세계라 하더라도 그 이야기를 쓰는 만큼 나 자신은 행복하고 회복되어지는 느낌이다. 장자가 말한 대로 글을 쓰면서 나를 잊게 되고 세상과 하나가 되어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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