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장재용
  • 조회 수 4157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12년 12월 17일 09시 44분 등록

장자

* 장주 지음, 김학주 역해, 연암서가, 2010.06.20

 

1. ‘스케일 종결자(저자에 대하여)

장자.JPG

■ 장주 (BC 370 ~ BC 280)

 

중국 고대 도가(道家)의 사상가다. 이름은 주(). ()에서 태어나 맹자와 동시대에 노자를 계승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실재성은 의심스럽다 한다. 전국시대 말기, 도가의 사상가들이 원본 장자(莊子)를 편찬할 때, 이것을 장주(莊周)에게 가탁(假託)하여 장자라 명명한 것인 듯하다는 학설이 있다. 장자는 공자, 맹자보다 노자와 함께 장자가 존중되기에 이르렀던 한대 초기에, 전국 말 이래의 도가의 논저를 부가하여 성립한 것으로서, 통일된 체계는 없지만 도가 사상의 역사적 전개를 볼 수 있다.

그 기본적 사상의 중심은 당시 지배자의 지위에서 몰락하고 있던 사상가들이, 뜻대로 되지 않는 사회 속에서 개인의 삶에 얽힌 근심과 고난으로부터 관념론적으로 도피하려고 한 인생론에 있다. 이상적인 삶이라는 것은 근심의 근원인 자기의 육체, 정신을 버리고 허정(虛靜), 염담(恬淡)의 심경에 도달하여 자연의 법칙에 따르고 어떠한 것에도 침해받지 않는 자유, 독립을 얻어 세계의 밖에서 초연하게 노니는 것이다. 이것을 실현한 사람이 진인(眞人)이다. 이 인생론의 근저에는 세계는 불가지의 실재인 도()의 표상이라는 세계관과, 개념적 인식과 가치판단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무의미한 것이고 철저한 무지(無知)만이 올바른 것이라고 하는 지식론이 깔려 있다.

이 지식론은 명가(名家)의 궤변이나 전변(田騈)의 제물설(齊物說)의 비판적 섭취에서 성립, 얼마 후에는 세계관과 혼합하여 세계의 존재와 운동은 ''()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는 존재론, 우주 생성의 전설을 받아들여 태초의 혼돈=도 로부터 세계가 유출하였다고 하는 우주생성론 및 음양 오행설을 채용하여 물()의 생사(生死)를 기()의 집산으로 설명한 자연론 등이 전개되었다. 장자의 새로운 부분에는 위와 같은 생각에 기초하여 무위자연(無爲自然)으로 인민을 통치한다고 주장한 정치 사상도 있다.

 

2. ‘장자(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 본문 내용, Ü : 나의 언어)

 

□ 장자는 사람이 타고난 그대로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부담조차도 거부하면서 순수한 자연에 모든 것을 맡기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살아 보자는 것이었다. (P. 11)

 

□ 공자가 가르치는 도가 제대로 행해진 시대란 거의 없다. (p. 13)

 

□ 대체로 사람들 사이의 관계나 사회의 질서는 유교적인 기초가 강하고 인생이나 자연에 대한 가치관 속에는 도가적인 색채가 짙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p. 14)

 

□ 장자의 본체론은 노자보다도 더욱 철저한 무의 개념을 근거로 한다. (p. 23)

 

Ü 그리하여 장자는 숫자의 통일체적인 개념을 넘어 그 대통합의 개념을 일러 太一(태일)이라 했다.

 

□ 도가와 도교는 서로 크게 다르다. 사람들은 상대적인 판단에서 얻어진 불안정한 가치를 평생을 두고 추구하기 때문에 불행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란 이성이나 감정 또는 욕망을 초월하여 아무런 의식적인 행동을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지내야만 한다는 무위자연의 이론을 주장하게 된 것. 반면 도교는 늙지 않고 오래 오래 살려는 신선술이 종교의 바탕이었다. (p. 26)

 

□ 노자와 장자를 도가라 부르게 된 것은 모든 존재와 현상의 근원을 추구하여 거기에 ()라는 이름을 붙이고 도가 이러하기 때문에 사람도 이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본체론을 근거로 학술을 전개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p. 27)

 

Ü 탈레스는 물, 아낙시만드로스는 무한자, 아낙시메네스는 공기, 피타고라스는 수와 질서, 헤라클레이토스는 로고스, 파르메니데스는존재연암은 먼지, 노자와 장자는 도.

 

無待(무대)의 경지, 기대는 곳이 없는 경지란 사람이 행동하고 의식하는 데 있어서 제약과 장애가 되는 모든 요소를 없애 버린, 완전히 자유로운 경지를 뜻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가 이미 지니고 있던 마음이나 자기의 욕망, 감정 같은 것을 모두 없애 버려야 한다. (p. 29)

 

內篇(내편)

 

어슬렁어슬렁 노님

逍遙遊 (소요유)

 

□ 북극 바다에 고기가 있는데 그 이름을 ()이라 하였다. 곤의 길이는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그것이 변하여 새가 되면 그 이름을 ()이라 하는데 붕의 등도 길이가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붕이 남극 바다로 옮아 갈 적에는 물을 쳐서 삼천 리나 튀게 하고 빙빙 돌며 회오리바람을 타고 구만 리나 올라가며 육 개월을 날아가서야 쉬게 된다고 하였다. (p. 36)

 

Ü scale을 보라. 초장부터 기를 죽여놓은 철학적 시선이다. 장자의 시선은 인간세를 놓아 두고 구만 리 장공 위에 있음을 시사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 시선이 도가의 시선이며 장자의 시선이며 노자의 시선이라는 것이겠다. 존재 너머를 사유하는 (). 장자를 접수하는 것이 만만치 않음을 예고 한다.

 

□ 아지랑이나 먼지는 생물의 숨결에도 날린다. 하늘이 파란 것은 그것이 본래의 빛일까? 그것이 멀어서 끝이 없기 때문일까? 그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아도 역시 이와 같을 따름일 것이다. (p. 37)

 

Ü 실은 하늘이라는 실제는 없는 것이다. 하늘이 있는가?

 

니체는 이야기한다. ‘모든 감정에, 모든 감각적 인상에 이 오래된 사랑의 한 조각이 있다. 마찬가지로 얼마간의 환상 선입관, 부조리, 무지, 공포, 그 밖의 모두가 그것에 섞이고 엮여 있다. 저편의 저 산, 저 하늘의 저 구름, 도대체 그 어디가 현실적인가?’

 

또한 순자는 말한다. ‘별이 떨어지고 나무가 울면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이 무슨 일인가 한다.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은 천지와 음양의 변화이며 드물게 나타나는 사물의 변화일 뿐이다. 괴상하다고 할 수는 있지만 두려울 것은 없다.’

 

성인들이 보는 하늘 조차 이리도 차이가 많다. 진리를 대하는 자세는 의심이다. 상대성을 인정하는 가운데 자신의 잣대로 진리를 정의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왔다.

 

□ 매미와 작은 새가 웃으며 말하였다. ‘우리는 펄쩍 날아 느릅나무 가지에 올라가 머문다. 때로는 거기에도 이르지 못하고 땅에 떨어지는 수도 있다. 무엇 때문에 9만 리나 높이 올라 남극까지 가는가? (p. 39)

 

Ü 사유의 지평은 다르다. 내가 생각하고 말하는 언어는 다르고 네가 사유하고 쓰는 언어는 다르다. 편견 없는 주장은 세상에 없다. 편협하지 않은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세상에 객관이란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하고 짧은 동안 사는 자는 오래 사는 자에 미치지 못한다. 아침 버섯은 아침과 저녁을 알지 못한다. 쓰르라미는 봄과 가을을 알지 못한다. 이것들은 짧은 동안 사는 것들이다. 초나라 남쪽에 명령이란 나무가 있는데 오백 년을 한 봄으로 삼고 오백 년을 가을로 삼는다고 한다. 태고적에 대춘이란 나무가 있었는데 팔천 년을 한 봄으로 삼고 팔천 년을 한 가을로 삼았다고 한다. (p. 40)

 

Ü 그러나 쓰르라미도 우주고 대춘이란 나무도 우주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은 쓰르라미와 대춘의 시간 개념이 다름을 전제해야 한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시간은 과연 무엇으로 주어지는가. 비교해야 하는가. 비교 당해야 하는가. 누구와 비교해야 하는가. 무엇과 비교해야 하는가.

 

□ 그래서 지극한 사람은 자기가 없고 신 같은 사람은 이룬 공이 없고 성인은 이름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p. 44)

 

Ü 장자의 초월 경지 네 가지 1. 극히 현실적인 常識(상식)() 2. 칭찬이나 모욕에 초연한 송영자 같은 사람 3. 열자와 같이 바람을 타고 자유롭게 비행하다가 15일이면 돌아오는 사람 4. 절대 자유, 성인, 신인, 지인 (신영복, 강의에서)

 

□ 뱁새는 깊은 숲 속에 둥우리를 친다 해도 한 개의 나뭇가지를 사용할 따름이며 두더지가 황하의 물을 마신다 하더라도 그것은 배를 채우는 데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p. 46)

 

Ü 요임금이 허유에게 천하를 맡기려 하자 허유가 한 말이다. 분수를 제대로 알고 명분에 사로잡히지 말자는 이야기겠다. 장자도 재상의 제의를 받았을 때 살아서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며 살겠다.’ 고 했다.

 

□ 과일 나무는 과일이 열리면 따게 되고 딸 적에는 욕을 당하게 된다. 큰 가지는 꺾이고 작은 가지는 찢어진다. 이들은 자기의 재능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는 것이지. 그래서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일찍 죽는 것이다. 스스로 화를 자초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세상 만물이 이와 같지 않은 것이 없다. 나는 쓸모 없기를 바란지가 오래다.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제야 뜻대로 되어 쓸모 없음이 나의 큰 쓸모가 된 것이다. 만약 내가 쓸모가 있었다면 어찌 이렇게 커질 수 있었겠는가? 그대와 나는 다 같이 하찮은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하여 서로를 하찮은 것이라고 헐뜯을 수 있겠는가? 그대처럼 죽을 날이 멀지 않은 쓸모 없는 사람이 어찌 쓸모 없는 나무를 알 수가 있겠는가? (p. 55, 강의 재인용)

 

Ü 무용함의 유용함

 

2편 모든 사물은 한결 같음, 齊物論(제물론)

 

땅의 피리 소리, 대지가 기운을 내뿜는 것을 바람이라 말한다. 이것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뿐이지만 일어나기만 하면 모든 구멍이 성난 듯 울부짖는다. 그대만이 그 씽씽 부는 소리를 듣지 못하겠는가? (p. 57)

 

Ü 스승님의 글을 인용해본다.

진짜 스릴을 맛보고 싶다면 제트스키 따위는 버리시오 / 대신 세상에서 가장 큰 롤러코스터를 한 번 타보시오 / 이 땅덩어리, 지구에 올라타시오. 공짜요 / 지구를 타고 우주를 쌩하게 여행하는 자신을 느껴보시오 / 하루 내 나를 실고 태양 주위를 달리면서 스스로 꽈배기처럼 자전도 한다오 / 그래도 난 절대 안 떨어진다오. / 해지는 것을 한 번 보시오. / 몇 분만에 태양의 직경만큼 달려간다오 / 우리 안에는 지구의 맥박 같은 시계가 있소 / 내 몸 안에는 세계의 맥박과 같이 박동하는 시계가 심어져 있소 / 그 박동을 기억하시오. / 우주와 나와 세상이 하나가 되는 박자라오 / 가장 빠른 것이 가장 느려 보이고 / 느려터진 것이 순식간에 다가온다오 / 커다란 것은 모순을 포용하는 법

 

하늘의 피리 소리, 온갖 물건을 불어서 모두 제각기 다른 자기 소리를 내게 하는데 모두가 그 스스로 작용을 하지만 성난 듯 소리치는 것은 누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겠느냐? (p. 58)

 

큰 지혜를 지닌 사람은 여유가 있지만 작은 지혜를 지닌 사람은 남의 눈치만 본다. 위대한 말은 담담하고 너절한 말은 수다스럽기만 하다. 잠잘 때에는 혼백에 의해 꿈을 꾸고 깨어나면 몸에 의해 활동한다. (p. 60)

 

□ 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움과 걱정과 탄식과 변덕과 고집스러움 및 경박함과 방탕함과 뽐냄과 허세 같은 사람의 마음, 이것들은 나와 가까운 것일 터인데도 그렇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 (p. 62)

 

Ü 무엇이 그리 만드는가. 형체도 없고 실체도 없다. 어림 잡을 수도 희미하게라도 볼 수 없다. 무엇인가. 감정이 나 인가? 육체가 나 인가?

 

□ 일단 그의 형체를 받고 태어났으면 몸을 손상시키지 않고 그것이 다해지기를 기다려야 한다. 밖의 물건들과 서로 맞서서 마찰을 일으켜 인생을 뜀박질하듯 살아가면서 그 발길을 멈추지 못한다면 매우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평생을 발버둥치면서도 그가 이루어 놓은 공은 하나도 없고 나른히 일에 지쳤으면서도 그 일의 귀결은 알지 못한다면 어찌 가엾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그를 보고 죽지 않았다고 말한들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그의 육체의 노화를 따라 그의 마음도 그와 같이 노화한다면 어찌 큰 슬픔이라 말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사람의 삶이란 본시부터 이처럼 아둔한 것일까? 나만이 홀로 아둔하고 사람들 중에는 아둔하지 않은 이들도 있는 것일까? (p. 65)

 

Ü 말문을 막아버리는 이 질문. 생의 질문 앞에 무참하여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끊임 없이 묻고 답을 해도 왜 풀리지 않는 걸까? 질문을 거두어야 하나? 존재를 거두어야 하나? 지식을 끊어야 하는가? 답답하다.

 

말이란 소리가 아니다. 말이란 것은 말로 어떤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나 그 말로 표현하는 생각은 일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 과연 말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본시부터 말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새새끼가 우는 소리와는 다르다고 하지만 그것과 차이가 있는 것일까. 차이가 없는 것일까? (p. 67)

 

Ü 도는 말에서 나오는가. 지혜의 말은 도에서 나오는가. 말하여질 수 있는 도가 있는가. 도가 말하여질 수 있다면 그것은 도인가, 도가 아닌가. 그런데 말할 수 없는 도는 도인가. 말이라는 것은 인간의 사유를 통해 개발된 장치다. 우주를 말하면서 인간의 언어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인가. 말하여지지 않은 우주가 얼마나 많은 것일까.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고종석의 말들의 풍경을 읽어보기로 한다.

 

□ 저것은 이것에서 나오고 이것 역시 저것에 말미암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저것과 이것이 함께 생겨난다는 설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삶이 있으면 죽음도 있고 죽음이 있으면 삶도 있다. 옳음도 역시 무궁한 변화 중의 하나이고 그름도 역시 무궁한 변화 중의 하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밝은 지혜로써 판단하는 것이 가장 좋다. 고 하는 것이다. (p. 69)

 

Ü 세상에 나 인 것이 없고 나 아닌 것이 없다. 만유가 관련되어 있고 만물이 제 홀로 산다. 길고 짧고 크고 작은 것은 상대적이다. 홀로 살고 관계하여 산다. 대지혜의 밝음으로 세상을 보라.

 

나누어지는 것은 다른 면에서는 이루어지는 것이 된다. 이루어지는 것은 다른 면에서는 파괴가 된다. 모든 물건에는 이루어지는 것과 파괴가 없으며 다시 통하여 한 가지 것이 된다. 오직 통달한 사람만이 모든 것이 통하여 한 가지가 됨을 안다. (p. 72)

 

Ü 세상에 나 인 것이 없고 나 아닌 것이 없다. 만유가 관련되어 있고 만물이 제 홀로 산다. 길고 짧고 크고 작은 것은 상대적이다. 홀로 살고 관계하여 산다. 대지혜의 밝음으로 세상을 보라.

 

□ 과연 이루어짐과 무너짐이 존재하는 것일까? 과연 이루어짐과 무너짐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p. 75)

 

Ü생은 과정이다. 그 눈물 겨움을 참을 수 없겠지마는 어쩔 수 없는 과정이다. 인간이 무한히 살고 죽어도 그 결과가 무엇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삶을 무한소급하여 그 시작을 알려 해도 그것은 미지다. 그러니 우열이 없다. 좋고 나쁨이 없다. 잘하고 못함이 없다. 우리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거대한 元亨利貞(주역에서 원형리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원은 만물이 창조되기 이전의 혼돈의 시간, 형은 천지창조로부터 성장 단계까지의 시간, 리는 결실과 수확의 시간, 정은 왕성하던 것이 소멸하는 쇠퇴의 시간) 그 과정의 삶이므로 완성이나 달성 같은 언어는 삶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것은 결과의 언어다. 과정의 언어는 이와 같은 말을 쓰지 않는다. 그저 열심히 하고 최선을 다한다는 안개 같이 답답한 말이 과정을 사는 인간의 삶에 가장 어울리는 선의의 단어다.’

 

□ 그러므로 도를 어지럽히는 빛을 성인들은 없애려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자기 본위의 방법을 쓰지 않고 영원하고 평범한 것에 자기를 맡겼던 것이다. 이것을 두고서 밝음이라 말하는 것이다. (p. 77)

 

Ü 해가 지고 달이 뜨는 것과 같이 사람은 태어나 살고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일.

 

시작이라는 것이 있다면 일찍이 시작되지 않았던 적이 있을 것이며 일찍이 시작되지 않았던 그 이전도 있을 것이다. 있는 것이 있고 없는 것이 있다면 일찍이 있고 없는 것도 없었던 그 이전도 있을 것이다. 갑자기 없는 것이 존재하게 되는데 그때에도 있고 없는 것 중에 과연 어느 것이 있고 어느 것이 없는지는 알지를 못한다. 지금 내게는 이미 이론이 있다. 그러나 내가 전개한 논리 중에 과연 이론이 존재하는 것일까. 과연 이론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알 수 없다. (P. 79)

 

Ü 장자는 양자물리학자들이 말하는 퍼텐셜 Potential를 이야기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에서 철학자 김용규는 이에 대해 말한다.

 

퍼텐셜은 플로티노스가 말하는 온전한 무엇의 바탕이 되는 소립자. 존재의 장은 퍼텐셜 안에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지만 퍼텐셜을 무조건 초월하고 우주 안에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지만 우주를 무한히 초월합니다. 이는 마치 신의 크기가 모든 물리적 공간의 크기를 가능하게 하지만 그것을 초월하고 신의 영원성이 모든 물리적 시간의 흐름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것을 초월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중우주모형에 따르면 퍼텐셜은 약 10 500승개로 추정되는 진공상태를 포함하는데 각각의 진공 상태가 모두 빅뱅을 통해 하나의 우주로 발전한다. 이 같은 우주들의 팽창은 마치 바다에서 물방울이 생겼다가 사라지듯이 시작도 끝도 없는 연속 과정일 수 있습니다.’

 

또한 캠벨은 이와 같은 것을 존재 너머의 일로 규정하고 있다.

 

미래의 부처가 덧없는 이름과 물리적인 성격의 다섯 가지 무기로 더 이상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최후의 수단으로 이름할 수 없고 보이지도 않는 여섯 번째의 무기로 바꾸어 대항하자 조복한 것이다. 이 여섯 번째 무기가 명()과 형()이라는 현상계 너머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원리의 지혜라는 천상적 벼락인 것이다. 이제 그는 영원히 자유로워진 것이다.’

 

□ 천하에서 가을 짐승 터럭 끝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여길 수도 있고 태산을 작다고 여길 수도 있다. 어려서 죽은 아이보다 더 오래 살 수 없다고 여길 수도 있고 팽조를 일찍 죽었다고 여길 수도 있다. 하늘과 땅은 우리와 더불어 함께 존재하고 있고 만물은 우리와 더불어 하나가 되어 있다. (p. 80)

 

Ü 세상 만물은 상대적이다. 절대적인 것은 있을 지 없을 지도 모르는 신, 조물주의 것이다. 상대적 존재들이 제 잘난 일을 떠들거나 겸손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울 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것이 얼마나 같잖은 일인지는 세상을 떠나기 전 깨달아야 하지 않겠는가.

 

□ 도에는 본시부터 한계가 없는 것이다. 말에는 본시부터 법도가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말에는 구별이 생기는 것이다. (p. 81)

 

Ü 언어의 한계는 사유의 한계다. 사유의 한계는 존재 인식에 대한 한계성을 드러낸다. 인간이 겁 없이 무한을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마음대로 구별 짓고 겸손하지 않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안다는 것이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님을 그 어찌 알겠는가? 내가 말하는 알지 못한다는 것이 아는 것이 아님을 어찌 알겠는가? 내가 보건대 어짊과 의로움의 기준이나 옳고 그른 방향이 어지러이 뒤섞여 있다. 내 어찌 그 분별을 알 수가 있겠는가? (p. 86~87)

 

Ü 상대성의 극치점이다. 객관은 이미 사라진다. 계절도 주관이고 가변적 상황이고 현상이다. 하물며 사람이 세워 놓은 기준이나 지식이 절대적인 것이 있겠는가. 오늘 많이 배운다.

 

꿈을 깬 뒤에야 그것이 꿈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또한 큰 깨어남이 있어야만 비로소 이 삶이 큰 꿈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자들은 스스로 깨어 있다고 생각하고 버젓이 아는 체를 하여 임금이니 목동이니 하지만 고루한 일이지요. 만년 뒤에 위대한 성인을 한 번 만나서 그 뜻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아침 저녁으로 만나는 것이나 같은 일입니다. (p. 93)

 

Ü 우리는 깨어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이 세계가 꿈인지 아닌 지도 모르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 나와 당신이 논쟁을 했다고 가정합시다. 당신이 나를 이기면 과연 당신 옳고 나는 그른 것일까요? 내가 당신을 이겼다면 내가 옳고 당신은 그른 것일까요? 그 어느 쪽은 옳고 그 어느 쪽은 그른 것일까요? (p. 94)

 

Ü 뒤통수를 얻어 맞는다. 이제껏 까불고 씨부려재낀 것들이 한 순간에 무너진다. 니체는 말한다.

 

우주는 어떠한 법칙도 준수하지 않는다. 자연 속에 법칙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을 경계하자. 그곳에는 단지 필연성만이 있을 뿐이다. 명령하는 자는 없다. 복종하는 자도 없다. 위반하는 자도 없다. 일단 그대가 목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우연 또한 없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연이라는 말은 목적의 세계와 비교할 때에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죽음이 삶과 반대된다고 말하는 것을 경계하자. 삶은 죽음의 한 형태, 그것도 매우 드문 한 형태이다.’

 

□ 변화하는 이론을 믿는다는 것은 믿는 것이 없다는 것이나 같은 것입니다. (p. 96)

 

어느 날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유유자적 재미있게 지내면서도 자신이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문득 깨어보니 다시 장주가 되었다. (조금 전에는) 장주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고 (꿈에서 깬 지금은) 나비가 장주가 된 꿈을 꾸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 무슨 구분이 있기는 있을 것이다. 이를 일컬어 만물의 조화라 한다. (p. 99, 강의 재인용)

 

Ü 물아일체, 나와 너의 경계가 없어지는 대동이 ()하는 지점. 도의 끝간 데 이지 않겠는가.

 

3편 삶을 길러 주는 주인 養生主(양생주)

 

□ 한이 있는 삶을 가지고 한 없는 앎을 뒤쫓음은 위태로운 일이다. 그런데도 앎을 추구하는 자가 있다면 위태로울 따름인 것이다. (p. 101)

 

Ü 내가 왜 글자를 깨우치고 배워서 지금 이렇게 괴로운가.

 

□ 제가 귀하게 여기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도입니다. 기술을 넘어 선 것입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온통 소뿐이었습니다. 3년이 지나자 소의 전체 모습은 눈에 띄지 않게 되었지요. 지금은 마음으로 소를 대할 뿐 눈으로 보는 법은 없습니다. 감각은 멈추고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입니다. 천리에 의지하여 큰 틈새에 칼을 찔러 넣고 빈 결을 따라 칼을 움직입니다. 소의 몸 구조를 그대로 따라갈 뿐입니다. 아직 한 번도 인대를 벤 적이 없습니다. 하물며 큰 뼈야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뼈에는 틈이 있고 이 칼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으로 틈이 있는 데다 넣으므로 넓고 넓어 칼날을 휘둘러도 반드시 여유가 있습니다. (p. 102~103)

 

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 쟁이, , 장인의 모습은 이런 것이다. 뼈를 베지 않기 위한 그네들의 눈물겨운 노력이 어떠했겠는가. 나는 그 경지에 진정 이를 수 없는 것인가.

 

4편 사람들 세상 人間世(인간세)

 

□ 귀란 듣기만 할 뿐이며 마음이란 느낌을 받아들일 뿐이지만 기운이란 텅 빈 채 사물에 응대하는 것이다. 도란 텅 빈 곳에 모이게 마련이다. 텅 비게 하는 것이 마음의 재계인 것이다. (p. 122)

 

□ 저 공허한 경지를 바라보노라면 텅 빈 마음이 밝아질 것이다. 행복하고 좋은 일은 이런 곳에 머물게 된다. 행복하고 좋은 일이 머물지 않는 것을 이곳에 앉아 있으면서도 정신은 딴 곳으로 달린다고 말하는 것이다. (p. 124)

 

Ü 지금에 집중하고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 행복을 더 많이 느끼는 방편이다. 금강경에서도 말하였다. 금강경의 제10장에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란 구절이 있다. 마땅히 형상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 것이며, 어떤 법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 것이니라

 

상대방이 아이 같다면 아이 같이 되십시오. 상대방이 분수 없는 사람이라면 분수 없게 행동하십시오. 상대방이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라면 종잡을 수 없게 행동하십시오. 여기에 통달하게 되면 탈 없는 경지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p. 133)

 

□ 자기의 훌륭함을 크게 뽐내면서 상대방의 권위를 범하면 위태로워집니다. (p. 135)

 

□ 어제 산의 나무는 쓸모가 없어서 천수를 다할 수 있었는데 오늘 이 집의 거위는 쓸모가 없어서 죽었습니다. 선생께서는 장차 어디에 서겠습니까? 나는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의 중간에 처하겠다.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의 중간이란 도와 비슷하면서도 실은 참된 도가 아니기 때문에 화를 면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p. 137, 강의 재인용)

 

Ü 무용함의 유용함이다.

 

□ 이것은 과연 재목이 되지 않는 나무라서 이처럼 크게 자랄 수 있었구나. 아아, 神人(신인)들은 이래서 재능이 없다는 것이로구나. (p. 140)

 

Ü 쓸데 없는 것의 쓰임

 

5편 덕이 속에 차 있는 증험, 德充符(덕충부)

 

□ 근본적인 덕을 지니고 있는 징험은 두려움이 없는 충실한 상태를 이룩합니다. (p. 151)

 

□ 남과 화합하기는 하지만 자기 주장을 내세우지는 않고 명성은 그가 살고 있는 사방의 지역을 벗어나지 않고 있소 (p. 159)

 

□ 애태타는 말을 하지 않아도 남에게 믿음을 주고 아무 공로 없이도 남과 친근해집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나라를 내어 주면서도 오직 그가 받지 않을까 두려워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p. 160)

 

Ü 이리 되는 것이 인간의 지향점이다. 애태타는 추인이다. 못생겨서 추하다고 하지만 사람이 곁에 머물러 아름다운 사람이 되었다. 자기의 것을 애태타에게 내어주지 못해 안달하는 사람들은 애태타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 되어야 한다.

 

□ 변화는 조화를 어지럽히지 못하고 마음 속으로 스며들지도 않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p. 162)

 

□ 내가 감정이 없다고 말하는 근거는 사람들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으로서 안으로 그 자신을 상하게 하지 않으며 언제나 자연을 따르기만 하고 자기 삶에 이익을 주려 하지 않는 것이오. (p. 167)

 

Ü 감정조차 자연에 맡기는 인간의 삶, 육체는 물론 감정에도 얽매임이 없어야 지극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이겠다. (각주)

 

6편 위대한 참 스승, 大宗師(대종사)

 

□ 옛날의 참된 사람은 삶을 기뻐할 줄도 모르고 죽음을 싫어할 줄도 몰랐다. 세상에 나옴을 기뻐하지도 않거니와 저승으로 들어감을 거부하려 들지도 않았다. 의연히 가고 의연히 올 따름인 것이다. (p. 171)

 

Ü 자칫 허무주의로 흐를 수도 있는 대목이다. 이렇게 의연한 장자도 진흙 밭이라도 이생이 낫다 하였다.

 

죽음과 삶은 운명이다. 밤과 낮이 일정하게 있는 것은 천연이다. 사람들이 관여할 수 없는 그런 일이 있는 것은 모두가 만물의 實情(실정)인 것이다. (p. 177)

 

늙게 만듦으로써 우리를 편안하게 해 주고 죽음으로써 우리를 쉬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기의 삶을 잘 사는 것은 곧 자기의 죽음을 잘 맞이하는 길인 것이다. (p. 178)

 

Ü 잘 늙어가고 잘 죽어가는 것. 제멋대로 태어난 인간이 의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 만약 천하를 천하에 감추어 두면 옮겨질 곳이 있을 수가 없다.

일찍 죽는 일에도 잘 대처하고 늙는 일에도 잘 대처하며 시작하는 일에도 잘 대처하고 끝 맺는 일에도 잘 대처하여 사람들이 그를 본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하물며 만물이 관계되어 있고 또 일체의 변화의 근거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처하겠는가? (p. 179)

 

Ü 그대로 두어라. 천하를 천하에 감추는 일은 그대로 놓아 두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일에도 잘 대처한다는 일은 나에게는 맞지 않는 일 같다. 그럴 수도 없거니와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그냥 모든 일에 서툰 대처를 지향한다. 인간의 맛이다.

 

이미 삶을 잊게 된 뒤에는 아침 햇살처럼 깨달음이 열렸소. 깨달음이 열린 뒤에는 유일한 도를 볼 수 있게 되었소. 도를 볼 수 있게 된 뒤에는 시간의 변화가 없게 되었소. 시간의 변화가 없게 된 뒤에는 죽음도 없고 삶도 없는 경지에 들어가게 되었소. 삶의 욕망을 죽이는 사람은 죽지 않으며 삶의 욕망을 살리는 사람은 살지 못하오 (p. 184)

 

Ü 깨달음의 process. 경지의 단계요. 존재론적 관념이 말하는 존재의 사다리의 제일 윗자리라 하겠다. 시간을 지배한 자, 존재 너머의 차원을 획득한 자, 그것은 신이다.

 

누가 무를 머리로 삼고, 삶을 척추로 삼고 죽음을 궁둥이로 삼을 수가 있겠는가? 누구든 삶과 죽음과 생존과 멸망이 한 가지임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와 더불어 친구가 될 것이다. (p. 186)

 

Ü 쓰러진다 저 표현.

 

□ 아아, 조물주가 나의 몸을 이토록 구부러지게 만들다니!

나의 왼팔을 조금씩 변화시켜서 닭으로 만들어 준다면 나는 그대로 사람들에게 새벽이나 알려주지요. 나의 오른팔을 조금씩 변화시켜 새 잡는 활로 만들어 준다면 나는 그것으로 솔개를 맞춰 잡아 군 고기를 구워 먹게 해 주지요. (p. 187)

 

Ü 내 작은 아기였을 때의 몸이 이렇게 커져 있으니 슬프다. 내 나를 어쩌지 못하는 그야말로 만유의 일개 하나임을 알았다.

 

□ 지금 훌륭한 야금사가 쇠를 붓는다 합시다. 이 때, 쇠가 튀어 나오면서 나는 반드시 막야의 명검이 되겠다.’고 말한다면 훌륭한 야금사는 상서롭지 않은 쇠라고 생각할 것이오. 지금 한 번 사람의 형체를 타고났다고 해서 사람으로 살아야지, 사람으로 살아야지하고 말한다면 조물주는 반드시 상서롭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오. 지금 한결같이 하늘과 땅을 큰 용광로라 생각하고 조물주를 훌륭한 야금사라 생각한다면 어디로 가게 된들 안 될 곳이 있겠소? 깜빡 잠들었다가 문득 깨어날 따름이지요. (p. 190)

 

Ü 이 스케일을 보라. 비유의 우언을 보라. 인생을 너무 엄숙하게 생각하지 말자. 생긴 대로 살고 생기고 싶은 대로 살아보자. 화끈하게.

 

□ 맹손 씨는 살게 된 까닭도 알지 못하고 죽게 되는 까닭도 알지 못하였다. 먼저 태어나는 것도 알지 못하였고 뒤에 죽는 것도 알지 못하였다. 자연의 변화를 따라 사람이 되었으니 자기는 알지 못하는 변화를 기다릴 따름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또한 살아서 변화하고 있는 지금 어찌 변화하기 전의 상태를 알겠는가? 변화하지 않고 있는 지금 어찌 변화한 뒤를 알 수 있겠는가? 나나 그대나 꿈에서 아직 깨어나지 않은 자들이 아닐까? (p. 197)

 

Ü , 감동의 연속이다. 삶을 한 순간 들었다 땅바닥으로 떨어뜨려 버리는 이 솜씨, 장자는 문학가의 가장의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다.

 

□ 저는 앉아 있으면서 모든 것을 잊게 되었습니다. (p. 202)

 

Ü 형체가 있는 육체를 떠나 마음의 지각을 버리는 것. 모든 차별을 넘어 서는 위대한 도의 경지에 동화하는 것. 공자는 이런 안회를 뒤에서 따르며 배운다고 했다. 그 스승에 그 제자다.

 

7편 자연에 따르는 제왕, 應帝王(응제왕)

 

□ 밝은 임금의 다스림은 공로가 천하를 뒤덮을 만하여도 자기 힘으로 한 것같이 보이지 않으며 교화가 만물에 베풀어져도 백성들은 그것을 의식도 못한다. 훌륭한 공로가 있어도 명성이 드러나지 않으며 만물로 하여금 스스로 기뻐하게 만든다. (p. 212)

 

Ü 헌신이다. 자신이 아니라 상대를 스스로 기뻐하게 만드는 공헌의 최고의 경지다.

 

□ 지극한 사람의 마음 쓰임은 거울과 같은 것이다. 가는 것은 전송하지 않고 오는 것은 마중하지 않는다. 변화에 호응하되 감추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사물을 이겨 내면서도 상처받지 않을 수가 있는 것이다. (p. 218)

 

□ 남해 임금은 숙, 북해 임금은 흘, 중앙의 임금은 혼돈이었다. 숙과 홀이 자주 혼돈의 땅에서 만났는데 혼돈은 그들을 잘 대접했다. 숙과 홀은 혼돈의 은덕을 갚을 방도를 의논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모두 일곱 개의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 쉬는데 오직 혼돈에게만 구멍이 없으니 시험 삼아 구멍을 뚫어 줍시다. 날마다 구멍 한 개씩 뚫어주었는데 칠 일 만에 혼돈은 죽어버렸다. (p. 219)

 

Ü 이 글을 신영복 선생은 이렇게 설명했다.

 

여기서 구멍을 뚫는 행위가 바로 통체적인 전체를 분하고 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누고 가르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그 전체적 연관이 소멸되고 남는 것은 분별지와 분별상이며 개아로서의 존재들입니다. 혼돈은 이러한 분석과 분별 이전의 통체적 세계를 의미하고 있음은 물론입니다. 혼돈이 죽어버린다는 것은 이러한 진정한 세계상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外篇(외편)

 

8편 엄지발가락과 둘째 발가락이 붙어 잇는 사람, 駢拇(변무)

 

□ 모두가 쓸데 없이 붙은 것을 존중하고 소용 없이 덧붙은 것을 존중하는 도이며 천하의 지극히 올바른 도는 아닌 것이다. (p. 225)

 

Ü 우리는 도덕 과잉인가 자문할 일이다. 우리가 최선이라 생각하는 가치는 실상 인간의 삶에 불필요할 수도 있다.

 

학의 다리가 비록 길지만 짧게 잘라 주면 슬퍼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본성이 길면 잘라 주지 않아도 되고 본성이 짧으면 이어 주지 않아도 된다. 아무것도 걱정할 것이 없는 것이다. 어짊과 의로움은 사람의 진실한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진 사람이란 얼마나 많은 걱정을 지니고 있는가? (p. 227)

 

Ü 생긴 대로 자기답게 사는 것. 절대 자유를 위한 첩경이다. 세상이 제시한 가치를 그대로 따를 필요가 있는가. 그것은 세상이 나에게 하는 말이다. 어쩌면 세상이 나를 외치지 못하게 하려는 수작일 수 있지 않는가.

 

□ 백이는 명예를 위하여 죽었다. 도척은 이익을 위하여 죽었다. 두 사람이 죽은 방법은 달랐지만 그들이 자기 삶을 해치고 자기 본성을 손상시킨 점은 같은 것이다. 어찌 반드시 백이는 옳고 도척만이 글렀겠는가? (p. 230)

 

Ü 맞다. 본질 앞에서 모두 벗은 모습은 같을 수 있다.

 

□ 스스로 보지는 않고 남의 것만을 보고 스스로의 것을 지니지 않고 남의 것만을 지니는 것은 남이 지니는 것만을 지니려 들고 그가 지녀야 할 것은 스스로 지니지 않는 것이 된다. (p. 233)

 

Ü 자주적 자유. 지극히 주관적 자유를 추구한다.

 

9편 말 발굽, 馬蹄(마제)

 

□ 흰 옥돌을 깨뜨리지 않고서야 누가 옥기를 만들 수 있겠느냐? 도와 덕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어찌 어짊과 의로움을 주장하겠느냐? 본성과 진실함에서 떠나지 않았다면 어찌 예의와 음악을 쓸 필요가 있겠느냐? 도덕을 무너뜨리고 어짊과 의로움을 내세운 것은 성인의 잘못이다. (p. 240)

 

Ü 무위자연 하였다면 도덕과 어짊과 의로움이 필요 없다는 말이겠다.

 

10편 남의 상자를 열고 도둑질함, 胠篋(거협)

 

상자를 열고 주머니를 뒤지며 궤짝을 여는 도적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끈으로 꼭 묶고 고리에 자물쇠를 단단히 채워야 한다. 이것이 이른바 일반 세상의 지혜인 것이다. 그러나 큰 도적이 오면 곧 궤짝을 짊어지고 상자를 둘러메고 주머니째 들고 달아나면서 오직 끈과 자물쇠와 고리가 견고하지 않은 것만을 걱정한다. 그러니 세상에서 말하는 지혜로운 사람이란 바로 큰 도적을 위하여 재물을 쌓아 놓는 꼴이 되지 않겠는가? (p. 245)

 

Ü 止揚(지양)이라는 말은 손을 들어 위로 올린다는 말이다. (찬양, 공양) 더 높은 단계로 오르기 위하여 어떠한 것을 하지 아니한다는 사전적 의미가 있다. 독일어로 aufheben (아우프헤븐). 변증법 관련 개념이다. 자체는 부정하면서 오히려 한층 더 높은 단계에서 긍정하는 것이라는 철학적 개념이다. 단선적이고 일차적이며 저급한 현실을 능가하여 한 차원 높은 곳에 이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큰 도적에 맞버티려면 말이다. 우리 사회에 큰 도적이 많다. 오늘날의 지식이 하는 일이란 대체로 정권을 유지하게 하거나 돈을 벌게 하거나 나쁜 짓을 하고도 그것을 그럴듯하게 꾸미는 일을 대행하는 일인데 그것은 큰 도적을 위해 상자를 묶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 장가 도척에게 도적질에도 도가 있냐는 질문을 한다.

도척은 감추어진 것을 알아내는 것이 ()입니다. 남보다 먼저 들어가는 것이 ()입니다. 늦게 나오는 것이 ()입니다. 도둑질해도 되는가 안 되는가를 판단하는 것이 지입니다. 도둑질한 물건을 고르게 나누는 것이 인입니다. (p. 248 요약)

 

Ü 도적에게도 도가 있거늘 하물며

 

허리띠 훔친 자는 처형을 당하지만 나라를 도적질한 자는 제후가 된다. 제후의 문 안에는 어짊과 의로움이 존재한다. 그러니 이것은 어짊과 의로움과 성인의 지혜까지 도적질한 것이 아닌가? (p. 250)

 

Ü , 장자여 속이 후련하다. 이것이 상자를 훔친 큰 도적이다. 고루하고 높은 지위와 교양으로 가득 찬 표정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그 태를 보라. 추악한 도적의 모습이다. 오늘날 위정자의 모습이고 재벌들의 모습이다.

 

□ 위대한 기교는 졸렬한 듯이 보인다. (p. 252)

 

Ü 상식을 넘어선 자는 상식 있는 자가 보기엔 졸렬하다. 어른이 보는 아이는 졸렬하고 유치한데 상식이라는 허울 좋은 색안경이 어른을 막고 섰기 때문이다. 위대함을 환동이라 한다.

 

□ 낚시, 미끼, 그물, 전지그물, 투망, 통발 등의 지혜가 많아지자 곧 물고기들은 물 속을 어지러이 헤엄치게 되었다. , 함정, 그물 등의 지혜가 많아지자 곧 짐승들은 늪 속을 어지러이 뛰어다니게 되었다. 지혜, 거짓, 속임수, 원한, 위선, 교활, 궤변, 논쟁, 의견의 차이 등이 많아지자 곧 세상의 습속은 이론에 미혹되게 되었다. 그러므로 세상은 언제나 크게 어지러운데 그 죄는 지혜를 좋아하는 점에 있는 것이다. 본성을 잃게 되었다. (p. 255)

 

Ü 진정 원형의 삶은 무위자연의 삶인가. 도가 사상을 가장 잘 함축한 문장이다. 모든 인위를 걷어라.

 

11편 있는 그대로 버려둠, 在宥(재유)

 

□ 유가와 묵가가 한꺼번에 생겨나 거짓이니 참말이니 하면서 서로 헐뜯게 되어 천하가 쇠퇴하였다. (p. 265)

 

□ 성인을 내치고 지혜를 버리면 천하가 크게 다스려진다. (p. 266)

 

Ü 그래 바른 말은 넘쳐나고 해라체의 언어들이 소음이 되었다. 껍데기다.

 

□ 천하기는 하지만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물건이다. 비천하기는 하지만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백성들이다. 귀찮기는 하지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일이다.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널리 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법이다. 본성과 먼 것이지만 실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의로움이다. ()에 불과한 것이지만 여러 가지로 변화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도이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아도 존귀한 것은 하늘의 도이다. 인위적이며 번거로운 것이 사람의 도이다. (p. 280)

 

Ü 무위의 권력, 하늘의 도가 알아서 해 주리라.

 

12편 하늘과 땅, 天地(천지)

 

□ 무위로써 말하는 것을 덕이라 한다. 굳게 자기 덕을 지키는 것을 기강이 있다고 한다. 덕을 이룩하는 것을 바로 서는 것이라고 말한다. (p. 286)

 

Ü 자기 주도의 주관적 가치를 지닌 것을 기강, 기강을 만들어 가거나 완성되어 질 경우 바로 섰다 한다.

 

□ 태초에는 무만이 있었다. 유도 없었고 명칭도 없었다. 일이 여기에서 생겨났는데 일만 있고 형체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직 형체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적에 일로부터 나뉘어지는 것이 잠시도 끊임이 없었는데 이것을 명이라고 한다. 일이 유동함으로써 물건을 생성시키며 물건이 생성되어 생리가 갖추어지는데 그것을 형체라 한다. 형체는 정신을 보존하게 되며 제각기 원칙을 지니게 되는데 그것을 본성이라 한다. (p. 297)

 

Ü 장자의 세계관이다. 장자는 세계가 도에서 시작했다고 하지만 도의 근원 태일이다. 이것은 흡사 서양의 존재론적 관점과 그 맥을 같이한다. 모든 존재들은 존재들과 본질로 구성되며 눈에 보이는 것은 현실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본질이 현실 이데아라고 했다. 빨강의 이데아를 토대로 세상에서는 빨강의 본질을 가진 물체들이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신에서 철학자 김용규는 아래의 사례를 들어 장자가 말하는 태일을 설명하는 것 같다.

 

플로티노스에 의하면 일자로부터 누스 nous 곧 정신이 맨 먼저 유출됩니다. ‘그러므로 정신이 있기 위해 일자 자체는 정신이 아니라 정신의 아버지여야 하며 따라서 정신은 그의 첫 아들인 것이다.’ 아는 자 (인식하는 자)와 알려지는 것(인식되는 자)의 관계가 등장하자마자 통일성은 이중성의 여지를 만들기 위해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정신은 일자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존재한다는 것은 본질에 의해 제한되고 규정된다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비로소 우리에게 인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지요. 물질세계를 생산해 낼 때 영혼은 정신 안에 이미 존재하는 형상들이 물질 안에서 가시적 형태로 스스로 만들어지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결국 영혼이 하는 일은 물질이 형상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일종의 촉매 작용입니다. 이를 플로티노스는따라서 만약 영혼이 어떤 행위가 아니고 합리적 원리라면 그것은 성찰 theoria 이다라고 했습니다. 영혼은 비물질적 세계와 물질적 세계 사이에 존재하며 그 둘의 연결고리로서 위로는 정신을 아래로는 자연계를 바라보며 만물을 창조한다는 것이지요. 신곡에서 단테는 말합니다.

 

필멸하는 모든 것과 불멸하는 모든 것은

오직 성부의 사랑에서 나온 이데아의 빛을 받고 있으니

 

빛나는 본원에서 흘러나오되 그로부터 분리되지 않고

또 삼위이면서 일체인 사랑(성령)으로부터도 분리되지 않아

그 살아 있는 빛(성자)은 스스로 영원한 (일자)에 남아 있으면서

 

그 선의 힘(성령)으로 자신의 빛 (idea)을 마치 거울에 비추듯이

새로운 존재들에게 비추고 있소.’

(일동만수의 경락)

 

□ 내가 우리 선생님께 들은 얘기지만 기계를 가진 자는 반드시 기계를 쓸 일이 있게 되고 기계를 쓴 일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기계에 관한 마음 쓰임이 있게 됩니다. 나는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부끄러워서 하지 않는 것입니다.

 

밭일을 하던 노인은 불끈 낯빛을 붉혔다가 곧 웃음을 띠고 말했다. 내가 스승에게 들은 것이지만 기계라는 것은 반드시 기계로서의 기능이 있게 마련이네 기계의 기능이 있는 한 반드시 효율을 생각하게 되고 효율을 생각하는 마음이 자리 잡으면 본성을 보전할 수 없게 된다네 본성을 보전하지 못하게 되면 생명이 자리를 잃고 생명이 자리를 잃으면 도가 깃들지 못하는 법이네. 내가 기계를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부끄러이 여겨서 기계를 사용하지 않을 뿐이네 (p. 304, 강의 재인용)

 

Ü 제주 해녀 할머니들이 산소를 메고 스쿠버 다이빙을 하지 않는 이유는 100개의 해삼을 캔다면 다른 사람이 캐지 못하고 1년 내내 캐지 못하기 때문이라 했다.

신영복 선생은 말한다. ‘일과 놀이와 학습이 통일된 형태가 가장 바람직한 것임은 제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기계는 바로 이 통일성을 깨뜨리는 것이지요. 노동이 삶 그 자체, 삶의 실현(지출)임에도 불구하고 기계로 말미암아 노동이 다른 목적의 수단으로 전락되는 것이지요. 노동을 그 본연의 지위로부터 끌어내리는 일을 기계가 하지요.’

 

부모가 말씀 하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부모가 행한 일을 훌륭하다 여기면 곧 세상에서는 못난 자식이라고 말한다. (p. 313)

 

Ü 30년 전 사고 방식이 지금 적용될 순 없다.

 

□ 그 자신이 어리석음을 아는 사람은 크게 어리석은 것은 아니다. 그 자신이 미혹된 것을 아는 사람은 크게 미혹된 것이 아니다. (p. 313)

 

Ü 이를 아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붓다가 6년 수행을 끝내고 자신의 지혜는 갠지스강 모래알에 지나진 않는다 했으면 뉴턴은 말년이 되어서야 자신의 지식이 해변의 모래에 지나지 않는 능력을 한탄했다.

 

문둥이는 밤중에 자기 자식을 낳고서 바로 불을 가져다 비추어 보면서 초조히 오직 그 애가 자기를 닮았을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p. 314)

 

Ü 이 엄정한 자기 성찰과 냉철한 자기 검열의 인간상에 존경할 따름이다. 이와 같이 사회와 국가와 문명은 비판의 시선으로 보아야 한다. 권력과 자본의 확대재생산은 자기 검열 없는 부끄러움의 자랑인 것이다. Shame on you!

 

13편 하늘의 도, 天道(천도)

 

□ 임금은 반드시 의식적인 행동을 하지 않음으로써 천하를 다스리고 백성들은 반드시 의식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천하를 위하여 쓰이는 것, 이것은 영원히 변치 않을 도인 것이다. (p. 326)

 

Ü 그래서 지금도 여태껏 오랜 동안 변하지 않고 있다. 그것이 나는 거북살스럽다.

 

□ 형체가 있으면 명칭이 있게 마련이다. 형체와 명칭은 옛 사람들에게도 있었지만 그것을 앞세웠던 것은 아니었다. (p. 331)

 

Ü 세상에서 도를 얻기 위하여 책을 소중히 여기지만 책은 말에 불과하다. 말이 소중한 것은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며 뜻이 소중한 것은 가리키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은 그 뜻이 가리키는 바를 전할 수가 없다. 도대체 눈으로 보아서 알 수 있는 것은 ()()이요 귀로 들어서 알 수 있는 것은 ()()일 뿐이다. (신영복, 강의, 장자 편에서 발췌)

 

□ 사사로움이 없다는 것이 바로 사사로움인 것입니다. 자연의 도를 따라 나아간다면 이미 목적에 달하였을 것입니다. (p. 336)

 

당신이 나를 소라고 불렀다면 나는 소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나를 말이라고 불렀다면 나는 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오. 진실로 사실이 그러한데도 다른 사람이 그에게 이름을 붙여 주는 것을 받지 않는다면 거듭 그 재앙을 당하게 될 것이오. (p. 339)

 

노자가 말하였다. 도란 것은 크기에 있어서는 끝이 없고 작기에 있어서는 없는 곳이 없으므로 만물에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p. 341)

 

□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하고 있으니 세상에서야 어찌 그것을 알 수가 있겠는가?

성인은 살아 계신 분입니까?

이미 돌아가신 분이지.

그렇다면 임금님께서 읽고 계신 것은 옛 사람의 찌꺼기이겠습니다. (p. 343)

 

□ 이어서) 옛날 사람과 그의 전할 수 없는 정신은 함께 죽어 버린 것. 수레바퀴 만드는 기술을 전수하는 것은 손의 감각과 마음에 호응하여 이루어지는 것. (p. 343)

 

14편 하늘의 운행, 天運(천운)

 

호랑이와 이리 같은 것이 어짊이오. 그 놈들도 애비와 새끼가 서로 친한데 어찌 어질지 않다고 하겠소? 천하를 모두 잊는 것은 쉽지만 천하로 하여금 나를 모두 잊게 하기는 어렵다. (p. 350)

 

□ 물 위를 여행하는 데에는 배를 사용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고 땅 위를 여행하는 데에는 수레를 사용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지금 주나라의 방식을 노나라에 행하려 한다는 것은 마치 육지 위에서 배를 밀고 가려는 것과 같습니다. (p. 357)

 

Ü 현대 경영의 벤치마킹 기법의 폐해다.

 

□ 어슬렁거린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참됨을 추구하는 노닒’ (p. 362)

 

샘물이 마르면 그곳 물고기들은 땅 위에 함께 모여 서로 물을 뿜어 주고 서로 침으로 적셔 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강물과 호수 속에서 서로를 잊고 지내는 것만 못한 것입니다. (p. 365)

 

Ü 자연이라는 강물과 호수를 놓아두고 세치 혀의 성인의 말이라는 소음에 우리는 목숨을 걸고 지키려 하고 있다. 장자가 맞다. 존재 너머를 본다면 조건 지어진 인간의 삶은 그리 참담할 필요가 없다

 

□ 나는 용이 어떻게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을 올라가는 지 알 수 없다. 오늘 나는 노자를 만났는데 그는 마치 용과 같은 존재였다. (p. 367)

 

Ü 사기의 노장신한 열전에 나온다. 공자와 노자의 조우 장면이 나온다.

 

친분 때문에 친하고 소원한 관계의 차별이 생겼다. 아기가 방긋방긋 웃어 어려서 죽는 일이 생겼다. 도적을 죽이는 것은 살인이 아닌 것으로 되었고 유가와 묵가들이 한꺼번에 생겨났다. 이름이 천하를 다스렸다고 하지만 사실은 더 말할 수 없이 어지럽혔던 것이오. (p. 368)

 

본성은 바뀌어질 수가 없고 천명도 변할 수가 없습니다. 시간은 멈출 수가 없고 도는 막히는 수가 없습니다. 진실로 도를 터득하기만 한다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없고 도를 잃으면 뜻대로 되는 것이 없습니다. (p. 372)

 

Ü 도를 터득한다면 시간을 지배할 수 있단다. 그래 도부터 터득해보자. 어서, 어서!

 

15편 뜻을 굳게 지님, 刻意(각의)

 

□ 편안하고 간단하여 담담하다면 근심 걱정이 끼여들 수가 없고 사악한 기운이 침입할 수 없다. (p. 376)

 

16편 본성을 닦음, 繕性(선성)

 

□ 무늬는 본질을 없어지게 하고 넓은 지식은 마음을 빠지게 하는 것이다. (p. 385)

 

□ 조그만 지식이란 덕을 손상시키는 것이며 작은 행동이란 도를 손상케 하는 것이다. 높은 벼슬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은 자기의 본성이나 운명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물건이 갑자기 와서 자기에게 붙은 것과 같다. 자기에게 붙은 것이지만 그것이 오는 것은 막을 수도 없고 그것이 떠나는 것을 붙들어 둘 수도 없는 것이다. (p. 388)

 

17편 가을 물, 秋水(추수)

 

□ 가을철이 되면 물이 불어난 모든 냇물이 황하로 흘러 든다. 그 흐름은 커서 양편 물가 언덕의 거리가 상대편에 있는 소나 말을 분별할 수 없을 정도다. 황하의 신은 천하의 아름다움이 모두 자기에게 갖추어져 있다고 생각하면서 흐름을 따라서 동쪽으로 가 북해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동쪽을 바라보았으나 물가가 보이지 않았다. 이에 황하의 신은 비로소 그의 얼굴을 돌려 북해의 신 약을 우러러보고 탄식하면서 말하였다.

속담에 백 가지 도리를 알고는 자기만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는 자가 있다고 하였는데 나 같은 사람을 두고 한 말인 것 같습니다.’ (p. 391)

 

Ü 자만과 겸손은 이리도 길항한다.

 

사람을 만물에 비겨 본다면 말의 몸에 난 한 개의 가는 터럭과 같지 않은가? 오제가 천자 자리를 서로 물려 준 것이나, 삼왕에 이르러 서로 다툰 것이나 어진 사람이 근심했던 것이나 일을 맡은 사람이 수고를 하는 것이나 모두가 이와 같은 작은 일이다. 백이는 왕위를 사양함으로 명성을 얻었고 공자는 여러 가지 가르침을 얘기하여 박학하다고 여겨지고 있다. 이들은 스스로 남보다 뛰어나다고 여기고 있었지만 당신이 조금 전까지 스스로 물 가운데에서는 뛰어나다고 생각하던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p. 393)

 

Ü 황하가 대지를 흐를 때는 자신이 최고의 아름다움이라 느꼈던 바 바다에 이르고서야 그것이 자만임을 깨달았다. 모든 권위에는 그 상위의 반대 권위가 있다고 했지만, 사람과 지식도 마찬가지다. 모든 존재는 그 너머의 존재를 깨닫지 못한다. 유한함을 어찌 깨부수겠는가.

 

□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무시하지 않고 큰 것이라 하더라도 대단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물건의 양이란 무궁하여 한정할 수 없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또 옛날과 현재를 한 가지 것으로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므로 오래 산다 하더라도 고민하지 않고 생명이 짧다 하더라도 더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시간이란 멈추지 않고 흐르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p. 395)

 

Ü 불변이란 변화의 탈시간화된 현상이고 변화란 불변의 시간화된 현상, 그러나 나는 다시 수렁으로 빠진다. 융은 말한다.

 

인간에게 가장 큰 제약은 자기 자신이다. 그것은나는 다만 그것에 불과하다!’는 체험 가운데 나타난다. 내가 자기 자신 안에서 아주 좁게 제약되어 있다는 의식만이 무의식의 무한성에 접속될 수 있다. 이러한 의식성에서 나는 나를 유한하면서도 영원하며 이것이면서도 저것으로써 경험한다. 내가 나를 개인적인 결함 속에서 궁극적으로 제약되어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로 알게 되면서 또한 무한한 것을 의식할 수 있는 가능성도 지닌다.’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메피스토의 입을 빌려 또 이렇게 말했다.

 

최후의 하찮고 허망한 순간을 이 가련한 자는 붙잡으려 하는구나.

내게는 억세게도 항거한 놈이지만, 세월 앞엔 별수없이 백발이 되어 모래 위에 누웠구나.

시계는 멈추었다. 

어째서 지나갔다는 거냐?

지나갔다는 것과 전혀 없다는 것은 완전히 같은 것이다. 영원한 창조란 도대체 무엇이냐?

창조된 것은 무 속으로 휩쓸려가게 마련이다.

지나가 버렸다 여기에 무슨 뜻이 있지?

그야말로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런데도 마치 무엇이 있었던 양 뱅뱅 맴돌고 있다. 나는 오히려 영원한 허무가 좋단 말이다.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보면 그 전체를 다 볼 수가 없고 큰 것에서 작은 것을 본다면 분명히 보이지 않는다. 말로써 논할 수 있는 것이란 물건으로서 큰 것이다. 뜻으로서 인지할 수 있는 것은 물건으로서 가는 것이다. 말로써 논할 수가 없고 뜻으로서 살펴 인지할 수 없는 것은 가늘고 크다는 것을 결정지을 수가 없는 것이다. (p. 397)

 

Ü 시선의 조정, 다시 생각하여 말의 터럭을 바라보는 미생물의 시선은 또 어떤가.

 

도를 터득한 사람은 남이 알아 주지 않으며 위대한 사람에게는 자기가 없다고 하였는데 자기의 분수를 한정하고 지내는 지극한 경지인 것이다. (p. 399)

 

Ü , 의 엄숙주의에서 벗어나라.

 

□ 도의 입장에서 본다면 물건에는 귀하고 천한 것이 없다. 물건 자체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의 귀하고 남은 천한 것이다. 세속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귀하고 천한 것은 자기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남이 정해 주는 것이다. 상대적인 관심에서 볼 때에 그것에 비하여 크다는 입장에서 말하면 만물에는 크지 않은 것이 없게 되며 그것에 비하여 작다는 입장에서 보면 만물에는 작지 않은 것이 없게 된다. (p. 400)

 

□ 묻노니 어째서 옳다는 것은 존중하고 그르다는 것은 무시하며 다스림은 존중하고 혼란은 무시하는가. 그것은 하늘과 땅의 이치와 만물의 진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하늘은 존중하면서 땅은 무시하고 음은 존중하면서 양은 무시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그것이 통용될 수 없는 것임은 분명한 일이다. 그런데도 그런 주장을 버리지 않고 내세우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가 아니면 거짓말쟁이인 것이다. (p. 402)

 

Ü 편견이다.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이란 없고 잠시도 바뀌지 않는 것이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을 하겠는가? 무엇을 하지 않겠는가? 그대로 스스로 변화하게 버려 두면 그뿐인 것이다. (p. 405)

 

□ 자연을 삼가 지켜 잃지 않는 것을 그의 진실로 되돌아가는 것이라 말한다. (p. 407)

 

□ 침은 내 뱉으면 큰 놈은 구슬 같고 작은 놈은 안개 같은데 크고 작은 것이 섞여 떨어지는 그 수는 이루 다 알 수도 없을 지경입니다. (p. 408)

 

Ü 침 뱉음을 묘사한 것은 또 처음 본다.

 

□ 살아서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며 살겠다 (p. 418)

 

Ü 장자는 일면 아킬레우스적이다.

아킬레우스는 삶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이다. 아주 열렬히 사랑한다. 다만 그는 현재를 사랑할 뿐이다. 지금의 감정과 지금의 움직임만 사랑한다. 오로지 거기에만 충실하다. 매 순간이 그에게는 삶이고 전부다. 살인도, 분노도, 눈물도, 사랑도, 연민도, 그는 모두 똑같이 사랑한다. 무슨 철학자들처럼 공평하게 거리를 두는 것도 아니라 자연처럼 모든 것을 끌어안는다. 고통도 기쁨만큼 즐겁다.’ 그런 아킬레우스가 누군가로부터 죽음의 운명을 들었다. 아킬레우스는 나에게 왜 죽음을 이야기하지?’

 

□ 피라미가 나와 유유히 헤엄치고 있군 물고기는 즐거울 거야

자네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가 즐거운 것을 아는가?

자네는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가? (p. 420)

 

18편 지극한 즐거움, 至樂(지락)

 

천하에는 지극한 즐거움이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자기 몸을 편히 해 주는 길이 있는 것일 것 없는 것일까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하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 무엇을 피하고 무엇에 몸담아야 하는가 무엇을 따라 나아가야 하고 무엇을 버리고 떠나야 하는가 무엇을 즐거워하고 무엇을 싫어해야 하는가? (p. 423)

 

열사들은 세상에서 훌륭하다고 일컬어지고 있지만 그의 몸을 편히 하지는 못한다. 나는 그들의 훌륭함이 정말로 훌륭한 것인지 훌륭하지 못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것을 훌륭하다고 하자니 그의 몸도 편치 않게 살고 있고 훌륭하지 않다고 하자니 남은 편히 잘 살도록 해 주고 싶다. 오자서는 임금과 다투다가 그의 몸을 잃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투지 않았다면 명성이 이룩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진실로 훌륭한 것이란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p. 424)

 

Ü 칭송 받고 추앙 받는 것이란 무엇인가. 내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면 그러한가. 내 입신과 양명을 꾀하면 그리 될 수 있는 것인가. 그리 되고 나면 추앙 받아 마땅한가. 추앙 받으면 나는 즐거운가.

 

□ 지극한 즐거움이란 즐거움을 초월하는 데 있고 지극한 명예란 명예를 초월하는 데 있다고 하는 것이다. (p. 425)

 

□ 만물이 번성하고 있지만 모두가 무위함으로써 불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은 무위하면서도 모든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으로 그 누가 무위할 수 있겠는가. (p. 426)

 

Ü 무위를 주창한 노자와 장자는 그 삶이 무위하였을까.

 

□ 장자의 처가 죽자 혜자가 조상하러 갔다. 장자는 그 때 두 다리를 뻗고 앉아 동이를 두드리면서 노래하고 있었다.

그가 태어나기 이전을 살펴보니 본시는 삶이 없었던 것이었고 삶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시 형체조차도 없었던 것이었으며 형체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시 기운조차도 없었던 것이었네. 흐리멍텅한 사이에 섞여 있었으나 그것이 변화하여 기운이 있게 되었고 기운이 변화하여 형제가 있게 되었고 형체가 변화하여 삶이 있게 되었던 것이네. 지금은 그가 또 변화하여 죽어간 것일세. (p. 427)

 

Ü 불변은 변화의 탈시간화, 변화는 불변의 시간화된 현상.

 

□ 육체를 다시 살려 내게 하여 당신의 뼈와 살과 살갗을 갖추게 하고서 당신의 부모 처자와 마을 사람들과 아는 사람들에게 돌려보내 주도록 한다면 당신은 그것을 바라겠소? (p. 431)

 

Ü 대답은 이러했다. 어찌 이 즐거움을 버리고 다시 산 사람의 수고로움으로 되돌아가겠소?

 

□ 이름은 실물을 근거로 하고 법도는 모두 본성에 어울리도록 설정하였다. 그렇게 하는 것을 조리에 통달하고 행복을 지속케 하는 방법이다. (p. 433)

 

Ü 생긴 대로 자신답게 사는 것, 행복을 지속하는 법

 

19편 삶의 진실에 통달함, 達生(달생)

 

□ 비록 할 만한 것이 못 되는데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은 육체를 보양하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p. 439)

 

Ü 그것을 초월하기는 인간의 몸을 받고 있는 상태로는 역부족이다.

 

□ 정신의 순수함이 극점에 이르면 본원으로 되돌아가서 하늘의 활동을 돕게 되는 것이다. (p. 440)

 

Ü 데르수의 삶을 측은하게 바라보는 문명인의 바탕 사유는 과연 무엇인가. 누가 측은하다 하는가. 그리 살지 못하는 문명인일까. 그 문명인의 시선으로 측은하다 생각되어지는 데르수 우잘라 인가?

 

□ 마음 쓰임이 헛갈리지 않고 순일되면 귀신에 가깝게 되는 법이라 했는데 그것은 저 꼽추 영감을 두고 한 말 같구나. (p. 445)

 

Ü 매미를 줍듯 담고 있던 노인

 

□ 헤엄을 잘 치는 사람이 쉽사리 배울 수 있다는 것은 물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p. 446)

 

Ü 그것과 태일을 이루는 것. 통달하는 경지다.

 

□ 안으로 들어가 내부만을 기르며 숨지 말 것이며 밖으로 나와 외부만을 기르며 드러내지 말 것이며 마른 나무처럼 중앙에 우뚝 서 있어야 한다. (p. 449)

 

발을 잊는 것은 신이 알맞기 때문이다. 허리를 잊는 것은 띠가 알맞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을 잊을 줄 아는 것은 마음이 알맞기 때문이다. (p. 461)

 

Ü 대상과 하나가 되어 대상이 내가 되고 내가 대상이 되는 지점. 그 기운이 엉겨 붙는 신묘한 지점. 일동만수의 경락.

 

20편 산속의 나무 山木(산목)

 

□ 어제 산의 나무는 쓸모가 없어서 천수를 다할 수 있었는데 오늘 이집의 거위는 쓸모가 없어서 죽었습니다. 선생께서는 장차 어디에 서겠습니까? 나는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의 중간에 처하겠다.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의 중간이란 도와 비슷하면서도 실은 참된 도가 아니기 때문에 화를 면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p. 467, 강의 재인용)

 

Ü dynamic equilibrium point

 

□ 그 구슬이란 이익 때문에 나와 맺어진 것이고 이 아이는 하늘에 의하여 나와 맺어진 것이오. 이익으로 맺어진 것이란 궁지에 몰리거나 환난을 당하거나 해를 보게 되면 서로 버려지게 마련이오. 하늘에 의하여 맺어진 것은 궁지에 몰리거나 환난을 당하거나 해를 보게 되면 서로 거두어 주어야만 하는 것이오. (p. 479)

 

우리가 벼슬이나 녹 같은 것을 취하는 것은 어째서일까? 새 중에서는 제비보다 지혜로운 것이 없다. 눈으로 보아서 처신하기 부적합한 곳이라면 되돌아 볼 새도 없이 달아난다. 비록 그의 먹이를 떨어뜨렸다 하더라도 그것을 버리고 달아나는 것이다. 제비는 그처럼 사람을 두려워하지만 사람들이 사는 집으로 들어와 집을 짓고 사는데 그것은 살 곳과 먹을 것이 있기 때문이다. (p. 485)

 

Ü 안 잡아 먹히면 다행인 곳에 굳이 들어와 산다. 연명 하려 산다.

 

□ 예쁜 여자는 스스로가 예쁘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나는 그가 예쁜 줄을 모르게 되었고 추하게 생긴 여자는 스스로 추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나는 그가 추한 줄을 모르게 되었습니다.

현명한 행동을 하되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버리기만 한다면 어디를 가나 사랑을 받게 되지 않겠느냐 (p. 490)

 

Ü 이게 참 어렵더라. 자신을 극복한다는 것. 세상에 세를 떨치는 것보다 힘든 일이다.

 

21편 문후의 스승 전자방, 田子方

 

□ 그 사람은 눈으로 보기만 하여도 도를 지니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으니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p. 496)

 

Ü 고수는 고수를 알아 보는 법

 

우리는 한 번 형체를 타고 난 이상 스스로를 멸망시키지 않고 끝장나는 대로 맡겨 두어야 하며 밖의 물건을 따라서 움직여야 한다. 변화는 낮이나 밤이나 쉬는 틈이 없으므로 그것이 끝나는 때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p. 498)

 

Ü 불변은 변화의 탈시간화, 변화는 불변의 시간화된 현상

 

□ 한 화공이 뒤늦게 왔는데 유유히 빨리 걷지 않고 명령을 받고도 읍하고 서는 일 없이 그대로 집으로 돌아갔다. 원군이 사람을 시켜 그를 살펴보게 하니 그는 옷을 벗고 벌거숭이 되어 두 발을 쭉 뻗고 앉아 있었다. 원군이 말하였다.

되었다. 그가 정말로 잘 그릴 사람이다.’ (p. 507)

 

Ü 이해 관계를 초월해야 위대한 일을 할 수 있고 모든 형식을 초월해야 사물의 핵심에 도달하여 충분한 기교가 발휘될 수 있다.

 

22편 지가 북쪽 땅에 노님, 知北遊(지북유)

 

□ 도를 닦는 사람은 쓸데 없는 일은 매일 같이 버려야 한다. 그것을 버리고 또 버림으로써 무위에 이르러야 한다. 무위하게 됨으로써 하지 않는 일이 없게 되는 것이다. (p. 519)

 

Ü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은 세상 모두를 다 가졌다는 것과 같다.

 

□ 고약하고 추한 것은 다시 변화하여 신기한 것이 되고 신기한 것은 다시 변화하여 고약하고 추한 것이 되는 것이다. (p. 520)

 

우주가 크다고 하지만 그런 속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가을의 짐승 터럭이 작다고 하지만 그것에 의하여 형체가 이루어진 것이다. 천하의 모든 것은 가라앉았다 떠올랐다 변화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그대로 있지 않는다. 이것을 근본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이것에 의하여 자연에 통달할 수가 있는 것이다. (p. 523)

 

Ü 변화, 우주의 종교다. 만유의 권위다. 변화는 곧 시간이다. 시간을 거스를 수 있는 자 없다. 변화를 막아 설 자도 없다.

 

□ 그것이 어디서부터 오는지 자취조차 없고 그것이 어디로 가는지는 한계도 없소. 드나드는 문도 없고 들어가 있는 방도 없으나 사방으로 통달하여 한없이 넓은 것이오. (p. 527)

 

Ü 그것은 지극한 ()

 

사람이 하늘과 땅 사이에 살고 있는 것은 마치 날랜 말이 좁은 틈새 앞을 지나가는 것처럼 순간적인 것에 불과하오. 만물은 자연의 변화를 따라서 모두가 생겨나고 자연의 변화에 의하여 모두가 없어지는 것이오. 자연의 변화에 의하여 생겨나기도 하고 또 그 변화에 의하여 죽기도 하는 것이오. 그것을 생물들은 서러워하고 사람들은 슬퍼하고 있소.

 

이론을 펴는 것은 침묵을 지키는 것만 못한 것이오. 도란 들어서 알 수 있는 것이 못 되며 거기에 대하여 듣는 것은 귀를 막고 들지 않는 것만 못한 것이오. 이렇게 하여 도에 합치되는 것을 위대한 터득을 했다고 말하는 것이오. (p. 530~531)

 

Ü 사람이 하늘과 땅 사이에 살고 있는 것은 마치 날랜 말이 좁은 틈새 앞을 지나가는 것처럼 순간적인 것에 불과하오. 그것을 생물들은 서러워하고 사람들은 슬퍼하고 있소. 슬퍼서장자의 말을 반복한다. , 이렇게 눈물 겨울 수가 있는가.

 

□ 지극하도다. 그 누가 이러한 경지에 이를 수가 있겠는가? 나는 무의 존재는 인식할 수 있었지만 무도 없는 경지는 인식할 수가 없었다. 무와 유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야 어떻게 이런 경지에 이를 수가 있겠는가? (p. 540)

 

Ü 장자는 매력적이다. 인간을 자연으로 선동하면서 존재의 가치를 떨어뜨렸다가 높였다가 자유자재로 요리한 뒤 결국에는 미물로 만들어 놓는다.

 

물건을 물건으로 존재케 한 것은 물건이 아닌 도이니 물건이 생겨난 것이 다른 물건에 앞설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물건은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물건의 존재는 끝이 없는 것이다. 성인은 사람들을 사랑함에 있어 끝내 끝이 없는데 역시 여기에서 법도를 취할 것이다. (p. 543)

 

Ü , 이 무슨 말인가. 사랑하지만 끝내 알 수 없는 것.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태어나 살고 죽음을 사랑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는 것. 물건, 만유, 생명의 존재가 도로서 완성되어짐을 알고 그 도를 사랑하는 경지. , 어렵다.

 

장자가 말하는 물건의 도는 서양 철학이 말하는 존재의 본질과 맞닿아 있지만 정확히 같지는 않다. 서양철학에서는 모든 존재들은 존재들과 본질로 구성되며 눈에 보이는 것은 현실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본질이 현실 이데아라고 했다. 빨강의 이데아를 토대로 세상에서는 빨강의 본질을 가진 물체들이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雜篇(잡편)

 

23편 노자의 제자 경상초, 庚桑楚

 

배를 삼킬 만한 큰 물고기라 하더라도 펄떡 뛰어 물 밖으로 나오면 개미들이라도 그를 괴롭힐 수가 있는 것이다. (p. 552)

 

Ü 근간은 그래서 중요하다. 삶의 근간, 자신의 가치, 자신의 주관, 인생관은 이래서 중요하다. 타인의 삶을 살 수 없는 것이다. 수 많은 개미의 괴롭힘을 어찌 감당하려 타인의 삶을 부러워하고 자신의 삶을 부끄러워하는가. 부끄러울 일 없다.

 

□ 아이와 같을 수 있어야 한다. 아이란 움직이지만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고 걷지만 자기가 가는 곳을 알지 못한다. 몸은 마른 나무의 가지와 같고 마음은 죽은 재와 같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재난도 닥칠 수가 없고 행복도 찾아올 수가 없다. 재난도 행복도 있지 않은데 어찌 사람의 재해가 있을 수 있겠소? (p. 561)

 

Ü 還童(환동),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지극의 경지다.

 

□ 만물이 태어나지만 그 근본은 없는 것이며 이승을 떠나는 것도 들어가는 구멍이 있는 것이 아니다. 존재는 하고 있지만 차지하는 곳은 없고 영원히 존재하기는 하지만 시작과 끝이 없는 것이다. 태어나기는 하지만 들어갈 구멍은 없기 때문에 존재가 있는 것이다. 존재는 하고 있지만 차지하는 곳은 없다는 것은 상하 사방의 공간이 한없이 넓음을 뜻한다. 영원히 존재하되 시작과 끝이 없다는 것은 예부터 지금까지 계속되는 시간을 뜻한다. (p. 567)

 

Ü 다시 눈물을 닦는다.

 

□ 존재가 없는 것을 머리로 삼고 삶을 몽둥이로 삼고 죽음을 궁둥이로 삼는 것이다. (p. 569)

 

천하로써 새장을 삼는다면 새들은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게 될 것이다. (p. 575)

 

24편 세상으로부터 숨어 사는 徐無鬼(서무귀)

 

□ 높은 데에 올라간다고 해서 더 길게 자랄 수 없고 낮은 데에 있다고 해서 키가 짧아질 수 없습니다. (p. 583)

 

□ 아이는 거절하였으나 황제가 거듭 묻자 말하였다.

천하를 다스리는 일이 말을 먹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역시 말의 본성을 해치는 것들을 제거해 주기만 하면 그뿐일 것입니다. (p. 586)

 

Ü 아이의 시선, 즉 환동의 경지가 무위다.

 

□ 모두가 시간의 변화를 따라 이끌리는 자들이며 사물의 변화에 얽매이는 자들이다. 자기의 육체와 본성을 고달프게 하고 밖의 만물에 대하여 몰두하며 평생토록 본성으로 되돌아가지 않는 자들이니 슬픈지고! (p. 589)

 

Ü 시간의 변화에 이끌리지 않을 수 있는가.

 

□ 부득이하다면 습붕이 괜찮을 것입니다. (p. 595)

 

Ü 관중 이오의 혓바닥으로 삼았다는 그 습붕이다.

 

나는 스스로의 본성을 잃고 있는 사람을 슬퍼한다. 나는 또 남을 슬퍼하는 사람도 슬퍼한다. 나는 또 남을 슬퍼하는 것을 슬퍼하는 사람도 슬퍼한다. 그래서 뒤에 모든 마음을 버리니 날로 모든 생각과 멀어져 이처럼 된 것이다. (p. 599)

 

Ü ()()의 경지

 

□ 그러므로 바다가 동쪽으로 흘러드는 모든 강물을 받아들이고도 변함이 없는 것은 광대함의 극치인 것입니다. (p. 600)

 

Ü 받아들여 바다, 바닥이라 바다

 

□ 개는 잘 짓는다고 좋은 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말을 잘 한다고 현명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p. 601)

 

Ü 둘러보면 모든 것을 아는 체 하고 아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윤똑똑이들이 꽤 많다.

 

양고기는 개미를 좋아하지 않지만 개미들은 양고기를 좋아하여 모여드는데 양고기가 노리기 때문이다. 순은 어짊과 의로움이라는 노린내 나는 행동을 하여 백성들은 그를 좋아한다. (p. 608)

 

Ü 어짊과 의로움은 부자유다. 부자유는 무위가 아니다.

 

□ 본시 물이 흙을 적셔 줌에는 빈틈이 없고 그림자가 사람을 따르는 것에도 빈틈이 없고 물건과 물건의 관계에도 빈틈이 없는 것이다. (p. 610)

 

□ 본성으로부터 떠나서 위태로움이 이루어지면 고칠 겨를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재화는 자라서 더욱 불어나기만 하는 것이다. (p. 611)

 

Ü 위태로움이 이루어져 재화가 불어나고 그것을 유지하려는 경영학이라는 학문은 내가 배운 고전에 정확히 반하는 학문이 아닌가.

 

25편 임금을 만나고자 하는 칙양, 則陽

 

□ 날이 없으면 해도 없고 안이 없으면 겉도 없다 (p. 621)

 

Ü 이것은 분별이 아닌가. 날도 없고 해도 없다. 안도 없고 겉도 없다. 분별 없음 자체가 분별이다.

 

□ 백성 속에 자신을 묻고 밭 언덕 가에 자신을 숨기고 있어서 그의 명성은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그의 뜻은 한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의 입은 비록 말하고 있으나 그의 마음은 말을 한 일이 없다. (p. 626)

 

□ 만물은 생존하고 있지만 그 근원을 볼 수는 없다. 만물은 사멸되고 있지만 사멸되어 가는 문은 볼 수가 없다. 사람들은 모두 그의 지혜로써 알고 있는 사실을 존중한다. 그러나 그의 지혜로써는 알지 못하는 것에 의지하여야만 지혜롭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p. 632)

 

Ü 지혜라 생각하는 것들이 대지혜의 발목을 잡는 일이다.

 

언덕과 산도 낮은 흙들이 쌓인 것이 모여 높아진 것이며 강물도 시냇물이 합쳐서 커진 것이다. 그처럼 위대한 사람이란 모든 개인을 합쳐서 공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밖에서 어떤 의견이 제시되면 자기의 다른 생각이 있다 하더라도 자기 생각에만 집착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가 제시한 의견이 올바르다 하더라도 남의 의견을 거부하지 않는다.

사철은 각기 기후가 다르지만 하늘은 한편에만 치우치지 않기 때문에 한 해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p. 636) 

 

Ü 역사와 사회에 빚지지 않은 없다.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미분 개념은 대륙을 달리하여 동시대에 나왔다. 교류가 없던 두 학자의 같은 개념의 발견은 역사와 사회가 이미 그 가치를 만들어 내도록 내면화하고 있었고 그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표출될 때를 기다린 것이다.

 

□ 도라는 것은 그것들 전체에 공정히 작용하는 것이다. 그것의 위대함을 근거로 하여 그것을 도라고 부른다면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도라는 이름을 지니게 되면 곧 다른 물건과 상대적인 것이 될 것이다. 만약 이와 같이 논한다면 비유를 들면 여론과 도는 개와 말이나 같은 것이 되어 도의 진실한 작용에는 멀리 미치지 못하는 것이 된다. (p. 638)

 

물건이 생겨나기 전에 생겨나지 못하도록 막을 수도 없는 것이며 이미 죽어 버린 것을 죽지 못하게 막을 수도 없는 일이다. 죽음과 삶은 우리로부터 멀리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 원리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주재자가 있다거나 주재자가 없다는 설은 결국 억측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내가 보건대 종말은 오는 데가 한정이 없는 것이다. 끝도 없고 한정도 없으니 그것을 무로서 표현할 때에 비로소 물건의 이치와 합치되게 되는 것이다. 주재자가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것은 이론의 출발점으로서 만물과 더불어 영원히 부침할 것이다. (p. 641)

 

Ü 신의 존재 증명은 불필요하다. 영원히 반복될 것이므로, 영원히 답을 얻을 수 없으므로.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필요할 지도 모르겠다.

 

□ 도란 물건의 극치이므로 말이나 침묵으로는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말도 아니고 침묵도 아닌 경지에서 그러한 도의 극치는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p. 641)

 

26편 우리 밖의 일과 물건, 外物(외물)

 

붕어야 너는 무얼 하고 있는 거냐?

저는 동해의 물결 속에 노닐던 놈입니다. 선생께서 한 말이나 몇 되박의 물이 있거든 제게 부어 살려 주십시오.

그러지, 내 남쪽으로 가서 오나라와 월나라의 임금을 설복시켜 서강의 물을 끌어다가 너를 마중하도록 하겠다. 괜찮겠느냐?

저는 제가 늘 필요한 물을 잃고 있어서 당장 몸 둘 곳이 없는 것입니다. 저는 한 말이나 몇 되박의 물만 있으면 사는 것입니다. 선생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하다가는 차라리 저를 건어물전에 가서 찾는 편이 옳게 될 겁니다. (p. 647

 

Ü 見蚊拔劍(견문발검)이다.

 

□ 신령스런 거북의 능력은 원군의 꿈에 나타날 줄은 알면서도 여저의 그물은 피하지 못하였다. 그의 지혜는 일흔두 번이나 구멍을 뚫으며 점을 쳐서 들어맞지 않는 게 없는 정도이면서도 자기 내장을 도려내는 환난은 피하지 못하였다. (p. 654)

 

Ü 유용의 무용함이다.

 

□ 혜자가 장자에게 말하였다.

자네의 말은 쓸데가 없네

장자왈 쓸데가 없음을 알아야만 비로소 쓸 곳을 얘기할 수가 있는 것일세. 땅은 넓고 크기 짝이 없지만 사람들이 걸을 때 쓰는 것은 발로 밟는 부분뿐일세. 그렇다고 발을 재어 가지고 그 밖의 땅은 땅 속 황천에 이르기까지 깎아내려 버린다면 사람들이 그대로 땅을 쓸 수가 있겠는가?

혜자왈 쓸 수 없지.

장자왈 그렇다면 쓸데없는 것의 쓰임도 잘 알게 되었을 것일세. (p. 656)

 

Ü 무용이 있어야 유용이 있고 유한이 있어 무한을 가늠할 수 있는 것이다.

 

□ 하늘은 늘 뚫리게 하여 낮이고 밤이고 변함이 없다. 사람들 자신이 자기의 구멍을 일부러 막고 있는 것이다. (p. 659)

 

Ü 결국은 나, 자신의 문제로 돌아간다.

 

□ 큰 숲 속이나 산 속 같은 곳이 사람들에게 좋다고 생각되는 것은 사람의 정신이 정욕을 견뎌 내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 (p. 659)

 

Ü 그 만큼 그곳의 기운이 강하다는 말이겠다.

 

□ 통발이란 것은 물고기를 잡는 기구이지만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을 잊게 된다. 올가미란 것은 토끼를 잡는 기구이지만 토끼를 잡고 나면 올가미를 잊게 된다. 말이란 것은 뜻을 표현하는 기구이지만 뜻을 표현하고 나면 말을 잊게 된다. 우리는 어찌하면 말을 잊은 사람들과 더불어 얘기할 수 있게 되겠는가? (p. 661)

 

27편 다른 일에 빗대어 한 말, 寓言(우언)

 

□ 친아버지는 그의 아들의 중매를 설 수가 없다. 친아버지가 그의 아들을 칭찬하는 것은 효과가 그의 아버지 아닌 다른 사람의 칭찬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p. 664)

 

□ 죽으면 어디로 가는 걸까? 어떻게 가는 곳이 없을 수가 있는가?

하늘에는 천체 운행의 법도가 있고 땅에는 평평하고 험한 변화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디에서 생사의 문제를 추궁할 것인가? 생명이 끝나는 곳을 알 수가 없는 것이라면 어찌하여 천명이 없다고 하겠는가? 물건과 정신이 서로 호응하는 것이 있다면 어찌하여 귀신이 없다고 하겠는가? 서로 호응하는 것이 없다면 어찌하여 귀신이 있다고 하겠는가? (p. 670)

 

Ü 귀신이든 뭐든 신은 존재하는가

 

그것들이 움직이면 나도 따라서 움직인다. 움직이는 것에 대하여 어찌하여 나에게 묻는가? (p. 672)

 

Ü 그림자의 말

 

28편 임금 자리를 물려줌

 

□ 진실한 도로써 자기 몸을 다스리고 그 나머지로써 국가를 돌보고 그 찌꺼기로써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다. (p. 685)

 

□ 듣건대 재물이 없는 것은 가난하다 하고 배우고도 행하지 못하는 것을 고생이라 한다 하였소. (p. 691)

 

□ 공자가 안회에게 말하였다.

안회야, 집안이 가난하고 신분도 천한데 어찌하여 벼슬을 하지 않느냐?

벼슬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게는 성곽 밖에 밭 오십 묘가 있으니 죽을 공급하기에 충분합니다.

훌륭하다. 그대의 뜻이여! 내가 듣건대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이익 때문에 스스로를 해치지 않고 자득할 줄 아는 사람은 이익을 잃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속마음의 수행이 되어 있는 사람은 지위가 없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p. 694)

 

Ü 권위에 대한 두려움은 자기 수행이 부족한 사람이다.

 

삶을 소중히 하면 이익이 가볍게 느껴집니다. (p. 695)

 

Ü 재화로 인해 돈으로 인해 관계가 깨어지고 영혼이 매 마른다.

 

29편 강도의 괴수 도척

 

□ 장자가 도척에게 도적질에도 도가 있냐는 질문을 한다.

도척은감추어진 것을 알아내는 것이 ()입니다. 남보다 먼저 들어가는 것이 ()입니다. 늦게 나오는 것이 ()입니다. 도둑질해도 되는가 안 되는가를 판단하는 것이 지입니다. 도둑질한 물건을 고르게 나누는 것이 인입니다. (p. 712, 강의 재인용)

 

□ 하늘과 땅은 무궁하지만 사람이란 언젠가는 죽게 마련이다. 일정한 한계가 있는 몸을 무궁한 공간에 기탁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의 덧없음은 준마가 좁은 틈바구니 사이를 달려 지나가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p. 720)

 

Ü 더 이상 빠를 수 있겠는가. 인생이여, 나는 도대체 누구란 말이냐!

 

□ 수치를 모르는 자가 부자가 되고 말이 많은 자가 출세합니다. 명예라는 관점에서 보든가. 이익으로 계산하든가 말 많은 것이 가장 좋은 것이 됩니다. (p. 723)

 

□ 지금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기와 동시에 살고 있고 같은 고장에서 생활하고 있는데도 나 같은 사람을 세속을 초월한 선비라 생각한다. (p. 729)

 

□ 부란 사람에 대하여 이롭지 않은 점이란 없다. 부는 어떤 아름다움도 이룰 수 있고 어떤 권세도 다 추구할 수 있으므로 이것은 지극한 사람도 미칠 수가 없는 일이요, 성인도 따라갈 수가 없는 일이다. (p. 731)

 

□ 평범한 것이 행복이 되면 남음이 있으면 해가 된다는 것은 모든 사물이 다 그러한데 재물에 있어서는 더욱 심하다. (p. 733)

 

부를 바라고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마음에 담을 둘러친 것처럼 장애가 생기지만 그것을 피할 줄을 모르고 그대로 정력을 사용하기만 하니 이것은 치욕이라고 할 만한 일이다. (p. 734)

 

31편 고기잡이, 漁父(어부)

 

□ 지금 선생은 위로는 임금이나 재상의 권세도 없고 아래로는 대신이나 관리의 벼슬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멋대로 예의와 음악을 꾸미고 인륜을 정하여 여러 백성들을 교화하려 하고 있으니 너무나 쓸데없이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p. 751)

 

□ 자기만 아는 지식을 가지고 일을 멋대로 하며 남의 것을 침범하여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것을 탐욕스런 짓이라 합니다. (p. 752)

 

발을 더욱 자주 놀릴수록 발자국은 더욱 많아졌고 빨리 뛰면 뛸수록 그림자는 그의 몸을 떠나지 않았다 합니다. (p. 754)

 

□ 진실함이란 정성의 지극함에 있습니다. 진실로 슬픈 사람은 소리를 내 울지 않아도 슬프게 느껴집니다. (p. 756)

 

32편 도가의 계승자 열어구 列禦寇

 

□ 도를 알기는 쉽지만 그것을 말하지 않기는 어렵다.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 것이 자연으로 나아가는 방법이다. 알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인위로 나아가는 근거가 된다. (p. 768)

 

장사꾼은 하늘의 은택을 얘기할 자격이 없다. 비록 일 때문에 하늘의 은택에 대하여 관여한다 하더라도 정신은 하늘의 은택과 함께 하지 않는 것이다. (p. 774)

 

Ü 장사치는 크든 작든 장사치일 뿐이다. 삶을 소중히 하면 이익을 가벼이 여겨야 하거늘 이익으로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번거로운 일을 시키고서 그의 능력을 살피고 갑자기 질문함으로써 그의 지혜를 살피는 것이다. 급작스럽게 그와 약속을 함으로써 그의 신용을 살피고 재물을 그에게 맡겨 봄으로써 그의 어짊을 살피는 것이다. (p. 776)

 

Ü 지혜와, 신용 그리고 어짊을 판별하는 방법

 

□ 아름답고, 멋진 수염이 나고 키가 크고 몸집이 크고 힘이 세고 멋이 있고 용기 있고 과감한 여덟 가지가 모두 남보다 뛰어나면 이것 때문에 궁해지는 것이다. (p. 779)

 

□ 나는 하늘과 땅을 관과 겉관으로 삼고 해와 달을 한 쌍의 구슬 장식으로 삼고 별자리를 진주와 옥 장식으로 삼고 만물을 부장품으로 삼으려 하니 나의 장구는 이미 다 갖추어진 것이 아닌가? 여기에 무엇을 더 보태겠느냐? (p. 782)

 

Ü 다시 스케일이 나온다. 장자여

 

□ 공평치 못한 척도로써 공평하게 하려 한다면 공평한 것조차도 공평하지 않게 된다. 올바로 감응되지 않은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사물에 감응하려 하면 올바로 감응될 것조차도 제대로 감응치 않게 된다. (p. 783)

 

Ü 재벌과 회사원의 교통 법규 위반에 의한 법칙금이 같은 나라가 공평한 나라인가?

 

33편 천하의 사상가들

 

자기 생각에 따라 물건을 선택하게 되면 모든 물건에 공평할 수 없고 말로 가르쳐 가지고는 도를 다 표현할 수는 없다. 도는 모든 것을 남김없이 포용하는 것이다. (p. 800)

 

안다는 것은 실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널리 알려고 하면 결국은 지식을 손상시키게 되는 것이다. (p. 801)

 

Ü 겸손, 좀 안다는 사람은 모두 갖추어야 할 제일의 덕목이다.

 

□ 지각이 없는 물건과 같이 되려고 노력할 따름이다. 현인이나 성인과 같은 지혜도 쓸 필요가 없다. 흙덩이는 지각이 없어 오히려 도를 잃지 않는 것이다. (p. 802)

 

□ 그는 절대로 남보다 앞서지 않고 언제나 남을 뒤따랐다. (p. 805)

 

□ 굳은 것은 깨어지게 되고 예리한 것은 꺾여지게 된다. (p. 806)

 

불은 뜨겁지 않다(뜨거운 것은 사람의 감각이다). 산에도 입이 있다 (산울림이 나오니까) 수레바퀴는 땅 위를 밟지 않는다 (언제나 극히 일부만이 닿아 있다) 눈은 물건을 보지 못한다 (빛이 없으면 안 되니까) (p. 812)

 

□ 하늘과 땅만이 내 변론보다 위대하다.

 

3. ‘여전히 꿈 속(내가 저자라면)

장자를 읽었지만 삶은 암전이 되었다. 이제껏 많은 고전을 접하며 생에 대하여 조금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장자를 읽고 난 후 삶은 다시 어둠으로 휩싸였다. 장자는 의로움과 어짊을 땅에 패대기 친 유일한 사람이다. 나는 그것에 적극 동조하였다. 자유로운 사람, 구애 받지 않는 인간의 덕목은 덕목이 없는 것이지 않겠는가. 현실 회피의 비난과 의도적 비켜가기 라는 비아냥도 있지만 장자를 깊이 읽어 본 다음이라면 이 사람, 장주는 현실에 정면돌파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처음에 나오는 곤이라는 큰 물고기와 붕새라는 거대한 새는 사실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처음부터 시작하여 독자의 시선을 흐린 뒤 지금까지의 의도된 모든 사상과 인간을 억압하고 있던 덕목들을 뒤엎는다. 현실 전복을 우회하지만 사회 시스템 변혁을 정확히 돌아가지 않고 직설한다.

 

그는 인간의 시간과 자연의 시간을 번갈아 가며 이야기하고는 인간은 자연을 닮아 살아갈 때에만 진정한 자유를 쟁취할 수 있다 한다. 그는 부에 대하여 지극히 적대적이었으며 아울러 권력에 대해서는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며 멀리하였다. 죽음을 축제로 전환하고 태어남에 냉정하고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목석의 시선을 유지한다. 구만리 장공에서 바라보면 나비와 자신은 둘이 아니라 모두 같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1편 소요유에서 33편 천하 편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끊이지 않았다. 삶의 본질은 무엇이고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의문이 쉬지 않고 튀어나왔다. 장자는 답을 주는 책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태어나 죽기까지 반드시 물어야 하는 핵심적인 질문이 총 망라 되어 있다. 이 질문으로 세상을 살아가라 하는 것이다. 질문 없는 삶이 곧 어두운 삶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유한의 인간, 피와 살이 있는 유한의 인간 앞에서 질문의 힘은 막강하다. 높은 차원의 질문이 거듭되면 신인으로 나아갈 수 있다.

 

장자는 자기가 늘려놓은 질문에 자신의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자신도 인간이기에 자기가 설정해 놓은 지인, 천인, 신인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아니 어쩌면 억겁의 시간이 지나더라도 인간, 만유는 단 한발자국이라도 그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며 또 다른 존재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몸은 비록 그리 될 지라도 장자의 시선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바다 깊은 곳으로 빠져들었다가 하늘 높이 구만리 장공을 떠돌고 다시 인간의 내면 속 깊은 곳의 추악함을 끄집어 낼 만큼 빠져든다. 마이크로와 매크로를 넘나드는 그의 시선은 이미 인간의 시선을 넘어 섰다. 나는 그의 시선이 부럽고 그의 시선을 따르고 싶다.

 

원문에 대한 번역은 탁월하다. 원문에 대한 해석은 참조할 뿐, 애써 담으려 하지는 않았다. 내 시선과 장자의 시선이 맞닿은 곳에서 늘 자리하고 싶었다.

IP *.51.145.193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