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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17일 10시 21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장자 (BC369~BC286)

 

이름은 주()이며 전국시대 송나라 몽 사람. 사상가이며 철학자. 노자와 열자 사상을 이어받아 도가의 대표학자로노장(老莊)’이라 병칭되기도 함. 그에 대한 이야기는 사마천 <사기>노장신한열전(老莊申韓列傳)에 실려있다.

 

<사기>에 의하면 양()혜왕(BC369~BC335재위) () 선왕(宣王)(BC356~BC320재위)과 동시대 인물로 들여다보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로 박학함. 저서는 10여만언()에 이름. 노자에 기초를 두었고 유가와 묵가를 맹렬하게 배척하였으며 당시 석학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은 그의 공격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고 함.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장자는 맹자BC372~BC298)와 거의 동시대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맹자는 장자를 거론한 곳이 없고, 장자 역시 맹자에 대하여 일언반구도 언급한 곳이 없다. 이에 대하여 주자는 맹자는 대량(지금의 하남)이남으로 내려가 본적이 없고 장자는 남쪽 자신의 활동 범위를 벗어난 적이 없어 서로 모르고 살았을 것이라고 함.

 

<장자>의 내용은 내편, 외편, 잡편으로 나누어져 있고 총 33 241장으로 편성되어있음. 그 중 내편은 도의 깊은 이치나 근본 개념, 즉 이본理本을 주제로 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리고 외편은 사적을 위주로 한 것이며 잡편은 내외편의 내용, 즉 이사理事을 다시 풀어 밝힌 것이다. 편명은 각 편의 주제를 포괄하여 편명으로 삼은 것으로 보고 있음. 제자백가의 많은 책 중에서도 가장 이채롭고 문학적 상상력의 보고라고 일컬어진다. 장자를 읽을때는 논리적인 철학책이 아니라 순간의 통찰로 봐야하는 문학책임을 말해준다. 읽는 이의 지혜와 상황에 따라 다양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책이다. 장자 내편의 저자로 알려진 장주는 범상치 않은 인간임을 말해주는 에피소드가 있지만 그중 단연 으뜸은 스승의 장례식을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하는 말이 압권이다. 열어구편의 내 몸은 까마귀와 솔개의 먹이 내용을 보면서 스승이나 부모가 이렇게 장례를 지내라고 하면 그를 따를 자가 한 명이라도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참조 : 장자 임동석역 동서문화사

 

나의 의견

 

노자에 기초를 두었으나 스승을 넘어선 통찰이 보이는 사람이 장주이다. 유가와 묵가를 배척하고 당시의 석학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그의 공격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하니 흥미로운 인물임에 틀림없다. 노자의 사상을 한마디로 표현다한다면

도생만물道生万物(도가 만물을 낳는다, 즉 도를 찾아야 한다)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도를 찾아야 한다는 노자의 생각에서

장자는 도행지이성道行之而成(도는 다녀야 만들어진다. 이전에 없던 도가 내가 행함으로써 만들어진다)로 이야기한다.

존재하는 것을 찾아야하는 노자의 사상과 없음이 나로 인하여 생긴다는 장자의 사상은 시작은 같았으나 한발 더 나아가는 사상으로 다가온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갖출 수 있는 통찰은 개개인이 다르다. 나고 자란 환경에 따라 살아가는 시대에 따라 당장 오늘 내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니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나 장자의 책 속에 이야기들이 작은 깨달음을 전달해준다. 물론 나의 그릇이 큰 깨달음을 받을 만한 사이즈가 못됨이니 시간이 흐르고 나서 다시 접하면 다른 통찰이 전해오겠지 싶다. 유가사상의 답답함을 깨뜨려주는 속시원 함도 있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

 

소요유

 

소요(逍遙)란 유유자득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첩운연면어이다. 따라서 소요유란 그 어떤 것에도 속박됨이 없이 자유롭게 노닒을 뜻한다. 장자 철학의 가장 핵심이 되는 것으로 생동감과 정신 세계의 무한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현실을 초탈하고 자연에 순응하여 인간 사회의 일체 제도나 작용을 거부한 채 우주와 혼연일체가 되는 경지를 설정한 것이다

 

31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하고, 수명이 짧은 것은 수명이 긴 것에 미치지 못한다. 하루살이는 새벽과 밤을 모르고 쓰르라미는 봄과 가을을 모른다. 이것들은 수명이 짧은 것들이다.

 

박이 너무 커서 쓸데가 없습니다.

 

43 손을 트지 않게 하기는 똑같지만 어떤 이로서는 봉지를 받고, 어떤이는 솜이나 빨게 된 이유는 그것을 쓰는 방법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대가 다섯 섬 들이의 박을 가지고 있다면 어찌 그것을 큰 술통 모양의 배로 만들어 강이나 호수에 띄울 생각은 하지 아니하고 그것이 펑퍼짐하여 아무것도 담을 수 없다는 걱정만 하고 있습니까? 선생은 역시 앞뒤가 꽉 막힌 마음을 가지고 있구려!

 

제물론(齊物論)

 

제물론은 만물과 제론을 합친 말이다. 즉 천하의 모든 만물은 모두가 하나의 뿌리로 돌아가면 평등하며 똑 같은 것이며, 이를 두고 사람들이 어떤 이론을 펴거나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도 실제 그 뿌리로 돌아가면 역시 하나로 똑같다는 뜻이다. 우주의 시간도 장단이 없으며 공간도 광협이 없어 시작도 끝도 없다고 여기고 있다.

 

52 큰 지혜를 가진 사람은 너그럽고 여유 있지만, 작은 지혜를 가진 자는 매사에 세밀하고 꾀죄죄하다. 큰 말은 담담하나 하찮은 말은 수다스럽다. 그들은 잠이 들면 혼백이 꿈을 꾸고 깨어나면 육신이 개운하다. 외물과 접촉하여 교섭하느라 마음은 날마다 투쟁을 한다. 그 가운데 마음이 바쁜 사람도 있고 우울한 사람도 있고, 답답한 사람도 있는 것이다. 작은 두려움은 사람을 놀라게 하지만 큰 두려움은 오히려 여유만만하게 한다. 사람들이 시비를 가릴 때에는 마치 쇠뇌를 떠난 화살처럼 빠르게 행동한다. 그들이 자기의 입장을 끝까지 고수할 때는 마치 신에게 맹세하는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날로 약해질 때에는 가을과 겨울에 초목이 시들 듯 쇠잔해진다. 그들이 일단 그 가운데 빠져들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게 된다. 그들이 늙고 쇠락하게 되는 것은 욕망에 억눌려 앞뒤가 막히기 때문이다. 죽음이 가까이 이른 사람의 마음은 다시 살려내기 어렵다.

 

57 사물은 저것 아닌 것이 없고 또 마찬가지로 이것 아닌 것이 없다. 스스로 저편의 입장에서 볼 수 없을 때에는 자신의 입자에서 보면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것은 이것으로부터 나오고 이것 역시 저것으로부터 비롯된다”:고 하는 것이니 이는 곧 저것과 이것이 함께 생겨난다는 논리이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삶이 있으면 곧 죽음이 있게 되고, 죽음이 있으면 곧 삶이 있게 된다. 또 가함이 있으면 불가함이 있고 불가함이 있으면 가함이 있게 된다. 옮음으로 인하여 그르다는 것이 나오고 그르다는 것으로 인하여 올하는 것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 까닭으로 성인은 어디에도 말미암은 바가 없이 그저 자연의 본성을 관조할 뿐이니 역시 여기에 근거를 둘 뿐이다.

 

59 천지는 하나의 손가락이요, 만물은 하나의 말이다. 긍정할 수 있는 것은 긍정할 이유가 있고, 부정할 수 있는 것은 부정의 이유가 있다. 도라는 것은 그것이 운행됨으로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사물은 그렇게 일컬어지기에 그렇게 된다. 스스로 그렇게 있는 것도 가하고 스스로 그렇게 있는 것이 불가할 수도 있으며, 스스로 그렇게 되는 것이 그럴 수도 있고 스스로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그렇게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어찌하여 그렇지 아니한가? 그렇지 않기에 그렇지 않은 것이다. 어찌하여 가한가? 그것이 가하기 때문에 가한 것이다. 어찌하여 불가한가? 그것이 불가하기 때문에 불가한 것이다. 사물에는 고유하게 그렇게 되는 까닭이 본래부터 내재해 있으며, 사물에는 그렇게 되는 가한 고유의 가함이 역시 내재해있다. 그렇게 되지 않는 사물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렇게 되는 가능성이 내재해 있지 않은 사물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작은 풀줄기와 큰 기둥, 악창을 앓는 자와 서시, 그리고 일체의 희귀하고 괴이한 사건들이란 모두가 도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로 관통해 있는 것이다. 분리란 다른 입장에서 보면 합성이며, 그 합성 역시 다른 편에서 보면 파괴가 된다. 무릇 모든 사물에는 근본적으로 합성도 파괴도 없이 다시 하나로 통하는 것이다.

 

65 춘추(春秋)에는 세상을 다스리는 데 대한 선왕(先王)들의 기록이 담겨져 있는데, 성인은 그에 대해 논의만 하였지 변별은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분석할 수 있는 것이 있고 분설할 수 없는 것이 있으며, 변별할 수 있는 것이 있고 변별할 수 없는 것이 있는 것이다. 어찌하여 그런가? 성인은 이상의 것들을 그저 마음속에 품고 있을 뿐인데 반해, 백가(百家)들은 그것을 변별하여 남에게 보이고자 하는 때문이다. 그러므로 변별을 일삼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고집만 보일 뿐 그의 다른 일면의 틀린 부분은 보이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이다.

 

도가 말로 밝히 표현하면 더 이상 도가 아니며, 변론이 말로 표현되고 나면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 있게 된다. ()이 한 곳에 치우쳐 있으면 두루 미칠 수 없게 되며, 청렴함이 그 형체를 나타내게 되면 진실을 다할 수 없으며 용기가 남을 해치면 완전한 것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를 소홀히 여기지 않는다면 거의 도가 가까워진 것이 된다.

 

75 옛날에 장주(莊周)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스스로 유유자적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이 장주라는 것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문득 잠에서 깨어나니 자신은 뻣뻣하게 누워 있는 장주였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장주와 나비에는 틀림없이 구분이 있을 것이다. 그를 일러 물화(物化)라 한다.

 

양생주

 

양생(養生)()란 양생의 요령이라는 뜻이다. 양생은 바로 자연에 순응하여 감정을 잊고 외물에 전혀 구애를 받지 않는 것이라 주장한 내용이다.

 

81 솜씨 좋은 백정은 1년에 한번 칼을 바꾸는데 그것을 살을 베기 때문입니다. 범속한 백정들은 달마다 칼을 바꾸니 이는 뼈를 자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 칼은 19년이 되었으며 수천 마리의 소를 잡았으되 칼날은 방금 숫돌에 간 것과 같습니다. 소와 뼈마디에는 틈이 있으니 칼날은 그보다 더 두껍지 않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을 틈이 있는 것에 넣기 때문에 칼을 휙휙 놀려도 틀림없이 여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19년이 지났어도 칼날은 새롭게 숫돌에 갈아 놓은 것 같은 것입니다. 비록 그렇다고는 하나 매번 뼈와 살이 뭉친 곳에 이르면, 저도 어려움을 알고는 조심하여 경계하며 눈길을 거기에 멈추고 천천히 손을 움직입니다. 이리하여 칼의 움직임을 아주 미약하게 하여 결국 해체하며 그 소가 죽어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 마치 땅 위에 자신을 맡겨 흩어져 있는 흙처럼 느끼지요. 그리고 칼을 들고 일어서서 사방을 둘러보며 천천히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끼면서 칼을 닦아 챙겨 넣습니다.

 

인간(人間)()

 

인간세란 그대로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어떻게 처세할 것인가의 문제를 다룬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 주어진 이 삶을 어떻게 관조할 것이며 어떠한 잣대로 볼 것인가를 다루고 있다.

 

89 너는 역시 덕()이 흔들리게 되는 까닭과 지혜가 어디로부터 나오는 지 그곳을 알고 있느냐? 덕이란 명분 때문에 흔들리고, 지혜란 다툼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명분이란 서로를 짓누르려는 것이요, 지혜란 다툼의 도구이다. 이 두 가지는 흉기가 끝간 데까지 행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다. 그리고 한 사람의 덕이 두텁고 신의가 돈독하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기분까지 통달할 수는 없으며, 명분이 알려지고 다툼이 없다 해도 남의 마음에 까지 통달해 들어갈 수는 없는 것이다. 네가 억지로 난폭한 자 앞에서 인의(仁義)로써 남을 바르게 고쳐주고자 하겠다고 논의를 펼친다면, 그는 네가 고의로 다른 사람의 잘못을 들추어내어 네 자신의 미덕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라 여길 것이며, 너를 명하여 치()()이라 할 것이다.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이 치인이라면 남도 틀림없이 너에게 해를 끼칠 것이니 너는 그 남으로부터 해를 입게 될 것이다.

 

91 남을 바로잡는 말이 너무 많아 마땅치 않느니라. 비록 방법이 고루하기는 하나 죄를 받을 리는 없겠지만 그렇게 하면 그저 그 정도에 그칠 뿐이다. 그래서야 어찌 남을 교회시키겠느냐! 너는 아직도 네 마음을 스승으로 여기는 좁은 생각에 얽매어 있구나.

 

사심을 가지고 행동을 하는데 어찌 남을 바꿀 수 있겠느냐? 바꿀 수 있다면 하늘이 마땅치 않게 여길 것이다.

 

92 공자가 말하였다. “너의 마음을 하나로 통일하라.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듣도록 할 것이며,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로 듣도록 하여라. 귀는 소리를 들을 뿐이며, 마음이란 밖에서 들어온 것에 맞추어 깨달을 뿐이지만 기라는 것은 텅 빈 채로 사물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도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빈 상태에 모이는 것이다. 바로 이처럼 비우는 것이 곧 마음의 재계란다.

 

들어주면 이야기하고 들어주지 않거든 그만두어라. 자신을 내세우지 말고 자신의 생각을 앞세우지 말 것이며, 시종 여일하게 처신하다가 어쩔 수 없을 때에만 응하거라. 그러면 거의 성공할 것이다. 걷지 않기란 쉽지만 걸을 때 땅을 밟지 않기란 어려운 법이다. 사람에게 부림을 당할 때 그를 속이기는 쉽지만, 하늘에 의해 부림을 당할 때에는 하늘을 속이기가 쉽지 않은 법이다. 날개를 가지고 난다는 이야기는 들었으나 날개 없이 난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하였다. 지각을 가지고 무엇을 안다는 말은 들었어요 지각도 없이 안다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다. 저 텅 빈 것을 관조하다 보면 텅 빈 마음이 밝아질 것이다. 길상(吉祥)도 이 호젓하고 텅 빈 마음에 머물 것이다. 무릇 머물지 않는다면 이를 일러 좌치坐馳라 한다.

 

97 말이란 그 평상의 정서에 따라 하되, 지나친 말을 전달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자신을 온전히 할 수 있다라고 한 것입니다. 또 계교로 싸워 승부를 다투는 자는 처음에는 겉으로 자신감을 보이지만 항상 그 결말은 음모를 꾸미게 되는 법이며 지나친 경우에는 온갖 기괴한 짓을 다 쓰게 됩니다. ()에 맞게 술을 마시는 사람도 처음에는 순리에 맞게 마시지만 나중에는 난잡하게 되며, 지나친 경우에는 온갖 기이한 즐거움을 찾고자 합니다. 모든 일은 이와 같아 시작할 때는 올바르나 항상 그 마무리는 비루하게 됩니다. 그 일의 시작은 간단하나 장차 끝낼 때는 거창해지게 마련인 것이지요. 무릇 말이란 풍파와 같은 것이며 이를 실행함에는 득실이 있는 것입니다. 풍파는 쉽게 움직이는 것이며, 득실은 쉽게 위험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노를 일으키게 되는 것도 다른 데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말을 간사하게 하고 그럴듯하게 둘러대려 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짐승은 죽음에 임박해서는 울음소리를 가리지 않고 지르며 여기에서 사나운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각박함이 지나치게 다가오면 틀림없이 좋지 않은 마음으로 그에 응하면서도 왜 그런지는 모르고 있지요. 그렇게 되는 까닭을 모른다면 그 결말이 어떻게 될지 어찌 알겠습니까! 그러므로 격언에명령을 남에게 미루려 하지 말고, 성공하기를 억지로 권하지도 말라. 허물만 더욱 커질 뿐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명령을 남에게 미루면서 성공하기를 권한다면 일이 위태로워집니다. 좋은 일을 성취하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나쁜 일을 한번 저지르면 돌이킬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니 신중하게 처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100 사마귀는 노하면 자신의 앞발을 들고 수레바퀴에 대들면서도 자신이 그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지요. 이러한 행동을 하는 것은 자신의 재능이 훌륭하다는 것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경계하고 삼가십시오! 자신의 훌륭함을 크게 뽐내면서 상대방의 권위를 범하면 거의 이렇게 됩니다. 그대는 호랑이를 키우는 사람을 모르십니까? 호랑이에게 살아 있는 동물을 먹이로 주지 않는 것은 호랑이가 그것을 죽이는 동안 사나움이 되살아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먹이를 통째로 주지 않는 것도 호랑이가 그것을 찢는 동안 야생의 노기가 되살아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는 호랑이가 주렸을 때와 배부를 때를 잘 맞추어 그 야생의 본성을 잘 따라주기 때문이며 그 본래의 야생을 드러내어 사람을 물어 죽이는 것은 호랑이의 본성을 거슬렸을 때입니다. 무릇 말을 사랑하는 사람은 바구니에 똥을 받고 조개 같은 좋은 그릇에 오줌을 받을 정도로 말을 아낍니다. 그러나 어쩌다 모기나 등에가 말등에 앉아 있다고 갑자기 그것을 내리치면 말은 놀라서 재갈을 물어뜯고 사람의 목과 가슴에 마구 발길질을 하겠지요. 본래 말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지만 그 결과는 반대로 나타나니 이는 바로 삼가지 않아서 생긴 일입니다.

 

105 그대도 나오 마찬가지로 모두가 하나의 물건에 불과할 뿐이거늘 어찌 나를 다른 물건에 비교하는가? 그대도 거의 죽어 가는 쓸모없는 인간일 뿐이거늘 어찌 쓸모 없는 나무라고 나를 단정하는가?

 

108 제사를 지낼 때에는 이마에 흰털이 난 소와 코가 위로 치켜올라간 돼지, 치질이 있는 사람은 강에 가서 제물로 적당치 않아 강물에 던져지지 않는다. 이런 것들은 무축(巫祝)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어 상서롭지 못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지만 신인(神人)들의 눈으로는 아주 상서로운 것이라 여기는 것들이다.

 

112 산의 나무는 더 잘 자랄수록 스스로 베이는 법이며 등불은 자신의 기름을 스스로 태우는 것이다. 계피는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베이는 것이요, 옻나무는 옻칠이 쓸모가 있기에 베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쓸모 있음의 쓸모는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쓸모 없음의 쓸모에 대하여는 모르고 있다.

 

덕충부(德充符)

 

덕충부란 덕이 충실할 때 그에 따른 증험()이 어떻게 나타나는가에 대한 관점이다. 여기서의 덕이란 우리가 보통 일컫는 도덕이나 덕행의 의미가 아니다. 일종의 만물의 본원이며 일체 자연에 편제한 도라는 뜻이다. 따라서 그 도를 충실히 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망형, 망정을 통해 호오나 귀천 충욕과 시비 등 일체의 대립적 갈등을 초월함을 뜻한다.

 

117 중니가 말하였다.

“사람들은 흐르는 물을 거울로 삼지 않고 잔잔하게 멈추어 있는 물을 거울로 삼는다. 잔잔하게 멈추어 있을 수 있어야 다른 사물들도 멈추어 있도록 할 수 있다. 땅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있는 것 중에 오직 소나무와 잣나무만이 바르게 서서 겨울이고 여름이고 푸른 모습을 할 수 있는 것이다.

 

121 어찌할 수 없는 일임을 알고 운명이라 여기며 이에 편안히 따르는 일은 오직 덕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

 

126 전투에 나가 싸우다가 죽은 자는 그 장례식에 자신의 관에 장식한 수식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다리가 잘린 형벌을 받은 자는 자신이 신고 다니던 신에 대한 애착이 없습니다. 모두가 그것을 필요로 할 근본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129 내면의 덕이 뛰어나면 외형 따위는 잊게 되는 것이다.

 

성인은 도모하는 바가 없으니 그 지식을 어디에 쓰겠는가? 그리고 끊을 일이 없으니 아교를 어디에 쓰겠는가? 잃을 것이 없는데 덕은 어디에 쓰겠는가? 재물이 필요 없는데 장사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이 네 가지는 하늘이 길어주는 것이다. 하늘이 길러준다는 것은 하늘이 먹여 살린다는 뜻이다. 이미 하늘로부터 먹을 것을 받고 있거늘 어찌 또 사람의 것을 쓰겠는가!

 

대종사(大宗師)

 

대종사란 가장 크게 존경하고 앙모하는 선생님이란 뜻이다. 구체적으로는를 스승으로 삼아 세상을 바르게 볼 것을 주장한 내용이다. 자연은 혼연일체의 하나이며 생사도 구별이 없으니 심신을 청정히 하고 육신과 지혜라는 것을 제거하며 생사를 잊어버리고 자연에 순응하는 것이 바로 도라는 스승을 통해 바르게 배우는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를 체득한 자로써진인(眞人)’을 설정하고 있다.

 

134 옛날의 진인은 사소한 것이라도 거역함이 없었으며, 그 성공을 자랑하지도 않았고 어떤 일에 모책을 세우지도 않았다. 이러한 사람은 과실이 있어도 후회하지 아니하며, 일이 정당하다고 인정되어도 스스로 자만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은 높은 곳에 올라가도 겁내지 아니하며 깊은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아니하고 불에 들어가도 뜨겁게 느끼지 않는다. 이는 그의 앎이 도()에까지 승화되어 이렇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옛날의 진인은 잠을 자더라도 꿈을 꾸지 않았으며, 깨어 있어도 근심이 없었고, 식사를 하되 맛난 것을 찾지 않고, 호흡을 함에는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진인은 발뒤꿈치로 숨을 쉬지만 범인은 목구멍으로 숨을 쉰다. 남에게 굴복당한 자는 그 말하는 소리가 마치 무엇을 토하는 것같고 욕심이 많은 자는 그의 타고난 천기(天機)가 얕다. 옛날의 진인은 삶이라는 것이 즐거운 것인 줄도 몰랐으며 죽음이라는 것이 싫은 것인 줄도 몰랐다. 세상에 태어남을 기뻐하지도 않았고 죽음을 거역하지도 않았다. 자유롭게 삶을 받아 살아갔으며 자유롭게 죽음이 오면 따라 갔을 뿐이었다. 천명의 시작을 잊지도 않았고 자신의 삶의 마지막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즐겁게 주어진 삶을 받았으며, 모든 것을 잊은 채 다시 그 죽어서 가는 곳으로 간다고 여겼다. 이를 일러 마음 때문에 도에 손상을 입히지 않는 것이라 하였으며, 사람의 힘으로 하늘을 돕는 것은 아니라 한다. 이를 일러 진인이라 한다. 이러한 사람은 마음은 모든 것을 잊고, 그 얼굴은 고요하며, 그 이마가 널찍하다. 쓸쓸하기가 마치 가을과 같고 온화하기는 봄과 같다.

 

139 죽음과 삶은 숙명이다. 밤과 낮이 항상 일정한 것은 하늘의 이치이다.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바가 있는 것은 모두가 만물의 실정이다.

 

작은 것을 큰 곳에 감추는 것은 마땅한 일이기는 하나 그래도 잃어버릴 수는 있다. 만약 천하를 천하에 감추어 둔다면 잃어버릴 리가 없을 것이며 이것이 항시 떳떳한 만물의 커다란 정황이다.

 

142 무릇 도()에는 정황과 믿음은 있지만 어떤 작용도 어떤 형체도 없다. 그것을 마음으로 전할 수는 있으나 물건처럼 주고받을 수는 없다. 그것을 체득할 수는 있으나 눈으로 볼 수는 없다.

 

148 가령 내 왼팔이 변하여 닭이 된다면 나는 그것으로 사람들에게 새벽이나 알려 주겠지. 가령 내 오른팔이 변하여 화살이 된다면, 나는 그것으로 산비둘기를 쏘아 구어 먹겠지. 나의 궁둥이가 변하여 수레바퀴가 되고, 정신이 변하여 말이 된다면, 나는 그것을 타고 다닐 것이니 어찌 달리 다른 것을 타고 다니겠는가! 또 삶을 얻었다는 것은 그런 때를 만난 것이며, 생명을 잃는다는 것은 자연에 순응하는 것이지. 때에 맞추고 순리에 처하면 슬픔이나 즐거움이 그 틈을 뚫고 들어올 수 없는 것이지. 이것이 옛날 소위 말하던 대롱대롱 매달렸던 삶에서 풀려난다고 하는 것이야. 그런데 그로부터 스스로를 풀려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외물이 나의 삶을 꽁꽁 매고 있었기 때문이었지. 게다가 무릇 외물이 자연의 도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의 진리이니 내가 어찌 그것을 싫다고 하겠나!

 

늙음이라는 것으로써 나를 편하게 하였으며, 죽음이라는 것으로써 나를 휴식하게 해 주는 것이라네. 그러므로 자기의 삶을 잘 다루는 자만이 곧 자신의 죽음을 잘 맞이하는 것이지. 지금 훌륭한 대장장이가 쇠를 녹여 주물을 만드는데 쇠가 뛰어오르며나는 반드시 막야 같은 명검이 되어야 합니다라고 한다면 대장장이는 틀림없이 불길한 쇠붙이라 여길 것이네. 지금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다고 해서사람으로만 있겠다. 사람으로만 있겠다라고 한다면 조물주는 틀림없이 불길한 인간이라고 여길 것이네. 이제 천지를 커다란 용광로라 생각하고 조물주를 훌륭한 대장장이라 생각한다면 어디로 간들 옳지 않음이 있겠는가!

 

153 그들은 삶이란 군살이나 혹이라 여기며, 죽음이란 곪은 데를 짜거나 종기를 베어 버리는 것쯤으로 여기고 있다.

 

154 기인이란 세속의 인간과는 다르고 천지 자연과 같이 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소인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군자요, 하늘의 군자는 인간에게 있어서는 소인처럼 여겨진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응제왕(應帝王)

 

응제왕이란 제왕이 되기에 마땅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장자의 위정사상을 잘 나타낸 것으로 우주 만물은 혼연일체의 도라는 것으로 인식을 삼고 자연에 합일하여다스리지 않음을 다스림으로 삼는자를 가정한 것이다. 따라서 응당 제왕이 되어야 하는 자는 자연에 순응하며 민정을 따라 불언지교(不言之敎)를 행하는 자여야 한다는 것이다.

 

174 동작이 빠르고 몸이 튼튼하며 사물의 도리에 밝고 도를 배우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이라면 명석한 임금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노담이 말하였다. “그런 사람은 성인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 지혜만 앞서고 재주에 얽매어 몸을 수고롭게 하고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사람이오. 또 호랑이나 표범의 가죽은 사람들을 끌어들여 스스로 사냥감이 되고, 원숭이의 날램이나 삵을 잡는 개의 재주는 사람들에게 좋은 도구 역할을 하게 되지요.

 

“명석한 임금의 다스림이란 그 곳이 천하를 뒤덮을지라도 자신이 한 것이 아닌 양 보이고, 그 교화가 만물에 베풀어지되 그것을 백성으로서는 그에게 기대는 것이 아닌 것으로 하며, 그 이름을 거론하지도 아니하며 만물로 하여금 스스로 즐거움을 누리도록 하며 헤아릴 길 없는 경지에 서서 아무런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 곳에서 노니는 것이라오.

 

181 명예를 추구하는 거짓 주인이 되지 말 것이며 모사를 일삼는 창고가 되지 말라. 일의 책임자가 되지도 말 것이요 지혜의 주인이 되지 말라. 무궁한 도를 체득하여 고요한 경지에서 노닐며 하늘로부터 받은 본성을 온전하게 하여 무엇을 얻고자 하지도 말고 역시 언제나 마음을 텅 비울 따름이다. 지인(至人)의 마음 씀은 거울과 같다. 가는 것은 가는 대로 오늘 것은 오는 대로 맡긴다. 그리하여 거울은 변화에 반응하되 감추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사물을 그대로 비춰주면서도 능히 손상을 입지 않는 것이다.

 

외편(外篇)

 

병무(騈拇)

 

병무란 엄지발가락이나 엄지손가락이 검지와 붙은 것을 말한다. 이는 보통 정상인의 모습과는 다르다. 그렇다면 사물의 고유한 원형에 덧붙은 것은 이것뿐인가? 바로 인간 본연의 삶이 고유한 것인데 여기에 인의(仁義)라는 것을 덧붙여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지금 세상의 어진 이들은 눈을 반쯤 뜨고 세상의 환난을 걱정하고 있으며, 어질지 않은 이들은 타고난 성명의 실체를 버린채 부귀를 탐하고 있다. 그 때문에 인의란 자연스러운 참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하도다! 삼대(三代)이후로 천하가 어찌하여 이토록 시끄러워졌겠는가?

 

마제(馬蹄)

 

마제는 말의 발굽이다. 말은 자연에 맞추어 살 수 있도록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 백락이 나타나 말을 사람의 용동에 맞추고자 자연상태의 조건들을 바꾸어 놓았다. 천지 만물을 본성대로 두는 것이 가장 아름다우며 완벽한 것이다.

 

거협(胠篋)

 

거협이란 상자를 옆구리에서 따서 열고 그 곳에 감추어둔 보물을 훔쳐낸다는 뜻. 그렇게 지혜를 소중히 여긴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인위적인 갈무리가 결국 본성을 훼손하고 성인의 인의라는 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원시의 질박함으로 되돌아갈 수 없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207 세상 사람들의 눈이 밝으면 천하는 어지러워지지 않을 것이며, 세상사람들의 귀가 밝으면 천하에 우환이 없을 것이며, 세상 사람들이 지혜롭게 된다면 세상에는 미혹되는 일이 없을 것이며, 세상 사람들이 덕을 지니게 되면 세상에는 편벽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212 천하는 매번 혼란에 빠지고 말았으며 그 죄는 지혜를 좋아한 데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천하는 모두가 자신이 알지 못하는 바를 추구하면서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하여는 추구할 줄 모르고 있으며, 모두가 자신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난할 줄 알면서도 자신이 이미 좋다고 여겼던 것에 대해서는 그르다 할 줄 모르고 있다. 이 까닭으로 큰 혼란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재유(在宥)

 

재유에서 재는 자재자유(自在自遊)의 의미이며 유는 관용의 뜻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인위적인 작위를 더하지 말고 모든 것을 자연에 맡겨 존재하는 사물의 그 자체를 관용으로 인정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바로 노자의 절성기지(絶聖棄智)를 내세워 무위이치(無爲而治)로 돌아갈 것을 달리 표현한 말이기도 하다. “성스러움과 지혜라는 것은 사람을 얽어매는 형틀이며, 인의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손발을 얽매는 형구이다.

 

217 자연 상태에 맡기는 무위야말로 사람의 본성을 안주하도록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몸을 천하보다 더 아끼는 자라야 그에게 천하를 맡길 수 있고, 자신의 몸을 천하보다 더 사랑하는 자라야 그로부터 천하를 넘겨받을 수 있다.

 

232 세속의 사람들은 모두 남들이 자기와 의견이 같은 것을 좋아하고 자신과 다를 경우 이를 싫어한다. 자기와 같기를 바라고 자기와 다른 것을 바라지 않는 것은 여러 사람보다 뛰어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보다 앞서려는 마음을 지녔다고 해서 어찌 다른 사람보다 뛰어날 수 있겠는가.!

 

천지(天地)

 

천지에서 천과 지는 장자에게 있어서 만물이 존재하는 시간이며 동시에 공간이다. 아울러 이 천지는 시작도 끝도 없으며 삶도 죽음도 없고 높낮이나 장단도 없다. 그러한 속에 갇혀 있는 인간도 역시 외물과의 상대적 우월이나 사고의 고등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절대적 자연의 도에 맞추어 작위를 없애고 무위로써 천하를 바라보며 터득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260 도를 확고하게 지키는 자는 덕이 온전하고, 덕이 온전한 자는 형테가 온전하며, 형체가 온전하면 정신이 온전한데, 정신이 온전한 것이 바로 성인의 도라는 것이다. 그는 삶을 타고나 백성들과 함께 살아가지만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한 채 망연히 순박함이 갖추어졌도다! 공리(功利)와 기계의 교묘함 같은 것이 사람의 마음 속에서 완전히 잊혀져야 한다. 그러한 사람은 자신의 뜻이 아니면 가지 않고, 마음에 내키지 않으면 행하지 않으며, 비록 천하가 그를 칭찬하고 그가 말하는 대로 된다 하더라도 초연한 모습으로 돌아보지도 않으며, 천하가 그를 비난하고 그가 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해도 태연함을 지키며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다. 천하의 그에 대한 칭찬과 비난은 그를 손상시킬 것도 없으며 이롭게 할 것도 없으니 이런 사람을 가리켜 온전한 덕을 가진 사람이라 하는 것이로다! 나 같은 사람은 일러 바람에 출렁이는 물결과 같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란다.

 

265 순망이 말하였다.

“덕 있는 사람이란 평소에는 아무 생각이 없고, 행동을 해도 아무생각이 없습니다. 옳고 그르니, 좋고 나쁘니 하는 마음도 가지고 있지 아니하며, 온 세상 사람들과 함께 이()를 얻음을 기쁘게 여기고, 온 세상을 총족시켜 주는 것을 편안하다 여기지요. 그 모습은 의지할 바 없는 듯 마치 어린아이가 제 어머니를 잃은 듯하고, 멍하니 길을 가다 길을 잃은 듯하오. 재물을 쓰되 여유가 있으나 그것이 어디에서 생기는지 알지 못하고, 음식을 배불리 먹되 그것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알지 못하니 이것이 덕 있는 사람의 모습이라오.

 

270 자신의 어리석음을 아는 자는 크게 어리석은 것이 아니며, 자신의 미혹됨을 아는 자는 크게 미혹된 것이 아니다. 크게 어리석은 자는 평생토록 자신이 어리석은 줄을 알지 못하고, 크게 미혹된 자는 종신토록 자신을 깨닫지 못한다. 세 사람이 길을 가는데 한 사람이 미혹에 빠져 있다면, 그나마 목적지에 이를 수 있으니 이는 미혹에 빠진 자가 수적으로 적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 사람이 미혹에 빠져 있다면 노고롭기만 할 뿐 목적지에는 이르지 못하게 된다. 이는 미혹에 빠진자가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온 천하가 미혹에 빠져 있으니 내가 비록 인도해 방향을 잡고 간다 해도 도달할 수가 없으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천도(天道)

 

천도는 자연의 절대적 규율이며 법칙으로 항거할 수도 없고 변혁시킬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무위로써 이 법칙을 따르며 본성으로써 만물을 대해야 하며, 그 근본을 지키고 그 박실한 원상태로 돌아가야 한다.

 

296 세상 사람들이 모양, , 이름, 소리로써 어찌 도의 실체를 알 수 있겠는가! 무릇 모양, , 이름, 소리를 가지고는 결코 그것의 진실을 알아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어찌 그것을 알겠는가!

 

298 수레바퀴를 깎는데 천천히 아무렇게나 깎으면 엉성하여 끼우기는 쉬워도 견고하지 못하고, 서둘러 꼼꼼하게 깎으면 끼워 넣기가 힘들어 들어가지 않습니다 엉성하지도 꼼꼼하지도 않게 깎는 기술을 손에서 이를 터득하여 마음에 응하는 것으로 입으로는 이를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기술이 그 사이에 존재하기는 하나 제 자식에게 가르쳐 줄 수 없고, 제 자식 역시 제게 가르침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 까닭으로 나이 칠십이 되도록 수레바퀴를 깎고 있는 것입니다. 옛 사람도 깨달은 바를 전하지 못한 채 죽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임금께서 읽고 계신 것은 옛 사람의 찌꺼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요!

 

천운(天運)

 

천운은 천지 만물은 아무런 마음도 가지고 있지 아니하되 스스로 운행하고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그에게 어떤 인위적인 작위를 가하는 것은 도리어 그에게 해를 끼치며 본래의 진실한 도에서 멀어질 뿐이다.

 

316 도라는 것이 가히 바칠 수 있는 것이라면 사람들은 누구나 그것을 임금께서 바쳤을 것이며, 도라는 것을 진상할 수 있는 것이라면 누구나 그것을 자신의 부모에게 가져다 드렸을 것이며, 도라는 것이 남들에게 일러줄 수 있는 것이라면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형제에게 일러주었을 것이며, 도라는 것이 전할 수 있는 것이라면 주구나 그것을 자손들에게 전해 주었을 것이외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주관할 만한 것이 없으면 도는 그 사람에게 머물지 아니하고, 밖이 올바르지 않으면 그것을 행할 수 업는 것이기 때문이오. 마음속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밖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성인은 그것을 내놓지 않고,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것에 대하여 주관할 만한 것이 없으면 성인은 그것에 의거하지 않는다오.

 

324 본성이란 바뀌어질 수가 없고 천명도 바꿀 수 없으며, 시간은 멈출 수가 없고, 도는 막을 수 없소. 그리하여 진실로 도를 터득하기만 하면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없고, 도를 잃으면 뜻대로 되는 것이 없다오.

 

각의(刻意)

 

각의란 자신이 하고자 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각고면려함을 뜻한다.

진인은 복을 누리겠다고 앞서 나서지도 아니하며 화를 피하겠다고 앞서 도망하지도 않는다.

 

329 뜻을 각작하게 하지 않고도 고상해지고, 인의가 없이도 몸이 수양되며, 공명을 세우지 아니 하고도 나라가 다스려지며, 강과 바다에서 노닐지 않고도 한가해지며, 영기를 끌어들이지 않고도 오래 사는 사람은 잊지 않아야 할 것도 없고 갖추고 있지 않은 것이 없늕 사람이다. 담담하여 극한을 두지 않지만 모든 아름다움이 그에게로 모이게 되나니 이것이 천지의 도이며 성인의 덕이다.

 

333 물의 본성은 잡된 것이 섞이지 않으면 맑고, 움직이지 않으면 수평을 이룬다. 그러나 막혀 흐르지 못하면 역시 맑아질 수가 없다. 이것이 자연이 지닌 덕의 형상이다. 그러므로 순수하여 잡된 것이 섞이지 않고, 고요하고 한결같아 변하지 않으며, 담담하게 하여 작위함이 없고 움직이되 자연의 운행에 따른다고 말하는 것이니 이것이 정신을 보양하는 도이다.

 

속담에는

“보통 사람들은 이()를 중히 여기고, 청렴한 선비는 이름을 중히 여기며, 현명한 이는 뜻을 숭상하고, 성인은 정신을 귀히 여긴다.따라서 소박하다는 것은 그의 정신에 다른 무엇이 섞이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며, 순수하다는 것은 그 정신을 어그러뜨림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능히 순수하고 소박함을 체득한 이를 일러 진인(眞人)이라고 부른다.

 

선성(繕性)

 

선성이란 글자 그대로 본성을 잘 수선하여 이념양지로써 본진으로 되돌아 가야 하며 세속적인 학문으로는 이를 이룰 수 없음을 주장한 것이며 장자 수양론의 일부이다. “세상은 도를 잃었고 도는 세상을 잃어, 세상과 도가 서로를 잃었으니, 도가 어찌 세상을 일으킬 수 있으며, 세상 또한 어떻게 도를 일으킬 수 있겠니가!

 

338 아름다운 장식이란 본질을 없애는 것이며, 박학함이란 마음을 침몰하게 하는 것이었으니 그 뒤에는 백성들은 드디어 미혹에 빠져 혼란을 일으키게 되었고 본성으로 되돌아가 그 태초의 모습을 되찾는 일이란 있을 수 없게 되었다.

 

346 일이란 처음과 끝이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사람이 알고 있다는 것은 헤아려보면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것만 못하고, 살아 있는 시간이란 그가 살아 있지 못한 시간에 비길 바가 되지 못하지요. 그런데도 지극히 작은 것으로 지극히 거대한 영역을 규명하려 듭니다. 이 때문에 미혹한 혼란에 빠지고 말아 스스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어찌터럭 끝이 지극히 작은 것이라 단정할 수 있겠으며, 또한 천지는 족히 무한히 큰 영역이라고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

 

347 대인의 행동은 사람들을 헤치지 아니하며, 어짊이나 은혜따위도 베풀겠다고 하지도 않으며, 이익을 두고 행동하지도 아니하며, 문지기나 노예를 천하게 여기지도 아니하며, 재물을 두고 다투는 법도 없고, 사양함을 자랑하지도 않습니다. 일을 함에 있어 남의 힘을 빌리지도 않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먹고 살아감을 자랑삼지도 않고, 탐욕하고 비열한 상대라도 천히 여기지 않으며, 그 행동은 세속과 다르지만 편벽되고 기이함을 자랑하지도 아니하고, 여러 사람들을 따라 행동하되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들을 천시하지도 아니합니다. 따라서 세속의 작록으로 그의 행동을 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형벌이나 치욕으로도 그에게 모욕을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는 시비라는 것도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고, 작고 큰 것도 차별을 둘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듣건데도인은 그 이름이 알려지지 않으며, 지덕은 남에게 얻는 것이 없고, 대인은 자기 자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라 하였으니 이것이 본분을 지키는 지극한 경지라오.

 

348 어찌 옳은 것만 중히 여긴다고 해서 그릇된 것이 없을 것이며, 다스림을 숭상하면 혼란함이 없다는 것인가?

 

350 소나 말이 네 개의 다리를 가지고 있는 것을 천()이라 하고, 말머리에 굴레를 쒸우거나 소의 코를 뚫는 것을 인()이라 하오. 그러므로 인으로써 천을 손상시키는 일이 없어야 하며, ()로써 천명(天命)을 손상시키는 일도 없어야 하며, 덕으로써 이름을 희생시키는 일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삼가고 지켜 잃지 않는 것, 이를 일러 그 진실로 돌아간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355 발이 하나밖에 없는 짐승인 기()는 발이 많은 노래기를 부러워하고, 지네는 발 없이도 움직이는 뱀을 부러워하며, 뱀은 의지할 데도 없이 움직이는 바람을 부러워하고, 바람은 움직이지 않고도 가는 눈을 부러워하며, 눈은 가지 않고도 마음만 갈 수 있는 자를 부러워한다.

 

365 “내 듣기로 초나라에는 신령스런 거북이 있어 죽은 지 이미 2천 년이 지났다고 하더이다. 왕께서 이를 비단에 싸서 상자에 넣어 묘당(廟堂)위에 모셔 놓았다는데 이 거북으로 말하면 죽어서 뼈만 남기어 존귀하게 되고 싶어하였겠소? 아니면 살아서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고 다니고 싶어하겠소?” 이에 두 명의 대부가 말하였다. “그야 살아서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고 다니고 싶어하겠지요.” 장자가 말하였다. “가시오! 나는 장차 진흙에 꼬리를 끌고 다닐 것이오.

 

지락(至樂)

 

지락은 지극한 즐거움을 뜻한다.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어떤 것이 지극한 즐거움이며 또한 생사의 문제를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지락은 곧 무락이며 죽음은 자연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며 육신은 기가 모여 이루어졌다가 다시 흩어지는 자연 현상일 뿐이니 인위적인 예악을 보태어 슬픔을 표시하는 것은 섭리를 바르게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지극한 즐거움이란 즐거움을 없이 하는 데에 있고, 지극한 명예란 그 명예를 없이 하는 데 있다.

 

382 옛날에 바다새가 노나라교외에 날아와 앉았더니 노나라 임금은 그 새를 맞이하여 종묘에서 잔치를 베풀고 구소의 음악을 연주하며, 태뢰를 잡아 그 새를 길렀단다. 그런데 그 새는 눈만 휘둥그레 뜨고는 걱정과 슬픔에 잠겨 감히 한 조강의 고기도 먹어 보지 못하고 한 잔의 술도 마셔 보지 못한 채 사흘 만에 죽어 버리고 말았단다. 이것은 왕이 사람을 보양하는 방법으로 새로 기르려하였지, 그는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릇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려면 마땅히 그 새를 깊은 숲 속에 살게 하고, 호수 가에서 노닐게 하며, 강이나 호수에서 헤엄치게 하며, 미꾸라지와 피라미를 잡아먹도록 해 주고, 자신의 무리들을 따라 줄을 지어 날다가 내려앉아 쉬고 편안히 처하도록 해 주었어야 할 것이다.

 

383 서로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옛 성현들도 그들의 능력을 똑같이 여겨 맡기는 일을 하지 않아 명분이 실질에 부합하도록 하였고 법도가 본성에 맞도록 하였던 것이다. 를 일러 조리가 닿고 복을 지속시키는 것이라 한단다.

 

달생(達生)

 

달생이란 생명의 본원에 대하여 통달함을 뜻한다. 일종의 양신론으로 문명의 이기를 배척하고 자연의 질박한 본원을 깨달아 그리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 것이다. 천지는 만물의 부모이다. 하늘과 땅이 합쳐서 사물의 형체를 이루었고, 흩어지면 처음의 아무 것도 아닌 상태로 되돌아 간다.

 

390 삶의 정황에 통달한 사람은 타고난 본성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에는 힘쓰지 아니한다.

 

398 질그릇을 내기로 하고 활을 쏘면 잘 쏠 수 있지만 허리띠의 고리를 내기로 걸고 화를 쏘면 마음이 떨리게 마련이며 황금을 걸고 활을 쏘면 눈앞이 혼미해지고 만다. 그 기교는 한 가지로 같건만 마음쓰는 바가 생기게 되면 외물을 중히 여기게 되는 것이니, 외물을 중히 여기게 되면 속마음이 졸렬해지는 것이다.

 

419 알맞음에서 시작하여 늘 알맞지 않은 일이 없게 되면 알맞은 것이 알맞다는 것조차도 잊게 된다.

 

산목(山木)

 

“배를 타고 강을 건널 때 어떤 빈 배가 와서 자신의 배를 부딪치면 비록 마음이 좁은 사람일지라도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그 배에 사람이 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신을 텅 비우고 세상을 노닌다면 누가 능히 그를 해치려 하겠는가!

 

436 짐승들 사이로 들어가도 짐승 무리가 흩어지지 않았고, 새들 틈에 들어가도 그 새의 행렬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새와 짐승들도 그를 싫어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사람들이야 어떠하였겠는가!

 

443 구슬은 나와 이익으로 합쳐진 것이지만 아이는 하늘에 의해 맺어진 것이라오라고 대답하였다 하오. 무릇 이익으로 만난 것은 위급한 경우를 당하여 궁지에 몰리면 서로 버려지게 되지만 하늘에 의해 맺어진 것은 위급한 경우를 당하였을 때라도 서로 거두어 주는 법입니다. 서로 거두어 주어야 할 사이와 서로 버려지는 사이란 이렇듯 거리가 먼 것이오. 또한 군자의 사귐이란 담담하기가 물과 같고, 소인들의 사귐이란 단술과 같이 달콤한 것입니다. 군자들의 사이는 담담하기에 더 친해지고 소인들의 사이는 달콤하지만 결국 끊어지게 마련이오. 아무런 연고 없이 맺어진 것은 아무런 연고 없이 사라지게 마련이라오.

 

444 너는 명심하라! 육신이란 자연의 인연에 따르느니만 못하고, 심정은 그 진솔함을 따르느니만 못하다. 인연대로 하면 떨어지지 않게 되고, 진솔함을 따르면 노고롭지 않게 된다. 자연으로부터 떨어지거나 노고롭지도 아니하다면 자신을 꾸미겠다고 나서지 않아도 되고, 자신을 꾸미려 하지 않아도 된다면 구태여 외물에 기댈 필요도 없게 되는 것이니라.

 

459 “예쁜 여자는 스스로를 아름답다고 여기기에 나는 그가 예쁜 줄을 모르겠고 추한 여자는 스스로 추하다고 여기기에 나는 그가 추한 줄을 모르게 된 것입니다.” 양자가 말하였다. “제자들아, 기억해 두어라! 행실이 어질면서도 스스로 어질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버린다면 어디간들 사랑을 받지 않겠는가!

 

전자(田子)()

 

467 무릇 슬픈 일 가운데 마음이 죽는 것보다 슬픈 것이 없고, 육신의 죽음은 그 다음의 슬픔이란다.

 

483 손숙오가 말하였다.

“내가 어찌 남보다 나은 게 있겠소! 나는 내게 오는 것을 물리치지 않았고, 가는 것은 막지 않았을 뿐이오. 나는 얻고 잃는 것이 나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아니하기에 근심이 빛이 없을 따름이오. 내가 어찌 남보다 낫다고 하겠소! 또 내가 존경받는 것이 영윤이라는 벼슬때문인지 나 자신 때문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벼슬 때문이라면 나 자신 때문이 아닐 것이고, 나 자신 때문이라면 벼슬 때문이 아닐 것이오. 그러니 나는 머뭇거리며 사방을 둘러보기에 바쁘거늘 어찌 부귀나 빈천 따위에 마음을 쓸 겨를이 있겠소?” 공자가 그 이야기를 듣고 말하였다.

공자가 그 이야기를 듣고 말하였다.

“옛날의 진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도 그를 설복시킬 수 없었고, 미인이라도 그를 유혹할 수 없었으며, 도둑도 그를 겁탈할 수 없었고, 복희나 황제라 해도 그와 벗할 수 없었다. 죽고 사는 것 역시 큰 문제이기는 하나 그의 마음을 변하게 하지 못하였으니 하물며 세속의 벼슬이나 봉록 따위야 더 무슨 영향을 주겠는가!그러한 사람의 정신은 큰 산과 맞닥뜨려도 막힘이 되지 않고, 깊은 못에 들어가더라도 젖지 않을 것이며, 낮고 천한 지위에 있어도 괴로워하지 않을 것이다. 하늘과 땅에 충만하여 이미 남에게 모든 것을 주었더라도 자신은 그럴수록 더욱 더 많아지게 될 것이다.

 

지북유(知北遊)

 

“도를 닦는 사람은 날마다 가식을 덜어내어 그것을 버려야 한다. 무위에 이르면 아무 작위함도 없으면서 작위하지 않음이 없게 된다.

 

489 무릇 도를 아는 사람은 도를 말로 표현하지 아니하며, 도를 말하는 사람은 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성인들은 말로 표현하지 않는 가르침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도란 말로써 이룰 수 없고, 덕은 행동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오. ()은 그대로 행할 만한 것이지만 의()는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며, ()는 서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도를 잃은 뒤에 덕이 나온 것이며, 덕을 잃은 뒤에 인이 나타났고, 인을 잃은 뒤에 의가 생겨났으며, 의를 잃은 뒤 예가 나온 것이니, 예란 도의 꽃과 같아 열매는 없으며 혼란의 우두머리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따라서도를 닦는 사람이 날마다 가식을 덜어내어 그것을 버려야 한다. 무위에 이르면 아무 작위함도 없으면서 작위하지 않음이 없게 된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509 무시가 말을 덧붙였다.

“도에 대한 질문이 있다고 해서 이에 응대하는 자는 도를 모르는 자이며, 도에 대해 묻는 사람도 역시 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도에는 질문이 있을 수 없으며 묻는다고 대답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물어볼 수 없는 것을 묻는 것은 질문이 궁한 것이며 응대할 수 없는 응답을 하는 것은 내면이 없는 것입니다. 안에 아무것도 없으면서 궁한 질문을 대한다면 이와 같은 자는 밖으로는 우주의 현상을 관찰하지 못하고 안으로는 태초의 현모한 이치를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 이 까닭으로 곤륜산같이 높은 경지를 넘어서지 못하고 태허(太虛)의 심오한 경지에서 노닐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556 어린아이는 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않는데 그것은 자연과 지극히 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하루종일 주먹을 쥐고 있어도 손이 저리지 않은 것은 그 덕이 온전하기 때문이지. 그리고 하루 종일 눈을 뜨고 있어도 눈을 깜빡이지 않는 것은 외계의 사물에 집착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라네, 어린아니는 길을 가도 가는 곳을 알지 못하고, 앉아 있어도 할 일을 알지 못하지. 외계의 사물에 순응하고 물결치는 대로 자기를 맡기는 것, 이것을 일러 생명을 지켜내는 도라는 것이라 할 뿐이지.

 

무릇 지인이란 땅 위에서는 사람들과 더불어 어울려 살고 함께 하늘의 도를 즐기는 사람들이지. 사람이나 사물, 이익과 손해 등에 얽혀 남과 다투는 일이 없으며, 괴이한 짓을 하지 않으며 어떤 모의도 하지 않고, 어떤 일을 함께 이루겠다고 나서지도 않는다네. 자유자재로 갔다가는 아무 거리낌없이 돌아오지. 이를 일러 생명을 지키는 도라고 부를 뿐이지.

 

어린아이란 행동하면서도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어디를 걸어가면서도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 몸은 마치 마른 나무의 가지와 같고 마음은 불 꺼진 재와 같다네. 만약 이런 사람이라면 그에게는 재난도 다가오지 아니하고 복이라는 것도 찾아오지 않는다네. 화복이 없는데 어찌 인간 세상의 재앙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겠나!

 

560 마음이 태연하고 안정되어 있는 사람은 자연스러운 빛을 발한다. 사람이란 스스로 자신의 사람됨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며 물건은 스스로 그 물건됨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람이 능히 스스로 자신을 닦아야 비로소 그 떳떳한 모습을 가질 수 있는 것이며 사람이 자연에 터를 잡게 되면 자연도 또한 그를 돕니다. 이를 일러 천민(天民)이라하며 하늘이 도와주는 사람은 천자(天子)라 한다.

 

562 안에 품은 마음과 맞아떨어지는 자는 행동에도 이름이 나기를 바라지 않으며 밖의 일에 의도한 대로 되는 자는 돈을 벌기에 기대를 가지게 된다. 이름이 나기를 바라지 않는 자라야 항상 떳떳한 빛을 발하게 되며 돈 벌기에 뜻을 둔자는 오직 장사꾼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기를 돋보이게 하려고 발돋움을 하고 있는 꼴을 남들이 지켜보고 있음에도 여전히 그렇게 우뚝 솟고자 한다.

 

571 미움. 욕심, 즐거움, 노함, 슬픔, 즐거움의 이 여섯 가지는 덕을 손상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떠남 다가옴 취함 줌 허락함 지혜 능력의 이 여섯가지는 도를 막는 것이다.

 

서무귀

 

“무릇 천하를 다스리는 일이 말을 먹이는 것과 무엇이다르겠습니까! 그저 말을 해치는 것들을 제거해 주기만 하면 됩니다!

 

579 사람이란 황량한 고장에 가서 잡초 우거져 족제비 다니던 길까지 묻혀버린 곳에서 오랫동안 홀로 있게 되면 사람 잘자국 소리만 들어도 기뻐하는 법인데, 하물며 형제나 친천의 웃음소리가 곁에서 들릴 때야 어찌하겠소! 너무 오래 되었소, 임금께서는 진인의 말이나 웃음소리를 가까이서 들어 본 지가!

 

588 농부는 농사일이 없으면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며, 상인은 장사할 일이 없으면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 서민들은 아침저녁으로 할 일이 있으면 근면해지고, 장인들은 정교하게 만들 기계가 있으면 열심히 일한다. 돈과 재물이 쌓이지 않으면 탐욕이 많은 자들은 근심을 하고, 권세를 이루지 못하면 뽐내기 좋아하는 사람은 슬픔을 느낀다 세력이나 물질을 좇아가는 사람은 변란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이들은 모두 그 시세에 따라 자신이 할 일만 있으면 거기에 사로잡혀 무위를 실처할 수가 없다. 이들은 모두 시간의 변화에 따라 이끌려 다니는 사람들로써 도를 따르고 거기에서 변화할 수가 없다. 스스로의 육체와 정신을 바삐 움직여 온갖 외물(外物)에 빠진 채 종신토록 자기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하니 슬픈일이 아닌가!

613 바람이 불면 강물이 줄고, 햇빛이 쬐어도 역시 강물이 준다. 그러나 바람과 햇빛이 서로 강물을 줄게 해도 강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것은 강물은 근원이 있고 그 근원에 의지하여 흘러가기 때문이다라고하는 것이다. 본래부터 물이 흙을 적셔줌에는 빈틈이 없고 그림자가 사람을 따르는 것에도 빈틈이 없으며, 삽물과 사물과의 관계도 빈틈이 없다 그러나 눈의 시력은 위태로운 것이고 귀의 청력도 위태로운 것이며, 마음의 작용도 위태로운 것이다. 모든 능력이란 그것을 지니고 있단즌 자체가 위태로운 것이다. 본성으로부터 떠나서 위태로워지게되면 이미 고치기 어렵다.

 

외물(外物)

 

“본성을 뒤집으면 손상되지 않을 것이 없으며, 사심을 가지고 해동하면 그릇되지 않는 것이 없다. 성인이란 항상 주저하면서 일을 일으키기 때문에 하는 일마다 성공을 거두는 것이다.

 

648 놀라 두려워 하는 가운데 아무 일도 이루지 못하면서 마음은 하늘과 땅 사이에 매달린 듯 불안한 것이다. 또 걱정ㄹ스런 마음이 뭉쳐 근심에 빠지게 되며, 이해가 서로 마찰해 화병을 일으키는 경우는 너무나 많다. 사람들 마음속의 화기를 태워 버리고 달처럼 깨끗하고 조용하던 마음이 그 분을 이겨내지 못한다. 이에 그 모든 것이 무너져 도가 진멸되고 마는 것이다.

 

684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게 마련이다.사람의 죽음에는 모두 그 까닭이 있으니 스스로 짓는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는 것은 양기가 움직여 이루어지는 것이니 스스로 어찌 할 수가 없다. 과연 그런 것일까? 죽으면 어디로가는 것일까? 어찌하여 가는 것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하늘에는 천체 운행 역수가 있는 법이고, 땅에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위해 만든 구분들이 있다. 그러나 우니는 어디에서 이를 추구해 볼 것인가? 그것이 끝나는 바를 알 수 없으니 그런데도 어찌 천명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시작되는 바도 알 수 없으니 그럼에도 어찌 천명이 있다고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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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왕이란 왕위를 물려준다 해도 이를 사양함을 말하며 외물은 가벼이 보고 자신의 삶을 중시한다는 경물중생을 담고 있다.

무릇 천하란 지극히 중한 것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그것 때문에 자신의 삶을 손상시킬 수는 없다고 여겼거늘 하물며 다른 사물쯤이야 어떻겠는가! 오직 천하를 두고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고 여기는 자만이 천하를 맡을 수 있는 것이다.

 

692 선권이 말하였다. “나는 이 우주 가운데에 서서 겨울에는 털옷을 입고, 여름에는 칡으로 짠 베옷을 입습니다. 봄이면 땅을 갈아 씨를 뿌리는데 몸은 일하기에 족할 만큼 튼튼하며, 가을에는 곡식을 거둬들여 몸을 편히 쉬게 할 수 있습니다. 해가 뜨면 나가 일하고 해가 지면 집에 들어와 쉽니다. 천지 사이를 유유히 소요하며 마음이 한가롭게 자득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내가 어찌 천하를 일거리로 삼겠습니까! 안타깝소이다. 임금님은 나를 모르고 계시군요

 

704 열자가 웃으며 대답하였다.

“자양은 스스로 나를 알아 준 것이 아니오. 남의 말만 듣고서 내게 양식을 보내 준 것이오. 그러니 내게 죄를 주는 일이 생긴다면 그것도 남의 말을 듣고 할 것이오. 이것이 내가 받지 않은 까닭이오.

 

712 원헌이 응대하여 말하였다.

“내 듣건대 재물이 없는 것을 가난이라 하고 배우고도 실행하지 못하는 것을 일러 병이라 하였소. 지금 나는 가난할 뿐 병이 있는 것은 아니오.”

자공은 머뭇거리며 부끄러운 빛을 감추지 못하였다.

원헌이 웃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무릇 세상의 칭송받기를 바라면서 행동하고, 서로 당을 지어 친구로 사귀며 남에게 뽐내기 위하여 학문을 하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가르치고, 인의를 내세워 간특한 짓을 하며 수레와 말을 장식하는 등의 일이라면 나로서는 차마 하지 못하오.”

 

715 증자가 위나라에 살 때 낡은 솜옷의 겉감이 없을 정도였으며 얼굴색은 부황으로 부어 있었고 손과 발은 트고 갈라졌었다. 사흘 동안이나 밥을 짓지 못하였고 10년동안 옷 한 벌 입지 못하였다. 관을 바로 쓰면 갓끈이 끊어지며, 옷깃을 여미면 팔꿈치가 나오고, 신을 바로 신으면 뒤꿈치가 떨어져 나갈 정도였다. 그러나 그가 발을 끌며 <> <商頌>을 노래하면 소리가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 마치 악기에서 나는 것과 같았다. 천자도 그를 신하로 삼지 못하였고 제후들도 그를 벗으로 삼을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뜻을 기르는 사람은 자신의 형체를 잊고, 자신의 형체를 기르는 사람은 이익을 잊으며 도를 터득한 사람은 마음조차 잊는 것이다.

 

717 공자가 초연히 얼굴을 바꾸며 이렇게 말하였다.

훌륭하구나, 안회의 생각이여! 내 듣건대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이욕 때문에 스스로를 해치는 법이 없으며, 자득할 줄 아는 사람은 이득을 잃었다고 해서 두려워하지 않으며, 행동에 안으로 수양이 되어 있는 사람은 지위가 없다고 해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하더라. 나는 그것을 외우고 있은 지가 오래 되었으나 네 말을 듣고서야 직접 보게 되었구나. 이것이 나의 소득이구나.”

 

도척盜跖

 

“공구야! 너는 문왕의 도를 닦고 천하의 변론을 도맡아 후세 사람들을 가르치겠다고 나서서 넓고 큰 옷에 얇은 띠를 띠고 헛된 말과 거짓 행동으로 천하의 임금들을 미혹시키면서 부귀를 얻으려 하고 있다. 도둑으로써 너보다 더 큰 자가 없는데도 어찌하여 세상 사람들은 너를 도구라 부르지 않고, 도리어 나를 도척이라고 부르는 것이냐?

 

733 머리에는 나뭇가지 같이 이것저것 장식한 관을 쓰고, 허리에는 죽은 소의 가죽으로 만든 띠를 띠고 다니면서, 그릇된 말을 함부로 지껄이며, 농사도 짓지 아니하면서 먹고 살고, 길쌈도 아니 하면서 옷을 입는 자이다. 입술을 놀리고 혀를 차면서 멋대로 시비를 판결하여 천하의 군주들을 미혹시키며, 학자들로 하여금 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735 내가 듣건대 남의 면전에서 칭찬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등 뒤에서 욕도 그만큼 잘한다고 하였다.

 

열어구列禦寇

 

열어구는 바로 도가 삼현중의 하나인 열자이며 장자보다 앞선 사람이다.

“도를 알기는 쉽지만 그것을 말하지 않기는 어렵다. 도를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 것은 하늘의 뜻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알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은 사람의 작위로 나아가는 것이다. 옛날 지인至人은 하늘을 따랐지 사람을 따르지 않았다.”

 

779 그대와 어울리는 자들은 그대에게 아무 것도 알려주지 못하오. 그들이 하는 하챦은 말들은 모두 사람들에게 해독으르 끼칠 뿐이오. 남을 깨우쳐 주지도 못하고 스스로가 깨닫지도 못하는 자들과 어찌 익숙히 사귈 수 있겠소! 기교가 많은 자는 노고로울 것이며, 아는 것이 많은 자는 걱정이 많은 법이오. 능력이 없는 자는 오히려 추구하는 것이 없어, 그저 배불리 먹고 유유히 노닐다가 매어 있지 않은 배처럼 두둥실 떠다니며 마음을 텅 비워 소요하는 것이라오.”

 

794 사람이 궁해지는 데에는 여덟 가지 극당이 있고, 통달하는 데에는 세가지 필연이 있으며, 육체에 화를 불러들이는 데에는 여섯 가지 창고가 있다. 아름답고, 멋진 수염이 나고, 키가 크고, 몸집이 크고, 힘이 세고, 수려하고, 용맹하고, 과감함 이 여덟 가지가 모두 남보다 뛰어나기에 사람이 궁해지는 것이다. 외물을 좇아가고 남을 따라 행동하고, 남만 못한 듯이 두려워하는 것. 이 세 가지는 보통 사람보다 못한 것처럼 보이게 할 수는 있지만 오히려 사람으로 하여금 통달하도록 하여 입신출세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지혜는 외물에만 통용되고, 용기있게 행동하면 많은 원망을 사게되며, 인의를 내세우면 많은 책망을 듣게 된다. 삶의 실정에 통달한 자는 우둑하며, 사물의 지식에 통달한 사람은 소인이 되고, 위명에 통달해 있는 사람은 자연을 따라 자유로우며, 자신만의 소명정통한 자는 편한 경우를 만나면 머물고 만다.

 

801 장자가 말하였다.

“나는 하늘과 땅을 관곽棺槨으로 여기며, 해와 달을 연벽連璧으로 여기며, 별들을 주기珠璣로 삼고 만물을 장송품葬送品으로 삼으려 한다. 나의 장례 도구가 그래도 갖추어지지 못한 것이 있느냐? 여기에 더 보탤 것이 무엇이겠느냐?

제자들이 말하였다.

저희들은 까마귀나 솔개가 선생님을 파먹을까 두려운 것입니다.”

장자가 말하였다.

위쪽에 두면 까마귀와 솔개의 먹이가 될 것이고, 아래쪽에 묻으면 땅강아지나 개미들이 먹어치울 것이다. 한 쪽이 먹는다고 빼앗아 다른 놈들에게 주는 것인데 어찌 그리 편벽되게 생각하느냐!"

 

805 시는 뜻을 서술하였고, 서는 사실을 서술하였으며, 예는 행실을 서술하였고, 악은 조화를 서술하였으며, 역은 음양의 변화를 서술한 것이며, 춘추는 명분을 서술한 것이다. 그 도는 온 천하에 널리 퍼져 중국에 알려졌으며 백가들의 학문가운데 간혹 그것을 내세워 말하는 자도 있었다.

 

808 지금 묵자만이 홀로 살아서 노래하지도 않고, 죽어서 상복을 입지도 않았으며 오동나무 관은 세 치 두께였으며 곽은 사용하지 않았으며 이를 규정으로 삼았다.

 

809 노래를 해야 할 때 노래하지 않고, 곡을 해야 할 때에도 곡을 하지 않고, 즐거워해야 할 때에도 즐거워하지 않는다면 이것을 과연 인정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살아서는 부지런히 일만 하고 죽어서는 장사도 지내지 않으니, 그들이 말하는 도라는 것은 너무도 각박한 것이며, 사람으로 하여금 근심하도록 하고, 슬프게 느끼도록 하는 것으로 그러한 일은 실행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826 혜시는 이를 천하의 큰 도라 여겨 천하에 과시하며 변사들을 깨우쳐 주었고 천하의 변사들도 역시 모두 이 학설을 좋아하였다. 즉 달걀에도 털이 있다. 닭에게는 세 개의 다리가 있다. 초나라 서울 영땅 안에도 천하가 있다. 개를 양이라고 할 수도 있다. 말도 알을 낳는다. 두꺼비도 꼬리가 있다. 불은 뜨겁지 않다. 산에는 입이 있다. 수레바퀴는 땅을 구르지 않는다. 눈은 사물을 보지 못한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은 그곳에 닿는 것이 아니며 닿는다 해도 절대적으로 끝까지 가는 것은 아니다. 거북은 뱀보다 길다. 곡척으로는 네모를 그릴 수 없으며 원척으로는 원을 그리지 못한다. 구멍에 넣는 쐐기는 구멍이 둘러싸지 못한다. 나는 새의 그림자는 움직이지 않는다. 빨리 날아가는 화살은 가지도 않고 멈추지도 않는 순간이 있다. 구拘와 견犬은 다르다. 누런 말과 검은 소는 셋이다. 흰 개는 검다. 외로운 망아지에는 어미가 있었던 적이 없다. 한 자 길이의 회초리를 매일 그 반을 부러뜨려도 만세토록 없어지지 않는다는 등의 논리였다.

 

말로 남을 이길 수는 있었으나 남의 마음까지 복종시키지는 못하였으니 이는 결국 변사들의 한계였다. 그러나 혜시는 날마다 그의 지혜로 사람들과 변론을 하며 특히 천하의 변사들과 함께 괴이한 논리를 폈으니 이것이 혜시 학설의 대강이다.

 

827 혜시는 스스로 도에 안락할 줄 몰랐고 만물에 대한 관심을 분산시키면서도 싫증을 내지 않았으며 끝내 변론에 능하다는 것으로 이름을 날렸던 것이다. 안타깝도다! 혜시는 재능을 가지고도 방탕하게 행동하여 참된 도를 터득하지 못하였고, 만물을 좇으면서 도의 근본으로 돌아올 줄 몰랐다. 이는 메아리를 막겠다고 소리를 지르고, 형체와 그림자를 경주시키려 한 것이었으니 안타깝도다!

 

3.       내가 저자라면

 

장자는 내편 외편 잡편으로 나뉘어 33 241장으로 편성되었다. 내편을 장주가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나머지는 문인 제자 또는 도가 학술을 신봉하는 자들이 쓴 것으로 보고 있다. 제자백가의 많은 작품중 특히 장자는 하나의 문학적인 상상력을 가지고 봐야하는 책이다. 다른 사상가에 대한 비판의 글도 중간중간 눈에 띤다. 문자로 쓰여진 문학작품속에 깊이를 알 수 없는 뜻을 담고 있는 책이다. 책을 접하는 독자의 앎에 따라 통찰의 정도에 따라 다른게 다가오는 책일것이란 생각이 든다. 한 두 번 읽고 장자를 말함은 어불성설이다.

 

목차

[내편]

1.       소요유

2.       제물론

3.       양생주

4.       인간세

5.       덕충부

6.       대종사

7.       응제왕

[외편]

8.       병무

9.       마제

10.   거협

11.   재유

12.   천지

13.   천도

14.   천운

15.   각의

16.   선성

17.   추수

18.   지락

19.   달생

20.   산목

21.   전자방

22.   지북유

[잡편]

23.   경상초

24.   서무귀

25.   칙양

26.   외물

27.   우언

28.   양왕

29.   도척

30.   설검

31.   어부

32.   열어구

33.   천하

[부록] 장자관련자료

IP *.217.21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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