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세린
  • 조회 수 3067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12년 12월 17일 10시 50분 등록

절대적인 자유를 꿈꾸다

장자

장자 지음/ 김학주 옮김

1. 저자에 대하여

장자의 생애에 대해서는 확실한 기록이 별로 없다. 있는 것을 근거로 이야기 해보면 장자의 이름은 주周이고 자는 자휴子休이며, 몽(蒙) 사람이다. 일찍이 몽의 칠원의 관리자 노릇을 했다. 그리고 양나라 혜왕 및 제나라 선왕과 같은 시대 사람이었다. 그의 학설은 노자를 근본으로 하였으며, 그의 저서는 10여만 자에 이르는데, 대부분이 다른 일에 빗대어 얘기하는 우언寓言으로 이루어져 있다.

장자는 유교의 예교 사상이 지배해온 중국에서, 언제나 인간 본연의 위치에서 ‘자유’를 추구했다. 그의 사상은 정체되려는 중국 문화에 끊임없는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장자가 ‘완전한 자유의 경지’를 추구함으로써 ‘예의’나 ‘인의’ 같은 인위적인 규범으로 사람들을 구속하려는 유교에 의한 지배에 숨돌릴 여유를 주었다는 뜻이다. ‘완전한 자유의 경지’란 사람들을 둘러 싸고 있는 모든 행위와 사상의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한다. 장자는 사람이 타고난 그대로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부담조차도 거부하면서 순수한 자연에 모든 것을 맡기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살아 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장자자 유교에서 주장하는 어짊이나 의로움 같은 것도 사실은 사람의 본성을 그르치는 면에서 도적질 같은 악덕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하면 사람들은 일종의 전율과 함께 통쾌감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장자>> 33편에 실려 있는 내용은 모두가 일반적인 중국 사람들의 사상이나 행동 속에 발견되는 생각의 일부분이다. <<장자>>는 동양적인 것, 즉 올바른 자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꼭 읽어야만 할 책이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내편內篇

제1편 어슬렁어슬렁 노님 (소요유 逍遙遊)

p37

2 아지랭이나 먼지는 생물의 숨결에도 날린다. 하늘이 파란 것은 그 것이 본래의 빛일까? 그것이 멀어서 끝이 없기 때문일까? 그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아도 역시 이와 같을 따름일 것이다.

또한 물의 깊이가 깊지 않다면 큰 배를 띄울 만한 힘이 없을 것이다. 한 잔의 물을 웅덩이에 부어 놓으면 곧 지푸라기가 그곳에 배가 되어 뜨지만, 잔을 놓으면 땅에 붙어 버릴 것이다. 물은 얕으데 배가 크기 때문이다. 바람의 쌓임이 두껍지 않다면 거기에 큰 날개를 띄울 힘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구만 리다 올라가면 바람이 그만큼 아래에 있게 되어 그렇게 된 다음에야 이제 바람을 탈 수 있게 된다. 푸른 하늘을 등짐으로써 아무런 거리낌이 없게 된 다음에야 이제 남쪽으로 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해설] 크고 작은 것도 사람들이 지닌 기준에 의하여 상대적으로 생기는 것이지 본시부터 큰 것과 작은 것의 구별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역시 사람들이 크다는 것은 모두 조건이 커야지만 제 구실을 하게 되고, 작은 것은 작은 조건 아래에서도 제 구실을 한다. 따라서 크고 작다는 것은 어떤 물건이 다른 조건들과 비교될 때 생기는 개념이지 본시부터 크고 작은 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p40

4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하고, 짧은 동안 사는 자는 오래 사는 자에 미치지 못한다. 어떻게 그러함을 아는가? 아침 버섯은 아침과 저녁을 알지 못한다. 쓰르라미는 봄과 가을을 알지 못한다. 이것들은 짧은 동안 사는 것들이다.

초나라의 남쪽에 명령이란 나무가 있는데, 오백 년을 한 봄으로 삼고 오백 년을 한 가을로 삼는다고 한다. 태고적에 대춘이란 나무가 있었는데, 팔천 년을 한 봄으로 삼고 팔천 년을 한 가을로 삼았다고 한다.

그리고 팽조는 지금까지도 오래 산 사람으로 특히 유명하다. 보통 사람들이 그에게 자기 목숨을 견주려 한다면 또한 슬픈 일이 되지 않겠는가?

해설] 사람이란 사람으로서의 분수를 올바로 알아 처신해야지 목숨이 소중하다고 해서 칠백 년을 산 팽조와 자기의 생애를 견주어 보면 그의 삶은 비참한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결국 대비에서 생기는 크고 작다는 등의 판단이 사람들의 불행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p43

6 그러므로, 지혜는 한 가지 벼슬을 감당할 만하고, 행실은 한 고을에서 뛰어나고, 덕은 한 임금을 모시기에 합당하고, 능력은 한 나라의 신임을 받을 만한 사람이 자신을 보는 것도 역시 이 안 새와 같다. 그런데 송영자는 그런 사람들을 보며 픽 웃었다. 그는 또 온 세상이 칭찬한다 해도 더 신나지 않았고, 온 세상이 비난을 한다 해도 더 기죽는 일이 없었다. 그는 자기 자신과 밖의 일의 분수를 일정하게 알고 영예와 치욕의 한계를 분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 그는 세상 일에 대하여 급급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직도 완전하지 못한 점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극한 사람은 자기가 없고, 신 같은 사람은 이룬 공이 없고, 성인은 이름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해설] 사람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일반 사람들의 가치 기준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결국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뛰어난 사람 위에는 더 훌류한 사람이 있고, 다시 그 위에는 바람을 타고 다니는 열자 같은 사람이 있다. 이들은 결국 자기가 설정한 가치 기준 때문에 언제나 그 기준에 얽매여 진정한 자유로운 인간이 되지 못한다. 진정 자유로운 훌륭한 사람은 일반 세상의 가치 기준을 초월한다. 열자 같은 신선도 바람을 타야만 함으로 완전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못된다. 그래서 도를 닦은 지극한 사람은 자기의 존재조차도 잊게 되고, 신묘한 능력을 지닌 신인은 사람들이 의식도 못할 큰 일을 자연의 변화처럼 이룩하며, 지혜와 덕이 많은 성인은 세상에 이름조차도 잘 알려지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판단 기준으로서는 그들의 위대함이나 업적과 공헌은 도저히 헤아릴 수도 없는 것이다.

p47 7에 대한 해설

사람이란 각기 자기가 살아 나갈 분수와 방식이 있다. 그러니 되도록 쓸데없는 명분에 사로잡히지 말고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 천자라는 것은 만인이 우러러보는 높은 지위이지만, 인간에게는 별로 쓸데없는 명분이라고 처리해 버리는 작자의 글에서 진실한 인간의 모습을 추구하는 그의 의기가 느껴진다. 전설에 의하면 허유는 요임금의 말을 듣고 나서 더러운 말이 귀를 더럽혔따 하여 기산 아래 영수로 내려가 자기 귀를 씻었다 한다. 마침 그 때 소에게 물을 먹이러 왔던 소부는 영수의 물이 더러워졌다 하여 다시 소를 상류로 끌고 올라가 소에게 물을 먹였다 한다.

p51

10 혜자가 장자에게 말하였다.

“위왕이 큰 박씨를 내게 주었소. 내가 그것을 심었더니 자라서 다섯 섬들이의 열매가 열렸소. 여기에 물이나 장을 넣어 보니 물러서 제대로 들 수가 없었소. 그것을 쪼개 바가지를 만드니 펑퍼짐하기만 해서 아무것도 담을 수가 없었소. 정말로 휑하니 크기만 해서 나는 그것을 쓸 곳이 없다고 여기고 부숴 버렸소.”

장자가 말하였다.

“선생께서 큰 것을 쓰는 법이 정말 졸렬하군요. 송나라 사람 중에 손이 트지 않는 약을 잘 만드는 사람이 있었는데 대대로 솜을 빠는 일에 종사하였소. 한 손님이 그 얘기를 듣고서 처방을 백금으로 살 것을 제의하였소. 그는 가족들을 모아 놓고 상의하였소. ‘우리는 대대로 솜을 빨았지만 겨우 몇 금을 버는데 불과했다. 지금 하루 아침에 그 기술을 백금에 사겠다니 처방을 그에게 내주자.’ 이래서 손님은 그 처방을 얻어 가지고 오나라 임금에게 가서 유세를 하게 되었다오. 마침 월나라가 침범해 와서 오나라의 임금은 그를 장수로 삼았소. 겨울철에 월나라 군사들을 물에서 맞아 싸워 크게 패배시켰소. 그 결과 그는 오나라에서 땅까지 봉해 받았소. 손을 트지 않게 하는 방법은 같은데도 어떤 이는 나라의 땅을 봉해 받고, 어떤 이는 솜을 빠는 일을 면치 못했으니, 이것은 쓰는 방법이 달랐기 때문이오. 지금 당신에게 다섯 섬들이 큰 박이 있다면 어찌하여 그것을 큰 배로 삼아 강호에 띄워 둘 생각을 하지 않소? 그리고는 그것이 펑퍼짐하여 아무것도 담을 것이 없는 것만을 걱정했으니, 선생은 옹졸한 마음을 지닌분이구려.”

해설] 보통 사람이 너무 커서 쓸 곳이 없다고 생각되는 것도 더 큰 안목에서 보면 나름대로 쓸 곳이 있다. 이른바 ‘무용의 쓰임’인 것이다. 일반 사람들이 지니는 물건의 작용에 대한 기대를 초월할 때, 모든 물건은 제각기 모두 쓰일 곳이 있게 된다. 쓰일 곳이 생길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더 크고 올바르고 참된 쓰임을 지니게 될 것이다.

p55 11의 해설

쓸데가 없다는 무용이야말로 크게 쓰일 수 있는 것임을 강조한 대목이다. 사람들이 쓸 곳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수록 일반적인 관점을 뛰어넘는 안목에서 볼 때에는 더욱 크게 쓰일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속된 세상의 가치 판단 기준이나 속된 생각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노니는 경지에 처신 하는 것’이 ‘어슬렁어슬렁 노님’이다. 사람의 이성을 초월하여 크고 작다든가 좋고 나쁜 것을 분별하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무위 자연’의 세계에 몸을 둘 것을 가르치는 것이 이 첫 장의 요지이다.

제2편 모든 사물은 한결같음 (제물론薺物論)

‘제물’이란 모든 사물을 한결같이 똑같은 것으로 본다는 뜻이다. 세상의 일반적인 가치관을 초월하여 높은 경지에서 볼 때, 모든 사물은 한결가이 보이는 것이다.

p60

2 큰 지혜를 지닌 사람은 여유가 있지만 작은 지혜를 지닌 사람은 남의 눈치만 본다. 위대한 말은 담담하고 너절한 말은 수다스럽기만 한다. 잠잘 때에는 혼백에 의해 꿈을 꾸고, 깨어나면 몸에 의해 활동한다. 외물을 접하게 되면 어지러워져 매일처럼 마음은 갈등을 일으킨다. 그렇지만 너그러운 자도 있고 심각한 자도 있으며 꼼꼼한 자도 있다. 두려움이 작을 때에는 두려워 떨지만 두려움이 크면 멍청해진다.

쇠뇌의 줄을 튕기는 것처럼 그것이 튀어나온다는 말은 그들이 시비를 가릴 적에 알맞은 표현이다. 신에게 맹세한 것처럼 그것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는 말은 그들이 남을 이기려는 입장을 지키는 것을 잘 표현한 말이다. 가을이나 겨울처럼 쇠해져 간다는 말은 그들이 날로 쇠약하고 있음을 잘 표현한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하는 일에 자꾸만 빠져 들어가 다시는 돌이킬 수 없게 된다. 묶여진 것처럼 그들의 욕망에 억눌린다는 말은 그들이 늙으면서 시들어져 감을 표현한 것이다. 죽음에 가까워진 자의 마음은 다시 소생케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해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모두 자기 위주의 욕망이나 지혜 때문에 일생을 불안 속에 보낸다. 작은 지혜가 있고 말에도 작은 것이 있다고 했지만,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이러한 작은 버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p62

3 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움과 걱정과 탄식과 변덕과 고집스러움 및 경박함과 방탕함과 뽐냄과 허세 같은 사람의 마음이, 음악이 공간에서 생겨나고 버섯이 수증기로 말미암아 자라나는 것처럼, 밤납으로 우리 앞에 서로 엇바뀌어 나타나지만, 그러나 그 싹이 트는 곳을 알지 못한다. 아아, 안타까워라! 아침 저녁으로 이것들이 나타남은 그 근원이 있어서 생기는 것이 아닌가!

해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감정이 있지만, 그 감정이 어디에 근원을 두고 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감정이 우리 눈앞에 나타나고 있는 이상, 그 근원도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 근원은 참된 우주의 지배자인지도 모른다. 장자는 그러한 감정과 감정의 근원의 관계를 자연과 주재자의 관계로까지 연결짓고 있다.

사람의 몸도 마찬가지이다. 몸의 여러 부분은 모두가 개인의 뜻에 의하여 움직여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움직이고 있는 참된 지배자는 따로 있는 듯하다. 이 몸과 지배자도 자연과 자연의 주재자의 관계로 발전된다.

따라서 사람은 몸과 마음의 움직임이나 상태가 자연과 합치되어야 한다. 자기 마음이나 지혜에 바탕을 둔 감정이나 행동이 뜻 없는 것이라는 논리가 여기에서 이루어질 근거를 갖게 되는 것이다.

p65 4의 해설

사람이란 이 세상에 한 번 태어났으면 자연스럽게 살다가 죽으면 된다는 것이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외부 세계와 항상 마찰을 일삼거나, 평생을 고달프게 살아 가는 자들처럼 가련한 사람들은 없다. 또 몸이 늙는다고 해서 마음까지도 이를 따라 늘 근심하며 함께 늙어갈 필요는 없다. 자연스러우면 그뿐이라는 것이다.

p67

6 말이란 소리가 아니다. 말이란 것은 말로 어떤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나, 그 말로 표현하는 생각은 일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 과연 말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본시부터 말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해설] 올바른 말은 보통 사람들의 시비를 초월할 수 있는 밝은 지혜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p70 7의 해설

세상 사람들이 좋다 나쁘다, 또는 크다 작다 하는 판단은 모두가 본질과는 상관 없는 상대적인 것이다. 따라서 상대적인 것을 초월하여 ‘밝은 지혜’를 바탕으로 하여 자연과 융화될 때, 비로소 참다운 사실의 파악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p70~71

8 천지는 한 개의 손가락과 같은 것이다. 만물은 한 마리의 말과 같은 것이다.

가능한 것은 할 수 있고, 불가능한 것은 할 수 없다. 도가 행해짐으로써 이루어지고, 물건은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음으로써 그렇게 되는 것이다. 어찌하여 그렇게 되는가?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어찌하여 그렇게 되지 않는가?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다. 물건에는 본시부터 그렇게 될 요소가 담겨져 있으며, 물건에는 본시부터 가능한 요소가 간직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는 물건이란 없으며, 그렇게 가능하지 않은 물건이란 없는 것이다.

해설] 이것들은 모두 그 나름대로의 의의를 지닌 개연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p72

9 나누어지는 것은 다른 면에서는 이루어지는 것이 된다. 이루어지는 것은 다른 면에서는 파괴가 된다. 모든 물건에는 이루어지는 것과 파괴가 없으며 다시 통하여 한 가지 것이 된다. 오직 통달한 사람만이 모든 것이 통하여 한 가지 됨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개인의 판단을 사용하지 않고 보편적인 영원한 것에 일체를 맡겨 버린다.

해설] 크게 보면, 크고 작고 흉하고 아름다운 것이란 본시는 세상에 없는 것이다. 또한 완성도 파괴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얕은 지혜로써 상대적인 기준에 의하여 이러한 판단을 내리고는 기뻐하거나 걱정하기도 한다.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다. 모두가 한 가지 ‘도’로 통한다. ‘도’란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p74

10 정신과 마음을 통일하려고 수고를 하면서도 모든 것이 같음을 알지 못하는 것을 ‘아침에 세 개’라고 말한다. 무엇을 ‘아침에 세 개’라고 하는가? 옛날에 원숭이를 기르던 사람이 원숭이들에게 도토리를 주면서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 주겠다”고 하자 원숭이들은 모두 화를 냈다. 다시 “그러면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 주겠다”고 하자 원숭이들은 모두 기뻐하였다. 명분이나 사실에 있어 달라진 것이 없는데도 기뻐하고 화내는 반응을 보인 것도 역시 그때문이다. 그래서 성인은 모든 시비를 조화시켜 균형된 자연에 몸을 쉬는데, 이것을 일컬어 ‘자기와 만물 양편에 다 통하는 것’이라 한다.

해설] 만물은 본질적으로 모두 같다.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와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분별하지 못하고 화내고 기뻐하는 원숭이들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밖의 물건이나 일에 구애됨이 없이 자연과의 조화 속에 잘 어울려 살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p79 시작이라는 것이 있다면 일찍이 시작되지 않았던 적이 있을 것이며, 일찍이 시작되지 않았던 그 이전도 있을 것이다. 있는 것이 있고 없는 것이 있다면 일찍이 있고 없는 것도 없었던 그 이전도 있을 것이다. 갑자기 없는 것이 존재하게 되는데, 그때에도 있고 없는 것 중에 과연 어느 것이 있고 어느 것이 없는지는 알지를 못한다. 지금 내게는 이미 이론이 있다. 그러나 내가 전개한 논리 중에 과연 이론이 존재하는것 일까, 과연 이론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알 수가 없다.

해설] 사람들의 인식이나 평가는 모두 완전한 것이 못 된다. 사람들의 인식을 바탕으로 한 있고 없는 것, 또는 평가를 바탕으로 한 올바른 이론이나 궤변 모두 어느 것이 진실한 것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불완전한 인식과 평가를 초월할 수 있어야만 참된 사람으로 존재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자기의 이론조차도 초월하려는 장자의 자세가 철저하다.

p81

15 말에는 본시부터 법도가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말에는 구별이 생기는 것이다. 그 구별에 대하여 말해 보고자 한다. 말에는 왼편이 있고 오른편이 있으며, 이론이 있고 설며잉 있으며, 분석이 있고 분별이 있으며, 대립이 있고 다툼이 있다. 이것을 ‘여덟 가지 덕’이라 말한다. / 성인들은 모든 것을 마음 속에 품고 있으나, 보통 사람들은 모든 일을 분별함으로써 자기를 내세우려 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분별하는 사람들은 옳게 보지 못하는 면이 있다는 것이다.

해설] ‘도’에는 본시 어떤 구별이나 한계가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의 말에는 여러 가지 구별이 있다. 자기의 이론을 펴기도 하고 남과 다투기도 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사람들이 올바른 ‘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데서 이러한 말의 구별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p88 18에 대한 해설

세상의 평가나 판단은 뜻없는 것이다. 심지어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 조차도 정말로 알고 모르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연이란 큰 입장에서 사람들의 모든 평가나 판단을 초월해야 한다는 것이다.

p89 19에 대한 해설

‘지극한 사람’은 장자가 이상으로 받드는 인간상이다. 그는 뜨거움이나 추위는 물론 죽음과 삶까지도 초월하여 이 세상 일에 초연하다. 따라서 이로움이나 해로움 같은 것은 그의 마음이나 행동을 조금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다.

p96 23에 대한 해설

사람들은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하고 논쟁을 하며 자기 주장을 내세운다. 그러나 크게 보면 어떤 누구의 논리가 옳은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논리조차도 초월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이성이나 논리는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p98 26 옛날에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 그는 나비가 되어 펄펄 날아다녔다. 자기 자신은 유쾌하게 느꼈지만 자기가 장주임을 알지 못하였다. 갑자기 꿈을 깨니 엄연히 자신은 장주였다. 그러니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던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되어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장주와 나비에는 반드시 분별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을 ‘만물의 조화’라 부른다.

제3편 삶을 길러 주는 주인 (양생주養生主)

우리 몸이란 생명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며, 마음이나 지각은 또 신경의 작용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몸이나 마음은 모두 생명의 주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자기 몸이나 마음에 따라 움직이는 일 없이 언제나 자연을 따르고 사물을 거스르지 않을 때, 비로소 행복한 인생의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p101

1 우리의 삶에는 한(한계)이 있으나 앎에는 한이 없다. 한이 있는 삶을 가지고 한 없는 앎을 뒤쫓음은 위태로운 일이다. 그런데도 앎을 추구하는 자가 있다면 위태로울 따름인 것이다.

해설] 사람들은 앎을 추구하며 똑똑한 체한다. 그러나 한이 있는 인생으로서 무한한 지식을 추구하면서 똑똑한 체하려는 것 자체가 비극이라는 것이다. 앎을 버려야만 참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p103

3 지금에 이르러서는 저는 정신으로 소를 대하지 눈으로는 보지 않습니다. 감각의 작용은 멈춰 버리고 정신을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천연의 조리를 따라서 큰 틈을 쪼개고 큰 구멍을 따라 칼을 찌릅니다. 소의 본래의 구조에 따라 칼을 쓰므로 힘줄이나 질긴 근육에 부닥뜨리는 일이 없습니다. 하물며 큰 뼈에야 부딪치겠습니까? 훌륭한 백정은 일 년마다 칼을 바꾸는 데 살을 자르기 때문입니다. 보통 백정들은 달마다 칼을 바꾸는데 뼈를 자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의 칼은 십구 년이 되었으며, 그 사이 잡은 소는 수천 마리나 됩니다. 그러나 칼날은 숫돌에 새로 갈아 내온 것과 같습니다. 소의 뼈마디엔 틈이 있는데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을 틈이 있는 곳에 넣기 때문에 횡하니 칼날을 움직이는데 언제나 반드시 여유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십구 년이 지나도 칼날은 새로 숫돌에 갈아 놓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뼈와 살이 엉긴 곳을 만날 때마다 저도 어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조심조심 경계를 하면서 눈은 그곳을 주목하고 동작을 늦추며 칼을 매우 미세하게 움직입니다. 그러면 뼈와 살이 후두둑 떨어져 흙이 땅 위에 쏟아지듯 쌓여집니다. 그러면 칼을 들고 서서 사방을 둘러보며 만족스런 기분에 잠깁니다. 그러고는 칼을 닦아 잘 간수해 둡니다.

해설] 모든 일에 자기를 버리고 대상에 대한 의식 없이 자연의 원리를 따라 행동하는 것이 바로 삶을 기르는 방법이라는 뜻이다. 자연을 따르되 백정이 칼을 놀릴 때처럼 어려운 고비에는 스스로 두려운 듯 경계하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한다 하였다. 이는 자연을 따르는 어려움을 인식시키려는 뜻일 것이다.

p107 4의 해설

삶을 기르는 것은 완전한 몸을 지님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분수대로 자연을 따름으로써 이루어진다. 외다리라고 불해앟고 두 다리가 멀쩡하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꿩이 우리 속에서 아무리 잘 먹고 지낸다 하더라도 자연 속에서 고생하며 먹이를 찾아다니는 생활보다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나 같다는 것이다.

p109

6 기름은 촛불이 되어 타 없어져 버리지만, 불은 옮겨 붙여 주면 다할 줄 모르게 된다.

해설] 이 대목에 대한 해설은 학자에 따라 구구하다. 그러나 여기에서 기름과 촛불은 사람의 몸과 여러 가지 사물에 비유한 것이고, 불은 여기에서 말하는 정신 곧 ‘삶을 기르는’ 바탕을 뜻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바라는 사물이나 사람의 몸에는 한계가 있지만 ‘삶을 기르는’ 바탕이 되는 정신은 영원히 존속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제4편 사람들 세상(인간세人間世)

그는 사회 생활을 원만히 해 나가기 위해서는 개인의 마음을 텅 비게 만들어야 하며, 그 뒤에는 ‘무용無用의 쓰임’의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고 보았다.

p112

1 공자가 말하였다. “흠, 네(안회)가 가 보았자 형벌이나 받게 될 것이다. 도란 잡되지 않아야 한다. 잡되면 일이 많아지고, 일이 많아지면 어지러워지고, 어지러우면 근심이 생기고, 근심이 생기면 구제해 줄 수도 없게 된다. 옛날의 지극한 사람은 먼저 자기 자신을 살피고 난 뒤에야 남의 일을 상관하였다. 자기 자신을 살펴본 결과가 불안정한데 난폭한 사람이 하는 짓을 상관할 겨를이 어디 있겠느냐?”

p114

2 “또한 그대는 덕이 그 진실함을 잃기 쉽고, 지혜는 지나치게 되기 쉬운 까닭을 아는가? 덕은 명성 때문에 진실성을 잃기 쉽고, 지혜는 경쟁심 때문에 지나치게 되는 것이다. 명성은 서로를 손상시키는 것이고, 지혜는 다툼의 연모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는 흉기이므로 지나치게 행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덕이 두텁고 신의가 많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의 기분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명성을 두고 다투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람들의 마음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억지로 어짊과 의로움을 가지고 사람들을 바르게 하고자 하는 논의를 난폭한 사람 앞에서 하는 것은 남의 악함을 이용하여 자신의 훌륭한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을 ‘남을 해치는 사람’이라 부른다. 남을 해치는 사람이라면 남도 반드시 그를 해치게 될 것이다. 그대는 아마도 남들로부터 재해를 받게 될 것이다.”

p127

8 공자가 말하였다. “천하에는 큰 법칙이 두 가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운명이며, 다른 하나는 의로움입니다. 자식이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은 운명입니다. 그것은 마음으로부터 풀어 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은 의로움입니다. 어디를 가나 임금이 없는 곳이 없으며, 하늘과 땅 사이에서는 그 관계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이것을 큰 ㅓ법칙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p129

9 내가 들은 바를 말씀드리지요. 무릇 사람의 교제란 가까운 나라에 대해서는 반드시 신의로써 접촉해야 하고, 먼 나라에 대해서는 반드시 말로써 충실함을 표시해야 합니다. 그 말은 반드시 누군가가 가서 전해 주어야 합니다. 양편이 다 기뻐하거나 양편이 다 노여워할 말을 전한다는 것은 천하에 어려운 일입니다 양편이 다 기뻐하는 것이면 반드시 지나치게 칭송하는 말이 많을 것입니다. 양편이 다 노여워 하는 것이면 반드시 지나치게 비판하는 말이 많을 것입니다. 모든 지나친 것은 거짓된 것과 같습니다. 거짓된 것이면 그것을 믿는 이들이 적습니다. 믿는 이가 적으면 곧 말을 전하는 사신은 재앙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격언에 말하기를 사신이 일상적인 사실만을 전하고 지나친 말은 전하지 않는다면 거의 잘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p134

12 “당신은 사마귀를 알지 못합니까? 화가 나면 그의 집게를 벌리고 수레바퀴 앞에 막아 서서 자기가 깔려 죽을 것도 알지 못합니다. 자기 재질의 훌륭함만 믿고 있는 것이지요. 경계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자기의 훌륭함을 크게 뽐내면서 상대방의 권위를 범하면 위태로워집니다.”

p137

13 “그대는 나를 어디에다 견주려는 것인가? 그대는 나를 좋은 재목에 견주려는 것인가? 돌배, 배, 귤, 유자나 과일이 열리는 나무나 풋과일 따위는 열매가 익으면 따게 되고, 딸 때에는 욕을 당하게 된다. 큰 가지는 꺾어지고 작은 가지는 휘어진다. 이들은 자기의 능력으로 자기의 삶을 괴롭히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타고난 목숨대로 끝까지 살지 못하고 중간에 일찍 죽어 버리는 것이다. 세속에서 스스로 얻어맞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어떤 물건이든지 이와 같지 않은 것이란 없다. 나는 쓸곳이 없기를 바라 온 지가 오래 되었다. 거의 죽을 뻔하다가 이제서야 뜻대로 되어 쓰일 곳 없는 것이 나의 큰 쓰임이 된 것이다. 만약 내가 쓸데가 있었다면 어찌 이처럼 커질 수가 있었겠는가? 또한 그대와 나는 모두가 같은 물건이다. 어찌해서 그대는 나를 딴 물건으로 보는가? 그리고 거의 죽어 가는 쓸모 없는 사람이 또 어찌 쓸데없는 나무를 알 수가 있겠는가?

p144~145

17 공자가 초나라로 갔는데 초광 접여가 객사 문앞을 지나가면서 노래하였다.

“봉새야, 봉새야,

어찌하여 그대의 덕을 쇠하였나?

장래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이고

과거는 돌이킬 수 없느 ㄴ것.

천하에 올바른 도가 행해지면

성인은 교화를 이룩하고,

천하에 올바른 도가 행해지지 않으면

성인은 자기 삶을 보전한다.

지금 시국에선

근근이 형벌 면하기도 바쁘다.

복은 새깃보다도 가벼운데

아무도 그것을 잡을 줄 모르고,

화는 땅보다도 무거운데

아무도 그것을 피할 줄 모른다.

아서라, 아서라.

덕을 사람들에게 내세우는 짓을!

위태롭고 위태롭도다.

땅을 가려가며 쫓아다니는 짓이!

밝음을 가리고 가려서

나의 갈 길을 그르치지 말아라.

내 가는 길 물러났다 돌아갔다 하며

나의 발을 다치지 않게 하라.

산의 나무는 스스로 자라 베어지게 되고,

기름 불은 스스로 타 버린다.

육계는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잘리고,

옻나무는 옻을 쓸 수 있는 것이어서

껍질이 벗겨진다.

사람들은 모두 쓸데 있는 것의 쓰임을 알지만

쓸데없는 것의 쓰임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도다.”

해설] 어떻든 어지러운 세상을 구하려고 사방을 쫓아다니는 공자의 위태로움을 노래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자에 대한 접여의 노래를 빌려 ‘쓸데 없는 것의 쓰임’ 이론을 결론짓고 있다.

제5편 덕이 속에 차 있는 증험 (덕충부 德充符)

덕충부란 덕이 사람의 마음 속에 충만하게 되면 그 증험이 밖으로 자연히 나타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덕이 안으로 찬 사람은 밖으로 자기 형체를 잊게 되며, 형체를 잊어야면 자연의 변화에 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편에서는 겉모양은 불완전한 불구이면서도 안으로 완전한 덕을 갖춘 사람들의 얘기를 보기로 들고 있다. 이것은 겉모양을 보고 사람을 평가하려는 세상 사람들의 상식을 비웃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p149

1 “죽음과 삶도 큰 문제이긴 합니다만, 그러나 그 분(노나라에 형벌로 발을 잘리 왕태)은 그것에 의해 변화를 받지 않습니다. 비록 하늘과 땅이 떨어지고 뒤엎어진다 하더라도 역시 그 때문에 그 분은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의지할 것 없는 참된 경지를 잘 알고 있어서 밖의 사물에 의해 변화를 받지 않습니다. 밖의 사물의 변화를 따르면서 그의 근본을 지키는 분인 것입니다.”

p151

2 사람들은 흐르는 물을 거울로 삼지 않고 멈춰 있는 물을 거울로 삼습니다. 멈춰 있는 물만이 물건들이 와서 멈추게 하고 사람들을 모여들어 멈추게 합니다. 땅에서 생명을 받고 있는 것 중 오직 소나무와 잣나무만이 올바라서 겨울이나 여름이나 푸른 것입니다. 하늘에서 생명을 받고 있는 것 중 오직 순임금만이 홀로 올바라서 만물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삶을 올바르게 할 수 있어서 여러 사람들의 삶을 바로잡아 주었던 것입니다.

근본적인 덕을 지니고 있는 징험은 두려움이 없는 충실한 상태를 이룩합니다. 한 사람의 용사가 많은 군사들 속으로 돌진해 들어갑니다 .용감하다는 명성을 추구하기 위해 스스로 행동하는 사람도 그와 같을 수 있습니다. 하물며 하늘과 땅을 다스리고 만물을 감싸며, 자기 육체는 잠시 맡겨진 것에 불과하고 귀와 눈으로 듣고 보는 것도 가상이며, 앎과 알지 못하는 것도 한 가지라 여김으로써 마음이 죽어 버리는 일이 없는 사람이야 어떠하겠습니까? 그는 또한 날을 가려 이승을 떠나갈 것이고, 사람들은 그를 따를 것입니다. 그가 또 어찌 사물로써 자기 일을 삼으려 하겠습니까?

해설] 사람은 겉모양보다도 그 속마음이 중요하다. 겉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란 만물이 모두 한 가지라는 것이다. 육체는 불구라 하더라도 올바른 마음의 수양은 사람들을 따르게 만든다는 것이다.

p154

3 어찌할 수도 없는 일임을 알고서 운명을 따라 평안히 지내는 일은 오직 덕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일세. 예羿 의 활 사정 거리 안을 노닐면 그 가운데 있는 모두가 화살에 맞을 것이네. 그런데도 맞지 않는다는 것은 운명일세. 사람들 중에는 자기의 다리가 완전하다고 해서 내 불완전한 다리를 비웃는 사람이 많네. 나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지만 선생님 계신 곳에 가기만 하면 곧 다 잊고 돌아오게 되네. 선생님께서 훌륭함으로써 나를 씻어 주시는 것인지 내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네. 나는 선생님을 따라 공부한 지 19년이 되지만 내가 절름발이라는 것을 의식한 일이 없었네. 지금 당신은 나와 형체 속의 마음으로 공부하고 있으면서도, 당신은 내게 형체의 외모를 따지고 있으니 또한 잘못이 아니겠나?

p157

4 “제자들이여, 힘써야 한다. 무지로 말하면 절름발이인데도 배움에 힘씀으로써 전날 잘못한 행동을 다시 보충하려 하는데 하물며 온전한 몸을 가진 사람이 아니 하겠는가?”

해설] 지극한 사람은 자기를 특별히 드러내지 않고 죽음과 삶 및 옳은 것과 그릇된 것을 초월하는 마음가짐을 이룩한다. 공자처럼 명성을 추구하는 사람은 지인이 못 될 뿐더러, 그러한 명성의 추구는 자기 몸을 구속하는 형틀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공자와 절름발이를 대응시키고 있는 장자의 우화가 신랄하다.

p159

5 애태타. 남과 화합하기는 하지만 자기 주장을 내세우지는 않고, 명성은 그가 살고 있는 사방의 지역을 벗어나지 않고 있소. 그런데도 남녀들이 그의 앞에 모여들고 있소. 이것은 반드시 사람들과는 다른 점이 있기 때문일 것이오. 내가 그를 불러서 보니 과연 추함이 천하를 놀라게 할 만하였소. 내가 그와 더불어 한 달도 넘지 않게 지내자 나는 그의 사람됨에 마음이 끌렸고, 일 년이 넘지 않아 그를 믿게 되었소. 나라에 재상이 없기에 나는 나라를 그에게 맡기려 하였소. 걱정하는 듯하더니 응답했는데 아무일도 아닌 듯이 사양하는 것이었소. 나는 마침내 그에게 나라를 맡기려던 일을 부끄럽게 여기고 말았소. 얼마 안 있다가 그는 나를 떠나가 버렸소. 나는 멍하니 무엇을 잃어버린 느낌이었소. 이 나라에 함께 즐길 이가 없어진 것 같았소. 그는 어찌된 사람일까요?

(중략) 공자의 말. 지금 애태타는 말을 하지 않아도 남에게 믿음을 주고 아무 공로 없이도 남과 친근해집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나라를 내어 주면서도 오직 그가 받지 않을까 두려워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는 반드시 재질은 완전하면서도 덕을 겉으로 나타내지 않는 사람일 것입니다.

p162

6 애공이 말하였다.

“무엇을 가지고 재질이 완전하다고 말합니까?”

공자가 말하였다.

“죽음과 삶, 존속과 사라짐, 곤궁과 영달, 가난과 부, 어짊과 우둔함, 욕 먹음과 칭찬, 굶주림과 목마름, 추위와 더위, 이러한 것들은 일의 변화요 운명의 실현입니다. 낮과 밤이 눈앞에서 엇바뀌어지고 있지만 사람들의 지혜는 그 시작을 규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변화는 조화를 어지럽히지 못하고 마음 속으로 스며들지도 않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하여금 조화됨으로써 즐겁게 통달하여 충실함을 잃지 않게 하면, 밤낮으로 변화가 들어올 틈이 없게 되어 만물과 더불어 어울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만물과 접하여 마음에 조화를 이룩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재질이 완전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제6편 위대한 참 스승 (대종사大宗師)

대종사란 크게 높여야 할 참된 스승이라는 뜻으로 ‘도’를 가리킨다. 장자는 노자의 사상을 계승하여 ‘자연’이야말로 사람들이 법도로 삼아야 할 위대한 스승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p170

1 하늘이 하는 일을 알고 사람이 하는 일을 아는 사람은 지극한 사람이다. 하늘이 하는 일을 아는 사람은 타고난 대로 살아간다. 사람이 하는 일을 아는 사람은 그의 지각이 아는 일을 가지고 그의 지각이 알지 못하는 것을 길러 나가는 것이다. 그가 타고난 나이대로 다 살면서 중도에 일찍 죽지 않는 사람은 곧 앎이 지극하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걱정이 있다. 앎이란 것은 의거하는 데가 있은 연후에야 판단이 서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의거하는 데가 전혀 불안정된 것이다. 그러니 어찌 내가 말하는 하늘이 사람이 아님을 알 수가 있겠는가? 어찌 사람이 하늘이 아님을 알 수가 있겠는가?

p171

2 옛날의 ‘참된 사람’은 적은 일에도 거스르지 않고, 성공을 뽐내지 않으며, 일을 꾀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람은 잘못 되는 일이 있어도 후회하지 않으며, 잘 되어도 스스로 만족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은 높은 곳에 올라가도 떨리지 않고, 물에 빠져도 젖지 않고, 불 속으로 들어가도 뜨거워하지 않는다. 그의 앎이 도에까지 승화되면 이와 같이 되는 것이다.

해설] ‘참된 앎’이란 지각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사람의 모든 감정이나 욕망 또는 이롭고 해로운 것을 잊음으로써 순수한 자연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추위나 뜨거움은 물론, 죽음이나 삶까지도 그런 사람의 마음은 전혀 움직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p177 4의 해설] ‘참된 사람’은 모든 상대적인 것까지도 한 가지의 것으로 보고 자연스럽게 살아간다는 것이다.

p177

5 죽음과 삶은 운명이다. 밤과 낮이 일정하게 있는 것은 천연이다. 사람들이 관여할 수 없는 그런 일이 있는 것은 모두가 만물의 실정인 것이다. 그들은 특히 하늘을 아버지처럼 여기면서 몸소 그것을 사랑하고 있다. 하물며 더욱 뛰어난 것에 대해서야 어떠하겠는가? 사람들은 특히 임금은 자기보다 뛰어나다 생각하고 스스로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 하물며 참된 사람에게야 어떠하겠는가?

우물이 마르면 물고기들은 함께 땅 위에 모여 서로 물기를 뿜어 주고 서로 물거품으로 적셔 준다. 그러나 강물이나 호수 속에서 서로를 잊고 있던 때만 못한 것이다. 요임금을 기리고 걸왕을 비난하는 것은 차라리 두 사람을 다 잊고 올바른 도로 동화되는 것만은 못한 것이다.

대지는 우리에게 형체를 부여하고 삶을 주어 우리를 수고롭게 하고 있다. 늙게 만듦으로써 우리를 편안하게 해 주고, 죽음으로써 우리를 쉬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기의 삶을 잘 사는 것은 곧 자기의 죽음을 잘 맞이하는 길인 것이다.

p183~184

8 나는 도를 그대로 지킴으로써 그에게 도를 알려 주려 하였소. 사흘 뒤에는 천하를 잊게 되었는데 천하를 잊게 된 뒤에도 나는 도를 그대로 지켜 칠 일 뒤에는 만물을 잊게 되었소. 이미 만물을 잊게 된 뒤에도 나는 도를 그대로 지키기만 하였는데, 구 일 뒤에는 삶을 잊을 수 있게 되었소. 이미 삶을 잊게 된 뒤에는 아침 햇살처럼 깨달음이 열렸소. 깨달음이 열린 뒤에는 유일한 도를 볼 수 있게 되었소. 도를 볼 수 있게 된 뒤에는 시간의 변화가 없게 되었소. 시간의 변화가 없게 된 뒤에는 죽음도 없고 삶도 없는 경지에 들어가게 되었소.

삶의 욕망을 죽이는 사람은 죽지 않으며, 삶의 욕망을 살리는 사람은 살지 못하오. 그는 만물을 전송하지 않는 것도 없고, 마중하지 않는 것도 없으며, 파괴하지 않는 것도 없고, 생성시키지 않는 것도 없소. 그런 것을 ‘혼란 뒤에 안정된다’는 뜻의 영녕이라 부르오. 영녕이란 혼란한 뒤에야 이루어지는 것이오.

해설] 장자는 ‘도’, 곧 자연에 도달하는 방법으로는 오직 ‘무위’, 다시 말하면 일부러 하는 행동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며, 도를 깨치기 위한 특별한 수양법을 말하지 않는다. 수양을 하기 위해서는 노력을 해야 되겠지만, 장자에 있어서 노력은 작위요 인위이므로, 수양 그 자체가 부자연스러운 것이어서 버려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어떻든 ‘도’는 먼저 모든 인간적 욕망의 초월에서 얻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적인 욕망의 초월이 결과적으로 늙지 않고 죽지 않는다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 욕망과 결부되고 있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라 하겠다.

p186 “누가 무無를 머리로 삼고, 삶을 척추로 삼고, 죽음을 궁둥이로 삼을 수가 있겠는가? 누구든 삶과 죽음과 생존과 멸망이 한 가지임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와 더불어 친구가 될 것이다.”

해설] 무는 사람이 태어나기 전을 뜻한다. 위 문장은 사람이 태어나기 전과 살아 있을 때와 죽은 뒤를 일치시키는 비유이다. 이처럼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시간적인 제약을 초월하는 사람들 넷이 친구로서 모인 것이다.

p198 13의 해설] 절대로 아무런 차별도 없는 경지에 있어서는 삶과 죽음, 꿈과 현실의 사이에는 구별이 없다. 인생을 꿈으로 보는 사상은 모든 사물은 한결같음편의 ‘나비의 꿈’ 이야기에도 나온다.

p199

14 장님에게는 이목과 얼굴의 아름다움이 상관 없고, 판수(시각 장애인)에게는 여러 가지 채색과 무늬의 고움이 상관 없는 것이오.

p204 자상이 말하였다.

나는 나로하여금 이런 궁지에 몰리게 한 것이 누군가 생각해 보았으나 알 수가 없네. 부모라면 어찌 내가 가난하기를 바라시겠는가? 하늘은 사사로이 어느 개인만을 덮어 주지 않고, 땅은 사사로이 어느 개인만을 길러 주지 않으니, 하늘과 땅도 어찌 나를 가난하게 만드셨겠는가? 나를 이렇게 만든 사람을 찾아보았지만, 찾지 못했던 것이네. 그러나 이토록 궁지에 놓이게 되었으니 이것이 운명이란 것인 모양일세.

해설] 사람에 관한 모든 것, 가난하고 부한 것, 귀하고 천한 것 등은 모두가 운명에 의한 것이며, 이 운명의 주체는 하늘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며, 자연의 필연적이고 맹목적인 힘인 것이다. 그것을 맹목적이라고 하는 것은 차별하고 선택하는 것 같은 작용을 전혀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제7편 자연에 따르는 제왕 (응제왕應帝王)

응제왕이란 자기의 마음조차도 잊고 자연의 변화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있으면 그러한 수양에 응하여 제왕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p208 태씨처럼 모든 분별은 물론 자기 자신조차도 잃고 자연스럽게 되는 대로 살아 가는 것이 장자의 이상이다. 그리고 그런 참된 덕을 지녀야만 정말로 훌륭한 제왕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p209 새는 높이 낢으로써 주살의 가해를 피하고, 두더지는 두툼한 언덕 아래 깊이 굴을 파서 집이 불에 그을리고 파헤쳐지는 환난을 피하오. 그렇지만 이들 두 가지 짐승들은 전혀 지혜가 없는 것들이오.

해설] 천하는 법이나 권력의 강압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본성을 올바로 유도하는 것이 올바른 정치라는 것이다.

p212

4 노자가 말하였다.

“밝은 임금의 다스림은 공로가 천하를 뒤덮을 만하여도 자기 힘으로 한 것같이 보이지 않으며, 교화가 만물에 베풀어져도 백성들은 그것을 의식도 못한다. 훌륭한 공로가 있어도 명성이 드러나지 않으며, 만물로 하여금 스스로 기뻐하게 만든다. 헤아릴 수 없는 경지에 서서 아무것도 없는 세계에 노니는 것이다.”

해설] 도가에서는 사람들의 지혜나 노력에 의한 어떤 일의 성취도 무시한다. 따라서 정치도 사람의 지혜나 노력에 의하지 않고 자연에 따라 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훌륭한 임금의 자질로 뛰어난 지혜나 재주 또는 힘보다도 저절로 천하가 다스려지게 할 수 있는 ‘도’를 터득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p218 장자는 운명에 따라야 함을 말하고 있으면서도, 운명을 내다본다고 하는 무술이나 점술에 대해서는 완전히 부정적이었다. 후세의 도교에서는 노자와 장자를 그들의 시조로 받들어 모셨으나 장자는 보다 분명히 이와 같은 민간 신앙과는 사상에 있어 뚜렷한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외편 外篇

제8편 엄지발가락과 둘째발가락이 붙어 있는 사람 (변무)

이 편에서는 세상에는 아름답고 흉한 것이 있으나, ‘도’에는 아름답고 흉한 것은 물론 옳고 그른 것도 없다는 것을 설명하고, 군자의 소인 및 악인이나 절조가 있는 사람들에 대한 도가적인 평가를 꾀하고 있다.

p227

2 지극히 올바른 경지에 이른 사람은 그의 본성과 운명의 진실함을 잃지 않는다. 그러므로 합쳐져 있다 하더라도 쓸데없이 들러붙지 않고, 갈라져 있다 하더라도 소용 없이 덧붙어 있지는 않고, 길다 하더라도 남는 것이 있지 않고, 짧다 하더라도 부족하지 않다. (중략) 그러므로 본성이 길면 잘라 주지 않아도 되고, 본성이 짧으면 이어 주지 않아도 된다. 아무것도 걱정할 것이 없는 것이다.

p233 내가 말하려 하는 귀밝음이란 그가 남의 것을 듣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듣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눈밝음이란 것은 남의 것을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해설] 본시부터 타고난 대로 자연에 모든 것을 맡기고 사는 것이 가장 참된 삶의 길이라는 것이다. 어짋과 의로움 같은 훌륭하게 보이는 행동이나, 음악이나 미술에 뛰어난 재질 같은 것도 모두가 인위적인 행동에 속하는 이상은 사람의 본성을 해치는 일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아무리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 하더라도 인위적인 것은 훌륭한 것이 못 된다.

제9편 말 발굽

p239 1의 해설

말을 인공으로 기르느라고 말에게 인위적인 제약을 가하여 말은 얼마나 큰 피해를 입는지 모른다. 그처럼 사람들은 타고난 본성대로 살지 못하고 여러 가지 인위적인 제약으로 본성을 거슬러 올바로 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연에 모든 것을 맡겨 되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가장 올바로 사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p243 3의 해설

말이 말을 잘 다루는 사람들에 의하여 교활해졌듯이, 사람들은 성인이 어짊과 의로움으로 본성을 잃게 함으로써 어지러워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말의 비유는 앞 대목에서부터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노자가 말했듯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스스로 교화되도록” 하는 것이 이상적인 사회라는 것이다.

제10편 남의 상자를 열고 도둑질함

p248 “어디를 간들 도가 없을 수 있겠느냐? 남의 집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을 마음대로 알아 맞추는 것은 성인이다. 남보다 먼저 들어가는 것은 용기이다. 남보다 뒤에 나오는 것은 의로움이다. 도둑질해도 되는가 안 되는가를 아는 것은 지혜이다. 고르게 나누어 갖는 것은 어짊이다. 이 다섯 가지를 갖추지 않고서 큰 도적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하나도 없다.”

p252 음악의 음계도 어지럽히고, 악기들을 태워 없애고, 사광같은 음악가의 귀를 막아 버려야만 세상 사람들은 비로소 귀가 밝아질 것이다. 무늬를 없애고, 다섯 가지 채색을 흩뜨리고, 이주 같은 이의 눈을 붙여 놓아야만 세상 사람들은 ㅂ로소 눈이 밝아질 것이다. 갈고리와 먹줄을 부숴 버리고, 그림쇠와 굽은 자를 내버린 다음 공수 같은 사람의 손가락을 비틀어 버려야만 세상 사람들은 비로소 재주가 교묘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위대한 기교는 졸렬한 듯이 보인다”고 했던 것이다. 증삼과 사추의 행실을 깎아 버리고, 양자와 묵자의 입을 틀어막고 어짊과 의로움을 내던져 버려야만 세상 사람들의 덕은 비로소 현묘한 도와 함께 어울리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정말로 눈이 밝아지면 세상에는 눈부셔 보이지 않는 것이 없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정말로 귀밝게 되면 세상에는 들리지 않아 걱정되는 일이 없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정말로 지혜롭게 된다면 세상에는 미혹되는 일이 없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정말로 덕을 지니게 된다면 세상에는 편벽된 것이 없게 될 것이다.

제11편 있는 그대로 버려둠

p262 무위하여야만 사람의 본성과 운명의 진실함에 편안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몸을 천하를 다스리는 것보다 귀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천하를 맡겨도 괜찮다. 자기 몸을 천하를 다스리는 것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천하를 다스리게 해도 괜찮다.

p263 노자가 말하였다.

“그대는 삼가 인심을 교란시키지 말라. 인심이란 아랫사람을 밀쳐내고 위로 올라가려 하는 것이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은 서로 구속하고 서로 헤치려 한다. 부드러움은 억세고 강한 것을 유하게 만드는데, 사람들은 모나고 날카롭게 깎고 쪼으려고만 한다. 뜨겁게 달아오르면 타오르는 불길 같고, 차갑게 식으면 꽁꽁 언 얼음 같게 된다. 마음의 빠르기는 잠깐 사이에 이 세상 밖을 두 번 도는 정도이다. 가만히 있을 적에는 심연처럼 고요하지만, 움직이기 시작하면 하늘로 날아오른다. 성이 났다 뽐냈다 하여 잡아매 둘 수가 없는 것이 인심인 것이다.

해설] 여기서는 노자가 인심은 종잡을 수도 없이 변화가 많은 것임을 설명하고 있다.

p278

8 위대한 사람의 가르침은 형체에 그림자가 따르고 소리에 울림이 따르는 것같이, 의문이 있으면 거기에 응답을 하여 자기가 품고 있는 생각을 다 털어 놓는다. 그래서 온 천하의 반려가 된다. 그는 아무 소리도 없는 고요함에 몸을 두고, 일정한 방향도 없는 자유로운 행동을 한다. 허둥지둥 왔다갔다 하고 있는 그대들을 이끌어 무한한 경지에 노닐게 할 것이다. 그는 드나듦에 있어 의지하는 곳이 없고, 태양처럼 시작도 끝도 없다. 그의 신체의 모양으로 말할 것 같으면 만물과 크게 합동되어 있으며, 크게 합동됨으로써 자기가 없다. 자기가 없는

데 어찌 사물의 존재를 인식하겠는가? 존재를 인식하는 사람이란 옛날의 군자이며, 무만을 보고 있는 사람은 하늘과 땅의 벗인 것이다.

제12편 하늘과 땅(천지天地)

p284

1 그러므로 하늘과 통하는 것이 도이며, 땅에 따르는 것이 덕이며, 만물에 행해지는 것이 의로움인 것이다. 위에서 사람을 다스리는 것이 일이다. 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재주이다. 재주는 일에 지배되고, 일은 의로움에 지배되고, 의로움은 덕에 지배되고, 덕은 도에 지배되며, 도는 하늘에 의하여 지배된다. 그러므로 “옛날의 천하 사람들을 먹여 살리던 사람들은 아무런 욕망도 없는데도 온 천하가 만족하였고 아무 하는 일도 없는데도 온 만물이 변화하였고 고요히 있는데도 백성들은 안정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p297

8 태초에는 무無만 있었다. 유有도 없었고 명칭도 없었다. 일이 여기에서 생겨났는데, 일만 있고 형체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물건은 일로 말미암아 생겼는데, 그 작용을 덕이라 한다. 아직 형체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적에 일로부터 나뉘어지는 것이 잠시도 끊임이 없었는데, 이것을 명이라고 한다. 일이 유동함으로써 물건을 생성시키며, 물건이 생성되어 생리가 갖추어지는데, 그것을 형체라 한다. 형체는 정신을 보존하게 되며 제각기 원칙을 지니게 되는데, 그것을 본성이라고 한다.

본성이 닦여지면 덕으로 되돌아간다. 덕이 지극해지면 처음과 같아 진다. 같아진다는 것은 곧 텅 비게 된다는 뜻이며, 텅 빈다는 것은 곧 커진다는 뜻이다. 새가 주둥이로 우는 상태와 합치되는데, 새가 주둥이로 우는 상태에 합치된다는 것은 하늘과 땅에 합치된다는 뜻이다. 그 합치되는 상태는 흐리터분하여 어리석은 듯도 하고 흐리멍텅한 듯도 하다. 이것을 현묘한 덕이라 말하는 것이며, 크게 순조로운 상태와 같은 것이다.

p304 선생은 널리 배움으로써 성인의 흉내를 내고, 허망한 말로써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홀로 금琴을 뜯으면서 슬픈 노래를 함으로써 천하에 명성을 팔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까? 당신도 당신의 정신과 기운을 잊고 당신의 육체를 버린다면 거의 도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몸도 다스리지 못하면서 무슨 천하를 다스릴 겨를이 있다는 것입니까?

p305 도를 지키는 사람은 덕이 완전해야 되며, 덕이 완전한 사람은 몸이 완전해야 되고, 몸이 완전한 사람은 정신이 완전해야 된다. 정신이 완전한 것이 성인의 도이다.

삶을 타고나서 사람들과 나란히 행동하면서도 가는 곳을 알지 못하고 망연하면서도 순수하고 완전해야 한다. 공로와 이익과 기교 같은 것은 반드시 사람의 마음에서 잊혀져야만 한다. 그러한 사람은 그의 뜻이 아니면 가지 않고, 그의 마음이 아니면 행하지 않는다.

p313 그 자신이 어리석음을 아는 사람은 크게 어리석은 것은 아니다. 그 자신이 미혹된 것을 아는 사람은 크게 미혹된 것은 아니다. 크게 미혹된 자는 평생토록 자신의 잘못을 이해하지 못하고, 크게 어리석은 자는 평생토록 자신의 그릇됨을 깨닫지 못한다. 세 사람이 길을 가는데 한 사람이 미혹되어 있다면 목적지로 갈 수가 있다. 그것은 미혹된 자가 적기 때문이다. 세 사람 중 두 사람이 미혹되었다면 수고만 하지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한다. 그것은 미혹된 자가 우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온 천하가 미혹되어 있으니, 내가 비록 가려는 방향이 있다 하더라도 갈 수가 없다. 그러니 슬프지 아니한가?

p318 사람은 본성대로 살아야 한다. 어짊이나 의로움을 위하여 본성을 잃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과적으로 도둑질을 하기 위하여 본성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본성을 잃지 않으려면 개인의 욕망이나 감정ㅇ르 모두 버리고 자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자연과 화합되어 아무런 자기 의식도 없이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참된 본성이라는 것이다.

제13편 하늘의 도

p323

3 장자가 말하였다.

“나의 스승이여, 나의 스승이여! 만물을 부수어 버리고도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 되지 않고, 은택은 만세에 미치지만 어짊이 되지 않고, 아득한 옛날부터 살고 있으면서도 오래 산다고 하지 않으신다. 하늘과 땅을 위 아래에 있게 하고, 만물의 형상을 조각하여 놓고서도 교묘하다고 하지 않으신다. 이것을 두고 ‘하늘의 즐거움’이라 말하는 것이다.”

p342 도를 배움에 있어서 세상에서 귀중히 여기는 것은 글이다. 글이란 말에 지나지 않으니, 말이 귀중한 것이 된다. 말이 귀중한 까닭은 뜻이 있기 때문인데, 뜻이란 추구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뜻이 추구하는 것은 말로써 전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세상에는 그 때문에 말을 귀중히 여기며 글을 전한다. 세상에서는 비록 그것들을 귀중히 여기지만 귀중히 여길 것이 못되는 것이다. 세상에서 귀중히 여기는 것이 귀중한 것이 못되는 까닭이다.

해설] 글에 대한 공격이다. 사람의 말이나 글로써는 도저히 올바른 도를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제14편 하늘의 운행

p349 장자가 말하였다.

“그렇지 않소. 지극한 어짊이란 고상한 것이어서 효성으로서는 본시 그것을 말할 만한 것이 못되오. 그것이 효성보다 뛰어난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효성이 될 수 없다는 말이오. 나미쪽으로 가는 사람이 영에 이르러 북쪽을 바라보면 명산은 보이지 않소. 그것은 어째서이겠소? 멀리 떠나 온 때문이겠지요. 그러므로 ‘공경으로써 효도를 하는 것은 쉽지만 사랑으로써 효도를 하기는 어렵다. 사랑으로써 효도를 하는 것은 쉽지만 어버이를 잊기는 어렵다. 어버이를 잊는 것은 쉽지만 어버이로 하여금 자기를 잊게 하기는 어렵다. 어버이로 하여금 자기를 잊게 하는 것은 쉽지만 천하를 모두 잊게 하기는 어렵다. 천하를 모두 잊는 것은 쉽지만 천하로 하여금 나를 모두 잊게 하기는 어렵다’고 하는 것이오.

p361 노자가 말하였다.

“그렇지요. 도가 바칠 수만 있는 것이라면 사람들은 누구나 그것을 자기 임금에게 바칠 것입니다. 도가 가져다 드릴 수만 있는 것이라면 사람들은 누구나 그것을 자기 부모님께 가져다 드릴 것입니다. 도가 남에게 일러 줄 수만 있는 것이라면 사람들은 누구나 그것을 자기 형제들에게 일러 줄 것입니다. 도가 남에게 줄 수만 있는 것이라면 사람들은 누구나 그것을 자기 자손들에게 가져달 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마음 속에 도의 주인이 될 만한 것이 없으면 그 사람에게 머물지 않고, 사람의 외양이 올바르지 않으면 그것은 행해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 속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밖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성인은 그것을 내놓지 않습니다.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것에 대하여 마음 속에 주인 노릇을 할 만한 것이 없으면 성인은 그것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제15편 뜻을 굳게 지님

p376 담담하고 고요하며 허무하고 무위한 것은 하늘과 땅의 올바른 도리이며 도덕의 본질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또 성인은 쉬면서 편히 지내어 편안하고도 간단하게 살아간다고 하였다. 편안하고도 간단하면 담담하게 되고, 편안하고도 간단하여 담담하다면 근심 걱정이 끼여들 수가 없고, 사악한 기운이 침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덕은 완전하고 그의 정신에는 결함이 없는 것이다.

p379 물의 본성은 잡된 것이 섞이지 않으면 맑고, 움직이지 않으면 평평하다. 그러나 꽉 막히고 흐르지 않으면 역시 맑아질 수가 없다. 이것은 자연의 덕과 비슷한 형상이다. 그러므로 “순수히 잡된 것이 섞이지 않고, 고요하고 한결같아 변하지 않으며, 담담히 무위하고, 움직이면 자연의 운행을 따른다”고 말했던 것이다.

p380 순수하고 소박한 도란 오직 이 정신을 지키는 것이다. 지켜 잃지 않음으로써 정신과 더불어 일체가 도어야 한다. 일체가 됨으로써 순수함으로 통하고 자연의 윤리와 합치되는 것이다. 속담에 말하기를 “보통 사람들은 이익을 중히 여기고, 깨끗한 선비는 명예를 중히 여기고, 현명한 선비는 의지를 존중하며, 성인은 정순함을 귀중히 여긴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소박하다는 것은 그의 정신에 다른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것을 뜻한다. 순수하다는 것은 그의 정신에 결함이 전혀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순수함과 소박함을 체득하고 있는 사람을 ‘참된 사람’이라 말하는 것이다.

제16편 본성을 닦음

p386 옛날에 이른바 숨어 있는 선비란 사람들은 그의 몸을 감추어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입을 닫고서 말을 내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지혜를 감춰 두고서 드러내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시대와 운명이 그와 크게 어긋나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시대와 운명이 들어맞아 크게 자기 뜻을 천하에 폈다면, 백성들을 옛날의 ‘지극한 통일’로 되돌려 놓되 자기 자신은 흔적조차도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시대와 운명이 들어맞지 않아 자기가 천하에서 큰 어려움에 놓이게 된다면 자기의 본성을 깊이 간직하고 자기의 운명을 편안히 받아들이면서 때를 기다릴 것이다. 이것이 몸을 보전하는 도인 것이다.

제17편 가을 물 (추수 秋水)

p392 “우물 안의 개구리에게 바다에 대하여 얘기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공간의 구속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여름 벌레에게 얼음에 관한 얘기를 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시간의 제약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비뚤어진 선비에게 도에 관하여 얘기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가르침에 속박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은 물가를 벗어나 큰 바다를 보고서야 당신의 추함을 알게 되었다. 당신은 이제서야 위대한 도리를 얘기하면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p395 물건이란 양이 무궁한 것이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흐르고, 각자의 분수는 일정하지 않고 변하는 것이며,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대로 있는 것이란 없다. 그러므로 위대한 지혜를 지닌 사람은 먼것 가까운 것을 똑같이 본다. 그래서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무시하지 않고 큰 것이라 하더라도 대단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물건의 양이란 무궁하여 한정할 수 없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또 옛날과 현재를 한 가지 것으로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므로 오래 산다 하더라도 고민하지 않고 생명이 짧다 하더라도 더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시간이란 멈추지 않고 흐르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또 모든 것은 달처럼 찼다 기울었다 하는 것을 살펴 알고 있다. 그러므로 물건을 얻어도 기뻐하지 않고, 물건을 잃어도 걱정하지 않는다. 사람의 분수란 일정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또 도란 넓은 것임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산다고 해서 기뻐하지 않고, 죽는다고 해서 불행으로 여기지 않는다. 일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그대로 있을 수 없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을 헤아려 보면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에 비길 바가 못 된다. 그가 살아 있는 시간이란 그가 살아 있지 못한 시간에 비길 바가 못 된다. 그러한 지극히 작은 입장에서 지극히 큰 영역을 추궁하려 들고 있으므로, 미혹되고 혼란하여 스스로 안정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또한 터럭 끝을 지극히 미세한 물건이라고 결정지을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하늘과 땅이 지극히 큰 영역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을 또 어찌 알겠는가?

p398 그러므로 위대한 사람의 행동은 사람들을 해치지도 않지만 어짊과 은혜를 소중히 여기지도 않는다. 행동은 이익을 위하는 일이 없고 문지기나 노예를 천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재물을 위하여 다투지 않지만 사양하는 것을 훌륭한 일이라 여기지도 않는다. 일을 함에 있어서 남의 힘을 빌리지 않으며, 자기 힘으로 먹고 사는 것을 훌륭하게 여기지도 않고, 탐욕 많은 자나 비열한 자들을 천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행동은 세속과 다르지만 편벽되고 기이한 일을 훌륭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행동은 여러 사람들을 따르지만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들을 천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세상의 벼슬이나 봉록으로도 그의 행동을 권하여 힘쓰게 할 수 없으며, 형벌이나 치욕으로도 그를 욕되게 할 수는 없다. 옳고 그름은 분별할 수 없는 것이며, 작고 큰 것은 분류할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있다. 듣건대 ‘도를 터득한 사람은 남이 알아 주지 않으며, 위대한 사람에게는 자기가 없다’고 하였는데, 자기의 분수를 한정하고 지내는 지극한 경지인 것이다.”

p404 도에는 시작도 끝도 없지만, 물건에는 삶과 죽음이 있다. 그래서 물건의 공용이란 믿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어떤 때는 비었다가도 어떤 때는 차게 마련이어서 그 형세에는 일정한 모양이 없다. 늙어가는 나이는 막을 수가 없고, 흘러가는 시간은 멈추게 할 수가 없다. 생성 소멸과 찼다가는 비는 일을 반복하여 그치면 또 시작을 한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위대한 도의 뜻을 얘기하고 만물의 이치를 논하는 까닭인 것이다. 물건의 생성은 말이 뛰는 것도 같고 달리는 것도 같이 변화한다.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이란 없고, 잠시도 바뀌지 않는 것이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을 하겠는가? 무엇을 하지 않겠는가? 그대로 스스로 변화하게 버려 두면 그뿐인 것이다.

p407 무엇을 자연이라 하고, 무엇을 인위라 하는 것입니까?

북해의 신 약이 말하였다.

소나 말이 네 발을 갖고 있는 것을 자연이라 말하고, 말 머리에 고삐를 매거나 소의 코를 뚫는 것을 인위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위로써 자연을 손상시키면 안 되고, 지혜로써 천명을 손상시키면 안 되고, 자기의 덕을 명성을 위하여 희생시키면 안 된다고 한 것이다. 자연을 삼가 지켜 잃지 않는 것을 그의 진실로 되돌아가는 것이라 말한다.

제18편 지극한 즐거움 (지락 至樂)

‘지극한 즐거움’이란 슬픔이나 즐거움을 초월하여 그런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있다는 것이다.

p425 나는 무위야말로 진실한 즐거움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세속에서는 그것을 크게 괴로운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므로 지극한 즐거움이란 즐거움을 초월하는 데 있고, 지극한 명예란 명예를 초월하는 데 있다고 하는 것이다.

p427

3 장자가 처가 죽자 혜자가 조상하러 갔다. 장자는 그 때 두 다리를 뻗고 앉아 동이를 두드리면서 노래하고 있었다.

혜자가 말하였다.

“그 분과 함께 살았고, 자식을 길렀으며, 함께 늙었네. 그런 부인이 죽었는데 곡을 안하는 것은 물론, 동이를 두드리며 노래까지 부르고 있으니 너무 심하지 않은가?”

장자가 말하였다.

“그렇지 않네. 그가 처음 죽었을 때에야 나라고 어찌 슬픈 느낌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가 태어나기 이전을 살펴보니 본시는 삶이 없었던 것이었고, 삶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시 형체차도 없었던 것이었으며, 형체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시 기운조차도 없었던 것이었네. 흐리멍텅한 사이에 섞여 있었으나 그것이 변화하여 기운이 있게 되었고, 기운이 변화하여 형체가 있게 되었고, 형체가 변화하여 삶이 있게 되었던 것이네. 지금은 그가 또 변화하여 죽어간 것일세. 이것은 봄, 가을과 겨울, 여름의 사철이 운행하는 것과 같은 변화였던 것이네. 그 사람은 하늘과 땅이란 거대한 방 속에 편안히 잠들고 있는 것일세. 그런데도 내가 엉엉 하며 그의 죽음을 따라서 곡을 한다면 스스로 운명에 통달하지 못한 일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에 곡을 그쳤던 것이네.”

제19편 삶의 진실에 통달함 (달생達生)

p439 삶의 실정에 통달한 사람은 타고난 본성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일에는 힘쓰지 않는다. 운명의 진실에 통달한 사람은 지혜로는 어찌 할 수 없는 일에는 힘쓰지 않는다. 육체를 보양하려면 반드시 먼저 물건이 있어야 하지만 남아돌아가는 물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육체를 보양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삶을 지탱하자면 반드시 먼저 육체를 손상시키지 말아야 할 것인데, 육체가 손상되지 않으면서도 삶을 잃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삶이 태어나는 것은 아무도 물리칠 수가 없으며, 삶이 떠나 버리는 것도 아무도 멈추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슬프다, 세상 사람들은 육체를 보양하는 것으로써 충분히 삶을 보존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육체를 보양하는 것으로는 실로 삶을 보존할 수가 없는 것이라면, 세상 일에 무엇이 할 만한 것이 있겠는가? 비록 할 만한 것이 못 되는데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은 육체를 보양하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p446 안연이 공자에게 물었다.

“제가 일찍이 상심의 못을 건넌 적이 있었는데, 사공이 배 다루는 솜씨가 귀신과 같았습니다. 제가 묻기를 배 젓는 솜씨를 배울 수 있습니까 하니, 그는 배울 수 있습니다, 헤엄을 잘 치는 사람은 쉽사리 배울 수 있고, 잠수를 잘하는 사람이라면 배를 본 일도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곧 저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제가 그 까닭을 물었으나 제게 얘기해 주지 않았습니다. 감히 어째서 그런가를 여쭙고자 합니다.”

공자가 말하였다.

“헤엄을 잘 치는 사람이 쉽사리 배울 수 있다는 것은 물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잠수를 잘하는 사람이라면 배를 본 일도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곧 저을 수가 있다는 것은, 그는 심연을 언덕과 같이 보고 배가 뒤집히는 것을 마치 수레가 뒤로 물러나는 것같이 여기기 때문이다. 뒤집히고 뒤로 물러나는 것 같은 온갖 사태가 눈앞에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의 마음에는 전혀 개입케 되지 않는 것이다. 이쯤 되면 어디를 간들 여유가 있지 않겠느냐?

그의 기술은 언제나 같지만 아껴야 할 물건이 있게 되면 밖의 물건이 소중히 여겨지게 된다. 누구나 밖의 물건을 소중히 여기게 되면 자기 속 마음은 졸렬해지는 것이다.”

p456 내게는 도가 없습니다. 나는 버릇대로 헤엄을 시작했는데, 버릇이 성격으로 발전되고, 성격은 운명처럼 되었던 것입니다. 나는 소용돌이와 함께 들어가서는 솟아오르는 물길과 함께 물 위로 나옵니다. 물길을 따를 뿐이지 사사로운 힘을 쓰지 않습니다. 이것이 내가 여기에서 헤엄칠 수 있는 까닭입니다.

p461 발을 잊는 것은 신이 알맞기 때문이다. 허리를 잊는 것은 띠기 알맞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을 잊을 줄 아는 것은 마음이 알맞기 때문이다. 안으로 마음이 변하지 않고 밖으로 물건에 이끌리지 않는 것은 사리와 경우에 알맞기 때문이다. 알맞음에서 시작해서 알맞지 않은 일이 없게 되면, 알맞음이 알맞는 것조차도 잊게 되는 것이다.

제20편 산 속의 나무 (산목山木)

p467 장자가 산 속을 가다가 가지와 잎새가 무성한 큰 나무를 보았다. 나무 베는 사람이 그 곁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베지 않았다. 그 까닭을 물으니 “쓸 만한 곳이 없다”고 대답했다.

장자가 말하였다.

“이 나무는 재목이 못됨으로써 그가 타고난 수명을 다 누리는 것이다.”

장자는 산으로부터 나와 친구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친구는 기뻐하면서 하인에게 명하여 거위를 잡아서 요리를 만들도록 하였다. 하인이 물었다.

“한 놈은 울 줄 알고 한 놈은 울 줄을 모르는데 어느 것을 잡는 것이 좋겠습니까?”

주인이 말하였다.

“울지 못하는 놈을 잡아라.”

그 다음날 제자가 장자에게 물었다.

“어제 산속의 나무는 재목이 되지 못함으로써 타고난 수명을 다 누릴 수가 있었는데, 오늘 주인의 거위는 재질이 없음으로써 죽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떤 경지에 처신하시겠습니까?”

장자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나는 재목이 되는 것과 재목이 되지 않는 것의 중간에 처신하겠다. 그러나 재목이 되는 것과 재목이 되지 않는 것의 중간이란 옳은 경지인 듯하면서도 그릇된 것이어서 재난을 면할 수가 없을 것이다. 만약 자연의 도와 덕을 타고서 떠다니며 노닐게 된다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칭찬도 없고 비난도 없을 것이며, 한 번은 용이 되었다 한 번은 뱀이 되었다 하고 자유로이 시간과 더불어 함께 변화하면서, 오로지 한 가지 일만을 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한 번 내려갔다 한 번 올라갔다 하면서 조화로써 표준을 삼을 것이다. 만물이 시작되기 전의 상태에 떠다니며 노닐고, 물건을 물건으로부터 부리되 밖의 물건으로부터 물건으로서 부림을 받지 않는다. 그러니 어찌 재난 같은 것이 있을 수가 있겠극나? 이것은 신농과 황제의 법칙인 것이다.

그러나 만물의 실정이나 인간 윤리의 변화는 그렇지 않다. 합해지면 떨어지게 되고, 이룩되면 무너지게 되고, 모가 나면 꺾이게 되고, 높으면 비판을 받게 되고, 뜻있는 일을 하면 공격을 받게 되고, 현명하면 모함을 받게 되고, 못나면 속임을 당하게 된다. 그러니 어떻게 꼭 재난을 면할 수가 있겠는가? 슬프다. 너희들은 이것을 잘 기억해 두어라. 자연의 도와 덕이 행해지는 고장에서만 제대로 지낼 수가 있을 것이다.”

p474 한결같음을 지니고 있었을 뿐이지 아무런 방법도 쓴 것이 없습니다. 제가 듣건대 옥은 깎고 쪼고 함으로써 본연의 소박함으로 복귀하게 된다 하였습니다. 저는 멍청히 아무런 의식도 없고 멍멍히 바보인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멍하고 망연히 가는 것은 보내고 오는 것은 마중하였습니다. 오는 것은 금하지 않고 가는 것은 붙잡지 않았습니다. 뻣뻐하고 억센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따르고 유순한 사람들에게도 내가 따랐습니다. 스스로 힘 다하는 대로 되도록 버려 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침 저녁으로 세금을 거둬 들여도 터럭 끝만큼도 백성들을 손상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이 정도이니 하물며 위대한 도를 터득한 분이야 어떠하겠습니까?”

p476 곧은 나무는 먼저 잘리고 단 샘물은 먼저 말라붙습니다.

자기가 터득한 도가 행해져도 자기 지위를 밝히지 않고, 자기의 덕이 행해져도 명성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순일한 마음으로 언제나 한결같이 행동하여 무심하고 자유로운 경지에 합치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자기 업적을 없애 버리고 자기의 권세를 버리며 공명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p490 여관 주인에게 처비 두 사람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은 예쁘고 한 사람은 추하게 생겼다. 그런데 추하게 생긴 여자가 귀여움을 받고 예쁜 여자가 천대를 받고 있었다.

양자가 그 까닭을 물으니 여관 주인이 말하였다.

“그 중 예쁜 여자는 스스로가 예쁘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나는 그가 예쁜 줄을 모르게 되었고, 추하게 생긴 여자는 스스로 추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나는 그가 추한 줄을 모르게 되었습니다.”

양자가 말하였다.

“너희들은 잘 기억해 두어라. 현명한 행동을 하되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버리기만 한다면 어디를 가나 사랑을 받게 되지 않겠느냐?”

해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자기를 텅 비우고 스스로를 뽐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남으로부터 사랑을 받는다. 훌륭하 사람이라도 스스로 훌륭하다는 것을 내세우면 결국은 남의 미움을 받게 되는 것이다.

제21편 문후의 스승 전자방

p500 자연은 잠시도 쉬지 않고 변화한다. 그러나 자연 변화의 현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현상 뒤에 숨겨져 있는 근본 원리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p500

4 마음은 무엇을 하려 하지만 곤해지기만 하고, 입은 무엇을 표현하려 하지만 열리기만 하고 말을 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험 삼아 당신을 위하여 그 대략을 논하여 보겠습니다.

지극한 음기는 고요하고 지극한 양기는 움직임이 있는 것입니다. 고요함은 하늘로부터 나오고, 움직임은 땅으로부터 나오며, 이 두 가지 기운이 서로 통하여 조화를 이룸으로써 물건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군가 그 법도를 다스리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 형체는 본 일이 없습니다. (중략) 사물의 시작과 끝은 서로 끝없이 반복되어 그 끝장이 나는 곳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아니라면 또 그 누가 만물의 근원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p513 나는 얻고 잃게 되는 것이 내 탓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근심하는 빛이 없을 따름이오. 내가 남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 있겠소? 또한 그것이 남 때문인지 나 자신 때문인지도 알지 못하오. 남 때문이라면 나 자신 때문이 아닐 것이고, 나 자신 때문이라면 남 때문이 아닐 것이오. 그러니 나는 바로 만족한 마음으로 사방을 둘러보는 여유가 있는데 어찌 사람들이 귀히 여기고 천하게 여기는 데 마음을 쓸 틈이 있겠소?

제22편 지가 북쪽 땅에 노님

p520 “삶이란 죽음의 무리이며, 죽음이란 삶의 시작인 것이다. 누가 그 법도를 다스리고 있는지 아는가? 사람의 삶이란 기운이 모인 것이다. 기운이 모여 태어나게 되고 기운이 흩어지면 죽는 것이다. 만약 죽음과 삶을 같은 무리로 본다면 우리에게 또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만물은 하나인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아름답게 보이는 것을 신기하다 하고, 그들에게 추하게 보이는 것을 고약하고 추하다고 한다. 그러나 고약하고 추한 것은 다시 변화하여 신기한 것이 되고, 신기한 것은 다시 변화하여 고약하고 추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하는 한 가지 기운으로 통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성인은 그러므로 이 하나를 귀히 여긴다.”

p530 사람이 하늘과 땅 사이에 살고 있는 것은 마치 날랜 말이 좁은 틈새 앞을 지나가는 것처럼 순간적인 것에 불과하오.

p533 두루, 언제나, 모두 이 세 가지 표현은 도에 대하여 말은 다르지만 같은 내용이며, 표현하는 것은 한 가지 것이다.

p543 삶의 원리로써 살고 죽게 하는 것도 아니며, 죽음의 원리로써 죽고 살게 하는 것도 아니다. 죽음과 삶은 의지하는 원리가 있는가? 모두가 스스로 변화하는 일체의 현상인 것이다. 하늘과 땅에 앞서 생겨난 물건이 있는 것일까? 물건을 물건으로 존재케 한 것은 물건이 아닌 도이니, 물건이 생겨난 것이 다른 물건에 앞설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물건은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물건의 존재는 끝이 없는 것이다. 성인은 사람들을 사랑함에 있어 끝내 끝이 없는데 역시 여기에서 법도를 취한 것이다.

p545 경험한 것들은 알지만 경험하지 못한 것은 알지 못한다. 능력 안의 것은 할 수 있지만 능력으로 불가능한 것은 할 수 없다. 그래서 알지 못하는 것이 있고 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것은 본시 사람으로서는 면할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런데 사람으로 면할 수가 없는 일을 면하려고 힘쓰고 있다는 것은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지극한 이론이란 이론을 초월항 것이며, 지극한 행위란 행위를 초월한 것이다. 지혜로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알려 한다는 것은 천박한 일이다.

잡편 雜篇

제23편 노자의 제자 경상초

p559 남영추는 자청하여 학사로 들어가서, 그가 좋다고 생각하는 도덕을 추구하고, 자기가 나쁘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버리자 열흘 만에 근심이 없어졌다.

“당신은 스스로 마음을 깨끗이 씻어서 푹 익은 기운이 서려 있는 듯하오. 그러나 그 마음 속에는 얼마간 아직도 악한 것이 남아 있는 듯하오. 밖의 일에 마음이 얽매여 있는 자는 마음이 번거로워 자제를 할 수가 없을 것이니, 안으로는 마음의 작용을 닫아 놓아야 하오.”

p563 마음이 태연하고 안정되어 있는 사람은 하늘의 빛을 발한다. 하늘의 빛을 발하는 사람은 그의 진실한 사람으로서의 모습을 드러낸다. 마음이 닦인 사람은 언제나 일정한 덕을 지니고 있다. 일정한 덕을 지닌 사람에게는 사람들이 의존하게 되고, 하늘이 그를 돕게 한다. 사람들이 의존하는 사람을 두고서 하늘의 사람이라 말한다. 하늘이 도와 주는 사람을 두고서 하늘의 아들이라 말하다.

학자란 그가 배울 수 없는 것을 배우려 한다. 일을 실행하는 자는 그가 실행할 수 없는 것을 실행하려 한다. 이론가는 그가 이론으로 밝힐 수 없는 것들을 논하려 한다. 그가 알 수 없는 경지에 처신할 줄 안다면 그것이 지극한 앎인 것이다. 만약 이러한 경지에 처신하지 못한다면 하늘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결과가 될 것이다.

p572 뜻의 움직임을 버리고, 마음의 속박을 풀고, 덕을 해치는 행위를 중지하고, 도를 막는 것들을 치워 버려야만 한다.

제24편 세상으로부터 숨어 사는 서무귀

p586 천하를 다스리는 일이 말을 먹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역시 말의 본성을 해치는 것들을 제거해 주기만 하면 그뿐일 것입니다.

p600 바다가 동쪽으로 흘러드는 모든 강물을 받아들이고도 변함이 없는 것은 광대함의 극치인 것입니다. 성인은 하늘과 땅을 아울러 포괄하고, 은택을 온 천하에 미치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서는 아무런 벼슬도 없고, 죽어도 아무런 시호도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재물을 모으지도 않고 명성을 추구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사람을 위대한 사람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개는 잘 짖는다고 좋은 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말을 잘 한다고 현명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물며 위대함이야 말과 상관이 있겠습니까? (중략) 자기 본성으로 되돌아옴으로써 자연스럽게 막히는 일이 없고, 옛 방법을 따르되 옛 방법에 합치시키려 들지 않는 것이 위대한 사람의 진실한 모습입니다.

p610 얻는 것이 삶이고 잃는 것이 죽음일 수도 있지만, 얻는 것이 죽음이고 잃는 것이 삶일 수도 있다. 약이라는 것은 그 내용을 보면, 오두나 도라지나 계두나 시령 같은 것으로 지어지고, 이것들이 때에 따라 번갈아가며 주제의 구실을 하는 것이다. 어찌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제25편 임금을 만나고자 하는 칙양

p616 성인은 그가 곤궁할 때에는 집 식구들로 하여금 그들의 가난함을 잊게 만들고, 그가 출세했을 때에는 임금이나 대신들로 하여금 벼슬과 녹을 잊고서 겸손하게 행동하도록 만듭니다. 그는 외물에 대해서는 외물과 동화하여 즐기고, 사람들에 대해서는 외물과 서로 통함을 즐김으로써 자기의 본성을 보전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는 말을 하지 않아도 사람들로 하여금 화합하는 마음을 지니게 만들고, 사람들과 나란히 서 있으면서도 사람들을 동화하게 만듭니다. 그들을 모두 아버지와 아들 같은 정의로 귀착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가만히 들어앉아 있어도 그가 세상에 베푸는 바를 한 번 살펴보면, 그가 사람들의 마음에 미치는 영향이 이와 같이 원대합니다. 그래서 공열휴에게 부탁드려야 한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p620 매일 만물과 더불어 변화하여 가는 사람이란 전혀 변화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p636 시간에는 시작과 끝이 있고 세상에는 변화가 있다. 화와 복은 유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는 좋지 않은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 되는 수도 있다. 모두가 제각기 따르는 성향이 다르기 때문에 한편에서는 바르다고 인정되는 것이 한편에서는 잘못된 것이 될 수도 있다. 큰 택지에 비유하면, 갖가지 동식물이 한데 어울려 살고 있는 것 같다. 큰 산에 비추어 본다면, 나무나 바위들이 다 같이 자리잡고 있는 것과 같다. 이것이 고을의 여론이라 말하는 것이다.

p641 도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제26편 우리 밖의 일과 물건

p646 장자는 집이 가난하여 감하후에게 곡식을 꾸러 갔다.

감하후가 말하였다.

“그럽시다. 내가 영지의 세금을 거둬들인 다음 선생에게 삼백금을 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괜찮겠습니까?”

장자는 성이 나 얼굴빛이 변하면서 말하였다.

“내가 어제 이곳을 오는데 도중에 나를 부르는 자가 있었습니다. 내가 돌아다보니 수레바퀴 자국 가운데의 붕어였습니다. 내가 붕어에게 물었습니다. ‘붕어야, 너는 무얼 하고 있는 거냐?’ 붕어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동해의 물결 속에 노닐던 놈입니다. 선생께서 한 말이나 몇 되박의 물이 있거든 제게 부어 살려 주십시오.’ 내가 말했습니다. ‘그러지. 내가 남쪽으로 가서 오나라와 월나라의 임금을 설복시켜 서강의 물을 끌어다가 너를 마중하도록 하겠다. 괜찮겠느냐?’ 붕어는 성이 나서 얼굴빛이 변하며 말했습니다. ‘저는 제가 늘 필요한 물을 잃고 있어서 당장 몸 둘 곳이 없는 것입니다. 저는 한 말이나 몇 되박의 물만 있으면 사는 것입니다. 선생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하다가는 차라리 저를 건어물전에 가서 찾는 편이 옳게 될 것입니다.’”

해설]모든 일은 그 때와 경우에 알맞아야 한다. 작을 일에는 작게, 급한 일에는 급하게 처신해야만 한다는 것을 빗대어 꾸며낸 얘기이다. 어떻든 ‘무위’한 장자의 가난한 처지가 너무도 절실하게 느껴진다.

p652 성인이란 조심하면서 일을 함으로써 언제나 성공을 하는 것이다.

p656 쓸데가 없음을 알아야만 비로소 쓸 곳을 얘기할 수가 있는 것일세. 땅은 넓고 크기 짝이 없지만, 사람들이 걸을 때 쓰는 것은 발로 밟는 부분뿐일세. 그렇다고 발으 재어 가지고 그 밖의 땅은 땅 속 황천에 이르기까지 깎아내려 버린다면 사람들이 그대로 땅을 쓸 수가 있겠는가?

p657 오직 지극한 사람만이 노닐면서도 편벽되지 않을 수가 있는 것이다.

p659 도란 것은 막혀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막히면 숨이 막히게 되고, 숨이 막힌 것이 멈추지 않으면 사리에 어긋나게 되고, 사리에 어긋나면 여러 가지 폐해가 생겨나는 것이다.

마음에 자연스럽게 노닐 공간이 없으면 여러 가지 정욕이 서로 다투게 된다.

삶의 보호는 자기의 관능을 지키는 데서 이루어지고, 일의 성과는 모든 조건이 알맞을 때 나타난다. 봄에 비가 오고 날씨가 따스해지면 풀과 나무들이 무성해지며, 밭 갈고 김 매는 일도 여기에서 비롯되게 된다.

제27편 다른 일에 빗대어 한 말

p671 나는 존재하고 있지만 그 까닭을 알지 못한다. 나는 매미 껍질이나 뱀 껍질과도 같다. 그러나 그것들과 비슷하면서도 형체가 없으니 다른 것이다. 불과 햇빛 앞에서는 나는 이루어지지만, 그늘 안과 밤에는 나는 사라진다. 그것들은 내가 의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내가 의지하는 물건들이야 의지하는게 없을 수가 있겠는가? 그것들이 오면 나도 따라서 오고, 그것들이 가 버리면 나도 따라서 가 버린다. 그것들이 움직이면 나도 따라서 움직인다. 움직이는 것에 대하여 어찌하여 나에게 묻는가?

제28편 임금 자리를 물려줌

p689 삼공의 지위가 양 백정의 직업보다 존귀하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만종의 녹은 양 백정 노릇을 하는 이익보다 훨씬 많다는 것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찌 벼슬과 녹을 탐하여 우리 임금님으로 하여금 함부로 그런 것을 나누어 준다는 말을 듣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감히 받아들이지 못하겠습니다. 저의 양을 잡는 도살장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저의 소원입니다.

해설] 사람은 높은 벼슬보다도 자기 분수에 맞는 일을 찾아 펴안히 지낼 줄 알아야 한다는 얘기이다.

p691 세상의 좋은 평판을 바라면서 행동하고, 자기와 친하게 어울리는 사람들만을 벗하고, 학문은 남에게 뽐내기 위해서 하고, 가르침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하고, 어짊과 의로움을 내세워 간악한 짓을 하고, 수레와 말을 장식하는 일들은 나로서는 차마 하지 못하는 일이오.

이 부분은 지금 내게 필요한 문장이다. 문장에 빗대어 나를 돌아본다.

해설] 가난하든 부유하든 자기 분수를 따라 도를 추구할 줄 아랑야 한다는 얘기이다.

p694 훌륭하다. 그대의 뜻이여! 내가 듣건대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이익 때문에 스스로를 해치지 않고, 자득할 줄 아는 사람은 이익을 잃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속마음의 수행이 되어 있는 사람은 지위가 없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하였다. 나는 그것을 마음에 새겨 둔 지 오래되었으나 지금 그대에게서 뒤늦게야 그것이 실행되고 있음을 본다. 이것은 나의 소득이다.

제29편 강도의 괴수 도척

p720 하늘과 땅은 무궁하지만 사람이란 언젠가는 죽게 마련이다. 일정한 한계가 있는 몸을 무궁한 공간에 기탁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의 덧없음은 준마가 좁은 틈바구니 사이를 달려 지나가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따라서 그의 의기를 기쁘게 하지 못하고 그의 수명을 보양하지 못하는 자란 모두가 도에 통달한 사람이 못 되는 것이다. 당신이 주장하는 것이란 모두가 내가 버리는 일이다. 빨리 뛰어 돌아가라.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말아라! 당신의 도란 본성을 잃고 급급한 사기아 허위의 일이다. 진실함을 완전히 보전할 수 있는 것이 못 된다. 어찌 논의할 대상이 되겠는가?

p724 관중과 공자는 얘기할 적에는 그들을 천하게 보면서도 실지로 행동할 적에는 그들 아래 머리를 숙이고 있습니다. 그러니 말과 행동의 실제가 모순을 이루어 가슴 속에서 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옛 책에 말하기를, 어떤 것이 나쁘고 어떤 것이 아름다운지 알 수가 없다. 성공을 하면 우두머리가 되어 존경을 받고, 성공하지 못하는 자는 꼬리가 되어 천대 받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p729 사람이란 결국 명예를 위하여 일어나고, 이익을 위하여 나아가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가 부유해지면 사람들이 모여들고, 모여들어서는 그에게 머리를 숙이고, 남들이 머리를 숙이면 그는 귀해지는 것이다. 남이 머리를 숙임으로써 귀해지는 것은 오래 살고 몸을 편안히 하고 뜻을 즐겁게 하는 근거가 되는 도인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 당신만이 그 일에 뜻이 없으니, 지혜가 모자라기 때문인가, 뜻과 지혜는 있지만 힘이 없어 실행하지 못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올바른 것만 추구하느라 딴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인가?

p731 지혜 있는 사람은 남음이 있기 때문에 남이 추구하는 것을 사양하며, 천하를 버리고도 스스로를 결렴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결렴하고 탐욕하다는 실제 내용은 추구하는 밖의 물건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돌이켜 자기 마음의 법도를 살펴보아야 아는 것이다.

p733 평범한 것이 행복이 되며, 남음이 있으면 해가 된다는 것은 모든 사물이 다 그러한데, 재물에 있어서는 더욱 심하다. 지금 부자들은 귀로는 종, 북, 저, 피리의 소리를 들으며 즐기고, 입으로는 짐승 고기와 맛있는 술 맛을 실컷 봄으로써 그의 뜻을 만족시키는 한편 그의 할 일은 잊고 있으니, 혼란이라고 할 만한 일이다. 자기의 성한 기운에 빠져들어가 무거운 짐을 지고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고통이라고 할 만한 일이다.

제30편 칼싸움 말 것을 설복함

p741 제후의 칼은 어떻소?

제후의 칼은 지혜와 용기가 있는 사람으로 칼끝을 삼고, 청렴한 사람으로 칼날을 삼으며, 현명하고 어진 사람으로 칼등을 삼고, 충성스러운 사람으로 칼콧등을 삼으며, 호걸로 칼집을 삼습니다.

제31편 고기잡이(어부 漁父)

p750 같은 종류의 것들이 서로 어울리고, 같은 종류의 소리들이 서로 화음을 이루는 것은 본시 하늘의 원리입니다. 저는 제가 지니고 있는 도는 놓아두고, 선생께서 종사하는 일에 대하여 논해 보고 싶습니다. 선생께서 종사하는 일이란 사람들에 관한 일입니다. 천자와 제후와 대부와 서민의 네 계급들이 스스로 올바른 자리에 있게 되는 것이 정치의 아름다움입니다.

p752 이른바 네 가지 환난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큰 일을 해 내기 좋아하고 변혁을 잘 시켜 일정한 것들까지 바꾸면서 공명을 얻으려 애쓰는 것을 참람된 짓이라 합니다. 자기만 아는 지식을 가지고 일을 멋대로 하며 남의 것을 침범하여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것을 탐욕스런 짓이라 합니다. 잘못을 알고도 고치지 않고 간하는 말을 들으면 그 나쁜 행동을 더 심하게 하는 것을 포악한 짓이라 합니다. 남이 자기에게 찬성하면 괜찮지만 자기에게 찬성하지 않으면 비록 좋은 일이라도 좋지 않다고 하는 것을 교만한 짓이라 합니다.

p756 진실함이란 정성의 지극함에 있습니다. 정성되지 못하면 성실하지 못하게 되어 남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진실로 슬픈 사람은 소리를 내 울지 않아도 슬프게 느껴집니다. 진실로 노여운 사람은 성내지 않아도 위압이 느껴집니다. 진실로 친한 사람은 웃지 않아도 친밀하게 느껴집니다. 진실함이 속 마음에 있는 사람은 정신이 밖으로 발동합니다. 이것이 진실함이 귀중한 까닭입니다.

p760 도란 만물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모든 물건이 이것을 잃으면 죽고 이것을 얻으면 산다. 일을 함에 있어서는 이것을 거스르면 실패하고 이것에 순응하면 성공한다. 그러므로 도의 존재에 대해서는 성인들도 존중하는 것이다.

제32편 도가의 계승자 열어구

p765 남을 감동시키고 즐거워 하는 것은 남과 다른 방법을 쓰기 때문이다. 꼭 남을 감동시키려 한다면 자기 본성을 뒤흔들게 되는 것이므로, 또 무의미한 것이 된다. 너를 따라 공부하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네게 얘기해 주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작은 말들이란 모두가 사람에게 해독을 끼치는 것들이다. 남을 깨우쳐 주지도 못하고, 자기가 깨우치지도 못하는 자들과 어찌 친숙할 필요가 있겠느냐? 기교가 많은 자는 수고롭고, 지혜가 많은 자는 근심하게 되는 법이다. 능력이 없는 사람은 추구하는 것도 없을 것이니, 배불리 먹고 유유히 노닐며 두둥실 매이지 않은 배처럼 떠다니고 마음을 텅 비우고 유유히 노닐게 될 것이다.

p767 스스로 덕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자기가 덕을 지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하물며 도를 터득한 사람이야 어떠하겠는가? 옛날에는 자연의 공로는 잊고 자기 능력만 믿는 것을 ‘자연으로부터 도망쳐 형벌을 받는 자’라 말했다. 성인은 그가 편안히 지낼 곳에 편안히 지내며, 편안치 않은 곳에는 편안치 않게 지내는 법이다. 여러 사람들은 편안치 않은 곳에 편안히 지내고, 편안한 곳에서는 편안치 않게 지내려 하고 있다.

p769 성인은 꼭 그러한 것도 꼭 그렇다고 고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력에 의존하는 일이 없다. 보통 사람들은 꼭 그렇지 않은 것도 꼭 그렇다고 고집한다. 그래서 흔히 무력을 써서 문제를 해결하려 든다. 무력을 따르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에는 추구하는 것이 있게 된다. 이처럼 무력에 의지하여 행동하면 멸망하게 되는 것이다.

p775~776 사람이란 두툼한 외모 속에 감정을 깊이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외모는 성실한 듯하면서도 마음은 교만한 자가 있고, 외모는 잘난 듯하면서도 사실은 못난 자가 있고, 외모는 신중한 듯하면서도 마음은 경박한 자가 있고, 외모는 견실한 듯하면서도 속은 유약한 자가 있고, 외모는 느슨한 듯하면서도 마음은 성급한 자가 있다. 그러므로 목마른 듯이 의로움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뜨거운 것을 피하듯 의로움을 떠나가기도 하는 것이다.

해설] 사람의 마음은 산천보다도 복잡하기 때문에 겉모양과 속마음이 다르다. 그래서 여러 가지 시험을 거쳐야만 그의 사람됨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자의 말이기도 하지만 도가의 입장과는 완전히 합치되지 않는 견해이다.

p782 장자가 죽으려 하자, 제자들은 그를 성대히 장사지내려 하였다. 그때 장자가 말하였다.

“나는 하늘과 땅을 관과 겉관으로 삼고, 해와 달을 한쌍의 구슬 장식으로 삼고, 별자리를 진주와 옥 장식으로 삼고, 만물을 부장품으로 삼으려 하니, 나의 장구는 이미 다 갖추어진 것이 아닌가? 여기에 무엇을 더 보태겠느냐?”

제자들이 말하였다.

“저희들은 까마귀나 솔개가 선생님을 먹어 버릴까 두렵습니다”

장자가 말하였다.

“땅 위에 놓아 두면 까마귀와 솔개가 먹을 것이고, 땅 아래에 묻으면 개미들이 먹을 것이다. 이쪽 놈이 먹는다고 그것을 배앗아 딴 놈들에게 주는 셈이다. 어찌 그렇게 편벽되게 생각하느냐?

제33편 천하의 사상가들(천하天下)

p786 근원이 되는 것으로부터 떨어지지 않은 것을 하늘의 사람이라 말한다. 순수함으로부터 떨어지지 않은 것을 신 같은 사람이라 말한다. 참 된 것으로부터 떨어지지 않은 것을 지극한 사람이라 말한다. 하늘을 근원으로 삼고, 덕을 근본으로 삼고, 도를 드나드는 문으로 삼고, 모든 변화를 초월하는 사람을 성인이라 말한다. 어짊을 은혜로운 것으로 삼고, 의로움을 원리로 삼고, 예의를 행동 기준으로 삼고, 음악을 조화의 방법으로 삼고, 훈훈하게 자애롭고 어진 사람을 군자라 말한다.

p800 공평하여 한편으로 치우치지 않고, 평이하므로 사심을 갖기 않고, 분명히 자기를 내세우는 것이 없으며, 사물을 따르며 자기오 남의 구별을 내세우지 않는다. 세속적인 생각을 하려 하지 않고 지혜로써 계책을 쓰지 않는다. 외물에 대하여 자기 위주로 가리는 것이 없으며, 외물과 어울려 함께 행동한다.

“위대한 도는 모든 것을 포용하지만 그것을 말로 표현하지는 못한다.”

“자기 생각에 따라 물건을 선택하게 되면 모든 물건에 공평할 수 없고, 말로 가르쳐 가지고는 도를 다 표현할 수는 없다. 도는 모든 것을 남김없이 포용하는 것이다.

p806 사람들은 모두 알맹이 있는 것을 추구하는데, 그 홀로 텅 빈 것을 추구하였다. 그는 저장하는 것이 없었으므로 언제나 남음이 있었다. 홀로 우뚝하여 여유가 있었다. 그는 행동함에 있어 더디고도 힘을 낭비하지 않았다. 무위하였고 사람들의 기교를 비웃었다. 사람들은 모두 행복을 추구하는데, 그 홀로 자연스러움에 완전하기를 추구하였다.

그는 깊은 것을 근본으로 삼고, 간략함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는 또 말하였다. (노자)

“굳은 것은 깨어지게 되고, 예리한 것은 꺾여지게 된다.”

그는 언제나 외물을 너그럽게 포용하였고, 남을 깎아내리지 않았다. 그러니, 도의 극치에 이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p807 황홀하고 적막하여 아무런 형체도 없고, 언제나 변화하고 있다. 죽은 건지 산 건지 알 수 없으나, 하늘과 땅과 함께 나란히 존재하고, 신명에 따라 움직여 간다. 망연한데 어디로 가는 건가? 황홀한데 어떻게 변화하여 가는 건가? 만물이 모두 우리 앞에 벌어져 있지만 돌아갈 만한 곳이 없다. 옛날의 도술을 닦는 학문을 터득하여 이러한 경지에 이르렀던 사람으로 장주가 있었는데, 그러한 이론을 듣고서 좋아하였다.

p809 위로는 조물주와 더불어 노닐고, 아래로는 죽음과 삶을 도외시하며, 처음도 끝도 없는 자와 벗하고 지낸다. 그의 근본인 도는 광대하고도 탁 트였으며, 심원하고도 자유롭다. 그의 사상의 요지는 조화되고 쾌적하여 위로 현묘한 도에 도달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자연의 변화에 순응하여 사물에 대한 집착을 풀어 버려서, 그 이치는 다 풀이할 수가 없다. 그것은 장래에 있어서도 잘못돌 수 없는 것이며, 망연하고 아득하여 철저히 추궁할 수가 없는 것이다.

 

3. 내가 저자라면

장자에게 배울 점이 아주 많다. 가르치려 하지 않고 비유로 이야기 해주니 스토리텔링이 되고, 한 번 더 생각하게 한다. 물론 장자의 이야기를 다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청소년 책을 쓸 때 많이 사용해야 하는 기법이다. 장자 책은 사실 직접 쓴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많기 때문에 뼈대를 논하기가 어렵다. 그래도 이야기 해보자면 내편, 외편, 잡편 구분이 잘 되어 있고, 비슷한 내용들이 많지만 그래도 큰 뼈대는 잘 나눠져 있다. 반복되는 부분이 많아 장자가 무엇을 이야기 하려는지 파악하기는 용이했다. 만약 현대식 장자를 쓴다면 대표적인 비유와 함께 장자 생각의 변화에 따라 뼈대를 구성해도 좋을 것 같다.

IP *.196.23.76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