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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17일 10시 52분 등록

장자

장자(莊子) / 김학주 옮김 / 연암서가

 

 

I. 저자에 대하여 / 장자

 

춘추전국시대 송나라 몽읍에서 태어나 맹자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을 하였다. 칠원에서 관리로 일하다가 그만둔 이후로 초나라의 위왕이 재상을 권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벼슬길에는 들지 않았다.

노자와 마찬가지로 도를 천지만물의 근본 원리로 삼으며 무위자연을 말하였다.

무위(無爲) -> 어떤 대상에 욕심을 내거나 어떤 일을 이루려 하지 않는다.

자연(自然) -> 자기에게 주어진 대로 자연스럽게 행동하여야 한다.

 

장자의 사상사적 의의

 

이러한 무위자연은 유교에서 주장하는 어짊()이나 의로움()같은 것도 사실은 사람의 본성을 그리치는 면에서 도둑질 같은 악덕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은 일종의 전율과 함께 통쾌감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유가사상과 도가사상은 매우 이질적이고 어느 면에서는 정 반대되는 사상이라 공존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개인의 수양을 통하여 얻어진 덕()을 인간 관계의 매개로 보고, 그 덕을 통하여 온 세상을 다스려야 한다는 유가의 이상은 결국 도가의 그것과 합치될 수 있다. 덕으로 다스려지는 이른바 대동사회에는 법이나 권력에 의한 다스림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유가의 번잡한 주장을 빼면 어짊이나 의로움 같은 기본적인 유가의 덕목은 도가가 주장하는 무위나 나라는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 무아한 인간이 지니는 덕성에 대한 객관적인 호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유가와 도가가 공존하면서 사람들의 의식을 지탱해 왔다.

문학에서도 이러한 점이 나타난다. 유교의 상고주의와 형식주의적인 경향은 작가의 창의나 개성이 존재할 여지도 없이 형식화하여 생기를 잃는 악순환을 거듭하게 만들었을 테지만, 현실적인 가치를 부정하며 홀로 숨어서 자기 내면의 세계를 추구하는 한편, 이른바 졸렬함과 소박함을 숭상하는 도가적인 문학 경향은 형식화하고 시들어 가는 중국문학에 끊임 없이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이러한 유교와 도교는 중국뿐만 아니라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은 아시아 사람들의 전반적인 사고에 영향을 주었다. 대체로 사람들 사이의 관계나 사회의 질서는 유교적인 기초가 강하고, 인생이나 자연에 대한 가치관은 속에는 도가적인 색채가 짙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장자는 서양의 경험주의, 실증주의, 윤리주의, 실존주의를 내세우는 서양적인 방법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현대의 고민은 해결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장자의 생애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장자의 이름은 주()이고 자는 자휴(子休)이며, (하남성 상구 북쪽)사람이라고 한다. 일찍이 몽의 칠원의 관리자 노릇을 하였다. 그의 학설은 노자를 바탕으로 하였으며 그의 저서는 10여만 자에 이르는데 대부분이 다른 일에 빗대어 얘기하는 우언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기잡이’, ‘강도의 괴수 도척등의 편을 지어 공자의 무리들을 공격하면서 노자의 학술을 밝혔다.

자연에 숨어 가난하게 살았다지만 혜시같은 재상급의 인물을 친구로 사귀고 있었고,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것을 본다면 그가 전혀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으로 세상과 동떨어진 생활을 하였다고만 볼 수도 없다. 노자의 사상을 계승했다고 하지만 오히려 장자의 학설이 더욱 믿음직하고 체계적이다.

 

장자의 내용

 

한서예문지여씨춘추필기편 고유의 주에서는 장자는 52편이라 하였으나 지금 우리에게는 33편의 장자가 전해지고 있다.

 

노자와 장자

 

장자는 노자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노자와 장자의 사상에는 차이점이 보인다. 첫째는 장자의 경우 유가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점이다. 많은 부분에서 유교를 공격하고 있기는 하지만 유가의 육경을 긍정적인 방향에서 설명한다던지, 공자의 말이 도가사상을 밝히면서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등 장자가 유학을 공부했다는 사실이 곳곳에서 드러나 보인다.

 

둘째는 노자의 경우 우주의 본체를 일()이라고 하지만 장자의 경우 그것을 태일(太一)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장자의 태일은 보통의 일이 아닌 모든 것의 절대적인 근원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셋째, 노자의 경우 () 라는 물건됨은 황홀하기만 한 것이다라고 표현한데 대하여 장자는 ()란 아무런 조짐도 없는 것이라면서 의 개념을 더욱 강조하였다. 장자의 경우 노자의 무에서 더 나아가 무 조차도 없었던 단계까지도 생각한 것이다. 장자는 더욱 철저히 무의 개념을 근거로 하고 있다.

 

넷째, 장자는 노자보다 더욱 철저하게 삶과 죽음을 초월하여 자기 자신을 의식하지 않는 무아의 경지를 추구하였다. 여기서 무아는 인간의 타고난 속성조차도 모두 초월한 경지를 뜻한다. 노자의 경우 어느 정도 국가나 사회를 의식하며 사회생활을 긍정한 데 비하여 장자는 이 모든 것을 초월하려 하였다. 노자가 도술로써 온 세상을 현묘하게 다스리고 사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한 데 비하여 장자는 그런 모든 것을 초월한 것이다.

 

도가와 도교

 

도가사상은 후세에 이르러 여러 가지 민간 신앙을 흡수하여 도교라는 새로운 종교를 이룩한다. 도교에서는 노자를 떠받들고 있기 때문에 도가와 도교는 혼동되기 쉽지만 서로 크게 다르다. 도가의 경우 욕망을 초월하여 아무런 의식적인 행동을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지내야만 한다는 무위자연을 이론을 주장하지만 도교에서는 삶, 물질적인것(연단술), 이성 등 속세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수련을 말하며 이러한 것들은 무위자연이 추구하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러나 속된 세상에서 초연하려는 태도는 도가와 도교가 어느 정도 일치하며, 유가와 도가처럼 유교와 도교가 대립적인 관계에 있었다는 점도 일치한다.

 

장자의 사상

 

본체론

 

노자와 장자의 사상이 도가라 불리는 이유는 모든 존재와 현상의 근원을 도()라는 이름을 붙이고 도가 이러하기 때문에 사람도 이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본체론을 근거로 학술을 전개 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윤리관

 

장자는 사람이 아무것에도 거리낌이나 의지하는 데가 없는 이른바 무대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옳고 그르다던가 크고 작다고 판단하는 가치 기준이란 언제나 자기 개인의 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어서 절대적인 것이 못 된다. 따라서 이러한 상대적인 가치로부터 탈피한 무대의 경지에 이르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이다.

 

인생관

 

장자는 사람의 죽음이란 삶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자기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 무아의 경지와 의식적인 행위를 하지 않는 무위의 단계에서 자연스럽게 이르게 되는 결론일 것이다. 한번은 그가 꿈에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 다녔는데 깨어나서 자기가 나비 꿈을 꾼 것인지 나비가 사람으로서의 자기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장자의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불교의 유회사상과는 다른 것으로서 오히려 죽음을 통해서 자유의 경지를 얻을 수 있다고 까지 생각했던 것 같다.

또한 꿈의 내용처럼 그의 견해는, 인간이 모든 사물은 한결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지니게 한다. 사람이라고 해서 만물 가운데 특출난 것이 못된다는 말이다. 때문에 사람은 만물과 일체임으로 만물이 일체가 되는 무위자연에 도달했을 때 가장 이상적인 생활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한편 이러한 무위자연은 숙명론에 도달할 수 있다. 사람의 능력 차이는 산이 높고 낮은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 임으로 유능하거나 유용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유가의 인이나 의는 인위적이라는 그릇된 점에서 본성에 어긋나는 행위라고 논하고 있다.

장자는 이상적인 인간상으로서 무위자연함으로서 인간이 지니는 모든 의식이나 행동상의 제약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자유로운 사람일 것이다.

 

 

II.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 즐거운 지식

 

1편 어슬렁 어슬렁 노님

 

36P 북극 바다에 고기가 있는데 그 이름을 곤이라고 하였다. 곤의 길이는 몇천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그것이 변하여 새가 되면 그 이름을 붕이라 하는데 붕의 등도 길이가 몇천 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중략이 새는 태풍이 바다 위에 불면 비로소 남극의 바다로 옮아갈 수 있게 된다. 남극 바다란 바로 천지인 것이다.

 

37P 아무리 큰 물고기나 새라 하더라도 현실적으로는 일정한 제약이 있는 것이다.

 

37P 물의 깊이가 깊지 않다면 큰 배를 띄울 만한 힘이 없을 것이다. 한잔의 물을 웅덩이에 부어 놓으면 곧 지푸라기가 그곳에 배가 되어 뜨지만, 잔을 놓으면 땅에 붙어 버릴 것이다. 물은 얕은데 배가 크기 때문이다.

 

38P 붕 같은 큰 새가 큰 바람을 타고 나는 것은 아지랑이나 먼지가 동물의 입김에 날리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38P 그처럼 크고 작은 것도 사람들이 지닌 기준에 의하여 상대적으로 생기는 것이지 본시부터 큰 것과 작은 것의 구별이 잇는 것은 아니다.

 

40P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하고 짧은 동안 사는 자는 오래 사는 자에 미치지 못한다.

 

41P 작은것은 큰 것을 따르지 못함을 애기하고 있다. 따라서 사람이란 사람으로서의 분수를 올바로 알아 처신해야지 목숨이 소중하다고 해서 칠백년을 산 팽조와 자기의 생애를 견주어 보면 그의 삶은 비참한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41P 대비에서 생기는 크고 작다는 등의 판단이 사람들의 불행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44P 그러므로 지극한 사람은 자기가 없고, 신 같은 사람은 이룬 공이 없고, 성인은 이름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46P 뱁새는 깊은 숲 속에 둥우리를 친다 해도 한 개의 나뭇가지를 사용할 따름이며, 두더지가 황하의 물을 마신다 하더라도 그것은 배를 채우는 데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47P 천자라는 만인이 우러러보는 높은 지위이지만, 인간에게는 별로 쓸데없는 명분이라고 처리해 버리는 작자의 글에서 진실한 인간의 모습을 추구하는 그의 의기가 느껴진다.

 

50P 신인이란 자연의 변화와 완전히 융화되어 세상의 모든 가치 판단 기준을 초월한 사람이다. 따라서 신인은 보통 사람들과는 행동이나 모습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참된 덕을 알아보지도 못한다.

 

50P 송나라 사람에 장보관을 사가지고 월나라로 팔러 간 이가 있었다. 월나라 사람들은 머리를 짧게 깎고 문신을 하고 지내므로 관이 소용 없었다.

 

53P 일반 사람들이 지니는 물건의 작용에 대한 기대를 초월할 때 모든 물건은 제각기 모두 쓰일 곳이 있게 된다. 쓰일 곳이 생길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더 크고 올바르고 참된 쓰임을 지니게 될 것이다.

 

54P 지금 당신은 큰 나무를 가지고 그것이 쓸데가 없다고 근심하고 있소, 어째서 아무것도 없는 고장, 광막한 들에다 그것을 심어놓고 하는 일 없이 그 곁을 왔다갔다하거나 그 아래 어슬렁거리다가 드러누어 낮잠을 자지 않소? 그 나무는 도끼에 일찍 찍히지 않을 것이고 아무것도 그것을 해치지 않을 것이오.

 

2편 모든 사물은 한결같음

 

60P 자연의 피리소리중에는 사람들이 내는 소리가 있고, 대지가 내는 소리가 있으며, 이를 통틀어 존재케 하는 자연의 소리인 하늘의 피리소리가 있는 것이다.

 

62P 작은 지혜가 있고 말에도 작은 것이 있다고 했지만,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이러한 작은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62-63P 사람에게는 백개의 뼈대와 아홉개의 구멍과 여섯 가지의 내장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우리는 그 중 어느것과 친한가? 당신은 그것을 모두 좋아하는가?

 

64P 사람의 몸도 마찬가지이다. 몸의 여러 부분은 모두가 개인의 뜻에 의하여 움직여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움직이고 있는 참된 지배자는 따로 있는 듯 하다. 이몸과 지배자도 자연과 자연의 주재자의 관계로 발전된다.

 

67P 일반 사람들의 마음을 초극하여 자연스럽게 살아야 함을 주장하는 것이 장자의 본 뜻이다.

 

68P 사람들에게는 말이 있고 또 사람들은 그 말을 사용하여 시비를 따진다. 그러나 그 말로 표현되는 생각은 이미 화려한 욕망에 가려져 있기 때문에 올바른 시비를 따질 기준을 잃고 있다.

 

68P 올바른 말은 보통 사람들의 시비를 초월할 수 있는 밝은 지혜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69P 저것과 이것이란 상대적인 개념이 없는 것, 그것을 일컬어 도추라 한다. 도추가 가장 알맞은 가운데에 들어맞아야만 비로소 무궁한 변화에 대응할 수 있게 된다.

 

70P 밝은 지혜를 바탕으로 하여 자연과 융화될 때 비로소 참다운 사실의 파악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72P 모두가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고 본질적으로 그러한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그 나름대로의 의의를 지닌 개연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73P 모든것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다. 모두가 한 가지 도로 통한다. 도란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74-75P 만물은 본질적으로 모두 같다.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침에 세개 저녁에 네개와 아침에 네개 저녁에 세개를 분별하지 못하고 화내고 기뻐하는 원숭이들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76P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이 남들과는 다르다는 점에서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을 남들에게 밝히려고 애썼다. 밝혀질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남들에게 밝히려 들었기 때문에 결국은 견백론의 어리석음과 같은 결말이 지어졌던 것이다.

 

78P 지혜의 이상적인 형태란 아무런 인식 작용도 없는 것이다.

 

79P 시작이라는 것이 있다면 일찍이 시작되지 않았던 적이 있고 일찍이 시작되지 않았던 그 이전도 있을 것이다. …중략지금 내게는 이미 이론이 있다. 그러나 내가 전개한 논리 중에 과연 이론이 존재하는 것일까 과연 이론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알 수가 없다.

 

80P 사람들의 인식이나 평가는 모두 완전한 것이 못된다. …중략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불완전한 인식과 평가를 초월할 수 있어야만 참된 사람으로 존재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81P 우리는 물건의 있고 없는 것이나 크고 작은 것 등을 따질 것 없이 초연히 자연스럽게 살아 가야 한다는 것이다.

 

91P 만물의 가치에 차별을 두지 않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일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태도는 그 자체가 만물을 한결 같은 것으로 보는 경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92P사람들의 이론은 아무런 가치도 뜻도 없는 것이니 무한한 자연에 자기를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99P 모든 사물이 한결같게 여겨질 때 자연에 완전히 융화될 수 있을 것이다.

 

3편 삶을 길러주는 주인

 

101P 제한이 있는 인생으로서 무한한 지식을 추구하면서 똑똑한 체하려는 것 자체가 비극이라는 것이다. 앎을 버려야만 참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102P 장자는 진정한 양생은 가운데의 올바른 도를 지키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장자는 선과 악을 거의 같은것으로 대비시키며 중간의 바르고도 자연스러운 길을 따를 것을 주장한다.

 

102-103P 백정이 소잡는 솜씨를 빌려 삶을 기르는 방법을 애기하고 있다. 소를 정신으로 대하되 눈으로 보지는 않으며, 소 몸통의 자연스런 문리를 따라 조금도 억지 없이 춤추듯 칼을 놀린다는 것이다. …중략….백정이 칼을 놀릴 때처럼 어려운 고비에는 스스로 두려운 듯 경계하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한다 하였다. 이는 자연을 따르는 어려움을 인식시키려는 뜻일 것이다.

 

4편 사람들 세상

 

125P 모든 일을 하기 전에 마음을 재계하여 텅 비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대목의 애기가 공자와 안회의 대화로서 인용되고 있지만 그것은 도가인 장자에 의해 씌어진 우화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상대적인 의식을 완전히 버리고 마음을 텅 비게 만드는 절대적인 경지는 바로 장자가 요구하는 개인의 수신 방법인 것이다.

 

129P 효도나 마찬가지로 임금에 대한 충성은 사람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길이니, 임금으로부터 어떤 명이 내리면 자기 자신은 잊은 채 그 일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자의 말을 인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런 곳에서 장자가 받은 유가 사상의 영향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133P 상대방이 분수 없는 사람이라면 그와 더불어 분수없게 행동하십시오. 상대방이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라면 그와 더불어 종잡을 수 없게 행동하십시오, 여기에 통달하게 되면 탈 없는 경지에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136P 사마귀처럼 무모하게 권력자와 맞서면 안 되고, 호랑이를 기르듯 그의 성질을 따라 잘 길들여야 하며, 말을 다루듯 조심하여 권력자를 놀라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5편 덕이 속에 차 있는 증험

 

156P 신도가는 비록 절름발이이며 천한 신분의 사람이지만 그런 겉모양이나 신분의 차별을 초월하여 당당한 재상인 자산보다도 더 떳떳이 행동하고 있다. 또한 이 처럼 계속 절름발이를 내세우고 있는 것은 크게 교묘한 것은 졸렬한 것과 같다고 한 장자 자신의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한 평가를 크게 내세우려는 듯도 있을 것이다.

 

162P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속에 지니고 있는 재질과 덕임을 이야기 하고 있다.

 

164P 지극한 사람의 재질과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 덕을 설명하고 있다. 재질이 완전하다는 것은 사물의 변화에 자기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며, 덕이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만물의 변화와 함께 어울림을 뜻한다는 것이다.

 

168P자기 자신의 감정을 따라 자기 삶을 이익되게 하려는 노력 없이 자연에 자신을 맡겨야만 참된 삶을 살 수가 있다는 것이다.

 

6편 위대한 참 스승

 

171P 참된 사람은 적은 일에도 거스르지 않고 성공을 뽐내지 않으며 일을 꾀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람은 잘못 되는 일이 있어도 후회하지 않으며 잘 되어도 스스로 만족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은 높은 곳에 올라가도 떨리지 않고, 물에 빠져도 젖지 않고, 불 속으로 들어가도 뜨거워하지 않는다.

 

177P 참된 사람은 모든 상대적인 것까지도 한가지의 것으로 보고 자연스럽게 살아간다

 

183P 도는 천지만물의 근원이며 언제 어디에나 있는 것이다.

 

189P 무는 사람이 태어나기 전을 뜻한다. 사람이 태어나기 전과 살아 있을 때와 죽은 뒤를 일치시키는 비유로서 무를 머리로 삼고, 삶을 척추로 삼고, 죽음을 궁둥이로 삼는다하였다. 이처럼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시간적인 제약을 초월하는 사람들 넷이 친구로서 모인 것이다.

 

202P 저는 앉아 있으면서 모든 것을 잊게 되었습니다중략도와 일체가 되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차별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변화에 그대로 따르면 일정한 것만을 추구하는 마음이 없어진다.

 

203P 앉아 있으면서 모든 것을 잊는다는 유명한 좌망 문답이다.

 

205P 운명의 주체는 하늘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며 자연의 필연적이고 맹목적인 힘인 것이다. 맹목적이라고 하는 것은 차별하고 선택하는 것 같은 작용을 전혀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7편 자연에 따르는 제왕

 

208P 세상 사물에 얽매이지 않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야말로 참된 도를 터득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209P 천하는 법이나 권력의 강압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본성을 올바로 유도하는 것이 올바른 정치라는 것이다.

 

210P 당신은 마음을 담담한 곳에 노닐게 하고 기운을 막막한 곳에 모아 놓고 만물의 자연스러움을 따름으로써 사사로움이 끼어들지 않게 하시오 그러면 천하가 다스려질 것이오

 

211P 장자도 노자와 마찬가지로 무위자연 자유방임의 정치를 말하고 있으나 그 밑바탕에는 자연의 질서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다. 임금이 일일이 백성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더라도 백성은 각기 자연의 슬기를 가지고 평안한 생활을 할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213P 훌륭한 임금의 자질로 뛰어난 지혜나 재주 또는 힘보다도 저절로 천하가 다스려지게 할 수 있는 도를 터득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214P 장자는 운명에 따라야 함을 말하고 있으면서도 운명을 내다본다고 하는 무술이나 점술에 대해서는 완전히 부정적이다.

 

219P 거울의 표면 그 자체는 바로 허무이다. 허무이기 때문에 모든 사물을 그곳에 머물게 할 수 있다.

 

8편 엄지발가락과 둘째발가락이 붙어 있는 사람

 

232P 인위적인 모든 행위는 사람의 본성을 해치는 일이다. 도둑질은 말할 것도 없고 세상에서 어짊과 의로움을 행하겠다는 것도 모두가 본성을 해치는 일이다. 그러므로 절의를 위하여 굶어 죽은 백이나 평생을 도둑질로 보내다 죽은 도적이나 사람의 본성을 저버렸다는 점에 있어서는 같다는 것이다.

 

9편 말 발굽

 

239P 말을 인공으로 기르느라고 말에게 인위적인 제약을 가하여 말은 얼마나 큰 피해를 입는지 모른다. 그처럼 사람들은 타고난 본성대로 살지 못하고 여러 가지 인위적인 제약으로 본성을 거슬러 올바로 살지 못한다는 것이다.

 

241P 성인이 나와 예의와 음악을 번거로이 하여 천하의 모양을 뜯어고쳤다. 어짊과 의로움을 내걸고 천하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 하려 하였다. 그러자 백성들은 비로소 일에 힘쓰면서 지혜를 좋아하고 다투어 이익을 추구하게 되었으나, 이를 금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것도 역시 성인의 잘못인 것이다.

 

10편 남의 상자를 열고 도둑질함

257P 성인이나 지혜는 세상을 어지럽히는 장본임을 말하고 있다. 태고적 백성들이 순박하던 시대를 예로 든 것은 지혜의 발달이 바로 사회의 혼란의 원인임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인류는 전체적으로 문명 때문에 생긴 위협 또는 위기 의식을 강하게 받고 잇는 것도 사실이다.

 

11편 있는 그대로 버려둠

262P 천하는 있는 그대로 버려 두어야만 될 터인데도 사람들은 인위적으로 다스리려 한다.

 

263P 천하는 인위적으로 다스릴 것이 아니라 아무런 작위도 가하지 마라고 무위함으로써 그대로 버려 두어야만 한다는 이야기이다.

 

274P 당신은 다만 무위 속에 살기만 하면 만물은 저절로 변화할 것이오.

 

277P 천지 사방을 드나들고 온 세상에 노닐되 홀로 갔다 홀로 오는 것을 두고 일체를 홀로 소유하고 있는 것이라 부르는 것이다. 홀로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된 사람을 두고 지극히 존귀한 사람이라 부르는 것이다.

 

12편 하늘과 땅

287P 도란 그 모습이 심연처럼 조용하고 깊은 물처럼 맑다.  쇠나 돌도 도를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소리를 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쇠나 돌의 소리가 나지만 두드리지 않으면 나지 않은 것이다.

 

296P 요임금이 천하를 다스릴 때에는 상을 내리지 않아도 백성들은 일에 힘썼고 벌을 내리지 않아도 백성들은 두려워 했습니다.

 

297P 본성이 닦여지면 덕으로 되돌아간다. 덕이 지극해지면 처음과 같아 진다. 같아진다는 것은 곧 텅 비게 된다는 뜻이며, 텅 빈다는 것은 곧 커진다는 뜻이다.

 

301P 위대한 성인은 천하를 다스림에 있어서 백성들의 마음을 풀어주어 그들로 하여금 가르침에 따라서 풍속을 훌륭하게 만들도록 합니다.

 

305P 도를 지키는 사람은 덕이 완전해야 되며 덕이 완전한 사람은 몸이 완전해야 되고 몸이 완전한 사람은 정신이 완전해야 된다.

 

13편 하늘의 도

 

341P 도란 것은 크기에 있어서는 끝이 없고, 작기에 있어서는 없는 곳이 없으므로 만물에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344P 수레바퀴를 깎을 때 엉성히 깎으면 헐렁해져 견고하게 되지 않고 꼭 끼게 깎으면 빠듯해서 서로 들어맞지 않습니다. 엉성하지도 않고 꼭 끼지도 않게 하는 것은 손의 감각이 마음에 호응하여 이루어지는 것이지 입으로 설명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14편 하늘의 운행

 

351P 지극한 효도는 부모의 존재를 잊고 부모로 하여금 자기를 잊게 하는 것이며, 지극한 어짊이란 천하의 존재도 잊고, 또 천하로 하여금 자기를 잊게 하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처럼 모든 것을 서로 잊어야만 완전한 자연의 상태인 도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15편 뜻을 굳게 지님

 

377P 성인은 살아감에 있어서 자연의 운행을 따르고 죽음에 있어서는 만물과 함께 변화한다. 고요히 있으면 음과 같은 덕이 되고 움직이면 양과 같은 물결을 이룬다.

 

16편 본성을 닦음

 

388P 높은 벼슬을 얻었다 하여 뜻을 방자히 지니지 말고, 곤궁하다 해도 세속을 쫓지 않아야 한다.

 

17편 가을 물

 

398P 크고 작다는 평가도 비교를 통해서 겨우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상대적인 비교를 초월한 곳에 있다는 것이다.

 

415P 우물안의 개구리를 비유로 들어 사람 중에도 제한된 자기 주위의 일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많음을 지적하고 있다.

 

18편 지극한 즐거움

 

427P 무위야 말로 지극한 즐거움이며 몸을 살려주는 길이라 단정하고 있다.

 

436P 만물은 모두 변화의 기틀에서 생겨나서, 모두가 변화의 기틀에 의하여 되돌아 가는 것이다.

 

19편 삶의 진실에 통달함

 

447P 사람은 밖의 물건에 대하여 아무런 거리낌이 없으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사람이란 무엇보다도 밖의 물건에 마음이 사로잡히는 일이 없도록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0편 산속의 나무

 

478P 사람은 자기를 드러내려고 하는 데서 위해를 받게 된다 순박한 자연을 따라 스스로의 본성만을 지키고 있으면 절대로 남이 해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도가적인 처세 방법인 것이다.

 

21편 문후의 스승 전자방

 

507P 이해 관계를 초월해야 위대한 일을 할 수 있고, 모든 형식을 초월해야 사물의 핵심에 도달하여 충분한 기교가 발휘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22편 지가 북쪽 땅에 노님

 

517P 생각도 없고 걱정도 없어야만 비로소 도를 알게 된다. 처신하는 곳도 없고 행하는 것도 없어야만 비로소 도에 편안히 지내게 된다.

 

535P 도는 우주의 어디에나 있고 우주 안의 모든 현상이 도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23편 노자의 제자 경상초

 

554P 인위적인 일을 하지 말고 작은 이익에 눈을 돌리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무위를 정치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572P 올바르게 되면 고요해지고 고요해지면 분명해지고 분명해지면 텅 비게 되고 텅 비게 되면 무위하면서도 자연의 생성 변화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없게 될 것이다.

 

24편 세상으로부터 숨어 사는 서무귀

 

583P~584P 덕을 빌려 이치에 어긋나는 일을 감추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기교로써 남을 이기려 해서는 안됩니다. 계략으로 남을 이기려 해서도 안 됩니다. 전쟁으로 남을 이기려 해서도 안 됩니다. 남의 나라 백성을 죽이고 남의 나라 땅을 빼앗아 차지함으로써 자기의 사사로운 육체와 정신을 만족시키려 하는 자는, 그 전쟁이 아무리 훌륭한 명분이 있다 하더라도 승리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임금님께서는 그러한 일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가슴 속의 정성을 닦음으로써 하늘과 땅의 진실한 변화에 순응하여 어지러워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백성들은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임금님께서 그렇게 되면 어찌 전쟁을 그만두실 생각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588P 자기의 육체와 본성을 고달프게 하고 밖의 만물에 대하여 몰두하며 평생토록 본성으로 되돌아가지 않는 자들이니 슬픈지고

 

25편 임금을 만나고자 하는 칙양

626P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맑고 텅 빈 마음으로 만사를 초월하여 정치를 하여야만 세상이 잘 다스려진다는 것이다.

 

26편 우리 밖의 일과 물건

 

651P세상 사람들은 지식을 이용해서 더 교묘하게 나쁜 짓을 한다. 그리고 자기의 악행을 경전을 인용해 변호할 줄도 안다.

 

653P 자기가 아무리 훌륭한 덕성을 지녔다 하더라도 그것을 내세우며 오만한 행동을 하면 그 자신이 파멸하는 것은 물론 만세토록 환난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27편 다른 일에 빗대어 한 말

 

665P 만물은 모든 종류가 다르며 각기 다른 형체로서 무궁히 변화하는 것이다. 처음과 끝을 둥근 고리의 처음과 끝처럼 구분할 수 없고 그 이치는 터득할 수도 없는 것이니 이것을 자연의 균형이라 하는 것이다. 자연의 균형이란 자연의 실상에 합치되는 것이다.

 

28편 임금 자리를 물려줌

 

685P 성인의 행동이란 반드시 그것을 하는 까닭과 그것을 하는 방법을 먼저 살피는 것이다.

 

29편 강도의 괴수 도척

 

717P 도척이 유가에서 숭상하는 인물들이 모두 그의 본성을 위반하는 짓을 하였고 공자의 가르침도 사람들을 환난으로 몰아넣는 이론에 불과한 것임을 논하고 있다.

 

30편 칼싸움 말 것을 설복함

 

742P 백성들의 뜻을 알아차려 사방의 온 나라를 편안하게 합니다. 이 칼을 한번 쓰면 우레 소리가 진동하는 것 같아서 사방 나라 안 사람들이 복종하지 않는 이가 없게 되어 모두가 임금님의 명령을 따르게 만듭니다.

 

31편 고기잡이

 

757P 성인은 하늘을 법도로 삼고 진실함을 귀중히 여기며 세속에 구애 받지 않습니다.

 

P799군자는 사물을 지나치게 따지며 살펴서는 안 되며, 자신이 물건에 이끌려서도 안 된다.”

 

32편 도가의 계승자 열어구

 

P763 사람들로 하여금 노인들을 저보다 가볍게 여기고 공경하기 않도록 한 것이니, 자기 사진의 환난을 기른 것과 같은 일입니다. 주막 주인이란 특히 음식을 팔아가지고 많은 이익을 남기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거기의 이익이라 보잘것없고 그들의 권한도 가볍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그처럼 저를 대하였으니 하물며 만승의 군주정사를 처리하는 데 다 쓰고 있습니다. 그는 제게 나라 일을 맡겨 제가 공로를 세우기를 바랄 것입니다.

 

P773 백성들이란 피차가 서로 어울려 즐겁게 지낼 수가 있도록 해 주면 그뿐일 것입니다. 지금 백송들로 하여금 사실을 떠나 거짓됨을 배우게 한다면, 백성들을 가르치는 방법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775P 사람들은 자기 안팎으로부터 오는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참된 사람은 이런 고통을 완전히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33편 천하

 

P795 목적과 금골희의 생각은 옮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행동은 옳지 못한다. 후세의 묵가들로 하여금 바드시 스스로를 괴롭힘으로써 넓적다리에는 살이 없고 정강이에는 털이 없도록 만들어 주고 있을 따름인 것이다.

 

806P 그 자신이 강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약한 입장을 지키면 천하 사람들이 계곡에 물이 모이듯 몰려든다. 그 자신이 결백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욕된 것 같은 입장을 지키면 천하 사람들이 계곡으로 물이 흐르듯 따르게 된다.

 

 

III. 내가 저자라면

 

약의 기원을 살펴보면 야생동물들이 병에 걸리거나 부상을 당했을 때 처하는 약초나 처방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하지만 때문에 약이라는 것 또한 자연의 일부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인위적인 것들도 자연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장자의 경우 인위적이지 않다면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 하면서 인간 본연의 욕구를 무시하고 자기를 잊으라 한다. 이것은 결국 그가 유가의 덕이나 인을 인위적이라고 한 것과 그가 주장하는 것이 별반 차이가 없지 않은가?

 

인위적인 것과 인위적이지 않은 것도 결국 비교를 통해서 얻어지며 이러한 구별도 결국 무의미한 것이다. 나는 오히려 인위적인 것과 인위적이지 않은 것 모두를 앎으로 인해서 더욱 자연에 대해서 알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된다. 인위적 행동을 유발하는 욕구 또한 자연을 움직이는 요소 중에 하나이지 않는가? 배가 고파하는 욕구 때문에 먹는 것이지, 먹어야 하기 때문에 배가 고픈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모든 것을 무위로 할 것이 아니라 작은 것과 큰 것, 인위적인 것과 비 인위적인 것 등 서로 상대적인 관념들을 알고 고찰함으로 인하여 자연스러운 방식을 찾고 무위의 경지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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