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id: 깔리여신
  • 조회 수 3855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12년 12월 17일 11시 55분 등록
 

장자

장자지음/ 김학주번역/ 연암서가


저자에 대하여

장자의 이름은 주(周)이고 자는 자휴이다. 지금의 하남성 상구 북쪽에 위치한 몽(蒙)l 고향이다. 장자는 일찍이 몽의 칠원의 관리자 노릇을 하엿다. 그리고 양나라 혜왕 및 젠라 선왕과 같은 시대 사람이었다. 그의 학설은 노자를 근본으로 하였으며 그의 저서는 10여만 자에 이르는데 대부분이 다른 일에 빗대어 얘기하는 원으로 이루어져 잇다.

또 고기잡이 와 강도의 괴수 도척 등의 편을 지어 공자의 무리들을 공격하면서 노자의 학술을 밝혔다.

장자의 생애에 있어서는 더 이상 확실한 기록이 없다. 노자의 생애보다도 그 근거가 확실한 듯이 느껴지지만 그것도 대략 맹자와 비슷한 연배였으리라는 추측 이상은 불가능하다.

<장자>는 동양적인 것, 즉 올바른 자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꼭 읽어야 할 책이다. 더 적극적인 표현을 하면 앞에서 말한 것은 완전한 자유에의 추구는 불교적인 해탈과 함께 가장 동양적인 것을 대표한다고도 할 수 있다. <장자/ 김학주 번역에서 발췌>


****장자의 생애

중국 고대 도가(道家)의 사상가. 이름은 주(周). 송(宋)에서 태어나 맹자와 동시대에 노자를 계승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실재성은 의심스럽다. 전국시대 말기, 도가의 사상가들이 원본 『장자』(莊子)를 편찬할 때, 이것을 장주(莊周)에게 가탁(假託)하여 『장자』라 명명한 것인 듯하다. 이 『장자』는 공자ㆍ맹자보다 노자와 함께 장자가 존중되기에 이르렀던 한대 초기에, 전국 말 이래의 도가의 논저(論著)를 부가하여 성립한 것으로서, 통일된 체계는 없지만 도가 사상의 역사적 전개를 볼 수 있다.

그 기본적 사상의 중심은 당시 지배자의 지위에서 몰락하고 있던 사상가들이, 뜻대로 되지 않는 사회 속에서 개인의 삶에 얽힌 근심과 고난으로부터 관념론적으로 도피하려고 한 인생론에 있다. 이상적인 삶이라는 것은 근심의 근원인 자기의 육체ㆍ정신을 버리고 '허정'(虛靜), '염담'(恬淡)의 심경에 도달하여 자연의 법칙에 따르고 어떠한 것에도 침해받지 않는 자유ㆍ독립을 얻어 세계의 밖에서 초연하게 노니는 것이다. 이것을 실현한 사람이 '진인'(眞人)이다. 이 인생론의 근저에는 세계는 불가지의 실재인 '도'(道)의 표상이라는 세계관과, 개념적 인식과 가치판단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무의미한 것이고 철저한 무지(無知)만이 올바른 것이라고 하는 지식론이 깔려 있다.

이 지식론은 명가(名家)의 궤변이나 전변(田騈)의 제물설(齊物說)의 비판적 섭취에서 성립, 얼마 후에는 세계관과 혼합하여 세계의 존재와 운동은 '도'(道)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는 존재론, 우주 생성의 전설을 받아들여 태초의 '혼돈'='도'로부터 세계가 유출하였다고 하는 우주생성론 및 음양 오행설을 채용하여 물(物)의 생사(生死)를 기(氣)의 집산으로 설명한 자연론 등이 전개되었다. 『장자』의 새로운 부분에는 위와 같은 생각에 기초하여 무위자연(無爲自然)으로 인민을 통치한다고 주장한 정치 사상도 있다.

네이버에서 발췌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문장


내편

제 1편 소요유(逍遙遊)

****소요유는 속된 세상을 초월하여 거리낌 없이 참된 자유로운 세계에 마음을 노닐게 하는 지극한 사람의 경지를 뜻하는 것이다. 크다 작다든가, 좋고 나쁘다는 것 같은 판단은 어디가지나 상대적인 것 뿐이지 절대적인 것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이러한 상대적인 가치기준에서 벗어나 이해관계나 삶과 죽음 같은 것에 대한 의식으로부터 완전히 초월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란 이처럼 아무런 거리낌없이 자유로운 몸과 마음을 지님으로써 참된 행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35P)

1. 

북극바다에 고기가 있는데 그 이름을 곤(鯤)이라 하였다. 곤의 길이는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그것이 변하여 새가 되면 그 이름을 붕(鵬)이라 하는데 붕의 등도 길이가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붕이 떨치고 날아오르면 그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도 같았다. 이 새는 태풍이 바다 위에 불면 비로소 남극의 바다로 옮아갈 수 있게 된다. 남극 바다란 바로 천지 인 것이다.(36P)

해설: 크고 작다는 것은 상대적인 판단이다. 아무런 전제도 없을 때 사람들에게는 큰 것도 작은 것도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곤과 붕이라는 전설적인 물고기와 새의 얘기를 첫머리에서 읽음으로서 장자의 사상의 스케일과 문장의 힘이 느껴질 것이다. 이 때문에 장자의 글은 시 같다고도 한다. (37P)


2. 

아지랑이나 먼지는 생물의 숨결에도 날린다.

물의 깊이가 깊지 않다면 큰 배를 띄울만한 힘이 없을 것이다. 한 잔의 물을 웅덩이에 부어 놓으면 곧 지푸라기가 그곳에 배가 되어 뜨지만 잔을 놓으면 땅에 붙어 버릴 것이다. 물은 얕은데 배가 크기 때문이다.(38P)


4.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하고 짧은 동안 사는 자는 오래 사는 자에 미치지 못한다. 어떻게 그러함을 아는가? 아침 버섯은 아침과 저녁을 알지 못한다. 쓰르라미는 봄과 가을을 알지 못한다. 이것들은 짧은 동안 사는 것들이다. (40P)

해설: 작은 것과 큰 것을 대비시키면서 작은 것과 큰 것들은 각기 자기의 분수가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견주어 볼 때에는 작은 것은 큰 것을 따르지 못한다.(41P)


6. 송영자는 온 세상이 칭찬을 한다 해도 더 신나지 않았고, 온 세상이 비난을 한다 해도 더 기죽는 일이 없었다. 그는 자기 자신과 밖의 일의 분수를 일정하게 알고 영예와 치욕의 한계를 분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 그는 세상일에 대하여 급급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직도 완전하지 못한 점이 있는 것이다.

  열자는 바람을 타고 다니는데 두둥실 날렵하기만 하였다. 그는 한 번 나서면 십오 일 만에야 돌아왔다. 그는 바람이 부는 것이 순조로운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해서는 마음 졸이는 일이 엇었다. 그는 비록 걸어다니는 일은 면했다 하더라도 아직도 의지하는 데가 있는 것이다.

만약 하늘과 땅의 모습을 타고 날씨의 변화를 부림으로써 무궁함에 노니는 사람이 있다먄 그는 또 어디에 의지하는 데가 있는가? 그러므로 지극한 사람은 자기가 없고 신 같은 사람은 이룬 공이 없고 성인은 이름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43~44P)

해설: 진정 자유로운 훌륭한 사람은 일반 세상의 가치기준을 초월한다. 열자 같은 신선도 바람을 타야만 함으로 완전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못된다. 그래서 도를 닦은 지극한 사람은 자신의 존재조차도 잊게 되고 신묘한 능력을 지닌 신인은 사람들이 의식도 못할 큰 일을 자연의 변화처럼 이룩하며 지혜와 덕이 많은 성인은 세상에 이름조차도 잘 알려지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45P)


7. 뱁새는 깊은 숲속에 둥우리를 친다 해도 한 개의 나뭇가지를 사용할 따름이며, 두더지가 황하의 물을 마신다 해도 그것은 배를 채우는데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46P)

해설: 사람이란 각기 자기가 살아 나갈 분수와 방식이 있다. 그러니 되도록 쓸데없는 명분에 사로잡힞 말고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 천자라는 것은 만인이 우러러보는 높은 지위이지만 인간에게는 별로 쓸데없는 명분이라고 처리해 버리는 장자의 글에ㅓ 진실한 인간의 모습을 추구하는 의기가 느껴진다 (47P)


11. 혜자가 장자에게 말하였다.

  “나 있는 곳에 큰 나무가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개똥나무라 부르오. 그 큰 줄기에는 혹이 많이 붙어있어서 먹줄을 칠 수가 엇고, 그 작은 가지들은 뒤틀려 있어서 자를 댈 수도 없소. 길가에 서 있지만 목수들도 거들떠보지 않소.”

장자가 말하였다.

“지금 당신은 큰 나무를 가지고 그것이 쓸데가 없다고 근심하고 있소. 어째서 아무 것도 없는 고장, 광막한 들에다 그것을 심어놓고 하는 일 없이 그 곁을 왔다갔다 하거나 그 아래 어슬렁거리다가 드러누워 낮잠을 자지 않소? 그 나무는 도끼에 일찍 찍히지 않을 것이고 아무 것도 그것을 해치지 않을 것이오. 쓸데가 없다고 하여 어찌 마음의 괴로움이 된단 말이오.” (53P)

해설: 쓸데가 없다는 무용(無用)이야말로 크게 쓰일 수 있는 것임을 강조한 대목이다. 사람들이 쓸 곳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 수록 일반적인 관점을 뛰어넘는 안목에서 볼 때에는 더욱 크게 쓰일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속된 세상의 가치 판단 기준이나 속된 생각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이성을 초월하여 크고 작다든가 좋고 나쁜 것을 분별하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무위자연’의 세계에 몸을 둘 것을 가르치는 것이 소유유의 요지이다. (55P)


☆☆☆아무리 훌륭하고 좋다하더라도 쓰임이 없다면 무용지물로 여기는 현대인들에게 장자의 말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쓰임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라니, 그리고 괴로워하지 말라니...... 쓰임과 고임을 받고 싶어하는 현대인들에게 위로가 될까?

제 2편 제물론(齊物論)

***제물이란 모든 사물을 한결같이 똑같은 것으로 본다는 뜻이다. 세상의 일반적인 가치관을 초월하여 높은 경지에서 볼 때 모든 사물은 한결같이 보이는 것이다.


1. 남곽자기가 말하였다.

“대지가 기운을 내뿜는 것을 바람이라 말한다. 이것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뿐이지만, 일어나기만 하면 모든 구멍이 성난 듯 울부짖는다. 그대만이 그 씽씽 부는 소리를 듣지 못하겠는가? 산 숲이 높다란 것과 백 아름되는 큰 나무의 구멍들이 코와도 같고 입과도 같고 귀와도 같으며, 목이 긴 병과도 같고, 술잔과도 같고, 절구통과도 같고, 깊은 웅덩이 같은 놈에 얕은 웅덩이 같은 놈도 있다. 큰소리로 부르는 소리, 크게 성내는 소리, 꾸짖는 소리, 바람 들이마시는 소리, 외치는 소리, 큰 소리내어 곡하느 소리, 둔하게 울리는 소리, 맑게 울리는 소리를 낸다. 앞의 것들이 우우 하고 소리를 내면 뒤따르는 것들도 오오하고 소리를 낸대. 소슬바람에 작은 소리로 화창(和唱)하고, 회오리 바람에는 큰소리로 화창한다. 사나운 바람이 자면 모든 구멍들은 텅비게 된다. 그대만이 살랑살랑 펄렁펄렁거리는 것을 보지 못하였는가?” (57P)


2. 큰 지혜를 지닌 사람은 여유가 있지만 작은 지혜를 지닌 사람은 남의 눈치만 본다. 위대한 말은 담담하고 너절한 말은 수다스럽기만 한다. 잘잘 때에는 혼백에 의해 꿈을 구고, 깨어나면 몸에 의해 활동한다. 외물(外物)을 접하게 되면 어지러워 매일처럼 마음은 갈등을 일으킨다. 그렇지만 너그러운 자도 있고 심각한 자도 있으며 꼼꼼한 자도 있다. 두려움이 작을 때에는 두려워 떨지만 두려움이 크면 멍청해진다.

가을이나 겨울처럼 쇠해져 간다는 말은 그들이 날로 쇠약하고 있음을 잘 표현한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하는 일에 자꾸만 빠져 들어가 다시는 돌이킬 수 없게 된다. 묶여진 것처럼 그들의 욕망에 억눌린다는 말은 그들이 늙으면서 시들어져 감을 표현한 것이다. 죽음에 가까워진 자의 마음은 다시 소생케 할 수가 없는 것이다. (60P)


3. 기븜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움과 걱정과 탄식과 변덕과 고집스러움 및 경박함과 방탕함과 뽐냄과 허세 같은 사람의 마음이 음악이 공간에서 생겨나고 버섯이 수증기로 말미암아 자나라는 것처럼 밤낮으로 우리 앞에 서로 엇바뀌어 나타나지만 그러나 그 싹이 트는 곳을 알지 못한다. 아아, 안타까워라! 아침저녁으로 이것들이 나타남은 그 근원이 있어서 생기는 것이 아닌가!

그것들이 아니면 나도 존재할 수 없고 내가 아니면 그것들도 의지할 곳이 없게 될 것이다. 이것들은 나와 가까운 것일 터인데도 그렇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 혹 참된 주재자가 있을 법도 하지만 특별한 그 증거를 잡아낼 수는 없다. 그것의 작용에 대해서는 이미 믿고 있다 하더라도 그 형체는 볼 수가 없다. 그러한 실정은 존재하나 그 형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62P)

해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감정이 있지만 그 감정이 어디에 근원을 두고 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감정이 우리 눈앞에 나타나고 있는 이상 그 근원도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 근원은 차된 우주의 지배자인지도 모른다. 장자는 그러한 감정과 감정의 근원의 관계를 자연과 주재자의 관계로까지 연결짓고 있다. (64P)


4. 일단 그의 형체를 받고 태어났으면 몸을 손상시키지 않고 그것이 다해지기를 기다려야 한다. 밖의 물건들과 서로 맞서서 마찰을 일으켜 인생을 뜀박질하듯 살아가면서 그 발길을 멈추지 못한다면 매우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평생을 발버둥치면서도 그가 이루어 놓은 공은 하나도 없고 나른히 일에 지쳤으면서도 그 일의 귀결은 알지 못한다면 어찌 가엾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그를 보고 죽지 않았다고 말한들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그의 육체의 노롸흫 따라 그의 마음도 그와 같이 노화한다면 어찌 큰 슬픔이라 말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사람의 삶이란 본시부터 이처럼 아둔한 것일까? 나만이 홀로 아둔하고, 사람들중에는 아둔하지 않은 이들도 있는 것일까? (64P)

해설: 사람이란 이 세상에 한 번 태어났으면 자연스럽게 살다가 죽으면 된다는 것이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외부 세계와 항상 마찰을 일삼거나 평생을 고달프게 살아가는 자들처럼 가련한 사람들은 없다. 또 몸이 늙는다고 해서 마음까지도 이를 따라 늘 금심하며 함께 늙어 갈 필요는 없다. 자연스러우면 그 뿐이라는 것이다. (65P)


6. 말이란 소리가 아니다. 말이란 것은 어떤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나 그 말로 표현하는 생각은 일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 과연 말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본시부터 말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새새끼가 우는 소리와는 다르다고 하지만 그것과 차이가 있는 것일까. 차이가 없는 것일까?

도는 어디에 숨겨져 잇다가 진실과 거짓을 드러내는가? 말은 어디에 가려져 있다가 옳고 그름을 분별한느가? 도는 어디에 간들 존재하지 않는 일이 있는가? 말은 어디에서 쓰인들 안되는 일이 있는가?

도는 조그만 성취에 숨겨지게 되며, 말은 화려함에 가려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가와 묵가의 시비가 존재하게 되어 상대방이 그르디고 하는 것은 이 편에서 옳다고 하고 상대방이 옳다고 하는 것은 이 편에서 그르다고 한다. 상대방이 그르다고 하는 것을 옳다고 하고, 상대방이 옳다고 하는 것은 그르다고 하려면 곧 밝은 지혜로써 해야만 할 것이다. (67p)


7. 물건은 저것이 되지 않는 것이 없고, 도 이것이 되지 않는 것도 없다. 저것은 저것의 입장만으로는 드러나지 않아도 이것을 통하여 알아보면 곧 저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저것은 이것에서 나오고, 이것 역시 저것에 말미암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저것과 이것이 함께 생겨난다는 설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삶이 있으면 죽음도 있고 죽음도 있으면 삶도 있다. 가(可)한 것이 있으면 가하지 않은 것이 있고 가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가한 것이 있다. 옮음으로 말미암아 그릇됨이 있고 그릇됨으로 말미암아 옳음이 있다.

그래서 성인은 이런 것에 의거하지 않고 그런 것을 자연에 비추어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옳음에 근거를 둔 것이다. 이것은 또 저것이 되고 저것은 또 이것이 된다. 저것도 한 가지 시비가 되고 이것도 한 가지 시비가 된다. 그러면 과연 저것과 이것이 있는 것인가? 과연 저것과 이것이 없는 것인가? 저것과 이것이란 상대적인 개념이 없는 것, 그것을 일컬어 도추(道樞)라 한다. 도추가 가장 알맞은 가운데에 들어맞아야만 비로소 무궁한 변화에 대응할 수 있게 된다. 옳음도 역시 무궁한 변화 중의 하나이고 그름도 역시 무궁한 변화 중의 하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밝은 지혜로서 판단하는 것이 가장 좋다”r 하는 것이다. (69P)

해설: 여기서는 모든 상대적인 시비나 가치판단을 부정한다. 세상 사람들이 좋다 나쁘다, 또는 크다 작다 하는 판단은 모두가 본질과는 상관없는 상대적인 것이다. 다라서 상대적인 것을 초월하여 ‘맑은 지혜’를 바탕으로 하여 자연과 융화될 때 비로소 참다운 사실의 파악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70P)


8. 천지는 한 개의 손가락과 같은 것이다. 만물은 한 마리의 말과 같은 것이다.

가능한 것은 할 수 있고, 불가능한 것은 할 수 없다. 도가 행해짐으로써 이루어지고 물건은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음으로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어찌하여 그렇게 되는가?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어찌하여 그렇게 되지 않는가?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다. 물건에는 본시부터 그렇게 될 요소가 담겨져 있으며 물건에는 본시부터 가능한 요소가 간직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는 물건이란 없으며, 그렇게 가능하지 않은 물건이란 없는 것이다. (71P)

해설: 천지만물을 큰 차원에서 보면 모두가 한 가지라는 제물론의 사상을 전개시킨 것이다. 그리고 만물의 존재나 도의 운행 같은 것은 모두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렇게 되도록 되어있고 본질적으로 그러한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그 나름대로의 의의를 지닌 개연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72P)


9. 나누어지는 것은 다른 면에서는 이루어지는 것이 된다. 이루어지는 것은 다른 면에서는 파괴가 된다. 모든 물건에는 이루어지는 것과 파괴가 없으며 다시 통하여 한 가지 것이 된다. 오직 통달한 사람만이 모든 것이 통하여 한 가지가 됨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개인의 판단을 사용하지 않고 보편적인 영원한 것에 일체를 맡겨 버린다.

알맞게 제대로 도니다면 거의 도에 이른 것이다. 이것을 근거로 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미 그렇게 되었는데도 그렇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는데, 그것을 일컬어 도라고 하는 것이다.

해설: 크게 보면 크고 작고 흉하고 아름다운 것이란 본시는 세상에 없는 것이다. 또한 완성도 파괴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얕은 지혜로써 상대적인 기준에 의하여 이러한 판단을 내리고는 기뻐하거나 걱정하기도 한다.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다. 모두가 한 가지 도(道)로 통한다. 도란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73P)


13. 시작이라는 것이 있다면 일찍이 시작되지 않았던 적이 있을 것이며, 일찍이 시작되지 않았던 그 이전도 있을 것이다. 있는 것이 있고 없는 것이 있다면 일찍이 있고 없는 것도 없었던 그 이전도 있을 것이다. 갑자기 없는 것이 존재하게 되는데 그때에도 있고 없는 것 중에 과연 어느 것이 있고 어느 것이 없는지는 알지를 못한다. (79P)

해설: 사람들의 인식이나 평가는 모두 완전한 것이 못된다. 사람들의 인식을 바탕으로 한 있고 없는 것. 도는 평가를 바탕으로 한 올바른 이론이나 궤변은 모두 어느 것이 진실한 것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불완전한 인식과 평가를 초월할 수 있어야만 참된 사람으로 존재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자기의 이론조차도 초우러하려는 장자의 자세가 철저하다. (80P)


14. 천하에서 가을 짐승 터럭 끝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여길 수도 있다. 어려서 죽은 아이(20세 전에 죽은 것을 가리킨다)보다 더 오래 살 수 없다고 여길 수도 있고 팽조(오래 산 것으로 유명한 옛사람 이름)를 일찍 죽었다고 여길 수도 있다. 하늘과 땅은 우리와 더불어 함께 존재하고 있고, 만물은 우리와 더불어 하나가 되어 있다. 이미 하나가 되어 있으니 또한 이론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하나라는 것과 이론은 두 가지가 되며 그 두 가지와 하나는 또 세 가지가 된다. (80P)

해설 : 크고 작다든가 오래 살고 일찍 죽는다는 것 같은 것은 모두가 상대적인 것이어서 보는 입장이나 기준에 따라 그 평가는 크게 달라진다. 이런 불완전한 바탕에 천하의 모든 사물을 따져보면 한없이 말한 많아지고 결론은 얻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물건의 있고 없는 것이나 크고 작은 것 등을 따질 것 없이 초연히 자연스럽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81P)


15. 도에는 본시부터 한계가 없는 것이다. 말(言)에는 본시부터 법도가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말에는 구별이 생기는 것이다. 그 구별에 대하여 말해보고자 한다. 말에는 왼편이 있고 오른편이 잇으며, 이론이 있고 설명이 있으며, 분석이 있고 분별이 잇으며 대립이 있고 다툼이 있다. 이것을 여덟가지 덕(八德)이라 한다.

분석해야 할 것에 대하여 분석하지 않은 것이 있고 분별해야 할 것에 대하여 분별하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은 어째서인가? 성인들은 모든 것을 마음 속에 품고 있으나 보통 사람들은 모든 일을 분별함으로써 자기를 내세우려 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분별하는 사람들은 옳게 보지 못하는 면이 있다는 것이다. (82P)


16. 위대한 도란 말로 표현하지 못하며 위대한 이론은 말로 나타내지 못하는 것이다. 위대한 어짊은 어질지 않는 듯하고, 위대한 청렴은 겸손하지 않은 듯하며 위대한 용기는 남을 헤치지 않는다. 도가 밝게 드러난다면 도가 아닌 것이며, 말이 이론적이라면 불충분한 갓이다. (83P)

해설 : 어떠한 미덕이라 하더라도 이것을 의식하고 행할 때에는 오히려 악덕으로 변화해 버릴 위험이 있다. 다만 인위적이 아닌 자연 그대로일 때 그것은 무한한 미덕이 생겨나는 원천이 되는 것이다. (84P)


19. 왕예가 대답하였다.

지극한 사람이란 신묘한 것이다. 큰 연못을 말릴 뜨거운 불이라 하더라도 그를 뜨겁게 할 수가 없고, 큰 강물을 얼어붙게 하는 추위도 그를 춥게 할 수가 없다. 굉장한 우레가 산을 무너뜨리고 바람이 바다를 뒤흔든다 하더라도 놀라는 일이 엇다. 그러한 사람은 구름 기운을 타고 해와 달에 올라앉아 이 세상 밖에 노니는 것이다. 죽음과 삶도 자기에게 변화를 가져올 수 없거늘 하물며 이롭고 해로운 것의 평가기준이야 어떠하겠는가? (88P)

해설: 지극한 사람은 장자가 이상으로 받드는 인간상이다. 그는 뜨거움이나 추위는 물론 죽음과 삶까지도 초월하여 이 세상 일에 초연하다. 따라서 이로움이나 해로움같은 것은 그의 마음이나 행동을 조금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다. (89P)


22. 꿈속에서 술을 마시며 즐기던 자가 아침이 되어 울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 꿈속에서 슬피 울던 자가 아침에는 즐거이 사냥을 나가기도 합니다. 막 꿈을 꾸고 있을 때에는 그것이 꿈인 줄을 알지 못합니다. 꿈속에서 또 그 꿈을 점치기도 합니다. 꿈을 깬 뒤에야 그것이 꿈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또한 큰 깨어남이 있어야만 비로소 이 삶이 큰 꿈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자들은 스스로 깨어있다고 생각하고 버젓이 아는 체를 하여 임금이니 목동이니 하지만 고루한 일이지요. (93P)


26. 옛날에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 그는 나비가 되어 펄펄 날아다녔다. 자기 자신은 유쾌하게 느꼈지만 자기가 장주임을 알지 못하였다. 갑자기 꿈을 깨니 엄연히 자신은 장주였다. 그러니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던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되어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장주와 나비에는 반드시 분별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을 ‘만물의 조화’라고 부른다.

해설: 이 대목은 장자의 ‘나비의 꿈’으로 유명한 우화이다. 현실이 꿈인지, 삶과 죽음의 한계는 어떤 것인지? 만약 우리가 이러한 상대적인 개념을 초월한다면 거기에는 아무런 차별도 없게 될 것이다.

상대적인 개념이 없어짐으로써 완전히 자유스러워진 세계, 이것이 장자가 생각하는 이상향인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물이 한결같게 여겨질 대, 자연에 완전히 융화될 수 있을 것이다.(99P)


제 3편 양생주(養生主)


2. 덕은 명성 때문에 그 진실함을 잃기 쉽고, 지혜는 경쟁심 대문에 지나치게 되는 것이다. 명성은 서로를 손상시키는 것이고, 지혜는 다툼의 연모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는 흉기이므로 지나치게 행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114P)


6. 안회가 말하였다.

“감히 마음의 재계에 대하여 여쭙고자 합니다.”

공자가 말하였다.

“그대는 그대의 뜻을 통일하여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듣도록 해야 한다. 다음에는 마음으로도 듣지 않고 기운으로 듣도록 해야 한다. 귀란 듣기만 할 뿐이며 마음이란 느낌을 받아들일 뿐이지만 기운이 텅 빈 채 사물에 응대하는 것이다. 도란 텅 빈 곳에 모이게 마련이다. 텅 비게 하는 것이 마음의 재계인 것이다. (122p)


11. 안합이 위나라 영공의 태자의 스승이 되어 먼저 거백옥을 찾아가 물었다.

거백옥이 대답하였다.

“종손하면서도 남에게 글려 들어가지 않아야 합니다. 온화하면서도 남에게 일을 드러내지 않아야 합니다. 태도가 종순하면서 남에게 끌려 들어가다 보면 전복되고 멸망당하여 무너지고 파멸하게 됩니다. 마음이 온화하면서 남에게 일을 드러내다 보면 명성을 뒤쫒다가 재난을 당합니다. 상대방ㅇ 아이와 같다면 그와 더불어 아이같이 되십시오. 상대방이 분수 없는 사람이라면 그와 더불어 종잡을 수 없게 행동하십시오. 여기에 통달하게 되면 탈없는 경지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133p)


12. “당신은 사마귀를 알지 못합니까? 화가 나면 그의 집게를 벌리고 수레바퀴 앞에 막아  서서 자기가 깔려 죽을 것도 알지 못합니다. 경계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자기 재질의 훌륭함만 믿고 있는 것이지요. 경계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자기의 훌륭함을 크게 뽐내면서 상대방의 권위를 범하면 위태로워집니다. (134P)


***그의 제자는 장석에게 달려가 말하였다.

“제가 도끼를 들고 선생님을 따라 다닌 이래로 이처럼 훌륭한 재목은 본 일이 없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고 발길을 멈추지도 않으시니 어찌 된 일입니까?”

장석이 말하였다.

“아서라. 그런 말 말거라. 그것은 쓸데없는 나무다. 그것으로 배를 만들면 가라앉고 관을 만들면 빨리 썩어 버리고 그릇을 만들면 바로 깨어져 버리고 문짝을 만들면 나무진이 흘러내리고, 기둥을 만들면 곧 좀이 먹는다. 재목이 될 만한 나무가 아니다. 쓸 만한 곳이 없어서 그처럼 오래 살고 있는 것이야.”

장석이 집으로 돌아온 뒤 토신묘의 참나무가 꿈에 나타나 말하였다.

“.....그러므로 타고난 목숨대로 끝가지 살지 못하고 중간에 일찍 죽어버리는 것이다. 세속에서 스스로 얻어맞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나는 쓸 곳이 없기를 바라 온지가 오래 되었다. 거의 죽을 뻔하다가 이제야 뜻대로 되어 쓰일 곳이 없는 것이 나의 큰 쓰임이 된 것이다. 만약 내가 쓸데가 있었다면 어찌 이처럼 커질 수가 있었겠는가?”(140P)

해설: 여기서도 쓸데없는 것의 쓰임을 말하고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쓸데없는 것, 또는 능력 없는 것이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괴로움을 당하지 않고 자기의 삶을 잘 보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141P)


17. 공자가 초나라로 갔는데, 초광 접여가 객사 문앞을 지나가면서 노래하였다.


복은 새깃보다도 가벼운데

아무도 그것을 잡을 줄 모르고,

화(禍)는 땅보다도 무거운데

아무도 그것을 피할 줄 모른다.


산의 나무는 스스로 자라 베어지게 되고,

기름불은 스스로 타 버린다.

육계(肉桂)는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잘리고,

옻나무는 옻을 쓸 수 있는 것이어서

껍질이 벗겨진다.

사람들은 모두 쓸데 있는 것의 쓰임을 알지만

쓸데 없는 것의 쓰임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145P)

☆☆☆옛 것이라고 전부 좋은 것은 아니다. 장자의 가르침이라지만 쓸데 없는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쓰임이 많은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 나의 바람이다.


제5편 덕충부(德充符)

***덕이 사람의 마음 속에 충만하게 되면 그 증험이 박으로 자연히 나타나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덕이 안으로 찬 사람은 밖으로 자기의 형체를 잊게 되며, 형체를 잊어야만 자연의 변화에 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2. 공자가 말하였다.

“서로 다른 점으로부터 본다면 한 몸의 간과 쓸개도 초나라의 월나라처럼 다른 것이고, 서로 같은 점으로부터 본다면 만물은 모두가 한 가지인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아는 사람은 귀와 눈을 즐겁게 하는 아름다운 것도 알지 못하게 되며, 마음을 덕의 조화 속에 노닐게 합니다. 만물이 한결같이 완전한 것만을 보지 그것들이 손상된 점은 보지 않습니다. (151p)


6. 애공이 말하였다.

“무엇을 가지고 재질이 완전하다고 말합니까?”

공자가 말하였다.

“죽음과 삶, 존속과 사라짐, 곤궁과 영달, 가난과 부, 어짊과 우둔함, 비난과 칭찬, 굶주림과 목마름, 추위와 더위, 이러한 것들은 일의 변화요 운명의 실현입니다. 낮과 밤이 눈앞에서 엇바뀌어지고 잇지만 사람들의 지혜는 그 시작을 규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변화는 조화를 어지럽히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스며들지도 않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하여그 조화됨으로서 즐겁게 통달하여 충실함을 잃지 않게 하면 밤낮으로 변화가 들어올 틈이 없게 되어 만물과 더불어 어울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만물과 접하여 마음에 조화를 이룩하는 것입니다. (162P)


8. 혜자가 말하였다.

“이미 그를 사람이라 부른다면 어찌 감정이 없을 수가 있겠소?”

장자가 말하였다.

“그것은 내가 말하는 감정이 아니오. 내가 감정이 없다고 말하는 근거는 사람들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으로서 안으로 그 자신을 상하게 하지 않으며, 언제나 자연을 따르기만 하고, 자기 삶에 이익을 주려 하지 않는 것이오.”

헤자가 말하였다.

‘삶에 이익이 되게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자신을 보유할 수가 있겠소.“

장자가 말하였다.

“도가 그에게 용모를 부여했고, 하늘이 그에게 형체를 부여했으니,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으로서 안으로 그 자신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오. 지금 당신은 자신의 정신을 소외하고 당신의 정력을 낭비하고 있소. 나무에 기대서면 노래하고, 거문고를 잡소서 눈을 감고 있다오. 하늘이 당신의 형체를 갖추어 주었는데도 당신은 궤변으로 천하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소. (167P)

해설: 자기 자신의 감정을 따라 자기 삶을 이익되게 하려는 노력없이 자연에 자신을 맡겨야만 참된 삶을 살 수가 있다는 것이다. 자기 육체는 물론, 자기 감정에도 얽매임이 없어야 지극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168P)


제 6편 대종사(大宗師)

2. 또한 참된 사람(眞人)이어야만 참된 앎을 알게 된다.

엣날의 참된 사람은 삶을 기뻐할 줄도 모르고, 죽음을 싫어할 줄도 몰랐다. 세상에 나옴을 기뻐하지도 않게니와 저승으로 드렁감을 거부하려 들지도 않았다. 의연히 가고 의연히 올 따름인 것이다. 그는 삶의 시작을 꺼리지도 않거니와 삶의 종말을 바라지도 않는다. 삶을 받아도 그것을 기뻐하고 그것을 잃어도 또다시 그러하다. 이것이 자기마음을 서로서 도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며, 사람으로써 하늘을 돕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이를 두고 참된 사람이라 부른다. (171P)


4. 옛날의 참된 사람은 그의 키가 크다 하더라도 무너진 모습을 하지 않으며 무엇이 부족한 듯하지만 남에게서 받는 것이 없다. 편안히 행동하는 것이 모가 난 듯도 하지만 고집하는 일은 없다. 널따랗게 텅비어 잇지만 화려하지도 않다. 화락하여 언제나 기쁜 듯하다.

그들에게는 좋아하는 것도 한 가지이고, 좋아하지 않는 것도 한 가지이다. 그들에게는 한 가지의 것도 한 가지이고, 한 가지 것이 아닌 것도 한 가지이다. 그처럼 한 가지라는 것은 하늘과 한 무리가 되는 것이고, 한 가지가 아니라는 것은 사람과 한 무리가 되는 것이다. 하늘과 사람은 서로 다툴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을 참된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176P)


5. 죽음과 삶은 운명이다. 밤과 낮이 일정하게 있는 것은 천연이다.

대지는 우리에게 형체를 부여하고 삶을 주어 우리를 수고롭게 하고 있다. 늙게 만듦으로써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고, 죽음으로써 우리를 쉬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기의 삶을 잘 사는 것은 곧 자기의 죽음을 잘 맞이하는 길인 것이다. (178P)

☆☆☆웰빙이 웰다잉이다. 잘 사는 것이 잘 죽는 것이다.


8. 삶의 욕망을 죽이는 사람은 죽지 않으며, 삶의 욕망을 살리는 사람은 살지 못하오. 그는 만물을 전송하지 않는 것도 없고, 마중하지 않는 것도 없으며, 파괴하지 않는 것도 없고, 생성시키지 않는 것도 없소. 그런 것을 ‘혼란 뒤에 안정된다’는 뜻의 영녕(영寧)d라 부르오. 영녕이란 혼란한 뒤에야 이루어지는 것이오. (184P)

해설:장자는 ‘도’ 곧 자연에 도달하는 방법으로는 오직 무위(無爲), 다시 말하면 일부러 하는 행동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며, 도를 깨치기 위한 특별한 수양법을 말하지 않는다. 수양을 하기 위해서는 노력을 해야 되겠지만 장자에 있어서 노력은 작위요, 인위이므로 수양 그 자체가 부자연스러운 것이어서 버려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86P)


9. "누가 무(無)를 머리로 삼고 사람을 척추로 삼고, 죽음을 궁둥이로 삼을 수가 있겠는가? 누구든 삶과 죽음과 생존과 멸망이 한 가지임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와 더불어 친구가 될 것이다.“ (186P)


"몸을 타고나는 것은 때를 얻은 것이며, 삶을 잃는 것은 자연변화를 따르는 것이오. 때에 안정되고 자연 변화에 순응하면 슬픔이나 즐거움이 끼여들 수가 없게 되오. 이것이 옛날부터 이른바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인 것이오. 그런데 속박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지 못하는 것은 사물이 그를 동여매고 있기 때문이오. 사물이 하늘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오래 된 진리요. 내가 또 어찌 싫어하겠소. (187P)


11. 공자가 말하였다.

“그들은 세속의 밖에 노니는 사라들이다. 그런데 나는 세속의 안에서 놀고 있다.........그들은 지금 조물주와 벗이 되어 하늘과 땅의 한 가지 가운 속에 노닐고 있다. 그들은 삶을 군살이나 혹처럼 여기고, 죽음을 곪은 것을 짜거나 종기를 베어 버리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한 사람들이야 또 어지 죽음과 삶에 앞서고 뒤지는 것이 있음을 알겟는가? 물체를 발림으로써 세상에 존재하고 있지만, 사실은 본체에 자신을 기탁하고 잇는 것이다. 자기의 간이나 쓸개까지도 잊고, 자기의 귀와 눈도 염두에 없다. 처음과 끝이 되풀이 되고 있지만 끝가는 데를 알 수가 없다. (192P)


13. 사람들은 모두 지금으 몸을 가리켜 자기라고 하지만 그들이 어찌 자기들이 생각하는 자기가 진실한 자기임을 알겠는가? 또한 그대가 꿈에 새가 되어 하늘로 날아오르거나 꿈에 물고기가 되어 못 속에 잠겼었다면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 꿈에서 깨어난 것인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 꿈인지를 알지 못할 것이다. 즐거운 경지에 이르러도 구태여 웃지 않아도 스스로 즐겁고, 즐겁고 웃을 일이 있다면 그것을 물리칠 것까지는 없는 것이다. 편히 대할 일이나 배척할 일이 닥쳤을 때 변화를 따른다면 비로소 텅 빈 하늘과 한 몸을 경지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197P)


15. 공자가 말하였다.

“도와 일체가 되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차별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변화에 개대로 따르면 일정한 것만을 추구하는 마음이 없어진다. 그대는 과연 현명하구나. 나도 그대 뒤를 따르며 베워야 되겠다.” (202P)


제 7편 응제왕(應帝王)

****응제왕이란 자기의 마음조차도 잊고 자연의 변화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있으면 그러한 수양에 응하여 제왕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6. “지극한 사람의 마음쓰임은 거울과 같은 것이다. 가는 것은 전송하지 않고 오는 것은 마중하지 않는다. 변화에 호응하되 감추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사물을 이겨 내면서도 상처받지 않을 수가 있는 것이다.” (218P)

해설: 거울은 표면 그 자체는 바로 허무이다. 허무이기 때문에 모든 사물을 그곳에 머물게 할 수 있다. 또한 거울은 차별의 마음이 없기 때문에 특정한 것만을 비추지 않고 찾아오는 것 그 모두를 비출 수가 있는 것이다.


7. 코스모스와 카오스

남해의 제왕을 숙이라 하고, 북해의 제왕을 홀이라 하고, 중앙의 제왕을 혼돈이라 한다.

숙과 홀이 어느 때 혼돈의 땅에서 만나게 되었다. 혼돈이 이들을 매우 잘 대접하여 숙과 홀은 혼돈의 은덕을 갚을 방법을 의논하여 말하였다.

“사람들은 일곱 개의 구멍을 가지고 보고 듣고 먹고 숨쉬고 있는데, 혼돈만은 이것을 가지고 있지 않소. 그에게도 구멍을 뚫어 주어보십시오.”

그리고는 혼돈의 몸에 하루에 한 구멍씩 뚫어 나갔는데 칠 일 만에 혼돈은 주고 말았다.

해설: 여기서는 인위와 자연을 우화적인 수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혼돈이란 본시 하늘과 땅이 나뉘기 전의 상태를 뜻하지만 한편 그것은 순수한 본성이나 자연을 뜻하기도 한다. 이러한 순수한 자연에는 아무리 훌륭하고 좋은 뜻에서라도 일단 어떤 사람의 의식적인 행동이 가해지면 바로 죽어버린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이미 인위이지 자연은 아닌 것이다. (220P)


외편(外篇)

***내편에는 장자의 사상을 충실히 반영하는 글들이 실려있는 반면 외편과 잡편에는 본래의 장자사상으로부터 변질 된 성격의 내용들이 실려 있다.


제 8편 변무

***변무란 엄지발가락과 둘째 발가락이 붙어있는 것을 뜻한다.

2. 지극히 올바른 경지에 이른 사람은 그의 본성과 운명의 진실함을 잃지 않는다. 그러므로 합쳐져 있다 하더라도 쓸데없이 들러붙지 않고, 갈라져 있다 하더라도 소용없이 덧붙어 있지는 않고, 갈라져 있다 하더라도 소용없이 덧붙어 잇지는 안고, 길다 하더라도 남는 것이 잇지 않고 잛다 하더라도 부족하지 않다. 그러므로 물오리의 다리는 비록 짧지만 길게 이어주면 걱정이 될 것이며, 학의 다리가 비록 길지만 짧게 잘라주면 슬퍼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본성이 길면 잘라주지 않아도 되고, 본성이 짧으면 이어주지 않아도 된다. 아무 것도 걱정할 것이 없는 것이다.(227P)


3. 천하에는 일정한 본연이 있다. 일정한 본연이란 것은 굽었어도 갈고리로 굽힌 것이 아니고, 곧은 먹줄로서 곧게 한 것이 아니고 둥글어도 그림쇠로 둥글게 한 것이 아니고, 모가 났어도 굽은 자로 모나게 한 것이 아닌 것이다. 붙어있되 아교나 옻칠로써 붙인 것이 아니고, 묶여있되 줄이나 새기로서 묶여진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천하에 개성을 달리하여 모두가 살고 있지만 그가 그렇게 살고 있는 까닭은 알지 못한다. 다 같이 모두가 자기 모습을 지니고 있지만 그가 자기 모습을 지니게 된 까닭은 알지 못한다. 그런 것은 예부터 지금까지 변한 것이 아니니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도 없는 것이다. (229P)


4. 스스로 보지는 않고 남의 것만을 보고, 스스로의 것을 지니지 않고 남의 것만을 지니는 것은 남이 지니는 것만을 지니려 들고 그가 지녀야 할 것은 스스로 지니지 않는 것이 된다. 남의 편안함만을 편안히 여기고 그의 편안함은 스스로 편안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 된다. 남의 편안함만을 편안히 여기고 그의 편안함은 스스로 편안하지 않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는 도척이나 백이 같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편벽되고 있는 것이다. (233p)


제 9편 말발굽 마제(馬蹄)

***마제란 말발굽의 뜻이다.

4. 세상을 위하여 말과 되를 만들어 헤아리면 곧 말과 되를 아울러 쓰며 도적질하게 된다. 세상을 위하여 저울을 만들어 무게를 달면 곧 저울을 아울러 쓰며 도적질하게 된다. 세상을 위하여 부신과 도장을 만들어 그것을 믿게 하면 곧 부신과 도장을 아울러 쓰며 도적질하게 된다. 세상을 위하여 어짊과 의로움을 아울러 쓰며 도적질하게 된다.

무엇으로 그러함을 아는가? 허리띠 고리를 훔친 자는 처형을 당하지만 나라를 도적질한 자는 제후가 된다.  (250P)


5. 위대한 기교는 졸렬한 듯이 보인다 (252P)


제 11편 재유(在유)

***재유란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둔다는 뜻이다.


1. 눈밝은 것을 좋아한 결과 소리에 빠지게 되었고, 어짊을 좋아한 결과 타고난 덕을 어지럽히게 되었고, 의로움을 좋아한 결과 의리에 어긋나게 되었고, 예의를 좋아한 결과 겉치레에 자신을 잃게 되었고, 음악을 좋아한 결과 음탕함에 자신을 잃게 되었고, 지혜를 좋아한 결과 남의 허물찾기에 자신을 잃게 되었다. (260P)


2. 노자가 말하였다.

“부드러움은 억세고 강한 것을 유하게 만드는데, 사라들은 모나고 날카롭게 깎고 쪼으려고만 한다. 뜨겁게 달아오르면 타오르는 불길 같고, 차갑게 식으면 꽁꽁 언 얼음 같게 된다. 마음의 빠르기는 잠깐 사이에 이 세상 박을 두 번 도는 정도이다. 가만히 있을 적에는 심연처럼 고요하지만 움직이기 시작하면 하늘로 날아오른다. 성이 났다 봄냇다 하여 잡아매 둘 수가 없는 것이 인심인 것이다. (263P)


5. 광성자가 벌떡 일어나면서 말하였다.

“내 당신에게 지극한 도를 얘기해 드리리다. 지극한 도의 정수는 깊숙하고 까마득하며, 지극한 도의 극치는 어둑하고도 고요하오. 보이는 것도 없고 들리는 것도 없이, 정신을 간직하고 고요히 있으면 육체는 자연히 올바르게 될 것이오. 반드시 고요해야 하고 반드시 맑아야만 하며, 당신의 육체를 수고롭게 하지 않고 당신의 정신을 요동케 하지 말아야만 곧 오래도록 살 수가 있게 되는 것이오. 당신의 속 마음을 삼가고 당신의 몸 밖의 일이 안으로 못들어오게 해야 하오. (269P)


제 12편 하늘과 땅 천지(天地)


2. 무위로서 일하는 것을 하늘이라고 한다. 무위로써 말하는 것을 덕이라고 한다. 사람들을 사랑하고 사물을 이롭게 하는 것을 어짊이라고 한다. 같지 않은 것을 같게 합치시키는 것을 크다고 한다. 행동이 남들과 달리 어긋나지 않는 것을 너그러움이라고 한다. 같지 않은 것을 만가지 가지고 있는 것을 부(富)라고 한다. 굳게 자기 덕을 지키는 것을 기강이 있다고 한다. 덕을 이룩하는 것을 바로 서는 것이라고 한다. 도를 따르는 것을 잘 갖추어진 것이라고 한다. (286P)


8. 태초에는 무(無)만이 있었다. 유(有)도 없었고 명칭도 없었다. 일이 여기에서 생겨났는데 일만 잇고 형체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물건은 일로 말미암아 생겼는데, 그 작용으 덕이라 한다. (297P)


9. 다스린다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오. 물건을 읹고 하늘을 잊으면 그것을 자기를 잊었다고 말하는 것이오. 자기를 잊은 사람을 두고서 하늘로 들어간 사람이라 말하는 것이오. (299P)


11. "기계를 가진 자는 반드시 기계를 쓸 일이 있게 되고, 기계를 쓴 일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기계에 관한 마음 쓰임이 있게 됩니다. 기계에 관한 마음 쓰임이 가슴속에 차 있으면 순수함과 깨끗함이 갖추어지지 않게 되고 순수함과 깨끗함이 갖추어지지 않게 되면 정신과 성격이 불안정하게 됩니다. 정신과 성격이 불안정한 사람에게는 도가 깃들지 않게 됩니다. 나는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부끄러워서 하지 않는 것입니다. (304P)

해설: 밭에 물을 길어다 주고 있던 사람의 애기는 바로 현대문명을 비판하고 있는 듯하다. 사실 현대 사회에서는 기계의 발달에 따라 반대로 사람이 기계에게 지배당하고, 날이 갈수록 순박하고 참된 사람의 본연의 자세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307P)


제 13편 천도(天道)

1. 성인이 고요한 것은 고요한 것이 훌륭하기 때문에 고요한 것이 아니다. 만물에 그의 마음을 굽힐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고요한 것이다. 물이 고요하면 수염과 눈썹도 밝게 비추며 완전한 수평이 되어 위대한 목수라 하더라도 그것을 법도로 삼는다. 물이 고요해도 밝은데 하물며 정신이나 성인의 마음이 고요할 때야 어떠하겠는가? 그것은 하늘과 땅을 비추는 거울이요 만물을 비추는 거울인 것이다. (320P)


2. 텅 비게 되면 고요해지고, 고요해지면 올바로 움직이게 되고, 올바로 움직이면 모든 일이 제대로 되게 된다. 고요하면 곧 무위하게 되고, 무위하면 제각기 일을 맡고 그 책임을 지게 된다. 무위하면 즐겁게 되고 즐거우면 걱정이나 근심이 있을 수 없게 되어 생명이 길어지는 것이다. (321P)


3. 하늘과 땅의 덕을 분명히 체득한 것, 이것을 만물의위대한 근본이요 위대한 조상이라 부르며 이것이 바로 하늘과 조화되는 것이다.

하늘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은 그의 삶은 천체의 운행과 같고 그의 죽음은 물건의 변화와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는 조용히 있을 적에는 음과 같은 덕을 지니게 되고, 움직일 적에는 양(陽)과 같은 움직임을 지닌다. 그러므로 하늘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은 하늘에 대한 원망이 없고 사람에 대한 비난이 없고, 물건에 의한 재난이 없고 귀신에 의한 책망이 없는 것이다. (321~324P)


9. 공자와 노자의 만남

노담이 말하였다.

“사사로움이 없다는 것이 바로 사사로움인 것입니다. 선생은 온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으 생육(生育)을 일힞 않도록 하고자 하십니까? 그러면 하늘과 땅에는 본시부터법도가 있고, 해와 달에는 본시부터 광명이 있고, 별과 성좌에는 본시부터 배열된 자리가 있고, 새와 짐승들에게는 본시부터 무리가 있고, 나무에게는 본시부터 서서 자라는 본성이 있습니다. 선생님도 그러한 자연의덕을 본받아 행하시고 자연의 도를 따라 나아간다면 이미 목적에 달하였을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어짊과 의로움을 애서 들고 나와 북을 치고 다니면서 잃어버린 자식을 찾듯 하십니까? 아아, 선생은 사람들의 본성을 어지럽히고 있는 것입니다.” (336P)


11. 노자가 말하였다.

“도란 것은 크기에 잇어서는 끝이 엇고, 작기에 있어서는 없는 곳이 없으므로 만물에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 넓이는 넓어서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 없고 그 깊이는 헤아릴 수도 없는 것이다. 덕을 어짊과 의로움으로 표현하는 것은 정신의 말초적인 일이다. 그런 것이야 지극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 누가 결정지을 수가 있겠는가?(341P)


12. 그런데 눈으로써 볼 수 있는 것은 형체와 색깔이다. 귀로서 들을 수 있는 것은 명칭과 소리이다. 슬프다! 세상 사람들은 그 형체와 색깔과 명칭과 소리로써 그것들의 진실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형체와 색깔과 소리로써는 절대로 그것들의 진실을 파악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하고 있으니 세상에서야 어찌 그것을 알 수가 있겠는가? (343P)


제 14편 천운(天運)

5. 노자가 말하엿다.

“그렇지요. 도가 바칠 수만 있는 것이라면 사람들은 누구나 그것을 자기 임금에게 바칠 것입니다. 도가 가져다 드릴 수만 있는 것이라면 사람들은 누구나 그것을 자기 부모님께 가져다 드릴 것입니다. 도가 남에게 일러 줄수만 있는 것이라면 사람들은 누구나 그것을 자기 형제들에게 일러 줄 것입니다. 도가 남에게 줄 수만 있는 것이라면 사람들은 누구나 그것을 자기 자손들에게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할 t 없는 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마음속에 도의 주인이 될 만한 것이 없으면 그 사람에게 머물지 않고 사람의 외양이 올바르지 않으면 그것은 행해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밖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성인은 그것을 내놓지 않습니다. 박으로부터 들어오는 것에 대하여 마음속에 주인 노릇을 할 만한 것이 없으면 성인은 그것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362P)


8. 지금 당신이 말하는 것은 발자취 같은 것입니다. 발자취란 것은 신발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 발자취가 어지 신발이겠습니까? (371P)



제 15편 각의(刻意)

4. 사람의 정신은 사방으로 자유로이 흘러 이르지 못하는 것이 없다. 위로는 하늘 끝에 이르고, 밑으로는 당 속에 서리면서 만물을 변하시키고 양욱시키지만 그 형상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그것을 ‘자연과 같은 것’이라고 부른다. (380P)



제 16편 선성(繕性)

***세상의 학문과 일반적인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비난하면서 고요하고 담담함으로서 마음을 잘 간수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383P)


4. 높은 벼슬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은 자기의 본성이나 운명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물건이 갑자기 와서 자기에게 붙은 것과 같다. 자기에게 붙은 것이지만 그것이 오는 것은 막을 수도 없고 그것이 떠다니는 것을 붙들어 둘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높은 벼슬을 얻엇다 하여 뜻을 방자히 지니지 말고, 곤궁하다 해도 세속을 좇지 않아야 한다. 그 즐거움은 그러나 저라나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근심이 없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물건에 의하여 자기를 잃게 되고, 세속 때문에 본성을 잃는 것”을 두고서 근본과 말단을 ‘거꾸로 하는 백성’들이라 말하는 것이다. (388P)


제 17편 추수(秋水)

***우화 때문에 장자 중에서도 명편의 하나로 친다.


2. 북해의 신 약(若)이 말하였다.

“우물 안의 개구리에게 바다에 대하여 애기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공간의 구속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여름 벌레에게 얼음에 관한 애기를 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시간의 제약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비뚤어진 선비에게도 도에 관하여 얘기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가르침에 속박되어 있기 때문이다. (392P)


천하의 물은 바다보다 더 큰 것이 없다.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흘러들며, 한 때도 멈추는 일이 없는데도 차서 넘치지 않는다. 미려에서는 바닷물이 한때는 그치는 일 없이 새어나가는 데도 물이 말라 버리지 않는다. 이 바다가 장강이나 황하의 흐름보다 얼마나 방대한 것인가는 수량으로 계산할 수가 없는 것이다. (393P)


“자신은 하늘과 땅으로부터 형체를 물려받았고 음과 양으로부터 기운을 물려받았다. 나는 하늘과 땅 사이에 있어서는 마치 작은 돌이나 작은 나무가 큰 산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존재인 것이다. 바로 이렇게 나의 존재를 작게 보고 잇거늘 어찌 스스로 뛰어났다고 생각할 이가 있겠는가? (393P)


중국이 우주에서 차지하는 크기를 헤아려보면 큰 창고 속에 있는 곡식알 하나와 비슷하지 않은가? (393P)


3. 황하의 신이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물건이란 양이 무궁한 것이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흐르고 각자의 분수는 일정하지 않고 변하는 것이며, 일은 처음부터 끝가지 그대로 있는 것이란 없다. 그러므로 위대한 지혜를 지닌 사람은 먼 것 가까운 것을 똑같이 본다. 그래서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무시하지 않고 큰 것이라 하더라도 대단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물건의 양이란 무궁하여 한정할 수 없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395P)


그가 살아있는 시간이란 그가 살아있지 못한 시간에 비길 바가 못된다. 그러한 지극히 작은 입장에서 지극히 큰 영역을 추궁하여 들고 있으므로 미혹되고 혼란하여 스스로 인정되지 못하는 것이다. (395P)


4. 황하의 신이 말하였다.

“세상의 논자들은 모두 말하기를 지극히 가는 것에는 형체가 없고, 지극히 큰 것은 끌어안을 수가 없다고 하는데 이것은 진실입니가?”

북해의 신 악이 말햇다.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보면 그 전체를 다 볼 수가 없고, 큰 것에서 작은 것을 본다면 분명히 보이지 않는다. 가늘다는 것은 작은 것 중에서도 가늘다는 뜻이다. 지극히 크다는 것은 큰 것 중에서도 아주 크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다 볼 수 없고 잘 보이지 않는 등의 형편이 다른 것은 자연의 형세가 그러한 것이다. 가늘다든가 굵다든가 하는 것은 형체가 있음으로써 결정되는 것이다. (397P)


6. 황하의 신이 말하였다.

“물건의 외형 또는 물건의 내면에 있어서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귀하고 천한 분별이 생기며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작고 큰 분별이 생기는 것입니까?”

북해의 신이 악이 말하였다.

“도의 입장에서 본다면 물건에는 귀하고 천한 것이 없다. 물건 자체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은 귀하고 천한 것은 자기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세속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귀하고 천한 것은 자기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정해 주는 것이다.

상대적인 관심에서 볼 때에 그것에 비하여 크다는 입장에서 말하면 만물에는 크지 않은 것이 없게 되며 그것에 비하여 작다는 입장에서 보면 만물에는 작지 않은 것이 없게 된다. 하늘과 땅도 큰 것과 비교할 적에는 피 한 알 정도로 생각될 수 있고 터럭 끝도 작은 것과 비교할 적에는 큰 산 정도로 생각될 수 있다는 것을 알면 그것은 상대적인 구별에서 그렇게 됨을 알 것이다. (400P)


7. 들보나 기둥 재목은 성벽을 무너뜨리는 데는 유용하지만 구멍을 막는 데에는 소용없다. 그것은 기구가 다르기 때문이다. 천리마는 하루를 달릴 수 있지만 쥐를 잡는데에는 살괭이만 못하다. 그것은 재주가 다르기 때문이다. 올빼미는 밤에는 벼룩을 잡고 터럭 끝도 볼 수 있지만 낮에 나와서는 눈을 뜨고도 큰 산조차 보지 못한다. 그것은 본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402P)


8. 북해의 신 약(若)이 말하였다.

“도의 입자에서 볼 때 무엇을 귀히 여기고 무엇을 천히 여기겠는가? 이런 경지를 반복순환하는 상태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기 뜻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그러면 도에 크게 어긋나기 때문이다. 도의 입장에서 볼 때 무엇을 적다하고 무엇을 많다 하겟는가? 이런 경지를 구별없이 연결되는 상태라고 말하는 것이다. (404P0


도에는 시작도 없지만 물건에는 삶과 죽음이 잇다. 그래서 물건의 공용이란 믿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어떤 때는 비었다가도 어떤 때는 차게 마련이어서 그 형세에는 일정한 모양이 없다. 늙어가는 나이는 막을 수가 없고 흘러가는 시간은 멈추게 할 수가 없다. 생성소멸과 찼다가는 비는 일을 반복하여 그치면 또 시작을 한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위대한 도의 뜻을 얘기하고 만물의 이치를 논하는 까닭인 것이다. (405P)


북해의 신 약이 말햇다.

“도의 입장에서 볼 때 무엇을 귀히 여기고 무엇을 천히 여기겟는가? 이런 경지를 반복 순환하는 상태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기 뜻에 얽매여서는 안된다. 그러면 도에 크게 어긋나기 때문이다. 도의 입장에서 볼 때 무엇을 적다하고 무엇을 많다 하겠는가? 이런 경지를 구별없이 연결되는 상태라고 말하는 것이다. (404P)


도에는 시작도 끝도 없지만 물건에는 삶과 죽음이 있다. 그래서 물건의 공용이란 믿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어떤 때는 비었다가도 어떤 때는 차게 마련이어서 그 형세에는 일정한 모양이 없다. 늙어가는 나이를 막을 수가 없고, 흘러가는 시간은 멈추게 할 수가 없다. 생성소멸과 찼다가는 비는 일을 반복하여 그치면 또 시작을 한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위대한 도의 듯을 얘기하고 만물의 이치를 논하는 까닭이다. 물건의 생성은 말이 뛰는 것도 같고 달리는 것도 같이 변화한다.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이란 없고, 잠시도 바뀌지 않는 것이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을 하겠는가? 무엇을 하지 않겠는가? 그대로 스스로 변화하게 버려두면 그뿐인 것이다. (405P)


9. 북해의 약이 말하였다.

“소나 말이 네 발을 갖고 있는 것을 자연이라 말하고, 말머리에 고비를 매거나 소의 코를 뚫는 것을 인위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위로써 자연을 손상시키면 안되고, 지혜로써 천명을 손상시키면 안되고 자기의 덕을 명성을 위하여 희생시키면 안 된다고 한 것이다. 자연을 삼가 지켜 잃지 않는 것을 그의 진실로 되돌아가는 것이라 말한다. (407P)


10. 우화

발이 하나 밖에 없는 기(夔)라는 짐승은 발이 많은 지네를 부러워하고, 지네는 발 없이도 움직이는 뱀을 부러워하고 뱀을 부러워하고 뱀은 의지하는데 없이 움직이는 바람을 부러워하고 바람은 움직이지 않고도 기는 눈(目)을 부러워하고 눈은 가지 낳고도 아는 마음을 부러워한다.

뱀이 바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나의 척추와 갈비뼈를 움직여 다니고 있으니 의지하는 곳이 있는 셈입니다. 지금 당신은 씽씽하고 북쪽 바다에서 일어나 휭휭하고 남쪽 바다로 불어 들어가는 데도 의지하는 곳이란 없으니 어째서입니까?”

바람이 말하였다.

“나는 씽씽 북쪽 바다에서 일어나 남쪽 바다로 불어 들어갑니다. 손가락도 나를 이겨낼 수 있고, 발길질도 나를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큰 나무를 꺾고 큰 집 지붕을 날려 보내는 것은 바로 나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것은 이겨내지 못하면서도 큰 것은 이겨내고 있는 것입니다. 완전히 크게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성인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408~409P)

해설: 하늘에서 내려 준 자연스러운 기능대로 살아 가는게 가장 올바르게 사는 방법이라는 것이 이 대목의 요지이다. (410P)


11. 공자가 광(匡)이라는 곳에 갔을 때 송나라 사람들이 그를 몇 겹으로 포위하고 해치려 했으나 쉬지 않고 금(琴)을 타며 노래하였다.

자로가 공자를 뵙고서 말하였다.

“어찌하여 선생님께서는 즐거우실 수가 있습니까?”

공자가 말하였다.

 “이리 오너라. 내 너에게 애기해 주마. 나는 이제것 곤궁한 것을 싫어한지 오래 되엇지만 그것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은 운명일 것이다. 나는 뜻대로 되기를 바란 지 오래 되었지만 그대로 쉬지 않고 있는 것은 시세일 것이다. ....물 속을 다니면서도 교룡이나 용을 피하지 않는 것은 어부들의 용기이다. 육지를 다니면서도 외뿔소나 호랑이를 피하지 않는 것은 사냥꾼들의 용기이다. 흰 칼날이 눈앞에 맞부딪치고 있어도 죽음을 살과 같이 여기는 것은 열사들의 용기이다. 자기가 곤궁해진 것은 운명임을 알고 뜻대로 되자면 시세를 만나야 한다는 것을 알아 큰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성인의 용기이다.  자로야, 자리에 편히 앉거라. 나는 운명에 의하여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다. ”

얼마 되지 않아서 무장한 군사를 이끄는 장수가 들어와 사과하였다.

“저희들은 선생님이 양호(陽虎, 노나라 사람으로 용모가 공자와 비슷햇다고 함)인줄 알고 포위했던 것입니다. 지금은 아닌 것을 알았으니 사과를 드리고 물러가려고 왔습니다.” (410~411P)

해설: 세상의 일이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운명과 시세에 대하여 모든 일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란 운명과 시세를 믿고 자연스럽게 살아가야 한다는 뜻도 된다. (412p)


12. 우물 안 개구리 일화 참조할 것


13. 위모가 말을 이었다.

“또한 당신의 지혜란 옳고 그름의 한계조차도 알지 못할 정도인데도 장자의 말을 이해하려 하고 있으니, 그것은 마치 모기에게 산을 짊어지게 하고, 노래기로 하여금 황하를 건너게 하는 것과 같아서 반드시 감당해 내지 못할 것이오.(415P)


15. 헤자가 양나라의 재상으로 있을 때 장자가 그를 만나러 갔다. 어떤 사람이 혜자에게 말했다.

 “장자가 오는 것은 선생님 대신 이 나라 재상이 되려는 것입니다.”

“혜자가 겁이 나서 나라 안에 사람을 놓아 사흘 낮 사흘 밤을 두고 장자의 행방을 찾게 하였다.

그 뒤에 장자가 찾아와 만나서 애기하였다.

“남방에 새가 있는데 그 이름을 원추라고 부른다네. 자네도 그것을 알겟지? 원추라는 새는 남해에서 출발하면 북해까지 날아가는데, 오동나무가 아니면 안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고, 단 샘물이 아니면 마시지 않네. 그런데 솔개가 썩은 쥐를 갖고 잇다가 원추가 날아가자 그를 우러러보면서 끽소리를 내며 자기 것을 빼앗을 까봐 놀랐다 하네. 지금 자네는 양나라 때문에 나를 보고 끽 소리를 내는 것인가?” (419P)


16. 장자와 헤자와 더불어 호숫가를 거닐고 있었다.

   장자가 말하였다.

“피라미가 나와 유유히 헤엄치고 있군. 물고기는 즐거울거야.”

헤자가 말하였다.

“자네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가 즐거운 것을 아는가?”

장자가 말하였다.

“자네는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가?”

혜자가 말하였다.

“나는 자네가 아니라서 본시 자네를 알지 못하네. 자네도 본시 물고기가 아니 이상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야.”

장자가 말하였다.

“얘기를 그 근본으로 되돌려 보세. 자네가 ‘내가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가’고 물었던 것은 이미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네. 그래서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한 것이지. 나는 호숫가에서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고 있었던 것이네.”

해설 : 이름과 실물의 일치를 추구하였으나 궤변으로 흘러 버렸던 명가의 한 사람인 헤자와 장자의 논쟁이다. (421P)

☆☆☆ 이빨 센 장자의 한 면을 본다. 궤변에 가까운 두 사람의 논쟁. 결국 이빨 센 장자가 이겼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말을 잘해야 하고 언변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요즈음 스피치학원이 증가하고 있는 것 같다. 말도 어눌하고 생각도 어눌하고 이런 사람은 어디다 쓸 것인가?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키면 능력없는 사람은 집을 지키는 것인가?


제 18편 지락(至樂)


1.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존중하는 것은 부귀와 장수와 명예이다. 세상에서 즐거워하는 것은 몸의 안락과 맛있는 음식과 아름다운 옷과 좋은 빛깔과 음악 같은 것들이다. 세상에서 싫어하는 것은 가난하고 천한 것과 일찍 죽는 것과 비난을 받는 것이다. 세상에서 괴롭게 여기는 것은 몸이 편안치 않은 것과 입으로 맛있는 것을 먹지 못하는 것과 몸에 아름다운 옷을 걸치지 못하는 것과 눈으로 좋은 빛깔을 보지 못하는 것과 귀로 음악을 듣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그런 것들을 얻지 못하면 곧 크게 근심하면서 두려워하게 된다. 이것은 그의 육신만을 위하는 것이니 어리석은 일이다. (423P)


사람이 태어난다는 것은 근심과 더불어 태어나는 것이다. 장수한다고 해야 정신은 희미한 채 오래도록 근심하며 죽지 않는 것이니 얼마나 그것이 괴로울 것인가? 이것은 그의 육신을 위하려는 것이니 원래의 목표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이다. (423P)


2. 과연 즐거움이란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나는 무위야말로 진실한 즐거움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세속에서는 그것을 크게 괴로운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므로 지극한 즐거움이란 즐거움을 초월하는 있고, 지극한 명예란 명예를 초월하는데 잇다고 하는 것이다.

세상 일의 옳고 그름은 정말로 단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무위만은 옳고 그름을 단정할 수가 있다. 지극한 즐거움과 몸을 편히 하는 길은 오직 무위일 경우에만 거의 존재하는 것이다.

하늘은 무이한데 그 때문에 맑다. 당도 무위한 것인데, 그 때문에 한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들 두 가지 무위가 서로 합쳐져 만물 모두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아득하고 아련하여 그 근원을 알 수가 없다. 아련하고 아득하여 그 형체를 알 수가 없다. 만물이 번성하고 잇지만 모두가 무위함으로써 불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과 당은 무위하면서도 모든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세상사람으로 그 누가 무위할 수가 있겠는가? (425~426P)


3. 장자의 처가 죽자 혜자가 조상(弔喪)하러 갔다. 장자는 그 대 두 다리를 뻗고 앉아 동이를 두드리면서 노래하고 있었다.

헤자가 말하였다.

“그 분과 함께 살았고, 자식을 길렀으며, 함께 늙었네. 그런 부인이 죽었는데 곡을 안하는 것은 물론, 동이를 두드리며 노래까지 부르고 있으니 너무 심하지 않은가?”

장자가 말하였다.

“그렇지 않네. 그가 처음 죽었을 때에야 나라고 어찌 슬픈 느낌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가 태어나기 이전을 살펴보니 본시는 삶이 없었던 것이었고, 삶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시 형체조차도 없었던 것이었으며 형체가 없엇을 뿐만 아니라 본시 기운조차도 없었던 것이었네. 흐리멍텅한 사이에 섞여 있었으나 그거이 변화하여 기운이 있게 되엇고 기운이 변화하여 형체가 있게 되었고 형체가 변화하여 삶이 잇게 되었던 것이네. 지금은 그가 또 변화하여 죽어간 것일세. 이것은 봄, 가을과 겨울, 여름의 사철이 운행하는 것과 같은 변화였던 것이네. 그 사람은 하늘과 땅이란 거대한 방 속에 편안히 잠들고 있는 것일세. 그런데도 내가 엉엉하며 그의 죽음을 따라서 곡을 한다면 스스로 운명에 통달하지 못한 일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에 곡을 그쳤던 것이네. (427P)

해설: 사람의 삶과 죽음이란 독같이 자연의 변화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428P)

☆☆☆장자의 처의 장례식은 유명한 일화다. 죽음과 삶을 하나로 본 장자의 정신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이정도의 경지가 된다면 삶도 문제없이 잘 살아낼 것이다.


6. “안연이 동쪽 제나라로 가게 되었는데 선생님께서는 걱정하는 빛이 게시니 어찌된 일입니까?”

공자가 말하였다.

“옛날 관자가 한 말 중에서 내가 매우 훌륭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 있다. 그는 주머니가 작으면 큰 것을 넣어 둘 수 없고, 줄이 짧으면 깊은 우물 물을 길을 수가 없다 하였다. 이 말은 운명에는 이미 정해진 것이 잇고, 형체에는 적절히 맞는 것들이 있어서, 여기에 대해서는 늘이거나 줄일 수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안연은 제나라 임금에게 가서 요순과 황제의 도를 이야기하며 수인과 신농의 말을 강조한 것이지만 제나라 임금은 자기 마음속으로 그런 것들을 추구해 보아도 그것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해를 못하면 미혹하게 될 것이라고 미혹하게 되면 안연을 죽이고 말 것이다. (433P)


옛날에 바다 새가 노나라 교외에 와서 내려앉았다. 노나라 임금은 그 새를 맞이하여 종묘로 불러들여 잔치를 베풀고 구소의 음악을 연주하여 즐겁게 해주고, 쇠고기와 양고기, 돼지고기로 안주를 삼도록 하였다. 새는 눈을 멍하니 뜨고 걱정하고 슬퍼하면서 한 조각의 고기도 먹지 못하고 한 잔의 술도 마시지 못하고서 사흘 만에 죽어버렸다. 이것은 사람인 자기를 양육하던 방법으로 새를 양육하엿기 때문이다. 그는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려 들지 않았던 것이다.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려면 마땅히 그를 깊은 숲속에서 살게 하고 호수 가에 노닐게 하며, 강이나 호수에서 헤엄치게 하고, 미꾸라지와 송사리를 잡아 먹게 하며, 같은 새들과 줄지어 날아가다 내려앉고 멋대로 유유히 지내게 하여야만 되는 것이다. 새는 사람의 말조차도 듣기 싫어하거늘 어찌 시끄러운 음악을 견디겟는가? (433P)

해설 : 사람의 이미 타고난 본성 도는 능력이나 성격이 각기 다르다. 따라서 사람은 각기 타고난 본성이나 능력, 성격을 그대로 따라야지 억지로 타고난 본성에 벗어나는 일을 하려다가는 위험한 경지에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435P)

제 19편 달생(達生)

***외편 중에서는 문장이 뛰어나고 내용도 장자의 본뜻과 어긋나지 않으니 내편과 가장 비슷한 성격의 것이다.


1. 삶의 실정에 통달한 사람은 타고난 본성으로 어지 할 수 없는 일에는 힘쓰지 않는다. 운명의 진실에 통달한 사람은 지헤로는 어지 할 수 없는 일에는 힘쓰지 않는다. 육체를 보양하려면 반드시 먼저 물건이 있어야 하지만 남아돌아가는 물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육체를 보양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삶을 지탱하자면 반드시 먼저 육체를 손상시키지 말아야 할 것인데 육체가 손상되지 않으면서도 삶을 잃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삶이 태어나는 것은 아무도 물리칠 수가 없으며, 삶이 떠나 버리는 것도 아무도 멈추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슬프다. 세상사람들은 육체를 보양하는 것으로써 충분히 삶을 보존할 수 잇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육체를 보양하는 것으로는 실로 삶을 보존할 수가 없는 것이니 세상 일에 무엇이 할 만한 것이 있겠는가? 비록 할 만한 것이 못되는데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은 육체를 보양하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439P)


김달진의 <선시와 함께 엮은 장자>번역

“몸뚱이는 완전해도 생은 죽는 수가 있다. 생이 와도 물리칠 수 없고, 생이 가도 붙들 수 없다. 그런데 슬프다. 세상 사람들은 몸뚱이만 기르면 생을 보존하기에 족하다고 생각하는 구나. 그러나 아무리 몸뚱이를 길러도 생을 보존할 수 없으니 세상 일에 무엇이 힘슬 보람이 있는가? 힘쓸 보람이 없는 것인 줄을 알면서도 그래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세상 생활에 어덯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개 몸뚱이를 위하는 일을 그만두고자 한다면 세상을 버리는 것만 같지 못할 것이다. 세상을 버리면 마음의 얽매임이 엇고, 마음의 얽매임이 없으면 마음은 바르고 편하며 마음이 바르고 편하면 저 조화와 더불어 날로날로 끝없이 새로워질 것이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일은 버리지 않으면 안되는 것인가? 무엇 때문에 생은 잊지 않으면 안되는 것인가? 일을 버리면 곧 몸이 괴롭지 않을 것잉 생을 잊으면 곧 정신이 온전하게 되기 때문이다. 대개 몸이 온전하고 정신이 본 자리에 돌아가면 하늘과 더불어 하나가 될 것이다. 천지는 만물의 부모다. 천지가 합하면 물형을 이루고 천지가 흩어지면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몸과 정신이 온전하면 그것을 일러 ‘조화와 함께 날로 새로워진다’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극하고 또 지극하면 근본에 돌아가 천지의 활동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270P)


2. 성인은 자연에 몸을 담고 있으므로 아무 것도 그를 손상시킬 수는 없는 것일세. 우너수를 갚는 사람이라도 좋은 칼은 꺾어 버리지 않으며, 비록 성을 잘 내는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 하더라도 바람에 날려온 기왓장을 원망하지는 않는 법이네. 그러므로 물건처럼 무심한 지경에 이르면 온 천하가 태평케 되는 것일세. (442P)


4. 공자가 말하였다.

“헤엄을 잘 치는 사람이 쉽사리 배울수 있다는 것은 물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잠수를 잘하는 사람이라면 배를 본 일도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곧 저을 수가 있다는 것은 그는 심연을 언덕과 같이 여기기 때문이다. 뒤지히고 뒤로 물러나는 것 같은 온갖 사태가 눈앞에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의 마음에는 전혀 개입케 되지 않는 것이다. 이쯤되면 어디를 간들 여유가 잇지 않겠느냐? (446P)


질그릇을 내기로 걸고 활을 쏘면 잘 쏠 수 있지만, 띠고리를 내기로 걸고 쏘면 마음이 캥기게 되고 황금을 내기로 걸고 쏘면 눈이 가물가물하게 된다. 그의 기술은 언제나 같지만 아껴야 할 물건이 있게 되면 밖의 물건이 소중히 여겨지게 된다. 누구나 밖의 물건을 소중히 여기게 되면 자기 속 마음은 졸렬해지는 것이다. (446P)


5. 공자도 말씀하시기를 “안으로 들어가 내부만을 기르며 숨지 말 것이며, 밖으로 나와 외부만을 기르며 드러내지 말 것이며, 마른나무처럼 중앙에 우뚝 서 있어야 한다. 내부와 외부 와 중앙의 조화가 잘 되면 그의 명성은 반드시 극치에 달하게 될 것이다‘고 햇다.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일상 생활 속에서 먹고 마시고 하는 일입니다. 그것을 경게할 줄 모르는 사람은 잘못입니다. (449P0


12. 발을 잊는 것은 신이 알맞기 때문이다. 허리를 잊는 것은 띠가 알맞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을 잊을 줄 아는 것은 마음이 알맞기 때문이다. 안으로 마음이 변하지 않고 밖으로 물건에 이끌리지 않는 것은 사리와 경우에 알맞기 때문이다. 알맞음에서 시작해서 알맞지 않은 일이 없게 되면 알맞음이 알맞은 것조차도 잊게 되는 것이다. (461P0


제 20편 산목(山木)


1. 제자가 장자에게 물었다.

“어제 산속의나무는 재목이 되지 못함으로써 타고난 수명을 다 누릴 수가 잇엇는데 오늘 주인의 거위는 재질이 엇음으로서 죽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떤 경지에 처신하시겠습니까?

장자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나는 재목이 되는 것과 재목이 되지 않는 것의 중간에 처신하겠다. 그러나 재목이 되는 것과 재목이 되지 않는 것의 중간이란 옳은 경지인 듯 하면서도 그릇된 것이어서 재난을 면할 수가 없을 것이다. 만약 자연의 도와 덕을 타고서 떠다니며 노닐게 된다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칭찬도 없고 비난도 없을 것이며, 한 번은 용이 되었다 한 번은 뱀이 되엇다 하고 자유로이 시간과 더불어 함게 변화하서 오로지 한 가지 일만을 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한 번 내려갓다 한 번 올라갓다 하면서 조화로서 표준을 삼을 것이다. 만물이 시작되기 전의 상태에 떠다니며 노닐고 물건을 물건으로서 부리되 박의 물건으로부터 물건으로서 부림을 받지 않는다. (467P)


만물의 실정이나 인간 윤리의 변화는 합해지면 떨어지게 되고 이룩되면 무너지게 되고 모가 나면 꺾이게 되고, 높으면 비판을 받게 되고 뜻있는 일을 하면 공격을 받게 되고 현명하면 모함을 받게 되고 못나면 속임을 당하게 도니다. 그러니 어떻게 꼭 재난을 면할 수가 있겠는가? 슬프다. 너희들은 이것을 잘 기억해 두어라. 자연의 도와 덕이 행해지는 고장에서만 제대로 지낼 수가 있을 것이다. (468P)


2. 의료가 말하였다.

“살찐 여우와 아름다운 무늬의 표범이 산림 속에 살면서 바위 굴에 숨어있는 것은 고요함을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밤에 활동하고 낮에는 들어앉아 있는 것은 경계하기 위한 것입니다. 비록 배고프고 목마르며 곤궁한 처지에 잇다 하더라도 역시 먼 강과 호숫가로 가서 먹이를 구하는 것은 안정을 위해서입니다. 그런데도 그물과 덫의 걱정을 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어서이겠습니까? 그들의 가죽이 재난의 원인인 것입니다.  (470P)

☆☆☆ 좋은 가죽을 지니고 있는 것은 걱정거리를 안겨주고 있다. 지금 내가 높은 벼슬에 있다면 높은 벼슬에서 떨어질 것을 염려하여 그다지 즐겁지 않은 인생을 살 것이다. 지금이 좋다.


3. 북궁사가 위나라 영공을 위하여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거둬들여 가지고 편종을 만들게 되었다. 그는 성곽 문밖에 제단을 만들고서는 석 달 만에 위 아래로 종이 달린 종틀을 완성시켰다. 왕자인 경기가 보고서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무슨 방법을 써서 이렇게 만들었소?”

북궁사가 말하였다.

“한결같음을 지니고 있었을 뿐이지 아무런 방법도 쓴 것이 없습니다. 제가 듣건대 옥은 각고 쪼고 함으로써 본연의 소박함으로 복귀하게 된다 하였습니다. 저는 멍청히 아무런 의식도 없고 멍멍히 바보인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멍하고 망연히 가는 것은 보내고 오는 것은 마중하엿습니다. 오는 것은 금하지 않고 가는 것은 붙잡지 않았습니다. 뻣뻣하고 억센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따르고 유순한 사람들에게도 내가 따랐습니다. 스스로 힘 다하는 대로 되도록 버려 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침저녁으로 세금을 거둬 들여도 터럭 끝만큼도 백성들을 손상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이 정도이니 하물며 위대한 도를 터득한 분이야 어떠하겠습니까?” (474P)


5. 서로 거두어 주는 사이와 서로 버리는 사이란 먼 것입니다. 또한 군자의 사귐이란 담담하기 맹물과 같고, 소인들의 사귐이란 달콤하기 단술과 같습니다. 군자들의 사이는 담담하지만 더욱 친해지고 소인들의 사이는 달콤하지만 결국 끊어지게 됩니다. 이유없이 맺어진 것들이란 이유없이 떨어지게 마련인 것입니다. (479P)


육체는 자연을 따르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며, 감정은 본성을 따르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자연을 따르면 서로 떨어지지 않게 되고 본성을 따르면 수고롭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자연으로부터 떨어지지 않고 수고롭지 않게 된다면 학문을 추구하여 자신을 꾸미려 하지 않게 됩니다. 학문을 추구하여 자신을 꾸미지 않게 되면 밖의 물건에 의지할 일이 없게 됩니다. (480P)


6. 장자가 누더기로 기운 거친 무명옷에다가 삼줄로 얽어맨 신을 신고서 위나라 임금을 찾아갔다.

위나라 임금이 말하엿다.

“어째서 선생은 그토록 곤경에 빠졌습니까?”

장자가 말하였다.

“가난한 것이지 곤경에 빠진 것은 아닙니다. 선비에게는 자연의 도와 덕이 잇는데 그것을 실행하지 못하는 것이 곤경에 빠지는 것입니다. 옷이 해지고 신에 구멍이 난 것은 가난한 것이지 곤경에 빠진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이른바 때를 만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482P)


7.

공자가 말하였다.

“처음 출세를 하고 보면 모든 것이 뜻대로 되고, 벼슬과 녹이 아울러 보태져서 궁하지 않게 된다. 이것은 박의 물건이 이롭게 해주는 것이지 자기가 지니고 있던 것은 아니다. 결국 나의 운명이 밖에서부터 지배당하게 되는 것이다. 군자는 도둑질을 하지 않고, 현명한 사람은 물건을 훔치지 않는 법인데 우리가 벼슬이나 녹 같은 것을 취하는 것은 어째서일까?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제비는 사람을 두려워하지만 사람들이 사는 집으로 들어와 집을 짓고 사는데 그것은 살곳과 먹을 것이 있기 때문이다. (484P)


“무엇을 두고서 사람과 자연이 한가지 것이라 하셨습니까?”

공자가 말하였다.

“자연이 존재하는 것도 자연이고 사람이 존재하는 것도 역시 자연이다. 사람이 자연의 도를 터득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 본성 때문이다. 성인이란 편안히 자연 변화에 몸을 맡겨 끝까지 가는 것이다. (485P)


9. 양자가 송나라로 가서 여관에 묵게 되엇다. 여관주인에게 첩이 두 사람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은 예쁘고 나머지 한 사람은 추하게 생겼다. 그런데 추하게 생긴 여자가 귀여움을 받고 예쁜 여자가 천대를 받고 있었다.

양자가 그 까닭을 물으니 여관 주인이 말하엿다.

“그 중 예븐 여자는 스스로가 예쁘디고 생각하고 있어서 나는 그가 예븐 줄을 모르게 되었고, 추하게 생긴 여자는 스스로 추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나는 그가 추한 줄을 모르게 되었습니다.”

“너희들은 잘 기억해 두어라. 현명한 행동을 하되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버리기만 한다면 어디를 가나 사랑을 받게 되지 않겠느냐?”(490P)


제 21편  전자방(田子方)

3. 공자가 말하였다.

“슬픔 중에서도 마음이 죽는 것보다도 더 큰 것이 없으며 사람의 죽음은 그 다음 가는 슬픔이다. 해는 동쪽에서 나와 서쪽 끝으로 들어가는데 만물은 모두가 이를 다라 방향을 정한다. 눈이 있고 발이 있는 사람들은 이 해를 기다려 일을 하기 사작한다. 만물도 역시 그러하니, 그것에 의하여 죽기도 하고 그것에 의하여 생겨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한 번 형체를 타고 난 이상 스스로를 멸망시키지 않고 끝장나는 대로 맡겨두어야 하며 밖의 물건을 따라서 움직여야 한다. 변화는 낮이나 밤이나 쉬는 틈이 없으므로 그것이 끝나는 때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만물이 다같이 형체를 나고 났지만 운명을 미리 알아 가지고 그 앞날을 규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날이 자연의 변화를 따라갈 뿐이다. (498P)


4. "지극한 음기는 고요하고 지극한 양기는 움직임이 있는 것입니다. 고요함은 하늘로부터 나오고, 움직임은 땅으로부터 나오며, 이 두 가지 기운이 서로 통하여 조화를 이룸으로써 물건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만물은 없어지고 생겨나고 하며 가득 찼다 비기도 하며 한 번 어두웠다가는 한 번 밝아집니다. 날로 바뀌어지고 달로 변화하여 하루도 쉬지 않고 이 현상이 지속되지만 그 조화의 공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사물의 시작과 끝은 서로 끝없이 반복되어 그 끝장이 나는 곳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아니라면 또 그 누가 만물의 근원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500P)


풀을 먹는 짐승들은 그의 풀밭이 바뀌는것을 싫어하지 않으며, 물에 사는 벌레들은 물이 바뀌는 것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생활상의 조그만 변화가 일어났을 뿐이지 그의 ms 법도를 잃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쁨이나 노여움, 슬픔이나 즐거움 같은 감정이 가슴 속에 스며들지 않는 것입니다. (501P)


가장 귀한 도는 나에게 있으며, 변화에 의하여 잃을 수도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만물을 변화하게 하여 영원무궁하게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내 마음에 걱정을 끼칠 수가 있겟습니까? 이미 도를 터득한 사람이라면 이것을 이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502P)


잡편


 

제 22편 지북유(知北遊)

3. “삶이란 죽음의 무리이며 죽음이란 삶의 시작입니다. 누가 그 법도를 다스리고 잇는지 아는가? 사람의 삶이란 기운이 모인 것이다. 기운이 모여 태어나게 되고 기운이 흩어지면 죽는 것이다. 만약 죽음과 삶을 같은 무리로 본다면 우리에게 도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만물은 하나인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아름답게 보이는 것을 신기하다 하고, 그들에게 추하게 보이는 것을 고약하고 추하다고 한다. 그러나 고약하고 추한 것은 다시 변화하여 신기한 것이 되고 신기한 것은 다시 변화하여 고약하고 추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하는 한 가지 기운으로 통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성인은 그러므로 이 하나를 귀히 여긴다. (520P)


5. 하늘과 땅은 위대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잇으면서도 말로 할 수 없고, 사철은 밝은 법도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논의할 수 없고 만물은 생성의 원리를 지니고 잇으면서도 설명할 수 없다. 성인이란 하늘과 땅의 아름다움을 근원으로 삼고 있고, 만물의 원리에 통달한 사람이 다. 그러므로 지극한 사람은 무위하며 우대한 성인은 작위가 없는데, 한르과 당의 원리에 통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522P)


천하의 모든 것은 가라앉았다. 떠올랏다 변화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그대로 있지 않는다. 음양과 사철은 올바로 운행되어 모두가 질서를 잃지 않는다. 어두컴컴하여 없는 것 같으면서도 존재하며 자욱이 형체는 없으면서도 신령스러운 것이 도이다. 만물은 극서에 의하여 자라고 있지만 알지 못하고 있다. 이것을 근본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이것에 의하여 자연에 통달할 수가 있는 것이다. (523P)


7. 순임금이 승에게 물었다.

“도란 터득하여 지니고 있을 수가 있는 것이오?”

“임금님의 몸도 임금님이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닌데 암금님게서 어떻게 도를 거기다 지닐 수가 있겠습니까?”

순임금이 말하였다.

“내 몸이 내 소유가 아니라면 누가 지니고 있는 것이오?”

“그것은 하늘과 땅에 부속되어 있는 형체입니다. 삶도 임금님께서 지니고 계신 것이 아니라 하늘과 당에 부속되어 있는 조화입니다. 생명도 임금님께서 소요하고 계신 게 아니라 한르과 땅에 부속되어 있는 순리인 것입니다. 자손들도 임금님께서 소유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하늘과 당에 부속된 변화입니다. 그러므로 걸어가면서도 갈 곳을 알지 못하고 살고 있으면서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하며 먹으면서도 맛보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운행하는 기운에 의하여 되는 것인데 어찌 소유할 수가 있겠습니까?”(525~526P0


10. "이 중국에도 사람들이 존재하고 잇는데 사람은 음도 아니고 양도 아니어서 하늘과 당 사이에 살고 있는 것이오. 그들은 잠시 동안 사람으로서 존재하지만 결국은 그 근본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오. 그 근본으로부터 본다면 삶이란 것은 기운이 모여 있는 물건에 불과하오. 비록 오래 살고 일찍 죽는 차이가 있다지만 그 차이야 얼마나 되겠소? 짧은 시간에 불과한 문제요. 그러니 어찌 요임금은 성인이고 걸왕은 폭군이란 시비가 문제가 될 수 있겠소?(529~530P)


11. 동곽자가 장자에게 물었다.

“이른바 도라는 것은 어디에 존재하는 것입니까?”

장자가 말하였다.

“어디고 존재하지 않는 곳이란 없다.”

동곽자가 말하였다.

“있는 곳을 지적해 주십시오.”

장자가 말하였다.

“개미에게 있다.”

“어째서 그처럼 하급입니까?”

“가라지풀이나 피에도 있다.”

“어째서 더욱 하급의 것이 됩니까?”

“기와나 벽돌에도 있다.”

“어째서 더욱 심해지십니까?”

“오줌과 똥에도 있다.”

동곽자는 아무 말도 못하게 되었다.

장자가 다시 말하였다.

“그대는 꼭 어디에 있는가고 한정시키려 하지 말아야 한다. 물건은 무엇이나 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지극한 도는 이와 같은 것이며, 위대한 이론도 역시 그러한 것이다.”(532P)

해설: 도는 우주의 어디에나 있고, 우주 안의 모든 현상이도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잇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자아를 잊고 무이할 수 있어야만 도에 따라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불가의 선문답이 여기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선가(禪家)에서 말하는 ‘도’와 <장자>에서 말하는 ‘도’는 유사하다.

중국의 선사들이 과연 독창적인 정신이 있었는지 의문스럽다.


어떤 물건이 차고 비고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차고 비는 것이 아니며 어떤 물건이 모익 없어지고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모이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물건의 근본과 말단도 절대적인 근본과 말단도 절대적인 근본과 말단이 되는 것은 아니며, 어떤 물건이 쌓이고 흩어지고 하는 것도 절대적으로 쌓이고 흩어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533~534P)


12. “도란 보아도 형체가 엇고 들어도 소리가 없다. 사람들 중에 그것을 논하는 사람들이 도를 캄캄하다는 뜻에서 명명(冥冥)이 라 부르고 있으나 도는 이론으로 진실한 뜻을 논할 n수가 없는 것이다.” (536P)


태청이 무궁에게 물었다.

“당신은 도를 압니까?”

무궁이 말하였다.

“저는 알지 못합니다.”

다시 무위에게 물으니 무위가 말하였다.

‘나는 도에 다하여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아는 도에는 또한 법도라는 것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그 법도는 어떠한 것 겁니까?”

“내가 아는 도는 귀해질 수도 있고 천해질 수도 있으며 모여들 수도 있고 흩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도의 법도입니다.”(536P)


무시가 다시 말하였다.

“누가 도에 대하여 물었을 때 여기에 대답하는 사람은 도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도에 대하여 질문한 사람도 역시 도에 대하여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도란 물어서도 안되는 것이며, 묻는다 하더라도 대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어서는 안 되는 것을 묻는 것은 헛된 빌문이 되고 맙니다. 대답할 수가 없는 것을 대답하는 것은 진실한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진실한 마음이 없이 헛된 질문에 대답하는 이가 있는데 이러한 사람은 밖으로는 우주의 현상을 올바로 관찰하지 못하고, 안으로는 태초의 미묘한 이치를 알지 못하고 있기 대문입니다. (537P)


16. 공자가 말하였다.

“옛날 사람들은 박의 물건이 변화하더라도 거기에 순응하기만 했지 자기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지금 사람들은 자기 마음은 밖의 물건에 의하여 변화하면서도 밖의 물건에 동화하지는 못한다. 물건과 더불어 함께 변화하는 사람은 한결같이 자신의 마음은 변화하지 않는 것이다. 변화해도 편안하고 변화하지 않아도 편안하며 편안히 그것들에 따르지 절대로 그것들과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 성인은 물건을 따르되 물건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물건을 손상치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물건은 그를 손상시킬 수가 없게 된다. 오직 물건을 손상시키는 일이 없는 사람만이 자연을 따라 그것들을 보내고 마중할 수가 있게 된다.

산림에서나 평원에서 노니는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흥겨이 즐기게 해 준다. 그러나 즐김이 끝나기도 전ㅇ에 슬픔이 또 이어지게 된다. 슬픔과 즐거움이 닥치는 것을 우리로서는 막을 수가 없다. 그것들이 떠나는 것도 우리는 막을 수가 없다. 슬프다. 세상사람들이란 바로 박의 물건들이 머물러 슬프고 즐겁게 해 주는 여관이라 할 수도 있다. (544~545P)


제 23편 경상초

*****남송의 주희는 이 편은 모두가 불교의 선사상과 비슷한 내용이라 하였다.


2. 경상초가 말하였다.

“수레를 한 입에 삼킬만한 큰 짐승이라 하더라도 홀로 떨어져 산을 이탈하고 보면 그물과 올가미의 재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배를 삼킬만한 큰 물고기라 하더라도 펄떡 뛰어 물 밖으로 나오면 개미들이라도 그를 괴롭힐 수가 잇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와 짐승들은 높은 것을 싫어하지 않고 고기와 자라들은 깊은 것을 싫어하지 않는 것이다. 그처럼 그이 육체와 새명을 완전히 하는 사람들은 그의 몸을 숨김에 있어서 깊고 먼 것을 싫어하지 않는 법이다. (552P)


5. 노자가 말하였다.

“당신은 스스로의 마음을 개끗이 씻어서 푹 익은 기운이 서려 있는 듯하오. 그러나 그 마음 속에는 얼마간 아직도 악한 것이 남아있는 듯하오. 박의 일에 마음이 얽매여 있는 자는 마음이 번거로워 자제를 할 수가 없을 것이니, 안으로 마음의 작용을 닫아 놓아야 하오. 자기 안 마음에 얽매여 있는 사람은 생각이 뒤엉켜 자제할 수가 없을 것이니 밖으로 보고 듣는 것을 닫아 버려야 하오. 밖이나 안으로 얽매여 있는 자는 도덕을 지닐 수가 없을 것이오. 그러니 하물며 위대한 도를 따라 행동할 수가 있겠소?” (559P)

 

 

제 24편 서무귀(徐無鬼)

3. 하늘과 땅이 만물을 양육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한결같습니다. 높은 데에 올라간다고 해서 더 길게 자랄 수 없고 낮은 데에 있다고 해서 키가 짧아질 수 없습니다. (583P)


11. 바다가 동쪽으로 흘러드는 모든 강물을 받아들이고도 변함이 없는 것은 광대함의 극치입니다. 성인은 하늘과 당을 이울러 포괄하고 은택을 온 천하에 미치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서는 아무런 벼슬도 없고, 죽어도 아무런 시호도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재물을 모으지도 않고 명성을 추구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사람을 위대한 사람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개는 잘 짖는다고 좋은 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말을 잘 한다고 현명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정말로 위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스스로 내세우는 것이야 덕이 되겠습니까? 위대함이 갖추어져 있기로는 하늘과 땅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600~601p)


15. 얻는 것이 삶이고 잃는 것이 죽음일 수도 있지만 얻는 것이 죽음이고 잃는 것이 삶일 수도 있다. (610P)


16. 발이 땅을 밟는 지면은 좁기 작이 없다. 비록 밟는 지면은 좁지만 그 발이 밟지 않는 지면이 넓은 것을 믿은 후에야 안심하고 잘 걸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이 아는 것도 적다. 비록 아는 것이 적지만 그가 알지 못하는 것을 의지하고서야 자연이란 것을 알 수 잇게 되는 것이다. (612P)


만물의 근원이 하나라는 대일(大一)을 알고, 만물의 근원이 지극히 고요하고 움직임이 없다는 대음(大陰)을 알고 만물을 분별없이 대목(大目)을 알고 자연의 조화가 균등히 작용한다는 대균(大均)을 알고, 자연에는 일정한 법도가 잇다는 대방(大方)을 알고, 자연이란 진실하다는 대신(大信)을 알고 자연이란 안정된 것이라는 대정(大定)을 알면 지극한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612P)


제 25편 칙양

2. 나면서 아름다운 사람도 남이 그에게 거울을 주어야 그것을 주어야 그것을 보고 자기가 아름다운 것을 알지만 남이 얘기해 주지 않으면 자기가 남보다 아름답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을 알든 모르든 듣든 듣지 못하든 그가 아름답다는 것은 끝내 부정도리 수 없는 일이며 사람들이 그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은 본성이기 때문이다. (619P)


11. 태공조가 말하였다.

‘음가 양이 서로 작용하여 서로 해치기도 하고 서로 다스리기도 한다, 사철이 서로 바뀌면서 서로 발생하게도 하고 서로가 버리게도 한다. 욕망과 증오와 버리고 취하는 생각들이 여기에서 모두 일어나는 것이다. 암놈과 수놈이 결합함으로써 모든 것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안락과 위험이 서로 바뀌고 화와 복이 번갈아 발생하고 더딘 것과 다급하 srjt이 서로 엇갈리며 모였다 흩어졋다 하는 현상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638P)


제 26편 외물(外物)


7. 헤자가 장자에게 말하엿다.

‘자네의 말은 쓸데가 없네.“

장자가 말하엿다.

“쓸데가 없음을 알아야만 비로소 쓸 곳을 얘기할 수 가 있는 것일세. 당은 넓고 크기 짝이 없지만 사람들이 걸을 때 스는 것은 발로 밟는 부분뿐일세. 그렇다고 발을 재어가지고 그 밖의 당은 당 속 황천에 이르기까지 깎아내려 버린다면 사람들이 그대로 땅을 쓸수가 있겠는가?”

혜자가 말하였다.

“쓸 수 없지>”

장자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쓸데 없는 것의 쓰임도 잘 알게ㅔ 되었을 것일세.” (656P)


10. 통발이란 것은 물고기를 잡는 기구이지만 물고기를 잡고나면 통발을 잊게 된다. 말이란 것은 뜻을 표현하는 기구이지만 뜻을 표현하고 나면 말을 잊게 된다. 우리는 어찌하면 말을 잊은 사람들과 더불어 얘기할 수 있게 되겠는가?“ (661P)


제 27편 우언(寓言)

우언 편은 <장자> 전편의 취지를 정리한 서문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 앞머리에는 장자의 내용과 글 쓴 방법에 대하여 쓰고 있다. 뒷부분에는 전체적인 뜻을 종합하고 잇다.


1. 내 글에는 다른 일에 빗대어 한 말이 십 분의 구 정도이고 세상에서 중히 여겨지는 말이 그 중의 십 분의 칠 정도이다. 그리고 그때그때의 일에 알맞은 말을 매일같이 한 것은 자연의 실상과 잘 조화하는 것이다.

십 분의 구나 되는 다르 s일에 빗대어 한 말은 밖의 사물을 인용하서 도를 논한 것이다. 친아버지는 그이 아들의 중매를 설 수가 없다. 친아버지가 그의 아들을 칭찬한ㄴ 것은 효과가 그의 아버지 아닌 다른 사람의 칭찬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사람들의 잘못인 것이다. (664P)


그중에서 십 분의 칠을 차지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중히 여겨지는 말은 사람들의 논쟁을 없애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옛분들의 말을 인용하는 것이다. 나이가 많으면서도 일에 대한 이치와 앞뒤를 뒤에 올 사람들에게 보여 주지 못한다면 그는 선배가 아니다. 사람으로서 선배가 될 수 없다면 사람으로서의 도가 없는 것이다. 사람으로서의 도를 지니지 않고 잇다면 그런 사람을 진부한 사람이라 말하는 것이다. (664P)


5. 여러 망량들이 그림자에게 물었다.

그림자가 말하엿다.

“나는 존재하고 잇지만 그 가닭을 알지 못한다. 나는 매미껍질이나 뱀 껍질과도 같다. 그러나 그 것들과 비슷하면서도 형체가 없으니 다른 것이다. 불과 햇빛 앞에서는 나는 이루어지지만 그늘 안과 밤에는 나는 사라진다. 그것들은 내가 의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내가 의지하는 물건들이야 의지하는게 없을 수가 았겠는가?

그것들이 오면 나도 따라서 오고, 그것들이 가버리면 나도 따라서 가 버린다. 그것들이 움직이면 나도 따라서 움직인다. 움직이는 것에 대해여 어찌하여 나에게 묻는가?“ (671P)


제 28편

9. 열자가 궁해져서 그의 용모에 굶주린 빛이 역력했다. 한 손님이 그러한 사실을 정나라 자양에게 말했다.

“열자는 도를 터득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선생의 나라에 살면서 궁해졌다면 선생이 선비를 좋아하지 않으시는 샘이 되지 않습니까?”

정나라 자양은 곧 관리들에게 명하여 열자에게 양식을 보재 주도록 하엿다. 열자는 시자드을 보자 두 번 절하고는 사양하엿다. 사자들이 가 버린 뒤 여랒가 들어오자 그의 처는 그를 보고 가슴을 치며너 말하였다.

“제가 듣건데 도를 터득한 사람의 처자들은 누구나 안락함을 누린다 하였습니다. 지금 굶주린 빛이 있자 그 분이 사람을 시켜 먹을 것을 보내 왔는데도 당신은 받지 않았습니다. 어찌 천명이 아니겠습니까?”

열자는 웃으며서 그에게 말하였다.

“그 분은 자신이 나를 알아본 것이 아니오. 남의 말만 듣고서 나에게 양식을 보낸 것이오. 그러다가는 나를 죄 주는 일도 역시 남의 말만 듣고 할 것이오. 이것이 내가 받지 않은 까덝이오.”

그 뒤에 백성들이 결국 난리를 일으켜 자양을 죽ㄱ여 버렷다. (686P)


12. 증자가 위나라에 잇을 때 해진 솜옷은 겉천이 거이 없을 정도였고 얼굴빛은 부황기가 돌았고, 손박 발에는 못이 박여 있었다. 사흘동안 밥을 짓지 못하기 일쑤였고 십 년동안 옷을 만들어 보지 멋하였다. 관을 바로 쓰려 해도 관끈이 끊어져 있었고, 옷깃을 여미려면 팔꿈치가 나왓으며 신을 신으면 뒤굼치가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가 신을 끌면서 <시경>상송을 노래하면 소리가 하늘과 당 사이에 가득 차서 악기에서 나오는 소리 같았다.

천자도 그를 신하로 삼을 수가 없었고 제후들도 그를 벗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듯을 기르는 사람은 자기 형체를 잊고 자기 형체를 기르는 사람은 이익을 잊으며 도를 닦으려는 사람은 마음조차도 잊는 것이다. (693P)


제 29편 강도의 괴수 도척


6. 세상에서 이른바 현명한 선비라 부르는 사람 주에 백이와 숙제가 있는데 고죽 나라의 임금 자리를 사퇴하고는 수양산으로 들어가 굶어 죽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시체는 아무도 장사지내 주지 않았다.

포초라는 사람은 자기 행동을 꾸미며 세상을 비난하다가 나무를 끌어안ㄱ 죽었다. 신도적은 임금에게 간하다가 들어주지 않자 돌을 등에 지고 황하에 자기 몸을 던져 물고기와 자라에 먹혔다. 개자추는 지극한 충신으로서 스스로 그이 넓적다리 살을 떼어 문공을 먹여 살리기까지 하엿으나 문공이 뒤에 그를 배반하였으므로 그 나라를 떠나 살다 나무를 끌어안고 불에 타 죽어야만 했다. 미생이란 사람은 여자와 다리 밑에서 만날 약속을 하엿으나 여자가 오지 않자 물이 불어나도 떠나지 않고 있다가 다리 기둥을 끌어 안은채 죽어야만 하였다.  (718P)


제 31편 어부(漁父)

5. 공자는 얼굴빛을 변하고 탄식하면서 두 번 절하고 일어나서 말하였다.

‘저는 노나라에서 두 번이나 쫓겨나고 위나라에서도 추방당햇으며 송나라에서는 나무를 베어 넘겨 저를 죽이려 하였고, 진니라와 채나라 사이에서는 포위를 당햇습니다. 저는 잘못한 것을 알지 못하겠는 데도 이러한 네 가지 고통ㅇ을 겪었는데 어째서였을 까요?

고기잡이는 슬픈 듯이 얼굴빛을 바꾸면서 말하였다.

“어떤 사람이 자기 그림자가 두렵고 자기 발자국이 싫어서 이것들을 떠나 달아나려 하엿는데 발을 더욱 자주 노릴 수록 발자국은 더욱 많아졌고, 빨리 뛰면 뛸수록 그림자는 그의 몸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 자신은 아직도 더디게 뛰는 때문이라 생각하고 쉬지 않고 빨리 뛰다가 결국 힘이 떨어져 죽어 버렸다 합니다. 그 그늘 속에서 쉬면 그림자가 없어지고 고요히 있으면 발자국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햇던 것이지요. 어리석음도 지나치다 하겠습니다. (754P)


제 32편 열어구

***열어구는 도가에 속하는 사상가인 열자의 이름이다.

7. 소인의 지헤란 선물을 주고받고 편지를 주고받고 하는 범위를 더나지 못하는 것인데도 정신으 천박한 일들을 위하여 피폐캐 한다. 그러면서도 도와 물건에 대하여 아울러 터득해 가지고 물건을 합치시키려 하고 있다. 이러한 자들은 우주 속에서 미혹되어 물건에 마음이 장애를 받아 태초의 묘한 이치를 알 수 없는것이다. (770p)



11. 사람이 밖으로부터 받는 형벌이란 쇠와 나무로 만든 혀욱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안으로부터 받는 형벌이란 마음의 동요와 잘못 때문이다. 소인으로서 박으로부터의 형벌을 받는 자는 쇠와 나무의 형구에 의하여 신문을 당하지만 안으로부터 형벌을 받는 사람은 음양의 두 기운의 부조화에 의하여 잠식을 당한다. 이러한 안팎으로부터의 형벌을 면할 t 있는 것은 오직 참된 사람만이 가능한 일이다. (775P)


17. 장자가 죽으려 하자 제자들은 그를 성대히 장사지내려 하였다. 그때 장자가 말하엿다.

“나는 하늘과 땅을 관과 겉관으로 삼고 해와 달을 한 쌍의 구슬 장식으로 삼고 별자리를 진주와 옥장식으로 삼고, 만물을 부장품으로 삼으려 하니 나의 장구는 이미 다 갖추어진 것이 아닌가? 여기에 무엇을 더 보태겟느냐?”

제자들이 말하엿다.

“저희들은 까마귀나 솔개가 선생님을 먹어버릴가 두렵습니다.”

장자가 말하였다.

“땅 위에 놓아두면 까마귀와 솔개가 먹을 것이고 땅 아래레 묻으면 개미들이 먹을 것이다. 이족 놈이 먹는다고 그것을 빼앗아 딴 놈들에게 주는 셈이다. 이찌 그렇게 편벽되게 생각하느냐?” (782P)


제 33편 천하의 사상가들

5. 묵자는 널리 사람들을 똑같이 사라앟고 다 같이 이롭게 해 주어야 하며, 사워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엿다. 그의 도는 노여워하지 않고 또 널리 배우기를 좋아하며 남과의 구별을 부정하엿다. 그러나 이것은 옛임금들의 법도와 같지 않은 것이며, 엣나르이 예의와 임금을 파괴한 것이다. (791P)


13. 만물의 근본은 지극히 순수한 것으로 q고, 형체있는 물건은 조잡한 것으로 보며 부가 쌓여 있는 것을 부족한 것으로 보고 담담히 홀로 신명과 더불어 지낸다. 엣날의도를 닦는 학술을 터득하여 이러한 경지에 이르렀던 사람으로 관윤과 노남이 잇엇는데 그러한 이론을 좋아햇다. 그들은 영원하고도 암 것도 없는 허무의 경지를 세워 놓고 태일을 중심사상으로 삼았다. 연약하고 겸손한 것으로 겉모양을 삼고 공허함과 만물을 손상치 않는다는 것을 실질적으로 삼았다.  (804P)




내가 저자라면

장자는 자신의 저서 <장자>에서 ‘우언 편’에서 서문에 해당하는 글을 썼다. ‘우언 편’ 은 <장자> 전편의 취지를 정리한 서문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 앞머리에는 장자의 내용과 글 쓴 방법에 대하여 쓰고 있다. 뒷부분에는 전체적인 뜻을 종합하고 있다.

그의 서문을 한 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내 글에는 다른 일에 빗대어 한 말이 십 분의 구 정도이고 세상에서 중히 여겨지는 말이 그 중의 십 분의 칠 정도이다. 그리고 그때그때의 일에 알맞은 말을 매일같이 한 것은 자연의 실상과 잘 조화하는 것이다.

십 분의 구나 되는 다른 일에 빗대어 한 말은 밖의 사물을 인용하서 도를 논한 것이다. 친아버지는 그이 아들의 중매를 설 수가 없다. 친아버지가 그의 아들을 칭찬한ㄴ 것은 효과가 그의 아버지 아닌 다른 사람의 칭찬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사람들의 잘못인 것이다.”


자신 스스로가 자신의 글에 대해 서문을 쓴다는 것이 조금은 쑥스럽다는 이야기로도 달린다. 누군가가 장자의 책에 대해 발문을 써준다거나 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아쉬움이 넘는다.


  장자는 또다시 자신이 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중에서 십 분의 칠을 차지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중히 여겨지는 말은 사람들의 논쟁을 없애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옛 분들의 말을 인용하는 것이다. 나이가 많으면서도 일에 대한 이치와 앞뒤를 뒤에 올 사람들에게 보여 주지 못한다면 그는 선배가 아니다. 사람으로서 선배가 될 수 없다면 사람으로서의 도가 없는 것이다. 사람으로서의 도를 지니지 않고 잇다면 그런 사람을 진부한 사람이라 말하는 것이다.”

옛사람들의 글을 인용하여 섰음을 밝히고 있다. 솔직하고 담배한 사람이다.















 


IP *.85.249.182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