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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31일 11시 36분 등록

<마르크스 평전> 자크 아탈리 지음, 이효숙 옮김, 예담

 

1.   저자에 대하여

 

1)   자끄 아탈리

 

1943년 알제리의 알제에서 유태인 보석상의 아들로 태어나 그는 정치 권력, 경제 권력, 그리고 지적 활동의 경력을 이끌어 왔다. 이 대단한 휴머니스트는 정치나 경제 문제뿐만 아니라 지적인 세계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프랑스 최고 지도자 양성소인 국립행정학교를 거쳐 소르본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20대 초반부터 1985년까지 파리9대학 등에서 경제학을 가르쳤다. 1974년 미테랑 사회당 당수의 경제고문으로 현실 정치에 참여한 뒤 사회당 정부 집권 이후 1991년까지 미테랑 대통령의 특별 보좌역을 맡았다.   

 

세계 최고의 석학

자크 아탈리는 유럽 최고의 석학으로 꼽힌다. 학문의 경계를 뛰어넘는 연구, 저술활동, 폭넓은 지식과 혜안으로 미래를 짚어내는 탁월한 통찰력을 보여왔다. 공산권 붕괴이후 동구권의 경제재건을 위해 유럽개발부흥은행 설립을 주도했고, 1993년까지 초대 총재를 지냈다. 혀재 국제컨설팅회사인 아탈리&아소시에 대표이자 제3세계 소상공인들의 경제적 자립을 돕는 구호기구 플래닛 파이낸스 회장을 맡고 있다.  

 

행동하는 지식인

분야를 가리지 않고 30여권의 저서를 냈다. 르네상스맨이라고 불린다.

 

2)   저자에 대한 개인적 평가

 

사회민주주의, 유목하는 인간 등에 대한 책도 이 사람이 쓴 줄 처음 알았다. 다른 책들도 재미있을 것 같다. 그에 대한 개인적 평가를 내리기엔 나의 조사가 너무 빈약하다.  

 

2.   내가 저자라면

 

1)   뼈대 및 목차

 

머리말

1장  독일의 철학자     1818~1843     아버지와 아들

2장  유럽의 혁명가     1843.10~1849.8 엥겔스와의 만남

3장  영국의 경제학자   1849.8~1856.3  가난한 지식인

4장  인터내셔널의 스승 1856.4~1864.12 운명의 전환

5장  자본의 사상가     1865.1~1871.10 대작을 마치다

6장  마지막 전쟁터     1871.12~1883.3 안락의자에 잠들다

7장  세계의 정신                      다른 이름으로

옮긴이의 말

 

장을 시대순으로 나누고 있다. 7장에서는 마르크스주의가 왜곡된 역사를 훑고 있다.

 

2)   장점 및 보완점

 

재미있었다. 내가 19세기 역사나 철학사를 잘 알지 못해도 자크 아탈리의 문장이 매력적이었다. 마르크스가 남긴 편지와 저술을 읽고서 인용하면서 설명하지  않고 보여주는 방식의 서술이 신뢰감을 주었다.

 

3)   감동적인 장절

 

그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마르크스에 대해, 공산당을 뿔달린 빨간 괴물로 상상하듯 그는 괴팍한 이종 괴물일쯤 일거라는 선입견이 있었다. 그는 그냥 사람이었다.

l  첫사랑인 이웃집 누나와 결혼해서 평생 한 여자와 한 남자로 사랑했던 남자

l  부모가 사랑했던 아들. 특히 아버지는 아들이 어릴 때부터 아이는 작은 어른이라는 말을 자기 아들을 가지고 실험하듯이 부자관계를 맺었다. 그는 대학에 진학한 아들이 읽는 저서 목록까지 나누는 친밀하면서 독특한 편지들을 주고받았다. 아버지와 이런 관계를 맺는 아들, 또는 딸이 많지는 않으리라.

l  20대의 좌충우돌

l  가난 속에서 자식들을 셋 잃고 돈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보내고서 너무 힘들어 병이 나버린 아버지

 

‘21세기에 인류의 실패한 혁명의 뿌리였던 마르크스를 읽어야 하나?’라는 질문에 대한 두 사람의 대답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l  세계무역기구 WTO 총재를 지낸 파스칼 라마의 말 (뒷 표지)

l  머리말에서 독자의 이런 의구심을 간파하고 선수를 친 자크 아딸리의 말

 

은은히 드러나는 평전 작가의 공력, 내공을 짐작하게 하는 장인의 손길을 느끼는 문장들이 많았다. 특히 동시대의 어떤 사건들을 꿸 때 눈이 휘둘그래졌다.

 

예니와 엥겔스에 대해 마음의 울림이 많았다.

l  마르크스 가족을 부양하다시피 한 남자 엥겔스

l  여섯 아이를 출산하고 세 아이를 5년 동안의 가난 속에서 잃고서도 마르크스의 글을 베껴쓰면서 옆에 있었던 혁명가의 아내

 

마르크스주의가 스탈린주의 나치에서 뭔가 많이 왜곡되고 꼬인 것이 7장에 나온다. 이게 내가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모르던 것을 알게되어 재미있었다. 한편 그 서술 내용 자체를 이해하는 게 불충분해서 메시지를 알아먹지는 못했다.

 

 

3.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그래서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로 상반되는 구절들 모두가 서로 일치되게 하는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한다. 의견이 일치되는 몇몇 구절에만 적절한 관점을 가지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서로 상반되기까지 한 구절들을 양립시키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카스칼 <팡세>

 

 

머리말

 

6 아마도 몇몇 종교 창시자들을 빼고는 어떤 사람도 20세기에 그가 누렸던 영향력에 비견될 만한 영향을 세계에 끼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가 시작되기 바로 전에 그의 이론들과 세계에 대한 견해들은 세계에서 용도폐기되었고 그의 이름을 둘러싸고 구축되었던 정치체제는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내던져졌다.

 

6 많은 사람들은 역사 속의 가장 큰 몇몇 범죄들, 특히 나치즘에서 스탈린주의에 이르기까지 지난 밀레니엄의 말기를 장식했던 최악의 부패들에 대한 주요 책임을 마르크스에게 전가한다.

나도 이런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읽을까 말까 했다. 제일 큰 이유는 연말연시에 약속 많은데 너무 두꺼워 싫은 거지만

 

6 마르크스의 저서들을 가까이 들여다 보면 자본주의가 어떤 점에서 그 이전의 소외들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는지를 누구보다 그가 먼저 알아보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울러 그는 단말마적 종말을 생각하거나 어떤 국가에서든 사회주의가 가능할 것이라고 믿은 적이 결코 없었다. 반대로 자유교역과 세계화를 예찬했으며 혁명은 오로지 세계적으로 보편화된 자본주의를 극복함으로써만 가능하다고 예견했다.

경제체제에 대한 것       자본주의의 반대말은 공산주의?

정치체제에 대한 것       민주주의   반대말은 사회주의???? 나는 여기서 헤깔린다.

 

7 그가 거쳐온 세기는 놀랍게도 우리가 지내는 21세기와 흡사하다.

 

8 용감한 남자들과 여자들, 특히 마르크스 같은 언론인들이 말하고 쓰고 생각할 자유를 위해 죽어갔다. 오늘날처럼 자본주의가 어디서나 노동비용을 압박하면서 유럽 국가의 조직을 본떠서 세계 조직을 꾀하며 주인으로 군림했다.

 

 8 다음으로 마르크스의 활동은 우리의 현재 핵심을 구성하는 것들의 원천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회민주주의는 그가 창설한 제도들 중 하나인 인터내셔널에서 탄생되었다.

 

8 지난 세기의 몇 몇 최악의 독재 권력들이 조성되고 몇몇 대륙에서 아직도 그 여파를 겪고 있는 것은 마르크스의 이상을 왜곡했기 때문이다.

 

8 마르크스는 사회과학을 통해서 국가와 역사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창시자이자 저널리즘을 통해 세계가 끊임없이 스스로를 이해하고 변화시키게 만든 위대한 프로페셔널들 중 하나였다.

 

9 마지막으로 마르크스는 서구 현대인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의 집합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유태교에서 가난이란 용서할 수 없는 것이며 인생이란 인류의 운명을 개선시킬 수 있어야만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물려받았다. 기독교로부터는 인간들이 서로 사랑하게 될 구원의 미래에 대한 꿈을 물려받았다. 르네상스로부터는 세계를 이성적으로 생각하려는 야심을 물려받았다. 프로이센으로부터는 철학이 모든 과학 중 으뜸이며 국가는 위협적이면서 모든 권력의 중심이라는 확신을 물려받았다. 프랑스로부터는 혁명이 인민 해방의 조건이라는 신념을 물려받았다. 영국으로부터는 민주주의, 경험주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열정을 물려받았다. 유럽으로부터는 보편성과 자유에 대한 열정을 물려받았다. 받아들이기도 하고 비난하기도 했던 이 유산들을 통해 가는 보편성에 관한 정치적 사상가이자 약자들의 수호자가 되었다.

이 문장이 아름답다. 어떻게 한 사람 속에서 이런 것들의 갈래를 다 읽어낼 수가 있을까? 자끄 아탈리가 신기하다. 

 

9 세계를 정치적이고 경제적이며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총체로서 파악한 사상가는 마르크스가 처음이었다

 

9 그는 세계와 인간 자유의 원동력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려고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애를 썼다. 그는 세계의 정신이었다.

 

10 지난 세기의 유일한 새 종교의 창시자였던 마르크스, 그가 추방자가 된 특별한 여정은 오늘날의 세계가 어떻게 그 비범한 사람들 위에 세워졌는지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들은 권력의 중심이 설 수 있었는데도 좀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헐벗은 주변인의 삶을 기꺼이 택했다. 우리가 그들에게 빚을 진 셈이다. 아울러 마르크스의 저서는 우리에게 가장 훌륭했던 꿈이 어떻게 해서 가장 나쁜 야만으로 일탈하기에 이르렀는지 보여준다.

마르크스가 이용당했다고? , 지금 나는 머리말을 거의 베끼다시피 하고 있다. 불길하다. 이러면

 

10 내가 과장하거나 향수에 젖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나는 어떤 의미에서든 마르크스주의자가 됐던 적이 결코 없었다. 청년시절에 마르크스의 저서들을 탐독한 적도 없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내가 과학, 법학, 경제학, 역사학을 공부하는 동안 그의 이름을 들어본 적은 거의 없었다. 마르크스를 접한 것은 그의 저서를 읽고 난 다음이고, 루이 알튀세르와 서신교환을 통해서다.

 

11 이 굉장한 정신의 소유자에 대해 수만 권의 연구서와 수십 권의 전기들이 씌어졌다. 그것들은 성인전과 같이 씌어졌거나 적대적인 시각에서 쓰어졌을 뿐이지 적당한 거리를 둔 저서는 거의 없었다.

 

13 우리가 직접 이어받은 그 19세기를 재해석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1장  독일의 철학자 1818~1843

 

 

비판의 무기가 무기의 비판을 대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신체적인 힘은 신체적인 힘에 의해 소멸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론은 대중의 소유가 되는 즉시 신체적인 힘이 될 수 있다.

 

20 민츠 일가 역시 그곳에 정착한 뒤로 남자아이들은 대대손손 제사장이 되고, 여자아이들은 다른 제사장들과 결혼해 대부분 트리어에 살았다. 그러다 성직자 지위만으로는 살수 업자 재단사, 목수 또는 전당포 일도 했다.

 

20 마르크 marc 가 마르크스 marx로 변하게 된 것은 주민증을 만들 때 철자를 잘못 적었기 때문이었다.

 

21 유태인들은 소수였고 극도의 빈곤 속에서 살고 있었다. 농업을 포함한 거의 모든 직종이 유태인들에게 금지되어 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전당포 일을 했다. 그들에게 활짝 열려 있는 유일한 직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태인 전당포가 많구나. 햄릿 샤일록?

 

25 직업을 얻게 되고 대학교에 들어가고, 기독교인들과 관계를 갖게 되자 규칙과 관습은 흔들렸다. 새로운 세기에 열광하고 과학, 민주주의, 철학, 자유에 매혹된 젊은이들은 제국의 패주를 무엇보다 두려워했고 새 권리들을 박탈당할까봐 전전긍긍했다.

문장이 강건하면서 아름답다. 이런 문장 좋아한다. 아는 게 많으면서도 이쪽저쪽으로 휩쓸리지 않는다. 그리고 과학, 민주주의, 철학, 자유에 매혹된다는젊음에 대한 묘사가 아름답다.

 

26 나폴레옹의 실각은 유럽의 유태인들에게 혼란의 시기를 예고하고 있었다. 한편 프로이센의 왕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유태인들이 자유직이나 공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개종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을 여전히 견지했다. 

이런 박해 때문에 유태인들이 더 강해졌구나. 이차돈의 순교 ; 불교도가 되면 죽인다 했다. 관직?

 

27 당시 37세여썬 헤르셀른 아직도 프랑스 행정 치하에 있던 트리어의 유태 교회당에서 26세의 네덜란드 유태인인 헬리에테 프레스부르트와 결혼식을 올린다. 헬리에테는 헝가리 출신이면서 오래 전부터 네덜란드에 정착하여 살고 있는 유태인 가족에서 태어났다.

마르크스의 부모

 

28 프랑크푸르트에서와 마찬가지로 피렌체에서도 유태인들은 게토로 보내졌다.

인디언 거주지. 고생 많다.

 

29 프랑스 제국의 모든 다른 유태인들처럼 헤르셀도 이제 자기직업과 신앙고백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만 했다.

 

31 그는 유태교를 포기하고 헤르셀 마르크스 레비라는 이름을 하인리히 마르크스로 바꾸었다자신의 개종이 순전히 정치적인 차원에서일 뿐이며 의심의 여지없이 임시적일 뿐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가톨릭교를 선택하지 않고 베를린 변호사들의 종교였던 루터교를 선택했다.  

마르크스의 아버지는 변호사였구나.

 

33 경찰이 어디에나 있고 말을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감옥에 끌려갈 위험이 있는 독일에서, 공적인 일에 열정적이며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하인리히는 깨어 있는 부르주아들이 모이는 서클 클럽 카지노를 결성하였다.

 

34 뒤이어 1821년 아들 헤르만, 1822년에 딸 에밀리에가 태어났다.

 

34 아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이들 넷을 루터교 교회에서 세례받게 한 것이다.

 

35 더불어 이에 관해(: 생시몽 백작의 저서) 일곱 살밖에 안된 아들 마르크스에게 까지 얘기해주었다. 그는 어른끼리만 맺을 수 있는 강한 결속을 어린 마르크스와 맺고 있었다. 아이는 특별한 인성을 타고 난 듯이 보였다. 이 아이는 누이들에게도 강한 인상을 주어 누이들은 대번에 마르크스의 이야기꾼 재능에 대해 감탄한 반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 얘기하게 된다.  

 

36 볼품없는 신체에다 혈색도 좋지 않고 늘 허약했던 마르크스는 어머니에게 아주 큰 애정을 보였다.

 

37 하인리히는 드러내놓고 이신론자가 되었다. 이신론이란 18세기 계몽주의의 대표적인 종교관으로서 계시종교를 부정하며 합리적인 비판정신을 바탕으로 오로지 이성적인 진실만을 내용으로 삼는 종교관이다.

 

39 아버지가 직업을 포기할 수 없어 개종을 할 수 밖에 없었으며 어머니는 스스로를 여전히 유태인으로 여기며 계속해서 유태교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그는 유태인 공동체 밖의 사회에 동화되고 싶어했다. 설사 어머니가 가르쳐준 히브리어를 읽을 줄 안다 해도 그는  아버지가 비난하는 유태인의 고리대금업자 이미지 자신도 물려받은 걸 알고 있는 그 이미지 를 거부했다.

 

39 반면 마르크스는 폰 베스트팔렌 가에 매료되어 있었다. 이 안락한 귀족 가문은 실제로 일하지 않으면서도 그 도시를 지배하고 있었고, 돈이 대화거리가 아니었다. …네 살 더 많은 예니는 그가 보기에 세상에서 가장 예쁜 처녀였다.

돈이 대화거리가 아니다.-à 돈이 대화거리인 집안을 아는구나. 그러나 돈은 때로 애정을 대치할 때가 있다. 돈 얘길 하고 있지만 사실은 관심과 애정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표현

 

40 마르크스는 트리어의 프리드리히 빌헬름고등학교에 들어가서 괴테와 아이스킬로스의 작품들뿐만 아니라 하인리히 항이네의 작품들을 알게 된다. 독일 유태인인 하이네는 개종을 한 뒤 곧이어 파리로 망명한 시인이다. 마르크스는 자신이 모르는 언어들로 시를 외우면서도 놀라운 기억력을 발휘한다.

놀라운 기억력을 발휘한다.’ 우리가 읽은 것들이 마르크스도 읽은 세계의 고전이구나. 뿌듯

 

42 마르크스는 당시 열다섯 살이었다. 그는 여전히 아버지와 프랑스, 유태교, , 도덕, 자유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폰 베스트팔렌 남작은 이 사춘기 소년을 우정으로 대하고 셰익스피어에 입문하게 도와주기도 했다. 그들은 함께 호메로스, 세르반테스, 막 세상을 떠난 괴테, 프랑스 경제학자 생시몽 백작 등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생시몽은 8년 전에 죽으면서 유럽의 지식인 사회에 깊은 흔적을 남기고 간 인물로서, 마르크스의 아버지는 그의 이론들에 대해 이미 찬사를 늘어놓은 바 있다.

어떻게 아버지가 아들을 기를까? 소년을 아이가 아니라 작은 어른으로 대한다.  

 

42 예니는 자기보다 네 살이나 어린 소년의 오만함과 정신에 매혹되어 있었다.

 

43 하인리히는 프로이센 왕을 조롱하는 건배를 하였다. 이 사실은 즉각 경찰에 알려졌는데 클럽은 감시를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급기야 하인리히는 소요의 선동자로 낙인 찍혔고….

 

43 하인리히는 자신의 신변이 염려되어 좀 더 신중하게 행동을 했다. 그는 그저 변호사로 남아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44 마르크스는 점점더 이런 교통수단의 발달에 매료되었고, 예니는 그에게 미스터 철도라는 별명을 붙여주면서 놀려댔다. 당시 열일곱 살이었던 마르크스는 예니에게 사랑 고백을 막 한 터녔다.

 

44 카를 마르크스의 저서들 중 집필의 궤적을 알수 있는 최초의 글들은 바로 그때 띄어진 세 편의 소논문들이다. 당시 마르크스는 아직 고등학생이었다. 세번 째 것인 <어느 젊은이의 직업 선택에 관한 고찰>은 그의 인생이 어떤 방향을 취하게 될 지 잘 보여주고 있다.

오호 고등학생이 이런 논문을? 우리 고등학생들도 이런 글을 써보면서 자신의 직업 선택에 대해 스스로 연구하면 어떨까? 내가 지금 꿈꾸나?

 

45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약간의 히브리어를 배우면서 중등교육을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마친 1835 10월에 마르크스는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본으로 보내져 법학을 공부하게 된다. 당연한 귀결이었다. 가장 가까운 대학이 본에 있었기 때문이다하인리히는 당연한 듯이 자기 아들의 직업을 변호사나 법학과 교수직으로 정해준 것이었다.

흔한 선택. 자기 길을 찾아가기 위해 아버지를 넘어서는 과정이 있었을 지 모른다.

 

46 신입생들은 잘 동화되기 위해 대학 생활을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동아리들 중 하나에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했다정치적 클럽이 아니라 30명의 회원을 가지고 있던 트레비란 클럽에 들어갔다.  Good idea, 향우회?

 

47 마르크스는 연구능력과 남다른 총명함 때문에 금방 눈에 띄었다. 그는 숱 많은 머리칼에 정성을 기울였고 벌써부터 조금씩 나기 시작하는 턱수염은 자라도록 내버려 두었다. 중간 정도의 키와 체격을 가진 그는 라인 주 억양이 섞인 데다 로 발음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는 뭐든지 극단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 철야, 언어 폭력과 신체적 폭력, 그리고 알코올 까지도.

이런 묘사 대단하다. 근데 저런 걸 어떻게 알았지? 주가 달려있는 걸 보면 다른 자료를 읽었나보다. 나는 연구원 숙제를 하면서 타이핑을 하는 것에 대해 대단한 거부감이 있었다. 그런데 타이핑은 필사로구나. 신경숙씨가 조세희씨의 책을 베껴적던 산업체 고등학교처럼, 공지영씨가 박경리소설을 전작주의한 건지 필사한 건지그리고 시집에 밑줄을 긋던 시인지망생이 시집을 손으로 베껴적는 것과 비슷하구나. 지금까지 나는 그걸 즐기며 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숙제는 고통스럽고 공부는 즐기지 못했다. 정신이 날카로운 아침에 읽고 저녁에 익힌다는 구절을 어디서 읽었지? <장자>에선가 <강의>에선가. 새벽에 읽고 밤에 타이핑하는 게 좋은 듯 하다.

 

47 그는 바와 무도회를 자주 다녔고 싸움질도 했다. 경쟁자들에게 대항할 채비를 갖추기 위해 권총을 사기도 했다. 그가 갖고 있던 동은 모두 자기 아버지가 보내준 것이었는데, 계산없이 먹고 마시고 집세 내고 책을 사는 데 썼다. 결국 몇 달이 지나자 그는 160 탈레르나 되는 어마어마한 빚을 지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격렬히 분개하면서 그 빚을 갚아주어야 했다.

좌충우돌. 경제관념이 없구나.

 

48 마르크스는 열심히 공부했다. 법학이나 프로페르티우스에 관한 라틴문학 강의들 외에 철학도 발견하였다. 그것은 일종의 계시였다. 철학은 곧 그의 주요 관심영역이 되어 버린다. 가장 편하게 느낀 것도 철학 분야였기에, 이후 그는 절대로 그 영역을 떠나지 않게 된다. 마르크스가 특히 주목한 것은 헤겔이었다.

이런 계시가 내게도 있었나? 이 질문 어디서 본 듯 하다. 아하 <깊은 인생>에서 마샤 그레이엄. 야생의 재능이 부를 때 따라 나서라.

 

48 마르크스는 이 책(헤겔 <정신현상학>)에서 역사에 관한 의미를 발견하고 황홀해했다. 역사란 이성, 도덕, 자유의 진보에 이끌려서 헤겔이 신, 관념, 절대적 정신, 절대적 지식, 보편성과 자유의 처소인 법의 실현 등으로 부르는 그 어떤 목표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개인들은 원하지도 않았고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헤겔의 이른바 이성의 계략에 의해 역사에 복무하게 된다. 역사를 뛰어넘어서 이상적이고 절대적인 실체인 국가의 역할이란 각자가 점잖게 살고, 그 누구도 그런 삶을 박탈당하지 않으며 남용하지도 않고, 갈등을 종식시키는 데 필요한 것들을 이용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역사가 끝날 때 소외라는 단어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소외란 헤겔에게 있어 엔트르렘둥(인간성을 상실하고 인간의 본질로부터 빠져나가기)’인 동시에 엔트오이세룽(자신에게 빠져나가고, 자신이 아닌 사람이 되기)’이다.

 , 누구나 공감할 아름다운 목적이지 않나? 역사가 신으로 ()가는 과정이잖아? 소외(인간성으로부터든, 자신으로부터든)를 끝내기 위한 과정이 역사라니. 일종의 필요악?

 

49 과학은 윤리에 우선한다. 사회 분석은 도덕적이 되기 전에 합리적이고 객관적이 되어야 한다.’ 마르크스는 이 교훈을 절대로 잊지 못한다.

 

50 1836년에 보낸 편지들 중 하나에서 하인리히는 아들에게 이렇게 쓰고 있다. “신이 원한다면 너에게는 아직도 네 자신과 가족의 안녕을 위해, 그리고 내 예감이 정확하다면 인류의 안녕을 위해 살게 될 긴 인생이 놓여 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니!

 

50 헨리에테는 아들에게 질서와 청결을 절대로 부수적으로 여기지 말라고 권고하면서 건강과 행복이 바로 그것들에 달려 있기 때문이라는 감동적인 충고들을 편지에 썼다. 그녀는 마르크스가 포도주나 커피를 너무 많이 마시는 건 아닌지, 너무 강한 양념을 한 음식을 먹는 건 아닌지, 담배를 많이 피우는 건 아닌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지, 감기를 조심하는 지,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춤을 추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염려했다.

엄마가 보낼 만한 편지

 

50 그녀는 자신에 대한 마르크스의 열정이 젊은 날의 사랑처럼 일시적인 것이 될까봐 두려워했다. 남자들은 단 한 번만 사랑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헤겔에 대한 마르크스의 관심을 이해한 이 처녀는 학업이라고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으면서도 철학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사랑에 빠진 여자들은 어찌 이리 비슷한가? 남자에게만 사랑이 여럿인 것은 아닐텐데

 

51 일찍이 자신이 하는 모든 것에 명령하는 것을 좋아하던 그는 7월에 트레비란 클럽의 회장이 된다.

 

52 그 수료증은 소동과 만취 때문에 하룻밤 구금되었던 것을 언급하면서도 학업에 대한 그의 열성과 주의력이 뛰어났음을 칭찬하고 있다.

 

52 마르크스는 당시 결핵 초기여서 군복무가 면제되었다. 편지를 많이 주고받았던 예니와 약혼을 하기로 결정했다. 하인리히는 결혼이 아들의 생활에 평온을 가져다 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헨리에테는 좀더 조심스런 태도를 보였다. 결혼을 생각하기에 마르크스는 너무 젊었다. 열여덟 살 밖에 안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예니는 스물 두 살이어서 마르크스가 감당할 수 없을 지 모를 생활 수준에 익숙해 있었다.

 

53 마르크스의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처럼 트리어의 변호사가 되거나, 최악의 경우 법학교수라도 되기를 늘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마르크스를 베를린으로 보내어 학업을 계속하게 하였다. 이 일로 근느 베를린에서 적어도 5년 이상 공부를 계속하게 된다. ..베를린에 만연해 있던 불관용이 마르크스를 반항자로 만들어버렸다. 

 

56 262쪽짜리 공책에 적어도 152편 이상의 시를 저어서 1836년 크리스마스 때 예니에게 보냈다.

오 로맨틱해

 

55 그의 초기 문학작품들은 시들이었다. 마르크스 부인은 남편이 젊은 시절에 쓴 이 작품들을 정성스럽게 간직하고 있었지만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55 마르크스가 언제나 특별한 지적 공모관계를 맺고 있던 아버지와 주고 받은 서신들을 보면 그 해에 그가 읽은 책들에 대해 모두 알게 된다.

아버지와 특별한 아들

 

56 평생 동안 그의 저서에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된 특징이 여기에서 나타난다. 자신에게서 어떤 작품이 완성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57 그의 방대한 교양, 경구들에 대한 감각, 빈정거림과 대담성은 자연히 그 도시의 젊은 헤겔학파 운동의 우두머리뿐만 아니라 가장 폐쇄적인 박사클럽의 수장에게까지 전해졌다. 박사클럽은 매우 전투적이고 가장 우수한 젊은 철학자들의 모임이었다. 그들 사이에서는 토론 주제가 끊이지 않았다. 바우어와 같은 이들은 무엇보다 의식 혁명을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계에 영향을 미치려면 사상을 거쳐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감옥에서 막 나온 마르크스를 박사클럽에 들어가게 해준 아돌프 루텐베르크 같은 사람들은 사색은 그만두고 행동으로 넘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뜻맞는 이들과의 이런 모임 속에서 다들 즐거웠겠다. 산소통이며 광장, 지지적인 커뮤니티

 

59 베를린의 차가운 방에서 열과 기침으로 고생하던 6개월이 지나고 1837년 겨울 끝 무렵이 되자 마르크스는 의사의 충고에 따라 시골로 거처를 옮긴다. 대학교에서 숲을 거쳐 1시간 가량 걸어가면 나오는 스프레 강의 오른쪽 기슭에 있는 어촌 마을 스트랄로프에 방을 얻었다.

대학 근처, 1시간 숲길, 물을 내려다봄, 이런 데 나도 살고 싶다.

 

60 마르크스가 자기 자신의 유물론을 정립하기 위한 시민사회의 개념을 헤겔에서 발견하였다.

 

60 마르크스는 자기 책들과 서류들을 아무도 정리하지 못하게 했다. 겉보기에는 무질서했지만 실상은 모든 것이 자기 자리에 있었으며, 그는 자기를 필요로 하는 책이나 공책을 언제나 힘들이지 않고 찾아냈다. 대화를 하는 가운데도 그는 종종 자기가 막 인용한 글귀나 숫자를 책에서 찾아 보여주려고 말을 멈추곤 했다. 그는 자기 작업실과 일체를 이루었고 책과 서류들은 마치 그의 몸의 일부인 것처럼 복종했다.

마르크스도 정리를 못했구나. 아 위로돼. INTP?

 

61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의 글들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마르크스는 절대적인 부정을 할 수 있는 용기와 새로운 것을 창조해낼 힘을 가졌던 그에게 매료되었다.

이런 식으로 순종의 독을 뺀다. 비판. 균형

 

61 글이 형편없다고 생각되면 불같이 성을 내며 찍어버리고는 막 시작한 소설들과 함께 불태웠다. 그러고 나면 울화가 치밀어 며칠 동안이나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럴 때면 무턱대고 숲을 쏘다녔으며 심지어는 슈트랄로브 셋방 주인의 사냥에 동행하기까지 했다.

젊은 그도 그랬구나.

 

61 마르크스는 자신의 재능이 어린 시절 가졌던 야망의 수준에 과연 미치는지 자문해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경력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모든 걸 다 포기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냥 조촐하게 살면 어떨까? 어찌됐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지 않던가?

그냥 조촐하게 살면 안될까? 책을 쓰겠다는 이런 허황된 욕심 내려놓고? 나가주는 게 나은가? 나의 최대고비가 왔다. ‘나 같은 것은 차라리 없어져 주는 게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 빠지면. 20대에는 이런 걸 넘지 못했다. 40대가 되어 다시 순환해서 그 자리에 왔다. 40대는 좀 더 나은, 다른 선택이길 바란다. 

 

62 남작은 평범한 대학생이던 마르크스가 문학과 철학에 대한 열정과 무한한 야심을 품은 교양 있는 열아홉 살 청년이 된 것을 보고 감동했다. 그들은 베를린에 대해 얘기했고 민주주의와 과학적 진보, 다가올 세계에 대해 토론을 펼쳤다. 마르크스는 특히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는 마르크스가 남작과 맺고 있는 돈독한 관계에 대해 질투하지 않았다. 하인리히는 심한 결핵에 걸려 있었기 때문에 수입이 예전 같지 못하면 아들에게 돈을 제대로 주지 못하게 될까봐 염려하고 있었다.

친부가 여러 양부에 대해 질투하지 않기도 어렵다.

 

65 각자는 자기가 한 행동들 중에서 잊혀진 것을 감동 속에서 되찾는 방식으로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한 기념비를 세워야 한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런 기념비를 세우기 위한 곳으로 아버지의 가슴보다 더 좋은 곳은 없습니다.

 

66 베를린 체류조차도 여전히 관심밖의 일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그 어던 예술작품도 예니만큼 아름답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아버지한테 이런 편지를 쓰는 스무살 아들

 

67 사랑하는 아버지 아버지가 어떻게 결정을내리신다 해도 제발 어머니께는 이 편지를 보내지 말아주세요. 제가 불쑥 나타나면 훌륭하신 어머니가 회복되실 수도 있으니까요.

아하하 엄마를 들어 슬쩍 아버지를 협박, 회유하고 있다.

 

69 네 의식이 너의 철학과 겸손하게 조화를 이루고 화합할 수 있게 되었다니 잘된 일이구나. 하지만 너는 단 한가지 점에서는 귀족적인 침묵을 슬기롭게 지키고 있구나. 비록 너는 인정하는 것 같지 않아 보여도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는 비중이 아주 큰, 쩨쩨한 돈 문제에 대해서 말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 너를 너무 자유롭게 놔두었던 것이 원망스럽구나. 지금은 이번 학기의 네 번째 달이고, 너는 벌써 20탈레르를 빼서 썼다. 그런데 나는 이번 겨울에 그만큼 벌지 못했단다. 내가 너를 잘못 판단하거나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다니, 그건 네가 틀렸다. 나는 네 마음과 도덕성을 전적으로 믿는다. 나는 언제나 너를 믿어왔다. 네가 1학년 때 그 암울한 사건 마르크스의 결투 을 일으켰을 때조차도 아무런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던 것은 너를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너의 그 고귀한 도덕성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너는 내 마음의 가장 비밀스런 곳까지 알고 있고, 내 인생의 가장 강력한 지렛대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너의 한결같은 아버지가

아버지가 아들이나 딸에게 이런 편지를 쓸 수 있다니..평소의 관계는 어른과 아이가 아니라 어른과 작은 어른의 관계였다.

 

70 네가 부활절 방학 때 오지 않는다면 나는 정말 화가 날 거다. 내 감정이 이성에서 벗어나도록 내버려둘 테다. 사랑하는 마르크스, 네가 너무 이성적이라는 점이 슬프구나. 너는 내 편지를 깊은 사랑의 척도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아주 많이 느끼면서도 말은 아주 적게 하는 순간들이 있다. 사랑하는 마르크스, 나도 네게 잘 지내라고 이야기하련다. 네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빨리 편지하렴. 네 편지가 아버지를 빨리 회복시키도록 도울 것이다. 너를 영원히 사랑하는 어머니가

 

 

72 돈에 관해 말하지 않는 것을 귀족주의와 동일시한 아버지의 방식은 마르크스에게 돈이 어떤 것이 될 지 추측이 가능하게 한다. 즉 노예 상태의 사슬, 구속의 원천이 되고 있는 것이다후에 돈에 의한 착취에서 벗어나는 것은 부르주아처럼 돈을 버는 것을 통해서도 아니며 귀족처럼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을 통해서도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처럼 돈의 권력과 싸움으로써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도 이렇게 길러졌다. 돈 이야기에 너무나 많은 상처를 받았던 부모님은 내게 돈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나는 좀 더 돈 개념이 없다. 돈에서 자유로와지는 방법은 무엇일까? 무지하거나 다루지 못하는 상태는 아니다.

 

73 1838 5 10일 하인리히는 트리어에서 결핵으로 61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마르크스는 그 날부터 죽는 날까지 카디건 안쪽의 심장 위치에 있는 주머니에 그들이 마지막으로 보았던 1년 전에 아버지가 준 은판 사진을넣어 다닌다. 이 죽음은 하나의 결별의 기점이 된다. 마르크스는 아버지 장례식에 가지 않은 것 같고 어머니는 마르크스 몫인 금화 6000프랑 상당의 유산을 보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러기 위해서는 가족들이 아직 살고 있는 집을 팔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많은 전기작가들이 마르크스가 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은 것은 무관심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 간의 편지를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의 불참을 증명해 보려면 그것은 사망을 통지하는데 필요한 시간으로만 설명된다. …형제 자매들이 모두 병에 걸려 있어서 아버지가 남긴 유산으로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74 하인리히가 어머니의 임종까지 기다렸다가 개종을 했던 것처럼 마르크스도 아버지의 마지막 편지 속에서 허락을 받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변호사직을 포기하고 새로운 꿈에 뛰어들게 된다. 그것은 철학교수가 되는 것이자 그가 정치활동을 할 것이라는 얘기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자기 길을 가게 되었다. 사랑이 굴레가 되기도 하는구나.

 

77 이런 단계를 거치면서 마르크스는 사회 속에서 철학자의 역할에 대한 생각의 기초를 세웠다. 그가 생각하는 철학자의 역할이란 진실을 말하면서 실제적인 것에 관해 행동하는 것이다.

버트런드 러셀

 

78 그리스 철학자들에 대해 공부하면서 그는 사실상 무신론과 유물론에 대해 공부했다. 에피쿠로스에 대한 연구는 종교적인 것에서 멀어지고 사회적인 것에 다가가는 방식이기도 했다.

 

78 그 와중에도 예니와의 서신교환은 계속되었고, 여전히 아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마르크스가 논문을 끝내자마자 결혼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적어도 3년을 기다려야 하는 일이었다.

 

79 당신은 나에 대한 아무런 배려와 신뢰가 없군요. 당신의 그 낭만적 사랑을 내가 오래도록 소유할 수는 없을 거라는 것을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당신의 그 멋지고 감동적이고 열정적인 사랑, 당신이 내게 해준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이제 와선 나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그것이 언젠가는 끝나버릴까봐 두려워서이죠.  

낭만적 사랑의 소멸에 대한 답이 결혼이라고?

 

79 그녀는 흔히 여자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멀리했다. 한 남자의 사랑 속에서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 말이다.

 

80 마르크스가 그녀에게 보낸 편지들 속의 냉정하기 짝이 없는 불평 앞에서 그녀는 그토록 열정적이고 사려깊던 그가 차갑고 냉소적으로 될까봐 두려워했다. 하인리히가 자기 아들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도 열렬하고 서정적이건 마르크스가 때로는 냉정하고 무심하게 보인다는 것이었다. 예니는 마르크스를 현실 세계로 돌아오게 하려고 애쓰면서 그의 부모들이 했던 역할을 떠안았다. 그녀의 편지들은 상호 간의 종속과 희생 정신을 보여준다.

 

82 엥겔스의 증조부인 요한 카스파르 엥겔스는 부퍼탈 옆에 있는 바르멘에 자그마한 실 가게를 열었다가 레이스 리본, 린네르 제품을 만드는 공장으로 전환하게 된다. 그가 죽자 장남이 견직물 도매상을 추가했다. 그 다음에는 세 명의 손자들이 서로 뜻이 맞지 않아서 누가 재산을 물려받을 지를 결정하는 뽑기를 한다. 뽑기에서 진 두 사람중 하나가 대담하게도 에르멘이라 불리던 두 형제와 함께 가장 좋은 기계들이 있는 맨체스터에 면방적 공장을 세우고 이어 바르멘과 엥겔스키르헨에도 설립한다.

아 재미있다.

 

85 결국 에피쿠로스가 종교를 뒤엎은 반면, 데모크리토스는 미신과 비굴한 신비주의의 문을 활짝 열었다.

마르크스의 박사학위 논문이 에피쿠로스와 데모크리토스에 관련된 것이라니! 둘 다 유물론과 관련 있다고 읽었다. 

 

86 마르크스는 예니의 아버지에게 이 논문을 헌정하며

 

86 1841 3 30일 베를린 대학의 졸업장을 획득한다. 자신의 박사논문을 4 6일에 예나대학으로 보낸다. 예나대학은 당시 박사학위를 쉽게 발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87 마르크스는 7월에 본으로돌아가 마침내 예니와 둘이서만 만나기 위한 구실을 찾게 된다폰 베스트팔렌부인은 남동생인 에드가르트가 예니와 동행한다는 조건으로 그들의 만남을 허락했다. 당시 예니는 27세였고 마르크스는 23세였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자.

웃기다

 

88 내가 한 일이 무엇인지 난 아주 잘 알고 있어요. 추방당해 마땅하고 사람들의 지탄을 받아 마땅한 그런 일을 내가 저지른 것이지요. 하지만 나는 그 몇 시간의 추억을 세상의 어떤 보물과도 맞바꾸지 않을 거에요.

잤다고?

 

88 그녀는 마르크스의 교양의 공유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88 나의 야생곰이여,

미스터 철도, 야생 곰, 내 사랑스런 귀염둥이애칭이 사랑스럽다.

 

89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당신을 위해 신의 가호를 기원합니다. 나는 내 손가락들 하나하나에 키스를 하고 그것들이 내 사랑하는 마르크스에게 날아가게 하여, 사랑에 대한 무언의 전령이 아니라 사랑에 관한 온갖 깜찍하고 부드럽고 비밀스런 표현들을 중얼거려 주기를 바라고 있어요. 

 

89 나는 당신과 결혼하게 되는 거지요?

 

89 법은 공장에서 아동의 노동을 제한하고, 일할 수 있는 최소 나이를 여덟 살로 제한했다.

 

90 현 세대에서 가장 위대한, 어쩌면 유일하게 진정한 철학자를 만날 준비를 해두게. 루소, 볼테르, 돌박, 레싱, 하이네, 헤겔이 모두 단 한 사람 안에 모여 있다고 상상해봐. 병렬로 있는 게 아니라 하나로 합쳐졌다는 얘길세. 그 사람이 바로 마르크스 박사야

 

91 1842 4, 마르크스는 여전히 본에 있으면서 별로 신중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을 자극하고, 속물들과 부딪치며, 부르주아들을 화나게 하기 위한 검열에 대해 시위를 벌였고

 

92 5월에 그는 대학교에서 완전히 해임되었다.

 

93 마르크스는 바야흐로 자신의 스승들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긴 과정에 들어간 것이다. 헤겔, 바우어, 사비니 다음에는 루텐 베르크가 공격을 받을 차례였다.

 

94 마르크스는 어머니와 누이들을 전혀 돌보지 않았고, 그들은 마르크스의 무관심을 나무랐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정치적 견해도 비난했다. 그는 사실상 다시는 트리어에 발을 들여놓지 않고 가족도 아주 가끔씩만 보게 된다. 트리어는 그의 아버지였으며 그 외에 다른 무엇도 아니었다.

 

95 , 분위기는 무겁고 옆구리에는 폭풍을 안고 있구나. 그 때문에 우리는 눈먼 형제들에게 소리치는 것이다. 정신의 눈을 떠라. 죽은 자를 땅에 묻는 일은 죽은 자들에게 맡겨라. 그리고 영원히 젊은 정신, 영원한 신생아를 찾아야 할 곳은 허물어져버린 폐허들이 아님을 깨닫도록 하라

(미하일 바쿠닌)

 

98 많은 책을 읽은 마르크스는 경제학이 다른 모든 사회과학들의 기반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어느 것도 경제 법칙과 유물론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98 이후로 그는 유물론적 논리가 예술, 철학, 사회, 경제구조 소유권에 관한 권리에까지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99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라인신문에 기사 하나를 제안하러 왔는데 젊은 편집장을 만나지는 않았다.

 

99 마르크스의 지휘아래 라인신문은 어느덧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구독자 수는 세 배나 들었고 필자들은 앞다퉈 글을 실으려고 했다.

 

99 마르크스는 온갖 차원의 전선에서 투쟁을 계속했다. 이제는 그의 스승 브루노 바우어  차례였다. ..바우어는 유태인들이 기독교로 개종을 한다는 조건 아래에서만 그들에게 정치적 권리와 자유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는 자기가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가 겪어야 했던 굴욕을 결코 잊지 않았다. 설사 그것에 관해서 들은 바가 별로 없다 해도 말이다.

스승에 대해서도 비판하다. 틀린 건 틀린 거 맞네.

 

102 곧 결혼하게 될 예니가 아니라면 라인 주에는 마르크스를 잡을 것이 없었다. 하지만 예니는 어디든지 마르크스를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102 “우리는 세계가 자기 품 안에서 스스로 발전시켰던 원칙들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우리는 세계가 왜 투쟁했는지 그 이유만을 명확한 방법으로 세계에 보여주었지요. 그리고 세계 자신의 의식은 세계가 스스로 획득해야 할 것입니다.” 이 문장은 그가 앞으로 겪게 될 모두를 요약하고 있다.

 

105 그 어떤 낭만주의적 감정 없이 확언할 수 있어요. 미치도록 사랑하고 있다고. 저는 약혼한 지 7년 되었고, 제 약혼자는 저를 위해 가장 혹독한 전투를 치르느라 건강을 거의 다 잃어버렸습니다. (1863 3 3, 마르크스가 아르놀트 루게에게 보낸 편지)

 

106 이번에는 장인의 죽음이긴 했지만, 부모 중 한 사람이 죽은 후인 그때에도 중요한 결정을 하게 된다. 부부 각자가 결혼 전에 진 빚이나 상속받은 빚에 대해서는 혼자서 책임을 진다고 규정하면서도 그 둘을 공동재산으로 하는 협정이 맺어진 것이다.

 

108 사춘기 때 가졌던 열망 중 그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고 차근차근 계획을 세워 나갔다. 가장 위대한 철학자가 되고, 모든 지식들을 서로 연결짓고, 이전의 다른 사상들과는 달리 노동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그 당시의 언어로 현존하는 질서에 대한 비평을 내는 것이 그 계획들이었다.

사춘기 때 열망?

 

108 독일 인텔리켄치아가 다수 망명해 있던 파리를 선택한다. 예니는 그 결정을 적극 찬성한다.

 

109 글들을 쓰면서 마르크스는 자신의 사상, 읽고 있는 책들, 쓰고 있던 것들에 대해 예니와 토론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마르크스의 첫번째 독자였으며, 그의 글을 완복하게 해독할 수 있는 유일한 독자로 남게 된다.

지성이 제법 되는 여자

 

111 그는 헤겔학파에 대항해서 그 유명하고 위협적인 강론을 내놓았다.

 

비판의 무기가 무기의 비판을 대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신체적인 힘은 신체적인 힘에 의해 소멸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론은 대중의 소유가 되는 즉시 신체적인 힘이 될 수 있다.

1장의 표지에 있던 글

 

115 사라진 모든 세대들의 전통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뇌를 악몽처럼 짓누르고 있다.

 

 

2장  유럽의 혁명가 (1843.10~1849.8)

 

 

프롤레타리아들은 사회의 개인들이 지금까지 전체의 표현으로서 선택해온 형태와 정반대에 놓여 있다. 다시 말해 국가와 정반대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개성을 실현하기 위해 국가를 전복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120 프랑스에는 750개의 정기 간행물이 발행되고 있었고, 그중 230개가 파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120 여기서 민주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란 보통선거, 무상교육, 극빈자들의 생활 조건 개선에 호의적인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121 파리는 제네바, 브뤼셀, 런던과 더불어 중부 유럽 전체, 특히 독일에서 물밀듯이 밀려오는 망명객들의 피난처였던 셈이다.

파리, 내가 한동안 머물고 싶은 도시 1

 

122 마르크스는 스물다섯 살의 나이로 파리에 입성하던 그 때 아버지 하인리히를 생각했다. 유태인으로서 변호사직을 수행할 수 있게 해준 프랑스 대혁명을 미칠 듯이 좋아하여 프랑스어로 프랑스 법을 공부하면서 한때 프랑스 시민이 되었다가 1815년에 프랑스와 결별했던 아버지, 프랑스는 사회 진보의 주요 현장이며 프랑스의 노동자계급을 세계 혁명의 전위대라고 보았던 아버지, 유태 문화, 독일 문화, 프랑스 문화 이 세 문화를 아우르고 있으면서 자기 아들에게 자유와 보편주의에 대한 취향을 잘 물려주었던 아버지. 마르크스는 아버지와 나눴던 그 모든 대화들을 떠올렸다. 여기 파리에서 그런 대화를 다시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버지와 밀착되어 있는 아들은 딸 보다는 위험하지 않다. 그는 남자로서 살아가는데 아버지에게 힘을 받아야 하므로.

 

123 마르크스는 그들 부부가 떠날 때 그토록 울던 예니의 어머니와 자신의 어머니가 준 약간의 돈이 있었다그 액수는 파리에서 상당한 수입에 해당됐다. 하지만 무엇보다 마르크스에게는 평생을 함께 살아갈 예니가 있었다. 자기와 결혼해줄 것이라고는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그녀가 자기와 함께 있었고, 벌써 임신해 있었다. 

신분차이 때문에?

 

124 마르크스는 하이네에게 그의 시적 재능을 자유를 위해 쓰라고 부추겼다. “그 끝없는 사랑의 세레나데들은 놔두시고, 시인들에게 회초리를 갖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보여주세요.” 하이네는 비판을 몹시 싫어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당시 쓰고 있던 정치적, 사회적 풍자적인 작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논평해 달라고 젊은 마르크스에게 간청했다.

 

126 가장 좋아한 작가는 발자크였다. 그는 훨씬 전에 출간된 메리 셀리의 <프랑켄슈타인>에서 깊은 인상을 받아 자본의 극악무도함에 대한 은유인 피를 빨아 먹는 자라는 글귀를 이 탁품에서 뽑아내게 된다.

 

127 그는 언제나 가장 최근에 읽은 것에 대해 쓰기를 원했으나 끊임없이 다른 책들을 또 읽으면서 발췌문들을 거듭 작성하곤 했다.

마르크스도 발췌문, 인용문들을 정리해두었구나.

 

129 엥겔스는 가치란 경쟁 속에서 드러나는 생산비용과 유용성 간의 관계라고 주장했다.

 

130 마르크스는 <유태인 문제에 관하여> <헤겔의 법척학 비판에 대한 논고>의 게재를 몹시 망설였는데, 그 이유는 글이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이나 사춘기 때처럼 그리고 평생 동안, 그는 어떤 글을 완성했다고 여기면서도 손에서 놓는 것을 아주 힘들어했다.

왜 항문기 생각이 나지?

 

134 학자적 능력으로 보면 그는 완전히 게르만 세계에 속합니다. 하지만 혁명가적인 사고 방식으로 보면 게르만 세계에서 배제됩니다.

 

139 그는 자기 자신을 총괄적인 분석가, 세계의 정신으로 생각했다. 각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재화 노동 또는 자본 의 성격에 따라서 인간을 두 개의 사회계급으로 나누었다. 계급들 간의 소유 관계는 사회의 하부구조를 구성하고, 그 위에 법률적이고 정치적인 상부구조가 세워지게 되며, 사회의식에서 결정된 형태들이 이 상부구조에 해당된다. 개인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가 속해 있는 계급을 통해서만 생존하며, 작용하는 것은 오직 그 게급이라는 얘기이다. 홉스와 헤겔에 반대하는 그는 에너지에 관한 저서들을 통해 막 알게 된 카느로 부자르 본떠서 진보, 시간을 따라 이루어지는 발전, 역사 등과 관련된 언어를 말하였다. 게다가 이미 계급 갈등을 역사의 원동력으로 묘사했다.

 

141 자신의 개념들을 분명히 하기 위해 철학과 경제학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했다. (<원고들> 1844 간행). 어떤 사람들은 나중에 이 원고에서 진정한 마르크스의 모습을 보고자 했고, 후에 그의 이름으로 자행된 잔학한 일들이 그와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증명하는데 사용되기도 했다.

 

142 그에게 소외란 헤겔처럼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사회의 산물이었다. 인간은 다른 그 어떤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노동에 의해 소외되었다고 주장했다.

소외 자체는 여러 사람의 관심사, 지금도. 원인은 보는 이마다 다를 수 있음.

 

143 글쓰는 것 외에는 다른 직업이 없던 그의 생각 속에서 이상적인 사회란 모두가 무상으로 자신의 일에 전념할 수 있는 사회라고 생각한 것이다.

 

145 그는 평생동안 아주 사소한 글에서도 벗어나기 힘들어했고 완전한 글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으로 항상 원고를 마무리하지 못했다.

 

145 버림받음이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 노동자가 노동의 결과를 자본가로부터 박탈당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노동자는 자기가 소유하거나 관리하지 못하는 물건들을 생산해 내는데 인생을 바치며, 자신은 자기가 아니라 타인에게 속한다는 것이다.

 

148 노동자의 음식 섭취는 기계관리와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임금이란 기게의 톱니바퀴가 작동이 잘 되도록 쳐주는 기름과 같은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자본가는 절대적인 권력자이다. 왜냐하면 노동자는 생존을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반면, 자본가는 자신의 자본 활용을 미룰 수도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자본가 없이 살 수 있는 기간보다 자본가가 노동자 없이 살 수 있는 기간이 훨씬 더 길다.

 

149 마르크스는 이러한 소외를 종식시켜 줄 수 있을 사회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다. 그리고 공산주의에 대한 정의를 소외로부터의 해방, 사물들의 재획득, 생산자들의 자유로운 연합을 통한 사용권과 노동의 자유화 등을 가능하게 해 주는 사회체제라고 하였다. 

 

151 마르크스는 민주주의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폭력에 의해 국가권력을 장악해서 그것을 경제적, 사회적 변혁의 도구로 만들어야 한다고 설명하였다. 그래서 이 유명한 프랑스 사회주의자를 공포에 질리게 만든다. 프루동은 그에게 개혁의 길을 통해 부의 공정한 재분배를 실현할 수 있다고 대응했다. 그는 순교자들이 생기게 될 프롤레타리아의 생바르텔르미는 원하지 않았다.

 

152 그는 포이어바흐와 헤겔의 이론을 빌려 모욕당하고 분노한 프롤레타리아를 미래의 해방과 혁명의 주역으로 만들었다.

 

153 그 하루살이 잡지 때문에 그는 이제 프로이센에 체류하는 것이 금지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운명이 결정된다.  

 

155 ‘드디어 노동자 세계를 잘 알고 있고 공장에 발을 들여놓은 적도 있으면서 독학으로 배운 언어들로 인간들의 구체적인 삶뿐만 아니라 철학에 대해서도 잘 얘기할 수 있는 자가 나타난 거야.’

마르크스는 결코 노동자계급처럼 살지도 않고 설사 그가 그들처럼 극심한 빈곤을 겪는다 해도 공장에도 발을 들여놓은 적이 결코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노동자를 이해하기 위해서 엥겔스가 보던 그 자료들, 즉 보고서들, 언론, 다른 사람의 증언을 이용한다.

 

156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고대 시인들이 묘사한 우정 이상을 우리 시대에 실현했다.

 

162 벨기에는 어떤 투쟁적 활동도 하지 않는다는 조건에 응하기만 하면 쉽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그저 글을 쓰고 싶었을 뿐이지 투쟁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163 제가 이곳을 떠나면서 헤어지게 되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큰 애석함을 느끼면서 남겨두고 가는 사람은 바로 당신입니다. 당신을 제 짐 가방에 넣어가고 싶군요.

 

164 3월에 예니의 어머니가 하녀 한 명을 보내주었다….그녀는 당시 25세였고 마르크스 보다 두 살 적고, 예니보다는 여섯 살이 어렸다. “마르크스 부인은 헬레나를 아주 가까운 친구로 여기고 있었고, 마르크스는 그녀에게 아주 특별한 우정을 보였다. 그는 그녀와 함께 체스를 했고, 그가 게임에 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마르크스 가에 대한 헬레나의 사랑은 맹목적이었다. 마르크스 가족이 하는 것들은 뭐든지 다 좋은 일이고, 오로지 좋을 수 밖에 없었다. 누구든지 마르크스를 비판하기만 하면 그녀가 가만두지 않았다. 그녀는 그 가족으로부터 친근하게 대접받는 사람이면 누가 됐든지 모성애를 발휘하여 보호했다. 아이들에게 옷도 입히고 마르크스 부인의 도움으로 바느질도 했다. 그녀는 살림을 이끌어가는 관리인이자 집사였다. 그녀의 깔끔함, 검약 정신, 재능 덕분에 그 가족은 필수품이 부족한 적이 없었다.

완벽한 집사, 또는 하녀, 그런데 그녀가 마르크스의 사생아를 낳는다니 참 아이러니하다. 마르크스와 여섯 아이를 낳았고, 그의 가난에 참예하느라 그 중 3 아이가 죽었다. 그리고 나중에 장성한 두 딸이 자살했다. 헬레나가 낳은 아이는 엥겔스가 거두어 양육비를 지급했지만 엥겔스는 임종 전에 사실을 고백했다. 그 아들은 자신의 친부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 채 78세에 죽었다. 하녀가 낳은 주인 남자의 아이, 스캔들. 그게 마르크스든 뭐든 구질구질한 스캔들일뿐이다. 아놀드 슈와제너거도 이런 출산을 했지. 태도도 이 여자와 비슷했다. 부인들은 남편의 이런 점을 너그러이 받아 안았다. 왜냐면 그래도 손익대조표에서 이득이 남으니까 그 남자(여자) 옆에 남는 거겠지. 또한 가정폭력은 범죄지만 이런 것은 당사자인 배우자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고, 남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닌 사적 관계라고 생각하려 한다.    

 

166 마르크스는 엥겔스의 돈으로 생 요스 텐 노드 동네의 알리앙스 가 5번지에 있는 집으로 이사하는데 엥겔스의 바로 옆집이었다. 예니가 엥겔스를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약간은 질투심과 충격 때문에 엥겔스에 대해 여전히 경계했지만 기꺼이 친구가 되었다. 그녀가 처음에 받은 충격은 엥겔스가 결혼하지 않은 채 끊임없이 여자를 바꾸어가면 사는 것 때문이었다.

엥겔스는 왜 그랬을까?

 

167 인간의 본질은 고립된 개인에 내재한 추상성이 아니다. 현실 속에서는 사회적인 관계들의 총체이다.

 

168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하기만 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169 영국에서 그들은 함께 6주를 보낸다. 9월이 해산 예정이었던 예니는 남편이 곁에 있어주기를 바랐지만 마르크스에게 이 여행은 찬란한 경험이었다. 그는 영국의 군주제에서 지배하고 있는 자유와 자본주의의 위력을 발견했다.

찬란한 경험이 되는 여행

 

171 아이가 둘이 되자 마르크스 가족의 경제적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당시 마르크스는 수입이 전혀 없었다. 얼마 안되던 비상금마저 다 떨어졌다.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남긴 유산 중 그의 몫에 해당하는 돈을 여전히 보내지 않았다. 힘닿는 데까지 마르크스를 돕던 엥겔스는 더 이상 가족의 재산에 손을 댈 수가 없어서 마라크스가 얼마간의 돈을 빌리고 싶어할 때마다 변명을 해야했다.

 

176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네 가지 중요한 결론을 덧붙였다. 마르크스의 저작에서 자주 나타나는 이 결론은 그의 아류들에서는 다소 소홀히 다루어지고 있다.

-설사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경제의 주역인 지도 계급의 이데올로기라고 할지라도 인간의 행동과 사고는 경제적 도는 사회적 요인들에 갖혀 있지 않다.

-자본주의는 공산주의에 불가피한 전제조건이다.

-공산주의는 우리에게 있어 창조해 내야할 형상도 아니고, 현실이 추종해야 할 이상도 아니다. 우리는 현 상태를 폐지시키는 현실적인 운동을 공산주의라 부른다.

-공산주의는 세계적일 수 밖에 없다. 공산주의는 다수 인민들의 즉각적이고 동시적인 활동을 통해서만 실현되는데, 이것은 생산력의 전 세계적인 발달과 거기에 관련된 국제관계들을 전제로 한다.

 

179 우리들의 주된 목표(우리 스스로 분명히 이해하는 것)에 도달한 만큼 그 원고를 생쥐들이 갉아먹으며 비판하든지 말든기 기꺼이 내버려두었다.

이번에도 자기가 한 일이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거부한 셈이었다. 엥겔스는 같은 기질을 갖고 있지 않아 그들이 공동으로 한 작업이 활로를 찾지 못한  채 그냥 방치돼 있는 것에 대해 실망한 듯이 보였다.

 

186 스물여덟의 나이가 된 마르크스는 자신이 작가이자 활동가이기를 바랐다나는 민주주의적 독재자의 실체를 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적 독재자라니 말이 되나?

 

189 그들의 어두운 논 속에는, 눈물 한 방울도 없었다.

작업장에 앉아서, 그들은 이를 꽉 문다.

독일, 우리는 너의 수의를 짠다.

우리는 삼중의 저주를 씨실과 엮는다.

우리는 짜고 있다. 우리는 짜고 있다. (하이네의 시)

 

191 공산주의연맹의 회원들은 아직 삼십대도 안된 그를 마르크스 영감이라고 부르곤 했다….대화를 나눌 때조차도 그는 걷기를 좋아했고, 때때로 토론이 열기를 띠거나 대화 내용이 중요할 때만 멈춰 섰다.

 

193 아들이 태어났다. 마르크스는 오래 전부터 자신의 아버지와 가졌던 같은 관계를 나눌 수 있는 아들을 기대했다.

이런 성별에 대한 기대가 양육기의 경험에서 비롯되나? 그럼 아테나 딸은 딸을 낳았을 때 매우 곤란하겠구나.

 

195 이 글을 보면 훗날 사람들이 그의 사상을 변질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르크스는 공포정치에 반대했던 것이다. 그가 보기에 그것은 부르주아지에게만 이로웠다.

공포정치=공산주의라고 생각해왔다.

 

197 엥겔스는 1848 1월에 파리로 가서 연맹 동지들의 사기저하, 내부경쟁, 치사함을 간파한다.

 

200 그가 세편이나 공표하게 둔 것은 처음 두 편은 연설문이고, 마지막 글을 서명을 하지 않을 글이었기 때문이다.

 

201 유령 하나가 유럽을 떠돌아다니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다. 옛 유럽의 열강들은 이 유령을 몰아내기 위해 신성동맹을 맺어 다 함께 뭉쳤다. 교황과 차르, 메테르니히와 기조, 플아스의 급진주의자들과 독일의 경찰들이 그들이다. 집권하고 있는 적들로부터 공산주의라는 비난을 받아보지 않은 반대파가 있는가? 또한 좌파든 우파든 자신의 적들에게 공산주의자라는 불명예스러운 수식어를 돌려준 적이 없는 반대파가 있는가?  (공산당 선언의 도입부)

 

202 오늘날까지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였을 뿐이다.

유명한 공산당 선언, 짧다. 한 페이지 분량이네.

 

207 프롤레타리아는 무엇보다 정치 권력을 장악하고 자신들을 국가적인 계급으로 자처하며, 자신들 스스로가 국가가 되어야 한다. 이런 행위를 통해서 보면 분명히 그들은 여전히 국가적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부르주아적 의미가 아니다.

 

210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벨기에에서 추방되었다.

 

217 마르크스가 예견했던 것처럼 부르주아지는 다른 제안들에 대해서는 듣고 싶어하지 않았다. 수입에 대한 누진 과세, 무상교육, 교통수단의 국유화, 중앙은행의 창설 등이 그것이었다. 여기에서도 후대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과는 반대로 마르크스는 생산수단들의 전면 국유화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특히 자본주의가 충분히 발전되지 않은 나라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마르크스가 오해 받는 부분이다.

 

218 우리는 하나의 깃발만을 줄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깃발이다. 아직은 내세울 수 없었던 특별히 프롤레타리아적인 성격을 어떤 기회에서든 분명히 하게 될 그런 민주주의의 깃발이다.

민주주의 공산주의 차이???

 

222 쾰른에서는 마르크스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자들과의 연합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확인한다. …그는 새로운 계획은 세운다. 자본에 철저하게 반대하는 전쟁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임시 독재에 대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으며, 이 개념이 곧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된다.

 

225 곧이어 지리멸렬한 일들이 이어졌다.

 

228 바그너는 지방 위병대의 부대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그 도시의 온갖 길을 다 안내했고 프로이센 부대들이 어디까지 와 있는 지 임시 정부에게 정보를 알려주었다.

니체가 존경했던 그 바그너?

 

230 이 신문(신라인신문) 때문에 마르크스는 총 7000탈레르를 쓰게 된다. 이를 위해 유산 중에서 남은 돈과 가족의 재산들 모두와 하다못해 그가 독일에서 갖고 있던 책까지 모두 처분한다. 예니는 트링에 있는 어머니 폰 베스트팔렌 부인 집으로 피난을 가서 마르크스의 어머니와 누이들에게 자기 아이들을 보여준다. 마르크스의 어머니와 누이들은 마르크스가 혁명 지도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한다.

그렇겠구나. 변화들이 너무 많았다. 나도 엥겔스가 죽어버렸다고 생각했다.

 

232 1845년 여행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서 마침내 그는 결정을 내렸다. 영국으로 가야겠다고. 8 27….그는 아는 사람없는 영국으로 가는 배를 탔다. 그의 나이 서른 하나였다. 무일푼에다 동지도 없고, 후원자도 없으며, 직업마저도 이제는 없다. 아내와 세 아이들의 소식도 알 지 못했고, 가장 가까운 친구는 실패한 혁명의 마지막 경련 속에서 어쩌면 죽었는지도 몰랐다. 허무의 무게가 그를 짓눌렀다.

 

 

3장  영국의 경제학자 ( 1849.8~1856.3) 가난한 지식인

 

 

인류가 아시아의 사회 상태 속에서 근본적인 혁명 없이 자신의 운명을 완수할 수 있을 지 알아봐야 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렇지 않으면 영국이 저지른 범죄들이 어떤 것이었든지 간에 영국은 이런 혁명을 촉발시키면서 무의식중에 역사의 도구 노릇을 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40 노동자와 그의 가족들이 가까스로 살 수 있을 만한 임금을 기준으로 한 주당 평균 노동시간이 64시간에 달했다. 

   

242 이런 곤란한 와중에도 단 한 순간도 마르크스는 글을 쓰거나 행동하는 일을 포기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또한 임금을 받는 일자리를 찾을 생각도 전혀 하지 않았다.

 

244 예니는 헬레나 데무트의 도움을 받아 병든 몸으로 세 아이를 거느리고 넷째 아이까지 임신한 상태로 왔다. 트리어에서 에니는 친정어머니에게 돈을 좀 받고, 아버지의 유산 중 일부를 회수할 수 있었다.

예니의 생활이 너무 불쌍하다.

 

245 예니는 물품을 대주는 사람들을 달래기 위해 거의 기적 같은 능력을 발휘해야 했다. 하지만 10월 마르크스가 집세와 아이들이 먹을 식량을 구할 돈, 곧 해산하게 될 아내의 병원비도 지불할 능력이 없게 되었을 때 엥겔스가 다니 나타났다.

구원자 엥겔스. 나는 예니의 상황에 짜증이 난다.

 

246 식구들은 아이들에게 별명을 지어주려 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좋아한 놀이였다. 그들은 각자 별명 하나씩을 갖고 있었다.

나도 해봐야겠다.

 

249 단도 없이 단칸방에서 일곱 식구를 부양하며 살아야 하는 마당에 어떻게 연구를 이끌어간단 말인가?

 

251 보나파르트는 이제 막 들어간 엘리제궁에서의 체류를 연장하려고 점점 더 독재

적인 방식으로 통치하려할 것이 분명하다고 마르크스는 생각했다.

 

252 런던에서 이 잡지를 사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는 늘 그래왔듯이 달느 망명자들을 끈질기게 공격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는 가족을 부양하고 자신의 사상을 알리기 위한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254 나는 세계 시민이고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일한다.

 

256 예니는 스코트랜드 출신의 어민 덕분에 독일어와 영어를 말할 줄 알았으므로 마르크스는 집에서는 아이들과 영어로 대화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는 네 살 또는 다섯 살부터 세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외우게 하였다.

 

258 이사온 지 겨우 10개월 뒤에 그는 집세를 물지 못해서 그들이 살고 있던 좁은 방에서 쫒겨나고 말았다. 침대, 세탁물, 옷가지, 장난감, 하다못해 아직 6개월 밖에 안되고 건강도 좋지 못한 아이의 요람까지 압류 중이었다.

집달리의 소동에 정신이 퍼뜩 든 약사, 빵집 주인, 푸줏간 주인, 우유가게 주인 등이 명세서를 들고 갑자기 몰려왔습니다. 결구 우리는 그들에게 진 외상을 갚으려고 물건들을 서둘러 팔아버렸습니다.” 그러면서 아주 침착하고 의연하게 혹시 잡지의 판매 수익이 있다면 가능한 한 빨리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엥겔스는 가장 급한 빚부터 갚아주고 나서 그 가족을 런던에서 가장 악명 높은 동네들 줄 하나인 소호의 딘 스트리트에 있는 지저분한 집으로 이사시켰다.   

힘들겠다. 심란하다. 

 

259 마르크스는 냉담해졌다. 그는 이제 설자 자신이 노동자 계급에 속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과 같은 상황을 견뎌내야 하며 자기 가족에게도 그런 상황을 감내하게 만들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빈곤의 결과에 대비라도 하듯 그는 자기 인생과 일에서 그 어떤 감상주의도 배격했다. 그는 결코 불평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코 남을 동정하지도 않았다. 그저 객관적으로 연구할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궁핌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의 궁핍에 대해서도 가능한한 무관심한 태도를 견지했다.

 

263 예니는 마르크스처럼 무신론자였도 사회주의자였다. 그녀는 마르크스가 투쟁을 계속하도록 돕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런던에서 게속 살기로 단단히 마음먹었다.

대단한 여자다.  

 

265 혁명은 경제 위기가 다시 생겨야만 일어날 거라는 얘기였다. “혁명은 현대적 생산력과 부르주아의 생산 형태들이 갈등을 일으키는 시기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혁명은 새로운 위기 이후에만 가능할 것이다. 혁명은 위기만큼이나 확실하다.”

269 예니가 다시 임신을 했다. 더불어 헬러네 데무트까지 임신을 했다. 그런데 데무트가 임신한 아이의 아버지 이름이 무엇인지 아무도 자백하게 만들 수 없었다.

짜증난다. 아내와 집사, 일부다처제, 수만은 삼월이, 사월이들의 역사

 

271 “자네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읽어야 할 책이 한 권이라도 있는 한 자네는 원고를 시작하지 못할 걸세.” 엥겔스는 마르크스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마르크스는 계속 읽기만 하고 여전히 글에 매진하지 못하고 있었다.

 

273 슈티버는 자기를 보낸 자의 환심을 사려는 목적으로 아주 부정적으로 묘사하였다.

마르크스는 사생활에서 아주 문란하고 시니컬하며 끔찍스런 가장이다. 그는 보헤미안 같은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몸을 씻거나 속옷을 갈아입는 일도 드물다. 그는 늘 취해 있다. 하루 종일 빈둥대고 있지만 종종 할 일이 잇으면 밤낮으로 그 일에 전념한다. 잠자고 일어나는 시간도 일정하지 않다. 가끔씩 밤을 꼬박 새고 다음날 오전에도 내내 자지 않고 있다가 옷을 다 입은 채로 12시경에 긴 소파에 누워서 자기 주위에 누가 왔다갔다 하는 지 알지 못하는 채로 저녁까지 자기도 한다. 그의 아파트에는 가구라고는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이 깨져 있고, 먼지가 쌓여 있으며, 온통 난장판이다. 거실 한 가운데는 테이블보 같은 것으로 덮여 있는 커다란 테이블이 있다. 그 위에 원고, , 신문, 아내의 바느질거리에서 나온 찢어진 천 조각, 이가 빠진 찻잔, 더러운 스푼, , 포크, 양초, 잉크병, 유리컵, 아피프, 담뱃재들이 한 테이블 위에 뒤죽박죽 놓여 있다.

마르크스의 집에 갈 때면 지하실처럼 석탄과 담배 연기가 눈을 덮쳐 오는데, 그러 상태는 그 어둠에 익숙해지고 그 연기를 통해 사물들이 구별되기 시작할 때까지 지속된다. 방문객이 오면 앉으라고 권하는데 의자는 닦여 있지도 않아서 잘못하면 바지를 버린다. 이 모든 것에 대해 마르크스나 그의 아내는 거북해하지 않는다.”

깍아내림이 심하네. 혁명가의 집에 대해 내가 가진 그림은 <나무를 심은 사람>의 오두막집이다. 그런 집에서 살고 싶다. 인제는 다산의 일상취미를 포함하여.    

 

275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엥겔스가 그 아이를 자기 아이로 인정하고 양육비를 대주기로 한 것이다. 카우츠키에 의하면 엥겔스가 임종 때 그 아이의 아버지는 마르크스라고 자기에게 고백했다는 것이다. 헬레나는 이 문제에 대해 평생동안 입을 다물었다.

 

276 만약 그 아이가 1850 9월 말에 잉태되었다면 당시 예니는 트리어에 있었으므로 마르크스의 아이라는 주장이 유력해진다. 그 아이가 10월 말에 잉태된 조사아일 경우에만 엥겔스가 아버지일 가능성이 있다. 그도 그때 런던에 있었으니까. 헬레나는 아이가 젖을 떼자 전에 하던 일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사생아 출산 풍문은 좁은 동네인 망명자들 사이에서 아주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285 마르크스는 망명이 장기전이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예니와 아이들이 트리어로 돌아가면 장관 오빠와 더불어 안락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마르크스가 이런 해결방법까지 생각했다는 것에 노발대발하며 그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마르크스는 더 많이 글을 쓰고, 더 많이 출간하고, 투쟁을 계속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이제부터 투쟁은 그녀의 것이기도 했다. 그녀는 그럴 태세가 되어 있었다. 마르크스가 포기하면 안된다. 그녀가 거기, 그의 곁에 있다. 그가 진정으로 그녀를 필요로 했을까? 그녀는 그것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왜 안 물었을까? 자신의 희생이 필요하냐고. 돌아가서 따로 살면 더 잘 살았을텐데

286 외투가 저당잡혀 집에서 나갈수조차 없다는 것이었다.

 

287 13개월된 프란체시크가 죽었다. 귀도가 죽은 지 18개월만에 같은 거리에서 마르크스는 자식의 죽음을 맞은 것읻. 마르크스는 죽은 아이의 장례식조차 치러줄 돈이 없어서 한동안 무진 애를 쓴 끝에 익명의 프랑스인 이웃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여전히 기품있고 소박했던 예니는 자신의 짧은 회상록에서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프란치스카는 세상에 태어났을 때 요람조차 없었고, 마지막 거처조차도 오랫동안 갖지 못했다.” 

비참하다. 갑갑하군.

 

288 마르크스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생전 처음으로 심각하게 병에 걸렸다.

 

288 예니는 마르크스를 여전히 신뢰하고 있었다. 마르크스의 상태가 안 좋아지면 그녀가 집을 관리하였다. 그녀는 마르크스의 상태가 좋을 때만 본래의 의기소침, 구토, 불안감을 다시 보이곤 했다.

 

290 마르크스는 자기가 겪은 인생의 쓴 맛(몇 달 사이에 두 아이가 죽은 것)때문에 더욱 냉담해져 있었다.

 

291 기사 한 편당 돈을 받기로 했으므로 이때부터 그는 쉬지 않고 온갖 주제에 대해 글을 썼다.

 

292 그는 부르주아지의 작업을 남이 해놓은 작업을 자기 것으로 만들면서 그것을 착복하는 권력이라고 정의하고 있었다.

 

296 그 일은 이제 1년에 150 리브르의 수입을 가져다 주었다. 예니가 마르크스와 함께 철저히 토론하고 나서 다시 베낀 다음에 보낸 기사들이다.

 

299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외국어는 삶을 위한 투쟁에서 무기였다.”고 한다. 마르크스는 찰스 디킨스가 <고된 시기>에서 그린 영국 노동자계급의 삶에 대한 끔찍한 묘사를 영어로 읽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노동자계급 도시의 원형인 코크타운에 대한 묘사에서 자신의 빈곤을 보게 되었다.

 

309 엘레아노르가 탄생한 지 석 달도 안 되었을 때 마르크스가 너무나도 사랑하여 뮤슈대령이라 별명을 부르던 에드가가 결핵을 여덟 살의 나이에 죽게 된다. 많은 사람들에게 무심한 사람을롤 보일 정도로 자기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마르크스가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는 이 아이와의 관계에서 자신이 아버지와 맺었던 관계를 다시 엮으며 굉장히 집착을 했고, 아이가 아픈 덧을 잊게 해주기 위해 햄릿의 긴 문장들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309 10년 후 예니는 그들이 런던을 떠나 바닷가에 가서 살았더라면 어쩌면 그 아들을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쓰고 있다. 죄책감은 그 부부 곁을 결코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아이들을 셋 씩이나 잃으면 부부 관계가 변할 거다. 두 사람의 사랑에 대한 너무나 큰 아픔이므로

 

311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게 된 마르크스는 생존을 위해 자신의 가사를 받아주는 신문이면 어디에든 글을 써야 했다. 

 

313 에드가의 죽음 때문에 극도의 슬픔에 빠져 있던 마르크스는 그렇게 해서 잉여가치이론을 구축하게 된다. 이 잉여가치가 권ㄹ겨과 투쟁의 동태성의 기초를 이루고 그것을이끌어간다는 것이다. 그는 이 잉여가치의 절대적 형태상대적 형태를 구분했고, ‘불변자본변동자본을 구분했다.

나는 잉여가치이론에 감동하는 게 아니라 저런 극심한 슬픔 속에서도 연구를 해나간데서 감동했다. 그런데 예니는 어떤 성과를 남긴 걸까? 예니가 트리어의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면 아이들은 살아있을 수 있지 않았을까? 먹고 살기 힘들어 뿔뿔이 흩어지는 가족도 많지 않나? 그런데 아이들이 죽어가게 두면서 까지 예니는 마르크스의 옆을 지키는 걸 우선순위로 둔 듯 하다.   

 

315 혁명은 불가능하고 자신으 고향집에서 멀리 떨어진 망명지의 누추한 집에서 3년 동안에 자식이 셋 씩이나 죽어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책임감을 느꼈다. 더 이상 희망도 없고, 글을 쓰거나 정치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예니에게 아이들과 함께 자기를 떠나 독일로 돌아가라고 독촉했다. 예니는 거부한다. 그는 아이들, 예니, 그리고 자기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는 일 외에 더 이상 할 일이 없었다.

무엇을 하면서 견뎌야 할까?

 

 

4장  인터내셔널의 스승 (1856.4~1864.12) 운명의 전환

 

 

우리가 어떤 개인을 판단할 때 그 개인이 스스로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에 따라서 판단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격변의 시대를 판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물질 생활의 모순들과 사회의 생산력들과 생산관계들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에 의해 그 의식이 설명되어야 한다. 

 

320 그는 점차 기분이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이번에도 죽음이 또는 죽음의 통지가 그를 도와서 속박에서 해방시켜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320 그는 젊은 시절의 어조를 되찾았고, 신랄함을 누그러들었다.

돈의 힘

 

323 예니는 혁명가와 결혼한 것 때문에 자신의 상속권을 박탈당할까봐 두려워한 나머지 베를린에 있는 이복오빠에게 편지를 보냈다.

너와 에드라르트가 상속인인 점에서 의심의 여지가 없단다. 혹시 일시적인 재정 문제가 생기게 되면 얼른 내게 편지하렴. 내가 필요한 것을 보내줄 테니까.”

이 편지는 그들의 관계가 결코 깨어진 적이 없음을 밝혀준다. 또한 예니가 지난 5년 동안 겪은 최악의 순간에 그토록 필요했던 도움을 자기 가족에게 부탁했다면 아마도 도움을 받을 수 있었으리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자존심 때문에 세 아이를 죽였군. 또는 아이보다 남편을 우선하는 것

 

325 마르크스가 월요일마다 산책하던 바로 그 동네였다.

나도 살고 싶은 동네를 산책해봐야겠다.

 

325 가족의 생계외에 다른 것도 생각할 수 있었다.

 

327 그 보고서들은 하원의 많은 의원들에게 배포되었지만 의원들은 이 보고서들을 표적으로만 사용하였다. 그 위에다 총을 쏘아서 총알이 통과한 페이지 수를 보고 무기의 충격력을 측정하였던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그 보고서들을 무게로 달아 팔아버리기까지 하였다. 마르크스는 그 보고서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다.

 

328 마르크스는 이제 거의 날마다 대영박물관의 새 도서실에 가서 늘 같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는 거기에서 루이 블랑과 마주치곤 했는데 루이 블랑은 그 기념비적인 저서 <프랑스 혁명사>를 쓰기 위해 작업하고 있었다.

 

330 “아프가니스탄이란 마치 실제적인 어떤 나라인 것 같지만 실은 아주 다양한 부족들과 국가들을 지칭하는 순수하게 시적인 용어이다. 아프가니스탄 국가란 존재하지 않는다.”

몇 마디 안되는 문장으로 그 나라에 대해 이보다 더 잘 표현한 사람이 오늘날까지 몇이나 될까?

 

335 마치 책을 출간하는 두려움이 그를 병들게 만들기라도 하는 듯이 집필하던 원고를 마치려 할 때마다 장벽이 갑자기 돌출했다. 오늘날의 정신과 의사라면 마르크스의 소외의식이 정신적인 것을 신체적인 것으로 만드는 작용을 유발시켰다고 말할 지도 모른다.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337 마르크스가 갖고 있던 우월감 콤플렉스나 모든 사람을 험담하는 기술은 그때 편집증적인 망상으로 바뀐다이런 정신적 위기의 원인은 사실상 다른 곳에 휠씬 더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연구들이 난관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그는 노동의 가치에 대한 자신의 이론과 경제의 실제적 자료들을 연결시키는데 성공하지 못했던 것이다.

연구하는 사람, 창작하는 사람의 곤란함.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이들의 신경증. 그 힘든 일을 왜?

 

341 원고 넘기는 것을 여전히 거부하면서도 어떤 생각들을 긁어모아서 풍부한 세부사항들을 남기고 싶어하는 이 모순적인 욕구, 이미 언급했듯이 한 작품이 자기를 벗어나게 하는 것, 그 작품이 자기 밖에 존재하도록 놔두는 것에 대한 그 두려움이 여전히 그에게 있었던 것이다.

 

344 사실 2주가 지났으나 여전히 아무것도 보내지 못했다. 출판사에 약속을 했던 라살은 염려가되어 어찌된 일인지 소식을 물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거의 두 달이 지난 11 12일에 마르크스는 비장한 사과 편지를 보냈다.   

, 대단하다. 나랑 매우 비슷하다. 마무리 못지으면서 끙끙 싸안고 있는 것 

 

348 에드가에게 쏟았던 열정을 세 살된 엘레아노르에게 옮겼다.

 

354 그 보잘 것 없는 원고가 이제 끝이 났네. 하지만 보내지를 못했네. 우송을 하고 보험을 들 파딩이 내게 없었기 때문이지. 그런데 보험은 꼭 들어야 하네. 왜냐하면 다른 복사본이 없거든. 그러니 월요일까지 약간의 돈을 보내주었으면 하네. 부탁하네.

 

355 이렇게까지 돈이 없으면서 돈에 대해 글을 쓴 사람이 결코 없을 것이네. 돈에 관해 쓴 작가들 대부분은 자기의 연구주제와 사이 좋게 살았었지.

 

358 그리고 때때로 엄습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증오의 표현이었다. 그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우월감의 이면의 이미지였다. 왜냐하면 그 자신또한 유태인인데다가 햇볕에 그을린 듯한 피부를 하고 있어서 자기 딸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상냥하게든 아니건 간에 무어인이라 불렀고, 그 당시 무수한 반유태주의적 공격들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361 이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장 플아수아 밀레는 <만종>을 그렸고, 최초의유전들이 펜실베니아에서 발견되었다.

이런 서술이 간간히 보인다. 위도와 경도, 세계 시계를 동시에 보는 듯한 시선. 자크 아탈리 특유의

 

365 마르크스는 소설 읽기를 좋아했다. 1860년에 그는 발자크의 <미지의 걸작>을 발견하는데 이 소설은 자기 그림에 덧칠과 수정을 하도 하는 바람에 그림을 끝내지도 못하고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내적 비전을 읽게 해주지도 못하는 어느 하가에 대한 이야기다.

 

368 예니가 천연두에 걸려 거의 죽을뻔한데다 얼굴이 완전히 흉하게 된 것이다우울증에 걸렸다.

얽었다고?

 

372 젊고 예쁜 사촌 나네트는 24세였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43세였다. ‘나의 친애하는 파샤나의 잔인한 유혹녀사이에 편지가 오간다. 한편 런던에서 예니는 항상 겪는 재정적 어려움과 싸우고 있었다. 그러면서  엥겔스에게서 자기 남편의 소식을 혹시 받았는지 물어볼 수 밖에 없었다.

 

374 아버지 무덤에 가서 묵념을 했다. 그런다음 다시 네덜란드로 가서 며칠을 보냈다. 자신에게 새로 생긴 질병인 옹을 아름다운 사촌 나네트가 돌봐주게 하면서

 

375 태어난 지 3개월만에 죽은 에드가의 환생을 엘레아노르에게서 보고 싶어하기라도 한 듯이 마르크스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녀가 남자애처럼 생겼다고 얘기하고, 아내가 이 아이를 낳았을 때 딸로 착각한 것이라고 얘기하기도 했다. 그런데 엘레아노르는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진정으로 사랑받지 못한 것에 대해 언젠가 대가를 치르게 하고야 만다.

자신의 모습으로 사랑받는 대가가 뭘까? 

 

382 내용은 비장하기 이를 데 없다.

내 궁핍을 자네에게 쏟아붓는다는 생각이 나를 괴롭히네. 하지만 어떡하겠는가/ 날마다 아내는 자식들과 함께 무덤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말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비릇되는 말할 수 없는 굴욕감 때문에 뭐라고 책망할 수 없네. 자네도 알다시피 빚을 청산하기 위해 50리브르는 써지만 아직도 반이상 남았네 가스 요금도 2리브르나 된다네. 런던에서 1페니도 없이 7주씩이나 보내야 하는 상황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네. 불행한 내 아이들 때문에 특히 서글프네. 왜냐하면 지금은 축제기간 아닌가

우울하겠다. 무능한 아버지라는 자괴감에 이 남자가 힘들겠다.

 

388 미국의 남북전쟁 때문에 자기 회사가 어려워진 것 말고도 그의 두 동거인 중 하나인 메리 번즈가 1863 1 6일에 맨체스터에서 그녀의 누이동생인 리지와 자기만 남겨놓고 죽은 것이다. 엥겔스는 공개적으로 이 두 자매와 함께 살고 있어서 상류사회에서는 스캔들이 되고 있었다. 그 때 마르크스는 그에게 평범한 조의의 말로 시작하더니 이어서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빚들과 자신의 절망적인 재정 상태에 대해 얘기하는 편지들을 보냈다!

엥겔스는 답장 속에서 자신은 충격 속에 빠져 있으며 그토록 가까운 친구로부터 좀 더 많은 위로를 기대했다고 표현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재정에 관한 충고들을 아낌없이 해주었고 돈도 얼른 보내주었다. 

위로부적격자 마르크스

 

394 라살이 런던을 다녀간 이후로 예니는 그에 대한 증오심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특히 그의 보호자인 그 붉은 모리 하츠펠트 부인데 대해 더욱 그랬다. 예니가 같은 편지에서 악의로 지적했듯이 하츠펠트 부인은 라살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다.

예니가 달라지는 모습을 관전한다.

 

395 예니는 결국 마르크스만큼 신랄한 비판자였고, 그녀의 문체 또한 마르크스의 문체 못지 않았다. 두 사람은 아직 45세도 안되었지만 30년 전부터 모든 점에서 함께 있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두 정신의 삼투작용때문이었다.

 

404 라살의 보좌관이었던 베른하르트 베커가 죽은 라살을 대신하여 임시로 노동자협회의 우두머리를 맡고 있는 마르크스에게 당수직을 제안했다.

 

410 나흘만에 교서와 정관이 준비되었다. 그는 16년 전에 공산당 선언을 종이에 적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주 쉽게 만들어냈다. 게다가 16년 전에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걸작이었다. 일부 분개한 전기작가들이나 그만큼 찬탄하는 전기작가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시티컬한 배후 조종자의 명인 같은 솜씨가 아니라 지적이고 정치적인 능란함의 모델이었다.

많은 공부, 많은 채움이 있어 뽑아낼 수 있는 거다.

 

414 suaviter in modo fortiter in re

형식은 부드럽게, 내용은 용감하게

    벨벳 장갑 속의 강철로 된 손이라 할까.

 

418 그 이야기의 길이는 몇 장으로 구성되었는지는 통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몇 킬로미터로 구성되었는지를 통해 알수 있다. 무어인이 얘기해준 이야기들 중에서 내가 가장아름답다고 여긴 것은 한스 뢰클이었다. 몇 달에 걸쳐 완성된 이야기였다. 불행하게도 시와 기지와 유머가 가득한 그 이야기들을 기록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한스 뢰클은 호프만 식의 일종의 마법사였는데 자안감 가게를 운영하였고, 언제나 엄하였다. 그의 가게에는 멋진 것들이 잔뜩 있었다. 나무 인형들, 거인들, 난장이들, 왕들, 여왕들, 노동자들, 주인들, 노아의 방주에 있는 동물들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동물들, 탁자들, 의자들, 수레들이 있었다. 하지만 한스는 마법사라 해도 악마나 푸줏간 주인에게 결코 빚을 갚을 수 없어서 악마에게 자기 장난감들을 팔아야만 했다. 그래서 각 모험은 언제나 그의 가게에서 끝을 맺는다. 어떤 모험들을 끔찍했고, 어떤 모험들은 아주 우스꽝스러웠다.”

 

419 여기에서 마법의 장난감 제조자는 당연히 카를 마크크스 자신이었다. 생존을 위해 자신의 사상을 아무에게나 내어주어야 했다. – 그에게는 소외의 가장 높은 단계의 형태 가장 훌륭한 개념들의 창안자인 바로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5장  자본의 사상가 (1865.1~1871.10) 대작을 마치다

 

 

노동자는 다른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상품이다. 그의 교환가치와 사용가치는 둘 다 노동의 양으로 측정된다는 특성을 보인다. 노동자의 교환가치는 그가 재생산하는데 드는 비용, 즉 그가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노동시간 수와 동등하다.

 

427 마르크스는 늦은 시간에 잠자리에 들면서도 아침이면 언제나 8시나 9시에 사이에 일어나 브랙커피를 마시고 신문들을 훑어본 뒤 자기 작업실로 건너가서 다시 새벽 두세시 까지 일하곤 했다. 일은 식사를 할 때만 중단되었고, 저녁에는 시간이 허락되는 한 햄프스테드 히드 족으로 산책을 나갔으며 낮 동안에 안락의자에서 한두 시간쯤 낮잠을 자곤 했다.

 

428 그의 뇌는 아직 항구에 정박해 있는 전함과도 같았다. 하지만 잔뜩 긴장하고 있으면서, 사상의 바다 위에서 그 어느 방향으로 언제든 출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430 그가 돈을 쓰는 것은 부르주아적 열정 때문이 아니라 회한 때문이었던 것이다. 자기 가족을 빈궁 속에서 허덕이게 하고, 세 아이를 죽게 만든 것에 대한 보상을 하기 위해서였다.   

 

431 그녀와 함께 (사촌 여동생 나네트) 질문놀이 고백이라는 것을 함께 즐기기도 했다두 사람의 관계를 명백히 드러내는 편지를 썼다. 이렇게 끝을 맺는다. “내 사랑하는 마법의 여인이여, 안영. 그리고 방황하고 있는 당신의 기사를 완전히 잊지는 마시오.”

오 갑자기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태평했을 예니를 대신하여 배신감이 드네. 그러나 결혼한 후에도 이런 인연들이 자주 오리라. 상대에게 헌신해야 하지만 의존하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437 에드가르트는 무위도식하며 지내고 있네. 하다못해 여자들에게조차 관심이 없어. 그의 성적 본능은 위로 옮겨간 것 같더군.

우울증?

 

437 진지하게 집필에 전념하력 마음먹을 때마다 간질환이나 유행성 감기가 찾아와서 그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그는 병적일 정도로 점점 더 완벽주의자가 되어 갔다.

 

441 돈 많은 사람은 노동력의 하루치 가치를 지불했고, 그하루 동안의 노동력, 즉 하루 전체의 노동의 사용은 그에게 속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시간은 교환의 진정한 척도이다.

 

443 잉여가치를 증대시키는 방법을 두 가지로 구분하였다. 첫 번째는 노동시간을 늘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노동자들의 탈진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다른 하나는 임금 노동자들이 생산에 필요한 노동의 양을 줄이는 것, 즉 재화 제조의 노동 생산성을 증대시키는 방법이다. 그것은 거의 무제한적이며 노동자들을 기계로 대치하는 과정을 거친다. 첫번째 방법은 노동자의 피로에 의해 제한되고, 두 번째 방법은 기술 진보 때문에 제한적이다. 첫번째는 더 많은 노동을 필요로 하고, 두 번째 방법은 더 많은 자본을 필요로 한다.

 

445 자신의 노동력 외에는 소유한 것이 없는 노동자들이 있다면 그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의 모든 생산수단을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생산수단의 수용의 역사는 억측이 아니다. 그것은 지워지지 않는 피와 불로 된 글자로 씌어진 인류 연대기 안에 기록되어 있다.

 

449 마르크스는 읽고 다시 읽으면서 책을 끝내지 못하였다. 그리고 거기에다 서문을 덧붙일 생각을 하였다. 그는 다시 쓰기도 하고, 미묘한 차이를 주며 변화시키기도 하고 보충하였다.

완벽주의의 함정

 

455 “나는 끊임없이 집안 걱정으로 일을 멈출 수 밖에 없어서 시간을 많이 빼앗기고 있네. 그래서 푸줏간 주인은 오늘 우리에게 고기를 주지 않았고, 이번 토요일에는 내가 쓸 종이도 다 떨어질 걸세

보르도로부터 폴의 부모가 4000리브르의 지참금을 약속하자 마르크스는 안심을 했고, 예니는 흥분해서 당신 같은 사고 방식과 사회적인 지위와 교양을 동시에 갖춘 사람은 참 드물어요라고 미래의 사위에게 말했다.

돈고생을 너무나 많이 했던 예니와 마르크스. 딸의 배우자 선택에서 돈을 배제하지 않았다. 그가 달았던 단서가 매우 흥미롭다.  

 

458 드디어 <자본론> 1권이 완성된 것이다. 마르크스는 그것을 곧 출간하게 될 것이다. 아주 중요한 순간이었다. 마르크스는 최초롤 사회주의를 과학적인 방식을 통해 소개하고 가치의 연이은 형태들에 대한 역사를 발표하게 되고, 부와 권력의 진정한 원천을 폭로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본론>이 하나의 문학작품, 일종의 빅토리아 시대 소설이나  탐정소설, 또는 고대 사회들에서 그랬던 것처럼 사물들이 살아 있도록 놔둠으로써 그 사물들에 생명을 부여하고 그것들을 만든 사람들의 생명물질 같은 것들에 관한 입문서이기도 하다는 것은 아마도 간파하지 못한 것 같다.

모든 책들이 이런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건 아니다.

 

459 현대산업은 아이들의 생산작업을 필요로 한다. 이 노동은 9세부터는 1 2시간으로 제한하고, 13세부터는 4시간, 16세부터는 6시간으로 제한해야 한다. 우리는 유년기와 사춘기에 있는 남녀 아이들을 사회적 생산의 거대한 운동에 협력하게 만드는 현대 산업의 경향을 일종의 발전으로 정당하고 이성적인 경향으로서 여기고 있다. 설사 자본의 지배가 그것을 가증스러운 것으로 만들어버릴지라도.

 

462 1월말 딸들에게 선물을 잔뜩 하는 바람에 다시 빚을 지고 외상을 진 동네 가게 주인들과 집주인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했다. 줄여가야 할 빚에 대한 부담이 다시 견딜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다시 심한 절종을 앓으면서 엥겔스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자신의 병이 자본주의에 책임이 있다는 문장도 있었다.

진짜 경제적으로 무능한 가장이다.

 

469 <자본론>은 잘 팔리지 않았다. ..이 책의 출간으로부터 그것을 쓰는 동안 피웠던 담배 값을 지불할 만한 정도의 돈도 얻어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그는 또 다시 병에 걸렸다. 10월에는 다시 돈이 부족해 엥겔스가 보증을 서서 100리브르를 빌려야 했다.

 

471 바쿠닌은 또 다른 러시아 무정부주의자 세르게이테차에프의 지지 아래에 명백히 무정부주의적인 프로그램을 기반으로 사회민주주의 국제연맹이라는 새로운 파당을 창설하여 다시 또 인터내셔널에 파고들어오려 시도했다. 그들의 프로그램은 무신론, 사유재산과 상속의 폐지, 남녀 어린이 모두를 위한 무상교육, 반동적인 모든 연맹의 거부, 자본에 대항하는 노동자들의 대의명분의 승리를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목표를 갖지 않을 수도 있는 정치 활동의 거부, 자유로운 농업연합과 산업연합의 총 단결

기득권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이들이 내세울 수 있는 목표 같다.

 

479 자본론 제1권 독일어판이 실패했는데도 그는 벌써 다음 권을 생각하고 있었다. 2권에서는 자본주의의 자기 파괴에 대한 전망을 자세히 다루고 싶어했다.

그 실패와 심란함을 겪으면서도 그는 2권을 계속 생각하고 써갔다. 타고났다. 신기하다.

 

482 그는 계속 연구하면서 고생도 하고 심한 불안에 사로잡히기도 하다가 완전히 탈진해버렸다. 그는 만성 기관지염과 폐궤양을 앓게 되었다. 의사들이 권하는 것처럼 햇빛이 많은 곳으로 치료하러 떠날 시간은 갖지 못한 채 대부분의 시간을 기침에 대한 치료책을 알아보고 자기 문제에 대한 해결책들을 생각하는데 보냈다. 

 

489 이번에도 글을 쓰지 않기 위한 온갖 구실이 동원되었다. 그것은 마르크스가 거의 30년 전부터 지겹도록 되풀이해오던 이야기들이었다.

그는 왜 그럴까? 나는 또 왜 그럴까?

 

490 엥겔스는 아버지 회사의 지분을 팔아버린 뒤 기업가로서의 생활을 포기하고 ㄹ런던에 와서 마르크스 일가가 사는 집 바로 옆인 리전츠 파크로드 122번지에 정착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때부터 매일 만나게 된다. 그들을 이제 더 이상 서신교환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그래서 그들 사이에 교환된 대화들에 대한 흔적들이 줄어들게 되었다.

옆 집에 집을 지어 같이 살고 싶은 친구

 

497 프로이센인들은 프랑스 수도를 폭격하였다. 암시장이 성행했다. 파리의 부자들은 말들을 먹어치운 다음 파리에 있는 식물원의 동물들까지도 먹어버렸고, 그 다음에는 고양이들로 만족해야 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쥐를 잡아먹었다고 했다. 

 

505 사실상 파리 사람들은 국가의 지렛대를 손에 쥐지 않은 채 민주주의적인 어떤 형식주의에만 그치고 말았다.

 

509 아르튀르 랭보 [파리 전쟁에 대한 송가]

 

5월이여 웬 정신나간 벗은 엉덩이들인가..터에르와 피카르는 에로스들이고 혈석의 유괴자들이다시뻘건 타박상 가운데 있는 그들

랭보도 이 시대 사람이구나.

 

511 요컨대 마르크스에게 있어 코뮌은 자신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라고 부르던 것의 가장 좋은 예증이었다.

 

512 이 정부는 다음 단게인 사회주의로 넘어가는 데 실패했다. 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제대로 관리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517 민주적이든 폭력적이든 권력 정복이 취해야 할 형태에 대해 기자가 묻자 마르크스는 대답했다. 혁명이란 민주적인 상황에서는 불필요하며 게다가 혁명은 노동자계급이 결정하는 것에 달려 있으며, 해당 국가의 노동자계급만을 얘기하는 것이라고

 

518 권력을 쟁취하는데 민주적인 길이 가능한 곳에서는 그 길을 택하라고 마르크스는 말하고 있다. 나중에 마르크스의 추종자들 중 아주 소수만이 이 얘기를 기억하게 된다.

 

523 그는 모든 비밀을 터놓는 상대인 자기 어머니가 있는 바르멘으로 편지 한 통을 보낸다.

나이 오십 가까이 된 남자가 어머니와 이런 관계라는게 이해가 안도니다. 모자가 지나치게 묶여있는 것 같다. 엥겔스가 결혼하지 않고 여러 여자를 번갈아 가면 살았던 이유가 아닐까? 가족세우기 참 재미있었다. 나의 관심사는 꿈, 가족세우기..어째서 이런식으로 자꾸 변방으로만 가는가?

마르크스는 아버지와 특별한 관계였다. 그는 아들 에드가와 그 부자관계를 재건하고자 하였다. 에드가는 죽었다. 막내딸을 대용으로 했다. 그러나 자신으로 사랑받는게 아닌 이런 사랑은 대가를 치뤘다. 막내딸은 내내 나이많은 남자, 유부남을 사랑하다, 결국 그가 자기 몰래 다른 여자와 결혼한 걸 알고 자살했다. 불쌍한 건 그 딸이다.  

반면 엥겔스는 아버지와 적대적이었고 어머니와의 친밀함은 눈에 뜨일 정도다.

그리고 그들은 평생 한 가족처럼 묶여 있었다. 이 두 사람의 관계가 흥미롭다.

 

  

6장 마지막 전쟁터 (1871.12~1883.3) 안락의자에 잠들다

 

 

그의 필생의 사명은 자본주의 사회와 그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국가제도들을 무너뜨려서 현대 프롤레타리아를 해방시키는 일에 헌신하는 것이었다. 프롤레타리아가 해방될 수 있는 조건들을 처음으로 정의내린 사람이 바로 카를 마르크스였다. 

 

534 새뮤얼 버틀러가 이상향을 그린 <산 저편에, 또는 에레혼>

마르크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가 평생 동안 이상주의적 사회주의를 과학적 사회주의로 대체하려 애썼다 할지라도 이상적인 사회의 묘사가 중요하다는 것은 의식하고 있었다.

미래에 대한 상상력의 힘

 

535 마르크스는 프랑스어판을 작업한다는 구실로 내용을 가감하고 다시 손보면서 제1권을 다시 쓰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이 망할 놈의 완벽주의. 마르크스 평전을 읽으면서 많이 와 닿은 것 (1) 예니와 엥겔스의 헌신성 (2) 마르크스의 완벽주의, 도지는 질병들 (3) 마르크스 예니 가족의 비참한 생활 (4) 자크 아탈리의 전방위적인 연결 (5) 저자의 의도이겠지만 마르크스가 오해된 면, 이용된 면이 많구나. 내가 가지고 있는 공산주의에 대한 나쁜 선입견은 실제 이론을 만든 마르크스가 아니라 그 이후 제도화되고, 권력을 가지면서 변질된 나치, 스탈린주의이겠구나.

 

537 저자의 정치적 신념이 외곬으로 사회주의적이며, 책 전체가 분명하게 사회주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개념에 모두가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아님이 확실하다. 더욱이 문체가 엄격하게 수학적이고 과학적이다. 검열위원회도 이 책에 대해 어떤 재검열도 필요없다고 단언했다. 러시아에서는 이 책을 읽게 되는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다. 더구나 이 책을 이해하는 사람은 더욱 적을 것이다.

어려워서 못읽는다는 말

 

542 그녀가 자신의 뿌리를 되찾기 위해 유태교를 주장하기 시작하는 바람에 확고한 무신론자였던 어머니를 난처하게 만들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무신론자였던 아버지는 죽은 아들 에드가를 생각게 하는 이 막내딸이 하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감동하였다.

곤란하다.

 

542 릿사가레는 엘레아노르보다 두 배나 나이가 많았다. ‘불타오르는 바스크인이라고 부르던 릿가레는 바람둥이라는 명성을 갖고 있었다.

 

544 에리그에게서 멀지 않는 곳에 사는 자기 누이 둘과 필립스 숙모, 인터내셔널의 투사가 되어 있는 사랑스런 사촌 나네트를 보러 갈 기회이기도 했을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예니도 마르크스와 동반하겠다고 한 것일테고.

참 뭐 이리 복잡하노? 예니는 질투심에 사로잡힌 헤라가 되는구나. 서글프구나. 혁명이론의 주창자이든 말든 여자 문제에 대해 깨끗하기는 어려운 듯

 

552 마르크스는 연극이 한때 예니센의 주의를 끌었던 것처럼 엘레아노르도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간섭이 많구나. 자기 자식에 대해서 어찌 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바로비터다. 

 

553 수없이 읽으면서 자기 논문 속의 데모크시토스처럼 경험적 관찰 속에서 자신의 이론의 진실을 찾았다. 그는 50권 이상의 공책( 3000페이지에 해당)을 다양한 주제들에 관한 기록들로 채웠다.

이게 다산선생이 했던 초서작업과 비슷한 듯 하다. 5유형?

 

555 다윈은 <인간과 동물의 감정표현> 이라는 책을 막 출간한 터였다. 마르크스는 다윈에게 보내는 증정본에다 충심의 숭배자라고 표현한 헌정사를 써 넣었다. 다윈은 그 책을 읽을만한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고 사과하면서 잘 받았다고 정중하게 편지를 보내왔다. 다윈에게 보낸 마르크스의 책은 104페이지까지만(전체 802페이지) 페이퍼 나이프로 잘려져 있는 것이 나중에 밝혀지게 된다. 결국 다윈은 마르크스가 352, 385, 386 페이지에서 세 차례 언급한 자신의 저서에 관한 부분을 보지 못한 것이다.

 

557 당시 마르크스는 또 다른 위기에 맞서야 했다엘레아노르는 부모의 허락도 없이 릿가레 백작과 약혼을 한 것이다. 자신의 분신처럼 여겼던 에드가가 죽은 후에는 다른 딸들보다 더 애지중지 했던 막내딸이 결국 자기를 벗어나고 있다는 생각과 애증을 동시에 느꼈다.  

 

561 마르크스는 엘레아노르가 릿가레와 결별하도록 설득하느라 애썼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프랑스인을 향한 불타오느는 사랑 사이에서 투시는 분노, 슬픔, 우울증을 반복해서 겪어야 했다.

예니의 딸, 그러나 불쌍한 딸.

 

562 3 23일 엘레아노르는 우울증에 빠져서 3주 전부터 방에만 틀어박혀 있다가 다시 아버지에게 릿사가레와의 약혼을 받아들여 달라고 애원하였다.

 

569 그는 이 교서에서 언급된 최초의 단계를 없애버렸는데 그것은 혁명에 의해 권력을 탈취하는 단계였다. 왜냐하면 이제 독일에서는 좌파가 민주적으로 요직을 얻을 수도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570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에게 있어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개인의 자유를 문제삼지 않고, 국가의 탄압적인 기관들을 사라지게 해야 하는 것이었다. 차후에 레닌이 이 개념에 부여한 의미와는 차이가 있다. 마르크스가 생각하기에는 파리 코뮌만이 그러한 경험을 시도했지만 자신을 잘 방어할 줄도 몰랐고, 생산도구들을 노동자들이 이용하게 해주지도 못하였다.

 

572 dixi et salavi animam meam

나는 말했다. 그리고 내 영혼을 구원했다.

마르크스가 마무리 지은 라틴어 표현. 이게 내가 <천일간의 자기사랑>, 누구도 책이 되리라 생각하지 않은 책에 대해 가진 모토가 되리라. 그런데 그런 것이 필요할까? 굳이 이렇게 욕심, 고집을 부릴 필요가 있을까? 12명의 캐릭터를 뽑아낸다는 마음으로 하면 되는 거지. 그런데 내가 소설가나 동화작가가 아니라는 게 내내 마음에 걸려 시작도 못하고 있다. 그런데 마르크스평전에서 대단히 거슬리는 마르크스의 완벽주의가 나를 비춰준다. 일단 좌르륵 써서 해야 한다.

 

574 1875 6, 마르크스는 점점 더 엘레아노르를 돌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녀는 더 이상 릿사가레를 보지 않겠다고 약속한 이래로 거식증과 우울증에 빠져서 자기 아버지와 같은 질병으로 고생하고 있었고, 아버지처럼 그 병들을 담배로 달래고 있었다. 엥겔스는 여전히 온갖 청구서들을 해결해 주고 있었다.

 

575 그는 딸의 그런 모습에서 현자들의 신을 숭배했던 아버지 하인리히의 유신론을 다시 보게 되었다. 결국 엘레아노르는 마르크스가 에드가에게서 찾고 싶어했던 모든 특성들을 다 갖고 있었던 것이다. 엘레아노르는 정말로 마르크스가 갖고 싶었던 아들과 같았다. 

 

 

576 그는 딸이 좋아하고 그녀를 여전히 충심으로 사랑하는 듯이 보이는 그 남자와 딸이 결혼할 수도 있다고 체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예니는 그 프랑스 남자에 대한 생각을 절대로 바꾸려 하지 않았다. 마르크스와 예니는 의견이 서로 다른 경우가 거의 없었는데 이 문제가 드문 경우 중의 하나였다.

예니의 극심한 반대는 자기 결혼 생활에 대한 어떤 반증일수도 있다.

 

585 어떤 저서를 마쳐야 할 때마다 늘 그랬던 것처럼 혹시 읽지 않은 책이 있는 건 아닐까 또는 어떤 중요한 자료를 참조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그로 하여금 끝없는 연구에 빠지게 만들었다.

 

594 마르크스는 사실상 저서를 집필하던 초기부터 노동을 증오했고, 자본주의의 틀을 넘어서 노동을 소외의 주요 원인으로 만들었다. 그는 노동의 권리나 정규직을 자기 것으로 삼은 적이 결코 없었다.

그렇지 그게 그의 맹점이지.

 

595 한편 엘레아노르의 우울증은 심각해져만 가서 생명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녀는 자살에 대해 점점 더 자주 얘기했다. 마르크스는 불안에 사로잡혀 예니에게 8년 전부터 딸을 기다리고 있는 랏사가레와의 결혼을 허락하자고 설득했다. 그런데 정작 이번에는 엘레아노르가 아주 모순적이게도 우물쭈물하였다. 1880 7 4일 릿사가레는 사면을 이용하여 파리로 돌아갔다. 그와 엘레아노르의 관계는 끝나버린 것이었다.

그를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사랑한 건가? 아버지 대용으로?

 

595 마르크스는 다윈의 생각들이 사회적인 분석에 적용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렇지만 살아있는 종들의 변화로 귀결되는 자연도태설, 사회적인 종들의 변화로 귀결되는 계급투쟁이론, 물질 상태의 변화로 귀결되는 열역학 이론 사이에는 수많은 공통점이 있다.

 

597 마르크스라는 인물자체가 신격화되기 시작했다. 엥겔스는 그 해에 마르크스의 사진을 1200장이나 뽑게 해서 본인으로 하여금 인사와 형제애를 보내며,’라고 서명하게 했다.

 

598 러시아에서만 자본주의를 거치는 우회 과정이 어쩌면 필요없을 지도 모른다는 내용이었다. 실은 그 반대를 늘 주장해왔지만 말이다.

 

601 수학에 푹 빠져드는 방법으로만 그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 고통의 시기에 미적분법에 관한 저서를 썼다.

 

602 마르크스는 하이게이트 묘지의 신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 즉 무신론자들의 영역에서 치러지는 장례식에 참석하기에는 몸이 너무나 아팠다. 그래서 이번에도 장례식을 놓치게 된다. 동생 아버지, 장인, 어머니의 장례식들에 못 갔던 것처럼 말이다. 몇몇 친지들만이 예니를 묘지까지 동반했다. 엥겔스가 추도사를 했다.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사회적 분신같다. 생활비를 대어주고 장례식 추도사를 읽어주고, 그리고 사생아 아들에게 양육비를 대어주는.

 

602 그녀는 마르크스를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고, 극도로 헐벗은 날들에도 선택했던 것들에 대해 결코 후회한 적이 없다. (추도사)

 

607 ‘나는 가족생활, 아이들 소리, 매크로적인 세계보다 훨씬 흥미로운 마이크로적인 이 작은 세계의 모든 것을 휴식이라고 부르네

매크로적인 세계보다 훨씬 흥미로운 자식들 셋을 포함하여 그 모든 것을 세계에 관한 연구와 활동에 희생시킨 사람으로서 그 얼마나 비장한 말인가.

 

609 법정에서 게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법 앞에서 평등을 준 것은 혁명이었으며, 보통선거를 주었던 것도 또 다른 혁명이었고, 경제영역에 공화적인 형태를 부여해준 것도 또 하나의 혁명이었다. 생산양식에서의 평등, 작업장에서의 투표, 경제영역에서의 공화제를 얻기 위해서 새로운 혁명에 의지하는 나는 논리적일 수 밖에 없다.”

혁명의 정의가 다양하다. 흥미롭다. 나에게 혁명은?

 

610 예니센은 다섯 아이를 남겨놓고 죽는다. 엥겔스는 예니의 장례식 때 그랬던 것처럼 마르크스의 맏딸 장례식에도 추도사를 하게 된다.

엥겔스가 돋보인다.

 

610 3 14일 카를 마르크스는 결핵으로 자신의 안락의자에서 숨을 거둔다. 엘레아노르가 그 자리에 있었고, 엘겔스는 잠시 방을 비운 때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처음 만난 것은 40년 전이었다. 그 이후로 상대편 없이는 단 하루도 지낸 적이 없었다. 최소한 편지를 교환하면서라도 말이다.

늙은 엥겔스는 자기 친구의 호주머니에서 그의 아버지, 아내, 맏딸의 사진들을 꺼냈다. 48시간 뒤 엥겔스는 그 사진들을 친구의 관 속에 넣어주었다.

마르크스는 하이게이트 묘지의 자기 아내 곁에 묻혔다. 열 한 명의 사람들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마지막 남은 딸들인 엘레아노르와 라우라, 두 사위들(이제 막 감옥에서 아논 폴 라파르그와 아들 하나가 죽어가고 있는 샤를 롱게). 헬레나 데무트, 그리고 여섯 명의 충실한 친구들. 엥겔스 추도사를 읽었다.

 

612 그는 시베리아 광산부터 캘리포니아에 이르기까지, 우럽에서 미국에서 수백만 혁명 동지들이 사랑하고 존경하고 눈물 흘리는 가운데 죽었습니다. 그에게 많은 반대파가 있기는 했어도 개인적인 적은 없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그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연년세세 길이길이 남아있을 것입니다.

 

 

7장 세계의 정신 다른 이름으로 불리워지다.

 

우리는 인간을 모든 것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 이것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미래의 세대들이야말로추방된 카를 마르크스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를 통해 우리는 세계의 정신에게로 되돌아가고, ‘인간은 기대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메시지를 얻을 것이다.   

 

620 마르크스주의에 의한 권력 장악을 촉발시켜준 정치상황은 러시아와 프로이센에서 벌어진 세계제1차대전 이었다. 두 나라 모두 헤겔과 마르크스, 국가 주조의 계획 경제와 국제주의적인 사회죽의를 탈선한 계승자들이었다. 바로 거기에서 20세기의 끔찍한 타락 두 가지가 생겨난다. 나치주의와 스탈린 주의

이게 마르크스주의와 다른 것을 나는 몰랐다.

 

628 그는 정신의 힘을 믿는 유물론자였으며, 경제는 역사의 기반이며 행동이 이론보다 우선한다고 생각하는 철학자였다. 그리고 인간을 신뢰하는 비관론자였다. 곧 다른 사람들이 그의 이론을 왜곡시켜 태도를 흉내내려 애쓰면서 이론을 실행에 옮기게 된다.

 

634 당시 영국 좌파에서는 마르크스로부터 영감을 얻은 세 줄기가 있었다. 사회민주주의 운동, 사회주의 운동, 바비우스협회가 그것이다. 혁명없는 마르크스 사상이 사회에 침투되는 것을 권장한 파비우스협회가 20년 후 오늘날의 영국 노동당을 탄생하게 하였다.

 

639 여전히 우울증에 빠져 있던 엘레아노르는 자기 동반자를 이혼시키는 데 성공하지 못하여 자살기도를 하기도 했다.

 

644 마르크스가 죽은 이후에도 내가 일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대부분 집에 있는 그녀의 존재가 가져다 준 햇빛과 후원 덕분이었다.

헬레나 데무트에 대해 엥겔스가 쓴 것

 

645 헬레나 데무트를 잃게 된 것을 엥겔스로서는 아주 고통스러워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얼마 안 가서 루이제 카우츠키가 집을 관리하기로 결정했다.

집사에 대한 의존. 근데 왜 결혼안했을까?

 

645 루이제의 임무는 카우츠키나 베른슈타인의 임무와 같은 것이었다.

 

655 마르크스의 딸들 모두 늙은 장군을 보러 왔다. 그러나 엥겔스가 1895 8 5일에 죽을 때 그녀들은 모두 런던에 있었다.  

 

656 당은 마르크스의 딸들에게는 고맙다고 말하는 수고는 하지 않은 채 루이제에게만 고맙다고 하였다. 엘레아노르는 이런 사실에  충격을 받았으나 너무 늦어버렸다. 이미 헌납한 것이니까

 

659 마르크스주의는 유럽 전역에서 좌파의 이론으로 자리잡았다. 어디서나 도식화되고 왜곡되고 조금씩 단순화된 흑백놀리로 축소되어버렸다. 권력은 석학의 의혹들을 용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661 1898 6 23일 엘레아노르는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된다. 그녀가 15년 전부터 함께 살아왔고, 오랜 전부터 병에 걸려 있어 보살피고 있던 동반자 에드워드 에이블링이 2년 전에 가짜 이름으로 다른 여자와 비밀결혼을 했다는 사실을. 그는 엘레아노르가 자살할까봐 두려워서 차마 그녀 곁을 떠나지 못했던 것이다. 마르크스의 귀여운 막내딸 투시, 죽은 아들 에드가의 분신으로 여겼기에 애지중지하였던 엘레아노르, 결국 평생동안 자주 자살을 얘기했던 그녀가 드디어 행동에 옮겼다. 그리고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았다.

 

671 네 아이들은 처형인 라우라 라파르그가 주로 돌보며 키웠다.

 

676 1911 11 26일 라우라가 자살했다. 65였고 남편도 아내를 따라 같은 행위를 한 것이었다. ..라우라는 자기 아버지의 서류들을 독일 사회민주당에 상속하였다. 레닌이 그들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조사를 읊었다.

참 나 뭐 이렇노 

 

680 이 글에서 그는 모든 것을 왜곡했다. 레닌 자신이 준비하고 있는 혁명의 방향으로 자본론의저자를 끌어당겨 놓은 풍자화라고 할 수 있다.

 

693 로자 룩셈부르크는 통찰력 있는 글에서 다름과 같이 표현했다….그녀도 마르크스처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민주주의를 적용하는 방식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699 경제를 위한 길은 정해졌다. 그것은 바로 산업의 공유화였다. 레닌은 그때 사회주의란 소비에트+전기화라고 말하였다. 경제학자 프레오브라젠스키는 국가자본주의라는 형태 아래 폐허가 된 국가의 재건을 위해 원시사회적 축적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마르크스를 읽었다면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은 슬라브 농민 공동체로부터 영감을 얻었어야 했을텐데 말이다.

 

703 이론적으로 모두 대담하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여러 경제학자들이 마르크스의 이론들을 글자 그대로 적용하려고 했다.

 

711 실제로는 레닌의 부관 중 하나인 그루지야 출신 스탈린이 레닌이 죽자 당총서기장으로 승진된 다음 자신의 모든 경쟁자들을 하나씩 제거함으로써 총서기장을 국가의 가장 중요한 자리로 만들어버렸다.

 

726 그 후 전쟁은 터졌고 더불어 이성의 파괴라는 긴 과정의 귀결인 유태인 대학살 쇼아가 자행되었ㄷ. 그것은 계급투쟁에 비추어 볼 때 어느 누구도 예견할 수 없던 일이었다.

 

732 해빙이 표면화되자 마르크스는 그의 이름으로 자행된 끔찍한 일들의 책임자로 여겨지면서 간접적인 피해자가 되었다.

이것의 예들이 소련, 나치, 중국 공산당을 배경으로 나오고 있는데 나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이 요소를 이해하는 게 중요한 것 같은데 워낙 기존 지식이 부족했고, 책의 나중으로 오면서 시간에 쫒겼다.

   

740 새로운 것의 횡포, 마르크스가 그토록 많이 얘기했던 소비에 대한 숭배는 상품들이 무한정 쇄신되는 스펙터클에 현혹되는 가운데 혁명의 도래는 어쩌면 영원히 지체될 것이다. 혁명 또한 세게의 다른 부분에 있는 몇몇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제공되는 스펙터클이 될 것이다.

 

인간이 그렇게 사회관계들의 상품화를 끝가지 밀어부치고 자신의 모든 자원들을 사용해버리고 나면, 자본주의는 그것이 인류를 파괴하지 않는 한 세계적인 사회주의로 개방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시장이 박애정신에 자리르 내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것을 상상하려면 마르크스가 세계적인 사회주의를 꿈꾸며 이미 언급했던 원칙들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무상성, 생산하는 기술의 공동소유와 무상이용이 그 원칙들이다.

 

취해야할 세계 국가가 없으므로 그것이 전 지구적 차원의 권력 행사를 거칠 수는 없을 테지만 마르크스가 그토록 귀히 여긴 혁명적 진보라는 세계의 정신속에서 과도기는 거칠 수 있을 것이다. 책임의식과 무상성으로 향하는 과정을 통해. 모든 인간은 세계의 시민이 될 것이고 세계는 마침내 인간을 위한 것으로 형성될 것이다.

뭔소린지 모르지만 자크 아탈리가 마르크스를 통해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인듯 하여 베껴둔다.

 

  741 그의 주된 메시지를 듣게 된다. 인간은 기대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메시지를.

 

옮긴이의 글

 

742 이 책은 작년에 프랑스에서 첫 출간되었을 때 인문 서적 분야에서 한참 동안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 있었다. 우리나라와 달리 프랑스는 정권을 우파가 잡든 좌파가 잡든 사회주의적 사회 안전망을 갖추고 있는 나라이므로 이들에게 마르크스에 관한 서적의 출간이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745 이 책은 한 세기 도안 세계를 관통한 정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오늘날 이기적 자본주의와 왜곡된 자유주의 때문에 위태롭게 기울어 있는 우리 사회를 보며 우려를 하는 이들에게 신선한 자극으로 다가올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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