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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6일 15시 34분 등록

<한국신화 새롭게 쓰기> 임금복 지음, 318, 모시는사람들, 2012

 

1.   저자에 대하여

 

임금복(林今福)

 

1960년 계룡산 신도안에서 출생했으며, 1996년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1997년 문학평론가로 데뷔했다. 2002년 기초학문프로그램 학진프로젝트로 지원을 받았고, 그동안 대전대, 명지대, 서경대, 천안대, 협성대 강사 및 성신여대 인문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을 역임했다. 2005년 저서 <’칠조어론깊이 읽기>가 대한민국학술원이 선정한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되었다. 현재는 성신여대 학부와 국제학생지원팀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

<한국 현대소설의 죽음의식 연구> (1996)

<박상륭 소설 연구> (1998)

<현대여성소설의 페미니즘 정신사> (2000)

<’죽음의 한 연구깊이 읽기> (2000))

<’칠조어론깊이 읽기>(2004)

<박상륭 어휘사전 (), ()> (2004)

<박상륭 소설의 창작 원류> (2004)

<동학 문학과 예술 그리고 철학> (2004>

<한국 신화 새롭게 쓰기> (2012)

 

 

위의 글은 왼날개에 새겨있는 소개다. 1960년생이면, 한번씩 연도를 고쳐 쓰게 되는 2013 1 3일 현재 우리 나이로 53,4세다. 특이한 이름 한자(금복: 지금 행복하라는 뜻?)를 보고서 여자인지 남자인지 단박에는 모르겠다. 1996년에 문학박사 학위를 땄으면 학부를 졸업한 후 곧바로 석사 박사 공부를 계속하셨나보다. 저서 목록을 보니 그녀는 박상륭이라는 이에게 매진했구나. 이 책 <한국 신화 새롭게 쓰기>는 주로 여성작가들의 작품을 살펴보고 있고 저서 목록에 페미니즘이 들어가는 것이 있다. 박상륭과 페미니즘 두 가지의 관심사가 짐작된다. 저서들이 2000년과 2004년에 몰려 있다가 한참 뜸을 두고 2012년에 나오고 있다. 2000년대에 서른이 넘어가는 젊은 학자였겠다. 그리고 여성이라면 아이를 낳아 기르느라 바빴을 것도 같다.

 

궁금한 걸 메모했다.

a.     계룡산 신도안이 어딜까?

b. 학위 논문의 제목은 뭘까? 그 논문들에 이 학자의 관심사가 표현될 것 같다.

              c. 문학평론가로 데뷔한다는 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을 보내서 당선된다는 뜻?

              d. 여자일까? 남자일까? 이건 머리말 읽다 쉬 나왔다. 저자는 여자다.

              e. 처음 들어보는 이름 박상륭씨는 뭐 하는 사람일까?

 

a.저자 임금복씨의 고향 계룡산 신도안은 병화, 삼재도 피해간다는 십승지지라고 소문난 곳이다. 조선 태조가 수도로 천도할까 말까 고려했을 만한 풍수지리 명당이다. 지기가 뛰어나다. 한국 신흥종교, 민중신앙의 집성지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태어나 자랐다는 게 저자의 관심사에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겠나?

 

b.

석사학위논문 : <이청준 소설 연구 소설가가 등장하는 작품을 중심으로> (1987)

박사학위논문 : <한국현대소설의 죽음의식 연구 김동리,박상륭,이청준의 작품을 중심으로>(1996)

 

c.1997 12 <창조문학> 신인문학상 문학평론 데뷔

 

e. 박상륭은 소설가다. 1940년 전북 장수에서 태어났다. 서라벌예대를 졸업, 경희대 정외과에서 수학했다. 1963년 성경의 유다 모티프를 도전적으로 재해석한 단편 <아겔다마>사상계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69년에 캐나다로 이민했다. 1973 <죽음의 한 연구>를 발표한 후 20여년간 <칠조어론> 집필에 전념했다. 인간존재의 문제를 죽음과 재생의 측면에서 탐사해왔다. 박상륭의 문학은 동서고금의 신화, 종교, 철학을 아우르는 심오하고 방대한 사유체계와 우주적 상상력, 독보적 문체로 다. 장편소설 <죽음의 한 연구><칠조어론>, 소설집 <열명길><아겔다마><감의 열매를 매단 나무는 뿌리로 꿈을 꾼다><평심>, 산문집 <산해기> 등을 펴냈다.

저자 임금복씨는 박사학위 논문을 그의 죽음과 재생의식에 대해 다루는 걸로 시작해서 박상륭에집중했다. <박상륭 소설 연구> (1998 , <’죽음의 한 연구깊이 읽기> (2000), <’칠조어론깊이 읽기>(2004), <박상륭 어휘사전 (), ()> (2004), <박상륭 소설의 창작 원류> (2004) 깊이 읽고, 어휘사전을 만들어내고, 그의 소설 창작에 대해 책을 썼다. 이렇게 생기셨다. 미남이시네.

  박상륭.jpg

 

 

쓸모 있거나 생산적이지는 않은 호기심 : 유년에 해당하는 초등학교 6학년때까지는 어떻게 성장했고, 왜 국문과를 갔고, 왜 공부를 평생의 길로 정했으며, 쉰이 넘도록 공부를 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어떤 의미이고, 그녀가 관심 가진 것은 무엇이며, 앞으로는 어찌 살아갈건지, 어떤 작가를 좋아하는 지, 쓰끼다시 같이 잡다구리한 것들이다. 이런 건 포털 사이트에 없더라. 그리 유명한 연구자는 아닌가 보다 하고 만다.

 

저자에 대한 개인적 평가

 

저자가 소설가 박상륭에 대해 집중하는 모습이 멋지다. 2002년에 우연히 시작한 연구프로젝트를 같이 하면서 논문 하나를 끝낸 뒤에도 이 주제로 혼자 계속해서 연구를 해 나간 결과물로서 이 책을 10년만에 펴낸 모습도 멋지다. 관심사에 대해 들이파서 끝장을 내시는 듯하다. ‘끊임없이 자신 속에 있는 인류원형의 무의식성, 여성연구자로서 정체성 등을 탐색하고 지내왔던 여정을 지천명의 나이에 생각해보니 그러한 모든 것들이 자기 구원의 길을 걸어왔던 것이 아닌가라는 말이 인상 깊다. 가장 큰 소감은 '만나서 많이 반갑습니다.' 한 마디로 요악할 수 있다.   

 

 

2.   내가 저자라면

 

1)   뼈대 및 목차

 

이 책은 국문학 논문 모음집이다. 연구비를 받으면서 2002년에 참여했던 팀프로젝트 고전 문학의 현대적 계승과 장르적 변용연구가 공동 연구자들이 논문 한 편씩을 내면서 끝이 난 후에도 저자가 멈춤 없이 연구해간 해당 주제의 논문을 모아 묶어냈다. 2004년부터 2007년까지 4년간 연구한 결과물이다. 전체 4부는 주제별로 몇 개의 논문들을 모았다. 한국인의 집단무의식에 있는 원형들을 드러낸다고 보는 신화가 현대에 새로 창작된 모습, 특히 여성작가의 작품을 살펴본다. 1부는 바리공주, 2부는 단군과 주몽, 3부는 처용, 4부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황진이를 새로 쓴 작품을 분석한 것이다. 각각 소논문의 형식을 따르고 있는 걸로 보인다. 각 논문은 구조가 강건하고 촘촘하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논문 부제는 괄호안에 있다.   

 

1부 바리공주 새로 쓰기

고전문학의 현대적 계승과 장르적 변용 (박상륭의 소설 <칠조어론>을 중심으로)

여성작가가 새로 쓴 바리공주연구 (송경아,장진영,김선우의 바리를 중심으로)

 

2부 단군과 주몽 새로 쓰기

여성작가가 재창작한 단군신화연구 (김성희,김승희,양귀자의 작품을 중심으로)

단군신화속의 호랑이의미의 부활 창조 (박진규의 수상한 식모들)

새로 쓴 주몽신화연구 (서정주,송수권,윤금초,이광수,송하춘 작품을 중심으로)

 

3부 처용 새로 쓰기

처용가 관련 현대소설의 유형과 의미 (방기환,윤후명,윤대녕,이인성,박상륭 소설을 중심으로)

액자구조로 다시 쓴 처용가의 의미 (신상성,김소진,구광본 소설을 중심으로)

 

4부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황진이 새로 쓰기

여성작가가 새로 쓴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연구 (김혜순,문정희,윤정선 작품을 중심으로)

반신데렐라의 공주들 (여성작가 김지원,박라연,최은옥의 평강공주연구)

새로쓴 황진이연구 (이태준,박종화,최인호,윤정선의 황진이를 중심으로)

 

부록 - 원전자료 해제 / 참고문헌

<바리공주><구천,구지가,풍요,변강쇠가><단군신화><주몽신화><처용가><호동왕자와 낙랑공주><황진이>

 

나는 논문 특유의 촘촘한 설계도에 매료되었다. 논리적으로, 실증적으로 전개해 나가야 하는 학자특유의 것인지도 모른다. 그 중 내 관심을 끈 몇 개를 보면 다음과 같다. 평생 짚풀이나 대나무를 잘라 이런 저런 것을 만들어온 이의 야물딱진 손에서 잘 갈무리된 수공예 바구니처럼 튼튼하고 이쁘다.

 

여성작가가 새로 쓴 바리공주연구

1.     바리공주의 의미와 새로 쓴 바리공주

2.     여성작가가 새로 쓴 바리공주

1)     인류학적 생산 모신과 새 인류의 탄생

2)     세상의 황폐와 이중 희생양, 광명의 세상 찾기

3)     생명수 구하기와 사랑의 힘

3.     수난의 여성 영웅사의 새로운 해석

 

2)   장점 및 보완점

 

(1)  다른 책을 읽어보고 싶게 만든다.

 

새로운 독서소비를 유발하는 광고전단, 삐끼 같은 책이다. 그녀가 아름다운 문장을 적재적소에 인용해서 일거다. 집구경을 다니는 이, 그 바닥에서 뼈가 굵은 신용있는 거간꾼을 따라 갔더니 고아한 집에 기품 있으면서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본때있고 귀태나는 아씨의 치맛자락이 보일락말락, 눈길을 뗄 수 없게 한다. 문학평론가 교수님은 감질나게 맛뵈기만 해주던 원문이 실린 작품집들의 사진을 전체 4부로 구성된 앞면에 간지로 써서 도배하는 섬세한 배려를 하고 있다. 딸랑 한 줄로 끄트머리 참고문헌으로 밝히는 것보다 실제성이 부여되는 디스플레이, 시식, 꼬드김 방식이다. 작품과 작가에 대한 저자의 충심과 연모의 정이 적합한 배율로 가미되어 고소한 기름지짐내를 단단히 풍긴다.

 

내 관심사는 여성 쪽에 있었다. 남성작가들이 많은 창작을 했던 처용신화, 황진이 이야기에는 그닥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건 남성 작가들에게 더 많은 영감을 주는 듯 하다. 여성이 길 떠나는 이야기인 바리데기와 단군신화속 웅녀와 호녀 이야기가 재창작된 이야기가 내 관심사와 통하는 걸로 보인다. 뒤의 황진이는 서양의 헬레나가 담당하던 역할을 한반도에서 맡았던 건 아닐까 싶으다. 단군신화를 재창작한 작품으로 이 저자가 분석하고 있는 것 중에는 곰이 마늘, 쑥을 먹으며 동굴을 견디는 동안 튀어나간 호랑이가 우리 민족 여성들 안에서 가부장제를 살면서 인정받기 위해 버려두었던 여성성의 어떤 부분을 담당한다고 해석하는게 흥미로왔다. 그걸 어머니에 대응하는 딸, 기혼여성에 대응하는 미혼여성으로, 또 박진규 소설 수상한 식모들에서 대리 모성의 담당자 호랑아낙으로 보는 게 신선했다. 내용은 한결같이 호랑이를 재조명해야 한다는 거였다. 오죽하면 양귀자씨는 호랑이 젖꼭지에서 젖 한 모금 얻어먹고싶다고 했을까?

 

특히 읽고 싶어진 책 정리. 시인 김선우 동화 <바리공주>, 죽은 이를 위한 오구굿을 희곡 형식으로 재창작한 장진영 희곡 <바리데기>,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이야기를 언뜻, 의붓아들을 사랑했다 모함해 쫒아내는 계모를 다룬 그리스비극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글로 쓴 윤정선 희곡 <호동>을 찾아 읽어야겠다. 단군신화를 웅녀의 딸과 호랑이 두껍을 쓴 여자 두 꼭지로 나눠서 보려고 했던 나는 단군신화를 재창작한 소설들은 다 읽어봐도 좋을 것 같다. 그래서 내가 궁금히 여겼던 것들이 이 소설가들에게서 다 다뤄졌다면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양귀자의 <호랑이 젖꼭지>가 가장 비스무리한 듯 하지만 웅녀인 어머니는 견디기만 하다가 이미 죽었다. 이왕이면 웅녀가 웅녀의 정체성을 지니면서 곰이기 때문에 가능한 야생을 웅녀의 삶에 들여와 향유하면서 살고, 호랑이이면서도 식모 호랑아낙으로 패배한 듯 사는 게 아니라 야수성이 살아 있으면서도 제도권에서 아무런 기득권을 갖지 못한 방식이 아닌 대안적인 삶을 살고 있는 캐릭터가 있나 궁금하구나.

 

(2)  학술 논문이면서 부드러운 글이 주는 견고함, 안정감

 

학자가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을 모아서 펴낸 책이다. 논문의 형식을 그대로 둔 건지, 조금만 손질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형식적인 것이 있어서 가독성을 떨어뜨리지는 않았다. 뼈대가 단단한 집에 잘 구운 벽돌로 지은 집같다. 단단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뒷 쪽 부록에는 각주, 참고문헌과 함께 신화 원문이 실려있다. 믿을 수 있는 출판사, 번역이 좋은 판본의 삼국유사, 삼국사기 몇 쪽 이런 식이다. 널리 알려진 원래 신화를 재창작한 것이든, 분석한 것이든 그런 걸 갖고 있는 책들은 이렇게 원문을 따로 싣는 방식이 좋은 것 같다. 내가 신화에 대한 책을 정말로 쓰게 된다면 신화 원문을 잘 실어놓아야겠다. 이게 독서를 할 때 미리 쟁여둔 인용문의 용처가 되리라.  

 

(3)  집성촌 발견, 또는 동호회 벙개의 감격과 후유증

 

겁을 때빵 많이 집어먹었다. 아주 배가 터지겠다. 또 사래 들리도록 놀랬다. 책을 읽어보니 신화를 새로 쓴 이들은 다 작가여서다. 시인, 소설가, 희곡작가. 김선우씨는 바리공주 동화를 2003년에 썼지만 데뷔는 1990년대 언제였다. 내가 연구원 졸업을 위해 쓰겠다고 했던 <나를 찾아온 12인의 여자들> 책에 대한 오프수업 발표는 다음주로 다가왔다. 그날 4명의 현직 출판사 편집인들이 온다고 했다. 뭔가 발표를 해야 한다. 멘탈 붕괴 상태다. 이런 주제가 골똘하다고 말을 했다만 뭘로 내가 그 주제를 다룰 역량이 있다는 걸 보여줄 수 있을까? 그리고 저런 촘촘한 얼개도 짜지 못한 상태에서 두루뭉수리하게시리 뭘 할 수 있을까? 개인대학원 과정인 변경연 연구원 졸업논문인 첫 책 이전에 신촌문예 동화나 소설에 응모라도 해서 붙어야 하나? 시인, 소설가, 희곡작가들의 수련생 시절을 지금부터 밟아야 하는 건가? 국문학이나 교사 학비 보조가 있는 교육대학원 국어교육과 석사학위 논문을 따든 저 주제의 책을 다룰 자격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인인증서를 받은 다음에 시작해야 하나? 그들에게 말고, 나에게 먼저 보여주어야 하는데 그게 없다. 탱탱 없다. 그런데 이 자격에 대한 안팎의 시비, 엄살과 호들갑을 토끼 간처럼 홀라당 보자기에 싸서 궁쳐두기로 하면 신화 주제를 재창작한 작가들이 매우 많다는 것, 그리고 저자가 말하고 있는 대로 이런 신화는 오래고 깊은 우물이라 다른 창작자와 독자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 많이많이 반가왔다. 나만 몰랐지 이런 관심사를 가진 이들이 이렇게나 많다니. 내 편 생긴 듯 기뻤다. 읽어볼 작가와 책들의 목록이 생긴 것도 낯선 도시에 와서 찾아볼 친척집 주소를 쥔 듯 뿌듯하다. 거기 가면 나를 반기며 먹던 밥상에 숟가락 얹어 밥 한끼씩 주고 이불을 빤다, 장을 본다 빡센 손님맞이 준비없이 머리냄새 나는 식구 베개랑 집안 여자 아무나 추리닝 내주며 하룻밤씩 재워줄 것 같다.  

 

이 책은 나한테 질문을 돌직구로 던진다. “그대가 쓰려는 책은 어떤 식으로 신화를 다루려는 걸까? 선택해야 한다. 신화 자체를 새로 쓸 건지, 아니면 신화를 가지고 일상을 읽어내려고 하는 건지?”

김선우씨의 <바리공주>는 동화로 버리데기 이야기를 새로 썼다. 그녀는 서천서역국으로 아버지를 살리는 약을 얻으러 가서 동자를 만나 아이를 낳아주고 몇 년 살았던 것을 사랑의 힘이 모든 것을 치유한다고 해석하고 있다. 또 바리가 낳은 아이에 여자 아이도 있다는 식으로 이 신화 자체에다 덧붙였다. 다른 경우 <단군신화>에 모티브를 두고 곰과 호랑이에 대한 해석을 달리한 양귀자의 소설 <호랑이 젖꼭지>는 현대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주인공은 학위를 가지고 살아가는 여자이고 여동생은 무용가다. 이혼만 안했다 뿐, 딸들을 하나씩 나눠 기르며, 애저녁에 갈라져 딴 여자와 같이 살았던 남편이 돌아오길 기다리다 죽은 어머니 탈상에 즈음해서 동물원에 시베리아호랑이를 보러간 이야기다. 내가 하려고 하는 게 두 가지 중 어떤 작업일까? 그리고 더 중요한 질문은 내가 재미나게, 잘 할 수 있는 작업은 어느 것일까?

 

(4)  신화에 대한 소개가 보완되면 좋겠다.  

 

신화와 설화는 어떻게 다를까? 나는 단군신화, 주몽신화, 버리데기신화,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신화, 처용신화로 모든 옛 이야기에 신화접미사 또는 성씨가 들어간 게 눈에 설었다. 나중에는 역사적인 실존인물(?이라고 할라니 자신이 없어진다) 황진이까지 들어갔다. 낙랑공주와 주몽도 신화와 버무려졌지만 구체적인 역사성을 지니는 실존인물일까? 궁금해졌다. 저자는 국문학자다. 그녀는 명확히 알고 있었을 신화, 설화, 민담의 차이에 대해 구별해주었으면 좋았겠다. 또는 신화에 대한 소개가 좀 들어가면 어땠을까? 이 책은 신화의 개념이나 특징에 대해 독자들이 상식적으로 다 알고 있으리라 전제하고 본론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새로 쓸 소논문이 있었다면 신화 자체에 대한 것이리라. 그것이 1~4부와는 관련없이 앞 쪽 어디에 포함되어 있었으면 더 좋았겠다. 근데 신화는 국문학의 영역이 아니라 종교학의 영역인가? 캠벨이 비교종교학자였던 걸 보면. 그럼 종교학 책 쪽에서 찾아보아야 하나? 신화라는 말은 어느 학문 영역에서든 쓰고 있을 테니 딱 그만큼의 소개나 정리였어도 좋았을 것 같다.       

 

 

3)   감동적인 장절

 

(1)   우연히 자신에게 왔던 기회에서 일생의 길을 짐작하고, 그 길을 혼자서 꾸준히 걸어갔음을 알려주는 머리말에서의 저자의 고백이 찡하다. 나도 그런 길을 찾고 싶고, 이 사람처럼 자분자분 걸어가고 싶다. 또한 공부가 그녀에게 구원의 길이었듯 나의 길도 그러하길!  

 

6 학진프로젝트 고전문학의 현대적 계승과 장르적 변용 연구라는 주제 연구에 동참하자는 요청을 받게 되었다. 1년 동안 프로젝트팀과 함께 고전이 재창작된 작품의 자료 발굴과 재창작된 텍스트 스터디를 1년 동안 쉬지 않고 하면서 한국문학사에서 거론되는 작가들과 작품들에 고전문학 작품이 많이 수용되고 재창작되고 있음을 재발견하게 된다. 그때 놀랄만한 감동을 받았다. 무의식에 침잠되어 있던 의식이 잠깨워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한 마디로 평생 연구할 주제를 다 찾은 느낌이 들었다.

일면식도 없지만 저자가 이런 순간을 맞이했음을 축하하고 싶다.

8 2002 기초학문 프로젝트 주제였던 고전문학의 현대적 계승과 장르적 변용 연구는 공동 참여자 모두 각자 논문 한 편씩 발표하는 것으로 그쳤었다. 필자는 그 이후 연속적으로 고전문학이 재창작된 현대문학에 관심을 가졌던 한 성과와 관심의 결과물 묶음집을 개인적으로 정리하고 싶었다. 시간이 지났지만 박사께도 감사드린다.

그 계기는 한 번, 1년이었지만 이 학자는 같은 주제에 집중해서 홀로 시간을 더 보냈나보다. 아름답다. 시작한 지 10년 후에 나온 책이라고 10년을 들였다고 볼 수는 없겠다. 위에서 3년동안의 연구라 했으니. 그렇지만 이 주제가 그녀에게는 평생의 탐구주제와 관련이 있나보다. 나는 너무도 쉽게(우연히, 거저) 찾아냈네. 감사하다.   

 

7 인생의 여러 갈림길에서 20대 중반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하는 것으로 삶의 길을 걸어왔던 지난 시간들을 생각해보면 벌써 25년 이상이나 공부를 한다는 자의식이 심리적 저층에 주요 생각으로 자리잡고 살아왔다. 끊임없이 자신 속에 있는 인류원형의 무의식성, 여성연구자로서 정체성 등을 탐색하고 지내왔던 여정을 지천명의 나이에 생각해보니 그러한 모든 것들이 자기 구원의 길을 걸어왔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된다.

내가 쓰려는 책도 결국은 나의 구원의 길일거다. 나를 구원하기 위해 책을 써야겠다.

 

(2)   버림받은 딸 버리데기는 가부장제를 치유하는 신약을 가지고 돌아오다, 단군신화에서 실종되었던 호랑이가 다시 돌아오자 모성 이미지만 허용되었던 한국여성이 전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버리데기와 단군신화는 새로 읽을 구석이 많은 신화인 듯 하다.  

 

28 박상륭은 바리공주가 갖고 있는 구원의 에너지는 수난 속에서 생성될 수 있다는 것, 바리공주의 경우처럼 버려진 버리데기로부터 치유의 약물이 생성된다는 주제를 수용하고 있다. 이는 남성 지배가 조장한 수난과 질병이 남성으로서는 해결할 가망이 없다는 인식을 반영한 것으로 작가는 여성을 생명 회생의 주체자로 설정하고 있다.

이 구절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러니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나는 딸은 가부장제에서 상처입은 아버지 자신과 가부장제 자체를 치유할 약을 가지고 돌아오는 거로구나. 어떻게 그녀의 여정에서 그런 대안이 나오는걸까? 

 

35 (바리데기가) 부모의 치병을 위해 약을 구하러 떠나고 모험하는 서사구조는 영웅의 일생과 궤를 같이 한다. 

 

100 웅녀는 한국산 가부장 이데올로기가 이상화시킨 모성으로서의 이미지로 자신의 정체성을 단지 모성에만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여성 육체에 대한 문화적 지배는 웅녀를 모성 지상주의자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기에 한국인에게 여성다움은 곰과 같은 수동성이나 기원하는 자세, 인내, 자기 희생, 모성성 같은 것으로 범주화되어 전해오게 된 것이다. 자신이 원초적으로 가지고 있던 아니무스(여성의 남성적 특징)로써의 호랑이성을 추방하고 제도권 안에 어머니로서 위치성만을 수용했던 것이다.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산물로써의 젠더를 획득한 웅녀는 여성의 자기 소외의 거울이며 여성 억압의 거울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여자가 되지 못한 호랑이를 불러와 해석을 한다면, 웅녀에 집중하여 해석할 때와는 달리 곰과 호랑이를 두 개의 다른 동물로 해석하지 않고 한 사람의 전체성 속에 공존해 있는 곰성호랑이성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한국산 가부장 이데올로기가 이상화시킨 모성으로써의 이미지를 탈피하여 자신이 원초적으로 가지고 있던 아니무스상을 재위치시켜, 자기 자신의 전체성(곰성+호랑이성)을 부활시킬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101 그리하여 가부장제의 제품으로써의 문화적 웅녀가 아닌 그 이전의 양성성 상태의 자연 여자를 회복시킴으로써 잃어버린 아니무스를 되찾아 원래적이고 전체적인 자기 자신이 되는 일로 매진하는 것이다. 웅녀를 뛰어넘어 웅녀 이전의 웅녀+호랑이의 자연 여자를 회복하는 것은 문화적 젠더 아이덴티티가 소외되었었지만 자신의 원초적 본능을 찾아가는 고고심리학적 탐색이 될 것이다.

 

105 농촌이 무너지고, 가족이 해체되고, 성 역할까지 모호해지는 21세기 초입에 식모를 호출하는 것보다 더 수상한 것은 박진규의 발상법, 즉 전복적인 상상력이다. 곰과 함께 쑥과 마늘을 들고 동굴로 들어갔다가 참지 못하고 뛰쳐나온 호랑이에 대해서는 그동안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단군시절의 호랑이는 참을성이 없는 불민한 족속의 상징이었다. 박진규는 우리의 신화적 연대기의 발원지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 물줄기를 바꿔버린 것이며, 모든 것을 뒤엎에 버린 것이다. 박진규는 신화와 역사는 다시 씌어져야 한다고 강변하고 있다.   

재미있다. 새롭게 창조하고 있다. 새로운 시선으로 어둠 속에 있던 옛 것을 환하게 조명한다. 살려낸다. 멋진 일이다. 

 

105 박진규는 한국 근대화 여정에서 상류층이나 중류층의 삶을 지향해 오는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하류 여성 구성원들의 삶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 특히 그것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나 비판적 리얼리즘이 아닌 신화를 가미한 전복적 글쓰기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이런 식의 글쓰기이기 때문에 더 재미있고, 부담없을 수 있다. 코미디처럼.

 

 

(3)   신화를 완전히 새로 창작한 이야기

 

버리데기의 후일담을 쓴 소설가 박상륭씨 & 단군신화를 웅녀신화로 보고 호랑이의 후일담으로서의 호녀신화를 쓴 소설가 박진규씨

 

28 박상륭은 <칠조어론>에서 버리데기를 수용하되, 후임담적 상상력을 덧붙인다.

l  비리데기의 부모는 오구를 받은 판관이 되고, 비리데기는 서왕세계의 불성문으로 보내달라고 한다.

l  가난한 비리데기는 아들 7형제에게서 다시 버림받는다.

l  비리데기는 죽음길에 임박해 장가를 못 들인 아들 일곱을 불러 자신의 궁리대로 해주면 눈을 감겠다고 한다.

l  아들들에게 약물 약초가 있는 고향인 서천서역국으로 가서 살라고 말한다.

l  비리데기가 죽은 후 화장을 하고 뼈를 추려 7묶음을 만들어 한 묶음씩 갖고 재는 큰 아들이 간직하고 왔던 길로 돌아가라고 한다. 그렇지 않고 뼈와 재를 버리면 다시 비리데기와 같은 신세가 된다고 한다.

l  미륵님은 불쌍한 어린 계집의 갈린 살과 뼈를 자신의 침과 말씀으로 반죽하여 법향 태우는 향로를 만들었기에 미륵님전에 있던 향을 태우는 향로였다고 하고, 7형제가 바로 향을 태우는 일곱 색깔의 불과 일곱 향기라 한다.

l  자식들이 길을 잃었을 때, 어미뼈의 흰 것과 검은 것을 간직한 막내둥이의 가슴에서 절하며 기다리면, 흰뼈와 검은뼈가 흰새와 검은 새가 되어 방향을 알려줄 것이며, 어미를 원망할 때 검은 수건을 희게 씻어주라고 한다.

l  여섯째 앞가슴의 푸른뼈와 누른뼈를 꺼내 절하면  푸른새와 누른새가 길을 알려 줄 것이며, 더 걷지 못할 때 그곳을 시영산이라 알고 어미 태운 재를 아랫목에 모시고 살면 그곳이 고향이 될 것이라 한다.

l  일을 하기 싫을 때가 오면 아기 심어주는 병이 생긴 것이며, 그때 7형제는 목욕재개하고 약산의 약토에 어머니 태운 재를 섞어 어머니를 재로 빚고 7형제들은 흙각씨에게 49번 침을 뱉고 세 가지 약꽃으로 흙각씨 목과 가슴과 아랫도리에 한 송이씩 꽂아주고, 7형제는 번갈아 7저녁씩 흙각씨 곁에서 자고 49일간을 보내면 그 병이 낫는 효력이 있으며, 49일 동안 어머니 생각만 한다면 어머니는 새로 살아난다고 한다.

l  어머니는 7형제의 각씨이기에 나중에 만나자며 간다 하고 숨이 넘어가고 몸이 식거든 방에 7형제 말고 누구도 들이지 말며, 7형제 어머니를 목욕시키며 어머니의 몸 잘 보아두라고 하며, ‘미륵님 소첩을 버리지 말라고 부탁하며 어머니는 불설문으로 가겠다고 말한다.

이 후일담 상상력이 재미있다. 특히 흰뼈 검은뼈, 푸른뼈 누른뼈에 절한다는 것, 아기 심어주는 병이 생겨서 흙각씨를 빚어서 새로 살아난다는 것은 어머니를 가진 채 새로운 여자와 만나 사는 걸 이런 식으로 말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모든 아들들은 색씨 안에서 어머니를 품으므로.

나는 이런 알듯말듯한 이야기가 재미 있다.  꾸며낸 아이들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고 그 안에 깊은 진실이 담긴 이야기, 이왕이면 마그마가 들뜷는 지구중심으로 향하는 깊은 샘물에 수원을 대고 있는 이야기들. 그건 복잡하거나 어렵거나 주불주불하지 않을 거다.  

 

101 호랑이 이야기의 후일담으로써의 - 호녀신화라 칭할 수 있는 소설 속에 구현된 가상신화

 

수상한 식모들의 첫 이야기는 단군신화와 맞물린다. 곰과 호랑이가 환웅에게 벌어 굴에서 마늘과 쑥을 먹으며 버틴 이야기는 누구나 알고 있다. 곰은 약속한 날짜를 다 채우고 결국 아름다운 여인이 되어 고조선의 시조 단군을 낳았다. 하지만 호랑이는 마늘과 쑥만 먹는 나날을 견디지 못해 결국 굴 밖으로 뛰쳐나오고 만다. 수상한 식모들의 시조는 바로 이 호랑이다.

호랑이는 굴을 빠져나오자 마자 온 산을 뛰어다니며 온갖 동물들을 다 포식한다. 토끼, 다람쥐, 고라니 등등, 과식한 탓에 배가 땡땡하게 찬 호랑이는 지독한 갈증을 느끼지만 주위에는 작은 샘물 하나 보이지가 않는다. 더구나 갑작스런 포식으로 위장은 쓰려오고, 호랑이는 그만 정신을 잃고 언덕 아래로 데굴데굴 구르고 만다. 너무나 운이 없게도 언덕은 가시나무 천지였다. 호랑이의 몸뚱이에는 온통 가시가 박히고 사지는 자갈에 긁혀 온몸이 상처투성이로 변한다.

호랑이가 비틀대며 당도한 곳은 다행히 샘가였다. 호랑이는 몸을 일으켜 목을 축이려고 샘 가까이에 다가갔다. 그러나 샘에 얼굴을 비춰보곤 자기 몰골에 경악해서 뒤로 물러서고 만다. 이어 밀려오는 후회. 지금쯤 곰은 아름다운 여인으로 태어났겠지. 그리고 환웅과 결혼했겠지? 이렇게 짐승의 숨만 쉬고 있는 나는 뭐람 (중략)

여자는 호랑이 가죽을 여며 옷으로 만들어 입고 산을 내려갔다. 사람들은 그 여자가 입은 옷을 보고는 범녀라고 불렀다. 범녀는 사람들을 이끌고 다니며 사냥하는 법과 노래하는 법을 가르쳤다. 춤을 가르쳐주기도 했으며, 산에서 자라는 약초가 무엇인지 알려주기도 했다. 또 버려진 여자아이들을 산으로 데려가 자기 수양딸로 키우기도 했다. 사람들은 범녀를 따랐으나 알 수 없는 모함을 당해 범녀는 마을에는 다시 접근하지 못하고 산에서만 머무는 운명에 처했다.

왜 범녀가 수상한 식모들의 시조가 되었을까? 나는 단군신화의 의미에 관한 몇 가지 연구 자료를 살펴보았다. 제일 설득력 있는 해석은 곰 토템 부족과 호랑이 토템 부족 중 전자가 지배권을 얻게 되었다는 가설이었다. 그렇다면 범녀는 지배당한 호랑의 부족의 리더쯤 되지 않았을까? 그녀는 그 후에도 지배집단에 항거하는 어떤 자세를 보여줌으로써 집단에서 축출당하고 산으로 내쫒겼던 것은 아닐까? 집단에 속하지 못하고 배회하고 소외된 여인들의 삶, 그곳에서 우리 수상한 식모들의 씨앗도 발아하였으리라.

이후 조선시대 말엽까지 그녀들은 범녀, 혹은 호랑아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수상한 식모들이란 명칭은 일제시대가 되어서야 생긴 명칭이었다. (박진규, 수상한 식모든, 30~33) 

, 재미있다.

 

(4)   동양과 서양, 그리스와 한국이 내통했을 리도 없는데 비슷한 이야기가 자생적으로 자라나온 걸 본다. 윤정선의 희곡 <호등>과 프랑스 작가 라신의 <페드라>는 공통적으로 아버지의 젊은 계모가 의붓아들에게 사랑을 품었다가 모함하는 내용이다. 그럼 이건 이 생명력 질긴 이야기 넝쿨들을 길러올리는 공통된 씨앗이 사람의 심성 안에 들어있다는 뜻이 아닐까? 피를 나눈 사이가 아니되 가족으로 묶인 남녀 사이에 있을 수 있는 남녀상열지사 또는 사랑의 감정, 사건들이나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일테고. 양쪽 중 어느 하나가 동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난 것은 폭력의 형태를 띠고, 두 사람이 동의한 것은 도덕이나 제도에서 인정은 받지 못하는 것일테고.(의붓딸아들과 계모, 계부/ 처제와 형부 / 시동생, 또는 시숙과 남동생의 처 / 며느리,사위와 시부모 또는 처부모)

 

241 왕비 : 그렇다! 공주! 나는 용서할 수가 없다. 절대로 용서할 수가 없다. 네가 만약 아름다운 여인이라면 왕자를 호린 그 아름다움을 용서할 수 없다. 네가 만약 못난 여인이라면 나의 사랑을 차지한 그 뻔뻔스러움을 용서할 수 없다. 네가 가지고 있는 그 충만한 젊음을 용서할 수 없다. 내가 숨어서밖에는 사랑할 수 없는 나의 님을 떳떳이 차지할 수 있음을 용서할 수 없다. 내가 벌하리라. 이 고구려의 왕비가 너를 벌하리라.

아아! 공주의 살내음에 아직도 취해 있을 왕자의 눈에, 질투로, 절망으로, 괴로움으로, 탄 재가 되어 버린 나의 몰골은 어떻게 보일까? 숨은 사랑에 질식하여 시들어간 나의 꽃다운 젊음은 어디에 가서 되찾는단 말인가? 가슴 찢어지는 고통을 털어놓을 곳 조차 없는! (윤정선, ‘호동’ 39-40)

원문이 더 아름답다.

 

248 낙랑공주의 자의식은 무도한 사랑의 소유자인 자신은 괴물이라며, 사랑에 빠지고 왕자의 사랑을 얻는데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이미 다 부수어 버린 지 오래였다고 자인한다. 그 결과 인륜과 도리까지 저버린 자신은 이제 호동에 대한 하나의 양심만 있을 뿐이라 한다. 더군다나 공주는 왕자에게도 사랑으로 괴물이 되어 버린 흉악한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가 의문을 던진다.

미노스왕을 사랑해서 아버지의 보라색 머리카락을 훔쳐 들고 갔던 공주가 있었지

메데이아도 사랑하는 이아손이 탈출하는 걸 돕기 위해 남동생을 죽여 토막내어 던지며 갔다.

아리아드네는 제 형제를 (비록 괴물에 인신공양을 받았지만) 죽이도록 실타래를 주어 건네었다.

그녀들이 버림받았던 이유를 낙랑공주가 말하고 있는 듯 하다.

 

(5)   왕이 될 수 없는 공주, 남편을 키워서 왕을 만들든, 왕재를 알아보고 협력자가 되든 이런 간접적인 권력 획득의 방법은 공주님, 또는 대비마마인 여성들의 차차차선, 또는 차차차악쯤은 되는 것 같다. 부모의 꿈을 자식의 미래에 덧입히는 것과 비슷한 매커니즘으로 남편을 이용하는 일은 대가가 있다. 그게 바로 그녀들이 버림받게 하는 요인이 되는 듯 하다.

 

264 공주는 자신의 정체성을 문화적 자궁을 가진 존재이며 모성으로서 거구의 아이를 출산시킬 힘을 가진 자로 보았다. 또 공주는 온달과의 관계성에서 온달을 경외감을 가진 남자로 보면서도 자신을 우주적 어머니로 인식하고 있다. (

독특한 시선이다. 그런데 나도 이렇게 생각하는 면이 있다. 남자에 대한 간섭이 많다. 이래라 저래라 한다. 아버지에 대해서도, 남동생들에 대해서도, 그에 대해서도. 이게 혹시 평강공주가 되려는 건 아닌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게 내가 되고 싶어서 그런건지, 아니면 정말로 누군가를 기를 양모나 코치 기질이 있어서 그런건지. 더러운 대리충족욕구, 오지랖인지

 

266 6막은 온달의 소리로 고백되고 있다. 온달의 소리는 공주를 욕심많은 자신의 종달새라 칭한다. 공주와 온달 중 누가 주인을 섬기는 충직한 시종인가? 온달은 전쟁터란 사내들의 게임 장소이며 자신의 빈털터리 시절이 즐거웠다고 한다. 그런데 공주가 자신에게 와서 밥과 옷, 지혜, 부와 권력을 주었고, 자신은 공주의 사랑을 잃을까 두려워 자신의 어머니처럼 생각했다고 온달의 소리로 들려온다. 공주는 자신의 주인이 되었고, 또 자신은 공주의 아들이자 충직한 하인으로 있는 동안 힘을 가진 사내로 변신해 왔다고 소리로 고백한다. 온달은 그 세월 동안 자신에게 남근의 힘이 생기는 것을 발견했으나 즐겁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더욱이 공주를 여자로 본다는 것 역시 참을 수 없는 모욕감, 죄책감을 일으킨다고 얘기한다. 

이 희곡에서도 온달은 평강공주가 부담스러웠구나. 스스로 될 수 없어서 대항마를 키우는 것이니. 그러니 평강공주는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했을 뿐 온달을 위해서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럼 신데렐라는 행복했을까?

 

257 여기서 주목할 점은 왕위 계승의 문제를 딸 편강공주가 하는 것이 아니고 사위가 대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작가 김지원이 고구려 시대 여성 정치인인 여왕이 등장하지 못한 시대의 한계를 반영하며, 대신 남성왕을 대리 출세 방식으로 드러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정작 왕이 된 언달은 그동안 공주와의 관계를 남편의 시각에서 아내를 보며 완전무결한 아내여서 한 번도 편안해 본 일이 없다.’고 인간적인 고백을 한다.

 

258 한 남자로서의 삶을 의식하는 언달과 여왕이 될 수 없지만 자아 성취 욕구를 남성을 통해 대리로 드러내는 편강공주 사이의 건널 수 없는 의식의 격차라 볼 수 있다. 여성 편강에게 콤플렉스를 느낀 언달은 주체적인 강한 여성과 결별하려 하고, 자신과 같은 처지의 여성에 관심을 갖는다. 즉 언달은 깊은 산속의 맑은 처녀 하나를 데려오라고 명하는데 이는 일반 사내들의 여성에 대한 기득권적 방식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다.

중요한 부분인 듯. 메데이아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이용하는) 남자를 사랑한 실수를 했다. 평강공주는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대신 할 아바타로서 온달을 필요로 했다. 만약 평강공주와 아라곤 원정대의 그 남자(아 이름을 자꾸 까먹는다. 이아손!)가 만났다면 정말 좋은 정치적 협상을 했겠다. 그런데 메데이아가 정확히 필요로 했던 것은 왕후의 자리는 아니었다. 또 왕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후의 자리에 머물려던 것도, 왕의 어머니가 되려는 것도 아니었다. 메데이아는 그럴 만한 힘이 있었지만 권력 자체에는 욕심이 적었던 것 같다. 메데이아에 대한 책을 읽어보자. 소설이 있던데   

 

(6)   이 책님이 다음에 읽을 책 목록을 추천하시다.

 

73 단군신화를 산문 장르(소설, 동화, 희곡-연극,뮤지컬)로 재창작한 작품들의 구체적인 의미망은 다음과 같이 대별할 수 있다. 알레고기 기법으로 보여준 인간 사회의 비극 (정한숙의 소설 <웅녀의 후예>), 고행의 통과제의나 메타포로 차용 (박상륭의 소설 <죽음의 한 연구> <칠조어론>, 전경린의 소설 <새는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 어른을 위한 동화이자 신화 세계와 현실 세계를 이중교차기법으로 드러냄 (이호림의 동화 <웅녀야 웅녀야>), 환인-환웅-단군 삼대로 구성한 이야기 (구상의 시나리오 <단군>) 등이다.

+ 윤정선 희곡 <호동>, 김선우 동화 <바리공주>, 김성희 희곡 <웅녀>, 김승희<호랑이젖꼭지>, 양귀자 <곰 이야기> 박진규 <수상한 식모들> 중 살짝 더 끌리는 것

 

 

3.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책머리에

 

6 성신여대 국문과 고전문학 전공 심치열교수에 의해 학진프로젝트 고전문학의 현대적 계승과 장르적 변용 연구라는 주제 연구에 동참하자는 요청을 받게 되었다. 1년 동안 프로젝트팀과 함께 고전이 재창작된 작품의 자료 발굴과 재창작된 텍스트 스터디를 1년 동안 쉬지 않고 하면서 한국문학사에서 거론되는 작가들과 작품들에 고전문학 작품이 많이 수용되고 재창작되고 있음을 재발견하게 된다. 그때 놀랄만한 감동을 받았다. 무의식에 침잠되어 있던 의식이 잠깨워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한 마디로 평생 연구할 주제를 다 찾은 느낌이 들었다.

일면식도 없지만 저자가 이런 순간을 맞이했음을 축하하고 싶다.

 

7 한국인의 원형무의식의 소유자, 바리공주, 웅녀와 호랑이, 단군, 주몽, 처용,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황진이 등은 한국이 존속하고 한국문학이 존속하는 한 영원히 독자를 기다리고 작가를 기다릴 것이다.

 

7 인생의 여러 갈림길에서 20대 중반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하는 것으로 삶의 길을 걸어왔던 지난 시간들을 생각해보면 벌써 25년 이상이나 공부를 한다는 자의식이 심리적 저층에 주요 생각으로 자리잡고 살아왔다. 끊임없이 자신 속에 있는 인류원형의 무의식성, 여성연구자로서 정체성 등을 탐색하고 지내왔던 여정을 지천명의 나이에 생각해보니 그러한 모든 것들이 자기 구원의 길을 걸어왔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된다.

내가 쓰려는 책도 결국은 나의 구원의 길일거다. 나를 구원하기 위해 책을 써야겠다.

 

8 이 글들은 실제로 2004년부터 2007년까지의 연구라 할 수 있다.

 

8 2002 기초학문 프로젝트 주제였던 고전문학의 현대적 계승과 장르적 변용 연구는 공동 참여자 모두 각자 논문 한 편씩 발표하는 것으로 그쳤었다. 필자는 그 이후 연속적으로 고전문학이 재창작된 현대문학에 관심을 가졌던 한 성과와 관심의 결과물 묶음집을 개인적으로 정리하고 싶었다. 시간이 지났지만 박사께도 감사드린다.

그 계기는 한 번, 1년이었지만 이 학자는 같은 주제에 집중해서 홀로 시간을 더 보냈나보다. 아름답다. 시작한 지 10년 후에 나온 책이라고 10년을 들였다고 볼 수는 없겠다. 위에서 3년동안의 연구라 했으니. 그렇지만 이 주제가 그녀에게는 평생의 탐구주제와 관련이 있나보다. 나는 너무도 쉽게(우연히, 거저) 찾아냈네. 감사하다.   

 

 

제1부   바리공주 새로 쓰기

 

고전문학의 현대적 계승과 장르적 변용

 

1.     머리말

2.     칠조어론에 반영된 고전의 수용 양상

1)     고전의 내용 중 회자되는 대목의 메타포 차용

2)     고전 어구인 노랫말의 합성 및 변용

3)     고전에 투영된 인간 심리 재핵석의 첨가

4)     고전 결구에 덧붙여 표출된 후일담적 상상력의 구현

5)     고전에 표출된 주제의식의 강화

3.     맺음말

 

15 고전은 고전으로 끝나지 않는다. 고전에 축적된 지혜와 전형화된 인간의 유형, 문학적 양상은 문학적 관습으로 오늘의 우리 문학작품 속에 계승되고 있기에 소멸되지 않는다. 이는 인류의 연면한 정신이 그 기저에서 결코 단절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한다. 고전의 의미망은 인류 의식의 원형, 인간의 보편적인 관심사, 노랫말의 미의식 등이 문학적 상상력과 다양하게 연맥되어 형성되는 것이기에 영구한 생명력을 지니게 된다. 따라서 작가들은 상상력을 동원하여 고전적 지혜와 문학적 관습의 부활을 위해 노심초사한다.

 

16 박상륭의 <칠조어론>에 수용된 고전문학 장르는 고시가, 향가, 신화, 무가, 서사무가, 고소설, 판소리 사설 등으로 다양하다.

 

17 박상륭은 장편소설 <칠조어론>에서 <단군신화> 및 고소설 <심청전>, <흥부전>, <별주부전>, 판소리 사설의 <변강쇠가>고전의 내용 중 회자되는 메타포 차용하기로 보여주고 있다. 이들 작품은 많은 작가나 한국 일반인의 무의식에 회자되고 있는 대표적인 고전이며, 그 중 작품의 핵심적 대목 일부는 끊임없이 차용되어 왔다.

이 책들을 읽어보고 싶구나. 입말로 소리내어서.

그 꿈이 생각나네. 연암의 원본을 처조카 아내에게 찾으라는.

북에서 번역하고 보리출판사에서 낸 겨레고전문학선집에 위에서 인용한 책들이 들어 있었다. 

 

18 반쯤 계집된 호랑이

 

18 박상륭은 단군보다 웅녀를 부각해서 드러내고 있다.

 

19 식물이미지를 나타내는 신단수, 쑥과 마늘 메타포를 차용하고 있다. 특히 쑥과 마늘은 고행의 의미로 어둠을 견디거나, 쓰고 맵고 답답한 시련을 견디는 자만이 인간이 될 수 있으며, 곰의 내적 투쟁의 시련에 필수 항목으로 보았다. 그 장면과 관련된 대목은 다음과 같다.

나도 이 메타포에 끌렸었다. 단군의 후예 프로그램에 참여할 때 나는 웅녀딸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나에게 힘을 주는 존재다. 메타포가 뭐지?

 

1)     어쨎든 반모섬의 양지에 앉아 한 우주를 꿈꾸고 있었던, 저 한 원숙한 늙은네는, 신명들린 무 같았을 터이며, 신단수도 같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태우지도 않는 불을 우거지도록 훨훨 이고 있는 가지떨기 나무 같았던 것입지

아름답다

2)     저것이 식물에 대해서는 음식이 되는 것일 것이지만, 사람이라는 이상스러운 동물 속에서는, 그것이 익으면, 광맥이 되거나 음식이 되는 대신, 지혜가 되어 있는 것일 것이다. 마늘과 쑥, 천로역정에 쓰이는 노자.

이 구절도 아름답다

3)      그는, 연좌로, 넉잠 자는 누에 모양, 요 며칠을 지내온 것인데, 반 잠보다는 훨씬 더 깊은 잠, 깨어 있기라고 쳐서는, 깨어 있기를 훨씬 넘어버린 깨어 있기의 잠, 그러는 동안은, 그의 숨쉬기며, 맥박도 느려져, 체온까지도 떨어져내려 있어, 말하자면 그는, 제 발바닥에서, 먹어두었던 쑥과 마늘즙을 핥아 사는, 겨울 곰이었다.

 

20 쑥과 마늘은 천로역정에 이르는 고행의 통과제의로 진입, 승화되는 과정의 매개체로 비유되고 있다.

 

22 시인들은 고전 시가 중 주로 향가와 무가를 새롭게 변용하여 쓰고 있다. 시인들이 주로 향가나 무가를 시로 계승하고 있음에 비해 박상륭은 소설에 시를 접맥하여 다시 쓰고 있다. <구지가>, <풍요>, 무가인 <구천>이 구체적인 사례들이다.

아니 박상륭씨는 소설가인데 공부를 엄침 많이 했나 보다. 저런 걸 자유자재로 갖다 쓰다니

 

24 작가 박상륭은 무가 <구천>을 왜 이렇게 수용하고 있는가? 절박한 시대가 거듭될수록 인간의 영혼은 중심 푯대를 상실하게 되며 절망과 나락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그것의 역설적 방법은 혼란의 의미 자체가 탈락된 소리의 반복 어법 방식의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

뭔 소리? 이해가 안된다. 

 

28 박상륭은 바리공주가 갖고 있는 구원의 에너지는 수난 속에서 생성될 수 있다는 것, 바리공주의 경우처럼 버려진 버리데기로부터 치유의 약물이 생성된다는 주제를 수용하고 있다. 이는 남성 지배가 조장한 수난과 질병이 남성으로서는 해결할 가망이 없다는 인식을 반영한 것으로 작가는 여성을 생명 회생의 주체자로 설정하고 있다.

이 구절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러니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나는 딸은 가부장제에서 상처입은 아버지 자신과 가부장제 자체를 치유할 약을 가지고 돌아오는 거로구나. 어떻게 그녀의 여정에서 그런 대안이 나오는 걸까? 

 

28 박상륭은 <칠조어론>에서 버리데기를 수용하되, 후임담적 상상력을 덧붙인다.

l  비리데기의 부모는 오구를 받은 판관이 되고, 비리데기는 서왕세계의 불성문으로 보내달라고 한다.

l  가난한 비리데기는 아들 7형제에게서 다시 버림받는다.

l  비리데기는 죽음길에 임박해 장가를 못 들인 아들 일곱을 불러 자신의 궁리대로 해주면 눈을 감겠다고 한다.

l  아들들에게 약물 약초가 있는 고향인 서천서역국으로 가서 살라고 말한다.

l  비리데기가 죽은 후 화장을 하고 뼈를 추려 7묶음을 만들어 한 묶음씩 갖고 재는 큰 아들이 간직하고 왔던 길로 돌아가라고 한다. 그렇지 않고 뼈와 재를 버리면 다시 비리데기와 같은 신세가 된다고 한다.

l  미륵님은 불쌍한 어린 계집의 갈린 살과 뼈를 자신의 침과 말씀으로 반죽하여 법향 태우는 향로를 만들었기에 미륵님전에 있던 향을 태우는 향로였다고 하고, 7형제가 바로 향을 태우는 일곱 색깔의 불과 일곱 향기라 한다.

l  자식들이 길을 잃었을 때, 어미뼈의 흰 것과 검은 것을 간직한 막내둥이의 가슴에서 절하며 기다리면, 흰뼈와 검은뼈가 흰새와 검은 새가 되어 방향을 알려줄 것이며, 어미를 원망할 때 검은 수건을 희게 씻어주라고 한다.

l  여섯째 앞가슴의 푸른뼈와 누른뼈를 꺼내 절하면  푸른새와 누른새가 길을 알려 줄 것이며, 더 걷지 못할 때 그곳을 시영산이라 알고 어미 태운 재를 아랫목에 모시고 살면 그곳이 고향이 될 것이라 한다.

l  일을 하기 싫을 때가 오면 아기 심어주는 병이 생긴 것이며, 그때 7형제는 목욕재개하고 약산의 약토에 어머니 태운 재를 섞어 어머니를 재로 빚고 7형제들은 흙각씨에게 49번 침을 뱉고 세 가지 약꽃으로 흙각씨 목과 가슴과 아랫도리에 한 송이씩 꽂아주고, 7형제는 번갈아 7저녁씩 흙각씨 곁에서 자고 49일간을 보내면 그 병이 낫는 효력이 있으며, 49일 동안 어머니 생각만 한다면 어머니는 새로 살아난다고 한다.

l  어머니는 7형제의 각씨이기에 나중에 만나자며 간다 하고 숨이 넘어가고 몸이 식거든 방에 7형제 말고 누구도 들이지 말며, 7형제 어머니를 목욕시키며 어머니의 몸 잘 보아두라고 하며, ‘미륵님 소첩을 버리지 말라고 부탁하며 어머니는 불설문으로 가겠다고 말한다.

이 후일담적 상상력이 재미있다. 특히 흰뼈 검은뼈, 푸른뼈 누른뼈에 절한다는 것, 아기 심어주는 병이 생겨서 흙각씨를 빚어서 새로 살아난다는 것은 어머니를 가진 채 새로운 여자와 만나 사는 걸 이런 식으로 말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모든 아들들은 색씨 안에서 어머니를 품으므로.

나는 이런 알듯말듯한 이야기가 재미 있다.  꾸며낸 아이들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고 그 안에 깊은 진실이 담긴 이야기, 이왕이면 마그마가 들뜷는 지구중심으로 향하는 깊은 샘물에 수원을 대고 있는 이야기들. 그건 복잡하거나 어렵거나 주불주불하지 않을 거다.  

 

30 판소리 사설 <변강쇠가>는 시인들이 주로 장승관련 소재의 시와 극작가의 길놀이마당에서 일부 다루고 있다.

 

32 박상륭은 판소리사설 <변강쇠가>의 변강쇠를 통하여 남성의 성의식을 강화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기생적이고 불건전한 삶을 영위하던 최하층민으로 시정 주변에서 무의도식으로 살아가는 구제불능의 가장에 가까운 변강쇠 그가 가지고 있는 남성 생명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표출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방법은 고전에 표출된 주제 의식의 강화를 다시 강조하는 예라고 볼 수 있다.

 

여성작가가 새로 쓴 바리공주연구-송경아, 장진영, 김선우의 바리를 중심으로

1.     바리공주의 의미와 새로 쓴 바리공주

2.     여성작가가 새로 쓴 바리공주

1)인류학적 생산 모신과 새 인류 탄생

2)세상의 황폐와 이중 희생양, 광명의 세상 찾기

3)생명수 구하기와 사랑의 힘

3. 수난의 여성 영웅사의 새로운 해석

 

35 (바리데기가) 부모의 치병을 위해 약을 구하러 떠나고 모험하는 서사구조는 영웅의 일생과 궤를 같이 한다. 

 

36 이 글에서는 여성작가에 의해 다시 쓰여진 바리공주인 송경아의 소설 <바리> 3부작(1998), 장진영의 희곡 <바리데기>(1999), 김선우의 동화인 <바리공주>(2003) 를 중심으로 의미를 살펴보려고 한다.

직접 읽어보고 싶다. 내가 만약 어른을 위한다기 보담은 어른도 읽는 동화의 형태로 쓰길 원한다면 김선우 동화 <바리공주> 외 시인과 소설가들이 신화 자체를 다시 쓴 이야기를 읽어보면 좋겠구나. 이런 것들이 또 뭐가 있을까? 이 책을 읽어가다보면 많은 소스가 있으리라.

 

36 여성작가들은 서사무가의 주인공 바리공주’, 서역국에서 무장승과의 혼인과 남아 출산, 그리고 구약, 복귀 후 아버지 치병, ‘만신왕되기 등 기본 서사에서 딸이라는 이유로 핍박을 받고 있는 상태를 차용하여 가부장시대에 나온 여성 차별의 모티프로 재해석을 하고 있다.

 

37 송경아는 바리에 관한 연작소설을 바리-불꽃’, ‘바리-동수자’, ‘바리-돌아오다 3부작으로 재창작하였다. ‘바리-불꽃에서는 바리의 어머니 입장을 부각시켜 그를 근친상간적 혼인과 인류를 탄생시키는 인류학적 어머니로 설정하고 있다.

어떤 근친성폭력 피해를 입은 여자는 자신이 신들의 행위속에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했다고 읽었다. 어디서더라? , 융자서전에서.

 

38 그때 어머니는 그 세계를 탈출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즉 첫째아이인 천상금아를 잉태하던 날 목을 매달아 탈출하여 했으나 오구로부터 매를 맞고 어머니는 거세게 반항하지만 탈출에는 실패하고 만다. 그러부터 열 달 후 낳은 아이가 천상금아이고, 그 후 7년 동안은 아이를 하나씩만 낳았다. 바리가 출생할 즈음 생명 출산 방법 변화도 나타낸다.

 

뱃속에서 온전히 열달을 지내고 태어난 아이가 자기를 버림이 없이는 아무도 스스로를 버리지 않으리라는 것, 죽음은 죽음이 아니고 원혼들은 떠돌다가 시체 속으로 들어가 온기 없는 눈으로 쏘다니리라는 것, 검은 바위 위에 내리꽂히는 푸른 번갯불이 데려가는 한 목숨이 우리 모두 위에 덮여서, 삶을 삶답게 만들고 죽음을 죽음답게 만들리라는 계시를 천동이 옿았다. 그것은 신탁이었다. (송경아, ‘바리-불꽃’ 171)

이 문장이 아름답다. 자발적 희생에 대한 것인듯, 예수님처럼

자발적 희생에 대해 더 읽어보시오.

 

39 브라흐마 신에게 간청을 하자 분노를 억누른 브라흐마가 칼리라는 죽음의 신을 나오게 하여 삶과 죽음을 반복하는 것은 세상을 바꾸게 한 의미로 볼 수 있다.

칼리가 파괴, 죽음의 여신이구나. 생명은 그의 자녀를 낳고 먹어치운다.

 

40 동수자 나는 오라버니이자 건강한 사내이기도 하다. 나는 바리가 동행하는 산행길을 알려주면서 고백한다.

 

41 동수자=나는 산속에서 혼자 살아 온 특유의 자만과 외로움을 방치해 오다 지어미인 바리와 살을 섞어 남자됨을 느끼고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낳는다. 도 세번재 아이를 낳았을 때는 사흘 동안 지어미가 그 아이들을 산 채로 먹어 치우고 새 잉태를 준비하고 있었기에 그 반역의 잉태로 지어미를 증오하기도 한다.

밑줄 그은 부부은 오래 혼자 살아온 여자와 남자 모두에 공통되는듯

 

41 동수자는 성욕과 죽음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천도복숭아를 훔쳐 먹고 그곳을 도망쳐 나왔던 것이다.

삶에 대한 의지와 죽음에 대한 의지??? 타나토스 어쩌고 저쩌고

 

42 송경아 바리-동수자에서 동수자는 바리의 상대자인 사내이며 바리를 통해서 생사의 문제를 매우 집요하게 확인하고 있는 존재이다.

 

42 동수자와 바리의 관계를 근친상간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서사무가 바리공주에서처럼 결혼해서 아들만을 낳고 약수를 얻는 과정은 나타나지 않는다.

나는 버리데기 그림책을 아이들에게 읽어줄 때마다 궁금했다. 어떤 이들에게는 결혼해서 아들딸 낳고 잘 먹고 잘 살았다가 삶의 완성, 목적인데 이 캐릭터는 그것마저 수단, 과정으로 취급하는 듯 해서다. 뭔가 수련을 받는 느낌.

 

 43 여덟번째 딸 미금은 편찮으신 아버지의 정액을 어머니가 마법으로 받아 태어난 아이로 날개를 가지고 있고, 어른 한 뼘 크기의 조그마한 여자아이로서 호기심이 많은 인물로 새로 태어난 인류의 부류다.

팅커벨? 요정류? 아 재밌다.

 

44 큰언니인 천상금은 병든 아버지와 늙은 어머니를 대신하여 정무를 보고 있었다. 천상금은 다시 만난 석금에 대해서는 냉소적이며 좀더 철이 들었다고 생각하고, 바리에게는 떠날 때 보이지 않던 그늘을 지니고 있음을 느낀다. 도 천상금은 바리에 대해 인생의 어두운 면을 알아버린, 미지의 힘을 감추어 놓은 낯선 사람으로 느꼈으며, 그림자를 지닌 인간으로 느끼게 된다. 천상금은 여덟 번째 딸로 태어난 미금을 무질서해지는 불라국을 회생시키려는 착상에서 태어난 호문쿨루스라고 본다.

호문쿨루스à 파우스트에 나왔던 것 같다.

마냥 밝기만 한 사람보다 그늘, 그림자를 동시에 느끼게 하는 사람이 실재에 가깝다. 나는 어떤가?

 

44 버려진 일곱 번째 아이인 바리는 아버지를 위한 구약여행에서 불로불사의 비밀을 깨달았고, 죄를 짓는 불라국 인간들의 죄악에 대해서는 탄식한다.

여행을 떠나게 하는 동기, 압축력이 무엇이든 여행 과정에서 배우고 성숙한다. 나 또한 그럴테지

 

47 송경아는 바리-불꽃에서 바리를 인류학적 생명 탄생과 생사의 균형에 대한 우주적 희생양으로 확대 설정하고 있다. 바리-동수자에서 동수자는 아들 낳기에 동참하는 남자일 뿐만 아니라, 지혜를 터득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유토피아에 대한 도전자로 그리며, ‘바리-돌아오다에서는 바리가 아버지의 병 치유만이 아닌 진정한 세계에 대한 고뇌까지 표출하고 있다. 아울러 송경아는 인도 신화와 성경신화까지 접목시킴으로써 보편적 사유 체계인 인류학과 신화적 사유까지 끌어들여 한국의 서사무가를 재창작하고 있다.

 

47 여성작가 장진영의 희곡 <바리데기>>는 서사무가 바리공주를 희곡 장르로 새롭게 쓰고 있다. 이 희곡은 프롤로그, 에필로그 외 13장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50 오구대완은 세상의 한 통치자로 한르의 뜻이 자기를 배반했다고 하면서 인간 세상뿐만 아니라 저승까지 마음대로 권력과 생명 유희로 장악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자결하게 되고, 순수한 축귀의 주재자 바리로 인해 마지막 순간 화해를 받고 그의 혼은 인도된다.

 

50 장진영은 아버지의 개인적 질병인 오만병으로 인해 전염병이 만연하는 상황뿐만 아니라 사회적, 국가적 질병 차원으로 병을 확장시켜 보여주고 있다. 이를 통해 보면 이 희곡은 희생양 바리를 등장시켜 육친과의 화해를 통해 세상에 광명을 가져오는 것으로 묘사하여 이중적 질병과 이중적 치유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미노스왕의 괴물자식 미노타우로스도 결국은 저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희곡에서는 오만병으로 인해 생긴 전염병을 바리라는 희생양을 통해 가능하다고 한다. 이건 기독교랑 비슷하구나. 그럼 아리아드네가 외부 영웅이 오기 전에 직접 해야했다면 그녀가 바리 또는 예수 같은 희생양이 되었어야 한다는 말인가?

 

51 7장에서 왕비 길대는 버린 딸 바리의 천도를 위해 오구대왕에게 배냇저고리에 맞는 꼭두 하나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한다. 이 때 오구대왕은 흉흉한 민심을 무마하기 위해 바리를 악귀로 이용할 것임을 밝힌다. 그러면서도 우구대왕은 쓰러지는 왕비 길대가 남덕을 부르고 남덕의 풀피리로 안정을 찾는 모습을 보고 두려움을 느낀다.

길대부인은 미쳐버렸구나. 딱하기도 하지

 

51 길대 부인은 딸을 버린 어머니로서 끝까지 자신의 죄값을 하려고 애쓰는 인물이다.

 

54 바리는 무장승의 저승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삼년 동안 밥하고 그러는 동안 아들 일곱까지 낳아줘야 한다는 여러 조건을 수락한다. 이때 바리는 부모에게 버림받은 것을 환기시키며, 자신을 바리떼기라고 부르는 무장승에게 자기 이름은 남덕이라고 주장하면서, 감옥에서 악귀를 쫒고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내는 능력을 보인다.

이 과정이 왜 필요할까? 그리고 대부분의 여자들이 겪는 이런 걸 통해 수련할 수 있는 건 뭘까? 내용이 무엇이든 그것 자체를 목적으로 보지 않고 다른 숭고하고 아름다운 목적으로 가는 방편으로 밥짓고, 빨래하고, 나무하고, 아이 낳아 남자와 사는 생활을 보는 건 특별한 인식의 차이를 주리라. 나는 특히 여러 길 위의 여자들에게 주어지는 과제가 비스무리해서 흥미롭다. 그 과제는 (1) 이산 저산 나무를 다 해주면 길을 알려주마 (2) 산처럼 많은 빨래를 다 해주면 길을 알려주마 (3) 이 땅을 다 갈아주면 길을 알려주마 같은 것들이었다.

 

54 바리 : 아 슬프다. 삼칠일도 못 다 살고 숨을 거둔 우리 아가. 어디 어디 갔었더냐 어찌어찌 지냈더냐. 북망산엔 올랐더냐 황천간은 건넜더냐. 엄동설한 눈서리에 입을 옷은 있었더냐. 삼복 더위 한여름에 마실 물은 있었더냐. 우여 슬프다. 삼칠일도 못 다 살고 숨을 거둔 우리 아가. 엄마 얼굴 어찌 알고 밤마다 찾아왔냐. 어미 젖을 다 못먹거 깃털보다 가볍다냐. 깃털조차 떠잇는 물 황천강을 못 거너고  발목에서 안 차는 물 코가 잠겨 숨 못 쉬고, 무슨 할 말 아직 남아 고사리손 흔드느냐. 가슴 속에 싸지 말고 속시원히 말하려므나. 속 시원히 말을 해.

여자1 아가아가, 우리 아가, 나 죽어서 네가 살면 이 자리서 칼 물겠다. 아가 아가 우리 아가(장진영, 버리데기, 56)

, 눈물나

 

55 이 장며은 서사무가 바리공주에서 죽은 사람의 혼령을 저승으로 천도하는 진오귀굿이나 오구굿 등의 사령제 무의가 구현되듯이, 바리공주가 무속 신화로써 의미가 그대로 살아있는 대목이다. 장진영의 희곡에서 바리는 여자1을 통해 죽은 딸의 혼령을 불러내어 위로하고 황천길로 배를 태워 보낸다.

 

55 오구대왕이 마음대로 지어낸 저승을 바로잡을 사람은 공주님밖에 없다고 말한다.

저승, 생명이 살지 못하는 곳. 영웅은 생명을 가져오는 자

 

56 어떤 면에서 장진영의 희곡 <버리데기>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에서 온 세상에 전염병이 만연하게 되자, 그 원인을 찾아 그 죄를 색출하면서, 오이디푸스이오카스테가 제물이 된 후 세상에 평안이 찾아오는 구조와 비슷한 면도 있다.

그러네

 

56 정진영의 희곡 <버리데기>는 하늘의 배반으로 온 나라가 전염병에 휩쓸리고, 결국 길대부인,바리, 오구대왕이 모두 제물이 되면서 세상에 광명이 찾아오는 구조로 되어 있고, 궁극적인 세상 치유의 대속자로 바리를 설정하고 있다. 바리가 생명수로 아버지를 되살린다는 협소한 의미의 구원에서 벗어나 세상을 구하는 광대한 의미를 포함한 희생양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는 여성작가의 자의식이 반영된 측면이 있다.

 

57 김선우의 동화 <바리공주>는 서사무가 바리공주의 서사 구조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결말부분에서 일설에 딸을 더 낳았다는 것을 집어 넣어 현사회적 상황을 비판하여 덧붙이고 있는 면도 있으나, 이 동화는 특히 문체와 시적 묘사가 뛰어나게 재창작하고 있다. 

읽고 싶다.

 

58 첫 아이를 낳은 후 이삼년 터울로 둘째, 셋째 아기까지 공주를 낳고 길대부인은 심사가 위태로와졌고, 오구대왕 역시 자식에 대한 애정이 차차 줄어든다.

 

58 강보에 싸인 바리공주는 어미의 마지막 젖을 먹고, 옥장이가 만든, 불나국 바리공주라 새긴 옥함에 넣어진다. 옥함에는 무명지를 끊은 선혈로 아기의 생월생시를 새기고, , 노리개, 패물도 채워 넣어주며 부인은 아기에게 어미를 용서하지 말라고 독백한다. 이로 인해 길대부인은 여식으로 태어나 버려져야 하는 아기 영혼의 주검을 가슴에 묻고 양지바른 땅에 묻을 것이라며 실성한다.

 

59 오구대왕은 일곱 번째 아이를 버린 후 아프기 시작하더니 폐인이 되어가고 불나국 전역의 민생도 피폐해져간다.

이것이 여러 작품마다 비슷한 맥락이다. 여자아이를 버렸기 때문에 병들었다.

 

59 내가 지닌 표적과 불나국 양 마마의 표적이 같다고는 하여도 나는 하도 어릴적 갓낳은 핏덩이일 때 버려졌으니 그 표적은 내 것이 아닐지도 모르오. 궁으로 돌아가서 나를 버리신 아버님의 피를 받아오시오. 정녕 합혈하는지 내 확인한 연후에 그분의 자식인지 아닌지 판단할 바요.

(김선우, 바리공주 84)

 

61 비럭공덕할멈과 할아범의 활인 공덕

 

61 버려졌던 바리공주는 사시사철 눈이 내리는 수미산에서 비럭공덕 할멈, 할아범과 산 지 벌써 20년이 되어 가며, 그 내력이 밝혀진다. 비럭공덕할멈과 할아범은 아기울음소리를 듣고 버려진 아이를 데려다가 기르는 것이 제일 중요한 공덕이라는 목소리를 듣게 된다. 비럭공덕할멈 내외는 자신들이 바리데기를 키운 지 7년이 지나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을 때, 생명의 비밀을알려준다. 그들은 7년 전을 생각하며 굴 입구에 잇닿은 처마 밑에서 옥함을 꺼내 보여주었는데 거기에는 불나국 바리공주라 씌어 있었다고 한다. 또 그들은 처음 옥함을 발견했을 때 왕거미, 불개미, 구렁배암에 둘러 싸여 울지도 못하고 있던 아이를 계곡에서 씻기는데 흰 꽃잎들이 떠내려왔다고 말해준다. 그 후 유난히 꽃을 좋아하는 아이 바리공주는 가끔 부모에 대한 궁금증을 내 비친다.

 

61 바리가 자신의 부모에 대해 묻자 할멈은 하늘, 땅이 네 부모라 하며 전라도 왕대가 아버지고 뒷동산 머구나무가 어머니라고 말해준다.

 

61 시간이 지나면서 바리공주는 처녀티를 내기 시작하고 초적 소리는 끊이질 않고 비럭공덕할아범을 통해 약초에 대한 지식도 많이 알게 된다. 또 바리는 산의 모든 것과 말이 통하게 되는데 꽃이 비치는 처녀가 되고 속이 뜨거워진 14세가 되면서 자신이 불나국 공주임을 알게된다.

 

62 버릴 아기를 옥함에 넣어서 생년월시와 이름까지 적어 버린 이유는 뭐란 말인가. 단지하며 흘린 피로 쓴 글씨의 흔적을 남긴 이는 누구란 말인가. 어머니, 나를 낳은 어머니가 나를 버렸단 말인가. 단지혈로 쓴 붉은 글씨와 첫꽃의 혈흔이 겹쳤다. 아기를, 아기를 낳을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이라 했다. 어머니가 될 수 있는 거라고 했다. (김선우, 바리공주 75)

 

62 바리공주는 자신의 실존에 대한 의문을 다양하게 고뇌하며 자신을 위해 울지 않을 것이라 다짐한다.

 

62 자신을 낳으신 부모가 찾는다 하니 한 번은 뵈어야 한다며 할미에게 돌아온다는 약속을 남기고 궁으로 간다.

 

63 이 동화에서 독특한 상상력이 가미된 부분이 바로 무장승과의 이야기이다.

 

63 바리공주는 무쇠로 지은 남자 의복을 부탁해 입고, 무쇠 두루마기와 무쇠 패랭이를 쓰고 궐을 나선다.

아테나스런 이런 무장이 필요하리라.

 

63 무장승은 30년 전 하늘에서 쫒겨와 인간의 몸을 받고 약수 지키는 일을 명 받고 살아간다. 100년을 채우고, 인간 세상의 배필을 만나 아들 삼형제를 얻으면 죄를 탕감 승천한다는 약속을 떠올린다.

남자에게도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과정이 수련의 과정일 거다.

 

64 무장승의 청혼을 받아들인 바리는 무장승의 사랑으로 원시로 돌아가고, 이 둘은 서로의 신성을 발견해간다. 무장승은 청혼한 그날 신목이 우주의 말로 내게 말을 하였고, 신목의 말에 공명하며 생명을 살리는 물을 얻기 위한 마지막 사랑을 배우라.는 말을 마음에서 듣게 된다. 어머니 나무인 신목의 말대로 바리와 무장승은 서로의 사랑을 통해 자신을 먼저 치유하고, 꿈에서 예지된 한눈에 반한 사람과 더불어 벌써 시간이 흘러 둘째 아이까지 생기게 되었다.

 

65 김선우는 바리가 무장승과 혼인하여 생명수를 얻는 과정을 노력과 자식 낳기만이 아닌 진정한 사랑과 치유의 힘으로 얻어가는 과정으로 설정하고 있다.

 

65 바리 스스로 자신을 치유하고 진정한 사랑의 힘을 가졌을 때 생명수를 구하는 것으로 새로운 해석을 해서 보여주고 있다.

 

66 황천강에 들었다가 드물게 살아 돌아온 이들은 더러 황천강가에서 꽃을 뿌리는 바리공주를 보았다고도 했다. 걱실한 사내가 공후를 타고 아름다운 여인이 초적을 불며 길잃은 넑배들을 인도하고 있었다고 했다. 영문모르고 죽은 어린아이 혼령들을 받아 안고 저고리 섶을 풀어 젖을 먹이는 바리공주를 보았다고도 했다. 세 아들 외에도 딸을 더 낳아 은하의 팔방 운을 지키는 별님들이 되게 한 후 세상의 슬픈 일 이쓴 곳이면 어디든 별빛 달빛을 흘려보내 상처를 매만지는 바리공주 일가가 있다고도 하였다.

옛날 옛적에 간날 저 갓적에 아장지 설적저게 ….

영문 모르고 버려지는 것들의 슬픔이 있는 한 오늘도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곤 한다.

(김선우 바리공주 190)

 

67 여성의 수난사와 여성의 영웅사가 공존하는 서사무가 <바리공주>는 현대의 여성에게도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특히 여성작가들은 여성의 의식이 성숙함에 따라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한 번은 설움을 당해봤던 여성 의식의 기저에 깔려 있는 감정을 끌어올려 스스로를 바리공주와 동일시하면서도 자기만의 독특한 능동적 목소리를 가미시켜 보여준다.

 

 

제2부   단군과 주몽 새로 쓰기

단군신화를 가지고 이미 많은 재창작이 이루어지고 있구나. 수상한 식모들에서 호랑아낙에 대한 게 신선했다. 또 곰보다는 호랑이 쪽에 중점을 두고 보는 시각이 신선했다. 주몽이야기를 신화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미혼모 잉태부터 시작해 영웅여정에서 비슷한 면이 많다.  

 

여성작가가 재창작한 단군신화연구- 김성희, 김승희, 양귀자의 작품을 중심으로

1.     단군시화의 의미와 재창작한 단군신화들

2.     여성작가가 새로쓴 곰 여인 역과 호랑이 여인 역의 삶의 대비

1)     기혼여성의 삶과 미혼여성의 삶 : 김성희 희곡 <웅녀> (1977)

2)     어머니의 삶에서 딸들의 삶으로 : 김승희 소설 <호랑이 젖꼭지> (1994)

3)     가난한 전처의 삶과 재벌2세 후처의 삶 : 양귀자 소설 <곰 이야기> (1995)

 

71 인간 원형에 대한 집단적 상상력이 녹아있는 신화는 끊임없이 생명력을 유지하면서 의미 생산 작용을 하고 있다. 신화는 민족의 통치 방식이나 정체성 인식의 토대였으며, 이러한 측면은 작가들에 의해 현대에도 계속 작용하면서 원형적 의미로 재생산되거나 부활되고 있다.

 

73 단군신화를 산문 장르(소설, 동화, 희곡-연극,뮤지컬)로 재창작한 작품들의 구체적인 의미망은 다음과 같이 대별할 수 있다. 알레고기 기법으로 보여준 인간 사회의 비극 (정한숙의 소설 <웅녀의 후예>), 고행의 통과제의나 메타포로 차용 (박상륭의 소설 <죽음의 한 연구> <칠조어론>, 전경린의 소설 <새는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 어른을 위한 동화이자 신화 세계와 현실 세계를 이중교차기법으로 드러냄 (이호림의 동화 <웅녀야 웅녀야>), 환인-환웅-단군 삼대로 구성한 이야기 (구상의 시나리오 <단군>) 등이다.

!

 

76 결혼한 이후 남성들의 삶은 미혼 시대의 삶과 크게 달라질 것이 없지만, 여성들은 이상을 꿈꾸던 미혼시대의 삶과 단절되고, 새로 주어진 가정에서 여러 과제들을 요구받는다. 특히 미혼인 처녀 시절의 꿈이나 이상과 단절하고, 오로지 현실의 과업을 수행하는 데 충실할 것을 전폭적으로 요구받는다. 이 과정에서 일상의 쳇바퀴 속에서 미혼 시절의 모든 꿈은 묻히게 된다. 그러한 과정이 이 작품에서 웅녀의 교통사고로 인한 기억상실증으로 설정되었다고 유추해볼 수도 있다.

 

79 한 때 웅녀는 두 남성 - 계약을 앞세워 웅녀를 돌려받으려 오는 환일과 자신을 사랑한다는 단성 사이에서 회의했었다. 즉 남성과 얽혀진 두 역할에 대해 사랑의 계약을 상쇄시킬 수 있냐고 반문했었다.

 

81 기혼여성은 곰여인으로, 미혼 여성은 호랑이 여인으로 대비해볼 수 있다.

 

81 곰이 시련을 겪어 여자가 되고 단군을 낳은 어머니일 뿐인 <단군신화>에서 김성희는 결혼한 후 잃어버린 자아를 동거남인 단성과의 관계에서 찾는 웅녀 이야기로 재구성했다. 그러나 김성희는 웅녀를 결국 제도적 삶으로 복귀하는 것으로 보여주었다. 이 작품을 통해서 두 가지 의미를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 결혼한 남편(현실적 삶, 법과 계약적 관계의 삶) 환일과 사랑하는 남자(이상적 삶, 사랑의 삶) 단성을 등장시켜 여성의 현실과 이상을 대별하여 구현한다. 즉 곰 여인 역의 기혼여성 웅녀는 여성의 현실인 계약제도로 복귀하며, 호랑이 여인 역의 미혼여성인 거리의 여자는 자유로운 이상의 삶을 펼치는 것으로 보여주고 있다. 둘째 결혼하여 현실 세계를 떠나 정신병원을 체험하고, 다시 새로운 현실로 돌아오는 여정은 웅녀의 자아 발견의 상황을 통해 보여준다.

 

82 두 자매는 어머니의 탈상 때문에 만나 과천의 동물원으로 백두산 호랑이를 보러 구경간다.

 

83 나는 사춘기 시절, 아버지와 어머니가 별거한 후, 시골에서 아버지와 살았고, 여동생은 서울에서 어머니와 살았던 경험을 갖고 있다. 아버지는 새어머니격인 최여사와 결혼생활을 꾸려나가고, 어머니는 그러한 여정에서 요구된 아버지의 이혼 요구에 끝까지 응하지 않고, 죽는 순간까지 아버지가 오기만을 기다린다. 결혼한 딸인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3년간 모신 적이 있다.

 

84 어머니의 진정한 탈상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그것은 어머니를 이 땅의 모든 구속, 모든 인연, 모든 착심으로부터 해방시킨 진정한 탈상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녀에 대한 진정한 탈상은 무엇일까? 나도 이런 과제가 있다. 

 

84 어머니의 삶에 대한 이해와는 달리 나는 스스로 자신을 위해 여성의 집단무의식 에너지에 관심을 갖는다. 그 에너지는 여성 내부에 야생 생활의 습관으로 잠재되어 있다고 보고, 그것을 고고학적으로 파 본다면 야생시대의 습관이 발견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여정으로 유추하더라고 내가 생각하는 어머니의 토템은 운명의 동굴을 참고 견디고 지키는 것이며, 또 내가 관찰한 어머니의 유일한 실존 행위는 동굴을 지키며 쑥과 마늘을 먹는 것뿐이라 생각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부분을 통해 어머니의 삶은 곰 은유적 시대의 삶이었다고 해석해볼 수 있다. 그러나 주인공은 어머니의 삶에 대해 이해는 할지언정 같은 방식으로 살 수는 없고, 자신의 세대는 어머니의 실존행위와 다르다고 피력한다.

그녀 곰, 나도 곰

 

85 어떤 면에서 나의 삶은 어머니와는 다른 듯 하지만 결혼 생활에서 탈출할 수 없었던 작은 일상들의 되풀이, 그때 글을 쓰지 못했던 것들이 암담한 동굴 속의 어두운 시간들이라 느낀다.

 

85 나는 백두산 암호랑이를 생각하며, 이것은 또 하나의 어머니가 오랜 세월 동안 미지의 대륙 끝을 헤맨 끝에 이제야 야성의 방랑을 마치고 돌아왔다는 소식처럼 느끼게 된다. ‘곰의 은유적 시대의 삶을 살았던 친어머니의 삶과 달리 잃어버린 또 하나의 원형적 어머니상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난 그 털이 북실북실하고 살이 몽글몽글한 암호랑이 젖가슴에 얼굴을 박고 울면서 호랑이의 젖을 먹어보고 싶어했던 것이다. 아사달의 찬란한 햇빛을 못 보고 쫒겨나간, 아니 스스로 도망쳐간, 우리의 또 하나의 어머니가 오랜 세월 동안 미지의 대륙을 헤맨 끝에 이제야 드디어 야성의 방랑을 마치고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 (김승희 <호랑이 젖꼭지> 49) 

 

86 위 대목에서 야성성의 어머니처럼 어머니와 다른 삶을 살고자 했던 나는 자주 포효하라며, 백두산 호랑이의 야성 에너지를 갈망한다.

 

86 그것은 웅녀와는 다른 또 하나의 어머니상으로 늑대같이 강하고 고양이처럼 예쁘고 용암처럼 이글거리는 암호랑이 같은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86 그러나 동물원에서 목격한 호랑이는 너무도 어렸고, 그것도 졸려서 잠에 취해 있는 모습이었다. 그것은 힘의 원천과 야성의 원천을 찾고자 했던 나에게 실망을 안겨 준다. 이는 정신적 비타민으로써의 <단군신화>가 억압하기 이전의 여성의 어떤 원초성, 사천년 이전의 양성구유의 맨 얼굴을 보고 싶었던 기대에 어긋난다.

 

87 사천년도 훨씬 더 전에 단군신화 속을 탈출해나간 또 하나의 어머니인 백두산 호랑이를 만나려고 그렇게 서둘러서 온 길이었다. 이글이글한 암호랑이 젖꼭지에 입술을 박고 사천년도 더 넘는 세월 동안 우리가 먹어보지 못한 야성의 모유를 먹어볼 수 있을까 꿈을 꾸었지. 불이 이글이글하고 털이 북실북실한 야성의 젖꼭지에 입술을 박고 불 같은 피를 먹어 어제의 어머니에게서 이유하고 이 땅을 더 잘 견디기 위한 뜨거운 힘을 구하려고 하였나? 아사달에 사는 사람들은 결코 체험할 수 없었던 어느 낯선 대륙의 야성의 태양빛의 황금빛 이야기를 그토록 갈구하였나 나의 메마른 입술에 그 탐스런 젖꼭지를 물고 한번만, , 한번만, 울고 싶었나 (김승희, 호랑이젖꼭지, 66-67)

 

87 결국 두 자매는 백두산호랑이처럼 한 번 울어보자며 자주 포효하라고 입을 모은다.

 

88 김승희는 여성 속에 잠재된 두 역학 에너지, 인내적 수동성과 야성적 능동성을 균형있게 읽어 냈다고도 볼 수 있다.

 

가난한 전처의 삶과 재벌 2세 후처의 삶- 양귀자의 소설 [곰 이야기] -1995

 

88 그는 재벌의 딸과 결혼하는 과정에서 정중한 대접을 받은 듯 했다. 하지마 그는 자신의 전공인 그림 때문이 아니라 네번째 결혼이 재벌 딸과의 결혼이라는 이유로 유명해지게 된다.

 

90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거나 가정을 위해 한 일이 없었고, 자녀의 양육 역시 장모님이 맡아했었다. 이런 생활에서의 무능과 빈곤한 삶 속에 술로 일상을 보내며 남성 역할 부재와 무책임한 가장의 전형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전처와 살 때의 이 남성은 원본 <단군신화>에서 잠깐 남편 역을 보여주었던 환웅과 마찬가지로 이름만 존재한남편이라 유추해 볼 수 있다.

반면에 가난한 전처인 여교사는 자기 힘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아이들을 키우고, 자립적을 ㅗ생활해나가는 유형의 인물이다. 무책임한 남편 대신 가정을 이끌어왔고, 자녀를 책임졌고 어려운 여정에서 고통을 겪어 가며 당당히 자립해 갔던 여성이다.

 

90 재벌딸은 그의 전처의 구속된 삶이나 책임을 도맡아 하던 삶과 달리, 호랑이적 삶을 자유롭게 누리며 살 수 있는 조건과 신분의 모델이었던 것이다.

재벌 딸이나 되어야 호랑이 역이 가능하다고? 

 

90 숨은 환웅 역의 남성인 그는 무책임한 남성으로서 아버지 씨만 준 존재여서 모계사회의 흔적을 보여주기도 한다.

 

94 범역의 여인 재벌 딸에게 있어서는 미숙한 자아가 채택되었던 온달처럼, ‘평강공주의 치맛자락에 나부끼는 비독립적 존재로 비쳐진다.

 

94 전처와 남자의 관계가 슈퍼우먼인 곰역과 무능한 환웅 역의 삶이었다면, 후처와 남자의 관계는 평강공주 역과 유약한 환웅=온달 역의 삶이라 비유해 볼 수 있다.

 

96 이 작품들은 여성작가들의 상상력에 여성의 자의식이 결합되면서

 

96 세 작품은 여성작가들의 시선으로 그려진 <단군신화>의 호랑이역, 곰 역을 새롭게 재해석하여 여성의 실존적 문제를 깊게 관찰했다고 보아진다. 특히 남성 작가들이 순종적인 곰 여인 역을 강조하고 있다면, 여성작가들은 곰 역에 대비한 호랑이 여인 역을 새롭게 보여주거나, 또는 호랑이 여인 역의 의미를 강조하면서 표출하고 있다.

 

단군신화속의 호랑이의미의 부활 창조 박진규의 <수상한 식모들>

1.     <단군신화>의 재창작과 호랑이여인부활

2.     웅녀신화와 가상신화 호녀신화

3.     수상한 식모들에 나타난 호녀신화 후예들의 의식세계

1)     근대화 이전 호녀또는 호랑아낙들정치사회적 집단무의식의 발현

2)     근대화 이후 수상한 식모들의 미시적 생활사와 하부 집단의 구술

4.     거시적 여성사외 미시적 여성사, 그리고 호녀신화의 창출

 

100 웅녀는 한국산 가부장 이데올로기가 이상화시킨 모성으로서의 이미지로 자신의 정체성을 단지 모성에만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여성 육체에 대한 문화적 지배는 웅녀를 모성 지상주의자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기에 한국인에게 여성다움은 곰과 같은 수동성이나 기원하는 자세, 인내, 자기 희생, 모성성 같은 것으로 범주화되어 전해오게 된 것이다. 자신이 원초적으로 가지고 있던 아니무스(여성의 남성적 특징)로써의 호랑이성을 추방하고 제도권 안에 어머니로서 위치성만을 수용했던 것이다.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산물로써의 젠더를 획득한 웅녀는 여성의 자기 소외의 거울이며 여성 억압의 거울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여자가 되지 못한 호랑이를 불러와 해석을 한다면, 웅녀에 집중하여 해석할 때와는 달리 곰과 호랑이를 두 개의 다른 동물로 해석하지 않고 한 사람의 전체성 속에 공존해 있는 곰성호랑이성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한국산 가부장 이데올로기가 이상화시킨 모성으로써의 이미지를 탈피하여 자신이 원초적으로 가지고 있던 아니무스상을 재위치시켜, 자기 자신의 전체성(곰성+호랑이성)을 부활시킬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101 그리하여 가부장제의 제품으로써의 문화적 웅녀가 아닌 그 이전의 양성성 상태의 자연 여자를 회복시킴으로써 잃어버린 아니무스를 되찾아 원래적이고 전체적인 자기 자신이 되는 일로 매진하는 것이다. 웅녀를 뛰어넘어 웅녀 이전의 웅녀+호랑이의 자연 여자를 회복하는 것은 문화적 젠더 아이덴티티가 소외되었었지만 자신의 원초적 본능을 찾아가는 고고심리학적 탐색이 될 것이다.

 

101 호랑이 이야기의 후일담으로써의 - 호녀신화라 칭할 수 있는 소설 속에 구현된 가상신화

 

수상한 식모들의 첫 이야기는 단군신화와 맞물린다. 곰과 호랑이가 환웅에게 벌어 굴에서 마늘과 쑥을 먹으며 버틴 이야기는 누구나 알고 있다. 곰은 약속한 날짜를 다 채우고 결국 아름다운 여인이 되어 고조선의 시조 단군을 낳았다. 하지만 호랑이는 마늘과 쑥만 먹는 나날을 견디지 못해 결국 굴 밖으로 뛰쳐나오고 만다. 수상한 식모들의 시조는 바로 이 호랑이다.

호랑이는 굴을 빠져나오자 마자 온 산을 뛰어다니며 온갖 동물들을 다 포식한다. 토끼, 다람쥐, 고라니 등등, 과식한 탓에 배가 땡땡하게 찬 호랑이는 지독한 갈증을 느끼지만 주위에는 작은 샘물 하나 보이지가 않는다. 더구나 갑작스런 포식으로 위장은 쓰려오고, 호랑이는 그만 정신을 잃고 언덕 아래로 데굴데굴 구르고 만다. 너무나 운이 없게도 언덕은 가시나무 천지였다. 호랑이의 몸뚱이에는 온통 가시가 박히고 사지는 자갈에 긁혀 온몸이 상처투성이로 변한다.

호랑이가 비틀대며 당도한 곳은 다행히 샘가였다. 호랑이는 몸을 일으켜 목을 축이려고 샘 가까이에 다가갔다. 그러나 샘에 얼굴을 비춰보곤 자기 몰골에 경악해서 뒤로 물러서고 만다. 이어 밀려오는 후회. 지금쯤 곰은 아름다운 여인으로 태어났겠지. 그리고 환웅과 결혼했겠지? 이렇게 짐승의 숨만 쉬고 있는 나는 뭐람 (중략)

여자는 호랑이 가죽을 여며 옷으로 만들어 입고 산을 내려갔다. 사람들은 그 여자가 입은 옷을 보고는 범녀라고 불렀다. 범녀는 사람들을 이끌고 다니며 사냥하는 법과 노래하는 법을 가르쳤다. 춤을 가르쳐주기도 했으며, 산에서 자라는 약초가 무엇인지 알려주기도 했다. 또 버려진 여자아이들을 산으로 데려가 자기 수양딸로 키우기도 했다. 사람들은 범녀를 따랐으나 알 수 없는 모함을 당해 범녀는 마을에는 다시 접근하지 못하고 산에서만 머무는 운명에 처했다.

왜 범녀가 수상한 식모들의 시조가 되었을까? 나는 단군신화의 의미에 관한 몇 가지 연구 자료를 살펴보았다. 제일 설득력 있는 해석은 곰 토템 부족과 호랑이 토템 부족 중 전자가 지배권을 얻게 되었다는 가설이었다. 그렇다면 범녀는 지배당한 호랑의 부족의 리더쯤 되지 않았을까? 그녀는 그 후에도 지배집단에 항거하는 어떤 자세를 보여줌으로써 집단에서 축출당하고 산으로 내쫒겼던 것은 아닐까? 집단에 속하지 못하고 배회하고 소외된 여인들의 삶, 그곳에서 우리 수상한 식모들의 씨앗도 발아하였으리라.

이후 조선시대 말엽까지 그녀들은 범녀, 혹은 호랑아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수상한 식모들이란 명칭은 일제시대가 되어서야 생긴 명칭이었다. (박진규, 수상한 식모든, 30~33) 

, 재미있다.

 

103 박진규의 <수상한 식모들>호랑아낙의 이야기라는 대체 신화를 발명해냄으로써 식모라는 대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어보이고 역사를 사적으로 재해석하려고 한다.

 

104 식민지 지배는 정치가와 군인들이 시작했지만 일본의 많은 서민이 조선으로 건너와 자리를 잡은 것은 일본이 식민지를 안정적으로 지배하는 한 근거가 되었다. ‘어머니라 불리던 조선인 하녀를 데리고 있던 사람은 35명 가운데 26명이다. 대부분의 일본인은 어머니가 어떤 인물인지에 관심이 없었다. 그런 어머니는 인격이 없는 도구, 로봇 같은 존재였다. 조선의 일본인 사회는 엄격한 피라미드 형태였다는 것, 대부분의 일본인 가정에서는 조선 여성(어머니)’을 가사 도우미로 고용했는데, 눈에 잘 띄는 곳에 일부러 약간의 돈을 놓아 두고 청소를 시킨 다음, 돈이 있던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으면 고용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식모의 존재는 일제 시대를 거쳐 1960, 1970년대 근대화가 가속 폐달을 밟던 시기, 농어촌이 대도시로 빨려들어가는 한 형식에서 가정부라고 불리던 식모로 자리잡았고, 그들의 형제 자매 가운데 일부가 구로공단의 공돌이, 공순이가 되었다.

 

105 농촌이 무너지고, 가족이 해체되고, 성 역할까지 모호해지는 21세기 초입에 식모를 호출하는 것보다 더 수상한 것은 박진규의 발상법, 즉 전복적인 상상력이다. 곰과 함께 쑥과 마늘을 들고 동굴로 들어갔다가 참지 못하고 뛰쳐나온 호랑이에 대해서는 그동안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단군시절의 호랑이는 참을성이 없는 불민한 족속의 상징이었다. 박진규는 우리의 신화적 연대기의 발원지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 물줄기를 바꿔버린 것이며, 모든 것을 뒤엎에 버린 것이다. 박진규는 신화와 역사는 다시 씌어져야 한다고 강변하고 있다.   

재미있다. 새롭게 창조하고 있다. 새로운 시선으로 어둠 속에 있던 옛 것을 환하게 조명한다. 살려낸다. 멋진 일이다. 

 

105 이름모를 사람들인 풀뿌리 여성=식모들은 한 집안을 신분 상승시키는 밑거름이 되었고, 한 집안을 중산층 사회로 이끌어 와 한국 사회 중추가 되게 한 근대화의 숨은 주역들이었다. 그들은 가족의 희생양이자 한국 사회의 희생양이며 소외 계층이었지만 같은 민중이되 남성의 경우처럼  힘있게 능동적으로 호출되고 해석되는 기회가 없었다.

 

105 박진규는 한국 근대화 여정에서 상류층이나 중류층의 삶을 지향해 오는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하류 여성 구성원들의 삶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 특히 그것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나 비판적 리얼리즘이 아닌 신화를 가미한 전복적 글쓰기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이런 식의 글쓰기이기 때문에 더 재미있고, 부담없을 수 있다. 코미디처럼.

 

105 문헌의 <단군신화>를 패러디한 가상신화를 투영시켜, 호랑아낙과 수상한 식모들의 여성 사회사 계보를 통해서 보여준 것이다. 보통 계층의식은 단순히 소득과 자산뿐만이 아니라 학력과 직업 등으로 형성된다. 게다가 거기에는 자신 말고 부모의 소득과 자산, 학력과 직업 등도 반영된다. 특히 계층 의식이 그 사람의 성격과 가치관, 취미, 행복함을 느끼는 정도, 이상적인 가족상 등과 깊이 관계되어 있다. 하류라는 것은 단순히 소득이 낮은 계층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커뮤니케이션 능력, 생활능력, 노동 의욕, 학습 의욕, 소비 의욕 등 한 마디로 발전적인 인생에 대한 의욕이 낮은 자들을 뜻한다.  그러나 근대화 이후 수상한 식모들은 하류하고 부르기에 너무 강한 자의식이 내재되어 있다는 반증을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박진규의 <수상한 식모들>이고 그것은 바로 수상한 하류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108 범녀신화가 있긴 하지만 그녀들의 본격적인 활동이 이력을 파악하려는 시돈느 무모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호랑아낙들은 체계를 갖춘 집단이 아니다. 그렇다고 사당패처럼 무리를 지어 다니며

재주를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각기 다른 자기의 신분을 방패로 삼아 본모습을 감추고 지배계급을 농락했다. 호랑아낙의 신분은 대부분 참수당할 때에나 세상에 드러났다. 다만 구전되어오는이야기에 따르면 민란이나 학살 혹은 혼란이 일어날 때마다 호랑아낙들이 늘어났다고 전해지기는 한다. 지아비 혹은 가족들이 몰살당한 경우에 갈 곳을 잃은 어린 여아나 부녀자들 중 몇몇이 호랑아낙의 길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을 이끄는 것은 기존에 몰래 활동하던 호랑아낙들이다.

주로 입이 무겁되 겁은 없으며, 딸린 식구가 없는 여인들이 호랑아낙으로 뽑혔다. 그 범녀들은 구전되어 오는 호랑이 신화를 듣고, 또 선대 호랑아낙들의 활약상을 듣고 그들 특유의 비방까지 전수받는다. 어떤 비방의 재주를 가지느냐는 어떤 선지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일이다.

조선 영정조시대에는 호랑아낙의 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던 시기였다. 이것은 조선시대의 짧았던 영화와도 맞물려 있다고 여겨진다. 이 시기에 범녀들은 다시 산으로 들어가 혼자 굴에 숨어 생을 보냈다. (중략)

당시만 해도 호랑아낙들은 신분을 떠나 다양한 계층에 두루 존재했는데, 어떤 이들은 왕실의 궁녀나 상궁으로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연산군 폐위시 재빠른 역할을 했던 이들이 대부분 왕실의 호랑아낙들이었다. 또 광해군을 도왔던 이들도 대부분 왕실의 호랑아낙들이었다고 한다.) 사대부 부인들 중에도 호랑아낙이 있었다. 물론 그녀들에게 호랑아낙의 신화와 삶을 전한 것은 주로 노비나 상인, 광대패 출신의 천인 호랑아낙들이었다. 상대적으로 행동이 자유로웠던 하층민 호랑아낙들은 양반 가문이나 왕궁의 호랑아낙들의 밀서를 가지고 발빠르게 움직이곤 했다. (수상한 식모들, 33~35)

, 재미있다. 어찌 이리 생각할 수 있었을까나.

 

109 호랑아낙의 역사에는 많은 직업과 사상들이 명멸하는 면도 있다. 호랑아낙은 때로는 점을 치는 무속인으로, 때로는 동학혁명에 참여하거나, 천주교 신자로 활동하다 순교하거나, 약초와 마법을 연구하며 그들의 삶을 지탱해왔다. 그러다가 그 수가 조선조 영정조 시절에는 현저하게 감소하였다. 또 조선이 패망의 길로 나아갈 때 그 수가 급증하여 동학혁명의 참여자들 대다수가 그들이었다. 호랑아낙의 신분 역시 상궁이나 사대부 부인, 노비나 상인들 등 다양했다.

마녀와 비슷하군. 재미있다. 나도 호랑아낙이나 되어볼까?

 

110 호랑아낙들은 곰여인들과는 달리 제도권에서 밀려난 패배자였기에 체계가 갖추어져 있지 않아서 해석하기가 어려운 면이 있다.

연구자의 해석보다 작가의 원문이 훨씬 찰지다. 입에 쩍쩍 붙는다.

 

111 승자 웅녀의 이야기가 아닌 패자 호녀의 이야기를 전면에 부각시키고, 패자의 계보를 잇는 호랑아낙, 여성들의 집단무의식에 숨죽이고 있던 호랑이 여인들이 지배 계층에 억눌려 왔던 패자의 복수심을 내존해 왔다는 전제하에 그 집단무의식이 식모의 계보를 대필하는 화자에 의해 드러나게 만든 것이다. 호랑이 스스로의 힘으로 여자가 된 것은 남성 중심의 신화를 여성중심으로 바라본 여성의 재발견이며, 거대집단에 대한 항거이자 호랑이 이야기의 후일담을 전면에 세운 또 하나의 가상신화인 호녀신화를 새롭게 해석해볼 수 있는 하나의 틀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여기서 특수교사와 특수교육보조원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특히 50대에 무기계약직 학교회계지이 되려고 하는 이들.

 

114 조부--자 삼대의 남성 군단은 어머니와 아내가 아닌 식모와 밀착된 삶을 살아온 공통 내력이 있다. 아마 그들 모두는 식모들로부터 유사 모성을 느끼며 향수하고 있고

어머니는 근대화 과정에서 일하러 가고 부자집 아이들은 식모에게, 가난한 집 아이들은 할머니에게 유사모성을 충촉하며 자라났다. 이 말이 맞아들어가네. 그러니 그걸 인정하고 할머니가 기른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되어 가정을 꾸렸을 때 어떻게 할 건지를 생각해보면 되는 거지.  

 

115 수상한 식모들은 어깨를 웅크리고 숙여 이글이글 타는 눈을 감춘 채 부르주아의 가정집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그들의 손에는 호랑이의 이빨만큼이나 날카로운 식칼이 쥐어져 있다. (수상한 식모들, 36)

 

116 나는 강순애를 통해 식모들의 보복이 훈련된 생리이며 집단적 광기이고 그녀들은 이기적 족속들이고 타인들의 정신적인 살점을 뜯어먹고 사는 것이라 알게 된다.

 

118 * 강순애는 최윤의 소설 [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를 원작으로 한 영화 꽃잎의 주인공이 연상된다.

 

123 우리의 집단무의식에 숨죽이고 있던 호랑아낙들은 지배계층에 억눌려 패자의 복수심을 보존해 왔고, 그 집단무의식을 식모의 계보를 대필하는 화자 나에 의해 드러나게 된다. 

 

새로 쓴 주몽신화연구 서정주,송수권,윤금초,이광수,송하춘 작품을 중심으로

1.     <주몽신화> 원전 및 새롭게 쓰기

2.     다시 쓴 시에서 유화주몽캐릭터의 표출 양상

1)     햇빛의 연인 모태 신앙과 대왕의 사주적 자격론

2)     영웅적 삼대 정체성 확인과 지혜 요청하기

3)     적소지에서 탈출과 고구려 열기

3.     다시 쓴 소설에서의 유화주몽캐릭터의 표출 양상

1)     아들, 남편, 아버지로서의 영웅 주몽의 일생과 여성들의 힘

2)     하백의 딸 생명의 잉태 과정 유사 심리와 삼신 수호신

4.     다시 쓰여진 주몽유화해석하기

 

133 주몽의 부 해모수는 해님으로서 천신과 관계되고, 그의 모 유화는 수신 하백의 딸로서 지모신, 곡모신에 해당된다. 주몽이 물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은 청룡의 운명으로 태어난 이유도 있지만, 그것은 유화가 수신 하백의 딸이기에 곧 그는 용녀의 아들이 되기 때문이다.

 

133 대왕이나 성왕이나 왕중왕 짜리가 적어도 될랴면은

되도록이면

처녀가 시집가기 전에 되게 야합해서 낳는 게 좋은데

그 중에서도 특히

하느님이라든가 해님의 넋을 붙어 그랬노라고

그 핑계가 아주 썩 잘 풍류로 된 아이가 좋나니

그러구선 또

이걸 자알 이해해 맡아 길러 주는

성인 같은 의붓아비가 있어야 하나니

그대는 무엇보다도 무기를 일등을 잘 다루고

참말보다 나은 거짓말을 골라서 자알 해내고

죽게 되는 마당에는

비호같이 아주 잘 뺑소니를 칠 줄도 안다면

그대 어느 구석땅에 몰릴지라도

아무렴, 대왕이나 성왕 하나는 너끈히 될 것이오.

또 어쩌면

한 나라의 시조왕까지도 될랴면 될 것이니라  (서정주 고구려 시조 동명성와 고주몽의 사주팔자’)

 

144 유화는 길 떠나는 주몽에게 그의 출신성분을 알려주며, 또 어린 시절 주몽의 비범성도 상기시켜 준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동방으로 가면 바닷가에 좋은 땅이 있으니 거기 가서 큰 나라를 세우라며 아들 주몽에게 웅지를 심어준다.

 

145 주몽이 영웅으로서의 일생을 살 수 있었던 밑거름은 어머니 유화가 지원해 준 힘 때문이었다. 주몽을 영웅으로 만들어낸 유화부인은 아들 주몽의 웅지를 키우고 지혜롭게 조언하는 자로 활약하여다고 볼 수 있다.

나도 동의한다. 유화부인의 힘이었다. 미혼모였고, 아버지 집에서 쫒겨났고, 후처였다. 그녀의 힘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146 이광수 [사랑의 동명왕]

주몽은 옆에 찬 칼을 빼었다. 그것은 간밤에 그 어머니께서 받은 것으로서 아버지 해모수가 남긴

신표였다. 주몽은 달빛에 번쩍거리는 칼날을 들어서 하늘에 빌었다. 하나님과 물귀신이 이 칼을 가진 자를 지키소서 함이었다. 그리고 그 칼을 중동을 분질러 두 동강으로 내었다. 그것이 부러지는 소리 쇠복을 힘차게 치는 소리와 같이 울려서 예랑도 강월도 놀랐다. 주몽은 자루가 붙은 쪽을 제 칼집에 꽂고 자루가 없는 쪽으로 제 옷자락을 싹둑 가로 베어 그것에 칼끝을 싸서 예랑으로 주며 이것이 신표요, 이 칼과 옷자락, 이것을 가지고 오는 자는 내 아들 유리면이요, 이 칼을 지닌 자를 아버지 하느님과 할아버지 하백이 지키실 것이니 어느 누가 감히 벌하랴

하고 왼손 끝으로 예랑의 배를 가리켰다. 그렇게 하는 주몽의 얼굴에는 무시무시한 위엄이 있고 눈은 불이 나는가시피 번쩍 빛났다. “유리명이라 하시니 애가가 나면 유리면이라 부르리까?
어머니에게서 받은 아버지의 신표를 분질러 여자에게 주었다. 그는 이미 부모를 넘어섰다. 만약 유리명이 남자가 아니라 여아였다면 역사는 어찌되었을까? 나의 상상력이 불온하냐?

유화부인과 예랑 모두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를 낳았다. 미혼모로 아이를 길렀는데 그 아이들이 모두 개국의 왕, 2대 왕이 될 수 있었다. 어째서인가? 아들에게 아버지를 좋은 사람으로 말해줌으로써 (이건 말만 그런게 아니라 진심으로 잠깐 스쳐가는 인연이었을 뿐인 그 남자에 대해 여자가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자신에 대해 긍지를 지닐 수 있게 했다. 이건 법문에서 줏어들은 내용이지. 그런데 내 보기에 미혼모의 지위에 있으면서 남의 남자에게 그의 소생이 아닌 아이를 데리고 재가해서 살면서도 어찌 아이의 마음을 그늘지우지 않고 웅지를 지킬 수 있었을까? 어머니, 하늘 아래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자리. 

 

150 모둔골은 원래 조시누 공주의 땅이었다. 조시누 공주는 전남편이 다스리던 고을인 모둔골을 주몽에게 바치고 자신은 어린 세 아이를 이끌고 홀승골로 오게 되었다이 지역을 기반으로 주몽은 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등극하고 조시누 공주와 혼인이 이루어진 것이다.

터전이 되었던 공주는 약해지고 그녀를 밑천으로 했던 주몽은 거대해졌다.

 

151 아들에 대해 특별하게 생각하는 주몽은 원래 온조를 두고 가슴이 뭉클했던 적이 있고, 어린 아들 온조에게 깊은 애정을 느끼기도 했다. 주몽의 이런 점은 항상 자신이 아버지없는 설움을 당할 때 금와왕이 자기를 아들처럼 사랑해 주었던 은혜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주몽은 따뜻한 부정의 소유자다.

양부를 양부로 되갚다.

 

152 1년후 백제의 시조가 될 온조는 고구려 국민의 축복하는 눈을 뒤로 하고 동으로 말을 달렸던 것이다. 이러한 아들 온조와 달리 어머니 조시누는 끝까지 남편 주몽을 위해 나라를 내주고 조용히 헌신하기로 결정한다.

주몽은 왕이 되려는 자. 많은 이들이 그를 돕고 있다. 유화부인, 조시누

 

152 유화, 예랑, 조시누는 모두 한국 어머니의 전형적인 현신들이라 할 수 있다.

 

157 유화는 여성들의 특유의 힘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송하춘의 [하백의 딸]은 비정상적 탄생과정과 생명보호라는 차원에서 <주몽신화> 모티프가 투영되어 나타나고 있다. 

10대 여고생, 조산하백의 딸들이 지금도 많겠구나.

<아도니스의 귀향>에서 나는 그녀를 기억해내려 한다. 아이는 입양되었다. 상상한다. 사회보장이 잘 되어 있는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 자라나 한국으로 돌아오는 서른 살 즈음의 한국계 프랑스 여자를. 무라는 아버지의 아이를 낳았다. 아도니스. 그는 아프로디테의 연인이었고, 그를 아껴서 사냥에 나가지 말라는  여신의 말을 듣지 않다가 사냥터에서 죽었다. 그러니 아도니스는 그저 난자와 정자는 만나면 수정란을 만들고 별 일이 없으면 아이로 태어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해외토픽에 나왔던 남미의 아버지들, 딸을 가둬두고 아이를 서넛씩 낳은 이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딸을 소유물로 취급한다는 점에서는. 그 옆의 어머니는 부재하거나 부재와 마찬가지다. 무력하거나 남편에게 철저히 귀속되어 있다. 영화 <그을린 사랑>은 오이디푸스콤플렉스를 드러낸다고 읽었다.

 

 

제3부   처용 새로 쓰기

 

 

처용가관련 현대소설의 유형과 의미

1.     처용가의 의미와 소설로 새로 쓴 처용가

2.     캐릭터 처용역신의 심리학과 그 의미망

1)     무관심과 방관 심리의 표출과 상동구조

2)     추악한 그림자 분신과 가학적 치유제로써 처용나무

3)     이중의 각도 비유, 각도 이전의 떠돌이 처용과 생불로 환생된 처용

4)     무의식 몽환 세계의 리비도의 변주와 명명의 언술

3.     창작의 수용과 상상력의 변천

1)     사건 촉발의 가능성과 야합 이미지

2)     도통과 악마적 구도법, 남성 심리의 반응 유형

3)     불교의 아수라도 이미지

4.     처용설화의 원형적 패턴과 해석적 재생산의 의미

 

162 처용가에서 중요한 모티프는 처용과 역신의 캐릭터이다. 이 두 캐릭터는 특히 남성의 내면에 자리잡은 인간의 양면적 심리로 볼 수 있다.

 

163 처용은 궁 밖에 있을 때처럼 궁 안에 들어가서도 바람둥이 생활을 하고 있다. 이러한 처용에게 심한 질투를 느끼던 나는 어느날 도화를 위로해 주다가 그녀와 엉켜 지내게 되는데 그날따라 처용이 일찍 귀가한다. 나는 처용과 한판 겨룰 생각이었는데 뜻밖에 처용은 그냥 집을 나가버린다. 그러한 처용의 태도에 나는 또다시 패배감에 젖게 된다.

난 년, 난 놈이어서? 이 치정에 얽히지 않는 건 거기 감정이 없기 때문?

저도 바람을 피우니 그나마 공정거래 의식은 있구나. 저는 되고 아내는 안되면 그건 불공정거래.

아니 근데 이걸 가지고 대범하다고 본다니

 

165 소설 <처용의 적>에서 방기환은 처용이 자기 아내인 도화와 나(역신)의 관계를 무시하고 방치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아내 도화에게도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도화와의 사랑에 가치를 두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 도화는 얼굴이 반반하고 하루라도 사내없이는 못사는 성향의 여자로 설정되어 있다. 그래서 처용이 결혼전에 입궐하자 동네 총각인 나에게 접근해 육체관계를 가진다. 그러다 처용에게 시집가버린다. 처용집 부엌 생선 대주는 자가 되었다가 저리 된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처용과 도화 모두 유희적 사랑을 하고 있는 거다. 그들은 둘 다 별로 소유욕이 없다. 역신이 소유적인 사랑을 하는 거지. 사랑의 종류가 다르다.

 

166 윤후명의 <처용나무를 향하여>

 

166 처용과 역신의 이중심리를 한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양면의 요소-그림자 분신과 이상적인 심리-로 환치하여 표현하는 것이 이 작품의 특징이다.

그림자든 이상심리든 남성 안 그늘의 이름 다른 검은 부분이리라.

 

167 일명 처용나무라고 하는 엄나무가 역귀를 막아내고, 망루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168 의처증 관련해서 비롯된 추악한 상상을 하는 고통과 자각의 과정 치유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에서 역신에 비견되는 모티프는 그림자 분신이며 이는 의처증이 심한 나의 다른 심리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

 

169 나는 처용가를 부르며 옛 신라 지역을 떠돌고 있는 34세의 남자다. 아내는 32세로 현재 동경의 광고 스쿨을 다니려고 유학하고 있어, 일시적으로 나와 별거 중이다.

 

169 한 달간 아무 연락이 없는 아내는 섬나라에 있고 나는 길 끝의 길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나날 속에 실종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나는

 

170 길 끝에 길이 있다. 때로는 게처럼 짜디짠 눈을 달고, 숯불 같은 마음이 되어 바다로 가고 싶었던 것이다. 삶의 거적때기를 벗고, 닫혔던 모든 문을 열고, 사랑이라는 것도 훌렁 벗어버리고 때로 길 떠나자 하는 마음을 어찌하랴. 이렇게 불현듯, 실종되고자 하는 울울한 마음인들 어찌하라 오늘 저 바다는 시작도 끝도 없이 출렁이고 있다. 누군가 길 끝에서 처용무를 추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역시 이번에도 연구자의 글보다 소설가의 원문이 아름답다. 연구자의 글은 안내자, 거간꾼의 말 같다. 길 끝에서 실종되고자 하는 마음이 어떤 것일까?  

 

171 이러한 설정은 어떤 면에서 두 얼굴을 갖고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 자기 아내에게는 남편일 때 처용 역을, 남의 아내에게는 그 남편 입장에서 보면 역신 역을 하면서 방랑길에서 오락가락하지만 결국 삶의 지표적 모델이 있다. 르네 지라르가 밝히는 욕망의 삼각형의 극점에서 보면 해탈을 지향하고 있고 그것은 삼촌의 삶이 바로 해탈의 삶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다.

그렇다. 누구나 두 역할을 한다. 새해에는 남편아내를 신 외래어로 나의 세계에 통용시키려 한다. 그러니 역신의 입장 보다 자주 처용의 입장이 된다. 그러나 사람 살아가는 일 어찌될 지 모른다. 세를 살기를 거부했던 것은 역신의 자리에 놓여지는 미묘한 초대들은 널려 있기 때문. 사랑이 결혼 안에서 실종되어 버리면 다른 데로 눈이 가는 건 당연한 것 같다. ‘사랑또는 생존에너지는 필수적인 것이어서 반드시 취해야할 테니. 사람마다 필요로 하고, 잘 할 수 있는 사랑의 종류가 다르니 그게 참 어려운 일인듯하고, 결혼제도 안에서 이미 관습적으로 내려오는 역할이란게 또 골때리는 면이 있는 듯하다. 겁은 나지만 어쩔 수 없다.     

 

174 이 소설(이인성 [강 어귀에 섬 하나]) 에서는 특히 무의식 세계의 심리를 몽환 의식 기법으로 보여주고 있다….여기서 바닷가의 섬이란 공간은 쾌락적 심층 공간이라 볼 수 있다. 나는 거기서 그녀를 만나는데 그녀는 나를 처용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자신의 이름은 만희滿熹 라고 한다. 그녀는 관능적이며 악마적이다. 그녀의 집에서는 무당탈, 부네탈, 처용탈, 백정탈, 소무탈 등을 매개로 다양한 가면극이 연출된다. 그러나 그녀의 집은 말 그대로 환상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이 전체의 줄거리이다.

소설가들이 바로 지금도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다. 이런 집에 초대받고 싶어하는구나. 헨절과 그레텔의 과자로 만든 집 같은 곳이다.  

 

178 작가는 처용이 자기 아내와 귀신의 관계 현장을 목격하는 극적 순간이 도래하기 이전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즉 무엇인가 벌어질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 직전까지 격발의 이미지를 촉발시켜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 태연히 놀다 돌아왔는데 댓돌에 신발은 두 켤레, 다리는 넷이라면 격발이지. 자기가 놀다오든 말든 이런 상황에서는 눈 뒤집혀 살인이라도 일으킬 테세인게 보통 사람의 심리다.

 

179 나는 어쩌면 그를 잘 알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글쎄 그는, 한 곬에 심긴 세번째 나무거나, 어쩌면 첫번째 나무일지도 모른다. 그의 눈은 충혈되어 번들거리고 있을 것이며, 입술엔 습기가, 가슴엔 불이, 치골엔 가려움증이 일고 있는 것이었다. 제 일의 처용은 숨어서 보고, 제 이의 처용은 각시의 뒤에서 자고, 제 삼의 처용은 각시의 앞에서 잔다. (박상룡, [죽음에 대한 한 연구-] 282)

욕망에 든 남자의 몸

 

181 박상륭의 <칠조어론>에서는 처용가를 여러 단계로 재해석하면서 인간의 심리를 드러내기 위한 원형적 은유로 표현하고 있다.

첫째, 처용가는 비화현, 화현의 도식이며 이러한 처용가의 비의를 빌려와 우주적 비밀의 방을 훔쳐보고어쩌고 더 이상 치기 싫다.

둘째, 이양일음 구조는요셉과 마리아와 정혼한 사이에 성령의 내방이 있고, 요셉+마리아+성령의 관계 또한 이양일음 구조를 취하고 있다고 보았다….삼각심리라 볼 수 있다. 흥미롭군

셋째, 영매접신가로서 처용을 보여주고 있다.

 

184 처용은 역신이 함께 누워있는 것을 구축하기 위하여 창가 작무를 하는 것이며 이 행위는 무당의 치병굿으로 볼 수 있기에 처용가를 무속적 향가로 볼 수 있다.

 

186 그러는 동안 그 스스로 짐승을 극복하려 할지도 모르며, 어쨎든 하루 중의 반은 그것도 은밀해야 되는 그 시간엔 그는 사람의 남자인데, 뿐만 아니라, 수피를 입은 그는 그대로, 늠름할 뿐만 아니라, 자랑스럽고 사랑스럽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아으, 처용댁의 공화적 임이여, 그래서 계집들마다 짐승을 낳는 것이러람. ‘어머니란 그래서 짐승을 낳은 여자의 의미일 터인데, (이 자리에 표절되어진 두 동화의 법을 따른다면) 그 허물이나 털을 벗겨주는 자도 또한 어머니되, 이번엔 (남자의) 아내라고 불리는 듯 하다.

(박상륭, [혼방된 상상력의 한 형태1-동화에서 신화를, vice versa] ,157)

이번에도 원문이 아름답다! ~!

 

187 거기서 한참 벗어난 데서부터는, 나무꾼들의 왕래가 잦았던지, 아니면 비 올 때로만 생기는 도랑이 흘렀던지, 제법 걸을 만한 오솔길이 트여져, 산로는 자기의 행망에 가락이 잡히기 시작한다고, 좀 후후거리며, 길섶의 이슬을 찼다.

 

190 공교롭게도 이 장에서 살펴본 5명의 작가가 모두 남성 작가들이다. 그들은 남성의 심리적 상태를 처용과 역신의 심층 심리를 독특하게 남성에 내재되어 있는 내면 세계로 재조명했다고 볼 수 있다. 여성적 처용의 모습을 그려낸다든지, 처용의 아내를 주체적 화자나 서술자로 하는 작품을 발견할 수 없는 점이 아쉽다고 볼 수 있다.

문정희씨의 시가 있었다. 찾아보자

이 논문은 [문예창작논문], 명지대학교 문예창작과, 2007 335~364에 실린 원고라 한다.(161)

그럼 문정희씨의 시가 그 이후에 창작되었나?

 

액자구조로 다시 쓴 처용가의 의미

이 논문의 소제목을 별로 베끼고 싶지 않다. 논문 자체가 별로 재미가 없었다.

작품 안에 사이코드라마 처용의 웃음소리’, 희곡 처용단장’, 소설 처용은 노래한다이 들어있다는 건데 차라리 해당 작품을 다시 읽어보는게 낫지 이렇게 분석하는 글은 머리가 복잡했다.

처용의 웃음소리 (1981) – 신상성 소설 : 사이코드라마

처용단장 (1993) – 김소진 소설 : 작중 희곡

 

194 구석에 처박힌 짐과 책들을 꺼내 먼지를 털면서 찾고 있는 예하를 들비가 곁에서 같이 거들어 주었다. 그리고 앨범을 찾아 넘기면서 옛날을 같이 회상했던 것 뿐이다. 그것이 전부다. 그 현장을 번쾌는 오해했던 것 같다. 그동안 혼자서 소심하게 축적해 왔던 콤플렉스가 우연한 현장 목격으로 폭발한 것이다. (신상성 처용의 웃음소리’, 20-21) 

 

197 사이코드라마의 마지막 장이 바로 처용무 판이고 환자들 전부 처용을 중심으로 원무를 춘다. 이 춤은 하나의 물결이며 흥분의 도가니를 일으키고 우주가 감정의 물결로 출렁이게 한다. …후렴구에서 장번쾌도 처용의 뜻을 몸으로 느끼며, 처용의 넓은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노래와 춤의 치료적 효과. 처용무는 의처증 환자한테 탁월할 것 같다.  

 

200 현재의 나는 사법고시2차에 합격한 상태인데 소주 개발에 바쁘다는 아내는 나와의 동침 약속 날짜에는 꼭 외근을 한다.

그동안 몇 년간 사법시험 준비하는 남자의 옆에서 마음 고생했을 여자가 살펴진다. 또한 가장 취약한 상태였을 남자의 끊어질듯한 예민함, 고달픔 역시

 

200 나는 아내와 그의 관계를 의심하지만 이해하고 넘어간다. 권희조는 내가 나중에야 밝힌, 자기가 만난 여자가 나의 아내라는 사실을 듣고, 경악하며 죄의식에 사로잡힌다.

 

내가 요즘 사련에 빠져있는 거 아나? 뭐라고 사련? 사련 좋아하고 자빠졌네. 처녀 총각이 만나는데 사련이고 자시고가 어딨어? 쉬운 말로 불륜의 관계지. 희조 니가 정말로 응? 그럼 유부녀란 말이지. 하긴 너란 놈은 일찍부터 여복이 있었던 놈이지. 상대는 누군대? 고향 후밴데 남편하고는 일이 잘 안되나봐. 누구는 좋겄다. 나는 조금 빈정거리는 말투로 대답했다. (김소진, 225) 

 

202 그래 나는 서른 살의 처용이다. 하루에 한 번쯤은 해탈을 할 나이다. 그런데 해탈은 어떻게 하는 거지. 나는 짐짓 힘차게 대문을 주먹으로 쾅쾅 두드리며 소리내어 아내의 이름을 길목이 떠나갈 듯 크게 불러 제꼈다. (234)

마흔, 하루에 한 번쯤은 ~~~~할 나이다.’ ~~~에 들어갈 말을 골라 문장을 완성하시오.  

 

203 이러한 여정 속에서 거세된 남성 처용은 아내와 잠자리도 함께 하지 않고 매일 연회에만 몰두하며, 그 결과 왕권은 안정되게 그린다. 또 권희조는 처용이 권력의 감미로운 단물에 빠져 정신을 가누기 힘들던 어느 날, 귀가하여 자기집 규방의 방문을 열어 불륜의 현장을 목격하게 되는 장면을 넣어 보여주고 있다.

그가 빌미를 제공했구나. 가족의 이름으로, 또는 가족의 행복을 보장하는 경제력을 획득한다는 명분으로 나섰지만 사실 그는 부재했다. 그러나합법적인 이혼 사유에 대해 정리를 좍 해보고 싶어지네.

 

204 희조는 입술을축이며 말했다. 이때의 처용의 마음을 적절하게 읽은 60년대의 시인이 있었지. 그게 누군데? 두말할 것도 없이 시인 김수영이지. 그래? 그가 시론을 논하면서 응축해 놓은 비수같은 말을 처용의 입을 통해 되풀이한다면 이렇게 될 걸, 아아 향가여 침을 뱉어라, 풍자가 아니며 해탈이다. 이 비극적 상황, 자신의 변절로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권력의 늪에 깊숙이 휘둘린 걸 안 처용은 분노의 주먹 대신 체념의 춤을 출 수 밖에 없었을 테지 (김소진 237~239)

 

204 서라벌 밝은 달 아래

밤새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가랑이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 사람 것이 분명한데

둘은 도대체 누구 것인가

원래 내 사람이던 이를

빼앗아가니 낸들 어쩔 것인가

 

212 역신이 사모했던 처용의 아내와 동침할 때 처용가가 소개되고, 처용은 노여워하지 않는 것, 처용의 모습을 보면 귀신이 물러가고 경사로운 일은 맞이한다고 하는 부분도 그 책을 통해서 읽는다. 

 

215 그의 처가 외간남자와 정을 통한 사건은 개혁조치의 입안실행자인 그를 밀어내려는 음모임을 왜 그들이, 음모를 눈치챈 백성들이 곧장 소문을 퍼뜨렸을 것이다. 처용이 자기 처를 범한 역신을 손 한 번 쓰지 않고 노래로 물리치고 항복까지 받아냈다고, 패배해 쫒기던 그를 단번에 승리자로 만든 것이다. 백성들은 노래로 패배와 조절의 기억을 역전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힘이 다시 처용을 도성으로 부른 것이다. 강일은 처용가의 뒷골목을 대충 그렇게 짐작해본다.

(구광본, [처용을 어디서 다시 볼꼬], 238)

 

216 강일은 골품에 얽매이지 않고 적인을 등용했으나, 난관에 봉착한 것은 기득권을 쥐고 있는 귀족들 때문이라는 것도 밝힌다.

 

217 강일은 자신의 작가로서의 삶 전체를 경주와 신라인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켰다고 말한다.처용을 포함한 신라의 혼은 성속을 넘나들며 원융무애한 삶을 산 대자유인 원효와, 용서의 노래와 화해의 춤으로 삶의 비극성을 극복하고자 한 처용과 관련지어 고뇌해 볼 때 의의가 있다고 보았다.

 

217 이태경의 작중서설 처용은 노래한다에서 중요한 의미는 강일이 처용과 영혼의 계약을 맺으며, 계시의 혈통과 도의 융합을 꿈꾸며 원대한 세계의 실현 가능성을 피력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오 영혼의 계약 파우스트식. 처용에서 이런 걸 끌어내는구나.

 

219 그가 바라본 이광우 형제는 율법의 수호자로서 누군가를 추적하고 있고, 그 형제의 행위에 대해서 이방인의 우물에서 영적 갈증을 해소하는 것인가에 대해서 반문해 본다.

 

222 경숙은 이태경이 문학 때문에 종교를 버린 것일까를 생각했다. 그녀는 처용은 노래한다’f는 작중소설은 인간극이며, 인간의 이해는 신의 이해가 따르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과연 인간에 대한 이해는 신의 이해 다음에 오는 걸까? 너무 기독교적인 발상인 건 아닌가?

 

 

제4부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황진이 새로 쓰기

 

 

여성작가가 새로 쓴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연구

-김혜순, 문정희, 윤정선 작품을 중심으로

 

230 낙랑왕은 자신의 딸이 군사 기밀시설인 무고를 부숴뜨려 전쟁에 패배하게 됨을 알고 그 딸을 죽이고 결국 고구려에 항복하고 만다. 한편 왕자 호동은 적자를 낳은 왕비에 의해 모함을 받아 왕의 처벌을 받게 된다. 그러나 호동은 왕비에게 받은 모함을 해명하면서도 자신의 정의를 드러내는 것을 원치 않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근심거리가 되고 싶지도 않아, 효도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자살한다.

 

231 시의 경우 문정희, 김혜순, 임영조는 낙랑공주의 입장과 신기한 무기 자명고를 중심으로 재창작하고 있다.

 

231 희곡적인 재창작의 경우 특히 많은 작가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 설화는 극적 갈등과 그 해결의 요소가 풍부해 다른 장르보다 희곡으로서 활발하게 재창작되어 왔다.

 

233    (1) 그녀가 온다. 북을 둥둥 치며 온다. 하늘의 고막을 둥둥 울리며 온다. 벼락을 안고 오는지 대문이 저절로 무너진다. 그녀가 온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그녀의 마음이 내게로 온다.

(7)   내 마음이 둥둥 울린다.

(8)   이렇게 두꺼운 아버지의 고막을 짖고 그에게 가리

(9)   나는 마치 바다를 깔고 누운 것 같다.

(10) 커튼을 치고 뇌파를 차단하고, 아아 그녀가 떠들썩한 텔레비전 방송국을 망치로 내리친다. 베개에 피가 번진다.

(11) 내 온몸의 세포가 나를 떠나려 한다. 심장이 번개처럼 갈라진다. 나는 벼락맞은 땅처럼 아프다.

(12) 그녀가 온다. 내 몸속으로 온다. 일곱 시간째 걸어온다.

(13) 파수병이 깰 것이다. 아 아 아버지의 군대도 깰 것이다. 잘 당겨진 북처럼 팽팽한 하늘을 달이 텅텅 친다. 잘 당겨진 북처럼 팽팽한 하늘을 달이 텅텅 친다.

(14) 그녀가 온다. 태풍의 눈을 둥둥 두드리며 온다.

(15) 나는 그녀가 잘 지나가라고 내 몸을 판판하게 펴준다. 내 몸 위로 말발굽이 지나간다.

(16) 그녀가 내 몸속에 칼을 높이 치켜든다. 어디선가 전투기들이 출정한다. 멀리서 온 북양함대가 전멸한다. 텔레비전 방송국이 폭발한다. 궁성의 우물들이 넘쳐흐른다. 그녀의 눈 속에서 샘물이 철철 속아 흐른다. 안 보이던 별들이 비오듯 쏟아진다. 물쥐들이 머릿속을 갉아먹는다. 그녀가 온다. 아직도 온다.

(17) 아버지의 궁성이 땅속으로 꺼지고 거기서 연못이 솟아오른다. 수양버들이 미친 듯 흔들린다. 그녀가 운다. 천둥 번개를 안고 운다.

(18) 아버지의 북이 둥둥 울릴 때마다 내 안의 병사들도 출정한다. 내 몸 속에서 시냇물처럼 소리치며 쉼없이 흐르던 칼의 바다

(19) 아 아 아버지, 이 북을 찢고 그를 만나러 가리. 그녀가 울면서 온다.

(김혜순, ‘낙랑공주전문. 번호, 연구자)

북이 이야기를 하는 듯 하다.

 

236 [딸의 소식] 문정희

아버지, 저 여기 살아 있어요.

그날 제 품에 숨긴 칼로 낙랑의 북을 찢을 때

제가 찢은 것은

적이 오면 저절로 운다는 자명고가 아니었어요.

제 운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손으로 아버지의 나라를 찢었습니다.

지금도 그 순간이 선명합니다.

두려움과 죄의식으로 후들거리며

맹목 속에 온몸을 던진

저는 그때 미친 바람이었어요.

호동은 달처럼 수려한 사내

하지만 북을 찢고 제가 따른 건 호동이 아니었습니다.

제 사랑은 전쟁의 아찔한 절벽에 핀 꽃, 세상에

파멸로밖에 보여줄 수 없는 사랑이 있다니요.

검은 보자기 홀로 뒤집어쓰고

손에 쥔 칼 높이 들어 북을 찢을 때

하늘의 별들 우르르 떨던

그 캄캄한 절망만이

온전히 제 것이었습니다.

 

238 문정희는 딸이 아버지와 통합되던 시대에서 딸이 아버지와 분리, 남자에게 탈출하는 그 여정 전단계에 여성 심연의 깊은 자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이 때 그것이 바로 아버지 국가냐 남자 국가냐의 갈림길이 되며, 이런 자신이 처한 모순적이며 운명적 정황에 시인은 눈을 돌렸던 것이다.

딸이 아버지와 통합되던 시대에 아버지와 분리되기 위한 방법은 단한 가지 남자를 따라 나서는 것밖에 없었던가? 하길 그 시대에 스스로 따라 나설 남자를 선택하겠다는 것도 대단한 일이겠지.

 

239 질투와 야욕, 자아 각성과 사랑 의식 윤정선의 희곡 [호동]

 

239 이 희곡의 서막은 고구려 궁성의 한적한 곳에서 점술사의 예언이 있고 왕비가 원자를 낳는 것으로 시작된다.

 

241 왕비 : 그렇다! 공주! 나는 용서할 수가 없다. 절대로 용서할 수가 없다. 네가 만약 아름다운 여인이라면 왕자를 호린 그 아름다움을 용서할 수 없다. 네가 만약 못난 여인이라면 나의 사랑을 차지한 그 뻔뻔스러움을 용서할 수 없다. 네가 가지고 있는 그 충만한 젊음을 용서할 수 없다. 내가 숨어서밖에는 사랑할 수 없는 나의 님을 떳떳이 차지할 수 있음을 용서할 수 없다. 내가 벌하리라. 이 고구려의 왕비가 너를 벌하리라.

아아! 공주의 살내음에 아직도 취해 있을 왕자의 눈에, 질투로, 절망으로, 괴로움으로, 탄 재가 되어 버린 나의 몰골은 어떻게 보일까? 숨은 사랑에 질식하여 시들어간 나의 꽃다운 젊음은 어디에 가서 되찾는단 말인가? 가슴 찢어지는 고통을 털어놓을 곳 조차 없는! (윤정선, ‘호동’ 39-40)

원문이 더 아름답다.

 

242 왕자는 공주에게 고구려의 며느리가 되고 싶다면 왕자를 도와 고구려의 지어미임을 밝히라 한다. 왕자는 왕비의 말대로 공주에게 그 고각을 없애주지 아니한다면 예를 갖추어 왕자비로 맞을 수 없다 전하게 한다.

 

242 고구려에 궤멸당한 낙랑태수는 딸로 인해 벌어진 일임을 알고, 딸을 죽이고 항복하게 된다.

 

243 왕비 ; (점차 격앙되는 어조) 공주는 그의 사랑을 천지에 고하며 떳떳이 칼을 맞고 단숨에 죽어 갔으되, 그보다 더 오래 전부터, 왕자의 생각으로만 숨쉬며, 떨며, 한숨 지으며, 숨은 욕망의 부끄러움에 시들어, 아픈 사랑의 인두에 남몰래 지져지는 가슴을 부여안고 살아온, 또 한 여인은 어찌하려오? 사랑한다 외치며 죽어갈 수 있던, 님을 빼앗아간 공주를 질투하며 그 타는 불길을 끄지 못하여 몸져 누어야 했던 한 목숨을 어찌하려오? 호동 오오! (왕비, 호동을 끌어 안고 격정의 입맞춤을 퍼붓는다. 호동 망연히 서 있다가, 저도 모르게 왕비를 마주 끌어안는다. 오랜 입맞춤과 애무, 왕비 웃옷 벗어 버리고 침상에 몸을 던진다. (윤정선, 호동, 65-66)

 

244 마침내 호동은 부끄러운 자존심마저 끊어버린 왕비에게 마귀이자 구미호라고 소리치며 자신의 영혼을 어디에서 구하냐며 증오하게 된다.

 

244수치심과 모욕을 느낀 끝에 감정의 방향을 바꿔 호동을 증오의 대상으로 삼는다. …왕비는 호동을 파멸시켜 오래 전부터 자신을 파멸시킨 죄를 갚게 하고 복수할 것이라 다짐한다.

사랑과 미움은 동전의 양면. 사랑이 뒤집히면 강렬한 증오가 된다. 치정에 얽힌 범죄가 잔인하다.

 

245 나는 왕비가 부럽네. 그 악랄함이, 그 끓어오르는 육체의 욕망이 못내 부럽네. 공주를 죽게 하고, 지아비를 속이고, 그리고 사랑하였던 사내를 죽이려 하는 왕비의 치열한 삶이 나의 것보다는 멋지게 느껴지네. 아비의 침소에 아들과 뒹굴려던 그 욕정! 지아비의 아들 앞에 알몸으로 타오르던 그 살의 뜨거운! 나는 그 불타는 사랑을, 그 생명의 몸부림을 부당하게 모독하였어. 나는 그를 증오하거나 원망할 수 없네. 사랑하던 사람을 모함하는 그 악마의 불꽃에도 생명의 은총은 있어. 그는 적어도 그의 방식대로 아직도 사랑하고 있는 것이야. 자네도 인정할 걸세. 어느 의미에서 그 여인들은 둘 다 승리자임을 하나는 순정으로 다른 하나는 사악으로 선택의 강요 앞에 그들이 택한 것은 다르지마는, 그네들은 자신도 삶도 사랑할 줄 알았던 거야. 하나는 육신을 벌ㅆ고 또 하나는 영혼을 팔았지 그러나 나는 버릴 것도 팔 것도 없네.

 

246 프랑스 고전주의 작가 라신이 쓴 <페드라>는 아테네의 왕비 페드라가 의붓아들 이폴리트를 사랑하면서 두 사람이 모두 파멸하게 된다는 그리스 신화에 바탕을 둔 작품이다. 페드라는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몸부림치는 비극적인 여인상을 보여준다.

 

246 호동, 그로 인하여 세상은 비로소 충만하다. 저 돌도, 저 나무도 내게 호동, 호동 하고 인사를 한다. 발 아래 이름 모를 풀꽃들, 그 품에 나랠 접는 나비들도, 둥지 속에 조잘대는 졸리운 새들도떠오르는 달님도 호동, 호동이라 눈짓한다. 별님들도 호동 호동! 개구리도 호동 호동!...목덜미에, 허리에 와 감기는 바람마저도 왕자님의 부드러운 손길을 전하여 주는데, 님의 귀엔 정녕 들리지 않는 것일까? 내게 들려 오는 이 모든 소리, 그리움으로 떨리는 생명의 소리가..천지는 서로 부르고 답하는 영혼들의 소리로 가득하고, 서로 눈짓하고, 서로 부둥켜 안으며 서로를 확인하고 있건만오 그리운 왕자님의 음성(윤정선, 호동, 46-47)

읽고 싶다. 이 희곡

 

247 낙랑공주의 아버지에게 이 무기는 낙랑의 자존심과 같으며, 아버지의 심장과 같은 것이다.

그게 뭘까? 돌아갈 수 없어졌다. 다시는 거기로. 자명고는 찢기웠다. 죽었다. 돌아가지 않는다.

 

248 공주의 자의식은 무도한 사랑의 소유자인 자신은 괴물이라며, 사랑에 빠지고 왕자의 사랑을 얻는데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이미 다 부수어 버린 지 오래였다고 자인한다. 그 결과 인륜과 도리까지 저버린 자신은 이제 호동에 대한 하나의 양심만 있을 뿐이라 한다. 더군다나 공주는 왕자에게도 사랑으로 괴물이 되어 버린 흉악한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가 의문을 던진다. 어쨎든 처음 보던 날 공주는 왕자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익사해 버렸기에 지금 죽는다 해도 새로이 죽는 것도 아니고, 이제 다른 길은 없다 한다. 그러한 공주는 결국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해 생은 종결된다.

미노스왕을 사랑해서 아버지의 보라색 머리카락을 훔쳐 들고 갔던 공주가 있었지

메데이아도 사랑하는 이아손이 탈출하는 걸 돕기 위해 남동생을 죽여 토막내어 던지며 갔다.

아리아드네는 제 형제를 (비록 괴물에 인신공양을 받았지만) 죽이도록 실타래를 주어 건네었다.

그녀들이 버림받았던 이유를 낙랑공주가 말하고 있는 듯 하다.

 

248 죽은 공주가 비수가 되어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 한다.

 

251 최씨의 딸은 무고를 파괴하고 낙랑은 엄습당하고, 원비는 호동을 음란죄로 무고하는 것으로 드러나는 <삼국사기> 설화에서 무고 파괴 이전의 최씨의 딸을 평화적 상생주의, 부조리 심연주의, 자아 각성 등으로 시대에 맞게 투영시켜 주고, 왕비는 여성의 육욕적 자의식의 화신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모두가 이 시대를 투영한 시적 화자들이 여성 발화의 적극성을 표명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 두 캐릭터 모두 적극적 여성상이다.

 

 

 

 

 

 

 

 

 

 

반신데렐라의 공주들 (여성작가 김지원,박라여,최은옥의 평강공주연구)

1.     평강공주 캐릭터의 현대적 의미 재현

2.     여성작가가 새로 쓴 공주들

1)     여왕이 될 수 없는 공주의 남성왕 대리 출세욕

2)     상승의 힘 부재 공주의 최고의 마음결

3)     문화적 자궁의 생명 애친자 공주의 우주적 실존 고뇌

국문학자, 문학평론가이면서 페미니즘, 신화에 관심이 있는 이 사람은 무척 재미난 경계를 가졌다.

 

254 신데렐라와 온달은 자기 주체적인 힘에 의한 신분 상승이 아닌 힘 있는 자 (권력자, 왕자님과 공주님)와 제휴되어 신분 상승된 캐릭터로서도 끊임없이 현대인의 관심을 끄는 소재가 되어 왔다.

결혼을 통해서 신분상승을 이루려는 이들이 있다. 부자와? 현대사회는 부가 계급인듯. 문화적인 것도. 사회경제적 지위.

 

255 기본적으로 바보 온달은 착하고 밝으며, 성실하고 효도하는 심성이 고운 캐릭터로 나타난다. 신데렐라 역시 착하고 신앙심이 깊은 아이로 간절하게 기도하는 여정에서 개인 성격이 드러난다. 그러한 심성들이 공주의 남편이 되어 왕가에 편입하거나 왕자의 부인이 되어 왕가에 편입하여 모두 신분 상승이 이루어지는 계기로 작용한다.

 

257 여기서 주목할 점은 왕위 계승의 문제를 딸 편강공주가 하는 것이 아니고 사위가 대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작가 김지원이 고구려 시대 여성 정치인인 여왕이 등장하지 못한 시대의 한계를 반영하며, 대신 남성왕을 대리 출세 방식으로 드러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정작 왕이 된 언달은 그동안 공주와의 관계를 남편의 시각에서 아내를 보며 완전무결한 아내여서 한 번도 편안해 본 일이 없다.’고 인간적인 고백을 한다.

 

258 한 남자로서의 삶을 의식하는 언달과 여왕이 될 수 없지만 자아 성취 욕구를 남성을 통해 대리로 드러내는 편강공주 사이의 건널 수 없는 의식의 격차라 볼 수 있다. 여성 편강에게 콤플렉스를 느낀 언달은 주체적인 강한 여성과 결별하려 하고, 자신과 같은 처지의 여성에 관심을 갖는다. 즉 언달은 깊은 산속의 맑은 처녀 하나를 데려오라고 명하는데 이는 일반 사내들의 여성에 대한 기득권적 방식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다.

중요한 부분인 듯. 메데이아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이용하는) 남자를 사랑한 실수를 했다. 평강공주는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대신 할 아바타로서 온달을 필요로 했다. 만약 평강공주와 아라곤 원정대의 그 남자(아 이름을 자꾸 까먹는다. 이아손!)가 만났다면 정말 좋은 정치적 협상을 했겠다. 그런데 메데이아가 정확히 필요로 했던 것은 왕후의 자리는 아니었다. 또 왕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후의 자리에 머물려던 것도, 왕의 어머니가 되려는 것도 아니었다. 메데이아는 그럴 만한 힘이 있었지만 권력 자체에는 욕심이 적었던 것 같다. 메데이아에 대한 책을 읽어보자. 소설이 있던데   

 

260 박라연 시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동짓달에도 치자꽃이 피는 신방에서 신혼 일기를 쓴다 없는 것이 많아 더욱 따듯한 아랫목은 평강공주의 꽃밭 색색의 꽃씨를 모으던 흰 봉투 한 무더기 산동네의 맵찬 바람에 떨며 흩날리지만 봉할 수 없는 내용들이 밤이면 비에 젖어 울지만 아제 나는 산동네의 인정에 곱게 물든 한 그루 대추나무 밤마다 서로의 허물을 해진 사랑을 꿰맨다.

 

..가끔전기가나가도…..좋았다…..우리는….

 

새벽녘 우리 낮은 창문가에 달빛이 언 채로 걸려 있거나 별 두서넛이 다투어 빛나고 있었다. 전등의 촉수를 더 낮추어도 좋았을 우리의 사랑방에서 꽃씨 봉지랑 청색 도포랑 한땀 한땀 땀흘려 깁고 있지만 우리 사랑 살아서 앞마당 대추나무에 뜨겁게 열리지만 장안의 앉은뱅이저울은 꿈쩍도 앉는다 오직 혼수며 가문이며 비단 금침만 뒤우뚱거릴 뿐 공주의 애틋한 사랑은 서울의 산 일번지에 떠도는 옛날 이야기 그대 사랑할 온달이 없으므로 더욱

 

261 공주에게는 자신이 반평강공주임을 비극적으로 고백하고 있다. 한마디로 가난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추억이 있지만 산동네를 벗어날 힘이 없어서 온달은 떠나가 버리고 공주만 홀로 남아 있는 것으로 그것은 아름다운 비극이기 때문이다.

 

262 문화적 자궁의 생명 애친자 공주의 우주적 실존 고뇌 (최은옥의 희곡 <평강의 푸른 피리>)

 

262 “내가 그렇게 겹겹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세계의 벽들을 죽을 힘을 다해 하나씩 하나씩 밀어내면서 한 발 한 발 가까스로 당신에게, 나의 아기에게 다가가고 있을 때, 당신은 고작 나무 하나를 찍어 내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나기라도 한 듯, 씩씩거리며 나무와 싸우고 있었지요.”

 

264 공주는 자신의 정체성을 문화적 자궁을 가진 존재이며 모성으로서 거구의 아이를 출산시킬 힘을 가진 자로 보았다. 또 공주는 온달과의 관계성에서 온달을 경외감을 가진 남자로 보면서도 자신을 우주적 어머니로 인식하고 있다.

독특한 시선이다. 그런데 나도 이렇게 생각하는 면이 있다. 남자에 대한 간섭이 많다. 이래라 저래라 한다. 아버지에 대해서도, 남동생들에 대해서도, 그에 대해서도. 이게 혹시 평강공주가 되려는 건 아닌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게 내가 되고 싶어서 그런건지, 아니면 정말로 누군가를 기를 양모나 코치 기질이 있어서 그런건지 

 

266 아버지 지철로왕은 욕망에 주린 사람이며 또 욕망의 거대한 빈 그릇으로, 정치적 재기를 위해 온달이란 희생양이 필요했던 것이라는 사실을 고백했다. 부왕은 정치적 거래를 위해 자신과 화해할 수 없는 일개의 공주, 딸에게 손을 내밀었던 것도 고백한다.

 

266 6막은 온달의 소리로 고백되고 있다. 온달의 소리는 공주를 욕심많은 자신의 종달새라 칭한다. 공주와 온달 중 누가 주인을 섬기는 충직한 시종인가? 온달은 전쟁터란 사내들의 게임 장소이며 자신의 빈털터리 시절이 즐거웠다고 한다. 그런데 공주가 자신에게 와서 밥과 옷, 지혜, 부와 권력을 주었고, 자신은 공주의 사랑을 잃을까 두려워 자신의 어머니처럼 생각했다고 온달의 소리로 들려온다. 공주는 자신의 주인이 되었고, 또 자신은 공주의 아들이자 충직한 하인으로 있는 동안 힘을 가진 사내로 변신해 왔다고 소리로 고백한다. 온달은 그 세월 동안 자신에게 남근의 힘이 생기는 것을 발견했으나 즐겁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더욱이 공주를 여자로 본다는 것 역시 참을 수 없는 모욕감, 죄책감을 일으킨다고 얘기한다. 

이 희곡에서도 온달은 평강공주가 부담스러웠구나. 스스로 될 수 없어서 대항마를 키우는 것이니. 그러니 평강공주는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했을 뿐 온달을 위해서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럼 신데렐라는 행복했을까?

 

새로쓴 황진이연구

 

272 <어우야담>에 등장하는 황진이의 일생을 정리하면 대략 세 가지 대목으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황진이의 화담 서경덕 유혹 둘째, 이생원과 함께 하는 황진이의 금강산 유람, 셋째, 황진이의 선전관 이사종과 6년간 계약적 동거이다.

 

273 진이는 우연히 선전과 이사종의 절창을 듣게 되며, 그를 찾아가 친근한 정을 나누며 6년만 함께 살자고 한다. 진이와 이사종은 서로가 3년씩 비용을 각자의 집에서 마련하여 똑 같은 방식으로 보답하다가 약속대로 작별하게 되는 부분이다.

멋지다. 특히 비용을 반씩 부담하며 각자의 집에서 살았다는 것. 그럼 각자의 집이 있었다는 거로구나. 주말부부, 롱디커플들과는 다르다. 그 시대에 계약동거를.  

 

274 총각은 그제야 처녀의 성명은 황진이요, 명월이란 호까지 가진 것을 알았다. 그리고 진이의 그 눈이 부신 외화뿐만 아니라 그 그림그림, 그 글씨씀, 그리고 그 고아한 취미에 더욱 감격되어, 그를 한아름에 넣어 으스러뜨리고 싶은 정욕도 정욕려니와 또 그를 금불과 같이 고이 받들어, 일생을 두고 자기의 태양과 같이 그의 광채와 그의 그늘에서 살며, 그를 섬기고 싶은 일종의 신앙심까지 끓어오른다. (이태준, [황진이], 31)

 

275 ‘나 때문에 죽어! 왜 그처럼 간절할진대 말이야 못해 보았다?’

진이는 콧날이 찌르르해졌다. 자기를 사모하다 치맛자락 한번 스쳐 보지 못하고 목숨이 끊어지도록 그리워만 한 그 사나이, 뼈가 쩌릿하게 감사한 생각이 올려솟는다. 자기를 절름발이 양반이니, 서녀니 하고 타박을 하는 사람들에다 이 너무 황송하여 제 목숨이 끊어질지언정 말 한 마디 내어보지 못하고 짝사랑을 품은 채 청춘을 땅 속에 묻는 겸손한 사나이를 대이면 얼마나 자기가 끔찍이 알아주어야할 사람이냐? 하는 생각이 들고, 그런 목숨을 내어놓도록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가 알기도 전에 왜 죽어버렸나! 하는 안타까움도 없지 않다. (이태준 [황진이], 81)

말이 맞다. 그토록 간절하다면 안될 값에라도 말이라도 해 보았어야 했다.

 

 276 죽은 총각 상여에 옷을 올려 놓았던 자신의 행위는 어떤 면에서 자신의 적삼 속에 처녀로서의 명예 전부가 싸여간 것이라 여기게 된다.

황진이는 휴머니스트

 

277 송유수의 놀이에 초대된 진이는 중매쟁이의 말을 통해 절름발이 양반이라 거절했던 집인 김참판도 만나게 된다. 김참판은 진이에 대해 꽃보다 고운 인간이라면서도, 자신의 지인 송유수가 드러낸 진이에 대한 애욕을 질투한다. ..며느리가 되려던 계집 진이의 미모에 대한 일종의 비밀스런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다.

 

278 우연히 자신의 남편이 될 뻔했던 김참판의 아들 김지학과 함께 지족선사가 있는 곳으로 길을 떠난다. 이미 선비 김지학의 혼은 진이의 품 속에 들게 되고

 

279 모든 취흥에 어우러진 속에서도 단둘이만 서로 맑아지는 정신으로 부딪쳐짐은 서로 말은 없어도 말이 있는 이상으로 통함이 있었다. 어떤 때는 명월이가 부끄러워 얼굴을 숙이었고, 어떤 때는 소제학이 수줍은 총각처럼 무안을 느끼었다.

이심전심

 

279 선전관 이사종과 만나 6년을 함께 지내 보다 헤어지지만 그것 역시 이사종과 헤어지는 것보다 자신의 청춘과 헤어지는 것을 더 마음 아프게 생각할 뿐이다.

 

279 지족을 보면서 자신은 도에 애달팠던 것이 아닌 정에 애달팠음을 깨닫는다. 진이는 자신이 애욕덩어리이며 정의 덩어리도 갈망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280 이상을 요약해보면 진이의 여정은 풍유 여성으로서 길 떠나기와 자유로운 삶 추구하기로 요약해 볼 수 있다.

 

283 40세에 이르러 골수에 병이 들어 죽으면서 유언을 남긴다. 진이의 유언은 자신의 무덤 앞에 입우물을 파놓는 것인데, 약수를 얻어먹으려면 진이의 무덤 앞에 엎드려 절을 하지 않으면 안되게끔 한다는 것이다. 또 자신이 죽거든 산에 버려 오작의 밥이 되게 해달라 해서 그의 시신은 장단 판교리에 묻어준다. 이는 길을 지나가는 후대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게 하려는 것으로 진이는 죽어서도 풍류객과 함께 하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죽어서도 우물가, 길가에 있고자 한다. 나에게는 거기가 어디지? 2013년 나도 삼거리 국밥집, 또는 우물가에 있어야 할텐데. 살롱9 수요일 어바웃미데이에나 참석해볼까?  

 

286 최인호의 소설 황진이는 진이 스스로 자신의 신분에 대한 자각 의식이 드러나지 않는다.

 

287 최인호의 두 작품은 황진이란 인물이 지닌 육체적 욕망의 복합적 측면이 드러난 소설이라 할 수 있다.

팜므파탈을 그렸다는 거로군. 그 여자의 내면이 어떻든. 보여지는 모습만으로 매혹적인 여자에서 한 번 매혹당해보고픈

 

288 윤정선의 희곡에서 황진이는 한양 나리인 이사종과 보냈던 시절을 회상하며, 세상 모두를 바꾼 정인이지만, 약속된 세월이 흘러 헤어지자는 약속을 지킨 바 있다. 또 사랑 도둑이 들어도 투기조차 잊어야 하는 현숙한 여인들이 그 당대의 삶이었는데, 그런 사나이들의 아낙이 되는 일은 모욕적인 일이라며, 진이가 기녀가 된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러나 6년간 남편이 그러고 있는 사이 한양의 그의 집에서 시부모 모시고, 아이들을 기르고 있었을 이사종의 부인 입장에서는 황진이가 사랑 도둑이며, 아픈 데였으리라. 

 

288 남존여비의 죄를 묻는 이사종에게, 진이는 삼종지덕, 부덕, 칠거지악의 설움은 결국 여인들끼리 핍박한 증거라며, 여성 인식에 대한 의식을 전환하여 보여준다. 또 진이는 하늘과 땅의 구별론을 언급하는 이사종에 대해, 하늘과 땅은 화락하는 사이라 생각을 달리 보여준다.

이건 작가 윤정선의 의식이다. 윤정선씨는 희곡 <호동>의 저자이지. 이런 종류의 재창작에 관심이 많았던 작가인가보다.

 

289 진이는 이승상 댁 자제를 시종 삼아 금강산으로 떠나 인간의 보잘 것 없음을 느끼며 사람의 생사가 오락가락할 때 살 껍데기가 뭐가 중요하냐며 몸을 보시한다. ‘, 내 살 아니고 ,흙이 내 살이고, 흙이 곧 내 뼈라며, 세상에 내던져져 뜯김을 당해야 하는 그녀의 운명에 대해 살, , 마음, 뜯어주어야 할 자에게 뜯어주겠다며 운명이 허락하는 대로 큰 삶의 무한한 법도를 지키겠다고 한다.

 

291 작가 윤정선은 조선의 가부장제 모순까지 꿰뚫고 체제마저 초탈한 여성 주체 의식의 소유자로 그려낸 황진이의 영혼은 우주와 합일된 죽음, 재생을 꿈꾸는 우주적 구도자의 자세를 지닌 여성으로 표출하고 있다. 

 

292 김탁환의 소설 [, 황진이]는 멸망한 왕국의 수도였던 송도는 당시 허무와 퇴락의 분위기에 쌓여있으면서도 보수적인 한양과 달리 진보적 학풍을 꽃피웠던 곳이라며 황진이라는 뛰어난 개인 뒤에는 송도의 분위기와 서얼까지 감싸 안았던 서경덕 학파라는 배경이 있었다고 지적하며 황진이가 유학자 서경덕을 농락한 기생 수준으로 전락한 데는 기록자들의 악의가 개입됐다는 것을 보여준다.

 

293 최근작, 전경린의 [황진이]는 황진이의 여러 면모 중 시대의 허위와 가식을 조롱한 근대인으로, 또 자결적 생애를 살다간 인물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췄다.

 

293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시대나 이데올로기와 상관없이 황진이가 지속적으로 창작자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미적 욕망의 화신이자, 구도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모티프라는 상극적 요소를 완비한 캐릭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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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2 35. 살아남기 위하여_자크 아탈리 한젤리타 2012.12.30 2349
1511 깨어 있는 자들의 나라 _ 자크 아탈리 레몬 2012.12.30 48016
1510 #35_세계는 누가 지배할 것인가. 자크 아탈리 서연 2012.12.31 3174
1509 호모 노마드 유목하는 인간-자크 아탈리 [12] id: 깔리여신 2012.12.31 4513
1508 살아 남기 위하여 - 자크 아탈리 세린 2012.12.31 2443
1507 # 35. 미래의 물결 - 자크 아탈리 file 샐리올리브 2012.12.31 3597
1506 마르크스 평전 - 자크 아탈리 콩두 2012.12.31 3751
1505 세계는 누가 재배할 것인가 - 자크 아탈리 file [3] 학이시습 2012.12.31 4485
» 한국신화 새롭게 쓰기 - 임금복 file 콩두 2013.01.06 3500
1503 36. 꾸뻬씨의 행복여행_프랑수아 를로르 지음 [1] 한젤리타 2013.01.06 4603
1502 #36 프레임 :나를 바꾸는 심리학의 지혜- 최인철 file 샐리올리브 2013.01.06 9249
1501 니가 수학을 못하는 진짜 이유 - 임익 세린 2013.01.06 14394
1500 어느 등산가의 회상 -에밀 자벨- [1] 파에톤 2013.01.07 3119
1499 알베르 카뮈 _ 이방인 레몬 2013.01.07 4591
1498 #36_투자, 심리학에서 길을 찾다. 마크 더를라스 서연 2013.01.07 4386
1497 여자의 심리학-베르벨 바르데츠키지음 id: 깔리여신 2013.01.07 7824
1496 경영이란 무엇인가 [2] 학이시습 2013.01.07 4560
1495 창조하는 경영자 - 피터 드러커(Managing for Results) [1] [8] 학이시습 2013.01.14 5475
1494 37. 꼬마 꾸뻬, 인생을 배우다_프랑수아 를로르 지음 [2] 한젤리타 2013.01.15 3448
1493 #37_ 사람-중심 상담 (A way of Being) 칼 로저스 [3] 서연 2013.01.15 54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