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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15일 08시 29분 등록

죽음의 지대

* 라인홀트 메스너 지음, 김영도 옮김, 한문화, 2007.03.26

1. ‘내 마음의 미치광이(저자에 대하여)

라인홀트메스너.JPG

■ 라인홀트 메스너 (1944 ~ )

 

최고의 등반기술은 살아남는 것이다.’

 

라인홀트 메스너(이탈리아어: Reinhold Messner 레인홀드 메스네르[*], 1944 9 17 ~)는 이탈리아의 산악인으로 히말라야의 8,000미터 이상 고봉을 의미하는 14좌를 최초로 모두 정복하였다. 특히 최고봉인 에베레스트 산을 홀로 무산소 등정한 최초의 사람이기도 하다. 1970년 낭가파르밧을 시작으로 1986년 로체에 오르면서 8000미터 이상 고봉을 모두 등정했고 그 뒤에는 등반 경험을 바탕으로 20권이나 되는 저술을 남겨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산악문학상을 3번이나 수상했다.

 

라인홀트 메스너

히말리야의 8m 자이안트급 14좌를 세계 최초로 오른 사나이다.1970 6월에 레이스를 시작, 1986 1016일에 모두 완등하는 쾌거를 이루었다.세기의 철인으로 일반인에게는 칭송을 받았던 한편, 일부 산악인들로 부터는 비난 받기도 했던 이탈리아의 등산가 '라인홀트 메스너'

(당시 나이 42)는 로체(8,516m)를 마지막으로 올라 사상 최초로 8,000m 14좌 거봉을 모두 오르는 위업을 달성했다.

 

14개 자이안트 봉우리 중에서 세계 제4위와 5위인  로체(8,516m)와 마칼루(8,463m)의 두 봉우리를 제외한 12개 봉을 오른 기록으로'8,000m급 등정 레이스'에서 폴란드의 '쿠쿠츠카'(당시 37, 10개봉 등정), 서독의 '미하엘'(당시 52, 8개봉 등정), 스위스의'에르하르트'(당시 27, 7개봉 등정)의 추격을 받고 있던 메스너가 결승점에 제일 먼저 선착한 것이다. 14개 자이안트 중에서 1985년도 까지 등정을 거부하며 메스너의 애를 태웠던 마칼루는 1986 927일에 등정을 허락했다. 메스너는 마칼루의 등정을 자신감으로 삼아 마지막 남았던 로체에도 도전, 파트너 '조안 커머랜드'와 함께 1986 1016일 오후145분 세계 제4위의 고봉 로체에 우뚝 섬으로서 히말라야의 모든 자이안트를 순례해 온 등산인생의 최정점을 맞았다.             

       

메스너의 등정레이스는 1970 6월 낭가파르밧 원정에서 스타트를 끊었다. 그때 메스너는 동생 '귄터 메스너'와 함께 표고차 4,500m나 되는 루팔벽을 뚫고 무산소로 낭가파르밧 정상에 올랐다.  하산 루트로 등정루트의 반대편인 디아미르벽을 택하여 사상최초의 자이안트급 횡단등반을 기록했으나, 하산 도중 메스너는 동생을 잃는 비운을 맞았다.

 

낭가파르밧 등정 이후, 그는 무산소 8,000m급 등반에 심혈을 기울였다. 따라서 자이안트급 무산소 초등은 거의 메스너에 의해 기록되었다. 마나슬루(8,163m /1972), 가셔브룸1(8,68m /1975), 초오유(8,201m /1976), 다울라기리1(8,167m /1977) 등이 산소도 없이 덤벼들었던 이 야심만만한 산사나이게 정상을 내놓았던 것이다. 한 두 명의 등반대원으로 산소 없이 8,000m의 웅자에 도전하는 그의 등반스타일은 그 후 히말라야의 등반방식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는 계기를 만들었고, 그는 그 선두주자의 자리를 굳혔다. 무산소등반에 대한 메스너의 의욕은 지구의 용마루인 에베레스트에도 눈독을 들이게 되었다.  에베레스트 무산소등반은 1920년대 에

베레스트 도전이 개시된 이래 반세기에 걸친 세계 산악계의 최대 이슈였다. 고산의학계의 '불가능'이라는 진단으로 그의 도전정신을 자극하여, 1978년 동료 '피터 하벨러'와의 2인조 에베레스트 무산소등반대를 꾸리게 했다. 그해 1978 58일은 고산의학계가 메스너와 하벨러에 의해 코가 납작해진 날이기도 하다.

 

두 철인은 의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하얀 선을 넘어 지구의 최고봉 꼭대기에 올랐다가 생환한 것이다. 1953년 힐러리와 텐징의 에베레스트 초등에 필적할만한 쾌거로  세계등반사에 기록된  이 에베레스트무산소 등정으로  메스너는 세계적인 명성을 떨쳤고, 8,000m 레이스에 더욱 박차를 가하며, 사회적으로도 유명인사가 되어있었다. 1978년에는 동생을 앗아갔던 낭가파르밧의 다아미르벽을 단독으로 초등했고, 이어 1979 K2봉 무산소등정에도 성공하여 메스너의8,000m 레이스 완주는 단지 시간문제로 간주되었다. 1980 8월에는 자신의 두 번째 에베레스트 등정이자 단독 초등이라는 대위업을 세웠다. 그는 이 해 티베트의 타자에 설치된 베이스 캠프에 애인인 캐나다의 '리나 리치'양을 남겨두고 혼자서 에베레스트 북면에 도전하여 3일만에 단독 등정 했었다.

 

8,000m를 향한 그의 집념의 레이스는  1982 5  세계 제3위봉 칸첸중가(8,586m)의 관문을 통과했고, 같은 해 7월에는 카라코롬의 브로드피크(8,047m)와 가셔브룸2(8,035m)을 연등하여 골인지점으로 향해 스퍼트 하는 인상을 주었다. 하지만 힘있게 뻗어 나가던 그의 최종 스퍼트는 마칼루와 로체라는 마지막 고비를 남겨두고 번번히 제동이 걸렸다. 1983년 이후 여러차례 마지막 남은 두 자이안트에 도전했으나 거푸 실패를 했다. 영웅적인 초인들, 대개 그 생애의 마지막에 대두 되었던 운명적 함정이 마칼루와 로체라는 이름으로 메스너의 생애를 가로막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추측마저 일축하며, 드디어 1986 1016일에 메스너는 과거 16년동안 달려온 알피니즘 사상 최초의 레이스를 '인간 승리'란 이름으로 완주한 것이다.                                                    

 

지구의 용마루를 연결한 메스너의 레이스에 세계적인 이목이 집중되었던 것은 그가 출중한 등반역량 못지않게 뛰어난 표현력과 사고력을 갖추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도 풀이된다.산악문학작가 또는 철저한 극기정신과 사색으로 전인간적인 알피니스트를 열망한 알피니즘의 구도자로 불려진만큼 메스너는 그 방면의 뛰어난 저술가이다. 자신의 등반경험을 토대로 20여 권의 저작을 남겼으며, 1968년과 1975, 1976년에는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산악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의 저서 중에서 제7, 도전, 검은고독 흰고독, 죽음의 지대, 등은 국내에서도 번역되어 출판되었을만큼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산악저술가이다.

 

1944년 이탈리아의 돌로미테(남부 티롤)의 휠뇌스마을에서  9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교장이며 등산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청소년 때부터 등산가로 활약했다. 1960년대 후반기에는 알프스에서 500여개의 전문루트를 등반하였고, 파투아대학의 공학도였던 1970년 낭가파르밧 원정에 참가하며 학업을 중단했다. 그 후 고향에서 일시적으로 교직에 몸담은 적도 있었으며, 1982년부터는 '토니 히벨러'가 주간으로 있던  산악지 '알피니무스'(Alpinimus)를 인수하여  '알핀'(Alpin)으로 제호를 바꾸어  자신이  발행하였다. 14좌 완등 후 고향에서 등산학교를 설립해 운영을 하기도했으며, 서적출판, 강연 등의 활동으로 바쁘게 이어갔다.

 

2. ‘죽음의 지대(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 본문 내용, Ü : 나의 언어)

 

□ 한계 영역

여기서는 한계가 문제다.

자신’ ‘하나’ ‘를 둘러싸고 지성과 감성, 이성과 본능, 머리와 배, 죽음과 삶, 존재와 비존재 이들 사이의 한계가 문제다.

이 책은 위로 올라가는 산행을 다루지 않았다. 이 책은 아래로 내려가 내면을 파고든다. 나는 불교 지도자나 등반계의 메시아가 되려는 것이 아니다. 상징이 되려는 것도 아니다. 하물며 우상이 되기를 바라랴. 나는 보상을 바라는 종교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두 다리로 대지를 딛고 바람 부는 곳을 향해 얼굴을 쳐든다. (p. 5)

 

□ 인간은 6000미터 고소에서 적응할 수 있다. 그러나 7000미터를 넘으면 고도 적응이 어려워진다. 휴식을 취해도 이미 소비한 에너지를 넉넉히 보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생리학적으로 자기의 한계를 벗어난 높은 곳에 지나치게 오래 머무는 자는 결국 하얀 죽음의 제물이 된다. -1953년 에르와르 위스 뒤낭 edourd wyss-dunant (p. 7)

 

Ü 죽음 조차 이리도 낭만적이다. 1953년이면 지구의 용마루가 처음 인간의 발을 허락한 해다.

 

8848미터인 에베레스트 정상의 산소 농도는 해면의 3/1밖에 되지 않는다. 산소가 부족하면 육체적, 정신적 기능이 크게 떨어진다. 그래서 얼어 죽을 위험이 커진다. 다시 말하면 혈액 농축으로 생기는 혈전증과 출혈 및 폐수증 등의 위험이 있다. -1978년 에베레스트 원정대 오스발트 외르츠 Oswald olz (p. 7)

 

□ 메스너 등반의 특징은 자기와 산 사이에 기계 장치가 들어가면 본질적으로 경험을 할 수 없다는 반기술적 자세와 산에 아무것도 버리지 말라는 환경 보호적 주장에 있다. (p. 9)

 

Ü 실제 메스너는 1978년 오스트리아 페터 하벨러와 함께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을 해냈다. 그의 철학이 인류에게 승리한 날이다.

 

탐구해야 할 것은 산이 아니고 인간이다. 나는 에베레스트를 정복하려고 오르지 않았다. 그랬으면 성공을 보장받기 위해 쓸 수 있는 모든 기술을 동원했으리라. 나는 그저 이 자연의 최고 지점에서 자기 자신을 체험하고 싶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에베레스트의 장대하고 준엄한 모든 것을 내 팔에 안고 싶었다. 이런 일을 산소 마스크의 힘을 빌려서는 하지 못한다. 나는 유토피아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었을 뿐이다. 나의 유토피아는 의사와 물리학자와 등반가들의 논쟁의 초점이던 8848미터의 고봉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 바로 그것이었다. (p. 9~10)

 

Ü 그가 얼마나 미친 짓을 했는지 나는 알 것 같다.

 

1장 등반 (그것은 병인가)


□ 등반은 - 어떤 가능성

등반은 모험

등반은 적극적인 자연 체험

등반은 유희적이면서도 창조적인 스포츠

등반은 존재를 인식하는 행위

등반은 죽음과 맞서서 얻는 깨달음

등반은 천국에서 지상으로의 옮아감

등반은 차안과 피안을 잇는 다리

등반은 높은 의식 세계에 대한 탐구

등반은 하나의 가능성

 

Ü , 묻자. 너에게 등반은 무엇인가? 가장 적극적인 자유

 

□ 정상에 서거나 어떤 성과를 얻는 일에 나는 관심이 없다. 그런데 왜 산에 오르는가?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나 자신과 싸우면서 얻는 그 새로운 약이 필요해서인가? 나는 산 없이는 못 산단 말인가? 나는 정말 산에 병이 든 것일까? 나는 이에 대한 해답을 찾아 나섰다. 그러다가 이 책을 쓰게 되었다. (p. 15)

 

Ü 이거 나의 질문과 같지 않은가.

 

8000미터 높은 곳 사우스콜의 눈보라 속에서 첫날 밤 폭풍에 그만 천막이 찢겨져 나가버렸다. 시속 200킬로의 폭풍이 우리 막영지를 빠져 나갔다. 기온은 영하 40도 이하. 산소 마스크도 없었다. 그리고 40시간이나 잠을 못 잔 상태였다. 천막이 날아가기까지 했더라면 우리는 살아 남지 못했으리라. 이러한 나의 기이한 체험이 나로 하여금 이 책을 쓰게 이끌었다. (p. 17)

 

□ 추락의 경험과 죽음의 지대의 체험을 있는 그대로 현장에서 얻어보려고 했다. 어쨌든 나로서는 문제는 과학적 연구가 아니라 죽음의 지대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새로운 존재의 차원에 조명을 가하는 일이었다. 즉 선입관 없이 단순하게 왜? 라고 묻는 일이었다. (p. 18)

 

□ 그러한 곳까지 뚫고 나가려면 등반가들이 말하는 모럴moral이 필요하다. 거기서는 무덤과 정상의 차이가 종이 한 장밖에 안 된다. (p. 18)

 

Ü 어제 함께 얘기하던 다른 나라 원정대원을 캠프4 가는 길에서 만날 수 있다. 같이 오르던 동료를 언제 어느 때고 주검으로 마주할 수 있는 곳이다.

 

□ 이런 경험들을 통하여 오늘날 나는 인간이란 불멸의 존재가 아니고 오히려 하나의 과정이며 가변적인 상태라고 믿게 됐다. 나는 삶 앞에서든 죽음 앞에서든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될 수 있다면 제한 받고 싶지 않으며 자기가 체험하지 않은 것은 알려 하지 않는다. (p. 20)

 

Ü 과정이다. 생은 과정이다. 그 눈물 겨움을 참을 수 없겠지마는 어쩔 수 없는 과정이다. 인간이 무한히 살고 죽어도 그 결과가 무엇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삶을 무한소급하여 그 시작을 알려 해도 그것은 미지다. 그러니 우열이 없다. 좋고 나쁨이 없다. 잘하고 못함이 없다. 우리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거대한 元亨利貞(주역에서 원형리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원은 만물이 창조되기 이전의 혼돈의 시간, 형은 천지창조로부터 성장 단계까지의 시간, 리는 결실과 수확의 시간, 정은 왕성하던 것이 소멸하는 쇠퇴의 시간) 그 과정의 삶이므로 완성이나 달성 같은 언어는 삶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것은 결과의 언어다. 과정의 언어는 이와 같은 말을 쓰지 않는다. 그저 열심히 하고 최선을 다한다는 안개 같이 답답한 말이 과정을 사는 인간의 삶에 가장 어울리는 선의의 단어다.

 

□ 등반은 나에게 생활이며 자기 표현이다. 즉 존재를 뜻하는 생활이다. (p. 21)

 

2장 한계 영역 (넓어지는 존재의 차원)

 

□ 체험을 통해 나는 죽음에 가까울수록 오히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알 수 없는 세계로 넘어가는 불안이나 회의는 없어지고 죽음의 현실만이 자기 것이 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것을 체험하고 나서 나는 죽음의 새로운 의미를 알았다. 전에는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지금은 죽음이 언제나 나와 함께 있으며 그러면서도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나는 죽음도 삶의 일부이고 죽음과 내가 하나며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p. 25)

 

Ü 이것은 체험에서 나온 기가 막힌 죽음에 대한 통찰이다. 누가 체험을 통해 죽음의 의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알 수 있다. 피와 살은 죽음을 먹고 살아간다는 것을.

 

머리칼이 바람에 엉클어지며 산속에 있다는 것 (p. 26)

 

Ü , 이 자유

 

인간의 본질을 파헤치면 그 특징은 누구나 거의 같다. 다만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아는 계기가 주어지는 행운이 따르지 않을 뿐이다. (p. 29)

 

Ü 자신을 깊게 물어보는 것. 그것은 한 차원 높은 존재를 위한 존재를 포기하는 일이다.

 

3장 추락사 (자신에게는 편안한 죽음)

 

□ 우리는 추락하는 사람이 자신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 공포에 휩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이 한번 들고 나면 죽음이 아름답게 느껴질 수도 있다. (p. 32)

 

□ 누군가는 그로세 치르슈피체에서 추락할 때 주머니 칼이 바지 주머니에 그대로 있는지 생각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사람은 흰프휭거슈피체에서 떨어질 때 자기가 살아온 지난날이 영화를 보듯 눈앞에 펼쳐졌다고 했다. 뜻밖에도 홀가분한 느낌, 자유로운 느낌이었다고 한다. (p. 33)

 

Ü 순간적 사태에 대한 의식이 무한으로 확장하는 것. 마치 퍼텐셜이 빅뱅을 10 43승 초 만에 터져버리듯 순간적인 의식 확장이 아픔이나 상황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게 만들 수 있겠다.

 

□ 사고 활동이 활발해지고 두뇌의 회전 속도나 사고의 깊이가 평소보다 수백 배나 늘어난다. 시간이 길게 느껴진다. 행동이 번개같이 빨라지며 사고 판단이 정확해진다.

추락하는 사람은 마지막 순간에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장밋빛 구름이 둥둥 떠 있는 맑게 갠 하늘로 빨려 들어간다. 마침내 고통 없이 의식이 꺼진다. 보통 이때가 어딘가에 부딪치는 순간이다. 그러나 부딪치는 소리가 본인에게 들리지만 아픈 줄을 모른다. 감각기관 중에 청각이 제일 마지막에 없어지는 것 같다. (p. 36)

 

Ü 순간적 의식의 폭발

 

□ 돌발 사고에서는 고통을 즉각적으로 느끼지 못한다. 그것은 극도의 정신적 흥분 때문이며 그 흥분이 최면 상태 비슷한 작용을 하는 데다가 다른 생각들이 머리 안으로 한꺼번에 몰려들기 때문에 아픔을 느낄 겨를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떨어져 죽는 사람이 고통을 모르는 것만은 틀림없다. (p. 37)

 

□ 추락자들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는 떨어지는 그 짧은 순간에 엄청나게 많은 생각이 집중되는 이른바 의식의 폭발을 경험하게 된다는 점이다. (p. 43)

 

추락자 중에는 대부분은 밑바닥에 떨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실신한다는 것이다. 예상과는 달리 추락자는 떨어지는 동안에 대개 말이 없다. 비명이 들렸다는 예도 거의 없다. (p. 45)

 

□ 추락에 관한 여러 체험담에 따르면 자기가 떨어지는 것보다 남이 떨어지는 것을 보는 것이 훨씬 더 괴롭다고 한다. (p. 48)

 

□ 이 아름다운 천국의 이미지는 내가 공중을 날면서 보고 생각하는 동안에만 느껴졌을 뿐, 땅에 부딪혀 실신하자 갑자기 사라지고 다시는 계속되지 않았다. (p. 49)

 

□ 추락, 1초와 1천 년이 다를 바 없다. 길고 짧고가 없다. 우리에게 있어서는 . 의식을 잃은 자에게는 죽음이 아무 변화를 미치지 못하며 절대적 평안과 고통 없는 소멸이 있을 뿐이다. (p. 51)

 

Ü 인간의 시간은 죽음으로 소멸한다. 그러나 인간이 죽고 난 후의 시간은 소멸이 없다. 존재를 뛰어넘는 지점에서 다시 산다.

 

4장 죽음에 끌리는 마음 (사라지지 않는 갈망)

 

내가 낭가파르바트를 혼자서 오르려고 했을 때 그 계획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물어온 신문 기자가 있었다. 나는 그의 질문에 그렇다면 당신의 인생에는 어떤 의미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그 기자가 내 산행을 기사화했을 때는 살아서 돌아올 자신이 있느냐고 묻는 전화가 여기저기서 걸려왔다. 나는 또 이렇게 말했다. 자신 없어요. 그런데 당신은 내일도 여전히, 틀림없이, 수화기를 들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나요?’ (p. 54)

 

Ü 촌철살인이다.

 

□ 내가 혼자 낭가파르바트에 간 것은 한 걸음 나아가 놀아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p. 55)

 

Ü , 이 사람 봐라.

 

검은 마력에 싸인 나의 끊는 의욕이 그 날개를 마음껏 펼칠 수 있다면 이 보 잘 것 없는 내 육체 따위가 우연과 맞서서 산산조각이 난들 어떨까 보냐! 오이겐 기도 람머- (p. 56)

 

Ü 멋진 산재이들의 말의 연속이다.

 

□ 나는 등반도 위험을 교묘히 피하는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p. 57)

 

Ü 촐라체를 오르고 하산하다 8개 손가락을 잃어버린 산악인 박정헌은 이 말을 곧잘 인용했다.

 

등반에서 중요한 기술은 겁먹는 일과 미친 짓의 경계를 판단하는 일이다. 바꾸어 말하면 가장 큰 어려움을 가장 신중한 태도로 대하는 일이다. 그러나 자기 평가가 어렵듯이 이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한 발 내디디면 떨어진다. 그러나 한 발 물러서면 안전하지만 불만이 남는다. ‘해도 괜찮겠다는 한계에 대한 식별 능력불안이 자동적으로 금지 명령을 내리기 때문에 어느 등반가에게도 있다. 동기는 어떤 것이든 정당하며 왈가왈부할 성질의 것이 못 된다. 만약에 스스로 품고 있는 관념이 자기 능력과 일치하지 않는 등반가가 있다면 그는 비판 받아 마땅하다. 자기를 등반가로서 과대평가하는 사람은 결코 오래 살지 못한다. (p. 57)

 

Ü 등반 사고 중의 대부분은 자기 과신이다. 주역에서는 자신을 믿으라고 강조하지만 산에서 자신을 과도하게 믿으면 대가를 치른다.

 

□ 나라는 자아가 자유로이 날뛸 수 있는 알피니즘이 나의 유일한 종교였다. , 나의 설익은 철학과 마찬가지로 나의 산에 대한 의욕과 행위도 윤리적 울타리가 없었던 것이다. (p. 63)

 

Ü 인화성 높은 일들을 애써 피해간 삶의 무늬가 윤리다. 윤리는 자유로운 인간에게는 불필요한 가치다.

 

□ 벽에서 비박하자. 틀림없이 무서운 밤을 새야겠군 (p. 71)

 

□ 도움을 받을 길 없이 버려진 자가 벌렁 누워서 피 묻은 얼굴로 신비롭고 아름답고 고요한 밤하늘과 푸르게 빛나는 백조좌를 올려다보았다.

무섭도록 당당한 마터호른이여, 너는 은색 달빛에 흠뻑 젖어서 차가운 빛으로 모든 것을 비추는구나! 너는 정말 무서운 산이며 우리를 이긴 자요, 자연의 계모며 두려운 산이다. 나는 그대의 무정한 아름다움을 화강암의 차가움을 사랑한다. (p. 77)

 

Ü 무정한 아름다움, 화강암의 차가움을 사랑한다멋지다.

 

5장 추락 체험 (나를 지켜보는 또 다른 나)

 

바위나 얼음을 탈 때 자기의 모든 것을 거는 등반가는 위험이 어떤 것인지 알고 사고를 예측한다. 추락은 교통사고와 달라서 체험의 깊이가 있다. (p. 82)

 

Ü 이거 등반과 추락에 대한 과도한 의미 부여는 아닐까.

 

□ 이 제2의 나는 떨어지고 있는 내 몸을 그보다 더 높은 망루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p. 84)

 

Ü  융은 이와 같이 말했다.

 

좀더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그가 내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깊은 충격을 받고 잠에서 깨어나 생각했다. ‘, 그렇구나. 그 사람이 나를 명상하고 있었구나.’ 그가 하나의 꿈을 꾸었는데 그것이 나다. 그가 깨어난다면 나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그 두 꿈의 뚜렷한 경향은 자아의식과 무의식의 관계를 완전히 뒤바꾸고 무의식을 경험적 인간의 생산자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도치는 다른쪽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의 무의식적 존재가 참다운 것이며 우리의 의식세계는 일종의 환각이거나 일정한 목적을 위해 세워진 하나의 가상적 현실임을 가리키고 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그 속에 있는 동안만 현실로 여겨지는 꿈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분명히 동양의 세계관과 무척 닮은 점이 많은데 특히 마야(maja : 오직 정신만이 영원하고 물질세계는 환영이며 착각이라고 하는 힌두교의 오래된 신앙)를 믿는 점에서 그러하다.’

 

□ 푸석푸석한 만년설에 빠질 때마다 두려움 때문에 전류가 골수까지 통하는 듯했다. (p. 89)

 

죽음의 인식과 함께 육체의 기능 정지가 일어나고 이것이 이런 꿈의 상태를 만들어 낸다고 말해도 좋을 듯하다. 이것은 유체이탈 현상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p. 93)

 

Ü 죽음을 깊이 인식하고 영혼의 정신적 수은주가 극에 달하면 물리적 영향력은 최저가 되고 육체의 기능 정지로 이어진다. 이것이 유체이탈이라 하는 것일까. 그런 상태에서 꾸는 꿈은 존재의 전체를 조망하는 무의식의 상태가 아닐까. 융은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만의 개인적인 삶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수세기에 걸친 집단정신의 고도로 수준 높은 대변자요 희생물이요 후원자인 셈이다. 우리는 평생 동안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세계라고 하는 극장 무대에서 주로 대사 없는 단역 배우 역할만을 해왔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사실들이 있다. 그것이 무의식적인 것일수록 그 영향력은 더욱더 크다.’

 

죽음의 가능성이 크면 클수록 우리 마음에 끼치는 작용은 가볍다. (p. 95)

 

□ 추락자는 사실은 더 이상 어떻게 됐는지 모른다. 그는 실신에서 깨날 때까지 꿈을 꾸고 있었기 때문이다. (p. 96)

 

6장 추락 (죽음을 피할 수 있는가)

 

□ 추락자는 자기 힘으로 어떻게 살아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아예 가질 수 없다. 그리고 속력이 붙으면서 끝장이라는 생각은 점점 더 강해진다. 아무 소용이 없다. 그래서 추락자는 사실상 의지력이 마비된 거나 다름 없는 심리 상태가 된다. 그런데 어떤 일에 주의를 돌리는 일도 의지적 행위의 하나다. 따라서 의지가 모두 사라지면 무의식을 덮고 있던 뚜껑이 단번에 젖혀 진다. 의식의 밑바닥에 깔려 있던 무수한 기억과 영상과 표상이 한꺼번에 표출되는 것이다.

우리가 추락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영상이 꼬리를 물고 나타나며 극히 단시간 내에 믿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고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것은 꿈과도 비슷하다. 아무리 길고 내용이 풍부한 꿈도 사실은 아주 짧은 시간에 일어난다. (p. 102)

 

Ü 내려놓는다. 생에 대한 의지를 이와 같은 관점에서 바라본 철학자는 쇼펜하우어다. 서양의 지혜에서 버트런드 러셀은 말한다.

 

쇼펜하우어는 이 의지를 철저하게 악으로 보고 삶에 고통이 반드시 따르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했다. 게다가 그에게 지식이란 헤겔처럼 자유의 원천이 아니라 고통의 근원이다. 그리고 우리의 고통을 야기시키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의지의 작용이다. 의지를 속이면 우리는 결국 열반, 즉 무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즉 의지를 내려 놓음으로써 존재를 초월할 수 있는데 등반가가 추락하는 그 짧은 순간은 모든 의지가 사라진 자유의 경지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설득력 있다.

 

□ 감각적 착오와 환각이 반드시 수면을 전제로 하지는 않는다. 즉 깨어 있는 것과 꿈꾸는 일의 두 가지 의식 현상은 서로를 배척하지 않고 나란히 이어지고 있다 (p. 103)

 

□ 정신을 잃은 시간은 고작 1분도 안 되는데 추락에서 각성까지 내가 느낀 시간은 꽤나 길었다. (p. 112)

 

□ 몸 밖에서 자기를 보는 체험을 미국 사람들은 out of body 라고 한다. (p. 118)

 

□ 결국 우리는 마지막 생각과 감정을 경험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추락에서 가장 중요한 증인은 입인데 죽음이 그 입을 영원히 다물게 하기 때문이다. (p. 121)

 

7장 생존 (대추락의 경우)

 

□ 의식의 내부가 범람하여 자각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생명의 외계와 내계를 하나로 만들고 사람에게 자기와 우주와의 일체감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일은 합리적인 사고를 배제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이 순간에 나는 자기 자신이 되며 죽음은 두려운 종말이 아니다. 이렇게 될 때 죽음은 죽음이지만 다른 의미를 지닌다. (p. 125)

 

Ü 계속 융이 겹쳐진다. 메스너가 언급하는 의식은 융의 의식과 다르지 않아 융이 어른거리는 모양이다. 융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경험한 철학자고 메스너는 삶고 죽음을 체험한 등반가다. 융은 말한다.

 

부처는 인간의 카르마가 개인적인 것이냐 아니냐 하는 질문을 제자들에게 두 번이나 받았다. 두 번 다 그는 이 물음을 피하고 토론하지 않았다. 이 물음은 존재의 환각에서 자기를 해방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 부처는 제자들이 니다나(인연)사슬을 명상하는 것, 다시 말해 출생, , 늙음과 죽음, 고통스러운 사건들의 원인과 작용에 대하여 명상하는 것이 그들에게 더욱 유익하리라고 여겼다. 내가 조상들의 인생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들의 인생을 다시 구현하고 있단 말인가? 내가 옛날에 한 번 특정한 인격으로 살았고 내세에서 이제 해방을 꾀할 수 있을 만큼 된 것인가?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부처는 이 물음을 답을 하지 않은 채 남겨놓았다. 그런데 그도 그 물음에 대한 확실한 답을 몰랐다고 짐작된다. 내가 먼 옛날에 살았고 거기서 지금도 여전히 대답할 수 없는 어떤 물음에 부닥쳤다는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내게 부과된 과제를 풀지 못했으므로 다시 태어나야만 했다고 말이다. 추측하기로는 내가 죽으면 나의 한 일들이 따라올 것이다.’

 

□ 나는 인생이란 무한 속에서 벌어지는 막간극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살기 위해서는 추락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따위의 말을 할 생각은 없다. 이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죽음을 배우거나 삶을 배우는 데에 길잡이가 되는 리더는 이 세상에 없다. (p. 126)

 

□ 앞으로 50년쯤 지나면 이 방하가 수수께끼 같은 송장 하나를 토하겠지. (p. 131)

 

Ü 크레바스의 죽음은 유효기간이 길다. 베이스캠프에서 10년 전 크레바스에서 쓰러져간 어느 산악인의 시신을 보았다. 삶은 그렇게 곡절이 많다.

 

□ 다만,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몹시 지쳐 있는데도 행복한 꿈을 꾸며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계속 중얼댔다. 너는 살아 있어. 정말이야, 꿈이 아니야! 나는 난생 처음으로 이 세계를 대하는 듯이 즐거운 호기심으로 그것을 찬미했다. (p. 136)

 

Ü 죽은 줄로만 알았던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할 때 그 환희를 어디에 비하겠는가. 그런 환장할 기쁨을 무시로 느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등반이다.

 

□ 팔짱을 끼고 구경꾼처럼 죽음의 충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p. 138)

 

Ü 이 상황과 그 마음을 상상한다.

 

□ 떨어지는 동안 내 영혼은 바깥에서 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p. 141)

 

Ü 융의 글을 한번 더 인용한다. 마치 호접몽을 꾸는 장자의 사유와 닮았다.

 

좀더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그가 내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깊은 충격을 받고 잠에서 깨어나 생각했다. ‘, 그렇구나. 그 사람이 나를 명상하고 있었구나.’ 그가 하나의 꿈을 꾸었는데 그것이 나다. 그가 깨어난다면 나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그 두 꿈의 뚜렷한 경향은 자아의식과 무의식의 관계를 완전히 뒤바꾸고 무의식을 경험적 인간의 생산자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도치는 다른쪽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의 무의식적 존재가 참다운 것이며 우리의 의식세계는 일종의 환각이거나 일정한 목적을 위해 세워진 하나의 가상적 현실임을 가리키고 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그 속에 있는 동안만 현실로 여겨지는 꿈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분명히 동양의 세계관과 무척 닮은 점이 많은데 특히 마야(maja : 오직 정신만이 영원하고 물질세계는 환영이며 착각이라고 하는 힌두교의 오래된 신앙)를 믿는 점에서 그러하다.’

 

□ 대부분의 클라이머들이 등반하는 동안에는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 (p. 145)

 

Ü 수직의 화강암 바위 밑 늘어진 자일 아래에서 안타깝게 올려다 보고 있던 그 후배의 모습. 바위를 다 올라수고하셨습니다! 선배님!’ 하던 후배. 하지만, 시커먼 땟물과 피투성이로 떨어대는 손가락을 보며 우리는 속으로미안하다. 후배야…’ 고함쳤습니다. 그 사람을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뛰고 그 곳을 생각하면 아직도 사무쳐 옵니다.

 

□ 이제는 무서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사라지고 감정도, 지각도 없어졌다. 허탈감만 남았다. 모든 것을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주위는 캄캄한 밤이었다. 나는 지금 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땅 위의 굴레에서 벗어나 구름을 타고 하늘에 둥둥 떠 있는 거처럼 느껴졌다. 이것이 바로 열반일까? (p. 151)

 

Ü 어제 꿈에 빙벽에서 떨어지는 꿈을 꾸고 오늘 빙벽을 오른다. 나는 떨어졌다. 떨어지는 동안 내 과거를 일목요연하게 보았다. 행복했던 순간이 지나갔다. 충격을 느꼈으나 아픔은 느끼지 않았다. 1시간여 뒤 구조대가 왔고 실려 내려가며 나는 왼쪽 발목을 스스로 절단하고 싶은 고통에 고함쳤다.

 

8장 산 속의 환상 (고조되는 감수성)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눕체 능선을 바라보면 자신이 세계의 일부로 느껴진다. 그리고 아콩가구아 산기슭에 있는 돌투성이 에르코네스 빙하를 걸어갈 때 사람은 자기의 한계를 깨닫는다. 나는 그렇다고 해서 자살하진 않는다. (p. 156)

 

□ 극한 영역에서는 이러한 감수성과 감각이 고조되는 기회가 생긴다. 그래서 나는 인생에서 등반을 중요하게 본다. (p. 156)

 

□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사람은 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외적 인간은 인간이 가진 육체적, 지적 영역을 말하는데 누구에게나 쉽게 이해된다. 그러나 내적 인간은 의식의 밑바닥에 있으며 아직 덜 밝혀진 정신적인 영역으로서 (나는 이것을 정밀 소재 영역이라고 부른다) 그곳으로 통하는 방법을 모르는 한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는 없다. (p. 157)

 

Ü 조금 길지만 융의 기억, , 사상에서 나오는 서문을 인용한다.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 (Selbst : 인격의 가장 깊은 구심점) 실현의 역사다. 무의식에 있는 모든 것은 외부로 나타나 사건이 되려 하고 인격 역시 무의식의 조건에 따라 발달하며 스스로를 전체로서 체험하려고 한다. 나는 이와 같은 형성과정을 표현하기 위해 과학적인 용어를 사용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나 자신을 과학적인 문제로서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적 견지에서 우리는 어떤 존재이며 영원의 관점에서는 인간이 어떤 존재로 보이는가는 오직 신화를 통해서만 표현할 수 있다. 신화는 훨씬 개인적이며 과학보다 더욱 정확하게 삶을 말해준다. 과학은 평균 개념들을 가지고 연구하는 것으로 그 개념들은 각 개인의 생애가 지니고 있는 주관적인 다양성을 제대로 다루기에는 너무나 일반적이다나는 내가 여러 면에서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내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는 알지 못한다. 인간은 자신을 무엇과도 비교해 볼 수 없다. 인간은 원숭이도 암소도 나무도 아니다. 나는 하나의 인간이다. 그런데 인간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모든 존재와 마찬가지로 나도 무한한 신성으로부터 떨어져 나왔지만 어떤 동물이나 식물 또는 돌에도 대비해 볼 수 없다. 오직 신화적인 존재만이 인간을 넘어선다. 그렇다면 인간이 어떻게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떤 결정적인 견해를 가질 수 있겠는가? 인간은 자신이 제어하지 않거나 부분적으로만 지배하는 일종의 심적 과정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자신과 자기 생애에 대하여 최종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다한 생애의 이야기는 어떤 지점, 즉 그 사람이 기억해내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하는데 이미 너무나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인간은 일생이 어떻게 되어나갈지 모른다. 그러므로 생애의 이야기는 시작이 없으며 그 목표 지점도 단지 막연하게만 제시될 뿐이다.

 

인간의 생애는 일종의 애매한 실험이다. 그것은 숫자상으로만 보면 거창한 현상이다. 인생은 허무하기 짝이 없고 너무나 불충분하여 어떤 것이 존재할 수 있고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적 그 자체라 할 만하다언제나 나에게 인생은 뿌리를 통하여 살아가는 식물처럼 생각되었다. 식물의 고유한 삶은 뿌리 속에 감추어져 보이지 않는다. 지상에 드러나 보이는 부분은 단지 여름 동안만 버틴다. 그러다가 시들고 마는데 하루살이같이 덧없는 현상이다. 생명과 문화의 끝없는 생성과 소멸을 생각하면 전적으로 허무한 느낌을 받게 된다. 하지만 나는 영원한 변화 속에서도 살아서 존속하는 그 무언가에 대한 감각을 결코 잃어버린 적이 없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사라져갈 꽃이다. 그러나 땅 속 뿌리는 여전히 남아 있다나는 인생의 복잡한 문제에 관해 내부로부터 해답과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 그것들은 결국 별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아주 일찍부터 깨달았다. 외적인 상황들은 내적 체험을 대신할 수 없다나는 외적 사건들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없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나에게는 공허하거나 실제적이지 않은 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나는 나 자신을 내적 사건들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그것들이 내 생애의 특이성을 이루며 나의 자서전은 그러한 내적 사건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만물은 무한이므로 인간은 무한의 한몫을 차지한다. 감각 기관을 도구로 의식을 기록 장치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은 궁극적으로 말하자면 한없이 크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만물에 관여하고 있으며 만물이 무한하기 때문이다. (p. 157)

 

Ü 일견 맞는 말이다.

 

정신을 일방적으로 그리고 과도하게 행동하면 자기를 상실할 염려가 있으며 이것 역시 육체의 자기 파괴와 마찬가지다. 자기자신을 경험한다는 것은 사는 것 자체를 가리킨다. 여기서 산다는 것은 지속적이고 생명력 있는 자기 경험을 말한다. 새로운 경험을 지속하지 않는 사람은 흐르지 못하고 고여서 썩어가는 물과 같다. 또 자기가 경험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경험에 끌려가는 사람은 식물처럼 산다고 볼 수 있다. 의식적으로 산다는 것은 경험에 대해 언제나 깨어서 마음을 열고 있음을 뜻한다. (p. 158)

 

Ü 끊임 없이 살아가는 것, 그래도 살아야만 하는 것. 그것은 자신을 찾아가는 길이다.

 

□ 인적이 없는 산 속에서 하룻밤을 지내거나 여러 날 동안 도보 행진을 하는 일, 또는 수직으로 선 침니를 고도의 밸런스를 잡으며 조금씩 기어오르는 일 등은 자기의 의식을 극한 영역으로 내모는 외부적인 조건으로서 충분하다. (p. 164)

 

□ 우리에게는 이러한 일을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언어가 없다. 우리들 등반가는 다른 스포츠맨처럼 자기들끼리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사용한다. 따라서 직접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도 같은 경험이 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때 눈에서 빛이 나는 경우가 있다. ‘스코토니 동남벽 제1밴드 위의 두 번째 자일 피치 중간의 현수 트래버스, ‘아이거 북벽 람페의 급류 침니또는 에베레스트 사우스콜의 폭풍 속의 밤 같은 (p. 166)

 

Ü 이 대목에서 왜 우쭐해 질까.

 

□ 또한 자신의 체험을 이해하는 능력이란 아무에게나 있는 것도 아니며 스스로의 체험을 남에게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은 더더욱 드물다. (p. 166)

 

Ü 내가 한번 묘사하여 전달해 보겠다.

 

그것은 천 가지 만 가지 생각이 질주하면서 그 많은 것이 머릿속에 정확하게 새겨져서 전 생애를 보여주는 순간이다. (p. 167)

 

Ü 바로 이 순간이다. 이런 표현이다. 파노라마같이 과거의 일이 훅 지날 때의 묘사

 

논리도 기술도 통하지 않는 곳을 뚫고 나가기 위해서 일종의 본능을 동원해야 한다. (p. 168)

 

□ 오스발트 외르츠 박사는 등반이 고난의 유희며 그 성패는 폐활량이나 심장의 힘보다는 오히려 동기부여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는데 그는 인간의 생리가 마음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말하려고 했던 것이다. (p. 168)

 

Ü 이건 어떤가. 지극히 평범한 묘사들의 나열 후 정상이었다. 로 싱겁게 끝내 버리는 것.

 

9장 자살 행위 (죽을 줄 알면서 암벽에 붙는 이유)

 

□ 평지에 있을 때보다 산 위에서 생명에 집착한다는 사실. 위험한 등반을 하다가 스스로 자기 인생을 정리한 예를 나는 본적도 들은 적도 없다. (p. 174)

 

□ 죽지 않으려고 얼마나 많은 체력과 정신력을 쏟고 또 쏟아야 하는지 스스로 체험하고는 놀라게 된다. 스포츠 알피니스트는 정신적인 면에 있어서 자살자와 가장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p. 175)

 

Ü 삶의 극한으로 몰고가 삶의 의지를 불태우는 등반가. 의지를 놓아야 열반할 수 있다는 데서 니르바나에서 가장 멀고 현실에 가장 가깝다. 가장 그리스적이며 가장 반 티베트 적이다.

 

□ 목숨 걸고 라는 말도 사실은 살려고 즉, 진정한 자기 자신을 향해 나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람머) 죽어도 좋다는 기분으로 극한으로 몰아세우는 것은 아니다. 이와 반대로 바로 그러한 순간에 나의 내부의 가장 깊은 곳에서 악착같이 살아야겠다는 강렬한 힘이 솟아오르는 것을 경험하고 싶기 때문이다. (p. 179)

 

10장 실종 (정상에서 사라진 두 사람)

 

□ 그들은 있는 힘을 다 쏟은 끝에 저녁이 되어서야 정상에 도착했다. 피로가 극에 달한 상태라 도저히 하산은 어렵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래도 해보았다. 어둠 속을 내려오면서 그들은 수없이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p. 184)

 

Ü 상상한다.

 

□ 죽은 자로부터의 소식 (p. 187)

 

Ü 융은 죽은 친구가 자신의 꿈에 나와 생전에 간 적 없는 그 친구의 서재로 인도했던 이야기를 우리는 알고 있다.

 

□ 두 사람이 지상 최고 지점의 최초 등정자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아무래도 좋다. (p. 187)

 

Ü 그렇다면 1924년에 처음 어빈과 말로리가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것이 아닌가. 비록 하산하다 운명하였지만 말이다.

 

11장 죽음의 지대 (낭가파르바트의 담배밭)

 

□ 제2차 세계대전 후 가장 빛나는 업적을 쌓은 독일 등반가의 한 사람인 토니 킨스호퍼가 동료인 지기 뢰브를 잃고 낭가 파르바트의 바즈인 분지를 내려왔을 때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에 대한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분지의 넓은 눈밭을 가로 질러 가고 있을 때 그의 아이젠이 벗겨졌다. 당연히 아이젠을 다시 묶어야 했는데도 그는 자기가 눈밭이 아니라 담배밭 사이를 걷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대로 비틀거리며 내려갔다. 고도가 그의 감각을 잃게 한 것이다. (p. 190)

 

□ 에르조그와 라슈날은 1950년에 인간으로서는 처음으로 8000미터정상에 선 뒤 몽유병자처럼 안나푸르나를 내려왔다. (p. 193)

 

□ 에베레스트 정상에 섰을 때 나는 너무나도 감격한 나머지 몸이 떨렸다. (p. 196)

 

□ 죽음의 지대의 희박한 공기는 대뇌 안의 혈액 순환을 급격히 떨어뜨리고 백만이나 되는 뇌세포를 파괴한다. (p. 204)

 

□ 고소에서 등반가는 감각이 극도로 민감해지면서 인식이 확장되는 듯한 체험을 하기도 한다. (p. 205)

 

Ü 의식의 폭발, 그래서 환영을 보고 무의식을 깨닫고 깊이 절망하는 것이겠다.

 

□ 왜 높은 곳에서는 뇌와 몸이 죽어가면서도 사람과 접촉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일어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보이지 않는 동반자라든가 도와주는 자 등의 갖가지 환상이 생기는 것일까? (p. 206)

 

높은 곳을 안 자는 설령 낮은 지점으로 내려오더라도 전체를 훤히 꿰뚫어 볼 수가 있으며 자신이 어디쯤에 있는지를 쉽게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p. 207)

 

Ü 칼 융은 그의 자서전의 말미에 노자를 인용한 적이 있다.

 

노자가 모든 사람이 명석한데 나만이 흐리멍덩하구나 라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내가 이 늙은 나이에 느끼는 바다. 노자는 빼어난 통찰을 지닌 사람의 모범이다.’

 

인간의 사유를 통찰하는 대가가 자신이 흐리멍덩함을 알고 있는 그 경지는 분명 높은 곳에서 보는 전체에서 인간에 지나지 않는 자신의 사유에 대한 우주적 스탠스에 놓은 정신적 자각이겠다.

 

12장 열반 (에베레스트에서 교토의 돌마당까지)

 

8000미터 봉우리 위에 그대로 눌러 앉으면 어떨까 하고 가끔 생각했다. 등반의 본래 뜻은 정상에 머무는 일이 아닐까? 겨우 도망쳐 나온 세계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는 것이 맞지 않을까? (p. 212)

 

Ü 그럴 수도 있겠다.

 

끝없는 공산 한 가운데 있는 정상에 나는 앉아 있었다. 깊숙한 골짜기에 뿌연 안개가 깔려 있다. 주위의 지평선이 내 마음의 공허감처럼 부풀어 올랐다. 깊은 호흡을 내뱉자 맑고 환상적인 동그라미가 나타났다. 표현하기 어려운 해탈감이 다가왔다. 나는 이 조화를 이룬 상태, 열반과도 같은 경지에서 깨어났다. (p. 213)

 

Ü 의지가 의식에서 놓아진 시간. 이 경지를 꼭 한번 느껴보고 싶다.

 

높이 오를수록 스스로가 더욱 맑고 뚜렷하게 보이며 감각이 예민해진다. 그가 온 정열을 쏟은 정상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그의 것이 된다. 그는 환하게 빛을 내는 그 안으로 들어가서 가장 이상적인 경우 열반 속으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해발 8000미터가 넘는 높은 곳에서 외계와 완전히 갈라서면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고독감에 젖는 법이다. (p. 214)

 

□ 이 경우엔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면서 정상을 놓치지 않아야 하며 그렇다고 정상에 집착한 나머지 돌에 차이는 일도 없어야 한다. 공자는 사람은 두더지 흙더미에 발이 걸려 넘어지지만 태산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마지막 한 발은 첫 걸음에 달려 있고 첫 걸음은 마지막 한 발에 달려 있다. (p. 215)

 

Ü 이거 멋진 표현이다. 새기자.

 

13장 알피니즘의 세속화 (무덤과 정상사이)

 

□ 많은 등반가들이 통속적인 알피니즘에 빠져 있으며 반드시 정상에 올라야 한다는 정상 정복욕에 매몰되어 있거나 또는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그릇된 수치심에 자기의 내면 세계를 숨기고 있다. 그러나 옛날에는 산이 거대한 미지의 세계였으나 오늘날 나에게 더 큰 미지의 세계는 불안과 꿈과 갖가지 의식 단계를 지니고 있는 인간의 의식이다. (p. 219)

 

Ü 산에서 사람으로 이제는 옮아가야 한다. 정상 앞에 솔직해져야 한다. 메스너의 주장은 융의 질문과 매우 닮아 있다. 사람의 의식에 천착하는 등반가 그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등반가다.

 

□ 등반이란 한낱 전쟁의 대용품이며 남자들의 승부 놀음이란 말인가? (p. 220)

 

□ 특히 등반에 있어서는 남성 안에 잠재하고 있는 여성적인 부분인 아니마 (남녀 모두에게 있는 이성적인 측면을 가리키는 심층 심리학 용어, 여자에게는 있는 남성적인 면은 아니무스)를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p. 220)

 

Ü 남성의 정복욕에 더한 여성의 연민과 감수성, 그리고 감응 능력.

 

하루가 지나면 마치 새로운 날처럼 또 하루가 시작 되어 이 맥빠지는 단조움에 질식할 수밖에 없다. (p. 223)

 

Ü 일상의 지루함을 나타낸 멋진 표현이다.

 

등반 활동이 현대의 분업으로 인해 인간이 기형적으로 되지 않도록 막아주는 신통력을 가진 영약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p. 226)

 

Ü 자본이 썩혀 놓은 인간의 영혼은 결국 산으로 치유될 수 있을 거다.

 

□ 산이 사람을 부르듯이 사람들은 고산 체험에 대한 읽을 거리를 맹렬히 찾고 있기 때문이다. (p. 227)

 

Ü 독자층이 얇다는 지적을 받은 뒤라 이 문장을 읽어도 깨운 하지 않다.

 

14장 자연스러운 고양 (약물에 의한 것과 다르다)

 

깊은 곳에 숨은 자여 내 운명을 지배하는 자여, 보잘것없는 나에게 강하고 신비스러운 감동을 가지고 말을 걸어오는 자여, 나는 그대에게 감사하노라! 인생이 제공하는 달콤한 것 가운데서 가장 단 것을 맛보게 해주니 감사하노라. 죽음의 잔에 입술을 대게 해주니 감사하노라. 참다운 죽음의 위험은 신이 내리는 선물이기에 두려움을 모르는 인간, 신경을 자극하는 이 신기한 맛을 죽음의 불안을 모른 인간이 가련하다. 지상의 기쁨 따위는 언제라도 내던진다. 그러나 내게서 두려움을 빼앗아간다면 차라리 죽은 것이 나을 만큼 인생은 삭박하고 지루하게 되리라! (p. 231)

 

Ü 람머가 한 이야기다. 인생에 대한 그의 시선은 맹렬하고 강력하다. 두려움은 신이 주는 은총이라는 말이겠다. 꼭 한번 인용할 수 있을 것 같다.

 

□ 탄탈로스(그리스 신의 하나로 영원한 굶주림과 갈증이라는 벌을 받았다고 함)의 영원한 형벌. 산을 잃는 것보다 견디기 어려운 산악병이 또 있을까. (p. 235)

 

밀도 있게 살겠다는 욕망. 생의 고양감이 많은 등반가들이 한결같이 이야기하는 다행증 쾌감을 일으킨다. 이러한 열반적인 해방 상태와 행복감 속에서 언제까지나 정상에 머무르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것도 어느 정도 당연하다. (p. 236)

 

□ 자기 인생이 ()인 것을 깨달은 자만이 자기의 존재 의미에 대한 물음에 답할 수 있기 때문이다. (p. 237)

 

Ü 융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결국 인간이 가치 있는 것은 오직 본질적인 것 때문에 그러하다. 우리가 그것을 갖지 않는다면 인생은 헛된 것이다. 또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무한한 것이 그 관계 속에 나타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결정적인 것이다.

내가 극단적으로 제약을 당할 때 비로소 무한한 것을 느끼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인간에게 가장 큰 제약은 자기 자신이다. 그것은나는 다만 그것에 불과하다!’는 체험 가운데 나타난다. 내가 자기 자신 안에서 아주 좁게 제약되어 있다는 의식만이 무의식의 무한성에 접속될 수 있다. 이러한 의식성에서 나는 나를 유한하면서도 영원하며 이것이면서도 저것으로써 경험한다. 내가 나를 개인적인 결함 속에서 궁극적으로 제약되어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로 알게 되면서 또한 무한한 것을 의식할 수 있는 가능성도 지닌다. 오직 그러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단일성과 무한성은 동의어다. 이것 없이는 무한성을 지각할 수 없다.’ 어떤가. 매우 유사하지 않은가. 무한의 세계를 간간히 볼 수 있는 등반가들이 무의식을 느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 중 하나임엔 틀림없다.

 

□ 정화된 기분에 그처럼 도취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 알피니즘의 격을 다른 어떤 스포츠보다 월등하게 높여주고 있다. 그 밖에도 신경이 쇠약한 20세기의 젊은이들을 노리고 있는 또 하나의 특별한 쾌감이 알피니즘 속에는 숨겨져 있다. 이것은 다른 스포츠가 제공하지 못하는 죽음의 위험이라고 생각한다. (p. 237)

 

Ü 메스너는 람머를 매우 좋아하는 모양이다. 위의 문장도 람머가 한 이야기다. 그러나 람머는 등반가로서 몇 안 되는 깊은 통찰을 가진 사람인 것 같다.

 

□ 사실 아무리 극단적인 산악 스포츠라 해도 아편이나 알코올 또는 이른바 사랑만큼 위험하지는 않다. (p. 240)

 

Ü 위험하다 부추기는 사람들에게 일갈해도 될 만하다.

 

□ 나에게 등반은 죽음에 도전하는 삶이다. 물론 넓은 의미에서 볼 때 등반은 병이라고 할 수 있다. (p. 241)

 

Ü 죽음에 도전하는 인간. 캬 멋지지 않은가. 인간의 시간을 넘어서겠다는 철학적 사유가 느껴진다.

 

15장 자신에게 가는 길 (참 자아를 찾아서)

 

□ 존재 의미에 대한 물음은 합리적으로는 풀리지 않는다. 죽음에 이르게 되는 때 바로 인생의 의미를 알게 된다. 자기 자신을 찾다가 죽음이 어떤 것인지를 안 자는 애써 노력하는 일 없이 자유롭게 놀이를 계속할 수가 있다. (p. 244)

 

Ü 노는데 빠지지 않고 찾아 다니기 위해서는 필요하다. 꼭 필요하다. 제대로 놀기 위해서는 죽음이 필요하다.

 

누가 자기 자신을 알겠는가? 자기가 갈 길을 알고 있다고 큰소리 치는 자도, 깊은 곳에 숨어서 만물의 성쇠를 지배하는 신의 입장에서 본다면 우물가에서 놀고 있는 철부지 어린애와 다를 바가 없다. (p. 245)

 

Ü 그래서 노자라는 성인도 자신을 흐리멍덩하다고 했고 부처도 갠지스 강 모래알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한번 날개짓에 구만리를 날아가는 붕새의 시선으로 보면 인간이나 벼룩이나 코끼리나 매 한가지라 이야기한 장자도 그렇다.

 

등반에서 경험을 얻는 데 결정적인 작용을 하는 것은 열린 감수성과 지성이며 그밖에 예외적이기는 하나 인간 존재의 극한 영역에 뛰어드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p. 247)

 

19세기식 정복을 위한 등반에서 21세기의 존재를 위한 등반으로 가기 위해서는 알피니즘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 우선 정상을 소유 가능성으로 보는 눈을 버려야 한다. 자신을 정상의 노예로 만드는 셈이다. (p. 248)

 

Ü 정상의 노예된 자들이 의외로 많다. 대부분의 사고는 이런 욕망과 관련 깊은데 인간의 무절제한 욕망에 신이 보내는 시그널이다.

 

□ 나와 내 이웃의 인격을 발견하는 것이 존재의 목적 즉 삶이며 이것을 촉진하는 것은 모두 신성한 것이라는 깨달음이다. (p. 250)

 

□ 자연적인 고양, 자기 인식을 체험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등반과 바꿔놓을 만한 것은 없다. (p. 251)

 

후기

 

□ 이 책은 극한 영역에서 쓴 극한 영역에 관한 책이다. 대개 천막 안에 앉거나 혹은 엎드려서 썼는데 그때 엷은 천막 플라이에 비나 눈이 떨어졌으며 사방 벽에는 서리의 무늬가 불규칙하게 돋아났다. 이렇게 해서 쓴 글이 마냥 합리적일 수만은 없다. (p. 252)

 

Ü 메스너여, 어디 등반이 합리적이었을 때가 있었나. 깊은 슬픔 속에 쓴 글이 나의 가슴을 울렸다면 그대의 노고는 그것으로 빛을 받아 마땅하다.

 

 

3. ‘두려움과 놀기(내가 저자라면)

두려움과 놀 수 있기를 바랬다. 내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떠들고 다니는 것이 하나 있다. 노는 곳에 절대 빠지지 말도록 노력하자는 좌우명인데 언제 바뀔지 모르는 좌우명이긴 하지만 아마 꽤 오랫동안 내 일상을 지배하는 아포리즘이 될 것 같다. 그만큼 내가 지닌 두려움이 크고 그 종류와 양에 있어서도 유난히 두려움을 느끼는 인간이기 때문이겠다. 나를 짓누르는 권위와 보이지 않게 행해지는 각종 폭력의 무늬들 그리고 그저 살고 죽을 수 있다는 삶의 기품에 대한 두려움. 무엇보다 자기 강박으로 인한 사유의 둘레에 갇힌 것이겠으나 나는 두려움을 달고 사는 인간이다.

 

그 중 가장 두려운 두려움이 있다. 등반에 임해 느낄 수 있는 부지불식간의 추락, 그 추락에 대한 두려움. 한번의 레코드로 그 트라우마가 아직 살아있는 사람으로 고소에서의 추락과 그 어쩌지 못하는 의식과 물리적 육체의 패쇄성을 나는 두려워한다. 그러나 메스너, 그는 그 추락의 두려움을 신랄하게 파헤쳐 두려워마라며 나를 위로한다. 이 책은 메스너가 나에게 주는 두려움을 즐기는 법이다. 메스너는 람머의 말을 빌려 아래와 같이 이야기한다.

 

참다운 죽음의 위험은 신이 내리는 선물이기에 두려움을 모르는 인간, 신경을 자극하는 이 신기한 맛을 죽음의 불안을 모른 인간이 가련하다. 지상의 기쁨 따위는 언제라도 내던진다. 그러나 내게서 두려움을 빼앗아간다면 차라리 죽은 것이 나을 만큼 인생은 삭박하고 지루하게 되리라!’

 

생을 살아가는 데 두려움은 필수라는 것이다. 그 두려움을 가장 극명하고 리얼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로 등반 행위라고 역설한다. 그가 밉다. 내 사유의 지평이 이르러야 할 지대를 그는 이미 밟아 넘어서고 있음으로. 책의 맨 처음 그가 등반을 죽음을 피하는 기술이라 했을 때 알아봤어야 했다.

 

책은 총 15개의 많은 챕터로 이루어져 있다. 각 챕터에 아래 꼭지글은 없으며 매력적인 챕터에 제목에 맞는 적절한 글들과 예화들이 이어져 있다. 이 책은 나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신의 일을 최소화하여 적절한 때 아주 조그만 일화만을 소개하고 나머지 대부분의 내용은 인용과 자신의 사유 그리고 실제 다른 등반가들의 예화다. 효과적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중언부언 풀어놓는다면 아마 이런 3자적 시각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책의 흡인력은 반감되었을 게다. 나의 책도 곧 이러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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