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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21일 05시 40분 등록

공자 노자 석가

-. 모로하시 데츠지 지음 / 심우성 옮김

-. 동아시아, 2001

 

 

저자에 대하여 - 모로하시 데츠지

 

 1883년 일본 니가타 현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한학을 배웠다. 도쿄고등사범학교 국어한문과를 졸업하고 교사로 일하다가 1919년 중국으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한자와 한학을 연구했다. 유학 시절 한자 사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귀국 후 다이슈칸 서점의 제의로 1929년부터 사전 편찬에 착수, 1943년에 첫 권을 펴내고 1960년에 제 13권을 펴냄으로써 <대한화사전>을 완간하였다. 사전 편찬 과정에서 눈을 혹사해 한쪽 눈의 시력을 잃기도 했으나 각고의 노력 끝에 펴낸 <한화대사전>은 세계에서 가장 정확하고 방대한 한자 사전의 하나로 평가 받고 있다. 사전 편찬의 공로로 아사히 문화상과 문화훈장을 수상했다. 1929년 도쿄대학에서 <유학의 목적과 송유의 활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고쿠가쿠인 대학 교수와 쓰루분카 대학 학장을 지냈다. <논어강의> <노자강의> <장자이야기> <중국고전명언사전> <공자노자석가 삼성회담>등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1982 100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1장 좋아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31 노자: 글쎄요….  지금 공자님은 높은 산이 세계를 내려다보는데 알맞다고 해서 산이 마음에 든다고 하신 것 같습니다만, 나는 그와는 반대로 계곡의 낮은 점이 마음에 듭니다. 왜냐하면 계곡은 낮은 까닭에 물도 흘러 들어오며, 그래서 그곳에서는 고사리도 자라고 고비도 싹을 틉니다. 만물은 모두 낮은 곳으로 모여들어 그곳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나는 계곡의 신을 도에 비유하여 계속의 신은 죽지 않으니 이를 알 수 없는 생산자(현빈)라한다고 했습니다.

 

31 현빈(玄牝)이란 만물을 생산하는 불가사의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여인이라는 의미입니다. 게다가 이 알수 없는 생산자의 문이 천지의 뿌리이다. 이는 미세하게 이어져서 있는 듯 없는 듯하지만 아무리 써도 다함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31 예를 들자면 계곡은 거의 불가사의한 여인과 같은 것으로 속에서 무엇이든지 나옵니다. 그 현빈의 문이 있는 지점에서 천지도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계곡에서 만물이 나오는 까닭에 미세하게 이어져서 있는 듯 없는 듯하지만 아무리 써도 다함이 없다(피로하지 않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낮은 곳에 있는 것은 만물을 낳는 근원입니다. 그래서 나는 나의 도를 현빈이라고도 말하는 것입니다.

 

32 첫 번째 이유는 물은 진실로 부드럽고 약하며 다른 것들과 공적을 다투는 일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은 그릇에 따라 모양이 변합니다. 즉 그릇이 네모나면 자신도 네모나고 그릇이 둥글면 그 속에 들어가 있는 자신도 둥글어집니다. 그리고 아무런 고집도 부리지 않으며 집착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물이 힘이 없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물방물이 바위를 뚫는다는 말도 물의 힘을 나타내며, 또한 거대한 함선을 띄워서 멀리 운반하는 것도 물입니다.

 

32 내가 물을 칭송하는 두 번째 이유는 이렇습니다. 물이라는 것은 가장 겸허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며, 다른 것들과 공적을 다투는 일이 전혀 없습니다. 이 점이 나는 대단히 마음에 듭니다. 인간은 제멋대로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싶어합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원인 중 절반은 바로 이 점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물은 스스로 낮은 곳으로 흐르고 있으므로 다른 것과 경쟁할 오류를 범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낮은 곳에 있는 까닭에 천하의 많은 것을 이루기도 합니다. 즉 낮은 곳에 있으므로 만물이 흘러 들어와 만물을 내부에 싸안아 저장하는 힘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점이 진실로 물의 위대함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33 그래서 나는 으뜸가는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되 싸우지 않는다.”, 즉 물은 만물에 이로움을 주고 잇지만 전혀 다른 것들과 그 공적을 다투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했으며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하니 도에 가까운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항상 강과 바다가 백 개나 되는 계곡의 왕이 되는 까닭은 그보다 더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고도 말했습니다.

 

33 양자강과 같은 강 또는 바다는 모든 계곡의 왕이 됩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자신이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낮아지지 않으면 그곳에 만물은 흘러들지 않습니다. 낮은 곳에 있는 까닭에 많은 계곡과 강에서 흘러들지 않습니다. 낮은 곳에 있는 까닭에 많은 계곡과 강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모두 그 속으로 들어와서 마침내 백곡의 왕이 되는 것입니다.

 

33 한편 물은 또한 대국의 횡포를 경계하는 재료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큰 나라는 아래로 흐르나니 천하의 교류는 이와 같다. 그러므로 큰 나라는 기꺼이 아래에 있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 않고 스스로의 거대함을 내세워 상위에 있으려고 하면 반드시 실패하게 됩니다.

 

35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움직이고 어진 사람은 고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로운 사람은 즐겁게 살고 어진 사람은 오래 사느니라라고 말한 것은 또 다른 방면의 인지경향론입니다.

 

36 또 갓난아기는 무슨 일에 있어서나 무념 무상으로 단 한가지 생각에만 매달려 여념이 없다는것이 마음에 듭니다. 세상 사람들은 못된 장난과 하잘 것 없는 갖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좌우로 두리번거리지요. 그렇지만 갓난아기는 한 가지에만 매달려 여념이 없지요.

 

37 예를 들어 지진이 일어나서 눈이 빙글빙글 돌아갈 정도라면, 기둥 같은 것이라도 꽉 잡고 있으면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생에서 헤매며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면 한 가지 일을 잡고 벗어나는 일없이 갓난아기처럼 오로지 한 가지 일에만 마음을 쓰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더욱이 갓난아기를 천하의 그 무엇도 해롭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38 내가 갓난아기를 찬미하는 도 하나의 이유는, 갓난아기에게는 아직 인간이 갖고 있는 희노애락의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 무심. 무표정한 모습은 마치 도덕을 몸에 익힌 인간의 진정한 모습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39 무엇이 그리 기쁜지 세상의 속물들은 싱글벙글하며, 큰 연회의 음식을 받는 것처럼 기뻐하고, 또 봄에 전망 좋은 높은 전각에 올라간 듯한 기분으로 기세 등등해 있습니다. 그렇지만 ’(갓난아기, 또는 도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지만)홀로 고요해서 아직 아무 징조가 보이지 않는즉 희로애락의 아무런 징조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갓난아기가 지금 갓 태어났을 뿐, 보조개를 보여줄 정도도 되지 못하는, 이 모습이야말로 진정 아름답습니다. 진정 도를 행하고 익힌 참된 사람의 모습을, 나는 갓난아기를 들어 도의 상징으로 비유하여 예찬하는 것입니다.

 

39 갓 태어난 아기야말로 진정 자연의 순정 그대로이며, 천진함을 그대로 갖추고 있습니다. 맹자도 대인이라는 것은 어린아이와 같은 순결한 마음을 잃지 않는 자이다.”라 말했다.

 

40 노자님은 인간의 꾸밈을 몹시 싫어하신 듯한데, 나도 그 점은 동감하며, 순직하고 말재주가 없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아하는 것입니다. 꾸밈, 겉치레, 현기(자기 재능을 뽐내고 싶어하는 마음), 교만함 등은 정말로 쓸모 없는 것입니다.

 

40 세상 사람들은 쓸모 있는 도구를 존중하고 가공하지 않아 쓸모 없는 제목은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과여 이것이 올바른 일일까요? 쓸모 있다고 하는 것들은 반드시 사람에게 이용됩니다. 그리고 사용하는 사람이 유용하게 사용하면 그것으로 끝납니다.

 

41 나는 또한 도는 항상 이름 없는 본바탕으로 비록 작으나 천하가 이것을 감히 신하로 삼을 수 없다라고도 말했습니다. 가공하지 않은 순수한 재목, 즉 산에서 금방 베어 온 나무는 쓸모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쓸모가 없기 때문에 이용되지 않습니다. 이용되지 않으므로 다른 사람에게 사용되어 신하가 되는 일이 없습니다.

  신하가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은 단적으로 말해 자기 자신의 군주이며 주인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약간 괴팍한 논리입니다만 그러나 사실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겉치레나 꾸며서는 안 됩니다. 자연 상태의 가공하지 않은 순수함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나는 가공하지 않은 순수함을 존중합니다.

 

45 하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변화는 자연스럽게 오고 갑니다. 봄이 되면 초목의 싹이 나고, 여름이 되면 잎이 무성하고, 가을이 되면 열매를 맺습니다. 공자의 말씀은 천지 자연의 변함없는 순화의 위대한 힘을 가르쳐 주신 것이라고 지금 깨달았습니다. 당연하지만 우리들도 천지 자연이 만물을 길러내는 모습을 보며 환희와 우러러 나오는 경외감을 느낍니다.

 

46 송나라의 정명도는 이 마음에 정성을 다한ㄴ 것이야말로 천지 만물을 낳는 기상으로 본다(천지의 진정한 기상으로 비추어, 우리들 또한 만물을 살리는 것이 인간의 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으며, 그의 동생 정이천은 조용히 하고 만물을 보면 자연 모두에 봄의 의지가 담겨져 있다(마음을 조용히 하고 천지 사이의 만물을 보면, 어느 곳에나 봄의 왕성한 기운이 가득하고 생생하게 발육하는 모습이 눈앞에 나타난다)”고 말했습니다.

 

47 나는 자연이 언제나 반복하고 있다고 볼 뿐입니다. 번성한 것은 곧 쇠퇴하고 쇠퇴한 것은 반드시 번성합니다. 이것이 천지 자연의 모습인 셈입니다. 여기서 내 생각을 말하라 하시면, 번성하는 것이 쇠퇴하는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오히려 쇠퇴한 것은 반드시 번성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48 노자 : 그래서 나는 되돌아옴이 도의 활동이다라고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흘러가는 것이 도의 활동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은 되돌아오는 것이 도의 활동인 것입니다. 나는 또한 도를 설명하여 나는 그 이름을 무어라고 할지 알 수 없어서 억지로 도라고 했으며, 마지못해 크다고 이름한다. ‘크다함은 감을 말함이요, 간다 함은 멀리 활동함을 뜻함이요, 멀리 움직임은 되돌아옴을 말함이다라고 말했습니다.

 

48 밝은 도는 어두은 듯하며, 진취적인 도는 퇴영하는 것 같다.

 

48 큰 평방은 모서리가 없으며,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지고, 큰 소리는 소리가 없고 큰 모습은 형태가 없다.

 

49 ‘큰 소리는 소리가 없다는 것처럼 큰 모습은 형태가 없다는 것처럼 가장 커다란 형상은 우주이며 자연이지만, 그 형태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소리가 엇는 소리가 가장 큰 소리이듯, 이 무형의 우주와 자연이야말로 절대의 힘을 갖고 있습니다.

  경계 가운데 네 가지 큰 것이 있는데, 왕도 그 하나에 거한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으며 하늘은 도를 본받는데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

 

49 도까지도 자연을 본받습니다. 하물며 인간의 작은 행위로써 자연을 거스르고, 자연을 정복하려는 생각 따위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겸허하게 순종하며 자연에 일임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나의 자연관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바로 이 대자연입니다.

 

2장 공자의 가계와 그의 행적

 

62 나는 항상 세상을 구제하는 일이 나에게 주어진 천직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온몸을 던져서 분투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심신이 쇠약해져 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때 내 나이 68. 아무리 힘써도 육체가 이를 따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차피 살아 있는 동안에 이 세상을 구제할 수 없다면, 적으나마 뜻을 후세에 남기자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65 첫째는 공자가 모국을 떠날 때의 심중과 처세, 둘째는 당시 수많은 은자들과 나눈 대화 속에 보이는 공자의 세상 구제에 대한 열의입니다.

 

71 갈아도 갈아지지 않고, 검게 물들여도 검어지지 않는 것이야말로 희다고 할 수 있는 것이며 이는 진실로 굳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나의 뜻은 이처럼 단단하고 흰 것이라서 필힐과 같은 악인이라도 능히 나를 혼란에 빠뜨릴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78 공자님은 늘 어진 사람을 보고 자신도 그와 같아지기를 생각했고, 어질지 못한 사람을 보게 되면 나 자신을 스스로 살펴야 되느니라고 하여, 친구를 사귀는 데에도 가르침을 구하라 하셨습니다.

  또한 세 사람이 일을 하는 데 있어서도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느니라. 그 착한 사람을 택하여 따를 것이고, 그 착하지 않은 사람을 보고 고칠지니라고 말하며, 평범한 세상 사람들의 언행 속에서도 충분히 스승을 구할 수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79 제자 자공이 선생님께서 말씀하시지 않는다면 저희들은 어떻게 도를 배우고 전하나이까?”고 말했을 때, 공자님은 하늘이 무엇을 말씀하시더냐? 사시가 운행되며 만물이 생겨난다. 하늘이 무엇을 말씀하시더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장 노자와 석존의 생애

 

90 당의 백낙천이 노자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시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하고, 아는 자는 침묵하나니

    이 말 나는 노군에게 들었도다.

    만약 노군이 아는 자라고 한다면

    어떠한 연유로 스스로 5천여 문을 저술했나

 

4장 세 분 성인의 인간관

 

97 석존은 인간의 행복과 불행, 가난과 부유함, 삶과 죽음 등은 모두가 무상하다는 점을 실감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인생에 대한 깊은 고뇌를 안고 아내와 자식, 그리고 지위도 버리고 산 속에서 6년간이나 고행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고행도 역시 무의미함을 깨닫고, '네란쟈라'라는 강변으로 내려와 우유를 마시고 기력을 회복한 뒤,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좌선 정진한 지 7일만에 깨달음을 얻게 되셨습니다. 그것은 석존 35세 때의 일입니다. 그 성도의 날이 음력 12 8일입니다. 그런데 6년간의 고행 기간 중 단순히 외적인 압박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석존 자신의 가정 내에도 갖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103 즉 좋은 인간은 악한 인간의 스승이 되므로 중요하다, 불선인은 사람이 선한 인간이 되기 위한 자료의 모태가 되므로 이것도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쁜 짓을 하면 당연히 나쁜 결과를 낳는다고 하는, 교훈의 자료가 된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104 나에게도 좋아하는 인간의 유형이 여러 가지 있지만, 그 하나는 역시 자신의 지위에 만족하고 있는 인간입니다. 찻잔에 물을 충분히 넣으려고 하면 물은 넘쳐 버리고 면도칼의 칼날을 예리하게 갈려고 하면 칼날이 망가지기 쉽습니다. 무슨 일이든 어떤 지점에서는 그만두고 만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금과 옥이 집에 가득하더라도 능히 지키지 못한다.

    부귀해서 교만하면 스스로 허물만 남길 뿐이다.

 

105 “족함을 아는 자는 풍요롭다.”는 생각이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105 자신이 사물을 만들어 냈으면서도 그것을 자랑하지 않으며, 또한 자신이 사물을 성장시켰으면서도 그것을 뽐내어 자신의 공적으로 삼는 일을 하지 않은 사람이 내가 말하는 현덕의 인간입니다.

 

105 이란 그윽한의 현이며, ‘현의 우현의 현이기도 하며, 외면으로는 나타나지 않지만 빌릴 수 없는 진짜를 말합니다. 나는 이와 같은 인간을 좋아합니다. “수컷의 늠름함과 씩씩함, 즉 수컷이 지닌 덕을 잘 알지만 암컷처럼 유순하고 부드러운 덕을 지키면 천하의 계곡이 된다.”

  수컷은 남성이며, ‘암컷은 여성입니다. 즉 남성과 같이 적극적이면서도 여성처럼 겸손하게 물러나는 도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106 근시안적인 사람들은 그렇게 낮은 곳에만 있게 되면 항상 밑에 깔리게 되어 세상에 나타나지도 못하고 손해만 본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절대 그렇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스스로 공적을 나타내려고 하면 공적은 나타나지 않고, 스스로 자랑하려고 하면 도리어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106 그러므로 나는 스스로 안다고 하는 자는 명철하지 못하고”, “스스로 옳다고 하는 자는 드러나지 않으며”, “자기가 정벌했다고 하는 자는 공이 없으며, 스스로 긍지를 갖는 자는 오래 가지 못한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정벌한다는 것은 공적을 뽐내는 것이고 긍지를 갖는다는 것은 마음속으로 자만하는 것입니다.

 

107 요컨대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재능을 알고 책임을 아는 것, 이것이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을 아는 사람을 지혜가 있다고 하고, 스스로 아는 사람을 명철하다고 한다.”

  다른 사람은 비교적 잘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보기란 상당히 어렵습니다. 다른 사람을 아는 것도 필요하므로 그 역시 지혜 있는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아직 진정한 앎이 아닙니다. 스스로를 아는 것이야말로 명철함이며 진정한 앎입니다.

107 “다른 사람을 이기는 것을 힘이 있다고 하며, 스스로를 이기는 것을 강하다고 한다.”

  타인을 완력 또는 재능으로써 이긴다는 것은 아직 그와 같은 힘이 있다고 하는 정도일 뿐이며 그다지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의 욕망을 자기 스스로 억제하기란 대단히 어려우며, 그것을 할 수 있는 자야말로 진정한 강자입니다.

  공자님도 극기복례는 인에 가까우니라고 말씀하셨고 왕양명도 산 속의 적을 무너뜨리기는 쉬우나, 마음 속의 적을 무너뜨리기는 어렵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어쨌거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이와 같이 스스로를 알고 스스로를 이기는 사람입니다.

 

108 다음으로 내가 싫어하는 인간은 할 수도 없는 일을 무리해하려는 인간이나, 항상 실력 이상으로 떠벌리는 인간입니다. 그러한 말을 하는 사람이 오래 계속되는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발돋음하는 자는 오래 서 있지 못한다”, 즉 억지로 발뒤꿈치를 들고서는 오래 서 있을 수 없다고 말했고, 또한 발걸음을 크게 떼어 놓는 자는 멀리 갈 수 없다.”고 훈계했습니다.

 

109 억센 바람 거센 비를 일으키는 것은 천지의 신이지만, 신이라 할지라도 무리를 한다면 결코 오래 버틸 수 없습니다. 하물며 인간이야 어떠하겠습니까? 계속 무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하려고 하는 인간이 많습니다. 나는 그것을 싫어합니다.

 

111 이는 한 마디로 말하면 자연의 품에 뛰어든다는 말입니다. 어머니는 즉 천지 자연이며, 천지 자연의 품으로 뛰어들어 의심하지 않는 사람만큼 고귀한 사람은 없습니다. 도를 수행하는 사람은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 속인은 그것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우왕좌왕하며 시끄러운 세상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나는 그와 같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120 공자에 심취했던 맹자는 백이와 이윤등 옛 성현을 논평하면서 벼슬할 만하면 벼스하고, 그만 두어야 할 만하면 그만두며, 오래 있을 만하면 오래 있고, 빨리 떠나야 할 만하면 빨리 떠나는 것이 공자님이시니, 다들 옛날 성인들일세. 나는 그처럼 행할 수가 없었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공자를 배우는 것일세라고 말했습니다. 맹자가 이처럼 말한 것은 공자님이 항상 때에 맞는중용의 대도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5장 생과 사란 무엇인가?

 

132 물의 흐름도 그러합니다. 흘러가는 강의 흐름은 멈추는 일이 없지만, 항상 원래의 물은 아닙니다. 꽃을 보아도 그러합니다. 오늘 피어있는 나팔꽃은 내일을 모르고 시들어 버립니다. 비교적 오래 피어있는 나팔꽃은 내일을 모르고 시들어 버립니다. 비교적 오래 피어 있는 다른 꽃도 작년의 꽃과 똑같지만 이미 작년의 꽃은 아닙니다. 흘러가는 물도, 피는 꽃도, 늘 있는 그대로의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삼라만상이 항상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듯, 이 세계의 모든 것도 그러합니다. 삼라만상을 가상으로 보는 것, 그것이 진짜 실상을 깨닫는 것입니다.

 

133 첫째는 인과의 이치를 깨닫게 함으로써 안심시키는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인과의 이치란 무엇일까요. 간단히 말해 좋은 일을 하면 좋은 결과가 나타나고 악한 일을 하면 나쁜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스스로 만든 원인에 의해 스스로 그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133 어떤 사람은 젊어서 죽고 어떤 사람은 비명의 죽음을 맞았다고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젊어서 죽음을 맞았다거나 비명의 죽음을 거두었다거나 하는 원인은 바로 그 사람 자신에게 있었던 결과입니다. 공자님이 가르치신 선을 쌓은 집에는 반드시 좋은 업보가 있고, 선을 쌓지 않은 집에는 반드시 나쁜 업보가 있다는 것과 별로 차이가 없는 것이지요.

 

134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라는 것은 현재 살고 잇는 일생에 관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에 걸쳐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에 걸쳐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업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아무리 선행을 행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과거 세상, 즉 전생에 악한 일을 행했다면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그 과보를 받습니다.

 

134 또한 현세에 악한 일을 하면 비록 그 결과가 현세에는 오지 않더라도 미래, 즉 내세에는 반드시 나쁜 결과가 생깁니다. 물론 선행을 행한 사람이 비록 이 세상에서는 재난을 받고 죽었다 하더라도 내세에서는 반드시 행복을 얻게 됩니다. 사후에 지옥도 있으며 극락도 있다고 설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134 그런데 이 지옥과 극락은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를 기다리지 않고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도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일이 매우 즐겁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극락이 아닙니까? 그와 반대로 악한 일을 하고 그 결과를 두려워하며 밤낮으로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면 비록 살아 있다 해도 그것이 바로 지옥이 아닐까요.

 

139 만약 삶보다도 더욱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나는 나의 삶을 버리고 그것을 취할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아닌 인간의 도입니다. 그리고 그 를 위해서는 한발자국도 죽음을 피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나의 생사관입니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으리라.”

 

139 “뜻이 있는 선비와 어진 자는 삶을 구하기 위해 인을 해치는 일은 없지만, 몸을 죽여 인을 이루는 일은 있느니라.”고 나는 말해 왔습니다. 인이니 도이니 하는 것을 생명보다 소중히 여겼기 때문에, 인간의 도를 위해서는 미련 없이 깨끗하게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것이 나의 생각입니다.

 

143 전쟁을 하고 적을 많이 죽일 때, 보통 사람은 이를 이긴 전쟁이라 하여 기뻐하지만 기뻐할 일이 아닙니다. 어찌 되었거나 전사는 슬픈 일이므로 눈물을 흘려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전쟁에서 이기면 보통 사람은 개선을 축하하며 크게 기뻐하지만, 오히려 장례식에라도 임하는 생각으로 몸을 처신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6장 석존의 공

 

148 마하반야란 커다란 지혜라는 말입니다. ‘마하는 산스크리트어로서, ‘크다는 의미를 갖고 있지만, ‘많다, ‘훌륭하다는 의미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반야지혜를 뜻합니다. 따라서 마하반야란 넓고 크고 무한하며 훌륭한 지혜라는 SEMT이 됩니다. 말하자면 만물의 실상을 꿰뚫어 보는 부처님의 지혜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149 불교에는 마하반야, 크다. 많다. 훌륭하다의 불지혜가 있지만, 그 지혜를 개발하여 자기의 생각으로 삼고, 또한 이것을 기본으로 하여 진정한 해탈을 얻는 것, 이것을 바라밀다라 합니다.

 

149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이 바라밀다를 얻었다면 그것을 자신만의 것으로 해서는 안되며 부처의 자비관에 의하여 다른 사람에게도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반야에 의해 해탈을 얻었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해탈을 얻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50 중국에서는 이것을 도피안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사실 인간 본연에게는 도덕적으로나 지식적으로 대단한 결함이 있습니다. 이 결함이 바로 헤매는 언덕이며 인간은 늘 이 헤메임의 언덕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번 힘것 노력하여 깨달음의 저 언덕에 이르려 합니다. 그 언덕에 가보면 훌륭한 깨달음의 세계, 즉 극락정토가 있음을 압니다. 그것이 바로 바라밀다의 가장 심오한 경지입니다.

 

150 학생: 석존께서 말씀하신 것을 다시 정리하면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이라는 것, 그것은 마음에서 일어난다라고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152 보살이란 무엇인가. 보살은 보리살타의 약칭입니다. 말하자면 깨달음을 얻는 사람으로서 모든 사람을 구제하는 부처라는 뜻입니다.

 

153 결국 관자재보살이 깊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다.”라는 깊은 지혜를 갖고 실상을 지극히 바로 꿰뚫어 봄은 물론, 자유자재로 세상의 변화를 관찰할 수 있고 사람을 이끌어 피안에 도달케 하는 일을 실행한다는 의미로, 한 마디로 도를 실현한다면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153 다음으로 오은이 다 공한 것을 비추어 보다란 어떠한 것인가. 오은은 색, , , , 식의 다섯 가지이며 조견 즉 비추어 보다는 마음으로 꿰뚫어 보는 것, 그래서 ㄱ 다섯 가지가 모두 공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153 불교에서는 어떤 것이나 단독으로 생겨난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무엇과 무엇이 인연에 의해 쌓이거나 모여서 이루어집니다.

  사람은 몸과 마음이 모였고, 그 몸은 뼈와 살이 모였고, 그 살은 과학적으로 말하면 단백질과 물, 그 물은 또 수소와 산소의 모임입니다. 따라서 오온이 모두 공이라는 것을 꿰뚫어 본다면, 그때는 비로소 번민과 재액으로 고통받고 있는 자기를 해탈하고 더 나아가 다른 사람도 구제할 수 있게 됩니다.

 

154 , 이제 오온 각각에 관해서는 아직 의문이 남았을 것입니다. 색이란 자기를 포함한 만물 모두를 가리키며, ,,,식 네 가지는 모두 인간이 외계에 접하는 마음의 모습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오온이란, 색 즉 나를 포함한 만물의 성질이며, , , , 식은 모두 만물과 접해서 일어나는 마음의 변화를 설명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오온이 모두 공이라 함은 만물도 또한 만물과 접하며 일어나는 인간 마음의 활동도 모두 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154 우리들에게는 눈, , , , , 뜻의 육근이 잇고, 그것이 바깥 세계와 접하면 눈으로는 색을 보고, 귀로는 소리, 코로는 냄새, 혀로는 맛, 몸으로는 촉감을 느끼고 그리고 뜻으로는 법(생각)이라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154 이것이 수입니다. 이미 수가 있으면 그것으로 인해 갖가지 생각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상입니다. 수와 상을 경과하면 자연히 이것을 실행에 옮기려고 합니다. 그것이 행입니다. 마지막의 식이란, , , 행 세가지의 진짜 모습을 인식하고, 선악과 바르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등을 식별하는 것입니다.

 

154 그런데 보통 사람은 이러한 모든 가상이 아닌 실상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육체와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즐거워하고 슬퍼하고 번민하고 초조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모두 실상이 아니라 공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때 비로소 사람은 모든 고뇌, 번민, 재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155 색즉시공, 모든 것은 공이다.

 

155 서양 철학은 자기, 즉 아에서는 의심한다, 그러므로 내가 있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실은 자기의 몸과 마음이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내가 아니듯, 영원하게 고정된 자성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같이 생각해 보면 색즉시공의 이치는알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156 (2단 제2) 사리자야, 이 모든 법의 공한 모양은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더러워지지도 않고 깨끗해지지도 않으며, 불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느니라.

 

156 1절에서 모든 현상과 마음이 이라는 것을 말했고, 여기서는 몸과 마음분만 아니라 모든 법이 공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법이란 사고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156 오온 그 자체도 공이고 모든 법의 진짜 모습이 공이라고 한다면, “본디 나고 늙고 죽고 더럽고 깨끗함도 없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잇습니다. 일어나는 현상 모두를 더러움과 깨끗함, 극락과 지옥, 괴로움과 즐거움으로 보아도 좋고, 문명과 야만으로 보아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즉 모든 현상을 어떻게 보아도 관계없다는 것입니다. 이 문구가 바로 <반야심경>의 극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163 아제아제는 부처님의 대자대비에 의해 깨달음의 세계로 건너가는 이여, 깨달음의 세계로 온전히 넘어가는 이여, 깨달을 지이다.”하는 뜻입니다. 좀더 상세하게 설명하자면, ‘아제건너다’ ‘깨달음의 세계로 건너다’ ‘구원하다입니다. 자기를 구원하고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원래 의미는 가다’ ‘떠나다의 의미입니다만, 부처님의 대자대비에 의해 방황에서 깨달음으로, 번민에서 볼리로, 생사윤회에서 열반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아제아제라고 되룰이한 것은 의미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164 앞의 <반야심경>과 마찬가지로 <금강경> 또한 인간의 모든 번뇌는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원래 세상의 모든 것은 공한 것이다. 말하자면 가짜 모습인데, 그것을 잘못 알고 진짜 모습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데에서 번뇌가 생겨난다. 그곳에서 집착이 생기고, 그곳에서 번민이 나온다. 그러므로 공의 실상을 인식하고 그 집착심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불교의 사상이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제7장 노자의 무와 공자의 천

 

168 오늘날 학계에서는 이것을 라고 칭합니다. 즉 석족의 은 노자의 라고 이해하고 싶습니다.

 

169 내가 라고 단정한 발상은 1)는 천지의 시작 2)’는 만물의 어머니 3)의 움직임은 무에서 비로소 생겨나는 것, 다시 말해서 무가 없으면 유도 없다,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는 만유 만물의 근원, 라는 것이었습니다.

 

172 원래 현이라는 것은 검은색을 나타내는 글자이지만, 검다고 하더라도 실은 빨간색과 검은색을 혼합한 검정색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상대적인 를 합한 근원의 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데 알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현에는 검다고 하는 것 외에, 현묘불가식의 설명할 수 없는 듯한 의미도 있으므로, 도를 나타내는 말로서는 가장 적합한 말이 아닌가 합니다.

 

173 “도는 텅 비어서 이것을 쓰면 혹시 가득 차지 않는 듯하다, 깊구나! 만물의 근원인 것 같구나. 나는 이것이 누구의 자식인지 알 수 없다. 상제보다도 앞선 듯하다에서 상제보다 앞서, 천제보다 앞이라는 뜻이며, 이는 도가 천지에 앞서서 생겨난 것을 말한 것입니다.

 

173 도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운행을 계속해왔습니다. 또한 천지 사이는 마치 풀무(공기를 불어넣는 풀무처럼 속이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는 것)와 같구나! 텅비어 있으나 쭈그러들어 없어지지 않고, 움직일수록 많은 것을 산출해 낸다라고 말했고, “곡신은 죽지 않으니 이를 알 수 없는 생산자라 한다.

 

174 그런데 당신들은 수레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어딜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바퀴일까, 바퀴살일까. 그렇지 않으면 채(수레의 채), 혹은 바퀴통(바퀴살이 모여 있는 곳)일까 실은 그 어느것도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퀴통의 한가운데 o모양의 구명, 무의 지점입니다. 이 공허한 구멍, 가 있어야만 수레바퀴가 회전하여 수레를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서른 개의 바퀴살이 하나의 바퀴통과 함께 하는데, 그 무에 해당 되는 것에 수레의 쓰임이 있다라고 설명한 것입니다.

 

174 예를 하나 더 들어봅시다. 이곳은 방입니다. 이 방안에서 무엇이 가장 필요한가. 기둥일까, 벽일까, 놓여 있는 의자 혹은 테이블일까.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가장 필요한 것은 이 방을 차지하는 공간, 의 부분인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으므로 사람이 들어갈 수도 있고, 우리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직으로 나는 그러므로 유로써 이익을 삼고(이것에 앞서서) ‘로써 쓰임을 삼는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175 ‘가 인생에 이익을 주는 것은, ‘에 앞서서 활동을 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가 없다면 모든 의 활동은 나올 수 없습니다.

 

176 신이 남녀를 낳았다고 주장한다면 그 신을 낳은 것은 무엇인가. 그러면 역시 신이라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도는 하나를 생하고, 하나는 둘을 생하며, 둘은 셋을 생하고, 셋은 만물을 생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177 이 충이라는 글자는 충으로 통합니다. 원래 바닥이 없는 그릇이라는 말입니다. ‘는 바닥이 없는 그릇과 같이 그 속에 아무리 담아도 결코 차서 넘치지 않고 무한한 수용력을 진기고 있습니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이며 입니다.

 

178 코끼를 도의 모습에 비유하여 큰 코끼리를 타고 천하에 나아가면 가는 데마다 해로움이 벗다. 모든 것을 평안케 하고 태평하게 한다라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코끼리는 실제로 존재하는 동물이었지만, 고대 중국 사람들은 이것을 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존재를 믿으면서도 그 실체를 받아들일 수 없는 도를 코끼리에 비유한 것입니다.

 

178 또한 이것을 보려고 하나 보이지 않음을 이름하여 이라하며, 이것을 들으려 하나 들을 수 없음을 이름하여 희라하며, 이것을 잡으려 해도 얻을 수 없음을 이름하여 미라 한다. 이 세가지는 말로 따져서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니, 그런 까닭에 섞여서 하나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182 ‘이 그것입니다. 나에게 있어 천은 만물의 본원이며, 만상을 지배하는 인 것입니다. 석가의 공’ , ‘노자의무와 다른 점은, 두 분은 도를 또는 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내가 말하는 천은 유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183 원래 하늘과 인간은 합일입니다. 하늘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일을 무엇이든 알고 잇는 것은, 인간의 지혜와 비슷합니다. 불쌍한 사람을 가엾게 여기는 것 또한 인간의 정과 비슷하고 악한 것을 주살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와 비슷합니다.

 

8장 중도와 중용에 대하여

 

191 지극히 천한욕락의 행위와 범부의 행동을 하지말아라. 또한 스스로 별로 성스롭지도 않으며 의롭지도 않은 고행을 구하지 말아라. 이 두 가지를 떠나면 그것이 중도가 된다.

 

191 인간은 누구든 욕망에 사로잡힙니다. 누구나 화려한 것을 원하며 남녀의 욕망도 본능입니다. 이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빠지기 쉬운 것이므로, 적당한 곳에서 적당한 중도를 택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성행입니다.

191 중도란 어느 한 사람이 자신의 수행을 통해 인간의 실상을 확실히 파악하여 스스로 양극단에 빠지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194 중도의 에는 한자의 이라는 개념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도는 즉 정도입니다. 불교도들이 실천 윤리의 근본으로서 존중하고 있는 팔정도가 그것에 해당합니다.

 

194 여러분은 팔정도의 내용을 잘 알고 있습니까? 사물을 바르게 보는 정견, 바르게 생각하는 정사, 바르게 말하는 정어, 바르게 행동하는 정업, 바르게 생활하는 정명, 바르게 노력하는 정정진, 바른 수행 목적을 염두에 두는 정념, 바르게 심신을 닦는 정정의 여덟 가지입니다. 이 항목을 실실천하는 것이 중도입니다.

 

199 거기에 때에 알맞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꼭 말하고 싶은 것은, 은 예를 들어 갑과 을의 중간을 취하고 있지만, 결코 갑과 을을 양분하여 그 반을 취한다는 의미는 아닌 것입니다.

 

199 “군자는 때에 알맞게 하고 소인은 이것에 위반된다고 합니다.

 

199 “때에 알맞게 한다라는 말이, 실은 중요의 실천에서 가장 중요한 점입니다. 여기에 방이 하나 있다고 하면 그 방의 중심은 정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한 집 전체의 중심은 방의 중심과는 다르고 한 집의 중심과 한 마을. 한 고을의 중심도 역시 다릅니다. 그러므로 언제라도 경우에 따라서 중심의 내용은 움직이고 있습니다.

 

200 지자, 우자 모두 중요의 실행이 어렵다는 것에 대하여 도가 행하여지지 않음을 내가 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지나치고 어리석은 사람은 이에 미치지 못한다고 말했으며, “천하의 국가도 고루 다스릴 수 있고, 벼슬도 사양할 수 있고, 흰 칼날도 밟을 수 있다 하더라도 중용은 능하게 하기 어렵다라고 엄하게 훈계했던 것입니다.

 

202 공자님에게 학, , 치는 대단히 중요하겠지만, 나는 그 각각에 정면으로 반대합니다. “배움을 끊으면 근심이 없다.”, “말하지 않는 가르침과 함이 없는 이익은 천하도 이르기 힘들다와 같은 유의 말이 모두 그러합니다. 어쨌든 이 문제만은 나의 생각과는 정면으로 대립하는 것이므로 이제 제안만은 그만두었으면 좋겠습니다.

 

203 내 생각으로는 배움이란 도를 배우는 것이며, 가르침이란 도를 가르치는 것이고, 다스림 이란 도를 행하는 것이므로 이 셋은 완전히 일치한다고 봅니다.

 

207 모든 책이 그러하듯이 노자님의 생각 또한 언외에 숨어있다는 것이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배울 것도 가르칠 것도 다스릴 것도 없음을 주장하고 무위자연을 강조하면서도 5천여 언을 운운하신 노자님의 자가당착 속에서, 오히려 후세의 사람들은 노자님의 구세의 비원을 느낄 수 잇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이 문제는 어떻게 생각하지는지요.

210 나는 일찍이 자로에게 육언육폐에 관해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인을 좋아하지만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 폐단은 어리석어지고, 지혜를 좋아하지만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 폐단은 방탕해지고, 신의를 좋아하지만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 폐단은 의를 해지게 되고(조리를 잃어 실패한다), 정직함을 좋아하지만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 폐단은 가혹하여 지고(융통성이 없어진다), 용기를 좋아하지만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 폐단은 난폭하여 지고, 굳세기를 좋아하지만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 폐단은 망녕되어지는 것이니라라고 가르쳤습니다.

 

211  깊이 사고하고 양심의 거울을 맑게 하는 것은 수양의 중요한 일면이지만, 나는 이와 같은 수양의 방법을 라는 한마디로써 나타냈습니다. ‘생각하는 것에 비례하여 배움은 역시 그 결점을 시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배움에만 열중한 나머지 생각을 소홀히 하게 되면 사물에 대한 투철한 판단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생각에만 열중하고 배우지 않는다면 이것 역시 식견이 좁아져서 자칫하면 터무니없는 과오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난폭해지고, 생각하되 배우지 않으면 위태로워진다고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211 우리들의 배움의 목적은 언제나 자기를 수양하고 자기를 닦는 일이지, 명예와 칭찬에 목표를 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점에 깊이 유의해 주었으면 합니다.

  나는 일찍이 옛날의 학자들은 자기를 위해서 학문을 했는네, 오늘날의 학자들은 남을 위해서 하느니라라 말했습니다. 이것 역시 내 제자들의 잘못된 경향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하는 학문이라면 겉과 속이 있고 끝이 있지만, 자신의 위해 하는 학문에는 그와 같은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212 유교의 가르침이 덕행을 배우는 것인 이상, 유교에서 말하는 근절(가까운데서 묻고 가까운데서 생각함)의 가르침은 아주 자연스러운 조류라고 봅니다. ‘근절이란 말은 배움을 넓게 하고 뜻을 독실하게 하며 간절히 묻고 가까이 생각하면, 이 그 가운데 있느니라고 한 말에 의거합니다만, 근절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말하면 가장 가까운 것을 생각하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212 “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어질고자 하면 곧 인이 나에게 이르는 것이다.”

 

213 그래서 나는 학문을 끊으면 근심이 없으리라. 공손하게 대답하는 것과 불손하게 대답하는 것의 차이는 얼마나 되며, 선과 악의 차이는 얼마나 되는가?”라고 냉소적인 말을 세상에 던졌던 것입니다. ‘는 정중한 대답이고, ‘은 건방진 대답이란 말입니까?

 

214 “학문을 위해서는 매일 보태야 되고, 도를 닦으려면 매일 덜어 버려야 한다” “많을수록  미혹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진실이 아니겠습니까? 학문에 의해 연마된 지혜와, , , , , 이러한 일체의 것을 끊어버리고, 운명도 지식도 없고, 성인과 현인도 없으며, 인의와 도덕이 없는것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의 행복과 평안, 그리고 국가와 사회의 안녕과 태평을 얻을 수 잇는 것이 아닐까요.

 

214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성스럽다고 하는 것을 끊고 지식을 버리면 백성이 백 배나 이로울 것이요, 어질다는 것을 끊고 의롭다는 것을 버리면 백성이 모두 효와 자애를 회복할 것이다.”

  어쩌면 이런 말들이 냉소적인 말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이것이 진정한 도입니다.

 

214 학문에 힘쓰면 매일매일 그 지식, 내용이 풍부해진다. 그러나 지식이 많아지는 것은 방황의 근본이 되므로 오히려 학문은 행하지 않는 편이 낫다. 진정한 도를 얻으려면 매일매일 모든 것을 털어 버려야 된다. 그러다 보면 내용은 적어진다. 가장 적은 것은 하나이고 그 하나까지도 없어지면 무가 된다. 무는 불언의 가르침, 무위의 정치를 한다.

 

216 다만 가르침을 잘 배우거나 게을리 하는 일에 대해서는,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묵묵히 기억하며 배움을 싫어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가르침에 게을리 하지 아니한다. 그 밖에 무엇이 또 있단 말이오!”라 말했으며 또 내가 성인이나 인자 같은 것을 어찌 감당하리오. 다만 성인과 인자의 도리를 위함에 싫어하지 않으며, 남에게 가르치는 데 게을리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니라라고도 말했습니다. 이 두말은 나의 교육관을 가장 잘 표현한 것입니다.

 

216 이러한 공자님의 노력으로 제자들은 꾸준히 학문을 닦으며 서서히 발전하여, 인격을 갖춘 뛰어난 학자로 태어났습니다. 오늘의 저희들로서는 부럽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가장 뛰어났던 제자 안연이 탄식하며 선생님께서는 순서 있게 차근차근히 잘 달래어 이끌어 나가신다. 글로써 나의 지혜를 넓혀 주시고 예로써 나의 행위를 단속해 주신다. 쉬고자 해도 할 수 없는 것은, 이미 나의 재주가 다하여 앞에 서 있는 바가 마치 높이 우뚝 서 있는 모양 같기 때문이다. 고 말했던 의미를, 저도 조금은 알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218 나는 우선 교육의 가능론자입니다. “가르침에 있어서는 선인과 악인의 구별이 없느니라”, 사람의 천성은 비슷하나 습관에 의해 차이가 있느니라등의 말은 모두 교육의 가능성을 믿으면 얻을 수 있다는게 내 생각입니다.

 

218 가장 지혜로운 자와 가장 어리석은 자란, 아무리 수양을 해도 진보하지도 후퇴하지도 않는, 즉 변화가 없는 자이다.

 

219 요컨대 교육을 받아야만 하는 사람은 내가 말하는 학지(배워서 아는 사람), 곤지(어리석지만 참으며 배우는 사람), <중용>의 학지이행, 곤지면행의 범위에 그치게 되는 것입니다. “중인이상은 가위 높은 도를 말해 주어도 괜찮으나, 중인 이하는 가위 높은 도를 말하 것이 못 되느니라.”

  곡식에 싹이 나도 꽃이 피지 않는 것이 있고, 꽃은 피더라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 있구나.

 

221 내가 예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공손하되 예가 없으면 번거롭고, 신중하되 예가 없으면 남이 두렵게 여기고, 용기가 있되 예가 없으면 사회를 어지럽히고, 곧되 예가 없으면 급박하여진다라는 말도 했습니다.

 

222 그 다음으로는 공자님의 교수방법에 관한 질문입니다. 이는 계발교육과 개인교육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몰라서 분통해 하지 않으면 알려 주지 않았고, 표현하려고 애쓰지 않으면 일깨워주지 않았으며, 한 귀퉁이를 일러주었는데 나머지 세 귀퉁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자에게는 반복하여 설명해 주지 않는 것이니라.”

  이것이 계발교육의 본래의 뜻이겠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할까 라고 말하지 않는 자에게는 나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을 따름이니라라고도 말했습니다.

 

223 안연과 계로가 공자님을 모시고 있었을 때에도 너희들의 뜻을 각각 말해 보지 않겠느냐?”라 하시며, 각자의 포부를 말하도록 했습니다. 이처럼 공자님은 제자들과 끊임없는 문답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이것이 공자님의 계발 교육이며 교수방법입니다.

 

223 자하가 방귻 웃는 웃음에 입술이 더욱 곱고, 아름다운 눈동자에 눈매도 더욱 고우니, 마치 희 바탕에 채색을 한 것 같구나라는 시구의 뜻을 물었을 때, 공자님은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서 흰 바탕이 있은 뒤에 채색을 하여 아름답게 됨을 말하는 것이니라고 대답하시자, 자하는 또 덕을 갖춘 후에 예가 따른다는 말씀입니까?”하고 반문했습니다.

  이에 공자님께서는 나를 일깨워 주는 사람은 바로 너로구나. 비로소 함께 더불어 시를 논할 만하구나라고 칭찬하며 이끌어 주셨습니다. 이는 공자님의 계발교육의 뛰어난 점을 가장 잘 나타낸 예라 할 것입니다.

  계발교육을 주로 한다는 것은, 배우는 사람의 정도에 따라서 적당하게 취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225 <예기>, “배우는 자에게 네 가지 허물이 있는데, 가르치는 자는 반드시 이를 알아야만 한다. 사람이 배우는데 있어 견문이 너무 넘치고 많아서 그 돌아갈 곳을 찾지 못하는 경우와 견문이 너무 적어 그 일반적인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 그리고 학문의 내용이 쉽다고 속단하여 이를 얕보고 너무 고원하게 치닫는 경우와 지혜가 얕아 미치지 못하겠다고 학문을 중지하여 분발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 네 가지의 것은 마음이 같지 않은 데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그 마음을 알고 난 후에야 능히 그 허물을 구할 것이다.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그 선을 늘여서 그 허물을 구해주는 것이다라고 되어 잇습니다만, 이것이야말로 진정 공자의 교육법을 가장 잘 나타낸 것이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227 노자님의 경우는 어떠신지요. 이미 성스럽다고 하는 것도 끊고, 지식도 버리고, 배움도 끊고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고까지 말씀하신 것을 들었습니다.

 

228 저는 일찍이 가르침은 배움이며, 가르침은 교화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몸으로써 가르치는 사람에게는 따르라, 말로써 가르치는 사람에게는 꾸짖어라, 즉 실천적이고 교화되지 않는 가르침은 최고에 도달하기 어렵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말없음의 가르침을 주장하신 노자님이 교육관에 대해 커다란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34 나를 다스리는 것은 마치 조그만 생선을 끓이는 것과 같다.” 이 말은 어떠합니까. 작은 생선을 끓일 때, 조금 더 잘익게 하려고 생선을 뒤집으면 그 생선은 부서지거나 살이 떨어져 나갈것나갈 것. 당연히 맛이 없어져 버릴 것입니다.

  이 말은 결국 대국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도 작은 생선을 끓이는 것처럼 쓸데없는 일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즉 인간의 영리한 지식을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조용하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무위로써 다스리면, 바라는 바 태평함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정치관입니다.

 

9장 인(仁), 자(慈), 자비(慈悲)

 

242~243 “어진 사람은 자기가 서고 싶으면 남을 세워 주고, 자기가 도달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면 다른 사람이 이르게 하여 주는 것이니라. 가까운 것을 취하여 남에게 비유한다면, 그것이 바로 인의 올바른 방향이라 이를 수 있느니라.”

  자기가 서고 싶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도 서고 싶을 것이므로 먼저 다른 사람을 세워라. 자기가 도달하고 싶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도 그러하고 싶을 것이므로 역시 다른 사람을 도달하게 해 주어라는 뜻입니다.

 

252 본래 정에 지나치게 끌리는 것은, 인자가 종종 빠지기 쉬운 점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인을 좋아하면서 학을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어리석어진다라고 말했습니다. 진정한 인자는 봄바람처럼 화창한 일면이 있는 동시에, 다른 면으로는 추상 같은 엄숙함이 있습니다.

 

252 인자는 한가하게 있을 때에는 즐거워하는 듯한 일면과 또 마음이 넓고 몸이 편안하다고 하는 일면도 있을 것입니다. 또는 온화하되 엄숙하고, 위엄이 있으나 지나쳐서 사납지 않다고 하는 면도 있을 것입니다.

 

253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인자의 풍모는 <논어>에 있는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는 말과 같은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산은 조용한 것이며, 영구히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지랑이 피어 오른 봄 산이라도 좋고, 비단을 물들인 듯한 가을 산이라도 좋습니다.

  그 조용한 산을 향하여 마음이 넉넉하고 나이가 지긋한 사람이 왼쪽은 책상에, 오른쪽은 팔걸이에 기대어 천천히 산을 대하고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떠올리며 나는 인자답다고 상상합니다. 그 사람은 천지의 유구함에 생각을 맡기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254 “나에게 세 가지 보배가 있어서 이를 지킨다. 첫째는 인자함이요, 둘째는 검소함이며, 셋째는 감히 천하에 앞서려 하지 않음이다라고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많은 덕을 가르치고 잇는 것 중에서도, 사람을 사랑하는 인자함의 도를 세 가지 보배 중에 그 첫째로 꼽았습니다.

 

255 나는 무릇 인자함으로 싸우면 이기고 이를 지키면 굳건해진다고도 말했습니다. 이것은 공자님의 인자는 반드시 용기가 있다. 그러나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인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과 부합하는 것입니다.

 

255 자애로써 나아가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 그러므로 하늘도 그런 사람을 구하려 든다. 그것은 자애로써 스스로를 지키기 때문이다. 자애야말로 대도에 순응하는 것이다.

 

259 ‘사물을 기르는 그것이 천지의 마음이다. 기르면 싹을 틔운다. 이 싹을 틔우게 하는 것이 천지의 마음이다.’ 분명히 그렇습니다. 봄이 되면 저의 집 정원에서도 작약이 싹을 틔우고, 단풍이 싹을 틔웁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해서라도 이것을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단순한 마음이, 곧 하늘의 마음이며 의 마음이며, 인의 마음입니다. 참으로 고마운 것이 아닙니까. 말하자면, 동양에서는 자라나는 초목을 관찰하는 데서부터 도를 감득하는 것이 아닐까요?

 

259 ‘이라는 문자는 직접적으로는 초목과 관계가 없는 듯합니다만, 실은 씨앗의 뜻이 있습니다. 살구 씨앗으로 만든 약을 행인탕이라 부른 역시 그 예입니다. 인도가 만물의 씨앗이 되어 화육을 도와주기 때문이겠지요.

 

267 일찍이 노자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대장장이의 일을 대신하면서 손을 다치지 않을 자는 드물다.” 이 말은 서투른 목수가 자기의 큰 도끼를 휘두르면 결국 상처를 입게 될 것이 뻔하다는 말이다.

나는 여러 번 이 노자의 말을 반복해서 되씹고 반성의 재료로 삼으면서, 전전긍긍 삼가 조심하고 조심하며 글을 썼다. 미천한 지식, 충분히 갖추지 못하여 예의에 벗어난 점 많을 것이다. 세상의 유식한 교시를 받들어 모시고 싶다.

 

 

내가 저자라면

 

  모로하시 데츠지 백수(白壽)에 이 책을 썼다. 자신이 소장한 '세한십우'(歲寒十友)라는 그림에는 매화를 중심으로 수선화와 주로 겨울 꽃인 여덟 종류의 화초가 화폭에 담겨져 있는 것을 보고 영감을 떠올렸다. 이는 모두 같은 때에 피는 것은 아니지만, 한 폭에 담겨져 있는 것을 보면서 즐거웠기 때문이다. 시대나 사상이 다른 석가와 공자, 노자가 '삼교도'(三敎圖)라는 그림을 보면서도 마찬가지다. '두세 사람이 모여 한 폭의 그림처럼 이야기한다면 어떨까?' 하는 질문을 던지면서 이 글을 썼다고 한다. 한학자 출신인 저자는 공자와 노자 사상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졌다. 두 대가(大家)의 사상을 균형 있는 시각으로 풀어냈지만, 노자보다는 공자의 사상에 비중을 더 많이 두었다. 두 사상가의 대화에서 언급된 시(詩)를 보면 저자의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하고, 아는 자는 침묵하나니

    이 말 나는 노군에게 들었도다.

    만약 노군이 아는 자라고 한다면

    어떠한 연유로 스스로 5천여 문을 저술했나 <()의 백난천(白樂天) '노자' () 중에서>

 

  하지만, 저자는 이 책을 서술하면서 정신적인 도움을 받는 것은 공자가 아닌 노자였다. '대장장이의 일을 대신하면서 손을 다치지 않을 자는 드물다.' 서투른 목수가 자기의 큰 도끼를 휘두르면 결국 상처를 입게 된다는 노자의 말을 떠올리면서, 삼가 조심하며 글을 썼다. 세 명중에 저자가 가장 힘들었던 인물은 석가였다. 불전(佛典)을 처음 대하는 그로서는 불경을 해석하는데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이다. '조금이나마 한문을 배운 점이 불전(佛典)을 읽는데 어느 정도는 편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여지 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동양 사상 대가(大家)들의 이야기에서 내가 가장 공감이 가는 쪽은 노자였다. 이 전에도 노자에 대한 책을 읽었지만, 다른 사상가들이 노자의 사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폭 넓은 시야로 바라보게 되었다. 가장 기억에 남은 구절은 '()는 무()에서 생긴다'였다. 지난 주 북페어를 통해서 '글 속에 너무 많은 것을 채우려 하지 않았나'라고 반성하게 되었는데, 그 깨달음을 준 구절이었다.

 

  당신들은 수레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어딜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바퀴일까, 바퀴살일까. 그렇지 않으면 채(수레의 채), 혹은 바퀴통(바퀴살이 모여 있는 곳)일까 실은 그 어느것도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퀴통의 한가운데 o모양의 구명, 무의 지점입니다. 이 공허한 구멍, 가 있어야만 수레바퀴가 회전하여 수레를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 마음 속에 욕심을 버리고 비워두어야만 글에 대한 영감들이 새롭게 채워질 수 있다는 단순한 진리. 나 스스로가 비움과 채움을 매일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멀리서 찾기 보다 똥을 누면서 생각해보자. 걸어가는 길거리에도 출근하는 지하철에서도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먼저 비워야 하고, 어떤 것을 채워야 할 지 고민하는 것.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있는 상태에서 누군가가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 책에서 수천 년 전에 노자가 되살아나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과거에 내가 썼던 이야기 속 주인공이 말을 걸어온다면 어떤 느낌일까? 질문은 고요한 마음 속에 울림과 파장을 주어 나를 흔들어 깨운다. 그리고 답을 찾기 위해 생각한다.

 

  내가 저자라면 과거에 내가 만들어낸 주인공과 나의 삶을 이야기하고 싶다. 과거의 꿈을 찾아 글을 썼던 나. 지금은 힘에 눌리고, 일에 찌든 나에게 희망과 긍정을 선물해 주자.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있음을, 경쟁으로 내몰려 욕심으로 채워진 마음에 행복이라는 틈을 내어 욕심을 걷어내어 보자. 행복에 대해 설명하는 글이 아니라 행복을 찾는 어느 동화 속 주인공의 이야기다. 나와 닮은 그 주인공이 세상에 빛을 보고, 사람들이 그 이름을 부르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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