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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21일 10시 01분 등록

수학사

Howard Eves/ 이우영, 신항균 옮김



1. 저자에 대하여 

하워드 이브스는 1911년 뉴저지 주패터슨에서 태어났다. 1945년 오리건 주립대학 수학과 전임교수가 되었고, 그곳에서 1948년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51년에 뉴욕의 샴페인 대학으로 옮겼고, 1954년 메인 대학교의 정교수로 임명받은 후 1976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재직하였다. 즉 1945년부터 1976년까지 31년 동안 수학을 하며 산 것이다. 물론 교수가 되기 전에도 수학을 했겠지만 전문적으로 가르치고, 연구하며 살았던 세월이 30년이 넘는다. 

 그가 처음 한 공부는 미분방정식이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의 수학적 관심사는 기하학과 수학사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이후 성공적인 교과서를 여러 권 집필하였다. 특히 지금 내가 소개할 <<수학사>>는 1953년에 출판되었는데, 출판 되자마자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며, 아직까지 표준교과서의 대표적인 저작으로 남아 있다. 카이스트 물리학 박사인 정재승 교수도 ‘지식인 서재’라는 코너에서 이 책을 추천했다. 물론 그가 읽은 책은 <<수학 문화사>>였는데, 그 책이 현재 절판 된 상태이기 때문에 <<수학사>>를 그 책 대신으로 소개했다. 

 하워드 이브스는 1945년부터 1963년까지는 <American Mathematical Monthly>의 초등문제란(Elementary Problem Section)의 주 편집자를, 1968년까지는 부편집자를 역임하였으며, 현재는 은퇴하여 메인 주루벡 시에서 부인과 함께 살고 있다. 

 현재도 살아계신지에 대한 정보는 없다. 


내 책을 쓰기 위해 하워드 이브스의 책은 다 읽고 싶다. <<수학의 위대한 순간들>>, <<수학의 기초와 기본개념>> 등이 더 있는데, 구하여 읽어 보고 싶은 책이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옮긴이의 머리말>

수학사를 역사주의적 관점에서 보지 않더라도 수학사가 그 스스로 어떤 실재를 지니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것은 분명히 인간의 수학적 갈망이 역사 속으로 투사될 때 시공을 초월하여 극적으로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17세기 이전>

1 수체계

1-1 원시시대의 셈법

p3 사회가 점차 발전되어감에 따라 간단한 셈이 절대 필요하게 되었다. 각 부족은 자신의 구성원이 얼마나 되는지, 또 얼마나 많은 적이 있는지를 알아야 했고, 사람들은 그의 양떼가 혹시 줄지 않았는지를 알 필요가 있게 되었다. 아마 초기의 셈은 일대일대응 원리를 이용한 간단한 부신에 의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양(羊)을 셀 때 손가락을 하나씩 접는다든지, 또는 조약돌이나 막대기를 모은다든지, 흙이나 돌 위에 자국을 낸다든지, 나무조각에 새김눈을 낸다든지 끈에 매듭을 묶는다든지 해서 셈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후에는 소리의 유별에 의한 방법으로 작은 집단의 대상을 셈하는 말이 개발되었을 것이고 그보다 훨씬 이후에는 표기법으로서, 기호의 유별이 이러한 수에 대한 표상으로 고안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상적인 발전은 인류학자들의 원시인에 관한 연구로부터 뒷받침되고 있다. 


1-2 밑수

p5~6 셈범의 체계화 참고 


1-3 기수법

p7 수를 기록하는 초기 방법으로서 표시나 새김눈을 이용했음을 이미 얘기한 바 있다. 아마 그러한 방법이 수를 기록하는 최초의 시도였을 것이다. 


1-4 단순 그룹핑법

p9 바빌로니아인들이 쓰던 종이 - 파피루스 


1-5 승법적 그룹핑법


1-6 암호 수체계

p13 암호 수체계에서는 많은 기호를 기억해야 하지만 수의 표현은 치밀하다. (기억하기)


1-7 위치 수체계

p15 예를 들어 지금 사용하고 있는 인도-아라비아 수체계에서 206의 2는 2(10의 제곱), 즉 200을 나타내고 27에서 2는 2(10), 즉 20을 나타낸다. 한편 명확성을 기하기 위해서는 밑수의 멱이 없는 경우를 표현하는데 0에 대한 어떤 기호가 필요함을 주목해야 한다. 위치 수체계가 비록 역사적으로 승법적 그룹핑법으로부터 유래된 것은 아니지만 승법적 그룹핑법의 논리적 발전으로 볼 수 있다. 

 이 위치 수체계는 기원전 300년 후까지도 0에 대한 기호가 없어서 어려움을 겪었다. 


1-8 초기의 셈법

p16 오늘날 초등 산수에서 사용되는 긴 곱셈이나 나눗셈과 같은 계산 규칙은 15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개발된 것이다. 이렇게 계산 규칙이 더디게 발전된 이유는 그러한 연구에서 만나게 되는 정신적 어려움과 물질적 어려움 때문이었다. 


p17 그러나 물질적 어려움은 매우 실제적이어서 충분한 종이 재료가 없이는 산술과정의 긴 전개가 곤란했다. 

(파피루스에 관한 설명 참고)


p18 이러한 정신적, 물질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발명한 것이 수판이었는데, 그것은 인간이 이용한 최초의 기계적인 계산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 인도-아라비아 수체계

p20 인도-아라비아 수체계는 인도인들이 그것을 발명하고 아라비아인들이 서유럽으로 전파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참고)

 이 새로운 수체계가 언제, 어떻게 처음으롱 ㅠ럽에 전해졌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모든 가능성을 유추해 볼 때 지중해 연안의 무역업자나 여행가들이 이를 전파했으리라 추측된다. 

 그 후 400년 동안은 수판론자와 산법론자 사이의 싸움이 계속 되는데 1500년에 이르면 우리의 현재의 계산규칙이 최상에 이르게 된다. 그 다음 100년 동안에 수판론자들은 자취를 감추고 18세기가 되면 서유럽에서 수판은 사라진다. 


2 바빌로니아와 이집트 수학

2-1 고대 오리엔트

p25 강은 편리한 수송로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배수, 치수, 관개 등으로 강 유역의 땅을 비옥한 농토로 바꾸는 것이 가능했다. 이러한 광대한 사업은 전에는 서로 떨어져 있던 지역을 결합시켰고 또 그러한 사업에 따르는 공사, 재정, 관리경영 등과 더불어 그들 사회가 창조된 목적이 상당한 수준의 기술적 지식과 그에 수반되는 수학의 발전을 요구했다. 따라서 초기의 수학은 주로 고대 오리엔트의 지역에서 농업이나 토목, 건축과 같은 일에 필요한 실용적인 과학으로서 발생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측량법을 개발해야 했고 또 거래의 목적이나 세금을 부과하고 징수하는 데 필요한 회계 업무의 발전이 필요했다. 


바빌로니아

2-2 기원


2-3 상업과 농업수학


2-4 기하학

p30 바빌로니아의 기하학은 거의 실체 측량과 관계된 것이다 .


p31 오늘날 원주를 360등분 하는 것도 틀림없이 고대 바빌로니아인들의 업적인 것 같다. 


2-5 대수

p32 기원전 2000년까지 바빌로니아 산술은 잘 개발된 산문 형식의 대수로 발전하였는데 당시에 벌써 2차방정식이 풀렸을 뿐만 아니라 3차방정식과 4차방정식까지 논의되었다. 어떤 판에는 1부터 30까지의 정수의 제곱과 세제곱에 대한 표와 그 둘의 합에 대한 표까지 만들어져 있다. 


p33 요약해 보면 고대 바빌로니아인들은 지칠 줄 모르는 표 제작자였으며 고등기술을 가진 계산가였고 분명히 기하학보다는 대수에 더 강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그들이 다룬 문제의 깊이나 다양성 앞에서 감탄을 금할 길이 없다. 


2-6 플림프톤 322


37 플림프톤 322에 대한 분석은 바빌로니아 수학판이 대단히 주의깊게 관찰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이전에는 그러한 판이 단순한 상업적 목록이나 기록으로 간단히 처리되어 왔다. 


이집트

2-7 기원과 연대


2-8 산술과 대수

p41 곱셈과 나눗셈의 이 이집트 방식은 곱셈표를 배워야 할 필요를 없애줄 뿐만 아니라 수판에서도 매우 편리했으므로 수판이 이용되는 기간에는 물론이고 그 외의 기간에서도 계속해서 이 방법이 이용되었음을 볼 수 있다. 


2-9 기하학


3 피타고라스 학파의 수학

3-1 논증수학의 싹 틈

p53 다른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수학에서도 사람들은 “왜 이등변 삼각형의 두 밑각이 같은가?” 라든가 “왜 원의 직경이 원을 이등분하는가?”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어떻게’라는 질문만으로 충분했던 고대 오리엔트의 경험적 과정은 ‘왜’라는 보다 과학적인 질문에 답하기엔 미흡한 것이었다. 그래서 논증적 방법에 대한 시도가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고 현대 학자들이 수학의 근본적 특성으로 간주하는 연역적 특징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현대적 의미의 수학이 이러한 합리주의의 분위기 속에서 싹트게 되었다. 그것은 소아시아의 서부 연안의 위치한 새로운 무역 도시 중의 하나에서 일어났는데 전통적으로 논증기하학이 기원전 6세기 초반에 활약한 고대의 ‘7현인’중의 한 사람인 밀레투스의 탈레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일컬어진다. 


p54 탈레스는 오늘날 초등기하학 교과서에서 행하는 방법과 똑같은 방법으로 논리적 추론에 의하여 두 각 a와 b가 같음을 입증하고 싶어했다. (맞꼭지각의 크기는 서로 같다.)


p54~55 (참고)


3-2 피타고라스와 피타고라스 학파

p55 그리스 수학의 처음 300년의 역사는 유클리드의 <원론>의 위대성으로 인하여 흐려졌는데 그 이유는 <원론>이 그 이전의 그리스 수학의 많은 저작을 망라한 것이어서 그 이전의 작품이 <원론> 이후로 빛을 잃은 채 잊혀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언젠가 20세기의 출중한 수학자인 힐베르트가 말했듯이 과학적 작품의 중요성은 그것이 그 이전의 많은 저작을 불필요하게 만들었다는 것에 의하여 판정될 수 있는 것이다. 


p57 초기 그리스 수학에 관한 주요한 정보는 흔히 프로클로스의 <에우데무스 요약>이라고 불리는 것에 기인한다. 이 요약은 프로클로스의 <유클리드 제 1권의 주해>의 머미말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서 내용은 그리스 초기로부터 유클리드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리스 기하학의 발전에 관한 간단한 조망이다. 

 <에우데무스 요약>은 피타고라스를 탈레스 이후의 가장 뛰어난 그리스 수학자로 기술하고 있다. (중략) 


3-3 피타고라스 학파의 산술

p59 왜냐하면 220의 진약수는 1,2,4,5,10, 11, 20, 22, 44, 55, 220으로서 이들의 합은 284이며 또 284의 진약수는, 1,2,4,71,142로서 이들의 합이 220이기 때문이다. 


3-4 피타고라스 정리와 피타고라스 3쌍 


3-5 무리수의 발견

p67 유리수는 간단한 기하학적 해석을 갖는다. 수평선 위에 서로 다른 두 점 O와 I를 표시하자. 이때 I가 O의 오른쪽에 오도록 하고 선분 OI를 길이의 단위로 취한다. 만일 O와 I가 각각 수 0과 1을 나타내도록 하면 양의 정수와 음의 정수가 모두 이 직선 위의 한 점으로 나타낼 수가 있다. 이때 양의 정수는 O의 오른쪽에 위치하도록 나타내고 음의 정수는 O의 왼쪽에 위치하도록 나타내자. 그러면 분모가 q인 분수는 단위 구간을 q등분할 때의 각 분점에 의해 표현된다. 그래서 각 유리수는 이 직선상의 한 점이 될 것이다. 초기 수학에서는 직선 위의 모든 점이 이런 식으로 완전히 덮혀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직선 위의 모든 점이 이런 식으로 완전히 덮혀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직선 위에 어떤 유리수에도 대응되지 않는 점이 존재함을 알았을 때 그 충격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는 상상하고도 남을 것이다. 특히 피타고라스 학파는 거리 OP가 단위변을 갖는 정사각형의 대각선일 때 직선 위의 점 P에 대응하는 어떤 유리수도 없음을 보였다. 따라서 그러한 점에 대응하는 새로운 수가 발견되어야 했고 이러한 수가 유리수가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무리수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무리수의 발견은 수학사에서 하나의 거대한 이정표를 세우게 되었다. 

 <루트 2가 무리수임을 증명하는 것 참고>


p69 아무튼 무리수의 존재에 관한 발견은 피타고라스 학파를 놀라게 했고 또 혼란에 빠지게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모든 것이 정수에 따른다는 피타고라스 학파의 철학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한 것 같았다. 


3-6 대수적 항등식 

p72 한 선분이 두 부분으로 분할될 때 주어진 선분을 한변으로 하는 정사각형은 각 부분을 한 변으로 하는 두 정사각형과 각 부분을 두 변으로 하는 직사각형의 두배의 합과 같다. 

인수분해 공식을 기하적으로 나타내며 말로 풀어 쓴 것이다. 


3-7 2차방정식의 기하학적 해법

p79 아무튼 피타고라스 학파의 기하학적 대수가 절묘하긴 하지만 앞에서 살펴본 과정을 돌이켜 볼 때 오늘날 대수적 표기가 그에 비해 얼마나 간단하고 편리한 것이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3-8 면적의 변환


3-9 정다면체

p81 플라톤의 작품 속에서 티마에우스는 쉽게 만들어질 수 있는 네 개의 입체-정4면체, 정8면체, 정20면체, 정6면체-를 엠페도클레스가 모든 만물의 근원으로 주장한 4원소-불, 공기, 물, 흙-와 신비스럽게 결합시켰다. 

 

3-10 공준적 사고

p82 기원전 600년의 탈레스 시대에서 기원전 300년의 유클리드 시대 사이에 모든 개념이, 명확하게 서술된 공준(혹은 공리, 가정)으로부터 엄밀한 추론으로서의 논리적인 과정을 통하여 완성되었다. 소위 공준적 방법이라고 불리는 이 과정은 현대 수학의 핵심이 되었고 이러한 과정에 의한 기하학의 발전은 틀림없이 피타고라스 학파로부터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4 3대 작도문제

4-1 탈레스에서 유클리드까지의 시대

p87 탈레스가 밀레투스에 세운 이오니아 학교와 피타고라스가 크로톤에 세운 학교 이외에도 많은 수학 센터가 주로 그리스 정치사가 지배한 지역과 그 기간 동안에 세워지고 번성하였다 


p88 마지막 단락/ 페리클레스와 소크라테스가 있던 이 도시는 민주적이고 지적인 발전의 중심지가 되었고 수학자들이 그리스 세계의 여러 곳으로부터 이 곳으로 모여들었다. 


p90 기원전 4세기경의 대부분의 중요한 수학적 업적은 플라톤의 친구나 제자들에 의해 성취된 것인데 플라톤은 자신의 아카데미를 초기 피타고라스 학파의 수학과 신피타고라스 학파의 수학을 연결하는 곳을 만들었다. 수학에 대한 플라톤의 영향은 그가 만든 어떤 수학적 발견에 있다기보다는 수학에 대한 연구가 정신을 훈련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이고 그래서 철학자나 이상국가를 통치할 사람의 소양을 위해 절대 필수적이라는 그의 정열적인 신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그의 아카데미 입구에 걸어 놓은 현판의 다음 유명한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이 곳에 들어오지 마라.” 


4-2 수학적 발전의 경향


4-3 3대 작도문제

p92 

1 정6면체의 배적 : 주어진 정 6면체 부피의 두 배의 부피를 갖는 정 6면체의 모서리를 작도하는 문제.

2 각의 삼등분 : 임의의 각을 삼등분하는 문제.

3 원적 : 주어진 원과 동일한 면적을 갖는 정사각형을 작도하는 문제.


이 세가지 문제의 중요성은 비록 자와 컴퍼스가 많은 그 밖의 작도 문제를 해결하긴 하지만 이들 도구를 가지고는 이 문제를 근사적으로 밖에는 해결할 수 없다는 데 있다. 


4-4 유클리드 도구


4-5 정 6면체의 배적

p95 정6면체의 배적에 대한 문제는 수학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어떤 고대 그리스 시인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신화적인 왕 미노스가 그의 아들 글라우쿠스를 위해 세운 묘비의 크기에 불만스러워했다고 표현하는 대사에서 그 문제가 출현했다는 증거가 있다. 미노스는 묘비의 크기를 두 배로 하라고 그 시인에게 명령했는데 이때 그 시인은 묘비의 각 변을 두 배 함으로써 묘비를 두 배로 만들 수 있다고 잘못 말했다. 이 단순한 수학적 오류가 기하학자들로 하여금 모양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부피를 두 배로 늘리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문제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4-6 각의 3등분


4-7 원적

p102 아마 어떤 문제도 주어진 원의 면적과 같은 크기의 면적을 갖는 정사각형을 작도하는 문제보다 더 강렬하고 오랜 유혹을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알려진 최초의 그리스인은 아낙사고라스인데 그의 공헌이 무엇이었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4-8 파이 연대기

p104 그러나 파이를 과학적으로 계산한 최초의 인물은 아르키메데스인 것처럼 보이는데 그의 성취에 대해서는 연대기에서 설명할 것이다. 


p109 1737년 파이라는 기호는 초기 영국의 수학자 오트레드, 배로, 그레고리 등이 원주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했다. 오일러가 1737년 파이를 채택했다. 


p112 파이를 10진법으로 많은 자리까지 계산하려는 시도가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 한 가지 이유는 파이의 ‘정규성’에 관한 통꼐적 결과를 얻기 위한 것이다. 실수가 십진법으로 표현될 때 모든 자리의 숫자가 똑같은 빈도로 나타나면 그 수를 단순 정규수라 하고 동일한 길이의 자리군이 똑같은 빈도로 나타나면 정규수라고 부른다. 파이가 정규수인지 혹은 단순정규수인지 조차도 밝혀지지 않았다. 현대에 들어와 컴퓨터를 이용한 파이의 계산은 바로 이 문제에 대한 통계적 결과를 구하기 위하여 행히진 것이다. 지금까지 파이의 계산을 근거로 보면 파이는 아마도 정규수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1873년에 생크스가 잘못 계산한 파이의 값을 보면 파이가 단순정규수조차 아닌 것처럼 보였다. 


5 유클리드와 그의 <원론>

5-1 알렉산드리아

p119 처음부터 알렉산드리아는 놀라운 미래를 실현시킬 충분한 조짐을 보여 주었다. 

이집트는 톨레미의 몫이 되었다. 실제로 톨레미는 기원전 306년까지 이집트를 통치했따. 그는 계속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정한 후 지식인을 그 곳으로 불러모으고 명성 높은 알렉산드리아 대학의 건설에 직접 착수했다. 이것이 바로 그 종류나 연구영역, 조직 면에서 오늘날의 대학과 거의 유사한 형태의 최초의 교육 기관이었다. 


5-2 유클리드

p120 한번은 토렐미가 유클리드에게 기하학을 터득하기 위한 지름길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유클리드는 “기하학에는 왕도가 없다.”고 대답했다. 


5-3 유클리드의 <원론>

p121 성경을 빼놓고 어떤 책도 이 <원론>보다 널리 이용되고 출판되고 연구된 것은 없으며 아마 어떤 책도 과학적 사고에 이렇게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없을 것이다. 유클리드의 <원론>은 1482년에 초판이 인쇄되었고 그 후 지금까지 1천 판이 넘을 정도로 인쇄되었으며 2천 년 이상 기하학의 교과서로서 군림해왔다. 


p125 유클리드가 <원론>에서 대체로  그 이전의 저자들의 작품을 성공적으로 편집하고 체계적으로 배열하는 것이 가능했다. 유클리드가 <원론>에서 많은 증명을 손수 만들어 넣고 또 많은 내용을 완성시켰다는 점은 의심할 바 없으나 이 저작의 주요한 장점은 아무래도 명제를 기술적으로 정선하고 논리적인 결과가 유도되도록 그것을 잘 배열하고, 적은 가정으로부터 많은 명제를 연역적으로 추론해 냈다는 데 있을 것이다. 


5-5 비례론

p131 “동일한 크기의 높이를 갖는 삼각형의 면적의 비는 그들의 밑변의 비와 같다” 

“밑변과 높이의 크기가 동일한 두 삼각형의 면적은 같고 동일한 크기의 높이를 갖는 두 삼각형은 밑변의 크기가 큰 것의 면적이 더 크다.”

중2 학생들이 배우는 내용


5-6 정다각형

p134 정17각형에 대해서는 많은 유클리드 작도가 만들어졌다. 1832년에는 리셸로는 정257각형에 대한 연구를 발표했고 링겐의 헤르메스 교수는 정 65537각형의 작도문제를 가지고 생애의 10년을 바치기도 했다. 가우스는 19세의 나이로 자와 컴퍼스를 가지고 정 17각형을 작도할 수 있음을 발견했는데 이것이 바로 일생을 수학에 바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507 <원론>의 형식체계

p135 초기 그리스 수학자들에 의한 가장 위대한 성취 중의 하나는 틀림없이 공준적 사고의 창조일 것이다. (중략)


6 유클리드 이후의 그리스 수학

6-1 역사적 배경

p145 고대사회의 몰락과 더불어 알렉산드리아 대학도 점차 운명을 다해갔으며 창조적인 사고는 포기되고 학자들은 편집과 주석에만 몰두하였다. 마침내 기독교와 이교도 사이의 싸움으로 열병의 시대가 도래하고 641년에는 알렉산드리아가 아라비아인들의 손으로 넘어가버렸다. 


6-2 아르키메데스

p145 모든 시대를 통틀어서 가장 위대한 수학자 중의 한 사람이며 또 가장 위대한 고대인이었던 아르키메데스는 기원전 287년경 시칠리아 섬에 있던 옛 그리스 도시 시라쿠사에서 천문학자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로마가 시라쿠사를 정복한 기원전 212년에 죽었다. (중략) 


p146 로마 장군 마르켈루스가 시라쿠스를 공격했을 때 아르키메데스가 시라쿠사의 방어를 위하여 고안한 여러 가지 훌륭한 장치에 대한 설명이 있다. 그런 것 중에는 적의 배가 도시 성곽에 가까이 접근했을 때 그 배에 무거운 돌을 떨어뜨릴 수 있는 투석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사정거리를 조정할 수도 있고 이동 발사장치도 갖고 있었다. 또 그는 적의 배를 물에서 끌어올리게 할 수 있는 기중기도 만들었으며 적의 배를 불태우기 위해 커다란 볼록렌즈를 사용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p149 아르키메데스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 참고 

 아르키메데스의 저작은 수학적 설명의 걸작품이며 놀라울 정도로 현대논문집의 논문들과 유사하다. 그것은 깔끔한 표현, 우아한 끝맺음, 위대한 독창성, 계산기술과 논증의 엄격함 등을 보여 주고 있다. 약 열 개의 논문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고 그 외에도 많은 논문이 쓰여졌지만 오늘날에는 분실되었다는 흔적이 있다. 이러한 저술 중 수학에서 가장 놀랄 만한 공헌은 아마도 적분법의 초기 개발일 것이다. 


p153 수학사에서 현대에 이르러 발견된 것 중 가장 스릴 넘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1906년 말에 콘스탄티노플의 하이베르크가 오랜 동안 분실된 채로 있었던 아르키메데스의 논문 <방법>을 발견한 것이다. 


6-3 에라토스테네스

p155 에라토스테네스의 체 : 소수 골라내는 방법


6-4 아폴로니우스

p156 유클리드, 아르키메데스, 아폴로니우스는 기원전 3세기의 수학에 있어서 3대 거인이었다. 


p157 타원, 포물선, 쌍곡선이라는 이름은 아폴로니우스가 만든 것으로서 그것은 초기 피타고라스 학파가 면적에 대하여 사용한 용어로부터 따온 것이다. 


6-5 히파르쿠스, 메넬라우스, 프톨레마이오스와 그리스 삼각법

p162 사실 히파르쿠스의 천문학에서의 업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삼각법의 발전에서 한 역할에 있다. 


6-6 헤론

p166 헤론의 저작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하나는 기하학에 관한 것으로서 주로 측정의 문제를 다루고 또 하나는 역학에 관한 것으로서 기계적 고안품에 관한 설명으로 되어 있다 .


6-7 고대 그리스의 대수 


6-8 디오판투스


6-9 파푸스

p174 그리스의 위대한 기하학적 전통이 유클리드, 아르키메디스, 아폴로니우스의 후계자들에 의하여 얼마 동안 지속되긴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결국 시들시들해지고 오히려 천문학, 삼각법, 대수 등에서 새로운 발전이 이루어졌다. 


p177 파푸스의 <수학집성>은 풍부한 기하학적 금괴가 묻힌 진정한 광산이다. 여기에 나오는 역사적 참고문은 믿을 만한 가치가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스 기하학에 관한 우리의 지식이 바로 이 위대한 논문으로부터 추출해낸 것이다. 이 논문은 무려 30명 이상의 고대 수학자의 작품을 인용하거나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수학집성>이 그리스 기하학의 만가라고까지 불리는 것은 당연하다. 


7 중국, 인도, 아라비아의 수학

중국

7-1 기원과 시대

p186 고대 중국의 수학에 관해서는 그 근원적인 본질에 관한 어떤 것도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 없다. 


7-2 주대에서 당대까지 

p187 주대 이전부터 중국의 기수법은 10진법이었으며 그 후도 줄곧 10진법이 사용되었다. 


7-3 당대에서 명대까지

p190 당대에 이르러 과거시험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당시에 구할 수 있었던 대부분의 주요한 수학책을 한데 모아 묶었다. 


인도

7-4 일반적인 조망

p194 고대 인도의 수학 발전에 관해서도 정확한 기록 부족으로 인하여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가장 오래된 역사는 5000년 전에 페허가 된 모헨조다로의 한 도시에 보존되어 있다. 넓은 거리, 벽돌집과 타일 붙인 목욕실이 있는 아파트, 포장된 하수시설, 공동수영장 등의 흔적은 고대 동양의 어떤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진보한 문명이 그 곳에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초기의 사람들은 쓰고, 셈하고, 무게를 달고, 측량을 하는 체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관개수로도 파놓았는데 이 모든 것들은 기초 수학과 공학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 사람들이 나중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p197 브라마굽타는 7세기의 가장 뛰어난 인도 수학자로서 중앙 인도에 있는 우자인의 천문대에서 일하였다. 그는 628년에 21장으로 된 천문학에 관한 책  <브라마-스푸타-싯단타, ‘브라마에의 개정된 체계’라는 뜻>를 저술했는데 그중에서 12장과 18장이 수학을 다루고 있다. 


p197 현대의 가장 눈에 띄는 인도 수학자는 가난한 판매원이었으며 교육받지 않은 천재, 스리니바사 로마뉴잔일 것이다. 그는 복잡한 수의 관계를 빠르고 깊게 통찰하는 놀라운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1913년에 저명한 영국 수론학자 하아디의 눈에 띄어 다음 해에 커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가장 주목할 만한 수학적 교제가 바로 그들 두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7-5 셈 법

p199 초기 인도의 덧셈은 오늘날 우리가 선호하고 있는 방식인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더해가는 것이 아니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더해가는 것이었다. 


7-6 산술과 대수 

p200 인도인들은 재능 있는 산술가였으며 대수에 주용한 공헌을 하였다. 많은 산술문제들이 임시위치법으로 풀렸지만 그 밖에 역산법으로 불리는 것이 선호되기도 했다. 역산법은 주어진 정보로부터 거꾸로 계산하는 것이다. 


7-7 기하학과 삼각법


7-8 그리스와 인도 수학의 비교

p2-7 그리스 수학과 인도 수학 사이에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우선 수학을 연구했던 인도인들은 근본적으로 스스로를 천문학자로 생각하였으며 따라서 인도 수학은 주로 천문학의 시녀 역할을 하였다. 반면에 그리스 수학은 독립적인 존재를 획득하여 수학 자체를 위해서 연구되었다. (중략)


아라비아

7-9 회교문화의 탄생


7-10 산술과 대수 

p211 마호메트 이전의 아라비아인들은 모두 숫자를 말로 적었다.


7-11 기하학과 삼각법

p214 아라비아인들이 기하학에 있어서 행한 중요한 역할은 어떤 발견에 있다기 보다는 기록의 보존에 있었다. 그들이 위대한 그리스 고전을 만족스럽게 번역하려고 애쓴 노력에 세계는 큰 빚을 진 셈이다. 


7-12 몇 가지 어원


7-13 아라비아의 기여

8 유럽 수학, 6세기에서 16세기까지 

8-1 암흑시대


8-2 전파의 시대

p229 시치리아 섬은 지정학적 이유로 동부세계와 서부세계의 자연적인 교류 장소가 되었다. 시칠리아 섬은 그리스 식민지로부터 시작하여 로마제국의 일부로 되었다가 로마의 몰락 후에는 콘스탄티노플로 합병되었고 9세기에는 약 50년 동안 아라비아의 지배를 받았으며 다시 그리스인의 손으로 넘어갔다가 노르만인에게 정복되었다. 노르만인의 통치 아래서는 그리스어, 아라비아어, 라틴어가 함께 사용되었고 외교관들은 콘스탄티노플과 바그다드를 자주 왕래했다. 그래서 고학과 수학에 관한 많은 그리스와 아라비아 사본들이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8-13 피보나치와 13세기

p229~230 13세기 초엽이 되면 중세에서 가장 재능 있는 수학자인 레오나르도 피보나치가 등장한다. 피사의 레오나르도라고도 알려진 피보나치는 피사의 상업 중심지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상업과 관련된 일에 종사하고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의 큰 상인들은 지중해 연안의 여러 곳에 상점을 두고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관세 관리인으로 아프리카의 북부 연안에 위치한 보기에서 근무하게 되었고 어린 레오나르도는 그 곳에서 교육을 받게 되었다.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소년시절부터 일찍이 산술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으며 이후 이집트, 시칠리아, 그리스, 시리아 등으로 여행을 하면서 동부와 아라비아의 수학을 접하였다. 인도-아라비아의 계산술의 실용적 우수성에 완전한 확신을 가지게 된 피보나치는 1202년에 고향으로 와서 마침내 그의 유명한 저서 <산반서>를 출간하였다. 


p231 15장으로 된 이 책은 새로운 숫자를 읽고 쓰는 방법, 정수와 분수를 계산하는 방법, 제곱근과 세제곱근을 구하는 방법, 임시위치법과 대수적 과정에 의한 1차 및 2차방정식의 해법 등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방정식의 음근과 허근이 인정되지 않았고 그의 대수는 수사적이었다. 대부분의 응용이 교역, 합자경영, 혼합법, 측량기하 등에 관한 것이었다. 또 이 책에는 많은 문제가 실려 있는데 이것은 수세기 동안 그 이후의 저술가들에게 수학문제의 보고가 되었다. 


p232 피보나치는 그와 동시대의 수학자가 적었기 때문에 실제의 그보다 더 위대하게 보인다는 주장이 있었다. 분명히 13세기에 재능 있는 수학자가 별로 많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8-4 14세기

p233 14세기는 수학에 있어서 비교적 황폐한 시기였다. 

이 세기의 가장 위대한 수학자는 1323년경 노르망디에서 태어난 니콜 오렘이었다. 그는 대학교수를 지내다가 후일에 주교가 되었으며 1382년에 죽었다. 그는 다섯 권의 수학책을 저술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몇 작품을 번역했다. 그중 한 논문에서 분수 지수를 처음 사용했으며 또 다른 논문에서는 점을 좌포로 표현하는데 이것이 곧 현대 좌표기하학의 전조가 되었다. 


8-5 15세기

p238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 −기호가 처음 등장한 것은 요한 비드만이 1489년에 라이프치히에서 출간한 한 산술책에서이다. 여기서 그 기호들은 연산의 기호로서 사용된 것이 아니라 단순히 과부족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더하기 기호 +는 틀림없이 덧셈을 표시하는 데 이용된 라틴어 et의 축약어일 것이고 빼기 기호 −는 뺄셈을 표시하는 축약어 ḿ으로부터 나온 듯 하다. +, − 기호가 연산기호로서 사용된 최초의 기록은 1514년에 독일 수학자 반데르 호이케가 쓴 어떤 책에서인데, 그러나 그 이전에 이미 그 기호들이 사용되었을지도 모른다. 


8-6 초기의 산술

p240 아담 리제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어느날 리제와 도안공이 자와 컴퍼스를 가지고 누가 더 많은 직각을 그릴 수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한 친선시합을 가졌다. 도안공은 직선 위에 수선을 계속 그려나갔다. 그러나 아담 리제는 직선 위에 반원을 그린 다음 재빨리 수많은 내접직각을 그려서 경기에 이겼다고 한다. 

 영국도 역시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초기의 산술책을 만들었다. 오로지 수학의 내용만을 담은 영국 최초의 인쇄된 책은 톤스톨이 쓴 산술책이었다. 


8-7 기호대수의 서막

p241 특히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은 1557년에 출간된 <지혜의 숯돌>이라는 이름이 붙은 대수책으로 이 책에서 처음으로 오늘날의 등식기호가 사용되어 있다. 

 또 하나의 현대 대수기호인 근호기호 (근)가 1525년에 크리스토프 루돌프가 쓴 <미지수>라는 이름이 붙은 대수책에서 소개되었다. 


8-8 3차 및 4차방정식

p244 16세기의 가장 극적인 수학적 성취는 아마도 이탈리아 수학자들의 3차 및 4차방정식의 대수적 해법의 발견일 것이다. 


p245 참고 


p247 1750년경에 오일러는 일반 4차방정식의 해가 결국 3차 방정식의 해법으로 구해진다는 것에 착안하여 그와 유사하게 일반 5차방정식의 해를 4차방정식의 해법으로 구해보려고 시도햇으나 실패로 끝나고 말았으며, 30년 뒤에 라그랑주도 역시 이 문제를 푸는 데 실패했다. 그러다가 1803, 1805, 1813년에 계속해서 이탈리아 의사인 루피니가 일반 5차 혹은 그 이상의 차수의 방정식들이 그 방정식의 계수에 관한 근기에 의해 표현될 수 없다는 사실의 증명을 하였다. 이 놀랄 만한 발견은 1824년에 유명한 노르웨이 수학자 아벨에 의하여 밝혀지기도 하였다.


p248~251 카르다노와 타르탈리아 이야기 


8-9 프랑수아 비에트

p251 비에트에 관한 몇 가지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한번은 베네룩스제국 대사가 앙리 4세에게 다음과 같이 큰소리쳤다고 한다. “프랑스에는 1593년에 우리나라의 아드리아누스 로마누스가 제시한 45차방정식의 근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그리하여 비에트가 그 자리에 출두되었고 그의 앞에 로마누스의 방정식이 놓아졌다. 기초적인 삼각법을 이해하고 있었던 비에트는 단 몇 분만에 두 개의 근을 찾았고 그 뒤에 21개의 근을 더 찾았다. 그러나 그도 음근은 생각해내지 못했다. (중략)


p253 비에트의 가장 유명한 책인 <해석학 서설>은 기호대수의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이 책에서 비에트는 미지량을 나타낼 때는 모음을, 기지량을 나타낼 때는 자음을 이용하는 예를 소개하였다. 


8-10 16세기의 그 밖의 수학자들

p257 수학사에서 스테빙느 소수(小數)이론을 발견한 초기인물 중의 한 사람으로 잘 알려졌으며 물리학에서는 정역학과 유역학의 발전에 기여한 것으로 잘 알려졌고, 당시의 학자들에게는 축성술과 군대공사에 관한 저작으로 더 잘 알려졌었다. 


p259 16세기의 수학적 성취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기호대수가 훌륭하게 시작되었고 인도-아라비아 숫자 계산이 표준화되었으며 소수가 개발되었고 3차 및 4차 방정식이 풀렸고 방정식론이 일반적으로 진보되었으며 음수가 받아들여졌고 삼각법이 완성되고 체계화되어 몇 가지 훌륭한 표가 만들어졌다. 그리하여 다음 세기의 놀라운 진보를 위한 무대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이면 아메리카 대륙에서 인쇄된 최초의 수학책이 1556년에 멕시코시티에서 나왔는데 그것은 주안 디즈가 쓴 작은 상업개요서였다. 


17세기 이후

9 근대수학의 여명

9-1 17세기

p269 17세기는 수학사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였다. 이 시기 초반에 네이피어는 로그를 고안하여 발표하였고 해리엇과 오트레드는 대수의 기호와 체계화에 기여하였으며, 갈리렐오는 역학의 기초를 세웠고 케플러는 행성의 운동법칙을 발표하였다. 이 세기 후반에 데자르그와 파스칼은 순수기하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고 데카르트는 현대 해석기하학을 창시하였으며, 페르마는 현대 정의 기초를 확립하고 호이겐스는 확률론과 그 밖의 여러 분야에서 두드러진 업적을 남겼다. 이 세기말로 접어들어 뉴턴과 라이프니츠는 많은 수학자들의 기초 작업 위에서 하나의 신기원을 이루는 창조물인 미적분학을 만들었다. 이와 같이 수학 연구의 새롭고 다양한 분야들이 17세기부터 시작되었다.


p270 이 장과 다음 장에서는 미적분학의 지식 없이도 이해할 수 있는 17세기 수학의 발전을 살펴볼 것이다. 11장은 고대 그리스시대에서 태동하여 17세기 후반의 뉴턴과 라이프니츠에 의해 성취된 괄목할 만한 미적분학의 개략을 담고 있고, 그 나머지 장들은 20세기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수학의 발전을 기술하였는데 이것들은 이 시기의 수학 연구의 대부분이 전문가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개략적으로 기술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북리뷰에서는 11장까지 일단락을 맺어야겠다.)


9-2 네이피어

p270~271 수치 계산이 중요시 되는 많은 분야들, 이를테면 천문학, 항해, 무역, 공학, 전쟁 등에서 계산이 좀더 빠르고 정확하게 수행되기를 바라는 요구가 끊임없이 증가되어 왔다. 이러한 요구가 증가함에 따라 네 가지 괄목할 만한 발명, 즉 힌두-아라비아 표기법, 소수, 로그, 현대 컴퓨터가 계속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의 아버지가 겨우 16세 때 태어난 네이피어는 귀족 가문의 대저택인 스코틀랜드 에딘버러 근교의 머쉬스톤 성에서 대부분의 생애를 보냈으며 그 시대의 정치와 종교적 논쟁에 대부분의 정열을 쏟았다. 그는 격렬한 반천주교주의자였고 녹스와 제임스1세의 주장을 옹호하였다. 


p272 그는 정치적 종교적 논쟁으로부터 휴식을 취하기 위하여 수학과 과학의 연구로 자신을 유인하였는데 그 결과 비범한 네 가지 연구 결과가 현재 수학사에 기록되고 있다. 


9-3 로그

p273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듯이 계산법으로서의 로그의 장점은 곱셈과 나눗셈이 로그에 의하여 보다 단순한 계산인 덧셈과 뺄셈으로 바뀐다는 사실이다. 이 생각의 전조는 네이피어 시대에 잘 알려진 식에 있음이 분명하고, 네이피어의 착상이 이 식으로부터 비롯되었음도 거의 확실하다. (중략)


p275 로그란 ‘비의 수’를 의미하며 네이피어가 처음에는 ‘인공 수’로 표현했다가 나주엥 로그를 채택하였다. 브리그즈는 ‘가수’란 용어를 소개했었는데 이것은 에트루리아 어원의 후기 라틴어이며 원뜻은 ‘추가’혹은 ‘평형추’이고 16세기에 ‘부가물’이란 의미가 되었다. ‘지표’란 용어 역시 브리그즈에 의하여 제안되었으며 블라크가 이를 사용하였다. 초기의 상용 로그표에는 가수뿐 아니라 지표도 써 넣는 것이 관례였다는 것은 이상하며 18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오늘날과 같이 가수만을 표시하는 관습이 세워졌다. 


p276 네이피어의 놀랄만한 발명은 전 유럽에서 열광적으로 채택되었다. 특히 천문학에서는 라플라스가 “로그의 발명으로 일거리가 줄어서 천문학자의 수명이 배로 연장되었다”고 단언한 것처럼 그러한 발견을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었다. 


p276 요즘에는 일반적으로 로그를 지수로 간주한다. 즉 n=b^x이면 x는 b를 밑으로 하는 n의 로그라고 한다. 이 정의에 의하면 로그의 법칙들은 지수의 법칙으로부터 바로 얻어진다. 지수를 사용하기 전에 로그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수학사에서 이례적인 것 중의 하나이다. 


p277 그러나 로그 함수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간단한 이유로 로그적-지수적 변환들은 자연계와 해석학에서 지극히 중요한 부분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그함수와 그 역함수인 지수함수의 성질을 공부하는 것은 수학 강의의 중요한 부분으로 항상 남아 있을 것이다. 


9-4 새빌리아와 루카스 교수직


9-5 해리엇과 오트레드 

p280 오트레드는 저술을 통하여 150여 가지 수학 기호들을 제시하고, 또 그것들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들 중 세 가지만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데, 그것은 곱셈기호와 비에 사용되는 4점 그리고 두 수 사이의 차를 나타내는 데 자주 사용되는 기호[~]이다. 그러나 가위표는 곱셈기호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라이프니츠가 제기했듯이 그것은 알파벳의 X와 너무 비슷하기 때문이다. 해리엇은 곱셈기호로 점을 때때로 사용했지만 라이프니츠가 이 기호를 채택하기 전까지는 별로 사용되지 않았다. 라이프니츠는 또한 곱셈기호로 모자모양기호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오늘날 집합론에서 교집합을 나타낸다. 나눗셈기호도 역시 1659년에 스위스의 란에 의해 쓰여진 대수책에 인쇄되어 처음으로 나타나면서 17세기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9-6 갈릴레오

p283 17세기 초에 수학에 지대하게 공헌했던 두 명의 뛰어난 천문학자가 있었다. 한 사람은 이탈리아인인 갈릴레오 갈릴레이이고 다른 한 사람은 독일인 요한 케플러이다. 

 하루는 피사의 성당에서 예배를 보던 중 높은 천장에 매달린 큰 청동 램프에 정신을 빼았겼다. 램프는 불을 켜기 쉽게 하려고 옆으로 글어당겨져 있었는데 놓았을 때 그것은 점차로 진폭이 작아지면서 앞뒤로 진동하였다. 그는 자신의 맥박수를 이용하여 시간을 재었는데 진동주기가 진폭의 크기와 관계없음을 발견하고 놀랐다. 그 후에 실험을 통해서 흔들리는 진자의 주기는 진자의 추의 무게와도 무관하며 단지 진자의 길이에만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과학과 수학에 관한 갈릴레오의 흥미가 바로 이 문제에서 비롯되었으며  대학에서 기하학 강의를 수강하면서 더욱 고무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그는 의학을 포기하고 그 대신 훌륭한 재능을 지닌 과학과 수학분야에 전념하는 것에 대한 부모의 허락을 얻어냈다. 


p286 갈릴레오는 또 그의 망원경으로 태양의 흑점, 달 표면의 산, 금성의 위상, 토성의 고리 등을 관찰하였다. 그러나 이 발견은 태양은 완벽하며 지구와 사람은 우주의 중심에 있다고 주장했떤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를 받아들이고 있던 많은 성직자의 편협한 반대를 한 번 더 불러일으킬 따름이었다. 한 성직자는 심지어 살릴레오를 목성의 네 개의 위성을 망원경 안으로 끌어들인 점을 들어 고소하기 까지 했다. 

(갈릴레오 이야기 참고)


p287 “과학의 문제에서의 천 사람의 권위는 단 한사람의 추론만 못하다.” 라는 갈릴레오의 말은 지금도 자주 인용되고 있다. 

 갈릴레오는 그와 동시대인인 유명한 케플러를 질투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케플러가 1619년경 행성 운동의 세 가지 중요한 법칙을 발표하였으나 이것은 갈릴레오에 의하여 완전히 무시되었기 때문이다. 


 9-7 케플러

p289 누구나 끊임없이 단지 그것만을 생각하고 충분히 오랜 시간 동안 노력을 한다면 거의 어느 문제든지 풀 수 있다고 흔히 이야기한다. 에디슨의 발명은 1%의 상상력과 99% 땀이라고 말한 것처럼 문제를 푸는 것도 1%의 상상력과 99%의 인내심이다. 아마도 태양의 둘레를  도는 행성들의 운동에 관한 문제를 푸는 데 있어서 케플러가 보여준 믿기 어려운 끈기만큼 이것을 잘 설명하여 주는 것은 과학사의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다. 가운데 있는 태양의 둘레를 행성들이 궤도를 따라 돌고 있다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완전히 확신하고, 케플러는 이 궤도들의 성질과 위치 그리고 행성들이 궤도를 도는 방법을 정하기 위하여 무척 노력하였다. 그는 증며엥 도움이 되는 자료를 거의 갖고 있지 않았던 때에 고도의 상상력만을 발휘한 여러 번의 시도 후에 브라헤의 방대한 분량의 행성 운동에 관한 매우 정확한 관찰들을 물려받게 되었다. 


p290 순수 수학이 언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응용을 갖게 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예를 들어 훼웰은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만일 그리스인이 원추곡선론을 발달시키지 않았다면 케플러는 프톨레마이오스를 앞지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인이 단지 그들의 지적 갈망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원추곡선의 성질을 연구한 지 1800년 뒤에 그것들의 실제적인 응용이 나타났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케플러는 1617년 저서 <우주의 조화>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동시대인을 -혹은 후세인이라도 상관없다-위하여 책을 쓰고 있다. 나의 책은 100년 동안 독자를 기다릴 수도 있다. 신은 6000년 동안이나 관찰자를 기다리지 않았는가. 


9-8 데자르그


9-9 파스칼

p294 데자르그의 논문의 진가를 인정했던 소수의 동시대인 중의 한 사람이 수학적 천재인 파스칼이었다. 


p300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오랫동안 필연성과 우연성을 논의했었지만 일부 이탈리아 수학자들이 주사위 게임 같은 도박게인에서의 승산을 계산하려고 시도했던 15세기 후반과 16세기 초반까지는 확률을 수학적으로 다루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8-8절에 언급한 카르다노는 수학적 확률론의 측면을 약간 담고 있는 간결한 도박사의 안내서를 집필하였다. 그러나 확률론의 발단으로 여겨질 수 있는 한 문제는 소위 점수문제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 문제는 어느 게임에서 기술이 비슷한 두 사람 사이에 우연히 게임이 중단되었을 때의 이들 두 사람의 점수와 게임을 이기는 데 필요한 점수를 알고 있을 때, 상금의 배분을 결정하는 문제이다. (중략)


p301 따라서 파스칼과 페르마는 서신 왕래를 통하여 확률론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10 해석기하학과 다른 미적분학 출현 이전의 발전

p10-1 해석기하학

p309 초등 대학수학을 배우는 학생들에게는 기하학적 문제를 공략하는 이 새롭고 효과적인 방법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더 감격적인 학문적 경험은 거의 없을 것이다. 


p310 해석기하학의 진정한 본질은 기하학적인 고찰을 그에 대응하는 대수적인 고찰로 바꾸어 놓는데 있다. 해석기하학이 이러한 능력을 가지게 된 것은 대수적 처리 과정과 기호가 발전되고 난 후이다. 따라서 프랑스 수학자 데카르트와 페르마에 의한 17세기의 수학에 대한 결정적인 공헌이 이 분야의 본질적인 창시라고 생각하는 대다수 역사가들의 견해를 따르는 편이 보다 옳을 듯하다. 분명히 이 두 사람이 그 분야에 활력을 불어넣은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의 해석기하학이 탄생되었다. 


10-2 데카르트

p318 데카르트가 해석기하학을 만들게 된 동기를 설명하는 몇몇 전설같은 이야기가 있다. 그중 하나는 꿈에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1616년 11월 10일 성 마틴 이브에 다뉴브 강둑 위에 있는 군대의 겨울막사에서 야영하고 있는 동안, 그의 전 인생을 변화시켰다고 그가 말하는 기이하고 생생하며 조리 있는 몇 편의 꿈을 꾸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 꿈들이 인생에 있어서 목표를 명확히 해 주고, “경이로운 과학”과 “놀라운 발견”을 밝히는 데 그의 미래의 모든 노력을 다하기로 결심하게 해 주었다. 데카르트는 무엇이 경이로운 과학이며 훌륭한 발견인지는 결코 명백히 밝히지는 않았으나, 일부 사람들은 그것이 해석기하학 또는 대수학의 기하학에의 응용, 그리고 모든 과학적 방법의 기하학에의 적용일 것이라고 믿고 있다. 18년 후에야 비로소 그의 착상의 일부를 <방법서설>에 상술했다. 


10-3 페르마

p319 데카르트가 근대 해석기하학의 기초를 구축하고 있는 바로 그때, 프랑스의 또 다른 수학 천재인 페르마 역시 그 문제에 관심을 쏟고 있었다. 페르마가 앞섰다는 증거는 1636년 9월에 로베르발에게 쓴 편지에 나타나 있는데, 착상을 한 지 7년이나 되었다고 적혀 있다. (중략)


p321 페르마의 수학에 대한 다양한 공헌 중 가장 돋보이는 것은 현대 정수론을 만든 것이다. 


p325 우리는 이미 9-9절에서 확률론의 기초를 낳은 파스칼과 페르마의 서신 왕래에 관하여 언급한 바 있다. 서신 왕래의 동기가 소위 점수문제였다는 것을 상기하기 바란다. 

 파스칼과 페르마는 1654년 그들의 역사적인 서신 왕래에서 점수문제와 연관된 다른 문제들, 가령 두 사람 이상 또는 능력이 다른 두 사람의 게임에서의 상금분배 문제에 영향을 미쳤다. 


 수학자들이 순전히 운만 작용되는 상황에 적용시킬 수 있는 합리적 법칙을 세우는 수학적 확률론이라는 과학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사실은 인상적이며 다소 놀랍낟. 


10-4 로베르발과 토리첼리


10-5 호이겐스

p330 위대한 네덜란드의 천재 호이겐스는 두드러지게 공헌을 많이 한 삶을 살았다. 


p332 호이겐스는 수많은 소책자를 썼다. 그는 디오클레스의 시소이드의 길이를 구하고 현수선의 기하학적 성질을 연구하고, 대수적 곡선에 관한 논문을 썼으며, 다항식의 현대 형태, 페르마의 극대, 극소 법칙에 관한 결과를 발표하였고 수학을 물리학에 수없이 응용하였다. 


10-6 17세기의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수학자

p333 또 다른 프랑스의 정수론자이며 여러 분야에 많은 저서를 남긴 사람으로 미니미트의 수사 메르센이 있다. 


p334 메르센 소수 


10-7 17세기 독일의 베네룩스 3국의 수학자

p336 지라르는 주로 네덜란드에 살았던 것으로 여겨지며 그 또한 구면기하학과 삼각법에 관심을 기울였다. 1626년 그는 사인, 탄젠트, 세크를 최초로 사용한 삼각법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10-8 17세기의 영국의 수학자

p338 수학에 있어서 그는 아크탄젠트 X, 탄젠트X , 아크세크 X의 무한급수전개를 얻었고, 수렴급수와 발산급수를 구별한 최초의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그레고리) 그는 원의 유클리드 구적법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는데, 그것은 매우 기발하였지만 불완전했다. 


11 미적분학과 관련된 개념 

11-1 서 론

p344 의심할 바 없이 그 시기의 가장 주목할 만한 수학적 업적은 세기말로 접어들면서 뉴턴과 라이프니츠가 만든 미적분학이다. 이 발명으로 창조적인 수학은 고등 수준으로 올라서고 기초수학의 역사는 본질적으로 마감됐다. 


11-2 제논의 역설

p345 어떤 양을 무한히 쪼갤 수 있거나 또는 그것이 매우 많은 개수의 쪼갤 수 없는 극소량들의 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정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 역설의 본질을 다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이분법 : 만일 직선을 무한히 쪼갤 수 있다면 운동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직선을 통과하려면 우선 중점을 지나야만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사분점을 지나야 하고 또 그러기 위해서 팔분점을 지나야만 하는 등 무한히 많은 점을 지나야 한다. 따라서 운동은 시작조차도 할 수 없다. 

화살 : 만약 시간이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아주 짧은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다면 움직이는 화살은 항상 정지해 있다. 왜냐하면 매 순간마다 그 화살은 한 고정된 지점에 있기 때문이다. 각 순간에서 이 명제가 참이므로 화살은 결코 움직이지 않는다. 

 그 후 제논의 역설에 대한 많은 해설이 주어졌는데 그들 대부분의 각 양이 극히 작다 하더라도 양의 무한개의 합은 무한히 크고, 그 크기가 0인 양의 유한 또는 무한개의 합은 0이라는 통상적인 직관적 믿음에 도전한 것이었다. 그 역설을 만든 동기가 무엇이었든 간에 그것들의 영향으로 무한소가 그리스 논증기하학에서 배제되었다. 


11-3 에우독소스의 실진법


11-4 아르키메데스의 평형법


11-5 서유럽에서의 적분법의 기원

p353 아르키메데스의 방법에 비견될 만한 방법을 사용했던 근대의 두 인물은 네덜란드의 공학자 스테빈과 이탈리아 수학자 발레리오였다. 

스테빈은 ‘포물선의 부분의 면적을 다루면서 했던 것과 매우 흡사하게 극한으로 직행함으로써 실진법의 이중 귀류법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이와 같은 방법을 유체 정역학 연구에 사용하였다. 이 방법은 근본적으로 오늘날 미적분학의 기초 교과서에서 사용하는 방법이다. 적분법과 관련하여 무한소의 개념을 발전시킨 근대 유럽인 중에서 특히 케플러를 기억해야 한다. 


11-6 카발리에리의 불가분량법

p354 카발리에의 수학에 대한 최대의 공헌은 1635년에 미적분법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불가분량법을 소개한 논문 <불가분량의 기하학>이었다. 방법은 데모크리토스와 아르키메데스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도 있겠지만 카발리에리에게 직접 영향을 준 면적과 체적을 구하기 위한 케플러의 시도였음이 거의 확실하다. 


p355 카발리에리의 면적과 체적을 계산하는 데 유용한 도구를 구성하고, 그것들의 직관적인 기저는 현대 적분법으로 쉽고 정밀하게 만들어질 수 있다. 이 원리를 직관적으로 명백하다고 받아들이다보면 많은 구적 문제를 풀 수 있다. 


p357 이 카발리에리의 두 번째 원리를 가정하고 이를 일관되게 사용하면 입체 기하학을 다룰 때 부딪치는 많은 체적 공식을 매우 간단하게 유도할 수 있다. 이 방법은 많은 교과서 집필자에 의하여 채택되어 왔으며 교육적 측면에서 옹호되어 왔다. 


p358 한 도형의 무한소 부분 같은 종류의 불가분량에 대한 카발리에리의 모호한 개념은 수학을 공부하는 일부 학생들, 특히 스위스 금세공업자이자 수학자인 굴딘에 의하여 많은 논란과 통렬한 비판을 받기에 이르렀다. 카발리에리는 이러한 반론에 맞서려는 부질 없는 바람으로 그의 논법을 개작했다. 프랑스 수학자 로베르발은 이 방법을 능숙하게 다루었으며 이 개념의 독립적인 창안자임을 주장했다. 불가불량법 또는 이와 매우 유사한 방법이 토리첼리, 페르마, 파스칼, 성 빈센트, 배로 등에 의하여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들의 연구과정을 통하여 여러가지 식의 적분법에 상응하는 결과를 얻었다. 


11-7 미분법의 기원

p358 미분법은 곡선에 접선을 그리는 문제와 함수의 극대, 극소값을 구하는 데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비록 그 같은 고찰이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올라간다 하더라도 미분법을 최초로 명확하게 예상한 것은 1629년 페르마가 설명한 착상으로부터 였다고 함이 타당할 것이다. 

 

p359 페르마의 설명의 논리가 완전 무결하지는 않지만 그의 방법은  lim (h→0) f(x+h)-f(x)/h=0으로 놓는 것, 즉 f(x) 의 도함수는 0과 같게 놓는 것과 같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것이 함수 f(x)의 극대, 극소를 구하는 관습적인 방법이며 때때로 기초 교과서에서 페르마의 방법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페르마의 방법은 극대값과 극소값을 구별하지 못한다. 


11-8 윌리스와 배로 

p361 영국에서 뉴턴의 바로 앞 선배는 윌리스와 배로이다. 

해석학에의 연구는 위대한 동시대인인 뉴턴의 연구를 준비하는 데 크나큰 공헌을 했다. 

 

p362 윌리스는 원추곡선을 원뿔의 단면으로서보다는 2차곡선으로서 검토한 최초의 인물이다. 


p363 윌리스는 수학에서 다른 것도 성취하였다. 그는 파스칼의 사이클로이드에 관한 난제를 거의 해결한 수학자였다. 

 미적분학의 발전에 대한 윌리스의 주요 공헌이 적분론에 있는 반면에 배로의 가장 중요한 공헌은 미분론에 관련된 것이다. 

 p364 배로의 가장 중요한 수학적 업적은 <기하학 강의>인데 케임브리지에서 교수직을 사임한 해에 출간되었다. 이 책의 서문에서 책 내용의 일부, 아마 고아학을 다룬 부분은 뉴턴의 덕임을 인정하고 있다. 


p366 미분학과 적분학의 이 단계에서, 많은 적분법이 실행되었고, 수많은 면적, 체적, 곡선의 길이가 구해졌으며 미분법이 전개되었고 많은 곡선의 접선이 작도되었고 극한개념이 고안되었으며 기본 정리가 인식되었다. 이제, 행해야 할 무엇이 더 남아 있는가, 여전히 체꼐적인 해석적 방법과 더불어 일반적인 기호를 만드는 일과 이 주제의 기본 이론들을 보다 엄밀하게 재발견시켜야 할 일이 남아 있다. 이들 중 첫번째는 정확하게 말하여 뉴턴과 라이프니츠가 각각 독립적으로 연구하여 이룩한 ‘미적분학’이다. 엄밀한 기초 위에서 기본 개념을 재발전시킨 일은 좀더 시간을 기다려야 했는데, 그것은 프랑스의 위대한 해석학자 코시와 그의 19세기 계승자들의 업적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언급할 것이다. 


11-9 뉴턴

p367 아이작 뉴턴은 갈리레오가 죽은 해인 1642년 성탄절에 울즈돕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농부였기에 그도 농사에 전념해야 했다. 그러나 어린 그는 기계 모형을 고안하는 것과 실험하는 것에 뛰어난 재능과 즐거움을 나타냈다. 그래서 생쥐의 힘으로 동력을 얻어 밀을 빻아 밀가루를 만드는 장난감 방앗간과 물의 힘으로 작동하는 나무시계를 만들었다. 그 결과 학교 교육을 더 받게 되어 18세 때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하였다. 이 시기에 스타우브리지 박람회에서 우연히 산 점성술에 관한 책을 읽고 수학에 관심을 집중하게 되었다. 그는 유클리드의 <원론>을 읽었는데 그것이 너무 명백하다는 것을 알았고, 그러고 나서 데카르트의 <기하학>을 보았는데 다소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또한 오트레드의 <수학의 열쇠>, 케플러와 비에트의 책, 그리고 윌리스의 <무한의 수론>을 읽었다. 이런 수학책들을 읽고 난 후 수학을 창조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려 23세 때인 1665년 초에 일반화된 이항정리를 알아냈고, 오늘날 미분학으로 알려진 유율법을 만들었다. 그 해와 이듬해 동안 런던에 선 페스트가 유행하여 대학이 휴교에 들어가서 울즈돕으로 내려와 지냈다. 이 기간 동안에 미분학을 곡선의 임의의 점에서의 접선과 곡률반경을 구할 수 있는 정도까지 발전시켰다. 


p368 그의 색채 이론과 광학 실험으로부터의 추론들은 일부 과학자로부터 격렬한 공격을 받았다. 뉴턴은 그러한 논쟁이 너무 지겨워서 과학에 관한 어떤 것도 다시는 발표하지 않으리라 맹세하였다. 그는 병적일 정도로 논쟁을 싫어하여 그의 발견들은 발견한 후 오랫동안 발표되지 않고 남아 있었다. 발표를 미루는 습관 때문에 나중에 미적분학의 발견의 선후에 관련하여 라이프니츠와 점잖치 못한 논쟁을 겪게 된다. 이 논쟁 때문에 뉴턴을 지도자로 지지하는 영국 수학자들은 대륙과의 수학교류를 단절하였고 이로 인해 영국의 수학 발전이 거의 100년이나 늦어졌다. 

<엇갈린 운명>을 설명할 때 아주 요긴한 부분이다. 왜 먼저 발표하지 않았을까? 호호호


p369  그가 달의 운동에 대한 연구와 관련하여 지구의 반지름의 새로운 측정법을 사용함으로써 만유인력 법칙을 증명한 때가 바로 이 시기인 1679년이다. 그는 또한 태양과 행성을 무거운 질점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는 가정에서 만유인력 법칙이 케플러의 행성운동 법칙과 양립함을 확증하였다. 그러나 이 중요한 발견은 5년 후인 1684년 핼리가 행성이 태양의 둘레를 타원궤도로 돌게 하는 힘의 법칙을 논의하기 위하여 케임브리지로 뉴턴을 방문할 때까지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p369 이렇게 다시 일깨워진 천체 역학에 관한 흥미로 뉴턴은 후에 <프린키피아>의 첫 권에서 기초가 된 많은 원리를 연구해 내었다. 얼마 후 핼리가 뉴턴의 원고를 보았을 때 그것이 굉장히 중요함을 깨닫게 되어 그 결과를 영국학술원으로 보내겠다는 저자의 약속을 받아 내었다. 이 연구를 한 것과 대략 같은 시기에 그는 마침내 수 년 동안 귀찮게 해 왔던 문제, 즉 임의의 점에서의 밀도가 단지 구의 중심으로부터의 거리에만 종속되는 구면체는 외부의 질점을 마치 전체 질량이 중심에 집중되어 있는 것처럼 끌어당긴다는 것을 해결하였다. 태양과 행성이 완전한 구 형태에서 약간 벗어나는 것은 여기에서 무시될 수 있기 때문에 이 정리로 해서 케플러의 행성법칙을 완전히 증명하였다. 또한 뉴턴은 열심히 이론을 연구하여 1865년 여름까지 <프린키피아>의 첫 권을 썼다. 1년 후 둘째 권을 완성하고 다시 셋째 권을 쓰기 시작하였다. 후크의 시샘하는 질책으로 뉴턴은 불쾌해져서 거의 셋째 권을 포기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핼리가 설득하여 완성하게 되었다. 


p370 1689년 뉴턴은 대학교를 대표하여 하원의원이 되었다. 1692년에 일종의 정신착란을 포함하는 특이한 병을 약 2년 동안 ㅇ랗았다. 이후 그의 생애 대부분을 화학, 연금술, 신학에 전념하였다. 사실은 그의 생에 초반조차 수학과 자연철학에 쏟은 거의 같은 시간만큼 이 목표에 쏟았을 것이다. 수학에 있어서 그의 창조적인 연구가 실제적으로는 끝났지만 뛰어난 능력을 잃지 않았다. 왜냐하면 영국의 다른 수학자들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수많은 문제들을 훌륭하게 풀었기 때문이다. (중략) 


p371 뉴턴이 발견한 보다 중요한 수학적 발견은 유율법인데, 그것의 핵심적인 내용을 1669년 배로에게 알렸다. 그의 <유율법>은 1671년에 쓰여졌으나 1736년까지 발표되지 않았다. 이 논문에서 뉴턴은 곡선을 점의 연속적인 운동에 의하여 생성되는 자취로 고찰하였다. 이 개념 아래에서 생성점의 가로 좌표와 세로 좌표는 일반적으로 크기가 변하고 있다. 변하는 양을 변량이라고 부르며 그것의 변화 비율을 변량의 유율이라고 부른다. 곡선의 생성점의 세로 좌표 같은 변량을 y로 타나내면 이 변량의 유율은 y에 관하여 나타난다. 현대 표기법에서 t가 시간을 나타낼 때 dy/dt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시간을 기하학에 이렇게 소개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의 개념은 어떤 양, 가령 동점의 가로 좌표 같은 양이 일정한 증가율을 주 유율이라고 부르며, 임의의 다른 변량의 유율은 이 주유율과 비교될 수 있다. y의 유율을 y로 표기하고 보다 고계의 유율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나타낸다. 한편 y의 변량은 y옆에 조그만 사각형을 그린 기호로 표기하거나 y로 나타내기도 한다. 


p373 뉴턴의 가장 위대한 저서는 말할 것도 없이 <프린키피아>인데, 거기에는 완전한 역학계와 천체 운동현상의 완전한 수학적인 공식화가 처음으로 나타난다. 이 책은 과학사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고 가장 많은 찬사를 받은 책임이 분명하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아마도 유율법에 의하여 발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리들은 군데군데 약간의 단순한 극한 개념을 써서 순전히 고전적인 그리스 기하학을 이용하여 증명되었다는 점이다. 상대성 이론이 발견되기 전까지 모든 물리학과 천문학은 뉴턴이 이 책에서 만든 좌표계의 가정 위에 세워졌다. <프린키피아>에는 고차원 평면 곡선에 관련된 많은 결과와 다음과 같은 흥미를 끄는 기하학적 정리의 증명이 발견된다. 


p374 뉴턴은 그 시대의 수학자들 사이에 알려진 다양한 난제 중 어느 것도 풀지 못한 적이 없었다. 그중 하나는 라이프니츠가 제기하였는데 그는 곡선족의 직교궤도를 구하여 풀었다. 


p374 뉴턴은 숙련된 실험가이자 뛰어난 분석자였다. 수학자로서 그는 거의 전 분야에서 이제까지 배출된 학자 중 가장 훌륭하다고 평가되고 있다. 물리학적 문제에 대한 통찰력과 수학적으로 다루는 능력은 아마 어느 누구도 결코 추월할 수 없을 것이다. 라이프니츠가 “태초부터 뉴턴이 살았던 시대까지의 수학을 놓고 볼 때, 그가 이룩한 업적이 반 이상이다.” 라고 말한 것과 같은 그의 위대성에 관한 많은 증명서들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라그랑주는 “뉴턴은 최상의 행운아이다. 왜냐하면 단지 한 번만 우주의 체계를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언급했다. 그의 업적을 시인인 알렉산터 포프는 다음과 같이 시적으로 표현했다. 

 자연과 자연의 법칙은 어둠에 묻혀 숨겨져 있었는데

 신께서 ‘뉴턴이 있으라’하시니 모든 것이 빛이 되었도다


p375 이러한 찬사에 비하여 자기 업적에 대한 자신의 평가는 다음과 같이 겸손하다. “나는 내가 세상에 어떻게 비쳐질지 모른다. 하지만 내 자신에게 나는 진리의 거대한 바다가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은 채 내 앞에 놓여 있는 바닷가에서 놀며, 때때로 보통보다 매끈한 조약돌이나 더 예쁜 조개를 찾고 있는 어린애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언젠가 선배들에게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멀리 보았다면 그것은 단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라고 겸손하게 설명하였다. 

 뉴턴은 가끔 하루에 18 내지 19시간을 집필하였고, 놀랄 만한 집중력을 가졌었다고 전해진다. 그가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넋이 빠지는 것을 입증하는, 꾸며낸 듯한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 줄거리는 이렇다. 뉴턴이 몇몇 친구를 초대하여 저녁을 대접할 때, 포도주 한 병을 가지러 방에서 나갔다가 딴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어 자기가 왜 나왔는지조차 잊어버리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중백의를 걸쳐 입고 교회당으로 가버렸다. 

 또 한 일화로 뉴턴의 친구인 스턱켈리 박사가 닭요리로 저녁을 먹기로 하여 그를 방문하였다. 뉴턴은 외출중이었으나 식탁에는 이미 요리된 닭이 뚜껑 덮힌 접시에 차려져 있었다. 저녁 약속을 잊어버린 뉴턴은 약속시간을 너무 지체하였고 스턱켈리 박사는 마침내 뚜껑을 열고 닭요리를 먹고 나서 뼈를 뚜껑 덮힌 접시에 담아 놓았다. 뉴턴이 나중에 와서 친구와 인사하고 식탁에 앉아서 뚜껑을 열었으나 뼈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는 “아참, 우리가 이미 저녁을 다 먹었다는 것을 잊었군.”이라고 말했다. 

 또 한 일화로, 어느날 뉴턴이 그란담으로부터 말을 타고 집으로 오고 있을 때 마을 건너편에 있는 스피틀리게이트 언덕을 오르려고 말에서 내렸다. 언덕을 오르는 동안에 말이 미끄러 떨어졌는데도 빈 고삐만이 손에 끌려 가고 있는 것을 뉴턴은 몰랐다. 언덕 꼭대기에 올라서 다시 말 안장 위로 뛰어 오르려고 했을 때에야 비로소 뉴턴은 그 사실을 알았다. 


11-10 라이프니츠

p376 17세기의 위대한 세계적 천재였으며 미적분법의 발명에서 뉴턴의 경쟁자였던 고트프리드 빌헬름 라이프니츠는 1646년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나이에 <일반 특성>의 첫번째 착상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훗날 부울의 기호 논리로 꽃피우고, 또 훨씬 후인 1910년에는 화이트헤드와 러셀의 <수학의 원리>를 꽃피운 뿌리가 되었다. 

 

p378 라이프니츠는 1673년과 1676년 사이에 미적분학을 고안하였다. 그가 카발리에리의 불가분량의 합을 나타내는 라틴어의 첫 문자를 딴 S를 길게 늘인 문자로 현대 적분 기호를 처음 사용한 것은 바로 1675년 10월 29일이었다. 몇 주일 후 그는 적분을 ∫ y dy,  ∫ y dx와 같이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분과 도함수를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 같이 쓰고 있었다. 미분학에 관한 최초 논문은 1684년이 되어서야 발간되었다. 


p379 라이프니츠는 수학에 대한 뛰어난 감각을 가졌으며, 잘 고안된 기호체계의 잠재성에 대하여 매우 민감하였다. 미적분학에서의 그의 기호들은 매우 운이 좋다는 것이 증명되었고, 의심할 바 없이 뉴턴의 유율법 기호보다 더 편리하고 적응성이 크다. 그러나 영국의 수학자들은 그들의 지도자인 뉴턴의 기호를 고수하였다. 


p379 여기서는 불행했던 뉴턴-라이프니츠 논쟁의 토론으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의 일반적인 견해는 각자가 서로 독립적으로 미적분학을 발견하였다는 것이다. 뉴턴의 발견이 먼저 이루어진 반면에 결과를 출간한 것은 라이프니츠였다. 만약 라이프니츠가 뉴턴같이 통찰력 있는 수학자가 아니었다면 아마 보다 더 폭넓은 수학자이었을 것이고, 또한 해석학자와 수리물리학자로서는 영국의 경쟁자보다는 못했겠지만 아마 보다 날카로운 수학적 상상력과 수학적 형식에 대한 보다 뛰어난 본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두 단체의 음모에 의해 야기된 논쟁으로 영국이 오랫동안 유럽의 발전을 무시하여 영국이 수학적으로 크게 손해를 입게 되었다. 


p380 라이프니츠는 천부적으로 낙천주의자였다. 자기 생애 동안 대립하는 종파를 하나의 일반적인 교회로 재결합시키려는 희망을 가졌을 뿐 아니라, 이진산술의 상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에 의하여 전 중국을 기독교화하는 방법을 가질 수도 있다고 느겼다. 신은 1로, 무는 0으로 나타낼 수도 있기 때문에 이진법에서 모든 수가 0과 1로 표현되는 것과 똑같이 신은 무에서부터 모든 것을 창조했다고 추측했다. 이러한 생각에 매우 흡족한 라이프니츠는 그 생각이 중국의 현 황제와 나아가 중국의 모든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바람으로 중국 수학위원회 위원장인 에수회 수사 그리말디에게 그것을 알렸다. 라이프니츠의 종교적인 환상의 또 다른 예는 허수가 기독교 성경의 성령-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중간쯤인 양서류의 일종과 닮았다고 한 말에서 엿볼 수 있다 .

인간으로서 유일하게 가지고 있었던 그의 재능에 대한 마지막 찬사로 라이프니츠에 대한 설명을 마친다. 연속과 이산이라는 수학적 사고의 넓고 대조적인 두 영역이 존재하는데, 라이프니츠는 수학의 역사에서 사고의 이 두 가지 성질을 완전하게 가졌던 유일한 사람이다. 


3. 내가 저자라면 

 <<수학사>>는 내가 두고 두고 읽을 책이다. 읽으면서 흥분되고 재미있었다. 임용고사 공부했던 것과 연구원 하면서 읽은 책들이 머릿 속에 남아 있었는지 쉽게 읽을 수 있었다. 물론 수학적 문제는 풀기 어려웠지만 말이다. 내 책을 쓰면서 계속 옆에 두고 읽고, 참고하고 싶다. 깊이 있게 들어가지 못하는 부분이 있긴 했지만, 깊이 연구할 수 있는 재료를 많이 제공해주어 고마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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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이미지
2013.01.21 10:51:57 *.9.168.103

세린이 덕분에 모르는 것도 많이 알게 된다 수학에 관하여..

더불어 뉴욕에 샴페인 대학이란 곳이 있구만?

 

어제 EBS 2013년 7대 기획안에

수학을 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쉽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기획물들을 만들 것에 대한 홍보가 있더라.

네 생각이 났지

저런 곳에 가서 일 해도 도움이 많이 될 듯 하여.

한번 알아바바..화이팅

 

프로필 이미지
2013.01.21 11:57:20 *.23.223.37

와! 감사합니다 :) 

진짜 알차고 좋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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