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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28일 05시 52분 등록

소설과 소설가

-. 오르한 파묵(Orhan Pamuk) 지음 / 이난아 옮김

-. 민음사, 2012

 

저자에 대하여 - 오르한 파묵

 

 1952년 터키 이스탄불에서 태어났다. 이스탄불의 명문 고등학교인 로버트 칼리지를 졸업하고 이스탄불 공과대학 건축학과에 진학하지만 자신에게 이야기꾼의 재능이 더 많음을 깨닫고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결국 학교를 자퇴하고 소설 쓰기에 전념하여 첫 작품인 <제브데트씨와 아들들> <밀리예트> 신문의 소설 공모에 당선된다. 1982년에 출간된 이 작품으로 그는 터키의 대표적 문학상인 '오르한 케말 소설상'을 수상하며 터키 문단의 주목 받는 젊은 작가로 떠오른다.

 두 번째 소설인 <고요한 집>(1983)으로 '마다라르 소설상'과 프랑스에서 주는 '1991년 유럽 발견상'을 받았고, <하얀 성>(1985)을 발표하면서 파묵은 세계적인 작가의 대열에 들기 시작한다. <새로운 인생>(1994)은 터키 문학사상 가장 많이 팔린 소설이라는 기록을 세웠으며 <내 이름은 빨강> 35개국 독자들에게 그를 알리며 2002년 프랑스 '최우수 외국 문학상', 2003년 이탈리아 '그린차네 카보우르 상', 2003 '인터내셔널 임팩 더블린 문학상'등을 그에게 안겨 주었다. 2002년에 발표한 <> 20여 개국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문명 간의 충돌, 이슬람과 세속화된 민족주의 간의 관계를 주제로 작품을 써 온 파묵은 2006 "파묵은 고향인 이스탄불의 음울한 영혼을 탐색해 가는 과정에서 문화들 간의 충돌과 얽힘을 나타내는 새로운 상징들을 발견"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다. 그 밖에 2005년에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평화상'과 프랑스 '메디치 상'을 수상했다.

 

 파묵은 세계적으로 '터키 작가'라기보다는 '이스탄불 작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제임스 조이스 하면 더블린을 떠올리고 카프카 하면 프라하를 연상하듯, 이제 오르한 파묵은 자연스레 이스탄불과 동일시된다. 이스탄불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다는 것. 그리고 현재까지 발표한 일곱 편의 장편소설 중 <>을 제외한 모든 작품의 공간적 배경이 이스탄불이라는 사실을 통해 그에게 왜 이런 수식어가 붙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현재도 이스탄불 중심가에 살고 있으며, 여름 집필실 또한 이스탄불 시에 속한 섬에 있다.

 

 파묵의 모든 소설에는 '삶의 의미'를 찾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는 '진정한 자아를 찾는 길'의 첫걸음인 셈이다. 이스탄불이나 터키 전역을 돌아다니는 등장인물들은 자신들의 내면세계에서 '자아', 결국 '삶의 의미'를 찾는다. 작가 자신도 이에 대해서 "이것은 우리 곁에, 어쩌면 멀리 떨어진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직감적으로 찾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파묵은 자신이 영향을 받은 많은 작가들 중에서도 탄피나르, 케말 타히르, 그리고 터키 현대 소설의 초석이라고 할 수 있는 오즈 아타이의 영향이 지대했다고 고백했다. 이들 작가들은 특히나 뚜렷한 역사의식을 작품에 담고 있는데, 파묵은 자신의 작품에서 심오한 사상 위에 서정적인 분위기를 덧칠하는 탁월한 기법을 구사한다. 그가 역사를 배경으로 소설을 쓰는 보다 근본적 이유는 그 자신이 역사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역사는 내게 순수하고 순결한 상상력을 부여해 준다."라고 말했다.

 

 자신이 소설을 쓰는 이유는 사회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일 뿐이라고 항상 강조해 온 파묵은 자신이 시도하는 새로운 형태의 소설을 통해 항상 독자들의 감응을 기대한다. 그는 '독자의 영혼에 어떠한 영혼을 미치고, 그들의 마음을 어떻게 빼앗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계산하면서 소설을 구성한다고 말했다. 파묵은 소설 쓰기를 인생과 동일한 것으로 본다. 소설 미학에 관해서는 소설에 사회적으로 풍부한 경험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내적 심오함에 중요성을 부여한다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

 

 

[참고]

1. 새로운 인생(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민음사, 1999)

2. 내 이름은 빨강(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민음사, 2004)

3. 이스탄불(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민음사 2008)

4. 순수박물관(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민음사 2010)

 

 

내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

 

1. 소설을 읽을 때 우리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

 

11 소설은 두 번째 삶입니다. 프랑스 시인 제라드 드 네르발이 말한 꿈처럼, 소설도 우리네 삶의 다채로움과 복잡함을 보여 주고, 우리가 아는 것 같은 사람, 얼굴, 물건 들로 가득 차 있으니까요. 마치 꿈에서 그러하듯이, 우리는 때로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가 접한 것들의 경이로움에 사로잡혀 우리가 어디 있는지도 잊고, 우리가 보고 있는 상상의 사건이나 삶들 사이에 있다는 착각에 빠집니다.

 

12 우리가 꿈을 꿀 때는 그 꿈이 진짜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꿈이니까요. 우리는 소설도 진짜라고 생각하며 읽습니다. 하지만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모순되는 상황은 소설의 본질에서 옵니다.

 

14 내가 앉았던 오렌지색 안락의자, 바로 옆에 놓여 있던 역겨운 냄새가 나는 재떨이, 카펫이 깔린 방, 골목에서 고함지르며 축구 하는 아이들, 멀리서 드려오는 뱃고동 소리가 점차 멀어지고, 내 앞에 새로운 세계가 단어들로, 문장들로 열렸습니다. 이 새로운 세계는 책장을 넘길수록 분명해져, 마치 특수 약품을 부을수록 서서히 드러나는 비밀 그림처럼 서서히 형태다 드러나고, , 그림자, 사건, 등장인물 들이 명백해지곤 했습니다.

 

15 나는 초조하고 들뜬 상태에서 단어들을 열심히 훑으며 한시라도 빨리 모든 것이 분명히 이해되기를 조급하게 바라곤 했습니다. 이러한 순간에는 마치 전혀 낯선 곳에 떨어진 겁먹은 동물처럼 나의 지각의 모든 문이 활짝 열렸고, 머릿속은 아주 빨리, 아주 다급하게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들어가려는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손에 들린 소설의 세부 사항에 전력을 다해 주의를 기울이고, 상상 속 단어들을 그림으로 전환하고, 소설에서 묘사하는 모든 것을 눈앞에 떠올리기 위해 발버둥치곤 했습니다.

 

15 이윽고 힘들여 집중한 노력이 결실을 맺어 내가 보고자 했던 진짜 커다란 풍경이, 마치 안개가 걷힌 후 커다란 대륙이 선명하게 드러나듯 내 앞에 펼쳐졌지요. 그러면 나는 소설에서 설명하는 것들을 마치 창밖 경치를 바라보듯 별로 힘들이지 않고 편히 바라보곤 했습니다.

 

15 독자는 소설 속 단어들을 읽는 게 아니라, 마치 어떤 풍경화 앞에 서 있은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여기에서 결정적인 것은 작가가 시각적인 세부 사항을 주의 깊게 묘사하듯, 독자도 상상 속에서 단어들을 커다란 풍경으로 전환한다는 점입니다.

 

18 소설을 읽기 시작하는 것은 풍경 속으로 들어가는 것임을 소설가들 대부분은 은연중에, 아니면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스탕달의 적과흑이 어떻게 시작하는지 떠올려 봅시다. 먼저 작은 도시 베리에르를 멀리서 바라봅니다. 이어서 도시가 자리잡고 있는 언덕, 붉은 기와를 얹은 뾰족한

지붕의 하얀 집들, 무성한 밤나무 수풀, 폐허가 된 요새를 보게 됩니다. 아래에는 두 강이 흐르고 있지요. 그러고는 제재소와 날염 공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18 소설 읽기의 진정한 희열은 세계를 외부가 아니라, 안에서, 그 세계에 속한 등장인물의 눈으로 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다른 그 어떤 문학 형식도 제공하지 못하는 속도로, 전체 풍경과 찰나의 순간을, 일반적인 생각과 특별한 사건 사이를 오갑니다.

 

18 우리는 풍경화가 그 안에 있는 인물의 생각, 감정, 지각을 반영하려는 의도로 그려졌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소설 속 풍경이 등장인물들의 정신 상태의 연장선이거나 일부라는 것을 감지하는 순간, 우리도 부드러운 전이로 이 등장인물들과 동일화됩니다.

 

19 지금 우리는 조금 전 차 밖으로 보았던 풍경 속에 있습니다. 산이 보이고, 강물의 차가움과 숲의 향기도 느껴집니다. 다른 주인공들과 이야기하면서 소설 속 세계로 더 깊숙이 걸어 들어갑니다. 소설 언어는 서로 동떨어져 있는 모든 것을 연결하고, 주인공의 외면과 머릿속을 하나의 시선으로 볼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줍니다.

 

19 우리 머릿속은 풍경에서 사무로, 등장인물에서 등장인물의 생각으로, 그들이 만진 사물로, 사물을 통해 그들이 떠올린 추억으로, 다른 등장인물로, 그리고 또 전체적인 생각으로 한시도 쉬지 않고 오갑니다.

 

19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운전하면서 버튼을 누르고 페달을 밟고 기어를 변환하고 수많은 규칙에 따라 운전대를 좌우로 돌리고 도로 표지판을 읽고 의미를 해석하며 교통 신호를 살피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운전자와도 같습니다.

 

20 이 운전자 비유는 단지 독자뿐만 아니라 소설가에게도 적용됩니다. 어떤 작가는 소설을 쓸 때 자신이 사용하는 기교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머릿속에서 하는 온갖 작업과 계산도 잊고, 소설 예술이 제공한 기어, 핸드 브레이크, 버튼 들을 사용하고 있으며, 더욱이 이중에 새로 발명된 것도 있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지만, 아주 자연스럽게 저절로 씁니다.

 

20 소설 창작은 소박한 동시에 성찰적인 일입니다.

 

20 1795년에 독일의 시인이자 작가인 프리드리히 실러가 소박한 문학과 성찰적인 문학이라는 유명한 논문에서 처음으로 제기했습니다.

 

21 소박한 시인들은 자연과 지극히 가깝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연 그 자체라고 할 수도 있지요. (자연처럼 차분하고 가혹하며 슬기롭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시를 자연스럽게 거의 생각하지 않고 씁니다. 말의 사상적, 도덕적 결과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써 버립니다. 그들에게 시는 현대인과 현대 시인 들과는 반대로 그들을 떠나지 않는 자연이 자연스럽게 남긴 어떤 영향 같은 것입니다.

 

22 소박한 시인은 말이, 단어가, 시가 전체 풍경을 규명하리라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그 세계를 대변하고 제대로 묘사하여 그 의미를 도출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그 의미는 시인과 동떨어져 있거나 그렇게 꼭꼭 숨겨진 것도 아닙니다.

 

23 실러에 의하면 성찰적인 시인은 무엇보다도 먼저 단어들이 실재를 규명할지, 실재에 도달할지, 말들이 그가 원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지 등등의 문제로 불안해합니다. 이렇나 이유로 그들은 자신이 쓴 시를 너무나 잘 알고 있고, 사용한 방법과 기법 들의 인위성도 자각하고 있습니다. 소박한 시인은 자신이 인지하는 세계와 세계 자체를 그다지 구별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현대적이고 성찰적인 시인은 자신이 지각하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지각마저 의심합니다. 게다가 자신이 지각한 것을 시로 옮길 때도 교육적, 도덕적, 사상적 원칙들로 고민합니다.

 

25 이 작가들은 단지 인간의 경험만을 늘어놓지 않고, 서술 방법에 대해서도 지극히 고민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현대 터키나 현대 이스탄불의 삶을 제대로 서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26 소박한 소설가와 소박한 독자는 달리는 차 안에서 창밖으로 바라본 것만으로도 그 나라에 대해 알고, 그 나라 사람들을 이해한다고 진심을 믿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는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의 힘을 믿기 때문에, 풍경에 대해, 사람에 관해 얘기하고, 성찰적인 소설가의 질투를 불러일으킬 만큼 강력한 견해를 말할 수도 있습니다.

 

26 반대로 성찰적인 소설가는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한정되어 있는 데다가 유리에 진흙까지 묻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고는 베케트 스타일의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아니면 나나 다른 많은 현대 소설가들처럼, 자동차 운전대, 버튼, 진흙 묻은 창, 기어를 장면의 일부로 그리지만, 우리가 본 것들은 소설의 관점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절대 잊지 않습니다.

 

26 소설을 읽을 때 우리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1.     우리는 전체 풍경을 바라보고, 이야기를 따라갑니다. 스페인의 사상가이자 철학자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돈키호테에 대해 썼던 책에서 모험 소설, 기사도 소설, 싸구려 소설 등은 그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 궁금해서 읽으며 (이 리스트에 탐정 소설, 가벼운 연애 소설, 스파이 소설 등을 덧붙일 수 있을 겁니다.) 현대 소설은 (오늘날 우리가 순문학 소설이라고 부르는) 분위기 때문에 읽는다고 말합니다. 가세트에 의하면, 이러한 분위기 소설은 아주 적은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는 풍경화같기 때문에 더 가치가 있습니다.

 

27 이야기를 따라 가면서 우리가 마주치는 것들이 어떤 의미가 있고 주제가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하면서 읽습니다.

 

27 2. 우리는 머릿속에서 단어를 그림으로 전환합니다. 소설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소설이 단지 어떤 이야기인 것만은 아닙니다. 이야기는 수많은 사물, 소리, 대화, 상상, 추억, 지식, 생각, 사건, 장면 묘사 들을 통해 서서히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소설을 읽으며 희열을 느낀다는 말은 단어들을 머릿속에서 그림으로 전환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의미입니다.

 

28 3.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작가가 설명한 것 가운데 어디까지가 경험이며, 어디까지가 상상인지 궁금해합니다. 특히 소설이 우리에게 놀라움과 감탄 그리고 당혹감을 불러일으키는 부분에서 이런 의문이 들곤 합니다. 소설 읽기란 소설에 가장 깊이 빠졌을 때조차 어디까지가 상상이며, 어디까지가 경험일까?’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하는 것입니다.

 

29 4. 우리는 계속해서 궁금해합니다. 현실이 이러한 것일까? 소설에서 설명하고, 보여주고, 묘사한 것들이 지금 우리가 사람을 통해 아는 현실과 같은 것일까?

 

29 5. 우리는 이러한 낙관주의 아래 적절한 단어, 정확한 비유, 상상과 이야기의 힘, 문장의 축적, 산문의 비밀스럽고 솔직한 시와 음악을 가늠하고 음미합니다. 스타일이 주는 희열과 과제는 소설의 심장부에 있지 않고, 심장부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29 6. 우리는 주인공들의 선택과 행동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내리기도 하고, 동시에 주인공에 대한 도덕적 판단들을 통해 작가를 판단하기도 합니다. 소설에서 도덕적 판단은 피할 수 없는 늪입니다. 다만 소설 예술은 인간을 심판할 때가 아니라, 이해할 때 가장 고매하고 탁월한 성과를 낸다는 것을 잊지 말고, 거기에 너무 휩쓸리지 않도록 합시다. 소설을 읽을 때 도덕은 풍경의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우러나와 소설 주인공을 겨냥해서는 안 됩니다.

 

30 7. 우리 머릿속에서 이 모든 작업이 동시에 행해지는 사이, 한편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깊은 이해에 도달했는지를 떠올리며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30 소설이 오로지 우리를 위해 쓰인 것 같은 느낌, 이 달콤한 착각이 마음속에서 천천히 솟아오릅니다.

 

30 작가와 우리 사이에 생기는 이런 친근감과 은밀함은 책에서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또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 나와도 별로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가는 데 일조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작가와 어느 정도 공범 관계가 됩니다.

 

30 우리는 이야기를 믿기 위해, 작가가 말하는 모든 것을 그가 원하는 만큼 믿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작가의 어떤 집요함, 고집, 그리고 강박관념이 옳지 않게 보일지라도, 책에 관한 믿음을 잃지 않고 계속 읽고 싶기 때문입니다.

 

30 8. 우리 기억도 한편으로 전혀 쉬지 않고 열심히 작동합니다. 작가가 우리에게 보여 준 세계에서 의미와 독서의 즐거움을 찾기 위해 우리는 소설의 감춰진 중심부를 찾습니다. 그러러면 소설의 모든 세부 사항을, 마치 나무의 모든 잎사귀를 기억하는 것처럼,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31 9. 우리는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 소설의 감춰진 중심부를 찾습니다. 이것이 바로 소설을 읽을 때 우리 머릿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소박하게 또는 성찰하면서 의도적으로 가장 많이 하는 작업입니다.

 

32 소설에 중심부가 있다고 믿으면 중요하지 않게 여겼던 세부 사항이 중요할 수 있고, 소설 표면에 있는 모든 것에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있다고 느끼게 됩니다. 소설은 죄책감과 피해망상 그리고 불안감을 향해 열려 있는 서사입니다. 소설을 읽을 때 느끼는 심오한 감정 또는 어떤 삼차원 세계에 있는 것 같은 착각도 이 감춰진 중심부의 존재 때문입니다.

 

33 삶의 본질과 관련된 가장 심오하고 가장 귀중한 지식에, 철학의 난해함이나 종교의 사회적 압력에 시달리지 않고도, 우리의 경험에서 출발하여 우리 자신의 이성으로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평등하며 가장 민주적인 희망입니다.

 

35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나는 소설의 중심부가 주는 기본적인 지식, 그러니까 세계가 어떤 곳이고 삶이 어떤 것이라는 지식을, 단지 중심부뿐만 아니라, 소설의 모든 곳에서 보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좋은 소설이란 모든 문장이 우리에게 진정 위대한 지식을, 이 세상에서 존재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이며 감각의 본질이란 어떤 것인지를 느끼게 해 주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여행이, 그러니까 도시에서, 거리에서, 집에서, 방에서, 자연에서 지나가는 우리의 인생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불확실한, 감춰진 의미를 찾는 과정이라는 것을 소설에서 배웠습니다.

 

2. 파묵 씨, 당신은 이런 것들을 정말로 경험했나요?

 

40 2. “하지만 나는 절대로 나의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 내가 케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시키지 못할 겁니다.”

이 두 번째 문장은, 독자들을 설득하는 것이 나에게(그리고 다른 많으 소설가들에게도) 어려울 거라는 의미일 뿐만 아니라 내가 주인공 케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노력을 할 의향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49 소설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작은 관찰로부터 출발하여, 처음에 약속했던 감춰진 진실로, 중심부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이 관찰을 감각적인 경험이라고 합시다. 창문을 열 때, 커피를 홀짝거릴 때, 계단을 올라 갈 때, 도시의 인파를 헤치고 들어갈 때, 교통 체증에 걸려 차 안에서 지루해할 때, 손가락을 문에 끼였을 때, 안경을 잃어버렸을 때, 추위에 떨고 있을 때, 비탈길을 올라갈 때, 여름에 처음으로 바다에 들어갈 때, 아름다운 여자와 만났을 때, 어렸을 때 먹던 비스킷을 다시 먹었을 때, 전혀 알지 못했던 꽃의 향기를 처음 맡았을 때, 키스할 때, 난생처음으로 바다를 보았을 때, 질투심에 휩싸였을 때, 차가운 물 한 잔을 마셨을 때 경험한 고유한 느낌이 다른 사람들의 비슷한 경험들과 겹쳐진다는 사실은 소설을 이해하고 즐기는 데 바탕이 됩니다.

 

50 눈 오는 밤 안나 카레니나가 기차에서 책을 읽으려고 애쓰는 부분을 읽으면서 우리는 이와 비슷한 감각적인 경험을 했다는 것을 떠올립니다. 우리도 어쩌면 밖에 눈이 올 때 야간 열차를 타고 여행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어쩌면 머리가 이러저런 상념으로 가득 차 있어서 소설을 제대로 읽지 못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51 세부 사항들이 정확하고 분명하고 아름답게 묘사될 때면 우리는 맞아, 정확히 이래, 바로 이거야.”라고 감탄합니다. 이러한 묘사를 통해 독자들은 상상 속에서 장면을 떠올리고 작가에게 열광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가 좋아하는 작가가 모든 것을 마치 실제 경험한 것처럼 설명할 수 있으며, 전혀 경험하지 않았던 것도 실제 경험한 것처럼 우리를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도 느낍니다.

 

52 우리가 어떤 소설에 전적으로 몰입했을 때, 소설 표면에 있는 복잡한 풍경 가운데 깊숙이 내재된 의미를 찾고, 주인공들의 감각적인 경험으로부터(사람들의 대화와 일상의 사소한 세부사항들을 통해 세계가 그들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 발견하면서) 즐거움을 느낄 때 작가의 존재를 잊을 수 있습니다.

 

52 소설 예술의 강력한 특징은, 우리가 작가를 가장 많이 잊는 순간, 그가 텍스트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작가를 잊는 순간, 작가의 세계가 자연스럽고 실재라고 느끼며, 작가의 거울을 완벽하고 자연스러운 거울(여기서 유행이 지난 비유를 사용하고 싶습니다.)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물론 완벽한 거울은 없습니다. 단지 우리의 기대에 완벽하게 부응하는 거울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소설을 읽기로 결심한 모든 독자는 자신의 취향에 따라 하나의 거울을 선택합니다.

 

53 유사성은 우리로 하여금 문학을 통해 모든 인류를 상상하게 하고, 세계 문학에 대한 생각으로 이끕니다. 하지만 마신 커피 잔을, 떠오르는 태양을, 첫사랑을 모든 소설가가 각기 다르게 경험하고, 각기 다르게 표현합니다. 이러한 상이성은 소설가의 모든 등장인물에게 이어져, 작가 고유의 문체와 서명을 이루는 배경이 됩니다.

 

55 나의 독자들이 나의 등장인물들의 모험을 보며 내가 경험한 일이라고 생각해도 나는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실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이 주장에 반박하여 나를 보호할 허구에 관한 이론이 내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55 모든 소설가의 작품은 삶에 관한 수많은 작은 관찰들을, 개인적인 감각에 의거한 삶의 경험들을 전시하는 별자리와도 같습니다. 문 하나를 여는 것에서 옛 애인을 기억하는 것까지, 인간적인 온갖 세부 사항을 포괄하는 이 감각적인 순간들은 소설에서 다른 그 어떤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영감의 순간들을, 개인적인 창조적인 지점들을 구성합니다. 덕분에 작가가 경험에서 직접 얻은 지식 또는 흔히 말하는 소설의 세부 사항이라는 것도 상상력과 분리하기 어려운 형태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56 소설에서 어느 부분이 경험한 것이고, 어느 부분이 상상한 것인지에 대한 모호성 역시, 독자와 작가 사이의 거울들 사이로 떨어지는 상황을 창출합니다.

 

56 작가는 한 문장을 쓸 때, 독자가 자신이 그런 상상을 했다고 생각하리라(실제 그렇든지 아니든간에) 추측합니다. 독자도 이 추측을 추측하며 계속 읽어 나갑니다. 작가도 어차피 자신이 추측하리라는 것을 독자가 추측하리라 추축하며 그 문장을 씁니다. 독자도 마찬가지로….

 

3. 소설의 캐릭터, 플롯, 시간

 

62젊은 시절 나는 끊임없이 소설을 읽으며 자유와 자신감이라는 감각을 충격적으로 경험했습니다.

 

62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필연적으로 이 지점에서 풍경으로 들어갑니다. 왜냐하면 소설 읽기는 세상을 등장인물의 눈과 정신과 영혼을 통해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62 등장인물의 눈으로 볼수록 세계는 우리에게 더 친근하게 느껴지고 쉽게 이해됩니다. 소설 예술이 거부할 수 없는 힘은 이 친근함에서 나옵니다. 하지만 진짜 주제는 소설 주인공들의 캐릭터가 아니라, 세계의 속성입니다. 주인공들의 삶, 세상 속에서 그들이 차지한 위치, 그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며 순간순간 보고 느끼는 방식 등이 순문학 소설의 소재가 됩니다.

 

63 우리는 이 사람들의 외모보다는 캐릭터’, 더 정확히 말하자면, 기질이나 습관을 궁금해합니다. 우리 부모님의 캐릭터가 우리에게 얼마나 영향을 끼치는지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물론 그들의 재산 정도, 교육 정도에 더 많이 좌우되기는 합니다만.)우리가 누구와 결혼하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 삶에서나 이야기에서나(제인 오스틴 시대에서 오늘날까지, 안나 카레리나에서 오늘날의 대중 영화까지)필수적인 소재입니다.

 

63 호메로스가 보기에 캐릭터는 항상 한결같고 명확한 어떤 속성, 출중한 특징입니다. 겁에 질려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순간에도 오디세이는 숭고한 가슴을 지닌 사람입니다.

 

64 오늘날 매일 수천만 명이 읽는 신문의 별자리 운세는 같은 시기에 태어난 사람들은 같은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는 순진한 관점에 의거하고 있습니다.

 

64 우리는 삶이 아니라 주인공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도스토옙스키를 읽습니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라는 위대한 소설을 읽고 논쟁하는 것은 세 형제와 이복동생을 통해 네 가지 인간 유형에 대해, 네 가지 캐릭터에 대해 논쟁하는 것입니다.

 

65 포스터는 19세기 소설의 성공과 특징을 논한 소설의 이해라는 대단히 영향력 있는 책에서 소설 속 주인공들의 캐릭터와 다양성이라는 주제에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 그들을 분류하고 그들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설명했습니다.

 

67 소설가들이 생각하기에, 그들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임무는 주인공을 발명하는 것입니다! 작가가 성공적으로 주인공을 만들고 나면, 주인공이 소설가에게 소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연극의 프롬프터처럼 속삭여 준다는 것입니다.

 

68 소설은 길어질수록, 모든 세부 사항을 계획하고, 기억하고, 소설의 중심부를 창조해 내기가 어려워집니다.

 

69 하지만 소설 캐릭터보다 더욱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들이 어떻게 주변 풍경과 사건과 배경에 녹아들어 가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69 한 번도 말로 표현된 적 없는 삶의 어떤 지대를 탐색해 나와 같은 세상에 사는 많은 사람이 겪는 상황, 생각, 느낌을 처음으로 단어로 옮기는 것입니다.

 

70 소설에서 이야기 또는 플롯은 설명하고 싶은 여러 상황을 연결하는 어떤 선이며, 주인공은 이 상황들을 거치며 실체가 구체화되는 한편, 이러한 상황들이 잘 설명되도록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70 소설 예술에서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소설 주인공들의 개성이나 캐릭터가 아니라, 소설 속 세계가 그들 눈에 어떻게 보이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이해하고 도덕적 판단을 내리려면, 우선 세계가 그 삶의 관점에서 어떻게 보이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지식뿐만 아니라 상상력도 필요합니다. 소설가로서 나의 주된 임무는 모든 등장인물과 되도록 일일이 동일화되고, 그들 눈에 보이는 것이 내 소설의 세계라는 것을 절대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71 주인공들과 일일이 동일화될 때 나의 심리 상태는 어린 시절 혼자 놀 때와 비슷합니다. 모든 아이가 그러하듯 나도 나 자신을 다른 사람 위치에 놓고 상상했습니다.

 

71 소설을 써서 생활비를 벌기 시작한 이래 25년이 흘렀지만, 어린 시절에 하고 놀았던 놀이와 유사한 직업을 가지게 되어 참 다행이라고 종종 생각합니다. 소설 창작에는 수많은 어려움이 있고 대단한 노력이 필요하지만 내게는 항상 아주 즐거운 일입니다.

 

71~72 내 이성의 한편에서 나의 주인공들처럼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면서 다른 사람이 되는 일로 바쁠 때, 그리하여 점차 그 인물 속으오 들어가려 할 때, 내 이성의 다른 한편에서는 소설 전체를 주의 깊게 살피고, 전반적인 구성 요소를 관장하고, 독자가 이야기와 인물들을 어떻게 읽고 분석할지를 계산하며, 내가 쓴 문장들이 어떤 영향을 끼칠지 예측하려고 애씁니다. 이 모든 세세한 계산들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어린애 같은 천진함과는 반대되는, 자신을 자각하는 상태가 요구되며, 이는 곧 소설의 인위성, 즉 소설가의 성찰적인면과 연결됩니다. 소설가가 지극히 소박하면서 동시에 지극히 성찰적일 수 있다면, 그만큼 좋은 작가가 될 것입니다.

 

72 소설 예술은 우리 자신에 대해 다른 사람처럼, 다른 사람들에 대해 우리 자신처럼 말할 수 있는 기량입니다.

 

73 소설가는 오로지 주인공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지 않고, 서서히 주인공과 닮아가기 시작합니다! 나 자신의 관점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소설 쓰기를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합니다. 소설가로서 나는 다른 사람들과 동일화되고 나 자신 밖으로 나가, 이전에 내가 소유하지 않았던 캐릭터를 가졌습니다. 이렇게 35년 동안 소설 쓰면서 나는 다른 사람의 위치에 나 자신을 놓으며 내 영혼을 길들였습니다.

 

73 자신 밖으로 나가,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을 전체적으로 보고, 가능한 한 많이 보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사람과 동일화된다는 것, 이런 점에서 소설가는 광대한 풍경의 시적인 면을 포착하기 위해 높은 산으로 올라간 옛 중국 화가와도 닮았습니다.

 

73~74 소설을 구성하는 것은 전체가 보이는 상의 어떤 관점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이 상상의 관점에서는 소설의 중심부도 가장 잘 감지됩니다.

 

74 소설 주인공이 이 거대한 풍경 속에서 배회하고, 머물고, 한데 뒤섞여 그 일부가 되는 순간, 그는 불멸이 됩니다. 안나 카레니나를 불멸로 만든 것은 그녀 영혼의 동요나 우리가 캐릭터라고 부르는 특성의 집합이 아니라, 그녀가 깊이 침잠해 들어가 모든 세부적인 것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일 수 있었던 광활하고 풍부한 풍경, 즉 러시아 사회 전체입니다.

 

74 주인공은 독자들의 머릿속에 전체 풍경을 일깨워 주는 역할을 합니다. 대개는 내가 풍경이라고 불렀던 소설의 윤곽이나 대략적인 줄거리가 우리가 캐릭터라고 부르는 특성의 집합이 아니라, 그녀가 깊이 침잠해 들어가 모든 세부적인 것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일 수 있었던 광활하고 풍부한 풍경, 즉 러시아 사회 전체입니다.

 

74 주인공은 독자들의 머릿속에 전체 풍경을 일깨워 주는 역할을 합니다. 대개는 내가 풍경이라고 불렀던 소설의 윤곽이나 대략적인 줄거리가 우리 뇌리에 남지만, 우리는 주인공을 기억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해서 주인공의 이름은 우리 상상 속에서 소설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풍경의 이름이 됩니다.

 

75 소설을 쓸 때 부딪치는 과제와 진정한 즐거움은 소설 주인공의 행동을 통해 캐릭터를 파악할 때 얻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을 소설 주인공과 동일시하여, 아니면 적어도 우리 영혼의 일부만이라도 동일시하여 잠시나마 나 자신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이 되고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볼 때 비로소 느낄 수 있습니다.

 

76 안나가 불멸이 된 것은 이 모든 사소한 세부 사항이 옳았기 때문입니다. 창밖에 눈이 오는 밤, 객차 안 모습, 안나가 읽었거나 읽으려고 애썼던 소설, 그 모든 것을 그녀가 보고 이해하고 느낀 만큼 우리도 보고 이해하고 느낍니다. 소설 예술에서 가장 독특한 면은, 주인공들이 모든 감각으로 느끼고이해하는 대로 세상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77 소설가들은 먼저, A, B, C 라는 소재를 설명하고 싶어합니다. 그런 후에 이 소재들을 설명하는 데 가장 적합한 주인공들을 상상합니다. 나는 항상 이렇게 해 왔습니다. 다른 모든 작가도 인지하든 그렇지 못하든 이렇게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78 우리가 플롯 또는 서사 구조 또는 사건의 연속 또는 이야기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설명하고 서술하고자 하는 지점들을 연결하는 하나의 선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 선은 소설의 재료나 내용, 그러니까 소설 그 자체가 아니라, 소설을 구성하는 텍스트 전체에 흩어진 수천수만 개의 작은 점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78 한 권의 책을 만드는 이 점들 가운데 가장 뚜렷하고 가장 잊히지 않은 것들을 신경관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자처럼 이 점들 역시 나뉘거나 다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다고 나는 느끼곤 했습니다.

 

79 나는 순수 박물관을 집필하면서 아리스토테레스의 자연학에서 출발하여, 이 나뉠 수 없는 점들과 시간을 만든 순간들 사이에 어떤 관계를 맺으려고 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나뉘거나 다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원자들이 있듯, 나뉠 수 없는 순간들이 있고, 이 수많은 순간을 연결한 일직선을 시간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한 소설에서 사건의 플롯은 이 크고 작은 나뉠 수 없는 단위들을 합친 선입니다. 소설 주인공은 당연히 이 선, 즉 플롯이 필요로 하는 드라마와 사건의 전개를 정당화할 수 있는 정신과 캐릭터와 심리적 특징의 소유자입니다.

 

79 소설 예술의 내부 구조에서 비롯된 황금의 법칙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야기와 별로 관계가 없고 사람이나 사물이 없는 풍경 묘사라 할지라도 소설 독자들은 주인공의 감정적, 정신적 세계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대 차창 밖을 내다본 안나 카레니나의 눈앞에 펼쳐지 장면은 그냥 우연일 수 있습니다. 기차는 어떤 풍경이든 지나갈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소설을 읽을 때, 안나의 창밖으로 떨어지는 눈송이를 보며 우리는 젊은 여성의 심리 상태를 짐작합니다.

 

80 좋은 소설에서는, 그러니까 위대한 소설에서는 풍경이나 다양한 사물에 대한 묘사, 짧은 일화, 약간의 일탈, 이 모든 것이 소설 주인공의 심리 상태, 기질, ‘캐릭터를 우리에게 환기시킵니다. 어떤 소설을 나뉠 수 없는 신경관들로, 작가에게 영감을 주는 순간들로 이루어진 바다라고 상상해 봅시다. 이때 각각의 점 안에는 소설 주인공의 영혼의 일부가 들어 있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맙시다.

 

80 그래서 소설의 시간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한 것처럼 객관적이지도 않고 일직선도 아닙니다. 주인공들의 주관적인 시간일 뿐입니다.

 

81 어떤 소설을 읽을 때 공통의 객관적 시간의 존재를 느끼는 것은 어떤 커다란 풍경화를 앞에 두고 모든 것을 동시에 보면서 느끼는 즐거움과 비슷한 감정을 독자에게 줍니다.

 

82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과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입니다. 우리는 이 두 소설에서 모두가 공유하는 객관적 시간의 존재를 아주 자주 느낍니다. 그러나 이 두 소설에서 깊은 곳에 있는 감춰진 중심부는 역사가 아니라 삶 그 자체, 그리고 삶의 구조와 관련이 있습니다.

 

82 『안나 카레니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완벽한 소설 가운데 하나지만, 톨스토이가 퇴고를 거듭하여 소설을 완성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이 소설이 굉장치 공들여 쓴 소설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84 소설을 통해 지금까지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우리 삶의 작고 세부적인 면을 이해하는 것은, 그것들이 전체 풍경에서 그리고 역사의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띠고 자리 잡을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자신의 감정과 우리 삶의 작고 세부적인 것을 통해 전체 풍경에 들어간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에게 모든 것을 이해하는 능력의 자유가 생깁니다.

 

84 나에게 소설 쓰기는, 풍경 속에서(세계에서) 소설 캐릭터들의 심리 상태, 감정, 생각 등을 포착해 내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내가 앞서 언급한 소설을 구성하는 그 수천 개의 작은 점들을 일직선이 아니라, 지그재그를 그리며 연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항상 느낍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소설 속에 있다면 사물, 가구, , 거리, 나무, , 풍경, 창밖 경치,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주인공의 생각과 느낌의 일부로 보입니다. 소설 주인공의 캐릭터는 소설의 전체 풍경속에서 형성됩니다.

 

4. 단어, 그림, 사물

 

90 도스토옙스키 작품을 읽고 나서 우리 머리에 남는 사물이나 이미지, 장면은 별로 없습니다. 톨스토이의 세계가 섬세하고 감각적으로 배치된 사물들로 들끓고 있을 때, 도스토엡스키의 방은 텅 비어 있습니다.

 

90 나에게 호메로스는 시각적작가입니다. 그의 작품을 읽을 때면 수많은 이미지가 눈앞을 스쳐 지나갑니다. 나는 이야기 자체보다는 이 이미지들을 더 좋아합니다. 하지만 내가 『내 이름은 빨강』을 쓸 때 거듭해서 읽었던 위대한 페르시아 서사시 『샤 나메』의 작가 피르도시는 기본적으로 플롯과 우여곡절에 의존하는 단어적작가입니다.

 

92 ‘시각적/단어적의 이분법을 이해하기 위해 잠시 눈을 감아 봅시다. 그리고 어떤 주제에 집중하여 아무 생각이나 떠올려 봅시다. 그런 다음 눈을 뜨고 우리 자신에게 물어봅시다. 방금 생각할 때 우리 머릿속에 단어들이 지나갔어요, 아니면 그림들이 지나갔나요? 둘 중 하나만 지나갔을 수도 있고 둘 다 지나갔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때로는 단어들로, 때로는 그림들로 생각한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대부분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옮겨 갑니다. 나의 목표는 시각적/단어적의 이분법을 통해 문학 텍스트를 읽을 때면 우리 머리에 있는 이 두 중심부 가운데 하나가 더 많이 작동하기 마련임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92 소설은 기본적으로 시각적 문학입니다. 소설은 주로 우리의 시각적 지능, 즉 사물들을 눈앞에 떠올리고 단어를 머릿속에서 그림으로 전환하는 능력에 호소하여 우리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92 소설은 세상이 어떻게 보이는지에 관한 것이기도 하지만, 냄새, 소리, , 감촉에 의해 일깨워진 느낌들도 다른 그 어떤 문학 형식도 흉내 낼 수 없는 풍부함으로 묘사합니다. 소설의 전체 풍경은 주인공들이 보는 것 외에도 세상의 소리, 냄새, , 감촉의 순간들이 있어 활기를 띱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존재하면서, 매 순간 우리 나름대로 느꼈던 경험들 가운데 가장 뚜렷한 것은, 당연히, 보는 것입니다.

 

92 소설 쓰기는 단어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고, 소설 읽기는 다른 사람이 단어를 가지고 우리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는 것입니다.

 

93 ‘단어로 그림을 그린다.’는 말은, 단어로 독자의 머릿속에 아주 뚜렷하고 확실한 이미지를 불러일으킨다는 의미입니다 대화 장면을 제외하고, 소설의 문장이나 단어 들을 쓸 때면 나는 항상 머릿속에 어떤 그림, 어떤 이미지부터 떠올립니다. 나의 일은 언제 내 머릿속에 잇는 그림을 선명하고 확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93 나는 앉아서 본격적으로 집필에 들어가기 전에 다른 소설가들에 비해 많은 계획을 세우고 비교적 주의 깊게 작품을 수많은 부분들로 나눠 구상합니다. 다른 작가들의 자서전과 회고록을 릭고 여러 소설가들과 이야기를 해 보고 나서 알게 된 사실입니다. 나는 한 장, 한 장면, 한 정경을(나도 모르게 미술용어를 쓰고 있군요!)쓰기 전에 먼저 눈앞에 상세하게 떠올립니다.

 

93 나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특정 장면을 눈앞에 떠올리는 과정입니다. 만년필로 써 나가고 있는 종이를 보는 것만큼이나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면서, 내가 쓸 문장을 한 편의 그림처럼, 내가 쓸 장면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앞에 떠올리려고 애씁니다.

 

93 결국에는 내가 설명하려는 장면이 가장 함축적이고 강력한 방법으로 표현될 수 있는 부분을 상상하고 강조하려고 노력합니다. 시각적 상상력으로 내가 슬 장을 한 장면 한 장면, 한 문장 한 문장 구상하면서, 나는 단어를 통해 효과적으로 표현될 세부 사항에 초점을 줍니다.

 

94 내가 살면서 경험한 세부 사항을 기억해 내고 눈앞에 떠올리지만, 그것을 단어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포기할 때도 있습니다. 이 무능함은 주로 나의 경험이 단지 나 혼자만의 것이라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플로베르가 자신이 글을 쓸 때 모색했다고 말했던 가장 적절한 단어는 내가 상상했던 이미지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을 단어입니다. 소설가는 상상했던 것을 가장 잘 표현할 단어를 찾는 데 그치지 않고, 가장 잘 표현할 수 있을 것을 상상하는 법도 배웁니다.

 

94 소설가는 눈앞에 떠올린 이미지가 오로지 단어로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상상하는 법을 배울수록 머릿속에 있는 시각적, 단어적 사고의 중심부들이 서로 가까워진다는 것을 느낍니다. 어쩌면 이 중심부들은 서로 맞물려 있는지도 모릅니다.

 

94~95 나는 호라티우스가 호메로스도 형편없는 구절을 썼다는 의견을 피력한 후 갑자기 말해 버린 이 유명한 말 다음에 이어진, 별로 알려지지 않은 말도 좋아합니다.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것과 한편의 소설을 읽는 것 사이의 유사성을 연상시키기 때문입니다. “시는 그림과도 같다. 어떤 것은 가까이에서 보면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고, 어떤 것은 멀리 떨어져서 보면 영향을 끼친다. 어떤 그림은 어두운 구석을 좋아한다. 어떤 그림은 비평가의 날카로운 평가를 두려워하지 않으므로 꽤 밝은 곳에서 감상해야 한다. 어떤 그림은 한 번에 마음에 들어오고, 어떤 그림은 열번 정도 보았을 때 사람에게 즐거움을 안겨 준다.”

 

96 사실 풍경화를 세부까지 즐기기 위해서는 호라티우스가 말한 것처럼 그림을 열 번 보고, 가까이에서 봤다가 멀리 떨어져 보고, 세부 묘사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한동안 그림 앞에서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96 소설들도 마치 그럼처럼 우리에게 박제된 순간들을 보여 줍니다. 하지만 소설 속의 작고 나뉠 수 없는 순간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순간들처럼)하나가 아니라, 수천수만 개가 있습니다. 소설 읽기는 단어들로 묘사된 이 순간들(‘시간’)을 시각화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상상 속에서 시간을 공간으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97 한 폭의 그림이 우리에게 박제된 어떤 순간을 보여 준다면, 소설은 연달아 줄지어 있는 수천 개의 박제된 순간을 제시합니다. 소설에 있는 각각의 순간이 전체 풍경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어떻게 소설의 중심부로 이어질지 궁금해하면서 소설을 읽다 보면 손에 땀을 쥐게 됩니다. 작가는 왜 그 순간에 창밖에 내리는 눈송이들을 우리에게 보여 준 걸까요? 침대차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준 이유는 뭘까요?

 

98 내가 스물두 살 때 그림 그리는 것을 그만두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소설이 독자들을 끌어들이는 정도가 그림에 비해 훨씬 더 깊기 때문입니다!

 

99 ‘ekphrasis’는 우선 좁은 의미로 시각 예술 작품, 즉 그림이나 조각 같은 예술품을 시에서 묘사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99 고전 문학에서 쓰인 ‘ekphrasis’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예는 호메로스가 『일이아스』의 18권에서 자세하게 설명한 아킬레우스의 방패입니다. 호메로스가 이 방패에 새겨진 별, 태양, 도시, 사람 들을 어찌나 잘 설명해 놨는지, 이 묘사는 온 세상과 우주를 단어로 그려 낸 그림으로서, 방패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문학 텍스트로 변했습니다.

 

100 특히 『내 이름은 빨강』에서는 그림 속 주인공들뿐만 아니라, 색과 사물 들까지 말을 하도록 했는데, 나는 어떤 세계(그림을 통해 설명하고 다시 구성하고 싶었던)속으로 들어감으로써 독자들 역시 그곳으로 끌어들일 수 있음을 느꼈습니다.

 

100 우리에게 과거는 옛 건축물이거나 옛 텍스트거나 옛 그림입니다. 굳이 글이 아니라 그림에서 출발하더라도 소설을 위해 필요한 밀도로 과거를 상상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나는 이스탄불 톱카프 궁전 보물창고에 보관된 16세기 말 책과 고문서 들 속에 있는 그림들을(대부분 오늘날의 이란이나 아프가니스탄에서 생산된)세세하게 묘사하고, 나 자신을 이 세밀화 속 영웅, 사물, 심지어는 악마와도 동일시함으로써 어떤 세계를 재현해 보려 시도했습니다.

 

101 소설을 쓰고 싶다는 창조적이 충동은 시각적인 것들을 단어들로 표현하려는 의욕과 열정에 의해 더욱 활기를 띱니다. 당연히 모든 소설의 배후에는 개인적, 정치적, 도덕적 충동 또한 도사리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충동들은 다른 방법으로, 예를 들면 회고록이나 인터뷰, , 언론 노출 등으로도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102 아나운서가 자신이 보고 있는 멋진 플레이를 묘사하면, 우리가 아주 잘 알고 있는 스타디움에서 축구 선수 누구가 경기장 어디로 뛰어가고 있고, 공이 지금 상대 팀 골대로 어떤 각도로 날아가 있는지를 단어를 통해 우리 눈앞에 떠올리며 마치 실제로 경기를 보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하도 들어서 해설자의 목소리에, 솜씨에, 단어 선택에 익숙해져서(마치 우리가 좋아하는 소설가의 작품을 읽을 때처럼) 그가 쓰는 단어들을 쉽게 그림들로 전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103 톨스토이는 상트페테르부르크행 기차에서 안나의 감정이 어떠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가 그녀의 감정을 느끼도록 그림을 그립니다. 왼쪽 창문에서 보이는 눈, 침대차 안 움직임, 추운 날씨 등등. 톨스토이는 안나가 빨간 손가방에서 어떻게 소설책을 꺼냈고, 어떻게 그 조그만 손으로 무릎에 작은 방석을 올려놓았는지도 묘사합니다.

 

103 머릿속에서 톨스토이의 단어들을 안나가 보았을 그림들로 전환하면서 우리는 그녀의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107 발자크에게 사물을 묘사하고 실내 장식을 살펴보는 것은 형사가 단서를 추적해 범인을 알아내는 것처럼 독자들이 소설 주인공들의 사회적 위치와 정신 상태를 짐작하게 해 주는 방법이었습니다.

 

108 소설 쓰기는 주인공의 감정과 생각을 주위에 있는 사물들과 통합하여, 이 둘을 하나의 문장으로 한순간에 보는 것입니다.

 

109 어떤 소설을 읽고 그 안으로 들어갔을 때, 우리는 전체 풍경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숲의 어느 지점에 있는지 직감으로 파악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소설을 이루는 각각의 나무와 마주칠 때는, 그러니까 짧은 순간과 각각의 문장에서, 단지 사건, 흐름, 드라마뿐만 아니라, 그 순간의 시각적 상관물도 보고 싶어 합니다. 이렇게 해서 소설은 우리 머릿속에서 실재하는 삼차원의 확실한 세계로 완성됩니다.

 

109 나는 소설을 쓸 때 항상 먼저 머릿속에서 이야기를 한 장면 한 장면 그려 보고, ‘적절한 장면을 선택하거나 창조해야 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109 헨리 제임스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제임스는 소설 『황금주발』의 서문에서 이 소설을 누구의 관점에서, 어느 조연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 나가느냐 하는 문제를 어떻게 결정했는지 설명합니다(제임스에게 이것은 항상 가장 중요한 기법 문제였습니다.) 이때 그는 내 이야기를 본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서술자를 화가로 부릅니다. 사건과 거리를 둔 채 그다지 관여하지 않고, 고덕적 고민에도 빠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임스는 소설 창작은 항상 단어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 여기고, 자신의 서문과 비평에서 파노라마’, ‘그림’, ‘화가같은 표현을 문자 그대로의 뜻으로 또는 은유로 계속 사용한 작가입니다.

 

109 내가 좋아하는 위대한 소설가들이 왜 화가처럼 되고 싶어 하는지, 왜 그림에 질투를 느끼는지, 화가처럼쓰지 못했다며 후회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소설 창작은 단어에 앞서 먼저 그림으로 세상을 상상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그림을 단어로 표현하면서 독자들도 상상을 공유하기를 바랍니다.

111 소설에서는 작가의 묘사들을 우리 상상 속에서 그림으로 전환해야만 세계와 거기에 속한 사물과 마주할 수 있습니다. 성서에서는 한 처음, 천지가 창조 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라고 합니다. 소설 예술은 먼저 그림이 있다. 하지만 그것을 단어로 설명해야만 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12 소설가는 주인공들을 둘러 싸고 있는 사물들에 대해 주인공만큼이나 관심이 있으며, 소설 속 세계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그 안에 있기 때문에 사물들을 필요한 만큼 호가처럼 묘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플로베르가 말한 적절한 단어를 찾기에 앞서 소설가들이 찾아야 하는 적절한 심상역시 풍경, 사건, 소설 속 세계에 완전히 들어간 뒤에야 찾을 수 잇습니다. 소설가가주인공에게 느끼는 애정도 이렇게 해야만 드러날 수 있습니다. 소설에서 사물에 대한 묘사는 주인공들에게 느끼는 애정의 결과이며 표현입니다.

 

112 영화를 볼 때는 마치 전통 서사시를 들을 때 그러했던 것처럼, 허구의 세상을 주인공의 관점이 아니라, 외부에서 멀리 떨어져서 판단하며 관람하곤 했습니다.

 

113 그후 35년 동안 소설을 쓰면서도 사실 내가 그림에 더 재능이 있다고 생각해 왓습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어떤 이유로, 이제는 단어들로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나는 나 자신이 그림을 그릴 때는 더 천진하고 소박하며, 소설을 쓸 때는 더 성숙하고 성찰적이라고 느낍니다. 소설은 오로지 이성으로 쓰고, 그림은 오로지 재능으로 그리는 것 같습니다.

 

114 격동적인 풍경화를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스트린드베리는 『하녀의 아들』이라는 자전적 소설에서 그림 그리는 것이 자신을 아편을 피운 것처럼,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하게한다고 말했습니다. 소설에서도, 그림에서도 가장 숭고한 목적은 이렇나 행복일것입니다.

 

4. 박물관과 소설

 

118 내 소설의 여주인공 퓌순에게 어울릴 오렌지색 장미꽃과 초록색 잎사귀 무늬의 원피스를 먼저 고물상에서 샀고, 나중에 이 허구의 인물이 이 옷을 입은 장면(운전 연습 장면!)을 쓸 때 그 옷을 앞에 놓고 세부적인 것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118 내 소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나와 주인공들에게는 나 자신, 어머니, 아버지, 친척들의 이야기가 많이 반영되었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고 추억하는 물건들을 그들에게서 가져와, 내 앞에 놓고 세부적인 것들을 묘사하며 소설의 일부로 만들었습니다.

 

120 내가 소설 주인공 케말이 아니라는 것을 잊은 교수인 내 친구처럼, 독자들도 소설 속 꽤 많은 것이 작가 상상력의 산물임을 알면서도 이 실망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설에서 묘사하는 세상을 자신의 감각으로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123 체스 선수가 상대의 다음 공격을 추측하며 경기하듯, 소설가는 독자의 상상력을 계산에 넣으며, 상상력을 작동시키는 이 충동 또한 염두에 두고 소설을 쓴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125 소설이 일상생활의 경험과 감각을 묘사하고, 삶의 본질적인 순간을 포착하는 작업을 통해 독자를 일깨운다는 얘기는 앞에서 여러 차례 했습니다. 동시에 소설은 인간적인 감정, 우리 주위의 평범한 일상, 제스처 말, 태도 들에 대한 강력하고 풍부한 기록 보관소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인식하고 단어로써 주의 깊게 배치했기 때문에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126 평범한 일상생활의 대화가 가진 힘과 설득력이 없는 소설을 상상하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소설 세계의 기초가 되는 일상 언어는 평범한 순간과 임의의 감각을 구성하는 천연의 재료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일상 대화가 반드시 세세히 기록되어 페이지마다 배치되고 한 단락당 한 문장씩 쓰여, 소설 풍경을 지배할 필요는 없습니다.

 

127 소설은 단어, 표현, 관용구만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일상 대화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도 기록합니다. 우리는 조이스의 작품을 읽을 때면 일상 언어의 묘미와 언어유희를 발견하고, 마치 말을 처음 배우는 아이를 바라볼 때처럼 행복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나 조이스 이후로, 포크너에서 울프까지, 헤르만 브로흐에서 가브리엘 마르케스까지 모든 위대한 작가들은 내적 독백을 통해 우리 머릿속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 주기보다는, 언어가 우리 삶에 미치는 아름다움과 기이함을 곤찰하며 즐거워했습니다.

 

129 생소하기만 한 16세기 이스탄불의 일상 대화라는 문제에 부딪혔을 때 시대를 재현하면서 일어날 수 잇는 실수로부터 소설을 보호하기 위해 오히려 그 인위적인 면을 드러내고 과장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가끔 주인공들이 독자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하고, 사물과 그림 들이 말을 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와 관련된 이야기를 계속 끼워 넣었습니다.

 

130 소설 독자들이 느끼는 희열은 박물관 관람객들이 느끼는 그것과는 다릅니다. 소설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사물과 우리의 지각이 만나는 순간을 보존하기 때문입니다. 색깔, 소리, , 풍경이 우리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기록하고, 최소한 어느 기간 동안 보존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단순히 우리에게 속한 사물들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경험과 우리의 삶이 소설에 기록되어 보존된다는 느낌입니다.

 

131 많은 소설가가 그러했듯이, 나도 이런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당신은 바로 내가 본 것들을 보고, 느낀 것들을 느꼈군요. 마치 내 인생을 쓴 것 같아요.” 이 호의적인 말에 기뻐해야 할지 속상해야 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무에서 상상력만으로 이야기를 지어내는 창조적인 소설가 아니라, 어떤 공동체에서 모두 함께 공유하는 어떤 삶을 기록하는 역사가인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134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을 때, 우리는 먼저 우리와는 차별되는 주인공들과 동일화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기분이 좋습니다. 그들은 우리와는 삶, , 환경, 공포, 장래희망, 전통, 모든 면에서 다르니까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아주 어려운책을 읽기 때문에 기분이 좋은 겁니다. 머릿속 한구석에서 우리가 특별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조이스 같은 어려운 작가의 작품을 읽을 때, 우리 두뇌 한구석에서는 조이스 같은 작가를 읽고 있는 우리 자신을 축하하느라 분주합니다.

 

134 학기 등록 첫날 가방에서 프루스트의 책을 꺼낼 때 아이셰는 줄을 서서 기다리느라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기보다는, 아마도 자신의 차별성을 드러내고 자신과 같은 부류의 학생을 쉽게 찾을 수 있는 사회적인 제스처를 보이고 싶었을 것입니다.

 

135 그림을 보면 한눈에 전체 구성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소설은 그 전체 구성을, 시간을 초월한아름다움을 보려면 많은 시간을 투자해 우리의 상상으로 나무 한 그루 한 그루 그리면서 숲을 지나가야 합니다.

 

136 아무도 읽지 않는 소설을 읽을 때는 작가에게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더 열심히, 더 상상력을 발휘하여 읽게 됩니다.

 

137 소설가는 독자가 이래저래 해석하리라 추측하며 텍스트를 쓰고, 독자 역시 소설가가 이래저래 추측하면서 썼겠지 하고 추측하면서 읽는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맙시다. 독자들이 스스로 작가가 된 기분에 젖거나, 작가가 이해받지 못해 불행한다고 여기면서 읽을 거라는 것도 소설가는 미리 예상하고, 거기에 맞춰 소설을 씁니다. 어쩌면 지금 나는 직업상의 비밀을 너무 많이 털어놓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작가협회에서 제명당할지도 모르겠군요!

 

138 소설 예술의 심장부에 내재된 핵심 패러독스는 소설가가 세상을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서, 동시에 자신만의 세계관을 표현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140 내가 보기에 이 소박함은 작가와 독자가 같은 계층과 같은 공동체에 속해 있음을 서로 인지하고, 작가들도 누군가를 대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쓴다는 데서 비롯합니다.

 

142 “파묵씨, 절대 카르스와 우리에 관해 그 어떤 나쁜 얘기도 쓰지 알아 주세요. 알겠지요? 그러는 비꼬는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배웅했습니다. 그러면 나는 버스 좌석에 앉아, 모든 소설가가 그렇듯, 진실을 쓰고 싶은 충동과 사랑받고 싶은 욕구 사이에서 갈등하곤 했습니다.

 

143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어쩌면 오로지 나의 행복을 위해서 소설을 쓰지 못했기 때문에, 오로지 나의 행복을 위해서 박물관을 세우려고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6. 중심부

 

148 순문학 소설 독자는 풍경 속 모든 나무(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마주친 사람, 사물, 사건, 일화, 이미지, 약간의 정보, 시간의 비약, 회상 그리고 가끔 나왔던 묘사 전부)가 배후에 있는 더 심오한 의미, ‘감춰진 중심부를 암시하기 위한 장치라는 것을 압니다.

 

148 소설가가 일련의 사건이나 세부사항을 소설에 넣을 때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실제 있었던 일일 수도 있고, 실제로 경험하면서 매력을 느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단순히 그럴듯하게 상상해 낸 것일 수도 있습니다.

 

149 순문학 소설 독자는 아름다움과 힘, 살아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 조각들 모두가 어떤 감춰진 중심부를 가리키기 위해 소설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이 중심부를 찾으면서 소설을 읽습니다.

 

149 소설이 진행되고 풍부해질수록, 각각의 나무뿐만 아니라, 뒤엉킨 나뭇가지와 잎사귀가 정성스럽게 묘사되어 그림이 되어 드러날수록, 작가도 독자도 감춰진 중심부에 대한 생각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소설 읽기는 진짜 중심부와 진짜 주제가 무엇인지를 탐색하는 작업입니다.

 

150 우리는 이 위대한 소설의 중심부가 어디인지를 우리 자신에게 계속해서 묻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계속해서 바꿔 가며 읽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의 한 이유가 풍경의 풍부함과 캐릭터의 다양성이라면, 또 다른 이유는 가장 위대하고 가장 능숙하며 가장 계획적인 소설가들조차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자신들이 쓴 소설의 중심에 대한 생각을 고쳐 나가기 때문입니다.

 

150 소설가의 인생 경험과 상상력은 그에게 풍부한 재료를 제공해 줍니다. 소설가는 이 재료를 탐색하고 발전시켜 깊숙이 아우르기 위해 글을 씁니다. 소설가가 인생에 대해서 소설로 암시할 심오한 관점, 그러니까 내가 중심부라고 부르는 통찰은 써나갈수록 확대되는 소설의 세부 사항, 전체적인 형태, 캐릭터에서 나옵니다.

 

151 경험 많은 소설가 역시 소설을 써 나갈수록 중심부가 서서히 드러날 것이며, 이 중심부를 찾아서 명확하게 하는 일이야말로 집필 과정에서 가장 어려우면서도 매력적인 작업이 되리라는 것을 압니다.

 

153 소설의 중심부는 어디서 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숲 전체를 밝히는 빛과 같습니다. 나무 하나하나, 오솔길 하나하나, 우리가 떠나온 곳과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곳까지, 가시덤불과 가장 어둡고 통과하기 어려운 수풀까지 모두 비춰 줍니다.

 

155 청년 시절 나는 정신적인 결핍감 때문에 형이상학, 철학, 종교뿐만 아니라 문학도 읽어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이십 대에 거의 생사가 달린 문제인 것처럼 흥분해서 중심부를 찾으며 읽었던 소설들 대부분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소설들에서 삶의 의미 또는 세상의 중심부를 탐색했을 뿐만 아니라 이 소설들의 작가, 예컨대 톨스토이, 스탕달, 프루스트, 토마스 만, 도스토엡스키 그리고 울프에게서 얻은 통찰로 나 자신을 계발하고, 나의 세계관과 도덕적 감수성을 형성했기 때문입니다.

 

155 소설을 써 나갈수록 중심부가 서서히 드러나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아는 어떤 소설가들은 별로 계획을 세우지 않고 소설을 쓰기 시작합니다. 무엇이 과다하고 무엇이 부족한지, 어떤 캐릭터가 피상적이고 어떤 인물이 불필요한지 하는 문제들은 중심부를 발견해서 명확해지고 나면 결정합니다.

157~158 『율리시스』의 중심부는 플롯이나 이야기에 있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주제와도 관련이 없습니다. 인간 정신의 작동을 시적으로 규명하여 지금까지 전혀 주목받지 못했던 우리 삶의 일부분을 조명하고 명확히 밝힌 희열에 있을 뿐입니다.

 

158 주인공의 한정된 시각 안에서 이야기를 구성한다는 아이디어를 광적으로 추구한 최초의 작가는 제임스입니다. 그는 1899 725일 편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하는 데는 500만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만약 작품에 중심부를 제공할 수만 있다면, 이 방법들 모두 타당합니다.”

 

163 보르헤스가 『모비딕』을 읽을 때 그랬던 것처럼, 나도 이 소설들을 읽으면서 중심부를 탐색했습니다. 그리고 예상되는 주제에서 벗어나거나 우회하는 것이(『트리스트럼 샌디』에서와 같이)작품의 진짜 주제라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163 내게 소설 창작이란 중요한 것에 대해 중요하지 않는 것처럼, 중요하지 않은 것에 대해 중요한 것처럼 언급하는 예술입니다. 이 원칙을 처음부터 끝까지 고수하여 쓴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모든 문장에서, 모든 문단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 이해하기 위해 중심부를 찾고 상상해야만 할 것입니다.

 

164 내 생각에 한 소설가가 창작자이자 예술가로서 도달할 수 잇는 가장 높은 지점은 소설 형식을 수수께끼로 구성할 수 잇는 능력입니다. 해답이 바로 그 소설의 중심 부인 수수께끼! 가장 소박한 독자라도 이러한 소설을 읽을 때는 소설의 의미, 즉 중심부를 찾으려면 이 수수께끼를 풀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챌 것입니다.

 

164 소설가가 실러가 말한 소박한 정신 상태에서 완전히 멀어져 성찰적으로 되는 가장 좋은 예는, 자신의 소설을 독자의 눈으로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접근은 우리가 그린 풍경화를, 호라티우스가 말했던 것처럼, 약간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다가가기를 반복하면서 보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이때 그림을 보는 사람이 우리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인 것처럼, 해야 합니다.

 

165 소설 쓰기란 세상 또는 삶에 우리가 찾을 수 없는 어떤 중심부를 설정하고, 그것을 풍경 속에독자와 상상의 체스 게임을 두면서 숨겨 두는 것입니다 소설 읽기는 같은 작업을 반대로 하는 것입니다. 독자와 작가 앞에 놓인 것은 오직 소설 텍스트뿐입니다. 일종의 즐거운 체스판인 것이지요! 모든 독자는 그 텍스트를 가지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고, 원하는 곳에서 중심부를 찾습니다.

 

166 소설 읽기란 전체 풍경에 대해 전반적인 의견을 말하기보다는 풍경을 구석구석 샅샅이 보고, 모든 사람을, 모든 색과 모든 음영을 느끼는 일입니다.

 

166 우리 상상 속에서 세세하고 뚜렷한 그림으로 재현하고, 그 그림들 속에 들어가 사방에 지각을 열어 두려고 애써야 합니다. 중심부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에 우리는 지각을 끝까지 열고 상상력을 긍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며, 그리하여 소설 속으로 순조롭게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166 소설읽기란 세상에 중심부가 있다는 것을 믿는 노력입니다. 위대한 순문학 소설들, 예를 들면

『안나카레니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의 산』, 『파도』 같은 책들은 우링게 없어서는 안 되는 작품입니다. 세상에 중심부와 의미가 있다는 희망과 생생한 환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상은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유지되며 우리에게 행복감을 안겨 줍니다.( 『마의 산』에 나오는 삶에 대한 지식은 추리 소설에 나오는 사라진 보석보다 더 훨씬 더 커다란 호기심의 대상이 됩니다.

)

167 위대한 소설을 읽을 때는 모든 캐릭터에 일일이 동화되어 그들의 시각에서 보고 그들을 인정해 주려는 노력, 단어들을 그림으로 전환하며 소비한 에너지, 우리 머릿속에서 빠르고 주의 깊게 실행되었던 그 밖의 모든 작업 등을 통해 소설에 중심부가 하나만이 아님을 느끼게 됩니다.

 

168 어떤 소설이 누구에게, 언제, 어떻게, 어떤 강렬한 주제로 호소하느냐는 시간에 따라 변합니다. 소설의 중심부가 변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168 나에게 소설 쓰기란, 새로운 단락, 장면, 세부 사항 들을 추가하고, 새 캐릭터들을 찾아 그들과 동일화되어 그들의 목소리를 빼거나 더하고, 몇몇 장면과 대화를 빼거나 더하고, 소설을 쓰기 시작할 때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것들을 덧붙여 중심부를 서서히 제자리에 앉히는 작업입니다.

 

170 콜리지에 따르면 워즈워스는 평범한 것에 새로움의 매력을 부여하고 초자연적인 무엇인가에 친근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이성을 습관의 마약에서 멀어지게 하고, 우리의 지력을 우리 앞에 있는 세상의 기쁨과 멋짐으로 향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썼습니다. 35년 동안 소설을 써 오면서 나느 이 말이 내게 소설 예술을 가르쳐 준 가장 위대한 작가들,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프루스트, 토마스 만을 위한 말이라고 항상 생각해 왔습니다.

 

171 우리가 소설 속 풍경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톨스토이가 경험하고 연구하고 탐색하여 우리를 끌어들이고자 했던 그 풍경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안나가 손에 있는 책이 아니라 창밖을 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제야 비로소 안나의 눈을 통해 우리 독자들의 눈앞에 전체 풍경이 재현됩니다. 그녀의 시선 덕분에 소설 속으로 들어가 1870년대 러시아에 있을 수 있었으니, 우리는 안나에게 고마워해야 합니다. 안나가 손에 들려 있는 책을 읽지 못했기에 우리 독자들은 『안나 카레니나』라는 소설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에필로그

 

176 『순수 박물관』은 나의 첫 소설 『제브데트씨와 아들들』의 세계로 돌아간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35년에 걸친 나의 소설가로서의 여정이 여러 정거장을 지나며 커다란 원을 그린 끝에, 내가 시작했던 곳으로 되돌아온 것 같았습니다.

 

177 우리는 위대한 소설들을 읽고, 그런 소설을 직접 써 보려고 애쓰면서 소설에 대해 가장 잘 배우게 됩니다. 니체의 인간은 예술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예술 작품을 창조하려고 애써야 한다.”라는 말은 지당하게 느껴집니다.

 

177 “오르한, 사람은 스물두 살 때 인생을 알 수 없단다. 나이를 좀 먹고, 인생을, 사람들을, 세상을 경험해 봐. 그런 다음에 소설을 써!”(그들은 내가 단지 소설 한 권만을 쓰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이 말에 크게 분개했고, 모두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소설은 우리가 인생을, 사람을 알기 때문에 쓰는 게 아니에요. 다른 소설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고 그와 같은 방식으로 써 보고 싶기 때문에 쓰는 거라고요!”

 

179 나는 보르헤스와 칼비노 같은 작가들을 향해 나 자신을 열면서, 옛날 표현을 빌리자면, ‘나의 목소리를 찾았습니다.

 

179『검은 책』은 나의 첫 소설처럼 상당히 자전적이지만, 나의 진정한 내면의 목소리를 찾은 첫 번째 소설이기도 합니다. 이 소설을 쓸 때 이 책에서 언급한 구조 이론을 감지했던 것 같습니다. ‘본 것을 단어로 전환하고, 단어로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는 것에 관한 관심은 『내 이름은 빨강』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언제나 독자의 시각적 상상력에 호소하는 작가가 되려 노력했고, 소설 예술은 도스토엡스키라는 충경적인 반증이 있기는 하지만 시각적 심상을 통해 작동한다고 믿어 왔습니다.

 

179 『순수 박물관』을 쓸 때 나는 그동안의 모든 경험이 서로 맞물려 있음을 느꼈습니다. 새로운 소설을 쓸 때면 예전 집필 경험과 예전에 읽었던 책들에 의지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첫 소설의 첫 문장을 쓸 때 느끼는 것처럼, 소설을 쓸 때는 항상 철저하게 혼자입니다.

 

180 내 머릿속에는 이 강좌에 참고할 책 두 권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책은 이제는 유행이 지났다고 확신했던 포스터의 『소설의 이해』입니다.

 

180 또 다른 책은 루카치가 마르크주의자가 되기 전에 썼던 『소설의 이론』입니다. 이 책은 소설 이론에 관해 자세하게 서술한 책이라기보다는, 왜 인간이 정신적으로 소설 같은 거울(특별한 구조의 거울!)을 필요로 하는지를 이해하려고 했던 철학적이고 인류학적이며 놀랍게도 시적인 논문입니다.

 

180 우리 소설가들의 첫 번째 임무가 주인공들과 동일화하는 것임을 이제는 이해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책을 쓰면서 나도 몽테뉴의 낙관론에서 힘을 얻었습니다. 나의 소설 창작 경험에 관하여, 소설을 쓰고 읽을 때 실제로 내가 무엇을 하는지를 솔직히 얘기한다면, 모든 소설가에 대해 그리고 소설 예술 전반에 대해 논의할 수 있으리라 믿는 낙관론에 나는 기대고 있습니다.

 

183 나에게 이상적인 상황은 한 소설가가 소박한동시에 성찰적인영혼을 갖는 것이라고 말하겠습니다.

184 유일한 문제는, 강연 시간이 45분에서 50분으로 정해져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소설을 쓸 때는 주제를 풍부하게 하는 창조적인 아이디어와 없어서는 안 될 세부 사항들이 떠오르면, 나중에 그 장을 늘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강연은 시간 제약이 있다 보니, 스스로 가혹한 비평가이자 편집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오르한 파묵의 소설에 관한 하버드 대학 강연록을 옮긴 글이다. 그는 소설에 대해 아는 것들과 배운 것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을 요약하였다. 그렇다고 소설에 대한 역사나 이론에 대해 서술되어 있지 않다. 소설이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 소설가들이 어떻게 쓰고, 소설은 어떻게 쓰이는 것인가에 대한 저자의 고민과 문학관이 담겨져 있다. 저자가 스물 두 살 때 어느 날 갑자기 화가 대신 소설가가 되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그에게 충고한 내용인데, 그의 음성이 아직 초보작가인 나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오르한, 사람은 스물 두 살 때 인생을 알 수 없단다. 나이를 좀 먹고, 사람들을 ,세상을 경험해 봐. 그런 다음 소설을 써!"

  "소설은 우리가 인생을, 사람을 알기 때문에 쓰는 게 아니에요. 다른 소설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고 그와 같은 방식으로 써 보고 싶기 때문에 쓰는 거라고요!"

 

  독자의 입장에서 본 소설 읽기와 소설가 입장에서 본 소설쓰기를 다양한 비유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운전자에 대한 비유였다.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운전하면서 버튼을 누르고 페달을 밟고 기어를 변환하고 수많은 규칙에 따라 운전대를 좌우로 돌리고 도로 표지판을 읽고 의미를 해석하며 교통 신호를 살피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운전자와도 같습니다."

 

  저자는 도입부분에서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한 장면, 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 간 기차에 안나가 생각에 잠긴 부분을 소개했다. 이 장면은 소설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언급하는 모두 장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가장 큰 힘이 여기에 숨어 있다고 말했다.

 

  "안나가 불멸이 된 것은 이 모든 사소한 세부 사항이 옳았기 때문입니다. 창밖에 눈이 오는 밤, 객차 안 모습, 안나가 읽었거나 읽으려고 애썼던 소설, 그 모든 것을 그녀가 보고 이해하고 느낀 만큼 우리도 보고 이해하고 느낍니다. 소설 예술에서 가장 독특한 면은, 주인공들이 모두 감각으로 '느끼고' 이해하는 대로 세상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소설가는 나 자신의 관점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저자는 35년 동안 소설을 쓰면서 다른 사람의 위치에서 자신을 내 놓으며, 자신의 영혼을 길들였다고 한다. 저자는 글을 쓰면서 서서히 주인공과 닮아 간 것이다.

 

  내가 오르한 파묵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아는 지인이 '내 이름은 빨강'이라는 그의 소설을 소개해 준 것이 인연이 되었다. 그리고 작년에 두 번째 터키 이스탄불 방문을 준비하고 있을 때, 어느 신문지면에 그가 이스탄불 시내에 '순수박물관'을 개관한다는 소식을 우연히 접하게 되었다. 아쉽게도 그 곳에 가지는 않았지만, 그의 책 '순수박물관'을 읽으면서 이스탄불 거리를 걸었다. 주인공이 사랑을 나누던 장소와 거닐 던 거리를 걸으며 마음껏 상상해 본 경험을 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독자들이 상상했던 소설 속 세계가 현실로 실현될 때, 자긍심을 가지게 되며, 자긍심이야말로 소설 독자와 박물관 관람객을 통합시키는 공통감정이라고 저자는 말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소설을 '숲과 나무, 그림'에 비유를 자주 하고 있는데, 이 책에 대한 구성 또한 소설을 바라보는 독자와 소설가의 관점이라는 전체 숲을 먼저 이야기하고 소설의 구성요소인 나무들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마치 미술작품을 멀리서 감상하면서 뒤로 물러서서 보기도 했다가 가까이 다가가 그림의 세부적인 사항 관찰하도록 만들었다. 소설을 읽는 느낌 그대로 책의 구성을 잡아 놓았다고 할까? 마지막 장의 제목도 '중심부'이다. 어떻게 소설을 읽고 써야 하는지에 대해 이해보다는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감동이 많았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았지만 어떻게 하면 독자의 감동을 끌어낼 수 있는지 그의 노하우를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저자라면 또는 내가 강연자라면 이 책의 구성처럼 전체 숲을 이야기하고 서서히 나무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아니면 멋진 나무를 먼저 보여 주고, 독자의 관심을 끌어 당기는 것도 효과적일 것이다. 방법은 저자의 선택이지만, 중요한 것은 위대한 소설들을 읽고, 그런 소설을 직접 써 보려고 애써야지만 소설을 가장 잘 쓸 수 있다.

 

 "인간은 예술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예술 작품을 창조하려고 애써야 한다."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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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8 11:03:38 *.216.38.13

저는 개인적으로 오르한 파묵의 책 중에 이 책과 <검은 책>을 제일 좋아합니다.

 

오르한 파묵을 아시는 분을 만나게 되어 정말 반갑네요.

 

언젠가 이스탄불에 가면, 그가 개관한 <순수 박물관>도 가 보고 싶습니다.

 

리뷰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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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8 12:45:56 *.229.250.5

개인적으로 이스탄불을 참 좋아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작년에 두 차례나 방문하게 되었구요.

지금은 '새로운 인생'을 읽고 있는데, 심야버스를 타고 터키 여행하던 추억이 되살아나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저도 다시 기회가 되면 <순수 박물관>에 꼭 가 보고 싶습니다.

변경연에 오르한 파묵을 알고 있는 선배님이 계셔서 넘 반갑습니다.

다음에 뵈면 파묵에 대해 말씀 나누면 좋겠습니다.

부족한 저의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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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8 18:04:27 *.216.38.13

전 파묵 소설 중 <새로운 인생>이 제일 어려웠던 것 같아요.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로 시작된 소설의 변주를 다 읽어내기가 참 쉽지 않았던 것 같아요.

 

전 지금 <고요한 집>을 읽고 있는데.....  만만치 않네요^^  다음에 만나면 파묵이야기로 꽃 피워 BoA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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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2 죽음의 지대 -라인홀트 메스너- file 파에톤 2013.01.15 4363
1491 # 37 의식혁명 - 데이비드 호킨스 file [5] 샐리올리브 2013.01.15 11363
1490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 - 토드 부크홀츠 [6] 세린 2013.01.15 5965
1489 우리 속에 있는 여신들 - 진 시노다 볼린 [1] 콩두 2013.01.15 4587
1488 욕망의 심리학 id: 깔리여신 2013.01.15 3671
1487 안정효 <글쓰기 만보> - 수정하였습니다. [2] [1] 레몬 2013.01.15 4411
1486 7년의 밤 - 정유정 레몬 2013.01.21 5000
1485 # 38 체인징 마인드 - 하워드 가드너 file 샐리올리브 2013.01.21 3122
1484 38. 공자노자석가_모로하시 데츠지 지음 한젤리타 2013.01.21 3862
1483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 -김장호- [1] [3] 파에톤 2013.01.21 4066
1482 #38 구본형의 그리스인이야기_생각정원 [1] 서연 2013.01.21 2906
1481 수학사_ 하워드 이브스 [2] 세린 2013.01.21 5798
1480 새로운 미래가 온다 - 다니엘 핑크 학이시습 2013.01.21 4326
1479 시간의 심리학-사라노게이트 id: 깔리여신 2013.01.21 4191
1478 우리 속에 있는 지혜의 여신들 - 진 시노다 볼린 콩두 2013.01.21 4029
1477 소설과 소설가 - 오르한 파묵 레몬 2013.01.27 3963
1476 #39 최고의 주식 최적의 타이밍_윌리엄 오닐 서연 2013.01.28 6539
» 39. 소설과 소설가(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3] [1] 한젤리타 2013.01.28 3378
1474 문명과 수학_리처드 만키에비츠_경문사 [1] 세린 2013.01.28 12215
1473 # 39 이 남자가 말하는 법 -김은성 file 샐리올리브 2013.01.28 3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