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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2월 25일 18시 51분 등록

행복의 충격

* 김화영 지음, 문학동네, 2012.07.15

1. ‘지중해화 꽃이 피었습니다(저자에 대하여)

김화영.JPG

■ 김화영 (1941 ~ )

 

세상은 그를 개성적 글쓰기와 유려한 번역, 어느 유파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활동으로 문학계에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그의 글에서 드러나는 부유한 인텔리 지적 허영은 감출 수 없다. 유려한 문장의 수사와 언어의 마술을 외경으로 바라보되 나는 시대의 특수성을 자발적으로 유리한 그의 부채감을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유신과 전제정의 부활이라는 희대의 시대적 상황에 까뮈와 그르니에, 보들레르, 스페인과 이탈리아 등 유럽의 문화적 핵우산에 보호되어 있던 그 시절 말이다. 이런 질문 자체가 외람인줄 알고 있으나 그의 글이 유려한 만큼 내 눈에는 폭정에 대항했던 당시 젊은이들의 잔상이 어른거린다. 그렇다, 내가 굳이 불필요한 말을 저자 설명에 밀어 넣는 이유는 완벽하게 아름다운 그의 글에 작은 스크레치 하나 내는 일조차 영광이 될 법한 유아적 어리광이다. 어찌되었든

 

1969년 가을. 스물아홉의 김화영은 지중해로 떠난다. 지금처럼 떠나는 일이 손쉬워지고, 소비되는 시절이 아니었다. 그러므로떠난다는 것은 제법 큰 용기를 필요로 했을 테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를 무릅쓰고, ‘우리들의 모든 유익하였던 경험들을 무용하게 하는곳으로 가는 것. 어쩌면떠남은 그의 말처럼 항상 최초의 경험일지도 모르겠다.

 

아래부터는 메마른 그의 프로필이다. 저자에 대한 예의는 아니겠으나 그의 문장을 자세히 보기 위해 시간을 나눈 셈 친다 이해해주시라. 인터넷 포털에서 발췌한다.

 

1941 6 1일 서울 출생. 서울대 문리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엑스앙 프로방스 대학에서 카뮈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64년 『세대』 신인현상문예에 시 과원이 당선되었고, 196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육성이 가작으로 입선되어 문단에 등단하였다. 『사계』, 68문학』 동인으로 활동했다 그는 봄밤의 가족(1965), 연가(1966), 유형지의 노래(1968), 나의 청춘문화(1969) 등의 시를 통해 세계의 근원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인간존재를 조명하는 지성적인 정신을 드러내고 있다. 한편 조각(彫刻)으로서의 문학-알베르 까뮈의 예술관(1979), 가치의 무게와 노래의 가벼움(1981), 미당 서정주론(19831984) 등의 평론을 발표하였고, 『문학상상력의 연구』(1982), 『미당 서정주의 시에 대하여』(1984), 『공간에 관한 노트』(1987), 『소설의 꽃과 뿌리』(1998) 등의 평론집을 발간하였다.

 

2. ‘행복의 충격(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 본문 내용, Ü : 나의 언어)

 

자정의 어둠 속에도

지중해는 항상 최초의 아침이다.

내 최초의 영원한,

내 최초의 청춘이다.

 

□ 서문) 행복은 습관이 아니라 충격이다. 행복은 이 땅 위에 태어난 우리의 하나뿐인 의무다 (p. 7)

 

지중해, 나의 사상

 

□ 나는 언제나 이국의 어느 도시에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홀로 도착하는 것을 꿈꾸었다. –장 그르니에- (p. 14)

 

Ü 장 그르니에, 알베르 까뮈의 스승이다.

 

□ 다른 곳은 공간에 있어서의 미래다. (p. 15)

 

Ü 멋진 말에 초장부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저자는 이미 첫 문장으로 독자를 무장해제 시키고 있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上手. 이 책은 모두 under line 이므로 굳이 색을 입히거나 highlight는 하지 않는다. 아시는가. 내 이제껏 읽은 대문호들의 번역어, 학술어를 밀어내고 아름다운 모국어의 진수를 가장 윗자리에 앉혀놓는 대단한 찬사임을.

 

□ 청춘은 그 자체가 자기 스스로의 정당화가 된다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 청춘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믿을 수 있는 이유를 얻으며 자기가 믿는 것을 증명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p. 15)

 

□ 수없이 떠나본 사람에게도 모든 떠남은 항상 최초의 경험이다. 떠나는 방법은 자기 스스로에게도 교육할 수 없는 것이다. 미지의 것, 다른 것, 다른 곳이 감추고 있는 새로움은 우리들의 모든 유익하였던 경험들을 무용하게 하는 데 그 힘이 있다. (p. 17)

 

Ü 거듭된 새로움은 더 이상 새로움이 아닌데 새로움은 익숙함에서 나오므로 익숙함은 항상 새로움을 품고 있고 새로움은 언젠가 다시 익숨함으로 들어가게 됨으로 새로움과 익숙함이 들고 나는 문은 같다. 노자를 집대성한 왕필은 말하였다. ‘희로는 뿌리가 같고 시비는 문이 같다. 그러므로 한쪽만을 들 수 없다.’

 

□ 그러나 여행자는 멸종되어가고 그 자리에 관광객이, 아니 관광객들이 관광객들의 떼들이 지불한 회비의 권리를 행사한다. (p. 18)

 

□ 어느 날 하오,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천천히 에펠탑 앞 광장을 지나가보라. 버스에서 왁자지껄 내리는 백발의 노파나 중년의 일본인들, 빠르고 익숙한 솜씨로 탑을 배경으로 가서 서고 찰칵, 코닥회사의 가벼운 사진 상자도 아사히 펜탁스의 무거운 제품도 다 같은 풍경, 다 같은 추억을 125분의 1초 만에 저장한다. (p. 19)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래도 마지막 개별성, 마지막 소유를 위하여 내가 들어가 있는 풍경, 나의 추억을 제조하기 위하여 사진을 찍고 그러고 일 분 후면 버스에 오르고 관광회사가 문을 닫는 시간을 향하여 떠난다. 공간을 담는 기계는 생산되었으나 시간과 기간을 담는 기계가 생산되지 않은 덕분에 우리는 모두 같은 추억들을 보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인생이 살과 피와 영혼에 가장 와 닿는 시간, 내 피부를 껴안아오는 공간의 그 참다운 비밀을 맛보지 못하는 대신 효율과 시간과 경비의 절약에 성공한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관광회사들은 모든 우연을 배제하고 안락한 旣知(기지)의 필연 속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p. 20)

 

Ü 사진은 공간을 담아 놓아 공간을 담아 갈 수 없다.

 

□ 몸에 젖은 풍경, 잃어버리면 무방비 상태가 되는 풍경, 이 피난처는 이 정처 없는 여행의 끝에는 따뜻한 아파트와 월화수목금토로 이어지는 행복과 정착이 있음을 쉬지 않고 확인시켜준다. 그리하여 그들의 여행은 단 한번도 미지를 향하여 열리지 않는다. 나의 방 속에서 나의 행복 위에 걸터앉아 이 부르주아들은 창밖으로 남의 풍경들이 지나가는 것을 구경하며 휴식한다.

 

여행이 우리에게 주는 경이, 공포, 그 철저하고 낭만적이지도 않은 고독감, 그 모두로 인하여 나의 영혼, 나의 몸 속에 꺼지지 않는 것으로 확인되는 청춘을 이동하는 집의 주민들은 포기해 버린다. 이동식 행복, 이동식 안락의 공간을 끌고 다니는 월급쟁이들이 나는 무서웠다. 카라반의 집단이 반드시 어느 날 내 청춘의 불덩이를 서서히 눌러 끄고 그들의 관광, 그들의 바캉스, 그들의 안락을 유형무형으로 나에게 우리들에게 강요할 것이다. 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p. 24~25)

 

Ü 월급쟁이는 여행자의 틈입이며 여행자는 월급쟁이의 틈입이다.

 

□ 사물을 보는 나의 눈은 나의 밖에 있는 사물만을 보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을 동시에 본다. 나와 사물과의 통제할 수 있는 거리를 우리는 이상하게도 친밀감이라고 부른다. (p. 26)

 

□ 심지어 대낮에 도착하였던 일도 기억 속에서는 항상 박명의 역에 빨려들어버리는 것만 같다.

해가 아직 완전히 뜨지 않은 새벽의 어렴풋한 시간, 마르세유에서 엑스로 가는 그 빨간 완행 기동차 속에서 문득 나는 길인 줄 알고 따라갔다가 남의 안마당에 도착해버린 사람처럼 민망하였다. (p. 29)

 

□ 수년 후에는 내 청춘의 가장 행복한 시절이 늙지 않고 잠겨 있는 곳이 될 이 소도시에 나는 이처럼 수줍고 말없이 도착하였다. (p. 29)

 

Ü 미래로 보낸 자신의 과거 시제

 

□ 이 작고 소중한 기차표로 인하여 오랫동안 입고 있던 자기 양복저고리에 달린 각종 호주머니들의 다양한 구조를 처음으로 확인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p. 31)

 

Ü 세심한 관찰력, 핵심과 연관되는 사소함의 힘

 

□ 영원히 푸른 프로방스의 하늘을 등에 받들고 이제 막 목욕을 마치고 일어서는 반라 여인들의 조각상들, 그 아래 세차게 떨어지는 물줄기에 흐드러진 갈기를 털고 일어나며 포효하는 듯한 청동의 사자들 (p. 32)

 

□ 그때 빈집 뜰에 가득하였던 고요, 그리고 어린 가슴을 흔들던 야릇한 무서움과 침묵의 울림, 멀리서 들리는 대낮의 개 짖는 소리, 이 모든 것을 세잔의 작은 숲은 나에게 되돌려주는 것이었다. (p. 35)

 

Ü 유럽 풍광에 제 고향을 더듬는 일을 저자는 즐겨 한다.

 

□ 그러나 엑상프로방스는 능률을 찾는 자, 시간이 바쁜 사람, 견문을 넓히려는 교양인, 소유의 노예들, 그리고 돈으로 살 수 있는 모든 것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일체의 환상을 거부한다.

 

햇빛이 참으로 우리들의 눈이 아니라 프로방스의 속담처럼 나의 살을 노래하게 하는 것이 되기 위해서 모든 부질없는 허영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p. 38)

 

Ü 융은 말한다.

 

파괴적인 전진은 결코 그칠 줄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이러한 관계성의 상실이며 근원과의 단절로서 문화 속의 짜증과 성급함을 야기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발전의 역사가 아직 전체적으로 완성되지 않은 현재에 사는 대신 미래에 살며 황금시대가 오리라는 터무니없는 약속에 의지한다. 사람들은 점점 깊어지는 결핍감과 불만, 초조감에 사로잡힌 채, 새로운 것을 향해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돌진하고 있다.

 

사람들은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미래의 약속에 의지하여 살고 있으며 현재의 빛 속에서 살지 않고 미래의 어둠 속에서 살고 있다. 사람들은 그 어둠 속에서 적절한 때에 해가 솟아오르기를 기대하고 있다.

 

사람들은 모든 좋은 것이 나쁜 것들의 대가로 얻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보다 큰 자유에 대한 희망은 국가에 대한 예속의 증대로 사그라들고 만다. 가장 눈부신 과학의 발전이 우리에게 끔찍한 재앙을 가져온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신화의 힘에서 소개되었던 시애틀 인디언 추장의 편지도 다시 새겨보자.

 

‘우리는 이 땅을 갓난아기가 어머니의 심장 소리를 사랑하듯 사랑합니다. 그러니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우리가 사랑했듯이 이 땅을 사랑해주시오. 우리가 보살폈듯이 보살펴주시오. 그대들의 것이 될 때 이 땅이 간직하고 있던 추억을 그대들 마음속에 간직해 주시오.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이 땅을 잘 간직하면서,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듯 이 땅을 사랑해주시오.

우리가 이 땅의 일부이듯, 그대들도 이 땅의 일부올시다. 이 지구는 우리에게 소중합니다. 이것은 그대들에게도 소중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한 분뿐이라는 것을 압니다. 홍인종이 되었든 백인종이 되었든 인간은 헤어질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우리는 결국 형제인 것입니다.’

 

□ 지중해안의 따뜻한 가슴, 프로방스는 완전히 절망한 사람이 올 곳은 아니다. 오직 행복한 자, 아무것도 소유한 것이 없이도 이 땅 위에 태어난 것이 못 견디게 기뻐지는 자들만이 올 곳이다. 아니 적어도 많은 절망의 한구석에 아직 저 필사의 모든 생명들이 공유하는 생명의 행복감, 우리들의 건강한 육체가, 죄 없는 육체가 아는 행복감의 씨앗을 아직 죽이지 않은 자들만이 올 일이다. (p. 39)

 

Ü 누가 나를 빚었는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대지에 발붙이며 섰고 한계와 조건으로 살게 되었다. 피와 살이 없어진 뒤의 일도 알지 못함으로 내 머리에 쬐어지는 햇살과 울통불퉁 살아 움직이는 육근이 유일하게 중요한 것이 되었다. 그 햇살 받은 몸과 움직이는 육이 기뻐하는 것, 늙어 흘러 내리는 육에 기쁨을 선사하는 것과 유한한 육을 무한으로 확장하는 마음을 누리는 일이 중요하게 되었다.

 

□ 그들은 혹은 알프레드 드 비니처럼 생각한다. ‘우리가 사랑할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사랑하여야 할 것은 지나가버리는 것이다라고. 그러나 프로방스 사람들은 지식인의 태를 철인의 태를 부리지 않는다. 그들의 몸, 그들의 몸짓, 그들의 웃음이 그 모두를 말한다. (p. 40~41)

 

내 청춘의 고향, 프로방스

 

고통보다 더욱 비극적인 것이

단 하나 있다면

그것은 행복한 사람의 일생인 것을 알베르 카뮈-

 

프로방스.JPG

 

□ 아마도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마주치며 이룬 골짜기의 과수원에서 사철 꽃과 과일과 떨어지는 잎과 내리는 눈, 그리고 해방이 행복한 시간의 리듬 속에서 보낸 유년 시절 (p. 45)

 

Ü 306동의 밝은 채광과 103동의 거침없는 조망도 좋다. 그러나 같은 집, 같은 길, 같은 놀이를 하는 아이들에게 같은 기억을 선사하는 저 야만은 또 어찌할 것인가.

 

□ 애송이 플라타너스를 심어 놓고 각목으로 테두리를 하고 책임 관리자의 푯말까지 달아두었던 길가의 희망은 항시 단명하였다. 5000년 역사의 그 마술 지팡이 같은 전통 속에 자라온 이 나라에 대규모의 궁전이나 가옥, 건물이 없다는 것은 잦은 전쟁이 목재의 문화유산들을 쉬 불태웠기 때문이라지만 그러면 500년 도읍지 서울에 자라던 모든 나무도 다 불타버린 것일까? (p. 46)

 

빤들빤들한 마누라와 동글동글한 자식들을 거느린, 볼 장 다 본 녀석’ –장 폴 사르트르- (p. 48)

 

□ 참으로 이곳에는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 아니 지금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은 올 것이 아니다. 이곳은 내일의 행복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올 곳은 아니다. 지금 당장, 여기서, 행복한 사람, 가득하게, 에누리 없이 시새우며 행복한 사람의 땅, 프로방스는 그리하여 내게는 그토록 낯이 설었다. (p. 49)

 

Ü 이 문장은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함축이다. 행복을 동화책에서나 보고 문맥에 의해서만 읽혀지고 계좌의 잔고만이 행복이었던 삶이 그곳의 행복의 실체를 천둥같이 깨달은 다음에 오는 그 충격을 상상하였다. 충격적인 행복.

 

□ 이 지방은 사람들이 신의에 입각한 행위를 하듯이 밝은 지에 입각한 결단을 내리기를 요구한다. 자기 스스로를 키워가고 있는 인간들에게 저의 찬란한 아름다움과 비참을 동시에 부여하는 이 기묘한 고장.

 

이들은 육체에 걸고 도박을 한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가 이 도박에서 반드시 패배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머나먼 미래를 준비하기 위하여 현재의 행복을 끊임없이 희생하며 살아온 사람들에게 지중해안의 사람들은 철부지 같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과거의 추억, 이미 떠나버린 사람, 이미 죽어버린 자들의 기억 속으로 저만큼 떠나 있어서 오히려 현재의 삶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사람들에게 프로방스 사람들은 감정이 메마른 사람들, 인정 없는 사람들 같이 느껴질 지도 모른다. (p. 50~51)

 

Ü 어쩌면 우리는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옛날, 전국시대 현자, 양주는 온전한 삶이 첫째이고 부족한 삶이 둘째이며 죽음이 그 다음이고 압박 받는 삶이 제일 못하다고 말했다. 흔히 시쳇말로 하는 개돼지만도 못한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어서 강신주는 말한다.

 

타자와의 충돌과 상호파괴로는 그 누구도 자신이 이루려고 했던 것을 이루지 못한다. 그런 좌절에도 불구하고 더욱더 자신이 이루려던 것에 집착하면서 우리는 충돌과 파괴의 삶을 강화시켜 나간다. 결국 삶은 지치고 피곤하지만 자신이 돌아가 쉴 곳을 알지 못하게 된다. 마치 강박적으로 음악을 생산해야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피리가 자신의 비어 있음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도대체 어디에서 우리는 편안히 쉴 것인가? 장자는 갈등과 투쟁의 삶은 죽음보다 못한 것이라고 본다. 삶 자체가 원래 이렇게 저주받은 것인가? 우리는 이런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인가?

 

□ 세잔은 우리들의 예술은 흘러가는 시간의 전율을 표현해야 한다. 자연을 그의 영원의 모습으로 환원시켜야 한다. 자연의 이 모든 현상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마도 모든 것이 담겨 있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진실이란 것은 그의 본질에 있어서는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색채만이 그 진실을 표현할 수 있다. 색채는 이 세계의 뿌리다. 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p. 52)

 

Ü 그리하여 이제 비로소 시간을 표현해야 하는 일생일대의 숙제를 나는 부여 받는다.

 

□ 대지가 메마른 곳에는 가장 현명하고 가장 탁월한 영혼이 있다. –헤라클레이토스- (p. 53)

 

Ü그리스인 이야기앙드레 보나르는 메마르고 황량한 그리스가 시를 배우고 바다로 갔다고 했다.

 

이러한 발전 과정 가운데 가장 두렵고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것은 바다를 정복하는 일이었다.

그리스에는바다라는 단어가 없었다. 그리스인들은 어떤 시인의 말처럼가난 때문에 굶주림 배를 채우기 위해바람과 파도가 지배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에 물건을 싣고 나가야 했다.’

 

□ 가장 메마르고 가장 견고한 그들의 영혼을 영원 속에 새겨두기 위하여 그리스인들은 수많은 신전과 수많은 조각상들을 깎아 세웠지만 반면 그들은 이로써 그들의 그 건장하고 행복한 육체가 썩는다는 사실에 대한 가장 깊고 비통한 이해를 표현했다. 알제의 젊은이들처럼 그리스인들도 행복이라는 도박을 그들의 육체에 걸었고 그 도박에서 실패하고 말 것이라는 것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행복에는 희망이 없고 그들의 사랑에는 내일이 없고 그들의 기쁨에는 위안이 없다. 그리하여 그들은 매 순간 가득하고 에누리 없고 회한 없는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비극적인 일생을 마치고 콜로누스에서 장님이 되어 죽어가면서 그래서 참으로 모든 것은 좋았다라고 결산한 오이디푸스 왕자는 그리스인이었다 (p. 54)

 

Ü 아름다운 육체미를 뽐내는 조각상은 역동적이지만 움직일 수 없고 아름답지만 썩지 않는다. 인간과는 아주 다르게 말이다.

 

우리는 멈추어야 한다. 한순간만 넘어서면 모든 것이 다 깨어져버릴지도 모른다. 산타크루스 정상에 도달하기 직전 우리들은 조마조마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 세상에 너무나 많은 것이 가득 차 있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들의 정신이 멀리 가지 못하고 다해버리는 것 같기 때문이다. 정신은 많은 것을 담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정신이 할 수 있는 것이란 측정하는 일뿐이다. 너무나 광대한 풍경은 우리들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속을 다 비워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산타크루스에서는 한계가 파괴되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는 이와 같은 대장관 앞에서 눈을 감고 스스로를 그 속에 몰입시켜 자연 자체가 되고 그 영향을 얻고 싶어질 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후일 그 대장관 없이도 살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대장관은 우리들 자신이 되어버렸을 테니까’ –알베르 카뮈- (p. 57~58)

 

세계의 부조리가 어디 있는가? 이 눈부신 햇빛인가 아니면 햇빛이 없던 때의 추억인가? 기억 속에 이렇게도 많은 햇빛을 담고서 내가 어떻게 무의미에다 걸고 내기를 할 수 있었던가? 내 주변에서는 그래서 놀란다. 나도 때로 놀란다. 바로 그 태양이 그렇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그리고 빛이 너무나 강렬해지다보면 우주와 형상들을 캄캄한 눈부심 속에 응고시키고 마는 것이라고 남들에게,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 대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달리 말할 수도 있을 테지만 내게는 언제나 진리의 빛이었던 이 희고 검은 빛 앞에서 나는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남들이 마구잡이로 논하는 것은 견딜 수가 없는 이 부조리에 대하여 그냥 단순하게 내 생각을 밝혀 두고 싶다. 그래도 역시 부조리를 이야기하다보면 우리는 또다시 햇빛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알베르 카뮈의 산문, ‘수수께기의 첫머리- (p. 59~60)

 

□ 지중해에서 사람들은 헤어지지 않는다. 지중해는 사람들이 만나는 땅이다. 세계사의 한 고향 지중해에는 영원한 현재만이 있을 뿐이다. 하나의 현재, 하나의 사랑이 끝나면 또 하나의 현재, 또 하나의 사랑이 항상 새로 시작한다는 확신을(이것을 고귀한 허영이라고도 말하지만) 가진 돈 후안은 지중해의 사람이었다. 광대한 평원의 한복판에 외따로 세워진 스페인 수도원의 협소한 방에 갇혀 노쇠한 돈 후안이 창밖으로 가슴을 떨며 내다보는 것은 사라져버린 사랑들의 환영이 아니라 스페인의 저 찬란한 대지, 과거도 미래도 영혼도 구원도 없는 인간의 대지, 인간이 그의 최후의 순간까지 그의 죽어야 할 운명의 육체로 껴안고 있고 싶어하는 현재, 현재의 사랑일 뿐이다.

 

바다, 언제나 다시 시작하는 바다!’라고 노래한 발레리도 지중해 사람이었다. 강물은 지나가나 바다는 남는다. 지중해 바닷가에 서면 개인은 항상 죽지만 인간은 현재에 살고 현재에 사는 인간은 영원하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그런 고장에서 실연 소질이라는 낭만주의적 경향을 가진 사람은 참담하다. 역시 헤어지는 방법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그냥 돌아서서 가는 것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우리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참으로 그대의 살은 알 것이다. 생명이 간직하는 것은 오직 새로이 시작하는 현재, 오직 영원한 현재뿐임을. (p. 63)

 

Ü 피와 살을 덧붙이고 사는 조건의 인간, 그 인간의 현재. 어디 피와 살에 미래가 있던가.

 

그때의 햇살이 비치던 아름다운 겨울날이었다. 하늘의 푸른 빛 속에서 노랗게 빗나는 추위가 느껴지고 있었다. 묘지는 시가지를 굽어보고 있었으며 마치 젖은 입술처럼 빛을 받아 진동하는 항만 위로 아름다운 햇빛이 투명하게 내리비치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다 찾아오는 죽음, 그러나 각자에게는 저마다의 죽음. 하여간, 그렇기는 해도 역시 태양은 우리의 뼈를 따뜻하게 덥혀준다’ (p. 70)

 

Ü 카뮈가 그의 산문집 안과 겉속에 그린 그의 할머니의 장례식 풍경이다. 누구에게나 찾오는 것이 죽음이지만 각자에게는 유일무이한 저마다의 죽음이라는 표현은 창의적이다.

 

□ 인간이 쉬 와서 머물고 쉬 사랑하고 그리고 문득 떠나버리는 땅을 우리는 아마도 낙원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낙원에는 꽃과 죽음이 함께 햇빛을 받는다. (p. 72)

 

Ü mistral : 겨울에서 봄 사이에 프랑스의 중앙고원에서 론(Rhone) 강 계곡을 따라 지중해 안의 리용 만 쪽으로 불어 내리는 한랭건조한 국지풍(局地風)이다. 미스트랄은북풍을 뜻한다. 겨울에 저기압이 지중해의 전선을 따라 동진할 때 그 전면으로 북쪽 대륙의 한기가 불어오는 현상이다. 이 한기의 남하는 하곡을 따라 내려오므로 지중해로 향한 몇 줄기의 유로가 생긴다. 이 바람은 연간 100일 정도 나타나며, 론 강 하류 부근에서의 풍속이 30~40m/sec에 이를 때도 있다. 미스트랄의 피해가 심한 곳은 론 강의 델타(delta) 지대와 리용 만이다. 현지 주민들은 방풍림을 심고, 정원에는 두꺼운 담장을 설치하고 창문은 작게 함으로써 이 바람에 대처하고 있다.

 

□ 단테가 처음 신곡을 쓰려고 결심하였을 때 애초에 생각한 언어가 프로방살이었다는 사실도 후일 노벨문학상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미스트랄의 감동적인 시도 오늘날 프로방스 지방의 서점에 간혹 보이는 프로방스어 소설들도 흘러간 시절의 어쩔 수 없는 추억이 되고 만 이 문화, 이 언어의 진면목을 되찾지는 못하고 있다. (p. 75~76)

 

□ 나는 당신이 동양에서 왔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 당신이 젊기 때문에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당신의 청춘에 깊은 질투를 느낍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 소유하는 것이라고 해서 청춘이 흔한 것은 아닙니다. 청춘보다 더 높은 긍지는 없습니다. (p. 76)

 

Ü 모롱 부인이라는 사람이 저자에게 한 말이다. 그녀는 저자에게 시집을 선사하며 늙은 나무가 젊은 태양에게 바침이라 썼다.

 

포도 알이 저의 황금의 즙으로 부풀기 위하여 빛의 줄에서 자양을 취하듯이 나의 가슴은 태양을 먹고 자랐다.’ (p. 77)

 

Ü 모롱 부인의 시? 인 것 같다.

 

□ 해 질 녘이 되면 프로방스에서는 우주가 보인다. 둥근 세계가 보인다. 황혼 녘의 들판은 과일처럼 잘 익은 빵처럼 둥글어진다. 낮에는 늘 만을 생각하던 우리가 저녁 시간이면 나에게서 떠나 시선을 멀리 던지기 때문이다.

 

하루해의 모양은 길지 않다. 화살이나, 길이나, 인간이 경주처럼 어떤 목적을 향해 가는 긴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둥근 모양을 하고 있다. Ü 시간의 무늬다.

 

문명은 우리들이 무엇인가를 향하여 어떤 머나먼 목적을 향하여 가고 있다고 설득시키고자 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유일한 목적은 사는 것이며 삶은 우리가 매일같이 항상 하고 있는 일이며 하루의 매 시각 우리가 살기만 한다면 우리는 진정한 목적을 다 달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모든 문명된 사람들은 새벽에 혹은 그보다 좀더 늦게 혹은 그보다 훨씬 늦게 요컨대 그들이 일을 시작하는 정해진 시각에 하루가 시작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 하루가 그들이 하루 종일이라고 부르는 작업 시간에 걸쳐 있으며 그들이 눈꺼풀을 잠그는 시각에 끝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바로 그들이 날들은 길다고 말한다.

 

아니다. 날들은 둥글다.

 

산다는 것은 그 밖의 어떤 목적도 없다.

 

Heureux celui des mortels sur la terre qui ont vu ces choses. –

지상에 태어나 이 사물들을 본 필멸의 생명은 행복하여라. (p. 79~81)

 

Ü 사는 것이 이리도 위대하였다. 우리는 그래서 위대한 것이다. 절대로 주눅들지 말고 추호도 압박 받지 말지어다.

 

침묵의 공간

 

내가 어머니라 부를 때,

, 집이여!

나는 그대를 생각하네.

내 어린 시절 어둡고 아름다운

여름들의 집이여. –밀로즈-

 

정신, 그 자체의 부정이라는 진리를 위하여 정신이 사멸하는 곳이 있다. 내가 제밀라에 갔을 때 바람과 태양이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딴 얘기다. 우선 말해야 할 것은 그곳을 지배하고 있었던 무겁고 균열 없는 침묵이다. 천칭의 평형과도 흡사한 것이다. 새들의 울음, 삼공의 피리가 내는 부드러운 소리, 산양들의 발자국 소리, 하늘에서 내려오는 소요, 이곳의 침묵과 황폐를 이룰 뿐인 이 갖가지 소리들

 

Ü 내가 히말라야를 갔을 때 바람과 태양이 있었다.

 

여기서는 죽음이 너무나 엄청난 것이어서, 또 너무나 오랜 시일에 걸친 것이어서, 일반화 되어 전체의 우주를 이루고 있는 듯만 싶다. 그래서 슬픔도 공포도 심지어는 허무도 떠나버린 그런 전반적인 죽음을 말한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언어, 우리들의 사고, 우리들의 의식, 우리들의 정신이 잠시 완벽한 침묵으로 돌아가 그 전반적인 죽음 속에 흡수당한다.

 

전에 나는 나의 피부를 통해서 이 세계의 문자를 판독해낼 수 있었다. 왜냐하면 세계가 저의 여름의 뜨거운 숨결로 내 피부를 데우거나 저의 된서리의 이빨로 깨물면서 저의 다정함과 저의 분노의 뜻을 그 위에 그리기 때문이었다.

 

바람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불타는 듯한 전라의 세계를 본떠서 나의 형상을 만들고 있었다. 바람을 통한 이 우주와의 짧은 포옹은 나에게 많은 돌들 중 한 개의 돌, 즉 한 개의 기둥과 여름 하늘 속 한 그루 올리브나무의 고독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p. 89)

 

Ü 바람과 나의 무대의 마음과 만나는 지점, 살아있는 내 피부.

 

□ 카뮈는 문명의 단 한 가지 진정한 진보, 인간이 때때로 집착하게 되는 진보는 의식적인 죽음의 창조이다라고 말했다.

 

의식적인 죽음이란 바로 고대인들이 그들의 생이 끝나가는 자리에서 눈길을 딴 곳으로 돌리지 않고 전신으로 운명과 정대면하며 죽음의 전체를 공포 없이 껴안고 청춘을 탈환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죽음으로부터 위안받지 않는 일이다. 질병처럼 죽음에 서서히 길들지 않는 일이다. (p. 90)

 

Ü 장자는 ‘시작이라는 것이 있다면 일찍이 시작되지 않았던 적이 있을 것이며 일찍이 시작되지 않았던 그 이전도 있을 것이다. 있는 것이 있고 없는 것이 있다면 일찍이 있고 없는 것도 없었던 그 이전도 있을 것이다. 갑자기 없는 것이 존재하게 되는데 그때에도 있고 없는 것 중에 과연 어느 것이 있고 어느 것이 없는지는 알지를 못한다. 지금 내게는 이미 이론이 있다. 그러나 내가 전개한 논리 중에 과연 이론이 존재하는 것일까. 과연 이론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알 수 없다.’ 라고 하며 인간 삶의 유한성 문제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정리했다.

 

첫째, 타자와의 충돌 둘째, 나 자신의 육체의 소멸, 즉 죽음의 도래다.

 

우리는 병이 들거나 늙게 되면 혹은 형을 받아 수족이 절단되면 우리의 마음은 그것에 집착하고 번뇌한다. 그러나 만약 마음이 그런 몸의 변화에 따라 변화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장자에 따르면 인식의 사변적 무한성이 지닌 문제는 그것이 삶이 지닌 근본적 유한성(=타자와의 충돌, 죽음의 문제)을 망각시키는 데 있다.라고 강신주는 분석했다. 카뮈가 말하는 의식적인 죽음이란 장자가 말하는 무대의 마음을 획득하는 방편이 되겠다. 이래서 통하는 모양이다.

 

□ 미래로부터 혹은 과거로부터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지금 딛고 있는 현재의 이 얼마 안 되는 내 살의 무게를 내 일생의 무게로 가늠할 수 있게 하는 참다운 용기를 저 보이지 않는 사막이 일깨운다. 그 용기를 무엇이라 부르는가? (p. 91)

 

□ 그렇다. 세계의 곳곳에 사막의 공간은 좁아져 간다. 석가의 공간도 베드로의 공간도 마호메트의 공간도 좁아져 간다. 이 속에서 사회를 변모시키는 것은 찬성이지만 세계를 변모시키는 것은 반대다라고 말한 카뮈의 목소리는 너무나 나지막하게 들린다. (p. 92)

 

Ü 인간의 야만성이 소용돌이 치고 섞여 치닫는 사회는 분명 변모 되어야 할 대상이지만 살아있음의 본질로 움직이는 현재, 즉 이 세계는 변모시킬 수 없고 변모시켜서도 안 된다.

 

□ 아! 나는 도데의 고장에 왔구나 하고 실감한다. 격하기 쉽고 사나우나 가슴속에는 쉬 눈물이 고일 듯한 나긋나긋한 심장을 소유하였던 사춘의 나이였을 때 고등학교 국어 교실에서 우리들은 저마다 한 통의 편지를 받은 기억이 있다. (p. 93)

 

Ü 쉬는 시간 조차 격한 공차기의 시간이 필요했던 땀의 냄새로 기억되는 그때의 교실에 나근해지는 오후의 햇살 속에 친구의 음성으로 들었던 별이었다. 졸리는 시간, 잠을 자도 뭣할 그때, 우리는 모두 깨어있었다. 화들짝, 스테파네트와 그 목동에 이야기에.

 

1850년 이래 제2제정기의 프로방스는 특유의 풍광이나 습속이 급격하게 수도권의 영향 속에 흡수되고 중앙집권의 손길과 권위가 무미건조한 단일화의 추진력으로 밀어붙이며 지방적 특색을 마멸시키고 있었다. (p. 97)

 

Ü 어디든 인간의 삶이 들끊는 곳에 자연의 본질을 압살하려는 노력은 위정자의 미끈한 웃음으로 진행된다.

 

□ 우주에 가득한 고요, 모든 것이 멈춘다. 내 맥박 속에서 세계사도 멈춘다. (p. 100)

 

Ü 기가 막힌 표현이다. 이 책 어느 표현이 그렇지 않을까만.

 

□ 조국은 그를 반기지 않았으나 조국의 벌 떼들이 반겨주어 양봉으로 생계를 이어 왔다는 그 (p. 103)

 

Ü 톨스토이 만년에 개인 비서를 한 빅토르라는 노인

 

침묵과 벽들만이 메아리를 되돌려 보내는 이름을 내가 부르며 찾아가는 집. 내 목소리 속에 서 있는 이상한 집에는 바람이 살고 있다.’ 피에르 에마뉘엘의 시-

 

나의 집에 당신은 오시겠습니다. 사실 이것은 나의 집도 아니랍니다. 누구의 집인지 나도 모릅니다. 어느 날 나는 그냥 들어왔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하얀 벽에 붉은 고추들이 걸려 있을 뿐 나는 오랫동안 이 집에 있었지만 아무도 찾는 이 없었지만 언제나 나는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자크 프레베르의 시- (p. 105)

 

집은 메아리의 기하학 (p. 106)

 

Ü 이 강렬한 정의는 백 줄의 설명보다 강하다.

 

□ 비어 있을 나의 방, 내가 열지 못하는 나의 빈집은 고통스럽다. 나를 밖에 가두어 놓은 채 저 혼자 잠긴 나의 방은 무의식의 심층처럼 깊고 멀고 어둡다. 그 금지된 방 속에는 또 하나의 내가 저 홀로 산다. 내 모든 추억의 무게로 무거운 발을 끌며 배회한다. 주인이 떠나간 집은 고통스럽다. (p. 109)

 

Ü 빈집, 나의 빈 방, 내가 없는 내 빈 방의 풍경.

 

침묵! 침묵! 바로 이 순간에 세계는 완벽해지지 않았는가? 이게 웬일일까? 가볍고 눈에 보이지 않는 미풍이 깃털의 가벼움으로 가벼운 바다에서 춤추듯 잠이 내 위에서 춤춘다. 잠은 내 눈을 감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 영혼을 깨어나게 한다. 깃털과 같이 가볍게 참으로 가볍게 (p. 112)

 

Ü 잠든 나를 잠든 후에 바라볼 수 있는 그 영혼의 한가함.

 

□ 이 광막한 마음의 공간, 이 무한의 변두리를 더욱 무한하게 넓혀주는 것은 밤일까? 달빛일까? 침묵일까?

 

침묵보다도 더욱 무한한 공간의 느낌을 환기하는 것은 없다. 나는 그 같은 공간 속으로 들어갔다. 소리는 넓이에 채색을 하고 공간에 어떤 음적인 육체를 준다. 그러나 소리의 부재는 공간을 순수한 공간으로 남겨두게 되어 광대한 것, 무한한 것, 심원한 것의 감정이 되게 한다. 침묵 속에서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바로 이런 감정이다. 그 감각이 내 마음을 빼앗아서 나는 몇 분간 밤의 평화가 소유한 이 위대함과 혼연일체가 된다.’보들레르- (p. 114)

 

Ü 영혼의 진보에 대한 밤의 기여. 밤이 없었다면 인간은 삭막하고 삼엄한 세계만을 거닐다 참담하게 생을 마감하였을 것.

 

□ 교교한 달빛 속에 버려진 옛 사원의 폐허, 그 곁에 촘촘히 열을 지어 서 있던 녹슨 철십자가의 무덤 (p. 115)

 

Ü 로부체로 오르는 그 길에 줄지어 선, 케른, 죽은 산악인의 환영.

 

□ 만약 여러분들이 노천에서 밤을 새워본 경험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우리들이 잠들고 있는 그 시각에 어떤 신비로운 세계가 고독과 고요 속에서 눈을 뜬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샘물도 한층 더 맑게 노래하며 연못은 작은 불꽃을 밝히게 된다. 모든 산의 정기가 오고 가며 공중에는 물질과 물질이 가볍게 스치는 소리. 들리지도 않는 작은 음향이 마치 나뭇가지가 굵어지고 풀잎이 자라는 소리처럼 들려온다. 낮이 살아 있는 것의 세상이라면 밤은 무생물의 세계이다. 거기에 익숙지 못한 사람들에겐 언제나 그것은 두려움을 가져오게 한다. (…) 바로 이때 한 아름다운 유성이 우리들의 머리 위를 지나 그와 꼭 같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흡사 우리들이 지금 막 들은 구슬픈 울음 소리가 그 빛을 이끌고 가는 것만 같았다. ‘저게 뭐예요!’ 스테파네트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 ‘그건요, 천국으로 들어가는 한 넋이랍니다.’하고 나는 십자가를 그었다.’ (p. 116)

 

Ü , 나즈막이 소리 내어 보라. 입술이 붙어 육감적이고 그 마지막엔 혀끝이 천장에 붙어 아득해진다.

 

세계 최초의 아침

 

그네 두 눈은

태양보다

먼저 일어난다. –폴 엘뤼아르-

 

□ 멀리 떠나서도 생래의 공간 속에 비유적으로 나마 낯선 이방을 편입시키고 나서야 안도감을 느끼는 이 병을 무엇이라고 부른 것인가? (p. 122)

 

□ 나는 칸 비에르를 지나는 쾌할하고 사납고 사실은 다정한 모든 지중해 처녀들을 눈여겨보며 걷기를 좋아한다. (p. 123)

 

Ü 그러다 그 여인의 향기가 바람에라도 날아오는 날이면 내 코끝은 자지러진다. 

 

□ 그러나 그 바다 기슭에 살며 간단없이 드나드는 상선과 여객선을 바라보는 젊은 가슴엔 바람이 들어 달뜬다. (p. 125)

 

□ 론 강의 달큰한 물로 빚어 담은 포도주와 곁들어 먹어보라. (p. 126)

 

바닷가에 사는 모든 청년들이 앓는 질병 먼 곳에 대한 가눌 길 없는 충동 (p. 127)

 

이 아이가 태어났을 때는 4킬로의 무게였지. 4킬로나 되는 제 어미의 살이었지 그러나 오늘은 9킬로야. 그 사이에 불은 다섯 킬로의 무게가 누구의 것인지 아니? 그 다섯 킬로는 사랑이야. 부드럽게 감싸는 듯한 그 사랑의 무게. 그러나 그것은 담배연기처럼 가늘고 푸르고 연약한 것. 다섯 킬로나 채우자면 사랑은 많이 필요해. 나도 내 몫을 치렀지만 가장 많이 바친 사람은 파니스야. 그런데 마리우스 너는 무엇을 주었지?’ (p. 129)

 

Ü 마리우스는 친아버지고 파니스는 의붓 아버지다.

 

□ 죽는 것쯤은 그에게 고통이 아니지만 살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서운하다는 말이야. 파니스가 행복한 삶과 작별하는 모습은 그것이 불행의 시작이기 때문이 아니라 행복의 끝이기 때문에 참으로 비통하다. (p. 131)

 

나는 언젠가 죽을 몸이다. 그러나 이 말은 아무런 뜻도 없다. 나는 그것을 믿을 수가 없다. 나는 타인의 죽음 이외에 죽음의 경험을 할 수가 없다. 나는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본 일이 있다. 특히 나는 개들이 죽는 것을 보았다. 내 속을 참으로 뒤집는 것은 그것들을 만져보았을 때이다. 그때 나는 생각한다. 물과 미소와 여자에 대한 욕망을. 그때 나는 죽음에 대한 몸서리침은 삶에 대한 억누를 길 없는 선망에서 온다는 것을 깨닫는다.’ –알베르 카뮈-(p. 133)

 

Ü 타자의 죽음, 그 죽음의 감촉. 나에게 전해지는 또 다시의 욕망.

 

□ 나체주의, 그 체제 냄새 (p. 141)

 

그들이 어디선가 나체주의자들, 다시 말해서 육체의 청교도들이 주장하는 설교문을 읽었기 때문은 아니다. 체제화된 정신에 못지않게 육체의 체제화도 난처한 것이다. 단지 그들은 햇빛 속에서는 기분이 좋기 때문이다.’알베르 카뮈- (p. 142)

 

Ü 육체의 체제, 또 다른 나체의 탄생.

 

수영. 물기로 번들거리는 두 팔이 바다 밖으로 솟아나와 햇빛에 금빛으로 물들고 모든 근육이 뒤틀리는 가운데 내리쳐진다. 물이 내 육체 위를 달린다. 내 두 다리가 파도를 거세게 소유한다. 그러고는 수평선이 잠시 부재한다. 그리고 모래사장에 나오면 모래 위에 거꾸로 쏟아지듯 던져진다. 이 세계 속에 다시 던져진다. 살과 뼈의 중량 속으로 되돌아와서, 태양으로 어리둥절해진 채 점점 아득히 내 팔 위에 시선을 던지면 마른 피부에는 물기가 미끄러지면서 노란 잔털과 소금가루(p. 143)

 

Ü 육체의 기쁨을 노래한다. 물과 땅, 하늘과 바다의 포옹, 저자는 지중해가 이것들을 마련하고 있다고 얘기하고 있다.

 

□ 빛의 솟아오름에 따라 모래 발자국, 그 미시적인 산그늘이 좁아지고 금빛이 모래를 황홀한 재화로 만들고 있었다. (p. 144)

 

Ü 더러는

 

토스카나의 부활절

 

한국의 가을은 우리 별에 찾아오는 가장 아름다운 가을일지 모르지만 봄은 너무 천천히, 그리고 너무 경련하면서 온다. 매화꽃이 눈 속에서 피는 것은 어쩌면 기적과 같은 기쁨일지 모른다. (p. 149)

 

Ü 전적으로 동의한다.

 

□ 그것은 급속한 시간 속에 그토록 다른 두 공간을 충격적으로 연결시키는 비행기의 속도 덕분이다. (p. 150)

 

□ 겨울에서 출발하여 불과 사십 문만이면 나의 몸은 봄의 심장 속에 당도하여 불현듯 진정한 부활절을 맞이한다 (p. 151)

 

□ 삶은 침묵과 불꽃과 부동 속에서 세 번 증언하는 것이라고 카뮈에게 가르쳐주었다는 토스카나의 대예술가들 (p. 151)

 

Ü 장자는 부동을 강신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소용돌이나 태풍의 눈이 비어 있는 상태는 강렬한 소용돌이를 가능하게 하는 부동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결국 소용돌이의 내부가 비어 있음은 외부의 강렬한 운동과 동시적인 사태인 것이다. 그래서 장자가 권고하는 원환의 중심을 얻는 것, 혹은 빔 일종의 정적주의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런 고요함이 역동성의 이면이라는 것, 비움이 타자와의 민감한 소통과 동시적 사태 일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 부재가 있고 거리가 있고 그로 인하여 다가가고 합일하려는 욕망도 있는 이 언어의 세계만이 우리들의 왕국이다. (p. 159)

 

Ü 그리하여 언어는 진보를 말하기도 하지만 그런 진보조차 인간에게 부질없음을 장자는 말하였다. 장자에게는 언어, 자의식, 고착된 자의식은 그래서 버려야만 할 혹이었다.

 

□ 잘 보이지 않는 천장화를 바라보면서 나는 물론 그 위대한 미켈란젤로를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더욱 강렬하게 나는 회상하였다. 내 이린 시절을 가장 종교적인 신비와 공포로 물들게 하였던 부석사의 단청과 여의주를 물고 밖으로 튀어나갈 것만 같던 용의 머리를 (p. 159)

 

Ü 이 뜬금 없는 대조는 필연으로 엮이어 미켈란젤로와 그 이름없는 목수를 등가시킨다.

 

□ 수없이 많은 근육의 힘, 그만큼 많은 고통과 아름다움의 동력이 합하여 꿈틀거리는 몸의 곡선 (p. 160)

 

□ 낯선 땅에 던져진 고백하기 어려운 그 유난스러운 공포감, 그리고 아마 호주머니 사정과 관련한 이상한 극기심 (p. 166)

 

□ 안방까지 쳐들어올 것 같은 친절 (p. 168)

 

Ü 아름다운 여인들을 대하는 이탈리아 남자들의 대담성

 

□ 내 정신을 휩싸던 내 이십대 모든 여자들의 알 수 없는 추억들, 연두색 새 잎이 돋아나는 한적한 오솔길 위에서 나는 문득 여자들을 다 사랑하였다. 그것은 나의 현재 속으로 함몰되는 모든 과거의 사랑의 충격들이 조금씩 완화되면서 연두색의 풀잎으로 내 전시에 돋아나는 것 같은 순간의 경험이었다. (p. 170)

 

Ü 저자는 연두색에 특별한 연정을 품고 있다. 당시의 현재들에 수많은 사랑과 가시는 일순간 표면처리 되어 사랑의 눈길만을 건네고 싶은 추억이 되었다.

 

□ 역사의 유적은 찾아가보면 감동적이지만 사진첩과 역사책과 여행 안내서가 이미 한발 앞서 더듬어간 자리이기 쉽다. (p. 171)

 

Ü 그러므로 follower의 지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지위의 자리를 싫어하는 류의 사람은 이것은 모욕으로 다가오지 않겠는가.

 

□ 피렌체의 프랑스 이름 플로랑스에 대하여 장 폴 사르트르가 환기시킨 하늘의 황금빛과 굽이치는 강의 이미지는 내 오후 세 시의 기차보다는 훨씬 더 먼 아름다움이었다. 카뮈가 스승 장 그르니에에게 바친 사막은 이렇게 시작한다.

 

산다는 것은 물론 표현한다는 것과는 어느 정도 반대되는 것이다. 토스카나 파의 대화가들에 의하면, 산다는 것은 침묵과 불꽃과 부동 속에서 이렇게 세 번에 걸쳐 증언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거장들의 그림 속에 그려진 인물들이 우리가 피렌체나 피사의 길거리에서 매일같이 마주치는 바로 그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자면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참다운 얼굴을 제대로 바라볼 줄도 모르게 되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는 이제 동시대 사람들을 잘 바라보지도 않게 되었다. 오로지 그들에게서 우리의 처신에 필요한 방향과 규칙만을 찾는 데 급급한 탓이다. 우리는 사람의 얼굴 그 자체보다는 가장 천박한 시에 더 관심이 있는 것이다.’

 

존재의 참된 증거인 살과 뼈를 그 자체로서 바라보기 전에 우리는 그 사람의 이름, 신분, 그의 보이지 않는 생각과 인격에 따라서만 그 사람의 모습을 해석하려 든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른 바 카뮈가 천박한 시라고 부르는 것) 이전에 사람의 얼굴은 생명이 약동하는 살과 뼈로 거기에 있다. (p. 173)

 

Ü 침묵으로 깊어진 다음 불꽃으로 순간을 살아내고 타버린 다음의 인생을 음미하는 부동. 그러나 부동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강렬한 소용돌이를 가능하게 하는 부동의 중심이다.

 

□ 침묵 속에 그 의미 이전의 생명이라는 불꽃 속에 존재로 나타나기 위하여 잠시 육체가 정지하고 있는 부동 속에 삶이 그의 전모를 드러낸다. (p. 174)

 

□ 아무리 무거운 것이라도 자기 몸의 일부분을 함께 들어야 하는 자가 느끼는 무게보다는 덜 무겁다. 아틀라스의 고통은 바로 분리된 타자가 아닌 자아까지도 두 팔 두 어깨로 받쳐들어야 하는 모순된 포지션에서 생겨난다. 그래서 시시포스와 아틀라스는 모순된 조건 속에 태어난 존재의 고통, 그와 동시에 살아 있는 살의 기쁨 속에서 만나는 두 형제이다.

시시포스에게서 오직 팽팽하게 긴장한 몸이 엄청나게 큰 돌을 들어 올리고 굴려서 수없이 되풀이하여 언덕 위로 밀어올리려는 노력만이 보인다. 뒤틀린 얼굴, 돌에 꽉 붙이고 있는 경련하는 얼굴이 보인다. 진흙으로 뒤덮인 그 돌덩이리를 떠받는 어깨의 힘, 그 돌을 고이는 한쪽 다리, 팔 끝으로 버티는 되풀이, 흙 묻은 두 손의 너무나 인간적인 확신, 하늘 없는 공간과 깊이 없는 시간으로 헤아린 이 모든 노력을 통하여 목표는 달성된다.’

 

이 투쟁과 경련하는 몸의 공간, 그 속에 토스카나 사람들은 신이 아니라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의 문명을 건설하였다. (p. 177)

 

Ü 시시포스를 사진으로 찍는다.

 

□ 화가만이 우리들의 굶주린 정신을 만족시켜줄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즉 화가는 육체의 소설가 노릇을 할 특권을 가지기 때문이다. 또 화가는 현재라고 하는 이 장엄하고도 덧없는 질료를 가지고 작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는 늘 어떤 몸짓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화가는 하나의 미소,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수줍음, 회한이나 기대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튀어 나오고 들어간 골격과 따뜻하게 피가 흐르는 얼굴을 그린다. 영원한 선 속에 고정되어버린 얼굴에서 화가는 정신의 저주를 영원히 추방했다. 그것은 희망이라는 대가를 지불함으로써 가능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육체는 희망 같은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육체가 알고 있는 것은 오직 피의 고동뿐이다. 육체가 알고 있는 영원은 다름 아닌 무심이다. (p. 178)

 

Ü 그래서 육체는 정신의 지배를 받는다. 오늘에 살기 때문에 지배 받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그 정신조차 육체다. 지배와 피지배의 자웅동체, 이 아이러니는 인류의 고민거리였다.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는 고민의 힘이 신에게 닿지 못한 채 말이다.

 

□ 내일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이 그 무엇엔들 감동을 느낄 수 있겠는가? 희망을 모르는 인간의 이 무감각과 위대함은 바로 통찰력 있는 신학자들이 지옥이라고 불렀던 그것이다. 누구나 다 알다시피 지옥이란 다름 아닌 고뇌하는 육체이다. 토스카나 거장들의 관심을 모으는 곳이 바로 이 육체일 뿐 그의 운명이 아니다. 예언적인 회화란 없다. 희망의 이유를 찾을 곳은 미술관이 아니다. (p. 179)

 

Ü 현재의 시선, 그 시선의 박제, 박제된 현재. 그러나 영원히 사는 법.

 

□ 경쾌한 의상의 그늘 속에서 유방을 흔들며 지나가는 피렌체의 주일 아침의 입술 젖은 여자들 (p. 180)

 

□ 아카데미 미술관 앞에서 버스를 타면 보카치오의 고향, 데카메론의 무대가 된 그 빛 밝은 언덕 지방을 따라 한 시간 채 못 되어 프란체스코 수도원이 있는 피에솔레에 당도한다. (p. 183)

 

Ü 보카치오는 데카메론의 머리말에 이렇게 말한다.

 

따라서, 우리가 목격하듯 마음씨 부드러운 부인네에게 도움을 주는 데는 가장 인색한 운명의 불공평함을 어느 정도 바로 잡기 위하여, 사랑을 하고 있는 부인네들에게는 구원도 되고 위안도 되는 또 사랑을 하지 않는 분들은 바느질이나 물렛가락이나 실을 감는 일로도 충분한 위안을 얻겠습니다만, 백 편의 이야기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 가운데에는 동화와 비유와 역사 이야기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이것은 무서운 흑사변이 온 거리에 퍼졌을 때 기품 있는 일곱 부인과 세 젊은 남성이 모여 열흘 동안에 이야기한 것들 입니다. 또 몇몇 부인네들이 여흥으로 부른 칸초네도 들어 있지요.’

 

프란체스코 수도원 이야기는 신곡의 천국편 11곡에 나온다.

 

그의 영적인 법정 앞에서 그는

아버지가 있는 가운데 그녀를 아내를 맞아들였고 날마다 더욱더 사랑했지요.

첫번째 남편을 여읜 이 여자는 그가 올 때까지 천백 년하고도 더 많은

세월 동안 누구의 초대도 받지 못하며 살았소.

 

(그녀는청빈이고 그는 성 프란체스코다. 청빈을 의인화 했다.)

 

또 마리아께서 아래 세상에 머물러 계셨을 때 이 여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 위에서 통곡할 정도로 굳세고 지독한 끈기를 보였지만 그래도 혼자였소.

그리고 그 뒤 그 아버지이자 스승은 이제는 초라한 끈으로 서로를 동여맨

그의 여인과 가족들을 데리고 떠났다오.’

 

(그리스도는 교리의 전부라 할 만큼 청빈을 강조하고 있다. 그 자신이 발가벗은 몸으로 죽임을 당할 만큼 청빈이 상징적임에도 어째서 오늘날 귀족 종교가 되었나. 네온 싸인의 십자가가 서글프게 느껴진다.)

 

그 수려한 영혼은 자기 자리로 돌아가면서도 자기가 선택한 청빈의 품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다른 관을 원하지 않았소.’

 

(성 프란체스코는 임종에 이르러 벌거벗긴 채 맨 땅에 눕혀 달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청빈의 헌신을 마지막까지 실천한 인간이다.)

 

창 너머로는 피렌체가 내다보이고 책상 위에는 죽음이 놓여 있다. 절망 속에서 어느 만큼 계속하여 견디다보면 희열이 생겨 날 수도 있다. –알베르 카뮈-

 

내가 그곳에서 배운 것은 인생의 무상함이 아니다. 그 촉루와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피렌체의 창밖 풍경은 무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 삶을 참으로 삶이게 하는 행복과 비극의 표리라는 진실을 사막의 시인은 말한다. (p. 184)

 

Ü 아이와 여행하는 것, 아이의 시선을 빌려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것! 이것은 황홀한 환동! 왠 금 없는 아이와의 여행? 참으로 삶이게 한다는 그 행복에서 삶은 아이의 시선으로 볼 때 참이라는 생각이 순간 지배했던 모양이다. 그래 아이와 여행하자.

 

꿈 속의 죽음, 물 속의 베네치아

 

배이자 관이고 관이자 배인 카롱의 통나무처럼

삶과 죽음이 따로 없는 안개 속,

시간도 공간도, 위도 아래도 없는 몽환 속으로

곤돌라가 가고 있다.

 

□ 거침없는 우월감,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건너간 조상들에게서 또 그들 나라의 광대한 공간에서 물려받은 긍지인지도 모른다. 해묵은 노대륙에 수십 세기 동안 쌓이고 쌓인 문화 콤플렉스와 완전히 무관해진 이 세대, 이 얄궂은 개량종의 막대한 자유의 힘, 그 행복한 무지의 힘 속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아무렇게나 걸친 블루진 바지며 멋대가리 없고 그저 건강하기만 한 체격, 허름한 셔츠, 손에 든 안내서 ‘5$ a day in europe’이 너덜너덜 걸레가 되어 들려 있다. (p. 190)

 

Ü 저자는 제국을 정조준하고 있다. 그러나 그네들의 자유의 힘은 저자가 그토록 사랑해 마지 않는 지중해의 풍광에 힘입은 바 크다. 근본 없는 자유라지만 저자의 종교와 같은 지중해와 그네들의 자유는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다. 다만 다른 점은, 자본의 윗옷을 걸치고 있다는 것뿐.

 

□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받는 사람보다 한층 더 신에게 가깝다. 왜냐하면 전자 속에는 신이 있지만 사랑받는 사람 속에는 신이 없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육체, 생명감, 예술, 그리고 미에 대한 깊은 연정은 구스타프 폰 아센바흐를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으로 인도했다. (p. 194)

 

□ 나는 땅바닥에 엎디어서 머릿속에 세계지도를 펴놓고 나의 위치를 생각해보고 지구 저편 극동의 대륙 한 귀퉁이에 매달려 있는 내 조그만 고향을 그곳에 남겨두고 온 정든 사람들, 그럴 때일수록 더욱 얄궂게 그리워지는 사람들을 생각하였다 (p. 198)

 

나는 어디 있을까? 나는 누구일까? 나는 몇 살쯤 먹은 사람일까? 아아 우리들이 잠든 사이에 한 도시가, 한 땅 덩어리가, 하나의 별이 이렇게 잠깐 다녀오는 세계는 이와 같은 것이다. 나는 본의 아닌 노숙 덕에 그 꿈길을 다녀오는 베네치아를 남몰래 숨어서 보았다. (p. 199)

 

Ü 심상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인가, 상상할 수 있는 한 마음으로 마음껏 거침없이 해댄다.

 

잔잔한 파도는 조금씩 다가와서 그의 발끝을 적시곤 하는 것이었다. 꿀빛깔의 머리털은 곱슬거리면서 뒷덜미와 목에 흘러내리고 태양은 척추의 윗부분에 있은 솜털을 비춰주었다. 그리고 늑골의 섬세한 자국과 가슴의 균형은 동체가 평평하게 졸리도록 입고 있는 수영복을 통해서 또렷이 드러나 보였다. 겨드랑이는 무슨 조각품에서와 같이 매끈하였고 정강이는 반짝였다. 구김살 없이 쪽 펴져 있고 젊음 속에 완전무결한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그 육체 속에는 대체 어떠한 규율이 어떠한 사상의 정밀함이 표현되어 있을 것인가? 어둠 속에서 작용하여 그처럼 신기한 조각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그 엄격하고 순수한 의지는 예술가인 아센바흐 자신에게도 잘 알려져 있고 익숙한 것이 아니던가?

 

그 유동적이며 형태를 거부하는 바다의 영원한 그 곁에서 형태적 아름다움과 쉬 지나가지만 생명의지를 현실로 실현하고 있는 필사의 육체는 우리들 삶과 직결된 미의식의 원천인지도 모른다. 참담한 생명의 의지, 참담한 미의 의지를 바닷가의 아름다운 육체보다 더 감동적으로 증언하는 것이 어디 또 있겠는가? 최초의 여자 아프로디테는 아마도 저 형태미를 거부하는 바다로부터 솟아나는 생명이기 때문에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리라. (p. 205~206)

 

Ü 니체는 의지와 파도를 말한 적이 있다.

 

의지와 파도

흡사 누군가를 앞지르기라도 하려는 듯이 마치 가치 있는 가장 높은 가치가 있는 것이 거기에 숨겨져 있기나 한 듯 보인다. 그리고 이제 파도는 다소 천천히 그래도 아직 흥분하여 하얀 거품을 내며 되돌아오고 있다. 실망했는가? 찾고 있던 것을 발견했는가? 실망한 척을 하고 있는가? – 그러나 이미 또 다른 파도가 처음 것보다 더 탐욕스럽고 야만스럽게 다가오고 있다. 이렇게 파도는 산다.’

 

신의 존재증명을 하고자 페일리는 지적설계론을 세상에 던졌다. intelligent design theory, 오존층의 두께가 생물 보호에 어쩌면 그리 적합한가? 이는 오직 신의 설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식의 주장이다. 그러나 지적설계론은 바닷가 나체의 인간이 파도를 적시는 그 육체를 설명하지 못한다. 적어도 페일리에게서 신은 실패했다.

 

발레아르의 영원한 봄

 

지중해의 한복판에서 유럽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을 양쪽으로 당기고 있는 마요르카, 미노르카, 팔마, 이비사, 포르멘테라 섬들의 부름을 내가 어찌 거절하겠는가 (p. 212)

 

□ 어떤 땅과 맺어진 자신의 유대를 느낀다는 것, 몇몇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감지한다는 것, 가슴이 친화를 찾을 수 있는 장소가 언제나 어디엔가 있음을 안다는 것, 그렇다, 그것만으로도 벌써 한 인간의 살이 맛볼 수 있는 대단한 확신이다.

 

인간을 초월하는 행복이란 없다는 것을, 하룻날의 곡선 저 너머에 영원은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배운다. 이 비천하나 본질적인 인간의 부, 이 상대적 진실만이 나를 감동시킨다. (p. 214)

 

Ü 존재 너머를 가늠하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음에도 단지 지적 허영에서 나는 갈구했다. 그러나 허영 이면의 허무를 알아채고 나면 언젠가 나는 그 너머의 일을 찾아 다니는 불을 내려 놓을 것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중단해야 함에도 놓지 못하는 것은 여전히 어리석음의 피가 내 안에 돌고 있기 때문이다.

 

비극 냄새가 나지 않는 헤어짐의 가벼운 슬픔을 나는 감미롭게 음미한다 (p. 215)

 

Ü 기가 막힌 표현이다.

 

□ 잘 닦은 유리잔 속의 검붉은 술 빛과 그 너머 발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푸른 바다, 그 두 개의 도취감을 연결하는 바람과 더불어 낙원을 실감한다. (p. 220)

 

Ü 시칠리아 체팔루로 기억 된다. 그 마을 입구의 이오니아해를 감상할 수 있는 레스토랑이 있다. 이 문장은 거기의 것이다.

 

여행 중에 아무리 즐거운 곳이라 하더라도 이미 청춘이 다한 늙은이들만이 돈으로 청춘까지 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사이에 끼어 있고 보면 일찍부터 양로원의 서기 자리에 취직한 기분이 들어 울적한 법이다. 그러나 가진 것 중에 무엇보다 자랑스러운 것은 튼튼한 몸, 틀에 박히지 않은 자유, 쉬 떠나고 쉬 머무는 역동성, 그리고 세계를 한 가슴에 다 품을 수 있는 젊음이라는 듯이 허름한 블루진을 걸치고 큼지막한 입술이 가슴팍에 그려진 엷은 셔츠 차림으로 언제나 밝게 웃는 그 젊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으면 나의 마음과 몸이 해풍처럼 가벼워진다 (p. 221)

 

Ü 젊어서 노세 했던 먼저간 이들은 청춘을 깊이 부러워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35. 젊음과 늙음의 그 언저리, 주변, 그 가장자리적 변방의 존재가 좋다.

 

몸에 착 붙는 푸른 옷 위에 그 여자는 재스민 꽃목걸이를 달고 있었다. 옷은 허리에서 다리까지 땀에 젖어 있었다. 그 여자는 춤추며 웃어대었고 머리를 뒤로 젖히곤 했다. 그 여자가 테이블 옆으로 지날 때면 꽃냄새와 땀냄새가 뒤섞인 향기를 뒤에 남기곤 했다.

 

그녀가 부푼 그의 목을 뒤로 젖힐 때면 그의 웃음소리가 들렸고 갑자기 몸을 앞으로 숙이는 그녀의 파트너의 프로필이 보였다.

 

파도바니에서도 팔마에서도, 이비사에서도, 지중해의 청춘은 대책 없이 행복하고 무작정 천진하다. 그들은 모두 하늘과 바다의 아들딸들이기 때문이다. (p. 223)

 

Ü 나는 이 여인의 묘사가 그리 좋을 수 없다. 아득한 표현이지만 선명하다.

 

□ 나는 그곳에서 그 초록색 저녁 속에 잠겨 있었다. 그렇다. 바닷바람과 소금과 햇빛의 냄새가 나는 삶의 기쁨을 이제 나의 살과 나의 젊은 몸이 만끽한다.

 

따뜻한 겨울, 따뜻한 바닷가에 그때는 벌써 참으로 처녀같이 되었을 주느비에브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바다와 눈부신 보랏빛 꽃들은 여전히 거기 있으리라. 영원한 지중해의 봄을 남몰래 간직하면서 그때 다시 가보고 싶다. 영원히 다시 가보고 싶다. 참으로 젊은 나의 땅을, 나의 바다를 영혼 속에 다시 껴안기 위해. (p. 226)

 

당신은 혹시 보았는가? 사람들의 가슴속에 자라나는 그 잘 익은 별을. 혹은 그 넘실거리는 바다를. 그때 나지막이 발음해보라. ‘청춘그 말 속에 부는 바람 소리가 당신의 영혼에 폭풍을 몰고 올 때까지. (p. 229)

 

Ü 그리하여 신은 없다.

현실 위에 그 너머에 존재하는 행복은 없으므로.

우리가 살아있음에 세계는 우연이다.

그리하여 신은 죽었다 했던 니체의 말은 옳은 것으로 증명되었다.

 

 

3. ‘글그림(내가 저자라면)

그림 한 장 없는 이 책은 책을 덮고 난 뒤 마치 그림책을 본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언어로 그린 명화로 뒤덮여 있다. 그림글을 그려 놓은 듯한 착각이기도 사실이기도 한 글의 마술이 펼쳐져 있다. 그러므로 베껴 쓰지 않을 문장을 찾는 내 머리는 바빴고 베껴 써야 할 문장으로 내 손이 바빴다. 또한, 어려운 단어 하나 없는 중에 내용의 깊이는 심연이고 넓이는 벌판이다. 묘사란 이런 것, 심상이란 이런 것, 감각이란 이런 것, 그리고 글이란 이런 것. 나는 그에 대한 질투로 마지막 장을 넘기기까지 괴로웠다.

 

그러나, 그의 글에 묻어나는 인텔리 지적 허영을 답습하진 않는다. 나는 단지 그의 문장에 살아있는 수사를 그 유려한 언어 마술만을 배운다. 동시대 프랑스에 있었던 홍세화, 그의 친구였던 문학 비평가 김현, 그리고 김화영. 비슷한 연배의 다른 길을 간 세 사람, 그들의 당시 고민을 짐작해 보는 것도 흥미롭다.

 

행복의 충격을 읽으며 도서관엘 가서 그가 이제껏 써낸 모든 책들을 가져왔다. 전작주의에 익숙하진 않으나 그의 떡잎? 읽고 난 후 나는 그가 무지하게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얇은 행복의 충격을 빠르게 읽고 난 뒤 바람을 담는 집, 시간의 파도로 지은 성 등 읽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은 그의 책들을 계속해서 읽기로 했다. 누군가 그랬는가, 언어의 확장은 곧 사유의 확장이다라고. 그의 글을 읽으며 설기 설기 엮여져 있고 떠다니던 사유들이 일시에 집합하여 섞인 다음 발육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렇다. 나는 그의 글을 배우고 싶다. 그리 되진 않겠지만 그의 글을 능가하는 카메라를 장착하고 싶다. 오르지 못할 일이겠지만 또 하나의 산을 만났다. 산이 높을수록 내 가슴이 뛰듯 그의 글에 내 가슴이 팔딱거린다. 진정시키려 한참을 손을 갖다 대어 보지만 좀처럼 가라앉지 않아 나를 당혹하게 하는 내 심장의 맥박. 그로 인해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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