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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2월 26일 08시 29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켄 윌버(Ken Wilber 1949년1월31~) 통합적 영성의 대가.

 

미국에서 출생, 아버지가 직업군인(공군장교)였던 탓에 이사를 자주 다니게 되어 전학도 자주 다녔다. 듀트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했으나 과학이 좋아 생화학으로 바꾸어 공부를 시작했으나 2학년때 듀크대학을 그만두고 부모가 살던 네브라스카로 돌아와 대학에 다니면서 영적 서적, 심리학 철학 책들을 차근차근 독파해 간다. 생화학을 전공으로 대학원을 잠시 다녔지만 이른 나이에 결혼하면서 학업을 중단함. 그는 학자로서 정규교육과정을 거처 성장한 것이 아니고 독학으로 동서양의 모든 학문을 통달함. 노자의 도덕경을 읽고 동, 서양의 심리학과 철학에 몰두. 박사과정을 밟던 중 일본선원의 선사와 티벳 선원의 린포체 지도하에 영적 수행의 길을 정진했다.

 

트랜스퍼스널(자아초월)심리학의 태동기인 70년대 초에 27세의 나이에 <의식의 스펙트럼>이란 획기적은 책으로 이 분야의 학자와 전문가들을 깜짝 놀라게 하며 혜성처럼 나타났다. 당시 인본주의 심리학을 넘어 인간의식에 있어 보다 상위의 자아초월, 초 의식영역으로 의식을 확장하거나 체험하기 위해 약물에 의한 트랜스Trance, 주술, 명상 등에 의한 심령현상, 환각체험 등을 주로 조사 연구하는 이른바 4 심리학의 트랜스퍼스널 심리학이 아무런 이론적 패러다임이나 틀이 없을 때, 그는 동서양의 전승지혜와 신비사상을 근대의 철학, 심리학과 접목하고 모든 자아 의식수준을 망라하는 스펙트럼 의식 심리학.을 자아 의식심리하고, 심리정신치료의 모든 분야를 포괄하고 포섭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였다.

 

트랜스퍼스널 사상의 전개과정

 

1(되찾은 선, 낭만주의모형시기  Winber Model 1)

트랜스펄스널 심리학의 가장 광범위하고 심오한 이론적 定礎정초를 제공. 저서 <의식의 스펙트럼, 무경계>

 

2(진화로의 변혁, 발달적 모형시기 Winber Model2)

발달심리학적으로 본격적인 트랜스퍼스널 사상을 보여줌. 저서<아트만 프로젝트>

 

3(통합적 비젼 모형시기, Wilber Model3) 저서<의식의 변용> 이 나올 즈음

이미 트랜스퍼스널 분야의 최고의 사상가, 대이론가, 대담론가로서 위치를 굳건히 하는 대표 사상가가 되어있었다.

 

4 (사상한과 포스트모던비판모형시기, Wilber Model 4)

<성 생태영성> <모든 것의 역사> <영의 눈> <감각과 영혼의 만남>

 

개인적인 삶

 

20대 초부터 명상, 참선, 연구, 저술로 일관된 활발하면서도 영적 구루와도 같은 삶을 살았으나, 그의 결혼생활은 많은 시련을 겪었다. 첫 아내와는 1981(32)에 헤어짐. 1983(34) 그를 숭배하며 흠모하던 시인이며 작가인 트레야킬람을 만나 두 주 만에 결혼을 약속하고 넉 달 동안의 준비기간을 걸쳐 결혼한다. 결혼한지 5일만에 트레야는 유방암 판정을 받고 5년 동안 아내의 병 치료를 위해 가족 부양자 노릇을 하지만 1989년 사망함. 이 일을 기록한 자전적 저서<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용기>펴냄. 번째의 결혼은 자식을 갖는 문제로 갈등을 빚어 이혼을 함.

 

참조 : 무경계, 켄 윌버 김철수 옮김 정신세계사

http://cafe.daum.net/sojourner

http://search.daum.net/search?w=tot&nil_profile=fix_similar&q=%EC%BC%84+%EC%9C%8C%EB%B2%84

http://cafe.daum.net/intergralCenter/HwzX/2?docid=4116395921&q=%C4%CB%20%C0%AA%B9%F6

http://blog.daum.net/c6353/265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73380

http://www.beopbo.com/news/view.html?section=1&category=83&no=72452

 

[나의 느낌]

 

지난 1월 살롱구의 오픈 파티날이다. 지인으로 부터 연락이 왔다. 오픈식이 몇시에 있는냐고 물었다. 연구소와는 직접적인 인연이 없는 사람이라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더니 주체측의 누군가와 아는 사이라서 초대를 받았다고 했다. 그런데 식이 시작하는 시각에는 시간을 내기 어려움을 이야기한다. 마침 나도 좀 일찍 다녀 와야 하는 상황이라 잘 되었다 싶어서 미리 참석하는 것은 어떠냐고 의향을 물으니 흔쾌히 그러마하고 말한다. 식을 준비하는 사람들 틈에서 테이블 하나를 차지했다. 나와 나의 동행인 언니 한 분과 전화의 그 친구가 앉았다. 차를 한 잔씩 마주하고 이바구를 하기 시작했다. 그 친구의 직업이 주로 말을 하는 남들 앞에서 강의를 많이 한 사람이라 재미나게 주제를 이끌어가고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되었다. 어떤 대화를 하다가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공부중인 불교대학원의 커리큘럼이었을 수도 있겠다. 켄 윌버라는 작가의 이야기를 꺼냈다. 하얀 백지 한 장을 꺼내고 그림을 그리고 시작했다. 통합심리학의 대가...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참 하더니 이 사람 책은 참 어렵다. 정통학파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도 있다. 말하는 이가 재미있어서도 그렇고 듣는 이가 잘 들어서도 그렇겠다. 세사람이 주거니받거니 잘 놀고 살롱을 나왔다. 다음날 나와 동행했던 언니로 부터 어제의 그 작가 이름을 물어왔다. 메모장을 뒤져보니 사라졌다. 어디에 메모를 해 놓았는고? 분명히 휴대폰 메모장이었는데 저장을 잘 못했나...어려운 이름도 아니었는데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네.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한 내용은 생각이 나는데 저자의 이름도 통합심리학이란 분야도 생각나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 작가의 이름을 물어보고 지인에게 알려드리고 나는 바로 책을 구매했다. 본래 읽어야하는 순서가 있기는 하지만 본인이 선정한 필독서라 이 책부터 미리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생각했다. 두텁지 않는 책인데 술술 잘 읽히는 책은 아니다. 앞뒤를 열심히 읽었는데도 다시 앞으로 다시 뒤로 왔다 갔다를 여러 번 반복했다. 맥락이 이해가 되지 않으니 글씨는 읽는 격이 된다. 할 수 없이 다시 앞장으로 문맥을 처음을 봉사가 담 더듬듯이 더듬는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진도를 나간다. 이렇게 읽기 시작한 책의 내용은 과연 그것을 꽤뚫는 시선이 예사롭지 않다. 통합이란 말이 아니면 적절한 단어를 찾을 수 없는 내용이다. 내가 가장 취약하다고 생각되는 경계에 대하여 고민한다. 경계는 전선이라고 했다. 나와남의 전쟁터. 또는 나와 나의 전쟁터이다. 내가 만들고 내가 묶이는 경계에 대한 고민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시점이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9 우리는 스스로 정신과 신체 사이에 혹은 유기체와 환경 사이에 경계선을 그음으로써 불필요하게 자신의 정체감을 제한해왔기 때문에, 이들 경계선을 하나씩 제거한다면 본래의 경계 없는 진정한 나(self), 즉 무경계를 실현할 수 있다는 점을 역설하면서,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페르소나(가면)수준으로부터 건전한 자아, 심신일여의 켄타우로스, 초월적 주시자의 단계를 차례로 거쳐가며 궁극적으로 전 우주와 하나가 되는 일련의 과정을 그 실천법과 함께 쉽고 친절하게 안내해준다.

 

19 이 책은 우리가 경험을 통해 세우게 된 여러 경계가 어떻게 해서 우리의 의식을 한정-분열, 갈등, 투쟁-시키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우리의 내면에는 경계와 한계가 다수 존재하고 있으며, 그 경계들을 통합할 때 의식의 스펙트럼이 형성된다. 그리고 다양한 치료법들이 이 스펙트럼의 각기 다른 수준에 대응하고 있다는 사실도 드러난다.

 

서론 : 나는 누구인가?

 

25 우리의 일상적 자각, 마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미지의 광대한 의식의 대양에 둘러싸여 있는 작고 보잘 것 없는 하나의 섬과 같다. 그리고 이 일상적 자각을 대양으로부터 격리시키는 산호초 위로는 끊임없이 파도가-언젠가 자연스럽게 광대미답의 진정한 영역, 즉 의식의 신세계에 대한 지식이 우리의 섬 같은 각성을 덮쳐올 때까지-세차게 몰아치고 있다.

 

27 나는 누구인가? 아마도 문명의 여며이부터 인류를 괴롭혀왔을 이 물음은 오늘날까지도 인간에게 가장 성가신 골칫거리로 남아 있다. 세속적인 것부터 신성한 것까지, 단순한 것부터 복잡한 것까지, 낭만적인 것부터 과학적인 것까지, 개인적인 것부터 정치적인 것까지, 실로 모든 범위에서 무수한 답이 제시되어왔음에도 말이다.

 

28 예컨대 나는 이러저러한 재능을 타고난 특별한 사람이다. 친절하지만 때로는 잔인하고, 온화하지만 때로는 공격적이다. 아버지이자 법조인이고, 낚시와 야구를 즐긴다.는 식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당신의 느낌과 생각의 목록은 계속 채워질 것이다. 하지만 정체성이 확립되는 그 모든 과정의 바탕에는 좀더 기본적인 절차가 하나 존재한다. 나는 이러저러한 사람이다라고 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를 묘사하거나, 설명하거나, 또는 내적으로 느낄 때마다 당신은 _자각하든 못하든 간에_마음속에 있는 내적 경험의 세계에다가 일종의 정신적인 선線이나 境界를 긋는다. 그런 다음 그 경계의 안쪽에 있는 모든 것을 self라고 느끼거나 라고 부른다. 반면에 그 경계 밖에있는 모든 것을 내가 아닌 것 not-self으로 느낀다. 다시 말해, 당신의 정체성은 전적으로 그 경계선을 어디에 긋느냐에 달려 있다.

 

29 즉 정체성이란 자신을 이것과 동일시하고, 저것과는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다.

 

정체성의 위기란 그 선을 어디에 어떻게 그을지 결정할 수 없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요컨대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당신은 어디에 경계를 설정했는가?라는 의미인 것이다.

 

29 이 경계선에 관해 가장 흥미로운 사실은, 그것이 쉽게 변경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경계선은 다시 그어질 수 있다. 내 영혼의 지도를 다시 그림으로써 우리는 이전에는 미처 가능하다거나, 얻을 수 있다거나, 바람직하다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들을 그 새로운 영역 속에서 발견하곤 한다. 그리고 앞서 보았듯이 경계선의 가장 혁명적인 제작도 또는 변경은 '지고의 본성' 체험에서 일어난다. 그 지점에서는 내 정체성의 경계가 온 우주를 포함할 정도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경계선이 전부 없어진다고 말할 수도 있다. 나 자신을 '하나의 조화로운 전체'와 동일시 한다면, 그곳엔 더 이상 안팎이 없으므로 그 어디에도 경계선을 그을 수 없다.

 

30 피부 경계선의 안쪽에 있는 것은 모두 ''이며, 그 밖에 있는 것은 모두 '내가 아니다.' 피부경계선 밖에 있는 것들 중에도 '나의 것'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들이 ''는 아니다. 예컨대 우리는 '나의' , '나의' 직업, '나의' 가족을 인식하지만, 그것들은 우리의 피부 안쪽에 있는 것들과는 사뭇 다르게 취급된다. 따라서 피부경계선은 가장 기본적으로 통용되고 수용되고 있는 '/나 아님'의 경계 중 하나이다.

 

31 사람들은 ''라는 유기체 속에서도 특정 부분을 좀더 친밀하게 느끼며 강하게 그것과 동일시한다. '진정한 나'로 느껴지는 그 부분을 우리는 흔히 마음, 정신, 에고, 성격 등의 이름으로 부른다. 생물학적으로는 몸과 마음, 정신과 육체, 에고와 육신을 서로 떼어 놓거나 근본적으로 갈라놓을 어떤 근거도 없다. 하지만 심리학에서는 이런 분리가 마치 전염병처럼 유행하고 있다. 실제로 심신의 분리와 그에 수반된 이원론은 서구문명의 기본적이 사고방식이기도 하다.

 

마음과 몸 사이의 경계선은 분명히 출생 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기묘한 것이다. 그러나 성장 과정을 통해 '/나 아님'의 경계가 그어지고 그것이 더욱 강화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점차 자신의 몸에 대하여 모순된 감정을 품게 된다.

 

37 우주로부터 '유기체'라는 우주의 일부로, 유기체로부터 '에고'라고 하는 유기체의 일부로, 에고로부터 '페르소나'라고 부르는 에고의 일부로 축소해가는 것이 의식 스펙트럼의 주요 대역들이다.

 

스펙트럼의 각기 다른 수준들은 정체성뿐만 아니라, 그 정체성과 직간접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문제에서도 차이를 빚어낸다. 내 안에서 서로 다른 생각들이 충돌하고 있는 갈등 상황을 예로 들어보자. 그것은 ''라는 경계 안팎에서 빚어지는 갈등이므로, ''가 어느 수준에서 정의되었느냐에 따라 양상이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스펙트럼의 어느 수준에 있느냐에 따라 정체성 경계는 서로 다른 곳에 그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사 전문가라면 누구라도 알고 있듯이, '경계선'은 잠재적인 '전선'이기도 하다. 하나의 경계선은 두 개의 대립된 영토, 전투가능성이 있는 두 진영을 만들어 내는 법이다. 예컨대 유기체 수준에 있는 사람은 환경을 적으로 보게 된다. 그에게 환경은 이질적인 것이자 자신의 생명과 안녕을 위협할 수 있는 대상이다.

 

38 중요한 점은, 자신의 영혼에 경계선을 그음과 동시에 영혼의 전쟁터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이다.

 

39 경계선은 곧 전선이며, 각 수준마다 그 적이 달라진다는 점을 상기해보라.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수준에 따라 서로 다른 '증상들'이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스펙트럼의 수준들이 서로 다른 특징, 다른 증상, 다른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어떤 형태로든 인간 의식에 효과적인 변화를 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유사성은 오직 그것뿐이다.

 

40 인본주의적 치료의 대부분은 그 목표가 대개 이 지점을 넘어서 '에고' '신체'사이의 분열을 치료하는데 있다. 즉 정신과 육체를 재통합시켜서 전 유기체를 드러내는 데 목표를 둔다. 3세력이라고 부르는 인본주의심리학_나머지 두 세력은 정신분석과 행동주의이다. _ '인간 잠재력 운동'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마음이나 에고로 부터 심신일여의 전유기체로 정체성을 확장시킬 경우, 유기체 전체의 엄청난 잠재력이 해방되면서 그 사람에게 주어진다. 좀더 깊이 내려가면 선불교나 베단타 힌두교 등이 있다. 이들은 '유기체' '외부환경'간의 분리를 치료해서 온 우주와의 정체성, 즉 지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데 목표를 둔다. 다시 말해, 이것들은 전부 합일의식 수준을 목표로 한다.

 

43 성장이란 기본적으로 자신이 지평을 확대하고 확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 밖을 향한 조망과 안을 향한 깊이라는 양편 모두에 있어서 경계의 성장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스펙트럼 상의 '하강'에 대한 정의이기도 하다.

 

2 그것의 절반

 

46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대극의 세계에 대하여 자연은 전혀 알지 못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자연은 진실한 개구리와 거짓 개구리를 키우지 않을뿐더러, 도덕적인 나무와 부도덕적인 나무, 옳은 바다와 잘못된 바다 같은 것도 만들어내지 않는다. 자연 속에서 윤리적인 산과 비윤리적인 산 같은 것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아름다운 種종과 보기 흉한 종 같은 것도 없다. 적어도 대자연에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때문에 자연은 온갖 종류의 것들을 만들어내는 일을 즐기고 있다. "자연은 절대로 사과하지 않는다"고 소로우는 말한 바 있다. 자연은 옳음과 그름이란 대극을 알지 못하며, 따라서 인간이 '오류'라고 생각하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47 늙은 고양이는 죽음이 임박했다고 해서 공포의 급류에 휩쓸리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숲으로 들어가서 나무 밑에 웅크리고 앉아 죽음을 맞을 뿐이다. 병든 울새는 버드나무 가지에 편안히 앉아 황혼을 바라본다. 그러다 더 이상 빛을 보지 못하게 되면 마지막으로 눈을 감고 조용히 땅에 떨어진다. 인간이 맞이하는 죽음의 방식과 얼마나 다른가.

 

마지막으로 잠 속으로 순순히 들어가지 마세요.

죽어 가는 빛에 대항하여 사납게 분노하세요.

 

자연계에도 고통과 쾌락은 있지만, 그런 것은 걱정할 문제가 아니다. 개는 아프면 낑낑거리지만, 아프지 않으면 아주 걱정도 하지 않는다. 개는 미래의 고통에 대해 염려하거나 과거의 고통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나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인다.

 

49 결정한다는 것은 선택할 것과 선택하지 않을 것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 일을 의미한다. 무언가를 욕망한다는 것은 쾌락적인 것과 고통스러운 것 사이에 경계선을 긋고, 둘 중에서 쾌락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어떤 관념을 주장한다는 것은 진실이라고 느낀 개념과 진실이 아니라고 느낀 개념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 일이다.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어디에 어떻게 경계를 그을 것인지, 그런 다음엔 경계를 지은 측면들로부터 어떤 일을 해야 할지를 배우는 일이다. 사법체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사회 규칙을 따르는 사람과 따르지 않는 사람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 일이다. 전쟁을 한다는 것은 우리 편과 적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 일이다. 윤리학을 배운다는 것은 선과 악을 드러내는 경계선을 어떻게 그을 것인가를 배우는 일이다. 서양의학에 종사한다는 것은 질병과 건강 사이에 확신을 갖고 경계를 설정하는 일이다.

 

51 말이란 양날의 칼이며,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 이브는 언어의 마술로 똑같이 되갚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52 아담이 배운 것은 "어디에 선을 그을 것인가?"는 실제로 "어디서 전쟁이 일어날 것인가?"를 의미할 뿐이라는 것이다. 단순한 사실은, 우리들 역시 경계의 세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자연히 갈등과 대립의 세계에서 산다는 것이다.

 

53 천국은 모든 대극을 초월한 것이 아니라 한 쌍의 대립 중 좋은 쪽만을 전부 모아놓은 곳을 의미하게 되었다. 반면 지옥은 고통, 고뇌, 불안, 질병 등등 모든 부정적인 쪽을 모아놓은 곳을 의미하게 되었다.

 

54 진보라는 모험에서 성공하면 할수록 우리의 실패는 더욱 두드러진 것이 되고, 그렇게 해서 총체적인 욕구불만은 훨씬 극심해진다.

 

55 노자는 말한다.

 

예와 아니오 사시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선과 악은 그 거리가 또한 얼마나 되겠는가?

사람들이 두려워한다고 나도 두려워해야만 할까?

이 무슨 난센스인가!

 

있음과 없음은 서로를 낳아주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를 전제로 성립하며

길고 짦음은 상대를 드러내주고

높고 낮음은 서로에게 기대며,

앞면과 뒷면은 서로 따라다닌다.

 

장자는 좀더 다듬어 이렇게 설명한다.

 

고로, 옮음과 한 짝인 그름이 없는 옮음을 말하거나, 善政선정의 짝인 惡政악정 없는 선정만을 말하는 것은 우주의 위대한 원리를 모르며 뭇 생명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증거이다. 마찬가지로 땅의 존재 없이 하늘의 존재를 말하거나, 양 없는 음의 원리를 말하기도 하나, 그런 것은 분명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런 말을 되풀이한다. 그와 같은 사람들은 바보 멍청이거나 무뢰한임이 틀림없으리라.

 

58 우리가 흔히 화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원인과 결과, 과거와 미래, 주체와 객체와 같은 모든 사물과 사건이 실제로는 단일한 진동, 단일한 파도의 마루(trough)와 골(frest)에 해당한다. 하나의 파도는 그 자체로 단일한 사건이지만 마루와 골, 최고점과 최저점이라는 대극을 통해 섬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실재는 골과 마루 중 어느 한 쪽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오직 그 둘의 통일 속에서만 발견된다. (골은 없고 마루만 있는 파도를 상상해보라)골 없는 마루, 최고점 없는 최저점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골과 마루_실로 모든 대립_는 그 근저에 있는 '하나의 현상'의 분리 불가능한 측면들이다.

 

59 세계를 분리된 대극으로 볼 때 삶이 왜 그토록 불만스러운 것이 되는지, 왜 진보가 성장이 아니라 암적인 것이 되는지를 이젠 아마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대립하는 양극을 떼놓으려고 애쓰면서 소위 고통 없는 쾌락, 죽음 없는 생명, 악 없는 선 따위의 '긍정적이라고 판단한 것들'에만 집착할 때 우리는 실체가 없는 유령을 쫓는 꼴이 되고 만다. 이것은 골 없는 마루, 파는 자 없는 사는 자, 오른쪽 없는 왼쪽, 출구 없는 입구만의 세계를 얻으려고 애쓰는 것과 같다. 따라서 우리의 목표가 너무나 고상한 것이어서가 아니라 그저 환상이기 때문에, 비트겐슈타인은 "우리의 문제는 풀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성립되지 않는 난센스"라고 지적했던 것이다.

 

63 문제는 아무런 경계도 없는 자연의 실제 영토를 놓고 경계가 완비된 관습적인 지도를 만들어낸 다음, 그 둘을 철저하게 혼동하고 있다는 데 있다. 코르지브스키와 일반 의미론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단어, 상징, 기호, 사고, 관념 등은 실재 그 자체가 아니라 단지 실재의 지도에 지나지 않는다. '지도는 영토가 아니기'때문이다. ''이라는 단어가 갈증을 풀어줄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지도와 언어가 진정한 세계인 것처럼 그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

 

64 양극을 분리하고 고립시키려는 시도는 고무줄의 양끝을 서로 완전히 분리시키려고 애쓰는 것과 같은 짓이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무줄이 끊어질 때까지 점점 더 세게 잡아당기는 일일 뿐이다.

 

해방이란 부정적인 것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긍정과 부정이라는 양극'으로 부터의 해방이라는 점에 유념하도록 하자.

 

65 얻고자 함 없이 그저 스스로 오는 것에 만족하고,

양극을 초월하여 시기심으로부터 해방된 자

성공이나 실패에 집착하지 않는 자.

그는 행위 속에서도 속박되지 않는다.

갈망하지도 않고 혐오하지도 않는

그를 일컬어, 영원히 자유롭다고 한다.

양극을 초월한 자는

갈등에서 쉽게 풀려나기 때문이다.

 

66 가장 오래된 불경 중 하나인 <능가경>에서는

빛과 그림자, 긴 것과 짧은 것, 검은 것과 흰 것, 이와 같은 것들이 서롤 별개로서 구별되어야 한다는 말은 그릇된 것이다. 그것들은 단독으로는 존재하지 못한다. 그것들은 다만 동일한 것의 다른 측면일 뿐이며, 실재가 아니라 관계성을 말하는 단어들이다. 존재의 조건은 상호배타적이지 않다. 만물은 본질적으로 둘이 아니고 하나이다.

 

'실재는 양극으로부터 자유롭다'는 모든 전승의 주장은 '실재는 모든 경계로부터 자유롭다'는 주장과 같은 것이다. '실재는 둘이 아니다'란 말은 곧 '실재는 무경계다'란 의미이다.

 

'모든 대극이 실은 하나임을 깨닫는다면 진보를 향한 우리의 충동은 어떻게 될까? 하는 의문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운이 따른다면 아마도 진보의 충동은 멈출 것이다. 그와 더불어 담장 너머 잔디가 더 푸르다는 환상으로써 무성해진 괴이한 불만도 멈추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점만큼은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겠다. 나는 의학과 농업과 기술 분야의 발전이 멈추게 되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행복이 진보에 달려 있다는 환상을 품지 않게 되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67 양극은 실은 하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불화는 조화로 녹아 들고, 투쟁은 춤이 되며, 오랜 숙적은 연인이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주의 절반이 아니라, 우주의 모든 것과 친구가 된 자리에 있게 된다.

 

3 무경계 영토 No-Boundary Territory

 

69 궁극의 형이상학적 비밀을 감히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 우주에는 그 어떤 경계도 없다." 경계는 실재의 산물이 아니라, 우리가 실재를 작도하고 편집한 방식의 산물, 즉 환상에 불과하다. 따라서 영토를 지도화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그 둘을 혼동하는 것은 치명적인 오류가 된다.

 

71 피타고라스는 사물을 '' 수 있었다. 이름 짓기가 마술처럼 보였다면, 계산은 성스러운 것처럼 보였다. 이름이 사물을 마술적으로 대표할 수 있다면 수는 사물을 초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오렌지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두 개의 오렌지가 되는데, 사과 역시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두 개의 사과가 된다. 둘이라는 수는 두 개로 된 모든 집단에 공평하게 적용되므로, 어떤 의미에선 개별적으로 사물의 특성을 초월한 것임이 틀림없다. 추상적인 수에 의해서, 인간은 구체적인 사물로부터 마음을 해방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런 일은 첫 번째 유형의 경계, 즉 이름 짓기, 분류 하기, 식별하기 등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수는 이럼 힘을 극적으로 끌어올렸다. 수를 세는 것은 어떤 의미에선 전적으로 새로운 유형의 경계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경계 위에 세워진 또 다른 경계, 즉 메타경계였다.

 

73 , 계산, 측정과 같은 새로운 메타 경계는 1600년경 갈릴레오와 케플러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수세기 동안 자연과학에 의해 실제로 사용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리스 시대와 최초의 고전물리학자들 사이의 중간 시기를 유럽 사회에 등장한 교회라는 새로운 세력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75 인간은 자연에 대한 지배력을 얻었지만, 그것을 얻기 위해 자신을 자연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분리해야만 했다.

 

77 그 충격은 어느 날 장갑을 벗으면서 거기에 손이 있기를 기대했지만 가재의 앞발을 본 것에 필적할 만한 것이었다.

 

78 '궁극적 실체'는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완전하게 측정될 수 없다는 사실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실성 원리'라 불리며, 그것은 고전 물리학을 내리친 마지막 치명타였다. 하이젠베르크 자신은 그것을 "딱딱한 틀의 붕괴"라고 불렀다. 낡은 경계들이 붕괴된 것이다.

 

79 핵물리학자들은 이제 확률과 통계를 가지고 연구해야만 했다. 이는 그들이 충분히 많은 원자 요소의 측정치를 끌어 모아야만 한다는 의미이다.

 

80 경계란 실재를 느끼고 만지고 측정해낸 결과물이 아니라, 실재를 지도로 그려내고 편집하는 '방식'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81 천의무봉 상태에 관해 테이야르 드 샤르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구체적인 실재를 바라볼 때, 우주의 소재는 마치 일종의 거대한 원자처럼 진정으로 나뉠 수 없는 하나의 전체를 형성하고 있다. ...보다 강력해진 방법을 사용해서 물질 내부로 더 깊이 침투해 들어갈수록, 물질의 각 부분들의 상호의존성을 발견하고 우리는 점점 더 당황하게 된다. 상호 의존하는 이 연결망은 모드 모서리를 닳아 헤지게 하지 않고는, 그 어느 한 부분도 조각내고 고립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

 

84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것을 분별이라고 한다. 이런 분별(경계들)의 실체 없음을 아는 것이 올바른 지식이다. 그러기에 현자는 이름과 모양을 실재와 혼동하는 일이 없다. 이름과 겉모양을 버리고, 모든 분별이 사라질 때, 그곳에 남는 것이 사물의 진정한 본성이다. '眞如진여'라 불리는 그 본성에 관해서는 어떤 예측도 불가능하다. 이 보편적이고 무분별적이며 不可知불가지한 '진여', 그것이 유일한 실재이다<능가경>

 

사물을 본다는 것은 생각하는 것이며, 생각한다는 것은 머릿속에서 '사물'을 그려내는 것이다. 따라서 '생각하기' '사물화하기'는 우리가 실재를 잡기 위해 던진 경계라는 그물에 붙인 두 개의 이름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에서 '실재는 공'이라고 말하는 것은 본래 경계가 없음을 의미한다. 모든 실체가 단순히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뒤에 무라는 순수한 진공, 분별할 수 없는 일원성의 혼돈만 남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85 세계를 경계의 공으로 볼 경우, 모든 사물과 사건이 _모든 대립과 마찬가지로_ 상호의존적이며 상호 침투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 핵심이다. 즐거움은 고통과 관련되어 있고, 선은 악과, 삶은 죽음과 관련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은 '그것이 아닌 것들'과 관련되어 있다.

 

86 당신이 가진 유일한 도구가 망치일 경우, 모든 것은 못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사실 당신은 실제로 경계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발명해 낼 뿐이라는 뜻이다. 분리된 사물을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발명해낼 뿐이라는 뜻이다. 이런 자신의 발명품을 실재 자체로 오해하는 순간 문제가 발생한다. 그렇게 되면 현실세계가 미치 조각나고 뿔뿔이 흩어진 사건처럼 보이게 되고, 원초적인 소외감이 자각 자체에 침투해 들어오기 때문이다.

 

4 무경계 자각 No-Boundary Awareness

 

89 합일의식이란, 진정한 실재에는 경계가 없다는 단순한 自覺자각이다.

합일의식이 곧 무경계 자각이다. 말은 쉬워 보이지만 무경계 자각이나 합일의식을 올바로 논하는 것은 물론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모든 논의의 매개체인 우리의 언어 자체가 '경계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앞서 보았듯이 단어와 상징 그리고 사고 자체는 실제로 경계 이외의 무엇이 아니다.

 

90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의 경계야말로 우리가 지워버리기를 가장 꺼리는 경계이며, 우리가 최초로 그은 경계이다.

 

91 뭉뚱그리자면, 최초의 근원적 경계란 '경험자' '경험된 세계'사이의 간극으로 볼 수 있다. 근원적 경계의 안쪽에는 주체, 생각하는 자, 느끼는 자, 보는 자인 ''가 있고, 그 반대쪽에는 외부 대상의 세계, 나로부터 분리된 낯선 환경, '나 아닌 것'이 존재한다.

 

93 최초의 경계를 깨부수려고 애쓰는 것은 신기루 한가운데 서서 그것을 몰아내려고 사납게 팔을 휘두르는 것과 같다. 그런 행동은 대단한 흥분을 자아낼지는 몰라도 전혀 쓸데없는 짓이다. 환상을 뿌리째 뽑아 근절시킬 수는 없다. 환상 그 자체를 이해하고 꿰뚫어볼 수 있을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요가, 정신집중, 기도, 의식, 찬송, 단식과 같은 꽤 공이 드는 활동을 통해 최고의 경계를 파괴하려는 시도조차도 실은 파괴하려고 하는 바로 그 환상을 더욱 강화시키고 영속시키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어쨌든 최초의 경계를 실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캄브라이의 대주교 페넬롱은 "'환상을 피하려는 시도'만큼 위험한 환상도 없다"고 말했다.

 

94 불교의 위대한 현자 파드마삼바바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자. "나 자신을 아무리 찾아도 찾아낼 수 없을 때, 거기에서 찾음의 목적은 달성된다. 또한 찾음 자체도 끝난다."

 

98 우리가 '생각하는 자'라고 믿고 있는 실체가 사실은 현재 생각의 흐름 그 자체일 뿐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99 현자들이 ''를 없애려고 애쓰지 말고 단지 그것을 찾아보라고 권유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를 찾으려 할 경우, 발견하는 것은 언제나 '내가 없다'는 사실뿐이기 때문이다.

 

세계와 떨어져 분리된 ''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피할 수 없는 결론은 분명해지기 시작한다. 당신은 언제나 자신을 '경험과 분리된 경험자'라고 상상해왔다. 하지만 막상 그것을 찾으려는 순간, 그것은 경험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앨런 왓츠 Alan Watts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단지 경험만이 존재한다. 경험을 경험하는 누군가란 없다. 우리는 듣기를 듣거나, 보기를 보거나, 냄새 맡기를 냄새 맡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느낌을 느끼거나, 생각을 생각하거나, 감각을 감각하지 않는다. '나는 기분이 좋다'라는 말은 현재 기분이 좋다는 의미이다. 그 말은 ''라고 부르는 어떤 것이 있고, '느낌'이라고 부르는 또 다른 분리된 것이 있어서, 그 둘을 하나로 모을 경우 이 ''가 좋은 기분을 '느낀다'는 의미가 아니다. 현재의 느낌 이외엔 어떤 느낌도 없다. 그때 당시 어떤 느낌이 현존하든 그것이 곧 ''이다. 현재 느낌과 동떨어진 ''를 찾아낸 사람, ''와 동떨어진 어떤 느낌을 찾아낸 사람은 세상에 없다. 결국 이 말은 단지 그 둘이 똑같다는 사실만을 알려줄 뿐이다."

 

100 ''는 곧 '나의 경험'이고, 또한 '내가 경험한 세계'이기도 하다. 내가 새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곧 새를 보는 경험 그것이다. 내가 책상을 만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곧 책상을 만지는 경험 그것이다. 내가 천둥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곧 천둥소리를 듣는 경험 그것이다. ''라고 부르는 내적 감각과 '세계'라 부르는 외적 감각은 하나의 동일한 감각이다. 내적 주체와 외적 객체는 하나의 느낌에 대한 두 개의 이름일 뿐이다. 이런 사실은 '느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느낄 수 있는'유일한 것이다. 이 말은, 당신이 깨닫고 있든 아니든, 지금 이 순간의 의식상태가 곧 합일의식이라는 의미이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은 '이미'우주이며, '이미'현재 경험의 총체이다. 당신의 현재 상태는 언제나 합일의식이다. 합일의식이 주된 장애물로 보이는 '분리된 나'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101 '분리된 나'란 없다는 통찰이야말로 모든 시대의 신비가와 현자들이 단언해온 것이며, '영원의 철학'의 핵심이기도 하다. 이런 통찰을 예증할 수 있는 수많은 인용문이 있지만 부처의 유명한 일설은 진정 그 모든 것을 말해준다.

 

고통이 있을 뿐, 고통 받는 자는 없다.

행위가 있을 뿐, 행위 하는 자는 없다.

열반이 있을 뿐, 열반을 구하는 자는 없다.

길이 있을 뿐, 그 길을 가는 자는 없다.

 

이런 이해는, 실로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가능케 해준다고 보편적으로 전해진다. 긍정적으로 표현하자면, '내가 곧 우주'임을 깨달을 때 내게 고통을 줄 수 있는 '외부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우주의 밖엔 충돌을 일으킬 아무것도 없다. 부정적으로 표현하면, 이런 이해는 무어보다 '고통 받을 수 있는 나'가 존재한다는 관념으로부터의 해방이기 때문에 곧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해방과 같다는 말이다. 웨이 우 웨이는 이 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105 합일의식을 논리적, 형식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신비가는 대단히 역설적이거나 모순되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불리한 운명에 처해 있는 셈이다. 문제는 어떤 언어구조든, 포크로 바닷물을 퍼올릴 수 없듯이, 합일의식의 본질을 포착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106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것처럼 "생각하지 말고 보라!"

 

107 절대적 주체성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보이거나, 들리거나, 알려지거나, 지각될 수 있는 대상이 될 수 없다. '절대적인 보는 자'를 보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절대적인 아는 자'를 아는 것 역시 절대로 불가능하다. 노자는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무리 보려 해도 보이지 않으니

이를 夷이(색깔 없음)라 한다

아무리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으니

이를 希희(소리 없음)라 한다.

아무리 잡으려 해도 붙들 수 없으니

이를 微미(모양 없음)라 한다.

 

108 우리는 알고 있거나 알 수 있는 모든 '객체들'의 집합과 무심코 자신을 동일시해온 셈이다. 이처럼 '인식될 수 있는 대상' '인식하는 자', '진정한 나'일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몸, 마음, 성격 등을 '진정한 나'라고 상상하면서 그것들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러고는 그저 환상에 불과한 그것들을 방어하고, 보호하고, 연장시키려고 애쓰면서 전 생애를 소비해버린다.

 

109 나의 마음, 나의 몸, 나의 생각, 나의 욕망들....이것들은 나무, , 구름, 산과 마찬가지로 '진정한 나'가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그것들을 객체로서 주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탐구를 계속 진행해가면, ''라고 하는 것이 점차 투명해지면서 어떤 의미에선 내가 고립되고 피부로 둘러싸인 이 유기체를 훨씬 넘어선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내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나는 나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 간다.

 

110 '진정한 나'는 안에도 밖에도 살고 있지 않다. 주체와 객체는 둘이 아니기 때문에, 신비가들은 실재에 관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다만 외관상으로만 모순되는 듯이 보일 뿐이다.

 

우리는 실재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 결렬되고 분리 독립된 사람들의 집합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우주 내의 모든 사물과 사건은 그것 이외의 모든 사물과 상호의존적으로 관련되어있다. 여기에서도 우리에게 독립된 개별적 실체라는 환상을 제공하는 것은 상징적 지도와 경계다. 그렇다면 진정한 세계가 어떤 분리된 대상도 담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진정한 세계가 무경계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111 우리는 무경계인 실재의 발견이 곧 '합일의식'그것임을 알았다. 이 말은 합일의식 속에서 무경계의 진정한 실체를 본다는 것이 아니라, 합일의식이 곧 진정한 무경계영토라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더라도, 실재는 무경계이며, 그것이 곧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이다. 양자역학의 창시자인 에르빈 슈뢰딩거의 말을 인용해보자. "대지 위에 자신을 던져 어머니인 대지 위에 몸을 눕히면, 당신이 그녀와 하나이고 그녀가 당신과 하나임을 확신할 수 있게 된다. 실제로 당신은 대지보다도 수천 배나 확고한 불사의 존재이다. 내일 그녀가 당신을 집어삼킬 만큼이나 확실히 그녀는 새로운 당신을 낳을 것이고, 당신에게 한번 더 새로운 노력과 고통을 안겨줄 것이다. 단지 '어느 날'말이 아니라 지금, 오늘, 그리고 매일 그럴 것이다. '한 번'만이 아니라 수천 번이나 어머니 대지는 당신을 집어삼키고 또한 당신을 낳을 것이다. 영원히 그리고 언제나, 오직 하나이며 동일한 '지금 이 순간'만이 존재한다. 현재만이 유일하게 끝없이 영원한 것이다.

 

5 무경계 순간 The No-Boundary Moment

 

113 성 디오지시우스는 "나는 성경에서 말하는 시간과 영원의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말과 함께 모든 신비통찰의 난제에 손을 댔다. 왜냐하면 모든 시대 모든 지역의 깨달은 현자들이 합일의식은 시간의 산물, 즉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무시간적인'것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합일의식은 시작도 탄생도 알지 못하며, 종말도 죽음도 알지 못한다. 따라서 진정한 실재가 우리를 교묘히 피해 다니도록 두지 않으려면 우리는 영원성의 본질을 철저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114 영원한 순간이란 과거도 미래도, 이전도 이후도, 어제도 내일도, 탄생도 죽음도 알지 못하는 무시간적인 순간이다. 합일의식 안에서 산다는 것은 곧 '무시간적 순간'속에서 '무시간적 순간'으로서 산다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시간이라는 '오염'만큼 신성한 빛을 철저히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도 없기 때문이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서 빛을 가로막는 것은 시간이다. 시간만큼 하나님(합일의식)을 가로막는 장해도 없다. 꼭 시간 그 자체뿐만 아니라 덧없음, 덧없어 보이는 대상들, 덧없다는 환상 등등 시간으로부터 기인한 흔적과 냄새도 모두 여기에 포한된다.

 

115 황혼을 바라보며, 바닥을 알 수 없는 수정같이 검은 연못 위에서 유희하는 달빛을 바라보며, 또는 사랑하는 사람과 황홀한 포옹을 나누며 넋을 잃고 나 자신과 시간으로부터 표류해 떠다닌 순간, 세찬 빗속을 통해 반향하는 천둥소리 후의 고요함에 문득 사로잡힌 순간...이와 같은 무시간성을 접해보지 못한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신비가는 '현재순간'에 완전히 몰입한 경험 속에서는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현재순간'을 잘 검토해보면, 분명 그 안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순간은 곧 무지간의 순간이며, 무시간의 순간은 과거도 미래도 모르고, 이전도 이후도 모르며, 어제도 내일도 모르는 영원한 순간이다. 따라서 이런 현재순간으로 깊숙이 발을 내딛는 것이 곧 영원으로 뛰어드는 것이고, 거울을 통과해 불생불사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116 결코 현재 순간의 종말을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죽더라도, 어떤 종말을 느끼는 당신은 이미 그곳에 있지 않을 것이다). 슈뢰딩거가 "현재는 끝을 갖고 있지 않은 유일한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이 때문이다.

 

설봉선사는 말한다. "영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싶은가? 그것은 지금 이 순간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서 영원을 붙잡지 못하면, 수만 법 다시 태어나더라도 그것을 얻지 못하리라."

따라서 끝없이 이어지는 '영속적인 시간'이란 개념은 기형적인 괴물에 불과하다.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도 그런 영속성을 이해하거나 포착하거나 경험할 수 없다. 그러나 영원한 지금, 바로 이 '무시간의 순간'은 당신 자신의 현재 경험만큼이나 단순하고 접근 가능한 것이다. 영원과 현재 경험은 하나이자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도 "영원한 생명은 현재에 살고 있는 사람의 소유물"이라고 말한 바 있다. 영원이란 현재의 본질이자 무시간적 순간의 본질이기 때문에 신비가는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문, '과거와 미래라는 양극 너머'로 이끌어주는 위대한 해방은 지금 외에는 언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기독교 성자인 드 코사드는 이렇게 말한다. ", 목마른 자들이여! 생명수가 샘솟는 샘을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라. 그 샘은 지금 이순간 그대 곁에서 샘솟고 있다...지금 이 순간이 하나님이름의 현현이요, 하늘나라의 임장臨場이다. " 이런 까닭에 이슬람 신비가인 루미는 "수피Sufi는 이 순간의 자녀"라고 말한다.

 

117 우리는 어제에 살면서 끊임없이 내일을 꿈꾸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시간이라는 고통스러운 사슬에 묶이고, 있지도 않은 유령을 불러내어 스스로를 속박한다. 기억과 기대라는 공상의 안개 속에서 에너지를 소모하고, 그로써 현존하고 있는 근원적 실재를 박탈하고는 그것을 '허울 좋은 현재' 또는 '빈약한 현재'. 즉 고작 1~2초 정도 머물다 사라져버리는 영원한 현존의 창백한 그림자로 전락시킨다.

 

118 우리의 걱정은 언제나 과거 또는 미래에 걸쳐 있다. 우리는 과거에 저지른 수많은 행동을 후회하며, 그로 인한 미래의 결과를 두려워한다. 죄책감은 과거와 단단히 결합되어 우울증, 쓰라림, 후회라는 고뇌를 가져온다. 이 말에 납득되지 않거든, 과거의 상처가 전혀 없는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일지 한 번 상상해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불안은 미래에 대한 생각과 한데 묶어서 두려움과 파멸적 기대라는 먹구름을 가져온다. 과거와 미래! 이 둘이 우리를 고뇌라는 족쇄로 채우고 있음은 분명하다. <바가바드 기타>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 세월로 와서 인간을 먹어 치우 노니

파멸로 무르익어가는 그들의 때를 기다리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그 자체에는 어떤 근원적인 문제도 없다. 그곳에는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현재의 문재를 끼고 사는 생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그런 것이 있다고 생각된다면 다시 면밀히 살펴보라. 그러면 그것이 실제로는 어떤 식으로든 과거의 죄책감이나 미래의 불안과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이 필연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왜냐하면 죄책감이란 과거 속에서 헤매는 상태이고, 불안이란 미래 속에서 헤매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119 에머슨이 먹지게 지적한 것처럼, 이 깨어남은 우리가 현재에 현존하게 될 때만 일어난다.

 

나의 창 아래 핀 장미들은 이전의 장미가 더 아름다운 장미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들은 존재 그 자체이며, 신과 더불어 오늘 존재한다. 그들에겐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엔 단순히 장미만이 존재할 뿐이다. 장미는 존재의 매 순간 완전하다...그러나 인간은 뒤로 미루거나 기억한다. 인간은 현재에 살지 않고 과거를 비탄하거나, 자신을 둘러싼 풍요로움에 무관심한 채 습관적으로 눈을 뒤로 돌리거나 미래를 미리 보기 위해 까치발을 한다. 인간은 시간 너무 현재 속의 자연과 함께 살 때까지 행복할 수도 강해질 수도 없으리라.

 

121 신비가들은 환상을 깨부수라고 하지 않고, 다만 환상을 주의 깊게 살펴보라고만 권고하는 것이다. 만일 실제로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시간을 부수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126 우리의 현재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낀 샌드위치가 되어 모든 면에서 제한된다. 현재는 한정되고, 담으로 둘러싸이고, 제한된다. 열린 순간이 아니라 짓눌린 순간, 압착된 순간, 즉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인 덧없는 순간이 된다. 과거와 미래가 너무나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샌드위치 속의 고기인 현재의 순간은 단지 얇은 종잇 조각처럼 축소되고 우리의 실재는 이내 내용물 없는 두 조각의 빵이 되어 버린다.

 

127 <육조단경>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 순간에 새롭게 생겨나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존재하기를 멈추는 것도 없다. 고로, 종말을 초래할 탄생과 죽음이란 없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은 절대적인 평화이다. 그것은 이 순간에 있지만 이 순간에는 경계도 제한도 없다. 여기엔 영원한 기쁨만이 있을 뿐이다.

 

128 합일의식은 '진정한 나'에는 경계가 없다는 인식일 뿐만 아니라, 거울이 대상을 포용하는 것처럼 모든 우주를 포용한다.

 

6 경계의 생성과 전개과정 The Growth of Boundaries

 

131 자아를 진정한 ''로 정의하는 정통심리학에서는 합일의식을 정상성의 상실로, 의식의 착란 또는 변성된 의식 상태로 묘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합일의식을 '자연스러운 나', 유일한 '진정한 나'로 본다면 자아는 합일의식의 부자연스러운 억제나 제약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스펙트럼의 각 수준은 '진정한 나', 즉 합일의식과 무경계 자각이 점진적으로 속박, 제약 또는 수축되어가는 단계들로 이해될 수 있다.

 

자연 속에는 어떤 장벽도 담장도 없다.

 

132 근원적 경계는 보는 자와 보여진 대상, 아는 자와 알려진 대상, 즉 주체와 객체 사이의 분열이다.

 

135 莊子가 말한 것처럼 "다른 사람이 없다면 나도 없을 것이고, 내가 없다면 구별할 아무것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137 탄생이란 '과거를 갖고 있지 않은' 상태이다

죽음이란 '미래를 갖고 있지 않은, 상태이다.

 

138 "모든 순간이 마지막 순간이고 모든 순간이 부활의 순간이다."

 

7 페르소나 수분: 발견의 출발점 The Persona Level: The Start of Discovery

 

149 고통이야말로 '최초의 은총'이라는 말이 전해오는데, 나는 이 말이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특수한 의미에서, 고통은 거의 환희의 순간이기도 하다. 고통은 창조적인 통찰력이 탄생하는 기점이기 때문이다.

 

150 경계로 이루어진 삶은 투쟁의 연속이며, 공포 불안 고통 그리고 마지막엔 죽음으로 점철된다.

 

151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주술사, 사제, 현자, 신비가, 심리학자, 정신의학자 등등 다양한 사람들이 고통을 넘어선 삶을 살기 이해 고통을 바르게 살아내는 최선의 길을 제시해왔다. 그들은 인간의 고통에 대한 자신들의 통찰을 나눠줬는데, 그것은 각자 자신의 고통을 올바로 이해해야만 그 고통을 넘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151 우리가 고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이유는 진심으로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영혼의사가 없기 때문이다.

 

152 그들은 인간 각성의 '다른 수준들'을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진심으로 믿을 수 있는 영혼의사를 갖고 있지 못한 이유는 그들 모두가 '동일한'의식수준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적어도 핵심사항에서는, 서로 명백히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며 우리는 그 모순에 휘말리고 있는 것이다.

 

154 경계가 생겨날 때마다 자신의 일부분은 외부로 '투사'된다.

 

155 페르소나란 다소간 부정확하고 허약해진 자기상을 일컫는다. 페르소나는 분노, 자기주장, 성적충동, 환희, 적대감, 용기, 공격성, 충동, 흥미 등과 같은 자신의 특정한 성향을 스스로 부정할 때 만들어진다.

 

164 가해자는 피해자가 덮어 씌운 그 혐오스러운 특징을, 알든 모르든 자기 자신도 소지하고 있는 경우에만 그렇게 난리를 치기 때문이다. 우리가 끔찍이도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우리의 일면을 그들이 끊임없이 환기시키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혐오하는 것이다.

 

환경(사람 또는 사물들)속의 무언가가 우리에게 단지 '정보'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강력하게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은 대개 우리 자신으로부터 투사된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성가시고, 당황스럽고, 혐오스러운 물건들, 또는 역으로 매료되고, 항거할 수 없고, 마음을 사로잡는 물건들, 이런 것들이 흔한 그림자의 반영이다. 옛 속담은 이렇게 말한다

 

보고 또 보다 보니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가 너라고 생각했던 그것이

실은 바로 나 자신이었음을

 

171 '변환'이 치료의 열쇠이다.

 

8 켄타우로스 수준 The Centaur Leavel

 

191 눈 주위에서 긴장감을 느낀다면, 울고 싶은 욕망을 억제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관자놀이에서 긴장과 통증을 느낀다면, 아마도 소리 지르거나 고함 치거나 또는 웃는 것을 저지하려 애쓰면서 자신도 모르게 턱을 악물고 있을 수도 있다. 어깨와 목의 긴장은 억제된 분노나 적개심을 나타내며, 횡격막의 긴장은 느낀 그대로의 '알아차림'이 표출되지 않도록 통제하려는 시도로 호흡을 만성적으로 제한하고 참고 있음을 나타낸다(자기억제 시에는 언제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호흡을 멈춘다)아랫배와 골반 주변의 긴장은 흔히 성욕에 대한 모든 자각이 차단됐다는 신호이다. , 생기 있는 호흡과 에너지의 자유로운 흐름을 막기 위해 그 주변부위를 경직시키고 억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이유에서든 이런 일이 발생하면, 다리에서의 느낌도 대부분 차단된다. 다리의 긴장, 뻣뻣함 또는 힘이 없는 느낌은 일반적으로 확고함, 안정감, 확실성 또는 전반적인 균형의 결여를 나타낸다.

 

194 자신의 팔을 어떻게 들어올릴 수 있는지를 남에게 묻지 않듯이, 어떻게 하면 꼬집기를 멈출 수 있는지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묻고 다니지 않을 것이다. 양쪽 다 수의적인 행동이기 때문이다.

 

199 켄타우로스로 되돌아온다는 것은 정신-신체적 유기체 내부 전체에 심리적, 신체적 건강이 이미 순환하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에너지란 영원한 기쁨이며, 그것은 신체에서 온다"고 블레이크는 말한 바 있다. 이것은 외적 보상이나 약속에 의존하지 않는 기쁨이기도 한다. 이 기쁨은 내면에서 솟아나는 것이며, 이 현재 순간에도 아무 대가 없이 주어지는 것이다. 자아가 시간 속에 살면서 이익을 얻고자 미래로 목을 길게 빼고 마음속으로 과거의 손실을 한탄하는 데 비해, 켄타우로스는 언제나 현재의 흐름, 스쳐가는 구체적인 현재, 어제에 매달리거나 내일을 희구하지 않는 살아 있는 현재, '눙크 플루엔스'속에서 살고 있다. 켄타우로스는 이 순간의 선물에서 충만함을 발견한다. 켄타우로스의 자각이야말로 '미래의 충격'에 사로잡힌 세계에 대한 강력한 해독제이다.

 

203 매 순간의 죽음과 무상함 앞에서 위축되는 것은 매 순간의 삶으로부터 위축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삶과 죽음은 하나이자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뭉뚱그리자면, 켄타우로스 수준은 1)자아실현, 2)의미 3)실존 곧 생사문제의 본거지이다.

 

9 초월적인 나  The Self in Transcendence

 

214 나는 몸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나의 몸이 '아니다'나는 몸을 보고 느낄 수 있다. 보여지고 느껴질 수 있는 것은 진정한 보는 자가 아니다. 내 몸은 피곤하거나 흥분하기도 하고, 아프거나 건강하기도 하고, 무겁거나 가볍기도 하지만 그런 것은 내면의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나는 몸을 '갖고 있지만', 나는 나의 몸이 '아니다'

 

나는 이런 저런 욕망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나의 욕망이 '아니다'. 나는 나의 욕망들을 알 수 있는데, 알려질 수 있는 것은 진정한 아는 자가 아니다. 욕망들은 오고 가면서 내 자각을 통해 흘러가지만, 그런 것들은 내면의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나는 욕망을 '갖고 있지만', 나는 나의 욕망이 '아니다.'

 

나는 감정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나의 감정이 '아니다.' 나는 나의 감정들을 느낄 수 있고 감지할 수 있는데, 느껴지고 감지될 수 있는 것은 진정한 느끼는 자가 아니다. 감정들은 나를 통해 스쳐가지만, 그런 것들은 내면의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나는 감정을 '갖고 있지만', 나는 나의 감정이 '아니다.'

 

나는 생각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나의 생각이 '아니다.' 나는 나의 생각들을 알 수 있고 직관할 수 있는데, 알려질 수 있는 것은 진정한 아는 자가 아니다. 생각들은 나에게 오고 나에게서 떠나가지만, 그것들은 내면의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나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나는 나의 생각이 '아니다.'

 

218 괴로움을 판단하지 않고, 회피하거나, 각색하거나, 손대거나, 합리화하지 않고 단순히 그것을 순수하게 자각할 뿐이다. 어떤 느낌이나 경향성이 나타나더라도, 단지 그것을 '주시'한다. 그 느낌에 대한 증오가 나타나더라도 단지 그것을 '주시'한다. 그 증오에 대한 증오심이 나타나더라도 또 다시 단지 그것을 '주시'한다. 해야 할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어떤 행위가 나타나든 단지 그것을 주시할 뿐이다. 모든 괴로움의 한 가운데서, 다만 '무선택적 자각'으로 머물러 있어보라. 이렇게 있을 수 있는 것은, 어떤 괴로움도 '전정한 나'를 이루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했을 때이다. 그런 것에 집착하고 있는 한, 아무리 미묘하더라도 반드시 그것들을 조작하려는 노력이 존재한다. 그런 것들이 나의 중심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 할 때. 비로소 자신의 괴로움을 비난하거나, 그것들에 분개하고, 원망하는 일도, 거부하거나 탐닉하는 일도 하지 않게 된다. 괴로움을 해결하려는 시도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자신이 바로 괴로움 그 자체라는 환상만 강화시킬 뿐이다.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괴로움에서 도피하려는 노력은 그 괴로움을 영속화시키는 일에 불과하다. 가장 골치 아픈 문제는 괴로움 자체가 아니라 그 괴로움에 대한 우리의 '집착'이다. 우리가 괴로움을 동일시한다는 것, 그것만이 유일하게 진정한 곤경이다.

 

10 궁극의 의식상태 the Ultimate State of Consciousness

 

창조도 없고 파괴도 없다

운명도 없고 자유의지도 없다

길도 없고 도달함도 없다

이것이 궁극의 진실이다. -라마나 마하르쉬-

 

233 합일의식은 무시간적 순간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전적으로 지금 이순간에 존재한다. 또한 지금 이 순간에 도달할 방법은 분명히 없다. 이미 그런 것에 새삼 '도달할' 방법이 달리 있을 리 없다. 따라서 라마나가 시사한 것처럼, 합일의식에 이르는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이것을 진실이라고 선언한다.

 

235 위대한 선사 하쿠인은 유사한 비유를 마음속에 품고 다음과 같을 글을 쓴 것으로 보인다.

 

진리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알지 못하기에

중생은 그것을 먼 곳에서 찾는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비유컨대 물 한가운데 있으면서

목마르다고 애원하며 울부짖는 사람과 같다.

 

238 스즈키 순류노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수행이 깨달음을 얻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라면, 사실 깨달음을 얻을 길은 없다. 깨달음이란 좋은 기분과 같은 특정한 마음상태가 아니다. (좌선 수행 시)그대가 앉을 때 존재하는 마음의 상태, 그 자체가 깨달음이다. 좌선에 있어서는 바른 마음 상태를 논할 필요가 없다. 그대는 이미 바른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239 다시 한 번 스즈키노사의 말을 인용해보다.

 

부처님으로부터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전수된 가르침은, 좌선을 시작할 대, 아무 준비하지 않아도 이미 깨달음이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좌선을 하든 안 하든, 누구에게나 불성이 있다. 본래 불성이 있다면, 우리가 좌선을 하는 이유는 우리도 부처님처럼 행동하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길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 앉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수행이다. 선禪수행이란 우리의 진정한 본성의 직접적인 표현이다. 엄밀히 말해, 인간에게는 이 수행 이외에 또 다른 수행은 없다. 이런 삶의 방식 이외에 또 다른 삶의 방식이란 없다.

 

261 한 노선사는 이렇게 말했다.

 

억겁億劫아래 나란 놈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

죽어도 달리 갈 곳이란 없도다.

아무 데도 없도다.

 

내가 저자라면

 

저자를 알게 된 것이 얼마 된지 않았는데 켄 윌버라는 저자를 좋아하는 사람이 주위에 많았다. 나만 모르고 있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반가워 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타인이 읽는다면 사람들은 반가워하고 좋아한다. 같은 장신구를 한 사람을 발견하면 자신의 것을 감추거나 아니면 다음부터 그 사람을 만날 때면 착용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특히 여자들은 그렇다. 책을 다르다. 같은 책을 읽고 그 내용을 함께 말하는 것은 재밌는 일이고 신나는 일이기 때문일까..? 그 작가 참 좋은 작가이다. 책 내용 좋다. 그런데 어렵다. 대부분 사람들의 반응이다. 과연 이 책을 저자의 책 중에 일반인을 위한 책이라고 했다. 제일 쉽다는 말이다. 읽으면서 그래도 그리 쉬운 책이 아님을 직감한다. 한번의 읽음으로 끝낼 책이 아님을 알아챈다. 하물며 이 코너는 가당치도 않다.

 

목차와 뼈대에 대하여

 

켄 윌버에 관하여

옮긴이의 말

머리말

초판(1979)머리말

 

1.       서론:나는 누구인가?

2.       그것의 절반

3.       무경계 영토

4.       무경계 자각

5.       무경계 순간

6.       경계의 생성과 전개과정

7.       페르소나 수준: 발견의 출발점

8.       켄타우로스 수준

9.       초월적인 나

10.   궁극의 의식상태

 

참고문헌

용어 및 인물해설(찾아보기)

켄 윌버의 사상

켄 윌버의 저술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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