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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11일 10시 08분 등록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 아르놀트 하우저 지음, 백낙청 옮김, 창작과비평사, 1999.03.05

 

1. ‘사회, 예술, 미술이 응겨붙을 때(저자에 대하여)

 

1. 헝가리의 유태인으로 태어난 하우저

 

아르놀트 하우저, 1892년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해있던 헝가리의 작은 도시 테메스바(Temesvár)의 유태인 가정에서 출생했다. 그는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19세기를 1830년에 시작해서 1910년까지 연속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므로 그가 출생한 1892년으로부터 그가 성인으로 성장해가던 시기의 대부분은 19세기를 살았다고 해도 무방하리라. 이 말은 물론 그가 전형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다분히 19세기적 지식인의 교양을 바탕으로 한 인물임을 말하기 위해서다. 그가 "영화는 대중문화의 특징적 산물"이라고 규정한다거나 "오늘날의 집권자치고 자기가 오로지 다수 대중의 이익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노라고 감히 공언할 자는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가 오늘날 우리가 만끽하고 있는 대중예술, 대중문화에 대해 일방적으로 호의를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다만 그의 사상적 배경엔 19세기적 지식인의 교양이 바탕을 이루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의 원저 명은 "Sozialgeschichte der Kunst und Literatur"이다. 원저 명대로 하자면 "문학"보다 "예술"이 먼저 나와서 『예술과 문학의 사회사』가 되어야 마땅한 번역일 테지만, 이 책의 옮긴이들이 문학비평가 내지는 그 방면으로 공부를 해온 분들이라 그런지 혹은 우리 사회의 일반적 경향 - 예술보다는 문학을 좀더 상위로 치는 - 때문인지 몰라도 『예술과 문학의 사회사』가 아닌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가 되었다.(하긴 이렇게 읽는 것이 입에 굳어서 그런지 어색하진 않다.) 그러나 하우저 자신은 문학, 특히 소설은 18세기의 예술로 규정하고 있으며 그 자신이 예술사가 이전에 미술사가, 미술비평가란 점은 기억해 두어야 한다. 오늘날 하우저는 그의 모국어격인 독일어권은 물론이고, 프랑스, 영미 문화권에도 널리 알려진 20세기 유럽의 대표적 지식인 중 한 사람으로 평가 받고 있다. 어떤 면에서 그는 "루카치", "아도르노"와 비슷한 계열의 지식인으로 평가 받고 있지만, 사상적으로는 이들과 많은 차이를 보인다.

 

  당시 테메스바는 헝가리 영토였지만 그의 부모는 독일 이주민이었고, 그런 덕분에 하우저는 어려서부터 독일어를 매우 유창하게 구사했다. 또 그의 부친은 독일어는 물론 헝가리어, 세르비아어까지 똑같이 구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부친이 생업을 제외하고 독서에도 열중하는 교양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우저의 회고에 따르면 부친의 손에 한 번도 책이 들려져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하우저. 내가 그를 특별히 좋아하는 한 까닭은 그가 만학(晩學)이자 전형적인 독학자의 면모를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렸을 때 그의 가정은 문화적인 교양이 넘치는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 자신이 정신적 발전을 이루기 시작한 것은 대학에 진학하면서부터였다. 불행 중 다행이었던 것은 그가 이곳에서 앞으로 평생 동료이자 절친한 친구가 될 칼 만하임(그렇다.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과 그의 스승이 될 게오르그 루카치를 만났다는 사실이다.

 

게오르그 루카치는 헝가리 출신 지식인 중 만하임과 함께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플로렌스와 하이델베르크에서 막스 베버, 레더러, 라스크 등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고, 에른스트 블로흐, 파울 에른스트와도 깊은 친교를 가졌다. 그가 헝가리로 돌아온 것은 1915년 무렵의 일이었고, 칼 만하임과 하우저 등은 곧 그의 제자가 되었다. 루카치는 "일요회(Sontagskreise)"라는 한 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독특한 모임을 만들었는데, 이 모임의 회원 수는 열두 명을 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모임에 속하기 위한 특별한 규정 같은 것은 없었으나 이들은 매주 일요일 오후 만남을 가졌고, 종종 만남은 그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지는 길고 긴 설전이 되곤 했다. 그들은 이 자리에서 점증해가고 있는 독일의 팽창주의를 염려했고, 문학을 토론했으며,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루카치의 이야기를 듣곤 했다.

 

2. 고달픈 망명생활과 문학과 예술의 사회학

 

하우저는 독일어만큼 프랑스어도 잘했다고 하는데, 그는 문학사를 전공했지만 문학사보다는 미술사 특히 조형예술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그는 고대의 조형예술가(조각가)들이 시인보다 낮은 지위에 머물렀던 원인을 분석하는데 많은 공력을 기울였던 까닭도 아마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에 하우저는 부다페스트와 베를린, 빈의 대학에서 문학사와 미술사를 전공했다. 전후 잠깐이었지만 헝가리 소비에트 정권 하에서(1919) 루카치의 도움을 받아 잠깐 부다페스트 대학의 교수에 취임하기도 했지만, 정권이 무너지자 그는 곧 빈으로 망명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 때의 망명은 그가 앞으로 전 생애에 걸쳐 이루어질 망명자 생활의 시작이기도 했다. 이 시기에 그는 미술사에 있어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뵐플린(Heinrich Wölfflin)의 양식사 연구, 드보르작(Max Dvorak)의 역사주의적 예술사 연구 등을 폭넓게 섭렵하였고, 또 이들과 사상적으로 결별했다. 그는 모든 예술양식 및 예술적 기호의 변화는 외적인 영향(하부구조의 변화)의 요구에 의해 생겨나며 그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변증법적 대립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의 이런 생각이 녹아 들어 훗날 평생의 저작으로 남게 될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의 뿌리가 되었다. 그는 떠돌이 망명자생활 동안 베를린 대학을 중심으로 한 사회과학자들 게오르그 짐멜, 베르너 좀바르트, 막스 베버 등의 사회학적 연구에 깊은 영향을 받았고, 파리와 이탈리아 등에 머무는 동안엔 직접 미술품을 접하여 안목을 넓혔다. 비록 고달픈 망명자 생활이었으나 그에겐 훗날 예술사 연구의 기초가 된 셈이었다. 하우저 내외는 독일을 떠나 빈에 정착하게 된다. 비록 헝가리로 돌아갈 순 없더라도 헝가리에 가까이 살고 싶다는 부인의 희망 때문이긴 했지만 하우저는 빈에서 더욱더 고달픈 생활을 해야만 했다. 독일에서 그는 출판사 일과 서적 판매업을 했는데 빈에서는 아무도 그를 고용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하우저는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별 볼일 없는 영화사의 사환으로 일했다.

 

비록 생계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 덕분에 하우저는 수백, 수천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경험, 새로운 예술이 탄생하는 것을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지켜볼 수 있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예술작품이 복제 가능해짐에 따라 예술을 대하는 대중의 태도가 '회화를 대하던 보수적 태도에서 영화를 대하는 진보적 태도'로 변화"하였고, "영화에서는 관중의 비판적 태도와 감상적 태도가 일치한다. 영화의 관객은 이전 회화 감상자처럼 위계 질서적 매개를 통해 개별적으로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인 집단 수용의 형태로 감상하기에 그 반응이 다르다."고 말했던 바로 그 변화를 그는 바로 영화사의 책상에 앉아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빈에서의 망명생활도 종지부를 찍을 날이 오고 말았다. 나치 독일이 빈(오스트리아)을 점령하자 그는 또다시 영국으로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빈에서와 마찬가지로 영국에서의 망명생활 역시 그에겐 고달픈 것이었다. 그는 돈도, 명성도, 목적도, 희망도 없이 떠도는 망명자였다. 그는 이곳에서 오랜 세월 함께 했던 아내와 사별하는 고통까지 겪어야 했다.

 

그는 이런 곤궁과 비참 속에서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집필했던 대영도서관에 갔다.

언제나 그곳을 기억할 때면, 나는 그와의 털끝만한 연대성도 감히 느끼지 못합니다만, 그곳에 앉아있는 순간은 바로 내가 다름 아닌 성소에 있다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예술사의 철학, 414쪽에서 재인용>

 

런던에서의 1940년부터 1950년까지 하우저는 어느 영화사에서사환이 하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며, 직장 일이 끝난 저녁 시간과 주말을 이용해 10여 년에 걸쳐 빈에서 착수했던 영화미학과 예술사회학에 관한 저술을 계속했다. 그러던 중 하우저는 먼저 런던에 와 있던 칼 만하임으로부터 그가 담당하고 있던 예술사회학에 관한 선집의 100여 쪽에 달하는 짧은 서문을 청탁 받는다. 그는 서문을 집필하기 위해 관련 서적들을 찾았으나 마땅히 참고할 만한 책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이 하우저로 하여금『문학과 예술의 사회사(Sozialgeschichte der Kunst und Literatur)』를 집필하게 만든 동기였다. 하우저는 짧은 서문을 쓰는 대신에 보다 체계적인 예술사회학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47세 때의 일이었다.

 

제 자신에 대해 간단히 말씀 드린다면, 저는 늦포도를 따는, 즉 첫서리가 내린 후 포도가 가을의 향내를 그윽하게 내뿜을 때 포도송이를 수확하는 사람이라고나 할까요? 제가 최초의 주목할 만한 책을 쓴 것은 47세와 57세 사이로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창조의 정점이 지나가 버린 연배입니다. 이것이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가 이루어진 10년간입니다. <아놀드 하우저, 예술사의 철학, 415쪽에서 재인용>

 

마침내 그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탈고했으나 누구도 무명의 학자가 저술한 방대한 분량의 원고를 선뜻 출판해주려 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뒤라 『반지의 제왕』도 J.R.R.톨킨의 희망과 상관없이 3권으로 분재되어 출판되던 때였다.) 이 무렵엔 그의 친구 칼 만하임이 이미 사망하고 난 뒤였으므로 그를 보증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때 대영도서관에서 알게 된 영국의 미술사가 "허버트 리드"가 하우저의 저작에 주목해 그의 출판보증인이 되어 주었다. (공교롭게도 허버트 리드와 하우저의 입장은 정반대의 것이었지만하우저는 예술현상을 사회구조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파악한 반면에 리드는 형이상학을 좀더 중시했다. 그의 책은 국내에도 여러 권 출간되어 있는데, 열화당 - 『도상과 사상』, 『조각이란 무엇인가』, 시공사-『간추린 서양현대조각의 역사』, 현대미학사-『예술의 뿌리』 등)

 

이런 우여곡절 끝에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1951년 영국 런던에서 처음 책으로 출간되었고, 1954년 독일어판이 출간되면서 하우저는 뒤늦게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곧 영국 리드 대학에서 전임 강사직을 얻게 되었고, 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까지 미국 대학에서 초청을 받아 교환교수로 활동했다. 이 시기에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 대한 이론적 연구서라 할 수 있는 『예술사의 철학』(1958)을 출판(국내에서는 1983년 돌베게에서 출판)했고, 그의 만년에 저술한 『예술의 사회학』(1974)은 자신의 예술이론과 연구방법론을 최종적으로 마무리 짓고 있다(국내에서는 한길사에서 1983년 출간했으나 완역은 아니고, 나머지 부분은 그보다 앞산 1981년 홍성사에서 『예술과 사회』란 제목으로 펴냈다.) 그는 『예술사의 철학』을 통해 20세기의 전자공학과 산업생산의 발달, 기계적으로 생산되고 복제되는 대중예술에 대한 그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불행히도 아놀드 하우저의 저술 가운데 국내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책들은 이제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뿐이다.

 

3. 예술도 천재도 시대의 산물이다

 

개인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나는 하우저를 문화연구(Cutural Studies)의 시조까지는 아니더라도 문화연구의 중요한 방법론 혹은 관점을 제공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그가 지닌 미덕들이 또한 "문화연구"의 일정한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는 생각을 함께 하고 있다. 문화연구란 아직 미완성인 상태 - 만약 그것이 스튜어트 홀을 비롯한 영국의 문화연구자들이 바라는 것과 같이 계속해서 비판적 이론으로 생존하기 위해서는 끝까지 미완성 형태로 남아야 할 터이지만 - 열린 구조를 지향하는 학문이다. 문화연구가 국내에 받아들여지는 과정이 그러했고, 캐나다, 호주, 서남아시아 등의 사례 역시 그렇지만 문화연구는 진보주의자들에게 먼저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그 까닭은 문화가 이전의 진보주의자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연구되던 주제인 "사회"를 대신했기 때문이다.

 

문화연구(Cultural Studies)란 학문은 특히나 실천을 강조하는 측면이 있고, 국내에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 90년대부터이다. 외국의 경우 학제간 연구로 활성화되고 있으나 국내에서는 대학원 과정에서만 일부 다뤄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역사적 맥락에서 보자면 문화연구는 일종의 비판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정치경제학이 담당했던 역할의 일부를 맡고 있다고 해야 할 터인데, 정치경제학에서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짓는다"는 명제가 경제결정론(경제환원론)으로 비판 받으면서 - 이 비판은 실제 역사 현실에서 노동자 계급이 늘 자신의 하부구조에 맞는 정치적 결정을 내리지 않았으며, 상부구조가 어떻게 하부구조를 왜곡하고 변형하는가에 대한 비판 없이는 자본주의 사회구조를 이해할 수 없고, 변혁할 수 없다는 반성에서 출발했다 - 그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 연구(고정된 '학문'이 아닌)이라 할 수 있다.

 

그와 같은 관점에서 하우저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통해 "예술은 역사와 사회의 관계에 의한 것이란 주장"은 그가 처음 이 주장을 펼친 것이 1950년대 초엽의 일이란 것을 생각해보면 매우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예술작품(현상)은 사회경제적 조건 속에서 탄생한다는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관을 예술사에 도입한 최초의 인물이다. 하우저 이전까지 예술은 이데아의 모사와 같은 형이상학적 입장에서 이해되었고, 예술은 천재들의 놀라운 업적에 의해 이룩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르네쌍스의 예술관에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은 천재 개념의 발견이다. 예술작품은 자주적 인격의 소산이고 자주적 인격은 전통, 이론, 규범은 물론 작품까지도 넘어서서 그 위에 군림하는 것이며 작품은 그 법칙을 이러한 인격으로부터 얻을 수 있다는 이념, 바꾸어 말하면 이러한 자주적·창조적 인격의 소유자는 작품보다 더 풍부하고 심원하여 어떠한 객관적 형상으로도 완전히 표현될 수 없다는 이념이 그것이다. …<중략>… 천재란 곧 신의 선물이요 남에게 양도될 수 없는 타고난 창조력이라는 이념, 천재가 따를 수 있고 또 따라야만 하는 독자적이고도 일회적인 예술의 법칙성에 관한 이론, 그리고 천재적 예술가의 특성과 고집에 대한 합리화, 이러한 모든 생각들은 자유경쟁에 입각한 동적인 사회의 본질 때문에 중세의 권위주의적 문화에서보다 개인들에게 더 좋은 기회가 주어졌고, 또 지배자들이 그들을 선전해야 할 필요성과 수요가 증가했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공급규모로써는 도저히 예술시장을 충족시키지 못할 만큼 예술의 수요가 급증했던 르네쌍스의 사회에 와서야 비로소 생겨났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2, 94-95>

 

비록 하우저 자신은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적 입장이나 실천적 입장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았으나 스스로를 마르크스의 동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바라본 예술사 속에는 마르크스 이론이 녹아있다. 하우저는 르네상스 이래 서구세계를 지배해온 "예술을 위한 예술"의 시각에서 벗어나 예술을 예술 그 자체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는 먼저 왜 그 작품이 그 시대에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를 먼저 생각하게 만든다. 그는 마치 한 시대가 산출한 예술작품은 예술가 개인 한 사람의 작품이 아니라 동시대를 살았던 모든 이들의 작품이며, 예술이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무엇이 아니라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역사, 계급의 문제라고 역설하고 있는 듯 보인다. 문화연구가 문화적 관습과 권력과의 관계, 사회적, 정치적 맥락 속에서의 문화, 정치적 비판과 행동이 일어나는 장소로서의 문화, 비판적으로 정치에 관여하여 사회를 재구성하고, 근본적으로는 산업자본주의 사회의 지배구조를 이해하고 이를 변모시키는 것에 목표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일정하게 하우저와 궤를 같이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하우저의 모든 관점이 받아들여지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나라에서 계속 출간되고 있는 그의 저서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한 종에 불과하며, 이 또한 광고는 물론 수용자(독자)들 자신에게도 일종의 문화예술교양서 정도로 취급 받고 있다는 사실이 잘 반증해주고 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하우저의 생애와 저술들을 통해 알 수 있듯 그 자신이 다른 입장에서 비판한 T.W.아도르노처럼 유럽적 교양(지식)을 주된 입장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하우저에게 있어 초기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뵐플린의 "형식주의적 전통 내지는 자율적인 예술적 구성물에 대한 내재적 고찰방식"에서 그가 탈피하게 된 계기가 '새로운 예술' 영화의 발견에 의한 것이긴 했으나 발터 벤야민처럼 대중을 긍정적으로만 바라보지 않았다는 점, 대중예술에 비해 고급예술(high art)의 우위를 확실히 인정하고 있는 점 등에서 최근의 조류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그러나 하우저의 입장과 관점이 그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영국의 대중문화론자들 매튜 아놀드, 리비스의 엘리트주의적 관점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하우저는 과거의 공동체 의식이 사라진 현대 산업사회를 소외의 시대로 보았다는 점에선 - 대중사회에서는 예술이 수용자에게 제기하는 요구들이 줄어들고 예술의 질적 수준이 저하됨에 따라 예술의 위기가 초래 - 대중문화론자들의 관점과 일치했으나 "예술의 민주화가 이루어지게 됨으로써 과거의 예술과 문화의 '독점 상황'이 사라지게 된 이상, 이제는 감상자 모두가 일종의 비평가적인 입장에서 작품을 대할 수 있게 되었고, 또 매체의 다원화와 교육의 확산에 의한 매개활동을 통해 그러한 비평가적 안목을 길러야 할 것"이라 말함으로써 합리적이고 생산적인 매개활동을 통한 예술의 대중화에 대해 긍정하고 있다.

 

우리의 과제는 다수 대중의 현재 시야에 맞게 예술을 제약할 것이 아니라 대중의 시야를 될 수 있는 한 넓히는 일이다. 참된 예술의 길은 교육을 통한 길이다. 소수에 의한 항구적 예술독점을 방지하는 방법은 예술의 폭력적인 단순화가 아니라 예술적 판단능력을 기르고 훈련하는 데 있다. 문화정책의 모든 영역에서 그렇듯이 예술의 세계에서도 발전을 자의적으로 중단하는 것은 항상 해결해야 할 문제의 회피가 되고 만다는 데에 가장 큰 난점이 있다. 즉 문제가 생기지 않는 상태를 조성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해결책을 발견하는 일을 연기하는 것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원시적이면서 동시에 가치 있는 예술을 만들어내는 길은 없다. 오늘날 참되고 진취적이고 창조적인 예술은 복잡한 예술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예술을 누구나 똑같은 정도로 즐기고 이해할 도리는 없지만 좀더 폭넓은 대중의 참여가 확대되고 심화될 수는 있다. 문화적 독점을 해소하는 전제조건은 무엇보다도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전제조건을 만들어내기 위해 싸우는 수밖에 없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4, 324-325쪽 중에서>

 

하우저의 지적 작업이 지닌 최고의 미덕은 그가 서양의 문학과 예술 사조, 철학과 미학, 역사, 정신분석학과 사회학에 두루 통달한 박학다식(博學多識)이 결코 아니다. 그보다 놀라운 것은 그가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적 입장에서 "사회 경제적 토대로부터 문학과 예술을 설명하고 양자를 변증법으로 꿰어내는 솜씨" 때문이다. 하우저는 사회적 조건이 변함에 따라 예술의 주체로서 작가와 독자가 다른 계급의식과 미의식을 형성하고 이에 따라 예술이 펼치는 파노라마를 마치 영화의 내러티브 구조를 따라가듯 정신 없이 펼쳐 보인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사전지식이 풍족하지 않은 일반인 읽어내기엔 분명 어려운 책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이만한 지적 수준에서 이만한 지평을 대중에게 폭넓은 깊이를 획득하여 펼쳐 보이는 책은 현재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쉽게 만나기 어려울 것이란 사실만큼은 단언할 수 있다.

 

4.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가 가야 할 길

 

하우저가 마르크스의 이론적 틀과 변증법적 방법론은 인정하면서도 마르크스주의의 정치적 실천과 경제환원론이 예술의 문제, 문화의 문제를 규정지을 수 있다는 입장에는 확실한 반대 입장을 보이는 것은 문화연구의 입장과 흡사하다. 이는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나치의 독일 지배에 대한 반성에서 출현했던 것처럼, 영국의 문화연구가 1956년 소련의 헝가리 침공에 대한 영국 내 신좌파의 반응으로 출현했다는 것과 묘한 일치를 보인다. 문화연구는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과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개념을 받아들이면서 문화를 계급간 헤게모니(도덕적이고 지적인 지도력)를 놓고 벌이는 대립과 충돌의 장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어떤 이는 문화연구에 대해 "가면을 쓴 마르크스주의"라는 비판을 가하기도 한다. 이것은 문화연구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아주 틀린 말이라고는 할 수 없다. 실제로 마르크스주의는 문화연구에 매우 밀접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연구는 산업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계급과 더불어 성별, 인종적 혈통에 따라 불평등이 이루어진다고 보고 있다. 다른 한 가지는 문화연구가 마르크스주의의 문화유물론을 인정하고 수용했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문화연구는 문화적 힘이 어떻게 사회구조에 역사적 형태를 부여하는가의 관점에서 사회구조를 분석한다. 문화가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사회구조뿐만 아니라 역사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문화연구는 역사와 경제 결정론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환원주의적 마르크스주의와 구별된다.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가 드러내고 있는 가장 큰 한계는 그의 시각이 서양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서구에서 출간된 많은 통사들이 그러하듯 실제로는 "서양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1세계의 문학사는 서양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했고, 2세계의 문학사는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계를 노출한다. 문화연구 역시 오늘날 몇 가지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그 중 하나는 학계 외부에서 대립적인 지적 전통의 하나로 출발했던 문화연구가 점차 학제 내부로 흡수되고 있는 것이다. 문화연구 역시 점차로 학문의 한 분야로, 학문제도와 권력구조의 일부로 변모해가고 있으며, 문화연구가 마치 서구(미국과 유럽이 제공하는)의 유치하기 그지없는 대중문화를 정당화하는데 앞장서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아메리카나이제이션의 문제). 그렇기에 문화연구는 결과적으로는 앵글로색슨의 문화적 식민지화 작업에 봉사할지도 모를 앵글로색슨의 하위계급에 대한 연구이기 보다는 근본적으로 지역연구여야 하며 진부하기 짝이 없는 연구들을 되풀이하기 보다는 비판이론으로서의 새로운 틀을 갖추어야만 할 때이다. < 2005. 9. 24.  >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의 옮긴 이 가운데 한 명인 반성완은 이 책이 지닌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첫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사회사적 관점에서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전유럽의 예술과 문학을 통사적으로 서술한 유일한 저서이다.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 대항 · 필적할 만한 저서는 아직도 나오지 않고 있다. 이러한 면에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비록 문학에 한정되어 있고 또 방법론을 달리하고 있지만 역시 통사적 성격을 띠고 씌어진 아우얼바하의 『미메시스』와 쿠르티우스(E.R.Curtius)의 『유럽문학과 중세라틴문학』과 함께 날이 갈수록 미시적 연구에만 빠져드는 제도권 중심의 오늘날의 학문적 풍토 속에서 앞으로도 계속 하나의 기념비적 업적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유럽의 예술사를 사회사적 시각에서 조감해보려는 문학도에게는 일종의 교과서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하우저는 문학사가이기 이전에 미술사가이다. 그의 문학에 대한 관심과 조형예술에 대한 관심은 그가 주장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일종의 평형 상태를 이루고 있다. 이는 예술사가가 가질 수 있는 최대의 강점이다. 그가 르네상스와 바로크 사이의 조형예술에 나타나는 양식사적 현상, 즉 매너리즘을 셰익스피어 문학 해석에 적용시키고 있다든가 20세기 전위문학의 특성을 현대의 영상예술에서 찾는다든가 하는 등의 그의 미술사가로서의 시각이 없었더라면 아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우저의 이러한 특징은 현대예술을 음악과 문학의 관련 속에서 보는 아도르노의 예술이론의 특징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셋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일반적 이론과 구체적 작품 비평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부분과 전체의 관계가 변증법적으로 잘 매개되고 있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보이는 몇몇 개별적인 작가나 작품에 대한 하우저의 뛰어난 실제 비평은, 그가 정해놓은 이론의 틀을 끊임없이 교정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하나의 예술사가 빠지기 쉬운 도식적 사고에서 벗어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예술사가로서의 하우저의 이러한 특징과 입장은 이론적 · 체계적 비평에 매우 강한 루카치와 개별적 예술품에 날카로운 감식안을 가지고 있는 아도르노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 보는 것처럼 이론비평과 실제비평이 서로 연결 짓지 못한 채 이루어지고 있는 문학연구나 예술연구의 실정에 비추어 보면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가 갖는 이러한 특징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넷째. 하우저의 사회사(사회학)적 연구방법론의 특징은 이미 언급한 대로 사회학적 연구방법론이 빠지기 쉬운 도식적 구성과 방법론에서 벗어나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표현을 빌면 현대 사회과학이 제공하는 여러 사회학적 인식은 그에겐 예술적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보조 수단에 불과하다. 그는 예술적 현상이 전체적으로 보면 예술 외적 요인에 의해 규정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 모든 요소에 의해서도 설명되지 않는 예술의 어떤 실체 내지 본질이 있다고 믿고 있는 듯 하다. 이러한 예술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대체로 그는 이러한 예술의 본질적 면을 예술의 형식 내지 양식이 가지고 있는 지속성과 자율성, 그리고 예술이 갖는 보편적 기능이라는 면에서 파악하고 있는 듯하다. 그가 뵐플린 식의 양식사 문제에 끊임없는 관심을 보인다든가, 현대 예술의 특징을 16세기의 매너리즘적 양식의 연속선상에서 고찰한다든가, 아니면예술의 종말론을 강력하게 부정하고 현대예술의 존립근거와 기능을 옹호한다든가 하는 것이 그의 예술관의 이러한 면을 잘 말해주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적 예술연구방법론에 대한 그의 관계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상 인용함-

 

저서

1951 :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Sozialgeschichte der Kunst und Literatur) ISBN 8936479954

1958 : 《예술사의 철학 (Philosophie der Kunstgeschichte)

1964 : 《매너리즘 : 르세상스의 위기와 근대 예술의 기원 (Der Manierismus. Die Krise der Renaissance und der Ursprung der modernen Kunst)

1974: 《예술의 사회학 (Soziologie der Kunst) ISBN 8935600490

1978 : "Im Gespräch mit Georg Lukács" kleiner Sammelband mit drei Interviews und dem Essay "Variationen über das tertium datur bei Georg Lukács"

 

2.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 본문 내용, Ü : 나의 언어)

 

1. 선사시대

 

□ 아이들의 그림이나 오늘날 원주민들의 예술은 감각의 소산이라기보다 이지의 소산이다. 즉 그들은 실제로 그들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을 그린다. 시각에 들어 온 모습 그대로를 그리는 게 아니라 대상에 대한 이론적인 종합을 제시하는 것이다. (p. 15)

 

□ 우리 현대인들이 복잡한 기구를 동원해서야 발견해낸 갖가지 뉘앙스를 구석기시대 화가들은 그대로 육안으로 볼 수 있었다. 이러한 능력은 신석기시대에 이미 상실되었으며 이 단계에서 벌써 인간은 감각적 인상의 직접성 대신 개념의 고정불변성에 의존하게 되었다. (p. 15)

 

Ü 장자가 말하는 무대의 마음, 무매개의 시선은 최초 인류에게 본성처럼 깊이 박혀있었던건가? 그 잃어버린 마음과 시선을 찾으려 노력하는 눈물겨운 시도들을 우리는 문명이라 부르는가? 장자를 연구한 강신주는 말했다.

 

장자는 바로 소통과 선이해, 무매개와 매개 사이의 기로에 서 있었던 사람이다. 소통을 하기 위해 선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고착된 자의식을 비울 것인가? 아니면 자의식의 동일성을 지키기 위해서 소통을 폐기할 것인가? 장자는 우리에게 비움을 권고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매개적 소통 쪽에 서게 된다.’

 

이 말에 따르면 구석기 시대의 자연주의 화가?들은 고착된 자의식이 미처 스며들기 전의 인류이며 이 인류가 그린 그림, 했던 말들은 세상과 무매개적으로 소통한 흔적이다. 우리가 보는 라스꼬 벽화의 소 그림은 우리가 원시인이라 부르며 폄하시킨 사람이 그린 고도의 철학적 경지의 소산이다. 따라서 그런 인류를 원시인이라 부른 원시적 정신세계의 천박함을 가진 인류가 바로 현대의 인류다.

 

□ 근대예술이 한 세기에 걸친 투쟁 끝에 겨우 달성한 시각적 인식의 통일성을 구석기시대 회화는 처음부터 힘 안들이고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눈으로 본 것과 머리로 아는 것 사이의 이원적 대립은 구석기시대 전체를 통해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p. 16)

 

Ü 있는 그대로를 볼 줄 아는 시선.

 

러시아 시베리아 극동 지역의 시호테 알린 산맥 주변에 거주했던 토착 주민데르수 우잘라는 별과 달을 묻는 문명인의 물음에 다음과 같이 답한다. 재미있다.

 

“별이 뭔가?

저기 별 떴다. 보면 된다.

달은 대체 뭘까?

눈 있는 사람 달 본다. 저게 달이다.

하늘은 어떤 의미일까?

환할 땐 파랗다. 캄캄해지면 까맣다. 비 올 때 흐리다. 다 볼 수 있어. 근데 대장은 맨날 묻는다. 대장 눈 나빠?”

 

이것은 매우 명쾌한 답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붙잡고 머리를 쥐어 뜯는 나를 보고 데르수는 웃으며 가소롭다는 듯 답할 것 같다. “너는 너지.”

 

□ 그들은 그림 속의 짐승을 죽이면 실제의 짐승도 죽게 마련이라고 믿었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그들이 원하는 결과를 미리 예기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마술적 시범에 뒤이어 실제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아니 마술적 시범행위와 실제 행위 사이에 가로놓인 것은 (그들의 사고방식에 의하면) 아무런 실체가 없는 매개물인 시간과 공간뿐인 만큼 원하던 바의 사건은 이미 일어난 것이라고 보았다 (p. 17)

 

Ü 시간과 공간을 실체 없는 매개물로 인식하는 사고방식, 이거 멋지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될까? 실현된 미래 속에서 살 수 있지 않을까? 이루어진 미래, 그것은 시간적으로 미래지만 발생적으로 현재다. 반대로 시간적으로 현재지만 발생적으로 미래다. 미래와 현재가 삼투압하는 사고방식, 스승은 말했다.

 

저 사람이 우리네 들소를 여러 마리 자기 책에 넣어 간 것을 나는 안다. 내가 그 현장을 보았으니까.’ (p. 19)

 

Ü sioux족 인디언이 들소 그림을 그린 사람을 보며 한 말이다.

 

□ 위치선정, 암중모색

 

□ 단순한 추측이나 상상의 산물로 단숨에 생겨날 수 없고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쳐 발견되고 점진적으로 완성되었을 것 (p. 21)

 

Ü 이 긴 시간의 시도들을 상상하라. 우린 그냥 시도 중 하나일수도 있다.

 

□ 이러한 결정적이고 혁명적인 전환점을 이룬 계기는 바로, 인간이 식량을 채집하거나 수렵하는 식으로 자연의 혜택에 기생하며 살아가는 대신 이제부터는 스스로 식량을 생산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p. 23)

 

Ü 추상화된 예술형식의 탄생, 인류역사에서 가장 과거와의 깊은 단절, 문명 전반에 걸친 일대 변혁, 인간이 노동하고 가축을 관리하기 시작한 시점. 이어서 권위가 생겨나고 특권층이 나타나며 지배와 피지배 구조가 구축되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어찌 보면 인류의 억압이 시작된 시점이라 봐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 무계획적인 약탈경제,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식의 연명방법 대신에 긴 장래의 일을 미리 배려하여 여러 가지의 사태진전 가능성에 대비하는 계획적인 경제활동이 등장했다. 사회생활도 분산과 무정부 상태의 단계에서 상호협력의 단계로 각자가 제 먹을 것을 찾는 단계에서 집단적인 노동공동체로 즉 공동의 이해와 공동의 목적을 갖고 공동작업에 임하는 사회로 옮아간다. (p. 24)

 

Ü 윤리와 지배체제가 생겨 나는 시점 곧 권위의 탄생이다.

 

□ 농경문화 목축문화와 더불어서야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운명이 일정한 섭리와 의도를 지닌 힘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날씨가 고른 정도, 비와 햇볕, 천둥과 우박, 전염병과 가뭄, 토지의 비옥함이나 가축의 다산성 여부 등에 의존하고 있다는 의식은 축복 또는 저주를 가져다 주는 선악 사이의 온갖 신령이나 정령의 개념을 낳으며 신비스러운 미지의 존재, 압도적인 위력을 가진 초인적 존재,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존재에 대한 관념을 낳게 되는 것이다 (p. 25)

 

Ü 신이 탄생하는 지점인가. 애니미즘과 힌두의 사상은 닮아 있다. animsm, 모든 자연물에 정신, 정령 또는 의지가 있다고 믿는 신앙 또는 학설, 물활설, 정령설 등으로도 옮김

 

□ 예술작품은 이제 단순히 대상의 재현일 뿐 아니라 사유의 표현이며 기억의 소산만이 아니고 상상력의 산물이기도 하다. 바꾸어 말하면 예술가의 마음속에 있는 감각적이 아닌 개념적인 요소가 감성적, 비합리적 요소를 압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실물의 모사는 점차 상형문자식의 기호로 변하며 사실성이 넘치는 그림은 사실성이 전혀 없거나 거의 없는 일종의 속기 기호로 변모하게 되었다. (p. 26)

 

Ü 언어와 문자의 탄생이다. 이거 굉장히 신기하다. 지배와 피지배가 탄생하고 윤리가 탄생하며 체제가 탄생하고 신이 탄생하고 언어와 문자가 차례로 탄생되는 순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차적으로 생겨난 것은 아니겠지만 이러한 획기적 문명의 탄생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흥미진진하다.

 

□ 관념과 현실, 정신과 육체, 영혼과 형식 등의 대립으로 표현되며 이제는 예술의 개념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이원론적 대립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때때로 균형을 이루는 수도 있으나 이 대립에서 오는 긴장은 서양 예술의 그 어느 시기에서나 엄격한 형식을 중시하는 시기든 자연주의적인 시기든 항상 감지할 수 있다. (p. 28)

 

□ 본질적으로 집단적이며 인습적인 농경사회의 노동방식과 더불어 문화생활의 전 영역에서 틀에 박히고 탄력성이 없으며 안정된 형식이 발생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p. 29)

 

Ü 지식을 생산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없던 사실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결국 있던 사실을 해체하고 종합하여 나름의 시각으로 분석해낸 결과를 그럴듯한 용어를 써가며 체계화 시키거나 묶어내는 일일 터다.

 

정치학 용어로서 권위주의적이라는 말은 독재정치와 사회주의, 봉건제도와 공산주의 사회 그 어느 것에도 해당될 수 있는 데 반해, 기하학주의적 예술양식의 분포 범위는 그보다 훨씬 좁다그런가 하면 평등의 개념은 예술에서보다 사회학에서 훨씬 좁은 의미를 지닌다. 정치적, 사회적 의미로 쓰일 때 그것은 여하한 종류의 독재체제와도 양립할 수 없는 말이지만 예술의 영역에서는 단순히 초개인적이라든가 비개성적이라는 정도의 의미를 지닐 수 있으므로 전혀 상이한 여러 사회질서들이 낳은 예술에 적용될 수 있는데 다만 민주주의나 사회주의의 정신과는 가장 거리가 먼 셈이다. (p. 32)

 

Ü 권위와 평등이 다른 분야에서 가지는 의미론적 스펙트럼이다. 혜안이다. 권위는 어느 시대 어느 체제에도 존재한 개념,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이 존재하는 한 어떤 체제라도 권위라는 것이 존재할 수 밖에 없고 그 권위는 또 다른 반대 권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인간이 가진 원초적 두려움을 가장 정치적으로 잘 활용한 개념이 권위가 아니겠는가.

 

□ 화가와 조각가의 존재가 허용되었다면 그것은 곧 그 사회가 이들 비생산적인 전문가들에게도 나눠줄 만한 물질적 여유를 가졌다는 증거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유치한 사회학의 주장처럼 예술의 융성기는 곧 경제적 번영기라는 식으로 이 원칙을 적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p. 35)

 

Ü 여기서 일하지 않은 자가 먹기 시작했다. 이 말을 해놓고 조금 유치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시대의 고민을 짊어진 자처럼 지사적 심각함이 묻어나기 때문인 것 같은데 실소가 나온다.

 

□ 예술의 어떤 종류나 스타일 또는 장르가 오래된 것일수록 외부로부터의 간섭을 받지 않고 그 자체의 내재적인 법칙에 따라 독자적 발전을 해온 도정이 길게 마련이며 어느 정도 자율적인 이러한 발전 과정이 길면 길수록 주어진 예술형태의 복합적 용인 가운데 어느 한 요소를 사회학적으로 설명하기가 곤란한 법이다. (p. 38)

 

Ü 세월의 묵직함으로 돌아나가지만 결국 첨단에 이르는 것은 유행이 아니다. 유행은 그야말로 흘러 지나가는 것이고 본질적인 가치를 남기지는 못한다. 유행의 인간이지만 유행의 인간의 물결에 합류해서는 안 되는 것이 이 때문이다.

 

2. 고대 오리엔트의 도시문화

 

신석기시대가 끝나면서 일어난 생활상의 변화는 이 시대가 시작할 때의 변화와 거의 맞먹을 정도로 전면적인 것. 독립적인 상업과 수공업의 시작, 도시와 시장의 발생, 인구의 집중과 분화 등이다. 두 경우 모두, 비록 그것이 돌연한 변혁이기보다는 점진적인 개조의 형태를 띠기는 했지만 인류생활을 전적으로 뒤바꿔놓았다.

 

권위주의적인 지배형태, 자연경제의 부분적 온존, 예배 및 종교적 요소로 가득 찬 일상생활, 기본적으로 엄격한 형식을 지키고자 하는 경향을 지닌 예술 등 고대 오리엔트 세계의 거의 모든 제도와 관습에서 새로운 도시생활 형식과 더불어 신석기 시대의 풍속과 관습이 존속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p. 45)

 

Ü 세계를 설명하는 주요 변화는 농경, 상업의 등장으로 인한 신석기시대의 종말, 과학의 발전과 산업혁명,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득세. 정도가 되지 않겠는가. 그 안에서 인간의 모습은 수렵인간, 농경인간, 노동인간, 기업인간으로 바뀌겠다.

 

□ 부가 증대하고 경작지 및 자유로이 처분 가능한 비축식량이 비교적 소수자에게 집중됨으로써 수공업 생산품에 대해 이전보다 강력하고 다양한 새로운 수요가 생겨나며 분업화 과정이 크게 촉진된다. (p. 46)

 

다루기 힘든 재료의 완전한 장악 (p. 46)

 

Ü 이 결정적 한방이 세계를 바꾸어 놓은 것 같다.

 

예술적 의지란 그물처럼 촘촘히 얽힌 장애물을 뚫고 나감으로써 비로서 성취되는 것 (p. 48)

 

Ü 그물과 장애물은 현실일 것.

 

자유의 많고 적음이 예술가 개인에게는 지대하게 중요할 수 있으나 가장 자유주의적인 사회의 인습에서 오는 제약이든 전제군주의 절대명령에서 오는 제약이든 그것이 제약인 점에서는 아무런 원칙적인 차이가 없다. 만약 강제라는 것이 그 자체로서 예술의 정신과 배치되는 것이라면 완전한 예술작품은 완전한 무정부사회에서나 나올 수 있는 것일 게다. (p. 48)

 

Ü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사회에서 예술의 진보가 상대적으로 덜 자유로운 사회의 그것과 비하여 획기적인 보폭의 차이가 드러나지 않을 터다. 다만 시대적 다양성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다.

 

□ 사제들은 왕이나 제후를 자신의 세력권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그들을 신격화하는 데 동조했고 왕후들은 자신의 명성을 드높이기 위해 사제와 신들을 위한 사원 건립에 동의했다. 양자는 각기 상대방의 권위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활용하고자 했으며 양자 모두 자신의 권력을 지탱하기 위한 투쟁에서 예술가의 조력을 빌리고자 했다. (p. 50)

 

Ü 정치적 예술, 예술의 정치화

 

사회의 특권계급에게 인생의 모든 값지고 즐거운 것들이 갖는 의미는 그것들이 자기 이외의 계층에는 부여되지 않았다는 사실과 항상 연관되며 그들의 모든 생활신조는 많건 적건 간에 배타적인 예의범절의 규칙과 같은 성격을 띠는 것이다. (p. 58)

 

Ü 그렇다 그네들의 속성은 부와 특권의 배타적 유지와 불가침 권위를 지속시키는 것이다. 관심사가 이렇게 천박하다 보니 늘 가져도 더 가지려 하고 남의 것을 취하여 자기 것으로 하다 보니 늘 불안하고 불안이 배타성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고 이러한 관계적 유리가 스스로를 옥죄어 간다.

 

□ 머릿속에서는 분명히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시각적으로는 서로 연관성이 없을 뿐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모순되기까지 하는 그림의 각 부분을 합성하는 이른바 봉합적 묘사방법에서도 결코 벗어나본 적이 없다. (p. 60)

 

□ 정면성의 원리 frontalitat (p. 61)

 

□ 그림 속 인물은 오른쪽 측면만을 감상자 쪽으로 돌린다는 것이다. (p. 64)

 

□ 강하게 인습에 사로잡히고 딱딱할 정도로 의례적이며 기념비적인 엄숙함을 가진 양식의 한구석에는 반드시 더 자유롭고 더 분방하고 더 자연스러운 태도를 보여주는 듯한 수법이 눈에 띈다. (p. 70)

 

Ü 인간은 이런 자유의 유혹을 한번도 도외시한 적이 없다. 도외시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 예술사의 영역에서는 동일한 원인이 반드시 동일한 결과를 낳지는 않는다는 것, 아니 그보다도 예술사에 작용하는 원인이란 그 수가 너무 많은 탓에 과학적인 분석으로 남김없이 밝혀질 수 없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입증할 따름이다. (p. 79)

 

Ü 개별 인간의 삶이 복잡한 만큼 사회적 이해관계도 복잡하기 마련이다.

 

3. 고대 그리스와 로마

 

□ 서사시 epos, epic. 서사적인 내용을 다루되 일정한 율격과 형식 및 격조를 갖춘 장편 서사시 또는 사시를 뜻함 (p. 85)

 

□ 봉건제도의 사회윤리는 혈연과 씨족에 의한 연대관계를 부정하고 도덕관계를 개인화, 합리화한다. 씨족 국가와 민족국가의 갈등을 소재로 한 것이 많은데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p. 88)

 

□ 문학의 사명은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을 싸움터로 몰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승리로 끝난 싸움 뒤에 장수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그들의 이름을 들어 칭송하며 그들의 명예를 드높여 후세에 전하는 것이 되었다. (p. 89)

 

□ 승리를 거둔 전쟁이나 약탈행각에 관한 최신의 보고 (p. 90)

 

Ü 서사시의 초기적 형태다. 기원이라고 하겠다. 문학이 용비어천가가 되는 수순이다.

 

□ 도리스인의 침입으로 쫓겨난 이주민들은 영웅시의 전통과 작품들을 그들의 새 고향이 된 이오니아에 가져오게 되었고 그리하여 이곳 이민족들의 틈바구니에서 낯선 여러 문화의 여향을 받으며 300여년의 세월을 거쳐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탄생한 것이다. (p. 92)

 

Ü 쫓겨난 이오니아 인들은 더 이상 모험을 하지 않았고 사치를 줄였고 검소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래서 모험을 동경한 오디세이아를 낳게 된 것인지 모른다.

 

□ 호메로스의 서사시의 세계관은 비록 딱히 봉건적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여전히 철저히 귀족적이다. (p. 96)

 

알몸은 랑에의 말처럼 죽음과 마찬가지로 민주적인 것으로 귀족사회는 나체의 묘사를 좋아하지 않았다. (p. 102)

 

Ü !!! 기가 막힌 표현이다.

 

□ 핀타로스, 귀족층을 위해 시를 써서 시인활동의 직업화 경향이 퇴행하고 있다는 느낌을 줄 수도 있지만 실은 바로 여기서 직업적인 문학활동을 향한 결정적인 한걸음이 내디뎌지고 있는 것이다. (p. 105)

 

□ 기원전 6세기에는 이제까지 볼 수 없던 또 하나의 현상, 즉 개인적인 성격을 강조하는 예술가라는 존재가 처음으로 나타난다. (p. 108)

 

□ 참주제는 권력의 군주제적 중앙집권이라는 점에서는 귀족제 이전 단계로의 역행을 뜻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혈연국가의 해체를 위한 제일보를 내디딘 것이자 토지귀족에 의한 민중의 착취에 한계를 긋고 가정경제, 자연 경제적 생산에서 교역과 화폐경제로의 전환을 완수함으로써 지주층에 대한 상인층의 승리를 초래한 것이다. (p. 109)

 

Ü 참주(僭主, 그리스어: τυραννος, tyrannos, 영어: tyrant)란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에서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장악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산시킨 지배자 또는 그러한 독재 체제를 말한다.

 

참주는 후대에 "폭군"이라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탁월한 능력을 갖는 참주의 경우 참주정이라는 과도기가 오히려 폴리스 정치의 전진 요소였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귀족정에서 참주정으로 이행하는 시기에 해당하는 기원전 7세기에서 기원전 6세기 동안에 걸쳐 폴리스 세계는 전반적으로 체제 확립이라는 내부 충실 시대에 들어간다. 이러한 사업은 주로 실존 인물이나 가공의 인물이 맡았으며 이는 법률로도 전해지고 있다.

 

□ 진정한 목적과 의미는 인간의 육체를 될 수 있는 한 완전히 재현하며 그 아름다움을 해석하고 마술이나 상징적인 의미와 관계없이 감각적인 형상을 그대로 포착하려는 데 있었다. 이제 예술은 이미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고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p. 111~112)

 

□ 본래는 인간의 사회적 공동생활을 가능하게 하고 인간들의 원만한 상호관계를 유지해나가기 위한 목적에서만 생겨난 명령이나 금지, 의무나 터부 등이 마침내 순수윤리의 규범이 되고 도덕적 인격의 완성과 실현을 위한 지침으로 변했던 것이다. (p. 113)

 

Ü 그리하여 윤리는 진리가 아니다. 관계적 상황을 놓고 해라체를 써가며 처신의 윤리성과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윤리성을 강조하는 근엄하기 그지 없는 말들은 사실 모두 허구다. 실소할 일이다. 비웃어야 할 대상이다.

 

□ 종교, 신앙, 미신 등의 속박을 받지 않고 합리적으로 짜여져 있을 뿐 아니라 어느 정도는 실용목적 그 자체를 도외시한 학문은 그리스인에 의해 비로소 만들어진 것이었다. (p. 115)

 

Ü 인류 최초의 한량인가. 아마도 당시 그리스에서는 잉여의 가처분 식량과 물자들이 존재하여 실용적이지 않아도 되는 학문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먹여 살렸을 것. 그들을 먹여 살릴 권위들이 존재했고 그 필요도 없는 학문을 현실에 적용하거나 인민을 교화시키기 위한 교육 목적으로 필요했을 계층들이 있지 않았겠는가.

 

□ 사회를 구성하는 많은 인간 중의 일부가 자율적인 다시 말해서 무익하고 비생산적인 형식을 창조하기 위해 다른 의무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은 그 사회가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잉여노동력과 여가시간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지배계급이 목적 없는예술이라는 사치를 감당할 만한 여유를 지닐 때 비로소 예술이 주술이나 종교, 과학이나 실용행위에서 독립할 수 있는 것이다. (p. 117)

 

Ü 결정적 분석이다. 목적 없는 예술이 사치이지만 그 예술을 절실이 필요로 했던 계층의 존재 여부. 그 존재들이 목적 없는 예술, 사상, 철학을 자신의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한 재료로 쓰기 위한 필요가 있었다.

 

□ 민주제는 온갖 세력의 경쟁을 자유롭게 방임하고 모든 인간을 개인으로서의 가치에 따라 평가하여 각자에게 최고의 능력을 발휘시키려고 하는 점에서는 개인주의적이지만 동시에 신분의 차이를 평준화하고 출생에 따른 특권을 폐지한다는 점에서는 반개인주의적이기도 했다. (p. 118)

 

Ü 민주적 이념과 개인주의의 대립적 긴장.

 

□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소포클레스가 이미자기는 인간의 있어야 할 모습을 그리는 반면 에우리피데스는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그린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p. 120)

 

Ü 오이디푸스 vs 메데이아

 

□ 비극은 그 외면적인 형식에서는 즉 일반대중을 위해 공연되었다는 점에서는 민주적이지만 그 내용에서는 즉 소재가 된 영웅전설이나 영웅적, 비극적 생활감정이라는 점에서는 귀족적이었다. (p. 121)

 

미무스,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 진정한 의미의 민중연극, mimus, 실생활에서 취재하여 주로 흉내와 춤으로 된 일종의 광대극, 익살극. (p. 122)

 

출연자들은 직업적 배우였다 하더라도 끝까지 민중배우로 남았으며 엘리트 교양집단과는 전혀 접촉을 갖지 않았다. 그들은 서민출신으로 서민과 같은 취미를 가지고 서민생활의 슬기를 바탕으로 작품을 만들었다. 그들은 관중을 훈계하거나 교육시키려 하지 않았고 단지 관중을 즐겁게 하고자 했을 뿐이다 (p. 123)

 

Ü 과거 남사당패를 연상시킨다.

 

□ 축제극장은 도시국가가 가진 가장 효과적인 선전시설이었다.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오레스테이아의 마지막이 아테네 국가 번영에 대한 열렬한 기원으로 끝맺는 것은 그리스 비극의 목적이 애당초 어디에 있었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p. 124)

 

Ü집집마다 행복을 향한 평화의 맹세를

팔라스 아테네의 시민들은 얻을 수 있으리라.

전능하신 제우스 신과 운명의 신이 그렇게 결정하셨으니

모두들 춤을 따라 드높이 노래 부르자.’

 

□ 사건진행과 동기설정에 조그마한 빈틈도 없는 것을 무엇보다도 중하게 여기는 희곡이야 말로 가장 합리주의적인 문학장르인 동시에 가장 고전주의적인 예술형식이다. 바로 이 점을 통해 그리스 고전주의에서 합리주의와 자연주의가 얼마나 큰 역할을 했으며 이들 두 원리가 얼마나 서로 잘 맞는지를 더없이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p. 126)

 

□ 미론의 원반 던지는 사람. 그는 동작과 돌연한 비약, 잠재적인 힘에 찬 자세 등에 모든 주의를 기울였고 동작에서의 순간적인 모습, 금방 지나가버리는 찰나의 인상을 포착하려고 애썼다. 가장 순간적이고 긴장에 차 있으며 가장 첨예화한 순간, 즉 원반이 손을 떠나기 바로 직전의 순간을 택했다.

 

이것은 서양미술사에서 환각주의의 역사를 여는 것인 동시에 본질적인 측면을 제시하는 데 치중하는 추상적, 관념적 묘사방법의 역사의 막을 다는 것이었다.

 

모든 조건은 현세의 삶과 현재의 생활을 즐기며 순간의 가치를 존중하는 예술의 발전을 위하여 유리하게 되었다. (p. 127)

 

Ü 고개를 원반을 보느냐 다리를 보느냐로 진품의 여부를 따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순간의 포착 능력과 움직임의 정지 상태를 깊이 뚫어보는 것이 중요하다.

 

□ 예술작품의 가치와 사회적 조건을 일 대 일로 간단하게 대응시킬 수는 없다. 사회학이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예술작품을 구성하는 가지가지의 요소를 그 근원에까지 거슬러올라가서 생각하는 것뿐이며 이러한 요소들이 동일할 경우에 거기서 생기는 예술작품의 질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일 수도 있는 것이다. (p. 130)

 

Ü 모든 학문은 인간의 사유를 앞지를 수 없다.

 

□ 자기인식, 자제력, 비판력을 근간으로 하는 서양적 문화이념은 바로 소피스트들의 교양관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p. 131)

 

Ü 서양적 합리주의의 역사 즉 도그마, 신화, 전설, 인습 등에 대한 비판의 역사도 소피스트들에서 비롯한 것 (저자)

 

彫像, 감상자로서는 끊임없이 관점을 바꿔가며 서서히 조상의 주위를 어쩔 수 없이 돌게 되고 결국에는 개개의 시점은 어느 것이나 상대적인 것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예술은 이제 비로소 기하학 양식의 마지막 속박을 떨쳐버린 것이며 정면성의 원리는 이제 드디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p. 134)

 

□ 죄가 있느냐 없느냐라는 문제가 작품 속에서 논의된다고 하는 것 자체가 이미 비극적인 외경감을 덜하게 한다. (p. 136)

 

□ 소피스트, 그들은 세계관적으로는 민주주의자로서 피지배층에게 동정을 기울이고 있었으나 부유한 상류층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로 생계수단을 삼고 있었다. (p. 137)

 

Ü 어찌 이리 처지가 비슷한가. 불우한 삶의 unbalance. 처지밥과 이상을 가려놓는 처지.

 

□ 문학작품의 모태는 시인의 기술적 능력이 아니고 신으로부터 주어진 영감 (p. 139)

 

□ 플라톤이 국가의 통치를 맡기고자 한 정신적 엘리트란 예로부터 내려오는 특권 상층계급을 말하는 것으로 그는 일반 민중은 정치에 조금도 개입할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의 이데아론은 정치적 보수주의의 철학적 표현으로서는 고전적인 것이며 모든 반동적 관념론의 원형인 것이다. (p. 141)

 

Ü 오늘날 플라톤의 기록이 넘쳐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라진 이유가 비로소 분명해진다.

 

전쟁과 패배의 시대, 전쟁경기와 전후경기의 시대, 개인경제가 번영한 시대, 그리고 풍부한 구매력을 지닌 사회계층이 대두하여 그 소득의 일부를 예술작품에 투자하며 예술작품을 소유하는 일이 점차 하나의 허영이 된 시대 이러한 시대였던 기원전 4세기에 이르러 사람들은 예술을 과대평가하여 미적 가치에 의거하여 삶의 방향을 정립하고 미적 기준으로 삶의 문제에 대처하기 시작하였다. 플라톤의 반예술적 태도는 이러한 예술지상주의에 대한 반동으로서 설명할 수 있다. (p. 142)

 

□ 시민적 취미, 희곡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론에서 감상적 요소가 우세를 차지하기 시작한 하나의 징후이며 수시간 동안 일상생활의 비애에서 빠져나와한바탕 눈물을 짜내려고 극장에 가는 속물적 감정의 표현이라고 말한다. (p. 143)

 

헬레니즘

□ 부분적으로는 이미 완전한 공장생산체제에 들어선 도자기 제작소와 더불어 우수한 조각작품의 대대적인 복제품 제조가 시작되었다. 이 복제품 제조는 진품 제작과 같은 지역에서 같은 인원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생각되는데 복제품 제조에 종사한 예술가들은 가벼운 기분으로 여러 가지 양식을 실험해보고 싶어했으리라 짐작된다. (p. 149)

 

Ü 주목 받지 못하는 모든 것이 세상을 이끌어가는 과정. 실험 ⇒ 우연 ⇒ 돌연변이 ⇒ 특별함 ⇒ 공감 ⇒ 지지 ⇒ 진보

 

□ 민중적 경향이 귀족계급의 예술을 제압한 정도도 각 예술장르에 따라 다르며 수세에 몰린 귀족계급의 예술은 하층계급 사람들은 거의 알 수 없는 일종의 인상주의적 표현 속으로 도피함으로써 최후의 몸부림을 치다가 드디어는 고대 로마 말기에 가서 서민적 예술의 소박성과 표현주의적 솔직성을 받아들이고 마는 것이다 (p. 154)

 

Ü 귀족이 인민의 윗자리에 놓일 수 없는 역사성

 

3세기, 당시 그림은 뉴스, 사설, 광고, 포스터, 화보, 그림 연대기, 환등, 영화잡지, 극영화 등 모두를 겸한 것이었다. 무엇이든 그림으로 설명된 것을 즐기는 천진함의 표현이었다. 오늘날 영화라고 부르는 것의 대용품 역할을 했다. (p. 155)

 

Ü 그 세계가 나는 왜이리 그리울까. 그립다는 것은 과거 경험을 전제한 말이지만 왠지 나는 그 경험이 내재되어 있는 느낌이다.

 

의심심장한 순간을 택함으로써 그 자체로는 움직임이 없지만 무한한 움직임을 암시하고 있는 어느 한 순간의 정경 속에다 시간적인 길이를 가진 사건 전체를 압축시키는 방법을 취했다. (p. 156)

 

Ü 시는소리 있는 그림 有聲之畵이요 그림은소리 없는 시 無聲之詩란 말도 있다. 보지 않고 보는 것과 듣지 않고 듣는 것. 움직이지 않고 움직이는 그림.

 

노예가 할 일이기 때문에 천시된 것이 아니라, 천시되었기 때문에 노예의 몫이 되었던 것이다. 노예노동과 육체노동이 결부되었다는 사실은 원시적인 체면의식의 보존을 조장한 것일 뿐, 육체노동을 천시하는 체면의식 그 자체는 노예제라는 제도보다 분명히 오래된 것이었다. (p. 161)

 

□ 알렉산드로스 이후 철학 및 문학의 소양은 마침내 조형예술가들 사이에도 침투되고 이들은 수공업에서 분리되어 장인집단과는 다른 독자적인 계층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p. 165)

 

Ü 예술적 조형 장인의 탄생.

 

□ 세네카는 말한다. ‘사람들은 신들의 상을 숭상하고 제물을 바친다. 그러나 이들 상을 만든 조각가는 경멸한다.’ (p. 167)

 

Ü 육체노동의 경멸, 인간은 왜 노동을 경멸했을까. 왜 체면의식이 생겨나게 된 것일까? 시각적 이유와 체험적 이유가 존재하지 않을까. 힘들기 때문에 두 번 다시 하기 싫어하여 경멸하고 그 모습이 말끔하지 않아 경멸하지 않았겠는가.

 

4. 중세

 

□ 중세를 하나의 통일적인 역사적 시대로 보는 사고방식은 일종의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의 중세 역사는 각기 완전히 독자적인 성격을 띤 세 시기의 문화로 갈라진다. 자연경제에 바탕을 둔 봉건제도 시기의 초기, 궁정기사 시대인 중세 전성기, 도시 시민계급의 문화가 중심이 된 말기가 그것이다. 어쨌든 이 세 시기 사이에 놓인 단층은 중세 전체를 그 앞뒤의 시대와 갈라놓고 있는 단층보다도 큰 것이다. (p. 177)

 

Ü 중세는 긴 시간 동안의 중첩된 사회 변혁을 하나로 묶어 놓은 기간이지만 그 하나하나의 변동의 디테일을 들여다보면 중세 이전의 고대, 오리엔트 문화와 중세 이후의 근대 문화의 변동의 진폭보다 더 큰 내부의 변동이 있었다.

 

□ 교회 중심으로 조직되고 그리스도교 일변도의 감정을 지닌 사회의 표현으로 남아 있었다. 중세 예술이 이와 같은 일관성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각종 이단과 분파의 발생에도 불구하고 성직자 집단이 정신계를 독점적으로 지배하고 있어 그들이 설치한 구원기관인 교회의 사회적 권위가 본질적으로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p. 178)

 

Ü 중세의 기간 분류 기준이 되며 중세가 도도한 세월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교회의 권위다.

 

□ 예술의욕 kunstwollen 이론을 내세워 초기 그리스도교 예술에서 사실주의적 표현수단의 결핍을 모두 정신적인 성과이자 진보라고 해석하곤 한다. (p. 183)

 

Ü 진보가 아니라 미처 따라가지 못한 실력의 차이다.

 

□ 낡은 육체적 인간이 사멸하고 새로운 정신적인 인간이 태어난 것이다. (p. 187)

 

□ 비잔티움에서는 진정으로 강력한 개인 유동자본이 전혀 형성된 적이 없었다.

 

흔히 상업과 교역, 도시경제와 화폐경제에 수반되는 것으로 생각되는 역동적이고 진보적인 반전통주의적 경향이 비잔틴제국에서 꽃피지 못할 원인도 그와 같은 상황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p. 188~189)

 

□ 비잔틴 제국의 통치형태는 정교합일주의 casaropapismus 즉 세속적 권력과 종교적 권력이 한 사람의 전제군주 손에 집중되어 있는 형태였다. 제왕신권설, 서방에서 비잔틴에서만큼 완전한 제정일치가 행해진 나라는 없었다. (p. 189)

 

Ü 버스의 출렁거림으로 현재 지나는 지역과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다.

 

□ 비잔틴 제국에서 예수는 왕처럼, 마리아는 여왕처럼 그려져 있다. (p. 192)

 

, cupola, 덧붙임으로써 건축물 내부의 갖가지 공간 부분을 분명하게 구별하는 이러한 비민주적인 공간구성을 다시 한걸음 전진시킨 결과가 되었다. (p. 195)

 

Ü 구분, 구별, 계급, 계층, 울타리, 너와 나

 

□ 황제들의 제일의 목표는 군대의 유지였고 이 지상명령 앞에서 일체의 다른 고려는 포기해야만 했다. (p. 198)

 

□ 예수를 그림으로 그리지 말라.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우리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인간이 되셨다는 한번의 수모로써 족한 것이다. 더 이상 그를 사람의 모습에 담아두기보다 오히려 그의 무형의 말씀을 우리 마음속에 확실히 새겨두도록 하자. (p. 199)

 

Ü asterius 의 말이다. 이 시기 예술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 우상파괴운동의 가장 중요한 동기이자 결과적으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동기는 황제들과 그들의 추종자들이 부단히 증대해가고 있던 수도원 세력을 견제하고자 한 데 있다.

 

우상예배 금지령의 가장 큰 타격은 성상 주변에 감도는 신비스런 분위기의 수호자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p. 200~201)

 

Ü 배타적 허구의 신성이 그 본 모습을 보이고 허물어지는 순간, 모든 진실은 드러난다.

 

□ 잔망스럽고 (p. 203)

 

Ü 1. 보기에 몹시 약하고 가냘픈 데가 있다. 2. 보기에 태도나 행동이 자질구레하고 가벼운 데가 있다.

 

□ 작은 울림, 사랑스러운 속삭임, 우주가 짜내는 신묘한 음악소리, 나뭇가지 위의 달콤한 목소리의 뻐꾸기. 작은 햇살은 햇빛에 춤추고 젊은 소는 산속의에 반해버렸다. (p. 206)

 

□ 자연적인 것이 곧 민중적 내지 민속적이라고 하는 낭만파의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인데 실제로는 이들 두 개념은 오히려 전혀 상반된 것을 표현하고 있다. (p. 208)

 

Ü 하우저는 민중이라는 용어에 유난히 민감하다. 매우 아낀다. 낭만파에서의 오독을 바로 잡으려 애쓰고 있으며 그 남발을 몸으로 막고 섰다.

 

□ 간난신고, 아랍인들의 손에 의해 바그다드나 코르도바 같은 거대한 도시가 건설된 시기에 서방에서는 프랑크 왕조 전시기를 통해 이렇다 할 도시가 하나도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p. 212)

 

Ü 艱難辛苦(간난신고) : 몹시 고되고 괴로움, 즉 어려움을 견디며 몹시 애쓴다.

 

교회가 서양사회에 압도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기관이 될 수 있었던, 저 교양의 독점을 교회가 처음 이룩한 것은 학교의 쇠퇴, 교육기관으로서는 성직자의 후계자를 확보하기 위해 할 수 없이 주교들이 관장하고 있던 본당 부속학교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 이유다. (p. 213)

 

Ü 지금은 어떤가. 어려운 법률 용어를 일부러 써가며 용어와 절차를 복잡하게 만들어 독점하고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이지 않으면 습득하기 어려운 남의 나라 말을 가지고 그 사람의 가치를 따지는 모든 일들이 지식의 독점과 비정상적 가치 판단의 기준이 아닌가. 다를 게 없다.

 

□ 고급 필사본의 세밀하고 복잡한 수법이 정적인 작품을 낳기 쉬운 것처럼 싸구려 펜그림에서 보는 담백한 스케치풍의 묘사는 인상주의적이고 역동적인 작품을 낳기 쉬운 것이다. (p. 219)

 

Ü 역사는 언제나 비주류에 의해 주류가 제압당해 온 과정이다. 이와 같이 진보한다.

 

□ 낭만주의 문학사가 내세우는 민중서사시 vloksepos, folk epic는 원래 민중과 아무 관계도 없는 문학이었다. 그것은 철저한 귀족계급의 문학이었다 (p. 222)

 

□ 아무리 미숙한 수준에서라도 그것 자체로서 완결, 고정되고 통일적인 줄거리란 이미 설화가 아니라 문학작품이며 그것을 최초에 이야기한 인간은 바로 그 작자인 것이다. (p. 227)

 

□ 음유시인은 중세 초기의 궁정가인과 그리스 로마 시대 이래의 미무스의 혼혈이라 말해진다. 이미 미무스의 연기자도 궁정가인 없고 다만 음유시인만이 남게 된 상황.

 

음유시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다면성이다. 신분이 높고 고도의 전문기술을 갖추었던 영웅가요의 시인 대신에 이제 속된 팔방미인이 등장한다. 그들은 이미 결코 시인이나 가인만이 아니고 악사 겸 무용사, 극작가 겸 배우, 광대 겸 곡예사, 요술장이 겸 곰재주 놀리는 쇼꾼, 한마디로 당대의 만능연예인이요 메트로 드 쁠레지르 maitre de plaisir 였다. (p. 231)

 

Ü 매우 흥미로운 인간이다. 가장 멋지게 살았던 인류가 아니겠는가.

 

□ 다음세대가 내리는 해석이 언제나 전보다 더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현재의 정신에서 출발한 모든 진지한 해석 노력은 작품이 갖는 의미를 심화하고 확장하게 마련이다. (p. 233)

 

□ 수공업은 수도원에서 비로소 가내경제로부터 독립한 것이다. 또 시간관리가 최초로 행해진 것도 여기에서였다. 즉 하루의 시간을 합리적으로 배분하고 이용하며 시간의 경과를 재어 종을 쳐서 이것을 알리는 것 등이 수도원에서 처음 행해졌다. (p. 236)

 

Ü 이때부터 하루가 직선이 되었구나. 김화영은 플로베르의 말을 빌려 아래와 같이 말한다.

 

해 질 녘이 되면 프로방스에서는 우주가 보인다. 둥근 세계가 보인다. 황혼 녘의 들판은 과일처럼 잘 익은 빵처럼 둥글어진다. 낮에는 늘만을 생각하던 우리가 저녁 시간이면 나에게서 떠나 시선을 멀리 던지기 때문이다.

 

하루해의 모양은 길지 않다. 화살이나, 길이나, 인간이 경주처럼 어떤 목적을 향해 가는 긴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둥근 모양을 하고 있다. 시간의 무늬다.

 

문명은 우리들이 무엇인가를 향하여 어떤 머나먼 목적을 향하여 가고 있다고 설득시키고자 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유일한 목적은 사는 것이며 삶은 우리가 매일같이 항상 하고 있는 일이며 하루의 매 시각 우리가 살기만 한다면 우리는 진정한 목적을 다 달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모든 문명된 사람들은 새벽에 혹은 그보다 좀더 늦게 혹은 그보다 훨씬 늦게 요컨대 그들이 일을 시작하는 정해진 시각에 하루가 시작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 하루가 그들이하루 종일이라고 부르는 작업 시간에 걸쳐 있으며 그들이 눈꺼풀을 잠그는 시각에 끝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바로 그들이 날들은 길다고 말한다.

 

아니다. 날들은 둥글다.

산다는 것은 그 밖의 어떤 목적도 없다.

Heureux celui des mortels sur la terre qui ont vu ces choses. –

지상에 태어나 이 사물들을 본 필멸의 생명은 행복하여라.

 

행복만을 위한 집단, 어디 없는가? 행복의 지속을 위한 노동, 노동에의 행복, 어디 없는가?

존재가 신기할 때가 있다. 너는 무슨 연유로 나의 옆에 이리도 오랫동안 붙어있고 별일을 다 겪으며 있는?

 

□ 봉건제도는 9세기 중장비 기병대를 창설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안출해낸 제도였던 것이다. 왕은 별다른 수단이 없던 나머지 그들에게 토지와 면세특권과 영주로서의 권한, 예컨대 징세권과 재판권 등을 주고 그 대신 군사적인 임무를 제공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특권들이 봉건제도라는 새 제도의 근간을 이루게 된 것이다. (p. 244)

 

Ü 봉건제도, 이제야 조금 명확해져 간다.

 

□ 이때부터 한동안은 오늘날 우리들이 말하는 의미에서의 국가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통일적인 행정기구도 없고 국민으로서의 연대감도 없었으며 신하들을 묶어주는 일반적이고 공식적 법률적인 여하한 근거도 없었다. 봉건시대의 국가는 말하자면 추상적인 한 점을 정점으로 가진 피라미드형의 복합사회였다. 왕은 전쟁의 주관자이긴 하지만 통치자는 아니었다. 실질적인 통치자는 대지주들이었다. (p. 245)

 

Ü 무정부적 지역 공동체. 봉건제도는 잘만 활용하면 매력적인 커뮤니티 사회로의 이행에 결정적 힌트를 주는 체제일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 경제가 자본주의 이전, 합리주의 이전의 정신으로 일관되어 있던 것에 상응하여 시대의 정신상황 일반도 개인주의 이전의 양상을 띠고 있었던바, 이러한 사실은 개인주의가 원래부터 경쟁의 원리를 포함하는 것임을 생각할 때 한층 이해하기 쉽다. (p. 248)

 

Ü 전자본주의, 비자본주의적인 봉건제도의 생활, 그리고 도시와 화폐가 사라지고 자급자족의 경제 형태, 경쟁이 필요 없고 경쟁하지도 않는 공동체, 점점 매력적이다. 다만 확고한 계급 분화에 따른 차별성만 제거된다면 말이다. 멋진 체제다.

 

□ 권위와 강제에 의한 문화 (p. 249)

 

Ü 경제의 역동성이 사회적 다양성과 사회적 역동성으로의 연결은 필연적인가? 그것은 당연한 수순인가?

 

□ 아케이즘 (p. 251)

 

Ü 고어(古語폐어(廢語) 또는 사용하지 않는 표현방법 등을 작자의 기호나 어떤 특별한 의도에서 일부러 부활시켜 사용하는 것을 의미하는 문예용어. 의고주의(擬古主義)라고도 한다.

 

11세기, 예술적 효과를 거두기 위하여 갖가지 과장수단이 사용. 즉 실물의 비례를 왜곡하고 얼굴이나 몸에서 표정이 풍부한 부분, 특히 눈과 손을 특별히 크게 만들며표현주의적 경향의 뚜렷한 증거 (p. 256)

 

□ 최후의 심판, 천년왕국설을 내세운 일종의 정신병적 말세주의의 산물인 동시에 교회 권위인 가장 강렬한 표현이기도 했다. (p. 259)

 

□ 미술은 고딕에 이르러서야 또다시 정상적인 비례를 갖추고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이며 미술이란 말의 본래 의미에서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을 담은 작품을 생산하기 시작한다 (p. 263)

 

문화사적으로 결정적인 중요성을 띠는 것은 수공업자 및 상인이라는 두 개의 새로운 직업집단의 발생이었다. (p. 264)

 

Ü 상상해보자. 상인의 역동성, 수공업자의 생산성이 맞아 떨어지면 새로운 부의 영역이 열렸을 것이고 그 부로 인한 새로운 시민계급이 제3의 계급으로 부상하며 기존 체제를 위협하지 않았을까. 그리하여 결국 시민 계급이 득세하면 체제의 붕괴를 가져오고 질서가 재편되는 사회구조적 변화를 가져왔을 터.

 

□ 상인층, 그들은 화폐경제의 정신을 가장 순수한 형태로 대표했으며 이윤과 영리를 중심으로 움직여나가는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가장 진보적인 인간형이었다. 특히 이제까지 단 하나의 중요한 재산형태였던 토지소유 이외에 유동적인 영리자본이라는 새로운 부의 형태가 생겨난 것은 그들의 공적이었다. (p. 266)

 

Ü 그러나 그로 인한 자본주의의 탄생은 예견된 일이며 이에 따라 새로운 장사치들의 세상이 열린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세상이 경쟁 일변도와 관계적 혼란을 겪으며 인간의 영혼을 화폐에 팔아버리는 일 말이다.

 

온갖 가치의 계산, 교환 및 추상화를 가능케 하며 재산을 비인격화하고 중립화하는 화폐는 개개인의 그 사회적 집단에의 귀속도 그들의 가변적인 자금능력이라는 추상적, 비인격적인 요인에 의존하게 만들고 이에 따라서 각 신분 사이에 가로놓인 세습적으로 고정된 경계선을 원칙적으로 지양하게 되었다. (p. 267)

 

Ü 전통적 계급 붕괴의 시작임과 동시에 자본에 의한 계급 분화의 서막이다.

 

□ 시민계급이 계급으로서 확립되고서부터 이른바 앙시앙 레짐 (ancient regime, 프랑스대혁명 이전의 낡은 체제)이 끝날 때까지 서양의 사회적 구조에는 특별히 주요한 변화는 없었다.

 

마침내는 사회 전체가 일종의 거대한 발효상태에 이르렀다. 농노의 일부는 소작인으로 바뀌었고또다른 일부는 도시로 도망하여 자유 신분의 임금노동자가 되었다. (p. 270)

 

Ü 농노해방, 임금노동자, 시민계급의 탄생, 도시 미술의 탄생

 

□ 상인들은 도시에서 도시로 떠돌아다녔고 농민은 고향을 버리고 떠나는가 하면 장인이나 예술가는 각지의 건축장인조합을 돌아다니고 교수와 학생들은 대학에서 대학으로 이동했으며 방랑문인 vaganten 사이에서는 방랑생활을 찬미하는 일종의 로맨틱한 풍조마저 일게 된 것이다.

 

13세기에 오면 이미 라틴어를 알지 못하는 교양 있는 세속인사가 출현하기에 이른 것이다. (p. 273)

 

Ü 이동하고 떠나고 다시 돌아오고 다시 떠나는 유동적이고 역동적인 도시의 삶이 시작된다.

 

기사계급의 도덕체계 속에서 충성이라는 것이 아주 소중한 덕목으로 꼽힌 것도 원래 그들의 충성심이 그다지 믿을 만한 것이 못되었다는 증거인 것이다. (p. 275)

 

Ü 실소를 날리자. 애국을 강조하는 국가는 민심이반이 심각한 상태고 위계질서를 목숨으로 여기는 단체는 위계질서가 무너짐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 않는가.

 

어떤 특권계급에 새로 가담한 사람들은 그 계급의 범절이나 체면과 연관되는 갖가지 문제에 관해서 원래 그 계급의 대표자들보다 훨씬 더 엄격하며 그 계급에 단일성을 부여하고 다른 계급으로부터 구별해주는 온갖 이념 속에서 자라나온 사람들보다 훨씬 강하게 의식한다는 것은 사회계급의 역사에서 흔히 되풀이되는 널리 알려진 현상이다. (p. 276)

 

Ü 계급의 현상이기도 하지만 단체, 소속, 기업, 가족을 불문하고 이런 현상은 나타난다.

 

□ 연애라는 것을 심각하게 다룬 시인들조차도 연애는 일종의 병이요 사람들의 이성을 빼앗아가고 의지력을 마비시키며 비참과 굴욕을 초래하는 것이라는 오비디우스의 연애관에 동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p. 284)

 

Ü 오비디우스는 사랑에 대한 저작들이 많다. '사랑도 가지가지', '여류의 편지', '흑해에서 온 편지', '사랑의 치료법' 등이 있다. 이름도 참 재미있다. 그러나, 연애에 대한 기교를 시적 형태로 엮은 [사랑의 기술(Ars Amatoria)]이 풍속을 문란케 하는 책이라 하여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노여움을 샀고 그는 그답지 않게 연애를 주제로 하는 詩作 중단한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인류의 큰 선물이 되는변신 이야기에 몰두하게 된다.

 

□ 갖가지 사회적 범주의 경계선이 유동적이 되고 그와 더불어 도덕적 가치의 기준까지도 흔들리게 되자, 이제까지 억압되었던 관능의 힘은 배전의 위력으로 폭발하여 궁정사회의 생활양식뿐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성직자들의 생활양식까지 휩쓸게 되었다.

 

이 새대 전체가 끊임없는 성적 긴장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상상하려면 기사문학의 주인공들은 자기가 사랑하는 부인의 베일이나 속옷을 자기 몸에 닿도록 지니고 다녔다고 하는, 무술시합의 이야기에서 널리 알려진 저 기이한 습관과 그러한 물건에 마술적 힘이 있다고 믿었던 사실을 상기해보면 충분한 것이다 (p. 293)

 

Ü 어떤 형태의 억압이든 억압이 지속되면 폭발을 동반한다. 그래서 억압의 방법이 좋을 때가 있고 좋지 않을 때가 있다. 위정자의 입장에서는 위협이며 인민의 입장에서는 기회다.

 

□ 젊은 아내가 한 해에 한번 5월에 하루 동안만 결혼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젊은 연인과 즐긴다 (p. 295)

 

Ü 나는 이런 자유를 줄 수 있는가

 

□ 주관주의 문학, 개인적 고백의 문학, 감정을 봐 란 듯이 분석하는 수법 등은 시인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졌기 때문에 비로소 생겨날 수 있었던 것이다. (p. 300)

 

□ 미니스테리알 ministerial, 종신, 종사 (p. 303)

Ü 장관, 각료라는 뜻이 있다.

 

□ 문학의 독설과 예봉으로 기회 있을 때마다 통렬한 복수를 하고 있던 것 (p. 304)

 

서양 정신의 일대 전환 신의 나라로부터 자연계로 궁극적인 것으로부터 바로 주변의 것으로 엄청난 종말론적 신비로부터 인간세계의 좀더 범상한 문제로의 복귀가 한층 명료한 형태로 나타나 있으며직접 체험 가능한 것, 감각적이고 일회적인 것의 묘사로 이동하는 경향 (p. 308)

 

Ü신은 모든 것을 반기신다. 모든 것은 신의 본질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본문) 토마스 아퀴나스

 

□ 신이 세계를 외부로부터 움직인다는 사고방식이 봉건제도의 초기를 지배하고 있던 독재적 세계관에 대응한 것이었다면 자연계의 모든 존재 속에 내재하여 작용하는 신이라는 관념은 사회적 상승의 가능성이 이미 완전히 배제되지 않은 좀더 자유화된 사회의 세계관에 대응하는 것이었다. 만물의 서열이 형이상학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은 사회가 여전히 신분에 의해 구분되어 있다는 사실의 반영이다. (p. 309)

 

Ü 공고한 존재의 사다리가 해체되는 시점.

 

□ 사회적, 종교적, 예술적인 갈등의 배후에는 언제나 동일한 내면적 모순과 정신의 양극성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p. 310)

 

그토록 많은 고딕의 대성당이 미완성인 채로 남은 원인이 된 이 새로운 예술의욕, 이미 괴테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처럼 비록 실제로는 완성되어 있을 경우에도 본질적으로는 미완성이요, 다시 말해서 무한한 것이며 영원한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그 내적 불안함, 무한의 피안을 찾아가고자 하는 그 충동, 여하한 완성에도 안주하지 못하는 그 본성, 이러한 것들은 그리스도 수난극 속에 비록 매우 소박한 형태이기는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명료하게 나타나 있는 것이다. (p. 318)

 

□ 고딕건축이야말로 그 대표적 건물들의 파란만장한 건축경위가 말해주듯이 예술작품의 최종적인 형태를 결정하는 데 우연적인 요소 또는 적어도 원래의 설계에서 보면 우연이라고 여겨지는 요소 가 애초의 구상 못지 않게 큰 역할을 한다는 사실의 가장 좋은 본보기이기 때문이다. (p. 319)

 

□ 버팀벽 buttress (p. 320)

 

Ü 버팀(, ) 및 지지

 

□ 감상자에게 끊임없이 위치를 바꿀 것을 강요하고 (p. 323)

 

Ü 이 놀라운 미술의 지시력

 

□ 고딕, 그 원시성의 마지막 잔재를 청산 (p. 324)

 

□ 건축장인조합과 길드의 근본적인 차이는 전자가 피고용자 집단이고 그 내부 조직이 위계질서적이었는 데 반하여 후자는 적어도 그 시초에는 제 각기 독립한 사업가들이 서로 평등한 자격으로 결합한 단체였다는 점이다 (p. 331)

 

12세기 및 13세기까지만 해도 시민계급은 자기들의 물질적 생존근거와 자신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싸웠는데 이제는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새로운 세력에 대항하여 자기들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 싸우게 되었다. 사회진보를 위해 투쟁하던 진취적인 계층으로부터 현상에 만족하는 보수적인 계급으로 변모한 것이다 (p. 335)

 

□ 기사계급이 시대착오적인 존재가 된 것은 그들의 무기가 낙후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이상주의와 비합리주의가 낡아버렸기 때문이다. 기사들은 새로운 경제, 새로운 사회, 새로운 국가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무엇인가를 이해하지 못했다. (p. 338)

 

Ü 그들은 시민계급과 그들의 돈을 장사꾼 근성으로 병적인 현상이라 매도한다

 

□ 중세에도 자본주의 체제를 운운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자본주의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려 있다.

 

경제활동 일체가 경쟁을 의식하고 이윤을 목적으로 자신의 독자적 책임 아래 행해지는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우리는 중세 전성기도 이미 자본주의 시대라고 말해야만 할 것이다. 이에 반하여 자본주의라는 개념에 포함된 가장 본질적인 요소로서 타인의 노동력의 기업적인 활용과 생산수단의 소유를 통해 노동시장을 지배하는 것 즉 한마디로 노동을 일종의 봉사에서 하나의 상품으로 변형시키는 것을 든다면 자본주의 시대는 14세기 및 15세기부터 시작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p. 340)

 

Ü 인류는 자본을 거스를 수 없는가. 전자본주의와 비자본주의를 회복할 수 없는가.

 

□ 시민계급의 합리주의 정신 현실의 탈마술화’ entzauberung der wirklichkeit (p. 349)

 

 

3. ‘통섭(내가 저자라면)

하우저는 곰브리치를 능가한다. 서양미술사를 통사적으로 개괄했던 곰브리치에 더해 하우저는 예술 전체와 사회학을 추가했다. 이 책은 값어치는 그리하여 예술사, 미술사, 사회사를 통틀어 가장 윗자리에 선다. 의미를 되새겨 보자.

 

(인용)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사회사적 관점에서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유럽의 예술과 문학을 통사적으로 서술한 유일한 저서이다.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 대항 · 필적할 만한 저서는 아직도 나오지 않고 있다.

 

하우저는 문학사가이기 이전에 미술사가이다. 그의 문학에 대한 관심과 조형예술에 대한 관심은 그가 주장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일종의 평형 상태를 이루고 있다. 이는 예술사가가 가질 수 있는 최대의 강점이다. 그가 르네상스와 바로크 사이의 조형예술에 나타나는 양식사적 현상, 즉 매너리즘을 셰익스피어 문학 해석에 적용시키고 있다든가 20세기 전위문학의 특성을 현대의 영상예술에서 찾는다든가 하는 등의 그의 미술사가로서의 시각이 없었더라면 아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우저의 이러한 특징은 현대예술을 음악과 문학의 관련 속에서 보는 아도르노의 예술이론의 특징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일반적 이론과 구체적 작품 비평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부분과 전체의 관계가 변증법적으로 잘 매개되고 있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보이는 몇몇 개별적인 작가나 작품에 대한 하우저의 뛰어난 실제 비평은, 그가 정해놓은 이론의 틀을 끊임없이 교정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하나의 예술사가 빠지기 쉬운 도식적 사고에서 벗어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예술사가로서의 하우저의 이러한 특징과 입장은 이론적 · 체계적 비평에 매우 강한 루카치와 개별적 예술품에 날카로운 감식안을 가지고 있는 아도르노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 보는 것처럼 이론비평과 실제비평이 서로 연결 짓지 못한 채 이루어지고 있는 문학연구나 예술연구의 실정에 비추어 보면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가 갖는 이러한 특징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하우저의 사회사(사회학)적 연구방법론의 특징은 이미 언급한 대로 사회학적 연구방법론이 빠지기 쉬운 도식적 구성과 방법론에서 벗어나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표현을 빌면 현대 사회과학이 제공하는 여러 사회학적 인식은 그에겐 예술적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보조 수단에 불과하다. 그는 예술적 현상이 전체적으로 보면 예술 외적 요인에 의해 규정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 모든 요소에 의해서도 설명되지 않는 예술의 어떤 실체 내지 본질이 있다고 믿고 있는 듯 하다. 이러한 예술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히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대체로 그는 이러한 예술의 본질적 면을 예술의 형식 내지 양식이 가지고 있는 지속성과 자율성, 그리고 예술이 갖는 보편적 기능이라는 면에서 파악하고 있는 듯하다. 그가 뵐플린 식의 양식사 문제에 끊임없는 관심을 보인다든가, 현대 예술의 특징을 16세기의 매너리즘적 양식의 연속선상에서 고찰한다든가, 아니면예술의 종말론을 강력하게 부정하고 현대예술의 존립근거와 기능을 옹호한다든가 하는 것이 그의 예술관의 이러한 면을 잘 말해주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적 예술연구방법론에 대한 그의 관계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상 인용)

 

학문의 통섭이란 이런 것이다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것이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하나의 현상, 또는 하나의 결과물이 주는 사회학적 시그널과 역사적 스탠스를 그는 매우 날카롭게 그러나 따뜻하게 추려낸다. 나는 그의 혜안이 부럽고 존경스럽다. 인간이 인간의 역사를 이해하고 그 역사가 주는 의미를 파악해 내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지금의 지점이 그 과정 속에 어떤 위치인지 어떤 의미인지를 알려주는 것, 그것이 인간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헌신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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