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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3일 22시 07분 등록

나만 위로할 것

-. 김동영 지음

-. , 2010

 

 

■ 저자에 대하여

 

 그는 음악작가이면서, '아마도 이자람 밴드'에서 드러머로 활동 중이다. 드러머 김동영이라는 이름 석 자보다는 '생선'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린다. 생선이 여행을 떠나면 집으로 돌아오는 걸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생선은 더 멀리 떠나는 거라고 그는 말한다. 2007, 미국 여행 에세이 <너도 떠나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로 큰 화제를 몰고 왔으며, 2010 180일의 아이슬란드 여행 에세이 <나만 위로할 것>를 출판했다.

 

 작가 지망생인 그는 나이 서른에 일자리를 잃게 되고 그 충격으로 얼마 되지 않는 돈을 가지고 미국 여행을 가서 죽을 둥 살 둥 여행하며 자신의 여행 이야기를 블로그에 올리게 된다. 그걸 우연히 본 까다롭기로 소문난 편집자가 책을 출판하자는 제안을 한다. 당연히 거절할 이유가 없는 그는 책을 출판하게 된다. 아무도 그를 몰랐기에 책을 당연히 이슈가 되지도 못했고 수 많은 비슷한 종류의 책들에 묻혀 버렸다. 사실 글을 쓴 그도 그리고 편집자도 기적이 없는 한 책이 많이 팔리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기에 그다지 실망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만큼 조금씩이라도 팔리는 것이 더 놀라운 일이라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그는 운 좋게 다시 일자리를 구해 돈을 벌며 지내고 있었다. 그러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사건의 시작은 유명 배우가 공중파 TV버라이어티 쇼에 책을 들고 나온 것이다. 그 배우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의 책을 들고 나와 소개하기 시작했다. 책은 각종 검색어 순위 1위를 차지하고 더불어 그의 책은 말 그대로 미친 듯이 팔리기 시작했다. 방송이 나간 일주일 만에 1년 반 동안 겨우 팔았던 분량의 책을 팔아 치웠고 판매추이 또한 수직으로 껑충 솟아올랐다. 그때쯤 그는 악플이라는 것을 처음 보게 된다. 그런 일이 그에게 일어날지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처음 책을 냈을 때 그러니깐 찔끔찔끔 팔릴 때는 99%가 응원의 글이거나 좋은 느낌을 받았다는 류의 긍정적인 글들이 주를 이뤘다면 책에 날개가 달리자 날개를 꺾으려는 인파가 몰려들어 날개 대신 89%의 악플을 달게 된다.

 

 그것들을 몇 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문장이 순전히 무라카미 하루키의 빠다.

   그렇게 생각해주신다니 영광입니다.

 - 블로그에나 올릴 법한 글을 책을 냈구나. 나무를 낭비하지 마라.

  → 사죄의 뜻으로 30년 동안 식목일에 나무를 3그루씩 심겠습니다.

 - ', , , '도 모른다.

  → 통학버스 없는 3류 유치원에 다니다 그나마 아파서 결국 졸업을 못했습니다.

 - 쿨한 척 하지 마라.

  → 자세히 읽어보면 온통 궁상맞고 찌질한 이야기인데 말입니다.

 - 글이 좋은 건 아니고 운이 좋았다.

  → 그래서 그 배우 분께 정중히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참고]

1. 나만 위로할 것(김동영 지음, , 2010)

2. 너도 떠나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김동영 지음, , 2007)

 

 

■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걷은 자의 꿈, 실크로드>의 문윤정 작가님이 추천해 준 책이다. <나만 위로할 것> 끌림이 있는 제목이다. 책 한 권을 읽고 한 문장을 가슴에 담을 수 있다면 큰 소득이라고 한다. 그것이 책을 대표하는 제목이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내용은 여행 에세이지만, 제목은 상처받은 모든 사람들의 아픔을 위로하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어, 제목을 쳐다본 독자들은 읽어볼 수 밖에 없는 운명에 빠져들게 된다. 아주 이기적인 제목이다. '타인은 신경 쓰지 말고 오로지 상처받은 자신의 내면을 제대로 위로하자' 라는 메세지로 처음에는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 또한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타인이라는 사실이며, 그런 나를 위로하는 것은 곧 타인을 함께 위로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저자는 온 세상이 눈으로 뒤덮인 먼 북쪽의 섬, 멀고 신비롭기만 한 땅, 아이슬란드의 180일 동안 체류한 경험을 책 속에 담았다. 그는 여름에 한 번, 겨울에 한 번, 아이슬란드를 두 번 여행하면서 그 곳의 사람들과 풍경들을 차분한 시선으로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았다. 한 여름에는 하루 종일 해가 지지 않으며, 한 겨울에는 하루 종일 해가 뜨지 않는다. 대신 여름에는 세상에 없는 색의 노을을 보여주고, 겨울에는 머리 위에서 오로라가 엄마의 치맛자락처럼 휘날린다고 한다. 이렇게 저자는 두 번의 아이슬란드 여행체험을 1부와 2부로 구성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저자라면 서른 아홉의 행복여행도 이 책의 구성처럼 1, 2부로 구성하고 싶다. 1부는 잃어버린 나를 찾기 위해 떠난 터키 여행, 2부는 나의 신화를 찾아 떠난 이탈리아 시칠리아 여행' 체험을 써보는 것이다.

 

 1부의 시작.
 
“비행기가 멀리 가기 위해서는 많은 기름을 소비해야 하네. 멀리 보기 위해서는 가진 걸 끊임없이 소비해야 하고 대가가 필요한 거지. 자네 같은 젊은이들한테 필요한 건 불안이라는 연료라네.(나만 위로할 것, 15p)

 

 작가는 만원 출근 열차에서 시달리며 직장으로 향하는 나를 부러워했다. 자신은 너무 게으르고 불안정한 인간이라고 나처럼 살기를 원했다. 자신의 하루는 끝이 나질 않고 나의 하루는 마침표라는 것이 있어서 부럽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어디든 자유롭게 떠나고 아무 곳에도 얽매이지 않는 작가의 삶을 동경한다. 매일 정신 없이 일하면서 조직 생활에 물들어 가는 나를 발견했다. 그런 의식마저도 시간이 지나 무뎌지고, 결국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긴 플라스틱 빨대에 꼽힌 채 살아온 시간은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았다. 이제는 텅 빈 공간 속에 불안들로 채워져 갔다. 그런 불안들이 무언가를 채워달라고 아우성이었다. 마흔이 되기 전, 잃어버린 나를 찾기 위해 터키로 떠났다. 무언가를 다시 채우고 새로운 인생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두렵기도 했지만 가슴 설레고 행복했다.

  

 2부의 시작.

 “기억이 많을수록 사람이 잘 살게 돼 있다는 걸 나는 믿어. 나이가 들면서는 현실을 지탱하는 저울보다 기억을 지탱하는 저울이 더 잘 듣게 돼 있거든.(나만 위로할 것, 121p)

 

 자신을 찾아 현실로 다시 돌아왔지만, 나의 신화가 궁금했다. 새로운 인생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는 나를 다시 창조해야만 했다. 주변의 사람들과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균형을 잡으려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내가 힘겨워 보였다. 때로는 어딘가에 치우쳐 있고 싶었다. 무의식 세계에서 내가 원하는 신화가 어떤 건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신화가 살아 숨쉬는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 곳에서 나는 다시 나를 창조하는 힘을 발견했다. 또한 내 인생의 수레바퀴가 튼튼하고 풍요롭게 굴러갈 수 있도록 아름다운 추억들을 만들었다.

 

 눈이 많이 내리면 그 해에 풍년이 든다고 한다. 그리고 이사 갈 때나 결혼할 때 눈이 오면 부자가 되거나 영원히 행복해진다고들 한다. 나의 아내를 처음 만날 때에도 눈이 왔었고, 두 아들이 태어나는 날에도 어김없이 눈이 내렸다. 읽는 내내 눈 오는 장면을 상상하게 만든 이 책도 어쩌면 나에게 축복의 책이었는지 모른다.

 

 

 

 

 

■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1

 

23 “그럴 필요 없어요. 이제 매일 와도 괜찮아요. 당신의 모든 질문에 답을 해줄게요. 그리고 물어볼 게 없어도 와서 당신이 어떻게 지냈는지 오늘은 뭘할 건지도 말해주세요.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오전 1-시부터 일하니까요. 그리고 너무 외로워하지 마요. 이곳은 아름다운 도시니깐. 곧 친구를 사귀게 될 거예요. 내가 당신의 아이슬란드 첫 번째 친구가 되어줄게요. 내 이름은 사라예요.”

 

23 우린 그동안의 서걱서걱했던 공기를 단숨에 날려버렸다. 난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그녀를 찾아 가서 질문이 아닌 소소한 나의 일상과 그녀의 일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런 짧은 감정들이 50여 일 동안 모이고 모여 결국 우리는 서로의 인생을 묻기도 하는 사이가 되었다.

 

26 사랑스러운 여름밤이었다. 그는 잠들어 있던 날 깨워 쌀쌀한 목소리로 라고 말하며 옆에 누워 있던 나를 손으로 자꾸 밀었다. 그런 그의 행동에 난 당황했고 그렇게 말하는 그가 무서웠었다. 어둠 속이라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그는 여전히 내게 라고 말할 뿐이었다. 난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나 그의 책상 의자에 앉았다. 그는 이런 나를 바라보다 다시 침대에 누웠고 이내 나도 그 책상에 엎드려 잠들었다.

 

31 친구는 내게 말했다. “어쩌면 넌 공허해서 그러는 건지도 몰라. 넌 그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 네가 잠든 사이 뱃속으로 음식들을 들이밀면서 너의 끝없는 허기를 채우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건지도 몰라.”

하지만 난 알 수가 없다. 뒷골목 형들은 공허하면 시를 쓴다던데 왜 내 공허는 그렇게 먹는 것을 밝히는지를.

 

33 당신은 날 부러워했지만 난 당신처럼 살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해가 뜨기도 전 부지런히 일어나 만원 출근 열차에서 시달리며 직장으로 향할 때 난 느지막이 일어나 모두 직장으로 학교로 떠나버린 텅 빈 거리를 바라보며 게으른 내 자신을 백 번 천 번 미워했습니다. 당신이 사무실에 이르러 당신을 위한 자리에 앉아 정신없이 일할 때 난 가방에 카메라와 노트, 그리고 책 한 권을 넣고 낯선 거리로 나가보지만 불안한 내 미래가 자꾸 떠올라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33 당신이 특별하게 살고 싶다고, 이렇게 사는 건 사는게 아니라고 허름한 호프집에서 친구들에게 말할 때 난 미지근해진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카페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한심한 내 인생을 저주했었습니다. 당신이 보람찬 하루 일을 끝내고 늦은 밤 집으로 돌아와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TV를 볼 때 난 벌써 어두워진 창문을 바라보며 새간은 왜 이렇게 빠른 건지 걱정스럽고 두려웠던 겁니다.

 

33 당신이 어디든 자유롭게 떠나고 아무 곳에도 얽매이지 않은 나를 부러워하며 자유로운 영혼이라 부를 때 난 말하고 싶었습니다. 내가 만약 당신처럼 살 수 있다면 당신처럼 살고 싶다고. 하지만 나 그렇게 살기에는 너무 게으르고 불안정한 인간이기에 그럴 수 없어 지금 이렇게 살 수밖에 없다고…. 그래도 당신은 나처럼 살길 원했고, 난 사람이라면 당신처럼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33 하지만 어느 날 당신이 내가 되고 내가 당신이 된다면 아마 우린 또다시 서로의 삶을 동경하며 살겠죠. 우린 평생 이런 식일 거예요. 어쨌거나 당신의 하루는 마침표라는 게 있어서 부럽고, 나의 하루는 끝이 나질않아 신경질이 나요….

 

아니, 그 반대인가요?

 

36 아이슬란드는 아주 조용한 나라야. 특히 백야의 새벽에는 모든 게 새파랗게 물든곤 하지. 아주 이른 시간이었을 거야. 서쪽으로 떠나는 버스가 7 30분에 있었으니깐. 내가 짐도 다 챙기고 쓰던 시트와 베개를 반납하려고 로비로 가지고 나왔을 때 넌 거기 파랗게 물든 로비에 그림자처럼 앉아 있었어. 네가 먼저 이른 아침인사를 건넸지.

 

37 우리가 낯설고 혹독한 길을 떠날 수 있는 건 그 길 위에서 나를 닮은 사람을 만날 수 있어서인지도 모르고, 때로는 많은 사람들의 대부분이 나를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서이기도 하다. 그러니 어떻게 남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바로 그것이 길 위에서의 마법이다.

 

44 우리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우리는 이름을 부르는 걸 피하며 서로에게 말을 걸거나 대화의 시작을 꺼냈다. 그건 우리가 서로의 본명을 들었지만 이미 잊어버렸거나 익숙한 언어가 아니었기에 제대로 발음할 수가 없어서였다. 나는 어느 날 아침, 나무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면서 말했다.

 

49 이렇게 해서 우리 세 사람에게는 아이슬란드에서 사용할 새로운 이름이 생겼다. 애초 이름이란 건 우리가 정하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의 이름은 정해져 있었거나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만들어 붙여준 거였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애를 써도 그 이름에서 벗어날 수도 그걸 회피할 수도 없다. 그 석자 안에는 우리의 인생이 담겨 잇겠지만 가끔 우리는 우리의 이름을 넘어서서 다른 이름의 사람으로 살고 싶어하지 않는가.

 

53 “그렇지 말고 그냥 내가 태워다 줄게. 정말 거기엔 아무것도 없어. 실망할지도 몰라.”

 난 작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정말 고마워. 하지만 그냥 걸어서 갈게. 그냥 어디든 걷고 싶으니깐.”

넌 이런 나의 고집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54 그렇게 우리는 작별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넌 먼지를 일으키며 마을로 내려갔고 난 가던 길을 계속 갔다. 난 인적 없는 그 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아마 내가 이곳에 살고 있다 해도 나 역시 이 길을 지루하다고 생각하고는 가지 않았겠지. 하지만 난 지금 여행중이니까 세상의 그 어던 길이라도 새롭고 흥미가 있어. 그래서 너의 친절도 거절하고 이렇게 거든 거야. 내가 이제까지 걸어본 적 없는 이 길을 그리고 앞으로도 걸을 일 없는 이 길에 나만의 의미를 부여하며 걷는 거지. 마치 나의 길이라도 되는 듯이, 내가 처음 발견한 길이라도 되는 듯이 말이지.

 

54 넌 이 길에 아무것도 없다고 했지만 난 그 길에서 산들바라믕ㄹ 만났고 내가 남기고 간 타이어 자국도 발견했으며 그리고 누군가 버리고 간 장갑 한짝도 찾아냈어.

넌 모르겠지만 이게 여행인지도 몰라. 그래서 꽤 많은 대가를 지불하고 여기까지 온 것인지도 몰라. 마치 돌과 돌이 부딪혀서 불꽃을 만드는 것 같은,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닌데 정말로 굉장한 그 무엇을 만나게 되는 그런….

언젠가 너도 나처럼 먼 길을 떠나게 된다면 길에서 만난 누군가가 거기가면 아무것도 없어라고 말해도 계속해서 그 길을 가보렴. 그땐 내 고집을 그리고 한 걸음 다가가면 두 걸음씩 세 걸음씩

가까워지는 길들의 풍경을 조금은 이해하게 될지도 몰라.

 

60 하지만 나이가 들고 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군. 내가 만약 시간을 되돌려 자네 같은 나이로 돌아간다면 난 일을 열심히 하기보단 내 자신을 위해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겠다고 말이지. 바빴고 열심이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거 같아. 안정적이긴 하지만 그에 비해 추억이 없다네. 내가 기억하는 30대는 그저 밤을 새고 일을 하는 것밖에는 없었어. 물론 그 시절 난 여행을 떠나 더 많은 것을 보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었지. 하지만 눈 앞에 쌓여 잇는 일들 때문에 그렇지 못했어. 내가 은퇴를 하자마자 그렇게 원하던 여행을 시작했을 때 알았지. 내가 아무리 멀리 가더라도 자네 같은 젊은이들이 여행에서 느끼는 것을 똑같이 느낄 수 없다는 것을…..”

 

61 “젊음이 뭔지 아냐? 젊음은 불안이야. 막 병에서 따라낸 붉고 찬란한 와인처럼, 그러니까 언제 어떻게 넘쳐 흘러버릴지 모르는 와인 잔에 가득찬 와인처럼 에너지가 넘치면서도 또 한편으론 불안한 거야. 하지만 젊음은 용기라네. 그리고 낭비이지. 비행기가 멀리 가기 위해서는 많은 기름을 소비해야 하네. 바로 그것처럼 멀리 보기 위해서는 가진 걸 끊임없이 소비해야 하고 대가가 필요한 거지. 자네 같은 젊은이들한테 필요한건 불안이라는 연료라네.”

 

61 그의 그런 말을 듣고 있자니 내가 타고 있는 비행기에는 꽤 많은 연료가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실에는 장미가 불안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아직 여름이 오려면 한참이나 남았는데 말이다. 어디선가 와인 향기가 풍겨와 코 끝에 머물렀고 나는 약간 몽롱한 상태가 되었다.

 

69 내가 느낀 황량함과 그곳에서 갈 곳을 잃은 채 한없이 공허하게 불던 바람 그대로를 당신에게 보내주고 싶지만 이 사진으로 대신합니다.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해주세요. 난 좀더 시간을 보내다 당신 사랑의 대답을 들으러 곧 돌아가겠습니다.

 

78 ‘결국 세상 모든 자유로운 새는 언젠가는 새장으로 들어가야 하겠지만, 그게 과연 언제일까?’ Magnetic Fields의 음악을, 잠이 들어 더 이상 들을 수 없을 때까지 들었다.

그날 밤 나는 꿈을 꾸었던 것 같다. 햇살이 잘 드는 창가에 매달린 금색 새장 안으로 날갯짓하며 날아 들어가는 내 모습 그리고 내가 들어가자 이내 새장 문이 하고 닫히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모든 새들은 날기를 원했지만 결국 모든 새들은 어딘가에 내려앉고 만다. 물론 다른 새들에 비해 많이 늦겠지만 내게도 그런 날이 올 것이다.

 

78 언제까지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기는 어렵다. 그것을 유지한다는 것은 엄청난 부를 축적하는 일보다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사실 남들처럼 똑같이 사는 건 자유롭게 사는 것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이 어쩌지도 저쩌지도 못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떡해야 좋을 것인지…. , 카드를 섞은 다음 패를 돌려보자.

 

83 난 그 밤 이후 그들이 여행객을 못마땅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여행객들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지만 그들의 입장에서는 신발 안에 든 모래 같았을 것이다.

 

84 항상 이 시간이면 저녁을 만들기 위해 벌집처럼 분주하던 주방은 텅 비어있었고 술에 취해 계단에 죽치고 앉아 있던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들이 남기고 간 마카로니만 부엌 찬장에 가득 남아 있을 뿐이었다.

 

88 아직 쓰이지 않은 책을 좋아해.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연재만화를 좋아해.

   아직 다 만들어지지 않는 노래를 좋아해.

   아직 녹음되지 않는 노래를 좋아해.

   아직 시작하지 않은 말랑말랑한 상태의 연애를 좋아해.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내 인생을 좋아하지.

 

   언젠가 만들어질지 아니면 그냥 누군가의 상상 속에서

   끝나버릴 불확실한 것들, 난 그런 것들이 정말 마음에 들어.

   그리고 어떻게 이야기가, 멜로디가

   그리고 사랑이 전개될지 아무도 모르는 상태가 좋아.

 

   혹시 누가 알아?

   아직 쓰이지 않은 책을 우리가 쓸 수 있을지도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연재만화를 우리가 그릴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영화를 우리가 찍을 수 있을지도 몰라.

  

89 아직 녹음 되지 않은 노래를 우리가 연주할지도 몰라.

   아직 시작하지 않은 연애를 우리가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리고 아직 진행 중인 내 인생을 너와 내가

   해피엔딩으로 만들 수 있을지도 몰라.

   모든 게 불확실하고 모든 게 정해지지 않고

   그저 누군가의 머릿속에 심장 속에 맴도는 순간들이 난 좋아.

   그저 말로만 떠벌리는 꿈에 대해 듣는 것도 좋아.

   말도 안 되는 어처구니없는 상상도 좋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당신이 이런 사람일 거라 가정하는 것도 좋아.

   그리고 이야기를 노래를 여화를 책을

   그리고 사랑의 마지막 이야기를 끝내려는 모든 사람들의 노력이 난 좋아.

   분명 이 세상 누군가가 그것들을 멋지게 만들어 갈거라는

   내 굳은 믿음도 좋아.

   그렇기 위해서는 때로 먼 곳으로 떠나야 한다는 사실까지도.

 

95 “그건 설득해서도 강요해서도 안 되지.  좋아서 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 아쉽게도 아들은 화산에는 관심이 없지만 미국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자기 인생을 살고 있어. 그러니 다행이지. 사실 즐겁지 않으면 어떤 일을 해도 무의미한 것이니깐.  나는 내 아들을 나처럼 살게 하고 싶지 않아. 자기가 좋아하는 걸 하면서 이 세상을 살게 하고 싶어. 물론 아들놈도 우리 가업을 물려받지 못한 걸 미안하게 생각하긴 하지만 난 상관하지 말라고 했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게 반짝이는 보석을 만드는 일이야.”

 

95 나는 내게 조용히, 좋아서 하는 일을 하며 살고 잇느냐고 물어보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좋아하는 일은 겉으로 보기에 좋아 보이는 일이었지 정말 내가 좋아했던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능하면 만족하고 즐거워할 수 잇는 일을 하며 지내고 싶다. 그러려면 내 안에서 번개가 쳐주길 기다려야 한다. 아니면 저지른 모든 불을 끈 다음 화산이 폭발해 못난 부분들과 폼 잡으려는 행동들과,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를 내 형편들을 모두 덮어버리고 그 위에 새롭게 태어나 걷고 싶은 것이다. 부디.

 

99 남자에게는 두 개의 뇌가 있고 그 뇌들 중 허리춤에 잇는 뇌가 머리 쪽 뇌보다 더 급히 움직인다는 것, 이것만 기억하세요.

그러니까 우연이라도 당신 팔에 허리춤이 잠시 스치더라도 그저 하리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굉장히 중요한 뇌를 건드렸다고 인정하시고 보호해주시고 살살 달래주세요.

 

103 “처음에는 모았어. 15병 정도. 그런데 그걸 가지고 있어봐야 한국으로 돌아갈 때 가지고 갈 수는 없잖아.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지. 일주일에 한 번 내 방청소를 해주는 도우미나 게스트하우스 데스크에서 야간에 일하는 사람들, 혹은 게스트 하우스에 같이 머무는 친구들에게 나눠주기도 하고, 가금은 숙소로 돌아갈 때 하상 같은 자리에있는 홈리스 할아버지에게 주기도 하지.”라고 말했다. 그러자 글렌은 꽤 사랑스러운 이야기네라고 말하며 웃었다.

 

107 나의 할머니 우수금 씨는 지금도 여전히 검은 물을 좋아하신다. 비록 그의 손자는 검은 물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 검은 물을 주문할 때마다 100살이 넘은 사랑하는 그녀를 떠올리며 여전히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몰아쉬곤 한다는 것. 이것이 100살이 넘은 나의 연인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방식이다.

 

2

 

124 그녀는 웃으며 부럽다고 말하며 빨간 출국 도장을 여권에 하고 찍어줬다. 그리고 여권을 돌려주며 말했다.

그거 알아요? 내가 지금가지 여기서 일하면서 본 여권 중에서 가장 낡고 꼬깃꼬깃하지만, 그 안은 화려해서 마치 작은 세계지도 같네요

나느 묵묵히 여권을 돌려받으면서 생각했다.

그래요. 꼬깃꼬깃하지만, 그 안은 화려해서 마치 작은 세계 지도 같네요.”

난 묵묵히 여권을 돌려받으면서 생각했다.

그래요 보시다시피 저 자체가 좀 꾸깃꾸깃하죠. 하지만 속은 쫌 화려한 편이랍니다.

 

137 나는 작년 여름 박물관에서 그녀의 사진을 찍었었다.

그리고 소녀에게 이번에도 다시 사진을 찍고 싶다며 그녀를 카페 발코니로 데리고 나가 사진을 찍었다.

소녀가 물었다 다시 올라스빅 안 와요?”

난 웃으면서 말했다. “이제 친구가 거기 사니깐 가야 할 거 같은데요. 물론 친구가 초대해준다면….”

소녀가 웃으며 말했다. “초대할게요.”

 

146 난 말을 썼다고 했다. 한번 읽혀지면 허공 속으로 곧 사라져버리는 라디오 방송 원고를 썼다고 했다. 그리고 난 다른 사람의 감정을 팔아서 글을 썼다고 했다. 내 이야기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썼다고 했다. 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당신 작가구나라고 말하면, 난 손을 저으며 일은 관뒀다고 말하며 얼굴을 붉혔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설령 잘 하지 못한다 해도 사람들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주눅 들지 않고 그 일을 직업이라 말할 수 있는 그들의 자신감과 확신은 대단한 거시었다. 너무 대단해서 주눅이 들 정도였다.

 

146 우리는 말할 수 있을까? 좋아하지만 전혀 돈을 벌 수 없는 일을, 좋아하지만 남들이 전혀 인정해주지 않는 일을 당당히 직업이라며 말할 수 있을까? 잘할 필요는 없을 것이고 돈을 벌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직업이라고 말할 수 잇는지, 그 진심의 정도를 가지고 있는지의 문제.

 

뭐 하세요?” 누군가가 그렇게 묻는다. 그때는 사랑하고 좋아하는 일을 말하면 되는 것인데 왜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사랑하는 일과 직업의 거리가 그렇게 멀단 말인가. 잠깐 한 번만 나에게 더 물어보자. 일단 정말 사랑하는 일이 있긴 있는가?

 

149 내가 이번 여행을 하면서 가장 행복하게 느꼈던 가장 듣기 좋은 소리는

    바로 윈도우가 부팅되면서 켜지는 소리였어.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내가 그토록 아득히

    세상 바깥으로 멀리 떨어져 나온 것이 아니라

    그렇게라도 세상 언저리에 등을 대고 있는 거라고 안심하게 해주었거든.

 

   의사는 메스 부딪히는 소리 속에서 존재하는 느낌을 받고

   비오는 날 가지 끝에 매달려 쉬는 새는

   나뭇가지의 흔들림으로 살아 있음을 의심하지 않고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사랑을 채우고 싶어지듯

   내게 있어 윈도우 부팅되는 소리는

   유일하게 세상으로 연결된 긴 빨대……였어.

154 그렇게, 우리는 세상의 규격에 맞는 나사가 되어갔고 세상은 드라이버가 되어 우리를 인생이라는 홈에 넣고 조였다.

 

155 허황된 꿈들은 사라지면서 아무도 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고 대신 눈치를 보며

좀 더 실제적인 계획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물론 너나 할 것 없이 우리의 계획들은 대부분 비슷했다.

 

159 안정된 직장을 갖는 것, 좋은 상대를 만나 결혼을 하는 것, 둘이 열심히 돈을 모아 집과 차를 사고 가끔은 무리해서 여행을 가기도 하고 아이를 갖고 그들을 남들보다 우월하게 키우거나 공격으로부터 큰 상처를 입지 않게 범퍼를 착용시켜 키우는 것

 

159 자신들의 직장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부동산과 주식 투자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고 아이들의 교육 이야기를 나눈다. 이제 그 누구도 우리가 좋아했던 음악과 가슴에 꽂혔던 책과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게 되었다. 저마다 다른 강가의 돌들도 세월이 흘러 바람에 풍화되고 물살에 깎여 결국 모두 맨질맨질한 둥근 돌멩이가 되듯.

 

159 우리가 사는 굴레가 우리가 받은 교육이 그리고 먹고 살아야 하는 생존의 문제가 우릴 뭉툭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마치 우리는 잘 드는 칼로 잘려진 사과인지도 모른다. 똑 같은 모양으로 잘려져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라는 큰 접시에 담겨 탁자 위에 놓여 있는 것이다. 아마 나는 잘못 깎인 사과의 한 조각일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접시에 담기지 못하고 아직 도마 위에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신은 우리 모두를 저마다 다르게 만들었노라고 자부하시지만 우린 모두가 이토록 똑 같은 자세로 개헤엄을 치고 있으니 참 우리도 대단하다.

 

159 그렇기에 난 지금 이렇게 미친 듯이 불안하면서도 여전히 꿈에서 깨고 싶지 않아 늦잠을 자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어나서 한 길밖에 없는 종류의 삶에 몸을 담글 수는 없을 테니.

 

162 안 좋은 일은 언제나 한꺼번에 찾아온다. 마치 쓰나미처럼 모든 걸 다 쓸어가버리는 것처럼. 일도 연애도 가족 간의 잡음도 그리고 이러저런 상처들과 당신의 고양이와 관련된 문제도….

하지만 그렇게 진창에 한참을 쓸려 다니다 정신을 차려보면 세상은 다시 조용해져 있을 것이다. 언제나 나쁜 일은 한 번에 몰려오지만 결국 올 때처럼 그건 한 번에 사라지는 법이니깐.

 

162 , 어쩌면 그렇게 엉망진창이 된 당신 인생에서 희미하게 반작이는 불빛이라는 걸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감정이며, 음악이 주는 기운이며, 혹은 운이 좋게 얻은 공연 티켓이거나 또는 두근거리는 약속인지도 모른다. 말끔히 잊은 것 같다가도 잊히지 않는 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162 난 당신이 그걸 발견하길 바란다. 놓치질 않기를 바란다. 그걸 주워 모래를 털고 소매로 얼룩을 닦아 더 반짝이게 만들어 당신의 깊숙한 안쪽에 넣어 보관했으면 한다. 그래서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길 바란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집을 나간 고양이를 찾고, 흐트러진 머리를 다시 빗고,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촘촘하게 다시 꿰매고 탈탈 털어 말린 후 부디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길 바란다.

 

169 그동안 우린 각자의 지난 사랑의 역사를 들려주겠지. 언제나 비극의 주인공은 우리 자신이 될 거야. 왜냐하면 이야기는 우리의 입을 통해서 서술되는 것이니깐 모든 나쁜 배역은 우리가 아닌 우리의 상대방의 몫이겠지. 그리고 그때마다 받은 크고 작은 마음의 상처들을 웃옷을 들쳐서 서로에게 보여주고 누구의 상처가 더 크고 깊은지 비교하면서 그 상처들을 쓰다듬어주는 건 어떨까? 그러면 우리가 모른 사리에 그 상처들은 우리가 강해지는데 부속으로 쓰일지도 몰라.

 

170 너무 느려 꽤 시간이 걸릴지도 몰라. 하지만 그래도 어떨 땐 그 느림이 우리에게 신선함과 즐거움을 줄 수도 있을 거야.

 

171 우리가 함께한 순간은 세월이 될 거야.

지금에도 또 먼 훗날에도 서로에게 힘이 되는 건 지나간 시간들일 거야. 넌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기억이 많을수록 사람은 잘 살게 돼 있다는 걸 나는 믿어. 나이가 들면서는 현실을 지탱하는 저울보다 기억을 지탱하는 저울이 말을 더 잘 듣게 돼 있거든.

 

173 “어쩌면 미래에 대해 계획하는 것보다 당신 말처럼 운명을 믿는 편이 더 좋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운명만 믿고 그것만 따라 살면 재미없지 않을까요? 우리 인생은 우리 손 안에 쥐어진 핸들 같은 건데.”

 

173 아마 난 핸들을 쥐고 운전을 하는 대신 조수석에 앉아 두 손을 가운데로 모아 기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여기보다 좋은 어디론가 이끌어 달라고 저 위의 누군가에게 말이다.

 

176 새벽 4:12. 거짓말처럼 창밖이 밝아온다. 해가 진 지 겨우 3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날이 밝아오다니 그래, 여긴 한국이 아니다. 아이슬란드다. 난 지금 세상에서 가장 먼저 깬 사람이거나 가장 늦게 잠든 사람일지도 모른다. 며칠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약이 떨어진 이후로 잠을 깊게 잘 수가 없다. 쌀통에 쌀이 바닥을 드러내듯 긴 여행에 남은 약은 없었다. 약은 감정처럼 사용하면 할수록 사라졌다.

 

183 또 어떤 사람들은 멀리서 여행을 와서 왜 카페에서만 머무느냐고 묻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난 여기가 내 아이슬라드니깐요라고 말하곤 했다.

 

185 바바루는 세련되거나 시설이 좋은 카페는 아니다.

    그리고 특별히 커피나 차가 맛있는 건 아니다.

    그렇다 맛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완벽하지 않은 곳도 아니다.!

 

205 제가 대학생이었을 때 다른 학과 소녀에게 마음을 빼앗겨 당시 제가 즐겨 듣던 노래들을 120분짜리 테이프에 빼곡히 녹음해서 우편으로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는 mp3 cd굽는 기술이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제가 꽤 나이 든 사람 같네요. 하지만 그건 그렇게 오래된 일은 아니랍니다.)물론 편지도 썼고 연락처도 남겼습니다. 테이프를 녹음하면서 전 너무 설레서 제 심장 소리까지 같이 녹음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편지를 쓸 때도 무슨 일이 제게 일어날지 너무 궁금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포장해서 우체국에 가서 소포를 부칠 때의 제 마음은 이미 잘 익은 자두처럼 터질 것 같았죠.

 

215 무엇보다 엄마가 보고 싶고 할머니가 보고 싶다.

빠진 앞니를 만들어 붙여 환하게 웃을 수 있게 치료도 받아야 하니까

모든 것은 되돌려져야 하므로 나 역시 돌아가야 한다. 다시 그곳으로…..

 

220 여행이라는 단어를 입 안에 굴리고 있으면, 데이터 전에 애써 만진 머리를 한순간 헝클어뜨리며 스치는 한 줄기 상쾌한 바람 같은 게, 마음 한구석에서 숨길 수 없는 작은 떨림 같은 게, 느껴집니다. 여행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연인이고 동경이며 로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어딘가로 떠나는 꿈을 꾸며 살고 있습니다. 사고 싶은 자전거나 초록색 스커트를 사지 않고 대신 그 돈을 모아 여행을 떠나길 고대합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 꿈을 실현하는 삶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건 우리가 너무 바쁘고 소심하기 때문인지도 도 열정이 그만큼 부족하거나 간절하지 못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21 여행은 자전거나 초록색 스커트처럼 실제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손으로 감촉을 느낄 수 잇는 실체를 가진 것도 아닙니다. 그러기에 막상 떠나는 순간에 망설이게 되는 건지도 모릅니다. 알 수 없는 것이니까요. 우리는 여행을 떠나지 못하고 일상에 머물 수밖에 없는 타당한 변명거리를 저마다 12000개씩은 가지고 잇습니다. 언젠가 저는 미래, 돈 그리고 시간 따위를 생각하면 우린 결국 어디도 떠나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그 말을 돌이켜보면 제가 너무 개인적인 감정만으로 그렇게 말한 거 같습니다. 그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대략 실제로 실천하기 어려운 추상적인 구호 같은 말이었습니다. 그 추상적인 말을 한 이후로 꽤 많은 사람들이 제게 자신들의 문제를 털어 놓았습니다.

 

221 “떠나는 것이 떠나지 않는 것보다 좋은 거 같습니다. 그것이 왜 그런지 정확히 설명해들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제 짧은 경험에 비추어볼 때 떠나건 떠나지 않건 간에 결국 우리는 언제나 후회하더군요. 어차피 무엇을 선택하던지 후회할 거라면 차라리 떠나고 나서 후회하는 편이 더 좋은 게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224 “생선은 왜 여행을 하는 거예요?”

그 질문에 큰 얼음덩어리가 제 머리를 누르고 있는 것처럼 정신이 바짝 들었습니다. 저는 고백했습니다. 내가 왜 여행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낯선 길 위에서 뭔가를 끊임없이 찾고 있지만 내가 찾는게 무엇인지조차 모른다고 했습니다. 내가 늙어 더 이상 여행을 다니지 못할지도 모르니까, 라고 말하기는 싫었습니다. 다만 여행을 통해 내가 그렇게 찾고 잇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고만 말했습니다.

224 “마리, 그럼 마리에게 여행을 한다는 건 뭔가요?”

마리는 와인으로 붉게 물든 입술을 냅킨으로 닦으며 내게 말했습니다.

생선, 나한테 여행은 단순히 풍경과 문화를 접하는 게 아녜요. 여행은 인생의 커다란 한 부분이에요. 인생을 행복하게, 윤기 나게 하기 위해 여행을 하는 게 아니라 여행은 내 눈동자이고 피부이고 손가락이에요.  그러고 여행은 즐거운 일도 많았고 힘든 일도 많았던 내 인생의 바퀴를 좀 더 풍요롭게 굴러가게 해주는 추억들이에요.”

정말 멋진 말 아닌가요? 마리의 말을 듣고 제 머릿속은 환해졌습니다. 그제야 내가 여행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 어렴풋이 알게 되었으니까요.

이제 당신의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다시 한 번 물어봐 주실래요?

 

225 “당신에게 여행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 우리가 여행에서 얻는 건 기념사진이나 기념품이 아니라, 어쩌면 수레바퀴처럼 끊임없이 반복되는 우리의 여생을 버티게 해줄 추억의 보관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32 이렇게 3일이 지나면 열차 안에 있는 사람들 몸에서 같은 냄새가 난다. 그리고 4일이 지나면 그 냄새도 사라진다. 왜냐하면 모두 그 냄새에 익숙해지기 때문이다.

 

248 “솔직히 겨울의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꽁꽁 얼어붙은 호수가 있고 눈이 쌓인 숲이 있을 뿐입니다. 다만 꽁꽁 얼어붙은 호수가 있고 눈이 쌓인 숲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주변 4km 이내에는 사람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만약 특별한 무언가를 기대하신다면 여름에 오시는 건 어떨까요. 그래도 이 겨울에 무언가를 보려하신다면 그다지 이곳을 권해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대신 비사투파는 당신에게 침묵할 공간을 드릴 수 있습니다.

 

254 나는 야네에게 비사투파에서 어떻게 외로움과 고독함을 내편으로 만드는지, 그리고 숲에서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는지, 북극 사슴에게 다가가는 법이라든지, 눈에 빠지지 않고 걷는 법 따위를 배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255 “잘은 모르겠지만 단순히 입을 닫고 말을 안 하는 건 아닌 거 같아요. 침묵은 그동안 살아오면서 어쩔 수 없이 너무 열어 둔 마음의 문을 잠깐 동안 닫아두는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잠시 했었어요. 여기서……”

그래요. 침묵은 단순히 말을 안 하는게 아니고 잠시 동안 스스로 세상과 멀어지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내가 말했죠.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당신에게 침묵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겠다고. 어때요, 만족했나요?”

 

259 “ 이 양말은 내가 미국을 혼자 횡단할 때도 신었던 양말인데 낯선 길 위에서 내가 어려운 일에 빠지거나 외로울 때면 항상 기적처럼 어려운 일이 해결되고 새로운 사람을 내 앞으로 데려왔어. 그때부터 난 이 양말이 보통 양말이 아니라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믿기 시작했지. 그리고 무엇보다 엄마가 아파서 병원에 계실 때 매일매일 이 행운의 양말을 신었어. 기적을 바라며. 그랬더니 엄마 몸에 퍼지던 암이 멈췄어! 그 이후로 난 완전히 이 양말을 내 행운의 양말이라고 숭배하고 믿게 되었지. 어때. 보통 양말은 아니지?”

 

269 “아이슬란드 사진을 본 적 있는데 거긴 마치 다른 행성처럼 생겼어. 화산이 지금도 활동하고 있고, 빙산도 볼 수 있고, 여름에는 종일 해가 지지 않는대. 정말 상상도 못할 풍경들이 펼쳐져 있을 거야.

 

273 아이슬란드를 특별하게 만드는 건 화산 지형이나 하루에 수십 번씩 바뀌는 날씨, 북극고래, 빙하가 녹아 만든 거대한 피요르드, 오로라, 손으로 직접 짠 아이슬란드 스타일의 울 스웨터, 그리고 여름 한철 하루 종일 해가 지지 않는 미드나잇 선세과 겨울철의 다크 데이인지도 모른다.

 

273 하지만 나에게 아이슬란드는 그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바람이 시작되는 곳이었고, 운율은 불규칙하지만 소리내서 읽으면 너무도 아름다운 시 같은 곳이었고, 잠들지 않아도 꿈을 꿀 수 있는 곳이었고, 불어오는 바람에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날아가버리는 곳이었고, 태초의 지구의 모습과 종말 후의 지구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했고, 우리가 아는 시간이라는 개념에 포함시킬 수 없는 시간 밖의 텅 빈 공간이었다.

 

273 그곳에서 나는 여러 생을 산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으며, 북극 찬바람을 맞아 두 볼이 빨개진 수줍은 여인의 미소처럼 오래오래 따뜻했던 것이다.

그곳은 내 여행의 끝, 종점이었다.

 

276 내가 왜 그들에게 이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했는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알 수가 없다. 그저 그냥 평범하게 여행다니는 여행자처럼 대접 받고 싶지 않아서 그랬는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늑대가 온다고 세 번이나 거짓말을 한 양지치 소년처럼 결국 나도 외로워서, 외로움을 어찌해보려고 거짓말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276 언어가 문제일 땐 귀가 잘 안들린다는 거짓말도 했었다. , 혼자 이렇게 긴 여행을 하면 외롭지 않는 질문에 나는, 아니 오히려 지겹게 발끝에 달린 그림자를 떨쳐낸 것처럼 홀가분하고 편안하다고 쿨한 척 거짓말을 했다.

 

277 나의 거짓말은 그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았고 피해를 입히지 않는 범위의 것이었다. 오히려 길에서 만난 평범한 사람들의 인생 혹은 순간들을 영화나 소설처럼 좀 더 극적이고 풍성하게만들어주었다고 나는 믿는다.

나 역시 내가 만들어 낸 거짓말에 스스로를 위로 받았고 조금 더 세상을 넓게 입체적으로 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알게 된 사실은, 오히려 사실만을 말하는 것보다 가쁨은 거짓말 속에 지내보는 것이 점점 더 진실에 가까워진다는 것, 그것이었다.

 

280 여행은 대본없는 드라마고 결말이 나지 않는 연재만화 같다. 우리 모두 여행이라는 드라마와 만화를 가지고 있을 곳이다. 물론 여행 안에서 본인이 선택할 수 있는 몇몇 부분도 꽤 있겠지만 대부분은 의도하지 않았는데 밀물에 쓸려 나도 모르는 곳으로 흘러가버리듯 여행이라는 운명에 휩쓸려 전혀 예상 밖의 일들을 경험할 것이다. 우리가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지 모르므로 그저 운명이라는 배의 키를 꽉 쥐고 가능한 한 최악까지 가지 않길 바라며 기도를 하는 편이 더 현명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래서 더 여행이 진해지는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제어할 수 없다는 것….

 

281 찐따같이 나온 사진이 더 기억에 오래 남는것처럼

아주 제대로 진상을 떤 여행이 시간이 아무리 가도 더 선명할 테고, 친구들도 그 모든 바보 같은 짓과 말도 안 되는 여행담들을 더 사랑하며 기다릴 것이다.

 

그러러면 우리는 배워야 할것이다.

그냥 지금을 인정하고 조용히 받아들이는 방법을,

그리고 그걸 제대로 엄청나게 즐기는 방법을….

그러면 결국 여행은 어떤 식으로든 재미있어지는 거다.

물론 그땐 죽을 만큼 힘들다 해도 말이다.

 

286 아이슬란드 산악지역에는 겨울 내내 눈이 많이 내려 어느 정도 눈이 쌓이면 마을 중앙에 있는 구식 대포로 산 중턱을 겨냥해서 대포를 발사한다고 얘기를 꺼냈다. 그는 왜 그러냐고 물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눈이 계속 싸이고 결국에는 눈사태가 일어나 마을이 파묻히게 되므로 그걸 막기 위해 아주 오래전부터 눈대포를 쏴서 인위적으로 눈사태를 만들어 눈을 조금씩 덜어내는 거라고 말해줬다. 그말을 들은 그는 내게 그 눈대포가 보고 싶다고 했다.

 

288 그걸 그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다. 외부가 아닌 내부로 향해 있는 아이슬란드 눈대포를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너무 걱정하지마. 너무 많이 쌓여 버겁다면 한 번 정도는 가진 걸 모두 털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면 되니까. 매해 겨울눈이 쌓이고 쌓이듯 너의 모든 것도 다시 금방 쌓일 거야.”

 

294 원래 못사는 사람이 벼락부자가 되면 행복하기보단 불안한 법이다. 그래서 담을 더 높이 올린다고 하지 않는가.

 

297 그는 이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제 그는 뭘 해도 예전처럼 되돌아 갈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제대로 뭔가 보여주지 않으면 이대로 쓰러질 거라는 것을, 그리고 사람들이 원하는 건 다른 사람의 인생역적 스토리가 아니라 한 인간이 어떤 식으로 무너지는지에 관한 스토리라는 것을..

 

297 뒤에는 강이 있고 앞에는 적이 있으므로. 여기서 무너지면 다시 동정을 받을 수 있을 테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다. 그러니 욕을 먹고 등에 1000개의 화살을 맞더라도 꿋꿋하게 갈 수밖에. 진정 가고자 했던 그 길을 말이다.

298 어느새 떠나는 것이 익숙해진 것의 슬픔, 내가 외롭다는 걸 인정한다는 것에 대한 슬픔, 떠나보내는 자의 슬픔 그리고 결국 다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여행자의 슬픔, 그리고 이 모든 슬픔을 기억한다는 것의 슬픔. 내 여행의 배터리그런 슬픔.

 

304 그의 인생은 여기저기 해어져 있었고, 여기저기 지저분하게 다른 천으로 덧대어져 있었지만 그건 그의 망토였고 깃발이었으며 그의 지도였다.

 

304 “물론 자네나 나처럼 사는 건 쉽지가 않지. 우리에겐 지속적인 안정이라는 것이 없으니……”

그의 말을 듣고 나는 당신과 닮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실제로 내게도 안정이라는 것이 없었기에 그저 고개를 돌려 걸어온 길을 뒤돌아 보았다. 거긴 우리의 발자국만이 남아 있었다.

 

305 “하지만 자네도 알게 될 거야. 나이가 들게 되면 결국 우리가 생각하는 안정이라는 건 없다는 걸. 열심히 일을 하고 있건 가족을 가지고 있건 그리고 돈이 많이 있건 모두가 결국엔 불안하지. 우리는 가진 걸 잃을까봐 언제나 불안하고 정말 잘 살고 있는 의심하지. 그래서 오히려 별로 가진 게 없는 것이 더 행복한 인생인지 모른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까지도 하질 않나?”

 하지만대부분 안정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직장과 가족을 거느리고 열심히 살아가잖아요.”

 

307 맛있게 눈을 먹는 그를 보며 나도 따라 장갑을 벗고 눈을 뭉쳐 한 입 베어 먹었다. 순간 입 안과 혀로 차가운 기운이 퍼졌고 금세 눈은 녹아 물이 되어 목 안을 흘러 들어갔다. 마치 신선한 공기가 몸 전체를 통과한 것처럼 기분이 깨끗해졌다.

 

309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정화를 거친 듯 더 푸르렀다. 사슴을 사냥하는 것도 아닌 그냥 단지 사슴을 보고 싶어서 이 깊숙한 숲 속으로 눈을 헤치고 오다니…… 그가 보러 오는 것은 천국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309 그는 이제 돌아가자고 했다. 이번에는 내가 그를 앞서 걸으며 왔던 길을 되짚어갔다. 다시 우리의 세상으로…… 나는 아쉬웠지만 그는 충분히 충전을 마친 듯했다. 자작나무 가지를 흔들며 바람이 불었다. 그와 내가 내쉬는 거친 숨소리와 눈을 밟는 뽀드득 소리만이 그 숲 속에서 나는 소리의 전부였다. 물론 우리는 살아오면서 수없이 많은 맹세를 하지만, 그 맹세들은 그저 말뿐이고 그 말은 그저 바람이기 쉽다. 내가 그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의 약속이 바람이 되어 어디론가 날아가지 않길 바랄 뿐이다.

 

314 “누군가의 손을 잡고 온기를 느끼고 싶었어요. 5달 동안 난 다른 사람의 온기를 느껴본 적이 없었거든요. 정말 이건 너무 따뜻하고 마음이 편해지네요. 어떤 약보다 안정이 되었어요.”

 

315 허공에 자꾸 머리를 부딪히는 새, 그래서 부리가 깨져버린 새, 아마도 여행을 통해 뭔가 얻을 수도 있겠지만 잃을 수도 있는 거라고, 나의 경우는 부리를 잃었고 그 잃어버린 부리를 통해 정신이 조금 단단해진 거라고.

 

317 , 낯선 한 사람을 마주하며 이렇게 마음이 시리고 춥다니. 그리고 마음이, 고개가 숙여지다니. 언젠가 그가 멈추는 법을 배우고 어딘가에 정착하게 된다면 그땐 어떤 눈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그때에도 지금처럼 끝내주게 빛나는 눈빛이기를. 의 자리를 내가 물려받을 수 있기를!

 

326 ‘생선이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집으로 돌아오는 걸 너무 좋아하기 때문일 거라고, 그래서 멀리 갈수록 집에 돌아오는 기쁨은 거리에 비례하는 것이기에 생선은 더 더 더 멀리 멀리 떠나는 거라고.’

 

331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야. 벌써 140일을 떠나 있었으니깐. 이민을 생각한다고 해도 난 분명 다시 내 집으로 돌아갈 거야. 익숙한 모든 것들에게로. 그런데 이번은 예전과 조금 다르겠지. 이미 내 마음속 한구석에 이민이라는 단어가 맴돌기 시작했고 그래서 몸속의 부속들이 마구 엉키는 기분이지만 우선 그냥 돌아가겠어. 그리고 어떻게 되어가는 내 눈을 지켜보겠어. 그래도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오면 내 모든 흔적을 지우고 익숙한 모든 것들과 이별하겠어. 모든 걸 가방에 가득 싣고 여기가 아닌 어디 다른 곳으로 날아오르는 거지.

 

337 내가 혼자 서점에서 책을 고르고 있을 때 누군가 내게 말을 걸었다.

앤드류!” 하지만 말은 건 사람은 내가 앤드류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얼굴을 붉히며 미안하다고 말하고는 근처에 있을 앤드류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나는 다시 책장으로 고개를 돌리며 생각했다. 지금 나는 앤드류가 되고 싶다고. 그래서 그들과 어울려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밥을 먹고, 바닷새를 보러 항구에도 같이 가고, 파이프오르간 연주도 같이 듣고 싶다고, 하지만 나는 혼자였다. 숙명처럼, 또다시 혼자서 차가운 바람이 부는 길로 나와 한참을 걸었다. <혼자>

 

338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기로 했어. 왜냐하면 내가 결혼하기에는 여전히 적당하지 않고, 여전히 내가 가진 꿈에 몰두해 있을 뿐이니까. 그리고 이제는 좋은 기억을 혀 위에 올려두고 녹여먹는 방법을 제대로 배웠으니깐. 지금 나는 그렇게 네가 원하던 추운 나라에 혼자 오서는 널 생각하고 있어. 이렇게 몇 년 늦긴 했지만 한 조각을 더 맞췄다고 생각해. 하지마 남은 마지막 한 조각은 네가 가지고 있기에 우리의 그림은 결국 999조각의 미완성 작품일 뿐이겠지.

 

339 “제가 사는 곳에서는 눈이 많이 내리면 그해에 풍년이 든다고들 해요. 그리고 이사 갈 때나 결혼할 때 눈이 오면 부자가 되거나 영원히 행복해진다고들 하죠.”

그게 사실이라면 여기는 정말 축복받은 땅이겠네. 하긴 아무것도 없는 이런 땅에서 그 동안 잘 먹고 잘 살아왔으니깐. 그 말이 사실인지도 모르겠어.” 그러고는 아저씨는 어색하게 웃으셨다.

저는 눈이 좋아요. 왜냐하면 눈이 내리면 지난 일들 모두가 내리는 눈 속에 묻혀 보이지도 않으니까요.”

 좋은 기억도 나쁜 기억도 모두 눈 속에 파묻어버리면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이따 저녁 먹으러 올 텐가? 오늘은 린다가 양스튜를 해준다고 했는데.”

 

340 어느 날 병을 얻었다. 그날 이후 나는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이 무서웠고, 꽉 막힌 도로 위에서 견딜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고, 화려하게 빛나는 조명들을 바라볼 때마다 불안했다. 그런 날들이 계속되자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광활한 평야와 사람과 문명이 없는 텅 빈 풍경을 갈망하게 되었다. 그 풍경에는 끝없이 줄지어선 차들도, 화려한 조명들도, 그리고 저마다 다르거나 고집 센 사람들도 없었다. 내가 지금 이야기하는 건 광활한 대자연을 말하는 것이 아닌, 말 그대로 스스로 고립된 텅 빈 곳을 동경하게 된 것이다.

 

340 나는 그런 곳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강원도의 고한부터 러시아 시베리아 호수, 미국 중부의 사막, 아무도 없고 바다거북만 살고 있는 퍼스의 해변, 눈이 허리까지 내리는 핀란드의 숲, 그리고 낮게 부는 바람소리만이 전부인 아이슬란드…… 이런 곳에서 나는 평온을 만났다. 작동되지 않던 뇌는 제대로 된 생각이라는 걸 하게 됐고, 입만 열면 허황된 꿈을 읊어대는 입은 침묵하게 되었다. 그 동안 어긋나 있던 206개의 뼈들이 다시 재조립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행복해질 수 있었고,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있었으며, 내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려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가벼워져 지상에서 7cm 떠 있게 되었다.

 

344 풀 한포기 자라지 않던 미국 중부 사막에서, 거북이 말고는 아무도 없었던 호주의 서해안에서, 눈이 허리까지 내리는 핀란드 숲 속에서, 꼬박 7일을 달렸던 시베리아 횡단열차 안에서, 그리고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느꼈던 고립감과 재로 뒤덮였던 2010 4월의 아이슬란드에서 내가 느낀 고립감은 전혀 다른 종류의 감정이었다. 그건 내가 원한 것도 아니고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운명 같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더 초조했고 두려웠다. 이제까지는 스스로 고립을 원했다면 이번에는 바꿀 수 없는 운명의 힘에 의해 기약 없이 고립되어 영원히 이 시간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346 나의 33살의 겨울은 유난히 추웠고 눈과 바람에 고립되어 있었다. 20년 만의 기록적인 눈이 내력 차가 눈 속에 파묻혀 꼼짝 없이 하룻밤을 길 위에서 보냈고, 소리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영하 37도의 중앙 러시아에 서서 누군가를 애타게 불러보기도 했다. 북쪽으로, 열차를 타고 끝도 없는 겨울 시베리아 벌판을 달리기도 했다.

 

346 30, 미국을 여행할 때의 나였다면 분명 매일 눈물을 흘리며 참담한 기분에 사로 잡혀 있었겠지만 33살이 된 지금 나는 더 이상 낯선 길 위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내 앞에 일어나는 일들과 모든 순간을 이제는 내 여행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이번 여행 역시 그 누구도 내게 강요한 적 없고 내가 이 여행을 통해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거나 인생을 바꿔버릴 만큼의 깨달음을 얻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저 가드를 올리고 언젠가 찾아올지 모르는 마지막 카운터 펀치 한 방을 노리는 복서처럼 나는 내 페이스대로 움직였다.

 

346 조급하지 않았다. 겨울은 여전히 끝날 생각이 없었고, 날 기다리는 사람도 그리고 내가 이야기할 특별한 장소도 없었으니까. 그 동안 가지고 있던, 더 많이 보고 더 멀리 가는 것, 그리고 누구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듣는 것에 대한 욕심을 버렸다.

 

350 당신이 거기에서 무슨 일을 했고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 당신 친구가 누구든 그리고 당신이 무엇을 가지고 있었건 그 모든 것이 이 길 위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5 곱하기 0 0이듯. 모든 것은 제로에서 시작한다. 당신의 한국에서의 생활은 그저 찬란했던 로마제국의 흥망성쇠처럼 따뜻한 전설로만 당신 마음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낯선 곳에서 당신이라는 사람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동안 우리 자신이 한번도 느낄 수 없었던, 우리가 서서히 밑바닥까지 가라앉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내 우리는 부상할 것이다. 바닥을 치고 나서 반등하는 주가처럼, 자신이 특별하지도 않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 순간을 우리는 모든 걸 바닥에 내려두고 다시 새로운 세상 한가운데로 부상할 것이다. 화 이 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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