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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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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18일 06시 32분 등록

이어서...

 

 

 

208 정녕 그대들은 그대들의 얼굴보다 더 좋은 가면을 쓸 수는 없으리라. 그대들 현대인들이여! 그 누가 할 수 있으랴, 그대들을 식별하는 일을!

과거의 기호들은 온몸 가득히 적어놓고, 게다가 이 기호들 위에는 새로운 기호들을 그려놓았다. 이와 같이 그대들은 모든 기호 해독자들로부터 교묘하게 자기 자신을 숨기고 있다!

신장을 검사하는 자라고, 그 누가 믿을 수 있을 것인가. 그대들에게 신장이 있다는 것을! 그대들은 페인트와 아교로 붙인 종이 조각을 빚어서 구운 것 같다.

è 나는 누구인가? 나는 너와 무엇이 다른가?

è 역주 : 신장 = 인간의 정수, 본성 è 아니, 왜 신장이 인간의 정수일까? 어째서 이런 상징이 가능하지?

è 역주 : 현대인에게는 신장이 없다고 한 말과 관련되며, 신체야말로 인간의 근원적인 자기 존재라는 사상이 배경이 되고 있다.

 

209 그렇다, 그대들이 어떻게 신앙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그대들 알록달록한 반점이 있는 자들이여! 그대들은 일찍이 신앙되었던 모든 것의 회화이다!

è 역주 : 니체에 있어서는 신앙과 창조는 동일한 원리 ,디오니소스적인 통일화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고 이 원리가 현실성의 핵심이다. 그러나 과거의 여러 문화의 잡동사니에 지나지 않는 현대인의 삶은 이러한 원리가 없으므로 열매 맺지 못하는 것, 신앙이 없는 것, 자신의 무신앙을 자랑하는 것이 된다.

 

209 모든 시대들이 그대들의 정신 속에서 서로 어긋나는 말로 수다를 떨고 있다. 그리고 모든 시대의 꿈과 수다가 그대들의 각성 상태보다는 더욱 현실적이었다!

그대들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대들에게는 신앙이 없다. 그러나 창조하지 않을 수 없었던 자는 언제나 자신의 예언적인 꿈과 별의 조짐을 갖고 있고 따라서 신앙을 신앙했던 것이다!

è 역주 : 앞에서도 신앙이라는 말이 쓰였거니와 여기서 말하는 신앙은 초월자로서의 신에 대한 신앙은 아니다. 니체는 이러한 신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대지에의 충실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한편 니체가 초월 신을 부정한다고 해서 존재의 초월성까지도 부정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초월론적 신앙 없이는 참된 창조도 있을 수 없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210 그대들은 반쯤 열린 문이고 문 옆에는 무덤 파는 자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것이 그대들의 현실이다. “모든 것은 멸망할 가치가 있다.”

è 역주 : 역사적 지식을 쌓기에만 급급한 교양인은 창조력이 없으므로 멸망에 가치를 둘 뿐이다.

 

212 이 비유를 나는 그대들 민감한 위선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다. 그대들 순수한 인식을 하는 자들에게! 나는 그대들을 음탕한 자들이라고 부른다.

è 역주 : 욕망이나 주관적 태도를 버리고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조하려는 자. 쇼펜하우어는 의지를 벗어나 관조하는 것을 아름다움이라고 보았다. 철학자나 그 밖의 학자는 대체로 이러한 자다.

 

214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는가? 내가 모든 의지를 갖고 의욕하지 않을 수 없는 곳에, 하나의 상이 단지 상으로 그치지 않도록 내가 사랑하고 몰락하고자 하는 곳에.

è 역주 : 몰락은 자기의 고독의 부정이라는 의미에서 자기 부정이다. 차라투스트라의 경우에는 현대의 니힐리즘적 상황을 자각하는 데서 출발하므로 니힐리즘에 철저함으로써 이를 극복하려는 것이다.

è 어쩌면 니체은 새로운 종교의 지도자가 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신을 거부하고 초인을 내세운 종교의 창시자다. 초인은 태양이 몰락하듯이 정점에서 세상을 향해 내려온다. 그 순간 초인의 고독이 종결된다. 초인이 세상에 내려올 때, 초인과 다른 세상은 부정적인 세상이다. 이 세상은 초인이 보기에 니힐리즘의 세상이다. 니힐리즘의 주체는 누구인가? 대중인가, 아니면 초인인가?

 

214 사랑하는 것과 몰락하는 것, 그것은 영원한 옛날부터 일치한다. 사랑에의 의지, 그것은 죽음조차도 서슴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나는 그대들 비겁한 자들에게 말한다!

è 사랑은 자기 희생을 전제로 한다. 자기 희생이 없이는 사랑이 아니다. 왜 자기 희생인가? 자기애를 넘어서 타인에게 사랑을 주기 위해 자기를 제물로 바쳐 증거를 보여야 한다. 마치 신전에 제물을 바치듯이.

 

그런데 이제 그대들의 거세된 곁눈질은 관조로 불리기를 바란다! 그리고 비겁한 눈으로 더듬는 것을 아름다움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한다! , 그대들 고귀한 이름을 모독하는 자들이여!

 

214 그러나 그대들 깨끗한 자들이여, 그대들 순수한 인식을 하는 자들이여, 그대들에 대한 저주는 그대들이 결코 분만하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è 니체는 분만의 과정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다.

è 분만하기 위해서 여자는 더렵혀 져야 하고철저히 욕망하고 욕망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자신의 몸을 망쳐야 한다. 분만한 여자의 몸은 망가진다. 그러면 아이를 얻을 수 있다.

 

정녕 그대들은 그대들의 입을 고상한 말로서 가득 채운다. 그러면 우리가 그대들의 마음이 넘쳐 흐른다고 믿을 것인가? 그대들 사기꾼들이여.

 

215 우선 과감하게 그대들 자신을 믿어라 그대들과 그대들의 내장을!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는 자는 언제나 거짓말을 한다.

 

그대들은 어떤 신의 가면을 쓰고 있다. 그대들 순수한 자들이여. 어떤 신의 가면 속에 그대들의 징그러운 환형 동물이 기어들었다.

정녕 그대들은 기만하고 있다. 그대들 관조하는 자들이여! 차라투스트라도 전에는 그대들의 거룩한 피부에 심취했다. 이 피부에 채워져서 몸을 사리고 있는 뱀을 간파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그대들에게 접근했다. 그때 나에게 새벽이 왔다. 그리고 이제 새벽은 그대들을 찾아간다. 달의 정사는 끝났다!

, 저쪽을 보라! 달은 정체가 밝혀져 창백한 채 저기에 서 있다. 아침놀 앞에!

이미 태양이, 저 활활 타오르는 자가 왔기 때문이다. 대지에 대한 태양의 사랑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순진하고 창조의 욕망에 불타는 것이 모든 태양의 사랑이다!

 

, 저쪽을 보라. 태양이 얼마나 초조하게 바다를 건너오는가! 그대들은 태양의 사랑의 갈증과 뜨거운 입김을 느끼지 못하는가?

태양은 바다를 빨고 바다의 깊이를 자기 자신의 높이까지 빨아올리려고 한다. 이때 바다의 욕망의 천 개의 유방을 갖고 부풀어 오른다.

바다는 태양의 갈증에 의해 키스를 받고 흡수되기를 바라고 있다. 바다는 공기가 되고 높이가 되고 빛의 길이 되고 스스로 빛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정녕 나는 태양처럼 모든 깊은 바다를 사랑한다.

그리고 나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인식이다. 모든 깊이를 끌어올리는 것이다 나의 높이까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è 여기에서 바다가 곧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è 파우스트 : 여성적인 것이 구원한다. 그레첸은 파우스트의 죄를 안고 소화한다. 마치 바다로 흘러든 욕망의 오염물을 소화해내듯이.

è 바다는 여자이자 어머니인데, 바다에 욕망을 해소하고(정액을 여자의 몸 속에 버리듯이) 그리고 생산해낸다. 태양을 토해내듯이. 그리고 바다와 같은 어머니의 애정(유방)을 통해 애착형성이 된 자들이 이상을 실현해낸다.

è 나는 태양이 되고 싶지 바다 따위가 되고 싶은 게 아니다.

è 이제 괴테와 니체를 내려놓을 때가 되었다. 여성적인 것이라는 말은 옳지 않다. 여자는 그저 아이를 낳을 뿐, 모성애를 타고나지는 않는다. 이제 여자들이 철학을 재단할 때가 되었다.

è 철학보다 현실이 우선하고 있다. 철학에 현 상황을 끼워맞출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철학이든 과학이든 실제의 거울이 되어야지 실제가 학문의 거울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현재 거의 대부분의 가정에서 남녀가 맞벌이를 하고 있다. 남성적인 영역이라 여겨진 부분에서 여자들이 활약하고 있다. 이제 아기들의 애착형성의 대상은 다양해 지고 있다. 대개의 경우, 애착형성의 대상은 어머니가 아니라 조부모다. 혹은 가정부들(중국 이모)이다. 이들과 애착형성이 된 아이들은 어쨌든 별 문제 없이 크며, 이러한 상황 역시 불가피한 상황이다. 맞벌이가 경쟁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금 부족한 애착형성을 겪은 사람들이 어머니를 지정하여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여자이기 전에 그냥 사람이다. 여자들도 사람으로서 자기 실현을 꿈꾼다. 예전에는 여자들이 아이를 통해 자아실현을 했었지만, 이젠 여자들도 안다. 자식을 키워봤자 봉양하지 않으며 이들은 아폴론적 삶의 꽃봉우리가 될 디오니소스들이 될 지언정 자신의 소유가 아니다. 꽃봉우리는 꽃대를 이탈한다. 그렇다면 믿을 것은 오로지 자기실현 뿐이다.

è 나의 어머니는 아폴로니우스적 영웅이었다. 모든 여자에게 데메테르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è 굳이 말하자면, 태양은 성숙하여 바다가 된다.

 

218 그들은 솜씨 있고, 그들은 재치 있는 손가락을 갖고 있다. 그들의 복잡함에 비하면 나의 단순함은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들의 손가락은 실을 꿰고 맺고 짜는 법을 모두 알고 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정신의 양말을 짠다!

è 역주 : 가치 없는 학문적 세공품

 

220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사상들을 간직하고 그들의 머리 위를 걸어다닌다. 그리고 비록 내가 나의 과오들을 신발 삼아 걸어 다닌다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그들과 그들의 머리 위에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평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의는 이와 같이 말한다. 따라서 내가 원하는 바를 그들은 원하지 못할 것이다!

è 역주 : 겉으로 보면 인간은 평등한 것 같지만 불평등은 주체적인 사색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생긴다.

 

221 “왜냐고?” 차라투스트라는 말했다. “자네는 왜 그러냐고 묻는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라고 물을 수 있지만 나는 그런 사람들과는 다르다. 나의 체험이 과연 어제 시작된 것일까? 내가 나의 의견의 여러 가지 근거를 체험한 것은 훨씬 전의 일이다. 내가 나의 여러 가지 근거를 간직하려고 한다면 나는 기억을 담는 통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è 역주 : 논리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라고 논리적 근거를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단지 논리적 사고에 머무르지 않고 더 높은 사색, 곧 체험적 사색을 한다. 그의 의견은 이러한 사색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그의 의견에는 근거가 있으나 이 근거의 의식보다 더 근원적인 것에 속하는 체험적 근거이며 따라서 반드시 의식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의견이 아니라 근거인데, 근거는 시시각각으로 변화하고 깊어지며 고양되므로 일찍이 근거였던 것도 의미를 잃고 따라서 그 의견도 사라진다(‘날아가버린 새도 적지 않다’). 또한 체험적 (또는 실존적) 근거는 반드시 의식되는 것은 아니므로 근거 불명의 의견도 있다(‘다른 곳에서 날아온 낯선 새도 발견한다’).

è 조셉 캠벨의 이야기와 상통한다. 실존이 논리에 우선한다.

è 그러나 ?”라는 질문 끝에 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와 실존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이는 비겁한 회피는 아닌가? 캠벨은 딱 잘라서, 인생에 의미 따위는 없다고 말했다(즉 왜 살아야 하는가? 의 답 따위는 없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의미라면서.

 

223 , 어디까지나 실제의 일이라고 하는 이러한 모든 불충분한 것들에 나는 얼마나 싫증이 났는가!

 

224 내가 보기에는 그들은 충분히 순결하지도 못하다. 그들은 그들의 바다가 깊게 보이도록 물을 흐려놓는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즐겨 조정자로 행동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들은 중개인, 혼합자이며 어중간하고 불순한 자에 지나지 않는다!

è 무식하고 불성실한 조정! A B가 대립할 때 적당한 중용을 요구하고 끝내버리는 것! 마치 본성과 양육이 50:50 이라거나 죽고 살 확률이 50:50이라고 말하거나 뇌는 화학물질의 스프라고 말하는 것 만큼이나 무책임한 조정에 대하여.

 

225 정녕 그들의 정신 자체가 공작 중의 공작이며 허영의 바다다!

시인의 정신은 관객을 원한다. 비록 그것이 물소이더라도!

그러나 나는 이 정신에 싫증이 났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이 정신 자체가 자기 자신엔게 싫증을 낼 때가 다가오는 것을.

나는 보았다. 시인들이 이미 변해서 자기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는 것을.

나는 정신의 속죄자(역주 : 보다 높은 경지로 향상하려는 시인들)들이 오는 것을 보았다. 속죄자들은 시인들로부터 성장했다.

 

228 그대들은 포효할 줄 알고 또 재를 뿌려 어둡게 만들 줄 안다! 그대들은 최상급의 허풍쟁이이며 진흙을 뜨겁게 찌는 기술을 충분히 배웠다.

è 니체는 은유의 천재이기도 하다.

 

232 하나의 가르침이 선포되고 이 가르침과 함께 한 가지 신앙이 퍼졌다. 모든 것은 공허하고, 모든 것은 동일하며, 모든 것은 이미 있던 것이다!

è 역주 : 염세 사상을 말한다. 구약성서 <전도서> 참조. 니힐리즘을 나타내며 영원 회귀 사상에 있어서 초극해야 할 계기를 제시한다.

그리고 모든 언덕으로부터 메아리로 돌아온다. ‘모든 것은 공허하고, 모든 것은 동일하며, 모든 것은 이미 있던 것이다!’

분명히 우리는 수확(역주 : 문화적 성과)을 거두었다. 그러나 왜 모든 열매는 썩고 갈색이 되었는가? 사악한 달로부터 어젯밤 무엇이 떨어졌는가?

모든 노동은 헛된 일이었고 우리의 포도주는 독으로 변했고 사악한 시선이 우리의 밭과 심장을 노랗게 태웠다.

우리는 모두 메말랐다. 그래서 우리에게 불이 떨어지면 우리는 재처럼 흩날린다. 그렇다, 우리는 불 자체를 지치게 만들었다.

모든 샘은 바짝 마르고 바다도 뒤로 물러났다. 땅은 모두 갈라지려고 하지만 땅 밑은 삼키려고 하지 않는다!

, 우리가 익사할 수 있는 바다는 어디에 남아 있는가.’ 이렇게 우리의 비탄은 울려 퍼진다 얕은 늪들을 넘어서.

정녕 우리는 죽기에는 이미 너무 지쳤다. 이제 우리는 깨어 있는 채 살아가기로 하자 무덤 속에서!

 

237 “좋아! 이제 이 일도 끝났다. 그러나 내 제자들아, 유쾌한 잔치를 열도록, 그것도 곧 열도록 준비해라! 이렇게 해서 나는 여러 가지 악몽을 보상하려고 한다! 그러나 저 예언자도 내 옆에서 먹고 마시게 하자. 그리고 정녕 나는 그에게 그가 익사할 수 있는 바다를 보여줄 테다!”

 

238 꼽추에게서 혹을 떼어내면 그에게서 정신을 떼어내는 것이 된다.

è 역주 : 불구자는 불구라는 사실에 중점을 두고 생활하며 자기를 강화해간다. 따라서 불구가 고쳐지면 중심이 없는 인간이 된다.

è 김미영 강사 : 결핍이 곧 경쟁력이다.

è 그러나 불구 또는 결핍이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것은 본인이다. 다 가진 것 같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사실은 내면에 충족되지 않은 결핍이 존재할 수 있고, 심지어 불구라 할지라도 불구임을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잘 훈련된 사회에서 생활할 수도 있다.

 

240 그리고 내 눈이 현재로부터 과거로 달아나도 언제나 동일한 광경을 발견한다. 조각과 수족과 무시무시한 우연 그러나 인간은 없다.

è 역주 : 종래의 인간은 진화의 목표가 없어서 발전의 필연성을 갖지 못하고 우연의 지배를 받았다.

è 역주가 니체를 제대로 이해한 것이라면, 나는 니체가 진화를 잘못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진화에 무슨 목적이 있는가? 진화에는 아무런 목적이 없다. 그저 존재할 뿐이고 남았을 뿐이다 니체는 정확히 진화를 어떻게 이해한 것인가?

 

241 만일 인간이 시인, 수수께끼를 푸는 자( : 삶 자체의 수수께끼를 푸는 자), 우연을 구제하는 자( : 우연에 적극적인 의의를 부여하는 자)가 아니라면, 나는 인간인 것을 어떻게 참을 수 있을 것인가!

è 니체도 결국, 인생의 목적과 의의에 대해 고민한 것이다. 그것만이 모든 문제의 핵심이므로.

è 카뮈와 통하는군.

 

241 과거의 것을 구제하고 일체의 그러했다그렇게 되기를 내가 바랐다로 개조하는 것 이것을 나는 처음으로 구제라고 부른다!

è 역주 : 니체에 있어서 존재의 본질은 권력에의 의지다. 따라서 존재하는 것은 모두 이 의지의 소산이다. 따라서 존재와 대립하는 나의 주관적 의지에서 본다면, 나의 의지는 존재와 일체가 된 근원적, 창조적 의지, 곧 권력에의 의지이므로 사실로서 주어져 있는 과거의 것도 나의 의지의 소산임을 자각할 수 있다. 이것은 과거의 구제. 과거의 구제는 과거를 무로 보려는 정신(원한) 또는 과거를 무로 만들어버리려는 정신(복수의 정신)과는 정반대되는 것이다.

è 나는 이게 말장난 같다. “권력에의 의지가 참이므로 이를 통해 과거의 사건도 연역해서 의지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è 핵심은 무엇이지? : 핵심은, 과거에 대한 합리화가 아니라, 삶의 형태가 권력에의 의지를 실현하는 것이며, 이 사실은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모든 것은 의지의 실현 과정이었으며 결코 무의미한 것들이 아니었음을 깨닫는 것이다. 이것이 과거의 구제다.

è 핵심적인 문제는, “권력에의 의지가 니힐리즘을 극복하기에 충분한 해답이 되나? 현상에 대한 이해력을 높이기는 하지만 가치에 대한 대답은 아니다. 왜 우리는 권력을 쟁취하려고 하는가? 왜 권력은 가치가 있는가? 혹은 권력에의 의지를 추구하는 것은 가치가 있는 행위인가? 안하면 안되나? 사실 대부분의 사람은 권력을 원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는 생존력을 증대시키기를 원한다. 선두에 나선 권력자는 처단 당하기 쉽다.

è 앞서서 니체는 ?”라는 질문에 대한 어떤 태도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나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라는 질문이 단지 논리적 근거를 추론하기 때문에 근본적 한계가 있다는 식의 부정적 해는 성실하지 않다”. “는 그저 일 뿐이다. “라는 질문을 분석하고 비판하기 전에 대답하지 못하는지를 알려달라.

è 크리슈나나무르티도 비슷한 상황에서 냐고 물은 제자를 비난했었다.

è 왜 철학자들은 라는 질문의 궁극을 기피하는가? 모르면 그냥 모르겠다고 해라.

 

242 의지는 되돌아가서 의욕할 수는 없다. 의지가 시간과 시간의 욕망을 부수지 못한다는 것 이것이 의지의 가장 외로운 우수다.

è 니체는 아름다운 문체를 구사한다. 그러나 핵심을 봐야 한다. 니체를 해체하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244 내가 그대들에게 의지는 창조하는 자다라고 가르쳤을 때 나는 그대들을 이 터무니없는 노래로부터 끌어냈다.

일체의 그러했다는 조각이고 수수께끼이고 무시무시한 우연이다. 창조적 의지가 덧붙여서 그러나 그렇게 되기를 내가 바랐다고 말할 때까지는.

창조의 의지가 덧붙여서 그러나 그렇게 되기를 내가 바라고 있다! 그렇게 되기를 나는 바랄 것이다!”라고 말할 때까지는.

è 스티브 잡스의 스탠포드 연설에서 connecting the dot라고, 모든 일들은 연결고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è , <시크릿>에서 니체를 언급했을까? 완전히 동일한 내용이다.

그러나 의지는 이미 이렇게 말했는가? 그리고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인가? 의지는 이미 자기 자신의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굴레에서 벗어났는가?

m이지는 이미 자기 자신에 대해 구제하는 자, 기쁨을 주는 자가 되었는가? 의지는 복수와 온갖 절치의 정신을 잊었는가?

그리고 누가 의제에게 시간과의 화해를, 그리고 모든 화해보다도 더 높은 것을 가르쳤는가?

è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하다!

è 역주 : 시간과의 화해는 복수의 정신과 온갖 절치를 잊는 것을 말하지만 이것은 아직도 소극적이다. 적극적으로 과거의 구제로 높일 때 시간과의 화해보다 더 높은 것이 된다. ‘누가가르쳤는가?’라고 했지만 사실은 아직도 가르쳐준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è 기독교에서는 과거를 용서하라고 한다. Forgiving is divine. 그러나 그것은 소극적인 행위이다. 그리고 결코 신적인 용서란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을 갉아먹고 기만하는 행위이다.

 

247 따라서 인간들 사이에서 쇠약해지고 싶지 않은 자는 어떠한 잔으로든지 마실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인간들 사이에서 깨끗하게 남아 있고 싶은 자는 더러운 물로도 몸을 씻을 줄 알아야 한다.

따라서 나는 가끔 다음과 같이 말해서 나 자신을 위로한다. “! 기운을 내자! 옛날 그대로의 마음이여! 그대는 한 가지 불행을 면했다. 이 불행을 그대의 행복으로 즐겨라!”

 

긍지를 가진 자들보다는 허영심이 강한 자들을 아끼는 것, 이것이 나의 또 하나의 대인의 재치다.

상처받은 허영심은 모든 비극의 모태가 아닌가? 그러나 긍지가 상처를 입은 곳에서는 긍지 이상으로 좋은 것이 자라날 것이다.

 

248 그대들의 거짓말이 그(허영심 많은 자)를 칭찬하는 것이라면, 그는 그대들의 거짓말조차도 믿는다. 그는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도대체 나는 무엇인가!”하고 탄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249 정녕 악에도 아직은 미래가 있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가장 뜨거운 남국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겨우 폭이 12피트, 생후 3개월 밖에 되지 않은 것이 벌써부터 극악한 악으로 불리는 것이 현재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언젠가 보다 큰 용이 세상에 나타나리라.

è 그게 뭐지?

 

3

 

259 나그네 나는 나그네이며 산을 오르는 자다. 이렇게 그는 그의 마음을 향해 말했다. 나는 평지를 사랑하지 않고, 나는 오랫동안 조용히 앉아 있지를 못하는 것 같다.

따라서 앞으로 나에게 운명과 체험으로서 어떠한 일이 닥치든 저기에는 방랑과 등산이 있을 뿐이다. 인간은 결국 오직 자기 자신을 체험할 수 있을 뿐이다.

 

261 그러나 인식하는 자로서 건방진 눈을 가진 자가 어떻게 만사에 있어서 겉에 나타나 있는 근거 이상의 것을 볼 수 있을 것인가!

 

262 , 나의 발밑의 이 검고 슬픈 바다여! , 이 몸이 무겁고 음울한 싫증이여! , 운명과 바다여! 그대들에게로 나는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된다.

è 역주 : 차라투스트라는 마지막 정상에 오르기 위해 우선 바다로 내려간다. 바다는 인간성의 비유(나우만은 바다를 영원 회귀 사상으로 본다.)

è 역주 : ‘가장 높은 산은 자기 초극이 이루어진 곳이다. 그런데 가장 높은 산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영원 회귀 사상을 체득해야 한다. 따라서 자기의 가장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서는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이 가장 높은 곳에 도달하는 길이라는 역설이 성립된다.

 

263 사랑은 가장 고독한 자의 위험이다. 살아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사랑하려는 사랑은, 정녕 사랑에 있어서의 나의 바보스러움, 나의 겸손은 우습구나!

 

266 위로 반쯤 난쟁이고 반쯤 두더지고 절름거리고 절름거리게 하는 이 정령이 나의 귓속으로 납을, 나의 뇌 속으로 방울방울 납과 같은 사상을 떨어뜨리며 내 어깨 위에 걸터앉아 있다 하더라도.

è 니체는 진정 은유의 천재다.

è 아마 징기스칸이 적을 처단하는 방법에 대한 글을 읽었을 것이다. 이들은 녹인 납을 생포한 적의 귀를 통해 집어넣어 뇌를 녹여 죽였다.

è 역주 : <이 사람을 보라>비극의 탄생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디오니소스적 상징에 있어서는 긍정의 극한이 달성되어 있는 데 대해 기독교는 가장 깊은 의미에서 니힐리즘적이다. 기독교의 성직자들이 음험한 난쟁이’, ‘지하적인 자들이라는 풍자를 받고 있는 곳이 있다.”

 

268-269

이 출입구를 보라! 난쟁이여!”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이 출입구는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 두 길이 여기서 만난다. 아무도 아직은 이 두 길의 끝까지 가보지 못했다. 뒤로 뻗친 이 기나긴 오솔길, 그것은 영원에 이어진다. 그리고 저 밖으로 나가는 기나긴 오솔길 그것은 또 하나의 영원이다. 그들은 서로 모순된다. 이 길들은. 이 길들은 서로 정면으로 맞부딪친다. 그리고 여기, 이 출입구는 두 길이 마주치는 곳이다. 출입구의 이름은 위에 쓰여 있다. ‘순간이라고. 그러나 이 두 길 중 하나를 따라 앞으로 더욱 앞으로, 더욱 멀리 가는 자가 있다면, 그대 난쟁이여, 그래도 이 길이 영원히 서로 모순된다고 믿는가?”

모든 직선은 속인다.” 난쟁이는 비웃는 듯이 중얼거렸다. “모든 진리는 곡선이고 시간 자체가 원환이다.”

è 난쟁이는 니힐리즘의 정령이다.

그대 중력의 정령이여!” 나는 화를 내며 말했다.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나는 그대를 지금 웅크리고 앉아 있는 곳에 웅크리고 앉은 채로 내버려둘 테다, 이 절름발이야. 사실 내가 그대를 높은 곳으로 데려온 것이다!”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보라, 이 순간을! 이 순간이라는 출입구로부터 하나의 기나긴 영원의 오솔길이 뒤로 뻗쳐 있다. 우리들 뒤에는 하나의 영원이 있다.

모든 사물 가운데서 달릴 줄 아는 것은 이미 언젠가 이 오솔길을 달렸음에 틀림이 없지 않은가? 모든 사물 가운데서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은 이미 언젠가 일어났고 이루어졌고 달려가버렸음에 틀림이 없지 않은가?

그리고 모든 것이 이미 있었다면 그대 난쟁이는 이 순간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출입구도 이미 있었음에 틀림이 없지 않은가?

그리고 이 순간의 모든 미래의 사물을 야기시키는 방식에 따라 모든 사물은 굳게 결합되어 있지 않은가? 따라서 자기 자신도 (야기시키는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모든 사물 가운데서 달릴 줄 아는 것은 이 밖으로 나가는 기나긴 오솔길을 언젠가는 반드시 달릴 것이기 때문이다!

è 역주 : 하이데거는 니체가 순간니힐리즘의 초극이라는 관점에서 영원 회귀 사상을 사색한다고 본다. 영원성을 사색하기 위해서는 자기 존재의 순간을 생각해야 하고, 한편 동일한 것의 회귀를 사색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은 동일하다는 니힐리즘과의 대결이 불가피하다.

è 이하에서 영원 회귀 사상의 주요한 세 전제가 암시되어 있다. 곧 첫째, 미래 및 과거에 있어서의 시간의 무한성, 그 시간의 현실성, 둘째, 여러 사물과 그 경과의 유한성이다. 이러한 전제 밑에서는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이미 존재자로서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한한 시간 속에서는 유한한 세계의 경과는 이미 완료되어 있기 때문이다(하이데거). 셋째, 따라서 현재의 모든 일은 과거의 것의 회귀이고 또한 현재의 일은 미래에 있어서도 회귀한다.

è 다들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찾지 못하면 살 이유가 없기 때문에. 살 이유를 분별한 후, 없다고 여겨지면 죽어야 하므로.

 

274 일찍이 창조하는 자는 길동무와 자기 자신의 희망의 어린애들을 찾아다녔다. 그런데 보라, 창조하는 자는 우선 어린애들을 창조하지 않고서는 그들을 찾아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 해서 나는 나의 어린애들에게 가거나 어린애들로부터 되돌아오면서 나의 사업에 몰두하고 있다. 자기 자신의 어린애들을 위해서 차라투스트라는 자기 자신을 완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오직 자기 자식과 사업만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커다란 사랑이 있는 경우, 이 사랑은 임신의 징조다. 나는 이와 같이 깨달았다.

 

275 폭풍이 바다로 추락하고 산맥의 코가 물을 마시는 곳, 거기서 각각의 나무는 언젠가 낮과 밤을 경계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시험하고 인식하기 위해서.

è , 니체가 너무 천재라서 진도 하나~~~도 안나감. 미추어버릴 듯.

è 산맥의 코가 물을 마신대. 이거 졸라 천재 아님? 어쩜 이럴 수가 있음? 이 자식 뭐임? 아 짜증난다. 진도 안나가서

è 니체에 관해서 니체를 잘 아는 남자와 토론을 하고 싶지만 남자라서 할 수가 없다. 니체와 살로메 따위의 어정쩡한 사단을 경계하며. 남녀가 성이 다르고 둘 사이에 아이를 창작할 수 있다는 것. 여기에 엄청난 교류의 손실이 발생한다. , 남녀 사이에 우정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278 , 나의 삶의 오후여! , 저녁 전의 행복이여! , 대양 위의 항구여! , 불안 속의 평화(역주 : 대해에서 느끼는 안정감)! 나는 그대들 모두를 얼마나 불신하는가!

정녕 나는 그대들의 음침한 아름다움을 믿지 않는다! 나는 비로드처럼 너무 매끄러운 미소를 믿지 않는 사랑하는 자와 같다.

사랑하는 자, 이 질투심 많은 자가 냉혹하면서도 깊은 사랑을 품고 가장 사랑하는 이를 밀어내는 것처럼 이렇게 나는 이 지복의 시간을 밀어낸다.

가거라, 그대 지복의 시간이여! 그대와 함께 나에게는 뜻에 거슬리는 지복이 찾아왔다! 나의 가장 깊은 고통을 감수하고자 나는 여기에 서 있다. 그대는 나쁜 때에 찾아왔다!

가거라, 그대 지복의 시간이여! 오히려 저쪽 나의 어린애들이 있는 곳에 숙소를 마련하라! 서둘러라! 그리고 저녁이 되기 전에 나의 행복으로 그들을 축복하라!

이미 저녁이 가까워졌다. 해는 진다. 가라 나의 행복이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는 밤을 새워 그의 불행을 기다렸으나 기다려도 소용이 없었다. 밤은 여전히 맑고 고요했으며 행복 자체는 점점 더 가까이 왔다. 그러나 아침 무렵,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의 마음을 향해 웃고 그리고 비웃듯이 말했다. “행복이 내 뒤를 쫓아 온다. 내가 여자 뒤를 쫓아다니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행복은 여자다.”

è 여기에 대한 주석이 없네.

è 여성적인 것이 구원한다는 괴테와 맞닿아 있나?

è 꼭 상징은 아닌 것 같다.

 

284 , 내 머리 위의 하늘이여, 그대 청명한 자여! 높은 자여! 나에게 있어서 그대의 청명함은 영원한 이성이라는 거미도, 거미줄도 없다는 것이다.

그대는 나에게는 신성한 우연들의 무도장이다. 그대가 나에게는 신성한 주사위와 주사위 놀이를 하는 자를 위한 신의 도박대이다! 나에게 있어 이것이 바로 그대의 청명함이다!

그러나 그대는 얼굴을 붉히는가? 내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했는가? 나는 그대를 축복하고자 했으면서 오히려 모독했는가?

혹은 그대가 얼굴을 붉힌 것은 둘이 함께 있다는 수치 때문인가? 이제 낮이 오기 때문에 그대는 나에게, 가라, 침묵하라고 명령하고 있는가?

세계는 깊다. 게다가 일찍이 낮이 생각한 것보다도 더 깊다. 모든 것이 낮 앞에서 발언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낮이 온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헤어지자!

è 확률론

 

289 작은 행복을 신중하게 얼싸안는 것 이것을 그들은 인종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때 이미 그들은 신중하게 새로운 작은 덕을 곁눈질한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한결같이 한 가지 일을 가장 원하고 있다. 아무도 그들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을, 그러므로 그들은 누구보다도 앞질러서 모든 자들에게 친절을 베푼다.

그러나 이것은 비겁이다. 비록 그것이 이미 덕이라고 불릴지라도.

그리고 그들이, 이 작은 자들이 거칠게 말할 때가 있더라도, 나는 여기서 오직 그들의 목쉰 소리를 들을 뿐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통풍은 그들의 목소리를 쉬게 한다.

그들은 영리하고 그들의 덕은 영리한 손가락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주먹이 없고 그들의 손가락은 주먹 뒤로 기어들어 숨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덕은 신중하고 길드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리를 개로 만들고 인간 자체를 인간의 최상의 가축으로 만든다.

우리는 우리 의자를 한가운데에 놓았다.” 나에게 그들의 미소는 이렇게 말했다. “빈사의 검술사로부터도, 만족한 돼지로부터도 멀리 떨어져서.”

그런 이것은 범용이다. 비록 그것을 이미 중용이라고 부르고 있을지라도.

è 매우 중요한 문단이다.

 

291 인종을 가르치는 이 교사들! 작고 병들고 딱지가 덕지덕지 않은 곳이면 어디든지 그들은 이처럼 기어간다. 그리고 오직 나의 구역질이 방해하기 때문에 나는 그들을 눌러 죽이지 않을 뿐이다.

 

292 나는 신을 부정하는 자인 차라투스트라다. 나는 나의 냄비 속에서 모든 우연을 끓인다. 그리고 우연이 거기서 잘 익었을 때 비로소 나는 우연을 나의 음식으로서 환영한다.

è 이는 태고의 생명의 스프를 생각나게 한다. 바닷가 연안에서 생성되었던 생명의 스프. 여기에 천둥이 치면 생명이 탄생하였다. 천둥, 어쩌면 초인.

è 이 과정은 인간의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과도 동일하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

è 우연과 필연이 뒤섞이는 지점에 관하여 : 난자에 대하여 어떤 정자가 결합하는가는 순전히 우연이다. 내가 태어난 것은 우연이다. 그러나, 난자와 정자가 만나는 행위가 이루어졌을 때 생명이 탄생하는 것은 거의 필연이다.

è 우연을 냄비에 넣고 끓이면 어쨌거나 음식이 만들어지는 것은 필연이다.

è 그래. 부부가 관계를 하여 아이가 생겼을 때, 바로 아이가 생겨난 것은 우연이지만(수만개의 정자 중 하나와 불특정하고 알 수 없는 난자 하나가 만나 이루어진 우연의 산물) 그 아이가 바로 나의 아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것은 나의 운명이고 나의 소유다.

è 영원회귀사상 : 모든 사건들은 우연의 자식들이다. 그런데 사건들이 생기는 것은 필연이다. “달리도록 만들어진 것은 달린다.” 이상의 오감도에서 터널을 달리게 되어 있는 아이들은 달린다.

è 사건들은 우연하게 탄생하는데, 그 우연을 설명하는 것은 필연적 설명이다. 사람들은 이미 발생한 결과들에 대해 필연적 설명을 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다. 뇌가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음이 실험 결과 밝혀지고 있다.

è 그것은 자기애에 입각한 합리화인가, 아니면 정말 내가 끌어들인 권력에의 의지 그 의지의 역장이 만들어낸 새로운 필연의 세계인가? 니체는 후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전자일지도 모른다는 혐의는 어떻게 씻을 것인가? 니체가 초인인지 아Q인지 어떻게 판별하지?

è 내가 말하고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è 역주 : 차라투스트라는 그의 권력 의지에 의해 어떠한 우연도 자신의 본래적인 체험으로 만들며 우연에 지배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연을 동화시켜 긍정한다. ‘냄비는 차라투스트라의 상징.==> è 이 냄비의 상징을 요리를 잘 못하는반다해의 상징으로 만들어도 재밌겠다. 냉장고에 집히는대로 아무 재료를 넣고 된장만 풀고 끓인다. 그리곤 저녁으로 대접하는 것이 반다해식 요리법.

è 그건 우리 엄마의 냄비인데...

 

299 그들은 나의 여러 가지 재난과 우연을 불쌍히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말한다. “우연으로 하여금 나에게 오도록 하라. 우연은 갓난애처럼 순진하다.”

 

299 어떤 자에게는 고독은 병자의 도피다. 다른 자에 있어서는 고독은 병자들로부터의 도피다.

è 역주 : 전자는 기독교의 수도사들처럼 영원히 인간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고, 후자는 일시적으로 자유로운 인식자가 되기 위한 도피다. 물론 후자의 고독도 참으로 자유로운 인식자의 고독은 아니다. 참된 인식자의 고독은 현실을 파고 들어가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è 역자도 대단한 사람이다.

 

304 사람들은 그대를 나의 원숭이라고 부른다, 그대 거품을 내뿜고 있는 바보여. 그러나 나는 그대를 나의 투덜거리는 돼지라고 부르리라. 투덜거림으로써 그대는 나의 어리석음에 대한 예찬조차도 망쳐버린다.

처음 그대를 투덜거리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누구도 그대에게 충분히 아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대는 많은 불평의 근거를 얻기 위해 이 쓰레기 더미에 앉았던 것이다.

허다한 복수를 할 근거를 얻기 위해서! 다시 말하면 그대 허영심 많은 바보여, 그대가 내뿜고 있는 온갖 거품은 복수다. 나는 그대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대의 바보스러운 말은 그대가 올바른 말을 할 때조차도 나에게 상처를 입힌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의 말이 백 배나 올바르더라도 그대는 내 말을 이용하여 부정을 저지를 것이다!

 

305 배반자들에 대하여 이들 젊은 심장을 가진 자들은 모두 이미 늙어버렸다. 그런데 늙은 것도 아니구나! 오직 지치고 천해지고 안일하게 되었을 뿐이다. 그들은 이것을 우리는 다시 경건해졌다고 말한다.

è 역주 : 차라투스트라는 자유 정신을 갖고 자기의 인식과 의지에 의해 살라고 하므로 그의 가르침은 안일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의 인도를 믿고 사는 것은 안일한 삶이다. 이것을 다시 경건해졌다고 한 것이다.

조금 전까지도 나는 그들이 아침 일찍 대담한 발걸음으로 뛰어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인식의 발은 지쳤고 이제 그들은 그들의 아침의 대담성조차도 비방한다!

 

307 그러나 기도한다는 것은 수치다! 만일에 대해서는 아니지만 그대와 나, 그리고 머리에 양심을 갖고 있는 자에 대해서는! 그대에 대해서는 기도한다는 것은 수치다!

그대도 잘 알고 있다시피, 합장하기를 좋아하고 손을 무릎에 얹고 편안하게 살고 싶어하는, 그대 마음속의 비겁한 악마 이 악마가 그대에게 하나의 신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렇게 됨으로써 그대는 빛 속에서는 결코 쉬지 못하는, 빛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속하게 된다. 이제 그대는 매일 그대의 머리를 밤과 안개 속에 깊숙이 밀어 넣어야 한다.

è 기독교뿐만이 아니라, 기도한다는 것은 안일을 바라는 비겁한 행위다.

 

310 ()는 너무 늙었다! 그는 이미 자식들을 더 이상 돌보려고 하지 않는다. 이렇게 다른 야경꾼이 대답했다.

도대체 그에게 자식이 있는가? 그 자신이 이 점을 증명하지 않으면 아무도 증명하지 못한다! 나는 그가 이 점을 한번 철저하게 증명해주기를 오랫동안 바라고 있었다.”

증명한다고? 마치 그 자가 일찍이 무엇인가 증명한 적이 있는 것 같은 말투군! 증명한다는 것은 그에게는 어려운 일이야. r는 사람들이 그를 믿는다는 데 중점을 두고 있어.”

è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의 증명 의무는 오직 신에게 있다. 기발한 발상이다.

 

316 사람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살면 인간을 잊어버린다. 모든 인간에게는 너무나 많은 겉치레가 있다. 거기서는 먼 곳이 바라보이니 먼 곳을 갈망하는 눈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320 육욕, 지배욕, 아욕(자기향락), 이 세 가지는 지금까지 가장 저주받아왔고 가장 나쁜 평판을, 그것도 왜곡된 평판을 받아왔다. 이 세 가지를 나는 인간적으로 좋은 것으로 측정하고자 한다.

 

325 자기 향락에 있어서는 소심한 불신, 그리고 시선이나 손(결의와 행동) 대신 맹세를 바라는 자는 천대받는다. 또한 너무나 불신하는 모든 지혜도. 이러한 지혜는 비겁한 영혼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자기 향락에 있어서 더욱 천대받는 것은 재빨리 영합하는 자, 곧장 드러누워버리는 개 같은 자, 비굴한 자다. 그리고 비굴하고 개 같고 경건하고 재빨리 영합하는 지혜도 있다.

자기 향락에 있어서 증오스럽고 구역질을 일으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지키려고 하지 않는 자, 유독한 침이나 사악한 시선을 삼켜버리는 자, 너무나 참을성이 많은 자, 모든 것을 참고 견디는 자, 모든 일에 만족하는 자다. 왜냐하면 이것은 노예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신들과 신들의 발길질에 굴종하든, 인간들과 인간들의 어리석은 의견에 굴종하든, 모든 노예의 특성에 복된 아욕은 침을 밷는다!

è 니체의 위대한 적은 기독교다. 니체는 증오할 적을 만들되 경멸할 적을 만들지 말라고 하였으며 적을 남들에게 자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가장 위대한 적을 만나기 위하여. 니체가 책 한 권에 담아내야 할 정도로 그가 극복하고 초극해야 했던 적의 크기는 참으로 컸던 것 아닐까?

 

328 이러한 인간에게는 대지와 삶은 무겁게 여겨진다. 그리고 중력의 정령은 이렇게 되길 바라고 있다! 그러나 가벼워져서 새가 되기를 바라는 자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이렇게 가르친다.

물론 병들고 탐욕스러운 자들의 사랑으로 (사랑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자들에게 있어서는 자기애조차도 악취를 풍기기 때문이다.

인간은 건전하고 건강한 사랑으로써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나는 이렇게 가르친다. 자기 자신을 참고 견디며 방황하지 않기 위해서.

 

329 그리고 우리는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지참금으로 준 것을 충실하게 딱딱한 어깨에 메고 험준한 산 너머로 헐떡거리며 간다! 그리고 우리가 땀을 흘리면 사람들은 우리에게 말한다. “그렇다. 삶은 짊어지기엔 무거운 것이다!”

그러나 오직 인간만이 인간 자신에게는 짊어지기에 무거운 것이다! 인간은 남의 것을 너무나 많이 어깨에 짊어지고 헐떡거리며 가기 때문이다. 낙타처럼 인간은 무릎을 꿇고 마음대로 짐을 싣게 하는 것이다.

특히 외경심이 깃들여 있는 억세고 끈기 있는 자 그는 다른 사람의 무거운 말과 가치를 너무나 많이 짊어지고 있다. 이제 이 사람에게는 삶은 사막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정녕! 자기 소유의 많은 것도 짊어지기에 무거운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내면에 있는 것은 대체로 굴과 같다. 다시 말하면 구역질이 나며 미끈미끈하고 잡기 어렵다.

è 역주 : 자기 자신의 정신에도 숨겨지고 자각되지 않은 약점이 허다하다.

따라서 고상한 장식을 한 고상한 껍질이 중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껍질과 아름다운 겉모양과 현명한 맹목의 상태를 갖는 기술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한편 많은 껍질은 빈약하고 애처롭고 또 너무나 껍질다우므로 인간 내면의 여러 가지 점에 대해 기만을 한다. 많은 숨겨진 선의와 힘은 결코 알려지지 않는다. 가장 훌륭한 맛이 그 미식가를 찾지 못한다!

è 정말로 옳은 말이다.

 

여자들, 가장 섬세한 자들은 이것을 알고 있다. 약간 살이 쪘거나 약간 마른 것 , 이 약간에는 얼마나 많은 운명이 깃들어 있는가!

è 역주 : 인간은 본질이 확정되지 않은 심연임을 말한다.

è 역주가 예술이다! 사실 이 부분에 달린 역주가 아닌데 착각하였다. 하지만 이 예에 속한 주석으로 해석하면 정말로 탁월한 해석이 된다! 원래 이 부분의 역주는 여자들에게 있어서는 약간 살이 찌거나 마른 것이 운명의 변화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다.”

인간은 밝혀내기 어렵고 인간 자신에게는 가장 어렵다. 흔히 정신은 영혼에 대해 거짓말을 한다. 중력의 정령이 이렇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나의 선과 악이라고 말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밝혀낸 자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그는 만인에 대한 선, 만인에 대한 악을 말하는 두더지와 난쟁이를 침묵시킨다.

정녕 나는 모든 사물을 선하다고 하고 이 세계를 최선의 세계라고 하는 자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이러한 자들을 완전히 만족한 자라고 부른다.

 

332 그러나 나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언젠가 나는 것을 배우고자 하는 자는 우선 서는 것, 걷는 것, 달리는 것, 기어오르는 것, 춤추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은 한꺼번에 나는 것을 배우지는 못한다!

 

335 내가 다음과 같이 가르쳤을 때 나는 이 잠을 방해했다. 곧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창조하는 자를 제외하고는!

그런데 창조하는 자는 인간의 목표를 창조하고 대지에 의미와 미래를 부여하는 자다. 이 창조하는 자가 비로소 선과 악이라는 것을 창조한다.

 

337 나에게는 모든 시간이 순간에 대한 복된 조롱처럼 생각되고, 필연이 자유 자체로서 자유의 가시를 희롱하는 행복을 누렸던 곳에서는.

è 역주 : 모든 순간은 영원히 회귀하므로 순간을 순간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영원히 회귀하는 것(필연)으로 긍정하는 것이 의지의 자유이다.

è 내가 이해한 것과 조금 다른데초인의 냄비로 돌아가면, 초인은 냄비에 우연을 넣고 끓여서 자신의 요리를 만든다. 이 요리를 만들고자 하는 의지가 바로 자유이며 요리는 반드시 만들어지기 때문에 필연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연 앞에 들이민 자유의 가시를 심각하고 결연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우연 역시 나의 냄비 속 요리의 재료일 뿐이며, 그런 의미에서 우연 역시 나의 의지이다. 그러므로 우연들이 뒤범벅이 된 과거 역시 나의 의지(나의 요리)라고 긍정할 수 있는 것이다(과거의 구제).

 

또한 내가 나의 늙은 악마요, 불구대천의 원수인 중력의 정령과 이 정령이 창조한 모든 것, 다시 말하면 강제, 규정, 필요와 귀결, 목적과 의지, 선과 악을 다시 찾아낸 곳에서는.

과연 춤추며 넘어설 수 있는 것, 춤추며 저쪽으로 건너갈 수 있는 것이 현존하지 않아도 될 것인 가? 가벼운 자, 가장 가벼운 자를 위해서 두더지와 무거운 난쟁이들이 현존하지 않아도 될 것인가?

è 현존하지 않아도 되지.

è 원죄의 종교를 부정함으로써 우리의 삶은 가벼워진다.

 

337 내가 초인이라는 말을 길에서 주운 곳도 그곳이었고, 인간은 초극되어야 할 그 무엇이라는 것.

인간은 다리이고 목적이 아니며, 따라서 새로운 아침놀에 이르는 길로서 자신의 정오와 저녁 때문에 스스로 지복을 찬양한다는 것.

 

339 그대의 이웃을 아끼지 말라고. 인간은 초극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è 앙드레 지드 역시 동정을 금기시한다. 그가 동정을 표현하는 순간은 오로지 자신의 사회성이 증명되어야 할 순간 뿐이다. 각자의 근심은 각자에게 맡겨두는 것. 이것이 바로 행복의 민주주의랄까. 누구도 노예처럼 남의 근심을 사역하거나 하는 척 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러하고 싶다면 그것은 동정에서 촉발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여러 가지 초극의 길과 방법이 있다. 그것을 그대는 찾아내야 한다! 그러나 오직 익살꾼만은 인간은 뛰어넘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대의 이웃 사이에서도 그대 자신을 초극하라. 그리고 그대가 그대 힘으로 빼앗을 수 있는 권리를 남이 그대에게 주는 일이 없도록 하라!

è 정말 멋진 말이다!

è 역주 : 앞에서 여러 가지 초극의 길과 방법이 있으나 그것은 각자가 찾아내야 한다고 말한 것과 관련되는 것으로 모든 가치 창조는 주체적인 것임을 말하고 있다.

 

자기 자신에게 명령하지 못하는 자는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명령할 수 있는 있지만 더 나아가 자기 자신에게 복종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340 고귀한 영혼의 특성은 다음과 같이 바란다. 고귀한 영혼은 공짜로 얻고자 하지 않다. 적어도 삶에 대해서는 그렇다.

천민에 속하는 자는 공짜로 살려고 한다. 그러나 삶이 스스로를 내맡겨 놓은 우리 다른 사람들은 우리는 언제나 이에 대해 무엇으로 가장 잘 보답할 수 있는가를 생각한다!

è 역주 : 삶은 우리에게 말하자면 운명으로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수동적으로 (공짜로) 빈둥빈둥 살지 않고 삶의 고양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è 이 역주가 가장 어리석다. 아무도 태어나기 전에 삶을 달라고 한 적 없다. 이 것은 기독교의 사상을 연상시킨다. 나를 탄생시킨 조물주에게 감사하며 그를 위해 사역하며 살다 가는 것이 인생의 의미인 것처럼. 의무를 지우지 말라. 이미 삶을 유지하기 위한 의무 아닌 의무가 태어난 자들에게 필연적으로 지어진다.

그리고 정녕 삶이 우리에게 약속한 것 그것을 우리는 삶에 대해 이행하리라!”고 말하는 것은 고귀한 말이다.

è 역주 : 삶은 우리에게 창조와 사랑의 기쁨을 약속하고 있다. 이것을 노력하여 실현한다는 것은 고귀한 일이다.

향락할 만한 것을 제공하지 못한 곳에서는 향락하고자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향락하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

è 역주 : 보다 높은 것을 창조하려는 의지에 의해 보다 높은 것을 실현할 때 비로소 향락이 허용된다. 향락을 위한 향락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è 이게 내가 생각한 바와 같다. 그러나 니체의 생각인지 역주의 생각인지 신중해야 한다. 니체의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는 책을 아직 읽어보지 않았다. 꼭 읽어봐야 하겠는데니체가 생각하는 정반합이란, 역시 아폴론의 줄기대 위에 디오니소스의 꽃을 올려놓는 것이다.

향락과 순진은 가장 부끄러움을 타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 것이나 추구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향락과 순진을 소유해야 하고 오히려 죄책과 고통을 추구해야 한다.

è 매우 중요한 문장이다!

è 니체가 철저하게 동사를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è 역주 : “행복을 추구하는 자로부터는 행복이 달아난는 말이 있듯이 향락과 순진도 직접 추구함으로써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 의지의 필연적 장애물인 죄책과 고통을 초극할 때 스스로 찾아오는 것이다.

è 향락과 순진은 이미 소유하고 있다소유한 것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다. 역주도 맞는 말이고. 아무튼 여기서 소유라는 개념을 도입한 것에 감탄했다.

 

341 , 이 선량한 자들! 선량한 자들은 결코 진리를 말하지 않는다. 정신에게는 이와 같이 착하게 되는 것은 일종의 병이다.

 

342 물 위에 교각이 있을 때,

è 앞서서 니체가 자신을 강가의 난간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는데 여기서는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인 것인가?

 

343 맹수를 부리는 곡예사처럼 흐름을 제지하는 매서운 겨울이 오면, 가장 재치 있는 자조차도 불신을 배운다. 그리고 정녕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멍청이만이 아니다. “만물은 정지해 있지 않은가?”

 

346 정녕 그대들은 소상인들처럼 소상인의 돈으로 살 수 있는 귀족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 값이 매겨진 것은 어느 것이나 가치가 적기 때문이다.

 

348 “무엇을 위해 사는가? 모든 것은 덧없다! 그것은 밀짚을 터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불태우면서도 따뜻해지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구태의연한 수다는 여전히 지혜로 여겨진다. 한편 낡고 곰팡냄새를 풍기기 때문에 더욱 존중된다. 곰팡이조차도 고귀해지는 것이다.

어린애라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으리라. 어린애는 불에 덴 적이 있기 때문에 불을 무서워한다! 낡은 지혜의 책에는 여러 가지로 어린애 같은 점이 있다.

è 삶에 약간 데였다고 삶 자체를 부정함.

è 그러나 꼭 그래서는 아닐 것이다. 정말로 삶에는 아무 의미가 없지 않은가? 조셉 캠벨식으로 말하자면 삶의 의미는 그저 백지의 도화지이며, 삶의 경험 그 자체가 의미다. 우리는 경험으로 백지 위에 의미를 쓴다.

그리고 언제나 밀짚을 터는자가 어떻게 타작을 비방할 것인가! 사람들은 이러한 바보들의 입을 묶어놓아야 마땅할 것이다.

이러한 자들은 식탁에 앉을 때에도 아무것도 갖고 오지 않는다. 심지어 왕성한 식욕조차도 갖고 오지 않는다. 게다가 그들은 모든 것은 덧없다!”고 비방하는 것이다.

그러나 잘 먹고 마시는 것은, , 나의 형제들이여, 정녕 덧없는 솜씨는 아니다. 부숴버려라, 제발 결코 즐거워하지 않는 자들의 목록판을 부숴버려라!

è 파스칼이 기독교에 대해 가진 추론법을 적용하자면, (파스칼 : 신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데 만약 없다면 죽어서 땡이고 있다면 신을 부정했을 때 지옥에 갈 것이므로 신을 믿는 편이 좋다.) 인간은 죽는데, 죽기 전에는 살아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기왕이면 즐겁고 초극적으로 살자.

è 니체의 영원회귀사상을 동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 흔한 강가에서 세월무상 탓하기 놀이” – 한 사람이 우리의 생도 이 강물과 같아 흘러가면 그 뿐이런 말을 하면 옆의 현자는 위로하듯이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지만 이 강물은 영원히 흐른다네.”라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흔히 전체성의 일부로서 의미를 가진다고 오해될 소지가 있다.

è 죽는다. 이 사실에서 연역하여 à 그러므로 아무렇게나 살자. 그러므로 잘 살자. 전혀 상반된 귀결이 가능하다. 스티브 잡스는 우리는 다들 죽으니까 자유롭게 잘 사는 법을 강구하자고 말했다.

è 죽는다는 사실이 도그마이지, 삶에 대한 의지가 도그마인 것은 아니다.

 

351 “많이 배우는 자는 모든 격렬한 욕망을 잊는다.”

è : 역사적 지식에 안주하는 자에게는 자발적 의욕이 없다.

 

354 , 나의 형제들이여, 피로가 만들어낸 목록판과 게으름, 부패한 게으름이 만들어낸 목록판이 있다. 비록 이 두 목록판은 같은 말을 전하더라도 같은 말로 들리지 않기를 원한다.

è :같은 염세주의적 주장이라도 만성적인 피로에서 생긴 주장과 영웅적 인간의 일시적 피로 때문에 생긴 주장은 구별되어야 한다.

 

356 모든 존재자의 최고의 종류는 무엇이고 최저의 종류는 무엇인가? 시객이 최저의 종류다. 그러나 최고의 종류에 속하는 자는 가장 많은 식객을 기른다.

 

359 아직도 번쩍거리고 있는 모든 것은 소상인의 금뿐인 곳에서는 소상인들이 지배해도 좋다! 이미 왕들의 시대는 아니다. 오늘날 민중으로 자칭하는 자는 왕이 될 값어치가 없다.

 

366 “왜 그렇게 단단한가?” 언젠가 숯이 다이아몬드를 향해 말했다. “도대체 우리는 가까운 친척이 아니란 말인가?”

왜 그렇게 연한가? , 나의 형제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그대들은 나의 형제들이 아니란 말인가?

왜 그렇게 약하고 그렇게 회피하고 양보하는가? 왜 그대들의 마음속에는 그렇게 많은 부정과 극기가 있는가? 왜 그대들의 시선에는 그렇게 적은 운명밖에 없는가?

그리고 그대들이 운명과 가차없는 자가 되고자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대들은 나와 함께 승리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대들의 단단함이 빛나고 베어내고 조각 내려고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대들은 언젠가 나와 함께 창조할 수 있을 것인가?

다시 말하면 창조하는 자들은 단단하다. 따라서 마치 밀랍에 찍듯이 그대들의 손을 몇천 년 위에 찍는 것을 그대들은 지복으로 생각해야 한다.

 

371 가장 비슷한 것 사이에서 가상은 가장 아름다운 거짓말을 한다. 가장 작은 틈이야말로 가장 다리를 놓기 어렵기 때문이다.

è 이 부분이 바로 내가 앞서 말한 두 가지 상반되는 연역 추론의 이야기다. 영원회귀사상의 두 가지 얼굴(일명 야누스적 얼굴)이기도 하다. 니힐리즘의 인식과 니힐리즘의 초극.

è : 하이데거에 의하면 가장 작은 틈에 의해 갈라진 가장 비슷한 것은 영원 회귀 사상에 대한 두 가지 경지다. 하나는 이 사상에 포함된 무서운 니힐리즘을 타산지석처럼 방관하는 경지이고 또 하나는 니힐리즘을 초극함으로써 도달하는 경지다. 전자에 있어서는 영원 회귀 사상은 모든 것은 덧없다. 모든 것은 가치가 없다. 보람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뜻이 되지만 후자에 있어서는 모든 순간이 문제다.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이 문제다라는 의미가 된다. 전자의 경지를 초극하여 후자의 경지로 들어가는 것이 니힐리즘의 극복이며 이때 비로소 영원 회귀 사상을 체득할 수 있다.

è 니힐리즘의 촉발이 니체의 경우에도 죽음에의 인식인가? 아니면 하늘 아래 같은 것은 없다는 인식인가? 아 씨, 헷갈려.

è 왜 초극해야 하지?

 

372 모든 것은 꺾이고 모든 것은 새로이 이어진다. 존재의 동일한 집이 영원히 세워진다. 모든 것은 헤어지고 모든 것은 다시 인사를 나눈다. 존재의 원환은 영원히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다.

모든 순간에 존재는 시작된다. 모든 여기를 중심으로 저기의 공은 회전한다. 중심은 어디에나 있다. 영원의 오솔길은 곡선이다.

 

377 따라서 그대가 지금 죽기를 바란다면, 오 차라투스트라여, 보라, 그 때 그대가 그대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지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대의 짐승들은 그대에게 아직은 죽지 말라고 간청한다!

è 니체는 가볍게 살라고 해놓고 왜 죽으려고 하는가?

 

384 두 번째 춤의 노래 그대가 가까이 있으면 나는 그대를 두려워하고 그대가 멀리 있으면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è 니체가 남들이 다 하는 연애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것과 사실 상관이 있다.

è : 삶을 지나치게 추구하면 그 암흑면이 드러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è 니체는 여자와의 사랑을 지나치게 추구해 본 적도 없는 것 같다. 이런 섬세하고 학식있고 이론만 빠삭한 자들의 문제다. 그들은 자신이 손상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 병적인 두려움이 승화되어 두뇌를 키웠는지도 모르겠다.

 

391 나는 아직 한 번도 내 아이를 낳게 하고 싶은 여자를 만나본 적이 없다. 내가 사랑하는 이 여자를 제외하고는.

è 니체의 사상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

è DNA가 아닌 정보로서의 번식욕.

 

393 , 어떻게 내가 영원을, 원환 중의 원환인 결혼반지 회귀의 원환을 몹시 탐내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è 결혼반지의 비유. 정말 탁월하지 않은가!

 

395 나는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 영원이여!

è 초극적 희열.

 

è 초극하며 사는 것은 그래야 한다가 아니라 그러는 게 어떻겠니?”와 같다. 선택은 내 몫이다. 마치 나에게 좋은 쿠바산 시가가 있는데 한 대 피울래?”라고 묻는 것과 같다. 피워도 되고 안피워도 된다.

 

405 그 예언자, “모든 것은 동일하다, 보람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세계는 무의미하다, 지식은 질식시킨다고 가르치던 커다란 피로의 고지자가.

è 피로 : 의미를 상실하면 피로해진다.

è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 나는 피로를 싫어하였다. 열정의 상실을 의미하므로.

 

410 왕들과의 대화

è 나는 왕이 아니어서 와닫지 않았다. 패스. 왕들은 낙타 사자 어린애의 단계 중 사자의 단계까지 레벨이 상승된 고귀한 자들이다. 자신들을 부정하고 더 높은 초인을 찾아 나선 자들.

 

417 거머리

è 이게 나의 이야기다. 근거 중심주의의 학자.

 

419 나는 나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나 자신은 나를 차라투스트라라고 부르고 있다. , 저 위로 뻗친 길은 차라투스트라의 동굴에 이른다. 동굴은 멀지 않다 .그대는 내가 있는 곳에 상처를 치료하지 않으려는가?

그대 불행한 자여, 그대는 이 삶 속에서 부당한 경우를 당했다. 처음에는 짐승이 그대를 물고, 다음에는 인간이 그대를 밟았다!

è : 처음에는 논리적 탐구로 애를 쓰고 이제는 인간적인 요구의 시달림을 받는다는 뜻이다.

è : 거머리는 사람의 몸에 달라붙으면 배가 부를 때까지 떨어지지 않는다. 여기서 거머리는 논리적으로 철저하게 따지는 상태를 상징하고 있다.

 

420 나는 정신의 양심적인 자다.

 

421 (학자) 그러나 내가 대가로서 잘 알고 있는 것은 거머리의 두뇌다. 그것은 나의 세계다!

그리고 그것도 하나의 세계다! 그러나 여기서 나의 긍지가 발언하는 것을 용서하라. 여기에는 나와 동일한 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는 나의 집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è 영화 <큐브>에서는 큐브에 갖힌 자들이 합심하여 이 큐브를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 중 한 명 천재 물리학자는 큐브가 열리는 시간을 계산해낸 후 죽는다. 그는 큐브를 탈출하지 못하며 큐브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431 그대는 그대의 하나의 진리로서 구역질을 수확했다. 그대에게는 어떠한 말도 이미 진짜가 아니지만 그대의 입은, 다시 말하면 그대의 입에 달라붙어 있는 구역질은 진짜다.

 

435 “그대가 누구이든 나그네여.” 그는 말했다. “길을 잃은 사람을, 찾고 있는 사람을, 자칫하면 여기서 해를 입게 될 늙은이를 도와달라!

여기 이 세계는 나에게는 낯설고 먼 곳이고 게다가 나는 야수가 울부짖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나를 보호해줄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죽었다.”

è 야수 : : 니체에 있어서 야수는 무의식적인 충실한 삶으로 고양된 인간을 나타내고 인간성의 도덕적 이상주의와 대립되는 것이다.

 

445 그대는, 내가 더듬거리며 너무 오랫동안 이야기해서 화가 났는가? 게다가 내가 충고까지 한다고 해서? 그러나 알아둬야 할 일이거니와, 나는 가장 추악한 인간이다.

è : 가장 추악한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구역질을 하는 인간이다. 곧 인간이 단편적이고 불구임을 자각하고 자기 자신에 혐오를 느끼고 자기 자신을 떠나려 하고 보다 높은 것을 의욕한다. 이러한 점에서 아무런 희망도, 만족도 없이 하루살이처럼 사는 인간들보다는 더 높은 인간이다.

 

450 “도대체 인간은 얼마나 가난한가?”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얼마나 추악하고 얼마나 쪼르륵거리며, 숨겨진 수치로 얼마나 가득차 있는가?”

사람들은 나에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 이 자기애는 어느 정도로 커야 하는가! 이 자기애는 얼마나 많은 자기 경멸을 내포하고 있는가!

 

나는 크게 경멸하는 자들을 사랑한다. 그러나 인간은 초극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455 또한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대의 위장 자체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모든 분노나 증오나 격앙은 그대의 위장에 거슬ㄹ린다. 그대의 위장은 보다 부드러운 것을 원한다.ㄴ 그대는 육식을 하는 자가 아니다.

 

460 여러 가지 가장 위험한 소망을 뒤쫓았다. 정녕 나는 어떠한 범죄든지 한 번은 그 위를 달려갔다.

è : 모험정신

선악의 명칭은 모두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 곧 권력 의지에 대한 비유.

 

462 그대는 목적지를 잃었다. 슬프다, 어떻게 해서 그대는 이러한 상실을 농담으로 삼고 단념하려고 하는가? 이 손실과 함께 그대는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465 행복해지는 데에는 아주 적은 것으로 충분하구나, 행복해지는 데에는! 나는 일찍이 이렇게 말하고 내가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대단한 모독이었다. 그것을 나는 지금 배운 것이다. 영리한 바보들은 더 좋은 말을 한다.

è : 평범한 가치판단에 사로잡히지 않는 바보들은 가장 적은 것으로 만족하는데, 사실은 여기에 현명함의 극치가 있다.

 

474 그러나 나는 나의 팔고 ksk의 다리를 아낒 ㅣ않는다. 나는 나의 전사들을 아끼지 않는다. 어떻게 그대들이 나의 전쟁에 도움이 될 것인가?

 

480 그대들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이것을, 시장에서는 아무도 보다 높은 인간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나에게서 배워라. 그러나 그대들이 거기서 말하고 싶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다! 그러나 천민은 눈을 깜빡거리며 말한다.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

그대들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이렇게 천민은 눈을 깜빡거리며 말한다. “보다 높은 인간은 졵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 인간은 인간이다. 신 앞에서는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

신 앞에서는! – 그런데 이제 이 신은 죽었다. 그러나 천민 앞에서는 우리는 평등하고 싶지 않다. 그대들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시장에서 떠나라!

 

484 초인의 최선에는 최악이 필요하다.

 

492 용기를 내라,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얼마나 많은 일이 아직도 가능한가! 사람들이 웃을 때 반드시 따라야 할 방식으로 그대들 자신을 넘어서서 웃는 것을 배워라!

그대들이 실패작이고 반쯤밖에 성공하지 못한 자일지라도, 무엇이 이상한가, 그대들 반쯤 부서진 자들이여! 그대들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나려 하지 않는가 인간의 미래가?

 

496 그대들의 마음을 고양하라, 나의 형제들이여, 높이! 더 높이! 그리고 제발 다리도 잊지 마라, 그대의 다리도 들어 올려라. 그대들 멋지게 춤을 추는 자들이여. 그리고 더 좋은 것은 물구나무를 서는 것이다!

 

497 제발 바람처럼 행동하라. 산 위의 동굴에서 불어오는 바람처럼. 바람은 자신의 피리 소리에 맞춰 춤추려 하고, 이 바람의 발자국 밑에서 바다는 떨며 깡총거린다.

 

505 인간의 내면의 신을

인간의 내면과 양과 마찬가지로 찌어버리고,

그리고 찢어버리면서 웃는 것

이것이야말로, 이것이야말로 그대의 지복이다!

è : 인간도 신도 초극하고 쾌활하게 웃는 것

 

509 이러한 오래된 예부터의 공포, 이것은 마침내 세련되고 신성화, 정신화되어 내 생각으로는 오늘날 과학이라고 불린다.

 

513 사막은 성장한다. 사막을 간직호가 있는 자(기독교 도덕에 중독)에게 재앙이 있으라!

 

523 그들은 그들의 마음속을 드러낸다. 좋은 때가 그들에게 되돌아온다. 그들은 다시 축제를 열고 다시 반추를 한다. 그들은 감사할 줄 알게 되었다.

그들이 감사할 줄 알게 된 것을 나는 가장 좋은 조짐으로 여긴다. 머지 않아 그들은 축제를 생각해내고 그들의 옛 기쁨의 기념비를 세울 것이다.

그들은 쾌유되고 있는 자들이다!

 

530 “, 차라투스트라여.” 가장 추악한 인간은 대답했다. “그대는 악인이다!

신이 아직껏 살아 있는지, 다시 살아났는지, 근본적으로 죽었는지 우리 둘 중에서 누가 이것을 갖아 잘 알고 있는가? 나는 그데에게 묻는다.

그러나 나느 ㄴ한 가지는 알고 있다. 나는 일찍이 그대 자신에게서 배웠다. , 차라투스트라여. 아주 근본적으로 죽이려고 하는 자는 웃는다는 것을.

사람들은 분노에 의해서가 아니라 웃음에 의해서 죽인다. 그대는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 차라투스트라여, 그대 숨어 있는 자여, 그대 분노 없이 전멸시키는 자여, 그대 위험한 성인이여, 그대는 악인이다!

è 무슨 뜻인지는 알겠는데, 무섭다.

 

531 그러나 우리는 하늘나라에 가는 것을 전혀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른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상의 나라를 원한다.

è 이미 기독교를 비판하면서, 니체는 이승의 세계만이 유일하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죽음을 인식했다고 볼 수 있다.

 

535 “오라! 오라! 이제야말로 방랑할 때가 되었구나! 때가 왔다. 밤 속으로 방랑하기로 하자!”

è : 밤 속으로 방랑한다는 것은 지성을 포기하고 본능에 따라 움직인다는 뜻이다.

è 이것은 지성을 비판한다기 보다 삶보다 지성이 우선하는 모순을 극복하라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삶이 우선하고 이 삶을 해석하는 것이 지성의 몫이지 지성에 삶을 맞추는 것은 모순이다. 우리는 삶의 자유의지를 어린애처럼 획득해야 한다.

 

543 그대들이 일찍이 한 순간이 다시 오기를 언했다면, 그대들이 일찍이 그대는 나의 마음에 든다, 행복이여! 찰나여! 순간이여!”라고 말한 적이 있다면, 그대들은 모든 것이 되돌아오기를 바랐던 것이다!

è 괴테의 파우스트의 마지막 말을 떠오르게 한다.

그대들 영원한 자들이여, 이러한 세계를 영원히 언제까지나 사랑하라. 그리도 그대들은 고통에게도 말하라. “가버려라, 그러나 되돌아오라!”라고. 모든 쾌락은 영원을 원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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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를 읽느라 너무 힘들었습니다.ㅠㅠ

 

사실은 너무 지겨워서..... 미추어 버릴 것 같았습니다. 남는 시간에 항상 니체를 잡고 있었던 것은 맞는데 읽히지가 않았어용. 헝... 제 게으름과 나태함에 대한 질책 달게 받겠습니다. 이번 주 칼럼은 오늘 자정까지 올리겠습니다. 급히 출근해야 해서. 죄송합니다.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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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19 02:28:19 *.137.98.177

내가 저자라면...

 

<차라투스트라...>에도 스토리 라인은 있다. 그는 산에서 내려와 헤매고 "영원회귀사상"을 깨닫는다. 그 중간 단계의 스토리는 그야말로 카오스다. 마치, 차핑을 한 도미 요리의 앞과 뒤에 장식으로 도미의 머리와 꼬리만 붙여서 내놓은 것 같다. 내용만을 보자면 그의 모닝 페이지를 보는 것 같다. 거의 미쳤다고 생각될 정도의 광인의 모닝 페이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나가기 위해서는 대단한 인내력이 필요하다. 가령, 연구원 숙제로 꼭 읽어야 한다든지...

 

나는 니체가 말한 "거머리에 물린 사람"이다. 즉, 근거주의에 충실한 학자다. 나는 니체를 파악하기 위해 이 책에 흩어진 사상의 파편들, 즉 근거들을 주워모은다. 모으면서 생각한다. "이거 정말 비효율적인 일이로군!" 가령, 기독교를 비판하는 내용을 한 챕터로 모으고, 영원회귀사상에 관한 부분을 따로 모으고, 이리저리 이리저리 묘안을 짜서 구성을 완벽하게 할 순 없었을까? 목차를 1. 그리고 1.1. 그리고 1.1.1. 이렇게 나가도록? 나와 같은 생각을 다른 누군가도 분명히 했을 것이고 (책에서 몇 명 언급되는 것 같다. 가령 하이데거라든지... 그들은 니체를 정리했다는 것만으로도 명성을 얻는 듯하다) 그것은 원작자의 의무는 아닌 모양이다. 니체는 뇌를 쏟아냈고 그걸 주워담는 것은 이삭줍는 자들의 몫이다.

 

니체는 누군가를 생각나게 한다. 한 때 니체는 나의 반대극을 상징했었다. 나는 인문학의 정수이자 허세의 표상인 이 책을 "읽어서는 안 되었다!" 그것이 내가 겸손하며 철저한 이공계라는 자부심의 근거였다. 이런 책을 읽을 시간 따위는 없어야 했다. 그것은 시간 낭비이므로. 정말 이렇게 생각했다.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니체를 제대로 파악한 자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니체는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했어" 라고 누구라도 단답형으로 말할 수 있었다면 나는 니체를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니체가 무엇인지 말하지 못한 채 그냥 니체를 병적으로 좋아하였다. 거기서 추론되는 생각은, "파악하려면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것 같고 거기에 시간을 쏟는 것은 인생 낭비"라는 것이다. 심지어 니체는 "니힐리즘"이라는 연관검색과 묶여 니체 자신이 니힐리즘의 총수라는 이미지를 주었다.

 

선생들은 "삶의 해답"이 인문학에 있다고 하였으나 "니체"에 있다고는 하지 않았다. 니체를 읽어라 - 라고 왜 사람들은 말해주지 않았을까? 그리고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니체를 읽지 않을 것이다. 니체의 초인은 완전히 지상으로 내려오진 않았다. 그는 그저 산기슭 어드메에 있다. 그가 예수가 될 수 없었던 이유는 십자가에 매달리는 초극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버리는 것. 그것은 사랑의 핵심인데, 사람의 의지는 감정에서 촉발되므로 예수를 사랑한 자들은 기독교를 "진화"시켰다. 그러나 니체는 자신을 알아봐주지 못하는 군중을 경멸하였고 그는 경멸당하는 자들로부터 그리 긍정적인 감정의 피드백을 도출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로지 자신이 니체와 같은 천재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자들만이 니체를 사랑하였다. 그리고 기꺼이 니체의 12제자가 되었지만 그들도 스승을 닮아 니체를 타인에게 설명할 의무는 느끼지 못했다. 결론은 이것이다. 작가는 독자를 철저히 사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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