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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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25일 08시 24분 등록

나의 이야기(변경연 칼럼모음)

-. 한젤리타 지음

-. 구본형변화경영연구소, 2012년~2013년

 

 

저자에 대하여

 

저자는 폐수처리장에서 일했다. 미생물을 키워 똥을 깨끗한 물로 정화시키는 일이다. 똥을 푸다가 똥물을 뒤집어 쓰기도 하고, 똥차를 타고 세상을 누비고 다녔다. 똥 속 보이지 않는 세계를 들여다 보면서 고대 그리스 신화의 비밀을 발견하기도 했다. 현재 저자는 식품을 만드는 회사에 근무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위생적인 식품을 만드는지 연구한다. ‘똥쟁이와는 정반대의 삶이다. 좋은 음식을 먹어야 똥이 굵어지듯이 책을 읽으면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가고 있다.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나는 이번 탐구를 통해서나라는 존재는 결코 혼자일 수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나 혼자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단절한 채 살아갈 수 없다는 의미이다. 누군가를 만나고 함께 생각하고 말하는 현재의 순간들이 나를 주도해가고 있다. 그리고 지나온 과거의 사실들은 현재 생각들과 만나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주었다. <나에게 역사란 무엇인가> 

 

큰 아들에게나의 이야기을 제본해서 건네 주었다. 한달 동안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 있을 때 어깨 너머로 계속 쳐다본 아들이었다. 아마도 무슨 글을 쓰고 있는지 무척 궁금해 했을 것이다. 아들은 나를 한 번 쳐다보더니 씩 웃고는 앉아서 읽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똑같은 핏줄의 부모 자식관계보다 더 끈끈하게 나의 과거와 연결되는 순간이었다. 어릴 적 나의 영웅이셨던 아버지를 통해 다가오는 미래를 생각했던 것처럼 아들은 나를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아들은 나의 역사를 통해서 살아가는 지혜를 배울 것이고 어려운 순간이 왔을 때는 용기를 가지고 도전해 나갈 것이다. <나에게 역사란 무엇인가>

 

내가 써낸 과제는 지나간 과거였지만 새로운 기회를 통해서 재발견되고멋진 여행이라는 미래를 만들어 냈다. 앞으로도 나는나의 역사을 순환시켜 나가고 싶다. 역사의 순환이 정체되지 않고 끊임 없이 움직일 수 있도록 현재의 순간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나에게 역사란 무엇인가>  

 

또다시 사람 만나는 게 싫어졌습니다. 심지어는 회사까지 그만 두고 싶었습니다. 그런 힘든 순간에 아내는 똥쟁이 시절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데일 케네디의 <인간관계론>를 보면서미소를 지어라라는 글귀가 가슴 속 깊이 와 닿았습니다. 그 미소는나는 당신은 좋아해요, 당신은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줍니다.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라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이후부터 고객을 만날 때면 활짝 웃으면서 인사를 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5년간 고객 만나는 일을 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모든 고객은 고객이기 이전에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먼저 마음의 문을 열고 다가가면 그들도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하지만 생각했던 대로 잘 풀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나를 표현해야 하는 순간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저를 한없이 낮추고 칭찬과 격려로 그들의 이야기에 활력을 불어 넣습니다. 심각한 순간에는 슬픈 생각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이렇게 수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심리를 배우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심리학 책을 보고 성격과 유형을 상황 별로 분석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름 대로 재미있게 정리해서 사내 교육자료로 만들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출판사에서 전화가 왔다. “작가님, 홍대 앞에서 독자 싸인회를 열 계획인데, 꼭 참석해 주세요지금까지 위대한 작가들의 싸인을 받기만 했었는데, 믿기지가 않았다. 과연 나의 꿈이 이루어진 것인가? 아니야, 사람들이 얼마 오지 않을 거야. 약속시간이 다가올수록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싸인회가 있는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일찍 도착해서 근처 커피숍에 들어갔다. 2층 창가에 앉았다. 앞으로 두 시간 뒤에 눈 앞에 보이는 싸인회 자리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누구인가?>

 

아직까지 실감이 가질 않았다. 순간, 힘들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변화경영연구소에서 첫 책을 냈을 때의 모습, 몇 년 뒤에 회사를 그만두고 방황하던 모습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똥쟁이 양반, 축하하네”, 스승님의 얼굴이었다. 환하게 웃는 모습이 나를 더욱 가슴 벅차게 만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를 꼭 안아주셨다. <나는 누구인가?>

 

고등학교 3학년, 저녁 자율학습 시간이었다. 담임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손에 조그만 책한 권을 들고 있었다. 선생님은 교탁에 서서, 복도 창가에 있는 학생에게 교실 불을 끄라고 손짓했다. 불이 꺼지자, 두 눈을 감으라고 말했다. 우리는 무슨 영문인지 모른 채 눈을 감았다. 정적이 흐르고 선생님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나직한 목소리로 시를 읊으셨다. 사무엘 울만의 <청춘>이었다. <나에게 시란 무엇인가?>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기간이 아니라 그 마음가짐 이라네라고 시작하는 시는 한 구절 한 구절마음에 와 닿았다. 눈을 감고 들었을 때, 행이 끝나고 난 뒤의 침묵은 시의 깊이를 더해 주었다. 공부에 찌들어 있던 감성들이 깨어났다. “영감의 안테나를 더 높이 세우고 희망의 전파를 끊임없이 잡는 한, 여든의 노인도 늘 푸른 청춘이네마지막 행에서는 전율까지 느껴졌다. <나에게 시란 무엇인가?>

 

작년 여름, 나는 시 창작 수업을 수강했다. 2010년 단편소설을 쓰면서 지적 받았던 묘사 부분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내 작품을 합평해준 소설가는묘사가 없는 소설은 재미없으며, 소설을 썼을 때 하나의 시로 녹여 낼 수 있다면 가장 좋은 소설이라고 말했다. 그 때도 지금처럼 문학에 대한 기본바탕은 없는 상태였다. 단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글로 써내고 있는 수준이었다. <나에게 시란 무엇인가?>

 

당신의 글에는 감정이나 감동이 없다. 시의 깊이가 없다. 깨달음이 없다, 당신의 글을 단지 이미지만을 나열하고 있다.” 쏟아지는 비평들을 받아 적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시의 깊이는 무엇인가?’, ‘깨달음이 왜 필요하지?’ 생각해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나에게 시란 무엇인가?>

 

감정을 너무 드러냈군요, 겉멋만 부린 것 같아요, 너무 다 보여주는 느낌입니다, 당신의 글은 과거의 추억회상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합니다.” 계속해서 나를 절벽으로 몰고 가는 기분이었다. 나름 상황 설정을 하고 몰입해서 열심히 써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생각이 꽉 막혀버린 것 같았다. 수업이 끝나고 시인 선생님을 찾아갔다. 도대체 나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단지좋은 시를 많이 읽어봐야지만 깨달을 수 있다고 대답했다. <나에게 시란 무엇인가?>

 

다시 눈을 감아라. 먼저 네가 들어가야 할 대문부터 찾아라마지막 문구를 읽고, 나는 두 눈을 감았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이 시를 읽어주던 시간으로 되돌아갔다. 나는 시를 음미하고, 선생님은 나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에 담겨진 선생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눈을 떴을 때 산이 보였다. 감동의 여운이 메아리 되어 내게로 왔다. <나에게 시란 무엇인가?>

  

책 속의 시인들은 소리 없이 다가와 내 옆에 앉았다. 함께 보자며 눈 앞에 사물과 풍경들을 펼쳐서 보여주었다. 시간은 숨을 멈추고 나를 무아지경으로 안내했다. 어느덧 자연과 하나되어 내 자신을 끌어안고 있었다. 이렇게 한시는 깨달음의 미학이었다. <나에게 시란 무엇인가?>

 

혹시 연필 있나요?” 말하자 승무원은볼펜은 있는데, 연필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가지고 있던 샤프펜슬을 할머니에게 건네주었다. 할머니는 무슨 보물이라도 찾는 것처럼 기뻐했다. 옆에 앉아계신 할아버지도 연신 고맙다며 인사했다. 나는한시미학산책을 잠시 덮어 두고, 할머니가 글 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나에게 시란 무엇인가?>

 

할머니는 책을 보다가 창 밖을 응시하고는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그 느낌을 노트에 옮겨 담으셨다. 할아버지는 커피와 음식을 챙겨주고 있었다. 오랫동안 익숙해진 모습이었다. 할머니가 쓰고 있는 것은 분명, 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미래의 나를 그려보았다. 서울역까지 그 아름다운 모습을 내 기억 속에 각인시켰다. 기차가 도착하자 할머니는 펜을 건네주었다. “고맙습니다, 인상이 참 좋으시네요~^^”라는 메모와 함께였다. “작가 분이세요?”라고 묻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웃음으로 대신했다.

이번 과제의 초안은 이 펜으로 작성했다. 어느 노 작가의 영감을 느끼면서, 혹시나 그 영감이 시마詩魔가 되어 나에게 들어오지 않을까? 기대해보면서 말이다. <나에게 시란 무엇인가?>

 

폐수처리장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다. 인간 욕망의 찌꺼기들, 먹고 마시면서 배설되는 모든 것이 모여드는 곳이다. 조셉 캠벨은이 시간의 장에 있는 모든 것은 이원적이다. 대극이 있는 곳이다. 과거와 미래가 그러하고, 삶과 죽음, 존재와 부재가 그러하다.’라고 말했다. 그 곳은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대극이다 그리고 극대와 극미의 세계이다. 이러한 이원화된 현실을 연결해주는 것이현미경이다. ‘현미경이라는 원형의 렌즈를 통해 그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인류가 탄생하기 전부터 존재해 온 미생물이다. <신화는 살아있다.>

 

현미경 렌즈 뒤에 눈을 대고 나는 내려다 본다. 한 손으로 초점을 맞춘다. 희미한 움직임이 보이면서 조금씩 선명해 진다. 마치 신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신 또한 광활한 우주 너머에서 나를 보고 있지 않을까? 문득, 내가 살고 있는 태양계가 작게 느껴진다. 둥근 모양의 렌즈를 통해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 본다. 그 순간, 나는 태어나기 이전, 의식이 존재하기 이전의 세계로 되돌아가 원형 속의 나를 발견한다. <신화는 살아있다.>

 

현미경 렌즈는 불빛을 하나로 모으고 유리판 위의 미생물들을 투명하게 비쳐준다. 강한 빛으로 그들의 내부까지 훤히 들여다 보인다. 이 모습은 게르만 신화에 나오는 광대의 이미지와 닮았다. “봐라, 나는 궁극적인 이미지가 아니다, 나는 투명해서 속이 들여다보인다. 나를 통해서 보라. 나의 이 우스꽝스러운 형상을 통해서 보라!” <신화는 살아있다.>

 

투명하게 비친 미생물의 형상도 마찬가지다. 그들을 보고 있으면 이면에 숨어 있는 다른 존재가 느껴진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려는 나의 생각을 뒤집는다. 나는 보이지 않던 세계에서 신의 존재를 본다. 그들의 움직임은 원시적인 아름다움이다. 유기물과 세균들을 순식간에 집어 삼켜버리는 모습은 장엄하기까지 하다. 무의식 속에 무언가 꿈틀대면서 올라온다. 나는 그들의 몸통에 올라타서 함께 움직인다. 그들과 나는 하나가 되어 춤을 춘다. <신화는 살아있다.>

 

똥 덩어리 속에는 수 많은 미생물이 존재한다. 그들이 폐수처리장에 들어오면 새로운 생명들을 만들어 낸다. 반응조(유기물을 미생물로 분해하는 곳)에 산소가 공급되면서 잠자고 있던 미생들이 깨어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Aeolosoma같은 거대한 몸집의 미생물들이 활동한다. 신화 속 혼돈 시기에 태어난왕뱀 퓌톤처럼 주변의 생명들을 순식간에 먹어 치운다. 삼킨 유기물과 세균들이 분해되는 모습이 보인다. 다음에는 왕뱀보다 몸집이 작은 Macrobiotus 가 나타난다. Macrobiotus 은 수십 개의 알을 품고 다닌다. 죽으면 새끼들은 어미의 몸을 먹고 자란다. <신화는 살아있다.>

 

마지막으로 먹이와 미생물이 평형이 이루어진 시기에 Aspidisca가 나타난다. 폐수처리가 정점에 다다른 순간이다. 그의 존재는 곧 깨끗한 물을 볼 수 있는 신호이며, 상징이다. 그 동안 온갖 욕망의 영혼들과 싸워서 이긴 승리의 순간이기도 하다. 그는 승리의 여신니케의 날개를 가졌다. 그래서 그는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자유롭게 유영하며 먹이를 찾아 다닌다. 그는 혼돈과 고난의 시간을 이겨낸 영웅의 모습이다. 나는 항상 그의 모습을 기다린다. 그에게 의식이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내가 혹여 아프거나 다른 곳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존재는 나의 광휘이고 에피파니였다. <신화는 살아있다.>

 

 현미경 유리판 위의 미생물은 뜨거운 빛으로 서서히 수분이 빠져나간다. 그리고 어느 순간, 터져버리고 증발해 버린다. 이렇게 미생물의 삶은 순간의 연속들이다. 아마도 그들은 이 세상이 탄생할 때부터 시간의 단편들로 이루어졌으리라. 나는 단지 원초적인 존재들의 광대무변한 힘을 체험할 뿐이다. 그것은살아 있음의 환희이고 아름다움이다. <신화는 살아있다.>

 

그들은 비록 필멸의 운명이지만 모든 것을 담아내고 있다. 혼돈 속의 탄생, 존재의 몸부림, 고난을 이겨낸 영웅의 모습이다. 그들은 매 순간 신화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우리에게 신화가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화는 살아있다.>

 

나는 현장 사무실로 돌아갔다. 소장은 한 손에는 전화기를 붙잡고 다른 손에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눈이 따가웠다. 이 곳에 온지 일주일 남짓, 나는 아직도 적응하지 못한 채 모든 것이 낯설었다. 담배연기를 보면서 나도 함께 창 틈으로 스며 나가고 싶었다. <탐욕의 신화>

 

 산은 낮 동안, 인간에게 고통 받은 것에 대해 침묵하고 있었다. 숲의 신 ‘사티스’가 모든 소리를 삼키고 있었다. 현장에 도착하자 소장의 차가 보였다. 그 쪽으로 걸어가면서 자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가까이 갔을 때는 그의 코 고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탐욕의 신화>

 

나는 현장 사무실에 가서, CCTV를 켰다. 4시간 전의 녹화화면을 뒤로 돌렸다. 마치 시간을 주관하는 크로노스(Chronos)신이 된 것 같았다. 빠른 배속으로 그의 모습을 찾았다. 현재의 시간으로 다가올수록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미 몸은 땀으로 흥건해 있었다. <신화는 살아있다.>

 

밧줄을 통해 누군가 올라오고 있었다.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얼굴을 가까이에서 보았을 때 등줄기부터 소름이 돋고 머리털이 서 버렸다. 현장 소장이었다. 목 주변에 하얀 뱀 껍질이 보였다. 허물을 벗는 모양이다. 한쪽 눈은 뱀에게 물렸는지 이빨자국이 선명했다. 다른 한쪽도 감겨있었다. 마치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 사람처럼 말이다. 탐욕의 눈이 모두 감겼다. 누가 변신한 것일까? 아니면 둔갑한 것일까? <신화는 살아있다.>

두 번 숨을 들이쉬고 두 번 내쉰다. 발이 땅과 맞닿을 때마다 호흡은 리듬이 된다. 새벽 공기는 머리카락을 스치고 흘러내리는 땀방울과 부딪쳐 내 몸 깊은 곳으로 스며든다. 지금은 매일 아침 글을 쓰고 있지만, 12년 전만해도 새벽을 깨우며 뛰어 다녔다. 그리고 결혼을 한달 앞두고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었다. 42.192km였다. 그 때는 결혼 전에 다시 출발선에 서고 싶은 생각이었다. 나 홀로 이겨내야 하는 도전이었다. 준비서부터 참가까지 혼자였다. 아내와 장모님의 반대가 심했지만, 완주하고 나면 결혼 생활을 정말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끝내 설득은 했지만, 마음은 무거웠다. <내 인생은 아름다운 축제이구나>

 나의 오른발을 죽 펴게 하고는 발바닥을 자신의 가슴에 대고 경련이 심한 다리를 누르고 펴주었다. 계속된 스트레칭으로 한결 나아졌다. 나는 다시 일어섰다. 하지만 페이스를 잃어버린 할아버지에게는 너무 미안한 마음이었다. 그 동안 나는 혼자서 생각하고 달려왔었는데, 할아버지 앞에서 한 없이 부끄러웠다. 계속되는 감사의 인사를 드리자, 할아버지는 나의 어깨를 쳐주면서 말했다. “젊은 양반, 죽자 살자 뛰면 정말 죽는 수가 있어, 즐기면서 뛰게나” <내 인생은 아름다운 축제이구나>

우리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할아버지와 호흡을 맞추면서 알게 되었다. 인생은 혼자서 외롭게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달리면서 옆을 바라보는 여유와 무엇보다도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깨닫게 되었다. 30km 지점에서 할아버지는 조금씩 힘들어하는 기색이 보였다. 할아버지는 숨이 차다면서 더 이상 힘들겠다는 손짓을 보였다. 그리고는 달리기를 멈추셨다.  “나는 이제 그만 뛰어야겠네, 자네는 끝까지 완주하게, 내 몫까지 말이야” 가쁜 숨을 몰아 쉬면서 말했다. <내 인생은 아름다운 축제이구나>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이 사람들과 함께 말이다’ 그 동안 아무 소리 없이 뛰던 나는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박수 소리는 점점 커졌다. 그리고는 소리쳤다. ‘힘내세요, 조금만 가면 됩니다.’ 목소리도 우렁찼다. 나도 나 자신한테 놀랐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누군가를 격려하면서 박수치고 소리치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줄 몰랐다. 그 마음이 사람들에게도 전달되었을까?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박수를 쳤다. 거리에 나온 사람들도 박수로 응원을 보내주었다. 조금 전에 고통스러운 표정들이 하나 둘씩 웃음으로 바뀌었다. 나에게 일어난 조그만 파장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전달될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이 되었다. <내 인생은 아름다운 축제이구나>

 38km 지점에 이르자, 체력이 점점 소진되더니 또다시 발이 무거워졌다. 영양분과 수분이 몸에서 증발해 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눈 앞에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인공 비였지만, 하늘에서 내리는 비처럼 힘이 느껴졌다. 비를 맞으면서 물방울이 그대로 내 몸 속에 흡수되는 기분이었다. 머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빗방울이 나를 꼭 감싸주고 있었다. 그리고 무거운 발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나는 마음껏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머리를 뒤로 젖히고 입을 벌리고는 빗방울을 느꼈다. 생명수였다.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천국이 따로 없었다. <내 인생은 아름다운 축제이구나>

 나는 무사히 40km지점을 통과하고 결승점에 도착했다. 이 대회의 완주는 나 혼자 이뤄낸 것이 아니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뛴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를 새롭게 태어나게 해준 빗방울이었다. <내 인생은 아름다운 축제이구나>

 지금도 나는 그 때의 완주 메달을 내 책상 앞에 걸어두고 바라 본다. 내 삶의 의미 있는 상징으로 자리잡고 있다. ‘천의 얼굴의 가진 영웅’에서 영웅의 출발, 입문, 귀환이라는 순환을 보면서, 나는 이 대회를 떠올렸다. 처음에는 결혼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출발로 생각했었지만, 결국 나를 새롭게 태어나게 한 여정이었다. 그리고 나 혼자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돌아보고 기꺼이 나를 내어줄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진정한 영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영웅은 집으로 귀환하면서 말했다. “내 인생은 아름다운 축제이구나”라고 말이다. <내 인생은 아름다운 축제이구나>

집을 나서기 전에 읽었던 이아손의 모습이 떠올랐다. 켄타우로스 케이론으로부터 오랜 세월 동안 무술을 연마한 이아손, 그는 아르곤 원정대의 대장이 되어 황금 양털을 손에 넣게 되었다. 아마도 수 많은 고난과 시련을 이겨낸 신의 축복이었을 것이다. 시합이 끝났다. 두 아이 모두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주심이 상대편 아이의 손을 번쩍 들었다처음으로 고개 숙인 아들의 모습을 보았다. 가까이 다가가 헬멧을 벗겨주었다. 얼굴과 귀가 벌겋게 달아 올랐다. “괜찮아”, “응, 다음에 이기면 되지 뭐” 애써 속상한 마음을 감추려고, 아들은 고개를 돌렸다. <차라리, 내가 터지고 찢어질 것을>

 

한참 아킬레오스를 상상하며 글을 써내려 가던 중이었다.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아내와 둘째 아들이 소리를 지르면서 들어왔다. “여보! 준상이가 다쳤어, 귀 좀 봐봐., 속이 타 들어가는 아내를 뒤로 하고 아들을 보았다. 얼굴이 흘러내린 눈물로 범벅이고, 귀에서 흘러내린 피로 옷은 피범벅이었다. 좌측 귀 윗부분이 심하게 찢어졌다. 바로 근처 대학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비상 깜박이를 켜고 정신 없이 차를 몰았다. 벌써 세 번째 찢어져서 응급실행이다. 처음에는 입술이 찢어지고, 두 번째는 눈이 찢어지더니, 이제는 귀가 찢어진 것이다. 그렇게 조심하라고 잔소리해도 소용 없었다. 크는 것이 어찌 부모 마음대로 되려나, 나도 그러했으니 말이다. <차라리, 내가 터지고 찢어질 것을>

 

잘 참아냈다. 씩씩했다. 아들이 대견스러웠다. 어른도 참아내기 힘들었을 텐데, 눈물이 뜨거워졌다. 얼마 전까지 해도 초등학교 입학해서 학교 다니기 싫다고 투정 부릴 때가 바로 한달 전이었는데, 다 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화의 힘’에서 나오는 원시부족 사회에서 ‘할레’ 의식을 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러한 의식을 하고 나서, 성인이 되는 상징적 의식이었다. 지금 아들의 모습도 그러했다. 아비와 어미가 꼭 붙잡고, 아들이 한 단계 성장하는 모습을 함께 지켜보았다. 그는 이제 우리 가족 모두의 영웅이었다그날, 미래의 영웅들을 위해 멋진 만찬을 베풀었다. <차라리, 내가 터지고 찢어질 것을>

 

그 이후 출장부터는 사람들이 가지 말라고 하는 곳은 절대 가지 않는다. 주로 호텔 안에서 시간을 보내곤 한다. 그리고 출발 전에 그 나라에 대한 언어와 역사에 대해서 공부하는 습관이 생겼다. 여행지에서 서로를 알아보는 것은 얼굴만이 아니라, 언어를 통해서 상대방에 대한 호의를 가진다. 이번 터키여행에서도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배웠다. 특히 문화에 대해서 만큼은 신화를 공부해서 그런지, 전문가 수준이 된 것 같다. 아는 만큼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언어로 가벼운 인사말, 환한 미소로 그들에게 다가가고 싶다. <터키로 떠나면서>

 

과제 제출의 마지막 클릭을 하고, 서둘러서 집을 나섰다. 홀가분한 기분과 함께, 이제서야 여행하는 기분이 나기 시작했다. 버스 안에서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안부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도착한 인천공항, 출국 수속을 진행하는 직원들의 웃는 얼굴을 보면서 지갑 속에 여권을 찾아 보았다. 하지만, 내 차례가 될 때까지 여권을 찾지 못했다. "여권, 주시겠어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 생각났다. 어제 저녁, 여권을 복사하고, 정작 여권은 복사기에 놓아둔 것이다. 그리고, 지갑 안에는 필요도 없는 종이 쪼가리가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직원에게 순간 내뱉은 말은 "여권, 없으면 안되나요?" 였다. 말도 안 되는 질문인 걸 알면서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어이 없다는 직원의 표정을 보고서야, 현실을 직감했다. 내일 뜨는 비행기 좌석도 없었다. 또 다시 시작되었다. 뭐든지 처음 시작할 때, 꼬이는 불행 말이다. <지옥과 천국은 항상 우리 곁에 있다.>

 

퀵 아저씨에게 돈은 넉넉히 드린다고 말해 놓고, 기다렸다. 이미 출국 수속을 마친 동료들은 출국 비행장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시간 내에 오지 않으면, 그냥 너희들끼리 가라고 말해 놓았다. 나 혼자 공항에 남았다. 그리고, 혼자서 중얼거렸다. '너라는 인간은 도대체 왜 이러니? 그 동안 무엇을 잘못했길래, 또 이런 시련을 당하는 거니? 너의 운명에는 사고가 끊이지 않는구나"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앉아서, 단테 <신곡> '지옥편'을 펼쳤다. 책 속에서 무슨 죄를 지으면 이렇게 시련을 받는지 알고 싶었다.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았던 중립자들, 지체 높은 이단자들, 마음속으로 자연과 신의 혜택을 무시한 사람들' 나는 이 중에서 어디에 속하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문장이 있었다.

 "인간의 재주는 대체로 가능한 한 자연법칙에 따르고 있다, 마치 제자가 스승을 따르는 것과 같이." <지옥과 천국은 항상 우리 곁에 있다.>

 

무사히 터키행 비행기를 탈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결론을 내렸다. 이번 사건은 내 의지대로 살아온 결과가 아니라, '이번 여행을 잘 다녀오라는 액땜이구나, 그리고 출발 전에 신께 올린 재물이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9 10일 동안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하지만 '인천공항에서 퀵 부른 사나이'라는 오명은 지울 수 없었다. <지옥과 천국은 항상 우리 곁에 있다.>

 

"과장님, 팁 달라고 하는 것 같아요" 말이 끝나자 말자, 육감적인 댄서는 가슴을 내밀었다. 마치  그 속에 넣어달라는 의미인 것처럼 말이다. 얼굴이 화끈거려서 얼른 지갑을 찾았다. 지난번에 여권을 찾아 헤매던 지갑이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나를 곤경에 빠뜨렸다. 지폐는 보이지 않고 찰랑찰랑 소리만 났다.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동전은 정말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손에는 이미 동전이 들려있었다. 옆에 있던 동료가 깜짝 놀랬는지 다시 옆구리를 찌르면서 말했다.

 "미쳤어요, 과장님! 가슴에 동전을 넣게요. 무슨 자판기인줄 아세요!"

 "없는데, 어떻게 하니?" 이 와중에도 육감적인 댄서는 더 심하게 몸을 흔들었다. 보다 못한 동료 한 명이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서 젖가슴에 쿡 찔러 넣었다. 그제서야 그녀는 다른 테이블로 몸을 흔들면서 옮겨갔다. 어찌나 진땀을 뺐던지, 온 몸이 후끈거렸다. 하지만, 동료들의 시선은 차가웠다. 데카메론의 등장하는 푼수 주인공 '칼란드리노'가 된 것 같았다. 동료들은 아직도 내 손에 들여있던 동전을 바라보면서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왜냐하면 다른 테이블의 손님들도 동전을 챙긴 나의 모습을 보았는지 박장대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옥과 천국은 항상 우리 곁에 있다.>

 

파묵칼레를 뒤로하고 우리는 세계적 휴양도시인 안탈랴로 이동했다. '변신이야기'에서 읽었던 그리스 신화 속 신들과 로마 황제의 대리석 조각들이 전시되어 있는 안탈랴 고고학 박물관에 들렀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유적들의 모습은 보고 있으니깐 금방이라고 살아서 움직일 것 같았다. 그 중에서도 '춤추는 무희 상'은 바람에 나부끼는 치마 결까지 표현해서 섬세함과 정교함의 극치였다. 그리고, 마침 그 곳에는 유명한 '지친 헤라클레스 상'이 특별전시 되고 있어서 더욱 인상 깊었다. <지옥과 천국은 항상 우리 곁에 있다.>

 

조금 전까지 지쳐있던 동료들의 모습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얼굴에 금새 웃음꽃이 폈다. 그리고 저 반대편에서 여대생들이 우리를 발견하고는 뛰어오는 것이 아닌가? 거짓말 같은 내 이야기에 확인 도장을 찍어주려고 말이다. 남자 4명은 달려오는 그녀들의 모습을 보고 온갖 상상의 날개를 펼쳤다. 마치 디오니소스 축제가 그려진 석관의 요정들이 살아 움직여서 내게로 달려오는 것 같았다. <지옥과 천국은 항상 우리 곁에 있다.>

 

잠시 바위 틈에 핀 꽃들을 바라볼 수 있게 벌룬을 하늘에서 정지시켰을 때, 모두들 탄성을 질렀다. 다 함께 벌룬 드라이버에게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웠다. 그리고 다시 떠오르면서 다른 벌룬과 부딪칠 뻔한 아찔한 순간이 있었고, 그리고 이어지는 일출의 광경은 내 마음을 뻥 뚫리게 만들었다. 짙은 구름으로 태양이 떠오르는 광경은 볼 수 없었지만, 구름 틈으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을 우리들은 두 팔 벌려 온 몸으로 스며들게 했다. 점점 햇살이 쏟아지는 중심에 이르렀을 때, 천국에 도착한 기분이었다. <하루를 살아도 그날처럼>

 

문득 맞은편에 있던 노부부의 모습이 구름 위로 얼굴을 내민 태양과 함께 내 눈에 들어왔다. 어깨를 감싼 남자의 손등 위로 그녀는 자신의 손을 포개어 얹고, 다른 손은 태양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모습은 천국으로 가는 아내를 배웅 나온 남편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화답이라도 하듯 천사들이 짙은 구름을 걷어내고 아름다운 천국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남편은 아내의 어깨를 꼭 감싸 안으며,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그 순간만큼은 자연이 만들어 낸 멋진 풍광보다도 가슴 뭉클한 장면이었다. <하루를 살아도 그날처럼>

 

 그날 하루를 돌이켜 보았을 때, 평상시 내가 가졌던 그런 하루가 아니었다. 차원이 다른 하루였다. 내 삶에서 이렇게 신나게 놀아본 적이 있었는가? 그것도 하늘 위에서 태양을 마주 보고, 천국의 기쁨을 누린 적은 없었다. 그리고 땅 속 깊이 내려가 지하세계를 탐험하고 강이 흐르는 계곡을 트래킹하면서 자연과 하나가 되었다. 부부의 소중한 의미를 다시 알게 되고, 여러 나라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좋은 영감들을 얻었다. 아마도 이렇게 많은 깨달음과 인연이 하루 동안 쏟아진 적은 없었다. 그리고 가슴 뭉클하고, 가슴 뛴 하루가 동시에 느껴진 것도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 하루를 내 인생에서 의미 있는 하루로 기억하고 싶다. <하루를 살아도 그날처럼>

 

 이번 터키 여행은 우연하게 나를 찾아왔다. 어느 날 우연히 서울 강남 뒷골목에서 길을 잃어버렸고 그 때, 눈에 들어온 것은 '이스탄불 문화원'이었다. 아마도 그 때부터 여행이 시작된 것 같다. 주저하지 않고 문을 두드렸고, 그 곳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그래서 더욱 의미가 있다. 앞으로 이번 여행의 경험들을 글로 옮겨서 책과 여행이라는 주제로 터키를 배경으로 한 여행이야기를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터키여행이 우리 삶에 어떻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가져다 주는지 그들에게 말하고 싶다. 그렇게 해서 그들과 다음 인연으로 새롭게 이어나가고 싶다. <하루를 살아도 그날처럼>

 

그 이후 출장부터는 사람들이 가지 말라고 하는 곳은 절대 가지 않는다. 주로 호텔 안에서 시간을 보내곤 한다. 그리고 출발 전에 그 나라에 대한 언어와 역사에 대해서 공부하는 습관이 생겼다. 여행지에서 서로를 알아보는 것은 얼굴만이 아니라, 언어를 통해서 상대방에 대한 호의를 가진다. 이번 터키여행에서도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배웠다. 특히 문화에 대해서 만큼은 신화를 공부해서 그런지, 전문가 수준이 된 것 같다. 아는 만큼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언어로 가벼운 인사말, 환한 미소로 그들에게 다가가고 싶다. <터키로 떠나면서>

 

스승님이 던지신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도전하는 해외문화체험 프로그램에 똑같이 적용해보았다. 팀원들의 반응이 좋았다. ‘나의 이야기를 적으면서 동시에, '회사 생활에서 잃어버렸던 나를 찾는 여행'이라는 주제로 준비했다. 이번에는 신화가 살아 숨쉬는 도시 '터키'였다. ‘터키에 대해, 헤도로토스의 '역사'를 읽으면서 더 깊이 알게 되었고, 발표 내용도 설득력 있고, 짜임새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번의 실패 경험도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게 만들었다. 우리 팀원과 이어서 가족들 앞에서 발표연습을 마친 나는 승리를 예감했다. 결국, 뽑히게 되었고, 회사 사람들의 축하를 받았다. 그리고 더 큰 축복은 변경연의 합격소식이었다. <‘나의 신화' - 아르고 원정대의 모험>

 

이아손이 아르고호를 만들고 아르고원정대와 함께 지금 막 배에 승선하는 기분과 똑같다. 지금까지 책을 통해서 읽고 생각했던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영화 스타워즈의 배경이 된 '카타도피아'을 시작으로 수 많은 로마시대 역사유물이 있는 에페소스 지역을 둘러보고, 트로이 전쟁의 배경이 된 도시를 거쳐, 이스탐불로 가는 여정이다. 이것은 스승님이 상반기에 계획하신 'Part 1 Take - Off 삶이 떠오르다' 일정과 닮았다. 아마도 지금까지 읽었던 책이 아니었다면 그 곳에서 마주하는 신들의 모습, 유적지와 어우러진 자연의 풍광은 하나의 돌덩이요, 일상의 하루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의 신화' - 아르고 원정대의 모험>

 

그 동안의 여정은 허황된 꿈을 찾아 떠났던 것이 아니라, 내가 몰랐던 존재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게 순간이었다.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안목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은 내 책의 주제가 어떻게 결정될지 망설여지지만, 앞서 말한 나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책 안으로 담고 싶다. ‘책과 여행이라는 주제로 책을 통해 새로운 변화를 상상하고, 여행으로 이어지는 작은 시작이 자신의 위대한 신화를 만들어 간다는 이야기이다. 아니면, ‘직장인들이 어떻게 자기 인생을 새롭게 찾아가는지’, ‘그 시작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나의 도전과 변화의 모습으로 보여주면 어떨까?그 모습은 단순히 나의 경험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그려가고 싶다. 다시 말하면, 순수한 자유에의 목마름을 채우는 개인의 모습보다는 가족과 함께 변화되어 가는 아버지 이야기를 표현하고 싶다는 의미이다. <‘나의 신화' - 아르고 원정대의 모험>

 

<파우스트>은 젊은 시절, 나의 어두웠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메피스토가 유혹하는 장면은 자석처럼 나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15년 전, 나는 건설회사에 취직을 했고, 곧바로 현장에 파견되었다. 시공 현장은 낯선 곳이었지만, 새로운 것을 경험한 곳이기도 했다. 나는 그 곳에 근무하면서 자주 유흥주점을 드나들었다. 주점은 접대를 위한 하나의 일터와도 같았다. 낮에는 현장 작업자들과 어울려 막걸리를 마시고 밤에는 갑의 관리자들과 향락의 밤을 보냈다. 빛과 그림자의 대극에서 나는 철저히 충동적이고 탐닉적인 인간이 되어 갔다. 파우스트가 메피스토에게 자신을 맡기고 쾌락에 빠져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악마에게 말하다.>

 

얼마 뒤에 그녀에게서 문자가 왔다. 그녀는 네모난 액정유리에 단어들을 꽉 채워서 보냈다. 나도 가끔씩 그녀처럼 답장을 보내곤 했다.3개월 동안 그녀와 메시지를 주고 받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졌다. 아니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현장에 혼자 있던 나에게 그녀의 문자 메세지는 나를 유혹하기에 충분했다. <악마에게 말하다.>

 

 더운 여름 날이었다. 폐수처리장 위에서 나는 미생물과 폐수가 처음 만나는 반응조 위에서 둥둥 떠오른 물체를 건져 올리고 있었다. 태양은 콘크리트 위를 뜨겁게 내리 쬐고 있었다. 둥근 창이 있는 모자를 써도 바닥에는 올라오는 열기는 막지 못했다. 푹푹 찌는 열기에 조금만 움직여도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깊은 반응조 위에 떠오른 물체들이 보였다. 똥과 뒤엉켜 있었지만 알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욕정을 온전히 받아낸 콘돔이었다. 나는 잠시 어제 그녀에게 온 문자를 떠올렸다. <악마에게 말하다.>

 

쾌락을 쫓게 만든 것은 그 누구도 아니었다. 내 안에 메피스토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뒤로 그녀에게 연락하지 못했다. 아니 연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파우스트가 만난 그레트헨 모습일까? 헬레나의 모습일까? 아니면 메피스토가 될 수 있었을까? <파우스트> '천상의 서곡'에서 주님이 메피스토에게 파우스트의 타락을 허락하면서 말했다. <악마에게 말하다.>

 

아이와 손을 잡고 건널목에 서 있다. 비온 뒤, 깨끗한 공기가 마음을 상쾌하게 했다. 거기에 신선한 바람까지 불었다. 어디 선가 여자의 향기가 바람에 실려왔다. 3시방향, 하얀 민소매 셔츠에 짧은 스커트 입은 여자가 걸어왔다. 그녀는 아이 옆에 멈춰섰다. 좋은 냄새였다. 몸이 그녀에게 약간 기울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향수를 기억하기 위해 천천히 숨을 들이 마셨다. 아이가 아빠의 달콤한 상상을 눈치라도 챈 것일까? 아이는 나의 손을 잡아 당겼다. 그리고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아빠, 이 아줌마 똥냄새나", 그녀의 눈과 마주친 나는 시선을 신호등으로 돌렸다. 빨간불이 녹색으로 바뀌었다. (냄새의 기억)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녀는 글을 쓰는 작가인 것 같았다. 이번 호메로스 작품에 대한 '앙드레 버나드'의 해석을 읽으면서 그녀 생각이 떠올랐다. 그녀는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서 이야기를 듣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경험한 이야기를 자신의 또 다른 감각을 이용해서 좀 더 리얼하게 세밀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순간, 나도 눈을 감아보았다. 컴컴한 어둠이지만, 시간이 흐르자 감각을 통해서 의식하는 모든 것이 느껴졌다. 손가락 끝에서 전해져 오는 컴퓨터 자판, 과거의 떠오르는 생각들이 자판을 통해서 타이핑 된다. 눈으로 보일 때보다 생각이 자유롭다. 두둥실 떠가는 구름 같다. 잠깐 동안 호메로스가 되어 <일리아스> '헥토르'를 떠올려본다. 헥토르가 죽음과 마주하는 순간이다. 마지막까지 가족을 생각하는 그의 음성이 들린다.

 "운명이 나를 삼킨다. 그러나 나는 싸우지 않고 그저 죽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다∙∙∙∙∙.

다음 세대들이 똑똑히 볼 수 있는 무언가를 마지막으로 나는 완성할 것이다. 싸우고 사랑하다

가 죽을 것이다." <눈을 감고 느껴보세요, 7/2>

 

눈물이 뜨거워진다. 그의 안타까운 운명 앞에 나도 모르게 뜨거워진다. 가족을 돌이켜보고 나의 삶에 '사랑'이란 단어를 빼곡히 채워보려 한다. 이렇게 호메로스는 단순한 표현이지만 핵심을 찌 르는 재능이 있다. 바라보는 대상이 누구이든 단 하나의 몸짓을 떠올리고, 본질을 드러내는 단어를 끄집어낸다. 마치 어둠 속에 빛의 근원을 발견하듯이 말이다.

 호메로스의 두 번째 서사시,인간이 이룬 것 가운데 위대한 업적에 대한 이야기, <오뒷세이아>를 만든다. 그는 영웅의 관한 전설을 여기저기서 수집해서 그 중심에 오뒷세우스를 가져다 놓는다. 오뒷세우스는 <일리아스>에도 나오지만, 거기서는 웅변가이자 장수이고, 훌륭한 외교관이다. 하지만 호메로스는 오뒷세우스를 로빈스 크루소와 같은 인물로 바꿔버린다. 그리하여 멀고 먼 바다를 떠돌면서 온갖 위험을 극복하여 결국, 집으로 귀환하는 영웅으로 만들어낸다. <눈을 감고 느껴보세요, 7/2>

 

호메로스는 장님이다, 아니다. 의견들이 분분하지만, 나는 그가 장님이라고 믿고 싶다. 그는 인간의 본성을 제대로 꿰뚫어보고 말 한마디의 표현으로도 한 인간을 살아 움직이게 하기 때문이다. 그는 <일리아스> <오디세이아>에서 다양한 인물들을 창조했으며, 인물 각각의 특성, 배역, 의미, 모습을 다르게 서술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호메로스는 어떤 탁월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듯하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사람들이 '호메로스는 장님'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해 본다. <눈을 감고 느껴보세요, 7/2>

 

우리가 일상에서 만들어 내는 이야기들도 누군가에게는 영웅의 이야기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자료를 수집하는 그녀의 모습이 꼭 호메로스를 닮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순간의 움직임까지 잡아내려는 그녀의 노력이 나를 깨워준다. 앞으로 글을 쓰면서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세계가 내 마음에 들어오게 해보자. 그리고 잠시 눈을 감고 호기심 가득한 이야기를 떠올리자.

 어둠 속에서 호메로스는 나에게 말한다. "너의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면, 너에게 살아있는 이야기를 선물로 주겠다" 그리고 눈을 뜨는 순간, 나는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적어내려 간다. <눈을 감고 느껴보세요, 7/2>

 

시인은 고단한 세계에서 나무와 풀밭, 푸른 바다에 대한 향수를 길어 올렸으며, 시골 생활에 대한 부러움을 전파했다. 그리고 청춘의 샘, 자연의 세계가 지니는 아름다움과 사랑의 천진함을 발견하며, 도시 사람들에게 낙원의 모습을 선물했다. <자연과 하나가 된 시인 테오크리토스’>

 

해인사 입구를 지나 산 속으로 펼쳐진 고목들을 보면서 테오크리토스를 떠올렸다. 하지만, 차 안에서 떠오른 생각이라 금새 사라지고 말았다. 창 밖으로 지나간 풍경들을 다시 붙잡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는 녹음을 했다. 마이크 달린 이어폰을 핸드폰에 연결한 다음, 녹음 버튼을 눌렀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주절주절 말하다 보니 잡생각들이 여기 저기서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유난히 빛나는 아이디어 하나를 건져냈다. 보석을 얻은 사람처럼 신이 났다. 운전대를 두들기며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이번 주 칼럼 주제는 바로 이거야!" <자연과 하나가 된 시인 테오크리토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산 속으로 걸어 올라갔다. 테오크리토스가 시칠리아 섬을 거닐면서 자연을 마음 속에 담아냈듯이 직접 자연을 느끼고 싶었다. 비가 쏟아졌다. 고개를 들고 빗방울을 맛보았다. 맛있었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렸다.해묵은 생각들이 빗물에 씻겨 내려가길 기도했다. 산 중턱에 자리잡은 숙소는 오래된 산장이었다. 기와지붕에 미닫이 문으로 양쪽 문을 열자 해인사 산 자락이 내 방 안으로 고스란히 들어왔다. 주인장에게 책상 하나 빌려서 <그리스 이야기3>를 펼쳤다. <자연과 하나가 된 시인 테오크리토스’>

 

 해인사에서 그리스 사람의 이야기를 읽는 느낌이 조금 이상해서일까? 잘 들어오지 않았다. 책을 덮고, 비 내리는 해인사 풍경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웠다. 고대 그리스 시인들은 자연을 보면서 그 순간의 느낌을 어떻게 글로 표현했을까?아마도 복잡한 생각이 많지 않아서 모든 감각 속에 저장할 수 있는 공간이 많았으리라, 그래서 눈은 사진기가 되고, 귀는 녹음기가 되어 자연을 넉넉히 기록했을 것이다. <자연과 하나가 된 시인 테오크리토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말했다. “혼자 있을 때면 너는 완전히 너 자신의 주인이 된다.” 그것은 자신의 정렬을 하나의 작품에 몰입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무언가에 빠져들면 자신을 잊고 대상과 하나가 되어, 그들의 정확한 마음을 표현해낸다. 이렇게 르네상스의 거장들은 인간과 자연을 보면서 젊음과 신선함을 읽을 수 있었다. 넓고 섬세한 시각으로 대상을 묘사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위대한 작품을 하나씩 완성해 갔다. <한번에 하나씩>

 

 개미가 책 위로 올라왔다. 이리 저리 활자 사이를 지나다닌다.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일까?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을 알고 있을까? 지금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부지런히 무언가를 찾고 있다. 익숙해 있던 나만의 세계를 떠나, 새로운 삶의 모습을 열심히 읽어내고 있다. 가끔씩 책 귀퉁이에 거장들의 삶의 비밀을 발견하곤 한다. 혹시 개미가 나의 문장을 찾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나의 일과 가족에게 균형을 맞추는 방법을 터득해 간다. 그것은 한 번에 하나씩 나의 열정을 쏟아 부는 것이다. 저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폭포수처럼 나의 열정은 변경연과 나의 가족에게 쏟아진다. 그리하여 굽이치는 저 강물 속으로 힘차게 빠져 들어간다. <한번에 하나씩>

 

에트나 산을 내려와 시라쿠사를 향했다. 휴게소에 들렀다. 주유소와 붙어있는 휴게소에는 간단한 음식과 기념품을 주로 팔고 있었다. 화장실을 다녀와서 휴게소를 나오려는 순간, 누군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뒤를 돌아보았을 때, 얼굴이 검게 그을리고 체격이 다부진 남자가 이태리 말로 소리쳤다. 지나오면서 내가 무슨 실수라도 했는지 움찔했다. 하지만 자신의 옷을 두 손으로 가리키면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붉은 체크무늬 반팔 셔츠였다. 아무리 봐도 내가 입은 옷이랑 똑같았다. 그의 옆에 있던 아내와 딸도 함께 앉아 활짝 웃는다. 가까이 다가가서 다시 쳐다봐도 상표만 틀릴 뿐 똑같은 옷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나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아마도 창피하게 생각하면서, 반갑다는 생각보다는 외면하려는 생각이 앞서게 된다. 이처럼 시실리아 사람들은 동질성에 대한 강한 애착을 드러낸다. 그에 대한 표현도 적극적이다. 낯선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변경연 시칠리아여행, 시라쿠사에서>

 

 지구 반대편에 나와 생각이 닮은 생각을 찾는다면 어떤 기분일까? 평소에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또 다른 내가 어느 시공간 속에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곤 했다. 비록 살아가는 방식은 틀리겠지만,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는 나보다 삶이 적극적이다. 가족과 함께 환하게 웃는 모습이 행복해 보였다. 그가 건넨 손을 잡으며, 시칠리아 사람들의 삶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가족과 함께 나눈 웃음에서 그들의 순수한 마음을 알 수 있었다. 마치 영화 <대부> 한 장면처럼 패밀리에 대한 끈끈한 사랑이었다.

 이전까지 아직은 낯선 곳이라는 생각에 시칠리아 사람들에 대한 거리감이 있었지만, 금새 경계를 풀고는 그들에게 마음의 문을 활짝 열게 되었다. 여행이 새롭게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신이 잠깐 인간의 모습으로 나를 만난 것이 아닐까? 조금씩 신화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기분이다. 어떤 세계가 펼쳐질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변경연 시칠리아여행, 시라쿠사에서>

 

최근에 과학자들도 그리스 극장의 비밀을 풀어냈다. 1 4천명이나 되는 청중이 배우와 악사들의 소리를 확성장치 없이 똑똑히 들을 수 있었던 비밀이 풀린 것이다. 그 비밀은 내가 발견한 석회암 계단에 숨어 있었다. 이 석회암 계단들은 청중의 웅성거림과 같은 저주파를 흡수해 배경 소음을 줄이는 여과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고주파를 청중석으로 반사해 효과를 증폭시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계단식 청중석의 굴곡진 표면이 소리를 잡는 천연의 덫 기능을 했던 셈이다. <변경연 시칠리아여행, 시라쿠사에서>

 

 뜨거운 태양을 피해 그늘로 들어서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벽면을 쳐다 보는 순간, 살아있는 도마뱀의 모습을 보였다. 도마뱀은 자신의 존재를 누군가에게 알리듯이 움직임과 멈춤을 반복했다. 카메라로 그 움직임을 쫓아갔다. 내가 그늘진 이 곳으로 들어온 것처럼 도마뱀도 뜨거운 태양이 힘겨워서 일까? 어느새 돌 구멍 사이로 들어갔다. 그런데 몸은 다 들어가지 않고 꼬리만 내 놓고 있다.

 구멍 속에 머리를 집어넣고 꼬리만 내어놓는 모습이 나의 모습과 닮았다. 누군가에게 알듯 말듯하게 완전히 자신을 드러내놓지 못하고 일부분만 내 놓고 있다. 그리고, 영혼은 구멍에 꽉 끼어버린 채 어둠 속에서 숨을 쉬고 있다. 나는 소리 없이 손을 움직인다. 그리고 닳을 듯 말듯 꼬리를 잡아보려 하지만, 어느새 도마뱀은 구멍 사이로 들어가 버렸다. <변경연 시칠리아여행, 시라쿠사에서>

 

그녀에게 왜 길을 잃었는지 물어보았지만, 자신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며 속상해했다. 아마도 로마 원형 경기장에서 사랑의 신 '에로스'가 그녀의 눈을 탐욕으로 멀게 했을까? 더워서 비키니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이태리 여자들에게 나 또한, 마음을 빼앗겨 버렸으니 말이다. 내가 만약 길을 잃어버렸다면 어떻게 했을까? 뒷걸음치며 구멍에서 빠져 나왔을까? 아니면 어두운 구멍으로 깊이 들어가 버렸을까? 8, 지중해의 강렬한 햇빛은 모든 인간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변경연 시칠리아여행, 시라쿠사에서>

 

  8월 뜨거운 햇살을 맞으며, 신화가 숨쉬는 시라쿠사의 길을 걸었다. 그리스 극장에서 초록들의 여름 노래 소리를 들었으며, 도마뱀의 움직임을 쫓으며 나의 현실을 바라보기도 했다. 디오니소스의 귀에서 울려 퍼지는 나의 음성을 들으며 내 삶의 주인공은 ''라는 사실을 발견하며 '더욱 더 뜨겁게 삶을 사랑하리라' 다짐했다. <변경연 시칠리아여행, 시라쿠사에서>

 

 이번 시칠리아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이전 생활에 적응하느라 힘들었지만 여행기를 쓰면서 소중한 시간을 보냈다. 출근버스에서, 지하철에서, 화장실에서 틈만 나면 졸았다. 서너 정거장 지나치기 일수였고, 회사출근 첫날부터 지각을 했다. 휴가 동안 나의 일을 대신해준 동료들에게 고맙다며 밥을 산 자리에서는, 나올 때 계산하지 않아 핀잔을 받았다. 시칠리아에 정신을 두고 온 상태가 지속되었다. 결국, 사고가 나고 말았다. 주차를 하려다 브레이크를 놓는 순간, 차가 앞으로 나가더니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기아가 파킹에 있지 않고 드라이버에 있었던 것이다. ''하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금년 5월에 터키를 다녀왔을 때도 이렇게 적응하는데 힘들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이번 여행이 꽤나 즐거웠던 모양이다. 완전히 나 자신을 그곳에 몰입시켜서 인지 헤어나오질 못했다. 기억이 지워지기 전에 써 내려간 여행기 탓인가? 어디를 가서 무엇을 보든 시칠리아가 떠올랐다. <신화에 물들어>

 

 나는 사부님이 추천해준 스승들이 떠올랐다. 그 스승들의 책을 읽으면서 무엇을 얻었는지 생각해보았다. 다양한 이야기 속에 보석 같은 지혜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중심에 진정한 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의 주제로 연결시켜 가는 관심과 깊이가 부족했다. 사부님이 변화의 키워드로 주옥 같은 이야기들을 엮어나가듯이, 사마천이 생생한 역사서를 만들기 위해 인간중심의 이야기를 저술한 것처럼 이는 모두 한 가지 일에 전심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책을 읽고 여행을 하면서 주제와 연관된 이야기를 뽑아내고, 그 이야기를 통해 나의 첫 책을 풍요롭게 만들어 보자. 자연스럽게 그 이야기가 내 안에 들어올 수 있게 즐겨보자. 모든 만물은 흩어지고 다시 모인다고 하지 않았는가? 흩어져 있는 지혜들이 다시 내 안에 모이도록 힘써보자. <넌 무엇을 연구하니?>

 

 현미경으로 지켜보면서 인류가 만들어낸 신화 속 세계를 발견하기도 했다. 인류가 탄생하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미생물 속에 이미 신화의 DNA가 존재하지 않았을까? 1g 속에 1조에 달하는 미생물이 존재한다고 한다. 비록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현미경을 통해서든 냄새를 통해서든 그들의 존재를 인지할 수 있다. 이렇게 그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우주에 살고 있다. 혹시 그들의 우주가 신들이 사는 세상이 아닐까? <똥쟁이의 기억>

 

 저 아래 손전등의 불빛이 약해져 가는 느낌이 들어서일까? 조금씩 추워지기 시작했다. 바로 그 때, 벽면에 어떤 동물의 그림자가 지나가고 있었다. 지렁이일까? 아니 분명 뱀이었다. 느릿느릿, 아주 천천히. 그림자로 봐서는 어린 왕자의 보아뱀처럼 큰 녀석이었다. 망할 놈의 자연은 오싹한 쇼를 연출하고 있었다. 점점 불빛이 사라져가고 주위는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였다. 뱀이 벽을 타고 올라오는 사실이 있는지, 아니면 과거의 영상에서 그 장면을 보았는지, 재빨리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금새 이빨을 드러내고 내게 달려드는 뱀에 대한 환상이 머리 속을 덮쳐버렸다. 어둠 속을 쳐다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안감을 참아내기 힘들었다. <똥쟁이의 기억>

 

 

 신화에 나오는 괴물들은 미생물과 닮았다. 비록 나는 첨단 장비의 힘을 빌어 미생물의 세계를 보고 있지만, 고대 인간은 무의식 속에서 그들을 상상했다. 그들 중에 분명 미생물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자가 신화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는 이원화된 세계,대극의 삶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자다. 아니면 미생물을 현실의 세계로 불러들일 수 있는 비밀을 알고 있는 자다. <똥쟁이의 기억>

 

미생물과 유기물이 균형을 이루는 시기가 되면, 자유의지를 가진 미생물이 나타난다. 그의 이름은 아스피디스카(Aspidisca). 폐수처리가 정점에 다다른 순간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의 존재는 곧 깨끗한 물을 볼 수 있는 신호이며, 상징이다. 그 동안 온갖 탐욕의 영혼들과 싸워서 이긴 승리의 순간이기도 하다. 그는 승리의 여신니케의 날개를 가졌다. 그래서 그는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자유롭게 유영하며 먹이를 찾아 다닌다. 그는 혼돈과 고난의 시간을 이겨낸 영웅의 모습이다. 나는 그의 출현을 매일 기다렸다. <똥쟁이의 기억>

 

옷과 손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시린 손을 꼭 잡고 문질러 주셨다. 할머니는 두 손으로 소년의 조그만 손을 감싸고, 따뜻한 입김을 불어넣어 주셨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고는 소년의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꿈장수>

 

엄마 꿈의 고객은 소년과 아빠였다. 한번은 아빠에게 큰 교통사고 났었는데, 전날에 아빠가 엄마 꿈을 사서 기적적으로 살아났다고 했다. 그 다음부턴 아빠는 엄마 꿈의 가장 큰 고객 중에 하나가 되었다. 그래서 아빠는 멀리 출장을 가거나, 여행을 갈 때면 엄마 꿈장부에서 좋은 꿈을 챙기고 집을 나선다. <꿈장수>

 

아이들은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어린 왕자가 모자 속 보아뱀을 알아보듯이 마음의 눈으로 사물을 보고, 마음이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인다. 비록 냄새로 가려져 있다 해도 그 안의 보물을 아이들은 찾을 수 있다. 그런 아이들의 눈으로 나의 발자취를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나의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침 출근부터 전쟁을 치르는 직장인들, 일에 매달리는 시간 동안 행복과 불행이 수없이 교차한다. 그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보려 하지만, 퇴근 후에는 모든 기억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리고 만다. <꿈쟁이 뿌꼬, 서문>

 

소년은 큰 나무 곁으로 걸어갔다. 나무 주변으로 초록색 이끼들이 자라고, 똥 냄새 대신 꽃 향기와 땅 내음이 구수했다. 나무는 조금씩 움직이는 것 같았다. 가지가 뻗어 나오는 것이 느껴졌고, 땅 밑에 있는 뿌리도 마찬가지였다. 소년은 두 손으로 나무의 몸통을 만져보았다. 따뜻한 온기가 전해져 왔다. 소년은 나무의 숨결을 느끼고 싶었다. 눈을 감아 보았다. 어둠 대신 주변이 환해진 기분이 들었다. 다시 눈을 뜨자, 조금 전 보았던 나무가 소년의 손을 잡고 있었다. 둘러보니 온통 초록 세상이었다. 똥차도 어느새 커다란 코끼리로 변해 있었다. <꿈쟁이 뿌꼬>

 

조금 전까지 분명 똥차였는데, 커다란 코끼리가 되어 풀을 뜯고 있었다. 긴 호수는 코가 되었고 코 끝으로 풀을 말아서 입 안에 집어 넣었다. 어린 아이가 손을 내밀어서 무언가를 입으로 가져가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천천히 머리를 흔들더니 귀를 펄럭였다. 새들의 날개 짓처럼 가벼웠다.크게 움직이면 하늘을 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코끼리는 소년을 쳐다보았다. 뿌꼬 아저씨를 처음 보았을 때 눈빛이었다.

  "아저씨가 사는 곳은 멀리 있는 행성인데, 어떻게 보내주는 거예요?"

 뿌꼬 아저씨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고는 오른손을 펼쳐보았다. 씨앗이었다. 조금만 씨앗이었다. <꿈쟁이 뿌꼬>

 

 "이 씨앗은 코끼리가 만들어준 꿈의 씨앗이란다. 이 나무도 처음엔 아주 작은 씨앗이었지, 보잘것없이 보이지만 인간들의 꿈을 담을 수 있고, 커다란 우주까지도 품을 수 있단다. 이 속엔 엄청난 에너지가 숨겨져 있지, 한 번 만져보렴"

 소년은 씨앗 하나를 건네 받고는 아저씨처럼 손바닥 위에 올려 놓았다. 처음 나무를 만졌을 때의 따뜻함과 두근거림이었다. 오히려 그 때의 느낌보다 더 강하게 전해져 왔다. <꿈쟁이 뿌꼬>

 

"우리는 아주 작은 먼지일수도 있고 작은 물방울 일수도 있어. 보는 사람이 어떤 마음인지에 따라서 우리 모습은 변화하지. 어린 아이의 마음으로 바라보면 언제든 줄었다가 커졌다가 할 수 있어. 하지만 욕심 많은 인간들이 바라보면 더러운 똥을 푸는 똥쟁이로 밖에 보이지 않아. 지구의 씨앗이 처음 우리 행성에 왔을 때 씨앗은 가장 먼저 나를 만났단다" <꿈쟁이 뿌꼬>

 

"며칠이 지났을까? 공원 벤치에 누워 마지막 잠이라고 생각하고 눈을 감을 때였어, 하늘에서 무언가 떨어졌어. 빗물 방울이 나를 깨운 거야. 나는 천천히 일어나서 빗물이 온몸으로 흘러 들어가게 했어. 피곤함이 사라질 때까지 몸 깊숙한 곳까지 빗물을 빨아들였지. 점점 힘을 되찾아가자, 키도 조금씩 커지는 걸 느꼈어. 새로운 생명을 얻은 것 같았어" <꿈쟁이 뿌꼬>

 

"뿌꼬, 너는 앞으로 아주 특별한 여행을 하게 될 거야. 너는 인간에게 소중한 존재가 될 거란다. 그건 네가 너의 꿈을 잊지 않고 굳게 믿기 때문이지. 여행 중에 어려운 순간이 와도 실망할 필요는 없어, 극복해 갈수록 너의 꿈은 점점 커져 갈 거야. 아무리 어려운 시련도 너를 막지 못할 거란다. 네 안에는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야. 인간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지" <꿈쟁이 뿌꼬>

 

 

뿌꼬는 주머니 속에 씨앗을 꺼내고는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뿌꼬가 입김을 불어넣자, 씨앗은 날개를 천천히 펼치기 시작했다. 조금씩 커진 씨앗 위로 뿌꼬와 소년은 올라 탔다. 몇 번 날개 짓을 하더니 하늘 위로 올라간 씨앗은 호수가로 날아갔다. 뿌꼬와 소년, 그리고 씨앗의 그림자는 수면 위를 물결치며 지나갔다. <꿈쟁이 뿌꼬>

 

똥이는 자라면서 보이는 모든 것에 영혼이 있다고 믿었다. 길을 걸어가다가 우연히 마주치는 돌이나 나무를 보더라도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 손을 내밀어서 만져보거나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똥이는 잠시 눈을 감고, 둘 사이에 흐르는 기운을 느꼈다. 점점 손이 따뜻해지면 사물의 영혼이 응답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심지어는 자기가 싼 똥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었다. <똥이의 모험>

 

"인간들이 똥을 누듯이 신도 똥을 누면서 세상을 다스린단다. 하지만 신들은 똥 대신에 씨앗을 내 놓는단다. 인간 세상에도 씨앗들이 수 많은 생명들을 창조하는 것처럼 신들도 씨앗을 내어서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내는 거야." <똥이의 모험>

 

"똥이 다시 인간에게 돌아가는 걸 보면 다르단다. 도시 사람들의 똥은 거름으로도 사용할 수가 없어. 마음 속에 욕심이 너무 많아 몸에서 독을 만들기 때문이야. 하나만 가져도 될 걸 둘을 가지려 하고, 둘을 가지면 열을 가지려 하니 한시도 맘 편할 날이 없지. 그런 마음이니 똥을 싸도 독이 묻어 있지." <똥이의 모험>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천천히 가슴과 공책의 간격을 좁혔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도 함께 움직였다. 몸을 뒤로 젖혀도 똑같았다. 예상하지 못한 행동으로 나는 고개를 돌려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눈빛이었다. 그녀는 다시 또 나의 공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너무도 자연스럽고 능청스러웠다.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 같았다. <뿌꼬>

 

침묵이 흘렀다. 마치 오래 전부터 알아온 사람처럼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고 나를 쳐다 보았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자였다.

 “글을 쓰고 있는 당신이 행복해 보였어요

 누군가와 약속을 했어요. 이야기를 꼭 완성하기로 했거든요.”

 당신의 글에도 행복이 묻어 있어요.”

 어떤 이야기인지 모르시잖아요?”

 글자들의 모양만 보아도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어요.”

 흔들리는 지하철에서 생각나는 대로 쓴 건데 어떻게……”

 아무리 급하게 써도 글자는 그 사람의 마음과 함께 움직이거든요.” <뿌꼬>

 

10년 전 버스 사고로 죽음의 문턱까지 경험해서 얻은 인생의 의미는 찰나여서 살면서 잊어버리는 순간들이 많았다. 반복적인 회사 생활에서 나 자신과 가족의 소중함을 잠시 잃어버리는 경우가 그렇다. 하지만,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얻은 인생의 의미는 평생 동안 내 가슴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 삶이 진정한 의미의새로운 인생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인생>

 

이탈리아 시칠리아 시라쿠사에서 초록색 도마뱀을 만났다. 작은 틈새로 숨어버린 도마뱀 꼬리. 아마도 자신을 따라오면 시칠리아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거라며 나를 유혹했다. 아니면 잃어버린 나를 찾을 수 있을 거라며 꼬리를 흔든 것 같았다. <새로운 인생>

 

이른 새벽, 단테의 <신곡>을 읽고 터키 카타도피아에서 벌룬을 타고 하늘 높이 올라갔을 때였다. 단테가 천국에 올라 갔을 때의 느낌이었을까? 함께 올라간 사람 중에 어느 노부부가 함께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았다. 초췌하고 창백한 얼굴, 머리카락이 한 올도 남아있지 않는 머리를 감싸고 있는 모자, 그런 그녀의 가냘픈 어깨를 두 팔로 안으면서 구름 틈 사이로 쏟아지는 천국의 빛을 노부부는 함께 보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천사들이 축복하며 나팔을 부르는 <신곡> 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지금 나의 아내를 떠올리면서 삶과 사랑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 순간이었다. <새로운 인생>

 

얼마 뒤면 그는 서른 아홉이었다. 예전에 활짝 웃던 자신의 모습이 자동차 백미러에 아른거렸다. 시동을 켜고 오랜 만에 네이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했다.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바로10m 앞에서 우회전하라고 말한다. 가는 거리는 39km, 남은 시간은 50분이었다.문득 뿌꼬는 인생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 네비게이션에게 묻고 싶어졌다. 누군가에게 서른 아홉은 마흔을 채우기 직전의 숫자일지 모르지만 그에게는 이미 바닥난 숫자, 무언가를 다시 채워야 하는 숫자였다. <서른아홉의 행복여행>

 

붉은 불빛이 흘러나오는 골목길에 들어섰다. 똑같은 크기의 지붕과 출입문이었다. 반짝이는 네온사인은 모든 물체들을 화려한 색깔들로 물들이고 있었다. 탐욕으로 물든 꽃들이 그를 바라보았다. 문득 이 곳에 왜 왔는지, 기억의 끈이 끊어져 버렸다. 뿌꼬는 잠시 동안 유혹의 눈빛들을 쳐다보며 상실의 즐거움을 맛보았다. <서른아홉의 행복여행>

 

뿌꼬는 정면에 보이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창문 안쪽에 긴 스탠드 의자에 앉아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다. 여자의 얼굴은 분홍 빛으로 윤이 나고, 하얀 색 원피스는 네온사인에 와인 색깔로 물들었다. 숨쉬는 공기까지도 붉게 물들이며 입에 물고 있는 담배 불은 더욱 빨갛게 타 들어갔다. <서른아홉의 행복여행>

 

   2012년 한해 동안,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경험했다. 네가 그토록 원하던 글도 마음껏 써 보았다. 즐거운 고생이었다. 하지만 잔뜩 늘어놓았지 아직 정리를 하지 않았다. 토해낸 구슬들을 하나씩 닦아내고 꿰어야 한다. 나만의 디자인으로 말이다. 그 결실을 내 목에 걸었을 때는 아름다운 보석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 과정 동안 나와 가족들을 사랑하고, 행복해지자. <세상과 하나가 되는 방법>

 

 이번 여행에서 나는 세상과 하나가 되는 방법을 발견했다. 활짝 웃는 것. 내 스스로 웃음꽃이 되는 것이다. 눈에 들어오는 자연들,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웃음꽃을 보여주자, 그 순간 하나가 된다. 그들에게 신의 사랑을 보여준 것이다. 내 삶의 존재 이유다. 책을 쓰는 작업도 마찬가지다. 글을 쓰면서 활짝 웃고 있는 나를 발견하자. 나와 자주 마주할수록 독자들도 웃음꽃을 피우는 자신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아주 자연스럽게 나와 독자가 하나가 되는 방법이다. <세상과 하나가 되는 방법>

 

   지금 이대로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고 싶다. 다시 지하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지상으로 쭉 달려가고 싶다. 끝없이 줄지어선 차들도, 화려한 조명들이 있는 곳이 아니라 텅 빈 자연이 있는 곳이다. 행복해질 수 있고, 내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려 하는지 명상할 수 있는 곳으로 말이다. 그곳에서 침묵하고 가벼워져서 하늘에 떠 있고 싶다. <떠나고 싶은 날>

 

 기차는 지하 속으로 들어가고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간다. 불안과 긴장 속에서 나의 수레바퀴를 돌려야 한다. 하지만, 지난 날 여행의 추억이 나를 다시 꿈꾸게 한다. 터키 야간 버스를 타면서 아침 햇살을 맞이한 순간들, 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서 아름다운 노을 빛에 물들어 간 순간들이 내 인생의 수레바퀴를 튼튼하게 만들어 준다. 언젠가 다시 자유롭게 날아오를 날을 꿈꾸면서 말이다. <떠나고 싶은 날>

 

아내에게 핸드폰을 보여주자, 아내도 나처럼 활짝 웃었다. 마치 황금보물을 찾은 사람처럼 서로 기뻐했다. 시동이 걸리자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어둠을 환하게 비추었다. 아마도 아이 놓고 처음 가져보는 둘 만의 심야데이트였다. 잔잔한 음악이 흐리고, 아내는 말문을 열었다.

“여보, 변경연 일년 동안 어땠어요, 뭔가 달라진 게 있어요?

“응, 글쎄…….이제 아무리 두꺼운 책이라도 읽을 수 있는 자신감이 생긴 것. 그리고…...

“일년 동안, 나 자신이 많이 위로 받았다는 것. 글을 쓰면서 내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신화에 나오는 영웅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분명한 건 나의 이야기 써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거예요. <난 무엇이 달라졌는가>

 

나는 운전대를 잡고 있는 아내의 손을 잡았다. 조금 전까지 뿌연 안개로 도로가 잘 보이지 않았었는데, 어느 새 안개가 걷히고 헤드라이트 불빛은 멀리 있는 곳까지 선명하게 비춰주었다. <난 무엇이 달라졌는가>

 

아내가 읽으면서 책갈피로 사용했던 나뭇잎과 종이조각들을 코로 가져가 냄새를 맡았습니다. 오래된 책 속에 묵어있던 깊은 향이 더해져 산속에 질박한 흙 냄새처럼 구수했습니다. 그리고, 젊은 시절 책 읽는 아내의 모습이 떠올려 보았습니다. 지금 책을 읽고 있는 나의 모습과 하나로 연결되었습니다. 아내가 읽었던 감동의 순간들이 시간을 관통하며 저에게 이어져왔습니다. <아내의 보물상자>

 

나는 머리 위에 있는 큰 창문을 하나 열었습니다. 시원한 바람이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날개는 바람을 붙잡고 다시 일어섰습니다. 이번에는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진짜 하늘이 보이는 창문으로 날아갔습니다. 창 밖으로 탈출한 새는 탁 트인 푸른 창공으로 높이 올라갔습니다. 처음 세상의 공기를 마신 것처럼, 처음 세상에 날개 짓을 하며 날아본 새처럼 날아 올랐습니다. <아내의 보물상자>

 

 

내가 저자라면

 

나의 이야기 2012 2 1일부터 2013 3 18일까지 변경연 연구원 생활을 하면서 작성한 칼럼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모두 수록되어 있다. 그 안에는 미완성 소설 2편과 동화 1, 여행에세이 2편등 서른 아홉의 행복이야기다. 그 동안 써온 글을 정리하면서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하고, 눈물이 나기도 하고, 웃음짓기도 했다.

내 안에 모든 것을 비워낸 느낌이다. 그리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원점에 서 있는 나는 여유롭다. 공간과 여백이 나를 숨쉬게 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앞으로 나는 나답게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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