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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25일 12시 12분 등록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The hero with a thousand Faces)

(Joseph Campbell , 이윤기 역, 민음사, 1995.05.20)

 

1. ‘신화의 영웅(저자에 대하여)

 

Joseph Campbell

캠벨.jpg

Joseph Campbell (1904-1987)  

 

 

- 사실 이주 전 이 책을 처음 읽고는 새로운 사실들과 넘치는 통찰에 기뻐하였다. 세상의 처음과 끝을 본 사람 같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에 한번 들어갔다 나온 사람 같이 느껴졌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다시 읽은 영웅에서 나는 많은 혼란을 겪었다. 처음 읽었을 때 눈에 들어오던 내용들은 다른 의미가 되어 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고 명쾌했던 혜안들은 곱씹어 보니 나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자의 대하여를 서치 해 놓은 동기들의 북리뷰를 다시 전부 보고는 이 사람,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박혔다. 나는 마음이 상했다. 이 사람을 넘지 못한다는 생각이 굳혀지는 순간이었다. 미소 짓고 있는 그의 사진이 얄미워 보인다.

 

- 어디서 본 듯하다. 꿈을 이야기는 하는 저자는 나의 꿈 언저리 어디선가 본 듯하다. 저자가 책에서 육신을 바꾸어가며 영혼은 불멸하는 존재라고 이야기할 때 그의 육신과 나의 영혼은 지난 억겁의 세월 안에서 한번은 스쳐 지났을 일이다. 그가 나의 꿈에 언뜻 보였다면 말이다. 책으로 만난 인연 또한 예사로운 인연은 아니니 나만의 착각에도 일말의 근거는 있겠다.

 

저자는 이 책에서 전 세계의 신화를 수집하고 그 신화 속에 살아있는 수없이 많은 영웅의 모습을 일반화 시키고 그 상사성(相似性)을 연구한다. 영웅은 모험을 떠나고, 어려움에 봉착하여 고통을 당하지만 이를 극복하고 결국에는 동아리를 구할 이롭게 할 선지자적 능력을 가지고 나타난다. 이렇게 일반화 시킨 영웅의 모습을 그대로 저자의 생애에 대입해 보기로 한다.

 

신화라는 인류사적 지적 갈급함을 안고 그는 모험을 떠난다. 어릴 적 그는 인디언을 유난히 좋아했다. 버팔로 빌이 뉴욕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 해마다 와서 와일드 웨스트 쇼로 공연을 벌였는데 그걸 보고는 그만 인디언을 짝사랑하게 된다. 이어서 인디언의 신화를 읽게 되고 오래지 않아 어릴 때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예수의 모티프와 아메리카 인디언의 모티프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신화라는 화두를 만났고 이로부터 시작된 한 인간의 지적 탐구의 여정은 다음의 인류를 풍요롭게 하는 영웅의 여정과 다름 없다.

 

1927년 캠벨은 콜럼비아 대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유학길에 올라 프랑스 파리대학, 독일 뮌헨대학교에서 중세 프랑스어를 공부했고 그가 가장 잘한 일이라 생각하는 산스크리트어를 그때 습득했다. 또한 그는 작가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와 토마스 만(Thomas Mann) 등의 저작들을 잇따라 섭렵해 나갔고 신화학의 일반적 연구성과물을 과학적으로 뒷받침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와 칼 융(Karl Jung)을 읽어낸다. 그러나, 1929년 캠벨은 유럽에서 돌아와 콜롬비아 대학교에서 교수로 임용되기 직전 자신의 연구 방향과 대학 당국의 입장이 다르자 과감히 교수직을 포기하고 ‘Great Depression’ 의 시기에 접어 든다.

 

이제부터의 저자 행적은 자칫 세간의 이목으로는 그의 지적 모험이 순탄하지 못한 것으로 비춰 질 수 있다. 대공황 시기의 가난과 교수직 포기로 인한 사회적 시선 따위가 그렇다. 그러나 캠벨은 천복을 따른다는 자신만의 기준으로 행복을 느끼며 이 시기를 극복한다.

 

슈펭글러, 제임스 조이스, 니체, 쇼펜하우어, 칸트 등을 잇따라 읽어 나갔고 이들뿐만 아니라 불교철학이나 신학에도 많은 공을 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1929년부터 5년간의 우드스턱시절의 일화 또는 이야기들은 앞선 신화의 힘에서 저자소개에 이미 소개된 내용임으로 참고하시기 바란다.

 

영웅은 귀환한다. 그의 깨달음을 자신의 깨달음에 대한 만족으로 놔두지 않고 사회와 동아리에게 들려줄 신의 이야기를 들고 다시 사회에 돌아온다. 1934년 캠벨은 사라 로렌즈 대학(Sarah Lawrence College)의 교수가 된다. 이후 가르침과 함께 수많은 역작을 쏟아내며 자신만의 일가를 만들어 내고 신화라는 주제 하나로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킨다. 여러 사람들과 대중들에게 그의 관점과 지식은 혼란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고 그는 홍익을 완성한다. 어릴 적 아메리카 인디언의 민화와 아더왕 전설의 감흥이 지구촌 동시대인들에게 혜안을 주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저자는 비교신화학이라는 학문 장르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 시기는 신화학자로써의 자궁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만물의 원형질을 갈구했다. 존재 너머의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질문을 대신하여 고민했다. 그 질문의 대답은 신화가 풀어줄 것이라는 확신을 놓지 않았고 신화라는 화두를 잡고 또, 놓지 않았다. 말하여 질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의 진리로써의 지위를 상실한다. 그리하여 말하여진 중에서 가장 윗자리가 신화라는 것을 알게 된다.

 

지난 한 달간 나는 그에게서 멀어질 수 없었다. 홀딱 빠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자기 직전까지 그와 놀았고 일어나자 마자 그와 얘기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나는 그가 좋다. 그가 하는 질문들과 답을 찾아가는 과정들이 마음에 든다. 내가 스스로 보 잘 것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여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책으로 만난 스승은 그렇지 않다라는 단 한마디를 기백 페이지에 달하는 신화 이야기로써 나를 위무하고 있다. 캠벨로 인해 다시 산다.

 

저자의 저작(원문)

- The Hero With a Thousand Faces (Mythos : Princeton/Bollingen Series in World Mythology, Vol. 17)

- The Power of Myth

- Joseph Campbell Collection : Western Quest

- Joseph Campbell Companion : Reflections on the Art of Living

- The Language of the Goddess

- The Masks of God : Creative Mythology

- The Masks of God : Occidental Mythology

- The Masks of God : Oriental Mythology

- The Masks of God : Primitive Mythology

- The Mythic Dimension : Selected Essays 1959-1987 (Collected Works of Joseph Campbell)

- Myths to Live by

- An Open Life : Joseph Campbell in Conversation With Michael Toms

- Tarot Revelations

- Transformations of Myth Through Time

- The Way of Myth : Talking With Joseph Campbell (Shambhala Pocket Classics)

- Mythos; The Shaping of Our Mythic Tradition

- The Hero's Journey : Joseph Campbell on His Life and Work

- The King and the Corpse : Tales of the Soul's Conquest of Evil (Bollingen Series Xi)

- Myths and Symbols in Indian Art and Civilization (Mythos)

- Philosophies of India (Bollingen Series, 20)

- Myths of Greece and Rome

- Portable Jung

 

- The Universal Myths : Heroes, Gods, Tricksters and Others

- Myth & the Body

- The Politics of Myth : A Study of C.G. Jung, Mircea Eliade, and Joseph Campbell

 

2. ‘Departure’, Initiation, Separation, Return’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 캠벨 선생님의 언어, Ü : 나의 언어)

 표지.JPG

 

머리말

 

종교 교의 에 녹아 들어 있는 진리는 대개가 변형된 데다 체계적으로 위장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진리로 알아보지 못한다. 이는, 우리가 아이를 상대로 갓난아기는 황새가 물어다 준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상황과 흡사하다. 우리는 이 큰 새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따라서 이 경우 우리는 상징으로 분식된 진리를 말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아이는 알아듣지 못한다. 아이는 우리가 말하는 내용 중 변형된 부분만을 알아듣고는 속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어른에 대한 아이들의 불신과 면역성이 종종 이러한 부정적 인상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때 진리의 상징적 분식을 피하고 아이들의 지적 수준에 맞추어 사건의 진상을 알게 하는 데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p. 5)

 

Ü 첫 번째 읽을 때는 뵈지 않던 것들이 첫 장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위의 말은 프로이트의 말이다. 신화 또는 종교의 교리에 숨어있는 진리는 은유로 표현되어 있으며 언표되어 있지 않다. 그러한 상징에 대한 해석은 제 각각이고 어려운 언어로 표현되기 일쑤다. 이 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질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으니 배배 꼬지 말고 쉽게 보자는 말인 것 같다. 지당하신 말씀이다.

 

□ 이 책은 목적은 종교와 신화의 형태로 가려져 있는 진리를 밝히되 비근한 실례를 잇대어 비교함으로써 옛 뜻이 스스로 드러나게 하는 데 있다.

옛 현자들은 말을 하되 언외의 끗을 거기에다 실는 데 소홀함이 없었다. 따라서 그분들의 상징적 언어를 거듭 읽되 그 가르침을 일거내기 위해서는 고문집 편집자의 재주쯤은 갖추고 있어야 할 듯하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상징의 문법을 터득해야 할 터인데 저자가 알기로는 이 문을 여는 열쇠로 정신분석학만한 현대적 길잡이는 따로 없을 듯하다. (p. 6)

 

Ü 진리가 잠재하는 곳으로 가겠다. 솜누스여 방해 말아라. 제발.

 

□ 세계 각처에서 채집된 신화와 민간 전설을 한곳에 모아놓고 상징으로 하여금 스스로 입을 열게 하는 일일 듯하다. 이렇게 모아놓고 보면 그 유사성이 한눈에 두드러져 보이고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이 이 땅에 살면서 오랜 세월 삶의 길잡이로 삼아온 방대하면서도 놀라우리만치 일정한 상태로 보존된 바탕 되는 진리와 만나게 된다. (p. 6)

 

Ü 상사성(相似性), 캠벨이 본격적으로 신화를 비교하기 시작하고 첫 상사성을 발견했을 때의 환희를 상상해 보았다. 그 기쁨을 얼마나 세상에 알리고 싶었겠는가. 그것을 세상에 알려 진리에 한 발짝 다가서는 미물의 눈물겨움을 보이려 하지 않았을까. 그 느낌으로 이 책을 읽어 내려 가보자.

 

□ 이 책이 다루는 것은 상사성이지 상이성이 아니다. 이러한 저자의 비교 해석이 이 세계의 통합을 결실시키려는 작품의 경향에 대해 종교적 혹은 정치적 제국의 이름으로서가 아닌 인류의 상호 이해라는 측면에서 그리 초라하지 않는 하나의 기폭제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베다 경은 진리는 하나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드러낸다.’고 했다. (p. 6~7)

 

프롤로그. 원질신화 (The Monomyth)

 

□ 재미 삼아 귀를 기울여보는 콩고 주술사의 잠꼬대 같은 주문이나 점잖은 취미로 읽어보는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한 노자 경구집의 얇은 번역본이나 이따금씩 깨뜨리고 보는 견고하기 그지 없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논법이나, 기괴한 에스키모 요정 이야기의 빛나는 의미나 그 내용면에 있어서는 별로 다른 것이 없다. 즉 변화 무쌍한 듯하지만 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이야기의 일정한 패턴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p. 13)

 

Ü 책의 주제 같은 느낌이다. 계속해서 살펴보자.

 

□ 신화는 다함 없는 우주 에너지가 인류의 문화로 발로하는 은밀한 통로하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종교, 철학, 예술, 선사 인류 및 유사 인류의 사회적 양식 과학과 기술의 으뜸가는 발견 바닥째 흔들어 수면을 엎어버리는 꿈, 신화의 불가사의한 고리, 모두가 이 은밀한 통로를 지나 인류의 문화로 현현한 것들이다. (p. 14)

 

Ü 캠벨이 생각하는 신화의 정의쯤 되겠다. 이 책 478페이지에는 신화에 대한 여러 철학자들의 정의가 소개되고 있다. 캠벨의 정의와 비교해 보자.

 

프레이저는 자연계를 설명하려는 원초적인 서툰 노력이라고 했고 뮐러는 후세에 오인되고 있는 선사시대로부터의 시적 환상의 산물이라고 했으며 뒤르켐은 개인을 집단에 귀속시키기 위한 비유적인 가르침의 보고라고 했고 융은 인간의 심성 깊은 곳에 내재한 원형적 충동의 징후인 집단의 꿈이라고 했다. (p. 478)

 

□ 신화의 상징은 영혼의 부단한 생산물인데 이 하나하나의 상징 속에는 그 바탕의 근원적 힘이 고스란히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시간을 초월한 이 환상의 비밀은 무엇일까? 그것은 정신의 어느 심연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신화는 왜 어느 곳에서 채집된 것이든 그 다양한 의상 아래로는 꼭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일까? 신화는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p. 14)

 

Ü 내 이 물음들에 대하여 나의 답, 단 한 번이라도 해 보고 싶다. 그리하여 신화를 로 바꾸고 세계로 치환하는 작업 말이다. 이 책은 위와 같은 질문에서 시작한다.

 

□ 정신분석학자들의 대담하고도 획기적인 저술은 신화학도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자료다. 프로이트와 융과 그 후계자들은 영웅과 신화의 행적이 현대로 계승되었음을 여지없이 증명해 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내부에는 속으로 알찬 꿈의 판테온이 있다. (p. 15)

 

Ü 어떻게 무엇으로 증명해 냈다는 말인가? 우리의 꿈 이야기가 인간 신화의 영역과 다르지 않다는 것은 우리의 꿈이 세계와 교감하고 우주의 고통에 참여하고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것이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는 말인가. 46억년 전의 생명이 시작되고 부단히 이어져온 생의 질주는 과연 무엇을 종국으로 하기 위해 치 닿고 있는 것인가. 삶은 무엇인가. 생은 무엇인가. 우리의 꿈은 무엇인가.

 

□ 인간이 가진 심성 중에 가장 끈질기게 남는 성향은 동물 중에서도 인간이 가장 오랫동안 어머니 젖가슴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p. 16)

 

Ü 너무 짧은 자궁 내 체제 기간의 연장(intra-uterine period)

 

□ 유아와 어머니는 출산이라는 대격변을 치르고도 육체적으로는 물론 심리적으로도 몇 개월간이라는 이원일체 상황을 형성한다. 양친이 곁에 없는 기간이 길어지면 유아는 긴장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공격 충동을 일으킨다. 어머니의 속박을 받아도 유아는 공격적인 반응을 보인다. 따라서 유아가 최초의 적의를 갖는 대상은 최초로 애정을 투사하는 대상과 일치하고 유아가 최초로 갖는 이상은 (이때부터 유아는 축복, 진리, 아름다움, 완전함이라는 이미지를 무의식 기저에다 간직한다)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Madonna and Bambino라는 이원일체 상황이다. 불행한 아버지는 다른 현실로부터 자궁 안에서와 똑 같은 상태로 재현된 이 지상의 천국을 침범한 최초의 틈입자다. 따라서 유아는 아버지를 적으로 체험한다. (p. 17)

 

Ü 그렇다면 나는, 나의 아이가 세상에서 만나는 첫 이방인 그러니까 미성숙 유아의 시선으로는 첫 침입자였다. 이 사실을 이제는 알았으니 알아차리고 알아서 기어야 한다. 그러면 이제부터 나는 너를 해칠 생각이 없다는 시그널을 지속적으로 보내기라도 해야 하는 건가.

 

□ 각주) 아버지는 보호자로 어머니는 유혹자로 체험된다는 지적도 있다. 오이디포스에서 햄릿에 이르는 과정이 그러하다. ‘신이여, 악몽만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면 견과 껍데기 속에 갇혀서도 무한 공간의 왕으로 행세할 수 있겠나이다. Hamlet 2 2. 프로이트 박사는 모든 신경증 환자는 오이디포스와 햄릿을 겸한다고 쓰고 있다. (p. 18)

 

□ 인간이라는 왕국에서 우리가 의식이라고 부르는 비교적 깔끔하고 비좁은 처소의 바닥 밑으로는 뜻밖에도 알라딘의 동굴이 꿇려 있다. 여기에는 보물뿐만 아니라 위험하기 짝이 없는 꼬마 정령, 그리고 우리로서는 생각해 본적도 없거나 감히 우리 일상의 삶으로 통합하지 못했던 불편한 혹은 억압당한 심리적인 힘이 도사리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에게 감지되지 않은 채 그대로 눌러 있지만 혹 한마디 말, 주위의 냄새, 차 한 잔의 맛, 또는 어느 사람의 시선에 촉발되면 무서운 사신으로 우리 머릿속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무섭다고 하는 까닭은 이것이 우리 자신과 우리 가족의 안전을 도모하는 질서의 바탕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의 발견이란 소망스럽고도 무서운 모험의 영역을 여는 열쇠를 가져다 준다는 의미에서 보면 참으로 매력적인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지었고 우리가 그 속에 살고 있고 우리가 내적으로 지니고 있는 세계의 파멸, 그러나 파멸이 끝난 다음에는 보다 대담하고 깨끗하고 보다 푸짐한 인간적인 삶으로의 눈부신 재건, 이것이 바로 우리 속에 내재하는 신화적 영역에서 오는 이 심란한 밤손님의 유혹이며 약속이며 공포인 것이다. (p. 21)

Ü 이 문장은 여전히 이해가 어렵다. 하지만 대강의 이해한 내용은 눈에 보이는 현실세계의 영역을 조금 더 들어가면 내면의 추악한 모습과 마주치게 될 수도 있는데 그 추악한 모습을 담담히 받아들이면 일순간 새로운 영역의 내면을 경험할 수 있다. 이런 의미일까. 알 수 없다.

 

의사는 신화 영역에 관한 현대의 명인이며 그 비방과 영험이 있는 주문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p. 21)

 

□ 원시 사회 생활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른바 통과제의 (通過祭儀, rites of passage: 출생, 명명, 성인, 결혼 장례 의식 등)는 이런 단계의 마음가짐이나 애착이나 생활 패턴으로부터 심적으로 단절된다는 의미에서 형식상으로 특이하고 극히 가혹한 단절의 체험이 되는 경우가 보통이다. (p. 22)

 

Ü 각주) 출생과 장례 같은 의식의 경우 부모와 친척들도 의미 심장한 감명을 받는 것은 물론이다. 모든 통과 제의에서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또아리의 구성원 모두가 의미 있는 체험을 하게 되어 있다.

 

□ 참으로 놀라운 것은 상당수의 제의적 시련과 이미지가 정신분석을 의뢰한 환자가 유아기 고착 상태를 떨치고 미래를 향해 발돋움을 시작하는 순간 꿈에 나타나는 이미지와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p. 22)

 

□ 무의식에서 이에 상응하는 경우의 실례로 C. G. 융 박사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내 환자 중 하나는 뱀이 동굴에서 나와 자기 사타구니를 깨무는 꿈을 꾸었다. 그가 이 꿈을 꾼 것은 분석을 믿고 자신을 친모 복합(親母復合, mother complex)의 굴레에서 해방시키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신화와 제의의 주요 기능은 과거에다 묶어두려는 경향이 있는 인간의 끊임없는 환상에 대응하여 인간의 정신을 향상시키는 데 필요한 상징을 공급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내부에 있는 타락의 길을 버리고 영험적인 정신의 도움을 따르게 하는 우리 내부의 고차원적인 신경증인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남아 있는 유아기의 이미지에 발목이 잡혀 있고 따라서 어른으로 가는 길을 애써 좆으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 미국에서는 전후가 도착된 슬픈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삶의 목표가 어른이 되는 데 있지 않고 청년으로 머물러 있는 데 있으며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데 있지 않고 어머니와 유착되는 데 있다고 믿는 현상이 그것이다. 그래서 남편들은 소년 시절이라는 이름의 신전에서 아들에 대한 부모의 소원이던 법률가, 실업가, 혹은 지도자를 섬기고 있는가 하면 아내들은 결혼한지 14, 두 아이를 낳아 길러놓고도 여전히 사랑 타령이나 하고 있다. (p. 23~24)

 

Ü 신화 그리고 ritual에 대해서 이 보다 더한 명징한 정의는 나는 알지 못한다. 결국 신화와 그 리추얼은 인류의 정신사적 진보를 위함이었다. 현재의 이런 잔인함은 위와 같이 정신분석학적 해석만으로도 해석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거기에 더하여 배금주의,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등의 영향과 아울러서 고민하는 시도도 필요할 듯 하다. 왜냐하면 실패에 대한 사회적인 어떠한 장치도 없는 상황에서 진보적인 삶의 목표가 설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러나, C. G. 융은 후반부의 위기를 강조했다. 즉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이 빛나는 태양이 마침내 그 고도를 떨어뜨리고 무덤이라고 하는 밤의 자궁 속으로 사라지기 위해 기를 꺾어야 하는 시기를 말한다. 우리의 욕망과 공포의 정상적인 상징이 인생의 오후에 해당하는 이 시기에는 반대되는 것으로 전화(轉化)한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시기에 도전해 오는 것은 삶이 아니라 죽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궁이라는 이름의 무덤 Tomb of the womb에서 무덤이라는 이름의 자궁 womb of the tomb까지 완전한 순환 주기를 산다. 그것은 꿈의 본질처럼 눈앞에서 곧 녹아버릴, 견고한 물질의 세계를 향한 모호하고 수수께끼 같은 흐름이다. 나 개인을 괴롭혔던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위험한 모험에의 두려움을 돌이켜볼 때, 결국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유사 이래 이 세계 방방 곡곡, 그리고 문명의 갖가지 위장 아래서 남녀가 더불어 경험한 일현의 상투적인 변신이야기 standard metamorphoses일 뿐이다. Ü (원형질의 세계 안에서 예정되어 있는 일상을 살고 있다는 말인가. 원형에서 변신되어 있는 자신의 육신의 모습을 하고 말이다. 그것인가.) (p. 24~25)

 

Ü 태양은 정오의 정점을 찍는 순간 황혼을 준비한다. 달이 차고 기울기를 12번 반복하고 해가 뜨고 지기를 365번 반복하고 해와 달은 다시 그 일을 ‘8 4’(무한의 개념) 번 반복한다. 거대해 보이는가. 그러나 이 단위의 무한함은 어제 제 어미에서 태어나 오늘 죽는 벼룩의 죽음 앞에 무참해 질 수도 있다.

 

□ 유피테르는 황소로 둔갑하여 에우로페를 취하고 미노스를 낳았다. 미노스의 아내 파시파에는 나무 모형으로 만든 소 안으로 들어가 황소와 사랑을 나누고 미노타우로스를 낳았다. 미노스는 자기 아내가 낳은 이 구역질나는 괴물을 제 궁전의 귀퉁이에 수많은 우회로와 굴곡으로 사람들의 눈을 홀리는 아주 이상한 미궁을 지어 가두었다. 그 괴물의 먹이로 로마에 사는 테세우스가 미궁 속으로 들어갔고 크레타 공주 아리아드네의 도움으로 미궁으로 들어갈 때 명주 실을 풀면서 들어갔다가 괴물을 죽이고 미궁을 무사히 빠져 나왔다. 테세우스와 공주는 섬에서 살다가 테세우스가 떠나버리는 바람에 공주는 혼자 섬에 남았다. 박쿠스 신이 이를 보고 이 공주를 하늘로 올려 왕관자리를 만들었다. (p. 25~27, 본문 요약 및 변신이야기 p. 339~343 차용)

 

왕이 된 이상 한 개인일 수 없는데도 그는 공적인 사건을 개인적인 이익으로 취했던 터였다. 수소의 재등장은 맡은 역할의 기능에 대한 철저한 복종을 상징했던 것 같다. 그런데도 이를 자기 소유로 하는 행위는 이기적인 자기 강화에의 충동을 나타낸다. 이렇게 해서 신의 은총을 입고 즉위한 왕은 자기 자신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위험한 폭군이 되었다. 전동적인 통과 제의가 개인에게 과거를 향해서는 죽고 미래를 향해서는 거듭 날 것을 가르쳤듯이 저 왕위 서임 의식은 그의 개인적인 성격을 벗기고 신명이라는 망토를 입혀주었다. 이것은 장인에게나 왕에게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제의를 거부하는 신성 모독 행위로 개인은 사회라고 하는 거대한 조직으로부터 하나의 단위로 떨어져 나오게 되었다. 이 하나가 부서져 여럿으로 분열하면서 각개 충돌(서로 자신을 억제할 수 없는)로 치달았다. 이렇게 되면 이를 통제할 수 있는 길은 힘뿐이다. (p. 27~28)

 

Ü 읽고 흘렸던 미노타우로스 이야기가 이와 같은 함의가 있었다. 불현듯 , 에 대한 열망이 끌어 오르는데 시간이 없다는 생각과 동시에 사유의 지평이 너무 좁다는 생각.

 

□ 대개는 제어하기 어려운 자신의 충동적 소유욕의 그림자인, 예상했던 주위의 공격에 스스로 놀라고 겁을 집어먹고 만나는 족족 싸우고 격퇴시키는 이 입지전적인 독재자의 에고는 아무리 세상에선 성공을 거두었을지라도 사실은 자신과 이 세계에 종말을 고하는 사자다. (p. 28)

 

Ü 허우적대면 댈수록 더 깊이 빨려 드는 늪과 같지 않겠는가. 오늘날의 탐욕적인 자본가의 모습이 포개어진다. 그것이 인류가 진보해야 할 방향과 다른 화살표를 하고 있다면 이 시점에서는 영웅의 귀환을 재촉하는 탐욕이 될 수 있겠다.

 

□ 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복종(자기 극복)의 기술을 완성한 인간이다. (p. 29)

 

Ü 18세기 사상가 에띠엔느 드 라 보에띠가 그의 책 자발적 복종에서 권력에 대한 대중의 자발적인 복종에 대한 매커니즘을 설명한다. 이를 영웅의 모습과 오버랩 해보면 영웅의 복종과 일반 대중의 복종이 정 반대의 방향으로 향하고 있음이 보인다. 결국 자신을 제압하는 각종 권위에 대한 대중의 자발적 복종은 영웅에게는 불복을 복종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인가.

 

□ 오직 탄생(낡은 것의 새로운 태어남이 아닌, 새로운 것의 탄생)만이 죽음을 정복할 수 있다. (p. 29)

 

C. G 융의 원형심상(원형심상, Archetypal image) (p. 31)

 

Ü 각주) 신화의 구성물인 동시에 무의식에 기원을 둔 토착적, 개인적 산물로서 세계 도처에서 나타나는 집단적 성격의 형태나 이미지를 말한다. 융 박사 자신이 지적하고 있듯이 원형 이론은 그의 독창적인 개념이 아니다. 니체의 다음 글과 비교해 보자.

 

잠잘 때나 꿈속에서 우리는 인간성의 사고를 꿰뚫어 체험한다. 내 말은 수천 년 전에 인간이 깨어 있는 상태에서 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꿈속에서 사유한다는 것이다. 꿈은 우리를 인류 문화의 이런 상태로 데려가고 그때에 관한 우리의 이해를 돕는 것이다.’

 

이 무슨 소린가. 우리가 지금 꾸는 꿈은 사진처럼 박제된 기억 저편의 실제 일들의 현현이란 말인가. 상상력의 진보라는 것이 원래 없었다는 이야긴가. 모든 생활 양식이나 인류의 사유 진보는 원래 그 총량이 한정 되어 있었다는 말과 같은가. 어지럽다.

 

각주) 루돌프 바스티안의 인종적 기본관념’elementary ideas’이론과 비교해 보자. 이 기본 관념은 최초의 심적 성격(스토아적인 생산적 로고스 logoi spermatikoi와 일치한다), 전체 사회적 구조가 유기적으로 발전되어 나온 영적 혹은 심적 근원적 경향으로 파악해야 하고 따라서 귀납적 연구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

 

프란츠 보아스 경과도 비교해 보자.

인류의 단일성 문제에 관한 바이츠의 전반적 검토가 있은 이후, 인간의 정신적 특성이 전세계에 걸쳐 대체로 동일하다는 논리에는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바스티안은 지구 위 어느 곳에 있든지 인류의 기본적인 관념은 놀라울 정도로 동일하다고 주장했다.

 

제임스 프레이저의 주장과도 비교해 보자.

고대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고 현대에도 있지만 우리 역시 서양인들이 동양의 고대 문명으로부터 죽음, 부활하는 신이란 개념, 그리고 이런 개념이 경배자들의 눈앞에 극적으로 진열되는 엄숙한 제의를 차용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동양 종교와 서양 종교에서 더러 발견되는 유사성은 다른 나라. 다른 하늘 아래서도 인간의 마음은 유사하듯이 유사한 동기에서 비롯한 우리가 줄잡아 우연이라고 부르는 것과 다름 아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비교해 보자.

나는 처음부터 꿈 상징의 정체를 알았다. 그러나 내가 안 것은 단편적인 정도에 불과했는데 경험이 늘어가면서 나는 그 범위와 의미가 얼마나 엄청난가를 이해했다. 이것은 빌헬름 슈테켈 덕분이었다. 슈테켁은 직관의 이해에 관한 천부적인 재능으로 직관을 통해 상징의 해석에 도달했다. 우리의 환자들은 정신분석의 경험을 쌓아감에 따라 이런 종류의 꿈 상징을 놀라운 정도까지 스스로 해석해 보였다. 이 상징은 비단 꿈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 관념 작용, 특히 사람들간에서의 무의식적 관념 작용의 특징이다. 이러한 상징은 민담이나 신화, 전설, 관용어, 잠언적인 결귀, 농담 따위에 꿈에서보다 더 완전한 형태로 나타난다.

 

박사는 원형이란 말을 고전, 즉 키케로, 플리니 연금술 대전, 어거스틴 등에서 차용한 것이라고 말한 바 잇다. 바스티안은 자신의 기본관념 이론이 생산적 로고스의 스토아적 개념에 대응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실제로 subjectively known form, 산스크리트어의 antarjneyarupa의 전통은 신화의 전통과 공존하는데 앞으로 자주 논의하게 되겠지만 이것은 신화적 의미의 이해와 이용에 필요한 열쇠이기도 하다. (p. 31~32)

 

Ü 이 부분은 정말 제대로 이해하기가 힘들다. 깊이 들어가 봐야 알 것 같은데, ~ 솜누스여.

 

□ 꿈은 인격화한 신화고 신화는 보편화된 꿈이며 꿈과 신화는 상징적이되 정신 역학의 동일한 일반적 시각에서 보아 그렇다. (p. 33)

 

□ 따라서, 영운은 과거 개인적, 지방의 역사적 제약과 싸워 이것을 보편적으로 타당하고 정상의 인간적인 형태로 환원시킬 수 있었던 남자나 여자를 일컫는다. 그래서 영웅은 현재의 붕괴되어 가는 사회나 정신에 대해서가 아니라 사회 재생의 심원한 원리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영웅은 현대인으로 죽었지만 영원한 인간(완전하게 되되 특이하지 않은 우주적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따라서 두 번째 엄숙한 과업과 행위는 (토인비가 주장하고 인류의 모든 신화가 보여 주듯이)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재생의 삶에 대해 그가 배운 바를 가르쳐주는 것이다. (p. 33)

 

□ 단테의 신곡 <지옥편> 3

 

나를 지나면 슬픔의 도시로 가는 길,

나를 지나면 영원한 슬픔에 이르는 길,

나를 지나면 길 잃은 무리 속으로 들어가는 길.

 

처음에는 입구가 보이는 하수도 (원문 비교: 조그만 개울, 죄 많은 여자들이 두루 나누어가진 그 붉은 빛깔을 생각하면 지금도 온 몸이 떨린다.) 그 다음에는 풀 위로 흐르는 맑은 (조그만 물결이 강 안에 자라는 풀을 어루만지는 강, 이 땅 위에서 가장 순수한 물은 아무것도 감추고 있지 않으면서도 무엇인가를 품고 있는 듯) 결정적인 순간의 조력자 (옛적 황금기를 노래했던 사름들은 우연히 파르나서스 산정에서 행복에 도취된 채 이곳을 꿈꾸었거니 이곳은 순진 무구한 인류의 뿌리, 이곳은 사시 장철이 봄, 백과난만하니 모두가 일러 제신이 먹는 과일이라 했다.) 출현, 강줄기 건너편에 있는 높고 탄탄한 땅

 

건너기 어려운 날카로운 칼날

시인은 노래했거니 이것이 험로라고. (p. 35~36)

 

□ 아무리 맹세하고 서원해도 절망적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란, 내부의 소명도 외부의 교리도 모르는 사람이다. 오늘날의 우리 대부분은 가슴 안팎으로 이 미궁을 안고 있다는 이야긴데 아, 미노타우로스와 맞설 용기를 심어주는 미궁 탈출의 단서와 괴물을 만나 도륙한 다음 우리를 자유의 길로 이끌어 줄 안내자, 저 아름다운 처녀 아리아드네는 어디에 잇는 것일까? (p. 37)

 

Ü 내 안에 있지 않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말이다.

 

□ 미궁으로 들어가는 영웅이 한 끝을 미궁의 입구에다 매어놓고 들어가면서 풀어야하는 실타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란 이 얼마나 하찮은 물건인가! 그러나 이나마 없으면 미궁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아무 희망도 없는 모험과 다름 없는 것이 아닌가. (p. 37)

 

Ü 우리에게 필요하거나 또는 우리가 획득해야 하는 것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닐 수도 있을 것 같다. 명예, 권력, money, 지위, 지식, 이상, 뭐 이런 것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 그렇다면 이 것들이 생의 목적이 되지 못한다면 한 순간 무너질 수도.

 

□ 그런데도 우리는 혼자서는 이 모험 길에 들어서지 못하고 있다. 모든 시대의 영웅들은 우리에 앞서 미궁으로 들어갔고 미궁의 정체는 모두 벗겨졌으며 우리는 단지 영웅이 깔아놓은 실만 따라가면 되는데도 그렇다. 추악한 것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우리는 신을 발견할 것이고 남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일 것이며 밖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던 곳을 통해 우리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외로우리라고 생각하던 곳에서 우리는 세계와 함께 하게 될 것이다. (p. 39)

 

Ü 먼 곳에 있지 않다는 어렴풋한 느낌만 있다. 책에서 구한다는 마음으로 책을 뒤적거리지만 넘쳐나는 수많은 금언들과 해라체의 자기계발서들에서 우리는 그 실을 구하지 못할 것이다. ‘은 잗다란 그런 것에 거하고 있지 않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럼 어디?

 

□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비슷하다. 불행한 가정은 각기 그 나름의 이류로 불행하다. (p.39)

 

□ 그리스의 비극과 마찬가지로 현대의 소설도 의절의 비의를 찬양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시간 속에 있는 인생이다. 해피 엔딩은 허위 진술로 경멸을 당하는데 이는 우리가 알고 보아온 한 이 세계에는 하나의 종말, 즉 죽음, 붕괴, 의절,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던 형태가 사위어감에 따라 일어나는 우리 마음의 십자가가 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p. 39) Ü 앞 선 북리뷰에서는 앞을 자르고 보았구나. 설명이 되었는가.

 

연민이란, 인간의 고통 중 엄숙하고 부단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하고 이를 고통 받는 사람과 하나가 되게 하는 감정이다. 공포는 인간의 고통 중 엄숙하고 부단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하고 이를 보이지 않는 원인과 하나가 되게 하는 감정이다. (p. 40)

 

Ü 어쩜 이리도캠벨 할아버지가 아낀다는 그래 그 james joyce.

 

□ 시공의 제약이 있는 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의 하찮은 논리와 정서적 집착으로 찾아 드는 죽음,

Ü 생의 유한성, 임시성이 주는 질문들. 그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사유의 여행. 나는 누구이며, 역사는 무엇이며, 원형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들은 흙으로 돌아가려 할 때 비로소 온몸을 흔들면서 승리의 찬가를 부르는 보편적 생명에 대한 이러한 재인식, 이 생명을 향한 우리의 가파른 중심 이동, 그리고 운명에의 사랑 amor fati.

 

미천한 종, 나의 날은 끝났다.

비밀을 밝혀라, 이다 산 요비스(제우스),

한밤중 자르레우스(디오뉘소스)가 배회하는 곳에서 나는 배회한다.

나는 자그레우스의 포효를 견디고

그의 진홍빛 피비린내 나는 축의를 치렀으며

태모님 산의 불길을 받아

나 역시 불붙어 이름을 얻으니

사슬 갑옷의 사제 바코스  (p. 41)

 

Ü 장례식을 치른 뒤에 우리는 꿀맛 같은 만찬에 기뻐하지 않았는가. ‘죽고 나니 이렇게 삶이 달구나’, 만약 죽어 깨어나지 않았으면 그 만찬의 달콤함의 몇 천 배를 느낄 수 있었을지도.    Amor Fati!

 

□ 현대 문학은 우리들 앞에 우리들 주위에 우리들 내부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참담하게 부서진 형체를 직시할 용기와 눈길을 부여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대학살의 참상에 불만을 토로하는 자연스러운 충동을 억압당하는 곳에서 비난도, 만병 통치약을 외칠 수도 없는 곳에서 비극 예술의 중요성은 그리스인들이 생각하던 것 이상으로 유효하다. 그리스인들이 생각하던 비극은 신들이 파국을 맞는 대신전에서는 물론 채찍에 찢긴 얼굴들이 들어 앉은 평범한 가정에서까지 십자가에 매달리는 현실적이고 본질적이며 흥미 본위인 민주주의의 비극이다. 거기에는 마왕에의 공포를 덜어 줄 천국, 내세의 천복, 보상에 대한 핑계 대신 오직 자궁에서 하릴없이 튀어나온 생명을 받아 먹어치우는 무위의 공허, 절대적인 어둠이 있을 뿐이다.

 

이 모든 것에 비추어보면 우리가 성취한 보 잘 것 없는 이야기는 얼마나 초라하고 눈물겨운가.

Ü 그러나, 그렇다고 눈물겹고 말 일인가. 눈물겨운 대로 우리에게도 나름의 신화가 있을 터.

 

우리는 실패와 상실과, 환멸과, 냉소적 무위의 쓰라림이 이 세상의 선망 받는 자들의 피를 말린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하늘의 신화가 삶의 발자국을 뒤로 남기고 밤의 문턱에 설 준비가 된 노인의 것이듯, 동화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아이들 나라의 것이며 현실로부터 보호받고 있기는 하나 조만 간에 거덜 날 운명에 놓여 있다.

 

동화, 신화, 그리고 영혼의 신곡에 나오는 해피엔딩은 모순이 아닌 인간의 보편적 비극의 초절성으로 읽히어야 한다.

 

냄비 속에서 끊는 물이 거품의 운명에 대해 우주가 은하의 생성과 소멸에 대해 그러하듯이 시간의 우유성에 대해 무심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비극과 희극은 삶을 계시하는 전체성을 본질로 공유하며 죄악(신의 의지에 대한 거역)과 죽음(필멸이 형태에의 동화)의 오염으로부터 정화(catharsis, purgatorio)되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사랑해야 하는 하강과 상승 kathodos and anodos인 것이다. (p. 41~42)

 

Ü 이 말은 이 책의 348~350 페이지에 나오는 자가 생산을 위한 양극화 중 인간의 감정 변화 version 인 듯 하다.

remind ‘마오리족의 형이상학적 족보

회임에서 생산이,

생산에서 생각이

생각에서 기억이

기억에서 의식이

의식에서 욕망이

 

언어가 풍성해졌다.

언어는 어렴풋한 인식 안에 있었다.

언어가 밤을 만들었다.

큰 밤, 긴 밤,

낮은 밤, 아주 높은 밤,

두껍게 느껴지는 밤,

만져지는 밤

보이지 않는 밤

죽음과 더불어 끝나는 밤.

 

무에서 출산이

무에서 생산이

무에서 풍요가

생산의 힘

살아 있는 숨결

숨결은 빈 공간에서, 우리 위에 있는 대기를 생산했다.

 

대지 위에 떠 있는 대기

우리 위에 있는 거대한 창공은

새벽과 동거했다.

그리고 달이 생겨났다.

우리 위의 대기는

빛나는 하늘과 동거했다.

이어 태양이 생겨났다

달과 태양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하늘의 큰 눈처럼

이어 하늘은 빛이 되었다.

이른 새벽과 이른 낮이 되었다.

한낮, 하늘에서 쏟아지는 한낮의 빛이 되었다.

우리 위의 하늘은 하와이키와 동거하여

땅을 낳았다. (p. 348~350)

 

□ 이 모든 것에 비추어보면 우리가 성취한 보 잘 것 없는 이야기는 얼마나 초라하고 눈물겨운가. (p. 42)

 

Ü 그러나, 그렇다고 눈물겹고 말 일인가. 눈물겨운 대로 우리에게도 나름의 신화가 있을 터.

 

□ 모든 것은 변하고 있으나 아무것도 죽지는 않는다. 영혼은 여기저기를 방황하다 마음에 드는 뼈대를 취한다. 따라서 한번 존재한 것은 다시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존재하게 되니 모든 운행의 주기는 반복한다.

 

이 몸뚱이는 죽어 없어지지만 이 몸 속에 와 계시는 실재 self는 영원하며 불멸이며 무한이니라. (p. 43)

 

Ü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 중에도 이 말은 있다. 실재의 총량이 이미 정하여 진 것이라면 영혼의 선택에 따라 그 모습을 변신해가며 현현하는 것인가. 그러면 죽음은 무엇인가. 단지 껍데기의 죽음일 뿐이지 않는가. 그런데 우리의 감각은 고통을 느끼는 물리적 감각은 어찌하여 영혼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는가. 그것을 왜 육체가 느끼는가. 영혼은 이렇게 육체와 하나가 되어 잘 지내다가 때가 되면 육신이 죽음에 이르면 그대로 다른 몸으로 옮기게 되는 것인가. 그 때 이전의 육신에서 얻어진 지혜와 사유의 곳간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는가 아니면 그대로 유지되어 가는가. 여기서 말하는 무한이라는 것은 결국,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프루스트는 이런 신비한 기억의 소생과 관련하여 켈트 신앙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들의 잃어버린 사람들의 영혼은 어떤 하등한 존재, 짐승이나 식물이나 생명 없는 물건 속에 갇힌 채 우리들에게는 실제로 사라지고 없는 상태로 있다가 우리가 어느 날 나무 옆으로 우연히 지나가다가 그 영혼의 감옥이 된 물건을 소유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의 경우 이런 일은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수 있지만) 그제서야 영혼은 홀연 소스라치면서 우리를 부르고 또 우리는 즉시 그들을 알아보게 되어 마법이 풀리는 것이다. 우리들 덕분에 해방된 영혼들은 죽음을 이겨내고 다시 우리 인간들 가운데 돌아와 살게 된다.’

 

신화적 영웅의 길은 부수적으로는 지상적일지 모르나 근원적으로는 내적인 길이다. , 보이지 않는 저지선이 뚫리고 오래 전에 잊혀졌던 힘이 다시 솟아 세계의 변용에 기여하게 되는 그런 심연으로 뚫린 길인 것이다. 이러한 영웅의 행위가 완성되면 삶은 더 이상 도처에 도사린 재앙의 가혹한 단죄와 시간에 의한 마손이나 막막한 공간의 두려움 앞에서 무방비 상태로 고통 받는 일이 없게 된다. 뿐인가 공포는 눈앞에 여전히 복이고 고뇌의 울부짖음은 여전히 귀에 들리나 삶은 모든 것을 채우고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과 정복되지 않는 힘의 자각으로 다시 생기를 얻는다. (p. 44)

 

Ü 내적 깨달음이 완성될 때의 모습인가. 깨달은 자들이 가난하고 약해도 사회의 천박한 권위에 휘둘리지 않는 원리가 이런 것 인가.

 

□ 영웅이 치르는 신화적 모험의 표준 궤도는 통과 제의에 나타난 양식, 즉 분리, 입문, 회귀의 확대 판이다. (p. 44)

 

영웅의과정.JPG

 

일상적인 삶의 세계에서 초자연적인 경이의 세계로 떠나고 여기서 엄청난 세력과 만나고 결국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영웅은 이 신비스러운 모험에서 동료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힘을 얻어 현실 세계로 돌아오는 것이다. (p. 45)

 

□ 해지기 전에 이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정복자는 초저녁에 자기의 전생을 알았고 한밤중에는 사물을 두루 꿰뚫는 혜안을 얻었으며 새벽녘에는 인과를 깨쳤다. 그는 날샐 무렵에 완전한 정각을 얻었던 것이다. (p. 47)

 

Ü 각주) 이것은 서양의 십자가에 못 박히는 상태에 대응하는 동양 신화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정각수 아래의 부처와 십자가 나무 위의 그리스도는 유사한 것으로 원형적인 세계의 구원자와 태고의 유물인 세계수 모티프를 통합한다. 이 테마의 변형은 앞으로 소개하는 이야기에서 자주 발견 될 것이다. 고전적인 부처의 좌상은 오른손을 오른쪽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손가락은 가볍게 땅에다 대고 있다.

 

이때 그는 자신이 얻은 소식을 남들에게 전할 수 있을지 가늠해 보다가 당분간은 홀로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Ü 영웅이 다시 귀환할 때의 망설임, ‘귀환의 거부이 문장은 이 책의 253페이지와 연결된다. Remind ’그러나, 영웅이 이 책임을 회피한 예는 너무나 많다. 심지어는 부처까지도 정각이라는 승리를 얻은 뒤에 이 소식이 대중에게 전해질 수 있을지 여부를 의심했고 성자들 중에는 천상적인 무아지경에서 몰한 성자가 많은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실제로 많은 영웅들이 불로 불사 여신의 축복받은 섬에 아예 영원히 눌러앉아 버린 것으로 전해진다.’ (p. 253~254) 그러나 신 브라마가 하늘에서 내려와 그에게 신들과 인간의 스승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부처는 그의 말에 승복, 자신이 깨친 도리를 전파하기로 작정하고는 자신이 속인들과 함께 살던 도시로 돌아가 정도의 법이라는 귀한 은혜를 두루 전파했다. (p. 48)

 

Ü 그것은 말하여질 수 없는 것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럴 때 침묵하라 강조한다.

각주) 정각은 말로써 전할 수 없고 不立文字 오직 정각에의 방법만 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름과 형태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진리의 불립 문자 교리는 플라톤 철학에서와 마찬가지로 동양 전통의 근간을 이룬다. 과학의 진리는 관찰할 수 있는 사실에 근거해서 논리적으로 세워진 논증할 수 있는 가설이기 때문에 전달이 가능하지만 제의 신화 그리고 형이상학은 초월적인 조명 가까이까지 인도받는 것은 가능하나 거기에 접근하는 마지막 단계는 개인의 조용한 체험으로써만 가능하다.

 

영웅이 부처처럼 승리를 거두고 완전한 정각 상태에 들어버린다면 이 경험의 만족감이 세상의 슬픔에 대한 그의 기억과 흥미와 희망을 없앨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Ü 그리하여 신 브라마가 내려와 신들과 인간들에게 스승이 되라 하며 친절하게 이르지 않았는가.) (p. 51)

 

Ü 그럴 수도영웅이 그러한 상태에 들 때는 어떻게 되는 건가. 영웅이 아니게 되는건가. 

 

□ 보잘것없는 영웅이든 탁월한 영웅이든 그리스 영웅이든 야만족의 영웅이든 이방인의 영웅이든 유태족의 영웅이든 영웅의 행장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모험의 형태, 등장인물의 역할, 마침내 얻은 승리의 내용물에는 놀라울 정도로 별 차이가 없다. (p. 53)

 

돌이켜 보면, 모험적인 여행은 성취하기 위한 노력이 아닌 재성취하기 위한 노력, 발견하기 위한 노력이 아닌 재발견하기 위한 노력이었던 듯하다. 영웅이 애써 찾아다니고 위기를 넘기면서 얻어낸 신적인 권능은 처음부터 영웅의 내부에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p. 54)

 

Ü 자신 안에 이미 있다. 이 문장을 왜 놓쳤을까. 이미 완벽한 상태의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인 인간의 생은 자신 안에 이미 있는 영웅의 모습, , 신화를 재발견하고 성취하려는 여정이었다. 결국, 신화란 인간이 생각하는 인간 원형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 나는 너고 너는 나다. 네가 어디로 가건 나는 거기에 있다. 나는 없는 곳이 없으니 원하면 언제든지 나를 찾으라 나를 찾는 것은 곧 너를 찾음이다. (p. 55)

 

Ü 신화의 힘에서 유사한 설명이 언급된다.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는 죽음과 재생을 통하여 계속해서 우리 안에 존재합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시바신과 동일시해도 좋겠지요. 나는 시바신이다. 이것은 히말라야 요가 행자들이 수행하는 명상의 가장 중요한 화두이기도 하답니다. (P. 86)’

일체화, 빙의, 자리바꿈, 역할 전환. 수행의 방법 곧 신화를 체화하는 방법이다.

 

□ 은총, 양식, 에너지, 이러한 것들이 나날의 삶이 있는 이 땅으로 내려오는데 이것들이 내려오지 않으면 살아 있는 것들은 죽을 뿐이다. (Ü 물리적으로만이 아니라 영혼으로도 죽을 수 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많이 보았다. 돈을 위한 악만이 남은 재벌 총수에게서 영혼을 볼 수 있는가.)

이 분류는 보이지 않는 원천 우주라는 상징적 원의 중심인 입구, 불교에서 말하는 부동의 자리에서 흘러나오는데 세계는 이곳을 중심으로 순환한다고 일컬어진다. (p. 58)

 

Ü immovable spot! Axis mundi!

 

□ 북 켄서스와 남 네브라스카에 사는 포니족의 하코(hako)의식

이 원은 둥지를 나타내고 이를 발가락으로 그리는 것은 독수리가 발로 둥지를 짓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록 새가 둥지를 짓는 것을 흉내 내고 있으나 이러한 행위에는 또 다른 뜻이 있다. 우리는 사람들이 살 수 있도록 세상을 지어준 티라와를 생각하는 것이다. (p. 59)

 

Ü 이 말, 어디서 많은 들어본 것 같다. 신화의 힘에서 마술사가 그리는 마력의 자장. 대지의 큰 원형(圓形)이 신화의 자장이자, 하늘에서 조건 지어준 것들의 터전이라면 너와 나, 우리 모두는 같은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배우다.

 

□ 태양은 희생 제물로 풍성한 끊임없이 새 음식으로 가득 차는 신의 쟁반이고 신의 살은 고기며 신의 피는 마실 것이다. 동시에 신은 인간에 대한 자양의 공급자다. 난로를 점화하는 햇빛은 신적 에너지와 세계의 자궁과의 교합을 상징한다. (p. 60)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p. 60)

 

Ü 요한복음에 나오는 성경의 말씀인데 이 말은 모든 사람은 이미 그 안에 자신만의 예수가 살고 있고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예수라는 인간은 그것을 알아차린 사람이며 누구든 자신의 소명(살과 피)을 깨닫는 순간 모두가 예수가 될 수 있다. 이런 말이 아닐까. 말하기는 쉽다.

 

Ü 우리가 물리적인 눈으로 볼 수 있는 시력은 사실 단지 보여지는능력이 아니라 신의 현현으로 이루어진 고기와 피들을 볼 수 있는능력 이라야 한다. 혜안과 법안이 필요하다.

 

따라서 세계의 배꼽은 도처에 있다. (p. 62) axis mundi!

그리고 이곳은 존재의 근원이기 때문에 세상의 하고 많은 선과 악을 두루 산출한다. 추한 것, 아름다운 것, 최악과 미덕, 쾌락과 고통이 모두 이 세계의 배꼽의 공평한 산물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르기를 신에게는 모든 것이 공정하고 선하고 정당하지만 인간은 어떤 것을 그르다고 하고 어떤 것을 옳다고 한다고 했다. 세계의 사원에서 섬김을 받는 대상은 늘 아름다운 것도 늘 자비로운 것도 아니며 덕이 높을 필요도 없다. 욥기에 나오는 신처럼 그들은 인간의 가치 척도를 저만큼 앞지른다.

 

신화도 위대한 영웅을 위대한 도덕가로는 다루고 있지 않다. 미덕 역시, 최고의 직관 앞에서는 케케묵은 훈장의 읊조림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직관은 짝짝으로 된 상대적 반대 개념을 초월한다. 초월적 힘은 이 모든 것을 통하여 모든 것 안에 사는 자, 모든 것 안에서 훌륭한 자 모든 것 안에서 우리의 섬김이 타당한 자에게 감득되는 것이다. (p. 62)

일찍이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닮지 않은 것이 상합하고 서로 다른 것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화가 이루어지며 모든 것은 다툼에 의해 생겨난다.

 

또 시인 블레이크도 비슷한 말을 한다.

사자의 포효, 이리의 울부짖음, 성난 바다의 광란, 그리고 피를 부르는 칼은 인간의 눈에는 과분한 영원의 편린들이다.  

Ü 우리가 지금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것들은 그 자체가 우주적 영원의 소산인 것.

 

Ü 이 말씀 새롭다. 내게 없던 시선이다. 존재 너머의 세계는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곧 모든 것이 가치 있는 것이고 모든 것이 무가치한 것이다. 시간, 윤리, 에너지불멸의 존재 앞에서는 무참해 지는 것이 느껴진다.

 

신화의 제신이 웃는 웃음은 적어도 현실 도피자의 웃음이 아니라 삶 자체만큼이나 무자비한 웃음이다. 우리는 이것을 신, 즉 창조자의 무자비함이라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이런 의미에서 신화는 비극적인 자세를 신경질적인 것으로 도덕적인 판단을 근시안적인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이 무자비함은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고통에 의해서는 손상되지 않는 끈질긴 힘의 그림자이지 다른 것이 아니라는 언질로 균형을 회복한다. 그러므로 이야기란 무자비하면서도 공포를 느끼게 하지 않는다. 요컨대 제때에 나고 죽는 자기 중심적이며 투쟁하는 자아를 응시하는 탁월한 정체 불명의 기쁨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p. 65)

 

Ü 알 수 없는 에너지로 인해 우주는 움직이지만 그 에너지는 우리 사유의 밖에 있어서 가끔씩 그 에너지가 우리가 지닌 윤리, 도덕을 벗어난 일을 벌일 때도 있다. 그때 우리는 우리만의 시각으로 판단하여 공포의 극을 향하고 두려움을 느끼지만 사실 그것은 존재 너머의 에너지가 세상의 균형을 맞추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나의 의문은 캠벨이 인도의 한 구루를 만나 묻는 질문과 같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니라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인가?’ 천박한 자본이 영혼을 압살하는 지금을 아니라고 하여서는 안 되는 것인가 말이다. ‘아니라고 하는 것이 미친 자본에 대한 균형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1부 영웅의 모험

1. 출발(Departure)

 

□ 세상구경이라면 할 만큼 한 태양도 이 막내딸의 얼굴을 비출 때면 오히려 제 얼굴을 붉혔을 정도였다. (p. 69)

 

□ 욕망과 갈등이 억압된 결과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부지중에 표출된 삶의 표면에 잡힌 주름이다. 그리고 이 주름의 골은 매우 깊다. 영혼 그 자체만큼이나 깊다. 실수는 운명의 시작에 해당되는 수도 있다. (p. 71)

 

Ü 니체는 옛날 사람들의 실제 행동했던 모습이 현재의 우리의 꿈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그리고 카잔차키스는 영혼의 자서전에서 말한다. ‘시간은 무한하지만 물질은 유한하다는 생각을 방금 하고 그대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따라서 필연성에 의해 물질의 이 모든 조합이 과거와 똑같이 다시 태어날 새로운 순간이 오리라. 앞으로 수천 세기가 지나면 그대와 같은 사람이 정말로 그대와 똑같은 사람이 바로 그 바위에 다시금 서고 똑 같은 사상을 재발견하리라.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무수히 여러 번. 그리하여, 보다 훌륭한 미래에 대한 희망은 없었고 구원도 없었다. 우리들은 시간의 수레바퀴에서 변함없이, 똑같이 회전한다. 따라서 가장 덧없는 사물들까지 영원성을 얻었고 가장 무의미한 우리 행동들은 헤아릴 수 없는 중요성을 지니게 되었다.

융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의 마음은 신체와 마찬가지로 조상 대대로 이미 존재해온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개별적인 인간의 마음에서 새로운 것이란 아득한 옛날의 구성요소들이 끝없이 변화하여 재결합된 것이다. 그러므로 신체나 마음은 현저하게 역사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새로운 것 즉 방금 생겨난 것 속에는 알맞은 자리를 찾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조상의 특징들은 그 속에 단지 부분적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우리의 정신이 필요로 하는 바도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중세와 고대, 원시시대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와 반대로 우리는 발전의 분류로 휘말려 들어가 거친 폭력으로 미래를 향해 밀려가고 있으며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우리의 뿌리로부터 떨어져나가게 된다.

옛 것이 한번 파괴되면 그것은 대부분 아예 없어지고 만다. 그리고 파괴적인 전진은 결코 그칠 줄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이러한 관계성의 상실이며 근원과의 단절로서 문화 속의 짜증과 성급함을 야기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발전의 역사가 아직 전체적으로 완성되지 않은 현재에 사는 대신 미래에 살며 황금시대가 오리라는 터무니없는 약속에 의지한다. 사람들은 점점 깊어지는 결핍감과 불만, 초조감에 사로잡힌 채, 새로운 것을 향해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돌진하고 있다. 사람들은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미래의 약속에 의지하여 살고 있으며 현재의 빛 속에서 살지 않고 미래의 어둠 속에서 살고 있다. 사람들은 그 어둠 속에서 적절한 때에 해가 솟아오르기를 기대하고 있다.

사람들은 모든 좋은 것이 나쁜 것들의 대가로 얻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보다 큰 자유에 대한 희망은 국가에 대한 예속의 증대로 사그라들고 만다. 가장 눈부신 과학의 발전이 우리에게 끔찍한 재앙을 가져온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아버지와 어버지의 아버지들이 찾던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못할수록 우리도 그만큼 더욱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온 힘을 다하여 개인의 근원과의 단절이 심화되도록 부추긴다. 그러면 각 개인은 집단의 한 부분으로 단지 중력의 혼(니체가 말한 집단정신)을 따라 가게 된다.

시간을 단축하는 조치들은 아주 불쾌한 방식으로 속도만 빠르게 하여 이전보다 더 시간이 부족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래서 옛 스승들은 항상 이렇게 말하고 했다. ‘성급함은 마귀에서 나온다.’

신화의 힘에서 소개되었던 시애틀 인디언 추장의 편지를 다시 새겨보자.

‘우리는 이 땅을 갓난아기가 어머니의 심장 소리를 사랑하듯 사랑합니다. 그러니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우리가 사랑했듯이 이 땅을 사랑해주시오. 우리가 보살폈듯이 보살펴주시오. 그대들의 것이 될 때 이 땅이 간직하고 있던 추억을 그대들 마음속에 간직해 주시오.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이 땅을 잘 간직하면서,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듯 이 땅을 사랑해주시오.

우리가 이 땅의 일부이듯, 그대들도 이 땅의 일부올시다. 이 지구는 우리에게 소중합니다. 이것은 그대들에게도 소중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한 분뿐이라는 것을 압니다. 홍인종이 되었든 백인종이 되었든 인간은 헤어질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우리는 결국 형제인 것입니다.’ ‘인용

 

□ 작은 용인 개구리는 머리로 세계를 버티는 심연의 생성적, 조물주적 힘을 상징하는 지하 세계 뱀의 유아기적 대응물이다. (p. 72)

 

□ 프로이트는 불안한 순간은 어머니로부터 분리될 때의 고통(탄생하는 순간의 숨이 막히고 피가 응어리지는 등의)을 상기시킨다고 지적한 바 있다. 거꾸로 말하면 분리와 탄생의 순간은 불안을 야기시킨다. 에덴 동산의 낙원을 떠날 만큼 성숙한 신의 딸 이브의 경우든 사바 세계의 마지막 지평을 뛰어넘는 순간의 전심 전력하는 미래 부처의 경우든 위험, 안심, 입면, 시련과 극복, 그리고 탄생이라는 신비의 기이한 신성을 상징하는 원형 이미지와 똑같다. (p. 73)

 

□ 꿈에서든 신화에서든 갑자기 한 사람 생애의 새로운 시대, 새로운 단계를 암시하면서 이런 모험에 등장하는 인물은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분위기를 갖는다. 주인공이 필연적으로 맞서야 하는 무의식적으로는 상당히 익숙해져 있는(의식적으로는 알지도 못할 뿐 더러 놀랍고 무서운 존재로 여겨지는) 이 인물은 자기 정체를 밝힌다. 그리고 이때 주인공은 이전에 자신이 의미를 부여하던 사물이 이제 무가치하게 되어버리는 상황을 경험한다. (p. 77)

 

이 신화적 여행의 첫 단계(우리는 이를 모험에의 소명으로 불렀다)는 운명이 영웅을 불렀고 영웅의 영적 중심이 그가 속한 사회에서 미지의 영역으로 옮겨졌음을 암시하고 있다. (p. 80)

Ü 두렵지만 한 발짝 들여놓는 일

 

□ 각주) 필자가 바라기로는 각주에 실린 책들을 일별하면서 방대한 이야기 중의 일부를 한가하게 즐겨주었으면 한다. (p. 80)

 

Ü 캠벨 할아버지, 한가하게 볼 수가 없어요. 얄미워.

 

□ 소명에의 거부는 모험을 부정적이게 한다. 타성이나 힘겨운 일 혹은 문화의 장벽 때문에 모험의 주체는 의미 심장한 긍정적 행동력을 잃고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버리는 것이다. (p. 81)

 

Ü 그러면 영웅이 아니게 되는 건가. 영웅의 track을 충실히 따르지 않으면 영웅이었던 사람이 영웅이 아니게 되는 건가 말이다.

 

□ 소명을 거부할 경우, 무슨 집을 짓건 그가 짓는 것은 죽음의 집이다. 자기의 미노타우로스를 숨기는 퀴클롭스 식 미궁일 뿐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내면서 파멸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너희는 불러도 들은 체도 않고

손을 내밀어도 아랑곳하지 않는구나.

너희가 참변을 당할 때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운 일이 닥칠 때 내가 비웃으리라.

두려움이 태풍처럼 덮치고

참변이 폭풍처럼 몰아치며

기막히고 답답한 일이 들이닥치면

그제야 너희들은 나를 부를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은 나에게 등을 돌렸다가 파멸하고

미련한 자들은 마음을 놓았다가 나동그라진다.

 

예수의 길을 두렵게 여겨라, 그는 돌아오지 않을 것임이다.

Time jesum transeuntem et non revertentem (각주, 라틴어)

 

미래란 생과 사의 부단한 연속만은 아니다. 개인이 가진 현재의 이상과 미덕과 목적의 체계가 어떻든 이득이 마땅히 따라야 하는 것이고 또 보장되어 있다. 미노스 왕은 그가 속한 사회의 신의 의지에 복종한다는 의미로 희생을 드려야 하는 신의 수소를 사유물로 취했다. 그는 자기 상상력보다는 경제적 이득을 앞세웠다. 때문에 그는 자기에게 맡겨진 생의 역할을 감당하는 데 실패했고 우리가 보았듯이 엄청난 불운을 겪어야 했다. 신성이 그 자신의 적이 된 것이다. 개인이 자기 자신의 신이기를 고집하면 신의 의지 즉 자신의 자기 중심적 체계를 파괴할 수 있는 힘인 신 자신은 괴물로 변하는 것이다. (p. 82)

 

Ü 악마와의 키스다. 단호하기 이를 때 없지만 결국,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단초가 된다. 이것은 신에 대한 항명이라고 봐도 무방한가. 그렇다면 모든 윤리와 도덕의 가치는 물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권위에 대한 도전은 철저히 보복 당할 수 있는 것이겠다. 이 또한 이해가 잘 되질 않는다.

 

정신분석학 보고서에는 이런 위험한 유아기 고착 desperate fixation의 사례가 얼마든지 나온다. 이러한 사례들은 당사자가 유아기적 자아 그리고 유아기적 정서 관계 및 이상의 틀을 벗어나지 못함을 보여주고 있다. 당사자는 유아기의 벽에 갇혀 있다. 이 경우 아버지나 어머니는 문턱을 지키는 사람으로 버티고 있어서 그들의 징벌을 두려워하는 소심한 영혼은 문을 열고 외부 세계로 나오는 재생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다.

 

Ü 그래서 소명에의 참여를 거부하거나 참여하려고 해도 할 수 없게 된 상태가 되었기 때문.

 

양의 땅에 있는 꿈을 꾼 바로 그 청년의 꿈이다. 양의 땅이란 말하자면 미자립 (未自立, unindependence)의 땅이다.  (p. 84~85)

 

Ü 아폴론이 사랑하게 된 다프네가 나무로 변신하는 이야기는 이렇게 깊은 함의가 있었다. 아폴론에게서 쫓기던 다프네가 아버지에게 도와달라는 요구는 거세 콤플렉스 즉 castration complex의 신화적 해석이다.

 

□ 주저한다고 다 길을 잃는 것은 아니다. 마음은 많은 비밀을 여축으로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비밀은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막혀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소명의 거부에 따르는 부정적인 상태가 뜻밖의 해방의 원리에 대한 행운의 계시일 수도 있다. 실제로 고의적인 내향성은 창조적인 정신의 고전적인 방편 중의 하나이고 이를 효율적인 장치로 응용할 수도 있다. 이 방편은 심적 에너지를 심층으로 몰아 무의식적 유아기의 이미지 및 원형적 심상이라는 잃어버린 대륙을 활성화시킨다. 그 결과 의식의 분열이 다소간 일어날 수 있음도 물론이다. 그러나 인격이 이 새로운 힘을 흡수하고 통합할 수 있으면 당사자는 자기 의식의 초인간적인 단계 및 완전한 통제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된다.

 

일종의 주어진 삶의 방식에 대한 철저한 파업 혹은 폐기라고나 할까. 그 결과 변형의 힘은 문제를 새로운 자장으로 끌어내는 수가 있다. 이 자장에서 문제는 어느 한 순간 마침내 풀릴 수 있는 것이다. (p. 87~88)

 

□ 신경증적 유형과 생산적인 유형을 비교해 보면 전자는 자기 자신의 충동적인 삶에 대한 과도한 관심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양자는 평균적인 유형과는 기본적으로 다르다. (p. 88)

 

Ü 88페이지의 내용은 이해하기 힘들다. 2번 읽은 때 유심히 보도록 하자. 3번 읽었으나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 이 작업은 창의적인 창조 과정은 분리시키고 이를 이념적인 추상서응로 변용시키지 못한다. 창조적인 예술가 역시, 자신의 재창조 작업에서 시작, 이념적으로 자아를 구축한다. 그러나 이 경우 이 자아는 자기 속의 창조적인 의지력을 그 자신의 이념적인 추상으로 변화시켜 객관화시키는 입장에 서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어떤 의미에서는 개인의 내적인 문제에 국한되며 건설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파괴적인 측면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생산적인 작품치고 신경증적 성격의 병리적 위기가 없는 작품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설명해 준다. (p. 88)

 

여자에게 고삐를 잡히는 사내는 물거품이 된 희망으로 벌금을 문다. (p. 89)

 

Ü 그런 것 같다. 공감이 간다. 좋은 문장이다.

 

□ 소명을 거부하지 않은 모험 당사자는 영웅적인 편력 도중 첫 번째 보호자를 만난다. 노파나 노인의 모습으로 자주 등장하는 이 보호자는 모험 당사자가 곧 만나게 되는 용과 맞설 호부를 준다. (p. 93)

 

Ü 사회적 강요에 의한 결혼을 거부함으로써 소명을 받아들인 카르마 알 자만과 가주르왕의 딸은 파괴적 징벌의 고통을 말하려는 것 인가. 92 페이지의 내용 말이다.

 

□ 삼계의 위난을 안전하게 두루 거친 끝에 단테는 이렇게 기도한다.

성모여 당신은 살아 있는 희망의 원천입니다. 성모여 당신은 하도 크시고 은혜로우시어 그 은총을 입되 당신을 거스르지 않는 자는 날개 없이도 나는 소원을 이루겠습니다. 당신의 자비는 구하는 자는 물론 미처 구하지 못하는 자에게까지 두루 미칩니다. 당신의 자비는 당신의 연민, 당신의 품위, 당신의 온갖 미덕 안에서 모든 피조물은 모두 하나가 됩니다.’ (p.96)

 

□ 모험을 나선 당사자가 그것을 알고 그 존재를 믿기만 하면 시공을 초월한 안내자는 언제나 나타난다. 대자연 mother nature은 항상 위대한 임무를 지원한다. 영웅의 행동이 그 사회가 예비하고 있는 것과 일치될 때 그는 흡사 역사적 변화의 리듬을 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러시아 원정에 즈음해서 나폴레옹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미지의 종국으로 (신에 의해) 떠밀리는 느낌을 받고 있다. 내가 그곳에 이르는 순간 내가 불필요하게 되는 순간 나를 갈가리 찢는 데는 한 입자의 원자면 충분하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인류가 힘을 모두 합치더라도 나를 해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신과 함께 하고 있으므로) (p. 97)

Ü 지도자의 탄생은 이러하겠다. 하지만 선/악의 구분은 하지 않으신다. 그 영웅의 행보는 가치화가 불가능하다.

 

Ü 나폴레옹의 이 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한번 파도를 느끼고 그 해류를 타기 시작하면 작은 물고기도 대양을 건널 수 있고 6000m 상공의 기류는 민들레 작은 꽃을 대륙으로 이동시킬 수 있는 것이다.

 

각주) 경험주의 적이던 나폴레옹 자신이 마렝고에서 몰락했던 사실을 생각하면 그가 한 말은 다른 형태로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고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탈인격화한 영웅은 역사적인 행위를 실천할 동안 실재로서의 자신과 형이상학적인 율동을 가진 다른 실재 사이에다 문화적 변천의 동력을 부여한다. (p. 97)

 

□ 의식적인 개성에 대한 보다 광범위한 체계 및 우리가 따르는 안내자의 불가사의한 힘에 의한 후원은 우리의 이성이 헤아리지 못하는 영역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조력자를 맞는 영웅은 소명에 응답한 영웅일 경우가 보통이다. 실제로 소명은 통과 제의의 사제가 접근하고 있음을 알리는 첫 번째 통고다. (p. 98)

 

□ 공주님 코는 잘 갈아놓은 면도날 같고 뺨의 빛깔은 포도주 빛, 아니면 핏빛 아네모네 같습니다. 입술은 산호나 빛나는 홍옥주 같고 그 입술 안에 고이는 침은 오래된 포도주보다 감미롭습니다. 이를 마시면 지옥의 고통도 잊을 수 있을 것입니다. 혀는 움직였다 하면 기지와 현답이 넉넉합니다. (이 가슴을 빚은 분에게 영광 있을진저!) 이 가슴 위로 매끄랍고 보드라운 두 팔이 뻗어 나와 있습니다.

 

팔찌 없는 그 손목

가랑비에 젖은 채 소매에서 나와 있네. (p. 103)

 

Ü 여기에 젖은 머리카락 목덜미에 착 붙은 모습이라면넘어간다.

 

이 수호자 뒤로는 어둠이며 미지의 세계이며 위험이다. 부모의 감시 밖이 아이들에겐 위험 지역이고 사회의 보호 밖이 종족의 구성원들에겐 위험 지역인 것과 마찬가지다. 보통 사람들이면 여기에서 만족한다. 심지어는 표시된 경계선 안에 안주하는 데 만족하기까지 한다. 집단의 보편적 믿음이 미지의 땅으로 첫 발을 내딛으려 하는 사람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p. 105)

 

Ü 여기서부터의 한발 짝은 이제껏 살아온 자신의 생애 전체의 긴 여정보다. 힘이 든다. 대부분 이 한 걸음에서 결판이 난다. 이것이 trigger point. 부모의 감시 밖이 아이들에겐 위험 지역이고 사회의 보호 밖이 종족의 구성원들에겐 위험 지역인 것과 마찬가지다. 보통 사람들이면 여기에서 만족하기 때문이다.

 

□ 미지의 땅(황야, 밀림, 심해, 타향 등)은 무의식의 내용물이 자유롭게 투사되는 무대다. 근친 상간 리비도 libido와 부친 살해의 데스트루도 destrudo는 거기에서 폭력의 위협과 가공의 위험한 환희를 암시하는 형태로 도깨비는 물론 신비스러운 정도로 매혹적이고 향수를 유발할 정도로 아름다운 세이레네스(사이렌)으로 개인과 사회에 다시 투사된다. (p. 107)

 

Ü 영웅의 거처로구나. 근데 이 사이렌이 경찰자의 사이렌과 같은 말인가.

 

□ 각주) 프로이트 박사는 발은 신화에서도 자주 나타나는 연조가 깊은 성적 상징이라고 쓰고 있다.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오이디포스 oedipus란 말은 부어 오른 발을 뜻하고 있다는 것이다. (p. 107)

 

플루타르코스는 퀘벨레의 황홀경, 디오뉘소스의 바카스적 광란, 무사이(뮤즈)에 의한 시적인 광란, 아레스(ares=mars)의 전투적인 광란, 그리고 이성을 뒤집어엎고 파괴적 창조적 비밀을 방출하는 신에 대한 열광의 실계 가운데서도 가장 격렬한 사랑의 광란을 열거하는데 이 판 밀의의 황홀경도 그 중의 하나로 꼽고 있다. (p. 110)

 

모험이란 기지의 세계에서 미지의 세계로 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어느 나라에든 어느 시대든 마찬가지다. 이 기지의 세계와 미지의 세계를 가르는 경계선의 수호자는 극히 위험한 존재다. 그들과 만난다는 것은 그만큼의 위험부담을 안아야 가능하다. 그러나 능력과 용기를 갖춘 사람 앞에서는 위험은 그 꼬리를 감추고 만다. (p. 112)

 

Ü 기지에서 미지로 가는 과정은 과거에서 현재를 넘어 미래로 가는 것과 같이 가만히 있어도 실현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구나. 미지는 제 스스로 발을 뻗어 찾아가야 하는 길이었다. 이 말은 내 삶의 지표가 되어도 될 것 같다.

 

□ 각주)쿠마라스와미 박사는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감각적인 경험 즉, 다섯 가지 감각인 다섯 가지 무기의 와중에 휘말릴 수 있으면서도 고유의 도덕적 힘으로 이를 제압하고는 자기 자신과 남을 해방시키는 영웅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미래의 부처가 덧없는 이름과 물리적인 성격의 다섯 가지 무기로 더 이상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최후의 수단으로 이름할 수 없고 보이지도 않는 여섯 번째의 무기로 바꾸어 대항하자 조복한 것이다. 이 여섯 번째 무기가 명()과 형()이라는 현상계 너머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원리의 지혜라는 천상적 벼락인 것이다. 이제 그는 영원히 자유로워진 것이다. (p. 119)

 

Ü 결국 존재와 시공을 뛰어넘는 것으로 해석. 언어와 존재로서는 말하여 질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아우르고 있는 것.

 

마법의 문턱을 넘는다는 것이 곧 재생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관념은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고래의 배라는 자궁 이미지가 상징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영웅은 그 관문을 지키는 세력을 정복하거나 그 세력과 화해하는 대신 그 미지의 힘에 빨려들어 겉보기엔 죽은 것으로 나타나고는 한다. (p. 120~121)

 

관문의 통과가 자기 적멸의 형태를 취한다는 교훈을 강조하고 있다. (p. 122~123)

 

아난다 쿠마라스와미 박사는 존재를 그만두지 않고는 어떤 생명체든 보다 높은 차원의 존재를 획득할 수 없다고 썼다. (p. 124)

 

Ü 죽지 않고 죽이지 않고 영혼은 진보할 수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지금 나와 동시대를 살고 있거나 현존하는 모든 물산과 존재들은 지금 순배의 우주가 생긴 이후 가장 높은 차원의 삶들인가. 우리 멋지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 각자는 모두 하나에서 출발한 영웅들의 변신된 모습이라 하지 않았나. 우리는 이미 존재 자체로 무량아승지겁(無量俄陞之怯)을 건너온 영웅들이다. 손이 무릎으로 가게 만드는 아난다 쿠마라스와미의 말은 결국, 현존하는 모든 생이 그 자체로 가장 멋진 삶들이라는 말이겠다. 맞는가.

존재를 그만두는 행위, 즉 시간의 자장(磁場)속에 있는 것 자체로 더 높은 차원으로의 진보를 위한 영웅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그 자장 안에서 겪는 어떤 형태의 고통이든 그것은 제 자신을 더 큰 우주로 한 발짝 들어서게 해 줄 것이라 믿는다.

 

남 인도 킬라카레 지역에서는 왕이 20년 치세를 마무리 짓는 해에 날을 잡아 엄숙한 제삿날로 삼는다. 노천 무대로 올라간 왕은 백성들 앞에서 칼을 꺼내고 코, , 입술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신체 기관으로부터 되도록이면 많은 양의 살을 베어낸다. 그는 베어낸 살점을 던지며 노천무대를 도는데 이런 행위는 출혈이 지나쳐 혼절할 때까지 계속된다. 혼절하기 직전, 그는 즉석에서 자기 목을 딴다. (p. 125)

 

Ü 저자의 다른 책 신화의 힘에서 언급되었던 사례가 있다. 게임에서 이긴 자가 제물로 바쳐진다는 내용의 이야기였는데 신의 가치가 즉 자신이 수행하는 소명의 가치와 동일하게 보는 관점이다. 그러나 만에 하나 육신이 시켜서 하는 일이라 겁나게 무서운 이 리추얼을 벗어나려 했을 수도 있겠다. 미노스 왕이 대표적이지 않을까. 그는 육신의 고통에 대한 두려움 보다는 사욕의 감정에 무릎을 꿇은 예가 되겠다.

 

2. 입문 (Initiation)

 

□ 일단 관문을 통과한 영웅은 기묘할 정도로 유동적이고 모호한 형태로 이루어진 꿈의 세계로 들어간다. 영웅은 이곳에서 거듭되는 시련을 극복하고 살아남지 않으면 안 된다. 신화와 모험에서 가장 흥미롭게 다루는 부분도 바로 이 국면이다. 이 국면은 기적적인 시험과 시련을 다룬 세계의 문학을 창출해 왔다. (p. 128)

 

□ 우리는 모든 원시 종족에서 주술사가 사회의 중심을 이루고 이음을 볼 수 있다. 이 주술사가 신경증적 혹은 정신병적이거나 아니면 그의 주술이 신경증이나 정신병과 같은 메커니즘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확인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인간의 무리는 집단의 이상에 따라 행동하는 법인데 이 집단의 이상이라는 것은 항상 유아기 상태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p. 132)

 

Ü 조직화의 기술이 여기서부터 발단되었나. 몽매한 집단의 synergy화 시키기 위하여.

□ 주술사란 이러한 유아적 놀이를 주도하고 공통의 근심거리를 밝혀내는 지도자인 것이다. 그들은 사회의 구성원들이 사방에서 성공하고 현실적인 어려움과 싸워 이길 수 있도록 잡귀와 대리 전쟁을 치르는 것이다. (p. 133)

Ü 이타적이다. 보살이 열반 직전 세상의 깨달음을 위해 열반을 보류한 것과는 비교가 될 수 없겠으나, 그에 버금가는 타자성이다. 샤먼,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사람은 샤먼일지도 모른다.

 

□ 감각이 정화되고 스스로를 낮추어 모든 에너지와 관심이 초월적인 것에 집중될 때인 것이다. 굳이 현대적인 의미의 어휘를 쓰자면 우리 개인이 가진 과거의 유아적 심상이 분리, 초월, 변화하는 과정인 것이다. (p. 133)

 

□ 모든 신들과 악마들의 존재를 이성의 이름으로 부정한 개화된 현대인인 우리가 알고 있는 문제 (p. 139)

 

Ü 각주) C. G. 융 박사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전 세대 사람들이 모두 이런저런 형태의 신을 믿고 있었으니만큼 새삼스러운 문제가 아니다. 우리에게 심적 인자, 즉 무의식의 원형으로서의 신을 재발견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상징 체계의 철저한 붕괴뿐이다. (P. 139)

 

□ 그러나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감청하기 위해서는 자기 정화를 감수하고 항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제는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다. ‘그런데 앞서간 자들이 당한 시련도 겪지 않고 너희는 지복의 낙원에 들어가려 하느냐.’

Ü instant fast가 난무하는 사회다. 서두르고 빨리 하는 것이 미덕이 되어 버렸다. 그런 스피드 속에 세상에 여유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앞서간 자들의 시련을 내 것으로 아우를 수 있는 삶의 틈새는 속도에 매꾸어져 버렸다. 이 책을 빨리 읽으려 이 문장을 빼 먹었던 나도 삶에서 베어버린 스피드의 관성이 문제였다. 둘러가자. 그래야 낙원으로 들어갈 수 있다.

 

□ 수메르의 신화는 바빌로니아, 앗시리아, 페니키아 전통 및 성서 전통(회교와 기독교를 잉태시킨)의 근원인 동시에 켈트인 그리스인, 로마인, 슬라브인, 독일인의 이교적 종교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P.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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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메르 문자]

 

Ü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도 이 수메르인의 위대함이 잠시 소개된 것으로 기억한다. 시간이 되면 앵글로의 원류, 이 수메르에 대해서 읽어 볼 기회가 있었으면 한다.

 

□ 자연력이나 정신력의 양극적 현상에 대한 유일의 조건 및 수단으로서 동일한 자연력이나 정신력에서 전개되고 저들 반대 감정을 가진 것들을 연결함으로써 재결합하기 위해 분극화된 동등한 대립자들 (P. 143, 각주, James Joyce)

 

Ü 어렵다. 이 문장으로 인해 두 번 읽기에 이 책이 선정된다.

 

잠자는 여성은 미인의 본보기 중의 본보기며 모든 욕망에 대한 응답, 모든 영웅의 지상적 비지상적 모험의 은혜로운 최종 목표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며, 누이며, 애인이며, 신부이기도 하다. 세상에 유혹하는 것 기쁨을 약속해 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잠자는 여성이 지향하는 존재의 예조에 해당한다. 그녀의 존재가 바로 완전성이라는 약속의 화신이며, 조직화된 불완전한 세계 속에서 오랜 방황을 끝낸 영혼의 안식이며 한때 인류가 맛보았다가 언젠가 다시 맛볼 은혜이기 때문이다. (p. 145~148)

 

Ü 잠든 여자, 이런 섹시함은 어디서 왔을까. 영웅뿐만 아니라 모든 남성은 사실 잠자는 여성에게 약하다. 무방비가 주는 남성의 공격적인 야성을 일깨워 본능을 건드린다.

 

□ 디아나와 악타이온

 

그에게 죄가 있었다면 길 잃은 죄밖에 없었다. 오늘 사냥은 이 정도 하고 그물을 걷세(악타이온). 사냥 친구들은 악타이온의 제안을 옳게 여기고 사냥을 끝내었다. 이 산에는 소나무와 잎이 뾰족한 삼나무가 덮인 골짜기가 있었다. <가르가피에>라고 불리는 이 골짜기는 사냥의 여신 디아나에게 봉헌된 성소였다. 디아나 여신은 사냥 다니다 지치면 곧잘 이곳으로 와서 이 맑은 물에다 몸을 닦고는 했다.

 

어느 날, 디아나 여신은 이렇게 몸을 닦고 있을 동안 사냥을 끝마친 카드모스의 손자 악타이온은 처음 들어온 숲이라서 길을 잃고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며 다니고 있었다. 그러다 이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발가벗고 서 있던 요정들은 난데없이 들어온 사내의 모습에 놀라 젖가슴을 가리며 숲이 울릴 만큼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다가 알몸을 들킨 이 여신의 뺨은 태양빛을 받은 구름 색깔 아니며 장밋빛 새벽의 색깔로 물들었다. 여신은 청년의 얼굴에 이 복수의 물방울을 뿌리면서 재난을 예고하는 주문과 다를 바 없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자 이제 할 수 있겠거든 어디 디아나의 알몸을 보았다고 해보아라!’

 

그러나 물방울이 튄 곳에서는 장수하는 동물로 소문난 사슴의 뿔이 돋았다. 이어서 그의 목이 늘어났고 귀의 가장자리가 뾰족해졌으며 손은 앞발로 변했고 팔은 앞다리로 변했다. 곧 몸에서는 털이 돋아났다. 이어서 여신은 이 청년의 가슴에다 공포의 씨앗을 뿌렸다. 악타이온은 달아났다. 달아나면서도 그는 자기가 그처럼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는 데 놀랐다. 물 위에 비치는 자기 얼굴과 뿔을 보고 그는 비명을 지르려고 했다. 그러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p. 148~150, 신화의 힘 p. 118~121)

 

만유의 어머니의 신화적 표상은 우주에 대해 그 우주의 존재를 윤택하게 하고 지켜주는 최초의 여성적 속성을 부여한다. 환상이란 원래 저절로 생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머니에 대한 어린아이 주위의 물질 세계에 대한 성인의 자세에는 밀접하고도 노골적인 상응 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종교 전통에는 자신을 정화하고 안정을 유지하고 마음을 가시적 세계의 자연 속으로 입문시킬 목적으로 이러한 원형적 심상을 의식적으로 통제하는 교육적인 이용 방법이 전해져 있다. (p. 150~151)

각주) 어머니에 관련된 정서나 감정이 억압당하면 인간에 대한 것이든 일반적인 사상에 대한 것이든 영적 요소를 과대평가하거나 강조하는 경향과 더불어 인간의 육체, 땅 그리고 물질적 우주에 대한 혐오, 경멸, 염증 혹은 호전적 태도를 취하게 하는 경향을 창출하는 수가 있다. 모르긴 하나 철학에 있어서의 지나친 이상주의적 경향은 어머니에 대한 이러한 반응의 이상화 현상에 너무 집착하기 때문이며 물질주의의 교조적이고 편협한 양식은 원래 어머니와 관련된 억압된 감정에의 회귀인 방향전환 때문인 듯하다. ‘솔직히 뭔 말인지 잘 모르겠다.’

 

□ 각주) 힌두교의 성전은 네 종류로 나뉜다.

 

1. 신의 직접적인 계시로 여겨지는 슈루티 shruti

2. 법통을 잇는 현자의 전통적인 가르침 의식용 성무교리 세간의 자궁 및 종규를 포함하는 슴르티 smriti

3. 힌두 신화 및 서사적 작품의 정수인 프라나 prana

4. 신의 예배 및 초월적인 힘을 얻는 의식과 그 방법을 기술한 탄트라 tantra (p. 151)

 

Ü 힌두를 배우고 싶다. 어쩌면 힌두교 생명의 연원에 대한 해답이 있을지도.

 

□ 여신은 또 때가 되면 죽는 모든 것의 죽음이기도 하다. 나서 사춘기, 성년기, 장년기를 거쳐 무덤에 들어가기까지 전 존재의 순환은 여신의 지배 아래서 이루어진다. 여신은 자궁이며 무덤이며 제 새끼를 먹는 돼지다. 이렇게 해서 여신은 개인적인 어머니는 물론 우주적 어머니에  이르기까지 어머니의 두 유형을 드러내면서 선과 악을 통합한다.

 

여신의 숭배자는 이 두 유형의 어머니를 똑같이 조용히 묵상해야 한다. 이러한 수행을 통해 숭배자의 정신은 유치하고 어울리지 않는 감상과 증오로부터 스스로를 정화하고 유치한 인간이 자신의 행, 불행에 연결 지어 멋대로 가는 선과 악 따위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본성의 법과 상으로 존재하는 불가해한 실재를 향해 그 마음을 열게 된다.

 

왼손에는 피 묻은 칼을 들고 있었고 그 아래의 손은 참혹하게 잘린 인두의 머리터럭을 거머쥐고 있었으며 위의 오른손으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손짓하고 있었고 그 아래 손으로는 은혜를 나누어주고 있었다. 그 목에 걸린 목걸이는 인간의 머리를 꿴 것이었고 치마는 인간의 팔을 짜맞춘 것이었다. 긴 혀는 피를 찾아 낼름거렸다. 이 여신은 다름아닌 절대 절멸의 공포와 비인격적이지만 모성적인 평화를 하나로 조화시키는 우주적인 권능, 우주의 전체성, 대립물의 조화였다. 시간의 강이 사람의 흐름으로 바뀌면 여신은 순식간에 창조하고 보존하고 파괴한다. 이 여신의 이름은 검은 존재 the black one, 즉 칼리 kali. 별명은 존재의 바다를 건네주는 나룻배다. (p. 150~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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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인도의 신 (6) 칼리|작성자 Durga

[힌두교의 깔리여신]

 

어느 조용한 오후, 라마크리슈나는 갠지스 강에서 올라와 그가 명상하고 있는 숲으로 들어오는 아름다운 여자를 보았다. 그는 여자가 아이를 낳으려나 보다고 생각했다. 곧 아기가 태어났고 여자는 이 아이를 돌보았다. 그거나 여자는 무시무시한 존재로 변하여 그 무지무지한 입으로 아이를 깨물어 죽인 다음 씹어 삼키고는 갠지스 강으로 들어가 모습을 감추었다. (p. 153)

 

Ü 두려움, 공포, 잔인함은 인간의 것인가. 신의 것인가. 원초적인 것인가. 원형적인 것인가. 우리가 삶고 말리고 찢어서 먹는 오징어의 대가리는 오징어 세계에서는 그토록 잔인할 수 없지 않겠는가. 껍데기는 추악하건 아름답건 착하건 악하건 무의미하다는 말인가. 껍데기는 없다.

 

고도의 이해력을 갖춘 천재만이 이 숭고한 여신의 계시를 읽을 수 있다. 이해의 정도가 낮은 사람을 위해 여신은 그 신통력의 정도를 낮추어 그들의 지진한 능력에 알맞은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정신적으로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이 여신의 모습을 본다는 것은 엄청난 재앙일 수 있다. 수사슴이 된 악타이온의 예에서 우리는 이미 이런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악타이온은 성자가 아니었다. 정상적인 욕망이나 놀라움이나 공포에 반응하는 인간으로서 엿보아서는 안 될 계시에 대해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일개 사냥꾼에 지나지 않았다. (p. 153)

Ü 낮은 암페어로는 그들의 전력장(電力場)으로 들어설 수 없는 것. 전압을 높여야 한다. 그리고 그 예는 악타이온 뿐만 아니라 헤라의 시기로 제우스의 광휘에 타 죽은 여인과 태양의 신 황금마차를 몰다가 죽은 그의 아들도 같은 예로 들 수 있을까. 그럴 것 같다.

 

여신은 자기 존재를 알아보는 자에 의해 해방된다. 지나치게 흥분한 상태에서가 아닌 여신이 바라는 친절하고 침착한 상태에서 그 여신의 정체를 알아 볼 수 있는 영웅은 여신이 창조한 세계의 왕 즉 인간으로 화신한 신일 수 있는 것이다. (p. 154)

 

Ü도라는 것은 라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다. 안다는 것은 그저 어리석은 생각에 지나지 않고 모른다는 것은 그저 혼란일 뿐이다. 네가 아무 의심도 없이 도를 깨쳐 안다면 너의 눈은 높은 하늘과 같아 한계와 장애를 벗어나 일체를 보게 될 것이다.” 조주선사의 스승이 건넨 도에 대한 말씀이다.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뜰 앞 잣나무에서도 도를 깨치듯 영웅은 신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는 자이다. 신은 준비된 자에 한해 그 통력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여신(모든 여성에게 현현)과의 만남은 사랑의 은혜(자비, 즉 운명에의 사랑)를 얻기 위해 영웅이 맞는 마지막 재능의 시험 단계다. 이 사랑의 은혜는 바로 우리 삶이 누리는 영원성의 그릇과 같은 것이다. (p. 157)

Ü amor fati! 모든 여성은 사랑의 화신이니 이 땅의 모든 여성을 사랑하리라.

 

여성이 곧 삶인데 영웅은 이 삶을 알게 되었고 이를 완성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영웅의 궁극적인 체험과 행위의 예비 시험이라고 할 수 있는 영웅의 시련은 자각의 위기를 상징한다. 이 자각의 위기를 통해 영웅의 의식은 증폭되고 어머니 상의 파괴자 즉 천생연분의 신부를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p. 159)

 

우리는 이 일반적인 유형과의 비교에서 우리 자신의 입장을 밝혀내야 하고 이것을 우리는 우리를 가로막는 제약의 벽을 허물어뜨리는 데 필요한 길잡이로 삼아야 한다. (p. 160)

Ü 그렇다면 나의 영웅 신화는? 그래 5월 수업의 주제다.

 

참으로 까다롭고 재미있는 것은 이상적인 삶에 대한 의식적 견해가 실제의 현실적 삶과 잘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질을 이루는 것 우리 친구들에게 내재해 있는 것 우리가 추구하는 것 자기 방어적이고 악취가 나고 탐욕적이고 음탕한 흥분 상태 즉 우리 조직 세포의 본질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이를 윤색하고 회칠을 하고 재해석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우리의 기름에 빠진 파리, 우리가 먹을 국에 빠진 머리카락을 누군가 다른 불유쾌한 사람의 허물로 돌리려 한다. (p. 160)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 우리가 행하는 것에는 어차피 육욕의 냄새가 나게 마련이라는 것을 깨닫거나 다른 사람을 통해 깨우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예외 없이 낭패의 순간을 경험한다. , 사는 행위, 삶의 구조, 특히 삶의 괄목할 만한 상징인 여성은 더 없이 순수한 영혼을 차마 상대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Ü 그 생각에 한번 이르러 봤으면 좋겠다. 육욕의 냄새 조차 맡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Ü 본질을 보지 않으려 한다. 진보의 시작은 혹독한 자기검열의 정반위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임을.

 

자기의 시체 같은 육신을 조금이라도 의식하면 그는 이제 순수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생, , 사뿐만 아니라 자기 적들로부터도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자신을 순수한 존재, 선의 정수, 부동의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는 순간 그는 자유로워진다. 원래 타성적이고 추악한 존재인 이 육체의 모든 제약을 떨쳐버리라. 육체는 더 이상 생각하지 말라. 한번 속에서 토한 것을(그대 육체를 토해내듯) 다시 생각하면 혐오감만 더해지느니 (p. 162)

 

Ü 예전의 한 시대의 부처는 자신의 육신이 사지가 찢어지는 가혹한 형벌을 받고 그 육신을 버렸다고 하지만 정각에 이른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캠벨 할아버지의 말처럼 그게 그리 쉬운 일인가. 노력은 해보겠다만. 그러나 죽음은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주제다. 탄생은 나의 주제가 아니되 죽음은 나의 주제가 되는 것이다. 나는 죽음을 맞이할 것이므로. 그렇다면 이 몸의 추악함을 언젠가는 깨달아야 할 터인데.  

 

눈을 못 돌리게 하는 둔부와 손길을 기다리는 가슴을 가진 이런 유의 허깨비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은자들을 애먹이는 존재로 알려져 있다. (p.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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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를 한 석가가 설산에서 수도하는 모습을 나타낸 ‘설산수도상’()와 석가가 깨우치는 것을 방해하려던 모든 마구니들을 보리수 아래서 항복시키는 장면을 담고 있는 ‘수하항마상’(아래)]

출처 : 야하다 야해, 부처님을 유혹한 젖가슴 - 오마이뉴스

 

□ 갇혀 있기 싫어하는 이물의 기운, 아래를 향해 쏟아지려는 이 물의 기운 (p. 167)

 

시바는 신도 앞에서 우주적 파멸의 춤을 추면서도 손으로는 두려워 말라는 시늉을 한다. (p. 168)

 

□ 각주) 신의 머리는 창조와 파괴의 역동성 안에서도 조용하고 반듯하게 균형을 잡고 있다. 시바 신의 오른쪽 귀고리는 남자의 것이고 왼쪽 귀고리는 여자의 것이다. 이는 신이란 한 쌍의 대립물을 초월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부동의 움직임을 주관하는 존재 세상의 행복과 고통을 초월해 있으면서도 이 양자를 품고 있는 존재의 모습이다.

 

, 그 음절을 싸고 도는 침묵은 언표되지 않은 초월성이다. (P. 169)

 

Ü (AUM)…태어남, 존재하게 되기, 사멸하여 온 곳으로 되돌아감. 옴은 사대의 음절이라고 불립니다. A, U, M, 침묵. 옴이 시작되기까지의 그 밑에 깔리는 침묵입니다. 내 인생은 옴입니다. 그러나 내 인생에는 침묵도 있어요. 그 침묵을 우리가 여기에서 영생하는 것으로 보아도 됩니다.

옴은 우주와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상징적인 소리입니다. 옴송을 통하여 우주와 접촉하고 우주를 느끼는 것, 이것이야말로 절정 체험입니다.

관계의 본질에 대한, 다분히 감정이 이입된 상태에서 했던 사고가 내 깨달음을 가능케 한 순간들이 있었지요.

그래서 절정의 순간은 이 언어 밖에 있는 것, 이 한마디….’, 이 한마디 밖에는 할 수 없는 데 있는 것이지요. (‘신화의 힘’ P. 414~415)

 

두려워 말라, 모두가 신 안에 거하리니 오고 가는 형상(그리고 육신 역시)은 춤추는 내 팔다리의 한순간 휘저음이다. 나를 아는데 무엇이 두려우랴?

성사의 불가사의(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하여 혹은 부처의 명상이라는 미덕에 의해 괄목할 만한 효력을 내는) 원시적인 호부나 액막이의 보호력, 신화나 동화에 나오는 초자연적인 조력자는 화살이나 불꽃이나 홍수가 사실은 보기보다는 무섭지 않은 것임을 알려주는 인간의 자위 수단이다. (p. 170)

 

□ 인간인 파에톤은 신의 아들이라는 어머니의 말에 자신을 낳은 신이라는 아버지를 찾아 길을 떠난다. 이윽고 찾은 신은 태양신이다. 아비가 자식에게 소원하나를 말해보라 하는데 파에톤은 아버지가 몰고 다니는 태양 수레를 단 하루만 빌려달라고 애원한다. 아들의 소원을 들어주마고 스튁스 강에 맹세한 태양신은 아찔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보통의 힘이 없으면 몰 수 없는 태양 수레를 파에톤은 제 젊음과 제 힘만 믿고 태양 수레에 올라 고삐를 받았다. 아버지에 비해 현격하게 가벼운 파에톤의 수레는 이를 끄는 하늘의 말들이 알아채고 익히 알던 괘도를 이탈하여 제멋대로 날뛰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대지는 불길에 휩싸이고 곡식은 파멸을 맞았다. 아이티오피아 사람들 피부는 새까맣게 되었다. 결국, 이 불길에 파에톤도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태양신의 요정들이 그의 시신을 수습하고 비석을 세웠는데 비석의 명문은 이러했다.

 

아버지의 수레를 몰던 파에톤, 여기에 잠들다.

힘이야 모자랐으나 그 뜻만은 가상하지 아니한가.’

(P. 173~177 파에톤 이야기, ‘신화의 힘’ p. 61~78 요약)

 

자식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한 이 부모의 이야기는 입문이 잘못되었을 때 입문자의 삶에는 혼란이 올 수 있다는 옛사람들의 생각을 확인시켜 준다. 한 아이가 자라, 어머니 품속의 목적이 자장가를 떠나 어른의 세계에 눈을 돌리게 될 때 이 아기는 정신적으로 아버지 세계를 엿보게 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있어서 미래 세계의 상징이요 딸에 있어서는 미래 남편의 상징이다. (P. 177)

 

Ü 아이가 아비의 등을 보는 이유는 카메라 앵글의 시선이다. 아비의 뒷모습의 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 아이의 앞으로의 살아갈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이런 말들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아직 어리다고 생각하는데 어느새 내가 누구에게 아빠로 불리어지는 사람이 되어 있다.

 

□ 소년들을 가까운 마을이나 멀리 떨어진 종족에게로 긴 여행을 떠나 보내기도 하는데 이는 남근을 숭배하던 조상들의 신화적 방황을 모방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위대한 아버지 뱀의 몸 안에서 어머니를 잃는 대신에 그 보상으로 얻게 될 새로운 세상을 소개받는다. 그리고 아이들은 자기 상상의 중심(즉 세계의 축)에다 젖가슴 이미지 대신 남근을 세운다. (P. 180)

 

□ 이 기나긴 일련의 의식에서 절정을 이루는 것은 할례 집도자 (P. 180)

 

Ü 각주) 로하임 박사는 이렇게 쓰고 있다. ‘실제로 아이에게서 잘려나가는 것은 어머니다. 포피에 싸인 귀두는 곧 어머니 품속의 있는 아이인 것이다.’

 

□ 받은 피는 약 한 되 정도 된다. 소년은 이 피를 마신다. 토할지 모르니까 아버지가 소년의 목줄을 움켜쥐어 토하지 못하게 한다. 토하면 아버지, 어머니, 누이, 형제가 모두 죽는다. 나머지 피는 소년 위에다 뒤집어 씌운다. 야밍가(yamminga) (p. 182)

Ü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입문 의식이다. 로하임 박사는 이를 두고 아버지를 죽이고 먹는 의식적인 행사라고 한다. ‘극복의 원형인가.

 

□ 호주대륙 야만인들이 미개해 보일지 몰라도 이 유서 깊은 정신적 유산의 체계를 오늘날까지 상속시킨 그들의 상징적인 의식과 그 의식의 광범위한 흔적이 인도양 저쪽 땅과 섬에서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특별히 우리 문화권으로 여기는 고대 문화 중심지의 유습에서도 발견된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오스트레일리아의 제의 형식을 우리가 익히 아는 고급 문화의 제의 형식과 비교해 보면 이 위대한 주제, 영원한 원형, 그리고 그 원형의 작용이 우리 영혼 속에 여전히 남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P. 183~184)

 

Ü 각주) 오늘날 멜라네시아에 남아 있는 상징 체계는 기원전 2천 년대의 이집트-바빌로니아, 트로이아-크레타의 미궁 콤플렉스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어떤 방법으로 어떤 지역에서 갖가지 고대 문명의 신화적 문화적 패턴이 지구의 구석까지 전파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단언하거니와 우리 문화 인류학자들이 연구한 소위 원시문화 중 자생적인 것은 거의 없다. 오히려 원시 문화란 전혀 다른 지역에서 대개는 그리 단순하지 않은 풍토 그리고 다른 종족에 의해 발전하는 풍습이 어느 지역에서 채용 변질, 형식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이 땅에 살기 시작한 이래로 인간은 이러한 신성한 절차를 통하여 현상계에 대한 공포를 이기고 불사의 존재를 향한 초월의 희망을 획득할 수 있었다. (p. 186)

Ü 이런 불경한 생각이 든다. 공포를 이기기 위해 그리고 불사의 존재를 한번 초월해 보기 위한 가식적인 겸손은 아닌가.

 

□ 코란은 어디로 돌아서든 거기엔 알라 신이 계시도다.’ 라고 말로 이를 암시하고 있다. 힌두교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만물 속에 숨어 있어서 그 영혼이 빛을 발하지 않으나 뛰어난 지력을 가진 명민한 자의 눈에는 보인다. 그노시스 파의 격언에 따르면 지팡이를 쪼개어도 예수님이 거기 계신다.’ (P. 190~191)

 

Ü 신이 현현하지 않는 데는 없다. 그러나 신이 있는 곳도 없다. 만물이 각자 자신의 변신 이야기'를 지닌 우주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모든 생명은 슬프다는 비관적인 어느 수도승의 통찰은 과연 생명이라고 찬탄하는 아버지의 낙관적인 확신 속으로 수렴된다. 자기 손이 창조한 생명의 고뇌를 익히 자각하고 혹심한 고통, 머리를 터뜨리는 듯한 미망의 불길, 자기가 창조한 자기 참해적이고 쾌락적이고, 분노에 떨고 있는 우주를 생생하게 의식하는 이 신은 삶이 삶을 점화시키는 행위를 승인한다.  정액의 사출을 보류하는 것은 멸종을 초래할 뿐이다. 그러나 이를 사출하는 것은 우리가 아는 세계를 창조하기 위함이다. 시간의 본질은 유동하며 한 순간 존재하던 것의 흐름이다. 그리고 생명의 본질은 시간이다. 신의 자비, 시간이라는 양식에 대한 그의 애정을 통해 이 데미우르고스(조물주)적 인간 중의 인간은 저 고해로 몸을 내맡긴다. 그러나 자기의 행위를 완전히 자각하고 있는 경우, 그가 사출하는 정액은 곧 그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다. (P. 192)

 

Ü 생명의 본질은 시간, 모든 슬픔의 연원은 시간이다. 그런데, 자기 행위를 완전히 자각하고 있다는 말은 무엇인가. 육신의 허망함과 생의 임시성을 완전히 깨치고 있다는 말인가. 그럴 경우 자신의 껍데기가 하는 행위는 그야말로 찰나에 지나지 않는 일이며 그가 쏟아내는 모든 육신의 결과, 즉 정액 등을 흘리는 행위는 한 순간 지나면 잊히게 되는 존재의 슬픔과 같다는 말. 어렵다.

 

□ 각주) 소승불교는 부처를 인간적인 영웅 , 대성인 그리고 현자로 모신다. 그러나 대승불교 에서는 부처를 구세주인 대각자 우주적인 정각 원리의 화신으로 파악한다. 보살은 불성의 경계에 든 귀인이다. (P. 195~196)

 

옴 마니 밧메 훔(妙法蓮花 , 연화 속에 보석이 있다)도 그 보살을 향한 것이다. 인간에게 알려진 신들 가운데 관세음보살만큼 많은 기도를 가납하는 신도 없을 것이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즉 그는 인간으로 이 땅에 살다가 마지막 관문을 넘어서는 순간(이 순간만 넘어서면 이름 붙여지고 경계 지어진 우주의 헛된 망상을 초월한 공의 무량 세계가 열린다)에 이를 작파해 버리고 모든 중생을 정각에 이르게 한 연후에야 공에 들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이다 (P. 196)

 

Ü 멋지다. 그래서 관세음보살~ 하는구나.

 

시간(결코 끝나지 않는)이 끝나는 순간까지 앞서서 잔잔한 영원의 강으로 뛰어들겠다는 각오로 열반의 문턱에서 걸음을 멈추었다는 것은 겁()과 찰나의 구별에 대한 자각을 표상한다. 합리적인 마음에 의해 자각된 이 구별은 한 쌍의 대립물을 초월한 마음에 대한 완전한 지식 안에서 용해되어 버린다. 이때 체득되는 것은 찰나와 영원이 같은 경험에 대한 두 가지 측면들 즉 동일의 비이원적이고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두 가지 층면들이라는 사실이다. 즉 영원의 보석이 탄생과 죽음의 연화 속에 들어 있다는 옴 마니 밧메 훔인 것이다.  (p. 198)

Ü 보살은 자기희생의 극한의 모습이다. 뻘에서 나는 연화 속에서 보석을 찾아 주려는 그 자기 희생.

 

헤르마프로디토스(자웅동체雌雄同體: 헤르메스 hermes와 아프로디테 aphrodite의 자식인 hemaphroditos)

Ü 변신이야기(오비디우스)에서 헤르마프로디토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메르쿠리우스와 베누스 사이에서 난 아들은 인물이 아주 좋았다. 그 이름은 헤르마프로디토스. 어느 날 요정 살마키스는 헤르마프로디토스를 보고 한 순간에 욕정에 빠졌다. 애인이 되어 달라고 요청했으나 여의치 않았는데 결국, 호수에서 놀고 있는 헤르마프로디토스를 보고는 옷을 벗고 덮쳤다. 결국, 신들은 이 두 육체를 하나로 만들었고 헤르마프로디토스는 요정과 합일 되어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반남성, 반여성의 육체, 어지자지로 변했다. (변신이야기 p. 171~176)

 

어지자지는 이러쿵 저러쿵의 의미다. 영어로는 a hermaphrodite.”

 

영원성이 시간성으로 발전하고 하나가 둘에 이어 다수로 분열하며 둘의 재결합으로 새 생명의 세대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 이미지는 우주 발생적 순환 cosmogonic cycle의 시작에 해당하는데 영웅의 모험이 막바지에 도달하여 낙원의 벽이 허물어지는 순간 신의 형상은 다시 나타나고 지혜는 다시 원상 회복된다. (p. 200)

Ü cosmogonic cycle을 도식화하면 길수행님께서 잘 아시겠지만 주가차트의 추세선과 매우 흡사하다 하겠다. 만물이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하는 이치, 분열하고 결합하는 원리는 비슷한 모양이다. 그 안에서 무수한 욕망과 거짓과 위선이 주가의 일봉차트에 고스란히 반영되는 것인가.

 

Ü 창조의 신비를 상징하는 기본적인 방법

 

□ 이 피(언급된 페니스의 자궁의 흉터를 다시 찢고 피를 뽑아내는 것)여자의 질에서 나온 월경혈, 남자의 정액, 그리고 오줌과 물과 남성의 유두에서 나온 젖을 동시에 상징한다. 피가 흘러 내린다는 것은 곧 피를 흘린 아버지가 삶의 원천과 자양을 내부에 지니고 있음을 나타낸다. (p. 203)

 

Ü 할례 다음해의 재수술(오스트레일리아). 그 행위의 신화적 함의, 이건 정말 이해하기 힘들다. 뭐지?

 

기독교 국가라고 불리는 나라들도 지엄하신 그들의 주가 가르친 에고, 에고의 세계, 그리고 에고의 종족 신의 정복과 동의어라고 할 수 있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실천하기보다는 식민지주의 적 야만성과 너 죽고 나 죽자 식 전쟁의 선수로 역사에는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들의 주는 이렇게 가르치지 않았던가? (p. 205~206)

Ü 예수가 가르친 대로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창녀에게 던지는 돌을 같이 맞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오늘날의 바리새인들과 사마리아인은 과연 누구인가.

 

Ü 그렇다. 낙타 구멍에 들어가기도 힘든 사람들이 외려 더 많이 가지려고 억압하고 속이고 싸운다. 매우 지엄하신 척 하면서 말이다. 못 보아 주겠다.

 

너희가 만일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한다. 너희가 만일 자기한테 잘해 주는 사람에게만 잘해 준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그만큼은 한다.

그 분은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다. 그러니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p. 206)

 

Ü 사랑의 가르침이 이렇게 명징하고 확고할 진대 어찌 오늘날 예수를 섬긴다는 사람들은 그 모습이 이런가. 첨탑 끝에 십자가에 네온싸인 불빛만 켤 생각만 한다.

 

□ 우리가 일단 세계의 원형들에 대한 편협스런 교회적, 종족적, 국가적인 해석의 선입견을 홀가분하게 벗어던지게 되면 우리가 전수받아야 할 최상의 도리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서슴없이 이웃을 공격하는 누구에게만 자애스런 아버지의 도리가 아님을 이해하는 게 가능해진다. (p. 207)

Ü 민족을 벗어내고 국가를 초월해야 한다. 종교를 극복해야 하고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깨닫는 수 밖에 없겠다. 이 책의 말미에 캠벨은 사회적 가치에 대해 대단히 높이 평가하며 모든 것의 뿌리이고 우리의 영웅적 능력들을 환원해야 할 대상이라고 하지만 그리 깊이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가 말하는 사회라는 것이 자기 속한 국가, 민족, 지역에만 국한 될 때 그러하다는 이야기다. 인류애를 기반한 초국적, 초민족적 봉사가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세계 시민으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다 할 것이다.

 

□ 남을 판단하지 말아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 받지 않을 것 (p. 208)

 

Ü 좋고 싫고 옳고 그르고의 모든 판단은 나에게 있지 않다. 그런 판단을 할 권리 조차 없다. 그렇게 생각하자. 누가 누구에게 가치를 판단하고 그 잣대를 들이 댈 수 있는 것인가.

 

209 페이지의 각주가 설명한다. ‘만상이 본래 비었다.’는 말은 한편으로는 현상계의 무상을 가리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상계에서 얻은 하찮은 경험으로 불멸의 존재를 파악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말이다. 공한 천상의 광휘 안에는 사상의 그림자도 관념도 없다. 그런데도 앎에 막힘이 없으니 놀라워라, 원래 비었음이여

 

□ 육계 미망의 도시 가운데

으뜸가는 소인은 악업에서 나온 죄악과 우매함이다.

여기서 중생은 좋고 싫음에 의지하니 언제 이 좋고 싫으이 다르지 않음을 알 틈이 없다.

오호라, 좋고 싫음의 무상함이여.

만상이 본래 비었음을 알면

그대 마음에 대자 대비가 일어나리라.

그대와 남이 다르지 않음을 알면

남을 섬길 수 있으리라.

남을 능히 섬겨 내면

나를 만날 수 있으리라.

나를 만나면 불성에 이르리라.

Ü 여기서 말하는 불성은 불교의 교조적 완성에 이르는 경지라기 보다는 민족과 국가와 종교의 편견을 벗어 던진 깨달음의 완성이 아닌가 싶다.

 

은하계 건너 은하계 우주의 세계 건너 세계, 별의별 존재의 세계(은하수를 경계로 한 지금의 이 우주뿐만 아니라 공간 끝까지 뻗어 있는)에서 무한한 공의 바다를 헤치고 생명을 얻었다가 거품처럼 사라지는 무량 겹으로 묶이고 족쇄에 채인 의식의 중심, 시간과 시간, 수많은 생명, 때리고, 죽이고, 미워하고, 승리 이상의 평화를 바라며 더 자신의 팽팽한 고리 속에 갇힌 채 고통 받는 군상. 이 모두가 만상을 한눈에 보고 공의 본질을 본질로 삼고 <대자 대비의 굽어 보시는 주>의 자식이며 무한히 계속되는 무상의 허상이며 긴 꿈의 세계다. 그러나 이분의 이름은 내면에서 보이는 주’ The Lord who is seen within이기도 하다. (p. 210)

Ü 은하계의 중심에서 은하계 끝에 이르는 거리는 10만 광년이다. 은하계에서 태양계까지의 거리는 3만 광년이다. 우주의 변두리 은하계, 그 은하계의 변두리 태양계, 태양계의 작은 별 하나 지구. 이제 우리에게 무엇이 더 필요한가. 우주를 짊어지고 갈 게 아니라면 우리의 빛나는 생은 무엇으로 가득 채워야 하는가? 무엇을 비워내야 하는가?

 

Ü 깊도다. 넓기도 하다. 하지만 그 깊고 넓은 것이 내 안에 있지 않았는가. 내면에서 보이는 .

 

□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새 생명, 새로운 탄생, 새로운 존재의 지식이 (따라서 우리는 이 몸만으로 사는 게 아니고 보살처럼 모든 몸, 세상의 모든 육신으로 산다) 우리에게 주어졌다. 저 아버지가 바로 어머니, 즉 재생의 자궁이었던 것이다. (p. 211)

 

Ü 영혼은 육신을 바꾸어가며 무한으로 존재한다. ‘나는 나 자신의 거울이다. 신이 내 입으로 말하고 나는 사라졌기 때문이다.’

 

불교의 팔정도는

1. 이치를 바르게 보는 정견

2. 정견으로 본 이치를 올바르게 생각하는 정사유

3. 진실한 지혜로 구업을 닦는 정어

4. 잘못된 행동이 없게 하는 정업

5. 정당한 법으로 살아가는 정명

6. 꾸준히 매진하는 정정진

7. 진실한 지혜로 정도를 생각하는 정념

8. 진실한 지혜로 선정에 드는 정정

 

마지막 미망과 욕망과 적의의 적멸, 즉 열반과 더불어 마음은 생각이 실체가 아님을 깨닫는다. 생각은 사라지는 것이다.

 

, 어둠, 등잔, 환영, 이슬, 거품, , 섬광, 그리고 구름.

이런 것들을 마땅히 보이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생각을 초월하는 진리(이는 언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공이라고만 불린다)의 안쪽에서 다시 바깥의 현상계를 바라보면서 보살은 이미 안에서 깨달은 동일한 존재의 바다를 바깥에서도 지각한다.

 

형상은 빈 것이며 빈 것은 즉 형상이다. 빈 것은 형상과 다르지 않고 형상은 빈 것과 다르지 않다. 형상이라고 하는 것 그것은 빈 것이며 진 것이라고 하는 것 그것은 형상이다. 관념, 이름, 개념 그리고 지식 역시 마찬가지다. (p. 215~216)

 

Ü 이 엄청난 말들은 어찌 해야 하나. 이 벼락 같은 진리들을 어찌 이해하려 들 수 있을까. 이것은 조급하여 이해하려 들면 왠지 망쳐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하나씩 깨달아 가도록 하자. 이 말의 손톱 밑의 때만큼만 알아듣더라도 삶은 행복으로 가득 차리라.

Ü 또한, 다시 생각해 보았다. 빈 것과 형상에 대해서. 언제나 보아도 어렵지만 다시 나에게 스스로 설명해 보자. 형상은 곧 사라질 영혼의 수레에 지나지 않고 실제 육화 되어 현재는 존재하는 실존처럼 보이지만 결국, 죽어서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로 돌아간다. 따라서 형상 육체 등은 실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모두 빈 것이 형상이고 형상은 곧 비워지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공과 색은 같으면서 다르다.

 

어느 유학자가 불조법통의 28대 조사인 달마에게 마음을 편케 해 주십시오.’하고 청했다. 달마는

 

좋아, 그러마, 너의 마음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고 대답했다. 유학자는

그게 문젭니다.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하고 말했다. 달마는

너의 소원은 이루어졌다.’고 했다. 유학자는 그 말귀를 알아먹고 편안한 마음으로 그곳을 떠났다. (p. 217)

 

Ü 찾을 수도 없는 마음을 가지고 편케 할 수 있는가. 나는 오줌이나 싸로 간다. 달마의 마음은 이러하지 않았을까.

 

□ 나무, 바위, , , 이 모든 것은 살아 있다. 이러한 무정물은 우리를 보고 있고 우리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안다. 우리에게 의지할 것이 없을 때, 문득 그 존재를 드러내고 우리에게 말을 거는 것이 바로 이러한 무정물들이다. (p. 222)

 

Ü 각주) 임제선의 비조 임제가 얼리 적에 밖에 나가기가 무서워 법당 안에서 방뇨하자 스승이 몹시 꾸짖었다. 어째서 거룩한 부처님 계신 곳에서 방뇨하느냐는 꾸중을 듣자 임제가 되물었다.

그럼 부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을 일러주십시오. 거기에 가서 누겠습니다.’

그 오줌조차 부처가 아닌가.

 

□ 우리는 어머니 안에서 배태되어 아버지로부터 격리된 채 산다. 그러나 우리가 때가 와서 그 시간의 자궁을 빠져나오면(영원으로의 탄생이다) 우리는 아버지의 손으로 넘어간다. 현명한 자는 그 자궁 속에서도 자기가 아버지에게서 와서 아버지에게 돌아가고 있음을 안다. 그보다 더 현명한 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나의 본체 안에 있다는 것까지 안다. (p. 223)

Ü 이 문장을 읽을 때 나는 오싹 했다. 내가 사라지는 듯한 느낌, 아버지 안으로 다시 들어가버릴 듯한 느낌.

 

□ 각주) 두려워 말라는 몸짓과 은혜를 내린다는 몸짓은 칼리가 자기 자녀를 보호하고 우주적 번뇌의 쌍을 이루는 대립물은 실상과 다른 것이며 영원을 향한 자에겐 찰나적 선과 악의 환상은 비록 여신 자신이 시바를 짓밟고 있으나 사실은 그 시바의 꿈에 지나지 않듯이 찰나적인 선과 악의 환영도 실은 마음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음을 가르치고 있다. (p. 224)

 

□ 각주) -세계, 영원-찰나, 열반-삼사라, 진리-미혹, 정각-연민, -여신, -친구, 죽음-탄생, 벼락-방울, 보석-연화, 주체-대상, -, -à , 절대부처, 보살, 지반 무크타(자유로워진 사람), 육으로 된 말씀. (p. 225)

 

Ü 이와 같이 등식을 이루었다.

 

□ 가령 원시 사회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주술사라는 직업은 일녀의 방어 기제로 자기의 미숙한 육체가 파괴당할지도 모른다는 환상에서 비롯된다.’ (p. 227~228)

 

□ 불멸의 존재에게 희구했던 최고의 은혜는 바로 영원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거하는 것이다. 즉 이런 땅이다.

 

예루살렘아,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아 기뻐 뛰어라.

예루살렘이 망했다고 통고하던 자들아,

이제 예루살렘과 함께 기뻐하여라.

너희가 그 품 안에 안겨 귀염 받으며,

흡족하게 젖을 빨리라.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그 풍요한 젖을 빨며 흐뭇해하리라.

나 이제 평화를 강물처럼 예루살렘에 끌어들이리라

민족들의 평화를 개울처럼 쏟아져 들어오게 하리라.

젖먹이들은 그의 등에 업혀 다니고,

무릎에서 귀염을 받으리라. (p. 230~231)

 

□ 우리 모두가 무의식 속에 간직하고 있는 유아기적 환상은 불멸의 존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끊임없이 신화와 동화와 교회의 가르침에 반영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현상은 마음이 이러한 이미지와 더불어 안식을 찾는다는 끗에서 그리고 예부터 익히 알려져 있었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는 의미에서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온통 경건하게 만들어버리는 유치한 행복에 젖어 있는 무리와 진정으로 자유로운 무리 사이에는 엄청난 심연이 존재한다. 여기에서 상징은 무너지고 초월 당한다. 천국을 떠나면서 단테는 이렇게 쓰고 있다.

 

듣고 싶은 마음 간절하여 작은 쪽배에 있는 그대들이여. 노래를 부르며 저어가는 나의 배를 뒤따르라. 그리고 돌아서서 그대들의 물가를 굽어보라. 나를 잃으면 길을 잃을지도 모르니 바다 한가운데로 깊숙이 들어가지 마시라.

 

내가 지나는 물은 일찍이 아무도 건넌 바 없다.

미네르바가 나에게 영감을 주고 아폴로는 내 길을 인도하며

아홉 뮤즈는 내게 북두칠성을 일러준다.

 

이것이 바로 생각이 무용해지고 이곳을 지나면 모든 느낌이 죽는 경지다. (p. 232~233)

 

□ 각주) 각각 창조의 신, 수호신, 파괴의 신인 브라마, 비쉬누, 시바는 힌두교의 삼위 일체로 하나의 창조적 본질에 작용하는 세 가지 속성을 표상한다. 그러나 이 양자는 결국 하나다. 오늘날의 신화에서 불로불사의 약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이 양자의 합동 작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p. 234)

 

신학적 교리의 기능은 무능한 지성을 구체적인 사실과 사상의 덩어리로부터 비교적 순화된 공간으로 이행시킨다. 이 공간에서는 궁극적인 은혜로 모든 존재(천상적, 지상적, 혹은 악마적인 것까지)는 덧없고 주기적인, 단순한 행복과 불안의 유아적 꿈과 비슷한 상태로 변해 보인다. 티베트의 어느 라마 승은 서양에서 온 이 방면에 생소하지 않은 이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어떻게 보면, 이들 신들은 실재하지만 달리 보면 이들은 실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p. 236)

 

Ü 이리 어려울 수 있는가. 신학적 교리는 원형의 신화에 한번의 쿠션을 더한 가공의 신화이지 않겠는가. 신학 역시 신화에서 출발했지만 원형의 신화에 정치적 입장과 역사적 스탠스가 더해져 곡해 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순화되었지만 순수하지 않을 수 있겠다.

이 책의 216페이지에서 언급된 에 대한 이야기를 remind한다.

형상은 빈 것이며 빈 것은 즉 형상이다. 빈 것은 형상과 다르지 않고 형상은 빈 것과 다르지 않다. 형상이라고 하는 것 그것은 빈 것이며 진 것이라고 하는 것 그것은 형상이다. 관념, 이름, 개념 그리고 지식 역시 마찬가지다. (p. 215~216)

 

□ 전설적인 왕 길가메쉬, 바닷가의 동굴에는 이슈타르 여신의 화신인 시두리 사비투가 살고 있었다.

길가메쉬여 왜 이렇듯 헤매는가?

그대가 찾아 다니는 것은 나타나지 않을 터인데

신들이 인간을 삼길 때

인간에게 죽을 운명을 매기고

그 생명을 자기네 손에 붙였다.

길가메쉬여 산해진미를 배불리 먹고

주야로 그대 일신을 즐기되

나날을 흥겨운 잔치로 보내라.

주야로 희롱하며 즐거워하라.

머리 감고 몸을 씻고

호의 호식을 탐하여라.

누가 그대 손을 잡든 개의하지 말고

그대 아내를 그대 품 안에서 복되게 하라. (p. 241~242)

Ü 어깨에 들어간 힘을 빼고 장례식을 한 번 치루었던 사람답게 세상에 여기저기 숨겨져 있는 기쁨을 찾아 다니자. 오늘 이 날부터 기쁨으로만 살 수 있도록

 

만물은 나아가고 일어나고 되돌아온다. 나무는 꽃을 피우나 오직 뿌리로 되돌아가기 위함이다. 뿌리로 되돌아감은 정일을 찾음이다. 정일을 찾음은 천명으로 합일함이다. 천명에 합일함은 영원에 합일함이다. 영원을 아는 것은 깨달음이요, 영원을 깨닫지 못하면 혼란과 마가 인다.

영원을 알면 이해력이 넓어지고 이해력이 넓어지면 포용력이 넓어진다. 시야가 넓어지면 귀함을 얻는다. 귀함이란 천상적인 것과 다름 아니다.

천상적인 것이 도다. 도는 영원이다. 여기에 이르면 육체가 썩는 것도 두려워할 바 아니다.’ (p. 248)

 

Ü 캬하하. 기가 막힌다. Logically, mechanically, in order, step by step! 이 문장은 두고 두고 새긴다.  나의 존재 역시 우주의 역사에 참여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새긴다. ‘가 이리도 무서운 것이었다. 내 죽었다 깨어나도 다다르지 못할 듯.

Ü 추가하여 위 내용은 이 책의 162페이지 내용과도 일맥 상통한다.

자기의 시체 같은 육신을 조금이라도 의식하면 그는 이제 순수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생, , 사뿐만 아니라 자기 적들로부터도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자신을 순수한 존재, 선의 정수, 부동의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는 순간 그는 자유로워진다. 원래 타성적이고 추악한 존재인 이 육체의 모든 제약을 떨쳐버리라. 육체는 더 이상 생각하지 말라. 한번 속에서 토한 것을(그대 육체를 토해내듯) 다시 생각하면 혐오감만 더해지느니

 

□ 일본에는 인간이 재물을 내려달라고 기도하면 신들이 웃는다는 속담이 있다. 신도에게 내리는 은혜는 그 신도의 처지와 그가 발원한 소망에 준하여 내려진다. 은총이란 특수한 경우의 발원에 내려지는 삶의 에너지의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신의 은총을 입고 있는 영웅이 완전한 깨달음의 은총을 구한다면 몰라도 그가 장수의 은혜와 이웃을 시해할 무기 혹은 자식의 건강 등을 구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다. (p. 248~249)

 

□ 개인적인 한계를 넘는 고통은 곧 전신의 성숙에 따른 고통이다. 예술, 문학, 신화, 그리고 밀료, 철학과 수련은 모두 인간이 자기 한계의 지평을 넘고 드넓은 자각의 영역으로 건너게 해주는 가교인 것이다. (p. 249)

 

3. 귀환 (Return)

 

□ 그러나, 영웅이 이 책임을 회피한 예는 너무나 많다. 심지어는 부처까지도 정각이라는 승리를 얻은 뒤에 이 소식이 대중에게 전해질 수 있을지 여부를 의심했고 성자들 중에는 천상적인 무아지경에서 몰한 성자가 많은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실제로 많은 영웅들이 불로 불사 여신의 축복받은 섬에 아예 영원히 눌러앉아 버린 것으로 전해진다. (p. 253~254)

 

Ü 그러면 영웅이 아니게 되는 것인가.

 

□ 잠을 깬, 무추쿤다 왕은 창조의 주기와 세계의 역사가 수없이 되풀이될 동안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 무추쿤다는 회귀하는 대신 이 세상으로부터 한 차원 더 떨어진 곳으로 물러서기로 마음먹었다. 누가 감히 그의 결심이 무분별하다고 할 것인가? (p. 257)

 

Ü 깨달았으나 그 지혜를 가지고 돌아오지 않는다. 자신의 깨달음 속에 지낸다. 이 또한 나쁘지 않을 것. 그의 영혼의 전파가 전 인류를 적실 것이니.

 

□ 심연의 권능에는 섣불리 도전하면 안 된다. 동양에서는 엄격한 지도와 감독 없이 심리적으로 해이해진 상태에서의 요가 수련은 몹시 위험하다고 가르친다. C. G 융은 말한다.

 

수련자의 명상은 그 발전 단계에 따라 통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 수련자의 상상력은 데비타(devata:수련자의 수준에 알맞은 신성)에 의해 각급 단계에서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이러한 단계를 거쳐 정신을 수련한 다음에야 수련자에게는 홀로 초월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는 순간이 온다.

Ü 악타이온을 보자. 준비되지 않은 자가 신을 완벽한 신성을 알현했을 때의 저주를.

 

교리적 상징의 유용한 기능은 개인이 무턱대고 나서지 않는 한 신의 직접적인 체험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해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집과 가족을 떠나 너무 오랫동안 혼자 방황하고 심연의 거울을 너무 깊이 들여다보면 이 무서운 만남 자체가 그에게 재앙일 수 있다. 그러나 수세기 동안 꽃피어 왔던 전통적인 상징체계는 이때 영약으로 작용하여 살아 있는 신의 치명적인 공격 무대를 교회라는 신성한 공간으로 바꿔놓을 수도 있다.’ (P. 263~264)

 

Ü 아 어렵다. 읽고 또 읽고 씹어 삼키면 이해할 수 있을까.

 

□ 단일 신화가 완성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적인 실패나 초인간적인 성공이 아닌 인간적인 성공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귀환의 문턱에 도사리고 있는 위기가 중요한 문제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p. 269)

 

□ 그러나, 어디에 있든지 그가 살아 있는 한 생명은 그를 부른다. (p. 270)

 

Ü 유치한 생각 하나 해 보았다. 이 문장에서 생명 대신에 인민이나 대중으로 바꾼다면 그는 누가 될 것인가. 아마 혁명가이거나 이 부르는 정치가나 영도자가 아닐까.

 

□ 여신의 모습을 반영시켜 비현현의 은거 상태에서 밖으로 이끌어낸 거울은 세계, 곧 반영된 형상의 장을 상징한다. 거울을 통하여 신은 자신의 영광을 보고 기뻐하는데 이 기쁨은 현현 혹은 창조의 행위를 유발시키는 자극제가 된다. 칼을 벼락에 해당한다. 나무는 열매를 맺고 소원을 성취시킨다는 의미에서 세계의 축(axis mundi)이다. 이 나무는 기독교도들이 동지에 가정에 장식하는 나무와 같은 것이다. (p. 276)

□ 외부로부터 구조를 받든 내적 충동에 따라 살아나든 신들의 안내를 받든 영웅에게는 오래 잊고 있던 곳으로 애써 얻은 전리품(홍익)을 가지고 돌아가야 할 단계가 남는다. 천신만고 끝에 얻은 재생의 영약을 가지고 돌아가 원래 속해 있던 사회와 맞서면서 그들의 까다로운 신문과 서릿발 같은 증오와 맞서야 한다. 뭐가 뭔지 영문을 모르는 선한 사람들까지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p. 280)

 

Ü 가장 중요한 순간을 남겨두고 있다. 어느 시대, 어느 곳, 어느 조직이든 이 실천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진보란 있을 수 없고 모든 것은 해결되지 않는다.

 

□ 신들의 세계는 우리가 아는 세계의 잊혀진 부분이다. (p. 281)

Ü 니체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잠잘 때나 꿈속에서 우리는 인간성의 사고를 꿰뚫어 체험한다. 내 말은 수천 년 전에 인간이 깨어 있는 상태에서 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꿈속에서 사유한다는 것이다. 꿈은 우리를 인류 문화의 이런 상태로 데려가고 그때에 관한 우리의 이해를 돕는 것이다.’

 

□ 그러나 정상 상태로 깨어 있는 의식의 관점에서 보면 심층에서 솟아난 지혜와 속세에서 유용한 분별 사이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이 존재한다. 그래서 미덕에서 득실 계산이 파생하고 극 결과 인간의 존재는 타락한다.

결국, 베드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계의 창조자이며 이를 보존하는 주를 지키기 위해 칼을 뽑는다. 초월의 세계에서 보내진 은총은 하찮은 것으로 취급되어 버리니 다른 영웅이 나와 말씀을 새롭게 설명할 필요가 절실해진다. (p. 281)

 

Ü 개소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대중의 평균적인 사유의 단계는 영웅의 그것에 항상 미치지 못함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대중과 인민은 생각보다 그리 어리석지 않다. 다음을 보자. 계속 이어간다.

 

하지만 인류가 약삭빠르면서도 우매했던 몇 천 년 세월을 통해 수십만 번 제대로 가르쳐지기도 했고 그릇 가르쳐지기도 했던 것을 어떻게 다시 가르친단 말인가? 이것이야말로 영웅의 궁극적인 숙제다. 빛이 있는 세상의 언어로 언어가 무용한 저 암흑 세계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Ü 인류의 교육 시스템은 그 어떠한 진보적 체계라 하더라도 모두 잘못 되어 있었음을 비로소 밝혀지게 되었다. 어느 교육도 위정자의 권력 재생산을 위한 방편일 뿐 임을 알자. 깨달음과 수행, 학문의 빛나는 성취들이 다시 오지 않는 까닭은 그보다 더한 진보가 이루어지지 않는 까닭은 그 방법이나 논리, 이론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것으로 접근하는 attitude, 사회적 사고 방식 등의 문제였다.

 

오로지 감각의 배타적 증거에만 급급하는 일반인에게 어떻게 저 만유의 근원인 공을 설명한단 말인가 (p. 282)

 

Ü 갑갑할 수 있겠다. 나와 같이 무지몽매한 사람들을 모아 놓고 그 진리를 가르친다 생각하면 그 영웅이 불쌍해 지경이니. 어쩌겠는가. 그래도 갈급하다.

 

밤에 꿈으로 꿀 때엔 중요하게 보이다가도 밝은 대낮에 생각하면 하찮게 여겨지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 시인이나 예언자는 맨 정신으로 전날 밤에 했던 기도를 후회한다. (p. 282)

 

인간의 눈으로 보면 이러한 세계는 변화와 죽음으로 보이고 신들의 눈으로 보면 불변하는 형상 곧 끝없는 세계일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직접적인 지상의 고통과 기쁨을 무릅쓰고 어떻게 이 같은 우주적 관점이 유지되겠느냐는 것이다. 속세의 지식이라는 과일 맛은 정신의 집중점을 영겁의 세계에서 말초적 위기의 순간으로 옮겨놓는다. (p. 289)

(힌두 신화 및 서사적 작품의 정수인 프라나 prana에 나오는 말이다.)

 

Ü 딸이 아팠다. 조막손에 주사 바늘이 꼽히는 순간에 신은 없었고 나는 이 책을 집어 치울 뻔 했다. 우주적 관점은 육신의 고통 앞에 결국 무참해 지고 말았다.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고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나 우리 다시 생각하자. 우리가 왜 스스로 영웅이 될 수 없는가. 우리 각자는 모두 하나에서 출발한 영웅들의 변신된 모습이라 하지 않았나. 우리는 이미 존재 자체로 무량아승지겁 (無量俄陞之怯)을 건너온 영웅들이다. 아난다 쿠마라스와미는 나에게 생경한 사람이지만 그의 이야기는 깊은 교감을 준다.

‘존재를 그만 두지 않고는 어떤 생명체든 보다 높은 차원의 존재를 획득할 수 없다.’

손이 무릎으로 가게 만드는 이 말은 결국, 현존하는 모든 생이 그 자체로 가장 멋진 삶들이라는 말이겠다. 맞는가. 존재를 그만두는 행위, 즉 시간의 자장(磁場)속에 있는 것 자체로 더 높은 차원으로의 진보를 위한 영웅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그 자장 안에서 겪는 어떤 형태의 고통이든 그것은 제 자신을 더 큰 우주로 한 발짝 들어서게 해 줄 것이라 믿는다.

□ 신성한 미덕에는 일촉에 즉발하는 고폭성이 있어서 터지거나 방전하거나 누출되지 않도록 예방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p. 290)

 

Ü 세계와 영웅의 사유 간의 절연 수단을 준비하는 것.

수행에 정진하는 중에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 거리로 들어 섰을 때 한 순간 떨어지는 영혼의 level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 낮은 전력장으로부터 자신의 자장을 지키기 위한 수단. 반지, 수염, 목주, 목걸이 등이 모두 이런 이유이지 않겠나.

 

□ 신화(가령 오비디우스가 변신 이야기라는 개론서에 모아둔 수많은 신화 같은)는 고도로 집적된 전력의 중심과 주위 세계의 비교적 낮은 전압의 전력장 사이의 허술하던 절연체가 갑자기 무력해질 때 생기는 충격적인 변화를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상기시키고 있다. (p. 291)

 

Ü 무슨 말인가. 이런 일반화가 가능한가.

 

□ 자기 모험을 완성하기 위해서 귀환한 영웅은 세계의 충격을 견디어야 한다. (p. 291)

 

□ 덧없는 만남과 헤어짐, 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사랑의 고통이 아닌가. 한 영혼이 제 운명을 저주하고 운명의 장난에 저항할 때 그의 고통은 더욱 고통스러워진다. (P. 294)

 

□ 카마르 알 자만의 기나긴 이야기가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운명이 일상의 삶으로 구체화되는 완만하면서도 놀라운 역사다. 그러나 이 운명이 모든 이에게 다 구체화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안으로 뛰어들어 이를 체험하고 반지를 얻어 다시 현실로 귀환한 영웅에게만 가능하다. (p. 294)

 

Ü 신에 의해 구체화된 이야기는 굳이 신의 힘이 아니더라도 일상에 구현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 반지를 획득하고 현실로 귀환한 이후의 현실 사회에서 극복하는 실천의 문제가 빠져 있는데 카마르 알 자만과 부두르 공주의 다음 이야기는 왜 생략 되어 있는가. 왜 여기서 끝인가. 이제부터가 중요한 실천의 문제를 언급할 대목이 아닌가. 그리고 실천은 예나 지금이나 왜 이리 어려운가.

 

우리는 립 반 윙클, 카마르 알 자만, 혹은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존재했는지 여부에 대해 관심하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가 역사적으로 실재했는지 여부는 부수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에서 역사성을 강조하면 혼란이 생길 뿐이다. 즉 암시적 메시지를 어지럽게 할 뿐인 것이다. (p. 299)

 

□ 크리슈나는 이 말과 함께 그 다른 형상을 보여 공포에 질린 판다바를 위로했다. (p. 303)

 

Ü 각주) om, 제물로 바쳐지는 말의 머리는 새벽 눈은 태양 그 생명력은 대기, 그 열린 입은 바이쉬바나라라고 하는 불이며 제물로 바쳐지는 말의 몸뚱어리는 해입니다. 그 등은 하늘이요 배는 공중 그 굽은 땅입니다. 옆구리는 땅 위의 네 지역이요 관절은 달과 주일이며 그 발은 밤과 낮 뼈는 별 살은 구름입니다. ~ 그 상상력에 혀를 내 두른다.

 

상징이란 의미 소통의 수레에 불과하다. 상징은 그 언급하는 바의 궁극적인 의미, 즉 진로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매력적이고 또 인상적이라고 하더라도 상징이란 이해를 돕기 위한 편의적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신의 성격, 혹은 일련의 성격(3차원적이든, 2원적이든, 1원적이든, 다신론적이든 유일신론적이든 단신론적이든 회화적이든 언어적이든 문서로 기록된 사실이든 묵시적 환상이든)을 최종적인 의미로 읽거나 해석하려 해서는 안 된다.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상징을 투명하게 닦아 우리에게 오는 진리의 빛이 이에 가리지 않게 하는 일이다. (Ü 영웅이 결국 인간세에서 해야하는 역할. 시대를 아우르며 전승되고 교육되지만 인간은 다시 망각하고 다시 배우는 cosmogonic cycle을 여기에서도 반복한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하느님이 인간의 생각이 미친 수 없는 높은 곳에 계신다는 믿음만 가지고 있다면 우리도 하느님을 진정으로 알고 있는 셈이다

 

케나 우파니샤드에도 같은 말이 나온다.

아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이요 알지 못하는 것은 아는 것이다.’

 

의미를 실어나르는 수레를 의미 자체로 오해하면 헛된 잉크뿐만 아니라 헛된 피까지 흘리게 된다. (p. 305)

 

예수는 똑 같은 것을 훨씬 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나를 위해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생명을 얻을 것이다.’ (p. 306)

 

□ 깨달은 자는 이런 상태에서도 지복의 극락을 산다. 무대 의상을 입고 있든 벗고 있든 배우는 배우 이전의 그 자신이듯이 불멸의 지혜를 깨친 자는 늘 그 불멸의 경지 안에 거한다. (p. 307)

 

□ 신화의 목적은 개인의 의식과 우주적 의지를 화해시킴으로써 생명에 대한 그 같은 무지(자기는 선한 자를 대표한다라는 둥)를 추방하는 데 있다. 이 목적은 덧없는 시간적 현상과 삶과 죽음이 혼재하는 불멸의 삶과의 진정한 관계를 자각해야 달성이 가능하다.

사람이 마치 계절에 따라 헌 옷을 벗고 새 것을 입는 것처럼, 이 몸 속에 와 계시는 그 실재도 낡은 몸뚱이를 버리고 새것으로 옮겨가신다. 칼이라고 해서 이를 벨 수 없고 불이라고 해서 이를 태울 수 없으며 물이라고 해서 이를 적실 수 없고 바람이라고 해서 이를 시들게 할 수 없다. 벨 수 없는 것이 이것이요, 태울 수 없고 적실 수 없고 시들게 할 수 없는 것이 이것이니 이것은 모든 존재의 심연에 두루 퍼져 불변이요 부동이다. 따라서 이 실재는 언제나 하나이니라.’

영원의 원리 안에서 집착하지 않는 이승 세계의 인간이 만일 자기 행위의 결과에 초연해하고 이를 살아 있는 신의 무릎에다 올려놓을 수 있다면 그는 이 제물에 의해 죽음의 고해에서 풀려 날 수 있다. (p. 308)

 

Ü 이 책의 43페이지에는 이와 같은 말이 있다. ‘모든 것은 변하고 있으나 아무것도 죽지는 않는다. 영혼은 여기저기를 방황하다 마음에 드는 뼈대를 취한다. 따라서 한번 존재한 것은 다시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존재하게 되니 모든 운행의 주기는 반복한다.

이 몸뚱이는 죽어 없어지지만 이 몸 속에 와 계시는 실재 self는 영원하며 불멸이며 무한이니라.’

 

다시 말해서 자기 자아의 죽음을 통하여 새로운 자아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Ü실재는 낡은 몸뚱어리를 버리고 새것으로 옮겨간다.) 영웅은 생성된 것의 투사가 아니라 생성되는 것의 투사다. 왜냐하면 그는 현재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내가 있는 것이다. 그는 시간 속의 엄연한 불변성을 존재의 영속성으로 오해하지 않는다. 변화가 영속성을 파괴할 때도 다음 순간(혹은 다른 사물)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원래의 형태를 보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위대한 재생의 손길인 자연은 부단하게 형상에서 형상을 만들어나간다. 온 우주 안에서 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음을 알라. 오직 변화하고 새로운 형상으로 재생될 뿐인 것이다. (p. 313)

 

Ü 자연은 비효율적이다. 엄청난 비효율의 에너지 소모는 무엇을 위함이 아니었다. 목적이 없었던 것이다. 다 태우고 다시 잎을 틔우고 다 쓸어버리고 다시 세우는 일을 반복하는 비효율은 새로운 형상으로 재생하기 위한 에너지질량을 보존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4. 열쇠 (The keys)

 

오랜 세월에 걸쳐 마모와 손상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신화나 옛 이야기의 윤곽은 원래 애매한 법이다. (p. 317)

 

□ 많은 신화의 후반부에서 중심적 이미지는 건초 더미에 바늘이 떨어지듯 부수적 삽화와 윤색된 부분에 숨겨진다. (p. 319)

 

Ü 305페이지 내용을 remind해 보자. ‘신의 성격, 혹은 일련의 성격(3차원적이든, 2원적이든, 1원적이든, 다신론적이든 유일신론적이든 단신론적이든 회화적이든 언어적이든 문서로 기록된 사실이든 묵시적 환상이든)을 최종적인 의미로 읽거나 해석하려 해서는 안 된다.’ 내용은 다음으로 이어진다.

 

전기나 역사나 과학으로 읽힐 때 신화의 명은 거기에서 다한다. 왕성하게 살아 있는 이미지들이 옛날 다른 하늘 아래서 있었던 까마득한 사실들로 전락하는 것이다. 한 문화가 자기네 신화를 이런 식으로 번역할 때 그들의 삶은 고갈되고 그들의 사원은 박물관이 되며, 과거와 미래의 끈은 끊어지고 만다. 이러한 오류는 성경이나 많은 기독교 의식에 대해서도 자행되어 왔다. 신화의 이미지를 생생하게 되살리려면 이를 현대의 문제에 적용시키려 할 것이 아니라, 영감으로 살아 숨쉬던 과거의 형태로부터 암시를 읽어내어야 한다. (p. 319~320)

Ü 생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서 원형을 돌아보는 연습이 필요하겠다.

 

□ 각주) 禮數가 숨을 거둔 날과 부활한 날 사이 (p. 320)

 

Ü 그 사이의 날은 라벤이 고래 뱃속에 있었던 시기와 일치하고 water of transformation은 부시 막대와 대응 된다.

 

□ 그러자 예수가 대답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신화적 상징은 그 함축적인 의미 그대로 계승되어야 한다. 즉 수천 년에 걸친 영혼의 모험을 유추에 의해 표상해 온 만큼 그 대응 관계의 전 체계를 섣불리 펼쳐 보이기 이전에 그것이 지닌 모든 함축적 의미들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p. 322)

 

2. 우주 발생적 순환

1. 유출 (Emanations)

 

□ 신화의 상징 체계가 지닌 심리학의 의미를 감지해 내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특히 정신분석학자들의 연구가 있은 이후, 신화가 꿈의 내용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꿈이란 정신 역동의 증후라는 사실에는 별 의혹의 여지가 남지 않았다. (p. 325)

 

□ 신화 체계란 전기나 역사, 그리고 우주론으로 오독되어 온 심리학이다. 현대의 심리학자들은 이를 적절한 의미로 재해석하여 오늘날의 세계에 인간의 특징적 심층에 관한 풍부하고 웅변적인 자료를 장만해 주고 있다. (p. 326)

 

□ 우리는 이를 읽고 그 일정한 패턴을 연구하고 그 다양성을 분석함으로써 지금까지 인간의 운명을 조형해 왔고 앞으로도 우리 사적 공적인 삶을 주관해 나갈 그 무서운 힘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p. 326)

 

Ü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하면 행복해 지는가. 일단 노력해 보기로 한다.

 

□ 이 신화가 수면의 산물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이 양자는 동일하지 않다. 오히려 신화의 패턴은 의식적으로 통제된다. 그리고 신화는 전통적인 지혜를 전달하기 위한 강력한 회화적 언어로 기능한다. (p. 326)

Ü 무의식의 공간으로부터 시작되는 꿈과는 대조된다.

□ 최근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상징적 심상들은 인간의 삶을 버티고 철학, , 그리고 예술의 영감을 자극해 왔다. 노자, 부처, 조로아스터, 그리스도 혹은 모하메드에 의해 거론된 전승적 상징(도덕적, 형이상학적 가르침을 전교한 위대한 정신적 스승들에 의해 채용되었던)덕분에 우리는 암흑이 아닌 깨어 있는 의식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다. (p. 327)

 

Ü 잃어버릴 뻔한 신화의 심상들을 고전이 살려 놓았다. 즉 고전은 신화를 계승한다. 그들에게 진 부채를 어찌하겠는가. 읽고 따르는 길 뿐이니 혼을 다하여 읽어 내리자. 그리하여 얻어진 행복을 내 주위에 감응시키면 그것이 그들에게 진 빚을 탕감하는 길일 것이다.

 

□ 이 세계의 가시적인 모든 구성물(사물과 존재)은 편재하는 힘에 의한 결과라고 가르친다. 즉 이 힘은 모든 구성물의 생성 원리이고 그들이 이세상에 현현해 있을 동안 그들을 지탱하고 그들을 채우며 궁극적으로 그들이 돌아갈 귀소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과학에서는 에너지라고 부르고 멜레라네시아 인들은 마나, 수우족 인디언들은 와콘다, 힌두교도들은 샤크티, 기독교들은 하느님의 능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정신분석가들은 심성에 나타나는 이 존재를 리비도라고 부른다. 이 존재의 우주적 현현이 바로 우주 자체의 구조며 우주의 변화인 것이다.

 

분화되지 않았으면서도 도처에서 개체화된 이 존재의 근원에 대한 인식은 바로 이를 인식해야 하는 기관에 의해 좌절 당한다. 인간이 지닌 감각 능력의 형식과 인간이 지닌 생각의 범주는 이 권능의 현현 그 자체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마음의 기능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에 다채롭고 유동적이고 변화 무쌍하고 복잡한 현상계 너머에 존재하는 것은 느낄 수도 볼 수도 없는 것이다. 제의와 신화의 기능은 유추 작용을 통해 이를 볼 수 있게 하고 이를 촉진시키는 기능이다.

 

신 혹은 신들 자체는 이름과 형식을 통하여 이 세계의 얼개를 설명하는 성질이 부여되어 있을 뿐, 이들은 결국 세계를 설명하는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신들은 우리 마음을 움직이고 마음을 깨우며 우리 마음을 겨냥할 상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p. 327~331)

Ü 결국 신화는 인간에 의해 씌어진 인간 자신들의 이야기다. 그렇다면 그 중 나의 신화도 없다는 법은 없겠다.

 

□ 어쨌든 분명한 것은 이러한 상징이 인간의 운명, 인간의 희망, 인간의 믿음, 인간의 어두운 신비의 메타포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p. 333)

 

인생이 너무 짧기 때문에 우주 발생적 시간의 회전이 영원한 것처럼 보일 뿐이다. 우주 발생적 순환은 우주 자체의 반복, 즉 끝없는 세계로 표상된다. 각 순환의 주기 안에는 소멸의 과정도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삶이 잠과 깨어 있음의 주기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p. 333)

Ü 지구가 도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우리의 청력과 같이 말이다.

Ü ~ 이 아둔함이여. 다 아는 것인 양 떠들어 대는 것이 얼마나 낯 뜨거운 일인지.

 

□ 자이나교의 순환 주기설 중 제6. 인간과 세계의 상태는 한층 더 악화된다. 오래 살아야 겨우 20, 키가 큰 사람도 겨우 한 완척(45~50센티)을 넘지 못하며 갈비뼈는 겨우 8개의 약골이다. (p. 336)

Ü 이렇게 될 수 도 있겠다. 진화해온 과정을 보면 근거 없지는 않은 듯.

 

□ 힌두교의 네 기간 중 첫 번째 기간은 완숙한 행복과 아름다움과 완전성이 지배하는 기간으로 이 기간은 4800신년(1신년은 인간의 햇수로 치면 360년이다) 간 계속된다. 두 번째는 이 보다 아름다움이 덜한 기간으로 길이는 3600신년, 미덕과 악덕이 공존하는 세 번째 기간은 2400신년, 악이 득세하는 오늘날 우리 세계와 같은 네 번째 기간은 1200신년, 인간의 햇수로 치면 432,000년이다. (p. 337)

Ü 이 책 468페이지의 마야인의 세계관과 비교해 보자.

 

여보게들, 십만 년이 흐르면 우주 순환 주기가 다시 시작된다네. 이 세계는 파멸에 들 것이고 바다는 마를 것이네. 이 넓은 땅, 산들의 왕인 수메루 산이 불에 타 브라마의 세계는 하나도 남김없이 파괴될 것이네. 그러니 여보게들 선의를 이 땅에 넘치게 하소. 연민과 기쁨과 평등이 여기에 넘치게 하소. 어머니와 아버지를 공경하고 집안 어른들을 섬기소.’

이것이 바로 우주가 부서지는 시점인 회겁이다.’

 

□ 우주 발생적 순환에 의해 설명되는 철학적 공식이란 존재의 세 단계를 통한 의식의 순환을 말한다. 그 첫 단계는 깨어나는 체험의 단계, 두 번째 단계는 꿈 체험의 단계, 세 번째는 깊은 잠에 빠지는 단계다. (p. 338)

 

□ 보이지 않고 말할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고 추정할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고 그릴 수도 없다. 의식 상태에 있는 만물이 공유하는 자기 인식의 본질. 현상계는 이 안에서 소멸한다. 이는 평화요, 행복이요, 둘이 아닌 것이다. (p. 339)

 

Ü 저자의 다른 책 신화의 힘의 마지막 부분에 다음과 같이 이와 유사한 말을 한다. ‘(AUM)…태어남, 존재하게 되기, 사멸하여 온 곳으로 되돌아감. 옴은 사대의 음절이라고 불립니다. A, U, M, 침묵. 옴이 시작되기까지의 그 밑에 깔리는 침묵입니다. 내 인생은 옴입니다. 그러나 내 인생에는 침묵도 있어요. 그 침묵을 우리가 여기에서 영생하는 것으로 보아도 됩니다.

옴은 우주와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상징적인 소리입니다. 옴송을 통하여 우주와 접촉하고 우주를 느끼는 것, 이것이야말로 절정 체험입니다.

관계의 본질에 대한, 다분히 감정이 이입된 상태에서 했던 사고가 내 깨달음을 가능케 한 순간들이 있었지요.

그래서 절정의 순간은 이 언어 밖에 있는 것, 이 한마디….’, 이 한마디 밖에는 할 수 없는 데 있는 것이지요.’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우주의 끝을 헤아리고 그 끝이 곧 시작임을 아는 자라야 현자라고 불릴 만하다.’

 

모든 신화 체계의 기본 원리는 끝과 시작이 함께 한다는 바로 이 원리다. 창조 신화는 모든 피조물은 그들의 모태가 된 불멸의 존재와 닿아 있음을 상기시키는 파멸 의식과 함께 고루 퍼져 있다. 모든 피조물은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으나 필경은 극점에 이르러 파멸하고 그리고 회귀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신화는 비극적이다. 그러나 우리의 참 존재를 파멸하는 형상이 아닌 다시 태어나는 불멸의 존재라는 측면에서 보면 신화 체계는 그리 비극적인 것도 아니다. (p. 342)

 

Ü 갈수록 미궁에 빠진다. 대극의 체험이 이런 것인가. 처음과 끝, 시작과 종말, 남자와 여자, 극미와 극대, 시간과 공간, 다시 처음과 끝. 그래서 부처는 갠지스 강의 모래알과 같은 생을 눈물겨움으로 바라보았는가.

 

마오리족의 형이상학적 족보

회임에서 생산이,

생산에서 생각이

생각에서 기억이

기억에서 의식이

의식에서 욕망이

 

언어가 풍성해졌다.

언어는 어렴풋한 인식 안에 있었다.

언어가 밤을 만들었다.

큰 밤, 긴 밤,

낮은 밤, 아주 높은 밤,

두껍게 느껴지는 밤,

만져지는 밤

보이지 않는 밤

죽음과 더불어 끝나는 밤.

 

무에서 출산이

무에서 생산이

무에서 풍요가

생산의 힘

살아 있는 숨결

숨결은 빈 공간에서, 우리 위에 있는 대기를 생산했다.

 

대지 위에 떠 있는 대기

우리 위에 있는 거대한 창공은

새벽과 동거했다.

그리고 달이 생겨났다.

우리 위의 대기는

빛나는 하늘과 동거했다.

이어 태양이 생겨났다

달과 태양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하늘의 큰 눈처럼

이어 하늘은 빛이 되었다.

이른 새벽과 이른 낮이 되었다.

한낮, 하늘에서 쏟아지는 한낮의 빛이 되었다.

우리 위의 하늘은 하와이키와 동거하여

땅을 낳았다. (p. 348~350)

 

Ü 자가 생산을 위한 양극화!

 

□ 공간은 넓게 펼쳐진 것이 아닌, 오목한 형상으로 끝이 없다. ‘존재하는 것존재하지 않는무한 위로 떠 있는 껍질이다. 현대의 물리학자가 1928년에 그가 본 세계를 그리는 이 간략한 표현은 신화 체계의 우주적 알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더구나 우리의 현대 생물학이 다루고 있는 생명의 진화는 우주 발생 주기의 첫 단계를 그 주제로 삼고 있다. 물리학자들이 태양의 쇠잔과 우주의 극단적인 고갈과 더불어 온다고 주장하는 세계의 파멸은 탕가로아의 방화가 남긴 상처로 예고되고 있다. (p. 353)

 

Ü 연결될 듯 말 듯, 설명이 가능할 듯 말 듯 하다. 한번 떠 씹어 새겨보자.

 

□ 이집트 신화는 자위 행위에 의해 세계를 창조한 조물주를 그리고 있다. (354)

인도의 다른 신화에서의 이야기다.

한처음의 우주는 인간의 형상을 한 자아 SELF였다. 그는 주위를 돌러보았지만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으로 내가 바로 그다(I am he)하고 소리쳤다. 여기에서 나라는 이름이 생겼다. 오늘날에도 누가 말을 건네오면 , 라는 말로 서두로 삼은 연후에야 자기가 만난 다른 사람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p. 355)

 

Ü 재미있는 말이다. 이후 신화의 이야기는 매우 창조적이다. 매번 육신을 생성해 낼 때 그는 생성하기 전 그 육신의 모습을 상상하고 스케치하고 육화시키기까지 그 창조성과 창의성에 혀를 내두른다. 어찌 그런 디자인을 할 수 있는가. 어찌 나와 같은 얼굴을 디자인 했으며 나무, , 동물이며 그런 모습들을 상상하여 세상에 내 놓았는가.

 

□ 우주 발생적 순환의 초기에 신은 관여하지 않으나, 신은 창조자이자 수호자이며 파괴자인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가 여럿으로 나뉘는 이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에 운명은 우연히 그러나, 성취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근원적인 시각에서 보면 세계는 존재하고 폭발하고 해소되는 형식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덧없는 피조물들이 경험하는 것은 전쟁 구호와 고통의 비명이다. 신화는 이 고뇌(시련)를 부정하지 않는다. 신화는 안으로, 뒤로, 그 주변으로 본질적인 평화(천상의 장미)를 거느리고 있다.

이 장미는 십자가에 의해 인류에게 피어나는 장미다.

중심적인 원인의 평화에서 말초적 결과의 소용돌이를 향한 급전직하의 예는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타락하는 대목에 잘 나타나 있다. 그들은 금단의 과일을 먹었다. 그러자 두 사람은 눈이 밝아 졌다. 낙원의 복락은 그들에게 닫혔고 그들은 변형의 베일의 다른 쪽에서 창조된 세상을 보았다. 그로부터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얻기 위해서 수고해야 했다. (p. 365~366)

 

□ 저희들은 어떻게 되나요? 언제까지 살아 있게 되나요? 저희 삶에는 끝이 없나요?

그가 대답했다.

그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구나 어디 그럼 지금 그걸 정하도록 하자. 내 여기 있는 마른 들소 똥을 주워 강물에다 던지겠다. 만일 덩어리가 뜨면 인간은 죽되 나흘 안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러니까 나흘간만 죽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게 가라앉으면 죽어도 되살아나지 못할 것이다.(p. 368)

 

Ü 생명의 한계를 결정짓는다. 그 함의는 무엇일까. 그 함의와 오늘날의 생명연장의 의학적 고뇌는 어떻게 연계되는가? 갈수록 어려워 지는 질문 밖에 없다.

 

□ 이 어리석음 뒤로는 단일한 원인(제 자신의 살을 찢는 둔한 자)이 세계의 이원적 결과(선과 악)의 틀에 그 자리를 양보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이야기란, 외양만큼 순진하지 않다. (p. 372)

 

Ü 각주) 인간이 감독하고 통제한다고 하더라도 우주는 그 감독과 통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넓고 무자비한 우주가 사실은 우주가 관여하는 무서운 사건과 함께 정연하게 계획되고 직접적으로 관리되는 열로라는 순진한 무지가 당연시되고 있는 찬송가나 설교나 기도를 들을 때면 나는 이보다 훨씬 이성적인 남아프리카 종족의 가정을 떠올린다.

그들은 신은 선하고 만인의 행복을 바라지만 불행히도 그에겐 멍청한 아우가 있어서 언제나 신의 일에 훼방만 놓는다고 말한다.’

 

□ 민간 시화들은 초자연적 발산물이 공간적 형식을 취해 돌입해 들어오는 순간에만 창조 설화를 흡수한다. (p. 373)

 

2. 처녀 잉태 (The virgin birth)

 

□ 어머니의 손가락 끝이 향하는 곳에서는

비죽이 튀어나온 곶이 생겼고

어머니의 발길이 머무는 곳에서는

물고기가 놀 동혈이 생겼다.

어머니가 물속 깊이 들어가면

바다가 깊어졌다.

 

어머니의 머리가 스친 곳에서는

만이 늘어났다.

(p. 377)

 

Ü어머니가 세계를 창조하는 장면이다.

 

□ 우주적 여신은 여러 가지 가면을 쓴 모습으로 인간에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창조의 결과란 다양하고 복잡한 데다 창조된 세계의 관점에서 경험할 때면 상호 모순적이기 때문에 생명의 어머니는 동시에 죽음의 어머니다. 이 어머니는 기근과 질병이라는 추악한 마귀의 가면을 쓴다. (p. 380)

 

□ 남 로데시아의 와훙웨 마코니 족으로부터 채집한 동남 아프리카의 신화.

응고나 기름 ngona oil을 채운 응고나 뿔을 주었다. (p. 383)

 

Ü 각주) 이 기름과 뿔은 남 로데시아의 민간 전승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느고나 뿔은 불이나 번개를 일으킴으로써 생명을 잉태시킬 수도 있고 죽은 자를 부활시키는 등 이적을 일으키는 도구다.

라벤이 고래 뱃속에서 맛본 갈비뼈의 달콤한 기름과는 연관이 없을까. 생명을 창조하는 작업, sex에 참여는 것

 

□ 짐바브웨란 말은 대강 궁전이란 뜻이다.

호수 바닥에서의 대화는 영원과 찰나의 대화 존재하느냐 마느냐는 결정적인 대화다. 끌 수 없는 욕망은 마침내 오랏줄을 받는다. 즉 행동이 시작된다. 사대적 자궁에서 태어난 첫 아내 두 번째 아내는 전인간적, 초인간적이었다. 그러나 우주 발생의 순환이 진행되고 원초적인 형태에서 인류사적 형태로 성장 운동이 진행됨에 따라 우주적으로 탄생한 여왕들은 물러가고 무대는 여인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여기서부터 조물주는 자기 사회 속에서 형이상학적 구닥다리 존재로 타락했다. 결국 그가 단순한 인간인데 넌더리를 내고 윤택했던 아내에게로 돌아가고 싶어하자 세계는 그의 충격적인 반응 때문에 한 차례 몸살을 앓았지만 곧 여기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었다. 풍요한 대지에는 오직 인간만 남았다. 순환은 계속 진행 되었다. (p. 388~389)

 

Ü 신화 또한 인류사의 진보의 trigger point는 어쩌지 못하는 모양이다.

 

□ 범용한 남성들 사이에 섞인 바람의 신부인 우주적 여성의 축소판이다. 원초적인 심연의 휴경지로 남은 그녀의 자궁은 만반의 준비가 다 된 상태에서 일찍이 공을 살찌웠던 근원적인 권능을 부른다. (p. 390)

예를 들면, 첫 햇살을 온몸 가득히 받을 수 있는 자세를 취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햇살을 받은 두 딸 중 하나가 햇살에 의해 수태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고란자초라는 이름을 얻은 이 아이는 촌장, 즉 외조부 집에서 스물네 살이 될 때까지 자라다가 당당하게 수도에 입성, 국민들로부터 태양의 아들이란 칭호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p. 391)

 

Ü 신화에서 처녀 수태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존재가 원형을 찾아 나설 때 그 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건가.

 

□ 부처는 하얀 우윳빛 코끼리 형상으로 하늘에서 어머니의 자궁으로 하강했다. 뱀을 누빈 치마를 입은 여성인 아즈텍의 코아틀리쿠 coatlicue는 신에 의해 깃털덩어리 형상으로 하강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의 각 장에 우글거리는 신들의 창조한 요정들은 아예 가면 무도회를 방불케 한다. 유피테르(제우스)의 황소, 거위, 그리고 황금의 비로 변신하기도 한다. (p. 393)

Ü 부처의 탄생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

 

3. 영웅의 변모 (Transformation of the Hero)

 

□ 이제 우리는 두 단계를 거쳐왔다. 즉 첫째는 비실재적 실재의 직접적인 유출에서 신화적 시대의 유동적이나 시간을 초월한 존재에 이르는 단계, 둘째는 이 실재적 실재에서 인류 역사의 영역에 이르는 단계다. 유출은 이제 그 극점에 이르렀고 의식의 장은 이제 좁아질 대로 좁아졌다. 전에는 사상의 실체가 보였지만 이제는 그 부수 효과만 인류의 눈, 작고 현실적인 동공의 초점 앞에 모일 뿐인다. 따라서 이제 우주 발생적 순환은 보이지 않게 된 신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모습을 갖춘 영웅에 의해 진행되어야 한다. 세계의 숙명은 바로 이 영웅들을 통해 실현된다.

 

영웅은 점차 우화적인 성격을 일탈하다가 다양한 지방적 전승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마침내 전설은 기록되는 시대라는 빛의 세례를 받게 된다. (p. 396~397)

염제신농씨.JPG

[풀 먹는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

 

Ü 이때부터 기록의 영웅들이 등장하는 모양이다. 영웅이 기록 되어지면 실존의 영웅으로 재 탄생될 것이다. 위정자가 대중을 현혹하는데 쓸 결정적 무기도 될 것이다.

 

□ 이러한 관점은 영웅이란 성취되는 것이 아니고 운명 지워진다는 관점과 일치한다. 가령 예수는 엄격한 고행과 명상으로 지혜를 터득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하면 인간의 모습을 취한 하강한 신이라고 믿어질 수도 있다.

신적인 존재란 우리 모두의 내부에 있는 전능한 자아의 계시다. 삶에 대한 묵상은 따라서 정확한 모방에 이르는 전주곡으로서가 아니라 자기의 내재적인 신성에 대한 명상의 형태여야 한다. 말하자면 이러저러하게 행동해서 선함을 얻는 것이 아니고 이를 앎으로써 신이 되는 것이다. (p. 400)

 

Ü 캠벨은 앞서 얘기한 대승과 소승불교에 대해 구분 기준을 설명하지만 자신의 의견은 유보한다. 위의 글을 보면 대승불교를 지지하는 관점이라 볼 수 있겠다. 이 책에 설명하고 있는 캠벨의 구분 기준이다. (어떤 것이 옳다고는 말 못한다.) ‘소승불교는 부처를 인간적인 영웅, 대성인 그리고 현자로 모신다. 그러나 대승불교 에서는 부처를 구세주인 대각자 우주적인 정각 원리의 화신으로 파악한다. 보살은 불성의 경계에 든 귀인이다.’

기독교를 바라보는 세계의 관점도 아래와 같이 변하고 있다.

각주) 예수를 곧이 곧 대로 따르는 시대 (원시 기독교)

예수는 신이고 세계는 모두 신의 종으로 살던 시대 (초기 및 중세 기독교)

신의 전달자로 인식하는 시대 (프로테스탄트 기독교)

인간 존재 전형으로 인식하는 시대 (개혁 기독교) (p. 401)

 

□ 실제 역사적 인물의 행위가 영웅적인 것이었다면 이 전설을 만드는 사람은 그를 위해 영웅의 모험과 그 심도가 유사한 정도의 모험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모험이 바로 초자연적인 영역으로의 여행인데 이 여행이 독자에 의해서 한편으로는 마음이라는 밤바다로의 여행 다른 한편으로는 각자의 삶으로 구체화하는 인간의 운명의 측면 혹은 영역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p. 402)

 

Ü 영웅을 보는 일반의 심상. 그 심상에 다가가는 영웅화의 메커니즘.

아가데의 사르곤 왕, 교황 대 그레고리우스, 샤를마뉴 등

 

□ 아브라함은 열흘이 지나자 일어서 걸었다. 그는 동굴을 나와 계곡을 빠져나갔다. 해가 저물고 별이 나오자 그는 중얼거렸다.

저기에 신들이 있구나

그러나 새벽이 밝아 별들이 사라지자 그는 다시 중얼거렸다.

저것은 신들이 아니니 내 섬기지 않겠다.’

이윽고 해가 뜨자 그는 다시 속삭였다.

이것이야말로 신이니 내 마땅히 찬미하리라.’

그러나 해가 지자 그는 고쳐 말했다.

신이 아니었구나.’

달을 보자, 그는 신을 부르며 섬기겠노라고 했다. 그러나 달이 지자 그는 소리쳤다.

이 역시 신이 아니다. 어디엔가 저들을 움직이는 분이 계실 것이다.’ (p. 407)

 

Ü 신은 어디에 있는가. 신은 어딘가에 있고 이 절대적인 우주 순환을 관장하고 있다는 믿음, 세상을 자기 식대로 조정하고 있다는 생각. 그러나, 동양 철학과 힌두교, 불교 등에서는 만물에 신이 내재해 있다고 하지 않았나.

 

□ 신화는 그러한 체험을 견디고 거기에서 살아나오는 데는 범상하지 않은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예수는 논쟁에서 이른바 지혜로운 자들을 당황하게 했다. 어린 시절 부처는 어느 날 나무 그늘에 놓여지게 되었는데 유모는 나무 그림자가 오후 내내 움직이지 않고 아기는 요가적 무아지경에 빠져 있는 걸 발견하고 기겁을 했다. (p. 410)

 

□ 그러나 크리슈나는 어찌나 힘있게 빨았던지 그녀의 목숨까지 빨아내고 말았다. (p. 410)

 

Ü 묘사가 좋은 문장이다.

 

□ 오랫동안 묻혀 지내던 영웅의 암흑기가 끝나고 그의 진정한 성격이 노출되는 것이다. 여기에도 상당한 위기가 따른다. 영웅의 권능이 인간 사회에서 소외, 축출을 야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Ü 영웅의 진가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인간 사회의 움직임들을 어떻게 잠재우는가는 영웅의 진가다. 나의 진가는 무엇일까.

□ 아일랜드의 전사 쿠훌린은 중세 얼스터 지방의 붉은 나뭇가지 기사단 전설의 주인공인데 이 영웅의 내부에서 타오르는 우주적 에너지는 어느 날 문득 화산처럼 폭발하여 저 자신은 물론 주위의 모든 것을 파멸시킬 수 있다. (p. 414~415)

 

Ü 나폴레옹이 느꼈던 신의 감정과 같은 우주의 에너지인가. 그의 말은 이렇다.

나는 미지의 종국으로 (신에 의해) 떠밀리는 느낌을 받고 있다. 내가 그곳에 이르는 순간 내가 불필요하게 되는 순간 나를 갈가리 찢는 데는 한 입자의 원자면 충분하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인류가 힘을 모두 합치더라도 나를 해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신과 함께 하고 있으므로) (본서, p. 97)

 

영웅이 탄생하는 곳 혹은 영웅이 도피 또는 추방당했다가 보통 인간들 사이에서 성인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떠나오는 머나먼 땅은 세계의 중심 혹은 세계의 배꼽이다. 물결이 물밑의 바닥에서 번져나오듯 우주의 형상도 이 근원에서 둥글게 퍼져나간다. (p. 419)

 

Ü 그 땅은 어느 곳, 어느 시간, 어느 때를 가리지 않는다. Axis mundi!

 

□ 신화적인 영웅은 이루어진 사상의 옹호자가 아니라 이루어지는 사상의 옹호자다. 그의 손에 살해되는 용은 현상이라는 괴물 바로 그것이니 괴물은 쇠사슬 같은 과거의 옹호자이다. 영웅은 암흑에서 일어서지만 적은 힘이 세고 권능 또한 엄청나다. 적은 자기 지위의 권위를 자신을 위해 행사하기 때문에 적이며, 용이며, 폭군이다. 과거를 옹호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옹호한다는 이유에서 그가 바로 사슬이다. (p. 422)

Ü 영웅은 과거를 배반하고 현재를 구축한다.

 

□ 고대의 전사인 왕은 괴물의 퇴치를 자기 임무로 생각했다. 용과 대적한다는 빛나는 여웅의 신조는 모든 군사 행동에 대한 자기 합리화의 한 방편이 되어 주었다. (p. 427)

 

Ü 전쟁이 신화로부터 그 정당성을 획득한다. 결국 멈출 수 없는 진행인가.

 

□ 영웅이 세계의 군주라면 처녀는 세계이며 영웅이 전사라면 처녀는 명예다. 처녀는 영웅이 감옥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하는 영웅 자신의 운명의 이미지다. (p. 428)

Ü 그래서 여자 편력이 없는 영웅은 한번도 보지 못했다.

 

□ 여자 전사인 스카타크에겐 딸(신화에 나오는 괴인에겐 거의 다 그렇듯이)이 하나 있었다. (p. 430)

 

Ü 이아손의 황금 양털을 위한 메데이아의 그것과 유사한 전개가 예상된다.

 

□ 눈에 보이는 표면적인 것에 대한 감상에 현혹되지 않고 과감하게 자기 본성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는 자 (니체의 말을 빌리면 스스로 구르는 바퀴인 사람) 앞으로는 어려움이 비켜나고 뜻밖의 탄탄대로가 나타나는 법이다. (p. 431)

 

Ü 과연 그런가. 어려움을 견디고 가난을 견디면 스스로 구르는 바퀴가 될 수 있는가. 대출이라는 고리대금의 역사는 인류가 존재할 때부터 있어왔는데 없어지지 않는 이유가 궁금했다. 위정자는 이를 사회적 억압의 효과적인 방편으로 활용하여 불필요한데 까지 성실을 강요하는 장치로 사용하는 것은 아닌가.

 

□ 그러나 최고의 영웅이란 우주 발생적 순환의 원동력을 추진시키는 영웅이 안리ㅏ 눈을 다시 뜨고서 오고 가며 기쁨과 고뇌가 교차되는 세계의 파노라마를 통해 하나의 실재가 다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깨치는 영웅이다. (p. 432)

 

□ 황금 시대의 황제 젬쉬드 jemshid에 대한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 전설에 그려져 있다.

땅이 은총을 베푸는 것은 나로 인함이니

나는 더불어 겨룰 자가 없는 임금이다.

이 같은 나라가 또 어디 있더냐.

 

나야말로 이 땅의 유일한 군주가 아니겠느냐.

하늘을 욕보이는 교만에 찬 이 말이

그의 입술을 떠나는 순간부터

그의 위엄은 땅에 떨어졌다.

입이란 입은 모두 방자하고 대담해졌으니 그럴 수밖에. (p. 435~436)

 

Ü 말하여질 수 없는 것을 말한 자의 업이다.

각주) 일찍이 페르시아인들의 신앙은 예언자 차라투스트라 Zarathustra(=Zoroaster)에 의해 선의 원리와 악의 원리 빛과 어둠, 천사와 악마의 엄격한 이원론에 따라 재확립 되었다.

 

자기 치적의 은총을 초월적이며 근원적인 존재의 은혜로 돌리지 않고 황제는 마땅히 자기가 누릴 바를 누린다는 입체적인 환상을 품는다. 이런 자는 더 이상 두 세계의 중재자일 수 없다. (p. 437)

 

Ü 조금 안다고 입 밖으로 어설픈 이론을 뱉어버리고 그것이 진리인 양 얘기하는 나는, 쪽팔리는 줄 알아야 할 것.

 

□ 모두들 슬퍼하지 말아요. 죽지 않고 영생하는 인간은 있을 수 없어요. 자기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부터가 틀린 것입니다. 어버지, 어머니, 아들은 존재하지 않아요. 존재하는 것은 오직 생과 사의 끝없는 순환일 뿐입니다. (p. 440)

 

Ü 이를 깨닫는 순간은 내가 살아있을 때, 내 육신이 지금의 영혼을 지니고 있을 때 과연 올 수 있겠는가.

 

□ 어제의 영웅은 오늘 스스로를 십자가에 달지 않으면 내일의 폭군이 된다. 현재의 관점에서 볼 때 미래에 대한 구원이 이 모양이니 앞날이 허무할 수밖에 없다. (p. 442)

 

이 무서운 예언과 맞설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신화는 이 궁극적인 계시를 희미한 장막으로 가려놓았다. 아들은 아버지를 시해하지만 결국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다. 수수께끼 같은 인물들은 원초적인 혼돈 속으로 해소된다. 이것이 바로 세계종말 그리고 재개의 비밀이다. (p. 442)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 대전의 마지막 장이 다른 손에 의해 완성되게 한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내가 쓰는 시대는 끝났다. 나는 나에게 계시된 것을 써왔고 가르쳐왔지만 내가 보기엔 참으로 하잘것없다. 이제 바라건대 내가 가르치는 시대가 끝났듯이 내 삶 또한 그러하기를..’(p. 443)

 

오이디포스가 알게 된 것을 자각하게 된다. 갑자기 육체는 자기 폭력의 바다로 보이게 된다. (p. 444)

 

Ü 콤플렉스로 평가 절하 되지만 오이디포스는 실로 깨달은 자다. 생의 고해로써의 육체, 껍데기 육체를 자각한 선각자인 것이다. 그는 성자가 되었다.  

 

□ 그러나 이 십자가의 관문 너머에 신 안에서의 천복이 있다. 십자가는 끝이 아니라 길(태양의 문)이어서 그렇다.

 

그가 나를 인()치셨는데 내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겨울은 갔다. 산비둘기가 노래한다. 포도밭은 꽃을 터뜨린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에게 결혼 반지를 주시었고

내 머리는 그분 신부 관을 씌워주셨다.

그분이 입혀주신 예복은 금실로 짠 빛나는 예복이요,

그분이 걸어주신 목걸이는 값을 헤아릴 수 없다. (p. 445)

 

Ü 그리스도의 신부로 성별될 때 수녀들이 부르는 응답송가.

 

□ 세존이시여 신들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세존께서는 저들을 무엇으로 보십니까?

아난다여, 몇몇 신들은 하늘에 있되 마음은 세상에 있다. 그들은 머리카락을 날리며 울부짖고 두 팔을 내저으며 울부짖고 땅바닥에 거꾸로 처박혀 이리저리 구르면서 소리를 지른다. (p. 456)

 

□ 제행이 무상하구나. 태어난 것, 모습을 나타낸 것, 죽기로 마련된 것들이 어찌 이를 피할 수 있겠는가? 어쩔 수가 없구나.

 

여래의 마지막 말은 이러하다.

축복받은 자는 첫번째 무아에 이른다. 첫번째 무아에서 일어난 그는 두번째 무아로 들어간다. 두번째 무아에서 일어난 그는 세번째 무아로 들어간다. 세번째 무아에서 일어난 그는 네번째 무아로 들어간다. 네번째 무아에서 일어난 그는 무한 의식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무한 의식에서 일어난 그는 무한 공간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무한 공간의 영역에서 일어난 그는 무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무의 영역에서 일어난 그는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영역으로 들어간다.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영역에서 일어난 그는 지각과 감각의 휴식 상태에 이른다.’

그러자 아난다 존자가 아누룻다 존자에게 말했다.

아누룻다 존자여, 세존께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아니오, 아난다 존자여, 세존께서는 아직 열반에 드신 것이 아닙니다. 이제 지각과 감각의 휴식 상태에 드시었습니다.’ (p. 456~457)

 

Ü 기절할 경지다. 경천동지한다.

 

4. 소멸 (Dissolutions)

 

□ 신화는 무수한 장애물을 돌파해야 하는 영혼의 여로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p. 460)

 

□ 단테의 신곡은 이 단계들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즉 연옥편은 육신의 욕망과 행위에 얽매인 영혼의 참담함을 정화편은 육신의 경험이 영혼의 경험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천국편은 정신적 자각의 단계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 무시무시하고 심오한 여행의 과정을 그리고 있는 것이 바로 이집트의 사자의 서 ‘book of dead’ .(p. 462)

Ü 곧 빠져들 lovely ‘신곡’. 그 책의 두께를 본 지금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앞선다.

 

□ 이와 마찬가지로 영혼은 원래 영혼에서 분리되어 영혼 밖에 있다고 생각되던 신들을 동화함으로써 그 크기나 권능으로 보아 최고조에 이른다. 신들은 영혼이라는 존재 자체가 투사된 것이다.

 

나는 어제이며 오늘이며, 또 내일이다. 나에게는 다시 태어나는 능력이 있다. 나는 신들을 창조했고 아멘테트의 명계 및 천상의 피조물들에게 제사밥을 먹여 주는 비밀의 장막에 가려진 신적인 영혼이다.’ (p. 466)

누트여신.JPG

[우주에게 젖을 먹이는 여신, 누트(Nut)]

 

Ü 신화의 힘에서 언급되었었다. 기억하는가. 누트여신

 

□ 개인이라는 창조된 형상이 결국은 소멸되고 말듯이 우주 역시 소멸된다.

 

여보게들, 십만 년이 흐르면 우주 순환 주기가 다시 시작된다네. 이 세계는 파멸에 들 것이고 바다는 마를 것이네. 이 넓은 땅, 산들의 왕인 수메루 산이 불에 타 브라마의 세계는 하나도 남김없이 파괴될 것이네. 그러니 여보게들 선의를 이 땅에 넘치게 하소. 연민과 기쁨과 평등이 여기에 넘치게 하소. 어머니와 아버지를 공경하고 집안 어른들을 섬기소.’

이것이 바로 우주가 부서지는 시점인 회겁이다. (p. 468)

 

Ü 기가 차고 혀를 내 두른다. 이 부분을 읽고는 한 동안 깊은 상심에 빠졌다. 이유는 나도 모른다.

이 책 337페이지에 소개된 힌두교의 시간 개념이다.

힌두교의 네 기간 중 첫 번째 기간은 완숙한 행복과 아름다움과 완전성이 지배하는 기간으로 이 기간은 4800신년(1신년은 인간의 햇수로 치면 360년이다) 간 계속된다. 두 번째는 이 보다 아름다움이 덜한 기간으로 길이는 3600신년, 미덕과 악덕이 공존하는 세 번째 기간은 2400신년, 악이 득세하는 오늘날 우리 세계와 같은 네 번째 기간은 1200신년, 인간의 햇수로 치면 432,000년이다.’

 

□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 기간 동안 보다 작은 단위의 주기들은 결국에 가서 종말에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영원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이 오랜 세월에서 몇 년 정도의 차이가 난들 어떠랴? (p. 469)

Ü 어제 아내가 물었다. ‘, 깔따구가 세상에 태어나 얼마나 살다가는 아나?’ 깔따구는 제가 태어날 때 지닌 에너지가 소진할 때까지 아무것도 먹고 마시지 않고 이 세상에 살다가 죽는다고 한다. 아무것도 먹고 마시지 못하는 이유는 입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깔따구 들러붙으면 팔을 휘저으며 처내던 내가 무참해 진다.

 

□ 동쪽에서 번개가 치면 서쪽까지 번쩍이듯이 사람의 아들도 그렇게 나타날 것이다. 시체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여드는 법이다. (p. 472)

 

무화과 나무를 보고 배워라.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워진 것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앞에 다가온 줄 알아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날과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Ü 마르코복음 중에서. 자연스럽다는 말, 스스로 그러하다는 말은 이와 같은 것이다.

 

에필로그

신화와 사회 (Myth and society)

 

□ 신화의 해석에는 최종적인 체계가 있을 수 없고 앞으로도 그런 것은 있을 것 같지 않다. 신화 체계는 진실만 말하는 고대의 해신 프로테우스 proteus와 같다. 이 해신은 땅에서 기는 모든 생물, 물 속에 사는 모든 생물, 심지어는 타오르는 불꽃에게도 말을 시킬 수 있고 그와 똑같이 변신할 수도 있다. (p. 477)

 

□ 프레이저는 자연계를 설명하려는 원초적인 서툰 노력이라고 했고 뮐러는 후세에 오인되고 있는 선사시대로부터의 시적 환상의 산물이라고 했으며 뒤르켐은 개인을 집단에 귀속시키기 위한 비유적인 가르침의 보고라고 했고 융은 인간의 심성 깊은 곳에 내재한 원형적 충동의 징후인 집단의 꿈이라고 했다.

쿠마라스와미는 인간의 심오한 형이상학적 통찰을 담은 전통적인 그릇이라고 했고 교회에서는 하느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라고 정의했다.

 

결국, 신화는 삶 자체가 개인, 종족 시대의 강박 관념과 요구에 대해 부응하듯이 신화 자체도 그에 부응할 것으로 비친다. (p. 478)

 

개인은 이 모두일 수가 없다. 따라서 개인의 전체성은 개별적인 구성 인자로서가 아닌 사회라는 공동체 안에서만 누릴 수 있다. 개인은 한 구성 요소일 수 있을 뿐이다. 개인은 이 집단으로부터 삶의 기술, 사유의 바탕인 언어, 삶의 자양인 이상을 빚졌다. 그의 육체를 이루는 유전자도 그 사회의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다. 개인이 실제든 상상이나 느낌을 통해서든 그 사회로부터 자신을 단절시킨다는 것은 존재의 근원과의 절연을 의미할 뿐이다.

 

이러한 제의는 개인의 정체를 그 자신에게 보여준다. (p. 479)

 

Ü 깨달음의 기쁨도 그래서 이 사회와 나누어야 하는 것이다. 사회에 빚지지 않은 자 없으므로.

 

□ 맡는 역할이 비록 하찮다고 하더라도 개인은 이 인간의 아름다운 축제의 이미지(잠재적이긴 하나 필연적으로 그의 내부에 깃들여 있는 이미지)에서 자기 역할이 바로 자기의 본질이었음을 깨닫는다. (p. 480)

 

□ 남자든 여자든 정직하게 자신이 맡은 역할(성직자든, 매춘부든, 여왕이든, 노예든)에 충실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만이 존재한다는 동사를 쓸 자격이 있는 인간이다. (p. 480)

 

Ü 자연은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으므로 아름답다는 말이 인간에게는 이렇게 해석 되는구나. 반성하자 나는 존재하는가.

그러나, 사회적 층위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경우는 어찌 하는가. 엄연히 계급지워져 있는 이 불합리는 어찌 하는가. 이로 인한 혁명은 존재의 소명을 충실히 따르는 것인가. 아니면 세계에 아니라고 대답한 이방인의 행동인가.

 

□ 그러나 다른 길도 있다. 즉 사회적인 의무와 대중적 제의와는 정반대로 향하는 다른 길이 있는 것이다. 의무의 길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사회에서 추방된 자는 아무것도 아닌 쓰레기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 추방은 탐색 모험의 첫 단계일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이 두가지 길을 동시에 간직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길은 자기 내부에서 탐색되고 또 발견되어야 한다. 성별, 연령별, 직업별 차이는 우리 인간의 특질상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어느 단계에서 우리가 한동안 입고 있는 옷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부에 있는 인간의 이미지는 의상과 아무 상관도 없다. 우리는 우리 자손을 미국인이며, 20세기 인이며, 서양인이며, 기독교 문명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호칭이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엇인지는 가르쳐주지 못한다. 우리의 핵은 무엇일까? 우리라고 하는 존재의 기본적인 성격이란 어떤 것일까? (계속 이어 가자. 침을 꼴깍 삼킨다.)

 

나는 저것이 아니다. 저것이 아니다. 조금 전에 죽은 내 어머니도 아니고 내 아들도 아니다. 내 몸은 병들거나 나이를 먹는다. 내 팔, 내 눈, 내 머리 이 모든 것을 합한 것도 아니다. 나는 내 감정이 아니다. 내 마음이 아니다. 내 직관력이 아니다.’ (그러면 나는 누구인가?)

 

목표는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가를 즉 본질을 깨닫는 것이다. (보아서 아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딛고 있는 현재를 우주적인 stance로 알아차리는 것)

신은 이렇게 말했다.

오 모하메드여, 네가 없었으면 내 저 하늘도 만들지 않았으리라.’ (p. 481~483)

 

진리는 하나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언표한다. (p. 486)

 

Ü베다에 표현된 말씀

 

□ 오늘날에는 이 모든 비의가 그 힘을 잃었다. 이제는 물리적 용어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을 뿐이다. 서양 학문의 하늘에서 땅으로의 하강(17세기 천문학에서 19세기 생물학으로의)그리고 오늘날의 인간 자체에 대한 관심 집중 (20세기 문화 인류학과 심리학에서의)은 인간의 경이라는 초점의 놀라운 이동로를 닦았다. (p. 487)

 

□ 감히 소명에 응하여 우리의 운명을 화해시켜야 하는 존재의 거처를 찾아내는 현대적 인간인 현대의 영웅은 자기가 속한 사회가 자만심과 공포와 자기 합리화된 탐욕과 신성의 이름으로 용서 되는 오해의 허물을 스스로 벗어 던지기를 기다릴 수도 없고 기다려서도 안 된다. 니체는 그날이 도래한 듯이 살라고 하고 있다. 창조적인 영웅을 이끌고 구원하여야 하는 것은 사회가 아니다. 아니 사회를 지키고 구원하여야 할 사람이 바로 창조적 영웅이다. 그리하여 우리 각자는 그 영웅의 족속이 대승을 거두는 그 빛나는 순간이 아니라, 그가 개인적으로 절망을 느끼고 침묵을 지킬 때 그가 겪는 모진 시련(구세주의 십자가를 지는 일)을 나누어 부담하는 것이다. (p. 488)

 

Ü AUM…

신화의 힘.JPG

[비교] 신화의 힘에서 AUM으로 이르는 과정을 도식화, 인용함

 

이윤기 선생님의 멋진 번역에 다시 한번 감사 드립니다.

 

 

3. 다시 말하는 영웅(내가 저자라면)

 

일본 만화 짱구는 못 말려에서 주인공 짱구가 죽고 못사는 우상은 액션 가면이다. 무한한 힘을 가진 이 로보트는 인간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벽한 기계인 로보트도 아니다. 영웅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이렇게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그 무엇으로 상상했다. 하지만 캠벨은 그 영웅은 우리 꿈속에 존재하는 자신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다. 우선,

 

이 방대한 신화의 수집을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수행 했을까. 그 작업의 수고스러움을 상상하면 혀를 내두를 뿐이다. 그런 수고는 이 책을 보다 쉽게(여전히 나에게는 어렵지만) 풀이할 수 있는 힘을 준 듯 하다. 이 책의 매력은 여기에 있다. 이론적인 학문이나 논문 격의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심오한 언어적 술어로 이야기하는 대신, 이른바 거장의 붓이 그러는 것처럼 우리 시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이야기를 일반인이 알아들을 수 있게 그려내는 데 모자람이 없다는 것, 어려운 이야기를 어렵게 이야기하지 않고 우리가 나날의 생활에서 만나는 문제와 관련시키거나 세계 여러 나라의 예화를 넉넉하게 소개함으로써 독자가 시적 상상력으로 이를 그 나름대로 해석하게 한다. 캠벨의 이야기가 끝나는 지점부터 독자들은 우주 심상에 대한 고민은 시작된다.

 

예수와 부처, 마호메트와 브라마 그리고 힌두의 여러 신들 이 모두를 아우르고 그 질량을 견주고 언어가 누릴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단어들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은 보물이다. 역자가 말했듯이 명저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 책에서 오로지 영웅에 모습에 그 모두를 할애한 것 같지는 않다. 영웅의 이야기를 하는데 필요했을 지 모르겠으나 종교적 계율이나 우주에 대한 관점들을 이야기 할 때는 영웅의 이야기와는 조금은 멀어지지 않았나 생각된다. 하지만 이 또한 나는 좋았다.

 

구성의 관점에서 주제와 조금 먼 이야기가 있었다는 것은 나뿐만 아닌 다른 독자들도 느꼈을 터. 따라서 보다 가독성을 높이고 집중적으로 읽어내려 가기 위해서는 구성의 재배열이 필요할 듯 하다. 하지만 따지자면 이 책은 구성의 배열로 인해 주제의 초점이 흐려지기 보다는 이야기의 중간 중간의 예화, 너무 많은 예화에서 초점이 흐려지는 것 같다.

 

예화가 필요하되 주제에 대한 집중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선에서 예화의 양을 조절할 필요가 있겠다. 그리고 중간 중간 오늘날의 현실을 꼬집고 일갈하는 이야기들이 보다 많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리하면 이 책은 배금주의를 떨쳐 내지 못하는 여러 사람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으리라 생각된다.

 

이 책에서 말하는 이 책 구성에 대한 소개다. ‘2부 우주 발생적 순환은 성공한 여웅에게 계시로 하사된 세상의 창조와 멸망의 엄청난 환상을 펼쳐 보인다. 1, 유출은 무에서 비롯되어 나오는 우주의 형상을 다룬다. 2장 처녀잉태에서 여성적인 힘의 창조적 보상적 역할을 일별하되 먼저 만유의 어머니 mother of the universe로서의 우주적 스케일 이어서 영웅의 어머니로서의 인간적인 단계를 다룬다. 3장 영웅의 변모는 인간의 다양한 요구에 따라 갖가지 형태로 영웅이 등장하는 전형적 단계를 통해 인류의 선사적 역사 과정을 추적한다. 그리고 제4장 소멸은 처음에는 영웅의 예언된 종말 이어서는 드러난 세계의 예언된 종말을 그린다. ‘

 

앞서 예화의 양에 대한 조절이 필요하다는 내 생각은 다르지 않다. , 그 예화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는 경우에는 다르다. 우리는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를 읽었고 신화의 힘을 읽었는데 이 사전 지식은 이 책을 이해하는데 매우 유용했다. 특히, 파에톤의 이야기나 악타이온의 이야기 등은 변신이야기에서 사전에 읽지 않고 바로 접했다면 다소 지루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접하지 못한 즉 익숙하지 못한 예화에 대해서는 건성으로 읽어 내려 간 적도 있는데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습득할 마음이 없었다는 것에 대해 일차적인 책임은 독자()에게 있겠으나 2차적으로는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지 못하는 다양함, 구성, 예화의 양 등에 있을 것 같다.

 

이 책의 제목은 얼핏 영웅의 모습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 이 책은 영웅을 주제로 한 인간의 이야기, 세계에 대한 인간의 관념, 지금 살아 숨쉬는 우리 생의 우주적 stance에 대한 이야기다. 그 이야기를 영웅의 모습과 신화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깊이 이해했다고는 못하겠다. 그렇지만 책 내용에도 나와 있듯이 우리가 곧 읽을 고전과 문학이 이러한 신화와 영웅의 모습을 오늘날까지 계승했던 유일한 통로임을 감안할 때 이 책은 앞으로 우리의 모습을 예견한 책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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