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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 1일 09시 24분 등록
 

히타이트


이희철지음/ 리수출판사


저자에 대하여

1953년 대전에서 태어나 대전고등학교를 거쳐 한국외국어대학교 터키어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세계경영대학원에서 국제경영학 석사과정을 이수했다. 터키의 수도 앙카라에 있는 국립 가지Gazi 대학교 사회과학대학원 국제관계학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치고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터키에서 학위 과정 이수중에 총무처 시험을 거쳐 외무부현 외교통상부에 입부한 후 본부 내 중구과中歐課, 문화협력과, 홍보과에서 일하였으며, 또한 주駐터키 대한민국대사관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하였다. 본부 외교사료과 과장을 거쳐 2006년 8월부터 미국에 있는 애틀란타 총영사관으로 일하고 있다.

20여 년 간 터키 연구에 몰두하였으며, 터키의 정치뿐만 아니라 터키의 문화·역사에 남다른 정열과 관심을 가지고 있다.

저서로는 미국인 학자가 저술한 터키 역사Turkey: A short History를 1998년에 <터키사 강의>라는 제목으로 번역 발간하였으며, 2001년에는 <오스만 제국과 터키사>를 2002년에는 <터키: 신화와 성서의 무대 이슬람이 숨쉬는 땅>을, 2004년에는 <히타이트: 점토판 속으로 사라졌던 인류의 역사>를, 2005년에는 <이스탄불: 세계사의 축소판 인류 문명의 박물관>을 발간하였다.

그 동안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면에서의 한국-터키 관계사 연구’, ‘터키 해협의 국제 항행상 지위 변천’,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을 중심으로 한 수자원 분쟁 연구‘ 등 다수의 논문도 발표하였다.

2002년에는 한·일 월드컵을 맞아 웹 커뮤니티 ‘터키팀을 응원하는 사람들의 모임cafe.daum.net/turkeyworldcup'을 개설하여 우호적인 한·터 관계를 조성하는 데 기여하였다.


목차


글을 시작하면서

제1부 히타이트 입문

2003년 5월에 부활한 히타이트 제국

히타이트는 어떻게 알려지게 되었나

히타이트 언어의 해독 "당신은 빵을 먹고 물을 마실 것이다"

히타이트인들의 정신적 고향 "하티 나라의 땅"

히타이트인들은 어떤 언어를 주로 사용하였을까

히타이트 역사를 밝혀주는 자료는 무엇인가

제2부 히타이트 역사

히타이트 시대의 전·후 역사

히타이트인들의 시조, 쿠사라 왕조 가문

초기 왕국 시대 "시리아와 바빌론을 향해"

유혈극을 부른 왕실 내 권력 투쟁

법과 질서를 사랑한 텔리피누

히타이트 제국 시대를 열다

또 하나의 시련 "전염병이 제국을 휩쓸다"

이집트와의 대전쟁과 평화

제국의 쇠퇴와 멸망

인물로 읽는 히타이트 역사 요약

제3부 히타이트 자세히 들여다보기

행정 조직

종교

점복(占卜)과 주술(呪術)

신화 및 설화

법령

경제 생활

예술

군사

카데쉬 전투

히타이트의 갑작스런 멸망

제4부 히타이트 역사가 남아 있는 주요 명소

보아즈칼레(하투샤)

야즐르카야

아나톨리아 문명 박물관

알라자회윅

퀼테페

글을 마치면서

찾아보기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


글을 시작하면서

****히타이트 제국은 기원전 1700년경 시작하여 기원전 120년경까지 약 500년간 역사무대에서 등장하였다. 그런데 제국의 멸망과 함께 그들이 남긴 역사의 기록이나 흔적이 땅속에 묻히는 바람에 너무 철저하게 인류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다.(5P)


***히타이트인들이 살았던 지역은 오늘날 인류 문명의 고향이라고 불리는 터키가 자리하고 있는 아나톨리아 반도이다. 아시아 대륙의 서쪽 끝에 있는 아나톨리아반도는 고대의 다양한 인류 문명이 발생한 곳으로 소아시아라고도 불린다. 현재 터키가 자리한 아나톨리아 지역은 동서남북 어디를 가도 다양한 인류 문명의 역사가 남아있어 전국이 문명 박물관 같은 곳이다. 이 땅은 고대 히타이트 제국으로부터 시작하여 비잔틴제국, 오스만 터키제국 등 3대 제국을 탄생시켰다. 그래서 아나톨리아를 제국의 땅이라고 부른다. (6P)

제 1부 히타이트 입문


2003년 5월에 부활한 히타이트 제국

****히타이트 제국의 이야기는 지금부터 말하자면 약 4000년 전의 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로 그 히타이트 시대의 5월 8일이 어떤 날이었는지는 지금 알 길이 없다. 히타이트 왕이 왕좌에 오른 날일 수도 있고 아니면 폐위된 날일수도 잇다. 히타이트 군사가 전투에서 승리한 날일 수도 잇고 패배한 날일 수도 있다. 어찌했건 히타이트인들의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5월 8일은 한 번쯤은 있었을 것이다. (15P)


****아나톨리아에서 인류가 집단 거주지에 정착하기 시작하여 4500여년이 지나고 있을 때 히타이트가 이 지역에서 최초의 정치 세력을 가진 국가로 등장하였다. 지금부터 4000여년 전의 일이다. 히타이트는 자기들의 언어를 가지고 주변 소왕국들의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세력 확장에 힘서 이집트, 아시리아와 함게 고대 오리엔트 3대 제국의 하나로 부상할 만큼 큰 나라였다.

히타이트 제국은 아나톨리아 반도의 역사는 물론 인류 문명의 역사에서 분명히 자신의 자리를 차지했던 제국이었다. 그들은 탁월한 행정력과 dhlyfur을 바탕으로 속국들과의 유대관계를 유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형법, 가족법, 민법, 상법 등 법전을 마련하여 법치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뛰어난 부조(浮彫)조각 작품을 남기는 예술성을 보여준 문명인들이었다. (20P)


히타이트는 어떻게 알려지게 되었나

****히타이트 부조물을 처음 목격하고 기록으로 남긴 사람은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토스였다. 헤로도토스는 아나톨리아 에게해 지역의 이즈미르에 가가운 카라벨에 있는 부조물을 보기는 하였지만 이것을 트라키아 반도까지 원정한 이집트의 세소스트리스3세의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물론 이것은 잘못 해석한 것이었다.


***근동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미 아시리아 설형 문자나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해독해놓았는데 그들은 아시리아인들이 기록한 ‘하티’나 이집트인들이 적대 대상으로 기록해 놓은 ‘헤타;에 주목하기 시작하였고 구약성서 여러 곳에 나오는 헷족과의 관계에 관심을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29P)

***구약성서에서는 아브라함이 그의 부인 사라가 죽자 헷족속으로부터 헤브론의 막벨라 동산을 사서 그곳 동굴에 장사 지냈으며 다우시은 예루살렘에 살던 헷족사람 우리야의 아내 바쎄바를 불러다 동침하여 솔로몬을 낳았는데 그는  헷족상인들로부터 철제 이륜전차를 구입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30P)


***보아즈쾨이의 페허를 목격한 텍시에는 이곳에서 2킬로미터 떨어진 야즐르카야를 보고 또 한 번 놀랏다. 깍아 지른 듯한 암벽 속에 허리띠를 메고 뾰족모자를 쓰고 일렬로 행진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또 뭐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사람과 상징물이 새겨져 있었다.(31P)


히타이트 언어의 해독- “당신은 빵을 먹고 물을 마실 것이다”

***히타이트라는 말은 구약에 나오는 헷족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생기게 된 말이었다.(37P)


히타이트인들의 정신적 고향 “하티 나라의 땅”

***태양의 원반-하티시대의 것으로 알라자회웍에 있는 왕묘에서 발굴된 사슴과 황소상이 있는 태양의 원반이다. 종교 제의 행사때 사제가 제단에 올려놓는 것으로 아나톨리아 청동기 문화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43P)


****알라자회웍에서 발굴된 사슴동상과 사슴을 둘러싼 태양원반은 하티인들이 남긴 제의물중 대표적인 것으로 꼽힌다. 사슴과 함게한 태양 원반은 현재 앙카라 시의 상징물이기도 하다. (45P)


****히타이트인들은 자신들의 말을 글로 적기 위해 먼저 쐐기같이 생긴 설형문자를 사용하였다. 설형문자를 처음으로 쓴 종족은 수메르인이지만 기원전 3000년경 후반에는 다른 중근동 종족들도 자신들의 언어와 함게 수메르인들이 남긴 설형문자를 사용했다. 수메르인들은 지금부터 5000여년전 이미 상형문자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이로부터 얼마 안가 그들은 상형문자에서 발전된 설형문자를 사용하게 되었다. 설형문자는 갈대나 금속으로 만든 펜으로 점토 위에 썼고 필체가 딱딱한 쐐기 모양으로 되어 있어 쐐기문자라고도 한다. (51P)


히타이트 역사를 밝혀주는 자료는 무엇인가

***히타이트인들이 남긴 역사 자료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점토판이다. 히타이트 점토판은 한마디로 역사와 문화를 기록한 책이다. 그런데 모든 쪽수가 다 갖춰진 책이 아니라 쪽수가 여기저기 찢겨나간 책과 같은 형태로 남아있다. 그 위에도 상형문자로 씌어진 석조 부조물과 인장(印章)등이 있다. 점토판은 사각형으로 앞과 뒤가 있고 쐐기문자로 빽빽하고 정교하게 기록되어 있다.(54P)


***점토판의 대부분은 주로 하투샤의 페허에서 발굴되었다. 하투샤의 뷔윅칼레의 신전, 언덕의 집, 풍우신의 신전 등이 있는 고셍서 그간 3만 개가 발굴되었고 하투샤에서 북동쪽에 있느 마사트, 초룸 근처 오르타쾨이, 시바스의 쿠샥클리 등지에서도 발굴되었다. (56P)


***히타이트인들의 역사 기록은 누가 했을까? 왕실에는 중요한 국사나 종교적인 제의 조약문을 기록하는 서기관들이 있었다. 흙위에 글을 시기는 서기관이자 필경사는 식견이 있는 사람이 맡는 귀한 직업이자 직책이기도 하였다. 필경사는 조약문이나 외국의 왕과 속국의 왕에게 보내는 히타이트 대왕의 편지를 새기고 대왕의 중요한 공적을 기록하고 종교적이고 법률적인 문서들의 기록을 남겼다. 초기 점토판은 대부분 아카드어로 기록하였다.

히타이트인들의 꼼곰함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히타이트인들은 마치 도서목록처럼 점토판의 내용은 무엇이며 몇 개의 점토판으로 구성되었는지 분실되었을 경우 몇 번째 점토판이 분실되었는지를 기록해 놓았다. 원본이 파괴되거나 분실되는 상황에 대비하여 복사본도 여러 개 만들어주었다. 복사본 제작은 히타이트인들의 철저한 성격에서 나온 것이다. (57P)


*****히타이트 역사를 구성해 나가는 데 보조적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왕들이 공식문서에 사용했던 인장들이다. 중요한 문서에는 우리의 도장처럼 문서의 끝부분에 왕의 인장을새겨넣었다. ....왕의 인장에는 날개달린 원반형의 태양이 왕의 상징으로 새겨져 있다. (61P)


제 2부 히타이트 역사


히타이트 시대의 전 후 역사

****상업을 위해 아나톨리아에 들어온 아시리아 상인들은 메소포타미아에서 1000년 이상 사용한 쐐기문자를 들여옴으로써 아나톨리아에서는 역사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68P)


***채무관계 점토판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10주 안에 갚아야 하는 21/2미나의 은세공품에 관한 부채 게약서인데 은세공품 대금을 기한 내 갚지 못하면 1미나당 매월 3셰켈의 지체 이자를 물어야 한다고 명시했다. 돈을 갚아야 하는 사람은 아시리아인이지만 보증인 세명은 모두 아나톨리아인이었다. (69P)


****범죄 혐의자가 정말 죄가 있는지 없는지를 강물의 신에게 물어보는 물심판도 있다. 범죄혐의자인 사람을 강물에 던지고 강의 신에게 의지하여 이 사람이 죄가 있는지 없는지를 심판한 것이다. 강에 던져진 사람이 강물에서 살아나면 죄가 엇다고 한다. 강물의 신이 이 사람을 구해주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69P)


****아슬란테페에서 발굴된 대표적인 부조물로는 하늘의 신이 일루얀카라는 용을 죽이는 모습과 술루멜리 왕이 하늘의 신에게 헌주하는 모습을 새긴 부조물이다. 진지를리에서 발굴된 것으로는 히타이트인들이 이집트 군대와 싸워서 이기는데 큰 기여를 하엿다는 말이 끄는 전차, 사자와 스핑크스 문의 부조 등이다. (72P)


***후기 히타이트 시대의 부조물 대부분은 앙카라에 있는 아나톨리아 문명 박물관에 전시도ㅚ어 있다. 대부분 보전상태가 개끗하여 히타이트 양식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72P)


법과 질서를 사랑한 텔리피누

***텔리피누는 하타인들이 믿는 신의 이름이다. 텔리피누라는 신이 있다가 사라지면 모든 자연물이 다 죽고 그가 돌아오면 죽은 것이 다 되살아난다는 신화가 있다.

텔리피누가 왕이 되면서 그는 신화속의 텔리피누처럼 하투샤왕실을 살리려는 작업을 하였다.(89P)


3부 히타이트 자세히 들여다보기


행정조직

****히타이트 초기는 도시 국가 형태였다. 이대 도시 국가란 신전을 중심으로 성벽을 쌓고 그 안에 사람들이 모여 취락을 이룬 독립된 정치세력이었다. 국가의 영토가 확장되면서 히타이트의 중앙세력과 속국의 지배자 간에 동맹 관계를 맺는 연합체가 구성되었지만 본질적인 중앙의 권력구조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131P)



***왕ㅇ과 왕비가 국가 서열 1, 2위이다. 그 다음 3위는 왕위를 승계할 왕자이다. 히타이트는 왕과 그 가족을 중심으로 한 정치 세력이었다. (131P)


****왕의 상징은 양쪽에 날개가 달린 태양이다. 오늘날 표현으로 하면 와이나 대통령의 휘장이다. 왕은 초자연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엇지만 초능력을 가진 신의 경지를 절대로 넘지는 않았다. 히타이트 국가가 곧 왕이고 왕이 곧 국가엿지만 왕과 신은 절대로 동급이 아니었다. 히타이트 왕들은 죽은 후에 신이 된다고 믿었으며 히타이트 왕은 살아있을 때 신을 대신하여 지상의 대표였다. (132P)


****히타이트 왕의 임무와 책임 중의 하나는 모든 사제들의 대표, 즉 사제장이었다. 왕의 중요한 책무는 하튜샤의 풍우신과 태양의 여신을 모시는 일이었다. 사제장ㅇ으로서 왕은 종교 축제나 기동일이 오면 이 행사를 주관하는 대표자가 된다.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책임이 왕에게 있었다. (132P)


***히타이트 왕실에서 왕 다음으로 권력이 있는 사람은 왕비였다. 왕비는 최고의 칭호로서 ‘타와난나’라고 불렀다. 히타이트왕비는 고대 동양의 왕국과는 달리 국사에 적극 관여하였다. 왕비는 왕의 공식적인 알현 행사나 종교적 제의행사에 왕과 함께 참석하였고 국가의 공식문서나 조약문에도 왕과 함께 인장을 눌러 서명하엿다. (133P0


종교

*****히타이트는 제정일치의 나라였다. 신을 숭배하고ㅗ 제사 지내는 일이 곧 정치였다. 왕은 나라의 대표이면서 재사장이었다. 히타이트인들은 신들을 성스럽게 모셨으며 신들과 하나라는 의식을 갖고 있었다. (135P)


***안타숨축제는 크로커스꽃(샤프란) 이름에서 유래한다. 이 축제는 봄에 열리는데 38일이나 게속되었다. 이들 축제때는 왕과 왕비가 수도 하투샤를 떠나 지방을 순회하며 제의나 종교축제를 주관하였으나 제국의 말기에는 지방의 신들을 한군데로 모아놓은 하투샤에서 종교행사를 가졌다.

신년에 하는 봄 축제인 푸둘리야 축제 때는 신의 권능을 과시하기 위하여 하늘의 신이 일루얀캬라는 용과 싸워 이긴 전설이 낭송된다. 푸둘리야는 당이나 대지라는 뜻으로 거의 한달 내내 계속되었다. 기우제로 출발한 키림아라는 축제는 3일간 게속되었다.(136P)


****종교행사에는 왕비와 왕자 외에도 술잔을 따라 바치는 사람, 악기를 켜는 사람, 노래하는 사람, 춤추는 사람, 음식만드는 사람, 고관들이 참석하였다. 조연으로 참석한 이 사람들은 신을 즐겁게 하는데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제의 행사 때 바치는 재물은 동물이나 빵, 과일, 야채, 꿀, 포도주, 맥주 등이었다. 신들에게 동물을 제물로 바치고 먹고 마실 것을 드리는 것은 제의행사의 기본이었다. (136P)


****히타이트인들이 믿는 신이 수적으로도 많아졌을 뿐만 아니라 신의 족보를 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 유형상으로도 다양하여 그들은 ‘천의 신을 가진 사람들’이라고도 불려지게 되엇다. 태양, 달, 산, 지하의 남자신들과 여자신들은 기본이고 심지어 각종 병의 신들도 있었다. 신의 동상들은 다 자기 자리가 있었으며, 어던 때는 신들의 신성한 동물이나 특정 물건이 신으 상징하기도 하였다. 히타이느인들이 남긴 점토판에는 무수한 신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138P)


****그들은 인간은 죄를 짓고 태어난다고 믿었다. 성악설을 믿는 셈이다. 신은 바로 죄를 짓는 인간을 벌하는 존재이다. 신은 죄를 지은 사람만을 벌하는 것이 아니라 후손까지 포함하여 전 가족을 다 벌한다고 믿엇다. (139P)


****히타이트인들은 죽은 자를 위해 묘비는 쓰지 않았다. 사람이 죽으 죽은 자를 화장하여 그 재를 불에 구운 토기에 넣어 매장하거나 죽은 자를 관에 직접 넣어 매장하엿다. 장례행사도 사후 세게에 대해 각기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참석하여 치러졌다.(139P)


****종교축제는 무사 평안과 풍요를 빌며 회개하는 동시에 신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유흥의 장이었다. (136P)

**** 그들은 신이 바로 옆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어떤 불행한 일이 닥치면 신이 자기로부터 멀어졌기때문이라고 믿었다. 멀어져간 신을 모셔오기 위하여 집 앞의 길에 좋은 냄새가 나는 약초를 태우며 신이 되돌아오기를 기도했다. (139P)


***하늘의 신을 상징하는 황소 앞에 경배하는 왕과 왕비 (140P)



점복과 주술

****점을 보는 방법에는 염소 같은 동물의 간이나 내장의 상태를 보고 점을 치는 내장점, 훈련된 새를 날게 하여 그 새가 나는 모습이나 날아가는 방향에 따라 점을 치는 새점, 달의 형태를 보고 점을 치는 월점 등이 있었다. 점술가는 신이 눕노한 이유를 알아내기 위하여 점을 쳤으며 그들의 점술 방법은 일정한 형태를 갖고 있었다. 히타이트인들의 점복은 수메르나 바빌론에서 기원한 것이다. (142P)


****일상적인 문제를 신이나 인위적인 방법에 의지하여 해결하려는 주술도 있엇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주술가는 소의 목을 잡고 태양의 신을 향해 주문을 외운다. 주술사는 신전에서 일하는 여자 사제였다. 히타이트인들은 여자 주술사를 늙은 여자라는 뜻의 ‘아니야트’라고 불렀는데, 늙엇다는 것은 인생의 경험을 ksg이 가졌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던 것 같다. 여자주술사는 콩, 석탄, 설탕, 금속전 등 점을 치기 위한 상징물을 흔들어 던진 후에 그 상징물이 떨어진 위치를 보고 점을 치기도 했다. 이런 형식의 점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또 여자 주술사는 자신의 손에 들린 뱀의 행동으로도 미래를 점쳣다. (144P)


신화 및 설화

***최초의 신화는 인류고대문명의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에서 특히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 강을 끼고 있던 수메르에서 발생하였다. 수메르의 신화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원형이 되었다. (146P)

법령

***법조문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 내용을 보면 도둑질, 살인, 결혼, 성(性)에 관한 것으로 히타이트법은 대부분 형사법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151P)


***히타이트인들의 죄에 대한 처벌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탈리오 법칙이 적용되는 보복의 원칙에 두지 앟았다. 히타이트인들은 참혹한 형벌 대신에 보상으로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하엿다. 사형은 강간, 수간, 왕실에 대한 반란 행위, 흑주술, 노예들의 주인에 대한 항명등으로 제한하였다. (154P)


****시비나 실수로 사람을 죽였을 경우에도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인력으로 보상하였다. (154P)


****히타이트법은 근친결혼을 금하였다. 그러나 근친 결혼의 예외적인 조항이 있엇다. 남편이 죽고 미망인이 된 여자는 남편의 형제와 결혼하고 그 형제가 죽으면 남편의 아버지와 결혼하고, 그 형제가 죽으면 남편의 아버지와 결혼하고 남편의 아버지가 죽게 되면 조카와 결혼하였다. 이런 근친 결혼이 있엇던 것으로 남편이 죽고 난 디 재산이 바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155P)


***히타이트 법은 몇 가지 경우 사형에 처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피해자에게 금전으로 보상을 해주도록 함으로써 과거의 보복원칙에 따른 끔찍한 형벌을 탈피하고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중시하였다는 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히타이트 법에 규정한 형벌은 이전의 다른 중근동 국가의 법과는 달리 인간적이고 보다 온건한 것이었다. (157P)


경제생활

****히타이트인들의 경제는 농업과 목축으로 이루어졌다. 농업의 근간인 땅은 신이 주인이고 그 다음에 왕이었다. 왕이 원하면 백성들에게 당을 하사할 수 있었다. 토지를 하사받은 사람은 왕실에 세금을 내고 전쟁시에 병사를 제공할  의무가 있었다. 밀, 보리, 콩이 히타이트인들의 주요농산물이었다. (158P)


****포도와 밀로 포도주와 맥주를 만들었고, 올리브로부터 기름을 얻었다. 포도주와 맥주는 제의행사때 많이 사용되었다. 아나톨리아에서는 포도주는 히타이트 시대부터 만들기 시작한 것이로 보인다. (158P)


***히타이트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동물은 말이었다. 말은 원정시에 꼭 필요한 동물이엇다. 왕들은 원정에서 승리하고 하투샤로 돌아올 때 동물들을 전리품으로 가져왓다.


예술

***하투샤에 남겨진 석조 부조물은 히타이트인들이 창조한 훌륭한 예술품이다. 얕은 양각으로 세밀하게 부조한 것이 특징이다. 얕은 양걱으로 명확하게 팠기 때문에 사람이나 신의 얼굴을 자세히 알아볼수 있을 정도이다.

히타이트인들은 큰 돌을 조각하듯이 깍아감 형상을 만들어내는 수준높은 석공술을 보여주었다. 하투샤의 성문에 있는 사자나 전사의 신상과 같은 형상물은 마치 거대한 돌 속에서ㅓ 튀어나온 것과 같은 분위기를 연출함으로써 살아있는 생명력과 힘을 과시하는 듯이 보인다. (165P)


****히타이트 석조부조물의 특징은 살아 움직이는 듯한 율동감과 대상물의 조화로운 배치와 구도이다. (168P)


***제의 행사에 사용된 그릇은 주로 흙으로 만들어졌으나 금속으로 만들어진 것도 있다. 황소 머리 형상으로 된 한 쌍의 제기를 포함한 다른 동물형상의 제기들은 살아있고 유머스러운 느낌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제기는 검은색, 붉은 색, 흰색을 띄고 있으며 기하학적인 구도로 만들어졌다. 히타이트왕의 상징인 양쪽의 날개가 달린 태양도 양쪽대칭으로 기하학적으로 만들어졌다. (169P)


***히타이트인들이 많이 남긴 것으로는 인장이 있는데 인장의 형태는 처음에는 주로 실린더형이었으나 점차 도장형으로 바뀌었다. 조그만 돌로 만들어진 인장은 초기 오아구시대부터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유지되어 온 예술분야이다. 인장은 메소포타미아에서 히타이트로 들어온 것이다. (169P)


군사

***히타이트 군대의 공격력은 말이 이끄는 경전차에 있었다. 이 전차는 기원전 2000년경 후반에 후리인들이 개발하여 근동 지역에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히타이트인 전차는 가벼웠기 때문에 기동성이 우수했다. 전차의 몸체는 가죽을 싀운 목재였다. 몸체는 목재로 된 두 개의 바퀴를 연결한 축 위에 고정시켰다. 이집트 전차와 마찬가지로 바퀴안에는 6개의 살이 잇고 전차는 두 마리의 말이 끌었다. 하타이트 군대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기존의 전차를 기동성이 있는 전차로 변화를 시도하였기 때문이었다. (175P)


카데쉬전투

***히타이트의 무와탈리 군대와 이집트의 람세스 2세 군대가 지금부터 약 3300여년 전인 기원전 1275년에 시리아의 오론테스 강 근처 카데쉬에서 대격전을 가졌다. 카데쉬전투는 d당시로서는 강대국 간 최대 규모의 전쟁이었고, 이 전쟁 이후 히타이트와 이집트 간에 체결한 평화조약은 세게최초의 국제평화조약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178P)


히타이트의 갑작스런 멸망

***히타이트가 패망한 연도는 기원전 1190년대가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히타이트의 수도 하투샤의 발굴작업결과, 하투샤는 불에 완전히 타 페허가 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히타이트의 마지막 왕인 수필룰리우마 2세 시대에 하투샤 왕실 내 사정도 불안하였다. 내부적으로 하투샤 왕실의 불안정 상황이 계속되고 있을 때 외부에서 쳐들어오는 침략세력에 의해 하투샤는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186P)


4부 히타이트 역사가 남아있는 주요명소

보아즈칼레(하투샤)


****하투샤는 돌이 많은 준산악 지형이다. 도시 외곽으로 게곡이 있고 곳곳에 암석이 있어 비탈이나 경사진 곳이 많고 이 때문에 움푹 파인 지형이 많아 건축물을 짓기에는 어려운 곳이다. 그런데 왜 히타이트인들은 이곳을 수도로 정하였을까? 그것은 하투샤가 갖는 자연적인 방어력때문이었다. (192P)


****상도시에는 세 개의 문이 잇다. 남서쪽에 있는 사자의 문, 남족 정상에 위치한 스핑크스의 문과 사자의 문 반대편에 있는 ‘대왕의 문’이 그것이다. 성문이름은 히타이트인드이 붙인 것이 아니라 하투샤발굴단이 그곳에 있는 석조물을 보고 붙인 이름이다. (194P)


****스핑크스의 문은 이집트의 영향을 받아 세워졌다. 스핑크스 문에는 안쪽에 두 개, 바깥족에는 두 개 등 총 네 개의 스핑크스가 잇었다. 그런데 현재는 성 바깥족의 왼족에 있는 스핑크스만 제 자리를 지키고 잇다. (195P)



****대왕의 문에 잇는 전사의 신상은 원형을 그대로 재현한 모조품으로 원형은 아나톨리아 문명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헬멧을 쓰고 짧은 치마 같은 바지에 왼손은 주먹을 불끈 쥐고 있으며, 오른손에는 도끼를 들고 있는 전사의 모습이다. 짧고 퉁퉁한 다리의 근육도 잘 묘사되어 있다. (196P)


아나톨리아 문명박물관

****터키의 수도 앙카라에 있는 아나톨리아 문명박물관은 곧 인류 역사와 문화를 보유하고 있는 중요한 박물관이다. 68개 박물관 대표가 참여한 1997년 스위스 로잔의 세게박물관회의에서 아나톨리아 문명 박물관이 최우수 박물관으로 1위를 차지하였다.(209P)


****아나톨리아문명박물관은 원래 오스만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할  때 세워진 건물로 옥내시장건물과 쿠르스훈루 여관 등 두 동이었다. 이 건물들은 전통적인 오스만 터키건축양식을 따랐다. 건물 안에는 큰 중정이 있고 천장에는 10개나 되는 돔이 있다. 시장과 여관이 같이 잇는 이유는 앙카라가 실크로드를 따라 움직이는 상ㅇ니들이 지나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209P)


***페허상태로 남아있던 두 채의 건물이 박물관으로 바뀌게 된 게기는 터키공화국의 국부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히타이트 박물관을 만들라는 지시로 인해서였다. (209P)


****히타이트인들은 제의 행사에 사용하기 위해 동물 형상이 있는 도기를 남겼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뿔달린 황소 두 마리가 있다. 황소 형상의 도기는 높이가 90㎝로 머리에 있는 뿔은 풍우신 테슙을 상징하고 있는데, 이 황소의 특징은 알몬드를 박아놓은 듯한 눈에 있다. 눈이 커서 해학적으로 느껴지느데, 이것이 바로 히타이트인들이 도기에 남긴 특징이다. 동물의 눈은 알몬드처럼 크고 얼굴은 웃는 모습을 하고 있어 히타이트인들의 낙관적인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217P)


***히타이트 전쟁의 신상이다. 하투샤에 있는 대왕의 문에 잇던 신상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높이가 225미터인 신상은 맨발로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모습이다. 강인한 히타이트 전사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다. (217P)


***히타이트가 이집트 람세스 2세 군대와 카데쉬에서 세게적인 전쟁을 치르고 이집트와 맺은 평화조약분은 이스탄불의 고고학 박물관 내 근동박물관에 전시되어 잇다. (217P)


****아나톨리아 박물관의 자랑은 박물관 가운데 홀에 크게 자리하고 있는 히타이트 후기시대의 석조부조물이다. 보전상태가 깨끗하여 보기가 쉽다. 히타이트인들은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그들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기원전 700년대까지 히타이트의 모티브가 짙게 배어있는 석조부조물을 대량으로 남겨놓았다. 그래서 후기 히타이트시대의 부조물을 보면 히타이트시대의 문화와 정치, 군사 등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이 박물관의 가운데 홀 전체가 석조부조물로 채워져 있다. (219P)


알라자회윅

****하늘의 신을 상징하는 황소 앞에 숭배하는 왕과 왕비, 제물로 바칠 동물들, 단도를 삼키며 공중에 떠있는 게단을 오르는 마술사,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 등이 돌에 새겨져 있다. 북서쪽에는 하투샤와 같은 지하 터널이 잇고 제의의 중심역할을 한 신전이 있엇던 흔적이 남아있다. (222P0


글을 마치면서

****히타이트인들이 남긴 동물상을 둘러싼 원반 태양의 조형물은 내가 몸을 담고 일했던 앙카라 대학교문과 대학의 상징물일 뿐만 아니라 관광부의 상징물이기도 하다. 아카라 시내 스히예 광장에는 이 조형물이 세워져 있어 히타이트의 숨결이 앙카라 시민과 함게 하고 있다. (22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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