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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 30일 20시 34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강신주 (1967-  )경상남도 함양

 

연세대학원 철학박사<장자철학에서의 소통의 논리-논문제목>학위 받음. 연세대 화학공학과 졸업연세대, 경희대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철학, 인문학의 정신은 인간이 자유와 기쁨의 전망을 꿈꾸는 것을 가능하도록 하는데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경력: 2007- 문 사 철 기획위원회 위원

 

 

'사람을 사랑하는 철학자. 그는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자신의 벌거벗은 몸과 직면하라고 말한다. 사실 우리는 알몸 곳곳의 상처 흉터, 군살이 너무나 적나라해서 차라리 외면하려고 한다. 그래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정직해지라는 그의 말과 글은 불편하다. 그러나 불편함을 감수하고 일단 알몸에 직면하고 나면 당당해진다. 우리를 지배하거나 우리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대상과 맞서 싸우고, 누구도 흉내 내지 않는 나만의 목소리로 살아 내면 삶은 충만해지기 때문이다. 강신주는 우리가 가면을 벗고 '벌거벗은 나'로서 자신과 타자를 진정 사랑할 수 있도록 이끈다. 결국 그가 주는 불편함은 행복을 가져다 준다. 그는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자 하는 이들의 세르파다.' 책의 앞날개에 소개된 글이다. 

 

그는 말한다. 지금은 자신의 주가가 천정부지로 올라가고 있지만 이는 지금이 인문학을 철학을 필요로 하는 시기라서 자신을 찾는 것이고 한 5년 정도 지나면 강신주를 아무도 찾지 않을지 모른다고. 그때가 되면 책을 쓰며 살겠노라고, 책을 쓰는 일과 산에 가는 일을 좋아한다. 결혼을 했으나 이혼하여 지금은 싱글이다. 사랑과 결혼에 대한 강의를 많이 하는데 청강생들이 물어온다고그래서 선생님은 그렇게 잘 하세요? 내의 실패에서 배운 것이다. 그러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질문은 하지 말라고. 맞는 말이다. 선생이 자신이 가르키는 대로 행하면서 사는 사람이 많지는 않은 듯하다. 실패에서 배운 공부를 전하는 것이 선생의 역할이기도 한 것 같다.

 

저서

  • 장자의 철학
  • 공자 & 맹자
  • 장자 & 노자
  • 동양의 고전을 읽는다
  • 중국 철학 이야기
  • 과학이 나를 부른다
  • 스승 이통과의 만남의 대화
  • 노자 국가의 발견과 제국의 형이상학
  • 대한민국 청소년에게
  • 생각하고 토론하는 중국 철학 이야기
  •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 회남자 & 황제내경
  •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 장자 읽기의 즐거움 망각과 자유
  • 철학 삶을 만나다
  •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 상처받지 않을 권리
  • 철학 VS 철학
  • 철학이 필요한 시간
  •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 관중과 공자
  • 철학의 시대
  • 김수영을 위하여

 

<나의 의견>

 

강신주김수영더러운 진창에 뿌리 내리고, 그를 거름 삼아 단단한 나무가 된 사람.”이라고 칭한다. 자꾸만 나무를 생각하게 한다. 나무처럼 살고 싶어하는 사랑하는 사람이 이제 곁에 없고 나무가 된 사람의 글을 읽으며 시인의 삶이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단독성이 확보되지 못하는 삶은 시인의 삶이라고 할 수 없다는 김수영의 말은 마음을 찔러온다. 그 의미를 몰라서 그렇게 스승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구나 싶다. 한 번 여쭙고 싶었으나 그 마음이 절실하지 않았던지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수많은 시간이 있었음에도 이제는 말이 없는 스승에게 홀로 자문자답하게 된다. 변화경영으로 시작하였으나 사상가가 되고 싶어했고 시인으로 살고 싶어했던 스승이 오버랩 된다. 평생 한 여인도 사랑했던 적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김수영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짐작하기 어렵다. 사랑은 어떻게 하는 것이며, 삶의 단독성은 어떻게 세우는 것이며 왜 조르바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의 거리를 과연 내가 좁힐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방법을 가진 사랑은 사랑이 아니며, 방법을 가진 삶은 박제된 삶일 수 밖에 없다는 두렵고 무서운 이야기 앞에 서게 된다.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는가. 나는 지금 제대로 사랑을 하고 있는가. 세상에 태어나서 사랑한 번 못해보고 가는 것은 아닌가.

 

참조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김수영을 위하여 강신주 지음/김서연 만듦, 천 년의 상상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머리말

 

"방법을 가진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이성복(1952- ) 시인의 멋진 말이다. 하긴 어떻게 어떤 사람을 사랑하기도 전에 미리 사랑하는 방법을 가질 수 있겠는가? 만약 가능하다면 그것은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와 무관하게 결정된 사랑하는 방법을 그에게 실험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불행히도 바로 이때 사랑은 폭력으로 변질되고 마는 것 아닐까. 사랑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삶도 예술도 마찬가지니까. 방법을 가진 삶은 삶이 아니다. 미래의 삶을 현재에만 타당한 방법으로 통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옷을 입기 위해서 우리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을 벗어 던져야만 한다. 옷을 벗어 던지면 춥거나 부끄러울 거라며 두려워하지 말자. 한마디로, 알몸이 되는 것에 쫄지 말자. 백 척이나 되는 대나무 꼭대기에서 한 걸음을 내딛는 불굴의 정신. '백척간두진일보'의 정신을 잊지 말자. 목숨을 건 비약이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나니까 할 수 있는 사랑, 나니까 살 아 낼 수 있는 삶. 그리고 나니까 가능한 예술을 바랄 수 있겠는가. 한 번밖에 없는 자신의 삶을 자신의 스타일로 살아 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이자 인문학이 추구하는 자유정신 아니겠는가.

 

저는 인간 세상에서 한결 편안하고 동화된 느낌을 가졌습니다. 제 과거로부터 저를 뒤쫓아 불어오던 폭풍우는 가라앉았습니다. 오늘날 저의 발꿈치를 서늘하게 하는 것은 다만 한 점 바람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바람이 불어오고 있고 옛날에 제가 지나왔던 저 먼 곳의 구멍은 너무나 작아져 버렸고, 그곳까지 되돌아가기 위한 힘과 의지가 아무리 충분하다 하더라도 그 구멍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내 몸에서 털가죽을 벗겨 내어야 할 것입니다. -카프카,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18 그날 강의에서 나는 자유를 살고 노래하는 인문정신을 학생들에게 들려주려고 했다. 인문학은 다른 학문과 달리 고유명사의 학문이다. 그래서 정몽주의 시와 김수영의 시가 다르고, 공자의 철학과 니체의 철학은 다르다.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張勉)이란

관리가 우겨 대니

 

21 우리에 갇힌 동물보다 자연공원에 방목된 동물이 더 자유로운가. 겉으로는 자유로워 보이지만, 자세히 생각해 보면 본질적으로 다른 점은 하나도 없다. 허용된 자유는 언제든 허락된 측에서 철회할 수도 있는 불완전한 자유, 아니 정확히 말해 자유를 표방한 기묘한 억압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자연농원의 동물들은 자신을 가두는 사방의 벽 쪽으로 가기보다는 본능적으로 가운데로 모인다. 하긴 벽에 직면하는 순간, 자신이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 테니 얼마나 불쾌한 일이겠는가. "한계를 넘지 않는다면, 너희들 마음대로 해도 좋다." 이것이 바로 허용된 자유의 논리이다. 허용된 자유를 자유라고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행동을 검열하게 된다. 체제가 우리를 핍박하려고 할 때, 우리는 나약하게 외칠 것이다. "저는 한계를 지켰는데, 왜 그러세요?" 너무나 어리석고 나약한 한탄을 토해 내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허용된 자유를 거부하고 자신의 자유를 찾아야 한다.

 

23 모방하는 삶이나 억압된 삶은 모두 자신의 삶을 자기 것으로 살아내지 못하는 실패한 삶이기 때문이다.

 

형식이든 내용이든 일체 외적인 것으로부터 단절하는 것, 그리고 자신이니까 느끼고 욕망하고 생각하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시이기 때문이다.

 

24 이 책의 편집자 김서연 <김수영 전집>1981년 판을 내게 구해 주면서, 책 안쪽에 이런 말을 썼다. "사포처럼 살갗을 도려내는 일상의 적들과 싸우느라...얼마나 아팠을까, 그 사람." 정확한 지적이다.

 

의자가 많아서 걸린다 테이블도 많으면

걸린다 테이블 밑에 가로질러 놓은

엮음대가 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은

미제 자기(磁器) 스탠드가 울린다.

 

마루에 가도 마찬가지다 피아노 옆에 놓은

찬장이 울린다 유리문이 울리고 그 속에

넣어 둔 노리다케 반상 세트와 글라스가

울린다 이따금씩 강 건너의 대포소리가

 

날 때도 울리지만 싱겁게 걸어갈 때

울리고 돌아서 걸어갈 때 울리고

의자와 의자 사이로 비집고 갈 때

울리고 코 풀 수건을 찾으러 갈 때

 

38선을 돌아오듯 테이블을 돌아갈 때

걸리고 울리고 일어나도 걸리고

앉아도 걸리고 항상 일어서야 하고 항상

앉아야 한다 피로하지 않으면

 

울린다 시()를 쓰다 말고 코를 풀다 말고

테이블 밑에 신경이 가고 탱크가 자나가는

연도(沿道)의 음악을 들어양 한다 피로하지

않으면 울린다 가만히 있어도 울린다

 

미제 도자기 스탠드가 울린다

방정맞게 울리고 돌아오라 울리고

돌아가라 울리고 닿는다고 울리고

안 닿는다고 울리고

 

먼지를 꺼내는데도 책을 꺼내는 게 아니라

먼지를 꺼내는데도 유리문을 열고

육중한 유리문이 열릴 때마다 울리고

울려지고 돌고 돌려지고

 

닿고 닿아지고 걸리고 걸려지고

모서리뿐인 형식뿐인 격식뿐인

관청을 우리집은 닮아 가고 있다

철조망을 우리집은 닮아 가고 있다

바닥이 없는 집이 되고 있다 소리만

남은 집이 되고 있다 모서리만 남은

돌음길만 남은 난삽한 집으로

기꺼이 기꺼이 변해 가고 있다 -의자가 많아서 걸린다-1968.4.23 세상을 떠나기 두 달 전 쓴 시

 

26 어쩌면 아예 제자리에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 게 상책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장 좋은 것은 죽어 버리는 것이다. 시체는 움직이지 않기에 무엇인가에 걸려서 소음을 내는 일도 없을 테니까. 이런 식으로 1968년 우리의 가정과 내면에까지 관청과 철조망이 설치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우리는 조금씩 좀비가 되어 갔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 1968.5.29  김수영의 마지막 시

 

30 마르크스(1818-1883)이 이야기했던가? 인간의 자유는 '대상적 활동'에 있다고 말이다. 앞에(ob) 던져져(ject) 나의 활동을 방해하는 저항에 대해 능동적(active)으로 개입하는 것, 이것이 바로 자유다. 급류를 헤엄치는 물고기를 생각해 보라. 강풍에 몸을 맡기고 활공하는 까마귀를 생각해 보라. 급류를 따라 흘러가는 물고기는 오직 죽은 물고기뿐이고, 강풍에 날려 가는 새는 오직 죽은 새뿐이다. 그렇다. 김수영도 알았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신적인 자유, 혹은 절대적인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말해 인간은 자유를 가로막는 저항에 맞서 자신의 자유를 관철하는 존재다. 외압에 전적으로 몸을 맡겨서도 안 되고, 무모하게 외압과 전면전을 벌여서도 안 된다. 어느 경우든 우리의 생명과 자유는 곧 꺼질 테니까 말이다.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를 보라. 얼핏 급류는 연어의 자유를 부정하는 절대적인 저항처럼 보이지만, 격하게 흐른다고 할지라도 물이 없다면 연어는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올라갈 수 없을 것이다. 강력한 바람에도 날개를 펴고 제자리에 있는 듯 하늘을 나는 까마귀를 보라, 바람은 결코 까마귀의 장애물만은 아니었던 셈이다. 오히려 바람만 잘 이용하면 힘든 날개 짓 없이도 날 수 있으니까. 풀을 통해 김수영이 본 것도 바로 이것이다. 강풍에 온몸을 던지는 무모함이 아니라, 부드럽게 강풍을 흘려 보내는 풀의 여유로운 자태, 뻣뻣하게 굳은 고사목이라면 아마 가지가 바람에 부러질 것이다. 그렇지만 풀은 마치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움직이는 연어나 까마귀처럼 악조건을 좋은 조건으로 만드는 여유를 가지고 있다.

 

<긍지(矜持)의 날>

 

피로도 내가 만드는 것

긍지도 내가 만드는 것

그러할 때면은 나의 몸은 항상

한치를 더 자라는 꽃이 아니더냐

오늘은 필경 여러 가지를 합한 긍지의 날인가 보다

암만 불러도 싫지 않은 긍지의 날인가 보다

모든 설움이 합쳐지고 모든 것이 설움으로 돌아가는

긍지의 날인가 보다

이것이 나의 날

내가 자라는 날인가 보다

 

-긍지의 날 1955.2

 

33 강의 첫날 나는 참석자들에게 이야기했다. "이번 강의는 상상마당에서 하는 마지막 강의입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매번 주제를 바꾸어 가며 4년 동안 여러분을 위해 강의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번 딱 한 번 만큼은 여러분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제 방식대로 진행하려고 합니다. 저는 제 스타일로, 제 페이스로 김수영이란 거대한 산을 오르려고 합니다. 혹시 여러분이 따라오지 못하더라도 뒤를 돌아보지 않을 생각입니다. 죄송합니다. 그저 이렇게 저를 헤라여 주세요. '선생님이 무언가 다급하고 절박하구나'이번 열 번의 강의에서는 김수영을 넘으려는 저를 이해하려고 해 주시고, 따뜻하게 바라보아 주세요. 마지막으로 바라는 게 있다면, 그래도 산을 내려와서 뒤를 돌아보았을 때 여러분 모두가 제 뒤에 웃으면서 서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매번 강의 때마다 A4 15장의 분량의 글을 완성했다.

 

34 사실 김수영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은 그에게 거리를 두는 것이다. 아니면 누구든 김수영에게 거리를 두었을 때에만, 김수영에 대한 글을 쓸 수 있다고 말해도 좋다. 이 글을 통해 나는 김수영의 빛과 그림자를 모두 담으려고 했으니, 이번 책은 김수영에게 바쳐진 조사(弔辭)나 묘지명(墓誌銘)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아버지를 잃어 외로운 내가 이제 김수영도 떠나 보내려는 것이다.

 

35 그녀를 통해 나는 저자가 어버지라면 편집자가 어머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1부 시인을 위하여

 

1장 인간적이거나 인문적이거나

 

존재하는 것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이고 다른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이 아니다.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은 믿음, 충동, 욕구, 혐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 자신이 행하는 모든 일이다. 반면에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들은 육체, 소유물, 평판 지위,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 자신이 행하지 않는 모든 일이다. 게다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은 본성적으로 자유롭고, 훼방 받지 않고, 방해 받지 않지만,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는 것들은 무력하고, 노예적이고 방해를 받으며, 다른 사람들에 속한다. 그러므로 만일 네가 본성적으로 노예적인 것들을 자유로운 것으로 생각하고 또 다른 것에 속하는 것들을 너 자신의 것으로 생각한다면, 너는 장애에 부딪칠 것이고, 고통을 당할 것이고, 마음이 어지러워지고, 신들과 인간들을 바난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라. -에픽테코스, 담화록

 

42 신동문 2차 술자리에 있었다면 아마 김수영은 그렇게 취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이미 자리를 뜬 상태였으니, 술을 벗 삼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43 김수영이 이병주의 삶과 문학을 평가한 두 마다. "딜레탕트" "울림이 없"음은 매우 중요하다.

'딜레당트'는 어설픈 예술 애호가를 지칭하는 용어로, 예술을 겉멋으로 추구하는 부류의 인간을 가리킨다. 이런 사람들의 작품에는 당연히 울림이 있을 수 없다. 예술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겉만 흉내 내는데 우리가 어떻게 감동을 받을 수 있겠는가? 바로 이 지점이다. 우리는 김수영 '딜레탕트'가 되지 않으려고 애썼던 시인으로 기억해야 한다. 김수영은 평생 '울림'이 있는 작품을 쓰고 싶었다. 어떤 작품에 울림이 있으려면 작가는 진지성과 진실성이 수반되는 정직한 글을 써야만 한다. 작가의 체취나 입김 혹은 정신이나 영혼, 뭐 이런 것이 없다면 그저 화려한 작품은 쓸 수 있어도 독자를 울리는 작품은 결코 쓸 수 없다. 진정한 사랑을 온몸으로 겪은 사람의 연애 이야기는 표현이 아무리 어눌해도 그럴듯하게 날조된 연애 이야기보다 우리를 더 울리는 법이다. 그렇다. 김수영은 딜레탕트가 아닌 진정한 예술가로 살려고 했던 시인이다.

 

1954년 가을 10.5 <거미>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 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 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 버렸다.

 

44 거미가 빈방에 거미줄을 쳐서 오지 않을 먹이를 바라기에 몸이 비쩍 말라 갔듯이, 자신도 무엇인가를 바라기 때문에 그토록 서러웠던 것이다. , 그렇다. 무엇인가를 바라면 설움이 생기는 법이다. 바라던 것이 불행히도 좌절된다면 어떻게 서럽지 않겠는가! <거미>를 읽으면서 우리는 되묻게 된다. 김수영은 무엇을 바랐을까? 그러나 이 시만으로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모든 시인이 그렇듯이 김수영도 불친절하다. 시인에게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독자에 대한 따뜻한 배려가 아니라 철저한 자기 이해이기 때문이다

 

45 시를 읽는 것은 당연히 나와는 다른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있는 타인의 속내와 그 삶을 읽는 것이다. 어떻게 타인의 속내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시 읽기의 어려움은 수학이나 철학의 그것과는 다른 종류의 어려움이라도 할 수 있다.

 

46 김수영은 가슴에 어떤 이상을 품고 살았던 것일까?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김수영은 시인이 되려고 했고, 시인으로 살고자 했다. 다시 말해 김수영의 이상은 시인이 되는 것이었다.

 

날 선 시인은

자기만의 풍경을 그린다.

그래서 시는

불친절하다.

 

49 김수영이 위대한 이유는 그가 태어날 때부터 시인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시인이 되려는 필사적인 노력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가 한 번 뿐인 자신의 삶을 타인의 흉내를 내지 않고 제대로 살아 내려고 했음을 말한다. 이런 절절한 의지와 소망을 관철시키려고 했고, 끝내 그럴 수 있었기에 우리에게 위대한 시인으로 기억되는 것이리라.

 

 만약에 나라는 사람을 유심히 들여다본다고 하자

 그러면 나는 내가 시()와는 반역(反逆)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

알 것이다.

 

 먼 산정에 서 있는 마음으로 나의 자식과 나의 아내와

 그 주위에 놓인 잡스러운 물건들을 본다

 

 그리고

 나는 이미 정하여진 물체만을 보기로 결심하고 있는데

 만약에 또 어느 나의 친구가 와서 나의 꿈을 깨워 주고

 나의 그릇됨을 꾸짖어 주어도 좋다

 

 함부로 흘리는 피가 싫어서

 이다지 낡아 빠진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리라

 먼지 낀 잡초 위에

 잠자는 구름이여

 고생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세상에서는

 철 늦은 거미같이 존재 없이 살기도 어려운 일

 

 방 두 칸과 마루 한 칸과 말쑥한 부엌과 애처로운 처를 거느리고

 외양만이라도 남과 같이 살아간다는 것이 이다지도 쑥스러울 수

가 있을까

 

 시를 배반하고 사는 마음이여

 자기의 나체를 더듬어 보고 살펴볼 수 없는 시인(詩人)처럼 비참

한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

 거리에 나와서 집을 보고 집에 앉아서 거리를 그리던 어리석음도

이제는 모두 사라졌나 보다

 날아간 제비와 같이

 

 날아간 제비와 같이 자국도 꿈도 없이

 어디로인지 알 수 없으나

 어디로이든 가야 할 반역의 정신

 

 나는 지금 산정에 있다-

 시를 반역한 죄로

 이 메마른 산정에서 오랫동안 꿈도 없이 바라보아야 할 구름

 그리고 그 구름의 파수병인 나.  

                                          -구름의 파수병 1956

 

51 산정은 지금까지 너무나 익숙하게 보았던 것들을 낯설게 바라볼 수 있는 거리를 제공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55 기질은 특정 사물이나 사건에 정해진 반응을 하도록 훈육된 습관이나 타성의 다른 이름이다. 여기서 타자를 응시하고 나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거리감은 발붙일 곳이 없다. 김수영이 제일 우려한 바가 이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태와 자기가 하나로 붙어서 생긴 타성을 ''이라고 부르며 경계했다.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의 '()'을 보면 된다. ''이란 한계점이다. 고치려야 고칠 수 없는 막다      

 른 골목이다. 숙명이다. ';에 한 두 번이나 열 번 스무 번이 아니라 수없이 부닥치는 동안에 

 내 딴에는 인간 전체에 대한 체념이랄까-그건 것이 생긴다. 그래서 나도 소크라테스의 말대로 본

 의 아닌 철학자가 된 셈이다. .......나중에는 걸레로 떼려다 못해 손가락으로 떼어 보려고 하지만     매끈거리는 비닐 장판에 붙은 머리카락이 손톱으로 쥐어질 리가 없다. 쥐어도 안 잡히고, 쥐어도 안 잡히고, 쥐어도, 쥐어도, 안 잡힌다. ''이다. 이렇게 되면 화를 내는 편만 손해를 본다. 그래도 눈앞이 캄캄해지도록 화가 날 때가 많다. 이것도 또 나의 ''이다.  - 1966

 

57 그의 분노는 방바닥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머리카락을 만날 때마다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아내의 '구스'한 성격에 대해 분노하는 자신의 ''을 글로 표현하는 순간, 김수영은 자신의 ''과 같은 분노를 이기고 서서히 자기 이해에 이른다.

 

적을 이기면 벽이 깨진다

 

59 흥미로운 것은 안가 '루스'한 성격이란 벽을 가지고 있다는 김수영의 판단과 화로 분출되는 정서적 동요가 동시에 작동한다는 점이다. 아내 대신 걸레질을 할 때 김수영은 이미 자신에게 화가 난 상태였다. 자신의 무기력과 무능력에 대해 화를 낸다는 것, 아니 자신의 무기력과 무능력을 자각하는 일은 무척 불쾌한 일이다. 김수영이 자각한 무기력과 무능력은 단순히 남편으로서 수행해야 할 경제적인 의무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제대로 된 시를 써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무기력과 무능력이 그에게는 더 심층적인 문제였을 것이다. 진정한 시인의 길을 가고자 한 그가 어떻게 자신의 무기력과 무능력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었겠는가. 그러니 자신의 상태를 직면하기보다는 그것을 억지로 억누른 것이다. 마침내 물걸레질을 하려다 아내의 젖은 머리카락을 발견하는 순간, 정신분석학의 근본적 통찰이라고 할 수 있는 '억압된 것의 회귀'가 일어난다. 눌린 용수철이 작은 계기로 튕겨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다.

고객인 목사와 대면하고 있던 나의 감정상태도 아마 나에게 더 화가 나 있는 김수영같은 꼴이 아니었나 싶다. 나의 무능함에 대한 문제, 결과에 대한 책임 문제, 인영에 대한 무한 책임문제

인연의 소중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이럴 때는 뒤집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진다는...

 

60 결국 자신의 상태가 ''이라는 사실을 안 순간, 김수영은 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실마리를 얻게 된다.

 

61 나에게는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도 점처럼 해결하지 못할 것 같은 세 가지 문제가 있다. 죽음과 가난과 매명(賣名)이다. 죽음의 구원. 아직도 나는 시를 통한 구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죽음에 대한 구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40여 년을 문자 그래도 헛산 셈이다. 가난의 구원. 길가에서 매일 같이 만나는 신문 파는 불쌍한 아이들을 볼 때마다 느끼는 자책감에서 헤어날 길이 없다. 역사를 긴 눈으로 보라고 하지만, 그들의 천진 난만한 모습을 볼 때마다 왜 저 애들은 내 자식만큼도 행복하지 못한 가 하는 막다른 수치감에서 헤어날 길이 없다. 나는 40여 년 동안을 문자 그대로 피해 살기만 한 셈이다. 매명의 구원. 지난 1년 동안에만 하더라도 나의 산문행위는 모두가 원고료를 벌기 위한 매문(賣文) 매명 행위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하고 있는 것도 그것이다. 진정한 ''의 생활로부터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나의 머리는 출판사와 잡지사에서 받을 원고료의 금액에서 헤어날 사이가 없다.-마리서사 1966

 

62 어느 순간에야 시인이 더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까? 바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갖는 시를 완성하는 순간이다. 만약 이것을 이룬다면, 그는 이제 아무 때나 죽어도 좋다고 말할 것이다.

 

63 하나의 스타일을 완성한 시인은 목숨을 걸고 아이를 출산한 여인과 같다.

 

64 내 앞에서 고통으로 신음하는 이웃을 위로하기 보다는 고통을 야기하는 구조적 문제를 고민할 때 참여시는 탄생한다.

 

65 가난이야말로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을 힘들게 만든다. 가난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이기 때문에 살아 낼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66 최소한 김수영에게 있어서 시는 죽음에 대한 구원에는 이르지 못할 지라도 삶에 대한 구원에는 도달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매너리즘에 빠진 자신도 구원하지 못한다면, 시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려면 외부 사태나 자기 자신, 그 어는 것에도 매몰되지 않아야 한다. 특히 어떤 것은 소망해도 좋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다고 미리 판단하는 유아론(唯我論)적 의식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유아론적 의식은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한다. 따라서 이런 의식 속에서 설교는 나올 수 있어도 시는 나올 수 없다. 시인으로 살고 싶다는 스승의 말이 김수영을 읽으면서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나도 시인으로 살도 싶다.

 

67 '사이'라는 것, 나를 버리고 '사이'가 되는 것. 너 또한 '사이'가 된다면 나를 만나리라.

 

68 칸트(1724-1804)는 자유란 "새롭게 행동을 개시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칸트의 말에서 '새롭게'라는 표현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69 한마디로 말해서 구름은 임제 스님이 말한 자유의 경지, '무위(無位)'를 상징하는 이미지다. 산정에 올라갔을 때, 우리는 순간적으로 세상을 낯설게 보는 거리감을 확보한다. 그렇지만 이것도 어느 순간 매너리즘으로 전락하기 쉽다. 모든 것을 동일한 고도감으로 관찰하면, 거리감이 생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르락 내리락 고도를 자유롭게 높이고 줄이는 구름과 같은 자유가 필요하다.

 

2장 전재의 가름치과 사랑의 상처

 

성교 외에도 부동의 껴안음이라는 또 다른 포옹의 형태가 있다. 우린 마술에 걸린 채 황홀해 하며, 잠자지 않고 잠 안에 있으며, 잠이 들려는 어린애 같은 쾌감 속에 있다. 그것은 옛날이야기의 시간이요, 나를 고정시키고 마비시키는 목소리의 순간이요, 어머니에로의 되돌아감이다. (..)그렇지만 이 어린애 같은 포옹 한가운데서도 생식기적인 것은 어쩔 수 없이 솟아올라, 근친상간적인 포옹의 그 분산된 관능을 차단한다. 그러면 욕망의 논리가 다시 작동하고 소유의 의지가 되돌아오며, 어린아이 위에 이중 인쇄된다. 나는 모성적인 것과 생식기적인 것을 원하는, 동시에 두 명의 주체이다. -바르트 <사랑의 단상>

 

자유를 찾는 여정은

땀내

가득하다.

 

87 그렇지만 김수영은 자유를 논하는 책을 더 읽을 필요가 없었다. 사실 책은 간접 경험에 지나지 않는다.

 

91 아내가 다시 돌아온다면, 김수영은 그녀를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용서하는 순간, 자신이 그녀를 이제 더는 사랑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모욕, 혹은 자존심의 상처는 결코 회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김현경은 잘못을 빌고 서울로 와야만 한다. 그러나 너무 불행한 일 아닌가. 그녀가 서울로 돌아오는 순간은 그의 구겨진 자존심이 조금이나마 회복되는 순간이자 그녀를 더는 그리워하지 않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93 애인은 오지 않았지만, 애인을 만나고자 기다리는 순수한 시간을 맛보았다는 것만으로 나는 만족할 수 있다. -일기초 1954.11.24

 

94 예나 지금이나 우리 사회는 성교중심주의적인 사랑에 매몰되어 있다. 순결을 강조하는 가부장적 유습이 강한 만큼, 사랑의 완성에서 성교가 하나의 척도로 기능한다. 그러나 이제 김수영에게 육체적 관계나 성욕은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이야기해 줄 수 없다.

 

95 분열된

몸과 마음은

다시 붙어도

상처다.

 

100 "자식을 볼 때에도 친구를 볼 때에도 아내를 볼 때에도 그들의 생명을, 그들의 생명만을 사랑하고 싶다." , 사랑에 대한 김수영의 상처는 이처럼 컸다.

 

101 보통 육체적 관계를 맺은 다음에는 관계를 맺은 여자를 보거나 다른 여자를 보면, 여자를 "경의 없이 애정으로"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 여자는 전혀 달랐다. 그녀는 단순한 성욕의 대상이 아니라 마음을 가진 엄연한 주체로 그에게 다가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수영은 그녀의 내면을 읽으려고 노력했다. "나를 어려워해서 경원하는지 무력해서 무시하는지, 정말 조금 생각은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어요. 돈이 없어서인가, 나이가 먹어서 그러는가."

 

102 식욕을 해소하지 못하면 사유가 힘들다. 성욕도 마찬가지다. 김수영에게 여자는, 그저 성욕을 해소하기 위한 욕망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104 미우나 고우나 자신의 모든 것을 상대방에게 건네주어야만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자신의 카드를 모두 꺼낸 뒤, 상대방이 어떻게 하는지 기다릴 뿐이다. 아니면 이렇게 말해도 좋다. 시를 쓰는 것도 그리고 사랑을 하는 것도 모두 "백척간두진일보"의 정신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그러니까 백 척이나 되는 까마득한 대나무 꼭대기에서 한 발 내딛는 것처럼 온몸을 던져야만 하는 것이다.

 

 사랑에 성공한 사람들의 제스처를 흉내 내려는 사람은 사랑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비록 남의 제스처로 사랑의 시작에는 성공했을지라도,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는 계속 남의 제스처를 흉내 내야만 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교감하는 사랑이 아니라 평생 사랑의 연기를 하는 사람이 어떻게 사랑에 성공할 수 있겠는가. 시인도 마찬가지다. 과거 시인의 스타일을 흉내 내는 순가, 시인은 독자들로부터 제대로 사랑을 받을 수 없다.

 

반인반수의 사랑.

그는 자신의 정체를 궁금해 하는 자를 조롱한다.

 

109 <>

 

그것하고 하고 와서 첫 번째로 여편네와

하던 날은 바로 그 이튿날 밤은

아니 바로 그 첫날 밤은 반시간도 넘어 했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그년하고 하듯이 혓바닥이 떨어져 나가게

물어 제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다부지게 해 줬는데도

여편네는 만족하지 않는다

 

이게 아무래도 내가 저의 섹스를 개관(槪觀)하고

있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똑똑히는 몰라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나는 섬찍해서 그전의 둔감한 내 자신으로

다시 돌아간다

연민(憐憫)의 순간이다 황홀의 순간이 아니라

속아 사는 연민의 순간이다

 

나는 이것이 쏟고 난 뒤에도 보통때 보다

완연히 한참 더 오래 끌다가 쏟았다

한번 더 고비를 넘을 수도 있었는데 그만큼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만다

 

-<> 1968.1.19

 

111 '나는 현경이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성교를 한다.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성교를 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가 성교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내가 나의 시를 모르듯이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성교하는 것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진짜 불행은 자신이 성교하는 줄 모르고 성교하는 진정한 사랑의 단계에 이르기 전에 김수영이 허망하게 떠나갔다는 사실이다.

 

3장 시인, 영원한 자기 배반자

 

페기(Peguy)가 말했듯이 나라에서 정한 714일 축제는 바스티유 감옥의 점령을 기념하고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바스티유 감옥의 점령이 출제를 벌이는 것이며 모든 봉기 집단들을 미리 앞서서 반복한다. 또는 모네의 첫 번째 수련이 그 밖의 다른 모든 수련으로 반복한다. 그러므로 특수자의 일반서이라는 의미의 일반성은 단독자의 보편성이라는 의미의 반복에 대립한다. 우리는 예술 작품을 개념 없는 단독성으로서 반복한다. 머리는 교환의 신체기관이지만 심장은 반복을 사랑하는 기관이다. -들뢰즈 <차이와 반복>

 

116 단독성은 글자 그대로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유성'이다.

 

사실 일반성과 특수성의 도식이 가장 극적으로 적용되는 사례가 자본주의다. 사람이나 사물이 모두 돈으로 구매 가능한 상품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돈은 '일반성', 사람이나 사물은 '특수성'을 상징한다고 하겠다. '일반성/특수성'도식에 입각한 사유에는 중요한 특징이 있다. 일반성에 포섭되는 특수한 것들은 서로 교환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다. 이로부터 일반성이 특수성을 지배한다는 지배와 위계의 논리가 타당하다.

 

117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혹은 벤야민과 라시스의 사랑을 흉내 내는 순간, 우리는 결코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사랑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 역으로 우리만의 단독적인 사랑에 성공했다면, 그 순간 우리는 두 커플의 사랑에 공명하고 공감하게 될 것이다.

 

125 6.25전쟁과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삶의 바닥을 경험한 김수영은 이제 더는 감각적으로 새로운 표현을 찾으려는 박인환 등과 함께 동인 활동을 계속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는 계속 새로운 표현 방법만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삶에 이르지 못한 지적 허영에 불과하다고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130 단독적인 것이 아니면,

감상만 남을 뿐

아무 의미도 없다.

 

138 고통,

불쾌,

죽음,

진실은

불편하다.

 

143 단독성은 마주친 사태에 대한 주체의 가장 단독적인 관계 맺음, 다시 말해 다른 행동과 바꿀 수 없는 '바로 그'행동을 수행할 때에만 달성될 수 있다. 이것은 사태를 마주치기 이전에 미리 계산 할 수 없다. 오히려 마주친 사태에 따라 사후에 인내를 가지고 호가고해야만 한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모든 것이 단독성을 가졌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김수영의 시와 삶의 과거의 것을 기계적으로 반복 할 수 없다.

 

144 지금 사귀고 있는 애인이 첫 번째 애인과 다르다면, 우리의 사랑은 달라야만 하고 다를 수 있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김수영이 꿈꾼 시인의 단독성이자 모더니티다.

 

145 자신의 제스처로 살려고 발버둥 치는 사람만이 단독적인 삶을 살아 내려는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법이다.

 

김수영이 마음에 품었던 이상적인 사회를 짐작할 수 있다. 이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만의 삶을 살아내고 그것을 자기만의 스타일로 표현할 수 있는 사회다. 그렇지만 이것은 고립이고 폐쇄된 자아들의 병립이 아니다. 자신만의 삶을 살아 냈을 때, 오히려 서로의 설움과 고통, 그리고 환희에 공명할 수 있다. 사랑을 자신만의 몸짓으로 겪어 낸 사람만이 타인의 사랑에 제대로 공감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당연히 여기서는 사랑은 이런 것이니,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이런 식으로 사랑을 해야만 한다는 등의 거친 이데올로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 민주적인 사회는 단독적인 자아들이 서로 공명하는 보편성이 회복된 사회이자, 자신들이 온몸으로 겪어 낸 삶을 자유롭게 표출할 수 있는 예술적 사회여야만 한다. 물로 삶의 모습을 획일적으로 정해서 통제하려는 권력의 입장에서는 무서운 일이지만 말이다. 단독적인 자아들이 공명하는 사회. 단독성을 갖는 것은 자신만의 꿈을 찾아서 살고자 했던 스승의 지향점과도 맞닿는 다는 느낌이다. 누군가 내게 물어왔다. 스승이 가고자 했던 궁극의 세계는 어떤 것 이었을까? 그의 대답은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단독성을 갖출려면 자신만의 색깔로 정착되어야 하는데 같은 세상을 꿈꾸었다는 말로도 들린다. 김수영과 나의 스승.

 

2부 사람을 위하여

 

4장 가장 구체적이어서 가장 단독적인 것.

 

'사물 자체' '의미 자체' '지시된 것 자체'와 마찬가지로 왜곡된 것이다. '사실 자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사실이 존재할 수 있으려면 늘 어떤 의미가 먼저 집어넣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무엇인가'는 그것과는 다른 어떤 것의 관점에서 시도된 의미 정립일 뿐이다. '본질'이나 '본성'은 항상 관점적인 것이며, 이미 다양성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근저에 놓여 있는 것은 "그것은 나에게 무엇인가"(우리에게, 존재하는 모든 것에게 등등)이다. -니체 <유고>

 

152 김수영의 이상은 분명하다. 모든 사물이나 사태처럼 각 개인은 단독적인 존재여야만 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우리가 단독적인 존재가 아닌데 단독적인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잃어버린 단독성을 되찾아야만 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인간은 교육과 관습, 권력이라는 외적 압력 때문에 자신만의 제스처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 외부가 강제하는 제스처로 살아가는 순간, 우리는 우울할 수 밖에 없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닌 것이 원하는 바대로 살아가는 것은 우울한 일이기 때문이다.

 

153 불행히도 모든 교육은 단독성을 개화시키기보다는 기성세대가 신봉하는 가치를 주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자신과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만나면 불쾌하게 느끼는 사람들과는 달리, 이런 불행한 개인들은 오히려 타인이 자신과 같은 옷을 입고 있을 때 편안함을 느끼기 쉽다. 그들이 유니폼, 즉 동일한 형식을 즐기는 것은 이런 이유인지 모른다. 결국 이들은 자신의 제스처를 버리고 권력이 허용하는 체스처를 취해서 자신의 단독성을 은폐하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시를 싫어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시는 자신들이 애써 은폐하려던 단독성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시를 좋아하게 된다면, 그들은 조금씩 자신이니까 살 수 있는 삶, 자신이니까 느낄 수 있는 감성, 자신이니까 생각할 수 있는 사유를 영위할 것이다.

 나만의 삶, 나만의 감성, 나만의 욕망을 되찾는 방법은 없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내면으로 침잠하면 안 된다. 오히려 외부로 과감하게 나아가야 한다. 외부는 어떤 식으로든지 마음을 격동시킬 테니까 말이다. 자신의 사유로 예측하지 못한 미묘한 감정이 출현할 때, 우리는 드디어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는다. "생각하지 말고, 느껴라!" 단독성을 회복하려는 사람에게 이보다 좋은 행동 강령도 없을 것이다. 동일한 꽃을 보았는데도 친구는 감동하지 않고, 나는 감동한다. 이럴 때 우리는 이 감동을 통해 자기 자신의 단독성을 헤아리게 된다.

 

154 어떤 사태를 만나 자신의 단독성에 이르는 데 성공했다면, 그 순간 우리는 과거보다 자신을 훨씬 잘 이해하게 되리라는 점이다.

 

158 비는 세상 모든 것의 움직임을 통제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비가 오면 사람도 동물도 모든 것이 자신의 움직임을 멈추고 휴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가 사람이나 동물 대신 움직이고 있어서다. 시가 구원일 수 있는 것도 이러해서 아닐까. 제대로 된 시가 탄생한다면 사태나 시인 자신도 휴식, 즉 구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비가 유일한 움직임이 되어 모든 것에서 휴식을 가져다 주듯이, 시도 유일한 움직임이 되면 마침내 사태와 시인은 구원과 안식들 얻을 것이다. 김수영에게 시는 비와 같다. 비가 움직이는 모든 것에게 휴식 기간을 마련해 주는 것처럼, 시도 그에게 구원과 안식을 제공한다. 시를 탄생시킴으로써 시인은 안식을 되찾는다.

 

159 감성이 현재에 매몰되어 있다면, 지성은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에까지 이르기 때문이다. 다른 위대한 시인들과 마찬가지로 김수영은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이가 단독적인 삶을 영위하길 원했다. 한마디로 모든 사람이 시인이 되기를, 나아가 시인들의 공동체를 구성하길 바랐다.

 

 서구의 어느 비평가가 말했듯이 앞으로 먼 후일에는 모든 세계의 인류가 시를 쓰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오. 또한 헤세가 그의 시에서 읊고 있듯이, 시가 필요하지 않은 낙원이 도래하고 모든 사람들이 착한 시인의 생활을 하고 오늘날의 시가 무효가 되는 세상이 올지도 모르오. -문단추천제 폐지론 1967.2

 

시는 나니까 쓸 수 있는 글이다. 그러니 모든 사람이 시인이 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자신만의 삶을 살아 낼 수 있다는 의미다. 이 경우 시인과 시인 아닌 사람의 구분도 사라지 것이며, 서로가 자기 삶의 형식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162 아직 도래하지 않은 삶, 동시에 도래해야만 하는 삶을 꿈꾸는 사람은 서러울 수밖에 없다. 그는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김수영은 시를 통해 삶의 단독성에 이르고 싶었던 시인이다. 결국 그의 시는 자신만의 삶에 이르려는 머나먼 길에 뿌려진 눈물과도 같다. 무엇인가 바라지만 그것이 실현되지 않을 때, 그렇다고 해서 바라는 것을 포기할 수도 없을 때 우리는 바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된다. 바로 이 순간이 제대로 된 글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그래서 모든 글다운 글에는 절망 속에 다시 강해지려는 희망과도 같은 것, 혹은 되찾은 희망속에서도 현재의 절망이 더 몸서리쳐지도록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이 있어야만 한다.

 

164 오히려 삶의 단독성에 가까워진 시가 어떤 모습일지 예측할 수 없다는 쪽에 가깝다. 사실 현실과의 마주침과 현실에 대한 개입으로 완성되는 삶의 단독성은 시인 혼자서는 함부로 예측할 수 없다. 내일의 시가 미지인 것은 이 때문이다. 니체라면 김수영 또는 진정한 시인이 추구하는 현실 극복의 과제를 '반시대적'인 것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세이모(samo, Same Old Shit, 별 것 아님)!

부단한 이탈,

이것은 예술가의 의무다.

 

171 어떻게 하면 먹구름처럼 가급적 땅에 가깝게 내려올 수 있을까? 자꾸만 떠오르려는 부력을 이기고 땅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높은 자리에서 낮은 곳의 사람들을 관조하고 지배하려는 해묵은 지배욕을 극복해야만 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자신이나 모든 사람이 자유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경험할 수 있다. 여기에 바로 단독성을 지향해야만 하는 인문학적 정신, 혹은 인문학적 신념이 갖는 중요성이 있다.

 마침내 먹구름이 충분히 세상에 가까워졌다면, 곧 비나 눈이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비나 눈은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들의 분주한 삶에 휴식과 안식을 준다. 구원의 시는 이렇게 완성되는 것 아닌가? 결국 비나 눈이 시인에게 진정한 시를 상징하는 이미지가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김수영김수영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상승에의 관성을 거부하고 하강에의 의지를 끈덕지게 관철시키는 것. 지배에의 욕구를 부정하고 공존에의 소망을 긍정하는 것. 그래서 김수영은 젊은 시인들에게 생생하게 떨어지는 눈을 보라고 외쳤는지도 모른다.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로 보라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 1956

 

이제 우리는 안다. 시가 난해한 이유는 그것이 추상적이어서가 아니라 구체적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일반 사람들이 시를 회피하려는 이유는 그들이 자신만의 삶을 영위하거나 자신만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무의식적인 두려움 때문이라는 사실을.

 

스승은 이런 시인이 되고자 하지 않았을까? 시인으로 살고 싶다의 그 시인이 김수영이 말하는 이 시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누군가의 바램대로 이대로 10년의 세월이 흐르면 위대한 사상가로 거듭날 분이었을지 모른다. 아직은 시장에서 나의 스승을 자기계발의 선구자로 인식하고 있다. 막 사상가의 길로 접어든 초입에 다른 세계로 뿅 사라져버리셨다.

 

173 눈이 시인의 정신을 상징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눈은 하늘이란 지고한 권좌로부터 스스로를 추방하여 구체적인 곳으로 내려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은 순수하고 고결하다. 신처럼 모든 것을 관조하지 않고, 스스로 더러워질 것을 감내하면서도 기꺼이 모든 것과 함께 하려고 한다. 눈은 더러운 진창도, 썩어 가는 시체도, 악취를 풍기는 오물도 가리지 않고 그들을 덮어 고결하게 승화시킨다. 눈 내리는 날 세상의 모든 존재는 빈부, 미추, 선악, 강약을 넘어서 동등하게 변한다. 부자의 집도 빈자의 집도 똑같이 흰 지붕이 되고, 대학 교수의 머리에도 구걸하는 아이의 머리에도 똑같이 흰 눈이 쌓이니까 말이다. 하늘과 땅이 지배와 피지배를 상징한다면, 눈은 지배 의지를 극복하고 구체로의 비약을 도모하는 시인 정신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거대 구조가 개인을 파묻어도

끝까지 헤치고 나와야 한다,

무서운 기색 없이.

 

175 시는 하늘로 오르려는 허영을 버리고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려는 정직함 속에서만 싹을 틔우는 법이니까.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업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金盞花)도 인가(人家)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懶惰)와 안정(安定)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폭포 1957

 

176 결국 그는 폭포의 이미지를 통해 비나 눈이 가진 일말의 낭만성까지 극복하는 데 성공한다.

 

5장 공통된 중심이 부재한 사회를 꿈꾸다

 

관조되는 대상-이 대상은 그의 무의식적인 활동의 산물이다-에 대한 구경꾼의 소외와 복종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가 더 많이 관조하면 할수록 그는 더 적게 살아가게 된다. 지배 체제가 제안한 필요의 이미지들로 그가 자신의 필요를 더 쉽게 재인식하면 할수록, 그는 자신의 존재와 욕망을 더 적게 이해하게 된다. 활동하는 주체에 대한 스펙터클의 외재성은 개체 자신의 몸짓이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고, 차라리 그에게 그것들을 대표해 주는 다른 누군가의 몸짓이라는 사실로 설명한다. 구경꾼은 어느 곳에서도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스펙터클은 어느 곳에서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기 드보르 <스펙터클의 사회>

 

184 팽이의 궁극적인 존재 이유는 도는 데 있다.

 

185 팽이가 도는 모습을 보면서, 김수영은 서럽기만 한 인간의 숙명을 응시하게 된다. 그의 통찰은 돌고 있는 팽이들이 서로 붙으면 안 된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돌고 있는 두 팽이가 마주치면, 둘 중 하나나 그들 모두 돌기를 멈추고 바닥에 내 팽겨 쳐지게 되는 법이다.

 모든 돌고 있는 팽이는 자기만의 중심을 가지고 돈다. 그런데 두 팽이가 마주친다는 것은, 어느 하나가 다른 팽이의 회전 스타일을 수용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허망하게도 팽이는 쓰러지고 만다. 팽이만 그런가. 인간도 마찬가지 아닐까? 자기만의 스타일로 살지 못하고 남의 스타일을 답습하는 순간, 인간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살아 내지 못한다.

 

186 오직 철저하게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채찍질하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삶을 마무리해야만 한다.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도기 때문이다.

 

187 김수영은 시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로 자신의 논의를 확장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예술은 단독성을 지향하는 사람이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표현하는 방법이다. 그것이 시이든 소설이든 그림이든 상관이 없다. 어쩌면 여기에 무용이나 음악, 혹은 영화를 포함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이다. 자신만의 삶을 살아 내려는 사람들은 예술가일 수 밖에 없다. 인간이 수행하는 다른 활동과 달리 예술은 독특한 개성과 생활 방식을 긍정하기 대문에 가능하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모방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 물론 새로운 것의 창조는 모든 인간이 절대적으로 새로운 존재이기에 가능하다. 자신이 과거와 미래에도 없을 전적으로 새로운 사람이기에, 인간은 자신의 단독성만을 당당하게 표현하기만 하면 된다. 새로운 것은 이로부터 저절로 탄생하고, 예술이 가능해지는 것도 바로 이 대목에서다.

 

190 자신만의 독특한 삶과 그로부터 표현된 시를 누가 감히 평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상을 준다는 것은 어떤 합의된 기준이 있어야 가능한 것인데, 이 기준에 맞는 작품을 썼다는 것은 이미 자신만의 시를 쓰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닌가.

 

191 아도르노(1903-1969)의 말을 빌리자면 "분단과 독재의 시대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 이것이 바로 김수영이 느낀 설움의 정체 아니었을까.

 

192 "시나 소설을 쓴다는 것은 그것이 곧 그것을 쓰는 사람의 사는 방식이 되는 것이다." 삶과 시가 일치가 되어야만 한다는, 그래서 시도 시인의 삶을 닮아야 하고 시인도 시적 인식에 부응해야 한다는 것은 김수영 스스로가 떠안은 명령의 핵심이다. 그렇다. 시는 자기 삶의 투철한 이해여야만 하고, 반대로 자신의 삶을 근본적으로 개조하는 전망이기도 해야 한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시와 삶. 혹은 예술과 삶은 우리의 온몸을 밀어붙이는 두 다리와 같다. 어느 한 다리가 앞으로 나가면, 다른 한 다리도 뒤따라갈 수밖에 없다. 어떤 경우에는 삶을 자기만의 스타일로 살아 내야만 자기만의 스타일을 가진 시가 나올 수 있다. 혹 다른 경우에는 자기만의 스타일을 가진 시를 쓸 수 있어야만 삶을 자기만의 스타일로 살아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결국 어느 경우나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온몸으로 혹은 시인의 육체로 삶을 밀어붙이면서 그에 부합되는 시를 쓰는 것이다.

자기만의 스타일로 살아 낼 수 있어야 시를 쓸 수 있다. 자기만의 스타일로 살아내는 삶을 살고 싶다.

 

김수영에 따르면 진정한 시인은 "남의 흉내를 내지 않고 남이 흉내를 낼 수 없는 시를 쓰려는 눈과 열정을 가진 사람"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잊지 말자. 그가 남의 흉내를 내지 않은 시를 쓰는 이유는 그가 한 번 밖에 없는 자신의 삶, 다시 말해 다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자신만의 삶을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만의 제스처로 살려는 사람은 시를 쓰지 않아도 된다. 그의 삶과 표현 자체가 이미 예술일 테니까 말이다. 그는 자신의 단독적인 삶을 영화로, 그림으로, 만화로, 연극으로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장르로 표현할 수 있다. 반면 남의 제스처만을 흉내 내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불행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 평생 일종의 가면을 쓴 채로 자신의 삶이 아닌 타인의 삶을 연기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자신의 맨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고 가면을 쓴 채 산다는 것. 물론 우리는 약자가 가면을 쓴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권력자 앞에서, 부모 앞에서, 또는 자본가 앞에서 우리는 자신을 보호하려고 가면을 쓴다. 노골적인 맨 얼굴을 드러냈을 때 권력으로부터 죽음의 판결을, 부모로부터는 추방 선고를, 혹은 자본가로부터 해고 통지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193 그렇지만 가면을 쓰면서 자신도 모르게 부당한 권력과 권위적인 부모, 혹은 고압적인 자본을 정당화하는 데 일조하는 것 아닌가? 이런 악순환에 말려들면, 더 두터운 가면을 쓸 것이고 죽을 때까지 가면 벗기를 거부할 지도 모른다. 마침내 우리는 자신만이 살아 낼 수 있는 삶을 포기하고 망각하는 데까지 이를 것이다. 이때가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지키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예술가의 존재가 필요한 시간이다. 자신의 제스처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제스처로 살려는 사람들을 통해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때문이다.

 

거짓없이 자신의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 모더니티이다.

 

197 (김수영)는 시에서 "거짓말이 없다는 것은 현대성보다 사상보다도 백배나 더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남의 말을 자기 말인 거처럼 지껄이는 순간, 우리는 거짓말쟁이가 된다. 화려하고 현란한 말로 남을 속일 수 있다고 할지라도, 거짓말쟁이는 결국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아 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시를 완성할 수도 없을 것이다.

 

199 삶과 예술에 대한 김수영의 생각은 지나치게 단순하고 쉽다. 즉 자신만의 삶을 살아 내려는 사람은 예술가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술은 자기 이해에 기반을 두는 인간 활동이기 때문이다.

 

200 사람의 수만큼 '포즈'가 있어야 한다고 이것이 그가 설움 속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인문(人文)이란 말은 매우 잘 만든 말이다. 사람을 뜻하는 인()과 문양이나 표현을 의미하는 문()이란 글자로 구성되어 있으니 말이다. 인문학은 사람과 그의 표현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사람이 눈길을 걸으면 그의 발자국이 찍히는 법이다. 발자국이 찍히지 않았다면, 그곳에 사람이 없었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눈길에서 사람과 발자국은 항상 서로가 서로를 가리키는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김수영 "시도 그렇고, 인생도 그렇고, 모두가 커다란 의미의 포즈"라고 말했다. 제대로 자신의 삶을 살아 내면, 다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자기만의 고유한 '포즈'가 만들어 질 수밖에 없다.

 

201 다른 사람의 발자국을 따라서 눈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힘과 보폭으로 눈길을 걷겠다는 정신. 그는 이것을 '진지성'이라고 부른다. '진지(眞摯)'라는 말은 매력적이다. 글자 그대로 '진짜로() 무엇인가를 꽉 잡는다()'는 뜻이니까 말이다. 그렇다. 무엇인가를 꽉 움켜잡아야 거기에 자신의 흔적을 남길 수 있다. 잡았다는 제스처만으로 자시의 흔적이 남겨질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일을 해도 사랑을 해도 이별을 해도 혁명을 해도 제대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진지하게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다. 남이 시키는 대로 일을 하고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고 혁명을 한다면, 그 결과 발생한 모든 '포즈'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포즈'에 불고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강조했다. "포즈 이전에 진지성이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오직 이럴 때에만 '포즈'는 우리 자신이 만든 것이 되기 때문이다.

 

202 모든 예술가가 그렇듯이 시인은 시인이 불필요한 세상, 혹은 시가 쓸모가 없어지는 세상을 꿈꾼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권력은, 종교는, 자본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포즈'를 갖는 것을 극히 꺼린다. 권력은 모든 인간이 자신이 명령하는 대로 살기를 바란다. 종교는 신의 가르침이 절대적인 삶의 방식이라며 모든 인간이 수용하길 원한다. 나아가 자본은 모든 인간이 자신의 단독성을 망각하고 자신이 자본에 종속되는 상품에 불과하다고 인정하기를 원한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만의 '포즈'를 갖춘 사람은 타인과 불화할 수밖에 없다고, 나름대로 진지한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203 시인은 당연히 시 무용론을 피력하는 억압에 맞서 시가 가능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 이래서 진정한 시인은 억압 체제와 맞서 싸울 수밖에 없다. 이런 저항과 자유의 정신이야말로 시인이 자신보다 부유하거나 권세가 있는 사람들에게도 주눅 들지 않을 수 있었던 "모랄과 프라이드"의 정체다. 그래서 김수영 "연애에 있어서나 정치에 있어서나 마찬가지. 말하자면 진정한 시인이란 선천적인 혁명가"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마침내 우리는 바이런(1788-1824)처럼 진정한 시인들이 왜 일체의 억압에 맞서 싸우려고 했는지 이해하게 된다.

 

204 단독성의 절대적 긍정!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인간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을 긍정할 때, 우리는 인문정신을 가졌다고 당당히 외칠 수 있다. 벤야민이라면 메시아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 메시아라고 외쳤을 것이다. 아니 우리는 메시아가 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을 때 권력, 종교, 자본은 계속 우리의 삶과 영혼을 좌지우지할 테니까. 놀랍지 않은가?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정신과 "길은 우리가 다녀야 만들어진다"는 장자(BC 369-289?)의 지혜가 김수영에게 그대로 이어진다는 사실이 말이다.

 

"이제 시의 시대는 끝났다.

곧 지루한

산문의 시대가 시작될 것이다."

-파리 코뮌 지배 당시 승리에 취한 시민들에게 경각심을 주는 신문 컬럼의 일부

 

207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사회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 즉 코뮌(commune)의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208 공동체 성원들이 스스로 도는 힘을 포기하지 않고, 동시에 자신이 살아가는 스타일을 다른 성원에게 강요하지 않을 때에만 민주주의는 실현된다

 

209 공동체에서 중용이 가능 하려면, 모든 성원이 자기만의 힘으로 돌 수 있는 팽이처럼 당당해야 한다. 스스로 도는 힘들의 균형 상태가 중용이니까 말이다. 불행히도 4.19혁명 이후 한국 사회의 성원들은 스스로 도는 힘을 회복하지 못했다.

 

211 우리 시인 김수영이 꿈꾼 중용의 사회는 단독성이 실현되는 동시에 보편성이 확보되는 사회, 다시 말해 모든 사람들이 자신만의 제스처로 살아가지만 때로는 서로 아름답게 때로는 아프게 공명할 수 있는 사회였다.

 

6장 언어의 숙명과 시인의 소명

 

전쟁터에서 명령과 보고-혹은 질문과 예, 아니오 라는 대답-로만 이루어진 언어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 밖의 상황에서도 무수히 많은 다른 언어들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언어를 상상하는 것은 하나의 삶의 형식을 상상하는 것을 의미한다.

 

220 보조국사 지눌(1158-1210)도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넘어진 자리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고 말이다. 넘어졌다는 자각이 없다면, 일어서려는 마음도 가질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낙후된 현실에 대한 자각이 없다면, 보다 나은 삶에 대한 희망도 생길 수 없다. 우리는 더러운 역사에서 그리고 더러운 진창으로부터 일어나야만 한다. <시월평:모더니티의 문제>란 산문에서 김수영 "오늘날의 우리의 현대적인 시인의 긍지는 '앞섰다'는 것이 아니라 '뒤떨어졌다'는 것을 의식하는 데 있다"고 말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진창처럼 더러운 우리의 역사와 삶에 "거대한 뿌리"를 내린다는 것, 이것은 거대한 나무로 서겠다는 김수영의 의지다. 뿌리를 내려서 거목으로 자라나는 것은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서는 가장 매력적인 방법 아닌가? 그의 바람대로 자신의 시가 "거대한 뿌리"로 결실을 맺어 거대한 나무가 자랄 수만 있다면, 진창은 사라지고 대신 그곳에는 수많은 풀과 나무가 우거질 테니까.

 

223 과거는 쉽게 부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덮개를 치우고 과거의 악취를 있는 그대로 드러낼 때에만, 진창과도 같은 과거와 정말로 단호하게 결별하려는 의지와 실천이 발생할 수 있다. 그가 자신에게 무의식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는 과거의 유산을 냉정하게 진단하려는 것도 이런 이유다. 과거의 악몽은 밝은 태양빛에 노출되면 사라지는 균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진창과도 같은 땅에 거대한 뿌리를 박아 서기 위해서, 지창에 대한 불쾌하지만 진지한 용서는 아주 오랫동안 불가피한 일이다.

 

230 "나를 이해하려면 스스로의 삶에 직면할 수 있을 때까지 성장해야만 할 거예요." "충분히 성장한다면, 제가 이야기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이처럼 말해도 좋다. 카프카의 소설을 <이솝우화>읽듯이 쉽게 읽는 날이면, 우리는 우리 시대를 넘어간 것이라고 말이다.

 

231 언어는 인간의 상상력과 항상 밀접한 관계였다.

 

현실 생활에 풀로 붙인 듯이 딱 붙은 언어는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 없다.

 

234 "심금의 교류"는 타인도 나만큼 자유롭다는 전제에서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타인의 삶을 강제할 수 없다는 자각에 이를 때에만, 우리는 그를 감동시킬 수 있는 표현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법이다.

 

아내는 반 홉 소주에 취했다 남편은 내내 토하는 아내를 업고 대

문을 나서다 뒤를 돌아보았다 일없이 얌전히 놓인 세간의 고요

 

아내가 왜 울었는지 남편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영영 알 수 없을

지도 모른다 달라지는 것은 없으니까 남편은 미끄러지는 아내를 추

스리며 빈 병이 되었다

 

아내는 몰래 깨어 제 무게를 참고 있었다 이 온도가 남편의 것인

지 밤의 것인지 모르겠어 이렇게 깜깜한 밤이 또 있을까 눈을 깜빡

이다가 도로 잠들고

 

별이 떠 있었다 유월 바람이 불었다 지난 시간들, 구름이 되어 흘

러 갔다 가로등이 깜빡이고 누가 노래를 불렀다 그들을 뺀 나머지 것

들이 조금 움직여 개가 짖었다

 

그때 그게 전부 나였다 거기에 내가 있었다는 것을 모르는 건 남

편과 아내뿐이었다 마음에 피가 돌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

작 되었다

 

-면목동 유희경 2011<오늘 아침 단어>중에서

 

236 모든 사람이 자신만의 삶을 살아 내고 그것을 표현할 수만 있다면, 인간은 서로에게 상상력의 원천이 될 수 있다. 모든 사람의 행동이나 표현에는 "전달과 노예의 언어"가 아니라 자신만의 고유한 "심금을 교류할 수 있는 언어"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단독성=새로움=상상력'이란 기묘한 삼위일체가 성립한다. 단독적인 것만이 새롭게 느껴지고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리고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만이 단독적이고 새로운 삶을 살아 낼 수 있다. 하긴 상상력이란 기존의 사유 공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사람에게는 찾을 수 없는 능력이다. 김수영 "시적 인식이란 새로운 진실의 발견"이라고 강조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237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성원들이라면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을 본다면, 이는 자신만의 삶에 이르지 않았다는 증거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바로 나니까 볼 수 있는 것, 이것을 봐야만 한다. 정치가의 시선도 아버지의 시선도 목사의 시선도 자본가의 시선도 혹은 과거 위대한 작가의 시선도 아니다. 오직 나만의 시선으로 사물의 진실을 볼 때, 그것은 과거의 맹목적으로 따르던 시선과는 다른 새로운 스타일의 시선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시적 인식"이다.

 

238 어느 개인이 공동체가 각인시킨 시선이 아니라 자신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이 순간 그는 더 이상 공동체의 노예가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를 꿈꾸는 불온한 주체가 된다.

 

241 진창과 같이 낙후된 현실을 넘어서고자, 김수영은 이 현실에 뿌리를 박고 우뚝한 거목으로 서려고 했다. 조금씩 자라난 나무는 어느 사이엔가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잎들을 풍성하게 길러냈다. 그 잎들 하나하나가 바로 그의 시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외롭다. 높게 자란 나무가 되어 주변을 둘러보아도 자신처럼 자라나는 나무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진창도 더 심한 진창으로 변했고, 나무처럼 스스로 자시의 삶을 곧추세우려는 자유에의 열망도 보이지 않는다. 이전투구! 진차에서 싸우면서 더럽게 뒹구는 개들만 보일 뿐이다. 진창을 비옥한 거름으로 삼아서 모든 사람이 자기만의 색깔을 갖춘 나무로 자라길 바라는 것이 이토록 힘든 일일까. "곧은 소리" "곧은 소리"를 부르지도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개들만이 뒹구는 세상,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죽어 가는 생활,

겨울이 짙어도

입을 봉한 사람들,

이들을 보고 결코 눈감지 않는 자,

내 말을 하는 자가

시인이다.

 

7장 자기 힘으로 도는 팽이가 되어라

 

우리는 심지어 고뇌조차도 자랑스럽게 여긴다. 고뇌가 참을성을, 참을성이 시험된 충실성을, 시험된 충실성이 희망을 생산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결국 희망은 기만하지 않는다. 도래할 결과의 표상에 대한 충실성이 아니라, 충실성에 대한 충실성이라는 이 신비적 희망은 도래할 충일감의 경중에 따라 환멸을 측정한다. 이렇게 고리쇠는 사건의 절대적 단독성 위에 닫혀 버리고 만다. 왜냐하면 충실성은 왜 그것이 고갈되고, 결국 어떻게 꺼져 버리는지 이해되지 못한 채 자신을 지속적으로 추진시키는 동력을 지속시키기 때문이다. -벤사이드 <저항>

 

250 국가가 적과 동지라는 범주에 의해서만 계속 존속할 수 있다는 것은 정치철학적 상식이다. 남한과 북한이 상대방을 적으로 설정하는 순간 승만은 남한을 하나의 동지로,김일성은 북한의 하나의 동지로 묶을 수 있었다. 당연히 체제비판자는 가차 없이 적으로 간주되어 제거되었다.

 

 

257 부르주아 법류의 핵심은 소유권을 인정하는 데 있는 것 아닌가?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趙芝薰)이란

시인이 우겨 대니

 

나는 잠이 올 수 밖에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張勉)이란

관리가 우겨 대니

 

나는 잠을 깰 수 밖에

 

-<김일성 만세> 1960.10.6

 

262 모험은 자유의 서술도 자유의 주장도 아닌 자유의 이행이다. 자유의 이행에는 전후좌우의 설명이 필요 없다. 그것은 원군(援軍)이다. 원군은 비겁하다. 자유는 고독한 것이다. 그처럼 시는 고독하고 장엄한 것이다. 내가 지금_바로 지금 이 순간에_해야 할 일은 이 지루한 횡설수설을 그치고, 당신의, 당신의, 당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일이다. 당신이, 당신이, 당신이 내 얼굴에 침을 뱉기 전에, 자아 보아라, 당신도, 당신도, 당신도, 나도 새로운 문학에의 용기가 없다. 이러고서도 정치적 금기에만 다치지 않는 한 얼마든지 새로운문학을 할 수 있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정치적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개인의 자유도 인정하지 않는다. ‘내용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형식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시여, 침을 뱉어라> 1968.4

 

자유는 고독한 것이다.” 그의 전선에서 일체의 비관주의를 읽어 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고독은 자유의 숙명과도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 김수영이 꿈꾼 자유는 자신의 삶을 자신의 스타일로 살아 내야만 하는 자유였다. 그의 자유가 권력으로부터 허용되는 자유나 혹은 타인이 인정하는 자유가 아니라, 장엄하고 고독한 창조의 자유일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269 자신의 삶을 자기 스타일대로 정직하게 살아 낸다면, 우리는 타인의 삶에 공명하는 보편성을 확보한다. 이것이 바로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방법 아닌가? 자신만의 스타일로 진지하게 사랑한 사람은 실연을 당했어도, 타인의 사랑과 실연에 공명할 수 있는 감수성을 갖추게 된다. 하지만 개체보다 전체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개인에게 무제한의 자유를 주면 공동체의 질서가 와해되고, 끝내 개인에게도 불행을 가져다 준다고 주장한다. “자유의 회복을 꿈꾼 그에게도 어느

날 이런 반론이 들어왔나 보다.

 

271 잊지 말자.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자유를 주려고 하지만, 우리가 지배하고 소유하려는 사람에게는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사랑을 가진 사람의 자유는

방종이 아니다.

나는 요즘 엄한 사람한테 화를 내고 있나 싶다. 비겁하고 못났다.

 

274 그가 포로수용소에서 배운 자유의 정치철학은 두 가지 주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자유는 고독할 수 밖에 없다는 것. 둘째, 당연히 자유를 지향하는 사람은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 가야 할 운명과 사명을 담당할 수 밖에 없다는 것.

 

275 주인이 되어서 주인으로서 살아가려면 과거의 노예적 습성들을 철저하게 제거해야만 한다.

 

276 강인한 고독을 통해 진정한 혁명가는 새로운 스타일의 사회를 꿈꾸고, 진정한 시인은 새로운 스타일의 글을 꿈꾼다. 그렇지만 혁명가와 시인은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

 

 

282 진정한 자유의 혁명을 꿈꾸는 혁명가나 시인도 아직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억지로 자유를 선물할 수 없다. 그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혁명가나 시인이 될 수 있는 자극을 주는 것, 그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혁명가나 시인은 모세(Moses)처럼 누군가를 이끌고자 하지 않는다. 임종을 앞둔 싯다르타(BC563?-BC483?)가 제자에게 말했듯이 무소의 뿔처럼 모든 사람이 혼자서 갈 수 있을, 마침내 김수영이 그렇게도 그리던 진정한 자유의 혁명, 혹은 최종적인 혁명이 절대적으로 완성될 테니까 말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무엇인지 모르고 기쁘고”, 그의 가슴이 이유 없이 풍성했던 이유 아니겠는가.

 

 

3부 자유를 위하여

 

8 행동을 낳는 생각을 하다

 

대상에 대한 진리가 인간사유로 귀착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인 문제이다. 실천에서 인간은 자기 사유의 진리성, 즉 현실성과 힘, 차안성을 증명해야 한다. 실천으로부터 유리된 사유가 현실적인가 비현실적인가를 논하는 것은 순전히 스콜라적인 문제이다

-마르크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290 자유롭게 사는 것, 혹은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서 사는 것. 이는 단순한 구호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만의 시선으로 자신과 세상을 정직하게 응시하는 안목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보지 않는다면, 자신만의 스타일로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두려움 사이에서도 자유를 잊지 말고, 슬픔 속에서도 환희를 잊지 말고

 

<죄와 벌>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 놈이 울었고

비 오는 거리에는

40명 가량의 취객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_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1963.10

 

301 아내를 받아들인 것은 가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였다. 그러니까 남자가 대범하지 못하게 아내의 실수도 용납하지 못한다는 수군거림이 무서웠던 것이다. 전쟁 중에는 누가 쌀 한 포대만 주어도 여자가 치마를 걷어 올리는 것이 죄가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자신은 생사가 묘연한 입장 아니었는가. 그가 자신이 지금까지 아내를 진심으로 용서하거나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더군다나 자신은 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만 아까워하는 이기적인 인간이 아닌가. 어떻게 이기적인 인간이 타인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는 한 번도 김현경을 사랑한 적이 없었다. 사실 김현경을 아내로 맞아 들인 것도 그녀가 주변 문인들이 그렇게도 탐내던 여인이기 때문 아니었는가? 마침내 그는 자신의 남루한 실체를 깨달은 것이다. 설령 아내가 이종구와 살림을 차리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과연 그녀를 제대로 사랑할 수 있었을까?

 

전쟁도, 독재도, 이웃의 고통도 나와는 무관하다는 듯 온실에 머무르는 이들에게 맨 얼굴의 고통을 요구하라.

 

311 “당신은 내 머리 속이나 내 심장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어요.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지.” 이렇게 달콤하게 속삭이지만 애인을 위해 땀 한 방울도 흘리지 않는 사람이 과연 사랑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온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는 어떤 밀어도 속삭일 필요가 없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침묵의 한 걸음을 내딛기 때문이다. 비지땀을 흘리더라도 그는 애인의 짐을 들어 주거나 그를 업어 준다. 쏟아지는 잠을 쫓으며 아픈 애인의 병석을 끈질기게 지키려고 한다. 이렇게 온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온몸으로 애인의 무게를 떠안고 자신의 삶을 밀고 나가는 법이다.  그렇다. 온몸으로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작”, 즉 시를 짓는다는 것은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간다는 것. 이는 또한 자신만의 힘으로 스스로 돌겠다는 자유의 선언이기도 하다. 권력, 종교, 자본은 인간이 그들이 원하는 스타일로 살기를 바란다. 압도적인 누군가가 허락한 제스처를 살아가는 순간, 우리는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사는 것이 아니다.

 

312 한자를 분석하면 자유(自由)자신()으로부터 유래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일체의 외적인 것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을 따르는 것이다.

 

9장 자유를 살아 내다

 

인생의 시작부터 사물화되어 버린 오류, 왜곡, 악습, 의존성의 심층부에 훈육이 가해진다. 그 결과 인간 존재가 여전히 머무르고 있을지도 모르는 젊음의 상태나 유년기의 어떤 단계로 되돌아가는 것이 관건이 아니라, 즉각적으로 결함 있는 교육 및 신앙 체계에 사로잡힌 인생 속에서 결코 나타날 기회가 없었던 속성을 참조하는 것이 관건이 된다. 자기 실천의 목표는 자기 자신 내에서 결코 나타날 기회가 없었던 속성과 자기 자신을 일치시키면서 자기를 해방하는 행위이다.

-푸코 <주체와 타자의 통치>

 

321 혼자 힘으로 돌아야만 하는 팽이를 통해 그는 고독한 자유정신이 무엇인지 직감한 것이다. 자유정신을 가진 사람은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 가야 할 운명과 사명을 자각하며 이를 실천한다. 스스로 도는 힘을 회복한 것만으로 충분히 위대하다. 지금까지 우리와 무관하게 주어진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해 울어 왔던 타율로부터 이제 스스로 도는 힘으로 우는 자율로 이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스로 도는 힘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현실 세계는 미끈한 평면이 아니라 다양한 굴곡으로 이루어진 너덜너덜한 면을 닮았기 때문이다.

 

스스로 도는 힘을 회복했다고 할지라도, 그 힘을 다양한 저항에 맞게 조율해야만 한다.

 

322 자신이 아닌 다른 것에 대해 만들어진 스타일을 벗어던지는 것이 하나의 시작이라면 저항에 직면할 때마다 매번 새로운 스타일을 만드는 것도 또 다른 의미의 시작이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시작은 매우 힘든 일이다. 자신의 힘으로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 사는 것은 굉장히 버겁다. 수많은 저항을 자신만의 힘으로 뚫고 “’온몸으로 밀고 나가야만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저항을 불변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에게 똑 같은 저항은 존재하지 않는다. 저항은 사람마다 다르게 경험된다.

 

323 저항은 오직 자유를 살고, 자유를 노래하는 사람에게만 의미를 가진다. 자신의 삶을 방해하는 저항의 발견이 자유인의 긍지인 것도 이런 이유인지 모른다. 그래서 매번 시작해야만 하는 우리에게 최고의 적은 온몸으로 경험하는 저항이 아니라 저항을 경험하지 못하게 만드는 게으름과 안정에 대한 욕망이다.

 

327 푸코와 마찬가지로 김수영은 자신의 내면에 숨어 있는 적을 찾아내고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내면의 적은 배가 부를 때도 목이 마를 때도, 연애를 할 때도, 졸음이 올 때도 꿈속에서도, 깨어나서도 또 깨어나서도 또 깨어나서도항상 자신과 함께 하고 있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패거리 정신을 박차는 일은

또 다른

억압과 시험의 시작이다.

 

333 김수영은 참여파 시인의 내면에서 일종의 권력의지를 발견한다. 그들은 민족과 민중에게 억압에서 벗어나는 길을 보여 주고 사람들은 그 길로 안내하는, 모세와 같은 구세의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334 대개의 경우 억압받는 사람은 억압 체제 자체를 극복하기보다는 억압자가 되고 싶어 하며, 가난한 사람은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극복하기 보다는 자본가가 되고 싶어 한다. 이것이 우리가 인문주의자나 민주주의자가 되는 것을 가로막는 가장 집요한 적이다.

 

338 잊지 말자. 새로운 형식과 새로운 내용을 가진 글 자체가 시라는 사실을 말이다. 간단히 정리하면 모든 면에서 새로운 글만이 시다. 새롭기 때문에 시를 이해하기 힘들고, 새롭기 때문에 시는 기존의 통념과 대립할 수밖에 없다.

 

345 기억하자. 삶의 주체는 항상 이지 우리일 수 없는 법이다. 아니 절대로 우리여서는 안 될 일이다. ‘우리가 삶의 주체가 되는 순간, ‘는 삶의 주인이 아닌 노예로 전락한다.

 

346 민주주의는 외적인 제도나 형식이 아니라 사람들의 자유정신이 확보되어야 하는 문제라는 통찰이다. 모든 사람들이 투철한 자유정신을 가진다면, 그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는 민주적인 공동체, 그러니까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일 수밖에 없다. 어떻게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에서 모든 사람을 자기 뜻대로 통제하겠다는 독재자나 소수의 지배자들이 등장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 민주주의는 인문주의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는 이념이다.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황지우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13

여하 20도 지상에

온몸을 뿌리 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裸木)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받는 몸으로, 벌받는 목숨으로 기립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 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에서

영상으로 영상5동 영상13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는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 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 피는 나무이다

 

기름진 권위를

비웃어라.

타인의 삶에 기생하는 이들과

투쟁하라.

 

10장 불온함과 긍지다.

 

정치란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만드는 것, 그저 소음으로만 들릴 뿐이었던 것을 말로서 듣게 만드는 것, 특수한 쾌락이나 고통의 표현으로 나타났을 뿐인 것을 공통의 선과 악에 대한 느낌으로서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다. (…)정치의 본질은 불일치다. 불일치는 이해나 의견들의 대립이 아니다. 그것은 감각적인 것과 그 자체 사이의 틈을 드러내는 것이다. 정치적 드러냄은 보일 이유가 없던 것을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한 세계를 다른 세계 안에 놓는 것이다.

-랑시에르 <정치에 관한 열 가지 테제>

 

366 우리는 관념에서의 자유삶에서의 자유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이솝 우화>에는 신 포도 이야기가 등장한다. 어느 여우가 길을 가다가 맛있어 보이는 포도를 발견한다. 그런데 포도는 너무나 높은 곳에 열려 있다. 여우는 몇 번이나 뛰어서 포도를 잡으려고 했지만 도무지 딸 수 없었다. 그러자 여우는 속으로 말한다. “저 포도는 신 포도야.”이렇게 생각하자마자 여우는 포도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것이 바로 관념에서의 자유.

 

진정한 인문주의자는 다음과 같이 물어 볼 테니까 말이다. “여우야, 너는 먹어 보지도 않고 어떻게 포도가 시가는 걸 알았니?” 관념에서의 자유가 허위에 불과하든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여우는 어떻게 할까? 아마 여우는 지금 자신의 방식으로는 포도를 딸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다른 방식으로 포도를 따려고 할 것이다. 마침내 여우는 실천적 전망을 확보하면서 삶에서의 자유로 한 걸음 내 딛게 될 것이다.

 

367 “한 편의 시가 완성될 때, 그때는 3할의 비약이 기적처럼 이루어질 때인 동시에 회의의 구름이 가시고 태양처럼 해답이 나오고 행동이 나온다.”태양처럼 해답이 나오고 행동이 나오도록 만드는 시, 바로 이것이 그가 말한 벅찬 영혼이다. 주어진 난제를 해결할 수 있는 행동이 실마리가 보이니, 이보다 감격스러운 일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구조의 억압은 한시도 쉬지 않는다

항상 자유를 읊고, 자유를 살아라.

 

374 모든 사람은 외모만큼이나 느끼고 욕망하고 생각하는 것이 다를 수밖에 없다. 나름대로 멋진 옷을 골라 입고 외출을 했다고 하자. 불행히도 자신과 똑 같은 옷을 입은 사람과 마주친다면, 어떤 마음이 들겠는가? 십중팔구 불쾌감을 느끼며 그 자리를 피하려고 할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은 남과 다르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유니폼을 입을 때 편안함을 느끼기도 한다. 타인과 다르다는 것이 무섭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적으로 오인되는 순간, 우리는 같이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배척당하고 끝내는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 인간은 이처럼 이율배반적인 존재다. 남과 같은 옷을 입었을 때 불쾌감을 느끼기도 하고, 어느 때는 동일한 옷을 입었을 때 안도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렇지만 잊지 말자. 인간이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려는 이유는 항상 압도적인 권력의 억압으로부터 유래하는 자기 검열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379 인간의 자유를 불온하다고 보지 않는 세상, 자기만의 삶을 살아 내려는 의지를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바라보는 세상, 바로 이것이 김수영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부터 비운의 교통사고로 이 세상을 뜰 때까지 서럽게 가슴에 품은 이상이다. 그의 이상이 실현된다면, 권력, 자본, 종교, 관습이 애써 지키려는 공통된 중심은 지상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세상은 지금까지 들어 보지 못한 다양한 소리들이 울려 퍼지는 장관을 연출할 것이다.

 

야만의 사회를 끝내는 메시아는

사람이 사랑을 사랑할 때 들리는 불협화음이다.

 

Epilogue 굿바이! 김수영

 

이야기된 불행은 불행이 아니다. 그러므로 행복이 설 자리가 생긴다.

-이성복,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누이야

풍자가 아니면 해탈이다

네가 그렇고

내가 그렇고

네가 아니면 내가 그렇다

우스운 것이 사람의 죽음이다

우스워하지 않고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죽음이다

8월의 하늘은 높다

높다는 것도 이렇게 웃음을 자아낸다

 

누이야

나는 분명히 그의 앞에 절을 했노라

그의 앞에 엎드렸노라

모르는 것 앞에는 엎드리는 것이

모르는 것 앞에는 무조건하고 숭배하는 것이

나의 습관이니까

 

-<누이야 장하고나!> 1961.8.5

 

403 편집자의 말

경찰에서는 한 마디도 못하면서 갈비탕집 주인에게만 고래고래 소리치는 내가 비겁해서 서럽고, 사랑하지 않는 마누라와 자식을 핑계로 함께 살아서 서럽고, 월급 주는 이에게 바른 소리 한 번 못하고 굽실거려 서럽고, 바라는 게 있어서 비쩍 마른 가을 거미처럼 늙어 가는 내가 서럽다. 김수영이 느낀 서러움이다. 우리네 생활인이 겪는 서러움과 같다. 같은 서러움이지만 다른 서러움이다. 우리는 서러워서 자본 신(), 종교 신, 권력 신에 기대지만, 김수영은 자신에게 기댔다. 그리고 시를 썼다. 시는 자유고, 혁명이고, 그 자신이었으니까. 김수영은 사회주의자도, 모더니스트도 아니다. 그저 자유를 바랐다. 자유에는 이념이 없다. 오직 사람뿐이다.

 

405 이 책을 통해 많은 사람이 타성에 억눌리지 않는 용기를 얻었으면 한다. 겉모습은 중요하지 않다. 누구든 사람이, 사람으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시인을 위하여, 사람을 위하여, 자유를 위하여

 

3. 내가 저자라면

 

목차와 뼈대에 대하여

 

김수영강신주김서연의 이야기이다. 어쩌면 이 세 사람은 결이 같은 사람일지 모른다. 그러니 아버지의 죽음 앞에 김수영을 놓고 김수영을 가져다 준 김서연을 나란히 책 표지에 올린 것인지도. 자유로운 사람이 되기 위한 방편으로 김수영은 시를 썼다. 시가 김수영이고 김수영이 시이다. 편집자 김서연 1981년판 <김수영전집>을 구해 주면서 한 말 사포처럼 살같을 도려내는 일상의 적들과 싸우느라얼마나 아팠을까. 그 사람.” 자유를 원하는 한 인간이 시인으로 살아가느라 힘들과 무서웠던 현실에 대한 느낌이 강신주의 맛깔나는 글 솜씨로 더욱 빛을 발한다. 저자가 김수영과 결이 같아서 더욱 글에 느낌이 살아있는 듯하다. 개인적으로 시인처럼 살고 싶다던 스승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던 터라 김수영을 읽으면서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알았다. 지금은 물어볼 수 없지만 아마 내 느낌이 맞을 거다. 조르바를 꿈꾸고 김수영을 꿈꾸던 사람이 나의 스승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마지막 에필로그에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아비의 죽음에 이르러 드디어 이해가 갔다는 누이야 장하고나! 는 나는 아직 다 이해하지 못했다. 사랑과 자유 그리고 사람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하는 탐나는 글이다.

 

머리말

prologue

 

1부 시인을 위하여

 

1장 인간적이거나 인문적이거나

2장 전쟁의 가르침과 사랑의 상처

3장 시인, 영원한 자기 배반자

 

2부 사람을 위하여

 

4장 가장 구체적이어서 가장 단독적인 것,

5장 공통된 중심이 부재한 사회를 꿈꾸다

6장 언어의 숙명과 시인의 소명

7장 자기 힘으로 도는 팽이가 되어라

 

3주 자유를 위하여

 

8장 행동을 낳는 생각을 하다.

9장 자유를 살아내다

10장 불온함은 긍지다

 

epilogue

편집자의 말

참고문헌

김수영 연보 및 본문 수록 작품 발표시기

 

감동적인 장절

 

153 자신과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만나면 불쾌하게 느끼는 사람들과는 달리, 이런 불행한 개인들은 오히려 타인이 자신과 같은 옷을 입고 있을 때 편안함을 느끼기 쉽다. 그들이 유니폼, 즉 동일한 형식을 즐기는 것은 이런 이유인지 모른다. 결국 이들은 자신의 제스처를 버리고 권력이 허용하는 체스처를 취해서 자신의 단독성을 은폐하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시를 싫어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시는 자신들이 애써 은폐하려던 단독성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시를 좋아하게 된다면, 그들은 조금씩 자신이니까 살 수 있는 삶, 자신이니까 느낄 수 있는 감성, 자신이니까 생각할 수 있는 사유를 영위할 것이다.

 

192 "시나 소설을 쓴다는 것은 그것이 곧 그것을 쓰는 사람의 사는 방식이 되는 것이다." 삶과 시가 일치가 되어야만 한다는, 그래서 시도 시인의 삶을 닮아야 하고 시인도 시적 인식에 부응해야 한다는 것은 김수영 스스로가 떠안은 명령의 핵심이다. 그렇다. 시는 자기 삶의 투철한 이해여야만 하고, 반대로 자신의 삶을 근본적으로 개조하는 전망이기도 해야 한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시와 삶. 혹은 예술과 삶은 우리의 온몸을 밀어붙이는 두 다리와 같다. 어느 한 다리가 앞으로 나가면, 다른 한 다리도 뒤따라갈 수밖에 없다. 어떤 경우에는 삶을 자기만의 스타일로 살아 내야만 자기만의 스타일을 가진 시가 나올 수 있다. 혹 다른 경우에는 자기만의 스타일을 가진 시를 쓸 수 있어야만 삶을 자기만의 스타일로 살아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결국 어느 경우나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온몸으로 혹은 시인의 육체로 삶을 밀어붙이면서 그에 부합되는 시를 쓰는 것이다.

IP *.175.25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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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2 07:22:27 *.51.145.193

이 책, 꼭 읽어봐야지...^^

감사합니다. 행님~~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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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2 07:56:29 *.175.250.219

그래. 꼭 읽어봐라. 이 책읽으면서 스승을 생각했고

그리고 너를 생각했다.

나니까 살 수 있는 삶, 나니까 할 수 있는 사랑. 나니까 할 수 있는 예술.

詩가 무엇인지 詩人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을 알게 해준 책.

간만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책을 읽고

간만에 심장이 뛰는 히말라야를 한주에 한꺼번에 보고 읽고 느끼고 한

행복한 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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