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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3월 24일 00시 02분 등록

'오늘 눈부신 하루를 위하여' 중의 한 장이 독서론에 대한 것입니다. 여기 다 시 올려 놓습니다. 다시 올려 놓는 마음을 읽어 주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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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서 묵향이 나면 좋다. 묵향은 선비의 향기다. 그리고 선비는 책을 읽는 사람이다. 옛날의 서책에서는 은은한 묵향이 흘렀으나 요즘 책에서 그것까지 기대할 수는 없게 되었다. 우리는 선비의 나라였지만 이제 사람들은 점점 더 책을 읽지 않는 것 같다. 정보와 지식의 시대에 책을 읽지 않고 어떻게 살아날 수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맹자는 책을 읽는 것을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일󰡑이라고 말했다. 주자는 󰡐도리란 이미 자기 자신 속에 갖추어져 있는 것이니 밖에서 첨가될 수 없다󰡑고 했다. 독서의 길은 자기 속에 이미 있었으나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것이다. 마음을 거두어들이지 못한다면 책을 읽어 무엇을 하겠는가?

그러므로 책을 읽는 것은 늘 󰡐두 번째󰡑 일이 된다. 책을 읽는 것 자체가 목적일 수 없다. 첫번째 목적은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아오는 것󰡑이다. 좋은 책을 읽어 이해하게 되면 이를 통해 원래의 마음을 찾게 된다. 좋은 책을 읽는 것은 경험하는 것이다. 책은 자신의 절실하고도 긴요한 곳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선인들이 알려준 독서의 방법*(주)에 나름대로의 경험을 더해 소개한다. 익혀서 실천하면 평생을 계획하고 살아가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많이 읽어라. 젊은 사람들은 특히 많이 읽어야 한다. 일 년에 100권 정도 읽으면 아주 많이 읽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독서광이다. 50권 정도 읽으면 일 주일에 한 권을 읽는 것이니 꽤 많이 읽는 편이다. 24권 정도 읽으면 2주일에 한 권을 읽는 것이니 적당하다. 보통 사람도 그 정도는 읽을 수 있다. 12권을 읽으면 적게 읽는 편이고, 그보다 더 적게 읽는 사람이 있다면 배우는 데 게으른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에게서는 얻을 것이 없다.

책의 전체를 처음부터 다 읽어야 할 의무는 없다. 책은 사람과 같다. 좋은 책은 어느 페이지를 펼치든 매력이 있다. 책을 많이 읽다 보면 좋은 책과 그렇지 못한 책을 구별할 수 있다. 좋은 책을 구별해내는 것은 일종의 지혜다. 잘못 고른 책에 시간을 쓰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러니 끝까지 다 봐야 할 이유가 없다. 그냥 덮어두었다가 기회가 되면 두어 페이지 다시 훑어보고 그래도 마음을 휘감지 못하면 버려라. 쓰레기는 공간을 차지한다. 마음의 공간이 비지 못하면 좋은 것이 들어와 머물 수 없다. 그러므로 쓰레기는 버리는 것이 좋다.

천천히 읽어라. 책은 음식과 같다. 천천히 씹으면 그 맛이 오래 가지만 대강 씹어 삼키면 끝내 그 맛을 알 수 없다. 공자는 󰡒배우되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고, 생각하되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라고 말했다. 한 번 읽고 다시 한 번 생각하고 한 번 생각하고 다시 읽는 것이 책을 읽는 좋은 방법이다. 명심하라. 생각할 것이 없는 책은 책이 아니다. 그대의 시간을 죽이고 돈을 죽인다. 가장 나쁜 투자다.

좋은 책을 고르면 투철해져라. 조금 읽고 많이 숙고해야 한다. 특히 중년 이후에는 많이 읽는 것보다 조금씩 깊이 생각하는 것이 좋다. 젊은 시절은 기억력이 좋고 정신의 활력이 왕성한 때다. 되도록 많이 읽는 것이 좋은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러나 중년이 되면 기억력이 많이 떨어진다. 반면 이해의 폭과 깊이는 넓고 깊어진다. 그러므로 중년 이후의 독서는 한두 단락을 보더라도 마음을 여유 있게 풀어놓아야지 많이 읽으려고 탐내서는 안 된다.

좋은 책을 읽을 때는 반드시 그 속에 들어가 한바탕 맹렬히 뒤섞여야 한다. 마치 앞뒤의 글이 막혀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것처럼 되어야 한다. 투철해져야 비로소 벗어날 수 있다. 그러니 공부할 양은 적게 하고 공력은 많이 기울여야 한다. 물을 잘 주는 농부는 채소와 과일 하나 하나에 물을 준다. 물을 잘 주지 못하는 농부는 급하고 바쁘게 일을 처리한다. 한 지게의 물을 지고 와서 농장의 모든 채소에 한꺼번에 물을 준다. 남들은 그가 농장을 가꾸는 것으로 볼 것이지만 작물은 충분히 적셔진 적이 없다. 우리의 정신도 이와 같다.

배우는 사람이 늘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예전에 받아들인 가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책을 읽을 때는 우선 의심이 일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의심이 생기면 반드시 의심을 없애야 한다. 책을 읽다 이해할 수 없는 곳에 이르면 옛 견해를 씻어버리고 새로운 의미를 얻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크게 나아질 수 있다.

글을 볼 때 이해한 곳에서 다시 읽어나가면 더욱 오묘해진다. 작가의 언어는 꽃밭과 같다. 멀리서 바라보면 모두 좋게 보이지만, 분명하게 좋은 것은 가까이 다가가서 봐야 보인다. 공부는 자세히 보는 것이다. 책을 읽는 것에 지름길은 없다. 지름길은 사람을 속이는 깊은 구덩이다. 껍질을 벗겨야 살이 보이고 살을 한 겹 다시 벗겨내야 비로소 뼈가 보인다. 뼈를 깎아내야 비로소 골수가 보인다.

책을 읽을 때는 마음을 비우고 자신에게 절실해야 한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한 걸음 물러나 생각하는 것이다. 한 걸음 물러난다는 것은 공부하며 느껴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설명하기 어렵다. 사람들은 책을 볼 때 먼저 자신의 생각을 세우고 저자의 말을 끌어다가 자신의 생각에 맞추어넣는다. 이것은 저자를 읽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신의 생각을 미루어 넓히는 것이다. 한 걸음 물러난다는 것은 스스로 생각을 지어내지 말고 저자의 말을 앞에 놓고 그들의 생각이 어디로 향하는지 보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저자의 뜻에 꿰어맞추지 말고 저자의 뜻을 붙잡으려 해야 한다. 저자의 생각을 알면 크게 진보할 수 있다. 이것이 자기를 없애고 마음을 비운다는 뜻이다.

체득하여 실천하라. 약을 조제하는 것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다. 약을 보기만 해서는 효험을 볼 수 없다. 책도 그렇다. 글은 보기만 해서는 안 된다. 이해한 것을 몸으로 체득한다면 이해하기도 쉽고 실천하기도 쉽다.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다. 화공은 자신이 그린 사람을 알고 있다. 다른 사람은 그림 속의 실제 인물을 모르기 때문에 그림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림이 곧 그 사람일 수는 없다. 이해한다는 것과 체득한다는 것은 이렇게 다르다. 사물에 따라 사물을 보라. 자기를 통해 사물을 보지 말라.

책을 보고도 진전이 없으면 조주화상이 한 말을 기억하라. 󰡒이 노승의 대가리를 잘라버려라.󰡓

나는 꽤 많은 책들을 읽었지만 여러 번 읽어 아끼고 싶은 책은 그렇게 많지 않다. 나는 그 책들은 평생 볼 것이다. 책 한 권을 천천히 여러 번 여러 시기에 걸쳐 평생 읽게 되면 그들의 마음을 조금은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을 이해하면 나 또한 알 수 있다.

생각할 것 없는 쉬운 독서와 킬링 타임의 통속성 속에 익숙해진 우리들에게 배움과 독서의 향기를 선사하는 책은 많지 않다. 그러나 향기를 선사하는 책은 다 읽고 버리는 책이 아니다. 평생을 곁에 두고 봐야 한다. 좋은 책이란 마음이 떨어진 낙엽처럼 바스러질 때, 혹은 바람에 날려 어디로 날아갔는지조차 알지 못할 때 몇 페이지 펼쳐보면 청량함을 느끼게 해준다. 이런 책은 책이라기보다는 향기다.

책을 읽는 것은 저자와 함께하는 여행이다. 마치 붉고 정정한 적송(赤松)들이 즐비한 오솔길을 산책하는 듯하고 대숲이 우거진 암자에 앉아 바람을 쐬는 것 같다. 천천히 책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상쾌하고 시원하다. 그것은 깊은 여행이다. 그와 나 혹은 그녀와 나만의 매우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여행이다. 여행이 그 정도는 되어야 함께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주) 남송 때 여정덕이 주희와 그 제자들의 대화와 강론을 주제별로 엮은 《주자어류》 속에 독서에 관한 방법론이 들어 있다. 여기에 소개된 내용은 이 방법론을 저자의 경험에 비추어 간략히 정리 소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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