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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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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3월 28일 19시 55분 등록
1. 인용문

<오래된 시(詩)와 언(言)>

시적 관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자유로운 관점은 사물과 사물의 연관성을 깨닫게 해줍니다. 한마디로 시적 관점은 사물이 맺고 있는 광범한 관계망을 드러냅니다. 시인은 마땅히 당대 감수성의 절정에 도달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의 개인적 경험 세계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군자 소기무일(君子 所其無逸) : 군자는 무일(편안하지 않음)에 처해야 한다.
먼저 노동의 어려움을 알고 그 다음에 편안함을 취해야 비로소 백성들이 무엇을 의지하여 살아가는가를 알게 된다. 무엇보다도 불편함이야말로 우리의 정신을 깨어 있게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없는 것이지요. 살아간다는 것이 불편한 것이고, 살아간다는 것이 곧 상처받는 것이라는 성찰이 없는 것이지요.

<주역의 관계론>

나는 인간에게 두려운 것, 즉 경외의 대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꼭 신이나 귀신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인간의 오만을 질타하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점을 치는 마음이 그런 겸손함으로 통하는 것이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상(相)과 명(命)이 결정된 운명을 미리 엿보려는 것임에 반하여 점은 선택과 판단에 관한 것입니다.

주역의 개념

개체의 능력은 개체 그 속에 있지 않고 개체가 발 딛고 있는 처지와의 관계 속에서 생성된다고 하는 생각이 바로 주역의 사상입니다. 위(位)가 효(爻, 음양을 나타내는 부호)와 그 효가 처한 자리의 관계를 보는 것임에 비하여 응(應)은 효와 효의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위가 소유의 개념이라면, 응은 덕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저변에서 지탱하는 인간관계와 신뢰가 바로 응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와 응을 설명하면서 비록 실위(失位)하더라도 응이면 무구(無咎), 즉 허물이 없다고 했습니다. 실패한 사람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은 인간관계에 있다는 것이지요.

역 易 궁즉변 窮則變 변즉통 變則通 통즉구 通則久

‘역이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는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주역 사상은 한마디로 변화입니다. 변화를 읽음으로써 고난을 피하려는 피고취락(避苦取樂)의 현실적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주역에는 사물의 변화를 해명하려는 철학적 구도가 있으며 그것이 사물과 사건과 사태에 대한 일종의 범주적 인식이라고 하였습니다.

<논어, 인간 관계론의 보고>

과거의 담론을 현대의 가치의식으로 재단하는 것만큼 폭력적인 것도 없지요. 우리의 고전 독법은 그 시제를 혼동하지 않음으로써 인(人)에 대한 담론이든 민(民)에 대한 담론이든 그것을 보편적 개념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논어의 독자적 영역이라면 숱한 사회학적 담론 중에서 사회의 본질을 인간관계에 두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논어의 화동론(和同論)

‘화’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관용과 공존의 논리입니다. 반면에 ‘동’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인 가치만을 용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된 지(知)는 사람을 아는 것

지인이란 타인에 대한 이해일 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인간’입니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알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애정 없는 타자와 관계없는 대상에 대하여 알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회는 무지한 사회입니다. 진정한 知란 無知를 깨달을 때 진정한 지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학(學)이란?

학즉불고(學則不固): 배우면 완고하지 않게 된다.
학이란 하나의 사물이나 하나의 현상이 맺고 있는 관계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자기 경험에 갇혀서 그것이 맺고 있는 관계성을 읽지 못할 때 완고해지는 것입니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탓하는 것이 이를테면 존재론적 사고라고 한다면, 관계론적 사고는 내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사회의 인간관계

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를 ‘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남’이라고 표현합니다. 짧은 만남 그리고 한점에서의 만남입니다. 만남이라고 하기 어려운 만남입니다. 부딪힘입니다. 우리들의 주변에서 ‘차마 있을 수 없는 일’이 버젓이 자행되는 이유가 바로 이 ‘만남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관계없기 때문에 서로를 배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지속성이 있어야 만남이 있고 만남이 일회적이지 않고 지속적일 때 부끄러움이라는 문화가 정착되는 것입니다.

<맹자의 의(義)>

仁이 개인적 관점에서 규정한 인간관계의 원리라면 義는 사회적 관계로서의 인간관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맹자는 공자의 천명론과 예론(禮論)을 계승하되 천명을 인간의 본성으로 내재화하여 극기에 의한 본성의 회복에서 예를 구합니다.

부중(不中, 화살이 과녁에 맞지 않음)했을 경우 그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 반구제기(反求諸己)의 태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대체로 자기의 작은 실수도 그 원인을 바깥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반구제기는 나를, 내부를 먼저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운동의 원인은 내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개인이든 국가든, 자기반성이 자기 합리화나 자위보다는 차원이 높은 생명운동이 되기 때문입니다.

<노자의 도와 자연>

자연을 카오스로 인식하는 여타 제자백가들과는 반대로 자연을 최고의 질서 즉 코스모스로 인식합니다. 그런 점에서 노자는 근본적으로 反문화적 체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건축의지에 대한 비판입니다.

무위(無爲)와 상대주의

무위란 작위(作爲)를 배제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것입니다. 상대주의는 가치판단의 상대성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판단이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작위이고 그것이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이지요. 차이의 생산이 곧 자연의 분열이며, 자연의 훼손이며 그것이 곧 인위라는 것이지요. 세상 만물은 상대적인 것이며 상호 전화하는 것입니다. 존재론적 체계가 아니라 관계론적 체계입니다.

비어있다는 것이 곧 쓰임이 됩니다.

바퀴살이 모이는 바퀴통은 그속이 ‘비어있음’으로 해서 수레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데 그 ‘비어 있음’으로 해서 그릇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문과 창문을 내어 방을 만드는데 그 '비어 있음’으로 해서 방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따라서 유(有)가 이로운 것은 무(無)가 용(用)이 되기 때문이다.

<장자의 소요>

장자의 사상은 제도개혁만으로는 사회적 과제를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공동체 구성원 개개인의 ‘자유와 해방’에 있다는 것이 장자의 주장입니다. 인간의 삶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어떠한 가치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소요유(逍遙遊)의 의미이고 나아가 장자 사상의 핵심입니다. 장자는 道를 무궁한 생성변화 그 자체로 파악하고 그 도와 함께 소요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지요.

‘불치병자가 밤중에 아기를 낳고 급히 불을 들어 살펴보았다. 급히 서두른 까닭은 자기를 닮았을까 두려워서였다.’ 저는 한참만에야 이 구절의 진의를 알아냈어요. 다름 아닌 각성입니다. 엄정한 자기 성찰입니다. 천하가 길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지요. 자기가 불치병자라는 사실을 냉정하게 깨닫고 자식만이라도 자기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심정이 참담할 정도로 가슴을 적십니다. 엄중한 자기 성찰과 냉철한 문명 비판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지요.

제물론(齊物論)

제(齊)는 하나의 체계 속으로 망라한다는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시비와 진위를 상대적인 것으로 보고 그것을 넘어서고 망라하는 것이 제의 의미입니다. 우리의 인식이란 분별상(相)에 매달리고 있는 분별지(智)라는 사실을 깨닫고, 모든 사물은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물은 서로가 서로의 존재 조건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지요. 모든 사물은 운동합니다. 정지도 운동의 한 형태입니다. 모든 사물은 변화 발전하는 동태적 형식으로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물은 원인이며 동시에 결과입니다. 모든 존재는 인과 과의 관계에 있으며 동시에 과와 인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모든 사물은 이이일(異而一)의 관계, 즉 ‘다르면서도 같은’ 모순과 통일의 관계에 있는 것이지요. 상호 침투하는 것이지요.

<묵자의 겸애와 반전 평화>

춘추전국시대의 상황을 파멸적인 시대라 규정하고 묵자는 ‘겸애(兼愛)’라는 보편적 박애주의와 ‘교리(交利)’라는 상생이론을 선언합니다. 관계의 본질을 상생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를 지침으로 연대라는 실천적 방식을 통하여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순자, 유가와 법가 사이>

순자는 인간의 능동적 참여를 천명합니다. 순자의 능참(能參)은 실천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고 이를 제어하여 활용할 것을 강조합니다. 운명이란 인간의 실천적 노력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순자의 사상체계입니다. 인간에게 선단(善端)은 없지만 인간은 仁 義 法 正을 알 수 있는 知와 이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본성은 교화될 수 있으며 또 교화되어야 한다는 것이 순자의 교육학이며 사회학입니다.

<법가와 천하 통일>

모든 사상은 기본적으로 기존의 관념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개념적 인식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잊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법가사상에서 적극적 의미로 읽어야 하는 것은 개혁성과 법치주의입니다.

<강의를 마치며>

우리가 깨닫는 것, 즉 각(覺)에 있어서 최고 형태는 바로 ‘세계는 관계’라는 사실입니다. 세계의 구조에 대한 깨달음이 가장 중요한 깨달음입니다. 하나의 사물은 그것이 물려받고 있는 그리고 그것이 미치고 있는 영향의 합으로서 그것이 맺고 있는 전후방 연쇄의 총화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우리의 인식이 분별지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 작은 우물을 벗어나기 위한 깨달음의 긴 도정에 나서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회적 변화는 사상투쟁에 의하여 시작되는 것이며 사회적 변화는 사상 체계의 완성으로 일단락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입니다. 새로움이란 단지 이론에 있어서의 새로움이 아니라 입장과 자세에 있어서의 새로움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모든 지적 관심은 우리의 현실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실천적 과제와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담론을 통해 발견한 동양적 삶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가치는 ‘인성의 고양’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인성의 내용이 바로 인간관계이며 인성을 고양한다는 것은 인간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성의 고양은 그런 뜻에서 ‘바다로 가는 여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바다로 가는 겸손한 여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소감

한 권의 책을 읽었다기보다는 한 학기동안 동양철학에 대한 강의를 직접 들은 느낌이었다. 마치 강단 앞에 서 계시고 나는 책상에 앉아 듣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울림을 주고 군더더기 없이 분명하면서 때로는 준엄한 꾸짖음으로 다가왔다.

선생께서는 장자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도통한 백정 포정처럼 ‘관계론’이라는 칼을 들고 분별지(智)로 층층이 쌓인 나의 정신 속을 소리 없이 파고 들어와 이리저리 헤쳐 놓았다. 그럴 때면 마음속에서 나지막한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때로는 애써 칼날을 피하려 하기도 하고 때로는 나의 칼을 들어 저항도 해보았지만 위력이 없었다. 그것은 논리의 위력이 아니라 글 속에서 느껴지는 ‘일관된 인간애’와 ‘실천 중심의 자세’ 때문이었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알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애정 없는 타자와 관계없는 대상에 대하여 알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라는 글 앞에서는 한동안 멈춰 서서 정신과 의사로서의 나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아무튼 선생님의 철저한 자기성찰과 겸애의 정신을 책 곳곳에서 만났다. 내 마음 역시도 모든 강의 으뜸인 바다로 물줄기가 흘러가듯 책속으로 흘러갔다.

선생께서는 신자유주의와 패권적 질서로 대표되는 작금의 자본지배 체제의 위기를 강조하고 새로운 문명사적 담론으로 ‘실천적 관계론’을 이야기한다. 부국강병만이 최고의 목표가 되었던 춘추전국 시대와 현 상황을 유사하게 보고 시대의 위기를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사람을 사람이지 않게끔 하는 것과의 쉼 없는 투쟁을 역설한다. 과거의 지혜를 바탕으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함을 설파한다. 그 사회란 ‘겸애’와 ‘연대’의 가치가 실현될 수 있는 새로운 구성원리로 운영되는 그런 사회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 동안 개인적 변화와 성장에만 주의를 기울이며 살아왔던 내 모습이 어쩌면 절름발이 같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앞으로 잘 달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밖으로 비추어지기에는 자꾸 엇나가며 절뚝거리는 것으로 비추어졌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진정한 변화란 나는 물론이거니와 나와 관계를 맺는 사람들과 사회의 변화를 끌어내거니와 그것을 통해 확인될 수 있음을 느꼈다.

책을 읽고 나서 매일 크고 작은 것이라도 하나 이상씩 깨뜨려 나가는 훈련이 중요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것이라고 믿고 있는 사유와 행위의 집들을 매일 허물고 새로 짓는 작업이 나의 삶에서 일상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느꼈다. 그것이 바로 변화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불을 켜고 거울을 들어 살펴볼 것이다. 어제와 똑 같은 내가 거울에 비치는지 말이다. 그래서 어제와 다름없는 내가 거울 앞에 서 있다면 진정한 부끄러움을 느끼고 싶다. 그리고 주역의 제일 마지막 괘인 미완성의 괘처럼 작은 실수를 받아들이고 끝이 없이 매번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늘 간직하며 살겠다고 다짐해본다.


3. 내가 저자라면

처음 목차를 보고 이 많은 동양고전을 어떻게 한권에 다 담아낼 수 있을까 싶었는데 읽고 보니 우려였다. 과거를 똑같이 읽어내는 것이 아니라 원칙과 입장을 가지고 지혜의 정수를 뽑아내고 새롭게 읽어내는 작업이라 재현이 아닌 또 다른 창조가 아닌가 싶다. 무엇하나 지은 것 없고 풀이한 것뿐이라는 선생님의 부담감도 조금은 덜어내도 될 것 같다.

‘내가 저자라면’이라는 제목으로 이 글을 쓰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고 아직까지 개인적으로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얘기하고 싶다. 선생께서는 和와 同의 주제를 꺼내며 서양의 사상은 지배와 억압의 논리인 同이며 동양의 사상은 공존과 평화의 논리인 和라고 규정짓고 동의 논리에서 화의 논리로 바꾸는 것만이 진정한 변화임을 강조하였다. 물론 사상적 당파성의 필연성을 강조하신 이유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과연 그렇게 분명한 차이를 그을 수 있는지와 서양의 사상이란 것이 모두 척결해야만 하는 대상인인지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그리고 선생께서는 변화와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이며 미래는 과거와 현재의 축적에서 오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선생님의 글 속에는 과거와 미래는 있지만 현재는 없다는 느낌이 든다. 현재란 위기이며 극복해야할 대상으로 느껴질 뿐 그 안에 어떤 창조적 힘과 변화의 동력들이 있다는 것인지 잘 전해지지가 않는다. 상품사회이자 디지털시대인 현실과 그 주역들을 너무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과거의 정신이 단절되었다면 그것이 과연 자본주의와 서구사상의 유입이라는 외부적 요인 때문인지 아니면 과거 안에 내포되어 있는 한계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정신과 의사로서 관계만큼이나 존재의 중요성이 균형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작금 우리가 겪고 있는 혼란과 위기는 ‘관계의 부재’이면서 동시에 ‘자기의 부재’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잃어 버리고 헤매고 있다. 이들은 자신을 찾기 위한 방편으로 관계에 매달린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엉키고 매몰된다. 사람은 자라나면서 자신의 진실하고 개인적인 목소리를 내도록 발달해 나가야 한다. 우리들은 ‘나’라는 존재감을 관계 속에서 발달시켜야만 분열되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며 자기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 즉, 나를 일으켜 세워야 관계도 일으켜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는 순환적이다. 선생님은 너무 관계속에서만 존재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싶은 의문이 들었다.

변화란 끝없는 자기부정의 과정이다. 하지만 자신을 알고 있는 사람만이 자신을 부정할 수 있다. 자신을 채워 본 사람만이 자신을 비울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선생께서는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탓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라고 하였다. 그러한 태도가 관계론에 입각한 사고라고 하였다. 하지만 내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기 전에 내가 나를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리는 존재를 바탕으로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 새로운 사회에 대한 담론을 동양의 과거에서뿐만이 아니라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접점에서도 찾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은 그래서 계속되고 있다. 또 다른 책들이 막 읽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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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일
2005.03.28 21:14:56 *.58.17.111
잘 읽었습니다. "지知란 지인知人"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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