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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승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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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3월 31일 20시 36분 등록
강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
: 신영복 저 / 돌베개 /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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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와 나의 대화: 소고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고전(古典)이란 ‘누구나 읽었기를 바라지만 읽기는 싫은 책’이라고 했다. ‘강의’를 읽으면서 염두에 둔 것은 가장 가슴에 끌리는 고전 한 권을 찾아낸다는 것이었다. 결론은, 이 책에 나온 모든 고전을 다 읽고 싶어졌다. 그래도 순서를 정한다면, 맹자(孟子)와 한비자(韓非子)를 먼저 읽고 싶다. 맹자에 매혹된 이유는, 첫째 글이 ‘논리적’이고, 둘째로 공자(孔子)의 논어(論語)에 비해 ‘사회적’이라는 점, 마지막으로 ‘제자백가의 사상을 가장 폭 넓게 접할 수 있는 고전’이기 때문이다. 한비자의 경우는 미래사관(未來史觀)과 변화사관(變化史觀)으로 대표되는 법가(法家)의 대표적인 사상가이자 고전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또한 신영복이 한비자의 개인적인 면모에 대해 인간적임을 강조한 것도 한 이유다.

마음에 드는 고전을 발견하는 것을 하나의 과제로 설정했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여러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다. 신영복이 고전으로 현대 사회의 행태와 자본주의의 야만성을 비판하는 대목에서 나는 감탄했다. 그의 비판은 때로는 칼처럼 날카로웠고, 어떤 때는 가위처럼 단호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관계를 ‘당구공과 당구공의 부딪침’에 비유했다. 부딪침은 ‘관계’ 없음(無)이다. 또한 그는 ‘자본주의 사회는 상품 사회(商品社會)’이기 때문에 ‘인간관계가 상품 교환이라는 틀에 담긴다’고 비판했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은 교환가치로 표현되고 인간관계는 일회적인 화폐관계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전에 나오는 잘못된 정치와 ‘난세의 징조’는 현대 사회의 그것들을 그대로 묘사한 것 같았다. 이런 깨달음 또한 즐거움이었다.

가장 즐겁게 읽은 부분은 1장과 11장이었다. 대가의 숨결과 통찰력을 바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느낄 수 있었다 함은 내 능력이 깊어서가 아니라 그가 대가이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대가의 공통점 중 하나는 ‘명백한 전문성’이고, 이러한 전문성은 ‘명확한 커뮤니케이션’으로 증명된다. 이것은 말발이나 글발과는 다른 것이다. 대가는 핵심을 꿰뚫는데, 핵심은 단순한 것이기에 대가에게 커뮤니케이션 능력은 부차적인 것이다. 표현 방식은 양념이고 포장이다. 적당히 잘 버무리고 맛스럽게 담으면 여러 사람이 즐길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적어지는 정도의 차이다. 중요한 것은 핵심이고, 양념이나 포장이 핵심을 담지 못하면 부실해질 뿐이다.

1장 서론에서 저자는 고전 강독에 있어 두 가지를 강조한다.

첫째는 어제의 고전을 오늘의 시대에 연결한다는 것이다. 고전 강독에는 ‘오늘의 상황이라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이고 ‘과거는 오래된 미래’다. 놀랍게도 신영복의 과거-현재-미래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역사 속의 영웅들(Heroes of history)’에서 윌 듀랜트(Will Durant)가 보여준 것과 매우 유사하다. ‘역사는 신문과 마찬가지로 이름과 날짜는 바뀌어도 사건은 언제나 똑같다’는 듀랜트의 말과 ‘미래로 가는 길은 오래된 과거에서 찾아야 한다’는 신영복의 관점이 내게는 같은 것으로 보인다. 이뿐만이 아니다. 듀랜트와 신영복은 철학(사상)에 대한 인식에서도 유사함을 보여준다. ‘역사를 쓰는 철학자’로 불리길 원했던 듀랜트는 ‘철학은 논리나 배움이 아니라 이해와 받아들임’이라고 말한 바 있다. 신영복은 동양 사상은 인문주의이고 동양의 사회 구성 원리는 ‘관계론’이라고 말한다. 이해와 받아들임, 이것은 존재론과 관계론 중 어디에 가깝나? 내가 보기엔 분명히 후자다.

둘째는 고전 강독의 전 과정에 화두(話頭)를 걸어놓고 진행한다는 점이다. 화두는 방향이고 중심이다. 방황하게 만들고 고민하게 만들지만, 길을 잃지는 않는다. 도(道)가 ‘길을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면, 화두는 길의 방향이고 생각의 중심이다. 신영복이 내걸은 화두는 ‘관계론(關係論)’이다. 왜? 동양 사상은 인문주의이고 동양의 사회 구성 원리는 ‘관계론’이기 때문이다. 결국, 삶이란 사람과 사람의 만남, 지속적인 만남이고 살면서 가장 필요한 것도 사람이라는 것이다. 관계론이 동양사회와 사상의 정수라면, 서양사회의 핵심은 개별적 존재의 실체성과 그것에 대한 강조, 바로 ‘존재론(存在論)’이다.

요약하면 이렇다. 고전 강독의 의의는 ‘과거를 재조명하고 그것을 통하여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는 것이고, 고전 강독의 관점과 재료는 ‘동양의 관계론’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신영복이 11장 ‘강의를 마치며’에서 전하는 몇 가지 당부를 정리하며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 온고창신(溫故創新). 과거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바탕으로 오늘의 주체가 되어 '지금 여기(here and now)'에서 ‘창신(創新)의 장(場)’을 시작할 것, 그리하여 내일을 밝게 할 것. ‘고전 독법에서 문명 독법으로’ 나아갈 것. 동양고전의 내용보다 동양고전에서 얻은 ‘성찰적 관점’을 중요시 할 것.

* 가슴과 실천. ‘가슴’이야말로 ‘관계론의 장’이라는 점. ‘사상은 감성의 차원에서 모색되어야’하며, 그 이유는 ‘감성과 인격이 사상의 최고 형태’이기 때문이라는 점. ‘실천된 사상만이 나의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 것. ‘책임이 따르는 실천의 형태가 사상의 현실적 존재 형태’라는 것.

* 좋은 사람, 좋은 사회, 좋은 역사. ‘좋은 사람은 좋은 사회, 좋은 역사와 함께 만들어지는 것임’을 가슴에 새길 것. 이것 하나는 지금 바로 새길 것.


책의 소제목 중 하나인 ‘삶을 존중하고 길을 소중히 하고’를 나는 이렇게 바꾸고 싶다. ‘관계를 존중하고 도(道)를 소중히 하고’, 이 책의 메시지를 감히 이 한 마디로 표현하고 싶다.



■ 나의 목소리: 저자되기
신영복은 고전을 읽는 것을 ‘태산준령 앞에 호미 한 자루로 마주 서는 것’에 비유했다. 그런데 내게는 고전 이전에 이 책 역시 그랬다. 산 넘어 강이고 강 건너 산이라고, 윌 듀랜트의 역작 ‘역사 속의 영웅들’에서 받은 감탄을 채 끝내기도 전에 이 책을 만났다. 어찌하오니까.

책의 내용에 대해서 나는 비판할 역량이 없다. 그저 ‘있으면 더 좋았을 것들’ 몇 가지를 적어본다. 내가 저자라면 책의 구성과 형식면에서 독자를 위한 몇 가지 ‘장치’를 달아두었을 것이다. 참고문헌과 더 읽어볼 만한 책들을 묶어서 부록으로 넣었을 것이다. 그리고 ‘찾아보기’나 색인을 뒤에 붙이고, ‘인물 사전’으로 고전에 친숙치 못한 독자를 배려했을 것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외에 대안을 제시하지 않은 것, 고전에 대한 칭찬 일색(단점 없는 고전), 동양 사상=중국 사상(그렇다면 한국적 가치와 사상은?), 민초에 대한 과도한 애정(특히, p285~291에서는 다소 흥분한 듯).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난 비판의 칼날을 갖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솔직히 말하자면, 비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첫째 비판에서 뭔가 얻었던 적이 드물기 때문이다. 꼭 필요한 경우이고 마음을 담아 비판할 수 있다면 직접 솔직하게 하고, 그렇지 않다면 하지 않는다. 대개 단점을 콕 집어내는 것이 더 쉽지만 나는 장점을 발견하는 것이 더 좋다. 어떤 사람과 책의 장점으로 내 스스로를 성찰하고 비판하는 것이 오히려 편하다.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으면 될 뿐이다. 둘째, 내가 할 수 없는 것으로 다른 사람이나 책을 비판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르는 분야라면 배우기에도 벅차다. 나쁜 책은 읽으면서 화내지만, 읽고 나서 배울 것을 하나라도 발견하면 좋아하는 게 나다. 하물며 이런 좋은 책이라면 즐거워서 어쩔 수 없다. 나의 견해를 갖지 못하는 역량 부족을 탓하기 전에 좋은 책을 만난 기쁨이 더 앞선다.

훌륭한 스승을 만나면, 고개를 숙이고 배우기에 힘써야 한다.



■ 저자의 목소리: 인용
- ‘인용’에서 별다른 표기가 없을 경우, 저자의 말이다.
- ‘*’ 표시는 간단한 설명과 나의 느낌이다.

[21] 고전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중요합니다.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고전 독법 역시 과거의 재조명이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당대 사회의 당면 과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고전 독법의 전 과정에 관철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고전 강독에서는 과거를 재조명하고 그것을 통하여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는 것을 기본 관점으로 삼고자 합니다.

[23] ... 유럽 근대사의 구성 원리가 근본에 있어서 ‘존재론’임에 비하여 동양의 사회 구성 원리는 ‘관계론’이라는 것이 요지입니다.

[34] 현실주의란 한 마디로 살아가는 일의 소박한 진실입니다.

[36] 도란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입니다.

[39] 어떤 존재가 특별히 자기를 고집하거나, 비대하게 되면 생성과정이 무너집니다. 생기의 장이 못되는 것이지요. 자연의 개념과 특히 자연을 생기의 장으로 이해하고 있는 동양적 체계에서 과잉 생산과 과잉 축적의 문제는 바로 생성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41] 동양적 구성 원리로서의 관계론에서는 ‘관계가 존재’입니다.

[22] 공자는 시경의 시를 한마디로 평하여 ‘사무사(思無邪)’라 하였습니다. ‘사무사’는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특함이 없다는 뜻은 물론 거짓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시인의 생각에 거짓이 없는 것으로 읽기도 하고 시를 읽는 독자의 생각에 거짓이 없어진다는 뜻으로도 읽습니다. 우리가 거짓없는 마음을 만나기 위해서 시를 읽는다는 것이지요.
* 공자는 명쾌하다.

[59] 사실이란 진실 조각 그림입니다.
[62] 사실이란 결국 진실을 구성하는 조각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의 조합에 의하여 비로서 진실이 창조되는 것이지요.

[72] 한마디로 무일(無逸)은 불편함이고 불편은 고통이고 불행일 뿐이지요. 무엇보다도 불편함이야말로 우리의 정신을 깨어 있게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없는 것이지요. 살아간다는 것이 불편한 것이고, 살아간다는 것이 곧 상처받는 것이라는 성찰이 없는 것이지요.

[77]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식민지 의식의 전형입니다. 권력이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입니다.

[101~102] 나는 그 ‘자리’가 그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상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평소 ‘70%의 자리’를 강조합니다. 어떤 사람의 능력이 100이라면 70 정도의 능력을 요구하는 자리에 앉아야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30 정도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30 정도의 여백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여백이야말로 창조적 공간이 되고 예술적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70 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 100의 능력을 요구받는 자리에 앉을 경우 그 부족한 30을 무엇으로 채우겠습니까? 자기 힘으로는 채울 수 없습니다. 거짓이나 위선으로 채우거나 차엄과 함량 미달의 불량품으로 채우게 되겠지요. 결국 자기도 파괴되고 그 자리도 파탄될 수밖에 없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능력과 적성에 아랑곳없이 너나 할 것 없이 ‘큰 자리’나 ‘높은 자리’를 선호하는 세태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70%의 자리’가 득위(得位)의 비결입니다.

[119] 관계란 다른 것을 향하여 열려 있는 상태이며 다른 것과 소통되고 있는 상태에 다름 아닌 것이지요.

[123] 희망은 고난의 언어이며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고난의 한복판에서 고난 이후의 가능성을 경작하는 방법이 과연 어떤 것이야 하는가...
[124] ... 희망은 현실을 직시하는 일에서부터 키워내는 것임...
* 희망이 필요한 시기, 희망이 빛이 되어 주는 시기는 좋은 상황이 아니라 고난에 처했을 때이다. 희망은 밝음 위에 서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극복하는 것이다. 고난 극복의 가능성에 초점을 맞춘 것이 희망이다.

[129] ‘길’은 도로와 다릅니다. 길은 길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 일터이기도 하고, 자기 발견의 계기이기도 하고, 자기를 남기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129] “목표의 올바름을 선(善)이라 하고 목표에 이르는 과정의 올바름을 미(美)라 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함께 올바른 때를 일컬어 진선진미(盡善盡美)라 합니다.”
[219] 목표와 과정은 서로 통일되어 있는 것... 진선(盡善)하지 않으면 진미(盡美)할 수 없고 진미하지 않고 진선할 수 없는 법입니다. 목적과 수단은 통일되어 있습니다. 목적은 높은 단계의 수단이며 수단은 낮은 단계의 목적입니다.
* 나는 목적이 과정을 지배한다고 생각해 왔다. 이 또한 좁고 가벼운 생각이었다. 진선진미라, 담아 두고 곱씹을만하다.

[130] “역(易) 궁즉변(窮則變) 변즉통(變則通) 통즉구(通則久)” ... “역이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
* 절실함이 변화의 첫 번째 조건이다.

[131] 변화를 사전에 읽어냄으로써 대응할 수 있고, 또 변화 그 자체를 조직함으로써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153] 덕치(德治)가 평화로운 시대 즉 치세(治世)의 학(學)이라고 한다면 행정명령과 형벌에 의한 규제를 중심에 두는 법칙(法則)은 난세(亂世)의 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55~156] 사카구치 안고의 타락론(墮落論)에 의하면 사회적 위기의 지표로 ‘집단적 탈락 증후군’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집단적 타락 증후군도 여러 가지 내용이 있습니다만, 우선 이 교통법규 위반 사례와 같이 모든 사람이 범죄자라는 사회적 분위기가 그중의 하나입니다. 적발된 사람만 재수 없는 사람이 되는 그러한 상황입니다. 또 한 가지는 유명인의 부정이나 추락에 대하여 안타까워하는 마음 대신에 고소함을 느끼는 단계가 있다는 것이지요. ... 타인의 부정이 오히려 자신의 부정을 합리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이러한 상황에서는 부정의 연쇄를 끊을 수 있는 전략적 지점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나는 사회의 본질은 부끄러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일회적인 인간관계에서는 그 다음을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사회란 지속적인 인간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사회성 자체가 붕괴한 상태라고 해야 하는 것이지요.
* 현재의 우리 시대가 바로 이렇다. 해결책은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지속적인 인간관계의 형성이 중요하다. 여기에 하나 더해야할 것 같다. 바로 양심이다. 부끄러움은 어디서 나오나? 내가 보기엔 지속적인 관계도 중요하지만, 부끄러움은 양심에 있다.

[198] 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를 ‘당구공과 당구공의 만남’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짧은 만남 그리고 한 점에서의 만남입니다. 만남이라고 하기 어려운 만남입니다. 부딪침입니다.
* 손이 또 무릎으로...

[199~200] 지(知)란 진리의 존재를 파악한 상태이고, 호(好)가 그 진리를 아직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한 상태임에 비하여 낙(樂)은 그것을 완전히 터득하고 자기 것으로 삼아서 생활하고 있는 경지로 풀이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상적인 교육은 놀이와 학습과 노동이 하나로 통일된 생활의 어떤 멋진 덩어리(일감)를 안겨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무엇을 궁리해가며 만들어내는 과정이 바로 그러한 것인데 즐거움은 놀이이고 궁리는 학습이며 만들어내는 행위는 노동이 되는 것이지요.
[200] 지를 대상에 대한 인식이라고 한다면 호는 대상과 주체 간의 관계에 관한 이해입니다. 그에 비하여 낙은 대상과 주체가 혼연히 일체화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가 분석적인 것이라면 호는 주관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낙은 주체와 대상이 원융(圓融)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200] 지는 역지사지하지 않고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호는 대상을 타자라는 비대칭적 구조 속에 가두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와 호를 지양한 곳에 낙이 있다고 생각하지요. ... “낙은 관계의 최고 형태”인 셈입니다. 그 낙의 경지에 이르러 비로소 어떤 터득이 가능한 것이지요.
* 극복하지 않고 즐길 수 있는가? 나는 극복하지 않으면 즐길 수 없다고 생각해 왔다. 지와 호를 넘어야 낙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잘 모르겠음. 이로 보아 터득의 경지는 멀고도 없었음.

[236]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얼굴 없는 생산과 얼굴 없는 소비로 이루어진 구조입니다. ... 엄격히 말해서 만남이 아니지요. 관계가 없는 것이지요. 관계없기 때문에 서로를 배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2차대전 이후 전쟁이 더욱 잔혹해진 까닭이 바로 보지 않는 상태에서 대량 살상이 가능한 첨단 무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240~241] 자본주의 사회는 상품 사회(商品社會)입니다. 상품 사회는 그 사회의 사회적 관계(social relations)가 상품과 상품의 교환으로 구성되어 있는 사회입니다. 당연히 인간관계가 상품 교환이라는 틀에 담기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사람은 교환가치로 표현되고, 인간관계는 상품 교환의 형식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게 되는 제도입니다.
[240] ... 자본주의 사회란 사회의 일반적 부문에 있어서의 인간관계가 일회적인 화폐관계로 획일화되어 있는 사회입니다.
* 인간관계가 ‘일회적인 화폐관계로 획일화’된다면, 그것이 지금의 현실이라면...

[239] 나는 사회의 본질은 인간관계의 지속성이라고 생각합니다.
[243] 지속성이 있어야 만남이 있고, 만남이 일회적이지 않고 지속적일 때 부끄러움(恥)이라는 문화가 정착되는 것입니다. 지속적 관계가 전제될 때 비로소 서로 양보하게 되고 스스로 삼가게 되는 것이지요. ... 지속적인 인간관계가 없는 상태에서는 어떠한 사회적 가치도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309] “우물 안 개구리(井底䵷)에게는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 한곳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메뚜기에게는 얼음을 이야기할 수 없다. 한 철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 장자(莊子) 외편(外篇) 추수(秋水) 중에서

[336~337] * 제나라 환공과 목수 윤편의 대화
* 내게는 책의 한계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의 중요하다는 메시지로 와 닿는다.

[376] “큰 나라가 약소국을 공격하고, 큰 가(家)가 작은 가를 어지럽히고, 강자가 약자를 겁탈하고, 다수가 소수를 힘으로 억압하고, 간사한 자가 어리석은 자를 속이고, 신분이 높은 자가 천한 사람들에게 오만하게 대하는 것 이것이 천하의 해로움이다.”
- 묵자(墨子) 겸애(兼愛) 중에서
* 용어 밑의 본질로, 오늘의 현실과 비교하면 딱 맞는다.

[428] “난세의 징조는 그 옷이 화려하고, 그 모양이 여자 같고, 그 풍속이 음란하고, 그 뜻이 이익을 좇고, 그 행실이 잡스러우며, 그 음악이 거칠다. 그 문장이 간사하고 화려하며, 양생(養生)에 절도가 없으며, 죽은 이를 보내는 것이 각박하고, 예의를 천하게 여기고, 용맹을 귀하게 여긴다. 가난하면 도둑질을 하고, 부자가 되면 남을 해친다. 그러나 태평 시대에는 이와 반대이다.”
- 순자(荀子) 악론(樂論)
* 순자가 말하는 난세(亂世)의 징조. 예나 지금이나 대개 통하는 말이다.

[462] 임금을 죽인 것이 36번, 나라를 멸망시킨 것이 52번이었습니다.
* 춘추전국시대가 어떤 사회였는지, 이 한 구절로 알 수 있다.

[475] 하나의 사물은 그것이 물려받고 있는 그리고 그것이 미치고 있는 영향의 합으로서, 그것이 맺고 있는 전후방 연쇄(link-age)의 총화라 할 수 있습니다.

[505] 창신(創新)이 어려운 까닭은 그 창신의 실천 현장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현실은 우리의 선택 이전에 주어진 것이며 충분히 낡은 것입니다. 현실은 과거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지요. 과거가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 현실을 창신의 터전으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이 유연한 대응을 요구하는 것이지요. 과거란 지난 것이거나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는 흘러가고 미래는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는 다 같이 그 자리에서 피고 지는 꽃일 따름입니다.
* 변화 또한 그렇다. 과거를 이해하고 거기서 배우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을 현재에 적용하는 것은 또 다른 어려움이다. 변화의 접근법이 획일화될 수 없으며, 획일화된 접근법으로는 변화에 성공할 수 없다. 온고창신(溫故創新), 창신(創新)의 장(場), 이 말이 참 좋다.

[505~506] 우리의 고전 독법은 관계론의 관점에서 고전의 의미를 재조명하는 담론이었습니다. 이러한 담론을 통하여 우리가 발견한 가장 중요한 것은 동양적 삶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가치는 ‘인성의 고양’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인성의 내용이 바로 인간관계이며 인성을 고양한다는 것은 인간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 인성은 이웃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며 그 시대의 아픔을 주입함으로써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좋은 사람은 좋은 사회, 좋은 역사와 함께 만들어지는 것임을 간과하지 않는 것이지요. 인성의 고양은 그런 뜻에서 ‘바다로 가는 여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바다로 가는 겸손한 여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 개인, 이웃, 조직, 시대. 그 안의 관계.

[508] 가슴을 강조하는 것은 가슴이 바로 관계론(關係論)의 장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거대한 장이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가슴이기 때문입니다.

[509~510] 첫째, 사상은 감성의 차원에서 모색되어야 합니다. ... 감성과 인격은 이를테면 사상의 최고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상은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것입니다. 단지 주장했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의 사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입니다. 말이나 글로써 주장하는 것이 그 사람의 사상이 되지 못하는 까닭은 자기의 사상이 아닌 것도 얼마든지 주장하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사상의 존재 형식은 담론이 아니라 실천인 것입니다. ... 책임이 따르는 실천의 형태가 사상의 현실적 존재 형태라고 하는 것이지요.

[510] 상상력은 작은 것을 작은 것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작은 것은 큰 것이 단지 작게 나타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상상력입니다. 하나의 사물이 맺고 있는 거대한 관계망을 깨닫게 하는 것이 바로 상상력이며 그것이 바로 시서화(詩書畵)의 정신입니다. 시서화로 대표되는 예술적 정서는 우리의 경직된 사고의 틀을 열러주고, 우리가 갇혀 있는 우물을 깨닫게 합니다.

[512~513] 산에는 새 한 마리 날지 않고
길에는 사람의 발길 끊어졌는데
도롱이에 삿갓 쓴 늙은이
홀로
눈보라 치는 강에 낚시 두리웠다.
千山鳥飛絶(천산조비절) 萬逕人滅(만경인종멸)
孤舟蓑笠翁(고주사립옹) 獨釣寒江雪(독조한강설)
- 유종원(柳宗元), 강설(江雪)
* 생생하구나!

[513~515] * 유종원의 종수곽탁타전(種樹郭橐駝傳)의 전문 찾아서 읽을 것.
IP *.76.24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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