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손수일
  • 조회 수 3411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05년 4월 1일 01시 12분 등록
일연 지음/김원중 옮김/을유문화사


Ⅰ. 인용


[문무왕 법민]

서울에 성곽을 쌓으려고 진리(眞吏)에게 명령을 내렸는데, 이 때 의상법사가 이 소식을 듣고 글을 보내 이렇게 말하였다.

“왕의 정치와 교화가 밝으면 비록 풀이 가득한 언덕에 땅을 그어 성을 만들더라도 백성들이 감히 넘지 못하고, 재앙을 없애고 복이 오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와 교화가 밝지 못하면 비록 큰 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재해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왕이 그 역사를 중지시켰다.


[수로부인]

성덕왕 대에 순정공(純貞公)이 강릉 태수로 부임하여 가다가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었다. 옆에는 바위가 마치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는데, 높이가 천 길이나 되었고 위에는 철쭉이 활짝 피어 있었다. 순정공의 부인 수로(水路)가 그것을 보고서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누가 내게 저 꽃을 꺾어 바치겠소?”

따르던 사람이 말하였다.

“사람이 오를 수 없는 곳입니다.”

다들 나서지 못하였으나 옆에서 암소를 끌고 지나가던 노인이 부인의 말을 듣고는 그 꽃을 꺾어 와서 가사(歌詞)도 지어 함께 바쳤다.

그 노인이 어떤 사람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다시 이틀째 길을 가다가 또 임해정(임해(臨海亭)에서 점심을 먹는데, 바다의 용이 갑자기 부인을 낚아채 바닷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공이 넘어지면서 발을 굴렀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또다시 한 노인이 말하였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여러 사람의 말은 무쇠도 녹인다’ (*註)고 하니, 바닷속 짐승인들 어찌 여러 사람들의 입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경내의 백성들을 모아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지팡이로 강 언덕을 두드리면 부인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공이 그 말에 따르니, 용이 부인을 모시고 바다에서 나와 (그에게) 바쳤다. 공이 부인에게 바닷속의 일을 물었다. 부인은 이렇게 말하였다.

“일곱 가지 보물로 꾸민 궁전에 음식들은 맛이 달고 매끄러우며 향기롭고 깨끗하여 인간 세상의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부인의 옷에도 색다른 향기가 스며 있었는데, 이 세상에서는 맡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수로부인은 절색이어서 깊은 산이나 큰 못 가를 지날 때 마다 신물(神物)에게 빼앗겼으므로 여러 사람이 해가(海歌)를 불렀다. 그 가사는 이렇다.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놓아라.
남의 아내를 약탈해 간 죄 얼마나 큰가?
네 만약 거역하고 내다 바치지 않으면
그물을 쳐 잡아서 구워먹으리라.


노인이 바친 헌화가(獻花歌)는 이렇다.

자줏빛 바위가에
암소 잡은 손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겠나이다.

------------------
*註)중구삭금(衆口金+樂金): 뭇 사람의 말은 굳은 쇠라도 녹인다는 뜻으로, 여러 사람의 말은 무섭다는 말.
------------------


[충담이 지은 「안민가」와 「찬기파랑가」>]


「안민가」는 다음과 같다.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사랑을 주는 어머니라.
백성을 어리석은 아이로 여기면,
모든 백성들이 사랑을 알리라.

꾸물거리며 사는 중생,
이들을 먹여 다스려라,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라면 하면
이 나라가 보전될 줄 알리라.


「찬기파랑가」는 다음과 같다.

열어젖히자 벗어나는 달이
흰구름 좇아 떠간 자리에
백사장 펼친 물가에
기파랑의 모습이 잠겼어라.
일오천(逸烏川) 자갈벌에서
낭의 지니신 마음 좇으려 하네,
아! 잣나무가지 높아
서리 모를 씩씩한 모습이여!


[처용랑과 망해사]

처용이 밨에서 집에 돌아와 두 사람이 자고 있는 것을 보고는 노래를 지어 부르고 춤을 추다가 물러났는데,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동경(東京) 밝은 달에 밤새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구나.
둘은 내 것이지만 둘은 누구의 것인가.
본래 내 것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 하리.

그 때 역신이 형체를 드러내 처용 앞에 꿇어앉아 말하였다.
“제가 공의 처를 탐내어 지금 범했는데도 공이 노여워하지 않으니 감탄스럽고 아름답게 생각됩니다. 맹세코 오늘 이후로는 공의 형상을 그린 그림만 보아도 그 문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이로 인해 나라 사람들이 문에 처용의 형상을 붙여 사악함을 물리치고 경사스런 일을 맞이하려고 하였다.


[조신의 사랑]

옛날 신라가 서울이었을 때, 세달사(世達寺)의 장원이 명주 날리군에 있었다. 본사에서는 승려 조신(調信)을 보내 장원을 맡아 관리하게 하였다.

조신은 장원에 이르러 태수 김흔(金昕)의 딸을 깊이 연모하게 되었다. 여러 번 낙산사의 관음보살 앞에 나가 남몰래 인연을 맺게 해 달라고 빌었으나 몇 년 뒤 그 여자에게 배필이 생겼다. 조신은 다시 관음 앞에 나아가 관음보살이 자기의 뜻을 이루어주지 않았다고 원망하며 날이 저물도록 슬피 울었다. 그리고 그리워하다 지쳐 얼마 뒤 선잠이 들었다. 꿈에 갑자기 김씨의 딸이 기쁜 모습으로 문으로 들어오더니, 활짝 웃으면서 말하였다.

“저는 일찍이 스님의 얼굴을 본 뒤로 사모하게 되어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부모의 명을 어기지 못해 억지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었지만, 이제 (죽어도) 같은 무덤에 묻힐 벗이 되고 싶어서 왔습니다.”

조신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며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40여 년을 살면서 자식 다섯을 두었다. 그러나 집이라곤 네 벽뿐이요 콩잎이나 명아주국 같은 변변한 끼니도 댈 수 없어 마침내 실의에 찬 나머지 가족들을 이끌고 사방으로 다니면서 입에 풀칠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10년 동안 초야를 떠돌아다니다 보니 옷은 메추라기가 매달린 것처럼 너덜너덜해지고 백 번이나 기워 입어 몸도 가리지 못할 정도였다. 강릉 해현령을 마침 지날 때 열다섯 살 된 큰 아들이 굶주려 그만 죽고 말았다. 조신은 통곡하며 길가에다 묻고, 남은 네 자식을 데리고 우곡현(羽曲縣)에 도착하여 길가에 띠풀을 엮어 집을 짓고 살았다. 부부가 병들어 굶주려 일어날 수 없게 되자, 열 살 난 딸아이가 돌아다니며 구걸을 하였다. 그러다가 마을의 개에 물려 부모 앞에서 아프다고 울며 드러눕자 부모는 탄식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부인은 눈물을 씻더니 갑자기 말하였다.
“내가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는 얼굴도 아름답고 꽃다운 나이에 옷차림도 깨끗했습니다. 한 가지 맛있는 음식이라도 당신과 나누어 먹었고, 몇 자 되는 따뜻한 옷감이 있으면 당신과 함께 해 입었습니다. 나와 산 지 50년에 정분은 가까워졌고 은혜와 사랑이 깊었으니 두터운 인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몇 년 이래로 쇠약해져 병이 날로 더욱 심해지고 굶주림과 추위도 날로 더해오는데, 곁방살이에 하찮은 음식조차 빌어먹지 못하여 이 집 저 집에서 구걸하며 다니는 부끄러움은 산과 같이 무겁습니다. 아이들이 추위에 떨고 굶주려도 돌봐줄 수가 없는데, 어느 겨를에 사랑의 싹을 틔워 부부의 정을 즐길 수 있겠습니까? 젊은날의 고왔던 얼굴과 아름다운 웃음도 풀잎 위의 이슬이 되었고, 지초와 난초 같은 약속도 회오리 바람에 날리는 버들 솜이 되었습니다. 당신은 내가 있어서 근심만 쌓이고, 나는 당신 때문에 근심거리만 많아지니, 곰곰이 생각해보면 옛날의 기쁨이 바로 근심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당신이나 나나 어째서 이 지경이 되었는지요. 여러 마리의 새가 함께 굶주리는 것보다는 짝 잃은 난새가 거울을 보면서 짝을 그리워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힘들면 버리고 편안하면 친해지는 것은 인정상 차마 할 수 없는 일입니다만 가고 멈추는 것 역시 사람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헤어지고 만나는 데도 운명이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을 따라 이만 헤어지기로 합시다.”

조신이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각기 아이를 둘씩 나누어 데리고 떠나려 하는데 아내가 말하였다.

“저는 고향으로 향할 것이니 당신은 남쪽으로 가십시오.”

그리하여 조신은 이별을 하고 길을 가다가 꿈에서 깨어나니, 희미한 등불이 어른거리고 밤이 깊어만 가고 있었다.

아침이 되자 수염과 머리카락이 모두 하얗게 세어 있었다. 조신은 망연자실하여 세상일에 관심이 전혀 뜻이 없어졌다. 고달프게 사는 것도 이미 싫어졌고 마치 100년 동안의 괴로움을 맛본 것 같아 세속을 탐하는 마음도 얼음 녹듯 사라졌다. 그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부처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깊이 참회하는 마음이 끝이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해현으로 가서 아이를 묻었던 곳을 파 보았더니, 그것은 바로 돌미륵이었다. 물로 깨끗이 씻어서 가까운 절에 모시고 서울로 돌아와 장원을 관리하는 직책을 사임하고 개인 재산을 털어 정토사(淨土寺)를 짓고서 수행하였다. 그 후에 아무도 조신의 행적은 알지 못하였다.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이 전을 읽고 나서 책을 덮고 지난 일을 곰곰이 돌이켜보니, 어찌 반드시 조신의 꿈만 그러하겠는가? 지금 모든 사람이 인간 세상의 즐거움을 알아 기뻐하면서 애를 쓰지만 특별히 깨닫지 못할 뿐이다.”

따라서 노래를 지어 경계한다.

즐거운 시간은 잠시뿐 마음은 어느새 시들어
남 모르는 근심 속에 젊던 얼굴 늙었네.
다시는 좁쌀밥 익기를 기다리지 말지니,
바야흐로 힘든 삶 한 순간의 꿈인 걸 깨달았네.
몸을 닦을지 말지는 먼저 뜻을 성실하게 해야 하거늘
홀아비는 미인을 꿈꾸고 도적은 장물을 꿈꾸네.
어찌 가을날 맑은 밤의 꿈으로
때때로 눈을 감아 청량(淸凉)의 세계에 이르는가.


[월명의 「제망매가」]

월명사는 죽은 누이를 위해 재를 올리면서 향가를 지어 제사를 지내는데, 문득 회오리 바람이 일어나더니 종이돈[紙錢]을 날려 서쪽으로 사라지게 하였다. 그 향가는 다음과 같다.

삶과 죽음의 길은
여기 있으니 두려워지고
나는 간다는 말도
못 다 이르고 갔느냐.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한 가지에 나서
가는 곳을 모르는구나!
아아! 미타찰(彌陀刹)에서 만날 나
도 닦으며 기다리련다. (03312005)



Ⅱ. 소감

『삼국유사』는 5권 9편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1은 왕력(王歷) 제1과 기이(紀異) 제1, 권2는 권1 기이의 후속편, 권3은 흥법(興法) 제3과 탑상(塔像) 제4, 권4는 의해(義解) 제5, 권5는 신주(神呪) 제6, 감통(感通) 제7, 피은(避隱) 제8, 효선(孝善) 제9로 이루어져 있다.

『삼국유사』는 전기체(傳記體)의 기록으로서 저자 일연(一然)이 승려의 손으로 쓴 일종의 야사(野史)라고 할 수 있다. 기이(紀異)편이 고조선 이후 남북의 여러 부족국가와 신라•고구려•백제•가락국(駕洛國) 등 역대 여러 왕들에 관한 기록이자 우리 민족 역사에 관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면, 흥법(興法)편에서 효선(孝善)편까지는 모두 불교와 승려의 행적에 관한 기록들이다.

『삼국유사』가 없었더라면 역사, 지리, 문학, 미술, 고고, 사상, 종교 등 우리 고대 문화의 면모를 제대로 알 수 없었을 거라는 말이 있는데, 책을 읽고 난 후 그 말에 대해 공감하는 마음이었다. 『삼국유사』는 우리들의 소중한 사료이자 기록임을 알 수 있었으며, 우리네 옛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마음을 엿보게 하고 상상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전체적인 구성과 내용 면에 있어서 아쉬운 점 또한 적지 않았다. 저자 일연이 고대(古代)의 신화전설을 원형 그대로 기술한 듯이 보이는 고조선에서부터 고구려•신라•백제 등을 같은 민족이란 개념에서 서술했다고 여겨지는 「기이(紀異)」편까지는 흥미롭고 매혹적인 이야기들로 가득했지만, 이후 기술되는 「흥법(興法)편」에서 「효선(孝善)편」까지는 책을 읽는데 있어 많은 어려움을 느껴야 했다. 주로 그 당시의 불교에 관한 기록들은 허황되고 비현실적인 요소들이 많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에 곤란했던 것이다.

고전에 대해서는 그 시절의 시제로 당시의 시대 상황을 고려해야 할 것이며, 과거의 담론을 현재의 가치 의식으로 재단한다는 것은 위험한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책의 역사적 가치와 몽고 침략이라는 당시의 민족적 위기상황을 고려해 볼 때, 그리고 당대(當代)의 지식인이라는 저자의 위치를 감안해 볼 때, 「기이(紀異)」편외의 나머지 부분들은 너무 안이한 서술들로 채워지지 않았나 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Ⅲ. 내가 읽는 『삼국유사』(저자의 입장이라면)

확실히 아쉬운 것은 신라에 대한 역사 서술의 비중만큼 백제와 고구려에 관한 기록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일연이 존재하던 그 당시라면 전 시대인 삼국에 대한 기록과 시대상을 좀 더 생생하고 자세하게 반영하여 전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신라에 대한 서술 비중만큼이나 백제와 고구려에 대한 이야기들을 좀 더 수집해서 기술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또한, 일연은 기이(紀異) 제2(第二), [김부대왕] 편에서 다음과 같은 기술을 하고 있다.

사론(史論)에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나 불법을 숭상하며 그 폐단을 알지 못하였고, 심지어는 여염 마을에까지 탑과 절을 즐비하게 세우고, 백성들은 달아나 승려가 되어 군사나 농민이 점점 줄어들고 나날이 쇠미해졌으니, 어찌 나라가 어지럽지 않겠으며 또 망하지 않겠는가?......”

저자 일연은 신라 말기의 상황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가 왜 망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당대 지식인으로서의 비판적 시각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왜 위 사론(史論)에서 기술했던 것과 같은 종류의 이야기들을 『삼국유사』에서(주로 '흥법(興法)'편에서 '효선(孝善)'편까지) 되풀이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일까?

당시의 시대 상황이 민족적 위기 상황이자 신라 말기와 같은 사회적 혼란과 병폐들이 드러나고 있을 고려 말기 시점이라면,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지난 시대를 인식하고 기술하는 눈이 좀 더 치열했어야 하지 않을까.

이를테면, 같은 불교와 승려에 대한 기술이라 하더라도 원효 등의 불교에 대한 당시의 학설이나 논쟁을 소개한다든지, 민족의식을 고취할 수 있는 진취적인 이야기와 교훈적인 일화 등을 소개함으로써, 당시의 의식과 철학을 한 단계 더 고양할 수 있는, 그런 방향으로 서술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옛일을 돌아봄으로써 오늘을 새롭게 한다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정신이 아니겠는가. 저자 일연은 그의 존재에서 비롯되는 그의 의식의 한계를 결국 뛰어넘지 못한 것이 아닐까.

삼국유사에서 엿보이는 이러한 치열하지 못한 안목들이 당시의 지식층과 지배층의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라면,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그 당시 지배 체제 변혁은 필요할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결국 유학을 주된 이데올로기로 삼는 조선이 일어설 수 밖에 없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IP *.241.103.105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