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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4월 4일 21시 29분 등록


그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사람은
그가 장차 어디로 가야할지를 알 수 없습니다.
- 도르테 죌레 (신학자, 1929-2003) -




< 책 속의 인용문 >

1.들어가는 말
내게 있어서 역사란 철학의 한 부분이다. 철학은 삶과 현실의 광범위한 전망을 얻으려는 시도이다. 당신은 적어도 두 가지 방식으로 광범위한 전망을 얻을 수 있다. 하나는 과학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이다. 이는 공간 속의 사물보다는 오히려 시간 속의 사건들을 공부하는 것이다. 역사는 시간속의 사건들을 탐구함으로써 철학적 전망을 얻으려는 시도이다. 나는 자신이 역사를 쓰는 철학자라고 생각한다.

2. 문명이란 무엇인가
인류는 땅을 경작하는 농부로 정착 생활을 한 것보다 40배나 긴 세월을 사냥꾼으로 살았다. 97만 5천 년의 이 세월동안 인류의 기본적인 성향들이 만들어졌고 아직도 그대로 남아 매일 문명에 도전하고 있다. 먹이를 구하면 아마도 십중팔구는 배가 터지도록 먹었을 것이다. 언제나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했다. 남자는 대단히 빛나는 존재일지는 몰라도 근본적으로 따지면 자궁이며 인간 종족의 주류인 여자에게 공물을 바치는 존재다. 남자는 여자가 마지막으로 길들인 동물로, 마지못해 부분적으로만 문명화되었다. 남자는 천천히 여자에게서 사회적 특질을 배워 익혔다. 이제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자질이 미덕이 되었다. 내 생각에 이것이 바로 문명의 시작이다. 즉, 문명이란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자연과 문명사이의 깊고도 끈질긴 갈등도 함께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아직도 자연 상태, 즉 사냥꾼 단계에 머물러 있다. 국가는 곧 우리 자신이며 조직과 방어를 위해 증진된 우리의 추진력이다. 국가의 탐욕은 미래의 필요와 결핍에 대한 방어다. 오직 외부에 대해 안전을 느낄 경우에만 국가는 내부의 필요성에 주의를 기울인다. 개인은 효율적으로 보호해 주는 공동체에 속해 안전해졌을 때 문명화 되었다. 하지만 문명은 사냥꾼 천성을 질식시키려 하지 않았다. 어떤 경제 체제도 축적본능에 호소하지 않고는, 그리고 훌륭한 보상을 통해 더 우수한 능력을 이끌어내지 않고는 유지될 수 없다는 사실을 문명은 받아들였다. 어떤 개인도 어떤 국가도 자기 보존을 위해 싸우려는 의지가 없이는 오래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방종은 보통 그 반대를 만들어낸다. 역사상 가장 빈번하게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장면은 이교적인 방종의 시대에 이어 청교도적인 억제와 도덕적 규율의 시대가 뒤따라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에는 방종과 그 반대사이의 이러한 진자 운동보다 더 즐거운 전망이 있다. 여전히 수많은 장애물을 넘어 생명의 흐름을 이끌어온 것은 평범한 가족의 건강함과 남자들과 여자들의 노동 그리고 사랑이다. 이 소란스럽고 더러운 강 위에 부조리함과 고통 한가운데에 진짜 신의 도시가 감추어져 있다. 우리에게 도전해 오는 악을 향해 눈을 감을 필요는 없다. 우리는 용기를 잃지 말고 그들을 가르치려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의 업적과 우리가 물려받은 장엄한 유산에서 힘을 얻을 수 있다.

3. 공자와 추방당한 신선
길(道)이란 공평하고 인간적이지 않으며 합리적인 사물의 질서다. 탄생, 삶, 죽음의 리듬을 지닌 인간의 삶은 우주 리듬의 일부다. 철학적 비활동 상태인 무위는 사물이 나아가는 자연의 흐름에 개입하지 않음을 뜻한다. 저항이 일어났을 때 더 지혜로운 방식은 싸우거나 다투거나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다. 조용히 물러나서 굴복하고 참음으로써 마침내 이긴다. 중국인의 사유는 성자가 아니라 현자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래서 선의가 아니라 지혜를 주로 이야기한다.

4. 붓다에서 인디라 간디까지
영혼이 모든 이기심에서 자유로워질 때까지 영혼은 되풀이해서 다시 태어나게 된다. 해탈이란 죽음 뒤의 하늘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기심을 극복한 고요한 상태이다. 우리 자신이 전체의 일부라는 것을 본다면, 전체의 틀 안에서 우리 자신을 개선하고 우리의 소망을 바꾼다면, 우리의 개인적인 실망과 패배, 비탄과 고통, 피할 수 없는 죽음 등이 더는 이전처럼 우리를 슬프게 하지 않을 것이다.

종교가 미덕과 축복뿐 아니라 공포심으로 설교하지 않는다면 인류의 무법적인 개인주의를 통제할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5. 피라미드에서 이크나톤까지
이집트 문명은 3,809년 동안이나 존속하였다. 이집트 사람들은 자기 속에 <카>라고 부르는, 자기와 똑같은 영적인 짝이 들어 있다고 여겼다. 피라미드에는 야만적으로 원시적인 요소가 있다. 그토록 난폭하게 엄청난 크기를 만들어낸 일과 영원성을 향한 공허한 갈망이 그것이다.

6. 구약 성서의 철학과 시
메시아란 다윗의 후손 중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뜻하는 말로 그가 다윗 왕이 통치하던 시대의 영광과 행복을 다시 만들어낼 것을 소원하다는 뜻이었다. 칼라일은 욥기를 가리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헌의 하나라고 하였다. 이는 기본서로 모든 신학체계를 괴롭히는 어두운 질문을 다루고 있다. ‘불의가 그토록 자주 승리한다면 어떻게 이 세상을 정의와 사랑의 신이 다스리는 세상이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하는 질문이다.

철학은 전체의 빛 속에서 부분을 탐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주 큰 전체의 아주 작은 부분이라는 사실이 그 최초의 교훈이다. 부분과 전체의 조화라는 것은 아마도 건강, 아름다움, 진실, 지혜, 도덕성, 행복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정의가 될 것이다.

7. 페리클레스에 이르는 길
플라톤 보다 300년 전에 헤라클레이토스는 신비로운 경구를 사용해서 변화의 철학을 설명하였다. 두 가지 생각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변화가 보편적이라는 것과 에너지는 파괴할 수 없이 영속한다는 생각이었다. 지속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모든 것은 변한다. 모든 것은 언제나 현재의 존재이기를 중지하고 새로운 다른 것으로 된다. ‘모든 것은 흘러간다.’ ‘흐르는 강의 동일한 물 속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았으니 곧 그가 <불>이라고 부른 것이었다. 이 말로 그는 <힘>이나 <에너지>를 뜻하게 되었다. 개별적인 영혼은 생명의 끊임없이 변화하는 불꽃의 일시적인 혀일 뿐이다. 인간은 이 불꽃 속에서 변하는 하나의 계기일 뿐이다.
8. 아테네의 황금시대
그리스 예술은 이성을 눈에 보이게 만든 것이다. 질서와 균형 비율, 형태와 리듬, 정밀성과 명료성에 대한 감각은 그리스 문화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예술이란 삶에 종속된 것이며, 삶은 모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이라고 생각하였다. 실용성이 없는 아름다움에 반대하는 건강한 공리주의 성향을 가졌다.

9. 플라톤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까지
역사는 신문과 마찬가지로 이름과 날짜는 바뀌어도 사건은 언제나 똑같다.

플라톤은 공산주의적 유토피아를 생각하지만 이는 실용성이 없다고 선언했다. 그는 두 번째로 좋은 국가의 초상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모두에게 공개된 교육 체계를 만들고, 교육적 맷돌의 가장 힘든 시련을 거쳐 살아남은 50세 이상의 <보호자>들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이다. 이들은 공산주의의 섬이 되어 사방을 둘러싼 자유로운 기획의 바다를 통치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행동의 목적은 행복이지만 행복의 비결은 미덕에 있다. 그리고 최고의 미덕은 지성이다. 이는 현실, 목표, 수단에 대한 조심스런 관찰이다. 통상적으로 <미덕>이란 두 극단 사이에 있는 황금의 중간(황금률)을 뜻한다. 정치한 한 사회를 구성하는 계층들 간의 타협의 기술이다.

정력이란 천재의 절반일 뿐이다. 나머지 절반은 통제의 능력이다. 알렉산드로스는 온통 정력이었다. 그러나 그를 보면 경탄하게 된다. 혼자 힘으로 세계의 절반에 맞섰기 때문이고 또한 그는 한 개인의 영혼 안에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힘이 잠재되어 있다는 생각으로 우리에게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피 속에 흐르는, 미치게 만드는 야만의 유산에 맞서 싸웠다. 또한 모든 전쟁과 학살에도 불구하고 아테네의 빛을 더 큰 세계로 가져가겠다는 꿈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10. 로마 제국
예술은 예술가와 그 수용자의 감정을 전제로 한다. ‘나를 울게 하려면 당신 자신이 먼저 슬픔을 느껴야 한다.’ 그러나 예술은 감정만이 아니다. 그것은 훈련된 형식으로 나타나는 감정이다. <평온함 속에서 기억된 감정>인 것이다.

마음의 평정이란 ‘보편적 자연(본성)에 의해 너에게 할당된 것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모든 것은 나와 조화를 이루고 우주와 조화를 이룬다. 나에게 있어 그 어떤 것도 너무 빠른 것도 너무 늦은 것도 없으며 그것은 그대 우주에 적합한 시간이다. (중략) 이 세상에서 훌륭한 기질이란 그것이 진지하기만 하다면, 아무것도 그것을 이길 수가 없다. 정말로 선한 사람은 불행에 대해 면역력이 있다. 어떤 재앙이 덮쳐도 그의 영혼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철학은 논리나 배움이 아니라 이해와 받아들임이다. -명상록 中에서-

11. 인간 그리스도
그가 생각한 혁명은 훨씬 더 깊은 종류의 혁명이었다. 사람들의 마음에서 이기적인 욕심, 잔인성, 정욕 등을 없앨 수만 있다면 유토피아는 저절로 올 것이다. 이 것이 모든 혁명 가운데 가장 깊은 혁명이 될 것이고, 이런 혁명에 견주어보면 다른 혁명은 단순히 계급간의 쿠데타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에 그리스도는 이런 영적인 의미에서 보면 역사상 가장 위대한 혁명가였다. 그의 업적은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새로운 도덕성의 윤곽을 드러냈다는 점에 있었다.

12. 르네상스
르네상스는 고대의 문학만을 복원시킨 것이 아니라 그 쾌락주의적 자유로움도 똑같이 복원시켰다. 1천년 동안이나 초자연적인 신앙에 기초한 도덕적 규율의 시간을 보낸 다음 부분적으로는 이교적인 방식으로 감각이 자유롭게 되었다. 새로 얻은 자유는 놀라운 1세기 동안 그들을 창조적으로 만들고 나서 도덕적 혼란, 통합되지 않는 개인주의 그리고 민족의 굴종 등으로 그들을 파멸시켰다. 르네상스는 두 가지 규율 즉, 중세와 종교 개혁 사이의 막간극이었다.

13. 종교 개혁
하느님에 의해 구원을 받도록 선택된다는 것 그리고 개인의 선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그리스도가 인간을 위해서 세운 공덕의 힘을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이러한 생각은 루터 신학과 그 추종자들 신학의 근간이 되었다.

루터도 반란의 기치를 신학의 사막에 꽂지 않고 도이치 민족정신이라는 풍요로운 토양에 꽂았다. 농민들은 루터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들은 새로운 종교가 자신들의 이유를 정당화시켜 주고 또 희망을 주고 행동하도록 부추기고는 결정적 순간에 자신들을 버렸다고 느꼈다.

14. 세익스피어와 베이컨(비관주의 대 낙관주의)
과학 분야에서 지금까지 이룩한 것은 제 자리에서 맴도는 일이며, 영원한 뒤섞기로서 항상 시작된 곳에서 끝이 난다. 베이컨이 세실 경에게 ‘모든 지식을 나의 영토로 삼았다.’고 말하였을 때 그의 말뜻은 모든 지식을 세부적으로 다 끌어안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자신은 학문들이 서로 협동하고 격려하도록 전망을 가지고 바위에서 내려다보듯이 조망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우리는 소망스런 사유의 논리적 기만을 없애버려야 한다. 명료하지 않은 생각의 온갖 부조리함을 쓸어버려야 한다. 겨우 몇 개의 공리와 원칙들로부터 수많은 항구적인 가치들을 이끌어내라고 제안하는 저 당당한 연역적 사고 체계를 싹 쓸어내야 한다. 베이컨은 대혁신을 위한 첫 발자국으로서 <지성을 배제>할 것을 요구한다. 그는 실제 경험에 의해 검증되지 않은 사고를 믿지 않았고 소망으로 오염된 결론들을 믿지 않았다. 인간은 자신이 이미 가진 것을 참이라고 믿으려 하기 때문이다.

15. 옮긴이의 글
문명을 떠받치는 다섯 기둥으로 꼽은 항목들은 기억할 만한 것들이다. 즉 가족, 종교, 교육, 법, 여론 등이다. 그는 사회 변혁의 핵심적인 이유의 하나로 부의 편중문제를 꼽고 있다. 역사상의 어느 시대이든 관계없이 한 사회가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느냐, 아니면 그에 휩쓸리느냐에 대한 답변이 그 시대의 배경과 흐름을 이해하는 하나의 중대한 열쇠가 된다.

< 책을 읽고 나서 >

‘인간은 자기가 되고자 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이것은 신의 최고의 선물이요, 인간이 받은 최고의 놀라운 축복이다. 짐승은 어미의 몸에서 나올 때 제가 가져야 할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 최고의 정신은 시작부터 영원히 지속되도록 만들어진 존재이다. 하느님 아버지는 인간에게만 탄생의 순간부터 모든 가능성과 모든 삶의 씨앗을 주셨다.’ -피코-

역사책을 근 10여년 만에 보았다. 전체 속에서 나를 보지 못한 좁은 시야와 우리 속에서 나를 바라보지 못하는 공동체 정신의 결핍이 나를 역사에서 멀어지게 했던 것 같다. 중간 중간 역사 속에 위치해 있는 사건과 인물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해 지루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역시 역사는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고 그 도도한 흐름 속에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나에게 끊임없이 물어보았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우리 문명의 역량은 어느 정도인지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지 많은 생각에 잠겼다.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은 물음들이었다. 하지만 개별적인 사건들과 횡적 시간에 머무르지 않고 근간을 흐르는 근원을 읽어보려고 노력했다. 책을 보며 나누었던 내적 대화들을 몇 가지로 정리해본다.

첫째는 개인과 사회의 역사는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본질적으로 같다고 본다. 먼저 자연과 문명간의 끝없는 갈등, 그 자체야말로 개인의 삶이자 사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초자아와 본능간의 갈등이 개인적 삶의 큰 축을 차지하듯이 자연과 문명간의 끝없는 갈등이야 말로 사회를 움직이는 큰 원동력 가운데 하나이다. 생물적 본능은 존재 자체의 근원적 힘이지만 과도하게 방치될 경우 사회유지의 위협이 되어왔다. 이를 위해 인간은 가족, 종교, 교육, 법, 여론이라는 문명의 수단을 통해 이를 조율시켜 왔다.
또 하나는 개인의 삶 속에 수많은 부침이 있지만 끝없이 자신 안에 있는 가능성을 실현하려고 애쓰는 것이 인간의 참 모습이라면 사회 역시도 끝없는 부침과 좌우편향을 거치지만 결국 더 나은 사회로의 발전을 끝없이 모색해 오고 있는 역동적인 생명체라는 것이다. 절망하는 순간이야말로 새로운 희망이 싹 트는 것임을 역사는 온 몸으로 웅변하고 있다.

둘째는 완벽한 인간이 없듯이 완벽한 사회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본성을 극복하고 차별을 철폐하고 자유를 확대해나가는 과정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결국 역사속의 각 사회는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명(정신)의 역량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것이다. 문명의 역량을 높이지 못한다면 모든 혁명은 개혁에 그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개인의 정신적 역량을 향상시키지 못하는 변화는 지속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문명의 역량은 어떠한가? 우리는 원하는 삶을 얻기 위한 내면적 성장을 멈추지 않고 있는가?

셋째는 역사의 흐름 속에 인류의 생명을 이끌어 온 힘은 투쟁만이 아닌 노동, 사랑, 선인들의 지혜와 예술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고비마다 시대적 사명과 갈등을 읽어내고 이를 극복하고자 헌신적으로 애써온 영웅이 있었다는 것이다. 시대 순응의 요구에 맞서 정치적, 문화적, 철학적으로 반역을 일으키는 영웅들은 시대적 산물이지만 또한 그 시대를 뛰어 넘어 새 시대를 열어 젖혔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 안에 품고 있는 모든 가능성을 발현시키려고 노력하는 존재이다. 사회란 그러한 인간의 확장된 외연이다. 더 나은 상태를 향한 노력이야말로 역사 속에서 끝없이 확인되는 인간의 본질적 특성이 아닐까 싶다. 더 나은 상태로 나아가는 노력을 우리는 희망이라 부른다. 비록 시대와 처지에 따라 그 희망의 내용이 다르지만 그를 향한 몸부림은 인류사 전체를 꿰뚫고 있는 원동력이 아닐까? 희망을 분출하는 것을 넘어서 이를 완성품으로 빚어내는 감각, 용기, 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아쉽게 느낀 부분들>

역사를 통해 저자는 희망과 용기를 길러낸다. 우리가 물려받은 위대한 정신적 유산과 문명의 유물 속에서 새로운 미래를 향한 힘을 끌어낸다. 역사는 생물학적인 방종과 문명의 질서 속에 끝없이 흔들리는 진자운동이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소란스럽고 부조리한 역사의 단면 속에 살아가더라도 그 속에 감추어진 신의 의도를 잊지 말라고 한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역사를 통한 삶의 전망을 이야기하는 철학가로 남고 싶어 했다.

문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저자의 철학은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많은 철학가들의 사상과 예술가들의 작품을 소개함으로써 역사 속에 담겨 있는 기록뿐 아니라 그 시대의 감정과 고뇌까지 전달되어졌다.

하지만 아쉬운 부문도 많다.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술과 자료는 다소 산만하기까지 하고 굳이 이런 이야기까지 담았을까 싶은 의문이 나는 대목도 많았다. 특히, 종교개혁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 너무 세부적인 개별 사건들에만 치중한 부분에서는 저자의 의도를 잘 납득하기 힘들었다. 또한 저자의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예술가 또한 영웅의 반열위에 위치시킴으로써 초점을 잃어가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리고 개인적 본능과 사회적 본능사이의 절묘한 황금률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줄곧 청교도적인 절제와 도덕적 규율에만 방점을 찍고 있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결국 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열거하면서 그 사건들이 저자가 생각하는 역사적 흐름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차지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없는 부분이 많았던 것 같다.

선택한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일관성 있는 해석이 좀더 돋보였다면 좋겠다. 그리고 한 사회가 다른 사회로 넘어가는 그 순간들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과 해설이 있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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