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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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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4월 7일 15시 59분 등록
마음의 속도를 늦추어라 (에크낫 이스워런 지음, 박웅희 옮김, 도서출판 바움, 2004)
Take Your Time.. by Eknath Easwaran

이 책은 삶의 속도를 늦추는 방법, 더 중요한 일을 할 시간을 확보하는 방법, 현재에 사는 방법을 다루고 있다. 붓다는 그것을 ‘깨어있는 삶(living intentionally)'이라 불렀는데, 우리의 모든 주의(注意)가 현재에 있을 때, 그날 하루가 제공하는 것을 최대한 이용하려는 집중력과 의지가 있음을 알게 되며 하루를 값지게 보낼 가능성을 열어준다고 말한다.
인도에서 나고 자란 저자 이스워런은 미국에 명상을 도입하고 수십 년 동안 지도한 사람으로 현대 문명의 ‘빠름’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빠름에 길들여져 잠시도 쉬지 못하고 질주하는 우리의 마음이 문제라고 간파하고 이 바쁜 세상에서 조화롭고 사랑이 깃든 삶을 영위하기 위해 마음의 속도를 늦추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 시간에 쫓기는 삶

사람들이 원래부터 무례하거나 몰지각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게 행동할 여유가 없을 뿐입니다.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고 달리는데 앞을 누군가 가로막고 있다면 악의는 없지만 그를 밀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심술궂은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똑같이 중요한 사실이지만, 삶이란 것이 원래 그래서도 아닙니다. 속도가 우리-어느 누구든-를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생활과 마음이 갈수록 빨라지고 있을 때는 어떤 판단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오로지 반사만 있을 수 있을 뿐이며, 그런 반사는 강박이 됩니다. 똑같은 생각, 즉 똑같은 정서적 반응, 똑같은 충동, 똑같은 갈망이 거듭거듭 반복되면 강박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흡연이나 마약에 대한 강박적 중독일 수 있고, 특정한 사람에 대한 강박적 애착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모든 강박적 사고의 순환고리는 위험합니다. 거기 빠져있을 때 우리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루라는 시간 속에 더 많은 것을 쑤셔 넣으려 애쓸수록 하루가 더 늦게 끝난다는 사실을 깨달은 적이 있습니까? 한정된 시간에 더 많은 것을 쑤셔 넣으려 하지만 실제로는 억지로 시간을 늘릴 뿐입니다. 몇 분 늦는 것쯤 사소한 일 같습니다. 그러나 거듭거듭 늦는다면 그 목적이 무엇이든 스트레스가 발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루 일과가 진행됨에 따라 스트레스가 쌓이고 잃어버린 시간이 누적됩니다. 그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스트레스도 가중됩니다.

‘급히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은 미신입니다’
천천히 사는 것은 비효율적 삶이 아닙니다. 비예술적인 삶도 아니고 따분한 삶도 아닙니다. 실은 정반대지요. 그것은 초를 다투는 경주 같은 삶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며 훨씬 더 예술적이며 훨씬 더 풍부한 삶입니다. 그런 삶은 잠시 멈추어서 생각하고 돌이켜보고 판단하고 찬반(贊反)을 가늠할 시간과 인간관계에 필요한 시간을 줍니다.

많은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반드시 미치도록 바쁘게 살아야하는 것은 아닙니다. 얼마나 일을 했느냐보다는 어떻게 일을 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 늦추기

속도를 늦추려면 우리가 모든 것을 읽을 수는 없고, 모든 순간을 다 재미있게 보낼 수는 없으며, 모든 정보를 흡수할 수 없음은 물론 모두 접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선택해야만 합니다.

읽을 가치가 없는 것들이라면, 왜 읽어야 하나요? 이미 소중한 시간을 빼앗기고 있다고 느끼는데, 실은 마음속의 소음과 혼란만 가중시키는데 시간을 들이고 싶나요? 나는 자라면서 ‘좋은 책은 인간 영혼의 가장 순수한 정수(精髓)’라고 한 칼라일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늘 책읽기를 좋아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학생 때조차 진정으로 읽을 가치가 있는 것을 가려서 저자가 그 안에 쏟아 부은 모든 것을 흡수하기 위해 천천히 집중해서 읽었습니다. 새 책의 잉크냄새는 내게 향수나 다름없었습니다. ‘샤넬 No.5'가 그만할까요. 나는 슈퍼마켓에서도 볼 수 있는 책과 잡지의 수에 놀랍니다. 그런데 그 표지들을 보면 차라리 글을 읽지 못했던 내 할머니가 부러울 지경입니다. 읽는 것을 현명하게 선택하세요. 읽을 가치가 있는 것만 읽으세요. 그리고 시간을 갖고 꼼꼼히 읽으세요.

아이들의 발달속도를 높여 어른들 세계로 집어넣으려 애쓰는 것은 비극입니다. 서두를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인생에서 어린 시절보다 더 귀중한 시간이 달리 어디 있습니까? 그 가치를 이해한다면, 아이들을 어린시절에서 어서 벗어나라고 재촉하지 않고 오히려 어린시절의 속도를 늦추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윌리엄 워즈워드는 이렇게 노래하지 않았습니까? ‘어린시절에 천국은 우리 곁에 있다네’

인내는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는 미덕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는 아주 부당합니다. 인내야말로 사랑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인내는 모든 종류의 정서적, 신체적 문제를 막아주는 가장 확실한 보험이며, 늦추기를 배우는데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입니다. 인내는 타고난 자질이 아닐지 모릅니다. 우리가 인내를 배우기 위해 할 일은 인생이 우리에게 도전할 때마다 인내하려 노력하는 것뿐입니다.

문제들 가운데 많은 것들은 마음을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고 그것들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해결하기 가장 어려운 문제는 실재하지 않는 문제입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계속 그것을 붙들고 씨름합니다. 마음을 떼어놓고 보면 실재하는 것과 실재하지 않는 것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앞의 경우라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관된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만, 뒤의 경우라면 해결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 한 번에 한 가지만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은 사건 그 자체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은 지금 그 사건에 대해 우리가 기울이고 있는 주의입니다. 주의를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그 사건도 더 커 보입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과거의 허깨비에 불과합니다. 바로 그 때문에 마음을 침착하고 평화로운 상태로 안정시키려면, 주의를 훈련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 가장 효과적인 방법들 가운데 하나는 온전히 집중하여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하는 것입니다.

선가(禪家)에서는, 스승이 말할 때는 잠시도 시선을 돌리면 안 된다고 합니다. 이는 어느 경우에도 타당한 조언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당신에게 말하고 있을 때는 진심을 기울이세요. 두 눈, 두 귀, 정신과 마음의 초점을 말하는 사람에게 맞추어야 합니다. 그 사람은 당신의 진심어린 관심에 반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대화는 마음이 하나로 모이게 훈련하는 기회입니다. 자연스런 집중이야말로 모든 인간관계의 비결입니다.

마음 일부만 가지고 무슨 일을 할 때, 우리는 삶의 표면만 대충 스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스며들지 않습니다. 아무것에서도 진정한 감동을 받지 못합니다. 그것은 결국 내면의 공허함으로 귀결됩니다. 불행히도, 바로 이 공허감이 우리를 충동질하여 더욱 많은 것을 쑤셔 넣어 필사적으로 마음 속 빈곳을 채우게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정반대입니다. 속도를 늦추고 완전히 현재에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 순간순간이 모두 충만해질 것입니다.

당신의 직업이 무엇이든 맡은 일에 전념하세요. 그 일이 얼마나 즐거운지 얼마나 많은 이익이나 위신을 보장하는지 등을 따져 주의를 흐트러뜨리지 마세요.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 아닌 한, 사람들의 건강과 안녕에 해가 되지 않는 한 최선을 다해 그 일을 하세요. 사무실에 들어가면 맡은 일에 주의를 완전히 집중하고, 일단 사무실을 나서면 그 일은 마음에서 지워버리세요. 이 간단한 기술이 긴장을 막아주고 최선을 다할 수 있게 해줍니다. 최선을 다했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걱정하지 않으면 행복합니다.

완전한 집중은 비상한 능력이기도 합니다. 깊이 집중할 때 우리는 자신의 몸을 완전히 잊을 수도 있습니다. 이는 행복에 이르는 진정한 비결입니다.

▶ 균형 찾기

요가 철학에 따르면 인성(人性)은 세 가지 요소, 즉 무기력, 활력, 조화의 항구적인 상호작용입니다. 세 요소 모두 항상 존재하지만, 어떤 시기(하루나 인생의 한 단계나 한 평생)에 한 요소가 지배적인 경향을 띠는 것입니다. 어떤 요소가 지배적이 되느냐는 에너지의 변화에 달려있습니다. 얼음이 녹아 물이 되고 증기로 변하듯이, 무기력 상태와 활성 상태는 양자 모두 생기와 힘이 가득한 역동적 균형 상태로 전환될 수 있는 에너지가 가득합니다. 에너지가 풍부하다는 것은 아주 좋은 일입니다. 극복하지 못할 장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디에 써야할지 모를 때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어떤 활동을 시작할 때와 그만 둘 때를 알려면 판단력이, 객관성과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통제되지 않는 에너지는 두 가지 두드러진 특징이 있습니다. 서두름과 걱정이 그것입니다. 걱정은 서두름과 잘 어울립니다. 서두르는 사람은 분명하게 생각하고 명석하게 판단할 시간이 없어서 늘 결과를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에너지가 많은 사람들과 관련하여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그 에너지를 그들 마음대로 부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에너지의 결여가 아니라 에너지를 통제하고 인도하는 방법입니다.

무기력은 신체적으로는 전혀 움직일 수 없다는 느낌이고, 정신적으로는 나태한 마음입니다. 주위 환경에 예민하게 반응하려 해도 마음이 나태하면 아무것도 강렬하게 느끼지 못합니다. 일부러 행동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능력이 없을 뿐입니다. 무기력은 좋은 점이 전혀 없습니다. 무기력은 힘이 얼어붙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힘은 있는 것입니다. 물이 얼었다가 녹고 다시 얼 수 있듯, 에너지도 활성과 마비 사이에서 비등했다 냉각되기를 거듭합니다. 무기력으로 얼어붙은 에너지는 풀릴 수 있으며, 그런 뒤에 모든 에너지가 역동적 균형 속에 통제될 수 있습니다.

조화로운 삶은 현재에 사는 삶, 어떤 상황에도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삶을 의미합니다. 조화롭게 살 때, 당신은 늘 기쁨 속에 있습니다. 그 기쁨은 일이 항상 당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즐겁게 해주는 방식으로 풀린다는 의미의 기쁨이 아니라, 당신이 동요되지 않고 자신에 대해 평온한 확신을 갖고 있다는 의미의 기쁨입니다. 삶에 대한 현대인의 태도에서 잘못된 것들 가운데 하나는 모든 것이 정확히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풀릴 때만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사실 나는, 삶이 그런 식으로 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때때로 삶에서 최상의 것들은 우리가 전혀 원하지 않았던 것일 수 있으며, 불유쾌한 경험들은 우리의 성장에 도움이 됩니다.

우리의 에너지 상태에서 조화가 지배적이면 마음은 평온할 수밖에 없습니다. 칭찬을 받을 때도 평온하고 비판을 받을 때도 평온합니다. 칭찬을 받았다고 더 좋은 것도 아니고 비난을 받았다고 더 나쁘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마음의 평화는 어떤 외적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평온한 마음으로 자유롭게 사는 것, 그것이야말로 늦추기의 진정한 결실입니다.

▶ 자유 속에 살기

어떤 것을 즐기기 위해, 거기에 매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쾌락을 붙들고 늘어지려 하며 기쁨을 끌어안으려 애쓰지만, 결국은 실패할 뿐입니다. 결코 지속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쾌락은 왔다가 갑니다. 지나간 행복의 기억에 매달리거나 그것이 언제 다시 올까 연연할 필요가 없습니다. 과거를 동경하거나, 오지도 않은 미래로 자신을 밀어 넣을 때, 우리는 현재로부터 달아나고 있습니다. 세계의 영적 전통들이 말하는 초연함(detachment)이라는 비결은, 과거나 미래에 매달리지 않으면 온전히 지금 여기, ‘영원의 해돋이’속에 산다는 것입니다.

차이를 강조하면 서로 멀어질 뿐입니다. 호불호(好不好)의 감정은 돌에 새겨진 것이 아니고 물에 새겨진 것이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에 엄밀한 태도는 단지 마음의 문제에 불과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어떤 것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도록 길들여져서 자기만의 습벽을 갖게 되면 거기서 놓여날 생각을 못합니다. 나는 실망하는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그것은 놀라운 발전이며,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엄밀히 가리지 않도록 마음을 훈련할 때 얻을 수 있습니다.

친밀한 관계는 하찮은 일을 통해 성장하며, 서로에게서 경험한 혜택은 공유됩니다. 남들을 우리의 기호에 적응시키려는 노력은 결국에는 그들을 더 멀어지게 만들기 십상입니다. 만약 관계 증진에 관심이 있으면, 남을 우리 쪽으로 오게 만들려하는 대신 우리가 상대 쪽으로 갈 기회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는 것이 두 사람 모두에게 좋습니다.

덧없는 감각적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헛된 약속들을 좇느라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합니다. 삶이 결코 보장할 수 없는 약속들인데도 말이지요. 쾌락을 추구할수록 만족은 적어지며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됩니다. 이는 오감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좌절과 괴로움과 소외를 키우는 완벽한 비법입니다.

마음은 하나의 과정, 늘 변하고 있는 과정입니다. 그것은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욕망들의 연속체입니다. 한 가지 욕망을 만족시키면, 또 하나가 뒤따릅니다. 그것을 만족시키면 세 번째 욕망이 옵니다. 어떤 경험도 영속적인 만족은 주지 못합니다. 의식의 거대한 창고에 끊임없이 연쇄를 이룬 욕망들이 저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 관계를 위한 시간

직업적 혹은 금전적 성공에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관계의 성공은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까? 사랑하는 사이라는 이유만으로 조화가 자연히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야 합니까? 사랑하는 사이라도 차이가 있게 마련입니다. 인내와 친절과 사랑에는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친절은 사랑으로 통하는 대로를 엽니다.

의견의 차이가 생겼을 때,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을 어긋나게 하는 것은 관념의 차이가 아닙니다. 그것은 대개 아집입니다. 상대가 아니라 나 자신을 앞세우는 버릇 말입니다. 더러는 존중감과 관심을 갖고 상대의 의견을 경청하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해결되는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늘 귀마개 한 벌을 갖고 다니면서 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하는 순간 그걸로 그의 말이 끝날 때까지 귀를 막았다가 자기 말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의견 차이는 논쟁이나 논리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내를 통해서만 해결(해소)됩니다. 인내심이 없다면 보복하기 시작하며, 더욱 화가 난 상대도 보복합니다. 마음을 늦추고 즉각적인 대꾸를 삼가세요. 할 수 있으면 미소를 짓고 공감하는 말을 해 주세요.

어떤 일에서든 남보다 뛰어나려면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더욱이 사랑하고 싶다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는 씩씩하고 매력적일지 모르지만 인내심이 없다면 관계는 갈수록 신선미를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사랑이며, 인내심은 모든 사람이 배울 수 있는 기술입니다. 속도와 조급성 사이에는 긴밀한 연관이 있습니다. 조급성은 단지 바쁜 상태일 뿐입니다. 바쁜 사람은 참을 수가 없고, 그래서 사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을 하려면 주위 사람들에 예민해야 하는데, 그것은 정신없이 질주하는 생활을 하고 있을 때는 불가능합니다.

모든 부정적인 생각들은 빠릅니다. 하지만 긍정적인 생각들은 느립니다. 인내는 늘 저속차선에 있습니다. 호의는 결코 질주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사랑은 도로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습니다. 사랑은 생각들의 흐름이 아니고 마음의 지속적인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 이미지를 높여라

‘현재의 우리는 모두 우리가 생각해온 것의 결과다’ (법구경 1장 1절)
서로 아는 사이가 되면 우리는 사람을 그가 우연히 운전하게 된 육체로 식별하지 않습니다. 내면에 있는 그 자신을 알게 됩니다. 불행히도 우리가 자신을 육체적 존재로 생각한다면, 내면의 사람을 희미하게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외적인 이미지만 알게 됩니다. 나는 그들에게 다른 어떤 것을 일깨워주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만약 내가 ‘당신은 내부에 그 무엇으로도 끌 수 없는 거룩한 불꽃을 지닌 고귀한 존재이고, 당신이 생명을 받은 것은 주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줌으로써 받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믿기 어려워합니다.

명상은 눈부신 건강과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와 다함없는 사랑과 영속적인 지혜가 깃들인 삶의 토대입니다. 무엇보다 깊은 내적 평화의 기초입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면이 있습니다. 먼저, 명상은 마음을 늦추어 점점 더 고요하고 안정적이고 깨끗하게 만듭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우리가 명상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신이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며 거룩한 불꽃은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한다는 확신은 주요한 모든 영적 전통에서 발견되기 때문에, 에베레스트 산을 여러 각도에서 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히말라야 산맥을 처음에는 인도에서, 다음에는 중국에서, 파키스탄에서, 방글라데시에서, 티베트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높은 산맥은 항상 똑같습니다. 우리들 각자의 내면에 진정한 ‘자아’로서 존재하는 힘도 마찬가지입니다.

명상하기 위해 돈을 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단순한 것을 복잡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또 다른 장삿속일 뿐입니다. 또한, 빠르고 쉬운 것은 명상이 아닙니다. 명상은 온전한 삶을 위해 마련된 수행입니다. 우리는 일거에 건강 상태를 이루고서 평생 동안 운동하지 않고도 건강하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마음이라 해서 왜 다르기를 바라야 합니까?

지금 나는 내가 늙어 죽을 수밖에 없는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나는 모든 사람 속에 살고 있습니다. 생명 전체와 백만 가지 상호관계를 맺고 있는 영원한 존재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 이것이 우리의 위대함입니다. 이를 깨달을 때 모든 고통을 초월합니다.

▶ 고요한 중심

마음을 뒤에서 여는 방법을 알면 당신의 마음이 곧 당신은 아니라는 것을, 마음은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을 알고 놀랄 것입니다. 일단 초연한 위치에서 마음을 보는 이 놀라운 기술을 습득하기만 하면, 마음의 속도를 원하는 대로 설정할 수 있습니다. 화가 다가오면 당신은 그 능력을 발휘해 그것을 늦추어서 자비로 바꿀 것입니다. 생각의 속도를 바꾸는 이 단순한 조작만으로 화라는 폭발적인 에너지를 자비라는 깊은 힘의 저수지로 변화시키기에 충분합니다.

명상을 체계적으로 진지하게 연습하고 있다면, 내면에 깃들인 고요함의 중심(center of stillness)에 들어갈 날이 반드시 옵니다. 그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으며 모든 주의가 내부로 집중되어 있고, 마음은 기어가는 수준까지 느려집니다. 마음이 속도를 내지 않고 있을 때만 한 생각과 한 생각 사이에 틈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틈에서는 어떤 생각도 진행되고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무심’ 상태가 심신에 얼마나 유익하고 삶의 본질을 여실히 드러내주는지, 일단 한번 그것을 발견하면 어떤 사태에도 흔들림 없는 사람이 됩니다. 몹시 당혹스런 일이 벌어지더라도 아무런 생각이 없는 그 틈으로 들어가서 쉬면됩니다. 앉아서 마음에 아무런 움직임이 없을 때까지 명상을 하여 원기를 회복하고 새로워지고 완전해져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당신은 혼자서 직접 이 평화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 평화는 당신 자신의 의식 깊숙한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삶이 장애물을 세울 때 괜히 주의라는 먹이를 주어 더 키우지 마세요. 문제들은 먹이를 주면 크게 부풀어 오르지만 주의를 못 먹어 굶주리면 줄어들고, 나아가 사라져버리기도 합니다. 이는 소중한 기술입니다. 이 전략은 우울, 낙담, 실의, 부적절감, 죄책감 등 부정적인 감정들에서 생기는 괴로움에 빠지지 않게 우리 자신을 지키는데 아주 중요합니다.

인간은 모두 사랑을 하려는, 삶 전체와 사랑에 빠지고 싶은 깊은 욕구가 있습니다. 이는 마음이 고요할 때 찾아오는 사랑입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기 전에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마음이 고요하면 모든 사람을 당신 자신으로 보게 됩니다. 해를 끼친 사람들조차 도울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본질입니다.

명상은 마음의 요란한 소음을 가라앉히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시간이 오래오래 흐른 뒤 이 소음이 깨끗이 사라졌을 때 우리 내부에 항상 흐르고 있던, 모든 것을 어루만지는 침묵의 소리를 들으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원하면 언제든지 쉬게 할 수 있을 때, 원하면 언제든지 고요하게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나인 세상에 사는 것입니다.

***

“계속 체계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인 열정을 갖고 수련한다면 결국 당신의 주의가 흔들리지 않아서 마음을 단 한 번도 되돌리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 옵니다.
나는 이 체험이 얼마나 장려한지를 당신에게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이 사람도 설명을 못하네.. 나는 궁금한데.. 정말 알고 싶은데..

“나는 아침 명상을 마칠 때마다 명상이 우리의 삶과 주변 사람들의 삶을 무한히 풍부하게 만들어줄 수 있음을 새롭게 깨닫습니다.”

아니, 글쎄. 그게 뭐냐구요..

이 책의 뒷부분은 ‘명상’에 대한 설명으로 가득하다.
그런데, 모르겠다.

나는 앞이 보이질 않는데, ‘보라색’이라는 색깔에 대해 잔뜩 얘기만 들은 꼴이다.
뭔가 있기에 알려주고 싶어서 한 얘길텐데..
눈을 감고 있는 난 아직 보질 못한다.

빨강이랑 파랑을 어떻게 섞으라는 건지,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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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소리
2005.04.08 13:25:39 *.248.205.34
저는 명상을 해 보았고, 지금은 잘 못하고 있고, 앞으로는 명상을 열심히 하려고 생각하고 있죠. 명상의 체험을 이해 하기 쉽게 설명하는것은 참 어렵다고 생각 되네요. 어떤것에 집중하여 나를 잊은 '무아지경'같은 상태가 구체적으로 어떠한지 그렇게 되면 무었이 좋은지는 본인이 직접 체험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명상의 종류는 아주 많고 방법도 다르고 또 위험하기도 합니다. 왜냐 하면 명상을 통해서 마음과 영혼과 가치관과 모든것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본인은 그 길이 가장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경우도 있고, 진정 올바른 길이지만 세상의 눈으로 보면 이상한 모습으로 비쳐 질 수 있도 있겠지요. 예수님이나 부처님의 모습이 그당시 사람들의 모습에는 어떻게 비쳐 졌을까 생각해보면 알 수 있겠죠. 그게 뭔지는 체험을 해보아야 알수 있고, 체험은 아주 조심스럽게 해야 될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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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영
2005.04.09 20:16:59 *.250.34.81
제 욕심이죠..거저 알고 싶은..^^ 세상에 공짜는 없는데요.. 말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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