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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4월 8일 00시 26분 등록
안인희 옮김/황금가지


문명이란 무엇인가

여자들은 먼저 양, 개, 나귀, 돼지들을 길들여 가축으로 만들었다. 그러고 나서 남자를 길들였다. 남자는 여자가 마지막으로 길들인 동물로, 마지못해 부분적으로만 문명화되었다. 남자는 천천히 여자에게서 사회적 특질을 배워 익혔다. 가족에 대한 사랑, 친절, 절제, 협동, 공동체 활동 등이다. 이제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자질이 미덕이 되었다. 내 생각에 이것이 바로 문명의 시작이다. 즉 문명이란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다는 의미다.

어떤 경제체제도 축적 본능에 호소하지 않고는, 그리고 훌륭한 보상을 통해 더 우수한 능력을 이끌어내지 않고는 유지될 수 없다는 사실을 문명은 받아들였다. 어떤 개인도 어떤 국가도 자기 보존을 위해 싸우려는 의지가 없이는 오래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공동체 생활은 이렇게 보호해주는 사회 질서의 우산 아래에서 확장되었다. 문학이 번성하고 철학이 발전하며 예술과 과학이 성장하고, 역사가들은 국민과 종족들이 남긴 위대한 업적을 기록하였다. 남자와 여자는 천천히 절제, 친절과 예의, 도덕적 양심과 미적 감각 등을 발전시켰다. 문명이란 문화적 창조를 격려하는 사회적 질서다.


피라미드

피라미드에는 야만적으로 원시적인 요소가 있다. 그토록 난폭하게 엄청난 크기를 만들어낸 일과 영원성을 향한 공허한 갈망이 그것이다. 역사에 의해 부풀려진 채 이들 건축물을 위대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아마도 구경꾼의 추억과 상상력일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

두 가지 생각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변화가 보편적이라는 것과 에너지는 파괴할 수 없이 영속한다는 생각이었다. 지속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은 변한다. 모든 것은 언제나 현재의 존재이기를 중지하고 새로운 다른 것으로 된다. <모든 것은 흘러간다> 그리고 <흐르는 강의 동일한 물 속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 우주는 하나의 거대한 쉬지 않고 중지하지 않는 <과정>이다.

이런 보편적인 변화 속에서 무엇이든 시간이 흐르면 정반대의 것이 될 수도 있다. 선은 악이 될 수 있고 악이 선이 될 수도 있다. 삶은 죽음이 되고 죽음은 삶이 된다. 이러한 대립은 동일한 사물의 두 가지 측면이다. 힘은 대립하는 두 요소의 긴장이다.


-피타고라스

그는 하프의 현에 나타나는 것 같은 음계들 사이의 수학적 관계를 밝혀냈다. 모든 물체는 공간을 가로질러 가면서 소리를 내기 때문에 각 행성들은 궤도를 돌면서 분명히 일정한 소리를 낼 것이다. 이 소리들은 <공간의 음악>을 이루는 것인데 우리는 계속 이 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듣지 못한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에 따르면 그는 처음으로 <세계에 코스모스라는 이름을 부여한> 인물이다. 그는 별들의 질서와 아름다움을 보고 그런 이름을 붙였다. <코스모스>란 질서라는 뜻이고, 이것이 피타고라스의 핵심적인 단어이다. 우리의 소망이 질서를 이룬 것 그리고 공동체와의 관계에서 질서를 이룬 것이 곧 미덕이다. 그리고 국가 안의 질서가 유지되면 그것이 곧 올바른 정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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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ogenes Laertius. 3세기경 그리스 철학사를 썼다.


페리클레스

1820년경 셸리는 이렇게 썼다. <페리클레스의 탄생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죽음 사이에 들어있는 시대는……세계 역사상 가장 기억할만한 시대이다.>

이 시기 그리스의 다른 도시들에서는 파벌 싸움으로 시민들의 힘이 소진되면서 문학이 시들어가고 있었지만, 아테네에서는 부와 민주적 자유가 커지는 것과 계몽된 정치적 지도력이 결합되면서 황금 시대가 만들어졌다. 페리클레스, 아스파시아, 아낙사고라스, 소크라테스 등이 함께 디오니소스 극장에 앉아 에우리피데스의 극을 관람하였다면, 아테네는 그리스 생활의 절정과 통합을 생생하게 목격한 것이다. 한 국민의 역사에서 정치 지도력, 예술, 과학, 철학, 문학, 종교, 도덕 등이 책의 여러 페이지에 흩어져서 각기 따로따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다채로운 색상을 지닌 하나의 직물로 짜여져 나타난 시대였다.


페리클레스 시대의 미술

그리스 사람들의 부의 추구는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에 의해서만 제한되었다.
질서와 균형 비율, 형태와 리듬, 정밀성과 명료성에 대한 감각은 그리스 문화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이다.

투키디데스의 페리클레스는 <우리는 무절제함 없는 아름다움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현실의 무수한 세부사항을 무차별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사물의 본질을 잡아내고 형태와 생명의 이상적인 가능성을 그려내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리스 사람들은 예술이란 삶에 종속된 것이며, 삶은 모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이라고 생각하였다. 실용성이 없는 아름다움에 반대하는 건강한 공리주의 성향을 가졌다. 쓸모와 아름다움과 선(善)은 플라톤 철학에서처럼 그리스인의 생각 속에서 서로 아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었다.

그리스 예술은 빌려온 경외심으로 명상을 하는 박물관이 아니라 사람들의 진짜 관심과 기획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스 연극

보통 한 시대의 철학은 다음 시대의 문학이 된다. 한 세대 동안 사색이나 탐구의 영역에서 논쟁이 이루어진 사상이나 문제들은 이어지는 세대에 가서 연극, 허구, 시 문학의 배경이 되곤 한다. 그러나 그리스에서 문학은 철학의 뒤를 쫓아가지 않았다. 시인들 자신이 철학자들이었고 자신들의 사유를 행하였다. 그들은 자기 시대의 지적인 선봉에 섰다.

헬레니즘 시대는 에우리피데스를 소포클레스와 함께 그리스가 배출한 가장 지적인 자극이라고 여겼다. 18세기와 19세기에 자유주의와 인도주의가 되살아나면서 에우리피데스는 거의 당대의 인물이 되었다. 오직 셰익스피어만이 그와 견줄 수 있다. 괴테는 이렇게 물었다. <세상의 모든 민족이 그의 신발을 들 만한 가치가 있는 극작가 하나를 만들어냈는가?> 오직 셰익스피어 한 사람뿐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행동의 목적은 행복이지만 행복의 비결은 미덕에 있다. 그리고 최고의 미덕은 지성이다. 이것은 현실, 목표, 수단에 대한 조심스런 관찰이다. 통상적으로 <미덕>이란 두 극단 사이에 있는 황금의 중간(황금률)을 뜻한다.


루크레티우스

영혼(아니마)이란 <생명의 호흡>이다. 이것은 신체 곳곳에 아주 섬세한 물질처럼 퍼져 각 부분을 움직이게 해준다. 생명은 자유로이 간직하라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임시로 빌린 것이다.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그것을 잘 이용해야 한다. 우리의 힘을 다 쓰고 나면 우리는 잔칫상에서 일어나는 손님처럼 우아하게 감사를 표시하면서 생명의 식탁을 떠나야 한다.

죽음 자체는 두려운 것이 아니다. 오직 저승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이 죽음을 두렵게 만든다. 그러나 저승이란 없다. 지옥은 이승에서 고통을 받는 것으로, 그것은 무지, 정열, 싸움을 좋아함, 욕심에서 온다. 천국은 이승의 <현명한 사람들의 평화로운 신전>에 들어있다.

미덕이란 신들을 두려워하는 것이나 즐거움을 조심스럽게 피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성에 의해 인도된 능력과 감각이 함께 조화롭게 활동하는 것을 뜻한다. <인간의 진정한 부는 마음의 평화를 지니고 단순하게 사는 것이다.> 결혼은 좋지만 정열적인 사랑은 정신에서 명료함과 이성을 빼앗아간다. 이렇게 에로틱한 어리둥절함은 결혼이나 문명을 위한 기초가 될 수 없다.

역사는 국가와 문명이 일어나고, 번성하고, 시들고, 죽는 과정이다. 그러나 각 국가와 문명은 거꾸로 관습, 도덕, 법, 예술 등 문명의 유산을 전달해 준다. <달리면서 생명의 램프를 다음 사람에게 넘기는 달리기 선수들처럼.>


인간의 아들

나는 그가 행했다고 하는 대부분의 기적들이 암시에 의한 자연적인 결과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감수성이 예민한 영혼에 미친 강하고 확고한 정신의 영향이라고 말이다. 비슷한 현상은 루르드(프랑스의 성지)에서도 관찰된다. 그에 대한 믿음이 그들에게 강장제가 된 것이다. 신앙을 가지고 그를 건드리면 약한 사람들은 힘을 얻고 병든 사람들은 나았다. 우리는 강하고 신념을 가진 여자나 남자의 생각과 의지 속에 들어 있는 힘에 대해 어떤 한계도 둘 수 없다.

그가 생각한 혁명은 훨씬 더 깊은 종류의 혁명이었다. 그런 혁명이 없다면 모든 개혁은 오로지 표피적이고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에서 이기적인 욕심, 잔인성, 정욕 등을 없앨 수만 있다면 유토피아는 저절로 올 것이다. 이것이 모든 혁명 가운데 가장 깊은 혁명이 될 것이고, 이런 혁명에 견주어보면 다른 혁명은 단순히 계급간의 쿠데타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에 그리스도는 이런 영적인 의미에서 보면 역사상 가장 위대한 혁명가였다.

그의 업적은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새로운 도덕성의 윤곽을 드러냈다는 점에 있었다. 그의 윤리 법전은 하느님의 나라가 일찍 다가올 것임을 예언하고, 사람들을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든 것이었다. 그래서 여덟 가지 복은 겸손, 온화함, 평화를 전례 없이 드높이고 있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

아벨라르는 중세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책들을 쓰는 일에 자신을 바쳤다. 「변증법」에서 그는 당시 부활하고 있던 서유럽의 정신을 위해 이성의 역할을 다시 공식화하였다. …… 그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혜를 향한 첫번째 열쇠는 자주 부지런히 질문하는 것이다......의심을 통해 우리는 탐구에 이르고, 탐구를 통해 진리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학」에서 그는 오직 기독교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주장을 비이성적인 것이라 해서 거부하였다. 그는, 신은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주신다고 주장하였다. 이단은 폭력이 아니라 이성에 의해 억제되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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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는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중세의 업적

중세 사람들은 종교에 모든 것을 걸었다. 로마 문명은 그 신들의 죽음 혹은 그에 대한 사람들의 혼란으로 인해 죽었다고 생각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반사회적 행동과 욕망의 힘과 지속성에 대해 배웠다. 중세 사람들은 어른이 되면 신학적 믿음, 도덕적 계율, 사제의 훈계 그리고 신학적인 공포 등을 환영하였다. 이런 것이 어느 정도는 젊은이의 자부심과 경망스러움을 억제하고, 또한 어른들의 범죄와 국가의 전쟁과 범죄를 억제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중세의 영혼은 자라나는 세포처럼 두 가지 역사적 유기체로 발전하였다. 남부 유럽에서는 고전적, 에피쿠로스적, 이교적 르네상스이고, 북부유럽에서는 초기 기독교적, 스토아적, 청교도적 종교 개혁이다. 중세의 영혼은 이제 두 개의 강력한 문화가 되었다. 그들을 통해 문명을 보존하고 전달하는 중세의 역사적 업적은 완성되었다. 그 죽음이 곧 그 완성이었다.


르네상스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

르네상스는 발생 초기부터 이미 죽은 다음 천국의 불확실한 즐거움 대신 이 세상에서의 즐거움과 모험을 선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르네상스는 고대의 문학만을 복원시킨 것이 아니라 그 쾌락주의적 자유로움도 똑 같이 복원시켰다. 1천년 동안이나 초자연적인 신앙에 기초한 도덕적 규율의 시간을 보낸 다음 부분적으로는 이교적인 방식으로 감각이 자유롭게 되었다.


경제적 기반

르네상스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고대의 부활 이상의 것이 필요했다. 무엇보다도 돈이 필요했다. 냄새나는 부르주아의 돈 말이다. …… 그래서 육체의 즐거움을 누리고, 관직과 애인을 사고도 돈이 넉넉하게 남게 되어서야 비로소 미켈란젤로나 타치아노 같은 사람의 힘을 빌어 부(富)를 아름다움으로 바꾸고, 예술의 숨결로 행운을 향기롭게 만들었던 것이다.

자유로워진 감각은 자연, 여자, 남자, 예술에 드러난 아름다움에서 노골적인 즐거움을 얻었다. 새로 얻은 자유는 놀라운 1세기 동안(1434년-1534년) 그들을 창조적으로 만들고 나서 도덕적 혼란, 통합되지 않은 개인주의 그리고 민족의 굴종 등으로 그들을 파멸시켰다. 르네상스는 두 가지 규율(중세와 종교 개혁)사이의 막간극이었다.

르네상스란 시간상의 시대가 아니라 생활과 사유의 방식이다. 그것은 상업, 전쟁, 사상의 통로를 통해 이탈리아에서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로렌초

청춘은 아름다워라,
그러나 쉽게 날아가버리네!
젊은이들과 아가씨들아, 지금 즐겨라.
내일은 아무것도 확실치 않으니.


-폴리치아노의 시대

플라톤 아카데미에서 로렌초 다음으로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조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 백작이다. …… 뒷날 「인간 존엄성에 관하여」라는 제목이 붙여진 글로 젊음의 열정으로 인문주의자들이 –대부분의 중세의 견해에 반대해서- 인간 종족에 관해 가진 높은 견해를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피코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인간이 소우주라는 사실은 학교에서 듣는 진부한 소리다. 인간의 몸은 땅의 원소들과, 천상의 정신과, 식물의 혼과, 하등 동물의 감각과, 이성과, 천사의 정신과, 신과의 유사성이 뒤섞인 것이다.> 그러고 나서 피코는 신이 아담에게 들려주는 말로 인간의 제한 없는 능력에 대한 신의 증언을 말하고 있다. <나는 너를 천상의 존재도 지상의 존재도 아닌 것으로 만들었다. 네가 너 자신을 만들어가는 존재가 되고 스스로 극복하는 존재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다. 너는 짐승으로 떨어질 수도 있고 신과 비슷한 존재로 다시 태어날 수도 있다.> 여기에다 피코는 젊은 르네상스의 높은 정신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

인간은 자기가 되고자 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이것은 신의 최고의 선물이요, 인간이 받은 최고의 놀라운 축복이다. 짐승은 어미의 몸에서 나올 때 제가 가져야 할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 최고의 정신(천사들)은 시작부터 영원히 지속되도록 만들어진 존재이다. 하느님 아버지는 인간에게만 탄생의 순간부터 모든 가능성과 모든 삶의 씨앗을 주셨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나리자가 미소 짓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여성이 남성을 향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일까? <정열에 빠진 가엾은 애인들아! 자연은 맹목적으로 당신들의 신경이 우리의 육체를 향하여 부조리한 갈망으로 타오르게 하고, 당신들의 두뇌가 우리의 매력을 아주 분별없게 이상화하도록 만들어주고 있으니……. 그래야 당신들은 부모가 되는 것이겠지! 이보다 웃기는 일이 있을까? 하지만 우리도 덫에 걸리기는 마찬가지. 우리 여자들은 당신들의 그런 열중보다 더 호된 대가를 치르는 것이니, 그래도 사랑스런 바보들이여,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은 여전히 기쁜 일이고, 사랑을 받을 때면 삶이 되살아난다.>

그는 <르네상스의 인간>이 아니었다. 그토록 강하고 격하던 시대를 대표하기에는 말과 행동이 지나치게 신사적이고 내성적이고 섬세하였다. 그리고 <보편인>도 아니었다. 그의 다양성 안에는 정치가나 행정가의 자질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한계와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르네상스 그리고 아마도 모든 시대에 걸쳐 <가장 풍요로운 사람>이었다. 그의 업적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원천으로부터 한 사람이 왔었다는 것, 그가 인류의 가능성에 대해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해주었다는 사실에 경탄하게 된다.


-마키아벨리

'군주론'. 이것은 가장 정직하고 부도덕한 책이다. 명료하고 솔직하게 국가는 자신의 시민들에게 권고하는 도덕률을 실천할 필요가 없으며 실천해서도 안 된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국가는 위증, 사기, 도둑질, 잔인성, 살인 등에 대해 형벌을 내리는 일이 옳다. 그러나 국가를 지키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될 경우 이런 행동의 일부나 전부를 행하는 것 또한 옳다. 마키아벨리는 고대 로마의 규칙인 <국민의 안녕이 최고의 법>이라는 말을 국가의 –곧 국민의 조직- 안전이 최고의 법이라고 해석하였다.


-이탈리아의 잔영

우리는 미켈란젤로에게 찬사를 바친다. 길고 고통스런 생애 동안 그는 계속해서 창작하였고, 미술의 모든 주요 영역에서 걸작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이 작품들이 이른바 살과 피를 찢고 나온 것임을 우리는 안다. 그의 정신과 마음에서 터져 나온 것으로 한 가지를 완성한 다음이면 그는 출산 고통으로 약해진 시간을 견디곤 했다. 그것들이 수십만 번의 끌과 연필과 붓을 움직여서 형태를 얻은 것임을 우리는 안다. 그것들은 불멸의 주민처럼 하나씩 아름다움이나 중요성의 지속적인 형태들 가운데 자기 자리를 차지하였다.

우리는 신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또한 악과 선, 고통과 사랑스러움, 파괴와 숭고함을 뒤섞은 듯이 보이는 우주를 이해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아기를 달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거나, 혼돈에 질서를, 사물에 의미를, 형태나 생각에 고귀함을 부여하는 지적인 의지를 보면, 우리는 세계의 이해할 수 없는 정신을 구성하고 있는 삶과 법칙에 아주 가까이 다가간 듯한 느낌을 얻는다.


셰익스피어
「리어왕」에서 에드가는 글로스터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이곳으로 오는 것과
여기서 떠나감을 견디어야 한다오.
성숙함이 전부요.(5막 2장)

영원성이 아니라 성숙함이 우리의 목표여야 한다.


베이컨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간의 지식은 단순히 뒤범벅이며 소화되지 않은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쉽게 믿는 태도, 수많은 우연 그리고 맨 처음에 흡수된 유치한 관념들로 이루어진 덩어리다.

단순히 우연한 관찰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료의 <단순한 열거>를 통해서가 아니라, <실험을 통해 찾아진...... 경험>에 의해 행해져야 한다.

그는 실제 경험에 의해 검증되지 않은 사고를 믿지 않았고 소망으로 오염된 결론들을 믿지 않았다. <인간의 오성은 메마른 빛이 아니라 의지와 감정으로부터 어떤 주입물을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과학은 ‘누군가가 원하는 대로의 과학’이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이미 가진 것을 참이라고 믿으려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18세기 철학자들처럼 이성을 종교의 적이나 아니면 그 대체물로 여기지도 않았다. 그는 철학과 삶에서 이성과 종교 두 가지 모두를 위한 공간을 두었다. 그러나 그는 전통과 권위에 의존하기를 거부하였다. 그는 감정적 추측, 초자연적 존재의 개입, 인기 있는 신화 대신에 자연적이고 합리적인 설명을 요구하였다.


Ⅱ. 감상

이 책은 문명이란 무엇인가(제1장)에 대한 저자의 독특한 해석으로부터 출발한다. 저자는 문명이란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다는 의미이며 그 구성원은 공동체의 생존과 보존을 위해 노력하고 분투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한다. 저자는 어떠한 개인이나 국가도 자기 보존을 위해 싸우려는 의지가 없으면 오래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문명의 발전을 위해 자신들의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한 역사 속의 특정 개인들에 대해 기술(記述)하고 있는 것이다.

문명이 인류의 발전을 위해 특정한 사상을 발전시켰다는 것을 이 책에서 소개한 개인들을 통해 말하고 있다. 이러한 개인들은 인류의 발전을 위해 주로 사상과 예술의 측면에서 공헌한 인물들로서 저자는 이러한 인물들의 문화적 창조를 격려하는 사회적 질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또한 얘기한다.

저자는 문명이란 무엇인가에 이어 중국과 인도, 이집트 문명에 대해 소개하고 있지만, 결국 서양의 역사에 대해 말하고 있다. 서양의 역사와 문화의 뿌리인 고대 그리스와 로마시대, 기독교의 성장, 중세시대, 르네상스, 종교개혁, 그리고 셰익스피어와 베이컨에 대해 명료하고 간략하게 개관한다.

사실 우리는 서양의 역사와 인물들에 대해 세계사 등의 텍스트들을 통해 대강 이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철학과 역사에 대해 깊이 있는 관점을 갖춘 저자가 각 장의 역사적 사건과 인물의 소개마다 저자의 분명한 목소리를 드러내어 설명해 주고 있기에, 이러한 해석과 서술들은 우리의 시선을 끌어당기고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 그 이상을 이해하고 생각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는 것이다. 저자의 시각으로 이해한 역사와 문명에 대한 통찰을 혹은 평(評)하고 혹은 주석(註釋)하면서 독자들에게 새로운 시각과 관점을 획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이것이 이 책의 독특함이며 매력적인 점이다.


Ⅲ. 저자의 입장에서

이 책의 2장과 3장 그리고 4장은 각각 중국과 인도, 이집트 문명에 대한 기술로 이루어져 있다. 이 부분들에 대한 저자의 서술은 정치하지 못한 감이 있으며 생소한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아무래도 서양이라는 세계에 속한 저자의 위치에서 오는 한계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겠지만, 책의 나머지 부분들에 비해 깊이 있는 서술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어 전체적인 내용의 완결성 측면에서 조금은 아쉽다.

저자는 이 책을 위해 원래 23개의 장을 완성하려고 생각했지만, 책을 쓰는 도중 세상을 떠났기에 처음 계획했던 것과 다르게 21장 '셰익스피어와 베이컨'에 대한 부분이 마지막 장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2장과 3장, 4장을 쓰지 않았더라면, 아니 2장과 3장만 쓰지 않았더라도 미완성인 채 남겨진 나머지 22장과 23장을 이 세상과 작별하기 전 완성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럼 좋았을 것이다. 책의 완결성 측면에서, 그리고 책을 흥미롭게 읽고 난 후 21장 이후 어떤 내용을 담으려고 했는지 못내 궁금했기에 더욱 이 점이 아쉽게 느껴진다.



(사족)

이 책은 제2장의 공자의 말과 이백(李白)의 시에 대한 번역이 모두 어색하다.
예를 들면, 이백의 산중문답(山中問答)이란 시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37페이지)

내가 어째서 푸른 산에 사느냐?
나는 웃고 대답하지 않는다. 내 혼은 고요하다.
내 혼은 사람에게 속하지 않은 다른 하늘 다른 땅에 산다.
복숭아나무엔 꽃이 피고 강물은 흘러가고.

이것은 이백(李白)의 시(詩)가 주는 흥취와 맛을 전혀 살려내지 못하고 있다. 이 시가 왜 좋은지 이러한 번역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을 일이다.

묻노니, 그대는 왜
푸른 산에 사는가
웃을 뿐, 답은 않고
마음이 한가롭네.

복사꽃 띄워
물은 아득히 흘러가나니
별천지 따로 있어
인간 세강 아니네.

(김달진 역해, 당시전서(唐詩全書)/민음사 간)

원시(原詩)를 영어로 번역했다가 다시 한글로 번역하는 과정, 즉 중역(重譯)에서 오는 결과이긴 하겠지만, 국내에 소개할 때는 이러한 어색함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 보고 이러한 부분에 대해 주(註)를 다는 세밀함과 친절함을 보임으로써 독자들의 이해를 구하는 것이 옳은 방법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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